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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2. 붉은 성 가장 높은 곳에, 빛나는 황금의 깃발을 (63/69)

Chapter 62. 붉은 성 가장 높은 곳에, 빛나는 황금의 깃발을

마지막으로 남았던 토르티아의 전투 부대가 전멸하고, 토르티아의 장수 또한 고단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을 알면서 달려든 그들은 용감하였으나, 정해진 결론이 달라지는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벤 장군이 사망하였습니다.”

그저 그들의 마지막이 좀 더 치열하고, 좀 더 애절하였을 뿐.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귀만 열고 눈만 뜨고 있는 조지 황제처럼 볼품없진 아니하였다.

“……벤이 죽었군.”

조지는 빠르기도 한 소식에 나지막이 말했다.

“황군 제1부대도 전멸하였습니다.”

두 번째 들려온 소식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슬프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았다.

그들이 알고 전장에 나갔듯, 벤 역시 알고 전장에 내보냈으니까.

“선봉은 그자라지. 제이드의 검을 쓴다던 그 황자.”

“네. 폐하.”

“벤을 죽인 것도 그 황자인가.”

“아니요. 로엘 공주님이십니다.”

“하하.”

조지는 짧은 너털웃음을 뱉었다.

이제 보니, 토르티아를 지키는 마지막 군사들은 제이드의 유일한 제자의 손에 죽었고, 제이드의 가장 심복은 제이드의 유일한 딸의 손에 죽은 거다.

‘모르겠어, 아버지? 그년은 도망친 게 아니라, 복수하러 카이로스에 간 거야!’

‘로엘 네아레스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카이로스를 다녀온 후, 자신에게 그토록 소리치던 에리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겁에 잔뜩 질린 채로 당장 암살자라도 보내 로엘을 죽여야 한다고. 아니면 소환 명이라도 내려 여기로 데려와 죽여야 한다고 수없이 말해 왔다.

무얼 보고 왔길래 이리 겁을 내나.

조지 황제는 잠시 궁금하였으나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준비하기엔 매사가 너무 귀찮았다.

‘이대로라면 그 괴물 같은 자 손에, 로엘의 손에…… 모두가 죽어 버릴 거라고요!’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궁에 홀로 남아 죽음을 기다리는 거였다. 에리카를 보낼 때 성의 사람들도 많이 내보내 이제는 이 커다란 황실에 남은 인원이 거의 없었다. 어차피 재정이 바닥을 쳐 사람을 많이 쓸 여력도 없었고, 그 사람들이 무너져 내리는 황실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만큼 충성스럽지도 않았다. 그러니 누가 조지를 위해 남았겠는가.

아무도 남지 않았다.

“……로엘이 왔단 말이지.”

그래서 더더욱 황궁이 크게만 느껴지고,

“그 아이가 왔구나.”

그만큼 자신이 더 작게만 느껴졌다. 조지는 잠시 허리를 세웠던 몸을 다시금 의자에 깊숙히 기댔다. 이 상황에 와서도 여전히 그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기운도, 마음도, 여력도 없었다.

약에 취해 산 지 벌써 수년. 그가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한 일들이 근 몇 년간 있기는 한가 싶다.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리고, 그 악몽을 잊으려 술과 약에 취해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에리카의 투정과 짜증 속에서도, 자신을 옹립한 부패한 원로들이 하나둘 황실의 재산을 빼돌릴 때도, 조지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 토르티아의 황제를 상징하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토르티아의 황제는 그가 아니라 이 황좌가 아니었을까.

그가 없더라도, 이 황좌는 항상 여기에 있을 테니, 결국 이 황궁의 주인도, 이 나라의 주인도 그가 아닌 이 황좌였을지 모른다.

‘폐하. 저는 한 순간도 욕심낸 적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되는 목소리. 눈빛. 얼굴.

조지가 황위에 올라 처음 그를 독대하였을 때, 제이드는 조지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황제에 즉위했다는 우월감과 제이드에 대한 열등감이 똘똘 뭉쳤을 시절. 조지는 제이드의 그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한 같잖은 허세이자, 꿍꿍이를 가진 음흉한 처세술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믿지 않았고, 더 불안해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지경이 되어서야 돌이켜 보니 그때 제이드의 말이 진심이었음을 알아 버렸다.

그래. 그의 말이 맞다.

그는 이 자리를 욕심낸 적이 없다. 처음부터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 자리가 그저 허울 좋은 감옥이라는 것을, 평생을 벗어날 수 없는 족쇄라는 것을 그 똑똑한 형님께서는 알고 계셨겠지.

게다가 제이드 네아레스에게 토르티아의 황제라는 그런 형식적 지위가 무엇이 필요했겠는가.

이미 그자는 모든 붉은 민족 위에 군림하는 신과 같은 존재였는 것을.

‘저는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겠습니다. 폐하.’

어째서 제이드의 기억만큼은 이리도 선명한지.

‘숙부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그건 로엘도 다르지 않았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나도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은 채 마치 어제 일이었던 양 너무도 선명히 머릿속에 그러졌다.

제이드를 미치도록 증오한 만큼, 조지의 눈에 로엘이 예뻐 보일 리 없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의 딸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그 작은 아이 역시 그 부모의 그 자식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출중했다.

‘로엘이 너무 싫어!!’

그 특별한 출중함이 에리카를 언제나 힘들게 만들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특별했던 제이드는 핏줄 말고는 아무 것도 특별하지 않았던 조지를 평생 괴롭혔던 것처럼.

무엇이든 자신보다 먼저 익히고, 더 잘해 내는, 그렇게 모든 면에서 잘난 비교 대상이 있는 건 끔찍하다. 그러함에도 자신이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건 정말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다. 조지가 그토록 에리카를 예뻐했던 이유. 모두가 에리카의 성격에 고개를 저을 때마다 그 아이를 더욱 품에 안고 다독여 줬던 그 이유. 에리카가 조지, 자신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이드를 죽이고, 레아 칼리드를 죽이고, 그 마지막 남은 아이를 유폐하듯 버려두었을 때에도 조지는 생각했다.

내가 살기 위해 그랬다고. 내 딸이 살기 위해 그러해야만 했다고.

‘숙부님. 안녕하세요.’

그 아이가 돌아왔다. 이제는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이제는 그의 인생에서 없어진 치부라 생각했는데, 그런 로엘이 돌아왔다.

그 어린 날에도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그 붉은 눈.

제 어미를 워낙 빼닮은 지라, 머리색도 다른 토르티아 황실 사람보다 훨씬 옅은 색이었던 그 아이는 눈만큼은 너무도 자신의 아버지를 빼닮았다. 붉고 뜨거운 피처럼, 붉던 그 눈이 조지는 무서웠다.

저 어린것의 눈에도 자신이 그렇게 추악하게 보이는 거 같아서.

제이드와 레아가 그렇게 죽고 나서, 로엘은 어떠했는가.

태양처럼 빛나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빛을 잃어버렸다.

레아가 그 눈앞에서 처참히 죽어 나갔을 때 세상이 끝나듯 울부짖었던 아이가, 그 밤에 살아남고 나서는 단 한 번을 울지 않았다. 아니, 아 소리 한 번을 하지 않았다.

평생을 공주로 살아왔던 아이에게 평생 갇혀 살지도 모르는 열악한 탑에 가두었을 때도,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홀로 남겨 두었을 때도 그 작은 아이는 조지에게 살려 달라는 그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묵묵히 조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건,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다.

에리카의 말처럼, 그 핏빛 눈에 저주라도 걸릴 것만 같았다.

‘제가 카이로스에 가겠습니다.’

그런 로엘이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카이로스가 무거운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그 세를 토르티아에게 뻗치려고 할 때 들어온 정략결혼 제의를 토르티아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하나뿐인 에리카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뿐.

워낙 아픈 손가락인 외동딸이라 조지 역시 보낼 마음에 없어서 생각해 낸 대체자가 바로 로엘이었다. 그래서 에리카가 로엘을 말할 때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했다.

그 아이라면, 가라고 해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갈 거 같았으니까.

그런데 의외로 로엘은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기꺼이 내가 가겠노라고 말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의외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막연히, 이 끔찍한 조국을 벗어나고 싶어서 차악을 선택하는구나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로엘 공주님께서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되셨습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인 거다.

‘카이로스가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선봉장은 로엘 공주님이십니다.’

카이로스가 쳐들어온다는 소리를 들었을때, 그리고 그 선봉이 로엘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조지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너무 덤덤한 자신에게 오히려 더 놀랄 지경이었다. 한창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그 상태에서도 조지의 귀에 저 한마디만큼은 너무도 또렷히 들려왔다. 그렇게 조지에게 선명히 인식시켰다.

그가 쌓은 그 많은 업보들이 돌고 돌아 이제야 값을 치르러 오고 있다고.

둥! 둥! 둥!

그렇게 그의 모든 것을 빼앗고 무너트릴 거라고.

둥! 둥! 둥!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 제이드 네아레스의 유일한 딸에 의해.

둥! 둥! 둥!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카이로스 부대의 북소리에 토르티아의 황실이 흔들렸다.

