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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3. 여전히, 아직도 (68/69)

Epilogue 3. 여전히, 아직도

뒤돌아 생각을 해 보면, 그녀와 만난 날은 몇 날이 되지 못한다.

토르티아와 테바로스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데, 황족들끼리의 교류 행사가 1년에 몇 번이나 되겠나. 그중에서도, 두 사람이 동시에 참석하는 날을 센다면 더더욱 며칠 되지 않았다.

그러니, 두 사람이 정혼자로 결정된 바로 그날, 두 사람은 서로를 처음 볼 수 있었다.

‘토르티아의 제1왕녀, 로엘 네아레스라고 합니다.’

제1황자와 정혼하는 에리카에게 모든 이목이 쏠려, 그러지 않아도 소박하게 꾸민 그녀는 더더욱 초라해 보였다. 덕지덕지 열심히도 치장하고 나온 에리카에 비해, 그녀는 차분해도 너무 차분한 드레스에 그 흔한 장신구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화장은커녕 밖에서 뛰어논 티를 내듯 살짝 그을린 얼굴에는 그 흔한 색조 화장 하나를 안 했다.

그렇게 데릭은 로엘을 만났다.

‘데릭 테바로스다.’

그런 그녀를 마주하며 데릭은 무슨 생각을 하였나.

토르티아마저도 그를 무시한다고 분개했나. 아니면 황제가 될 게 뻔한 조지 네아레스의 딸과 결혼하는, 그래서 뒷배가 탄탄해질 형님의 정혼을 보며 초조함을 느꼈다. 그도 아니면, 그 허례와 가식이 가득한 그 시간들에 속으로 짜증을 내었나.

솔직히,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로엘을 만난, 바로 그 순간 나머지는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으므로.

‘저는 데릭 황자님과 정혼하였으니, 원래부터 이 자리가 제 자리입니다.’

그래. 그녀 외엔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는다.

‘황자님께서도 황자님 인생을 사세요. 태어난 순서 따위에 얽매여 살지 마시고.’

어떻게 그날의 다른 것들 따위가 기억날까.

그 한마디. 그 첫 만남이 그의 인생을 흔들어 놓았는 것을.

그날 밤, 토르티아로 돌아가는 그녀의 작은 마차를 참 한동안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그녀는 평생 모를 테지.

마치, 제이드의 부고에 본능적으로 토르티아로 달려가려 했던 것을.

그렇게 몇 번이고, 이미 인연이 끝나 버린 옛 정혼자를, 목숨이 오가는 전장 속에서도 떠올렸다는 것을.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되었다는 버리의 보고에 또다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그녀를 카이로스의 한복판에서 다시 만난 그날, 그는 다음 날 그녀를 또 만날 생각에 잠 못 이루었다는 것울.

그리고 이렇게, 그 잔인한 안녕의 인사를 고한 그녀를 보기 위해 다시 카이로스에 왔다는 것을.

아마,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거다.

“폐하. 이 정도면 병에 가까워요.”

볼멘 버리의 목소리가 온 사방에서 환호하는 카이로스 백성들의 목소리 속에서 겨우 들려왔다. 다들 축제 분위기 속에 흥분되어 있는데, 두 사람만이 깊게 로브를 뒤집어쓴 채로,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아주 심각한 불치병이요.”

“어허. 갈수록 막 나가는 거 같은데. 이러다 말도 놓겠어.”

“설마요. 제가 어디 감히 대 테바로스의 황제 폐하께 말을 놓습니까. 그러다 당장에라도 목이 날아갈 텐데.”

가득 짐심이 담긴 투덜거림에 데릭은 피식 웃고 말았다.

로엘이 부추긴 테바로스의 반란은 생각보다도 쉽게 정리되었다. 그의 어리석고도 무능한 숙부는 애초 데릭의 상대가 되지도 않거니와, 아무리 데릭이 한동안 성을 비웠다고 한들 젊은 황제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그가 모든 것을 접고 테바로스에 다시 들어가는 순간부터 판도는 기울어 버린 거다.

물론, 로엘의 장난질이, 선을 지키게끔 만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조금만 더 못된 마음을 먹었더라면, 훨씬 더 데릭을 궁지에 몰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을 홀로 했지만 더 이상 고민하진 않았다. 그녀의 마음과 사정이 어떤 것이든, 더 이상 데릭에겐 아무 의미 없는, 부질없고도 헛된 희망일 테니.

“……고약한 병인 건 맞지.”

그 헛된 희망임을 알면서도 이리 결국엔 와 보고야 말았으니.

“불치병이 아니면 다행이고.”

데릭은 온 카이로스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카이로스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베일에 싸여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데릭은 알 것만 같았다.

아마 큰 눈을 조금 낮게 내리깔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을 거다. 새하얀 피부에는 예쁜 홍조를 드리우면서도 마주하면 당당한 태도가 저절로 나와 기품을 더할 테지.

그녀의 그런 모든 것들이 그녀가 ‘황후’임을 드러내고 있겠지.

그 어린 날에도, 그러하였듯.

‘나는 테바로스의 황제가 될 거다. 그러니 너는 테바로스의 황후가 되어라.’

그렇게 데릭이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

저 붉은 여인이 한 나라의 국모가 되리라는 것을.

그것이 너무도 당연히 테바로스가 될 줄 알았는데. 그래서 번영하는 테바로스를 함께 지켜보며 모든 테바로스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줄 알았는데.

어쩌다 그녀는 이 머나먼 이국의 땅에 와 다른 이에 옆에 서게 되었을까.

