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황제께 붉은 월계수 꽃을 7권
연아 장편소설
목차
Chapter 61. 진심을 다하여, 뜨거운 작별의 인사를
“저분이 마지막이지?”
“네, 수아 님.”
카이로스 성문을 나서는 기나긴 마차의 행렬을 지켜보는 사라의 곁으로 수아가 다가섰다. 수아의 목소리에 사라는 바로 몸을 돌려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고, 수아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북방 원정으로 카이로스 성이 비워진 지 벌써 한 달. 그 빈 성을 더 비우는 일을 수아와 사라가 도맡았다. 후궁의 여인들을 뒷말 없이 출궁시키는 것. 카이로스 황실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라, 이래저래 꽤나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았다. 어디로 돌려보낼지, 작위는 어떻게 처리할지, 출신 가문들의 동의는 어떻게 받을지 등등 서류적으로도 처리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들의 절차와 방식을 제롬은 원정을 떠나기 전 완벽히 정리해 두었다.
에단은 후궁의 여인들을 모두 내보내기로 결정했고, 제롬은 그 길을 만들어 두었으며, 사라는 이를 행하였고, 수아는 이를 책임졌다. 이는 에단이라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권을 가진 황제가 있기에 가능한 일. 그 누구도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없기에, 이미 황실의 일원이 된 이들의 작위도 무를 수 있는 거다.
‘폐하. 이건 많은 잡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겠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어. 나는 이미 그리 결정했고, 내 결정에 변함은 없다.’
‘그럼 따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작위를 더해 주었고, 어떤 이에게는 영지를 주었으며, 어떤 이에게는 원하던 상권을 넘겼다. 제롬의 말 그대로, 그들은 자신들이 겨우 얻은 황실 일원이라는 대가 대신 그에 상응하는 이득을 원하였고, 에단은 아낌없이 주었다.
로엘이 칼라리엔이 되는 데에 쓰이는 비용이라면 조금도 아깝지 않았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쓸데없는 황실의 인연을 만드는 것보다 그런 식으로 지금 당장의 지출을 하는 것이 멀리 보아선 훨씬 경제적이라는 것을 에단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황실에 딸을 보낸 모든 이들이 결국 황실과 거래를 한 거래 상대방일 뿐.
그 계약을 파기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위약금과 거래 관계를 계속 유지함으로서 지출하게 될 비용을 에단은 계산하였고, 파기가 더 싸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물론, 그녀의 길이 보다 깔끔하게 정리된다는 것이 가장 주된 이유였겠지만.
그 계산에 제롬은 동의하였고, 기꺼이 에단의 뜻을 따른 거다. 전쟁 준비로 한창 바쁜 아론에게조차 상의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시녀장 사라.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잘 부탁합니다.’
결국 황실 내부의 일이니, 당연히 사라가 이 일을 전담했다. 후궁의 짐을 들이고 짐을 빼는 일은 너무도 명확히 시녀장 전담 업무였으므로.
그리고 이 모든 일들에 대한 당사자인, 그녀들에게 통보하는 일. 그녀들을 설득시키는 일. 아니 억지로라도 수긍하게 만드는 일. 그렇게 결과적으로 이 황궁을 떠나게 만드는 그 최종 마무리는 수아가 도맡았다.
‘수아 님. 이는 폐하의 뜻입니까?’
‘네. 그리고 제 의지이기도 하지요.’
켈트의 이름 아래 아카시스라는 직위를 가지고 폐하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수아는 그렇게 폐하의 여인들을 전부 이 황금의 성에서 내쫓았다. 그 일이 어찌 쉬운 일이었을까. 꽤 오랜 세월 동안 그림자처럼 살아와 그녀들에게 무시당해 왔던 수아라 더 힘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왕년의 아리스였다면야 그래. 아 소리도 하지 못하고 나갔겠지.
수아는 다시금 그녀의 위치를 확인시켜야만 했고, 켈트의 가문을 언급해야만 했으며, 그에 대한 온갖 반발과 투정을 한몸에 받아야만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수아는 조금의 싫은 내색 없이, 어쩌면 즐겁게 그 일들을 해냈다. 아주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지금 나가는 저 여인이 바로 그 마지막이다.
“저분은 좀 애를 먹였네요.”
“그러게.”
“그만큼 가져가신 것도 많잖아요.”
“그것도 그렇지.”
수아와 함께 온 베티와 쥰도 그런 마차의 행렬을 지켜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들고 온 것이 참 많은 분께서 그에 더하고 또 더하여 들고 이 카이로스 성을 나서고 있었다. 남동부 지역을 오랫동안 통치하던 백작 가문의 영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제일 부유하다고 믿었던 소녀는 도성에 올라올 때까지만 하여도 한껏 꿈에 부풀어 왔을 거다.
말로만 듣던 그 위대한 폐하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고. 그렇게 황후에 오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현실은 그저 흔하디흔한 지방 백작 가문의 여식일 뿐. 도성에 올라와 보니 자신보다 훨씬 높은 작위의, 훨씬 부유하고, 훨씬 아름다운 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거다. 이름도 낯선 지방 영지의 백작 영애 따위 어디 개국공신 켈트가 공녀와 눈이라도 맞출 수 있는 지위던가.
