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3. 칼라리엔을 위하여 (64/69)

Chapter 63. 칼라리엔을 위하여

참 많은 것들이 이루어진, 기나긴 하루가 끝나 가고 있었다. 온전한 승리에 취한 카이로스 병사들을 위해, 에단은 아낌없이 음식을 풀었고, 패망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토르티아 사람들은 로엘의 손에 떨어진 자신들의 운명에 감사해하고 있었다.

카이로스의 이름 아래에 온전히 토르티아의 존재가 사라지는 줄 알았건만, 이렇게 로엘 치하에 들어간다면 그건 전혀 말이 다르다. 그건 어쨌거나 토르티아 황실의 명맥이 이어진다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붉은 민족의 나라가 유지된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들에게도 조금의 희망은 남은 셈이다. 그래서 이 축제 분위기 속에 그들도 자연히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요.”

“그렇겠지.”

축제를 즐기는 이들을 성에서 내려다보며, 로엘이 말했다. 그런 그녀 곁으로 에단이 다가가, 그녀에게 와인 잔을 건넸다.

“기나긴 여정이 승리로 끝났으니.”

“맞아요. 다들 많이 고생했죠. 감사할 일이에요.”

“자신의 몫을 한 거지.”

“그게 감사한 거예요.”

로엘은 그가 가져다준 와인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토르티아의 와인이 달달한 향을 내며, 알싸한 뒷맛을 남겼다. 그 맛이 반가워 로엘이 살짝 미소를 짓자, 에단 역시 미소 지었다. 얼마만의 여유로운 시간인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여 에단도 마음도 좋았다.

이 전쟁을 시작하며, 이 여인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그 속에서 얼마나 아파하고 힘들어했는지 잘 알기에 더더욱 이 편한 미소가 반가웠다.

에단이 로엘의 어깨를 감싸자, 로엘은 순순히 그의 어깨에 기댔다.

“참. 세상일은 정말 아무도 모르네요. 내가 이 자리에서, 당신과 이렇게 토르티아를 내려 볼 줄이야.”

로엘은 그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신기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토르티아의 황제만이 들어올 수 있는 황제 전용 침실.

발 빠른 제롬의 주도 아래, 그리고 매우 협조적인 토르티아 황실 시종들의 도움으로 이곳은 조지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새 방이 되어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완벽히 준비된 이 침실은 애초에 황제와 그 반려가 아닌 한 들어올 수조차 없었다. 그러니 로엘 역시 이곳이 처음이었다. 어린 날 한 번쯤은 들어와 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알다시피 토르티아 황제 중 그녀에게 우호적이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애초에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방에 이리 당당히 들어와 이 야경을 보게 될 줄이야.

로엘은 좀 더 그에게 편히 기댔다.

“에단. 나와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매우 새삼스러운데.”

“내가 평생, 아니 죽어서도 이 빚을 갚을게요.”

진심이 아주 가득 담긴 그녀의 감사 인사에 에단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절절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녀가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쯤은, 아니 말하지 못할 만큼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까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그런 눈이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을.

‘폐하. 토르티아를 지도에서 지워 주신다면, 그 붉은 대지의 붉은 성을 피로 물들게 해 주신다면, 나의 황제시여. 저는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나이다.’

그는 그녀에게 그러한 맹목적인 충성을 바랐던 것이 아닌데.

“그럴 필요 없어.”

“내가 그러고 싶어요. 당신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어. 당장 이 자리에서라도.”

“로엘.”

에단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이 진지한 게 오히려 더 덜컥 심장을 내려앉게 했다.

로엘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물론 그가 그녀에게 죽으라고 명할 일이 없다는 거, 아니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전하고 싶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바로 이 마음을.

이 붉은 토르티아 성, 가장 아름다운 야경이 보이는 이 자리에서, 이 승리의 밤에.

“에단. 나의 폐하. 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내가 피눈물로 지내 왔던 지옥 속에서 나는 이런 날이 올 거라 감히 꿈꾸지도 못했어요.”

악에 받쳐, 조지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그녀와 그녀의 부모를 외면했던 그 수많은 배신자들을 하나하나 죽여 버리겠다고 복수를 다짐했을 뿐이지 이런 식의 영광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이 순간부터 토르티아는 프란시아에 속한다.’

그래. 어떻게 영광이 아니랴.

그녀의 뿌리였던, 그녀의 집이었던, 이 아름다운 나라가 그녀의 것이 된 것을.

에단은 눈물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바로 그날 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절박한 눈동자에 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홀린 듯 이 희고 부드러운 손을 잡아 버렸던 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진 거다.

로엘은 에단의 품에서 나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나의 하늘. 나의 태양. 나의 황제 폐하시여. 저의 모든 마음을 다해, 당신을 받들겠습니다.”

토르티아의 드레스가 예쁘게 펼쳐진 채로, 그녀의 붉은 머리가 아름답게 흘러내렸다. 거의 땅에 닿을 듯 깊게 고개를 숙인 그녀를 에단은 내려다보았다.

완벽히 격식을 차린 예법. 모든 것을 바칠 것 같은 경의.

딱, 그가 자비를 내린 속국의 왕과 같았다.

“그런 거 아니야.”

그래서 에단은 또 한 번 한숨을 삼켰다. 정말 그녀는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나 보다.

토르티아를 이대로 내버려 둔 것에 대해서도. 그가 토르티아를 그녀에게 준 것에 대해서도. 그녀는 그의 자비라 생각하나 보다.

“이 전쟁은, 그리고 이 결말은, 오로지 나를 위한 거야.”

로엘은 마치 그가 그녀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해 왔다고 말하지만, 그건 명백히 틀린 말이다. 그러기엔 에단은 북방 정벌의 시작을 토르티아로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고, 토르티아의 통치는 애초에 카이로스에 귀속된 형태로 진행하려 했었다. 그러니 이 크나큰 영토까지 카이로스의 이름 아래에 두고 카이로스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바꿀 마음 따위 전혀 없었다. 그럴 필요도, 그렇게 할 여력도 없었다.

“엄밀히는 카이로스를 위한 거지.”

에단은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가볍게 그녀를 안아 들어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한동안 밖에 있어서 그러지 않아도 그녀를 그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의 품에 쏙 들어가는 작은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도 놀라지 않은 채 순수히 그의 품에 안겼다.

“이미 오랜 세월 카이로스는 타성에 젖어 있었어. 그건 당연하지. 중부의 최강국으로 살아와 세월이 벌써 까마득한데.”

그 타성은 곧 정체를 의미한다. 이미 카이로스는 외세가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했고, 비옥한 땅은 발전된 기술로 더 비옥해졌으며, 부유했던 나라는 그로 인해 더 부유해졌다. 그러니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적이었고, 그 안정은 평화를 가져다주었으니, 그 평화는 변화를 외면했다.

그럴 수밖에. 굳이 무언가를 더 하려 들지 않아도 지금의 만족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는데, 변화라는 그 힘들고 어려운 일을 누가 할까.

“나는 그게 지루했던 거야.”

단 한 사람. 이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으신, 이 타고난 ‘황재’만큼은 예외였지만.

에단은 그녀를 침대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기꺼이 그녀 앞에 자세를 낮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자연히 그녀의 붉은 눈에 그가 담기고, 그의 황금의 눈에 그녀가 담겼다.

“어쩌면 짜증이 났는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그 모든 행태들이.

“그래서 난 북으로 눈을 돌린 거야. 더 이상 중부에서 카이로스가 흥미를 느낄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로엘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 진지한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카이로스의 축복이구나, 하고.

에단 카이로스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말하면 입이 아플 일이라,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진짜 대단한 이유를, 왜 그가 천하를 다스릴 거라는 그 위대한 신탁을 받았는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로엘은 그게 안타까웠다.

그가 대단한 건 결코 그가 가진 타고난 능력 때문에 아닌데.

“나는 황금의 나라에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고 싶었어.”

바로 이 마음이, 너무도 대단한 건데.

“그렇게 황금의 민족에게, 어째서 우리가 위대하다 불리는지 일깨우고 싶었어.”

가장 타성에 젖을 이. 당연히 모든 것을 가진 황제 폐하다.

그런 그가 평생을 이리 부지런히도, 열심히 사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신념이 있기 때문이요. 백성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성군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역사를 창조한 선조의 높은 뜻을 일깨우고 실현코자 함이다.

카이로스의 황제로서, 황금의 민족의 아버지로서 그는 그 신념울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다.

이는 그가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될 테지.

‘음. 폐하는 좀 무섭잖아요. 마마.’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 뭐든 잘하셔서 매사에 조금 심드렁하시고…….’

‘일단 모든 일들에 거의 일희일비하지 않으시잖아요? 저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 그럴 수 없는데.’

‘저는 그 부분이 제일 이해되지 않아요.’

정말 그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가 없는데도 말이다.

로엘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에단.”

누군가는 이를 집착이라 할 테고 누군가는 이를 오래된 교육에 의한 세뇌라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그 자체가 운명인 거다.

피할 수 없는, 태양의 신이 사랑하는 황금의 황제에게 주어진 운명.

“이제는 좀 덜 미안해지셨나. 아카시스.”

북방의 기둥과 같은 이 나라에 황금의 깃발을 꽂는 것으로 그는 그 위대한 출발은 시작한 셈이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선 그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무언가를 더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오래된 그의 계획이 우연히 이 비운의 공주님의 복수에 맞아떨어졌을 뿐.

“오히려 이용이라면 내가 했지. 그것도 아주 많이. 매우 효과적으로.”

제이드 네아레스의 외동딸. 토르티아의 승리의 공주님.

이 얼마나 이용하기 좋은 타이틀인가.

그가 처음 그녀를 만난 바로 그날, 분명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은 충동이었을지 몰라도, 프란시아로 임명한 건 철저한 계산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물론, 네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에단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뺨을 감싼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네가 없었더라면 내가 이토록 열심히 하진 않았겠지.”

그녀를 바라보는 그가 좀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녀는 그의 이 오래된 계획에 ‘마음’을 불어넣었다.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서. 너를 더 이상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너를 웃게 해 주고 싶어서. 그래서 더 빨리 이 붉은 나라를 마무리 지은 거야.”

오늘따라 이 남자가 왜 이리 솔직하신 건지. 로엘의 양 볼에 예쁘게 홍조가 드리우고, 그녀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나의 아카시스. 나는 네가 웃는 게 좋아.”

이 아름다운 여인의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그 미소가 자신을 가장 기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에단은 알았다.

내가 이 여자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있음을.

“그러니, 내 곁에서 웃어 줘. 그렇게 나와 나란히 내 곁을 지켜 줘.”

그는 기어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했다. 로엘은 지금 그의 말이 참 많든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의 곁에 나란히 선다는 것. 그렇게 평생을 함께한다는 것.

그래. 그는 지금 ‘칼라리엔’을 말하고 있는 거다.

“네, 폐하. 그럴게요.”

그 의미를 알고도 그녀는 더 이상 뒤로 발을 빼지 않았다. 더 이상, 그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지레 겁을 내며 피하지 않았다.

어려움이 있다면, 반대가 있다면 그 역시 함께 넘어서면 될 일.

그가 곁에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제 남은 일생을, 나의 위대하신 하늘, 나의 사랑께 바칩니다.”

로엘은 먼저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칼라리엔이 되겠다는 마음을 담아.

그로써 그의 곁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담아.

그렇게 평생을 사랑하겠노라는 맹세를 담아.

***

“결국 그렇게 되었나.”

“네.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데릭의 덤덤한 혼잣말에, 버리의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데릭은 피식 작은 웃음을 뱉었다.

알고 있었던 결말이라고 하나, 그렇다고 하여 놀랍지 않은 것은 아니다.

원체 놀라운 일이라.

“토르티아가 망했다라.”

데릭은 로엘 덕분에 잠시 빼앗겼던, 그러나 다시 피바람을 일으키며 찾아온 자신의 테바로스 성 발코니에서, 불 꺼진 테바로스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대단했던, 그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던 토르티아가 망했다. 너무도 손쉽게, 너무도 허무하게 카이로스의 손에 떨어졌다.

