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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4. 어느 화창한 날에 (69/69)

Epilogue 4. 어느 화창한 날에

“인간적으로 일이 너무 많은 거 아냐? 아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많을 수가 있냐고!“

짜증이 가득 담긴 로엘의 목소리가 칼라리엔의 집무실에 울렸다. 최근 들어 워낙 종종 듣는 말이라 이반은 그저 웃고 말았다.

“그럼 칼라리엔 업무가 쉬울 줄 알았어? 괜히 이 거대한 나라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고.”

이반은 그러지 않아도 쌓여만 가는 서류에 또 새로운 서류를 얹으며 말했다. 하나를 처리하면 두 개가 더 들어오는 그런 기분이라 로엘은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볼멘소리가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누가 쉬울 줄 알았나.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닐 줄 알았지.”

“어느 정도일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이 혼자 할 수 있는 정도.”

“지금 충분히 잘 해내고 있잖아.”

“그런 게 아니잖아!”

결국 로엘이 이반을 흘겼다. 아까부터 위로는 못 해 줄망정, 괜히 약만 올리는 그런 기분이다. 참 매섭기도 한 그 눈초리에 이반은 여전히 웃기만 했다. 그래도 정말 힘이 부치기 시작하는지, 로엘의 눈가에 피곤이 서렸다. 살짝 핼쑥해진 거 같기도 하고, 눈 밑도 조금 어두워진 거 같아 이반은 미안해졌다.

괜한 투정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제일 잘 아는데, 그가 알아주지 못했나 보다.

“힘들어?”

“응.”

로엘은 바로 답했다. 여전히 팔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계속 서 있던 이반은 아무래도 좀 더 로엘을 토닥토닥해 줘야 할 거 같아 그녀 앞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 마. 졸리단 말이야.”

“자면 되지.”

“그럼 일은 누가 하고?”

“내가 하면 돼.”

“진짜, 말은…….”

“어? 내가 말만 하는 인물은 아니지 않나?”

되묻는 이반의 말에 이번에는 로엘이 피식 웃고 말았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게 황당해하는 이반의 얼굴이 저절로 그러졌다.

“아닌 게 아니니까 문제인 거지. 넌 진짜 다 해 줄 것 만 같아서.”

그리고 그러면 안 되므로.

“정말 좀 도와줄까?”

“아냐. 내가 해야지. 보란 듯.”

로엘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반의 손길 아래 더 엎드려 있다간 그대로 자 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금 서류를 보기 위해 펜을 잡는 그녀가 기특하기도 했다. 이반은 그런 그녀를 보며 쓴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녀를 시작부터 많은 이들이 힘들게 하는구나 싶어서.

요새 로엘의 일이 많다는 것. 누가 보아도 객관적으로 그러했다.

“요새 좀 심한 건 사실이야. 원래는 이 정도까진 아니야.”

“나도 알아. 그리고 그 이유도 알고.”

로엘은 덤덤히 말했다. 이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 어느 나라의 황후보다도 권한과 권력이 막중한 칼라리엔은 애초에 황제의 총애 따위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철저히 준비되어 후보에 오르고 그중에서 고르고 골라 선정되는 사람이 앉게 되는 바로 그런 자리.

그 자리를 위해 참 많은 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오로지 그 칼라리엔이 되기 위해 교육받았다. 아리스 몰브가 그러했고, 수아 켈트가 그러했다.

최종 칼라리엔을 선택하는 것은 황제이나, 그 후보 선상에 오르기까지는 각자의 몫이므로.

그러니 결국 객관적으로 이 나라에 가장 어울리는 칼라리엔 재목이 되는 게 먼저였다. 로엘은 바로 그 재목임을 아주, 이례적인 방식으로 증명한 거였고.

“……그러니 얼마나 많이 의심들을 하겠어.”

그 잘난 귀족분들께서.

너무도 속이 훤히 보이는 심술이자, 검증에도 로엘은 볼멘소리 한 번을 그들 앞에서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묵묵히, 보란 듯 그들에게서 몰아치는 일을 전부 해냈다. 실수 하나라도 잡히면, 마치 열을 잘못했다는 듯 달려들 게 뻔해 더더욱 잘하려 들었다.

“내가 화나는 건 그런 점이 아니야.”

그리고 그건, ‘그’ 또한 그러하였겠지. 어쩌면 지금도 그러할 테고.

“……그런 건 정말 아무래도 좋아.”

이 기라성 같은 나라들의 귀족들이 어떻게 황실을 견제하는지, 이제야 제대로 된 견제 대상이 되어서야 로엘은 뼈저리게 느꼈다. 모든 일을 감시받는 느낌이랄까.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들으며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어린 황제 에단에게도 그러했을 테고, 그 에단 곁에 있는 이반에게도 그러했겠지.

로엘이 화나는 건 이 끔찍한 견제 속에서 그가 이 많은 일들을 그 오랜 시간 ‘혼자’ 해 왔단 사실이다.

“……어떻게 이러고들 살았데?”

“음. 뭐 당연한 거라. 카이로스 황실에선.”

“하나도 당연하지 않아.”

로엘의 미간이 또 한 번 찡그러졌다.