거기에 사랑만 받아 왔던 고향에서의 시절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냉담한 황제 폐하까지 마주했으니, 그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그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싫습니다. 제가 왜 떠나야 해요? 저는 죽어도 황실에서 죽을 거예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곧 죽어도 황제의 여인으로 죽겠다는 그녀의 안쓰러운 발악은 수아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이곳에 남아 보았자, 평생 폐하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채 후궁에 발이 묶여 외롭게 늙어 갈 거라는 수아의 잔인한 말들은 그러한 모든 이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아무리 부인하고자 하여도 황실에 들어온 후 지나온 세월들이 그 아픈 현실을 너무도 처절히 매일매일 깨닫게 해 주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이 아름다운 시절을 허망하게 보내느니, 차라리 한껏 챙길 것을 챙겨 자유롭게 사는 편이 훨씬 행복할 건 자명했다. 황실과의 결혼도 없던 것으로 무르고,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엄청난 재물에, 원한다면 젊고 멋진 혼처도 마련해 준다고 하니 마다할 게 무언가.
실제로 그것이, 그녀들을 황실에 보낸 그녀들의 부모와 가문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수아 님께서 무슨 권리로 이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몰라서 묻습니까? 당연히 내 권리가 아니라 폐하의 권리겠지요.’
무엇보다도, 이것이 제일 중요한 ‘그분’의 뜻이었고.
“결국 이리 갈 거면서, 참 애를 먹였네요.”
“우리 수아 님만 괴롭히고 말이에요.”
“됐어. 잘 해결되었으니 된 거야.”
베티와 쥰은 총대를 멘 수아가 괜한 욕받이가 된 것 같아 한껏 불만이 가득했다. 물론 수아 앞에서만 툴툴거리지, 언제나처럼 그녀들은 완벽한 수아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다.
“마마. 고생많으셨습니다.”
“시녀장도 고생 많았네.”
마지막 행렬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열렸던 성문이 닫히고, 사라 역시 수아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사라에게 하대하는 것이 수아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평생 공작 영애로 살아와 황후 교육을 받아 온 수아에게 황실 내부 최고 어른인 사라를 자신의 아래에 두는 것은 꽤 오랫동안 교육받은 일이다. 지위만 공주일 뿐 황실 밖에서 자유롭게 어른들 속에서 살아온 로엘이 사라에게 아직도 존대하는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오히려 수아가 더 자연스러운 거라서. 아니 수아처럼 해야 이곳의 질서가 제대로 서는 길이라 사라는 처음부터 로엘을 나무랐던 거다.
‘시녀장, 사라. 켈트가의 공녀님을 뵙습니다.’
이곳에 아카시스 후보로 처음 들어왔을 적, 수아의 나이는 고작 열여덟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당돌히 사라의 인사를 받는 그 당당한 모습은 오랫동안 교육받은, 준비된 황후의 재목이었다. 그건 지금, 이 엄청난 일 처리를 단번에 깔끔히 하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증명되고 있었다.
만일, 폐하의 마음에 이분이 먼저 들어왔더라만.
그래. 이분은 꽤나 이상적인 황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끝이 났네.”
그런데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사라는 그 짧은 생각이 참 헛되다는 것을, 지금 너무도 홀가분하다는 수아의 표정으로 바로 깨달았다.
그래. 이상적인 황후의 재목인 게 무엇이 중요한가.
폐하의 마음에 이분이 없고, 이분이 그럴 마음이 없는 것을.
“이제 나만 남은 거지.”
이리 밝은 표정의 수아는 처음이라, 사라는 수아를 마주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황실을 나갈 생각에 이리 화색이 도는 분을 잡을 이는 아마 아무도 없을 거다.
특히 그 어여쁘신 분이라면 더더욱 그러겠지.
“내 마지막은 로엘 님을 뵙고 나서 하겠네.”
“아카시스님의 명을 받듭니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수아의 등을 기꺼이 떠밀며 용기를 복돋아 주었을 거다.
“사라.”
“네. 아카시스님.”
그런 수아가 사라를 다시금 불렀다. 한동안 성문 밖을 바라보던 눈이 다시금 사라에게로 돌아섰다. 그 부름에 사라는 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내가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없었어.”
“하문하십시오. 답하겠습니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바로 사라는 수아의 말에 답했다. 수아가 준비된 황후감이라면, 사라는 완성된 시녀다. 수아는 그런 사라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정말 한 번쯤은 꼭 물어보고 싶었으나, 정말 좀처럼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일을 함께하며 드디어 그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영영 물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지. 굳이 사라를 불러다가 물을 만한 그런 질문은 아니니까.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로엘 님을 좋아하는지. 아니 동경하는지 굳이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시녀장은 알겠지. 나보다 훨씬 어른이고, 나보다 훨씬 이 힘든 곳에서 살아온 사람이니.”
“예. 마마.”
“그런 나여서 나도 이제 어렴풋 알 것만 같아. 누가 내가 사랑하는 이를 진심으로 위하고 있는지. 내 눈엔, 시녀장이 바로 그 사람 중 하나일세.”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나왔다. 나름 티를 안 낸다고, 제법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진즉 알아보신 폐하는 워낙 비범한 분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보니 비범함이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수아의 말대로, 로엘의 위하는 이에게는 보이나 보다.