북방이 이리 중부에게 공식적으로 나라를 빼앗긴 적도 처음인데, 그 첫 번째가 토르티아라니. 이건 참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아주 별로네.”

자타공인 북부의 최대국이자 최강국인 토르티아에 중부의 상징과도 같은 황금의 깃발이 꽂혔다는 것. 이는 그 깃발이 북방 그 어디에도 꽂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 토르티아도 무너져 내렸는데, 테바로스라고 아닐 건 무언가.

얼마든지, 황금의 깃발이 이곳을 향할 수도 있는 거다.

그러니 북방으로서는 더더욱 두려운 거다. 에단 카이로스가. 그리고 그의 황금의 나라가.

“어디 그뿐일까.”

심지어 로엘의 손에 바로 그 토르티아가 떨어졌다. 보란 듯, 토르티아에서 쫓겨난 비운의 공주님이, 이리도 극적으로 복수에 성공하고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뿐만 아니라 토르티아의 황족 손에 토르티아를 맡김으로써 붉은 민족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 주었다.

이는 카이로스를 두려워하되,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지는 않게 하여 사전에 분란의 씨를 잠재운 셈이며, 여타 힘없는 왕들에겐 언제든 자신의 나라를 카이로스에게 갖다 바칠 준비를 시킨 셈이다. 그 마무리를 가능케 만든 이가 바로 에단 카이로스라는 것을 모를 이가 아무도 없으니, 소문의 황제께서는 더더욱 신에 가까워져 버렸다.

그것도 아주 자비로우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그런 존재로.

“그리고 그건 로엘도 마찬가지.”

그러한 황제의 곁에서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승리의 여신이 되었으니. 토르티아가 멸망하여 그 프란시아의 손에 떨어짐으로써, 그녀가 프란시아라는 것은 완벽히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그다음 순서는 무엇일까.

“그야 뻔하지.”

바로 카이로스 황제의 옆. 황금의 나라의 어머니, 칼라리엔이 되는 일.

“결국 그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은 셈이군.”

데릭은 실소를 뱉었다. 참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는 이 전쟁 하나로 몇 가지를 얻은 셈인가.

중부의 염원이던 북방 진출을 멋지게 성공했으며, 카이로스의 명성을 천하에 드높였고, 그러지 않아도 높았던 자신의 위상을 더 높였다. 거기에 더하여 이제는 원하던 여인을 평생 자신의 곁에 둘 수 있는 완벽한 명분까지 얻은 셈이다.

이는 말 그대로 원하는 전부를 얻은 셈이다.

‘황자님. 지나간 인연과 추억에 기대어 감히 조언드리건대, 저분께 맞서지 마세요. 저분께서는 남들이 생각치 못한 것을 생각하시고,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시는 분입니다. 내가 한발 앞서 나갔다 싶을 때 세 걸음 앞서 나가 계시고, 다른 이가 세 걸음 앞서 나갔다 싶을 때 열 걸음 앞에 계신 분입니다.’

로엘을 다시 만나, 제대로 대화를 한 건 몇 번 되지 않는다. 워낙 반가운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데릭이 원하는 것은 그녀 자체였으므로 그녀와의 대면은 항상 험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함에도, 그 상황 속에서도 데릭과 마주하여 대화를 나눌수 있을 때 그녀는 언제나 데릭를 위해 말을 해 주었다.

‘저는 황자님께서 그 자리에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앉아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저는 황자님께서 테바로스의 황제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것이 테바로스에겐 최선이라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더더욱, 저는 당신이 좋은 성군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린 나이,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내려앉히며 빼앗은 황좌. 그의 황권은 무력 위에 세워졌다. 그래서 더 강력하고 그래서 더 위태롭다. 그러니, 고작 타국의 얄팍한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 이리 바로 반란이 일어나는 거다.

그의 숙부가 일으킨 반란을 어찌 로엘과 카이로스 탓으로만 돌리랴.

에단이 황제였다면, 그 에단이 황궁을 비웠다고 한들 어떠한 황족도 그 자리를 넘보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이건 엄밀히 따지고 보면 결국 제대로 된 황권을 세우지 못한 데릭 자신의 탓이다.

‘그러니 테바로스의 황제시여. 지금은 욕심을 조금 내려 두시고, 안을 다져야 할 때입니다. 평생을 달려만 온 당신은 이제 발걸음을 늦춰 주변을 보고, 곁에 있는 이를 챙기며, 뒤를 따르는 이에게 말을 건네주세요. 그렇게 걷다 보면, 다시 달릴 수 있는 때가 올겁니다. 그때는 더 멀리, 더 오래 나아갈 수 있겠지요.’

한창 중요한 바로 이 시기에, 그로 하여금 잘못 나아가지 않도록 그녀는 그를 잡아 주려 노력했다. 감히 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말을, 기꺼이 하고 또 했다.

데릭은 그래서 로엘이 좋았다. 그래서 그렇게 포기가 안 되었다.

‘결론은 에단 카이로스에게 대항하지 말라는 거군.’

‘네.’

그런 그녀가 이제 그의 곁에 보란 듯 선 거다. 그렇게 그 말도 안 되는 사람 곁에 나란히 서 천하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더 대단한 건 오히려 그쪽일지도.”

데릭은 언제나 자신의 눈을 올곧이 바라보는 그녀의 붉은 눈을 떠올렸다.

그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도 이리 보란 듯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서다니.

“대단한 거지.”

너무 대단해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데릭은 발코니에 양손을 짚으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달이 없어 더 빛나는 별이 하나같이 아름다워 절로 눈이 갔다.

‘테바로스는 토르티아에서 나가세요.’

그만 토르티아에서 나가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이제 정말 그녀의 인생에서 그가 나가 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끝인 셈이다.

더 이상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겠다는 그 눈을 보며 데릭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제 곧 그녀가 그의 손에 닿지 않은 곳으로 정말 가 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카이로스의 가장 높은 곳, 칼라리엔의 자리라는 것을.

“결국 해냈구나. 로엘.”

로엘은 카이로스에 가며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를 것을 조금이라도 상상해 보았을까.

‘황자님. 저는 제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그 운명 안에서 최선을 다해 행복해질 거예요.’

처음 그녀가 그의 정혼자가 되는 것을 예상치 못했던 것처럼, 그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황금의 나라에 갔을 거라 생각지 않는다.

그저 그 어린 날의 사랑스러웠던, 그의 로엘처럼 주어진 자신의 운명 속에서 그녀의 최선을 다해 얻어진, 오롯이 그녀의 힘으로 만들어 낸 그녀의 성과인 거다.

그러니, 그 누가 그녀의 영전에 돌을 던질까.

“결국 행복을 찾았네.”

비록 그게 자신의 곁이 아닐지라도.

데릭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밤하늘의 별은 빛났고, 맑은 겨울바람은 기분 좋게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그는 홀로 밤을 지새나 보다.

저 멀리, 멋지게 승리한 그녀에게 전하지 못할 축하를 마음으로 전하며.

***

“정말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래 알았어. 누가 뭐래.”

로엘과 에단의 목소리가 높디높은 토르티아 탑에 울렸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고 먼 깊은 밤. 로엘과 에단은 둘이서만 그 높은 탑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높네요. 원래 이렇게 높았던가.”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나는 처음이지만 너는 아주 익숙할 거 아냐.”

앞서 올라가던 에단이 잠시 걸음을 멈춰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맞잡은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로엘이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그녀의 지나간 시절에 새삼 마음이 아픈가 보다.

표정만 보면 화에 더 가까운 거 같다만.

“뭐 엄밀히 말하자면, 저도 내내 감금된 상태라 그렇게 익숙치는 않아요. 어렸을 때 한두 번 호기심에 아버지랑 올라와 본 정도? 그다음엔 말 그대로 유폐라 한 번 오르고 거의 내려오지 못했어요. 아. 거의도 아니지. 올라가서 한 번도 못 내려왔네요. 생각해 보니.”

조금 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표정은 더더욱 험악해졌고.

그런데 오히려 로엘은 그런 그의 반응에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그녀의 손으로 그의 손을 감쌌다.

“암울하고 추웠지만, 괜찮아요. 그땐 그런 걸 느끼지 못할 만큼 정말 제가 텅 비어 있었거든요.”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었다.

하루아침에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에 무너져 버려,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먹을 의욕도, 잠들 마음도 없었다.

너무 먹지 않아 쓰러진 적도, 너무 자지 않아 정신을 잃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제정신을 차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거 같아요. 제정신을 차린 후에는 악밖에 남지 않았지만.”

멈춰 버린 그를 대신해 그녀가 먼저 그의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오르는 이 탑은 여전히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해가 떠도, 해가 져도 똑같이 어둡고 서늘하기만 한 이곳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지만, 솔직히 로엘도 조금 신기하긴 했다. 자신이 이런 곳에서 혼자 그렇게 긴 시간 어떻게 있었나 싶다.

이미 꽤 올라와서 그런지 슬슬 숨이 차기 시작하고 다리가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그 말은 곧 정상에 거의 도달했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나서 결정한 거예요. 이곳에서 나가야겠다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슬슬 숨이 많이 가빠지려는 그 시점에 익숙한 장소가 그녀의 눈앞에 딱 나타났다.

“그렇게 내가 당신에게로 갔지요.”

로엘은 제이드에 이어 레아마저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이 탑에 올랐다. 하루아침에 공주에서 인질이 되어 버린 그녀는 그날의 밤이 잘 기억나진 않는다.

어머니가 자신의 품 안에서 처참히 죽어 갔다는 거. 그거 하나는 생생히 기억하나, 그 이후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누가 그녀를 여기로 데려왔으며 그때 그녀는 자신의 발로 걸어 올랐는지, 아니면 억지로 끌려왔는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가 실신한 그녀를 옮겼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그렇게 갇힌 이곳에서 그녀는 장장 3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아무것도 없죠?”

로엘은 눈에 띄게 굳어 버린 그의 표정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그를 정말로 화나게 만들어 버린 거 같았다.

여전히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가, 이제는 아플 지경이었다.

“폐하.”

그래서 로엘은 작은 한숨을 삼키며 그를 불렀다. 이 남자는 무얼 상상했던 걸까.

이 높은 첨탑 위에 형형색색 공주님 방이라도 꾸며져 있을 걸 상상했나.

“에단.”

“부르지 마. 애써 화를 참고 있으니까.”

에단은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을 먼저 끊어 버렸다.

툭하면 나와 버리는 그놈의 괜찮다는 말.

하나도 괜찮지 않았으면서, 조금도 괜찮을 수 없었으면서 기계적으로 나오는 그 말이 그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오지 말자니까.”

“그러지 않아도 후회 중이야. 토르티아를 이렇게 끝내 버린 게.”

정말 피바다를 만들어 버릴 것을.

그렇게 지옥 불 속으로 떨어트려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생을 마감하게 할 것을.

처음 그녀가 그에게 왔던 그날 밤.

이 붉은 성을 피로 붉게 물들게 해 달라던 그 말을, 이 토르티아를 지도상에서 지워 달라던 그 말을 에단은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저 흔하디흔한 황권 다툼의 피해자라 생각했다. 그저 조금 더 억울하고 조금 더 슬픈, 그런 여린 공주님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투정 부리기보다 직접 일어나 복수를 다짐하는 그 처절함에 눈이 갔을 뿐. 그녀의 지나간 시간에 대한 고통을 그는 결국 귀로만 듣고 머리로만 이해한 거다.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이렇게 직접 이곳에 서 보니 이제야 그의 머릿속에 지난날의 로엘 네아레스가 어떠하였을지 상상이 되었다.

이 아무것도 없는 춥고 어두운 곳에, 이 작은 여인이 홀로 덩그러니 놓인 거다.

어찌나 잔인한 일인가.

“아주 많이 후회가 돼.”

