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 나의 황제께 붉은 월계수 꽃을
로엘이 처음 카이로스에 왔을 때에는 어떠했나. 너무도 초라한 그 작은 행렬은 지나가는 일반 백성들의 시선을 끌기에도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온갖 나라의 온갖 진상품이 늘 오가는 카이로스에서는 웬만큼 화려한 행렬이 아니고서야 이 콧대 높은 황금의 민족의 시선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 그녀의 초라한 행렬은 아무리 중부 사람들에게 낯선 북방 토르티아의 행렬이라 해도 카이로스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저 알음알음 들어 온, 그 불쌍한 공주가 이곳으로 쫓겨 왔나 정도의 얄팍한 관심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프란시아님 만세!!!!”
“칼라리엔님 만세!!!!”
이제는 전 카이로스인들이 그녀를 연호하며 환호했다.
이 나라의 가장 높고 고귀하신 여인, 카이로스의 어머니로서 말이다.
“참, 세상일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거야.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어? 지금의 이 광경을.”
그 모습을 카이로스의 성에서 바라보며, 수아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로엘의 말 레아가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인파들 속에서 로엘은 환히 웃고 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그리고 그녀 역시 그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이 먼 곳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무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요. 그때의 그 북방의 공주께서, 이 나라의 칼라리엔이 되실 줄은.”
“칼라리엔은커녕 아카시스도 과분하다고 했었죠.”
“쥰.”
“뭐 사실인걸요. 다들 워낙 말들이 많았잖아요? 로엘 님의 입궁에 대해.”
베티는 쥰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그렇다고 쥰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드센 아리스의 등쌀에 못 이겨 지겹도록 악의적인 로엘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고, 아리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는 로엘을 깎아내리는 무언가라도 들고 와야 했다.
그래서 이 후궁의 사람들은 생각했다. 타지에서 오신 어린 공주께서 아리스의 등쌀에 못 이겨 죽어 나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예상은 보란 듯 빗나갔지.”
그것도 단 하루 만에.
에단 폐하께서 그녀의 방에서 첫날밤을 보냈으니.
“어쩌면 그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 로엘 님의 이러한 운명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에단의 마음을 사로잡는 바로 그 일을 그녀는 이곳에 온 첫날에 이루어 내었으니. 그걸, 누가 당해 내겠는가.
“그래. 그건 정말 작은 시작일 뿐이었어.”
카이로스 성 전체를 놀라게 한 그다음 날, 그녀는 대놓고 아리스를 물먹였고, 이어 몰브의 말도 안 되는 암살 계획마저 보란 듯 엎어 버렸다.
“그러고는 바로, 아무도 찾지 않는 나에게로 오셨지.”
로엘을 바라보는 수아의 입가에 미소가 더 진해졌다. 이렇게 행렬이 눈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발코니에 나와 그들을 기다린지라, 제법 추울 텐데도 수아는 꼼짝 않고 로엘을 기다렸다. 그러고는 그녀가 드디어 환호하는 백성들 사이에서 금의환향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수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렇게 수아 님께로 오셨지요.”
그 모습을 전부 베티와 쥰이 곁에서 지켜보았다. 잠시 들어가 쉬시라고, 그녀들이 보고 있으니 바로 알려 드리겠다고 말해도 수아는 한사코 괜찮다며 이리 오랜 시간을 발을 동동 구르며 로엘을 기다렸다.
그녀의 언 몸을 녹여 주기 위해 두꺼운 숄과 담요, 따뜻한 차를 내어 주며 쥰과 베티는 생각했다.
웬만한 연인, 아니 리암이 전장에 나갔어도 이 정도는 아닐 거라고.
그만큼 수아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라고.
“나를 찾아만 오셨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지.”
그러니, 참 많이 저분께 감사하다.
그녀들의 아가씨를, 다시금 이렇게 힘찬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그리고, 다시 리암을 만나게 해 주었어.”
수아는 많은 인파들 속에서도, 그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도 정확히 리암을 알아보았다. 이제는 한 부대의 부대장급으로 올라온 만큼 프래카 내에서의 입지도 단단해졌다. 거기엔 리암의 노력이 참 많이 들어갔다는 걸 알지만, 로엘의 신뢰도 한몫했음을 너무도 잘 안다.
“하나부터 열까지, 고맙지 않은 것이 없어, 나는.”
리암의 올라간 직급은 그에게 자유를 주었고, 그 자유는 수아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그건 곧 수아에게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결국 그 용기가 수아를 움직이고, 켈트를 움직였으니 그녀의 지금 이 꽃길에 켈트가 힘을 얹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거다.
“로엘 님도 아셔야 할 텐데. 수아 님이 로엘 님이 안 계시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했는지.”
원정을 떠나자마자, 켈트와 수아의 작업은 시작되었다.
당연히 모든 것은 미리 수아를 통해 에단의 허락을 받은 사안들. 수아의 아버지는 원로들을 만나 로엘의 칼라리엔 임명에 힘을 실었고, 수아는 후궁에 있는 많은 여인들을 하나하나 상대해 가며 성밖으로 내보냈다.
그 과정에서 수아는 듣지 않아도 될 짜증과 성질들을 다 받아 내야 했고, 켈트 사비를 털면서까지 그들 가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물론 에단에게 그 보상을 원한다면 기꺼이 그 이상으도 해 줄 수 있겠지만 켈트는 그에 대해 요구할 마음이 없다.
그보다는 칼라리엔을 옹립한 가문으로 남아 그 혜택을 취하는 편히 훨씬 나을 테니. 수아가 칼라리엔에서 멀어지는 것을 인정하고, 그를 포기한 순간 그들은 재빠르게 계산을 마친 셈이다.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아무도 그 뒤를 봐주지 않았던 이방의 공주님에게 가문의 운명을 걸면서.
물론, 수아야 그런 복잡한 가문의 이익 따위에 움직인 건 절대로 아니지만.
“어디 많이만 하셨나요. 엄청 열심히 하셨지.”
칼라리엔이 새롭게 생긴다고 한들, 황제에게 다른 여인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수아는 그마저도 발 벗고 나서 전부 해결한 셈이다.
오로지 로엘을 위해. 조금이라도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이 가상한 마음과 생각이 에단도 아닌 수아의 머리에서 먼저 나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고도 놀랄 일이다. 세상 어떤 아카시스가 다른 아카시스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까.
“사방팔방 뛰어다니시면서 사람 만나시고, 돈도 엄청 쓰시고…….”
아마. 지금 이렇게 울려 퍼지는 칼라리엔을 외치는 연호도 켈트가의 돈을 받은 세작들이 적절히 운을 띄워 이렇게 사방팔방 소리가 번질 수 있었던 거다.
이리 백성들로부터 대놓고 칼라리엔이라 인정을 받는 그녀를 그 누가 감히 반대를 하겠는가.
말 그대로 임명식만 거치지 않았지, 이미 로엘은 칼라리엔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진짜 로엘 님이 꼭 아셔야 하는데.”
그 공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이리 성안에서만 틀어박히셔서 바라만 보고 있으시니 쥰은 그저 답답하였다. 살짝 불만스러운 쥰의 볼멘소리에도, 수아는 그저 로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실 거야. 저분이라면.”
점점 다가오는 그녀를 보아하니, 수아는 정말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매일같이 무사하기를 정말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혹여나 저분이 잘못되면 어쩌나,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몇 번을 가슴을 쓸어내렸는가. 리암이 편지라도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수아가 직접 달려 나갔을지도 모른다.
“모르셔도 상관없고.”
그러니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수아는 정말 다 되었다.
많은 인파를 뚫고 겨우 성문에 다다른 그녀가 드디어 성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자연히 발코니에 있던 수아의 몸도 좀 더 밖으로 나갔다. 조금만 기다리면 직접 만날 수 있을 텐데도 조금이라도 로엘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거였다.
“아.”
그런데 순간 수아의 입에서 짧은, 놀란 목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로엘이 고개를 들어 멀고도 높은 곳에 있는 수아의 눈과 딱 마주친 거다.
“로엘 님……!”
그런 수아를 보며 손까지 번쩍 들어 인사해 주는 로엘에 수아는 감동에 눈물을 그렁거렸다.
“아니……. 수아 님. 이 정도면 사랑이에요, 진짜.”
그 모습이 너무도 짝사랑하는 남자아이를 몰래 보다 눈이 마주친 여자아이의 모습이라, 베티와 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고 말았다.
“어서 저희도 내려가요, 수아 님.”
“그래요, 수아 님. 수아 님이 그토록 기다리시던 로엘 님이 오셨다구요.”
끝까지 로엘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얼른 가자.”
그녀들의 말대로 드디어 로엘이 돌아왔다.
그녀 없는 카이로스가 이렇게 외로운 줄 수아 역시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가 오기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외로움은 느껴 본 적이 없는데, 하루 종일 같이 다과할 사람도,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지루한 일인지 카이로스 성에 와서 처음 느끼고 말았다.
딱, 언니가 자신만 두고 멀리 여행 가 버린 어린 동생의 마음이랄까. 그러니 이리 그녀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쿵 뛰는 거겠지.
당장 내일은 어떤 다과를 준비해 로엘 님에게 가나, 많이 피곤하실 텐데 무얼 드리면 좋을까 하는 즐거운 생각만이 가득하다.
“얼른 가자!”
만면에 미소를 가득히 하며 수아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녀의 로엘을 만나러 간다.
***
“카이로스의 영광.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수백에 이르는 목소리가 한데 모여, 황금의 성을 울렸다.
“카이로스의 축복. 프란시아님의 뵙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황궁의 사람들은 드디어 2개월 만에 돌아오신 그들의 주인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북방 원정의 대승을 경하드립니다. 모든 영광이 오로지 황제 폐하께 있기를.”
열과 행을 맞추며, 빼곡히 황궁의 중앙 홀에 모인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에단과 로엘을 반겼다. 정확히 90도로 몸을 숙인 이 칼 같은 환대에 로엘은 이건 보나마나 사라의 작품이라 생각했다.
“모든 영광이 오로지 황제 폐하께 있기를.”
당연히 사라 역시 가장 앞줄, 한가운데에서 그들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깊이 허리를 숙이느라 눈썹조차 보이지 않은, 그 머리 희끗한 중년 부인은 이제 허리를 굽히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왠지 그녀가 없는 동안 더 야윈 거 같아, 로엘은 마음이 아팠다. 이 우직한 여인은 아무 말 않겠다만, 어떻게 힘들지 않았으랴.
이 커다란 성을 주인도 없이, 홀로 가꾸어야 하는 것을. 로엘은 따로 점검하지 않아도, 그녀가 너무도 완벽히 황궁 살림을 해 왔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사라에게 일임한다고요?’
‘어. 최고 시녀장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
‘게다가, 그 누구보다도 잘할 테니까요. 저는 찬성이에요, 폐하.’
그래서 에단이 사라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였을 때 고민 않고 그의 선택을 지지했다.
원래대로라고 한다면야 당연히 에단과 로엘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수아가 가져가는 것이 맞다. 그녀는 엄연히 이 황궁의 어른인 아카시스이므로.
‘의외네. 수아 켈트에게 맡기라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바본 줄 알아요. 당신의 그 숨은 뜻도 못 알아보게.’
하지만 수아는 아카시스 이전에 켈트가 아닌가.
켈트가 지금은 로엘의 힘이 되어 주고, 그의 충신이 되었다 한들 그래도 그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는 스타일이 아니다. 특히나 이런 막강한 권력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수아를 믿는 것과는 별개로, 켈트가의 영애께서는 이 황궁의 살림을 담당할 수 없는 거다.
