소설리스트

3화 (3/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3화

오늘도 보네.


묵직한 이불에 묻힌 재영이 움찔거렸다.

창가에 서 있던 이서가 고개를 돌렸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하얀 얼굴에 피곤이 그득했다.

“으……. 으으. 물.”

그 신음에 이서는 컵에 물을 따라 재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재영은 긴 머리를 풀어헤친 이서를 보고 사레가 들렸다.

“컥, 뭐야? 처녀 귀신이야?”

이서는 진짜 처녀 귀신처럼 재영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뭐야? 왜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차피 기억도 못할 게 분명했다.

이서는 어젯밤 일을 따지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표님. 새벽에 왕유진 본부장님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으. 또 왜?”

“두바이 뱅크에서 저희와 계약을 없던 일로 하고 싶다고,”

“뭐?!”

재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표인 나랑 말도 없이 뭘 없던 일로 한다는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건 말했어?”

재영의 씩씩거리는 목소리가 듣기 괴로웠다.

“그래서 오후에 뱅크 측 디지털 매니저와 미팅 잡아 두었습니다.”

재영은 표정을 더욱더 일그러트렸다.

“매니저? 지금 내가 매니저급이랑 이야기해야 돼?”

“겨우 잡은 미팅입니다. 우선 담당자와 이야기가 잘 풀리면 뱅크 대표와도 만날 기회가 생길 거예요.”

“야! 정이서!”

버럭 소리를 지른 재영은 이서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딴 거까지…….”

재영이 이서를 노려보다 결국 욕실로 향했다.

울컥. 밤새 눌러온 화가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했다.

이서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금 여기서 화를 내봤자 오히려 자신만 괴롭히는 꼴이 될 것이다.

이서는 어렵게 감정을 누르며 해야 할 일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 * *

재영의 얼굴에 묻어 있던 숙취는 말끔히 지워졌다.

크림색 세트업 슈트와 고가의 메탈 시계, 구두까지 맞춘 그는 거울 속 제 모습을 연신 확인했다.

“많이 걱정되세요?”

“아니.”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평소 재영의 습관이었다.

긴장하면 끊임없이 제 모습을 확인하는 것.

스타일 매치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쳐야 안정을 찾았다.

“만만해 보이진 않지? 재한 시큐리티 대표처럼 보여?”

제 나이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한 기업의 대표처럼 보일 리가.

하지만 이서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거짓을 고했다.

“완벽하십니다.”

“그럼 됐어.”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두 사람의 모습이 나란히 비쳤다.

이재영과 달리 이서는 피곤이 가득해 보였다.

새벽에 클럽을 헤맨 것도 모자라 소만 한 남자를 끌고 왔으니.

거기다 두바이 뱅크와 접촉하기 위해 몇 시간을 종종거렸다.

그럼에도 이서는 차분하게 대표님을 격려했다.

“대표님, 준비하신 대로만 브리핑해 주시면 됩니다.”

“공 들일 거 있어? 얘네 이러는 이유가 뻔해. 막판에 한 번 쥐락펴락 해보자는 거지.”

따로 대꾸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이재영의 말이 맞길 간절히 바랐지만…….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늘 귀신처럼 맞아떨어지기 마련이니까.

“재한 시큐리티에서 개발한 ‘모자이크’는 한국 유수의 기업들에서도 인정한 AI 보안 관제 서비스입니다. 모자이크는 24시간 외부 공격을 감지하고 바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이건 저희 재한만이 실현 가능한 일입니다.”

재영의 말에도 매니저는 따분한 이야기를 듣는 듯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재한의 기술력이야 저희도 인정하는 바지요. 그렇기에 진지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매니저는 손 안에 있는 펜을 휙휙 돌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현재 모자이크에서 사용되고 있는 AI는 철저히 한국의 금융 환경을 토대로 학습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실력을 UAE에서도 제대로 발휘할까요? 한국과 여긴 근본적으로 환경이 다릅니다. 이제 GCC(걸프협력회의) 지역 안에선 총이 아니라 사이버 전쟁이 일어나니까요.”

살벌한 말에 재영은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 대신 이서가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4번째로 사이버 공격을 많이 받는 국가입니다. 또 가까이엔 국가나 민간 서버를 침입하는 북한이 있어요. 그만큼 공격 데이터 또한 많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 막대한 데이터로 머신 러닝한 모자이크를 이길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고도로 학습된 AI? 그것만 있다면 저희 뱅크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숨 막히는 압박 질문에 재영은 질식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얼굴까지 붉어졌다.

재한이 최고인데…….

수억 원을 투자해 만든 보안 프로그램을 왜 자꾸 의심하는 건지.

재영은 이런 말만 입안에서 맴돌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이서는 예상 질문지라도 받은 듯 재깍재깍 대답했다.

재영은 저와 비교되는 이서의 모습에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모자이크 말고도 다양한 보안 솔루션을 제공할 계획입니다. 모자이크가 1초도 잠들지 않고 서버를 모니터링 할 때, 저희 개발자들은 두바이 뱅크 환경에 맞는 솔루션과 더 나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이서는 입에 단내가 나도록 떠들어댔다.

하지만 매니저는 여전히 감흥이 없어 보였다.

“하이에나 같은 해킹범들보다 AI가 훨씬 더 똑똑하겠지요. 서버에 침입하는 수많은 데이터들을 기가 막히게 잡아낼 테니 말입니다. 근데 그런 빅 이벤트보다 더 치명적인 게 있지 않습니까?”

이번엔 이서도 대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몇 달 전에 저희 뱅크로 한 남자가 접근해 왔습니다.”

역시 누군가가 두바이 뱅크에 접근했다는 예상이 맞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얼마나 훌륭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걸까?