에단의 황금빛 눈동자에 살기가 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실수를 한 거 같다. 조지 네아레스를 그렇게 쉽게 죽여서는 안 되었다. 더 처참히 끝을 맺어,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후회하고 또 후회하게 만들었어야 했다.

“나는 충분해요.”

그런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그녀가 먼저 그 마음을 다독였다.

“나는 아니야. 하나도 안 충분해.”

“아니. 충분해요. 충분히 그자는 지옥 속에서 살았어요.”

그의 옆에 서있던 로엘은 그의 앞에 서 그의 나머지 한 손도 마주 잡았다. 그러고는 살며시 들어 올려 품에 앉았다.

두근두근.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그에게로 전해져 오고 그 따뜻한 온기만큼 따스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렸다.

“폐하 저는 당신을 만나 이렇게 여기 토르티아에서 당신을 마주하고 있어요.”

그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아마 이 사람은 모르겠지.

“그러니 조지 네아레스가 어떤 식으로 죽어 갔는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로엘은 좀 더 그의 손을 자신의 심장 위에 가까이 두며, 두 눈을 감았다.

정말 그녀에게 더 이상 조지 네아레스는 중요치 않았다.

그녀는 그자의 비참한 마지막을 지켜보았으며, 이 나라의 허무한 끝을 가져왔다.

이들이 어떠한 지옥 속에서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업보의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았고 걸맞게 돌려주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충분히, 그녀의 부모님에 대한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을 위해서.

에단은 그런 그녀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곳에 올라와, 이 말도 안 되는 곳을 보면서 치솟았던 분노를 어쩔 수 없이 누그러트려야만 했다.

그편이 그녀를 위하는 길이었으니.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어찌해 줄 수 없는 그 과거 속에 어린 그녀를 너무도 외로이 혼자 두었다는 사실이.

에단은 그만 그녀를 당겨 품에 꼭 안았다.

“짜증 나.”

품에 쏙 들어오는 그녀의 작은 체구가 익숙하게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렇게 품에 안으면 딱 그의 턱 끝에 그녀의 머리가 닿아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를 간지럽혔다.

“에리카 네아레스는 어쩔 거야. 죽이고 싶으면 죽여.”

로엘은 피식 웃어 버렸다.

무섭기도 해라. 그녀가 여기서 그러라 하면 정말 이 밤을 넘기지 못하고 에리카의 목숨은 사그라들 것만 같았다. 물론, 그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지만.

“아니. 됐어요. 그냥. 그녀가 가진 전부를 뺏어 주세요.”

그녀는 그의 품에서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차마 그대로 내버려 두란 말을 할 순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미천한 서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황권을 넘봐.’

‘평생 내 발밑에서 살아. 너도. 네 아비도.’

지독히도 괴롭히고 잔인하게도 모욕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했다. 그러니 이번엔 에리카의 차례다.

평생을 짓밟고 살아왔으니, 이번에는 본인이 밟혀 누군가에게 숙여야 한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공평하다.

“조지 네아레스가 빼돌린 토르티아의 것들. 전부 돌려받아야겠어요. 에리카는 토르티아의 곡식 한 톨도 가지고 나갈 수 없어요.”

차갑게 식은 그녀의 눈동자만큼이나 차가운 말이 울렸다. 에단은 그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지만, 오히려 로엘이 말하는 그 편이 그 에리카 네아레스에겐 더 잔인한 결말이니 아쉬울 게 없다.

“다른 건.”

“다른 건 없어요. 정말 그걸로 충분해요.”

로엘은 다시금 눈을 감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더 이상 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에단은 그런 그녀를 좀 더 품에 꼭 안아 그녀의 등을 한동안 토닥여 주었다.

그녀의 지친 몸의 긴장이 한 번에 풀리는 것이 눈에 보여 안쓰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피곤했을지 말해 무엇하랴. 그녀는 정말 인내할 만큼 인내해 왔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카이로스로.”

“네. 폐하.”

그래서 그만 그녀를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우리 집으로 가요.”

이제는 두 사람의 집이 되어 버린, 그들의 카이로스에서.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편안하게.

***

“안 피곤해요?”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두 사람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엔 그들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그녀가 한사코 말려도 한사코 바닥에 깐 그의 로브 위에 앉아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이렇게 둘만이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로엘은 아주 좋았다.

아직 동이 트려면 먼, 깊은 밤.

승리의 기쁨에 축제를 벌이던 이들도 지쳐 잠든 시간에 오로지 두 사람만이 깨어 있는 듯했다.

“여기의 유일하게 좋은 점이 있다면, 별이 너무 잘 보인다는 거예요.”

로엘은 창문 넘어 환히 보이는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의 눈도 자연히 밤하늘을 향했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별이 쏟아질 듯이 반짝였다.

“그러네.”

그건 아름답다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살랑살랑 열어진 창문으로 적당히 기분 좋은 찬바람이 불어오고, 겨우 불을 붙인 난로에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오래된 장작이 타올랐다.

“나름 별자리 명당이라구요.”

로엘은 자신의 숄을 그의 넓은 어깨까지 덮어 주려 하는데, 기어코 그는 그녀의 어깨에만 얹어 주었다.

“너나 덮어.”

“추울 텐데…….”

“전혀.”

어깨에 얹어 주다 못해 아예 꽁꽁 싸매서 여며 주는 그는 마치 그녀를 어린아이 대하듯했다. 종종 이리 구는 그의 행동에 그녀는 조금 눈썹을 찡그렸다.

“나는 애가 아니라구요.”

“알아.”

“아닌 거 같은데.”

“아니까 안고 싶지.”

훅 들어온 그의 말에 로엘은 순간 입이 딱 다물렸다. 그러고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괜히 되게 부끄러워졌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 이번엔 오히려 그를 웃게 만들었다.

이러면서 무슨 애가 아니라고.

그의 눈에는 그저 작고 어여쁜 어린아이 같았다.

심통 내는 모습이 귀여워 살짝 골려 주고 싶다가도, 너무 사랑스러워 이내 품에 안게 만드는. 그리고 그렇게 안아 버리면 더 깊게 안고 싶어지는 그런 위험한 아이.

“은근 뜨겁네요. 이거.”

애써 말을 돌리면서 손부채질을 하는 그 모습도 귀여우니 이걸 어쩌나.

에단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숄까지 내려간 그녀의 드러난 목덜미를 보며 괜한 생각이 올라왔다.

“불 때문이 아닌거 같은데.”

“맞아요. 불 때문에 그래.”

그러지 않아도 예쁘게 달아오른 홍조가 이제는 귀까지 빨갛게 만들었다.

정말 열심히도 부채질을 하면서 그의 시선을 피하는 그 모습을 조금 지켜보다 에단은 느긋한 손짓으로 그녀의 어깨 라인을 쓸었다. 그러니 흠칫하며 바로 그녀가 긴장했다.

“그러네. 불 때문에 그러네.”

그녀의 말대로 작은 난롯불은 두 사람을 따뜻하게 하기엔 충분했고, 이곳은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으며, 모피로 된 그의 로브는 이 작은 여인을 눕히기엔 충분했다.

그러니, 어떻게 야릇한 생각이 안 들까.

“읏.”

그의 손이 느릿하게 어깨에서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어깨에 걸쳐 있던 숄이 스르륵 떨어지고, 그녀의 허리가 꼿꼿하게 섰다.

지금 그가 무얼 원하는지 모를 만큼,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래서 저절로 온몸에 열이 확 올랐다.

“왜 이렇게 긴장해.”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 당신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데.”

로엘은 더 이상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그를 마주 보았다. 장작불을 등진 채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높게 묶은 자신의 머리를 풀었다. 그러자 길고 풍성한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그녀의 하얀 드레스 위로 흘러내렸다.

“내가 어떤 눈으로 하고 있는데.”

“나를 원한다는 눈.”

너무도 갈망하는, 열망이 가득 찬 ‘남자’의 눈.

“그렇게 사랑해 주겠다는,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당신의 눈이요.”

로엘은 기꺼이 자시의 목 뒤로 아슬아슬하게 묶인 끈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그 끈을 당기자 그녀의 몸에 걸쳐 있던 얇은 드레스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단번에 드러난, 그 아름다운 나신에 에단은 순간 숨을 삼켰다.

이건, 조금 많이 자극적이었다.

“보고만 있을 거예요. 나 지금, 상당히 부끄러운데.”

감정이 없다는 말을 평생 들어온 그를, 이리 단번에 뜨겁게 만들 수 있는 건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오로지 이 여자뿐이겠지.

“그럴 리가.”

그러니 기꺼이 그 역시 자신의 상의 단추를 풀렀다.

“하아.”

로엘의 새된 목소리가 낮게 탑 안을 울렸다. 훤히 드러난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그는 붉은 꽃을 피우며, 평소보다도 훨씬 따뜻한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어루만졌다.

“에단…….”

“로엘.”

로엘은 조금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늦은 밤,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리 그의 품 안에 안겨 뜨거운 숨을 토해 내는 것이 마치 몰래 밀회를 나온 어린 연인의 기분 같았다.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이 묘한 스릴이 그녀를, 아니 두 사람을 더욱 부추겼다.

“등, 괜찮아?”

“괜찮아요.”

그녀를 그의 로브 위에 조심스레 눕히며 물어 오는 그에게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녀에 대한 배려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사람. 남들이 보기에 그저 차갑고 무뚝뚝해 보일지 몰라도, 그녀에게 있어 그는 항상 자상한 사람이다.

“그걸 나만 알아서 좋아.”

“응?”

“당신이 너무 좋다구요.”

로엘은 그의 목을 당겨 진한 키스를 남겼다. 이미 촉촉이 젖은 입술을 열어 서로의 뜨거움이 오가고, 그 향기가 섞였다. 좀 전에 마신 와인의 달콤함마저 느껴져 뒤늦은 취기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으응……!”

등이 아프긴커녕, 최고급 모피의 부드러움이 오히려 간지러울 정도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살에 닿은 그 부드러운 감촉에 그가 주는 뜨거운 짜릿함까지 어우러져, 로엘은 머릿속이 점점 더 하얘졌다.

입술부터 시작한 그의 키스가 느릿하게 내려와 그녀의 하얀 몸 가득히 붉은 꽃을 피우고, 그때마다 그는 점점 더 단단해지고 그녀는 점점 더 차올랐다.

“하. 읏!”

그걸 누구보다도 두 사람이 제일 잘 알고 있겠지.

에단의 굵은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그 차오른 뜨거운 샘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어 그 안을 오갈 때마다 로엘은 온몸으로 그에게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 준비는 비단 로엘만 된 것이 아니다.

에단 역시 아까부터 아플 정도로 단단해진 뜨거운 자신을 그녀의 입구에 가까이 했다.

“너무 빤히 보는 거 아니야.”

“내가 언제……!”

“그 말 하는 순간에도 눈을 못 떼고 있어, 너.”

“아니. 나는…… 아!”

그는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은 채, 그녀의 말을 끊어 버렸다.

아주 많이 야한 방식으로.

“으읏……!”

그는 아까부터 그를 유혹하던 그녀의 안으로 단번에 들어갔다. 그 갑작스런 침범에 그녀는 고개를 젖히며, 숨을 참아 그 가득 참을 받아들였다. 등이 휘어 가는 허리가 들리자, 그는 바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더 안쪽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도 더 이상 여유로운 표정으로 있을 수 없었다.

“아읏. 읏! 응!”

저절로 미간이 좁혀지고,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라면 그를 받아들이는 그녀의 속도에 좀 더 맞춰 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이 은밀한 곳의 분위기가 그러하였고, 수줍게 그를 원해 하는 그녀의 눈이 그러하였으며, 그녀의 안으로 들어간 그를 놔주지 않는 그녀의 중심이 그러하였다. 그래서 멋대로 허리가 움직였다.

“에단. 잠, 잠깐만요. 진짜……!”

오랜만에 마음 편히 안는 그녀는 역시나 언제나처럼 기대 이상으로 너무 좋다.

“미칠 거 같아.”