켈트가 입장에서야 조금 서운할 수 있겠다만.
“모든 영광이 오로지 황제 폐하께 있기를.”
하지만 드보아 켈트는 훨씬 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
어심을 파악하고 군소리 없이 에단의 결정에 따랐다. 조금의 서운함도 내색하지 않은 채.
“하늘 같으신 폐하와 아카시스 님을 뵙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폐하의 밀명을 받아, 이렇게 에단이 돌아오기 전에, 그녀를 칼라리엔으로 만들기 위한 참 많은 준비들을 해 두었다.
로엘은 잔뜩 상기된 얼굴에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자신을 반기는 수아가 반가워 바로 달려가 그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수아는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라, 보는 눈이 여럿이었는데도 지금 수아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로엘 님.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기어코 한 방울 뚝 떨어지더니, 수아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로엘도 당황할 정도로 과한 환대에 에단은 뒤에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아카시스라면, 로엘이 아닌 자신에게 먼저 달려오는 게 맞을 텐데 수아의 눈에 지금 에단 따위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황제에 대한 엄청난 무례일 거다.
“마, 마마!”
그러니 뒤에 있던 베티와 쥰이 저리 사색이 되는 거겠지. 버젓이 황제를 버려 두고 다른 이를 먼저 챙기고 있으니, 이는 황제를 무시한 거나 진배없다. 그도 이리 대놓고 하는 수아의 행동에 어이가 없으니, 아마 주변 사람들은 더 기함을 토하고 있을 거다.
“로엘 님……. 정말 너무 걱정했습니다. 이렇게 돌아와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그런데 이 상황을 어쩌지 못할 만큼 지금의 수아는 감격에 겨워 어쩌할 줄을 몰라 했다. 잠시 놀랐던 로엘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꼭 껴안은 채로 놓아주지 않은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쓸어 주었다.
“수아 님.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왜 그렇게 운이 좋았나 했더니만, 이리 그녀를 걱정해 주는 수아가 있어서 그랬나 보다. 로엘은 자신을 위해 울어 주는 수아가 마냥 고마웠다.
세상에 어느 누가 그녀를 이리 눈물로 걱정하고 반겨줄까 싶다.
“수아 님.”
좀처럼 떨어지지 않은 두 사람 대신, 사라가 먼저 두 사람을 갈라 주었다. 길게 말하지도 않은 채, 낮게 수아를 부르는 사라의 한마디는 그 어떠한 명령보다도 확실했다.
그제야 수아는 조금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눈물 자국을 대충 수습한 후, 에단을 향해 몸을 돌리곤 허리를 깊이 굽혔다.
“아카시스 수아 켈트. 하늘 같으신 폐하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로엘과는 확연히 다른, 너무도 담백하기 그지없는 그 감정 없는 한마디는 도리어 에단을 피식 웃게 만들었다.
정말 안 하느니만 못하는 축하 인사였다. 오히려 듣는 로엘이 민망할 정도랄까.
누가 보아도, 수아는 에단을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
“사라. 황궁이 비어 있는 동안 고생이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남들 앞에서 존대를 하지 말라고 했건만, 저 습관은 도통 고쳐지질 않아 사라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칼라리엔이 되어서도 고쳐지지 않을 거다. 이 지나치게 사람 좋으신 분은.
사라는 로엘의 치하에 말없이 그저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일부러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그녀가 소리 높여 말했다는 것을 모를 만큼 사라는 눈치없는 사람이 아니다.
로엘 역시 그런 자신의 배려를 알고도 이리 말없이 묵묵히 감사를 받을 사라라는 것을 알고, 더더욱 그러한 거였고.
수아가 수아답지 않게, 유난스럽게 로엘을 반겼다면 사라는 조용히 로엘의 귀환을 반겼다.
평소의 사라답지 않게, 꽤 지그시 오랫동안 로엘과 눈을 맞추자 로엘 역시 그에 응하여 미소를 지었다.
모든 감정과 생각을 꽁꽁 싸맨 채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은 이분께서 웬일로 대놓고 그녀에 대한 걱정과 감사를 하고 있는 거였으니까.
사라에겐, 이 무언의 눈인사가 최선임을 알기에, 그리고 그 최선에 담긴 마음이 너무도 진심인 것을 알기에 로엘 역시 그저 감사했다.
사라의 로엘에 대한 이유 없는 호의, 배려, 걱정. 로엘은 막연히 사라가 로엘 자신은 모르는 자신과의 인연이 있다고 추측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묻지 않았다.
맨 처음, 이곳 카이로스에 처음 왔을 때 딱 한 번 자신을 아냐고 물었던 그 답에 따라 그녀 역시 같은 마음이니.
사라가 말해 주고 싶을 때, 그때 들으면 된다고.
그녀에게 있어, 그녀가 몰랐던 그 과거는 사라와 그녀의 관계에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폐하. 말씀해 주신 대로 오늘 저녁에 원로회와 귀족들을 초청한 축하연이 준비되어 있으며, 조정회의는 내일 아침으로 통보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인사가 끝나자, 이번엔 잠자코 있던 제롬이 입을 열었다.
“백성들의 축제도 오늘부터 사흘간 진행될 예정이며 원정 부대에 대한 사례품도 이번 달 내로 지급할 예정입니다. 하명하신 대로 전부 황실 예산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전쟁 이후 참전했던 백성들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일은 늘상 있던 거라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렇게 황실의 금고를 풀어서 나눠 주는 것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이번은 나라 전체가 움직이는 대거의 원정이었던 만큼 참전한 병사들의 수가 어마어마할 텐데도 이렇게 선뜻 그는 황실의 재고를 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쓸데없는 귀족들의 동의를 받지 않기 위해서겠지. 황실 금고는 오롯이 황제의 소유이므로 그가 얼만큼을 쓰든 원로들 역시 찍소리도 하지 못할 테니.
“토르티아의 편입 건에 대해서도 조치를 취해 놨습니다. 현재로서는 영지 번호가 아닌 속국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관제와 제도 측면의 적용에 다소 시간이 걸려 보입니다. 이 부분은 추후 아카시스님과 좀 더 논의하여 보고드리겠습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제롬이 일 처리 하나는 확실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제롬 먼저 카이로스로 들여보낸 일은 역시나 잘한 선택이었다.
“또 다른 건.”
여기까진 로엘도 전부 알고 있던 거라 로엘 역시 정확한 제롬의 일 처리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녀가 모르는 하나가 더 있는 듯했다.
“이미 사라 시녀장을 통해 준비 중에 있어 예정대로 진행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로엘만 모를 뿐 사라도, 수아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로엘 님의 칼라리엔 취임식은 다음 주 월요일. 차질없이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젠 로엘도 알아 버린 바로 그 나머지 하나.
바로 카이로스 칼라리엔의, 로엘의 취임식이었다.
***
“잠깐만요. 이건 너무 급작스럽잖아요!”
카이로스 황궁 사람들의 요란스런 환대 인사를 끝내고 난 후, 에단과 로엘은 자연히 에단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원래대로라면 그래도 일단은 그녀의 후궁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에단이 던져 놓은 폭탄에 로엘은 무작정 그를 따라왔다.
“이렇게 갑작스런 취임식이라니요! 이건 너무……!”
막무가내잖아, 라고 말하려다 차마 그 말까진 뱉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건 그가 그녀를 위해 준비해 온 일이므로.
다만 로엘은 그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도리어 다른 이들의 화를 살까, 그게 걱정이었다.
“계속해. 왜 하다 말아.”
에단은 그녀가 뭐라고 떠들든, 하나둘 자신의 몸에 걸치고 있는 무거운 장비들을 벗었다. 그도 이제야 오랜 원정 끝에 자신의 집에 왔다는 걸 몸으로 실감하는지, 쌓여 있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거 같았다. 그도 그러한데 눈앞의 이 작은 여인은 아직도 이리 기운이 쌩쌩한 것을 보면, 확실히 웬만한 체력은 아닌 거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잖아요. 원로들의 허락도 받아야 하고…….”
“허락? 누구 마음대로 허락이야.”
그녀가 뭐라 하던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던 그가 순간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가 쓴 단어가 심히 귀에 거슬렸다.
그가 그의 칼라리엔을 선택하겠다는데, 누구의 허락이 필요하단 말인가.
사사건건 그의 일에 도움 안 되고, 트집만 잡는 그들에게 그의 반려까지 트집 잡힐 마음은 정말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칼라리엔을 선정하는 데 왜 원로의 만장일치가 필요한지조차 에단은 심히 불만족스러운 터였다.
로엘은 차갑게 대꾸하는 그를 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라고 어떻게 그의 마음을 모를까.
그는 그저, 그녀가 다른 이들의 반대와 거절에 상처 입을까 미리 걱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그의 생각만큼이나 약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허락이 아니라, 인정을 받고 싶은 거예요. 저는.”
로엘은 아까부터 하나둘 벗기 시작해 이제는 얇은 상의 하나 입고 있는 그에게 다가섰다.
가까이에서 올려다보니, 그의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당신의 옆자리에 서는 사람으로서 부족하지 않다고. 당신뿐 아니라, 당신의 사람들 모두에게.”
원정 내내 제대로 잠 한숨 못 잤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다짜고짜 그를 붙잡다니. 이제 그만 쉬어야 할 사람을 데리고 자신이 너무 그녀의 투정만 부렸단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목욕물을 받아 놓았다는 사라의 말을 함께 들어, 그 대신 톡톡 그의 단추를 풀어 주며 말을 이었다.
“폐하. 나는 당신의 힘만으로 당신의 곁에 서고 싶진 않아요. 오롯이 제 힘과 능력으로, 노력으로, 당당히 이 나라의 칼라리엔이 되고 싶어요.”
로엘이 에단의 마음을 알 듯 에단 역시 로엘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안다. 작은 손으로 얇은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주는 이 작은 여인은, 오히려 그를 걱정하고 있는 거였다.
혹여나, 그의 강압적인 칼라리엔 선정이 다른 이들에게 괜히 잘못 보일까 봐. 그렇게 그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 봐. 그래서 듣지 않아도 될 쓴소리를 들을까 봐.
에단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그야말로, 그녀 생각만큼 그리 약한 사람이 아닌데.
도대체 이 여자는 무엇이 그리 조심스러운지.
“로엘.”
“네. 폐하.”
에단이 로엘을 부르자, 그녀의 눈이 다시금 그를 향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마지막 하나의 단추까지 풀자, 그의 상처 없이 깨끗한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오랜 훈련으로 단단히 근육진 그의 상체는 여전히 그 흔한 흉터 하나가 없었다.
에단은 망설임 없이,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두고, 그녀의 허리를 안아 당겼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로엘은 자연히 그의 맨가슴에 손을 올렸다.
두근두근.
근육진 가슴 위로 그의 심장 뛰는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디 심장 소리뿐일까. 그의 진한 체취. 뜨거운 숨결. 따뜻한 체온까지 전부 다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 넓은 가슴에 안겨, 쾌감의 눈물을 흘린 것이 어디 한두 번일까. 이제는 부끄러워할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도, 여전히 로엘은 눈앞의 훤히 드러난 그의 가슴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참 일관되기도 한, 이 소녀 같은 반응에 에단은 피식 웃고 말았다.
되게 진지한 대화 중이었는데도, 이 귀여운 여인은 할 것은 다 한다.
에단은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는 팔에 좀 더 힘주어 그녀를 더 가까이 밀착시켰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닿게 했다.
“너는 이미 네 힘과 능력으로, 이렇게 내 곁에 있어.”