이건 단순한 북소리만이 아니란 거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힘없이 걸려 있던 토르티아 황실의 휘장이 펄럭거렸다. 얼마 남지 않은 궁인들 역시 그 굉음과 진동에 사색이 되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소란스러움마저 배가되었다.

둥! 둥! 둥!

점점 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만큼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리다.

토르티아의 마지막이. 그리고 조지 네아레스의 마지막이.

“끝을 알리는 소리구나.”

조지는 힘없는 소리로 나지막이 말하며 눈을 감았다.

황금의 부대가,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붉은 성으로 달려오나 보다.

***

둥! 둥! 둥!

붉은 성문 앞, 카이로스의 황금 부대는 일제히 열을 맞추어 섰다. 굳게 닫힌 붉은 문 앞에서 그들은 규칙적인 북소리에 따라 가지고 있는 자신의 무기를 땅에 내리치며 발을 맞추었다.

둥! 둥! 둥!

지면을 흔드는 그 대군의 소리는 마치 토르티아의 마지막을 알려 오는 사신의 소리 같았다.

토르티아를 지키던 마지막 부대가 전멸하고, 벤이 로엘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둔 지 이제 몇 시간이 채 되지도 않은 시간.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카이로스는 그 누구 하나 흥분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마지막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분위기는 고조되기 마련인데도, 카이로스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그렇게 이 기나긴 전쟁의 마지막을 임했다.

둥! 둥! 둥!

그 한가운데 에단이 있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 같은 이 황금의 부대의 가장 중앙. 가장 높은 곳에서, 이 붉은 성의 마지막을 선고하고자 한다.

‘토르티아의 멸망이라. 나에겐 너무도 쉬운 일이지. 너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고.’

로엘은 그와 처음 만난 그날 밤이 떠올랐다. 토르티아를 바치겠다던 그녀의 말에, 그렇게 이 붉은 성을 피로 물들여 달라고 말하던 그녀의 악에 받친 제안에 그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었다. 그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이라고.

로엘은 잠시 숨을 삼켰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한번 카이로스의 군대를 둘러보았다.

오와 열을 완벽하게 맞춘 그들은 숨소리, 발소리 하나까지도 칼같이 맞추고 있었다. 제1선 루카스의 프래카가 황제 폐하를 둘러싸고 그 옆으로 이반의 북방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콜린은 그 옆에, 아론은 에단 옆에 포진하고 있었으며 그 뒤로는 황군이 끝이 보이지 않도록 도열한 채 대기 중이었다.

가히 압도적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정작 그들 속에 있는 로엘조차도, 당장이라도 토르티아 성을 무너트릴 것만 같은 이 군대에게 위압당하였다.

이들이라면, 세상 어느 성이라도 무너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결국, 그가 맞지 않은가.

처음부터, 그에게는 쉬운 일이었던 거다.

그 오랜 역사 동안 한 번도 무너져 본 적 없는 바로 이곳. 이 붉은 토르티아를 무너트리는 일은.

“폐하.”

아론은 짧게 에단을 불렀다. 에단은 그런 아론의 말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이란 뜻이었다.

“카이로스. 1보 전진!”

그러자 바로, 아론의 목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오고,

“카이로스. 1보 전진!”

“카이로스. 1보 전진!”

바로 메아리처럼 그의 말이 울러 퍼졌다. 어찌나 인원이 많은지, 이 짧은 명령 한마디가 전해지는 대도 여러 번의 메아리가 울려야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땅을 흔들며 존재를 과시하던 카이로스 부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카이로스. 2보 전진!”

그리고 또 한 번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로스. 2보 전진!”

“카이로스. 2보 전진!”

또다시 황금 부대가 일제히 움직였다. 그렇게 고작 세 걸음 더 앞으로 전진하였을 뿐인데, 체감상은 훨씬 바짝 토르티아의 성문 앞으로 다가선 것 같았다. 가는 그들이 그러하니, 보고 있는 이들은 어떠할까.

덜덜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저 성루 위에 숨어 있는 초병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거다. 제대로 된 지휘관이 있나. 아니면 그들을 도와줄 많은 동료 병사가 있나. 어쩌다 보니, 이 마지막의 마지막을 지키게 된 불쌍한 잔류병일 뿐인 것을.

벤 장군의 마지막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겁에 질려 붉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던 그들이 이 순간 저리 성큼성큼 다가오는 황금의 대군을 보며 할 수 있는 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저. 자신의 비겁함과 무능함에 자책하며 끝을 맞이하는 수밖에.

“정말 한심하네. 죽어 간 벤 플레어가 불쌍해질 정도야.”

루카스의 볼멘소리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들려왔다. 빈정거리는 그의 말에 아론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소리가 왜 안 나오나 했다.

“맞서 싸울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항복할 용기도 없고.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벤 플레어가 그렇게 죽어 가는 걸 보고도 느끼는 바가 없나?”

“루카스.”

아론보다도 먼저 이반이 한소리 했다. 아직 벤의 죽음이 많이 아플 로엘이 어쩔 수 없이 신경 쓰였다. 그런 이반의 마음을 잘 알기에 로엘 역시 슬쩍 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도 사적인 감정이기에 로엘은 다시금 덤덤한 표정으로 눈앞의 붉은 성을 응시했다.

굳건히 닫힌 저 문이 너무도 처량해 보였다.

‘단 한 번도 저 붉은 성문을 넘은 침략자는 없지. 토르티아의 역사는 무패의 역사야.’

한때는 세상 무엇이 쳐들어와도 꿈쩍 안 할 것 같은 든든한 존재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힘없는 문짝이 되어 버렸나.

‘그럼 언제까지든 토르티아를 지켜 주겠네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

아버지와 함께 저 성루에 서서 광할한 토르티아의 평원을 바라본 것도, 그 광활한 대지에서 이 아름다운 붉은 성벽을 바라본 것도 이토록 선명하건만.

‘붉은 민족의 신념과 의지가 퇴색하고, 서로의 타성에 젖게 된다면. 이 무너지지 않는 성도 언제든 무너지게 되는 법이란다. 처음부터 우리를 지켜 주고 있는 건, 이 성벽이 아닌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들 자신이니까.’

그 마음이 무너져 내려, 이리 붉은 성이 무너져 내리나 보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아버지의 말이 유난히 아프게 들려와,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답답해서, 그렇죠. 답답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뚫고 들어갈 수 있는데.”

하지만 그건, 이 성을 무너트리고자 이곳까지 온 그녀가 할 수 있는 말도, 내색할 수 있는 감정도 아니다.

다시금 루카스의 볼멘소리가 들려와 로엘 역시 자연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벤 플레어마저 사망한 이 시점에서, 토르티아의 붉은 문을 여는 것은 카이로스에게 너무도 쉬운 일. 돌격대장 루카스가 답답해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갔다.

“어제 다 설명했잖아. 멍청아.”

하지만, 그건 에단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 마지막 전투를 시작하기 전부터, 에단은 그리할 마음이 없었다.

“알아들었으니 이리 가만히 있지.”

투정 부리고 있긴 하나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은 루카스도 이미 알고 있다.

이미 그의 주군께서는 결정을 내리셨고, 그 결정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애초에 그 결정은 의심할 여지 없는, 완벽한 최선일 테니까.

“저 바보들이 항복할 용기조차 없으니 답답해서 그런 거예요. 답답해서.”

아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저 철없는 루카스가 길게 투정 부릴 거 같진 않았다.

“답답하긴 하네. 어쩌면 생각보다 오래 버틸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이번엔 이반이 한마디 얹었다. 아론에게 핀잔만 듣던 루카스는 자신과 같은 의견인 이반의 말에 화색이 바로 돌았다. 솔직히 아론이라고 하여 다른 마음인 것도 아니다. 그저 주군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를 뿐이지.

아론도 작은 한숨을 삼키며 여전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붉은 성문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 다가왔는데도 그 흔한 화살 하나를 쏘지 못하는 수성병이라니.

너무 한심스러워 맥이 다 빠질 지경이다.

“항복할 용기조차 없는 자들이라면, 정말 영영 이대로 버틸지도 몰라. 우리가 이대로 물러가 주길 바라면서.”

“아주아주 한심한 발상이죠.”

“너무도 현실감 없는 희망사항이고.”

다들 지금 상황에 한마디씩 얹었다. 그만큼 다른 이들 역시 이제 그만 이 지리한 싸움을 끝내고 싶은 거였다.

어디 그들뿐일까 지휘부가 그러하다면 그 밑의 병사들은 더더욱 그러할 거다.

에단이 원하는 것. 그리고 에단이 의도하는 것.

모두들 알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승리이자 가장 현명한 승리가 곧 무혈 입성이니.

이미 많은 피를 보았고, 많은 생명을 거두어들인 그들에게. 그리고 아무리 최소라고 하더라도 발생한 사상자들을 생각해 본다면, 그래. 에단이 옳다.

결국에 열릴 문을 기다리는 것. 그렇게 이 토르티아의 마지막을 우아하고 고고하게 장식하는 것.

분명 길이길이 역사에 남겨질 테지.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들은 이미 지쳐 있었다.

“폐하.”

카이로스의 부대가 남다르다는 것은 모두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비단 좋은 무기와 좋은 훈련으로 다져진 정예병이라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들은 강했다. 타국에서는 징집하여 일반인을 병사로 만드는 것과 달리 그들은 처음부터 이 나라를 위해 싸우는 병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결속력이 있고 그래서 더 인내할 수 있다.