이곳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 갑작스런 사랑 행위는 참았던 두 사람의 욕망을 깨워 버린 듯, 두 사람의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는 성난 짐승처럼 그녀를 몰아붙였고, 그녀는 그런 그를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였다.

“하아…… 아!”

“로엘.”

방 너머 기다리는 시녀들도 없고, 문 너머 지켜 서는 군사들도 없다.

그래. 이렇게 오롯이 둘만이 있는 시간. 공간.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의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몸이 흔들렸고, 그녀의 목소리는 더 크게 탑을 울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로엘은 평소와 다른 자신을 느꼈다. 늘 저절로 나오는 신음을 참기 바빴는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아. 에단.”

그저 그가 주는 이 감각에 솔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그를 찾고 먼저 그를 유혹했다.

“마음대로 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에단.”

그게 그를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도 모르고.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그 한마디에 그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이러는 건가.

열기에 사과처럼 빨개진 얼굴로, 큰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자신을 향해 부끄럽다는 듯 웃어 주는 이 얼굴.

그래. 그가 그녀를 안을 때만 볼 수 있는, 그래서 오로지 그만이 볼 수 있는 그녀의 얼굴이다.

이 얼굴로 이리 귀엽게 사자를 유혹하는 토끼라니. 어떻게 이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밤은, 아무래도 그녀가 그에게 주는 선물인가 보다.

“그 말. 책임져.”

“얼마든지.”

그러니 이곳에 오르자고 말했던 자기 자신을 크게 칭찬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얼마든지요. 나의 사랑.”

“그렇다면, 사양 않고.”

“하읏!!”

받아가야지. 그 선물.

잠시 쉬었던, 그의 움직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떻게 된 것이 그녀 안에서 여전히 더 커지는 그를 느끼며 그녀는 자신이 너무 경솔하게 자신만만하게 굴었나 하고 덜컥 겁이 났다.

그가 진심으로 하고자 한다면, 이 밤이 끝나기 전까진 절대 끝날 수 없을 텐데.

“에, 에단. 잠깐만요. 잠…… 읍!”

에단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금 진한 키스를 나누며, 그녀를 내리눌렀다. 아까부터 그의 가슴에 맞닿으며, 그를 자극하던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자 바로 그녀의 안쪽으로부터 움찔하고 신호가 왔다.

“네가 먼저 말한 거야.”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겨우겨우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이렇게 멋대로, 단번에 날려 버렸으면서 고작 잠깐이란 말로 멈출 수 있을 리가.

“에. 에단……!”

그래서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아름답게 출렁이는, 그 뽀얀 가슴에 그는 원껏 꽃을 피웠다. 그때마다 그녀는 멋대로 요동치는 자신의 안쪽과 그 안쪽에 맞닿은 그의 뜨거움을 적나라하게 느꼈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끈적한 물소리와 함께 울리고, 더욱 진해진 서로의 향기가 더더욱 두 사람을 열기에 취하게 만들었다.

로엘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반짝이는 별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반짝임이 진짜 별인지, 아니면 그가 주는 이 쾌감이 만들어 낸 반짝임인지 솔직히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늘, 그와 사랑을 나눌 때마다 별을 보았으니.

“하아. 에단. 이제 그만…….”

로엘은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이제는 아플 정도로 단단히 커져 버린 그의 뜨거움이 그녀를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대로 더하다가는 그녀가 먼저 미쳐 버릴 거 같았다.

“그만……!”

“그만. 뭐.”

“읏!”

그걸 뻔히 알면서도, 이 짓궂은 남자는 끝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말을 해야 알지.”

너무도 얄미운, 그래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만 좀……!”

그녀가 원하는 걸 달라고.

끝끝내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그녀의 자존심이 정말 그녀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입을 앙다문 채 그를 노려보는, 이 열기에 흐려진 눈을 보고 싶어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놀리고 싶어졌다.

“알았으니 울지 마. 어차피 내가 훨씬 더 원하는 거. 알고 있잖아.”

그가 이제는 한계라는 것까지.

“몰라요. 그런 거.”

아무튼 고집 하고는.

에단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와중에도 토라진 그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 그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아니. 알았다고 했…… 응!!”

“알았다고.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거.”

이보다 더 깊숙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도, 그는 더 깊숙이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느끼는 곳의 짜릿함에 로엘은 발끝을 세우고 허리를 뒤로 젖혓다. 저절로 곧게 뻗은 다리가 저릿하고, 그녀의 안쪽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아! 응! 하아! 읏!”

그녀의 허리를 잡은 그의 손은 그의 허리 짓에 맞추어 그녀를 움직였다. 원체 그녀는 가볍고 그는 힘이 센지라 온몸에 힘이 빠진 그녀를 그 마음대로 하는 것은 정말 일도 아니었다.

“하아. 로엘……!”

그렇게 그녀를 움직여, 더 깊숙히 들어가니 이번엔 에단이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더 이상 단단해질 수 없을 만큼 단단해진 그의 뜨거움이 그녀의 안을 들락거릴 때마다 마치 그를 놔주기 싫다는 듯 꽉 죄어 오는 그곳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에단…….”

이제 그만 이 뜨거움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그는 다시금 그녀의 입술에 입을 올렸다. 두 혀가 얽히고, 뜨거운 숨이 섞여 들며 그는 그렇게 속도를 냈다. 서로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끼며, 그가 속도를 올리는 것에 맞추어 그녀 역시 그에게 잡힌 허리를 움직였다.

“아아아아!”

그렇게 다시금 그의 뜨거움이, 가득 그녀의 안을 채웠다.

그녀 안에서 잘게 진동하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보내는 그를 느끼며, 그녀도 길게 신음을 토해 냈다.

습관처럼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는 그에게 미소 지어 보이는 그녀가 이제 그만 그를 빼려는데, 그전에 먼저 그에게 잡혀 버리고 말았다.

“에, 에단……?”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나.”

불안한 눈으로 설마라는 신호를 보내는 그녀에게, 그는 씩 하고 미소를 지으며 역시라는 답을 했다.

“맘대로 해도 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정말. 이래서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되나 보다.

“아니. 제 말은…… 으왓!”

“이제 시작이야. 아카시스.”

분명 방금 전에 뜨거움을 토해 냈던 거 같은데, 또 언제 이렇게 단단해졌는지.

여전히 그녀의 안에서 두근두근 힘찬 혈관의 움직임을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던 그때, 몸이 휙 하고 돌려졌다. 부드러운 모피에 자신의 가슴이 닿았다는 것을 인지하며, 고개를 젖혀 그를 돌아보자 그는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으응.”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위에 올라 몸을 겹치며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그는 뜨거운 숨결과 함께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어디 토르티아의 밤을 즐겨 볼까.”

달콤하고도 위험한 유혹의 말을.

“하아. 기꺼이요. 폐하.”

그러니 넘어갈밖에. 로엘은 어쩔 수 없다는 작은 한숨을 쉬면서도,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술에 키스를 되돌려 주었다.

별이 빛나는 토르티아의 밤.

그렇게 카이로스의 황금의 황제께서는 토르티아의 붉은 공주님을 밤새도록 놔주지 않았다.

***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여전히 잘 타오르고 있는 난로 앞에서, 로엘은 그의 품에 안겨 스르륵 눈을 떴다

“깼어?”

“네.”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 주며 물어 오는 그에게 로엘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그녀의 말을 너무도 충실히 들어준 그 덕분에, 로엘은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쓰러지듯 잠들어 버렸었다. 온몸의 근육이 뻐근하고, 유달리 저릿한 하반신에 살짝 민망한 마음이 들었으나, 이내 자신을 보며 미소 지어 주는 그를 보자 행복감이 더 충만해짐을 느꼈다.

그래. 무엇이 부러울까.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사랑하는 이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을.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다.

“내가 얼마나 잔 거예요?”

“한, 한두 시간 정도.”

“깨우지 그랬어요. 미안하게…….”

“미안한 건 그게 아니지.”

에단은 그녀의 척추를 손가락으로 느릿하고 쓸어내리며 짓궂게 웃었다. 그 손길에 어쩔 수 없이 흠칫한 로엘은 자신을 일부러 놀리는 그를 흘겼다.

그의 말의 요지는, 한참 달아오른 그를 그대로 방치하고 쓰러져 버린 게 문제라는 거였다.

“난 최선을 다했다고요. 애초에 내가 어떻게 당신을 따라가. 그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정력을.

로엘은 차마 뒷말까지는 하지 못한 채 입으로만 투덜거렸다. 어디 가서 체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매번 그와의 잠자리에서는 체력으로 밀리는 거 같아 자존심이 다 상했다.

물론 그 정도로 여자를 몰아붙일 수 있는 이 남자가 제일 큰 문제겠지만.

“아니……. 보통은 한 번 하고, 좀 쉬었다 하는 거 아닌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피식 웃었다.

무얼 알기나 하고 이렇게 말하는 건지.

웬만한 귀족 영애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그들 기준에서 참으로 외설스런 대화임에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그는 그저 사랑스럽기만 했다.

“나의 아카시스께선 그런 걸 또 어디서 들으셨을까.”

“……그렇다던데.”

이미 자리에 앉은 채로 골똘한 그녀와 달리 여유가 가득한 그는 한쪽 손으로 머리를 괸 채로 흘러내린 그녀의 붉은 머리를 넘겨 주었다.

“경험담일 리는 없고.”

경험 없는 그녀를 살짝 무시하는 듯한 말에 로엘이 순간 울컥했다.

그가 그녀 말고도 참 여럿 여자를 안아 보았다는 것.

그에 비해 그녀는 평생 그가 유일한 남자라는 것.

전부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막상 그가 이리 나오니 반발심이 생겨 버렸다.

“경험담일 수도 있지요.”

“그 거짓말을 하기엔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아닐걸요?

방법은 다양하니까.”

아. 이건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그녀가 살짝 심통이 나 버린 것을 알아 좀 더 골려 주려던 에단은 순간 그녀의 입에서 당돌하게 나온 저 한마디에 순간 멈칫했다.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거.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의 그 처음이, 반드시 모든 것들의 처음은 아닐 테니.

“흐음. 그럼 다른 걸 해 보셨다는 말인가.”

스르륵. 몸에 대충 이불 대신 덮은 옷들이 흘러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토라져 버리는 바람에 난로를 향하고 있었던 그녀의 시선이 살짝 낮아진 그의 목소리 톤에 자동적으로 그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황금 눈을 마주한 순간,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그 형식적인 미소를 보는 순간 로엘은 철렁했다.

그녀의 돼도 않는 허세가 그의 괜한 독점욕을 자극한 거 같았다.

“그, 그건…….”

“그건 내가 죽여야 할 사람이 생겼다는 소리인데.”

턱 하고 숨이 막히는, 절대 장난으로 들을 수 없는 그의 말은 싸늘하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한껏 재밌어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그의 분노가 분명 담겨 있었다.

“꼭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구요…….”

그래서 그녀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고 괜한 화를 돋우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말해 봐. 다른 무얼 알고 있는지.”

“아……!”

그는 상체를 좀 더 숙여 그녀의 귓가에 직접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귀에 닿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여전히 움직일 때마다 허리의 통증과 아랫배 부근의 저림이 가득한데, 그의 목소리는 또다시 그 긴장을 일깨웠다.

“자. 아카시스. 얼른 경험담을 말해.”

그녀도 안다. 그가 그녀의 허세를 진짜 믿어 버렸다든가, 그녀가 다른 남자와 어떠한 형태로든 경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이 남자는 그녀의 이 충동적인 발언만으로도, 그녀가 아주 잠시라도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그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 싫은 거다.

“말할 게 있어야…….!”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빼려는 그녀의 허리를 그는 단단히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씩 하고 한쪽 입꼬리만 더 올라간 걸 보니. 그래. 지금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거다.

비록, 그녀의 귀여운 도발이 순간이라도 그의 심기를 건든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는, 그 앙큼한 고양이와 좀 더 재밌는 시간을 보낼 계기가 생겼달까.