사라의 숨겨진 마음이.
“내가 사가 시절을 통틀어 사라는 가장 공명정대한 사람이야.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과 사가 확실하며 모든 일에 이성적이고 객관적이지. 그런 시녀장이 유일하게 편을 들어주는 이가 있다면, 그렇게 마음을 주는 이가 있다면 그건 아마 로엘 님이겠지.”
언제나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쓴소리를 자주 하지만, 분명 그 속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그녀의 쓴소리가 누구에게만 계속되는지. 더 좋은 것을 드리지 않더라도 더 필요한 말을 전하는 그녀의 마음은 진심으로 로엘을 위하고 있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사라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솔직히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만큼, 오랫동안 사라의 마음속에 묻어 둔 너무도 오래된 이야기다.
카이로스의 시녀란 어떤 존재인가.
황실 깊숙이 들어와 너무도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은 그녀들을 어느 황실이든 쉽게 들이지도, 쉽게 내보내지도 않는다.
들어오는 어려움보다 나가는 어려움이 더 큰 이곳. 화려하기 그지없는 곳에서 좋은 것만 보고, 들을 거라 꿈꾸며 들어왔던 많은 이들은 그 순진한 생각을 뼈아프게 후회하며, 눈물로 남은 여생을 외롭고 힘들게 보내야만 했다.
태양의 자손이라 칭송 받는 카이로스의 황실이야, 그에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겠지. 애초에 폐하를 곁에서 뫼실 수 있는 시녀들은 적어도 자작가문 이상의 여식이어야 하며, 그에 걸맞는 학식과 교양을 겸비해야만 했다. 폐하를 곁에서 시중 든다는 것 자체가, 언제든 폐하의 여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황실 본궁 시녀로 들어가기 위한 시험은 가끔 백작가문의 여식이 지원할 만큼 매우 치열한 일이었다.
그런 카이로스 황궁에서, 몰락한 자작가문의 딸로 들어온 사라가 젊은 나이에 시녀장에까지 오르기까지 그 우여곡절이 어디 한둘일까.
그러함에도 그녀는 그에 대해 단 한 번을 투정부리지 않았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갚을 빚이 있을 뿐.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로엘 님께 갚고 싶었나 봅니다.”
사라는 덤덤히 수아를 보며 답했다.
특별히 거창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나, 그래도 이 정도로 간단한 답을 예상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사라의 대답은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실한 말뿐이라 정작 중요한 내용은 무엇 하나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같이 듣고 있던 베티와 쥰은 눈썹을 찌푸렸다. 뒷말을 기다렸으나, 사라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으니. 그건,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수아는 그런 사라를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라의 과거.
그 속에, 아무래도 잊지 못할 은인이 있었나 보다.
이 얼음장 같은 이의 마음을, 이리 오랫동안 잡아 둔, 바로 그러한 은인.
수아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없어도 그 은인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뻔하지 않은가.
북방을 넘어 이곳에서도 신과 같은, 바로 ‘그분’이시겠지.
“그 은인 대신, 로엘 님에게 갚았다라.”
사라 나이 열다섯에 황궁에 들어와 고작 20년 만에 시녀장이 된 것은 카이로스 황실 역사에도 없는,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신화 같은 이야기다. 그 말은 곧 그녀가 열다섯 이후론 적어도 이 황금의 성을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다는 뜻.
그렇다면 그 몰락한 자작 가문의 어린 영애가 북방에서 쉬이 만나 뵐 수 없는, 바로 그 제이드 네아레스를 만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답이 나왔다.
제이드 네아레스가 이 황금의 나라에 발을 디딘 것은 그 한때밖에 없었으므로.
“짧은 만남이 귀한 인연이 되었나 보네.”
“네, 마마.”
그 짧은 한때에 사라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있었나 보다.
정확히 알아챈 수아의 반응에 짧게 말을 끊으려던, 사라의 생각이 보다 깊어졌다.
정말 한동안 기억 저편에 묻어 둔 기억이건만.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이에 의해 꺼내 놓게 되다니.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귀한 인연이 되었지요.”
그 신기하고 묘한 기분이 괜히 말을 길게 하게 만들었다.
“제가 이 순간. 이 카이로스의 황실에서, 이리 두 발로 서 있는 것도. 그렇게 계속 살아갈 힘을 주신 것도 전부 그분이셨으니까요.”
사라의 갈색 눈동자가 조금 더 진하게 물들었다. 결연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단호함. 그건 제이드를 향한, 그녀의 신념과도 같았다.
‘귀족을 돌로 내리찧을 용기라면, 충분히 살 수 있어. 어디서든, 어떻게든.’
‘보아하니, 귀족 출신인 거 같은데, 나라면 궁으로 도망치겠어요. 적어도 그곳은 저런 인간들이 함부로 쫓아올 수 없는 곳일 테니.’
이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이토록 선명하다니.
이 흐려지지 않은 기억이 조금은 야속하기까지 했다.