그녀가 사랑하는 기분 좋은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리고, 그녀만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황금빛의 눈에 그녀가 오롯이 담겼다. 그녀의 마음을 순식간에 차분히 가라앉히는 이 남자의 모든 것이 그녀의 걱정을 단번에 괜찮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토닥여 주었다.
“그걸 모든 카이로스가 알아.”
그들이 직접 보고 들었으므로.
그녀가 어떻게 카이로스에 오고, 어떻게 니블을 밝혀내 몰브를 처단했으며, 어떻게 에토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지. 어떻게 카이로스의 프란시아가 되었으며, 그 프란시아로서 이번 전쟁을 어떻게 이끌었는지도. 그 전쟁 속에서 무얼 보여 주었고, 무슨 기적을 만들었으며, 어떤 승리를 가져왔는지까지.
그래. 그 모든 그녀의 카이로스 일생을, 모든 카이로스가 함께 공유했다.
“그러니 어느 누가 내 여인을 감히 부정할까.”
이토록 열심히. 이토록 멋있게 그 많은 것들을 해 왔는 것을.
아무리 꼬장꼬장한 카이로스의 원로 대신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못할 거다. 그건 에단이 절대 군주여서도 아니요, 그녀가 그러한 그의 사랑을 받기 때문도 아니다. 오롯이, 그녀가 해 온 그 모든 것들 때문이다.
“결정된 것이 없는게 아니라, 결정할 것이 없는 거야. 이미 결정되어 버렸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카이로스에 의해. 로엘 네아레스를. 카이로스의 칼라리엔으로.”
미소를 머금은 그를 따라, 로엘의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눈가에 촉촉한 눈물도 함께.
에단이 덤덤히 말하는 그 모든 말들이 그녀를 얼마나 감동시키는지, 이 남자는 알까. 로엘은 그의 목에 올린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당겼다.
“프러포즈를 치사하게 백성으로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게 제일 효과적일 거 같아서.”
에단은 그런 그녀에게 기꺼이 몸을 숙여 주었다.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로의 입술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얼른 익숙한 그 온기를 달라 재촉했다.
에단은 자연스레 그녀의 머리 뒤를 받쳐 주며, 좀 더 그녀의 허리를 당기며 상체를 숙였다.
“자. 그럼 대답을 들어 볼까.”
그러고는, 참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바로 그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
이 마음과 이 진심을 다해. 진솔하면서도, 간절하게. 그렇게 사랑을 담아.
“로엘 네아레스. 나의 칼라리엔이 되어 주겠어?”
절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충동적으로 할 마음은 정말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물론이에요. 폐하.”
그러나 이렇게 예쁘게 미소 지어 주는 그녀의 대답이 있는데, 그깟 상황과 계획이 무엇이 중요할까. 로엘은 그의 양 뺨을 작은 손으로 감싸며, 기꺼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올려 가볍게 키스했다.
“너무도 영광스럽게, 나의 폐하. 당신의 칼라리엔이 되겠나이다.”
예쁜 미소와 맑은 눈물과 함께 그녀는 그가 원하던, 바로 그 대답을 정확히 해 주었다.
‘저는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참 어렵게도, 듣고야 만 대답이 아닌가.
처음 만나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절대 그의 여자가 되지 않겠다던 이 여인을, 그는 그 순간부터 미치도록 원해 왔는지도 모른다.
‘저는 칼라리엔이 되지 않아요.’
그렇게 돌고 돌아, 참 많은 일을 겪고 이렇게 다시금 서로를 마주하는 지금.
그래. 드디어 그는 그녀로부터 원하는 답을 들었다.
“황제에게 허언은 곧 죽음이야.”
“얼마든지. 저는 그 어떠한 허언도 하지 않았으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당돌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그는 또 한 번 웃었다.
이 겁 없는 태도는 여전했다. 아마 그녀는 그의 곁에서 평생 이러하겠지.
“그렇다면, 믿어야겠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평생 이렇게, 그를 웃게 만들겠지. 서로가 서로에게 속삭이는 그 간지러운 대화를 이제 그만하고, 그는 깊게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 깊은 입맞춤에 로엘은 그만 눈을 감고 그가 주는 쾌감에 몸을 맡겼다.
‘카이로스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의 이름으로 토르티아의 왕녀, 로엘 네아레스를 나의 프란시아로 임명한다.’
처음 만난 그 순간, 그녀를 프란시아로 임명했던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상상했을까. 로엘은 아까부터 계속 생각나 버리는 그와의 첫 만남에 미소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정말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그녀가 카이로스의 칼라리엔이라니.
그저 이 남자를 만나게 해 준, 모든 운명에 감사할 따름이다.
“하아…… 사랑해요, 에단.”
뜨거운 열기 속에 새어 나온 그녀의 진심 어린 사랑 고백에 그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 말. 역시 듣기 위해, 그가 얼마나 애가 닳았던가.
“사랑해. 로엘.”
서로에게 전해지는 따뜻함이 뜨거움으로 번져 가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카이로스의 황제로서, 그리고 카이로스의 칼라리엔으로서 서로를 평생 사랑하겠노라고, 그렇게 평생 서로의 곁에 함께하겠노라 맹세하며.
***
화려한 샹들리에는 눈이 부시게 반짝이고, 그 반짝임에 해가 진 늦은 저녁임에도 홀 안은 대낮처럼 밝았다.
황제의 승전 파티는 황제께서 돌아오신 바로 그날 하는 법이라, 이리 에단과 로엘은 조금도 쉬지 못한 채 끌려 나오듯 나와 귀족들을 맞았다. 어쩜 다들 하나같이 기다렸다는 듯 꾸미고 나왔는지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전장에서 그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을 때 발 뻗고 편히 쉬어 저리 혈색 좋은 얼굴로 하하호호 웃을 수 있나 싶기도 하여, 조금은 아니꼬웠다.
물론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아 보았자, 그녀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이 언제 전장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생사를 오갔냐는 듯, 이리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거짓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놈의 격식이라는 그 명목하에
“피곤해?”
“조금.”
요란스럽고 사치스러운 그곳에서 잠시 나와 발코니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뒤에서부터 이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반.”
그녀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이반은 이렇게 귀신같이 그녀의 곁으로 찾아와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그 옛날 타르타니에서도, 이 순간 카이로스에서도 변함없이. 이반은 들고 온 칵테일을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건넸다.
“피곤할 만하지. 오자마자 쉬게 해 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성대한 파티라니.”
“뭐 어쩌겠어. 그게 관례라며, 카이로스의.”
“그건 그렇지.”
“매우 쓸데없다.”
“하하. 이젠 그런 말 하시면 안 된다고. 대 카이로스 제국의 칼라리엔이 되실 몸인데.”
이반의 입에서 나온 그 낯선 단어에 로엘은 잠시 이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반에게도 그녀가 칼라리엔이 되는 게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나 보다.
“왜 그리 보실까. 마치 내가 잘못 말한 것처럼.”
“그냥. 이반까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그런가 보다 싶어서.”
“하하. 그게 뭐야.”
“몰라. 나한텐 그래. 너란 존재가.”
아무래도 그녀가 조금은 취한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공식석에선 부르지 않던 ‘이반’이란 호칭도 서슴없이 나오고, 이리 똑바로 쳐다보며 조금은 의미심장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면.
그 모든 것들이 그녀가 편안함을 느끼는 데 비롯되어 나오기에 이반 역시 편한 미소를 지으며 로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당연히 현실이지. 나의 형제가 그리 정했고, 이 나라가 그리 선택했는걸.”
“이반도?”
“응. 나도.”
이반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그녀가 칼라리엔이 되는 것.
그래. 어떻게 그가 반대라는 것을 할까.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가 칼라리엔이 되는 상상을 해 온 것을.
어린 날 함께 지내 왔던 그 시절에도, 이반은 생각했었다.
참,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는 여자라고.
그래서 자신에겐 참 많이 아까운 사람이라고.
“그래서 이리 제자리를 찾아갔나 보네.”
“응?”
로엘의 반문에 이반은 대답 없이 그저 미소만 지었다. 이리되어 보니, 정말 이 귀결은 그녀의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리 카이로스에 온 것도.
그렇게 그의 형제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그 형제와 함께 토르티아를 정복한 것도.
그리고 이리 멋지게, 칼라리엔이 되는 것도.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그런 운명일지 몰라.”
로엘은 이반이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얼 말하고 싶은지는 알 거 같았다. 조금의 씁쓸함은 지난날에 대한 것일 테고, 그러하면서도 잔뜩 든 이 다정함은 그저 그녀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거겠지.
이반은 언제나처럼 그녀를 걱정하고, 응원하고, 사랑해 주고 있는 것일 뿐.
그 진심은 언제나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음. 역시 아니야. 운명이라고 퉁 치기엔 너무 열심히 살았다.”
“맞아. 그건 그래.
나 진짜, 열심히 살았어.”
이반의 정정에 로엘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수긍했다. 이반의 말대로, 그녀의 이 험난한 여정이 단순히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운명이라고 하기엔 너무 억울했으므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여기까지 왔어.”
정말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다 걸고 쉬지 않고 달려와 지금 이곳에 이리 서 있다.
로엘은 밖을 바라보던 몸을 돌려, 발코니에 기댄 채 여전히 화려한 파티가 진행 중인 홀 안을 바라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카이로스의 모든 것이 그리도 낯설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는 하나하나 모든 것들이 익숙했다.
이 음악도. 이 드레스들도. 이 예법과 이 사람들, 전부 다.
자신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그들의 형식적인 미소에도, 이제는 그녀를 바깥 외부인이 아닌 내부 사람으로 대하는 마음이 드러났다.
뭐랄까, 토르티아 사람이 아닌 카이로스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해야 하나.
이 붉은 머리가 참 오랫동안 그녀를 이곳에서 괴롭힐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렇지도 않았던 거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저 멀리서도 이리 빛나고 있는 바로 저 사람 덕분.
“투덜거리면서도 진짜 은근히 할 건 다 한다니까.”
이반은 로엘의 시선이 자연히 에단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이반도 에단을 바라보니, 요란스럽게도 그의 승전을 축하하는 아첨꾼들 사이에서 그가 매우 짜증스러움을 꾹꾹 참은 채 있었다.
“당연하지. 태어날 때부터 교육을 받았다고. 우리 형제님은.”
“도대체 얼마큼 교육을 하면 저 성격에도 참아지는 거야.”
로엘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조금 지칠 법도 한데, 저걸 다 듣고 다 받아 주고 있었다. 그러니 저들이 그를 무서워하면서도 저렇게 끝없이 몰려드는 거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는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도 대단한 거였다. 그 정도로 내내 쉬지 못하고 일만 한 사람인데, 그 잠깐을 쉬게 해 주지 못하는 거 같아서 로엘은 속이 상했다.
정말 오늘 밤은 데려다 눕혀 놓고, 잠부터 재워야겠단 생각이 물씬 들었다.
“네아. 생각이 다 드러나잖아.”
이반은 찡그린 그녀의 이마를 엄지손가락으로 펴 주면서 말했다.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 보는 ‘네아’라는 호칭에 로엘은 아주 조금 놀랐다.
한때는 이반의 입에서 아카시스라든가, 로엘 님으로 불리는 게 어색했는데 이제는 ‘네아’가 어색해지다니.
이 역시도 이토록 쉽게 적응을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어쩔 수 없이 드는 씁쓸한 마음은 두 사람 모두에게 짧게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정말 다시는 부르지 못할 그 ‘네아’라는 호칭 아래 두 사람은 지나간 추억에 서로를 보며 웃었다.
이반은 손을 올려 로엘의 머리를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네아. 언제 이리 크셨나.”
여동생 시집보내는 오빠의 마음이 이러려나.