그의 손가락이 또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한 그녀의 양 볼을 쓸고 내려와, 엄지로 지그시 그녀의 먹음직스러운 입술을 눌렀다.

“방법이야 많지.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언가를 알긴 아는 거 같아 에단은 이 반응이 더 귀여웠다. 그래서 좀처럼 그녀를 놀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여기로 할 수도 있지.”

“읏……!”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더니 이번엔 그녀의 훤히 드러나는 맨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안에 꽉 들어차는, 그 기분 좋은 감촉의 가슴을 그는 적당하 세기로 주무르며 분홍 정점을 다시 단단히 세웠다. 일부러 그 끝을 자극하여 그녀의 약한 부분을 공략하는 능숙함에 다시금, 그녀의 스위치에도 불이 들어왔다.

아. 다시금 몸의 피가 한 곳으로 쏠리는 거 같았다.

“물론, 여기까지.”

한동안 가슴에 머무르던 손이 자연스레 그녀의 가는 허리선을 따라 내려왔다. 잘록한 허리를 거쳐 뒤로 향한 그의 손은 그녀의 애를 태우며 엉덩이 라인을 쓸었다.

그 깊은 골에 닿은 낯선 감각에 로엘은 바로 허리를 곧게 세우고 온몸에 근육을 긴장시켰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버리고 말았다.

“아, 안 돼요.”

너무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바로 도망가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정확히 그가 원한 바로 그 반응이다.

“이제 와 도망가는 건 안 되지.”

그는 몸을 뒤로 빼려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아 가볍게 그녀를 돌렸다. 엎드린 그녀의 등 위로 몸을 겹치며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팔을 잡은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되게 많은 걸 알고 계신 듯한데. 우리 아카시스님께서는.”

“몰라요, 몰라! 하나도 모른다구!!”

“그니까 뭘 말이야.”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거……!”

아. 정말 이건 너무 귀여운 거 아닌가.

귀까지 새빨개진 채로, 이 작은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요동치는 것이 전부 드러났다. 그러니 웃을밖에.

별다른 욕심이 없었는데, 이 반응에 오히려 없던 욕심이 생기려 했다.

이 보드랍고 따뜻한 살과 맞닿으면 세상 어느 남자가 와도 마음이 흔들릴 거다. 어떻게 안 그럴까. 이 여자의 모든 것이 남자의 욕망을 부추기는데.

그래서 더 불안하고 그래서 더 애가 닳았다.

혹여라도 다른 자의 눈에 이 여자가 들까 봐. 그렇게 이 여자를 욕심낼까 봐.

“아…….!”

몸을 밀착시킨 그가 그녀의 뽀얀 엉덩이를 움켜쥐자 바로 그녀는 새된 소리를 뱉었다. 저절로 들리는 허리를 놓치지 않고 그가 잡아 올리자, 로엘은 바로 상체를 세워 그를 돌아보았다.

“무리. 절대절대 무리예요!”

“그야 해 보지 않으면 모르지.”

“아니. 알 수 있어요. 절대 무리라고요!!”

역시나 그녀는 너무도 정확히 지금 그가 무얼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분명 그에게 처음 왔을 그 밤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였는데.

이 아름다운 꽃봉오리가 그의 손에 의해 어느새 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되었나.

정말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진짜, 에단. 이건 무리예요. 오늘은 이미 여러 번이나 했고……. 진짜 더 이상 했다가는 이상해질 것만 같구…….”

로엘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그에게 말했다. 솔직히 처음부터 진짜로 할 생각은 없었던 그라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그저 즐거웠을 뿐인데 왠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오히려 더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다른 날이면 모를까. 오늘은 절대 무…….”

특히 이 말.

“다른 날?”

자극하다 못해 제대로 불을 지피고 말았다. 조금 놀라 반문하는 그의 반응에 로엘은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네?”

“그러니까 오늘 말고는 괜찮냐고 묻는 거야.”

“아……. 그건…….”

그리고 그 불을 그녀는 오히려 더 활활 키웠다.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의 시선을 피하는 그녀는 그의 질문에 답했다.

“하, 한 번쯤은 해 보는 것도…….”

그것도 아주아주 위험한 대답을.

에단은 한 박자 늦게 웃음을 뱉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말하는 거야?”

“아, 알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안 된다구요.”

“오늘‘은’이라고, 분명히 했어.”

“그래요. 오늘. 오늘!”

결국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어찌나 몸에서 열이 나는지 난롯불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질 판이다.

“알았으니까, 이리 와.”

금세 쪼르르 멀어진 그녀의 팔을 잡아, 그는 다시 품에 당겨 안았다. 잔뜩 기장하던 그녀는 이내 그의 누그러진 표정과 기대에 찬 마음을 읽었는지 작은 한숨을 삼키며 다시 그의 품에 안겼다.

지금 당장 모면을 위해 무리수를 던진 거 같긴 하다만, 그렇다고 그녀가 빈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이제 답을 하셔야지. 나의 비께선 어디서 무얼 들어 이리 잘 아시나.”

“……들은 게 아니라 읽은 거죠. 엄밀히 말하면.”

로엘은 살짝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로엘은 좀 더 편히 그에게 기댔다. 어차피 이렇게 이실직고할 것을, 괜한 허세에 작은 소동만 일어난 셈이다. 거기에 아주 무리수인 약속까지 더해서.

“책?”

“네. 어렸을 때 토르티아 성에서 맨날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거기면 에리카가 잘 찾아오지도 않고 다른 소리도 듣지 않아도 되니까.”

로엘은 좀 더 편히 그에게 기대며 말을 이었다. 되돌아보면 어렸을 때부터 책을 참 좋아했다. 처음엔 그저 에리카를 피해 숨어 다니는 용도였지만, 나중에는 에리카와 상관없이 그저 책이 좋아 먼저 찾아가곤 했다. 그래서 카이로스에 가서도 제일 먼저 그에게 베리타스 출입을 요구했던 거였다. 아버지의 자료를 찾아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어도 분명 그녀는 서재를 찾았을 테니.

“몰래 숨어서 야한 소설을 읽은 거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게 풋풋한 추억을 만끽하는데 산통을 깨는 그의 짓궂은 말이 돌아왔다. 그가 이 말을 할 줄 알아서, 더더욱 말하기 싫었던 거다. 로엘은 얄밉기만 한 그를 힘껏 흘겼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녀도 할 말은 아주 많다.

“뭐 나만 있는 거도 아니던데. 베리타스에서도 뭐가 많던데.”

그가 말하는 그 ‘야한 책’은 분명 카이로스 베리타스에서도 보았으니까.

“베리타스? 거기에 그런 통속 소설이 있다고?”

“모른 척하지 말아요. 엄청 많았다고, 엄청.”

로엘은 살짝 부풀려서 당당히 말했다. 그녀가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은 아니므로.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놀린 그를 조금이라도 당황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예상외로, 그는 정말로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그래? 몰랐네 그건.”

이 맥 빠진 대답에 오히려 그녀가 더 맥이 빠져 버렸다. 처음 베리타스에서 그런 책들을 발견하였을 때, 어린 에단이 몰래 와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엽게 느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궁금하면 참된 성교육을 시켜 줄, 어느 여인이든 데려오면 되는 것을.

그에겐 그리할 힘과 재력이 차고 넘치니.

“진짜 모른 거 맞아요? 모르는 척하는 거 아냐?!”

“베리타스에 쌓인 책이 몇 권인데, 내가 어떻게 그걸 다 봐.“”

그는 너무도 당연스럽게 그가 다 알고 있을 거란 그녀의 표정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녀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업무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잠잘 시간까지 할애해 책을 읽었던지라, 애초 그렇게 많은 책을 볼 시간이 없었다. 그에 비해 그가 보아야 하고 배워야 할 것은 차고 넘쳤으니, 어떻게 그가 그런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에 그 귀한 시간을 쓸까.

그러기엔, 이 눈앞의 황제께서는 너무 어린 나이부터 철이 들었다.

“나는 필요한 거 보기도 바쁜 사람이야.”

“나도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니에요. 우연히 봤어요, 우연히!”

로엘은 왠지 말을 하면 할수록 불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그의 미소는 오히려 더 진해지는 거 같았고.

에단은 자신의 가슴에 편히 기대어 있는 그녀의 볼을 감싸 올려 그와 제대로 눈을 맞추었다.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분한지, 이제는 로엘의 양 볼이 붉다 못해 조만간 터질 것만 같았다.

“우연히 봤는데, 친히 읽기까지 하신 거네. 우리 아카시스께서는.”

“그야……!”

“그야, 뭐?”

“그야……! 그야…… 당신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한껏 그녀를 놀리던 그의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나도 당신을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그래서 읽은 거라구요.”

아.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답변인데.

그녀의 뺨을 감싸던 손에서 살짝 힘이 빠졌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빤히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 오히려 더 그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이건, 너무도 진심이었으니까.

“……경험 많으신 폐하랑 달리, 나는 당신과 한 모든 게 처음이란 말이에요.”

살짝 투덜거리는 그 목소리에는 서운함, 부끄러움, 분함 그 모든 감정이 뒤섞였지만, 가장 중요한 마음은 단연코 그를 위한 그녀의 사랑이었다.

그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는 그 한마디.

솔직히 그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로엘을 품에 안은 그의 팔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당신의 지나간 여인들보다 내가 잘할 리가 없잖아요. 아주 여러 가지 의미로.”

거기에 너무도 귀여운, 그녀의 속마음이 이어졌다.

세상 멋있는 로엘 네아레스가 질투라니.

아, 이건 진짜 반칙인데.

베리타스에 홀로 앉아, 야한 내용의 책을 보고 혼자 끙끙대었을 그녀를 상상하니 오히려 그야 말로 입가의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

분명 우연히 만난 그 책에 화들짝 놀라, 처음에는 모른 척하다가도 이내 돌아와 열심히 공부하듯 정독했을 거다. 무엇이 얼마나 자세히 묘사되고 있는지 그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만, 적어도 이 투명한 여인을 붉게 만들 만큼은 될 거라 확신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 내용을 보며 그와의 사랑을 생각했다는 건데. 그건 또 다른 의미로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녀가 읽었던 그 책이 무엇이든, 돌아가자마자 꼭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면, 그녀가 말하는 그 다양한 일들을 직접 해 볼 수 있을 텐데.

아주 당당히, 열심히 공부한 그녀의 복습 차원으로.

“거기다가 맨날 폐하는 나한테 자기 취향 아니라고 하잖아.”

“당연히 그냥 하는 말이지.”

“알아요.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난 당신에게 제일 예뻐 보이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여인이므로.

평소 그녀답지 않은, 너무도 유치한 마음이라 입 밖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있어서는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애써 어른인 척 잘 숨겨 왔는데, 이 짓궂은 폐하가 기어코 그녀의 입에서 이 마음을 실토하게 만들었다.

“되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네. 나의 비께서는.”

물론, 그녀의 진심을 듣는 그는 그 모든 이야기가 너무도 기쁘게 들리겠지만.

“폐하는 절대 몰라.”

말하다 보니 정말 시무룩해져 버린 그녀의 속도 모른 채, 그는 좀 더 꼬옥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다정한 위로에, 로엘은 어쩔 수 없는 자신을 향해 작은 한숨을 뱉었다.

그녀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그녀는 에단 앞에서 너무 어린 연인이 되어 버린다.

작은 것에도 마음이 서운하고 사소한 것에도 질투가 나는, 그런 철없는 연인.

애 같은 이런 행동들이, 그러지 않아도 바쁘고 힘든 그를 더 힘들게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는데도, 좀처럼 마음이 멋대로 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당신은 모를 거야.”

그만큼 그가 너무 좋았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모르는 건 너야.”

그런데 그건, 너무도 당연스럽게 그도 마찬가지.

에단은 또다시 그녀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남기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의 비께선 나에 대해 너무 몰라. 너에게 미쳐 있는 건, 다름 아닌 나잖아.”