“몰락한 자작 가문의 딸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밖에 없습니다. 늙은 부호의 첩이 되거나, 하녀가 되거나. 저는 후자를 택하고 싶었으나, 아버지를 잃으신 어머니는 저를 늙은 도성의 부호에게 팔았습니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래서 더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어머니는 돈을 받았으나, 어린 사라는 첫날에 도망쳤고, 많은 이들이 그녀를 뒤쫓았으니. 그 와중 밤길을 돌아다니던 망나니가 겁탈하려 덤벼들기까지 했으니 그보다 더 바닥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손에 짚히는 돌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짐승 같은 이의 머리를 내리찧었다.
그렇게 해 놓고 보니, 그 휘장이 백작가문의 휘장이 아니던가.
붉은 피로 물들어 가는 그 하얀 휘장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렇게 덜덜 떨면서, 아무것도 못한 채 뒷걸음만 치는 그녀를 수색대로부터 지켜 준 바로 그이가 제이드와 그녀의 부인 레아 칼리드였다.
저절로, 사라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더 이상 최악일 수 없는, 그렇게 암흑밖에 없었던 시절의 저를 단번에 빛으로 끌어올려 주셨습니다.”
그 미소가 어찌나 따뜻한지, 수아는 물론 곁에 있는 베티와 쥰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놀랐다. 시녀들 사이에서는 폐하만큼이나 무섭기로 유명한 이가 사라 시녀장인데, 저분도 이리 미소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너무도 딴사람인 것 같은 그 따뜻한 미소에 그녀들도 저절로 따라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친목이라는 명분 아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렸던 무인 대회. 그곳에 참가하기 위해 제이드는 임신 중인 아내를 데리고 처음 카이로스에 왔고, 그 새로운 곳에서 금실 좋은 부부는 밤마실을 나온 터였다. 그때도 이미 제이드의 명성은 알려질 대로 알려진지라, 그리고 이 카이로스에서 제이드의 붉은 머리카락과 레아의 은빛 머리카락은 너무도 눈에 띄어 두 사람 다 망토를 깊게 둘러쓴 상태였는데, 그 상태에서도 사라는 바로 두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래서 더더욱 놀랐다.
타지에서는 ‘신’ 같은 분들이 어째서 자신의 눈앞에 있나 싶어.
‘계속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거면 구해 준 보람이 없는데.’
‘제이드. 아직 애가 놀라서 그렇잖아. 무섭게 굴지 마.’
‘무섭게 굴려는 게 아니라 힘을 주려는 거잖아. 아무 일도 아니니 얼른 훌훌 털고 일어나 씩씩하게 갈 길 가라고. 아까 같은 용기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기적 같은 우연인가.
토르티아에서도 그분을, 그 밤, 그 상황 속에서 만나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일 거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말고. 그러니 우리와 함께, 카이로스 황궁으로 가지 않겠어요? 오늘 밤 이 귀족들의 수색에서 무사히 살아남는 방법은 아무리 보아도 그 수밖에 없을 듯한데.’
아무 일도 아니니 괜찮다는 그 한마디가 그때의 어린 사라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아마 제이드는 평생 모를 거다. 그리고 그때 사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카이로스 황궁으로 안내하던 레아의 권유가 사라의 평생이 될 줄 레아 역시 모를 테지.
그들의 비호 아래, 그렇게 그 밤, 사라는 처음 카이르소 황실의 성문턱을 넘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다시는 그 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 저를 도와주십니까.’
‘어여뻐서 돕는다네. 곧 세상에 태어날 내 아이에게 더 좋은 세상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
그때 그 곱고 따뜻하신 분의 아이가 무사히 세상에 나와, 이리 사라와 다시금 연이 되었다.
처음 토르티아의, 그 제이드 님과 레아 님의 아이가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드디어, 평생을 갚지 못할 그 빚을 갚을 기회가 온 거 같아서. 그렇게 그 아기님을 뵙나 싶어서.
‘토르티아 제1공주, 로엘 네아레스입니다.’
어찌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던지.
두 사람을 너무도 닯은 그 모습에 울컥 눈물이 날 뻔하였다.
“그 감사한 인연이 로엘 님까지 이어진 거로군.”
수아는 사라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가 왜 그토록 소리 소문 없이,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로엘을 돕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참. 세상이 좁기도 하다. 그 좁은 세상 속에서 로엘의 부모는 자식을 위해 너무도 이롭게 살아오셨나 보다. 그러니 이토록 일찍 그녀를 홀로 두고 떠났어도 이리 많은 귀인을 세상에 남겨두지 않았는가.
수아의 미소가 좀 더 따뜻해졌다.
“로엘 님과 시녀장은 정말 인연일세.”
수아의 따뜻한 미소에, 이번엔 사라 역시 환히, 로엘도 보지 못한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네, 마마. 저에게는 그 어떠한 인연보다도 따뜻하고 감사한, 그래서 너무도 소중한 그런 인연입니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던 인연.
긴 세월, 긴 거리를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된 사라는 결심했다.
그때 그녀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온정에 천 배, 만 배로 갚아 드리겠노라고.
그렇게 이분을 이 카이로스의 가장 높은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그러니 저의 열과 성을 다해, 로엘 님을 뫼시겠습니다.”