새삼스럽게, 로엘이 너무도 멀리 떠나가는 거 같아 이반의 마음도 조금 이상했다.
서운하면서도 기쁘고, 기쁘면서도 뿌듯하고 그런. 그런 여러 감정들이 한데 모여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자신이 쓰다듬을 때마다, 베시시 미소 지으며 좋아해 주는 그 예쁜 미소를 내려다보며 이반은 생각했다.
이 아이가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웃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럼 되었다고.
“네아.”
“응.”
“행복해?”
이반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낮게 울리고, 그의 따뜻한 미소가 점점 더 진하게 번져 갔다. 로엘은 살짝의 취기와 함께 자신을 바라봐 주는 저 따뜻한 시선에 마음이 뭉클했다.
그녀야말로 새삼스럽게 왜 이러나.
정말 이반을 떠난다는 듯이 그녀야말로 괜한 서운함이 몰려오려 했다.
다시는 못 볼 사이도 아니건만, 뭐 이리 애절해지는 건지.
“응. 행복해.”
그래서 더더욱 밝게 답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바 그대로.
“이반. 너는?”
그리고 물었다. 그는 어떠하냐고.
어린 날,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했던 이유는 각자의 아픔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픔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은 채,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위로했고, 그 위로 속에 서로를 의지했기에, 어린 날의 네아는 늘 생각했다.
반드시, 이반과 함께 행복해지겠노라고.
그게 어떠한 형태로든, 어디에서든, 언제 오든 간에 꼭 그렇게 둘 다 행복해질 거라고.
그래서 로엘은 행복하냐는 이반의 물음에,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다.
“너는 지금, 행복해?”
정말 너 역시 행복하냐고.
자신과 똑같은 질문을 해 오는 그녀에게 이반의 입꼬리가 좀 더 휘어졌다.
물어봐 주지 않았다면, 조금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응. 나도 행복해. 네아.”
그래서 이반 역시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을.
이반은 저 발코니 넘어 환히 빛나는 카이로스의 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루카스와 아론, 콜린들을 보았다. 어디로 사라져서 자신의 대타를 안 뛰냐고 속으로 욕하고 있을, 자신의 사랑하는 형제도 보았다.
그리고, 너무도 소중한 눈앞의 이 여인을 보았다.
그러자 이반의 입가에 저절로 환한 미소가 번져갔다.
“진짜 행복해. 나도.”
그렇게 이반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아. 이제 나도, 이곳에서도 행복하구나.
하고.
“그럼 됐어.”
그건 분명, 그의 형제에게도, 이 카이로스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선물 같은 그녀가 와 주었기 때문.
“응. 그럼 됐어.”
이반은 눈부시게 환히 웃는 로엘을 따라 환히 웃었다.
이제 곧 칼라리엔이 되실, 그의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 되어 준,
한때 그의 사랑이었고, 지금은 그의 소중한 동생인, 그만의 영원한 네아의 행복을 바라며.
***
“로엘 님.”
이반과의 휴식을 마치고, 다시 홀에 들어서자 이번엔 수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는 수아의 환대에 로엘 역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수아 님. 여기 계셨네요.”
“네.”
수아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차가운 물 한 잔을 건넸다. 모두의 손에 칵테일이 들려 있는데도 냉수를 준 것에 로엘의 입가에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많은 사람들과 한 잔씩 주고받느라, 그녀가 조금 취한 것을 알고 수아가 신경 써 준 거다.
그 말은 수아가 아까부터 계속 그녀를 보고 있었단 것이 되니, 어찌 고맙지 않을까. 수아는 그녀가 이반과 잠시간의 휴식 시간을 가질 동안, 이 물을 미리 준비해 그녀를 기다린 거다.
“잘 마실게요, 수아 님.”
구구절절 자신을 이리 신경 써 줘서 너무 고맙다는 긴말 대신, 짧은 감사의 인사 한마디로 그쳤지만, 수아는 마주쳐 오는 로엘의 눈빛만으로도 그 고마운 마음을 알 수 있어 이번에도 그저 미소만 지었다. 벌컥벌컥 단번에 한 잔을 디 비우는 걸 보니 제법 목이 말랐나 보다.
“한 잔 더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충분해요, 수아 님. 덕분에 메스꺼웠떤 기분이 훨씬 상쾌해졌어요.”
로엘은 씩씩하게 말하며 웃었다. 수아는 아까부터 소화가 잘 안 되는지 계속 가슴 부분을 가볍게 두드리는 로엘이 신경 쓰여 걱정스런 눈으로 되물었다.
“조금 술이 과하셨나 봐요. 들어가 쉬시겠어요?”
“아니에요, 수아 님. 그 정도로 마신 건 아닌데, 그냥 좀 피곤했나 봐요. 심한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로엘은 바로 걱정이 한가득이 되어 버린 수아의 반응에 도리에 작은 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수아의 모습이 마치 금지옥엽 어린 외동딸을 대하는 어머니 같아서 조금은 웃겼다. 우리가 이리 절절한 사이라는 걸 이 가식으로 점철된 사람들이 알면 어찌 생각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도 정 힘드시면 그만 쉬세요, 로엘 님.”
“네. 수아 님. 정 안 좋으면 그럴게요.”
그래서 더더욱 이런 수아와의 관계가 로엘은 너무도 소중했다.
수아는 입이 마르도록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하지만, 로엘은 도리어 그녀야말로 수아가 너무 고마웠다. 이 넓고 화려한 황금의 성에서 수아마저 없었더라면, 참 많이 외로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드니.
어렸을 적은 산속에 틀어박혀서, 성안에서는 동갑내기 사촌에게 지독하게 괴롭힘 당해, 소위 말하는 그 흔한 동성 친구 한 명이 평생 동안 없었는데 수아는 그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그녀 인생의 유일한 동성 친구가 되어 준 셈이다. 그러니 어찌 고맙지 않을까.
게다가 그 친구가 비단 마음뿐 아니라 참 다양한 방면에서 그녀를 도와주고 있으니, 더더욱 로엘은 고맙고 또 고마웠다. 로엘은 그녀의 괜찮다는 말에도 걱정을 온전히 거두지 않는 수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수아 님. 제가 없는 동안 참 많은 일을 해 주셨다고 들었어요. 제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몰라요.”
꼭 잡은 손을 통해 로엘의 온기가 수아에게로 전해지고, 수아는 그 따스함에 다시금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이분께서, 또다시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시려나 보다.
전혀 그럴 필요 없는 것을.
“지금 이 자리도, 그리고 백성들의 그 환호도. 후궁의 일도 전부 다 수아 님께서, 그리고 켈트가 애써 준 일인 것을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저는 드린 것이 없는데 너무도 많은 것을 받아 버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로엘 님께서 아시긴 하냐는 쥰의 볼멘소리에, 아실 거라 자신 있게 말했던 자신의 말이 역시나 맞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리 이분은 다 알아줄 줄 알았다. 알아주지 않아도 되는데도 말이다.
수아는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채, 조금 촉촉해진 로엘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수아 역시 로엘의 작은 손을 마주 잡아 가슴께로 올렸다.
모든 것은 그녀 스스로를 위해 한 것일 뿐인데, 뭐가 이리 고마우신 건지.
“로엘 님. 그건 제가 할 말이지요. 저는 너무도 많은 것을, 받아 버려 이리 작은 것들로는 감히 로엘 님께 보답을 드릴 수가 없어요. 저의 모든 것을 당신을 위해 아낌없이 바칠 수 있고, 그 모든 것들은 오로지 저를 위한 일이랍니다.”
이 넘치는 고마움과 이 절절한 마음을 어떻게 말 따위로 전할 수 있을까.
수아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로엘을 위하는 마음이 이토록 넘쳐흐르는 것을.
‘수아. 그게 무슨 마음인 줄 알아?’
‘음. 사랑?’
“하하. 그럼 내가 너무 질투하게 되지.”
수아는 리암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여느 때처럼 리암의 품에서 한창 로엘의 자랑을 늘어놓는데 리암이 그런 수아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언제나처럼 그녀를 향해 지어 주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는 깨닫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 마음의 ‘정체’를 알려 주며.
‘뭐 일종의 사랑이라 할 수도 있지. 근데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 있어.’
‘우정? 그것만으로는 뭔가 많이 부족한데…… 도대체, 그게 뭔데?’
‘충성심.’
그 정체를 듣는 순간, 그녀의 가슴에 내리 혔다.
그래. 리암의 말이 맞다.
이건, 로엘에 대한 그녀의 진심 어린 충성이다.
‘지키고 싶은, 나의 주군. 기꺼이 목숨을 바칠, 나의 왕. 수아에게 로엘 님은 이미 그런 존재인 거야.”
일생의 단 한 번 만나게 될, 바로 그러한 주군.
태어나 보니, 내 조국의 황제라서 받치는 그런 충성심이 아닌, 내 마음으로, 내 진심을 다해 저절로 우러나오는 그 뜨거운 존경심.
‘그러니, 이토록 나날이 뜨거워지는 거지. 나의 아가씨께서.’
수아는 리암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으며, 부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걸 부인할 이유 따위가 없었으니.
다른 귀족이나 장군이 들었으면, 아마 에단 황제 폐하에 대한 크나큰 불경이라 비난할지도 모른다. 비록 그 상대가 에단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이 나라의 프란시아일지라도, 엄연히 모든 이의 주군은 폐하가 되셔야 하니.
근데, 그런 고리타분한 말 따위가 수아의 마음을 바꿀 리 없다.
수아 켈트는, 단 한 순간도 에단 카이로스에게 이토록 뜨거워 본 적이 없으므로.
‘인사드리렴. 황태자 전하시다.’
’켈트가의 수아. 대 카이로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에게 에단은 그저 높디높은 곳에 홀로 고고히 빛나고 있는, 황금의 조각상 같은 존재.
백성들처럼 맹목적으로 신으로 떠받들기엔 그들보단 가까이 있었고, 그렇다고 평범한 인간으로 대하기엔 너무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에단이 카이로스의 적자로 태어나는 순간 황제의 재목으로 자랐듯이, 켈트가의 유일한 영애로 태어난 순간 수아 역시 황후의 재목으로 자랐다. 그런 그녀에게 에단 카이로스는 그녀의 인생을 멋대로 결정지어 버린, 참 미운 사람.
그 사람에게 그 뜨거움이 생길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수아 켈트에게 에단 카이로스는 차디찬 황금 같은 존재다.
‘안녕하세요. 그러지 않아도 찾아뵈려 했는데 이렇게 만나 뵙네요. 토르티아 제1왕녀, 로엘 네아레스라고 합니다.’
‘차 한잔해요, 수아 님.’
그런데 이분은 어떠한가. 죽어 가던, 아니 이미 죽어 버려 아무도 뒤돌아봐 주지 않은 그녀에게 달려와 먼전 손을 내민 분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분이 그녀의 ‘빛’이 아닐 수 있나.
처음부터, 수아 켈트의 진정한 주군은 눈 앞에 있는 이 아름다운 분 뿐이다.
“로엘 님.”
나를 구원하여 주신, 나의 빛. 나의 주군. 나의 왕.
수아는 기꺼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켈트가의 수아 켈트. 열과 성을 다해, 이 한 목숨을 바쳐 대 제국 카이로스의 어머니. 칼라리엔 로엘 네아레스 마마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수아의 행동에 소란스러웠던 회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눈치를 보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런 수아와 로엘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런 두 사람의 곁에 제일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켈트가의 수장이자 수아의 아버지인, 드보아 켈트와 그의 부인 마담 켈트였다.