분명 모자이크 대신 그들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가 그러더군요. 보안의 가장 큰 홀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AI가 유능하다고 한들 사람들의 부주의까지 막진 못한다는 소리였다.

다양한 피싱들과 개인정보 오남용들을 말이다.

“그는 한 달 동안 저희 내부에 서식하고 있는 버그들을 박멸해냈습니다.”

“내부의 버그들이라면…….”

“인간의 부주의요. 직원들의 보안 교육은 물론 피싱에 사용되는 방법들을 고객들에게 공유해 주었습니다.”

재한에선 인력 문제와 번거롭다는 이유로 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 확실히 그런 부분을 건드는 건 경쟁력이 될 테지.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했습니다. 직원들의 보안 인식도 더 단단해졌고, 고객들 역시 저희를 더 신뢰하게 되었죠.”

재영과 이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두 눈만 깜빡였다.

“그래서 선택한 겁니다. 그를. 우리에게 때론 인간의 손이 AI보다 더 안전하다는 걸 알려줬으니까요.”

“하지만 저희가 싸워야 하는 건 인간의 힘만으로 막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제가 언제 기술력이 뒤떨어진다고 했던가요? 그가 제공한 보안 서비스는 모자이크보다 한 단계 진보된 것이었습니다.”

모자이크보다 한 단계 진보한 서비스라니.

그게 가능한가?

대한민국 일류 프로그래머들이 만든 AI 보안 관제 프로그램이 모자이크였다.

“그는 천재가 분명합니다.”

매니저의 말에 이서의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천재?

이 업계에선 막대한 자본도 중요하지만, 소위 천재라 불리는 자들이 나타나 판을 흔들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혹시 그분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매니저는 흔쾌히 대답을 해줬다.

“최 원이라고 하더군요.”

최 원……?

이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분, 한국 분이신가요?”

“네. 그렇던데요.”

“저흰 처음 듣는 걸요. 그 정도 능력자라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이서의 지적에 재영 또한 한 술 거들었다.

“신뢰할 만한 사람은 맞죠? 요즘 블랙 해커들이 화이트 해커로 위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매니저는 끄떡없었다.

“저희는 그를 무한 신뢰합니다.”

최 원. 그가 두바이 뱅크에 쌓아놓고 간 무한 신뢰의 방어막.

천재라는 그 남자가 쌓은 방어막엔 재한이 들어갈 어떤 틈도 없는 듯했다.

* * *

-진짜 속상해! 우리 재영이가 얼마나 공들인 사업인데. 우리 재영 대표 상심이 크지? 전화 좀 바꿔 봐.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재영이 손사래를 쳤다.

절대 바꿔주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서는 중간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다 대답했다.

“사모님, 지금 대표님께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일어나시면 사모님께 연락하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새끼, 또 회사 걱정에 밥도 제대로 못 먹을까봐 내 마음이 찢어져.

이서는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밥을 제대로 못 먹긴 했지. 숙취 때문에.

“네. 사모님, 제가 옆에서 잘 챙겨 드리겠습니다.”

-정이서, 너어. 비서의 능력에 따라 상사의 낯빛이 바뀐다고 했어. 이 대표 얼굴빛이 바로 이서 네 능력의 바로미터인 거야!

손 여사의 잔소리에 재영은 그만 끊으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이서는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서 있었다.

재영은 그런 이서를 보다 답답한 듯 휙 전화를 빼앗았다.

“아, 진짜. 엄마! 정이서가 내 엄마야? 쪽팔리게 이상한 소리를 해.”

수화기 뒤에선 여전히 앙칼진 목소리가 이서를 비난했다.

재영은 재빨리 종료 버튼을 눌렀다.

“왜 이런 소리까지 듣고 있냐? 나 쪽팔리게 만들려고 버티는 거야? 이런 건 네가 알아서 잘 좀 끊어 봐.”

제가 끊고 싶다고 끊을 수 있는 전화인가요?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이제 와 비겁한 소리나 하는 이재영이 더 재수 없었다.

하지만 이서는 굳이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어차피 말이 길어져 봤자 저만 피곤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대표님, 식사 주문할까요?”

“……됐어. 우선 한숨 자고 싶어. 아, 왜 뒤통수가 아프지.”

이서는 도보에 널브러졌던 이재영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럼 필요하실 때 연락 주세요.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넌 어디 가? 크리스마스이븐데.”

“신년부터 시작될 프로젝트 검토해야 돼서요.”

“야, 너 좀.”

재영은 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이서에게 건넸다.

“놀고 와.”

이서는 재영이 건넨 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일한다고 또 나 들들볶을 거잖아. 됐으니까 놀고 와. ……정 할 게 없으면 나랑 같이 나갈까?”

그 말에 이서가 냉큼 카드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혼자서 재밌게 잘 놀고 오겠습니다.”

이서가 휙 나가버리자, 재영은 퍽 무안해졌다.

“혼자 놀 줄도 모르는 게.”

재영은 침대에 누웠다.

자고 일어나면 분명 돌아와 있겠지.

불쌍한 영혼을 위해 결국 제가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좋은 곳이라도 데려가야 하나.”

재영은 나름의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며 눈을 감았다.

모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행복해 보였다.

무작정 바에 들어왔지만, 혼자 이런 곳에 있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이서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쭈뼛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뭐, 예쁘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만인지도 까마득했다.

대체 다들 뭐 하면서 지내길래 저렇게 행복해 보일까?

남들의 안부가 궁금해질 무렵, 누군가 이서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올린 이서의 눈이 커졌다.

맑고 투명한 만큼 서늘한 기운을 보이는 사막의 하얀 달.

그 달과 닮은 그가 물었다.

“오늘도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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