짧았던 키스가 서로에게 아쉬웠는지, 이번엔 좀 더 길고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이 밤에만 수도 없는 키스를 주고받았음에도, 두 사람은 부족하다는 듯 뜨겁게 서로의 열기를 주고받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너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열렬히, 너만 사랑하고 있다고 구애하고 있는데.”

그러니 그에게 있어 지나간 여인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얼굴도 이름도 출신도. 그 무엇 하나 기억에 남지 않은 사람들.

그에게 있어서는 매일 먹는 식사처럼, 그저 많고 많은 황궁 내의 나무를 지나쳐 가는 것처럼 아무런 인상도 없고 애착도 없는 그런 존재들일 뿐이다.

그래서 그 누군가를 두 번 찾는 일은 없었다. 만일 그에게 한 번 이상 안긴 여인이 있다면, 그래. 그건 그저 제롬의 판단이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렇게 애가 닳아 미친 듯이 안고 싶은 여인은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오직 한 사람일 뿐일 거다.

바로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아름다운 붉은 공주님.

“그러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머리카락 한 올. 숨결 하나까지 전부 다. 로엘 네아레스의 모든 것이 나의 취향이야.”

그녀의 진심에는 늘 더 큰 진심으로 부딪혀 오는 사람.

그녀의 유치한 투정에 그는 더 큰 감동으로 보담을 해 주었다.

열렬하기도 한 사랑 고백에, 로엘의 양 볼은 도통 식을 줄을 몰랐다. 한동안 놀리기만 했던 그라, 이런 고백을 해 올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의 녹아내릴 듯한 속삭임에 그녀의 붉은 눈이 예쁜 반달로 휘었다.

아. 정말 치사한 사람.

이러니 늘 그녀가 더 사랑하게 되는 거다.

“그건 제가 할 소리예요. 나야말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의 모든 것이 나의 동경, 나의 이상형이에요.”

얼굴도 모른 그의 소문만 듣고 바로 날아올 정도로.

몇 년을 마음을 닫고 살았던 그녀가 단번에, 처음 만난 그에게 손을 내밀 정도로.

그리고 이렇게 기꺼이 그녀의 모든 처음을 함께할 만큼.

그래. 시작은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모든 감정들이 어우러져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

그러니 어떻게 사랑하지 않으리.

그를 사랑하게 될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네. 이번엔 책 말고 실전으로.”

“어휴. 진짜.”

금세 또 짓궂어진 그의 말에 그녀는 짧은 한숨을 뱉으면서도 이내 환히 따라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또 한 번의 키스를 나누었다.

마침, 붉은 태양이 프란시아의 토르티아에 새로운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

드디어 토르티아의 새 아침이 밝았다.

지난밤 그 많은 생명이 사그라들고, 찬란하였던 붉은 민족의 역사가 마지막을 고했음에도 어김없이 붉은 태양은 토르티아에 떠올랐다.

“공주님께 예를 갖춥니다.”

그 눈이 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 로엘은 중앙 정무실로 이어지는 기나긴 통로를 걸었다.

“공주님께 예를 갖춥니다.”

그녀가 방에서 나와 이 길을 걸을 때까지, 아니 지금 걷고 있는 이 순간까지 그녀는 얼마나 많은 같은 인사를 들었는가.

황족에게 기계처럼 나오는 저 한 마디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들이라 로엘은 오히려 불편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불편하기보다는 씁쓸했다.

마치 지난밤이 없었던 일인마냥, 그렇게 오늘의 아침이 어제의 아침과 다를 게 없다는 듯한 이 평온함이, 그녀가 아등바등하며 지나온 모든 것들을 순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너무도 미안했다고, 그렇게 자신들도 그날 이후 내내 후회했다고, 눈물로 잘못을 읍소하던 그 사죄들이 거짓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들은 진정으로 후회를 했고, 죄책감을 느꼈으며, 그 불편한 마음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힘든 일상이, 바쁜 일상이 그들을 그저 움직이게 했을 뿐, 그들이 어제와 같은 오늘의 업무를 문제없이 한다고 하여 그들이 슬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로엘 역시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녀를 보자마자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보이는 그들을 보는 순간 저절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잘못했습니다. 공주님.’

‘너무너무 저희가 잘못했어요.’

용서라기보단, 뭐랄까, 이해랄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걸맞는 드레스를 건네며 머리를 손질해 주고, 그녀를 위한 모든 길을 닦아 놓은 이들을 마주하며, 그렇게 이미 옛날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진행되는 일련의 행동들을 보며 로엘은 저절로, 아주 확실히 깨달아 버렸다.

이들에게 이 황궁의 주인이 ‘누가’ 되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그저, 그들이 모실 상전만 필요할 뿐.

‘토르티아는 내가 내 아름다운 부인께 주는 선물이야.’

태양이 막 떠오르던 새벽녘, 로엘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그는 그녀의 양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이 토르티아는 그가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다만, 그 선물이 반짝이는 보석이 될지, 아니면 버려야 할 돌덩이가 될지는 너 하기에 달려있어.’

단, 그 선물은 그녀의 손에 그 운명이 달려 있다고.

로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바로 알았다.

‘너는 이 붉은 나라를 이대로 망가트릴 수도 있고, 다시 빛낼 수도 있어. 그건 오로지 네 마음이니까.’

그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그 말을 하고 싶었겠지.

두 가지 선택권이 모두 그녀에게 있다는 말은, 곧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그녀가 짊어져야 한다는 말.

에단은 그 어떠한 경우에는 자신이 로엘 네아레스의 편이라는 것을, 그러니 다른 생각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너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그는 말해 주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그 어떤 선택을 하든. 로엘. 나의 프란시아. 어떠한 기대도 하여선 안 돼.’

동시에, 걱정도 되었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라면, 지금부터 그녀가 걸어갈 그 길이 얼마나 외롭고 힘겨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 테니까.

‘그들 역시, 너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들은 무얼 원할까.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저 하루하루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평온한 일상.

그들은 그저 그 소박한 일상의 행복만을 바란다.

그러니 그 평안을 가져다줄 이라면, 솔직히 붉은 머리의 황족이든 황금 머리의 황족이든 별로 중요치 않다. 아니 전혀 상관없다.

처음부터, 그들은 목자를 원하는 거지 목자인 누군가를 원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러기엔 당신은 백성을 너무 사랑하는 걸.’

‘사랑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그들은 그저, ‘카이로스의 황제’를 사랑하는 거지, 에단 카이로스를 사랑하는 게 아닌 것을.’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나도 ‘카이로스의 백성’이니까 사랑하고 지키는 거야.’

그러니, 붉은 머리의 민족이라도 사랑하고 지키고자 할 테지.

그들이, 카이로스의 이름 아래에 그의 백성으로 귀속되는 한.

로엘은 더 이상 이야기를 잇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무슨 걱정을 하는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녀를 다독이면서도 걱정을 하였고, 걱정하면서도 경고를 한 셈이다.

진심을 다하되, 마음을 쓰진 말라고.

“마마. 도착하셨습니다.”

도착을 알리는 시녀의 말에 로엘의 발걸음이 굳게 닫힌 붉은 문 앞에 멈춰 섰다.

그 앞에서 로엘은 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무거웠던 전장의 갑옷을 벗은 채, 그녀는 정갈한 토르티아의 드레스를 갖추어 입었고, 단정히 올린 머리 위엔 프란시아의 왕관이 씌워졌으며, 그녀의 가슴엔 토르티아의 황실 권한을 상징하는 붉은 배지가 달렸다.

그 붉은 배지 위를 덮는 황금의 휘장은, 마치 토르티아가 이제는 카이로스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듯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공주님께서 드십니다.”

그렇게 로엘은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로서 토르티아의 정무실에 첫 발을 내딛었다.

무거운 붉은 문이 천천히 열리고, 그녀의 눈에 토르티아의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황좌가 들어왔다.

“로엘 네아레스 공주님을 뵙습니다.”

결국 이 모든 일의 시작과도 같은 곳.

붉은 보석으로 꾸며진 저 황금의 의자에 한번 앉아 보겠다고 이 비극이 시작된 거다.

“로엘 네아레스 공주님을 뵙습니다.”

그 양옆을 채우는 원로들은 일제히 그녀의 등장에 깊게 고개를 숙였다 .

토르티아를 세운 원로 공신 가문서부터, 조지가 새롭게 작위를 내린 신생 귀족들까지 일제히 그들은 새로운 주인께 예를 갖추었다.

군기가 바짝 든, 그 일련의 인사를 받으며 로엘은 천천히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황좌에 앉았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조지 네아레스가 앉아 있었던 바로 그 자리.

어제도, 그제도 이들은 조지에게 이리 똑같이 허리를 굽혔겠지.

로엘은 지금 자신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있는 이들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계산들이 정신없이 오가는지, 그들의 입을 통하지 않아도, 그들의 눈을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토르티아의 모든 원로는 들으세요.”

조지 황제가 즉위하고, 그녀의 아버지가 허망하게 죽었을 때도, 그녀가 팔려 가듯 카이로스로 떠났을 때도, 그리고 이리 카이로스가 토르티아로 진격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들의 머릿속은 똑같이 한 가지만을 생각했을 거다.

바로 자신들의 안위.

토르티아의 멸망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던 터라, 백성들 중에는 미리 이 나라를 떠난 이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이미 조지 네아레스에게 수년간 신물이 났었고, 다른 누구도 아닌 로엘이 온다고 하니 이 나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어서 도망가지 않는 편이 오히려 바보였다.

그래서 돈 좀 있는 졸부들을 중심으로 하나둘 자신들의 재산을 국외로 빼돌리기 시작했고, 일반 백성들 역시 하나둘 자신들의 짐을 싸 긴 여정을 떠났다.

떠나지 못한 이들은 그러한 의지도 없거나, 이리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들처럼 자신들이 가진 것을 조금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 뿐이었다.

“위대하신 토르티아의 로엘 공주마마의 명을 듣습니다.”

그러니 이 나라가 얼마나 희망이 없는가.

아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하명하소서.”

그녀의 손에 토르티아가 떨어지자 웃기게도 이들은 가슴을 쓸어내렸을 거다.

아무리 그러하여도 이 나라의 공주님인데, 다른 누구도 아닌 로엘 님이라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해 줄 거라는 같잖고도 근거 없는 희망을 가지면서 말이다.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로 명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그렇게 고집스럽게 '공주님'이란 칭호를 사용하는 거겠지.

로엘은 그 무책임하고도 탐욕스런 기대에 부응할 마음이 전혀 없다.

“지금 이 시간부로, 토르티아의 모든 작위를 폐지합니다.”

옳지 못한 황제가 즉위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역사 깊은 나라가 이리 빠르게 무너질 수는 없다.

너나 할 거 없이 무능한 황제 아래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바빴을 뿐.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이 나라의 멸망에 자유롭지 못하다.

“고, 공주님!!”

“공주마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공주님!!”

그러니 감히 그 입에 이미 사라져 버린 그 호칭을 담아선 안 되지.

“누구 마음대로, 공주야.”

나라가 없는데 공주가 있을 리 있나.

나라가 없는데 작위가 무슨 소용이랴.

“패망국 토르티아는 카이로스의 프란시아에게 예를 갖추라.”

그걸, 어째서 모르는가. 이 한심한 사람들은.

서슬 퍼런 그녀의 말에 회장의 분위기가 단숨에 얼어 버렸다. 동시에 그녀를 윽박지르듯 부르던 원로들의 숨소리가 바로 사그라들었다.

‘패망국 토르티아’라니.

이건 절대 그들이 예상하던 그림이 아니다.

로엘은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원로들을 보았다. 너무도 한심해서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토르티아가 이 지경까지 치달았는지, 이들을 보니 단번에 알 것만도 같았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탐욕에 취해 있었고, 너무 오랫동안 젊은 시절의 꿈과 신념을 잃어버렸다.

그들도 한때는 분명 이 나라를 위해 고민하며 밤을 지새웠던 적이 있었을 텐데.

어쩌다 이토록 자신밖에 모르는 탐욕스럽고도 한심한, 그래서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나.