사라는 깊이 허리를 숙이며, 수아 앞에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보지 못한 자신의 진심을 말하였다. 그 진심이 고스란히 수아에게로 전해져 수아의 미소 역시 진해졌다.
짧게 듣고 끝나 버릴 줄 알았던 대답은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놀라고 조금은 신기했지만, 결론은 그저 감사일 뿐.
수아는 그런 사라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사라.”
수아 역시, 사라가 그러하듯, 그저 로엘이 무사히 이곳에, 다시금 자신의 앞에 와 주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
토르티아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이 질문에는 누구나 쉽게 답할 수 있다.
북방의 중심, 가장 비옥하고도 가장 평평한 땅 위에 있노라고.
산세가 높아 지형이 고르지 않고, 지나치게 숲이 우거진 타르타니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북방에서 제대로 된 평원을 가진 성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카티처럼 높은 산 위에 있거나 티벌처럼 숲속 깊숙이 덩그러니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중 이 아름다운 붉은 성 토르티아는 당당히 타르타니의 강줄기를 가로지르는 대평원에 위치한 축복받은 성이다.
고르고 비옥한 땅. 적당히 우거진 수풀림에, 마르지 않은 수로. 바다와도 인접한 접근성까지.
성에서 나가는 것도, 성으로 들어오는 것도 모두 수월하니 북방에서 가장 많이 발전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런 토르티아의 대평원이 막힌 셈이다.
전초까지 나온 벤은 토르티아의 평원을 가득 메운 황금의 부대를 응시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 황금의 부대 속에 홀로 붉게 빛나고 있을, 그의 사랑스러운 공주님을 바라보는 셈이지만. 이 작전의 시작이 벤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로엘이 모를 리가 없다. 맥스까지 저세상으로 가 버린 이 시점에서, 이 성을 지킬 이는 이제 벤밖에 남지 않았으니.
게다가, 이리 땅을 깊이 파 진흙과 점토를 채우고 그곳에 물을 넣어 늪을 만드는 수법은 더더욱 로엘이 모를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로엘의 머리로부터 시작된 작전이었으니까.
‘에이. 공주님. 옷이 다 지저분해지셨잖아요. 이리 오세요. 털어 드릴게요.’
‘맥스랑 진흙 가지고 놀았어요.’
‘맥스 너 이 자식. 내가 공주님 잘 좀 보라니까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치냐."
‘아니, 들어 봐. 얼마나 우리 공주님이 영특한지 아주 천재시라니까? 내가 풍뎅이 잡기 놀이를 하려는데.’
‘어린애를 데리고 너 뭘 한 거야!’
‘아, 들어 보라고. 근데 우리 공주님이 어떻게 했는 줄 알아? 이 깜찍한 손으로 진흙을 만들어서 함정을 파서 잡았다니까?! 나 완전 소름 돋았잖아.’
‘맞네. 내 딸이 천재였어.’
‘제이드 님!’
로엘에 관해서는 정말 세상 팔불출이었던 맥스의 호들갑에, 제이드의 딸 사랑까지 얹어져서 어린 로엘의 흙장난이 엄청난 일이 된 적이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꼬맹이가 풍뎅이 한 마리 잡겠다고 흙장난 좀 한 건데, 그걸 고스란히 제이드는 다음 전쟁에 똑같이 이용했다.
지형의 조건만 맞는다면, 적군의 발을 묶어 버리는 늪지대를 만드는 것은 그리 힘들이지 않아도 가능한 일. 초원지대만 아니라면, 그것도 이렇게 안개가 잘 끼고 겨울의 서리가 가득한 지면이면 더더욱 감쪽같이 상대를 속일 수 있다.
‘어떻게 풍뎅이 잡는 걸 가지고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지금 거의 열 배 가까운 대군의 공격을 막으신 거라고요!’
‘내 딸이 누굴 닮았겠어. 다 나를 닮은 거지. 하하!’
북방 최전선으로부터, 십만 대군이 갑자기 밀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제이드에 대한 조지 황제의 자격지심이 최고조였던 시기라, 제이드에게 배정된 군대는 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북방의 성 따위 내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제이드가 패배하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는 조지 황제의 말도 안 되는 패악이었는데, 그 상황 속에서도 제이드는 불만 한 마디를 하지 않은 채 출정하였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는 대승. 그때 바로 이 전략을 처음 사용했었다.
기마병은 빠르고 강하다. 특히 이렇게 대군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대다수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대신 안일하지.’
사람의 심리가 그렇게 만든다. 기마병이 강하다는 것은 기마병 자신들도 알고 있으니. 내 옆에 나와 같은 이들이 많다는 것은 저 쏟아져 내리는 화살을 나 대신 맞을 이가 많단 소리도 된다. 그러니 더더욱 이 늪 전략은 지금 카이로스처럼 엄청난 기마병 대군을 앞세우는 경우 그 어떠한 때보다도 효과적이다.
그걸 벤은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이다.
“장군님의 예상이 제대로 적중하였습니다. 카이로스가 처음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네요.”
옛 기억에 빠져 있는 벤에게 조금 흥분된 목소리의 부하 네오가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어디 네오만이 흥분했으랴. 다 죽어 가던 토르티아 병사 모두가 흥분했을 거다.
