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1. 칼라리엔, 로엘
로엘의 칼라리엔 임명은 만장일치로 원로회를 통과했다. 모두가 예상한 그 결과에는 아무런 이변이 없었고, 백성들은 그 소식에 환호했다. 최초로 북방을 정벌한 에단 황제에 대한 칭송은 드높았으며, 그런 에단의 곁에서 이 전쟁에 큰 역할을 했던 로엘에 대한 칭송 역시 끊이지가 않았다. 그러니 온 카이로스가 축제 분위기일밖에.
그 어느 때보다도 성대하게 이루어진다는 로엘의 책봉식에 온 카이로스인들이 흥분에 싸였다.
“와. 마마. 보이세요. 카이로스 사람 전체가 모여든 거 같아요!”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는 로엘의 뒤에서 흥분한 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딜리아. 지금 마마는 못 움직이신다고.”
“아는데, 그래도 상황은 아셔야지!"
딜리아는 상기된 얼굴로 바로 발코니에서 나와 로엘에게 달려갔다. 베일에 싸여 있는 로엘은 그런 딜리아를 보며 미소 지었다.
“딜리아. 너무 신난 거 아니야.”
“신난 정도가 아니죠. 마마께서 칼리리엔이 되시는 날인걸요.”
“너희들 덕분이야.”
“어휴. 마마. 무슨 그런 말씀을. 저희가 무얼 했다고요.”
“나야말로 무슨 말이야. 너희들이 없었으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리가 없잖아.”
로엘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듯 바로 말했다. 진심이 가득 담긴 그 말이 너무 고마워, 아주 잠시 그녀의 곁에 모여 있던 그녀의 사람들은 순간 울컥했다. 그런 그녀들을 로엘은 거울을 통해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낯선 이곳에 홀로 떨어져 그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었던 그녀에게 이들은 분명 가족이 되어 주었다.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기꺼이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는 이들을 곁에 두며 그녀는 안정과 위로를 얻었고 그 가운데에서 그녀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헤더에게 잠시 움직이고 싶단 눈짓을 주자, 헤더는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듣고, 드레스 끝자락을 들어 올려 그녀가 그녀들을 마주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내가 지금 상태가 이래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네. 그래도, 지금 말해야 할 거 같아. 이 감사한 마음을.”
로엘은 모두의 눈을 일일이 마주했다.
그녀의 눈과 귀가 되어 주었던 딜리아. 힘든 궁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항상 맛있는 음식을 해 준 안나. 그녀를 언제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만들어 준 헤더. 항상 뒤에서 그녀의 계획이 가능하도록 재정을 담당해 준 페니. 마지막으로 그녀가 어디를 가든 그림자처럼 그녀를 지켜 준 시에라까지.
그래. 이 다섯 명이 없이, 그녀는 이 카이로스 황궁에서 버틸 수 없었다.
아니. 이리 이 아름다운 황금의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가장 위대한 그분 옆에 설 수 없었겠지.
로엘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많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바로 그녀들은 무릎을 꿇고, 그녀 앞에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카이로스의 어머니. 칼라리엔 로엘 네아레스 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녀의 진심 가득한 감사 인사에, 더 큰 진정이 담긴 충성 맹세가 돌아왔다. 왠지 이럴 줄 알아, 로엘은 그저 웃고 말았다. 참 올곧기도 한 마음이다.
이들을 만난 건 정말 천운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제이드 네아레스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참 많이도 들었던, 아버지에 대한 충성 맹세. 아버지를 우러러보는 그들의 그 진심 어린 맹세는 어린 마음을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눈을 반짝이며, 나도 언젠가는 나와 함께 앞을 나아가 줄 이들을 갖겠노라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맹세한 그 누구도 아버지의 죽음에 함께하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바란 건, 아버지와 같이 죽어 달라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저 아버지의 마지막이 외롭지 않게 그의 곁을 지켜 주기만을 바랐던 것뿐이었는데. 그 마지막을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로엘은 그게 참 야속했다. 그래서 충성한다는 그 말 따위. 정말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을 만났다. 그녀 손으로 뽑고, 그녀의 마음에 맞는 이들을 직접 추려서 골랐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엔 어느 정도의 포기가 있었다.
벤과 맥스의 마음이 진심이었으나, 아버지의 마지막에 그들이 없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그녀에 대해 진심이나, 그녀의 힘든 순간에 그녀를 외면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러니 그에 대해 서운해하지 말자고.
‘마마!’
그런데 그 마음을 이들은 점점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느 순간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녀를 위협한다면 누구보다 먼저 그녀 앞에 서 그녀를 지켰다. 그녀의 일에 함께 울어 주고 함께 분노했으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했다. 그래. 그녀들은 마치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듯, 그렇게 그녀를 위했다.
그 맹목적인 신뢰와 충성에 어떻게 다른 마음을 먹을까.
‘보고싶었습니다. 공주님.’
그리고 그건 그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로엘은 죽어 가면서도, 자신에게 끝까지 달려왔던 벤을 생각했다. 보고 싶다고 말하던, 그 주름진 눈가의 미소에 그녀는 정말 울고 싶었다.
누가 감히 벤과 맥스의 충성이 거짓이었다고 말할까.
‘벤이랑 맥스는 진짜 아버지가 좋나 봐.’
‘하하. 당연하잖아. 우린 형제인걸.’
아버지 역시, 절대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홀로 떠나시는 그 순간에도. 다시 저 하늘에서 그들을 만났을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니 그녀 역시 눈앞에 이들과 그저 지금 이 순간 행복하면 된 거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감격의 시간을 지속하기엔 시간이 없어 보이는데.”
“어머! 맞아요. 이럴 때가 아니라고요!”