“나에게 어떠한 기대를 가졌는지 모르나, 그 모든 기대는 버리세요.”

이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친 그녀의 아버지가,

“나는 지금, 이곳에 카이로스의 속국, 토르티아를 관리할 프란시아로서 있습니다.”

이 나라를 세우고 키워 준 붉은 민족의 수많은 조상들이 하늘에서 통탄할 일이다.

“그러니. 정신 차리세요, 토르티아.”

그걸 이들은 어째서 이제야 깨닫는가.

이미 그들의 붉은 나무는 뿌리가 뽑혀 버려, 그들을 지켜 주던 그늘이 사라졌음을.

“당신들의 집은, 그 감사했던 붉은 민족의 뿌리는. 그 아름답던 우리의 나라는.”

그렇게 영영 그들의 ‘조국’을 놓쳐 버렸음을.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토르티아의 정무실에 정적이 돌았다.

토르티아의 공주가 아닌 카이로스의 프란시아.

그 한마디가 무얼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멍청하진 않다. 너무 노련한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바로 상황 파악을 하며 꼬리를 내리는 그들이 로엘은 그저 우스웠다.

정말, 손에 쥔 것들이 많아 아무것도 놓을 줄 모르는 귀족의 전형.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사람들. 여기서 같잖은 오기를 부리다가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바로 파악하여 어떤 길이 자신들의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지킬 수 있을지만을 고민하고 있을 거다.

그 누구 하나, 이 나라를 위한 고민은 하지 않은 채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그가 하고 싶은 말이, 그가 걱정하던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똑똑히 알 거 같다.

로엘은 계속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토르티아의 멸망은 비단 조지만의 탓이 아님을, 정말 뼈저리게 느낀다.

“토르티아의 모든 관제는 카이로스의 것을 따릅니다. 작위 역시 그러하며 관료 체계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다시 개편해야겠지요.”

그 책임을 물을 이가 이렇게 눈앞에 버젓이 있음에도 그녀 역시 여기 모두를 내칠 수는 없다.

이 거대한 나라는 단 하루라도 관리자 없이 돌아갈 수 없고, 그 관리자는 하루아침에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쉬워도, 억울해도 이 베테랑들을 쓰지 않을 수는 없다.

관료의 연륜이란 것은 이래서 무서운 거다.

로엘은 그녀의 차가운 말 몇 마디에 바로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굴리는 이들을 내려다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굉장히 오랫동안 무능하고 무책임하기만 했던 이들을 데리고, 다시 출발선에 서야 한다니. 앞길이 막막해도 너무 막막하다.

“로엘 네아레스 마마를 뵙습니다.”

그중 이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울렸다. 한동안 잠자코 있던, 이 원로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원로의장 엘바도르였다. 그는 그녀의 명에 기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그녀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벤과 맥스와 동년배인 그는 로엘에게도 낯익은 사람 중 하나다.

명망 높은 토르티아 개국공신 가문 중 하나인 엘바도르 가문의 장자.

제이드 네아레스가 위험하다고 조지 네아레스에게 지속적으로 말했던 그 장본인.

‘황자 제이드님은 절대 황궁에 머무르셔서는 안 됩니다.’

로엘은 자신이 토르티아에 왔을 때 이자만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이 사람은 너무도 대놓고 아버지를 배척했다, 모두가 아버지를 추앙할 때도 이자만큼은 굳건히, 망설이지 않고 주장했다. 제이드 네아레스는 토르티아에 영광이 아닌 재앙을 가져올 거라고. 저 검이 결국 조지 황자님의 목을 겨누고 황좌를 빼앗을 거라고.

마치 홀로 간신들 속에 파묻힌 고독한 충신인 양 구는 엘바도르를 자격지심에 휩싸인 조지는 무한히 신뢰했다.

덕분에 조지가 황제에 즉위한 직후부터, 엘바도르 가문은 꾸준히 이 토르티아 원로의 수장직을 맡고 있다.

‘로엘 공주는 내버려 두세요. 죽이면 오히려 눌러 놨던 원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

‘에리카 공주 대신 보내는 방안. 나쁘지 않습니다. 공작 영애를 보내 한 소리 듣느니, 골칫거리도 처리되고, 차라리 그편이 나을 수 있지요.’

나라를 위해 나라의 안정을 기하는 것이 아닌, 본인을 위해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속한 이 붉은 나라가 부유하고 이 붉은 나라가 안정하여야 이 붉은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그의 모든 부와 권력을 더더욱 높일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제이드를 죽이라 하였고, 그래서 로엘을 살렸으며, 그래서 로엘을 카이로스에 보냈다.

그녀의 입장이라면 원수이자 은인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트린 장본인이자, 그 망가진 인생을 이리 다시 세우게 해 준 장본인이기도 하니.

“신하 엘바도르, 로엘 마마를 뵙습니다.”

그자가 지금 그녀의 앞에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그녀에게 최고의 예를 갖추고 있는 거다.

이런 순간이 올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제이드가 죽었을 때도, 그녀가 카이로스에 쫓겨 갔을 때도 이자는 전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자신의 마지막으로 한 바로 그 일. 에리카를 보내는 것을 망설이는 조지를 설득시키지 않고 그대로 로엘을 보내 버린 바로 그 일을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을까.

로엘은 정말 실소가 나왔다.

화가 난다거나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뭐랄까, 그냥 체념이 된다고 해야 하나.

그는 그저, 그가 배워 온 방식대로, 그렇게 그의 신념을 충실히 따라온 것일지도 모른다.

설사 이렇게 망국의 원로가 될지언정.

“계속하세요.”

그러니 그녀의 앞에 이리도 당당히 다시 설 수 있는 거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자신이 조지 네아레스를 옹립하는 데에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니까.

지금 역시도, 그는 그의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

“본디 북방과 중부의 차이는 확연한 바, 비록 토르티아가 카이로스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한들 북방국이 북방국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리 단번에 모든 것을 카이로스에 맞추라 하시면 여기에 있는 저희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할수 있는 것이 있을 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지요.”

그러니 그녀 역시 그 최선에 최선을 다할 뿐.

차가운 그녀의 대응에 엘바도르의 말이 잠시 막혔다.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의 붉은 눈이 어찌나 제이드 네아레스를 닮아 있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자를 이 조금한 공주님께서는 참 많이도 생각나게 만들었다.

‘뭘 그리 어렵게 사시나. 좀 편히 사시게.’

뻔히, 그가 자신을 매우 심하게 반대하고 모함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이드는 단 한 번도 엘바도르에게 인상을 써 본 적이 없다. 인상은커녕 보란 듯이 웃으며 인사했다.

어디 그뿐일까. 작은 꼬투리 한 번을 잡으려 아무리 노력하여도 모든 것들을 완벽히 해내다 못해 그 이상을 해내어 오니, 그가 만든 그 수많은 함정들이 죄다 기회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더욱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높이 올라가 버린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온갖 치사한 방법으로 오명을 뒤집어씌우며 지켜 낸 조지의 황좌였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 원로의장 자리겠지만.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로엘 네아레스가 전부 뺏어 버린 거다.

토르티아의 황권도, 엘바도르의 작위와 권력도. 그리고 이제는 이 나라까지.

그녀에게 그가 원수일지 몰라도, 이제는 엘바도르에게도 로엘 네아레스는 죽어서도 용서 못 할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습니다. 편찮으신 폐하를 위해 열심히, 여기까지 토르티아를 끌고 온 건 저희 원로입니다.”

“그 황제를 편찮게 만든 것도, 그 편찮은 황제를 옹립한 것도. 전부 여기 계신 분들 아니십니까.”

다만 이제는, 정말 어쩌지 못할, 복수는 꿈도 못 꿀 그런 원수가 되어 버렸지만.

“토르티아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아니라, 이렇게까지 망가트린 분들이십니다. 지금 자신들의 있지도 않은 공을 치하하실 게 아니라, 어떻게 책임을 지실 건지 그것부터 고민하시는 게 순서이지요.”

“그 책임이라는 게 저희의 작위를 반납하는 겁니까.”

“아니요. 어떻게 작위뿐이겠습니까. 당연히 가지고 계신 재산 전부이지요.”

“공주님!!!”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재산이란 단어가 나오자,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들도 단번에 고개를 쳐들고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렇게 중요시하던 그 명예와 작위보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돈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거다.

“이건 저희의 고유재산입니다 !”

“저희가 정당히 일군 것들을 공주님께서 가져가실 권한은 없으십니다!”

하. 당당.

로엘은 순간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정당하다’라는 단어의 뜻을 당신들은 모르냐고 반문할 뻔했다.

니블을 팔아 그 망신을 당하고도 정당한 재산이라. 정말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이건 토르티아의 멸망과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작위야, 그래 뭐. 토르티아가 사라졌으니 그렇다고 하지만, 재물은 다르지 않습니까. 카이로스라 한들 그걸 뺏을 수는 없습니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공주님!”

“공……!'

로엘은 자신이 들고 있던, 황제를 상징하는 봉을 크게 내려쳐 끝나지 않는 귀족들의 말을 끊어 버렸다. 홀을 울리는 그 굉음과 그들을 내려다보는 서슬 퍼런 시선이 다시금 언성이 높아진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뺏을 권한이 없어? 하. 그럼 그대들은 지금 가진 그 모든 것들을 소유할 권한이 있나? 마약을 밀매하고, 영지민들에게 말도 안 되는 과세를 하고. 비리를 저지르고. 착취를 하고!! 북에서 가장 부유했던 토르티아가 이 지경이 된 게 정녕 누구 때문인데!!”

눈과 귀가 멀어 버린 황제 밑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빼돌렸는지, 이곳에 들어오기 전 토르티아 황실에 남은 이권을 보고 기함을 토했다.

이미 카이로스가 토르티아로 쳐들어오기도 전에 이들 손에 의해 먼저 산산조각 났을 그런 판이었다.

“권한을 운운하시니. 그래요. 훌륭한 카이로스의 법제 아래, 국가라 하더라도 함부로 백성의 재산을 가져올 순 없지요. 하지만, 속국에 대한 찬탈은 가능하지.”

로엘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좋게 좋게 끝내려 했건만 정말 도와주지 않는다.

“내가 뺏을 권한이 없는 거지 힘이 없는 건 아니니까.”

정말 자신들이 놓인 게 어떤 상황인지, 이렇게 꼭 굳이 알려 줘야만 하나.

“다 뺏길 것인지. 그래도 조금이라도 남겨서 갖다 바칠 건지. 잘 생각해 보시고 답하세요. 저는 더 이상 인내하지 않습니다.”

이제 시작인데, 정말 벌써부터 지치는 것만 같다.

***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마.”

“아닙니다. 제롬 경이야말로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이게 제 일인걸요.”

토르티아가 멸망하고, 카이로스의 속국이 된 지 일주일.

토르티아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났다. 당연히 그 개혁의 중심은 토르티아의 통치자가 된 로엘이었다.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마마.”

그녀의 통치가 선포된 그다음 날. 그녀는 바로 원로 대신들을 불러, 그들의 토르티아에서의 모든 작위를 박탈했으며 관료제를 전부 제롬의 도움을 받아 카이로스 식으로 바꾸었다. 황실 재정 관리를 황족이 일임하였던 것을 황실 재고를 관리하는 오래된 시녀장에게 임시 직위를 주며 관장하게 하였고, 에리카가 빼돌린 모든 비자금들을 다시 귀속시켰다.

나아가 작위를 박탈시킨 귀족들의 모든 사유재산을 몰수하였으며, 몰수한 재산 중 경지들은 오랜 기간 경작하던 일반 백성에게 넘겨주었다. 재산을 뒤늦게라도 빼돌리는 귀족에겐 가차 없는 응징을 내렸고, 반항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 몇 번의 칼바람은 금세 다른 귀족에게 경각심을 일으켰고, 그 이후에는 제법 일 처리가 순조로웠다.

