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을 사랑하라
2화
너는 내 옆에서 못 벗어나.
“괜찮아요?”
이서를 잡고 있던 남자의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서는 낯선 남자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 속에 얼음 조각을 담은 듯 차가운 눈빛.
이상하다. 왜 낯이 익지?
분명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시리도록 차가운 눈을 분명 전에도.
머릿속에 뿌연 잔상이 떠오르다 이내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역시 착각이었나?
괜한 생각에 사로잡혀 낯선 남자의 몸에 너무 오래 기대고 있었다.
이서는 빨리 정신을 차리고 중심을 잡았다.
남자는 그녀가 제대로 설 때까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가 이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탐색하는 듯한 눈빛에 괜스레 이서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타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난 게 반갑기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면 그 역시 저처럼 왠지 낯익은 기분이 드는 걸까.
이서와 눈을 맞추자 그는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곤 그녀와 싸우고 있던 캐리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로비에 서 있던 벨보이에게 손짓했다.
벨보이는 황금색 카트를 끌고 와 캐리어를 척척 실었다.
“다친 곳은? 발목 겹질린 거 아니에요?”
이서는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괜찮아요.”
이서는 고개를 저을 때 남자를 한 눈에 살펴보았다.
고개를 살짝 치켜들어야 할 정도로 커다란 키와 딱 벌어진 어깨.
입고 있는 슈트도 그 완벽한 피지컬에 맞춘 듯 잘 어울렸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헤어와 진한 이목구비.
수염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
남자는 뭇 여자들의 시선을 뺏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이서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여기서 한국 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네요. 감사합니다.”
이서의 인사에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다 씩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는 격려하듯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행운을 빌어요.”
그리곤 그대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이서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세단에 올라타기 전 이서를 바라보았다.
또 제게 닿은 시선에 이서의 되도 않는 착각도 길어질 법했다.
그녀는 그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진짜 날 아는 사람인가?”
이서는 제가 뱉어놓고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낯선 땅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리가.
게다가 저런 얼굴을 쉽게 잊을 리가 있을까.
그녀는 착각은 그만 접고 호텔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위로처럼 다가온 떨림은 잊고 이재영 대신 내일의 위기를 대비해야 했다.
* * *
하지만 위기는 그리 굼뜨게 움직이지 않았다.
어두운 새벽. 그 위기가 이서를 깨웠다.
노트북 앞에서 고꾸라져 잠들어 있던 이서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깼다.
‘왕유진 개발 본부장님’
이서는 재빨리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두바이는 새벽 세 시.
하지만 서울은 아침 여덟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이서는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전화를 받았다.
“네, 본부장님.”
서울에서 날아온 목소리도 그리 살갑지 않았다.
-정 비서. 지금 어디야?
“어제 저녁 두바이에 도착했습니다.”
-이재영 대표는?
“대표님…….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순간 이서의 가슴이 섬뜩해졌다.
설마. 지금 자고 있는 거 맞겠지?
새벽 세 시인데…… 설마 아직까지.
-전화해도 안 받던데. 하기야 우리와 달리 늘 긍정적인 분이니 이 와중에도 잠이 잘 오시겠지.
대표를 향해 사정없이 비난을 쏟는 본부장.
이런 하극상은 재한 시큐리티에선 흔한 일이었다.
금줄 타고 대표 자리까지 올라온 철부지를 그 누구도 대표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어제 업무 끝나고 바로 비행하셔서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 시간이 늦은 새벽이거든요.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방금 두바이 뱅크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서의 심장 박동이 ‘두바이 뱅크’라는 말에 뚝 멈췄다.
-우리랑 계약 안 한대.
“네? 분명 계약 연기라고,”
-계약 무산이야.
“이렇게 갑자기요? 계약이 코앞인데.”
-그건 어디까지 MOU일 뿐이고. 그마저도 도장도 안 찍었잖아.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국에서부터 이서를 따라오던 불안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서는 재빨리 핸드백에 이것저것 챙겨 넣었다.
“우선 제가 대표님과 함께 설득해 보겠습니다. 대표님이 두바이까지 왔다는 거 알면 그쪽에서도 마음이,”
-얼뜨기 데리고 가서 뭐 하려고. 우리 신뢰나 더 잃지.
“…….”
-그리고 애초에 걔…… 아니, 이재영 대표가 상의도 없이 두바이부터 간 이유가 그거 아냐? 우리가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얹으려고 간 거잖아.
“본부장님. 저흰 그게 아니라 한 시라도 바삐 움직이려고,”
-웃기지도 않은 말 말고 한국으로 돌아와요.
“그래도 저희가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왕유진 본부장의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말 안 통하는 건 이재영이나 그 비서인 정이서나 똑같다는 뜻이었다.
“이유라도 듣고 오겠습니다. 지금까지 기술팀에서 열심히 준비하셨는데 이유도 모르고 물러서긴 아쉽잖아요.”