상기시키는 로엘의 말에 다들 화들짝 놀라 분위기가 바로 바뀌었다. 헤더는 얼른, 다시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의 마무리를 도왔고 딜리아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문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다른 시녀들을 안으로 들였다.
“자자. 마마. 서둘러 봅시다! 오늘, 아주 그냥 제대로 여신님이 되어 보자고요!”
이제 그만 그녀를 밖으로 뫼실, 다른 시녀들까지 전부 안으로 들어오자 금세 그녀의 방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녀 혼자 일어서기도 힘든, 이 화려한 드레스는 카이로스의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금빛 자수로 빼곡히 수놓아 있었고, 카이로스의 칼라리엔을 상징하는 문양은 그녀의 베일에 수놓아 있었다.
단정하게 높게 올린, 그녀의 붉은 머리 위로 내려진 그 금빛의 베일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거기에, 오로지 황족만이 착용할 수 있는 다이아는 그녀의 모든 장신구에 들어가 빛나고 있었는데, 특히 그녀의 목에 걸린 입이 떡 벌어지는 그 다이아 목걸이는 이미 한 번 그녀가 걸어 본 적 있는 바로 그 목걸이였다.
‘폐하께서 선물하신 건가요?’
그때 수아가 물어본 그 이유를 로엘은 이번에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많은 귀족들이 자리하는 바로 그 자리에 아무 생각 없이 이 목걸이를 걸고 나갔으니, 그들이 경악할 만했다. 이제 보니 이 목걸이는 에단이 그들에게 확실히 경고한 셈이었다.
언제든 끊길 수 있는, 그런 얄팍한 총애 따위에 기댄 아카시스가 아니라고.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칼라리엔으로 염두에 둔 그런 아카시스라고.
그러니 알아서 그 앞에 고개를 조아리라고.
“가실까요, 마마.”
딜리아의 안내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후궁의 모든 이들이 그녀 앞에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맨 앞에 있는 이는 바로 사라.
“카이로스의 어머니. 칼라리엔 로엘 님을 뵙습니다.”
오늘은 날이 날인 만큼 황궁의 사람들 모두 정복을 갖춰 입고 있었는데, 사라는 그들 중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최고 시녀장의 정복이었다. 그녀가 이곳 카이로스에 처음 와 아카시스로 등극하는 그 임명식 때에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 로엘은 짧게 놀랐으나 이내 미소 지었다.
고마운 이로 치자면, 당연히 사라도 포함된다.
‘칼라리엔이 되세요. 마마.’
그녀에게 가장 먼저 칼라리엔을 언급했던, 바로 그이가 이 사라가 아닌가.
처음 그녀가 그에게 안긴 그다음 날, 사라는 그녀에게 찾아와 말했다.
이 나라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여인이 되시라고.
그때 로엘은 생각했다. 이 여인은, 정말 그녀를 위하고 있구나 하고.
살가운 말 한마디. 따뜻한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지만. 사라는 진심으로 그녀가 안녕하길 바라고 있다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은 그럴 마음이 없다고. 그런 그녀의 대답에도 사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리될 줄 알았다는 듯이.
로엘은 자신 앞에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칼라리엔이 되는 이 길을 안내하는 이는 당연히 사라여야 한다고.
“결국 이렇게 되네요.”
로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세세한 설명이 없어도 사라는 바로 알아들었다.
사라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따뜻한 마음이 가득한 이 붉은 눈을 그녀는 참 좋아한다. 너무도, 그분들을 생각나게 하니까.
“네.”
사라는 그저 짧게 대답했다.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말로.
하지만, 이내 로엘을 놀라게 만들었다.
“칼라리엔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아주 짧게, 사라가 너무도 환히 그녀에게 웃어 주었으니까.
잔주름이 깊어지는 사라의 눈가가 예쁘게 휘고, 차갑기만 하던 눈에 온기가 서리며, 꽁꽁 숨겨 둔 그녀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그렇게 사라는 로엘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 한 마디가 로엘 역시 환히 웃게 만들었다. 조금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올 만큼 고마워서.
마치, 그녀의 험난했던 그 많은 고난들을 다른 이들도 다 알고 있다고. 그러니 너무도 수고했다고. 그렇게 말해 주는 것만 같아서.
사라의 안내를 받아, 그렇게 로엘은 걸음을 옮겼다. 후궁에서 나서는 길 양옆으로 모든 키로스들이 도열한 채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고, 황궁으로 향하는 그 길목에는 프래카들이 열을 맞추어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 뒤로는 수없는 궁인들이 그녀의 영전에 허리를 숙였으며, 취임식장에는 모든 원로와 관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뒤로는 환호하는 백성들의 소리가 울렸으며, 그녀의 걸음마다 웅장한 북소리가 들렸다.
둥둥둥. 북소리에 맞춰 그녀의 심장도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로엘은 이곳,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의 여인. 나의 사랑. 나의 월계수. 로엘.’
저 눈부신, 위대한 사람 곁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가.
이 먼 거리에서도 그녀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져 그녀는 미소 지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이 벅찬 마음을, 그 역시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
“나의 하늘.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춥니다.”
긴 길을 걸어, 에단 앞에 다다른 로엘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금빛 드레스가 찬란한 태양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이 났고, 그녀의 베일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온전히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제야 에단은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을 만들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이 있지 않았는가.
결국 이리될 것을. 이 여인은 뭘 그렇게 돌아 그에게 왔는지.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온 거다.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황금의 제국. 카이로스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의 이름으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회장을 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 칼라리엔을 상징하는 왕관이 씌워졌다.
“로엘 네아레스를 대 제국 카이로스의 제31대 칼라리엔에 봉한다.”
그렇게 로엘은 카이로스의 칼라리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