카이로스의 군대가 강한 것은, 황금의 부대가 무적인 것은 바로 그러한 정신에 기반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이 긴 여정의 마지막까지 이리 흐트러짐 없이 주군의 명을 수행할 수 있다.

“이대로 유지할까요?”

그런 카이로스의 부대가 이제는 지쳤다는 거다. 아무리 다른 어떤 부대보다 강인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더라도. 그렇게 끝까지 자신의 맡은 임무를 다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그들도 사람이므로.

“유지해.”

다만, 그들의 주군께서 지치지 않으셨을 뿐.

단호한 에단의 대답에, 다들 예상했다는 듯 그만 수긍하려는 찰나.

“단. 어느 정도 용기를 불어넣는 선으로.”

에단의 말이 한마디 더 붙었다.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 모두가 갸웃한 와중에, 에단이 오른손을 올리자,

“제1궁부대 사격 준비!”

기다렸다는 듯 칼슨 장군의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사격 준비!”

그러자 바로 대기하고 있던 제1궁수병이 1열에 배치되었다.

기본적으로 루카스의 프래카라든지, 이반의 전속부대와 같은 정예군은 보병 혹은 기마병으로 구성되어 있고, 후단에서 받쳐 주는 역할을 하는 궁병은 중앙 지휘부의 통제 아래에 있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황궁의 궁병단은 에단의 직접적 지휘권 아래에 있는 거다.

그 지휘권을 받아 통솔하는 자가 바로, 시에라의 아버지, 칼슨 장군이다.

“사격 준비 !”

“사격 준비!”

일사분란하게 명령에 맞추어 움직이는 궁부대는 바로 루카스의 프래카보다 앞선에 서 자리를 잡아 활을 들었다.

공성하는 입장에서 이리 성벽 근처에 다가가게 되면, 그만큼 궁병이 닿을 수 있는 비거리가 짧아지게 된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그들은 뒷선에 배치하게 되어 있는데, 지금 그 궁병이 최전선으로 나오게 된 거다. 얼핏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은 배치 명령.

“아. 진짜. 말 좀 미리 해 주시라고요. 괜히 투덜거렸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든 화살을 보는 순간, 바로 모두의 수긍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는 진한 기름 냄새. 그들의 화살은 날카로운 활촉이 아닌 촉촉히 젖은 기름 주머니로 되어 있었다.

“확실히. 없던 용기가 생기겠네.”

이반 역시 루카스와 마찬가지로 실소를 뱉었다. 에단이 무얼 의도했고, 왜 이리 가까이 진격했는지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단순히 토르티아를 압박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저 무거운 화살을 날리기 위함이었나 보다.

로엘은 피식 작은 웃음을 뱉었다. 지난밤의 그의 말이 떠올랐다.

‘토르티아의 성이 왜 붉은지 알아요?’

‘붉은 민족이니까.’

‘틀렸어요. 피로 물들지 말라고, 기원하는 의미로 같은 붉은색 성벽을 쌓아 올린 거예요.’

‘나는 피로 물들일 생각이 없으니 상관없겠군.’

‘네?’

‘나는 그저 더 붉게 만들고 싶을 뿐이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의 말이 맞다. 그는 그저, 더 붉게, 더 뜨겁게 만들 뿐이다.

“발사!”

그렇게 저 굳게 닫힌 붉은 문을 열려나 보다.

불길은 삽시간에 붉은 성벽에 옮겨붙었다. 단순 불화살만 쏘아도 불길이 붙는 법인데, 이렇게 대놓고 기름을 성벽 전체에 퍼붓고 피우는 불이야 말해 뭐할까.

붉은 화마가 토르티아의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불이야!!”

“성벽에 불이 옮겨붙었다!!”

그러니 그 안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허울뿐인 병사들이 무얼 할까. 그저 갑작스런 화염에 혼비백산하여 빠져나가기 바빴다.

“불…… 불이야!!”

“토르티아가 불타오르고 있어!!”

그 모습은 자연히 두려움에 떨고 있던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굳게 걸어 잠근 성문 뒤로 마지막 남은 토르티아 군사들의 죽어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벤 장군의 서거 소식을 들으며 그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도망갈 곳도 없는 그들의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사그라든 거다.

둥! 둥! 둥!

쉬지 않고 계속 들려오는 카이로스의 소리는 다가오는 지옥의 나팔처럼 더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함에도 무능한 왕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성안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귀족이라는 작자들은 애저녁에 금은보화를 챙겨 도성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니, 돈도 없고 힘도 없는, 그래서 갈 데도 없는 그들은 그저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에겐, 정말 기댈 곳이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제이드 님이 또 승전하셨어!!’

‘북방의 야만족을 완적 격파하셨다는데?!’

‘역시. 그분은 신이야. 토르티아에 내려온 무신이라고!!’

한때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그들이 마음 편히 다리 뻗고 잘 수 있도록, 토르티아를 굳건히 지켜 주던 이가 있었는데.

그 귀한 분의 얼굴이 왜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건지.

‘조지 전하가 황위를 받으신대.’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 그럼 제이드 님은?’

‘어쩌긴 뭐 어째. 조지 전하가 제이드 님 싫어하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일인데.’

붉은 민족의 긍지이자 자부심이었던 분.

이리 허무하게 무너지는 아름다운 국가를 가장 빛나게 만들었던 바로 그분.

‘소문에는 제이드 님의 측근을 하나하나 암살한다던데?’

‘제이드 님한테 친절한 시녀들도 죽인단 소문이 있어.’

‘어휴. 몸 사려겠다.’

‘제이드 님이고 뭐고, 일단 나부터 살아야 할 거 아냐.’

그 과분한 분을 그리 허망하게 잃어서. 그 허망함에도 그 누구 하나 목소리를 내지 않아서. 그렇게 하나같이 비겁하게 외면해 버려서, 이리 토르티아가 무너지나 보다.

“황금의 새…….”

이토록 어이가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제이드 님의…… 새잖아…….”

“제이드 님의 새야……!”

이토록 부끄러울 정도로 볼품없게.

“진짜 제이드 님의 독수리야……!”

“제이드 님이 오셨나 봐!”

그렇게 무너지나 보다.

불길은 치솟고, 대군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토르티아의 허공 위로, 아름다운 황금의 독수리가 날아올랐다. 우렁차게 하늘을 울리며, 낮게 활공하는 그 거대한 황금의 새는 마치 신화 속에서 나온 새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 단번에 토르티아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황금이 떨어지고 있어…….”

그런데 그 빛남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성큼 그들에게 다가온 그 거대한 새는 보란 듯 붉은 대지에 황금을 흩뿌렸다.

“진짜…… 황금의 새인가 봐…….”

“제이드 님의 새가……. 카이로스의 것이 되어 버린 거야.”

마치, 황금의 부대가 이 붉은 나라를 뒤덮어 버렸다는 것을 알리듯이.

그렇게 붉은 민족이 이제는 끝나 버렸다는 것을 선고하듯이.

“그래. 로엘 님께서 제이드 님의 복수를 하러 오신 거야…….”

“우리를 벌하러 오셨나 봐……”

“제이드 님을 대신해서, 다시 오신 거야…….”

또 한 번 디케는 큰 소리로 울었다. 그 울음소리에 주변 독수리와 매마저 합류해, 토르티아의 하늘을 메우자 커다란 그림자가 생겼다.

정오에 그림자가 돌아다니는 나라라니.

멸망하기에 딱 좋은 그림이 아닌가.

“그분이 오셨구나…….”

“응……. 그 어여쁘신 분이 오신 거야.”

황금의 부대를 이끌고. 제이드 님의 가호를 받아.

“그렇다면 우린 정말 끝났 거잖아.”

그렇다면야, 토르티아의 그 누가 그 벌을 달게 받지 않으리.

지금 이 순간에도 찾게 되는, 그들의 영웅이 이토록 마음에 선명히 살아 계신 것을.

“그래……. 공주님이라면야.”

잃어버린 그 순간부터 후회해, 지금 이 순간까지 이토록 아픈 것을.

“제이드 님이라면야…….”

이런 결과가 당연한 거다.

토르티아의 백성들은 더 이상 오열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불타오르는 붉은 성벽과 날아드는 황금의 새를 바라볼 뿐이다.

“그래. 제이드 님이라면야.”

“우리의 공주님이라면야.”

저 붉은 성문을 여는 이.

그렇게 하여 토르티아의 이 긴 역사를 끝내는 이.

다른 누구도 아닌, 너무도 소중한 것을 어리석게도 잃어버린, 그들이었나 보다.

***

로엘이 맨 처음 에단에 대해 들은 건, 너무도 유명한 그의 신탁이었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으리.

카이로스와 달리 신전이라든지, 신탁 같은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에게 그의 신탁은 마치 신화에 나온 이야기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저 막연히 카이로스에 엄청난 왕재가 태어났나 보다 하고 가볍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 그를 마주하였을 때. 그 빛나는 황금의 머리와 황금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 정말 신이라도 된 양 마주하는 이를 긴장시키는 그 위압감.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저절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저 신화의 시작 같은 신탁이. 그 어마어마한 예언이. 어쩌면 진짜로 이루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열어라.”

