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1화

방심의 시작


12월 23일 저녁.

두바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이서는 계속 초조해했다.

“대표님,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혹 다른 기업에서 접촉을 하고 있는 것 아닐,”

“왜 그렇게 안달복달해? 상황 정리하러 내가 가고 있잖아.”

이서와 달리 이재영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아니, 방금 이서의 말에 한쪽 눈살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그는 더 대꾸 없이 스튜어디스에게 웃음을 보였다.

그리곤 와인 향기를 음미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Good Recommendation(좋은 추천이네요)!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스튜어디스는 이서에게도 물었다.

“같은 와인으로 한 잔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왜, 비행도 긴데 한 잔 해. 나한테까지 불안증 전염 시키지 말고.”

두 사람의 시선에 이서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 대신…… 차가운 물 한 잔 주실 수 있나요?”

“쓸데없는 걱정 멈출 수 있을 정도로 차디찬 물로 가져다주세요.”

재영의 말에 이서의 입가가 딱딱해졌다.

지금 찬물로 정신을 차려야 할 건 제가 아니라 이재영이었다.

큰 계약이 불발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저렇게 여유를 부리다니.

재영은 이서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혀를 차며 말했다.

“당연히 우리가 두바이 뱅크와 계약한다는 소리를 듣고 여기저기서 달려들었겠지. 계약금만 해도 얼마야? 10만 달러가 넘는데. 달달한 냄새가 폴폴 풍기잖아. 그 냄새 맡고 다들 가만히 있겠어?”

“거기에 흔들리는 거라면…….”

“넌 그렇게 우리 ‘모자이크’에 자신이 없어? 난 자신 있는데.”

재영은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이건 썸이랑 비슷해. 원래 밀고 당기는 썸 끝내고 연애로 넘어갈 때가 제일 어렵잖아. 괜히 더 재고 따지는 거지. 그럼에도 여자들은 결국 완벽한 남자……. 예를 들자면 나 같은 남자를 선택하지만. 하기야.”

재영이 이서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너한테 내가 무슨 소릴.”

이서를 무시하는 재영의 발언에 이서의 낯빛이 사나워졌다.

“업무와 상관없는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이제 대책을,”

“너도 이제 다른 남자 만나봐야 하는 거 아냐? 곧 스물여덟인데 평생에 남자라곤 나 밖에 없었잖아.”

이재영에게 이런 말까지 듣다니.

이서가 불편하다는 듯 대꾸했다.

“제 사생활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긴. 맨날 일만 하면서. 너한테 남자가 어디 있는데? 대답해 봐.”

이서는 따로 할 말이 없는 게 서러워 말을 돌렸다.

“그게 아니라……. 대표님이 저한테 남자는 아니니까요.”

결국 만나본 남자가 없었다는 사실에 비참해지는 건 저였지만.

그럼에도 짚고 넘어갈 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이재영이 제게 남자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릴.

이서의 말을 들은 이재영이 오묘한 얼굴을 했다.

“맞다, 그렇지?”

그는 짓궂게 안색을 바꾼 뒤 비아냥댔다.

“하기야 내가 너한테 남자일 수 없지. 평생 도련님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

이서는 더없이 처참한 기분이 들어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 환경이 무섭다니까.”

그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어렸을 땐 죽어도 도련님이라고 부르기 싫다더니. 이젠 내가 말 안 해도 네가 먼저 정확히 하잖아.”

이재영은 제 말이 틀리냐는 듯 이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환경이 무섭긴 한 것 같다.

어렸을 때 같았으면 당장에 저 팔을 물어뜯어 놨을 텐데.

지금은 공격할 의지조차 생기지 않으니…….

호전적이었던 어린 아이가 이렇게 무감해졌다.

새삼 재한이 얼마나 자신을 바꿔 놓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서는 깔깔한 속마음을 애써 정리하고, 조용히 반박했다.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까요?”

“뭐가?”

이재영이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앞으로도 계속……. 제가 대표님 곁에 있을까요?”

재영이 눈을 깜빡이며 이서를 쳐다봤다.

이서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대표님 말처럼 제 나이도 며칠 뒤면 스물여덟이고 곧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도 하겠죠.”

“결혼?”

“그럼 남편이랑 아이도 생길 텐데. 어떻게 대표님 곁에 계속 있겠어요?”

재영은 영 납득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이서는 저 기고만장한 얼굴이 흔들리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사실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꿈꿔 본 적은 없었다.

당장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면 연애는 사치였으니까.

앞으로도 쭉 이대로 살아갈 확률이 컸지만,

그럼에도 이건 분명히 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때가 찾아오면 미련 없이 떠날 거란 걸.

* * *

UAE, 두바이.

세계적인 호화 도시의 풍경에 이서는 넋을 놓았다.

광활한 사막 위에 그려진 마천루.