로엘이 칼라리엔이 되기 전까지 칼라리엔의 자리는 쭉 공석이었다.

칼라리엔이 맡은 역할이 어디 한두 개던가.

워낙 다른 나라에 비해 권한이 많은 칼라리엔은 그만큼 담당하는 역할도 다양하고 가지고 있는 책임도 막중했다. 이 거대한 카이로스 황실의 살림을 도맡아야 했으며, 황실 재정의 일부인 전국 황실 사업을 챙겨야 했고, 귀족들을 상대해야 했으며 나아가 외교적 의전도 담당해야만 했다.

거기에 중간 중간 민생도 일부 처리해야 하니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남아나질 않았다. 정말 괜히 카이로스의 어머니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공석이면 안 될 자리.

결국 공석인 동안 그는 즉위 이래 쭉 혼자 맡아 왔단 거다.

“전혀, 조금도 당연하지 않아.”

로엘은 매일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들어오는 그를 떠올렸다. 이 큰 나라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이렇게 많나 싶어서, 정말 세상에 어떤 황제가 저렇게까지 격무에 시달리냐고 한두 번 불평을 터트린 게 아니다. 저 사람이 제대로 된 잠을, 정말 몇 시간씩 푹 자는 것을 본 기억이 손에 꼽히는데, 그런 생활을 그는 평생을 해 왔단다.

그녀는 고작 한 달 남짓 이러는 것만으로도 이리 힘이 부치는데.

“이마에 주름.”

“몰라.”

이반은 로엘이 무얼 말하고 무얼 걱정하는지. 그리고 무엇에 화내는지 전부 알아들었다. 그건 정확히 이반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이므로.

에단이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을 때 이반 역시 옆에서 도왔으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최종 결정권자는 에단이어야 했으므로. 그래서 더더욱 이반도 얼른 영특하신 칼라리엔이 들어와 적어도 칼라리엔 업무만큼은 덜어가 주길 바랐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누가 들어온들, 자신의 형제가 그자를 믿고 맡길까 싶기도 했다.

몰브가의 그 노골적인 압박에서 끝끝내 칼라리엔을 임명치 않고 미뤄 두었던 에단의 의중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이반은 눈치 없지 않았다. 그는 칼라리엔이 가진 큰 권한이 한 가문에 집중되는 것을 걱정했고, 그 걱정을 덜기 위해선 본인이 직접 그 모든 것들을 쥐고 있을 수밖에 없었겠지.

원로와 귀족들은 어린 황제의 권력욕이 지나치다고 뒤에서 흉을 보았을지 모르겠으나, 그 권한을 권력이 아닌 의무 이행으로 쓰는 에단이기에 일 처리는 훨씬 군소리 없이 진행되었던 거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 누가 와도, 내 형제의 짐을 덜어 주지 못하겠구나 하고.

그런데, 그 생각을 보란 듯 깼다.

지금 눈앞에 계신, 그의 오래된 누이께서.

“이제는 네가 있잖아. 에단에게도. 카이로스에게도.”

지난 칼라리엔의 연회 때 그토록 굳게 다짐하며, 아쉬운 추억과의 작별을 고했음에도 이반은 여전히 로엘의 가장 가까운 이로 남아 버렸다. 아무리 언질을 주고, 혼을 내 보아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로엘의 일관된 태도가 기어코 이반을 굴복시킨 거다.

사라의 매서운 눈초리 덕분에, 이렇게 둘이 있는 편한 자리에서는 그저 타르타니의 두 사람으로 남기로 암묵적으로, 그리고 반강제적으로 합의가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 정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단 에단의 확인까지 그녀는 기어코 받아 와서 말이다.

덕분에 그녀는 늘 그녀의 편이 되어 주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고, 이반은 소중한 네아를 지켰다.

“그러니, 더 열심히 해야겠지? 칼라리엔님.”

토닥토닥을 좀 더 해 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로엘의 칼라리엔 업무를 하는 데 이반은 공식적인 스승이 되어 버렸다. 칼라리엔의 업무를 가장 많이 대행한 이가 이반이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고, 대놓고 에단이 이반을 콕 집어서 로엘의 교육을 부탁했다. 로엘이야 옛날 추억도 할 겸 이반과 함께하는 게 반가왔으나, 그녀의 예상과 조금 다르게 이반은 꽤나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은근 엄하다니까.”

그래서 종종 로엘의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하면서 세우는 그를 쓱 한번 흘겨도, 이반은 꿈쩍도 안 했다.

“얼른 시작해. 수로 사업 먼저 하고.”

“진짜 너 엄하다구!”

“엄해야지, 그럼.”

갑작스레 들려오는, 두 사람 모두에게도 익숙한 목소리가 칼라리엔 집무실에 울렸다.

“아주 잘하고 있어.”

언제 들어왔는지, 천천히 걸어오는 그는 아무래도 막 국정회의를 마무리하고 온 거 같았다.

에단의 등장에 이반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이제 그가 빠질 차례가 된 거 같다.

“형제. 칼라리엔님께서 불평불만이 아주 심해. 나 잘릴 거 같아.”