“켈트가의 당주, 드보아 켈트. 켈트가 전원을 대표하여, 대 제국 카이로스의 어머니. 칼라리엔 로엘 네아레스 마마께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수아의 돌발 행동을 말리러 다가가나 했더만, 예상을 깨고 드보아는 기꺼이 수아의 뒤에서 수아와 같이 무릎을 꿇으며 로엘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정적이 흐르던 홀 안은 더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저 콧대 높은 드보아 켈트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켈트의 이름으로, 대 제국 카이로스의 어머니. 칼라리엔 로엘 네아레스 마마께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다른 켈트라고 어쩔 도리가 있을까. 아카시스 수아와 당주 내외가 무릎을 꿇고 충성 맹세를 한 이상, 켈트의 성을 가진 이들에게 다른 선택지 따윈 없었다. 하나같이 자신들의 부인과 남편을 데리고, 켈트의 이름 아래 로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세버가의 후계자, 루카스 세버. 세버가의 명예를 걸고, 대 제국 카이로스의 어머니. 칼라리엔 로엘 네아레스 마마를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그다음은 누구랴. 당연히, 나서기 좋아하는 우리의 루카스였다.
루카스 역시 에단이 내린 자신의 검을 기꺼이 앞으로 내밀며, 기사의 정도에 맞게 로엘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
“세버의 이름으로, 대 제국 카이로스의 어머니. 칼라리엔 로엘 네아레스 마마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어쩌랴. 거동이 불편하여 허울뿐인 루카스의 아버지 대신 실질적 당주를 하고 있던 대장군 루카스의 뒤로 줄줄이 카이로스의 군부를 장악하는 세버가 전원이 로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클래버 가의 장자, 아론 클래버. 클래버가의 이름을 걸고 대 제국 카이로스의 어머니. 칼라리엔 로엘 네아레스 마마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루카스가 했으니, 그다음은 당연히 아론. 루카스의 눈치에 못 이겨, 결국 아론 역시 기꺼이 로엘 앞에 자신의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 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라, 로엘은 꽤 의외라 생각했지만 그렇다 한들 아론의 진심을 모르지 않으니 그 역시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클래버가까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자, 결국 홀 안의 모든 귀족들이 그녀를 ‘칼라리엔’이라 지칭하며 그녀 앞에 충성을 맹세했다.
아 정말. 수아는 그녀에게 어디까지 해 주려는 건지.
로엘은 시키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일어난 이 일련의 상황들이 그저 감사하고 벅차 올라 눈물이 차올랐다.
“로엘 마마.”
그렇게 귀족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으면, 남은 이는 이제 황족뿐.
공작가로 따로 나가지 않은 유일한 황족 이반 역시, 기꺼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자 이반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대 제국 카이로스의 어머니, 칼라리엔 로엘 네아레스 마마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반마저 미소와 함께 그녀 앞에 머리를 숙이자, 이제는 정말 한 사람만이 남았다.
자연히 그녀의 눈이 그에게로 가자,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그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그녀에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어 주는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기꺼이, 허리를 굽혀 그녀의 손등 위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의 이름으로, 로엘 네아레스를 대 제국 카이로스의 칼라리엔에 명한다.”
에단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그렇게 카이로스 대 연회장의 홀을 가득 메우자,
“대 제국 카이로스의 어머니. 칼라리엔 로엘 네아레스 마마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다시금 모든 이들의 목소리가 한데 모였다.
결국 로엘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바로 그녀 역시 에단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 영광, 어찌 감히 이분 앞에서 그녀 홀로 받을까.
“칼라리엔 로엘 네아레스. 이 몸과 마음을 다해, 대 제국 카이로스와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녀의 모든 것은, 눈앞의 이 사람인 것을.
혹여, 이 충성 맹세가 황제의 권위에 누가 될까 싶어 바로 그 앞에 고개를 숙이는 이 현명한 여인은 누가 무어라 해도 최고의 황후감이다. 에단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그 누구보다도 당당한 그의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꺼이 무릎을 꿀은 그녀와 눈을 맞추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칼라리엔에게 사랑을 다해야겠군.”
이 엄청난 와중에도, 이런 농담이라니.
감동에 겨워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기어코 웃게 만드는, 이 눈앞의 남자를 그녀야 말로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건 기본이라구요. 폐하.”
그래. 이토록 서로가 서로에게 감동인 것을.
“저의 모든 사랑을 나의 빛, 나의 주군. 나의 모든 것인 당신께 드립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거다.
카이로스의 모든 귀족들의 충성 맹세 속에서도 서로만을 바라보며,
그렇게, 달이 빛나는 승리에 취한 밤. 로엘은 공식적인 ‘칼라리엔’이 되었다.
***
“로엘.”
너무도 익숙한, 기분 좋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왠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은 그 목소리가 너무도 좋아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데.
“여기서 죽을 셈이야?”
“아……!”
갑작스럽게 훅하고 멍했던 정신이 깨 버렸다.
길기도 했고, 일도 많았던. 그래서 감동과 기쁨에 겨워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던, 그 승전 연회가 끝나자 로엘은 녹초가 된 몸으로 방에 올라왔다. 딜리아가 미리 받아 놓은 따뜻한 물에서 잠시 몸의 피로를 푼다는 것이,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폐, 폐하……!”
“그렇게 고생해 놓고 여기서 죽어 버리면 곤란해.”
문제는 꽤 오래, 잠들어 있었다는 거지만.
목욕할 때만큼은 극구 시중을 거부하는 그녀라, 언제나처럼 그녀 홀로 들어가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민폐가 되었나 보다. 들어오지 말라는 그녀의 배려가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명령과도 같았으니,
그래서 시녀들은 한동안 나오지 않는 로엘이 걱정되어도,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 밖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걸, 기다리다 못한 에단이 친히 이곳까지 들어와서야 발견한 거고.
에단은 이 수증기 가득하고 더운 곳에 너무 오래 있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상태를 보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천지에 목욕하는 데 시중 드는 걸 불편해하는 황족은 이 여자가 유일할 거다.
“그러길래 웬 고집을 그리 부려. 처음부터 시중을 받았으면 되잖아.”
“저는 혼자 목욕하는 게 편…… 으왓!”
에단은 로엘의 투덜거림을 다 듣지도 않은 채, 바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입고 있던 로브의 소매가 젖는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다리 밑으로 손을 넣은 에단이 등을 받친 채 단번에 들어 올리자 로엘은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안았다.
“내, 내려 주세요……! 저 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
“가만있어. 그러다 떨어져.”
“아니. 그래도……!”
로엘은 순식간에 훤히 드러난 자신의 알몸에 민망함이 몰려왔다. 이렇게 바보같이 잠들어 버린 것도 시녀들에게 민망하고 미안해 죽겠는데, 그가 친히 욕실까지 들어와 안겨 나가다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내가 못 살아, 진짜.”
“그건 네가 아니라 내가 할 소리지.”
하다 하다 이런 사고까지 쳐서, 그를 걱정시키니.
어여쁜 그의 여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이 안 오니 그도 그 나름대로의 짜증 나고 걱정이 됐을 거란 생각이 짧게 지나갔다. 좀 오래 걸리나 보다가, 지나치게 길어져 이렇게 직접 찾아왔기에망정이지 아니면 진짜 거기서 실신이라도 할 뻔했다.
“그대로 계속 거기에 있었으면 진짜 죽을 수도 있지. 그렇다면 아주 역사에 길이 남을, 카이로스 욕실의 비극이 일어날 뻔한 거야.”
“어휴, 됐거든요!”
로엘은 일부러 자신을 놀리는 그를 흘기며 볼멘소리를 냈다. 이거 두고두고 놀려 먹게 생겼다.
그는 성큼성큼, 크기도 한 보폭으로 금세 그녀를 그녀의 방의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다 두었다. 눈치껏 다른 시녀들은 바로 두 사람만을 남겨 두고 사라졌고, 로엘은 침대에 내려지자마자 바로 준비된 타올로 몸을 가리기에 바빴다. 어찌나 재빠른지, 안겨 있을 때도 고양이처럼 잔뜩 웅크리더니만 지금은 날쌘 다람쥐처럼 순식간에 몸을 돌돌 말아 숨겼다.
여전히, 그녀는 이 환한 조명 아래에서 알몸이 되는 게 소녀처럼, 이리 부끄러운가 보다.
그 모습이 그의 눈엔 그저 귀여울 뿐이지만.
“이미 볼 만큼 봤고, 알 만큼 알잖아. 피차.”
“진짜, 좀……!”
로엘은 일부러 짓궂게 말하는 그가 얄미워, 또 한 번 그를 흘겼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신지 그녀의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그는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일 시녀들 얼굴을 어떻게 보냐구요. 내가 진짜, 못 살아. 어휴.”
“어떻게 보긴, 그냥 보는 거지. 내가 아카시스 로엘에게 정신 팔려 있는 걸, 어디 한두 번 들켰나.”
에단은 로엘을 안아 올리느라 자신도 다 젖어 버린 상의를 천천히 벗었다. 톡톡 하나씩 단추를 풀러 내려가며 젖은 머리를 옆으로 내리는 로엘을 그는 미소와 함께 내려다보았다.
“어이구. 우리 폐하께서 언제 그러셨나. 제 기억엔 없는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매우 서운하지, 내가.”
목소리에 살짝 억울함이 깃든 그의 말에 로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오늘따라 저 높으신 분께서 귀여운 공치사를 하고 싶으신가 보다.
그녀가 타월로 몸을 싸고, 젖은 머리를 터는 동안 그는 아무렇게 셔츠를 벗어 던져 버렸다. 환한 샹들리에 아래로 훤히 드러난, 그 근육진 상체 위로 그녀가 선물한 월계수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겉에 드러나지 않아도, 그 안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그 빛나는 황금 월계수에 로엘은 괜시리 뿌듯해 좀 더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고 계셨네요. 선물한 사람 감동하게.”
“부적인데 하고 있어야지. 준 사람에게 혼나고 싶지도 않고.”
“아주 좋은 자세예요.”
그와 눈을 맞추며 정말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 짓는 그녀에게 그 역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다가가 여전히 긴 머리를 털고 있는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억지로 건네받아 침대 밑으로 대충 떨어트리고선, 그녀의 몸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근데, 월계수를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닐 텐데.”
그는 돌돌 말린 타월로 숨어 버린, 그가 선물하고 그녀의 목에 늘상 걸려 있는 바로 그 목걸이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새하얀 피부 위로 반짝이는 황금의 월계수가 빛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한 승리의 월계수.
서로가 따로 맞추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맞아 버린 이 월계수 한 쌍은 이리 두 사람의 목에 늘상 걸려 있었다.
차를 마시고, 책을 보는 일상 생활 속에서도.
검을 휘두르는 전장 속에서도.
정무를 보는 업무 속에서도.
“아마 너를 품에 안을 때 빼고는 거의 안 빼는 거 같은데.”
진지하게 민망한 말을 참 잘도 하는 그 때문에, 로엘은 아까보다도 더 볼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혹여라도 그녀의 피부에 생채기가 날까 봐, 그는 물론 그녀의 몸에서도 일체의 모든 장신구를 그는 빼 버린다. 어디 좀 격하게 움직여야 안 빼지, 경험상 서로를 원하고 또 원해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역시나 서로를 위해 빼는 것이 맞았다.
“틀린 말 하는 거 아니잖아? 아카시스. 아니, 이제는 칼라리엔이라고 불러야 하나.”
에단은 자연스레, 그녀의 몸을 싸고 있던 타월의 매듭을 풀어 단번에 떨어트렸다. 바로 훤히 드러나는 그 새하얗고 뽀얀 가슴골 사이를 거쳐, 배꼽보다 살짝 위에 그가 준 황금의 월계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오로지 그가 준 목걸이 하나만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이 꽤나 야릇하여 에단은 자신의 몸이 빠르게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그냥 로엘이라 불러 주세요.”