‘모든 일과 모든 인간관계를 전부 좋은 말로 해결할 수는 없어. 아흔아홉 번의 좋은 대화를 위해, 검을 한 번은 꺼내 들어야 하는 거야.’

에단은 그런 그녀의 모든 통치 행동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일체 토르티아의 정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모든 결정에 그의 재가가 들어가지 않은 그녀의 전결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루카스를 통해 현재 주둔하고 있는 카이로스의 군사들을 통제시키며, 토르티아의 상황에 개입시키지 않았다. 그는 정확한 선을 그으면서 모두에게 보여 준 거다.

이 토르티아는 이제 온전히 그녀의 것이라고.

‘원한다면, 왕위에 올라. 아무도 반대할 사람 없어.’

‘그건 싫어요. 저는 이미, 카이로스의 아카시스인걸요.’

기꺼이 그녀에게 토르티아의 왕좌를 넘겨준다는 그의 제안을 그녀는 고민 않고 거절했다. 침대 위에 마주 앉아 주고받을 주제가 아닌데도 너무도 쉽게 말해 버리는 그라서 그녀는 조금 그 상황이 웃기면서도 그에게 너무 고마웠다.

그녀를 너무도 배려해 주고, 믿어 주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녀는 토르티아에 머물고 싶진 않았다.

‘저는 카이로스로 돌아갈 거예요. 이건, 그저 저를 믿고 맡겨 주신 당신을 위해, 그리고 제가 맡은 이곳에 대한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믿고 맡긴 보람이 있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로엘은 에단의 생각에 잠시 미소를 지으며 이만 서류를 덮었다.

“먼저 주무시라니까, 참 말 안 들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쓰고 있던 안경을 내려놓으며, 로엘은 제롬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았다. 이제는 제롬과도 이 정도는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침실과 연결되어 있는 집무실에서 나와, 들어가자 그 역시 편한한 자세로 침대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눈치껏 그들을 위해 문을 닫아 주고 물러서는 시녀들에게 가벼운 묵례로 감사를 표하며, 그녀는 바로 그에게로 다가갔다.

“다 끝났나 보네.”

“네. 겨우 시간을 맞추었어요.”

어깨에 걸쳤던 숄을 대충 놓아두고, 그녀는 이미 침대에 기대어 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토르티아에 와서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그녀는 부쩍 응석이 늘었는데 정작 그녀 자신은 모르는 듯했다. 에단 입장에서야 그런 로엘이 너무 사랑스러웠기에, 괜히 응석쟁이라고 했다가 다시금 머뭇거릴까 봐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만 지었다.

오늘로 딱 일주일.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밤을 새워 토르티아의 망가진 많은 것들을 정돈하였다.

“하루 종일 뭐 했어요?”

“잤지.”

“거짓말.”

“조금 잤어. 진짜야.”

1시간이라도 잤으면 잘 잤겠다, 라는 말을 하려다 로엘은 말았다. 그녀의 맘 같아서는 카이로스에 들어가 다시 바빠지기 전에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쉬길 바랐는데,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여기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루카스에게 보고받고, 아론에게 지시하고. 하루 종일 얼마나 바쁜지, 시녀를 통해 들어 보면 좀처럼 앉아 있지를 않았다.

“좀 쉬면 얼마나 좋아…….”

“충분히 쉬고 있어. 이렇게 쉬어 본 적, 평생 동안 처음이라고 생각될 만큼.”

“그게 문제예요, 그게.”

로엘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이 정도가 쉬는 거라니. 고작 일주일, 사흘은 군대 정비하는 데 쓰고 나머지 나흘은 보고하고 지시하는 데 썼으면서. 거기에 조금 자투리 시간에도 토르티아 서재에서 책 읽기 바빴을 거다. 그러니 이리 새벽에 돌아오는 그녀를 기다리면서도 책을 읽고 있는 거겠지.

에단은 마음에 안 든다는 마음이 얼굴에 잔뜩 드러난 그녀의 반응에 그저 웃으며,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내가 아니라, 내 비께서 쉬어야 하는데.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야.”

“시간 내에 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어디 뭐 한두 가지 엉망이어야지.”

“그럼 더 있어도 돼.”

“아니, 너무 오래 집을 비워 둘 순 없잖아요. 이미 충분히 오래 비워 두었는걸.”

그녀의 입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집’이란 단어가 나왔다. 그 단어가 괜시리 그를 기쁘게 해, 그의 입가에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아무튼, 아무 생각 없이 그를 기쁘게 하는 데에는 1등이다.

그녀는 좀 더 그에게 편히 기대며,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제가 북방에 와서 깨달았는데, 진짜 과일은 카이로스가 제일 맛있는거 같아요. 저 며칠 전부터, 그렇게 카로가 먹고 싶은 거 있죠?”

“별로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니까 말이에요. 저는 그렇게 단 과일 안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계속 생각나네요. 진짜 돌아가자마자 바구니째 두고 먹을 거야.”

로엘은 생각만 해도 살짝 침이 고여, 눈썹을 찡그렸다. 그 흔한 과일이 이리 먹고 싶을 건 또 뭔지. 눈까지 반짝이며 굳은 다짐을 하는 그녀에게 그는 피식 웃었다.

“네, 그러세요.”

“진짜 꼭 그럴 거예요.”

하품을 작게 하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그놈의 니블을 정리했어요.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어, 하암…… 있던지…….”

눈을 감은 그녀의 말은 금세 멈추어 버렸다. 에단은 그런 그녀의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 주며, 여느 때처럼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 몇 번의 토닥임에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드는 그녀를 보아하니, 역시나 힘에 부치는가 보다.

“……원한다면, 무엇인들 못 구해 줄까.”

에단이야말로 너무 말라 버린 그녀의 몸을 두 배로 찌우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색색 금세 소리를 내며 잠든 그녀의 머리를 넘겨 주며, 아직 잠이 오려면 한참은 먼 그가 한쪽 손으로 머리를 괴며 그녀를 보았다.

“나를 위해서만은 아니지. 아카시스. 엄연히, 토르티아를 위해서잖아.”

그리고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너무도 열심히 하는 그녀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며, 에단은 생각했다. 그녀가 참, 이 붉은 나라를 많이 사랑했구나 하고.

그래서 더 상처받고, 더 많이 아팠겠다고.

그러함에도 이리 다시금 이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발을 구르고 있으니,

“참 지독한 짝사랑이네.”

그건 어쩔 수 없는 군주의 숙명이건만. 어쩜 그런 것까지 다 하려 하시나.

“남자로 태어났으면, 엄청 위협적이었겠어.”

꽃으로 살기에는, 너무도 뿌리 깊은 나무인 거다.

이 아름답고도 작은 여인은.

“잘 자. 아카시스.”

그렇다면, 그 뿌리가 좀 더 튼실히 내려 울창하고 푸르른 나무가 될 때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분명, 그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피는 꽃은, 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운 테니.

***

토르티아의 황제, 조지 네아레스가 로엘의 손에 죽었다는 것.

그렇게 토르티아는 멸망하여 카이로스에 귀속되었다는 것.

그 토르티아는 카이로스의 프란시아, 로엘 네아레스의 통치하에 놓였다는 것.

그녀는 바로 토르티아의 모든 귀족들의 작위를 해제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그들의 오래된 죗값을 치르게 했다는 것.

다시 말해, 피눈물을 흘리며 떠나간 토르티아의 붉은 공주님께서 너무도 완벽히 복수했다는 것까지.

“정말 소설 같네.”

그 소설 같은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토르티아는 물론이거나 테바로스를 비롯한 북방 전역, 아니 북방의 국경을 넘어 중부 전역에까지 살에 살을 붙여서 말이다. 덕분에 소문 속의 로엘은 어느새 신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뭐라고?”

루카스의 실없는 혼잣말에 아론은 이해할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그닥다그닥. 나란히 말을 몰고 걸어가던 아론은 루카스 쪽을 바라보았다.

“그냥. 찬찬히 돌이켜 보니 로엘 님의 인생이 너무도 기승전결 확실한 신화 같아서 좀 신기하달까.”

“뭐야, 새삼스럽게.”

아론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라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너무도 새삼스러웠다.

저분의 인생이 웬만한 통속 소설의 주인공보다도 더 파란만장하다는 걸 모르는 이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렇게 따지자면, 뭐 폐하는 안 그런가. 저분이야말로, 현실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한 분 아닌가.”

로엘의 복수가 이 전쟁의 한 축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한 축일 뿐.

누가 뭐래도, 이 전쟁의 결론은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의 대승인 거다.

“카이로스의 또 다른 승리이자, 중부의 영광인 거지. 역사를 새로 쓰시고 있어. 우리의 주군은.”

“그리고 그 옆에, 그 역사를 함께 쓸 수 있는 분이 온 거고.”

아론의 에단 사랑에 뒤질세라, 로엘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랄 것 없이, 이반이었다.

살짝 뒤에서 오던 이반과 콜린이 어느새 루카스, 아론과 나란히 가고 있었다.

“나의 형제는 대단하지.”

태어날 때부터 대단했고, 자라나면서 더 대단해졌으며, 황제가 되고 나선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만큼 외로운 분이야.”

이반은 앞에서 먼저 가고 있는 에단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항상 보던 저 빛나는 뒷모습.

언제 어느 순간에서도 저 어깨는 당당히 펴 있었다. 저 말없는, 조용한 뒷모습이 주는 묘한 카리스마에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정작 본인은 모르겠지.

이반 역시도 항상 앞서 나가는, 그의 한결 같은 뒷모습이 있었기에 그를 쫓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 저 흔들리지 않은, 그렇게 모두를 지켜 줄 것만 같은 저 태산 같은 그의 모습이 그를 뒤따르는 이들로 하여금 뭐든 이루어 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

그렇게 모두가, 카이로스가 여기까지 올라온 거다.

“그럼, 우리의 주군은 누굴 보며 나아가지.”

“……아무도 없지요.”

“맞아. 나의 형제는 단 한 순간도 없었어.”

그의 앞에 믿고 따라갈 수 있는, 그렇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신의 사랑을 받고 태어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순간부터 칭송받은 그의 앞에, 그 누구도 서 본 적이 없으니까.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는, 그런 폐하의 옆에 서 있는 거야.”

앞에 설 순 없어도, 그 옆에 서서 그를 지탱해 주기 위해.

그는 혼자가 아니라고.

자신도 옆에 있으니, 함께 앞으로 가자고.

토르티아 성에서 잠시 입고 있던 드레스를 기어코 벗어 던지고, 굳이 준비해 둔 마차마저 마다한 채 그와 나란히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반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걸로 된 거 아니겠어? 우리에게 있어서도, 그리고 카이로스에게 있어서도 저런 프란시아란 존재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루카스와 아론, 그리고 콜린 역시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말을 타고 걸어가면서도 끊임없이 옆을 보며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편해 보였다. 간간이 짓는 에단의 미소에, 그리고 환한 로엘의 미소에 보는 이들마저 자연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맞아요. 그거면 된 거죠.”

그러니 이반의 말이 맞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신화 같은 인생의 주인공이냐고, 누가 더 대단한 거냐고 따져 무엇하랴.

그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운명처럼 만나, 저렇게 서로를 사랑하며, 인생의 반려가 되어 주면 되는 것을.

더 이상의 수식어도, 미사여구도 필요 없다.

“폐하. 카이로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연호에 대한 설명도 더 이상 필요 없다.

“황제 폐하 만세!!”

이미 저 멀리서부터 그들을 알아보고 활짝 열어 놓은 성문으로부터,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들리더니,

“프란시아님 만세!!!”

그들을 맞이하는 연호가 이어졌다.

“칼라리엔님 만세!!!”

그녀 역시 순간 움찔하게 만드는, 아직은 어색한 바로 그 호칭.

“황제 폐하 만만세!!”

아. 이 소설의 끝이 얼마나 멋진 마무리로 치닫고 있는가.

“칼라리엔님 만만세!!!”

눈앞에 펼쳐진 수천의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태양의 황제 에단 카이로스와 그의 반려, 칼라리엔 로엘이 대 카이로스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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