야자수 사이에 우뚝 서 있는 크리스마스트리.

짧은 미니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 핫한 외국 언니들.

영롱한 불빛들에 괜히 시선이 갔다.

색다른 크리스마스 풍경에 잠깐 넋을 놓고 있던 이서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재영은 더 채신머리없이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대표님, 서둘러 체크인하고 오겠습니다.”

“잠깐만.”

“네?”

체크인을 위해 프런트로 향하던 이서를 재영이 불러 세웠다.

재영이 도원경에라도 홀린 양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클럽 갈까?”

“네?!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이서의 큰 목소리 때문에 주위 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이서는 얼굴을 붉힌 채 재영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당장 내일 미팅입니다. 지금 클럽이라뇨. 대표님.”

하지만 재영은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준비할 건 다 했어. 두바이까지 왔는데 일만 하다 갈 거야?”

“저희는 일을 하러 왔으니 당연하죠.”

이재영이 혀를 차며 이서를 흘겼다.

“이렇게 꽉 막힌 주제에 결혼은 무슨. 돌처럼 딱딱한 너를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냐?”

비행기에서 끊긴 줄 알았던 화제가 다시 이어졌다.

정이서는 무조건 이겨야 하는 이재영의 나쁜 버릇이었다.

울긋불긋해진 이서의 얼굴에 재영은 그제야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제 손에 있던 커다란 캐리어를 이서에게 건넸다.

“그럼 넌 올라가서 일 해. 난 놀고 올 테니까.”

발길을 돌리려는 재영의 옷소매를 이서가 재빨리 붙들었다.

재영이 짜증을 부렸지만 이서는 더 악착같이 매달렸다.

“안 됩니다. 가시려면 일 해결 된 다음에. 그때 얼마든지 가세요.”

“어차피 너랑 나랑 본다고 해서 뭐 달라져? 너나 나나 컴퓨터 무식자들인데.”

“저희도 확인할 거 많습니다. 꼭 모자이크가 아니더라도 UAE 금융 시장 보고서랑 두바이 뱅크에 접근했을 시큐리티 기업도 추려 봐야죠.”

“야, 증말!”

재영은 이서의 손을 팩 내치며 제 팔을 빼냈다.

“진짜 왜 그러냐? 짜증나게. 어차피 아무 일도 안 생겨. 너도 알잖아. 재한 말고 걔네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겠냐고. 우리 기술력이 있는데.”

“그래도 저흰 모든 문제에 대비해야죠.”

“정이서!”

재영이 답답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융통성 있게 좀 살자. 의심병에 불안증까지 도진 비서. 그게 정말 유능한 비서라고 생각해?”

그 말에 이서가 놀란 듯 숨을 잠시 멈췄다.

이서의 눈동자가 떨렸지만 이재영은 서슴없이 말했다.

“대표님을 들들 볶는 게 무슨 유능한 비서야.”

재영은 검지를 들어 그녀의 코앞에 가져다 댔다.

“그건 비서로서도 여자로서도 매력 없는 짓이야. 그러니까 작작해.”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힐끔거리는 걸 보고 재영은 그제야 손사래를 쳤다.

“그만 하고 올라가. 난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이서는 택시에 오르는 재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재영이 꽂은 말이 이서의 귓가에 선명했다.

“……의심병에 불안증?”

숨을 크게 들이쉬며 불 붙은 마음을 끄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더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대표가 클럽에 가다니.

게다가 열심히 하려는 사람한테 의심병에 불안증이라고?

이서는 황당함에 헛웃음을 지으며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비서는 그렇다 해도……. 여자로서 매력 없는 짓? 내가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해.”

게다가 이재영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퍽 자존심이 상했다.

“반응하지 말자. 저런 말에 일일이 반응하고 화내면 지는 거야.”

그녀는 제 몸집만 한 캐리어 두 개를 끙끙거리며 끌었다.

“뭐가 이렇게 무거워. 고작, 고작 이틀 있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가져온 거야. 진짜.”

캐리어는 아무리 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재영 캐리어 하나 제 맘대로 못 옮기다니. 제 꼴이 퍽 처참했다.

낑낑대며 캐리어를 끌던 이서가 결국 화를 터트렸다.

“이제 하다 하다 이재영 캐리어까지 내 속을 썩여.”

캐리어를 힘껏 당기자 이서의 몸이 휘청거렸다.

“제발, 아앗!”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던 이서는 스텝이 꼬여 몸이 기우뚱했다.

그때, 커다란 손이 이서의 어깨와 허리를 붙들었다.

이서는 제 몸에 다른 이의 체온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고개를 올려 자신을 잡아준 남자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무언가에 홀린 듯. 이서는 남자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그와 그녀가 길게 눈을 맞췄다.

그게 방심의 시작이었다.

이서의 인생을 뒤집을 방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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