-우리 양심 좀 있지? 회장님한테 된통 깨질까 봐 그러는 거면서. 뭐 하러 우리까지 걸고 넘어져?
이재영 대표와 이서, 재한 기술팀 사이를 정확히 가르는 말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IT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인간들의 주먹구구식 운영을 비난하는 말이었다.
그 말뜻을 이서가 모를 수가 없었다.
재한 그룹에서 재한 시큐리티의 임원 자리에 이재영을 올렸을 때도. 나아가 재영을 대표 자리에 올렸을 때도 이서가 함께였으니.
그 태풍의 중심에 서 있은 지 벌써 3년 째였다.
이제 직원들의 숨소리만 들어도 생각까지 간파해 낼 정도였다.
“이재영 대표님도 늘 재한 시큐리티를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본부장님.”
피식 웃는 소리는 이서의 말을 믿기는커녕 기가 찬다는 뜻이었다.
-알아서 해. 내 회사도 아닌데, 뭐. 정 비서가 고생이 많네. 멀리서 파이팅 보낼게.
전화를 끊은 이서는 허리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을 꽉 묶었다.
얼뜨기 대표든 뭐든 상관없다.
우선은 이재영을 찾아 이 일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이서의 예상이 맞았다. 이재영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 시각 새벽 세 시 삼십 분.
지리도 익숙하지 않은 도시에서 어떻게 재영을 찾아야 하나.
이서는 핸드폰 지도로 주변에 있는 클럽과 바를 찾아 샅샅이 뒤졌다.
벌써 세 번째 클럽이었지만 재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정말.”
귀가 터질 것 같은 음악과 어지러운 조명 아래에서 이서는 새하얗게 질려 갔다.
불길한 생각이 차츰 쌓여만 갈 때.
이서의 눈에 익숙한 형체가 잡혔다.
“대표님!”
비상구 앞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 바로 이재영이었다.
“대표님, 괜찮아요?”
타이와 재킷을 벗어 던진 이재영은 와이셔츠만 입은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대표님, 정신 차리세요!”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이서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재영을 세게 흔들었다.
그때, 그의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흘렀다.
“으, 으으. 그마안 흔들어……. 토 나와.”
이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취한 걸 보자 곧장 화가 치솟았다.
“깜짝 놀랐잖아요! 이렇게 만취하면 어떡해요?”
“어지러워어. 그만……. 그마안.”
재영이 풀린 눈으로 이서를 보았다.
“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아.”
자신만만한 말과 달리 재영의 몸이 힘없이 기울어졌다.
이서는 재빨리 재영을 제 품으로 받았다.
알싸한 숨 냄새가 이서의 코를 찔렀다.
“……화 내지 말자, 화 내지 마. 전생에 나라를 판 내 죄야. 화 내지 말자.”
자기최면을 걸었지만 짜증으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우선 이서는 재영을 제 등 위에 올렸다.
키가 큰 재영을 업기엔 이서의 체구는 턱없이 작았다.
재영의 긴 다리가 땅에 질질 끌렸고, 작은 등에 기댄 그의 큰 몸은 몇 번이나 중심을 잃고 맨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서 또한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온몸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이재영을 보좌하는 건 매번 이런 고난의 연속이었다.
“정 비서……. 아니, 정이서어어.”
“나중에, 나중에 말해요, 우리. 헉, 헉.”
그러거나 말거나 재영은 이서의 등 위에서 몸을 휘적거리다 구시렁댔다.
“뭐, 네가 결호온? 결혼은 무스은. 연애도 못하는 게. 크큭. 네가 결혼하면 내 이 손에 장을 지진다!”
또 그 소리.
비행기에서 했던 도발이 영 심사에 거슬렸나 보다.
이제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정이서에게 지는 걸 가문의 수치쯤으로 생각하는 인간이니 말이다.
“하, 진짜. 알겠으니까 그만 움직이면 안 돼요? 힘들어 죽겠는데.”
“너 결혼하면! 내가 전 재산 다아아 줄게! 해 봐, 어디. 나 두고 가나 보자아. 악!”
손을 휘적거리던 재영이 다시 도보에 널브러졌다.
이서는 씩씩거리며 벌러덩 자빠진 재영을 노려보았다.
아프지도 않은지 이서를 보며 헤실 웃는데……. 이걸 콱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이서는 허리에 양 손을 올리고 이재영을 내려다보았다.
“왜 자꾸 남의 인생에 초를 쳐요? 나에 대해 뭘 그렇게 많이 안다고!”
이재영은 푸흣 웃음을 흘렸다.
“너? 내가 너에 대해선 다 알지. 앞날도 훤히 보여.”
길바닥에 자빠져 있으면서도 저 기세등등한 표정.
약이 올라 내뱉는 숨이 격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재영은 방긋 웃으며 이서에게 말했다.
“정이서 넌, 앞으로도 쭈욱…… 내 옆에서 못 벗어나.”
아니, 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