지금 이 순간 로엘은 그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그렇게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붉은 성문은 그의 낮게 울리는 한 마디에 거짓말처럼 덜컹거렸다. 그러더니 끼익 하는 커다란 굉음을 울리며,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으리.

그러자 가장 중앙에 있던, 그가 제일 먼저 유유자적하게 자신의 백마를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히 황금의 부대가 양옆으로 갈리고, 거대한 문마저 완전히 열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로엘은 순간 숨을 멈췄다.

거짓말처럼, 그의 신탁이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으리.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다가도, 순식간에 불이 되어 모든 것을 태워 버리리라.

여전히 매섭게 불길이 치솟고 있었으며,

-가는 곳마다 환호와 통곡이 가득할지니.

그 불길 속에 토르티아의 사람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보라. 만물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되리라.

자기 손으로 열어 버린, 그리고 자기 손으로 끝내 버린 기나긴 자신들의 역사를 안타까워하며.

지나간 날들에 대한 뼈저린 후회를 느끼며.

그들은 에단에게 머리를 조아린 채로 흐느낌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 반해 카이로스의 군사들은 드디어 열린, 그 마지막 문에 하늘이 떠나가라 환호를 질렀다.

“토르티아가 무너졌다!!”

“카이로스!! 카이로스!! 카이로스!!!”

중부의 염원이자 카이로스의 숙원.

그리고 에단과 동시대를 살아온, 지금 이들의 꿈이었던, 바로 이곳 토르티아.

그 오랜 시간 준비를 거쳐, 그 많은 시간과 땀을 흘려, 이 붉은 성에 발을 들였으니 벅차오르는 것은 당연한 법이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도, 수많은 승리들이 있었지만, 그때의 고조와 환호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카이로스마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이들이 수두룩하였으며, 루카스는 물론이거니와 이반과 아론도 서로를 보며 완전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폐하.”

그 와중 유일하게, 이 환호 속에서도 그는 평온했다.

수많은 이들의 통곡과 수많은 이들의 환호 속에서, 그는 당당히 토르티아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모두를 내려 보았다.

-아. 황제시여. 천하를 누리소서.

내리쬐는 태양 아래, 빛나는 그는 눈이 부셨다.

로엘은 그를 올려다보며, 그제야 왜 그가 토르티아의 바로 문 앞에서 진격하지 않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토르티아의 문을 열지 않아.’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원한 거다.

‘문을 여는 건 그들이야.’

그렇게 이 유구한 역사의 붉은 나라를 완전히, 완벽하게 점령하고자 하는 거다.

침략자가 아닌, 토르티아가 스스로 인정한 정당한 권위자로서.

“이 이후, 토르티아는 카이로스에 속한다.”

중부의 최강자이자, 최고 권력자로서, 그는 이 붉은 나라에 당당히 군림하는 거다.

“에단 카이로스 폐하. 만세!!”

루카스의 기다렸다는 듯한 선창을 시작으로,

“에단 카이로스 폐하. 만세!”

카이로스의 목소리가 한 데 모아지더니,

“에단 카이로스 폐하. 만세!!”

뒤이어 토르티아의 목소리마저 얹어졌다.

“에단 카이로스 폐하. 만세!! 만세!”

로엘은 그런 토르티아 사람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나라 잃은 슬픔으로 여전히 눈가에 눈물이 가득한 와중에도, 새로운 주군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괘씸하다거나 한심하기보다는 그저 안쓰러웠다.

그렇게, 또다시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그리 돌아가실 때도 이들은 이런 마음이었을까.

제이드 네아레스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조지 네아레스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을까.

아무것도 없는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걸까.

그렇다면, 그들을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던 그녀의 지난 세월이 너무 허망해질 거 같은데.

“프란시아.”

그걸 말해 주려, 이 사람은 일부러 이들의 피를 보지 않았는지 모른다.

로엘은 자신을 부르는 에단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그 올곧은, 흔들림 없는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참 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있는 그녀의 붉은 눈이 그를 향했다.

“가서 네 자리를 찾아.”

짧지만 강한 한마디.

이 전쟁을 시작한 이유이자, 그녀가 그의 곁으로 오게된 바로 그 이유.

“나의 하늘. 나의 황제 폐하. 프란시아, 로엘 네아레스.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가 문을 열어 주었으니, 마무리를 짓는 것은 그녀.

드디어, 그녀가 꿈에서도 용서하지 못했던 그녀의 숙부를 만나러 간다.

***

토르티아의 황궁은 토르티아 본성 안에 있다.

토르티아의 붉은 성을 지나면 토르티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발달된 도성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그 시장 길을 따라 걸어가면 소위 말하는 황족이 사는 진짜 황궁이 나타난다.

“되게 특이하네. 성안의 성인 셈 아닌가.”

“그런 셈이지.”

그런 토르티아 황궁을 보며 루카스와 이반이 말했다.

그 거대한 성벽도 그리 아름다웠는데, 이리 작은 황궁이야 말해 뭐하랴. 심지어 어느 나라든 가장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이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이다. 섬세한 토르티아의 건축 기술은 그런 토르티아의 황궁을 마치 거대한 조각품처럼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

그 아름다운 황궁 앞에, 그녀가 섰다.

도망치듯 나온 이곳으로 그녀를 다시 오게 해 준 이들과 함께.

정말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그녀가 이리 황금의 부대와 돌아올 줄을.

“프란시아님.”

황궁의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카이로스 군사들의 승리의 환호와 토르티아 백성들의 흐느낌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와 정신없었지만, 수뇌부들은 아직 마무리 지을 일이 남은 거다.

“로엘 님”

그녀를 또렷이 응시하는, 그 대단한 사람들의 시선이 오롯이 로엘을 향했다.

“로엘.”

그리고 그녀를 부르는, 신뢰와 애정이 담긴 그의 목소리.

그녀를 올곧이 바라봐 주는 그 흔들림 없는 황금 눈동자는 두근두근 세차게 심장이 뛰는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래. 그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토르티아.”

바로 잃어버렸던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일.

‘로엘 공주님.’

그 자리를 참 처절히도 짓밟고 빼앗은, 그렇게 지금의 자리에 홀로 앉아 있는 그녀의 숙부를 만나는 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네가 무언가를 하려 드는 순간, 네 아비 꼴이 날 거다.’

그 숙부를 끌어내리는 일.

똑같이. 가장 잔인하고 비열하게. 조금의 정도, 마음도 없이 처절하게. 끝을 내는 일.

에단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보다, 로엘이 몇 걸음 더 앞서 나가 섰다.

그녀의 적마가 당당히 황실의 문 앞에 서고 그 위에 올라탄 로엘은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굳게 닫혀 있던 붉은 성문처럼, 붉은 황실 역시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 닫힌 문을 향해 로엘은 입을 열었다.

“토르티아는 문을 열라.”

토르티아의 멸망은 이미 확정되었다. 에단은 승리를 선언했으며, 토르티아의 백성들은 스스로 문을 열어 항복했다. 즉, 제국 토르티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고, 황제 조지는 더 이상 토르티아의 황제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황궁의 문을 열고 나오지 않는 조지 네아레스의 마음은 무언가.

‘네 아비는. 죽었다. 토르티아의 황제는 나다.’

그는 도대체 무얼 욕심냈으며, 무얼 지키고 싶었던 걸까.

말의 고삐를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멋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토르티아!!”

좀처럼 소리치지 않는, 아니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거의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토르티아를 울렸다. 그러자 환호하던 이들마저, 바로 소리를 죽였다.

웅성거림과 어수선함이 저절로 잦아들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카이로스는 다시금 열을 맞추어 그녀의 뒤에 섰다.

그러고는 마치 그들이 그녀의 뒤에 있다는 것을 알리듯, 강하게 자신의 검집과 창끝으로 땅을 쳐 울렸다.

짧게 오는 진동을 느끼며, 로엘은 뒤돌아서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의 뒤에 누가 어떤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는지.

그래서 자연히 마음이 벅차올랐다.

부모도 뺏기고, 지위도 뺏기고, 나라도 뺏긴 채 쫓겨나온 그녀를,

“프란시아!”

“프란시아!”

카이로스는 분명 마음으로 그녀를 받아 주었다.

처음에는 북방의 공주라는 호기심과 그 유명한 제이드 네아레스의 외동딸이란 사실에 흥미를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다 얼음 같은 황제 폐하의 마음을 얻고, 뜻하지 않은 여러 사건들이 겹치면서 그녀에 대한 소문은 살을 덧붙여 가며 입방아에 오르내렸겠지.

“프란시아!”

프란시아의 지위를 얻고 나서는 아마 좀 더 맹목적인 이유로, 그녀를 따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항상 그녀를 환히 웃으며 반겨 주었다. 로엘은 바로 그 사실이 고마웠다.

“프란시아!”

그 순수한 동경. 애정. 믿음. 신뢰.

그들은, 그녀가 너무도 사랑했던 그녀의 붉은 백성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렇게 외면당하고 배신당해, 증오만 가득했던 그녀가 잊어버렸던, 바로 그 좋은 추억들을 기억나게 했다.