“누구 마음대로. 선생을 제자가 자르면 안 되지.”

“어휴. 두 형제분. 나가 주실래요. 저 일해야 하거든요.”

아무튼 둘만 있으면 한통속이지.

로엘은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흘겼다.

참 닮기도 얼마나 닮았는지. 얄밉기도 한 두 사람을 보며 로엘은 결국엔 피식 웃고 말았다.

“폐하께서 오셨으니 저는 그만 갑니다. 두 분 다 좀 쉬세요. 제발. 부디.”

역시나 이반은 바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으나, 또 말릴 필요도 없었기에 두 사람은 이반을 보냈다.

“이반이 아주 잘하고 있네.”

이렇게 편한 사이가 된 것이 그저 좋았다.

세 사람 모두에게.

“내 편도 좀 들어주시죠, 페하? 나 진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만 나오는, 그녀만의 이 귀여운 투정에 에단은 여느 때처럼 웃고 말았다. 칭찬해 달라는 아이 같아 그저 사랑스러울밖에. 업무를 하느라 최근 머리를 질끈 묶고 안경을 끼는 그 모습마저 그는 너무 좋았다.

“어떻게 칭찬해 드리면 되나.”

그녀의 얼굴을 반이나 가리는 안경부터 벗기자 꽃처럼 환히 핀 그녀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자연스레 고개를 숙여 그 붉은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기며 에단은 그녀와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달아.”

“좀전에 과일을 먹어서 그래요.”

“요새 너무 자주 먹는 거 아냐.”

“어? 나 살찐 거 같아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바로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의 반응에 그는 작은 한숨을 삼켰다. 물론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었으나, 뭐 사실 그 입장에서야 그녀가 살 좀 찌면 어떠랴. 그래 보았자 여전히,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울 것을.

아니, 오히려 좀 쪘으면 싶다.

그의 기준에 그녀는 말라도 너무 말랐으니.

“최근에 종종 먹는 거 같아서 그런 거야. 하루 종일, 입에 달고 살잖아. 원래 안 그러던 사람이.”

“아…… 그건 그래요. 요새 그렇게 과일이 달더라. 제철 과일이라 그런가 봐요. 이번에 농사가 되게 잘 됐거든. 그러지 않아도 그거에 대해 좀 상의하려 했어요, 폐하. 아니 작황이 좋은 지역을 파악해 보았는데,”

“잠깐.”

포도 한 알을 또 입에 넣으면서, 자료를 찾으려는 그녀의 말을 순간 에단이 뚝 끊었다. 그러고는 불현듯 생각이 났는지 그야말로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최근에 거의 매주였잖아.”

“뭐가요?”

“내가 너를 안은 게.”

“아니, 갑자기 무슨…….”

너무 쌩뚱맞은 이야기에 로엘은 괜시리 얼굴을 붉혔다.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오히려 더 민망스러웠다.

“작황 이야기에 어떻게 하면 거기로 빠지는 거예요.”

“좋아하지도 않았던 신과일을 찾고, 몇 주 동안 내내 나에게 안겼다는 건,”

“설마……!”

이제야, 로엘도 에단이 무얼 생각했는지 알아챘다.

그래. 로엘은 자신이 생각해도 최근 먹지 않던 음식이 당기고, 거의 찾지 않던 야식을 챙겨 먹고 있다고 생각했다. 안나까지 나서서 요새 잘 드신다고 좋아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어떻게…… 맞는거 같아요. 나 요새…….”

“당장 그만 일해.”

에단은 바로 그녀의 손에 들린 펜부터 뺏었다.

그러고는 신줏단지 모시듯 그녀의 팔을 잡아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예상치 못했던 일에 어안이 벙벙한 로엘은 그저 에단이 시키는 대로 일어나, 편한 소파에 몸을 기대앉았다.

정말, 그거라면 지금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아니면. 나 지금 좀 많이 기쁠려고 하는데.”

“아니어도 괜찮고, 맞다면 안 괜찮아. 도대체 며칠 밤을 새우면서 일한 거야.”

에단은 진심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얼른 밖에 있는 딜리아를 불러 당장 의원을 부르라 명했고, 자초지종 설명을 들은 딜리아는 화색이 되어 당장에 뛰어갔다.

벌써부터 소란스러워지는 밖의 소리를 들으니, 로엘은 정말이지 실감이 나는 거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배를 짚으면서 흔들리는 눈으로 에단을 보았다.

“어떡해요, 나 진짜 너무 기뻐”

“나도 그래.”

아직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로엘과 에단은 확신이 들었다. 지금 이 작은 배에 두 사람의 새생명이 깃들었다는 것을.

그래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제 보니, 두 사람은 두 사람 자신들도 모르게 원하고 있었나 보다. 서로를 닮은, 그래서 너무도 사랑스러울 그들의 아이를.

“앞으로 일은 금지야. 먹고 자는 것만 해.”

“어휴, 정말. 어떻게 그래.”

진심이 가득 담긴 그 말이 너무도 에단스러워서 로엘은 웃고 말았다.

햇살이 기분 좋게 들이치는 오후.

카이로스인들 모두가 기뻐할 소식이 들려올 것만 같다.

_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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