“인연이 아닌 거지요. 폐하.”

아무 말 없이 로엘을 바라보는 데릭 대신, 버리가 나지막이 그 답을 해 주었다.

이제는 버리도 데릭의 생각을 제법 정확히 읽을 줄 알게 되었다.

뻔히, 자신의, 주군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이 이질적인 환호 속에서 저 멀리도 있는 여인을 바라보는지 조심스레 알 것도 같았다.

알 거 같으니, 여기까지 따라온 거다.

목숨 걸고 그를 말린 것이 아니라.

데릭은 꽤나 건방진 버리의 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의 심복이 진정으로 ‘심복’이 되었나 보다.

이토록 정확히 그의 마음을 알고, 이토록 아프게 그의 정신을 깨우는 것을 보면.

“인연이 아닌 걸 어쩌겠습니까. 그건 폐하의 잘못이 아니에요.”

거기에 더해, 이리 듣고 싶은 말로 위로까지 해 주고 있었다.

데릭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그 말이 듣고 싶었나 보다. 아무리 그녀가 괜찮다고 하여도, 단 한 번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지난날 그를 외면했던 그 많은 시간들에 대하여 말이다.

그때, 그가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그녀에게로 달려갔다면. 그렇게 토르티아의 외딴 탑에 홀로 갇힌 그녀를 데리고 왔더라면. 지금 로엘은 그의 곁에 있었을까. 그랬다면 처음 그녀에게 테바로스의 황후가 되라고 말했던 것처럼, 당당히 그녀를 테바로스의 황후라 칭하며 사랑하고 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는 아주 많이 후회가 되고, 오래 아플 것만 같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폐하. 폐하의 인연이 아닌 저분께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셨습니다. 보란 듯. 저렇게 눈이 부시도록 멋있게요.”

버리는 데릭을 따라 로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여인이 테바로스의 황후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 버리라고 어디 안 해 본 줄 아나.

‘데릭 폐하가 대단하다는 건, 그렇게 열심히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모두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로엘 네아레스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흔들리고 말았다.

‘욕심이 과하시거든 멈추게 하시고, 아첨이 들리거든 쓴소리를 아끼지 마셔야 합니다.’

아니. 어디 흔들리는 수준일까.

온 마음을 단번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분을 부추기지 마세요. 버리 경. 버리 경께서 부추기지 않아도 그분은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 못 하게, 홀로 너무도 열렬히 바랐다.

저 붉은 여인께서, 자신의 외로운 주군의 곁을 지켜 주기를.

그렇게 테바로스에 영광을 가져다주기를.

마음의 문을 너무 굳게 닫아 버려서, 어느 순간부터 문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살아온 이분을 유일하게 뒤흔드는 사람. 그렇게 두드리고 또 두드려 그 문을 저절로 열리게 만드는 사람. 그 유일한 사람이 저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때, 버리는 꽤나 슬펐다.

참 역경과 고난이 많은 주군의 인생에, 저분을 위로할 한 명쯤은 함께하게 해 주실 줄 알았는데. 그 한 명조차 허락되지 않는 거 같아서.

저분이 아니라면, 이 문은 절대 그 누구에게도 열리지 않음을 버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순순히 따라왔다.

이 말도 안 되는 걸음에.

“그렇다면 폐하의 자리는 어디신가요? 지금 여기, 이곳인가요.”

로엘을 향해 있던 버리의 시선이 데릭을 향하자, 데릭 역시 시선을 돌려 버리를 보았다. 올곧은 시선. 흔들리지 않은 눈동자. 함께해 온 시간이 긴 만큼, 그를 더 깊게 보게 될 줄 안 그의 충신은 꽤나 매섭게 그를 추궁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그에게 본분을 다하라고, 혼을 내고 있는 거다.

“내가 있을 곳은, 테바로스.”

그러니, 그 무서운 질타에 다른 대답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애초에 데릭 테바로스의 인생에, 다른 길이 없었던 것처럼.

“나는 테바로스의 황제. 내가 있을 곳은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오직 테바로스뿐.”

그러니 그녀에게 달려간다는 그러한 선택지 따위, 처음부터 데릭의 인생에는 없었던 거다. 버리는 만족스러운 데릭의 대답과 더 만족스러운 데릭의 결의에 찬 눈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버리가 지금껏 보아 왔던, 그렇게 보고 싶었던 자신의 주군의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예. 폐하. 폐하께서는 테바로스에 가장 큰 영광을 가져다주실, 위대하신 우리의 왕. 폐하께서 계실 곳은, 테바로스, 바로 우리 테바로스인들 곁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저 닿지 못할, 그렇게 갖지 못할 분에게 마음을 두지 마시라고.

이제 그만, 온전히 자신들의 황제로 돌아와 달라고.

버리는 무릎을 꿇고 무언의 충언을 하였다.

데릭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은 버리의 충언에 그 역시 무언의 답을 했다.

그도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황자님. 테바로스의 황제가 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그래.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의 자리가 어디고,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의 인연은, 처음부터 ‘테바로스’였을 뿐.

“칼라리엔님, 만세!!”

“만세!!!”

그러니, 그도 그의 자리로 돌아가면 그만.

“칼라리엔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렇게 행복이 늘 함께하기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마지막 말을 삼킨 채 데릭은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칼라리엔 로엘 마마, 만세!!!”

여전히 아련한, 그리고 아직도 시간이 필요한 이 마음이 언젠가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되길. 홀로, 그저 바랄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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