“프란시아!”

그래서 그녀는 다시금 토르티아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인정하고야 말았다.

그들도 어쩔 수 없었겠구나 하고.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들이 아버지를 거짓으로 위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니 그 지나간 좋은 감정마저 부정할 것은 없다고.

그들은 그녀에게,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분명 진심이었다고.

그러니 미워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용서하자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로엘 자신을 위해서 그러자고.

“카이로스. 프란시아님을 따릅니다!”

카이로스는 분명히, 그 사실을 로엘에게 알려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금, 굳게 닫았던 마음을 열 수 있었다. 다른 모두에게.

로엘의 입가에 어쩔 수 없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토르티아는 문을 열고, 나. 로엘 네아레스에게 예를 갖추라!”

그녀의 목소리가 또 한 번 토르티아를 울렸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이 목소리는 문 뒤에서 떨고 있는, 황궁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졌을 터.

바람마저 잦아들고,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더니,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토르티아 황궁의 문이 열렸다.

“토르티아의 제1공주 마마. 로엘 네아레스 님께 예를 갖춥니다.”

“로엘 네아레스 님께 예를 갖춥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잠시 카이로스 사람들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로엘 네아레스 님께 예를 갖춥니다.”

끝이 보이지 않은 붉은 머리 궁인들의 향연.

90도 이상으로 깊게 허리를 숙인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한 그들은 일제 입을 모았다.

에리카가 떠나면서, 그리고 카이로스의 군대가 턱밑까지 다가오며 조지는 많은 궁인들이 도망갔다고 생각했겠지. 애석하게도, 그들은 조지에게서만 도망간 거다.

“로엘 네아레스 님께 예를 갖춥니다.”

로엘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로 예를 갖추는 그들을 마주한 순간 로엘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준비된 대열. 상황. 목소리.

그래. 그녀는 알아 버리고 만 거다.

이들이, 그녀를 기다렸단 사실을.

‘아이고, 공주님!’

‘그러시면 안 되신다니까요!!’

머리가 희끗해진, 낯익은 사람들이 보이는가 하면, 어렸던 궁인이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 있기도 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한들, 같은 옷을 입고 있다고 한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속해 있다고 한들 로엘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곳을 떠날 때까지 함께하였던 이들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몇 년 만에 보는 것인데도 이리 선명히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그러한데, 저들이라고 그러니 아니할까.

그러니, 이는 그녀가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분명 피의 복수를 꿈꿨건만.

자신의 부모를 외면한 그 모든 이들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 했는데.

모두가 이리 그녀를 기다렸다는 모습을 보이면, 그렇게 기꺼이 그녀의 칼 앞에 서겠다 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러기엔, 지나간 세월 동안 그녀가 가졌던 이들에 대한 감정이 너무도 진심이었으니까.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것은 결국 그만큼 믿고 사랑했다는 증거.

로엘은 자신을 품에 안고 키웠던, 저 맨 끝줄에 선 노모 상궁의 굽은 허리에 울컥함을 억지로 삼켰다.

“토르티아는 내게 길을 여세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죽으라 하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에게 나온 그녀의 말은 그저 길을 비키라는 것뿐이었다.

그저 모든 것을 묻겠다는 덤덤한 표정. 그래. 그녀는 더 이상 그들에게 분노하지 않았다.

그래서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공주님.”

“로엘 공주님.”

그것이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붙잡고야 말았다. 그녀의 명령에 양옆으로 길을 트면서도, 그들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불렀다.

참고 참았던 것을 터트려 내듯,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애절하고 처절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다들 아무도 없어?! 다들 어디 간 거에요!!’

지난날의 잘못이 이토록 오랫동안 아플 줄 알았던가.

여전히. 지금도 너무 죄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는데. 어째서 이분은, 이 순간이 되어서도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는가.

어떻게 남은 생애를 속죄하라고, 우리에게 이러시나.

“잘못했어요, 공주님.”

“잘못했습니다. 공주님.”

“너무너무 저희가 잘못했어요.”

저 밖, 토르티아 백성들의 오열보다 더 큰 오열이 터져 나왔다. 언제 어디서든 흐트러지지 않는 궁인답지 않게, 그들은 하나같이 땅에 주저앉아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통곡했다.

이렇게라도 죽기 전에 한 번쯤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 밤 이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그런데 그 이기적인 소망을 이분은 이리 이루어 주시나 보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공주 마마.”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도.

그러니 그 오래된 피눈물의 사죄는 꽤 길게 토르티아 황구을 울렸다.

***

“여전하네.”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고요한 황실을 울렸다. 붉은 금장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거대한 토르티아의 휘장이 연이어 천장에서부터 내려왔다. 카이로스의 황궁이 그 크기와 화려함에 압도당한다면, 토르티아의 황궁은 이 웅장함에 압도당하는 법이다.

황좌가 있는 중앙 홀까지 이어지는 이 붉은 길을 어린 날 얼마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걸었던가. 아무리 숙부가 핍박하고, 이 숨 막히는 곳이 싫었어도 이 길만큼은 없던 애국심마저 생기게 만들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길을 당당히 걷는 아버지의 그 뒷모습이 좋았던 거지만.

무엇이 되었든, 이 길은 토르티아 황실의 자부심이자, 자존심과 같은 거다.

그 여전한 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했다.

마치, 이 커다란 황궁에 아무도 없다는 듯.

“……여전하지도 않네.”

그래서 홀로 이 길을 걷는 그녀의 입에서 작은 실소가 나왔다.

자신의 발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이 큰 길이 언제부터 이리 쓸쓸했던가.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 만큼 짙은 적막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를 더 선명히 들려주었다. 그 말은, 이 안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은 그 모든 소리를 들었다는 말이다.

벤 플레어의 사망 소식도. 마지막 남은 황군 부대의 전멸 소식도. 땅을 울리는 카이로스 대군의 소리도. 불타오르는 토르티아의 성벽의 소리도. 그 불타오르는 성문을 넘어 토르티아의 하늘을 날았던 디케의 소리와 제이드와 로엘을 연호하며 통곡하는 토르티아의 소리까지 전부 다.

그 패망의 소리를 듣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황제라.

“그건 황제가 아니지.”

그녀의 발걸음이 딱 멈추었다. 활쫙 열린 중앙 홀 문 너머, 그토록 보고 싶었던 바로 그 사람이 홀로 앉아 있었다.

‘숙부님.’

한번도 자신을 살갑게 대해 준 적이 없는 분.

‘숙부님께 인사드립니다.’

한 번도 자신의 인사를 받아 준 적이 없는 바로 그분.

‘토르티아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춥니다.’

그렇게 일관되게 그녀를 외면했던 바로 그분.

그저 외면만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네 아비는 죽었다.’

왜 그리도 지독하게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으셨을까.

‘네 어미도 죽어 버렸다.’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셔도 되지 않았나.

‘너는 이제부터 죽은 사람이다. 토르티아 공주 로엘 네아레스는 더 이상 없어.’

무엇이 그리 두려워 그렇게 짐승만도 못한 일을 하셨나.

“토르티아의 제1공주 로엘 네아레스. 숙부님을 뵙습니다.”

이리 비참한 마지막이 되어 버릴 것을.

로엘은 조지 앞에 다다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저 멀리서부터 봐 왔음에도 조지는 여전히 단상 위 황좌에 홀로 앉아 그런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붉디붉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버리고, 인상만 쓰던 그 눈가는 주름이 가득했다. 굽은 어깨는 두꺼운 황제의 모포마저 버거워 보였으며, 허리는 제대로 펴지 못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영락없는, 힘없고 지친 노인의 모습.

너무도 볼품없는 그 노쇠한 모습에 로엘은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정말 이자는 무엇을 위해 그리 못되고 악독하게 굴었을까.

로엘은 들고 있는 검을 그대로 조지에게 뻗었다.

“카이로스의 프란시아. 로엘 네아레스. 토르티아의 황제에게 명한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곧은 선.

그 완벽한 자세가 마치 제이드를 보는 듯했다.

그래서 조지의 흐릿한 눈에는 이 순간, 자신을 평생토록 괴롭힌 바로 그 형님이 겹쳐 보였다.

“토르티아의 마지막 황제는 패망국의 황제로서 자결하라.”

크지 않지만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토르티아 황제의 마지막을 고하는 말이 울려 퍼지는데도, 조지를 위해 나서주는 이 하나가 없었다. 아니,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이조차도 없었다.

이건 처음부터 정해진, 그런 결말이었으니까.

“하.”

로엘 네아레스가 토르티아의 황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하하.”

아니, 에단 카이로스가 토르티아의 성문을 여는 순간부터.

“하하!”

아니면, 토르티아가 로엘을 카이로스로 내치는 순간부터.

“하하하!”

그도 아니면. 그래. 그가 제이드 네아레스를 그렇게 죽여 버린 그 순간부터 정해진 결말인 거다.

‘폐하. 저는 한순간도 욕심낸 적 없습니다.’

아. 왜 이렇게 선명히 기억나는 걸까.

조지는 로엘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꺼플이 더더욱 무거워짐을 느꼈다.

‘아우님. 나는 아우님의 것을 탐하지 않아.’