그런 그에 맞추어, 그녀 역시 여느 때처럼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을 당겨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자연히 상체가 뒤로 넘어가고, 부드러운 시트 위로 맨등이 닿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좀 더 세게 그의 목을 안았다.
“그래. 로엘.”
“네. 에단.”
애초에, 이리 환한 곳에서 물에 젖어 침대에 올랐을 때부터 그는 꽤나 참고 있었던 터다. 그런 그를 이렇게 대놓고 유혹하는 그녀를 그가 마다할 리가 있나.
그는 바로 그녀의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무게를 살짝 실어 좀 더 깊이 그녀와의 입맞춤을 만끽했다.
“하아.”
작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오고 방금 목욕하여 뜨거워진 체온이 더 뜨겁게 그에게 온기를 전해 주었다. 이토록 달콤하고, 이토록 짜릿한데 어떻게 조금이라도 질릴 수가 있나. 그는 자신의 몸에 걸쳐진 나머지 거추장스러운 천들을 죄다 벗어 버리고, 그녀의 몸 위로 제대로 올라섰다.
“당신. 뜨거워.”
“이게 누구 때문인데.”
“나는 목욕 때문인 거 같아.”
“과연.”
서로의 입술이 아주 조금 떨어진 채로, 서로의 숨결이 고스란히 닿는 그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채 장난스러운 농을 주고받았다.
너 나 할 거 없이, 이미 둘 다 스위치가 눌린 상태였음에도 이런 허세와 여유라니. 간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친숙한 반말. 나신인 채로 몸을 겹치고 있음에도, 피하지 않은 시선. 서로가 서로를 갈망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 눈빛.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워지고 익숙해졌는지. 어떻게 서로에게 길들여졌는지,
따로 설명하고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 모든 일련의 말과 행동과 눈빛이 전부 다 보여 주고 있었다.
서로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짧은 키스를 몇 번 더 주고받은 후에야 그는 겨우 살짝 상체를 일으켜 그의 목에 걸린 월계수를 내려 두었다.
아까부터 짤랑 소리를 내며 그녀의 월계수와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듣기 좋으면서도 혹여 그녀의 피부에 상처를 낼까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그녀의 목에서도 그 월계수를 그만 빼려는데, 순간 잠시 멈칫했다.
“……왜 빤히 봐요.”
“보기가 좋아서.”
뭐랄까, 새삼스럽게 되게 아쉽다고 해야 하나.
아까부터, 목걸이 하나만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지금, 굉장히 야하거든. 나의 아름다운 부인께서.”
“어우. 뭐라는 거야. 진짜.”
그래서 아주 잠깐, 피곤한 그녀를 오늘 밤은 쉬게 해 주려던 그 마음이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
벌써 자정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카이로스의 밤은 식을 줄 몰랐다. 승리에 취해,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쁨에 다들 오늘 이 밤이 너무 아쉬운 양 그 누구 하나 쉽사리 잠들려 하지 않았다.
“다들 체력들도 좋아.”
“그러게 말이에요.”
그리고 그건 이반과 루카스 일행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귀족들과의 눈이 아프도록 화려한 파티가 끝나고 나서도, 그들은 그들대로 다 같이 모여 다시 한잔 술을 기울였다. 카이로스의 도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성루에 둘러앉아, 이반과 콜린. 루카스와 아론은 제대로 자리를 깔았다.
“굳이 여기서 이래야 해요? 아직 날도 추운데.”
아론의 볼멘소리가 짧게 들렸으나,
“아, 그게 낭만이지!”
루카스는 단번에 차단시켜 버렸다. 투덜대긴 하여도 아론 역시, 이런 피크닉 같은 그들만의 연회를 싫어하진 않았다.
그걸 뻔히 아는 루카스라, 이 예민한 소녀 같은 그의 죽마고우를 재주 있게 토닥거렸다.
“진짜 오랜만이네요. 황자님까지 이렇게 다 같이 여기에 모이는 건.”
“그러게. 내가 다시 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 아마 처음이지?”
“바쁜 것도 없었는데, 진짜 그러네요.”
“너만 안 바빴어, 너만.”
“아. 말이 그렇단 거지! 나도 겁나 바빴거든!!”
물론 그 토닥거림은 길게 가지 못하고 바로 다시 두 사람은 투닥거렸지만.
이반은 조금이라도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참 일관되기도 한 루카스와 아론을 보며 그저 웃었다.
치고받고 싸워도 서로를 위하는 게 훤히 보여, 두 사람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반 님. 저는 왜 끌어들이신 거예요. 저는 여기 멤버가 아니라구요.”
“앞으로 멤버 하라고 그런 거지.”
“제 의사는 중요치 않습니까.”
“전혀.”
이반의 즉답에 콜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스, 아론이야 어렸을 적부터 도성에서 이반과 함께한 자라 그렇다 치지만 콜린은 엄연히 이반을 철이 들고 나서 만나 깍듯이 모신 군신 관계로 지내 온 사람이다, 철저히 원칙을 지키는 콜린에게 이리 성루 바닥에 술 몇 병 들고와 아무렇지 않게 나누어 먹는 말도 안 되는 분위기는 적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거참. 아직도 되게 새침하게 구네. 이제 그만 좀 삐딱선 타지?”
“삐딱선이 아니라 황자님에 대한 예를 지키는 겁니다. 그리고 왜 먼저 말을 놓지?”
“억울하면 댁도 놓든가.”
“아니……!”
콜린은 대뜸 자신에게 말을 놓아 버리는 아론에게 한마디 하려다가, 그만 한숨을 삼켜 버렸다. 여기서 자신이 예의를 운운해 보았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으니.
루카스는 자신보다 먼저 선수를 치는 아론에게 피식 웃으며, 비어 있는 콜린의 술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맞아. 함께 생사를 오간 사이인데. 이제 그만 우리 사람합시다.”
“……누가 들으면 내가 반역이라도 꾀하는 줄 알겠네.”
“반쯤은 맞지 않나? 이반 님이 황좌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해 왔으니”
“이봐요……!”
“하하하! 딱 걸렸네, 딱 걸렸어.”
“아, 황자님!!”
조금도 거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 말해 버리는 루카스에 콜린은 사색이 되어 버렸는데 이반은 그 모습에 그냥 빵 터져 버렸다. 정말 이 정도로 투명한 대화라니. 카이로스 성에서, 그것도 황자를 상대로 이런 대화가 오가는 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 거다.
이반은 이 편함이 너무도 좋았다.
“이미 다 깠으니, 그만 내려놔. 이미 동지가 되어 버렸는데 뭘.”
“하아. 아무튼 여기는…….”
이래저래 다 이상하다는 말을 하려다, 콜린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이상하게 싫은 게 아니라, 이상하게 좋은 거였으므로.
콜린은 루카스가 따른 술을 단번에 입에 털어 넣으며, 그 역시 이제 편히 성루에 등을 기대앉았다.
솔직히, 부러 투덜거렸을 뿐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싫을 리 없지 않은가.
이반과 이들의 이 끈끈한 유대 관게를, 남몰래 아주 많이 동경하고 있었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받아 주는 이유가 뭡니까.”
“이제 그게 끝났으니까.”
이번에도 아론이 바로 답했다. 콜린은 그런 아론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가장 콜린을 배척하고 가장 경계하던 이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태도가 변한 게 많이 신기했다.
“직접 봤으니, 그렇게 경험했으니 이제는 제대로 알 거 아니야. 이 나라의 황제 폐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아론은 콜린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툭 던지듯 말했다.
너무도 뻔하디뻔한 사실을 말한다는 양.
그리고 콜린 네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양.
“소문 따위가 아무리 과장돼 보았자 그저 말일 뿐. 절대 그분을 그깟 언어가 온전히 전할 수 없어. 어떠한 과장이 붙든, 그리고 어떠한 상상을 하든 우리의 주군은 그 이상이야.”
그걸 눈앞에서 본다면, 그렇게 직접 경험하면 다른 사람 따위. 어찌 감히 눈에 들어오랴.
그 누구도, 그분이 앉으신 그 자리에 다른 이를 상정할 수 없다.
“……나의 주군은 여전히, 지금도 이반 황자님뿐이십니다.”
“콜린.”
“하지만, 그러함에도 이 나라의 황제는 에단 폐하시겠지.”
나무라는 이반의 말에, 아론이 바로 말을 이었다. 이번만큼은, 정확히 콜린의 눈을 바라보며.
그 흔들림 없는 눈에는 더 이상 적대심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단호함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결정된 그 답을 이제 그만 제대로 말하라는 무언의 경고.
콜린은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론이, 옳았다고.
“당연하잖아. 네 말대로 봐 버렸는걸.”
그래서 인정하고야 말았다.
이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로 나와 버린, 너무도 편한 그 반말에 피식 이반은 웃어 버리고야 말았다.
아. 정말. 우리 형제님.
이제는 콜린마저 가져 버리셨구나 하고.
“그럴 거면서 뻗대기는.”
참 얄밉게도 말하는 아론이 여전히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마음 가득이었지만, 이제는 콜린마저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 얄미운 인간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고, 또 얼마나 우직한 사람인지 또한 이제 콜린도 알게 되었으므로.
그리고 그런 이가 자신을 받아 주었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완전 멋진 카이로스의 천재 모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미친. 뭐야 그 쪽팔리는 명칭은.”
“우리 공식 명칭 아니었어?”
“야, 이……!”
“하하하! 진짜. 너네 하나도 안 변했구나. 하하!”
게다가 이리, 이반을 편히 웃게 만드는데 콜린이 각을 세울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원래 우리 폐하까지 딱 계셔야 하는데. 오늘은 뺏겨 버렸네. 로엘 님한테.”
“뭐 오늘뿐이겠어. 이제 계속이지.”
아론의 심드렁한 말에 루카스의 볼멘소리가 바로 나왔다. 진심으로 서운한 듯한 풀 죽은 모습에 아론은 피식 웃었다.
정말 애도 아니고.
누가 이 철없는 인간을 그 악명이 자자한 지옥의 개로 볼까.
“니가 애냐. 질투할 걸 질투해.”
“아, 그래도. 폐하가 있어야 완전체라고. 폐하가 제일 천재잖아.”
“……너 그 되도 않는 명칭 한 번만 더 얘기해 봐.”
정말 싫다는 듯이 잔뜩 찡그린 아론의 표정에도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툴툴거리는 루카스의 어깨를 이번엔 이반이 토닥여 주었다.
“로엘 님을 부르면 되지.”
“아? 맞아. 그러면 되네!”
이반의 아주 깔끔한 해결책에 루카스의 얼굴에 바로 화색이 돌았다.
이반의 말대로, 로엘이 함께하면 당연히 에단도 함께할 테고, 그럼 루카스가 원하는 바로 그 완전체가 될 테니.
“그러네. 나 로엘 님 좋아. 진짜 좋아.”
“그런 말은 폐하 앞에서 조심하고.”
“지금 폐하 상태라면, 한 대 맞을 수 있다고.”
폐하의 한 대는 꽤나 아플 테고.
루카스가 순수하게 로엘을 좋아한다는 거야, 아주 예전부터 그래 왔던 일이라 놀랍지도 않다. 정말 로엘이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던 바로 그 시절부터 이 짐승적인 직감이 있는 루카스는 바로 로엘에게 마음을 열었다.