지금 붉은 성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은 토르티아의 병사들. 심지어 벤이 도망갈 사람들은 도망가라고까지 말했음에도 남은 이들이다.
그 말은 곧, 이들만은 토르티아의 마지막을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했단 소리다.
비록 저 황금의 군대에게 이길 희망이 없더라도,
“카이로스와 같은 대군은 기본적으로 이동에 제약이 많아.”
군사를 나누어 움직이면 대군의 의미가 없어진다. 최대한 넓게 군사를 펼쳐서 한 번에 공성을 하는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편이 통솔하기도 쉬우며 시간도 빠르고 군사의 사기 측면에서도 매우 유리하니, 늘 카이로스의 황군들은 정면 돌파로 승부했다.
“애초에 다른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없었겠지.”
제일 좋은 무기에 잘 훈련된 군사들이 엄청난 장군들 지휘 아래 있는데 정면 돌파가 무엇이 두려울까. 거기에 이렇게 넓은 평원마저 깔려 준다면, 정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루카스를 필두로 다들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그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지만.
"아직 지면 상태는 양호한 편입니다. 생각보다도 저들의 후퇴가 빨랐으니까요.“
벤은 솔직히 꽤 놀랐다. 기마병 대군이라 모래바람이 심하게 흩날려, 뒤에서는 더더욱 지면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루카스의 부대가 함정을 밟는 그 순간부터 카이로스 지휘부로부터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그건, 루카스가 직접 밟은 그 순간 이전에 이미 이상함을 눈치챘단 거다.
그건 당연히, 저 끝도 안 보이는 엄청난 대군을 이끄는 황금의 황제시겠지.
“대신, 지면 점도가 많이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이대로라면 또다시 들어와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로스의 피해가 적은 것은 안 좋았지만, 그만큼 토르티아가 또 한 번 저들을 막을 수 있게 돼 버린 셈이다.
벤은 말로만 보고를 듣다가 이리 직접 카이로스와 전투하며 느낀 점이 있었다.
그건, 카이로스의 황제가 생각 이상으로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것.
벤의 입장에선 매우 의외였다.
에단 카이로스가 어떤 황제인가. 신의 축복을 받은 태양의 황제이자, 죽음을 몰고 다니는 피의 황제다. 황자 시절부터 저 황금의 제국을 넓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렸던가. 그 사실들이 소문에 소문을 얹어 북부에서는 거의 괴물같이 표현되곤 했다.
그래서 벤 역시 저 황제라면 자신들의 병사라도 가차 없이, 아무렇지 않게 희생양으로 삼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의외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 대군을 움직이면서 그들의 사상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좋은 무기에 좋은 군사들. 좋은 전략의 힘을 받아 더더욱 그러하겠지만 그렇다고 한들 카이로스의 사상률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이 대군에, 거의 있을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러니, 얼마나 소름 끼치는 사람인가. 저 젊은 황제는.
“전열을 가다듬고 전방에 집중해.”
“예. 장군.”
“아직 우린 끝난 게 아니야. 저들은 다시 몰려올 거고 그때는 더 많이, 더 빨리 몰아칠 거다. 궁병부대를 가능한 최전선까지 배치하고 항시 대기시켜.”
“네. 하명받았습니다.”
네오는 바로 고개를 깊이 숙여 명을 받들었다.
이 전투가, 토르티아의 마지막 전투라는 것. 그래. 모두가 알고 있다. 머리가 희끗한 이 늙은 노장도, 그 노장을 따라 이곳에 남은 네오와 그의 동료들도, 그 밑에서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 기꺼이 검을 잡고 활을 잡는 군사들도 전부 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남았고, 그러함에도 그들은 끝까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이 붉은 민족의 마지막을, 이 아름다운 성의 마지막을 아무도 지키지 않는 건 너무도 서글픈 일이었으니.
나를 믿어 주는 상관 밑에서, 나의 조국과 함께 마지막을 고하는 것.
그래. 군인으로서 결코 나쁘지 않은 결말이다.
아니. 어쩌면 최고의 영광일지도 모르지.
“장군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네오는 결의에 찬 눈으로, 그만 명을 수행하러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벤은 네오가 떠난 후에도 묵묵히 카이로스의 전열을 바라보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저들 역시 전열을 가다듬고 또 한 번 들이닥칠 예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똑같이 온다면, 결론 역시 같을 수밖에.
기마병을 뺀다고 한들, 보병이라 다른 건 없다. 여전히 기동력은 막힐 테고 그사이 수많은 화살들이 황금의 부대를 덮치겠지.
“자. 앞길이 막혔습니다. 공주님.”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나오시려나. 황금의 황제는 틀을 깨고, 늪을 피로 희생시켜 앞으로 나아가실 텐가. 아니면, 생각지 못한 묘안으로 이 늙은 노장의 마지막을 즐겁게 해 줄 텐가.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벤의 지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닿지 않을, 닿을 수 없는, 그의 공주님께 전해지기리 바라며.
“언제나 그랬듯, 이 붉은 성 붉은 대지 위에 서 있습니다. 공주님.”
미소가 참 예쁘던 그의 소중한 공주님.
목숨 걸고 지키고 싶었던, 바로 그 작은 공주님.