한때 분명 형님, 아우 했던 시절도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던 ‘아우님’이란 바로 그 단어가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걸 보면, 정말 형님은 저 위에서까지 그를 지독히도 벌주고 싶었나 보다.

태어나 보니 모든 것이 자신보다 뛰어난 형제가 있다는 건 비극이다.

더더욱 황권을 물려받아야 하는 황족에게 그런 형제가 있는 것은 지옥 그 자체다.

사람들이 제이드의 칭찬을 한 번 할 때마다, 조지 네아레스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는 백 마디였으니. 그리고 천 마디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질타가 쏟아졌다.

그래서 지옥을 끊어 내기 위해, 그 형제를 죽였을 뿐인데.

“건방 떨지 마.”

그 끝맺음이 더 큰 지옥을 가져온다는 것을 몰랐을 뿐인데.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조지는 손에 힘을 주고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지 꽤 오래된 줄 알았는데, 이리 로엘을 마주하니 아직 놓지 못했던 자존심이 있었나 보다.

‘나는 형님이 너무 싫어.’

그건, 너무도 뿌리 깊은, 조지 네아레스의 자격지심.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의 이 비참한 그를 만든, 헛되고 비뚤어진 욕망의 찌꺼기.

“반역자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은 토르티아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려라.”

주름진 손이 하얗게 될 때까지, 황좌를 움켜쥔 그 늙은 손이 애처로웠다. 덜덜 떨리는 몸을 숨기지 못한 채로, 마약에 찌들어 흐려진 눈동자에 눈물이 흘렀다.

“내가 토르티아의 황제다.”

참 애처롭고, 비참하고, 외로운 마지막이 아닌가.

로엘은 망설이지 않고, 조지의 왼쪽 가슴에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어머니의 검을 꽂았다.

붉고 뜨거운 피가 그 검을 따라 흘러내렸다.

“크흡!”

뒤이어 입에서 피를 토해 냈다. 그제야, 조지는 흐려졌던 시야가 환해짐을 느꼈다.

아. 이렇게 얼룩 없는, 선명한 시야가 얼마만이던가.

그 붉은 눈에 가득 찬 이는 자신의 형님을 꼭 닮은 하나뿐인 조카님.

‘숙부님은 후회하게 되실 거예요.’

레아 칼리드가 로엘의 품에서 죽어 가던 때에, 그녀를 탑에 가뒀던 바로 그날.

그때까지만 해도 악에 받치던 로엘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 말이다.

‘그 후회가 더해지고 또 더해져. 죽어서도 지옥을 면치 못하실 겁니다.’

사실, 형님을 죽였던 그 순간부터 후회했다고.

한동안 부인하고 또 부인했지만. 그날 밤. 실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축배를 들었으나 그 밤, 도저히 눈이 감기지 않았다고.

그래. 조지는 로엘에게 그렇게 고백을 해야 하는 순간일지 모른다.

“로엘.”

그러나 절대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진 않겠지.

처음으로, 조지는 로엘의 이름을 불렀다.

그 옛날 이 아이가 손바닥만 하던 시절에도 한 번을 불러 준 적이 없었던 바로 그 이름.

조지는 제이드의 자식이 아들이 아닌 딸이어서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자신에게 없는 바로 그 아들마저 제이드가 가져 버린다면, 정말 당장 황권을 뺏겨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만난 첫 조카이자 마지막 조카가 바로 로엘.

‘로엘 공주님이십니다. 너무 어여쁘지 않습니까? 폐하.’

처음 이 아이를 만난 그 순간, 조지는 생각했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아기도 있을 수 있구나 하고.

그래.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시종일관 차갑게 굴던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인사를 거르지 않을 만큼 밝은 아이였으니. 하루하루 이 아이의 눈치가 빤해지고, 빨리 철이 드는 걸을 알았지만 조지는 일부러 그런 로엘에게 더 차갑게 굴었다.

그러함에도 이 아이는 갈수록 더 빛이 났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사랑스러워졌다.

‘안녕하세요, 숙부님.’

그 사랑스러운 아이가 그렇게 매번 그에게 인사를 먼저 건넨 거다.

그 인사를 한 번도 받지 않은 것이, 그래. 조금 후회된다면 후회된달까.

제이드 네아레스를 미워하는 그 못난 마음을 이 아이가 온몸으로 받을 이유 따윈 없었는데.

조지는 겨우겨우 자신의 심장을 후벼파는 로엘의 손을 잡았다.

“으윽.”

아. 다시금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숙부님. 당신은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거예요.”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렇게 용서받지 못한 채, 끝없이 사죄하세요.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께 머리를 조아리고, 피눈물을 쏟으며 그렇게 사죄하세요. 내가 잘못했노라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그의 귓가에 낮게 울려 퍼지는 그 낮은 목소리는 차갑기도 하였다. 불처럼 뜨거운 붉은 눈동자를 가진 조카님이 이런 서슬 퍼런 눈도 할 줄 알았나.

경멸하고 증오하는 그 눈빛에 조지는 작은 실소를 뱉으며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그 피가 하얀 로엘의 얼굴에 튀었지만, 로엘은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옥 끝까지 사죄하신다면, 그래요. 내가 에리카를 세상 끝까지 쫓아 찢어 죽이는 일은 하지 않을게요.”

그 대신 조지의 심장을 철렁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내뱉었다. 살짝 로엘의 손을 잡은 그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차마 화낼 힘은 없었는지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 애절한 무언의 부탁을 할 뿐이다.

그 아비의 눈에 로엘은 오히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 자식은 그리 귀하면서, 어떻게 남의 자식 귀한 줄 모르나,

그리 자기 가족은 소중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형제는 그리 잔인하게 죽였나.

정말 조금도 용서할 수 없다.

“저는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또 한 번 로엘의 손에 힘이 들어가 좀 더 깊숙이 조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덜덜 떨리던 진동마저 사그라들며, 거친 숨소리도 숨이 죽어 갔다.

무력하고 비참한, 쓸쓸하고 볼품없는 그 마지막에 정말 다다른 거다.

“지옥에 떨어지세요. 숙부님.”

안녕히 가세요.

라는 그 한마디를 하지 않은 채 로엘은 그만 검을 거두어들였다.

단번에 빠진 검과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며, 조지는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와중에도 그 눈만큼은 여전히 로엘을 향했다. 흐려진 시야 속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로엘의 눈을 보며, 조지는 다시금 제이드를 보였다.

그래. 알고 있다

자신을 죽인 건 로엘이 아닌 제이드란 사실을.

그러니 이런 결말. 조금도 억울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자신이 만들어 낸 인과응보.

‘토르티아 제28대 황제로 조지 네아레스를 임명한다.’

못나게 태어난 자신의 짐승 같은 업보에 대한 정당한 결과인 거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사죄하러 가야겠다.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폐하. 언제나 영광이 함께하시길.’

꾹꾹 눌러 담은 자신의 이 못나고 부끄러운 마음을 형님에게 고백하기 위해.

지옥 속으로 떨어져, 그렇게 사죄하고 또 사죄해야겠다.

***

비릿한 피 냄새는 순식간에 넓은 중앙 홀을 가득 메웠다. 조지와 로엘만이 있던 그곳에 이제는 로엘만이 존재했다.

로엘은 자신의 발 밑에 뜨거운 피가 점점 더 번져 나가는 것을 말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마음이 평온했다. 그녀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덤덤하였다.

“……다 끝났네.”

이 순간을, 그녀는 꽤 많이 상상했던 거 같은데. 이런 기분이 들 줄은 몰랐다.

기쁨에 겨워 환희의 눈물을 터트릴까. 아니면 염원했던 것을 이루어 그동안의 삶에 대한 통한의 오열을 할까.

그도 아니면, 이런 사람이라도 자신의 숙부라며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든가, 그 비참한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서 연민이라도 들까.

참 많이도 생각해 봤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다 틀렸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저 허망했다.

“생각했던 기분이 아니지.”

그렇게 멍하니 조지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뒤에서부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반이었다.

“생각했던 후련함도 아닐 테고.”

이반은 천천히 로엘에게로 다가섰다. 보아하니, 홀로 들어간 그녀를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모든 것을 끝낼, 그런 시간이었으니.

그녀를 걱정한다기보다, 그녀를 배려하여 잠시 그녀만의 시간을 주었던 거다.

더 이상 길어지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제라도 들어온 걸 테고.

로엘은 자신의 옆에 서는 이반을 잠시 바라보았다. 로엘만큼이나 이반도 덤덤했다.

“결국 이리될 거면서.”

뭘 그리 추악하게 살아왔나.

힘없이 쓰러져 있는 조지를 바라보며, 이반이 작은 실소를 뱉었다. 이 사람의 악행에 흘린 그와 그녀의 눈물만 얼마이며, 그 때문에 고통받은 나날이 얼마인가.

돌고 돌아 이리 비참하고 외로이, 모든 것을 빼앗겨 죽어 버릴 것을.

“참 사람 허망하게 만드네.”

이반은 작은 욕을 뱉었다.

이 무책임한 죽음에 화도 나지 않았다.

이자가 로엘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으리라 이반은 생각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그런 짓들을 하지도 않았겠지.

‘토르티아는 아름다운 나라야.’