워낙 그들 앞에서 헤헤거리고 다니는지라 자칫 오해할 수 있지만, 엄연히 이 나라의 군대를 통솔하는 대장군. 그가 진심으로 사람에게 호의를 보이고 마음을 여는 것은 여기 이 들 이외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선이 확실한 루카스는 이상하리만치 로엘을 따랐다.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그 여자를 좋아하는 거야?’
‘야. 그 여자가 뭐냐. 엄연히 아카시스님인데.’
‘토르티아의 공주라고. 뭘 믿고 그렇게 덮어놓고 따라. 너답지 않게.’
‘몰라. 그냥 좋아. 그냥, 이분이면 괜찮겠다 싶어. 폐하의 곁에 있는 것도.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어머니가 되는 것도’
그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루카스는 아주 오래전부터 로엘을 칼라리엔으로 보고 있었다. 어쩌면, 에단보다도 먼저.
아론은 흔들림 없는 투명한 눈으로 로엘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는 루카스를 보며 한숨 섞인 웃음을 뱉었다.
저 근거 없는 직감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구나 싶어서.
“네가 그렇게 열심히 피력하지 않아도, 여기 누구도 그분의 동석에 반대하지 않아.”
“이제 우리가 어떻게 반대할 수 있는 분도 아니고.”
아론과 콜린은 또 한 번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아마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로엘 네아레스를 떠올리고 있는 거겠지. 이반은 그렇게 로엘을 이야기하는 세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며 그저 미소 지었다.
로엘이, 참 많은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모시고 올까?”
“루카스.”
“이 멍청아. 가만히 있어!”
“와……. 생각보다 더 눈치가 없었네.”
루카스는 진짜로 갔다 오려는 듯이 몸을 반쯤 일으키자마자 세 사람으로부터 동시에 혼나 버렸다. 당연히 루카스도 반장난이었는데, 이렇게 열렬히 혼날 줄이야.
루카스야 말로 피식 웃고 말았다.
“이야……. 여기서 이런 반응이면, 폐하께 갔다간 아주 그냥 단번에 목이 날아갔겠네.”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콜린까지 가세해 이제는 잔소리 마왕인 아론이 둘이나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카스는 일어나다 만 몸을 자리를 털썩 앉히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남은 술잔의 술을 전부 다 마셨다.
“그렇다면야. 죽을 수는 없으니 오늘 밤은 여기 이 사람들끼리 아침까지!”
“아. 누구 마음대로.”
“이제 갈 겁니다.”
질색하는 아론과 콜린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호탕하게 웃는 루카스를 따라 이반도 연식 웃음을 터트렸다.
루카스의 말대로 오늘은 우리끼리.
이 달빛 밝은, 즐거운 승리의 밤.
카이로스의 승리를. 우리들의 우정을.
그리고 지금 뜨거운 밤을 보낼 사랑하는 두 사람의 행복을 모두가 한마음으로 빌었다.
***
“하아.”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로엘은 시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의도치 않게 목욕을 오래한 덕분에 열기가 제대로 식지도 않았는데, 그가 주는 열기까지 더해져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읏. 에단……!”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민감하게 그에게 반응했다. 그녀의 작은 몸을 온전히 가리는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위에 올라타 단번에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예고도 없이 들어차는 그 뜨거움에 로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이 턱 막히는 가득 참을 적응하려 노력했다.
“윽……!”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힘을 힘에 부치는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나 보다. 아파하는 그녀의 반응을 바로 알아채고, 그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덩달아 그 역시 이마를 찌푸렸다. 그가 어떠하건, 그녀를 아프게 하면서까지 그녀를 억지로 안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
“오늘은 그만할까?”
그래서 그녀의 젖은 머리를 넘겨 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어 왔다. 이미 주체하기 힘들 만큼 단단해졌으면서, 그녀를 먼저 걱정하는 그 따뜻한 배려에 로엘은 작게 웃고 말았다.
이렇게 자상한 남자라는 걸, 세상 그 누가 알까 싶다.
“아니에요. 그냥 조금, 몸이 늘어져 있어서 놀랐을 뿐이에요.”
물론, 다른 이가 알 필요 따위 전혀 없었지만.
로엘은 자신의 안에 이미 들어와 두근두근 힘차게 맥박 뛰는 그를 고스란히 느끼며, 열기에 흐려진 눈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에게 말한 그대로, 그녀는 조금 놀랐을 뿐이다. 오랜만에 들어차는 그 생경한 느낌이 짧은 통증을 주어서.
물론, 그녀를 위해 최대한의 이성을 끌어 올려 멈춰 준 그 덕분에 그깟 통증쯤 금세 무뎌졌지만. 로엘은 여전히 심각한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시트를 꼭 쥔 손을 놓고 그의 뺨을 감쌌다.
“정말 괜찮아요. 에단.”
그러고는 살짝 팔뚝에 핏대를 세우며, 그녀에게 무게를 실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그의 뺨을 조금 당겼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계속, 사랑해 주세요.”
짧지만 강한, 유혹의 속삭임과 함께.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너무도 예쁘게 웃는 그녀는 얼굴에 예쁜 홍조가 붉게 올라왔다. 살짝 찡그리던 표정이 금세 화사한 꽃처럼 피더니, 열기가 가득한 속삭임으로 겨우겨우 잡고 있던 그의 이성의 끈을 단번에 끊어 놓았다.
정말, 끝까지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그렇다면야, 사양 않고.”
맘껏 취할밖에.
“아읏!”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바로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단번에 다달았다. 덕분에 제법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그녀가 바로 높은 교성을 내뱉으며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는 바로 그녀의 허리를 안아 그녀의 몸을 세웠다.
“에. 읏……! 에단……!”
“그래. 여기 있어.”
단번에 그의 위에 걸터앉아 버린 그녀는 순식간에 바뀐 자세에 당황할 틈도 없이, 그의 머리를 꼭 끌어안아 그에게 매달렸다. 바뀐 자세만큼, 깊이감이 달라졌으므로.
“아. 이건……! 읏!”
그녀가 뭐라 하건, 그는 허리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가벼운 그녀가 그의 위에서 멋대로 흔들리고, 더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고 싶은 그는 더더욱 뜨겁고 단단하게 그녀를 갈구했다.
“아. 응. 아아. 읏……!”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그녀의 새된 소리가 규칙적으로 방 안을 울리고, 살과 살이 마찰하는 끈적한 물소리가 서로의 귀에 적나라하게 들렸다. 로엘의 모든 근육이 긴장하며, 온 세포가 이 말도 안 되는 짜릿함에 모든 신경을 세우는 듯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눈앞이 하얘지면서 오로지 한 사람만이 느껴지는 이 느낌.
그래. 바로 이 느낌이다.
“하아. 로엘.”
“에단……!”
그 역시 새로운 자극이 신선한지, 아니면 너무도 오랜만에 카이로스 황궁에서 모든 긴장을 내려 두고 그녀를 안아 더 집중하게 되는 건지. 아니면 그저 눈앞의 여인이 오늘따라 유난히 예뻐서 그러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이 다 합쳐져 그런 건지 몰라도, 오늘따라 에단 역시 여유가 없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좋은 건지.
다른 생각 따위 할 겨를 없이 오로지 눈앞에 자신을 위해 움직여 주는 이 사랑스러운 여인에게만 모든 감각이 집중되었다. 서로 마주 앉아 바로 눈앞에서 흔들리는 뽀얀 가슴을 조금 세게 움켜쥐며 빨아들이자, 그를 잡아 두는 그녀의 안이 바로 반응하였다.
“아. 읏!”
뜨겁고 단단한 그가 그녀의 몸을 반으로 가르는 것만 같은 이 적나라한 느낌. 그녀는 되도록 체중을 실지 않도록 그의 어깨에 손을 짚어 매달렸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멋대로 허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그가 빠져나가는 것이 너무도 아쉽다는 듯이.
그게 얼마나 그를 미치게 하는지 조금도 모르면서.
“에단……! 좀 천천히……!”
“지금……!”
누구 때문에 이리 짐승처럼 구는데.
에단은 자신의 속도 모르고 조르는 그녀의 입술을 거침없이 막아 버렸다. 그녀의 뜨거운 숨마저 온전히 삼켜 버리는 그의 키스는 거칠고 사나웠다. 목 끝까지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혀가 그러지 않아도 정신이 없는 그녀를 더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서로에게 애가 닳았다.
“하아. 으, 응!”
자신이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부끄러움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 부끄러움을 넘는 욕망이 그에게 ‘좀 더’를 요구하였다. 그녀 스스로가 놀랄 만큼, 적극적으로 그를 원하는 그녀에게 맞추어 그야말로 더더욱 그녀를 몰아세웠다.
“아. 자. 잠깐. 잠시만……이라니…… 꺄……!”
어딜 도망가려고.
라는 말이 들리지 않았는데 들린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성이 차지 않은 그는 가볍게 그녀의 한쪽 다리를 들어, 그녀를 돌려세웠다. 아직 그가 안에 들어차 있음에도 가볍게 돌아가는 자신의 자세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앞으로 뺐다.
“아흑!”
물론 그는 절대 도망가게 두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가 사람을 물러도, 지척에 사람이 있는 것들을 뻔히 알아 되도록 소리를 삼키는 그녀답지 않은 높은 교성이 방문을 넘어 울렸다. 갑작스레 뒤에서부터 치고 들어오는 그 강한 짜릿함에 온몸에 전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아. 로엘.”
“에……단……!”
그녀의 등에서 그의 넓은 가슴이 느껴지고 진해진 그의 체취가 그녀의 코안을 가득 메웠다. 그녀의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아니 어쩌면 그의 땀일지도 모를 물방울이 살결을 타고 흘러내리며, 그녀는 성난 짐승처럼 자신을 몰아치는 그를 받아들이기 급급했다. 뒤에서부터 무게를 실어 오는 그를 최대한 버티고자, 가는 팔에 핏대를 세우는 그녀를 대신해, 그는 침대 헤드를 꼭 쥔 그녀의 손 위를 살며시 감싸며 한쪽 팔로 자신의 무게를 버텼다. 그러고는 훤히 드러나는 그녀의 하얀 뒷덜미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
“아응……!”
어찌나 이렇게 모든 것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건지, 그녀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울 수 있을 거 같았다. 그 정도로 인간의 이렇게 기분 좋을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에단은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그녀의 한쪽 가슴을 꼭 움켜쥐었다. 단단히 부푼 분홍 정점을 자극할 때마다 바로 요동치는 그녀의 뜨거움을 즐기며, 그는 이제 그만 끝을 내기 위해 좀 더 속도를 내었다.
“아. 아. 아……!”
미친 듯이 심장이 뛰고 있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건, 그리고 조급해지는 건 그의 거칠어진 숨소리와 빨라진 움직임만으로 바로 알 수 있기에 그녀 역시 곧 그녀에게 몰려올 그 뜨거운 파도에 저절로 온몸이 긴장하였다. 아니. 이미 알아 버린,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쾌락을 온몸이 기대하고 있었다.
“로엘……!”
“아아아!”
그리고 그 기대를 넘어서는 뜨거움이 바로 그녀의 안에 들어찼다. 쉬지 않고 차오르는 그 파도는 그와 그녀를 함께, 눈앞이 아득해지는 절정에 다다르게 했다.
“아아…….”
잘은 진동이 이어지고, 쉬지 않고 달려온 그 끝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온몸으로 전해졌다. 로엘은 이 익숙한 충만함에 이만 침대 위로 쓰러져 버렸다. 에단은 그렇게 축 늘어진 그녀를 바로 품에 안아 주었다.
언제나, 버릇처럼 그랬듯이.
“괜찮아?”