‘벤.’
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를 부르던 그 낭랑한 목소리가 이리 선명히 귓가에 울렸다.
벤은 자신의 낡은 검집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곧, 드디어 만날 수 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분을.
이곳, 붉은 토르티아에서.
***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글쎄.”
에단과 로엘은 나란히 자신들의 말에 올라, 양옆으로 멀어져 가는 루카스와 콜린의 부대를 바라보았다. 진격을 명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두 부대는 순식간에 본진에서 멀어졌다.
“내가 말하기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 맞잖아요.”
“그야 모르지.”
그녀의 질문에 계속 애매한 대답만이 돌아와 살짝 로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명확하지 않은 그 대답이 괜히 얄미웠다. 바람에 흩날리는 높게 묶은 머리를 대충 넘기며 그녀는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공성기를 처음부터 이렇게 배치할 리가 없잖아요.”
살짝 따지는 듯한 목소리에 에단은 작은 웃음을 삼켰다.
그가 미리 알았던 게 무엇이 그렇게 중요할까.
결국, 그녀의 머리에서 이 공략법이 나온 것을.
“나도 몰랐어.”
“그럼 왜 이렇게 배치했는데요. 놀라울 정도로 이번 전략에 딱 맞도록.”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는 짧게 답했다. 그 이상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잠시 그녀와 눈을 맞추던 그의 시선이 다시금 저 멀리 토르티아를 향했다.
그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가 신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까.
그도 분명 벤의 전략을 전혀 예상치 못했고, 그로 인해 루카스의 기마병들은 피해를 봤으며, 전쟁 후 처음으로 후퇴 명령도 내렸다.
단지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알아채고, 좀 더 빠르게 결단했을 뿐.
그 역시 당황했고, 그 역시 놀랐으며, 그 역시 분했다.
“처음부터 이상했으니까.”
그러니 드러나지 않을 뿐 그의 심기도 매우 좋지 못했다.
순간 그의 황금의 눈동자에 매서운 한기가 서렸다.
‘뭐야. 지금 제1군이 전부 다 나온 거야?’
그래. 그는 처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다.
넓디넓은 평원. 카이로스의 대군이 공성하기에 너무도 좋은 환경이다.
그걸 토르티아의 연륜 많은 노장께서 모를 리가 없는데 마지막 부대를 저렇게 성 밖으로 나오게 하다니. 물론 그러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수성의 전략은 무궁무진하고 각자 잘하는 바에 따라 성 안에서 싸우기보다 성 밖으로 나와 공격적으로 수성하는 경우도 왕왕 있는 법이니까. 특히 지금처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몰린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할 수 있다.
‘지휘관도 나온 거 같은데?’
그런데, 단순히 부대가 나와 있는 게 아닌 벤. 그자가 나와 있지 않은가.
‘벤 장군은 아버지의 가장 오른팔이에요.’
실질적으로 이 토르티아에 남은 마지막 희망 같은 자.
그런 최고 지휘자가 직접 이리 최전방에 나오는 것은 매우 드물다.
‘오른팔인 만큼 그 누구보다 강하고, 우직하신 분이지요.’
드물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나름대로 숨을 골랐다. 비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그 비로 하여금 테바로스를 처리할 시간과 그녀가 돌아올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동시에, 열심히 토르티아를 지켜보았다.
‘거진 자포자기인 상태라 그냥 제대로 붙어 보고 끝내고 싶은 그런 마음 아닐까요?’
‘솔직히 지금 토르티아 상황이라면, 성 내부에서 수성하든 밖에서 수성하든 다를 바가 없긴 하죠.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으니.’
‘이대로 진행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폐하.’
분명 토르티아는 비 오는 내내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카이로스가 피제에 당도하기 전부터 토르티아 초소는 성 밖에 준비되어 있었고, 최전방 진지 역시 두 개로 나누어, 모두 성 밖에 나와 수성을 준비해 두었다.
그녀가 카티에 불을 올려 임무를 완수하였다고 알릴 적,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 첫 번째 진지를 무너트렸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면서까지 확인했고, 그대로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상황임에도 한걸음 물러섰다. 그 물러섬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저 신경에 거슬리는, 벤의 지나치게 앞으로 나온 전초 배치였다.
‘형제. 그 정도면 됐어. 우린 충분히 신중했고, 토르티아의 특이점은 없었어. 그저 노장의 마지막 자존심인 거야.’
그가 갖는 이 의문점에 대해 모두와 이야기했을 때, 하나같이 이례적인 것은 인정하였으나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전혀 있을 수 없는 전략이 아닌 건 사실이었으니.
막연히 토르티아의 마지막 발악만큼은 덜 비겁해지려나 보다 싶었다.
그래서 에단 역시 한걸음 물러선 거다.
‘그만큼, 저에게도 소중한 가족 같은 분이세요.’
무엇보다도 벤의 이야기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으니.
맥스가 세상을 떠났을 적 그녀가 어떠했는가.