토르티아라는 역사와 전통이 깊은 이 나라를,

‘제이드 네아레스가 있는 한 토르티아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어.’

그것도 가장 찬란한 시기에 놓였던 바로 그 나라를 이렇게 단번에 망가트리고, 무너트릴 만큼 어리석고 무능했던 황제.

‘토르티아가 제이드 네아레스라는 축복을 받았다면, 조지 네아레스라는 저주를 함께 받은 거야. 하늘은 생각보다 공평했던 거지. 아닌가. 생각보다 잔인한 건가.’

가진 것이라곤 고작 적자라는 그 핏줄밖에 없었으면서,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이 한심한 황제는 결국 붉은 나라를 역사 속에서 없애고 붉은 민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 이후부터, 토르티아는 카이로스에 속한다.’

그 업보를, 이자는 선조와 후세들에게 어떻게 갚으려는 건가.

이반은 여전히 조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로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끝났어.”

물론, 그중 가장 큰 업보를 갚아야 하는 사람은 당연이 이 아이겠지만.

손에 잡힌, 그녀의 어깨가 너무도 가늘어 새삼 이 여자가 얼마나 작은 여인인지 와닿았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질 것 같은 어깨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짐이 올라가 있었나.

이제야 그중 가장 큰 짐이 내려간 거다.

“드디어 끝난 거야.”

“응. 맞아.”

그러니 이제는 그녀도 숨을 쉴 수 있다.

참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힌, 그 끔찍한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진짜, 끝난 거야.”

로엘은 조지를 바라보던 시선을 올려, 정면의 토르티아 황좌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붉은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일자로 다부진 입가에는 감정 하나가 깃들지 않았다.

덤덤히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이반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반은 그저, 그녀가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 동안 옆에서 지켜봐 주고 싶을 뿐이다.

“이반. 너도 저 자리가 한 번이라도 욕심났었니.”

“아니.”

“어째서.”

“내 자리가 아니니까.”

이반은 바로 답했다.

그리고 그건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심이었고.

“만일, 카이로스의 황제가 조지 네아레스였어도, 그랬어도 그랬을까.”

그런데 바뀐 질문에는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반의 즉답은 당연히 에단이 있기에 가능한 답이었으므로.

그 누구보다도 황제에 어울리는 이가, 자기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어디 감히 다른 이가 그 자리를 탐내 할까.

모든 것을 빼앗긴 몰브가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뿐, 그 이전까지만 하여도 몰브 역시 감히 황권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에단 카이로스라는 황제가 너무도, 의심할 나위 없이 완벽하였으므로.

“조지 네아레스라.”

이 무능하고 한심한 황제라.

“그렇다면 조금 말이 달라지지.”

이 역시 이반의 진심.

이반이 충성하는 것은 에단인 거지, 단순히 ‘형제’라는 이유로 충성하는 것은 아니므로.

“무능한 황제로 내 조국이 무너지고 있다면야, 그렇게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면, 그리고 내게 그걸 멈출 힘이 있다면. 글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 같아. 아주 솔직히.”

이반은 진솔히 말했다.

그게 그녀가 원하는 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을까.”

로엘의 시선이 다시금 이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이반도 선뜩 답하지 못했다. 그건, 그 역시 가지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므로.

“글쎄.”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하기엔 이미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너무 사랑했던 게 아닐까. 토르티아 자체를.”

그저, 이 긴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사랑했다면 더더욱, 더더욱 하셨어야지. 그렇게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셨어야지.”

조금 높아진 목소리.

“그래야 사랑했다는 그 말이 맞는 거잖아……!”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 같았던 그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이 깃들었다.

모든 것이 끝나 버린 지금 이 시점에서, 이렇게 허망하게 토르티아는 무너지고, 조지 네아레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이반은 그 한마디가 무엇일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러길래, 처음부터……!”

처음부터 아버지가 황제가 되었으면 되지 않았냐고.

도대체 그 감내는 누굴 위한 거였냐고.

참 많은 이들이 속에 품고 있었던 바로 그 말.

마치 이 지경이 된 것은 결국 제이드 님 탓이라는 그 억울한 책임 전가의 화살들.

그 말들을 들으며 로엘은 분명 억울함에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죽어라 이 나라를 지킬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억울하게 세상을 떠날 때도, 떠난 후에도 목소리 한 번을 내지 않았으면서.

그래서 로엘은 더더욱 그 한마디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로엘은 너무도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정말 아버지만 마음먹으셨으면……!”

너무도 아버지가 보고 싶었으니까.

참았던 눈물이 결국 한 방울 떨어졌다.

로엘의 어깨를 잡은 이반의 손에 다시금 힘이 실렸다.

아무래도 그는 오답을 말했나 보다.

조지 네아레스였대도 욕심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답할 걸 그랬나 보다.

그럼, 이 아이가 덜 아팠을까

“애석하게도, 스승님이 사랑하는 그 토르티아에는 조지 네아레스도 있었나 보지.”

로엘의 눈물이 또 한 방울 떨어졌다.

로엘 역시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았던 바로 그 답.

그래. 아버지는 정말 토르티아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거다.

자신을 평생 괴롭혔던 바로 그 이복형제까지도.

“사랑하는 가족과 형제들. 동료들도 들어가 있었을 테고.”

정말 어리석을 만큼, 그 모든 것에 대해 온 마음을 바쳐 그리 사랑했던 거다.

“그게 화가 나.”

다들 신이라고 부르니, 정말 신이라도 되신 줄 알았나 보다.

로엘은 한 방울 이상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아, 양손을 꼭 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화가 나고, 짜증 나.”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수만 가지의 복잡한 감정이 한데 어우러져, 그렇게 로엘의 가슴을 후벼팠다.

이렇게 힘들게 모든 것을 마무리 지었건만 어째서 그녀에겐 이토록 후회되는 일들 뿐인 건지.

로엘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던 이반의 손이 위로 올라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로엘의 어떤 기분인지 감히 안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고생했어, 네아.”

그래서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그저, 지금 곁을 지킬 뿐.

“나도 그래.”

제이드 네아레스를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이 마무리를 함께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한동안, 로엘과 이반은 말없이 제이드를 그렸다.

그렇게 서로를 위로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정말 고생이 많았다고. 이제는 그만, 제이드를 구하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자고.

그렇게 기쁘게 추억하자고.

***

토르티아 본성에 도착해서 지금 이 토르티아 황궁의 계단을 오르기까지, 생각해 보면 너무도 짧은 시간이 걸렸다. 앞장서는 이반의 뒤를 따라 걸으며 로엘은 이 순간이 너무도 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같이 너무 좋다기보다 그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소리가 들려.”

“너를 위한 소리야.”

토르티아 황궁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하는 돌계단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조금 어두웠다. 앞서던 이반은 울리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슬쩍 그녀를 뒤돌아보며 답했다.

그녀의 말대로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카이로스가 한데 모여, 어쩌면 토르티아까지 함께 모여, 그렇게 로엘을 기다리고 있는 거다. 이 붉은 성에 그녀가 다시 오르기까지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그녀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는지 지금 저곳에서 환호하는 사람들 중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만큼 토르티아와 카이로스 모두가 인정하는 파란만장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로엘 네아레스다.

“너를 위한 승리의 순간이지.”

마지막 계단에 다다라, 이반은 뒤를 돌아 로엘을 마주했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문 바로 앞에서 이반은 로엘을 보며 미소 지었다.

‘네아.’

처음 만난 곳은 신록이 우거진 여름날의 타르타니.

‘카이로스 제1황자, 이반 카이로스.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다시 만난 곳은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황금의 성.

‘오래된 벗으로서, 나의 스승님의 영애로서, 사랑하는 형제의 반려로서, 그리고 이 나라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로서, 카이로스 제1황자 이반 카이로스. 로엘 네아레스 님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이곳. 이 붉은 성에 함께 서기까지.

그래. 두 사람의 시간도 참 빠르게도 지나갔다.

그 숱한 우여곡절과 시련 속에서도. 그렇게 아프고 힘들어하다, 엇갈리고 부딪치다. 이렇게 다시금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너무도 편한 사이가 되어 버려, 이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되는, 그런 소중한 존재가 되어.

“로엘 네아레스 마마.”

이반은 로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로엘 역시 미소와 함께 그의 손을 잡았다.

이반의 입에서 나온 그 낯선 존칭이, 도리어 두 사람을 더 웃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깨닫게 만들었다.

“황자 이반.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님을 뫼십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반마저도 그녀에게 허리를 숙이고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

그만 진지하고, 그만큼 뜻깊으며, 그만큼 중요한 순간인 거다.

이반은 자신의 손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자연스럽게 그 하얀 손등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프란시아님의 길에 축복이 깃들길.”

진심과 애정이 가득한 그 짧은 한마디에는 그녀를 위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고. 너는 잘해 왔다고. 그러니 지금의 이 환호를 받아도 된다고. 그래서 너무도 축하한다고.

그 마음이, 말없이도 전해져 와 그녀의 미소를 좀 더 진하게 만들었다.

로엘은 자신을 에스코트해 주는 이가 이반이라, 너무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반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 순간 이리 평온할 수 없었을 테니.