그렇게 사람을 몰아붙일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이렇게 다정히 물어 올 건 또 뭐람.
로엘은 진심으로 괜찮냐고 물어 오는 그의 걱정이 조금은 웃겨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가 그 못지않게 너무도 그와의 사랑을 즐기고 있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매번 그는 이리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혹여나 그가 그녀를 힘들게 해 버린 건 아닌가 하고.
스스로도 자각 못 하는 이 배려에 그녀가 매번 반한다는 것을, 이 남자는 죽어도 모르겠지.
“응. 괜찮아요.”
너무너무 좋았어요, 라는 그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채로 로엘은 그저 그와 눈을 맞추며 수줍게 웃었다. 그녀야말로, 오늘 밤은 그를 푹 재워 쉬게 하려 했건만, 그 때문에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그녀는 어째 연회장에 있을 때보다 더 생기가 도는 것 같은 그의 얼굴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그의 뺨을 감쌌다.
“안 피곤해요?”
“그런 건 내가 묻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하는 거야.”
물론, 그의 눈에는 이러한 그녀의 걱정이 그저 귀엽기만 하지만.
“너만 허락한다면, 밤새도록 계속할 수 있어.”
“어휴. 못 말려.”
아주 진심으로 말하는 그의 대답에 그녀는 바로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들짝 놀라 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예견된 거라 그는 피식 웃으며 훤히 드러난 그녀의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대신, 이렇게 꼭 안고 자요.”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야? 이러면 더 못 자.”
이제는 뻔히 알면서, 짓궂긴. 가만 보면 진짜 여우는 그녀였다.
로엘 역시 그러한 에단의 반응을 너무도 예상했던 거라, 그저 배시시 웃으며 그의 단단한 허리를 더 꼭 안았다.
“싫으면 마시든가요.”
눈꼬리가 휘도록 웃으며 그를 놀리는 모습에 에단 역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럴 리가.”
그러니 져 줄밖에.
어차피 그녀를 두고 참는 거라면, 그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다. 매우매우, 그게 힘들어도.
그는 자신을 꼭 안아 주는, 그렇게 그의 품에 쏙 들어오는 그녀를 좀 더 힘 있게 안았다.
“따뜻하네.”
여느 때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느끼며.
“당신 덕분에.”
“그건 뜨거운 거지.”
이리 서로가 서로에게 한마디도 져 주지 않는 이 즐거움을 즐기며.
두 사람은, 나른하고도 여유롭게 다시 돌아온 카이로스의 밤을 함께 보냈다.
***
언제 잠들어 버린지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린 로엘이 스르륵 눈을 떴다. 그러자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아름다운 그가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깨운 건가.”
그리고 이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녀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니에요.”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뻐근하고, 기분 좋은 나른함이 느껴졌다. 여전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라, 살에 닿는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그녀의 나른함을 더욱 부추겼다. 좀처럼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이 훤히 드러나 에단의 입가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아무래도, 그의 부인께서 오늘 아침은 게으름을 피우고 싶으신가 보다.
“더 자도 돼.”
“안 돼요. 할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나중에 해도 돼. 너한테 뭐라고 할 사람 없어.”
“내가 뭐라고 해요, 내가.”
로엘은 태평하기도 한 그의 반응에 한숨을 삼켰다. 다른 일도 아니고 그녀의 칼라리엔 취임식과 관련된 일이다. 지금 온 황궁이 그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나중에 하라니. 그녀에게 묻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날짜로 정해 버렸으면서 정말 안일하기 짝이 없다.
“원로회가 오늘이죠?”
“어.”
“만장일치였던가.”
“맞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그와 달리 로엘은 잠시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도 이제 와서 원로회의 동의가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렇다기엔 어젯밤 너무 많은 귀족들이, 아니 거기에 참석한 모든 귀족들이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그 안에는 원로원 전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그 모습을 원로의 모든 이들이 보았단 말. 그걸 보고 그녀의 취임에 반대할 이, 절대 있을 수 없다.
다만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런 그들의 동의가 마지못해서가 아닐까 하는 작은 걱정이랄까.
“쓸데없어.”
“네?”
“지금 하고 있는 그 생각, 쓸데없다고.”
그런 그녀의 마음을 그는 전부 읽었나 보다. 그녀를 올곧이 바라보는 그 흔들림 없는 시선에 로엘의 마음은 저절로 차분히 가라앉았다.
“너는 카이로스의 백성에게 선택받았어. 그 선택은 카이로스의 선택이고, 그들은 그걸 따라야 할 의무가 있지. 그러니 그들의 진심이 무엇이든 간에, 그 선호가 어떻든 간에 그들은 너를 택할 수밖에 없어. 그게 이 나라 카이로스의 마음이자, 내 마음임을 알고 있으니까.”
에단은 단호했고, 로엘은 수긍했다.
백성이 선택하였다는 그 말, 그 진심에 대해서는 의심하고 있지 않았으니.
그래. 그거면 되었을 뿐.
이미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요구하는 그들에게까지 그녀에 대한 진심 어린 지지와 축하를 바라는 것은 분명 욕심이었으므로.
“그리고. 너무 간과하고 있는 거 아닌가.”
또다시 자신의 생각에 빠져 버린 그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잠시 내려갔던 시선을 들어 그를 다시 보자, 그는 느릿한 손길로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람의 마음에 든 거야.”
갑자기 닿은 그 손길에 그녀는 순간 흠칫했다. 애를 태우는 그의 손길이 느릿하게 척추를 따라 내려갔고, 조각같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몸선을 따라 엉덩이에까지 내려왔다. 얇은 천 하나 위를 훑는 그 손길은 금세 그녀의 풀어진 몸을 긴장시켰다.
“그건 기뻐하지 않는 건가.”
조금은 귀엽고, 조금은 짓궂기도 한 그의 말에 그녀는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조금 떨어져 있던 거리를 좁혀 금세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기같이 따뜻한 그녀의 체온이 다시금 그의 몸에 온기를 전해 주고, 그 달콤한 향기가 그를 웃게 만들었다.
“제일 기뻐하고 있지요.”
이루 말 할 수 없이.
아주 많이.
모든 것에 감사할 정도로 너무나도.
로엘은 그의 가슴에 턱을 대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로 모든 것이 아름다운 황금의 그가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완벽한 남자가, 이 과분한 분이 어쩌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
“아주 많이, 감사하고 있어요.”
진심이 가득 담긴 그녀의 눈에 에단 역시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지금 느끼는 바로 그 감정을 고스란히,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그가 기뻐하고 또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사랑스러운 여인은 알고 있을까.
“어떻게 내가 당신의 여인이 되었을까. 이렇게, 우러러보는 것도 황송한 사람을.”
“과해.”
“사실인걸.”
“그럼 내 부인께서도 그만큼 대단한 거지.”
‘부인’이란 단어가 기분 좋게 울렸다.
그 사소한 단어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환히 웃어 주는 그녀를 그는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 확실히 말해 두지만, 내가 제일 먼저야.”
“네?”
“처음부터 내가 먼저였다고.”
데릭 테바로스보다도. 이반보다도.
에단은 굳이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아 생략했지만, 그래도 그건 확실히 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그녀와의 인연은 그가 제일 먼저였다는 사실을.
전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였지만, 그는 굳이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대신 품에 그녀를 꼭 안은 채로 참 오래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단 한 번 독대했던 제이드 네아레스를 생각하며.
‘정말 내 사람이 되어 주지 않을 건가.’
‘응. 말했잖아. 토르티아를 너무 사랑한다니까, 내가.’
‘토르티아를 멸망시키면, 그럼 되는 거야?’
‘하하. 진짜 위험한 꼬맹이야.’
뒤돌아 생각해 보면, 그답지 않은 투정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하긴 그가 태어나서 그토록 욕심이 났던 적도 처음이었고, 그토록 칼같이 거절당한 것도 처음이었으니
‘그만큼 나는 그대를 원해.’
‘와. 이거 꽤 설레네. 이 아저씨, 진짜 좀 흔들렸어. 방금.’
그런 그에 비해 그자는 철이 없을 만큼 유쾌했다. 감히, 대 카이로스의 황제가 될, 그를 앞에 두고.
아무리 그가 어렸다고 한들, 그 앞에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 자가 없던 때인데도 말이다.
‘다른 방법이 있긴 하지. 황태자님께서 내 사위가 되는 방법.’
‘좋아.’
‘아니, 고민은 해 달라고, 꼬맹아. 지금 엄청난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정말 짧은 만남, 짧은 대화였는데.
어째서 그 오래된 기억이 이토록 선명한지. 에단은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히 기억나는 제이드를 떠올리며, 여전히 갸우뚱하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참. 많이 닮은 부녀다.
‘그대의 딸을 나의 칼라리엔으로 만들겠어.’
‘하하. 진짜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더 무섭네. 이거 우리 공주님 아주 출세했네, 출세했어. 카이로스의 칼라리엔도 맡아 놓고.’
그때 그 말이 이리 현실이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하늘에서 그자가 이걸 보고 있다면, 뭐라 할지 에단은 조금 궁금하다.
지금도 그를 꼬맹이라 부를 거 같은, 그 격 없는 자는 여전히 위대할까.
너무도 그럴 거 같아, 더더욱 에단은 제이드 네아레스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황태자님. 근데 나도 엄청난 말을 지금 한 거야. 아무리 농이래도 내 사랑스러운 공주님을 누구한테 시집보낸다고는 안 한다고. 내 딸이 진짜 얼마나 예쁜데! 아주 천사야, 천사.’
그 천사가 여신이 되어 그의 여인이 되었다. 이건, 운명이라 해야 하지 않나.
제이드가 어떤 마음으로 그에게 그런 농을 던졌는지 몰라도, 그 순간 어린 에단 카이로스는 분명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몰랐던 로엘 네아레스를 부인으로 들이겠다고 약속했다. 진심을 다해, 매우 진지하게.
그 약속을 그는 이리 지켰다.
“정말. 계속 말 안 하고 혼자만 알고 계실 거예요.”
그녀 모르는 추억으로 홀로 미소 짓는 그에게 조금 심통이 났는지, 그녀가 그를 불렀다.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는 것 같은 귀여운 투정에 에단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그 약속을, 제이드 네아레스가 살아있을 때 제대로 지켰다면, 그랬다면 이 여인은 그 숱한 시련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렇게 그의 품에 좀 더 빨리만 왔다면. 그래. 그는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지켜 주었을 거다.
아픔 없이 그저 예쁘게만 피어날 수 있도록.
분명, 어떻게 만나더라도 그는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을 테니.
“에단?”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지나간 시간들을 붙잡고 후회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녀는 이렇게 돌고 돌아 그의 품에 왔고, 지금도 이 여자는 눈이 부시게 아름답게 피었으므로.
누구보다도 멋지고, 위대하게.
“많이 사랑하고 있단 소리야.”
당당히 그의 옆자리에, 그리고 이 카이로스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를 만큼.
“로엘. 나의 꽃, 나의 여인. 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게.”
갑작스런 고백에 그녀는 작은 웃음을 뱉었지만,
“뭐예요, 갑자기.”
그래도 이내 예쁜 홍조를 얼굴에 드리우며 눈꼬리가 휘어지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여느 때처럼, 장미처럼 붉고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만을 보았다.
그녀의 목에 걸린 황금의 월계수(Laurel)가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에 반사되어 붉게 반짝이며.
“나도 많이 사랑해요, 에단.”
이제는 낯설지 않은 사랑 고백을,
“저의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을 사랑합니다.”
온 진심을 다해. 이 마음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며.
그렇게 서로의 눈에 서로를 가득 담아,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과 같이 사랑을 맹세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