이건 에단이 주는 안정감과는 다른, 이반만이 줄 수 있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데서 오는 편안함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녀에게 있어서 이반이 ‘가족’이 아닐 수 있을까.

‘이반!’

그 옛날 타르티나의 숲에서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던 그 시절부터.

그리고 여기. 그녀의 기나긴 승리가 끝나는 이 시점까지.

“자. 이제 진짜 가 보실까.”

그녀는 언제나 그의 승리의 여신.

그런 그녀가 이제는 세상 모든 이들의 여신이 되려 한다.

***

이반과 함께 에단이 있는 곳으로 오르며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걷고 있는, 카이로스에서 가장 높고 위대한 바로 그 자리를 올라가는 이 돌길이 자신이 유폐되어 있었던 바로 그 탑과 매우 유사한 거 같다고.

어린 날, 그 높은 탑을 오를 때마다 그녀는 늘 그 계단이 마치 지옥에 끌려가는 길목 같아서 참 싫어했다. 아무리 밖에 햇빛이 쨍쨍해도 신기할 정도로 빛이 들이치지 않아서, 걸어도 걸어도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렇게 함께 계단을 오르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투덜거리곤 했다.

물론, 진짜 그 곳에 유폐될 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그런데, 그 길이 바로 지금, 로엘이 걸어온 바로 이 길과 이토록 닮아 있을 줄이야.

‘고백하자면, 나도 여긴 처음 올라가 봐.’

‘처음 오른다고?’

‘응. 거긴 오로지 토르티아 황제만이 오를 수 있는 곳이거든.’

로엘은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이토록 비슷한, 그저 흔한 돌계단일 뿐인데.

유폐된 탑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무섭고, 토르티아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의 자리로 가는 길은 이리 고귀하게 느껴지다니.

그러니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가.

‘가장 중요한 건 뭐다?’

‘마음!’

결국 그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었던 것뿐인데.

항상 자신의 가슴을 팡팡 치며, 제일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주문처럼 말하던 아버지가 생각나 그녀는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아버지는 틀린 것이 없다.

“자. 이제 진짜 가 보실까.”

이반이 무거운 문을 열자 순식간에 햇빛이 그녀를 덮쳐왔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환한 태양 아래로 나오자, 로엘은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카이로스! 카이로스! 카이로스!!”

멀게만 느껴지던 엄청난 환호 소리가 그제야 제대로, 어마어마한 크기로 그녀의 귀를 울렸다.

“황제 폐하! 만세!”

그 빛들 사이로 희미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한 사람.

“에단 황제 폐하! 만세!”

아무리 눈이 부셔도 로엘은 그에게로 다가서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치 홀린 듯, 빛을 뚫고 그에게로 다가섰다. 그러자, 눈이 부신 태양 빛을 한 몸에 받으며, 그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려 손을 내밀었다.

“로엘.”

그녀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이 목소리.

로엘이 그 큰 손을 망설임 없이 잡는 순간, 그리고 그 역시 그녀의 손을 똑같이 마주 잡은 바로 그 순간,

“프란시아님이다!!”

거짓말처럼 시야가 밝아지고,

“프란시아 만세!!”

“로엘 님 만세!!!”

그제야 카이로스 성을 가득 메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프란시아님 만세!!”

그 모든 이들이 로엘을 보자, 그녀를 불렀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토르티아의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는 한눈에 다 들어오기도 힘들 정도였다.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다들 꼼짝도 하기 힘들 만큼 지쳐 있을 텐데도, 카이로스의 군사들은 하나같이 황금의 투구를 벗어 던지며 에단과 그녀를 연호하였다.

“카이로스 만세!!!!”

그러니 어떻게 벅차오르지 않으랴.

로엘은 홀린 듯 토르티아의 성벽을 짚으며,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 냈는지 돌아보았다. 붉은 성 한가득 황금의 깃발이 흩날리고,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에단을 상징하는 카이로스 황제의 깃발이 펄럭였다.

“에단 폐하 만세!!!!”

그리고 그 옆에, 당당히 자리한 프란시아의 깃발.

“프란시아님 만세!!!”

찬란한 태양 아래, 이 아름다운 붉은 성 가장 높은 곳에, 빛나는 황금 깃발이 펄럭이는 거다.

“이제야 실감이 좀 나나 보네.”

에단은 미세하게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잡아 주며 말했다. 익숙한 온기가 그녀에게 전해 오자, 로엘은 자연히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그를 보았다.

겨우 마주한 이 황금의 눈동자.

이 아름다운 눈을 보니, 참았던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다.

이건, 후회도 미움도 절망도 후련함도 아닌. 그저 순수한 기쁨의 눈물.

‘글쎄. 변덕 정도로 해 두지.’

오로지, 이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선물 같은 눈물이다.

‘카이로스에 온 것을 환영한다.’

절망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 한 줄의 빛과 같았던 이.

‘가자. 토르티아로.’

도망쳐 나온 이곳으로 다시 가슴을 펴고 돌아올 수 있게 해 준 사람.

‘가서 네 자리를 찾아.’

절망에서 희망이 되어 주고, 어둠 속에서 빛이 되어 불가능을 가능케 하니.

그래. 어떻게 이 남자가 ‘신’이라 불리우지 않을 수 있을까.

“로엘.”

그런 그가 그녀를 불렀다. 여전히 시선은 곧게 환호하는 백성들을 향한 채로, 한쪽 손은 보란 듯 그녀의 어깨를 안은 채로.

“네. 폐하.”

그래서 그녀 역시 다시금 자신을 연호하는 백성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울컥하는 마음을 다잡고 미소 지었다.

이 사람 옆에 서는 것이 어색하지 않도록. 그리고 부끄럽지 않도록.

진심을 다해, 자신을 우러러 보며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는 이들을 마주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카이로스에서는 황제의 승은을 입은 여인에게 영지나 성을 내리는 일이 종종 있다고.”

“네?”

“그래서, 내가 못다 한 그 선물을 주려 해.”

그래서 너무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소리에도 여전히 손을 흔들며,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응으로 그를 슬쩍 보면서도, 금세 백성을 보며 순수하게 웃어 주는 그녀의 반응에 그는 속으로 웃었다.

정말 타고난 황후감이 아닌가.

황제에게 솔직한 것도. 백성에게 애정 어린 것도 전부 다.

“저는 이미 많은 것을 받았는걸요. 베리타스 열쇠도 받았고, 다음 날 엄청난 금은보화도 받았고, 또…….“

게다가, 지나치게 욕심도 없다.

검소함까진 카이로스 황후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만, 정말 차고 넘치는 여인이다.

이러니, 놓지 못할밖에. 에단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그것밖에 기억 안 나면 많이 서운할 거 같은데.”

“아니, 첫날밤 말입니다. 첫날밤.”

“그렇게 따지면, 진짜 첫날밤 것을 못 받은 셈이군. 어처구니없게도 진짜 첫날밤은 훨씬 더 뒤에 있었으니.”

“폐하, 좀……!”

이 와중에 무슨 가당치도 않은 농을 하시려 이러시나. 로엘은 짓궂은 에단의 말에 얼굴을 붉힌 채 살짝 그를 흘겼다.

도통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아직 나는 안 끝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녀가 다시 반문하기 전에 그가 반대편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렇게 크게 환호하던 모든 이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자신들의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께서 말씀을 하신다는데 감히 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거다.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의 말씀을 받듭니다.”

그래서 한목소리로 자신들은 들을 준비되었다는 예를 갖추었다.

잘 훈련받은 군인임을 나타내는 이 절도 있는 행동들은 가히 장관이었다. 그렇게 흥분 상태이던 이들이 이리 한순간에 진정되다니.

“카이로스 황제의 이름으로 명한다.”

새삼 카이로스가 얼마나 잘 조직되었는지, 그리고 이들에게 에단이란 존재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로엘은 다시금 확실히 느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붉은 대지 토르티아는 카이로스의 승리의 여신, 프란시아에게 속한다.”

그런데, 그 감탄이 순식간에 감동으로 바뀌는 데에는 긴 말이 필요 없었다.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흐뭇한 표정으로 에단에게 충성하는 카이로스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프란시아님, 만세!!”

“프란시아님, 만세!!”

그런데 그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진실임을 다시금 시작된 환호성으로 바로 깨달았다.

아아. 이 남자. 정말 어디까지 하려는 걸까.

“에단…….”

“뒤늦은, 제대로 된 결혼 선물인 거지.”

기어코 그녀를,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리고야 만다.

아아. 나의 하늘. 나의 구원자. 나의 사랑.

그녀야말로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로엘은 두 눈 가득 눈물을 흘리며, 기꺼이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러자 제롬이 가져온, 준비된 황금의 왕관이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졌다.

태양이 붉은 대지를 내리쬐던, 눈이 부시도록 화창한 토르티아의 늦겨울.

막 새순이 돋아나 봄이 오려는 그 찬란한 시작의 순간에, 붉은 머리의 공주께서 황금의 왕관을 쓴 채로, 드디어 붉은 성 토르티아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았다.

“로엘 마마 만세! 만세!! 만세!!”

끝이 없을 것 같은 겨울날들을 지나, 매서운 눈서리를 견디고 또 견디어, 드디어 붉은 월계수가 환히 꽃을 피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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