소중한 이를 또다시, 너무도 아프게 잃어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는, 그녀를 그는 보고야 말았다. 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일을 그녀는 또 한 번 반복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더더욱 그는 벤과의 전투를 빠르게 끝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벤에게도, 정말 제가 그런 존재였을까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되물어 오는 그녀의 눈에는 벤에 대한 그녀의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슬픔. 분노. 그리움. 안타까움. 그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맥스의 죽음에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슬퍼했듯, 맥스 역시 죽음의 끝자락에서 그녀를 찾았다. 벤이라고, 무어가 다르랴.
그래서 에단은 더더욱 벤의 이해할 수 없는 전진을 합리화시켜 버렸다.
이 붉은 성의 마지막을 담당한 저 후회가 많은 노장이, 자신의 공주님을 보러 나왔구나.
그렇게 뒤늦은 사죄를 고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나 했다.
그 합리화가 안일한 진격을 하게 만든 거다. 전혀 그답지 않게.
“그 이상함을 알면서도 나는 알아채지 못했고, 성급히 움직였어. 이건 내 실책이야.”
단호한 그의 말에, 그녀는 바로 그의 팔을 잡았다.
“아니. 그건 아니에요.”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전혀 개의치 않은 줄 알았는데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로엘은 조금 놀랐다. 무엇보다도 그의 입에서 나온 ‘실책’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토르티아의 지형과 벤의 성향. 토르티아의 기후와 전략 체계까지 알고 있는 나조차도 알아채지 못했는데, 당신이 알아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어요.”
오히려 그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 그녀보다도 먼저 알아챈 게 더 놀라울 따름이지.
“결국 당신은 모두가 괜찮다고 하는 상황 속에서 대비를 한 거잖아요. 알았든, 몰랐든 폐하의 선택은 결국 옳았어요.”
발 빠른 퇴각 명령도, 이리 공성병기를 양옆으로 나누어 배치한 것도.
흔들림 없는 로엘의 눈이 에단을 향했다.
언제 어디서든 빛나는, 이 아름다운 황금의 눈. 그래. 이 분은 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조차 아름답다.
“당신은 언제나 정답이에요.”
로엘은 알고 있다. 그는 몰랐다고 하지만 결국 알았음을.
‘수로라고요?’
‘네. 기본적으로 토르티아 본성은 타르타니를 가로지르는 새몬 강의 물줄기를 끌어다 써요. 원래대로라면 토르티아 앞을 횡단할 수로를 오래전 대공사를 통해 종횡하게 만든 셈이죠. 저는 그 물줄기를 이용할 생각이에요.’
벤이 늪지대를 만들어 토르티아의 평원을 막았을 때 로엘은 바로 생각했다.
저 늪은 물로 쓸어내릴 수 있음을.
벤이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엘의 흙장난을 보았을지 모르지만, 로엘은 그 후에도 종종 함정을 만들어 온갖 벌레를 잡으며 혼자 놀았다. 그래서 안다. 아무리 넓고 깊이 파 보았자, 가벼운 소나기 한 번이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 것을. 애초에 물줄기에 쓸려 내려가지 않은 진흙따위는 없으니 말이다.
‘억지로 물줄기를 바꿔 놓은 간이댐 같은 거예요. 전투에 집중하고 있는 지금. 아무도 그곳에 신경 쓰고 있지 않겠지요. 그곳을 부숴 버린다면, 그렇게 막힌 수로를 뚫으면 막혔던 평원이 자연히 열릴 겁니다.’
그렇게 공성 병기를 이용해 양옆의 수로 댐을 부수자고 말하려는 순간, 로엘은 깨달았다.
카이로스의 공성 병기는 평소와 다르게 양옆으로 나누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그 말은 곧, 처음부터 에단은 염두에 두고 있었단 거다.
토르티아 성의 양끝을 차지하고 있는 수로 댐을 부숴 새몬 강줄기를 이용할 생각을.
로엘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했잖아. 내 형제는,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을 하는 사람이라고.’
에단이 티벌 성을 삼켰을 때, 이반이 로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어떠한 기대를 하든, 그 이상일 거라고. 그는 항상 그보다 더 대단하니.
‘그래서 내 형제가 소름 끼친다는 거야. 끝을 가늠할 수가 없거든.’
로엘은 그 말을 지금 이 순가 너무도 뼈저리게 느꼈다.
카이로스에 오기 전까지. 평생을 토르티아에 살아온 그녀조차도, 벤의 함정에 당하기 전까지 수로 댐 따위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바로 눈앞에 무너트려야 하는 성이 있는데 그깟 수로 따위. 그 누가 신경을 쓸까. 그건 이반도. 아론도. 콜린도. 그 어떠한 전략가를 데려다 놓아도 같을 거다.
에단이 다른 이와 다른 점은, 어쩌면 거기서부터 오는지도 모른다.
남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볼 줄 아는 넓은 시야.
어떠한 상황에서는 편협해지지 않은 사고.
애초에 토르티아를 점령하는 데에 붉은 성문과 붉은 성벽만을 바라볼 이유는 없다.
“공성 1부대. 공격 준비.”
“공성 1부대. 공격 준비!!”
크지 않은 그의 명령은 곧바로 지휘관들의 목소리를 타고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맞추어 저 멀리, 멀어져 가던 루카스와 콜린의 부대는 각자 맡은 수로 댐에 거의 다 다다라 공격 준비를 마쳤다.
“공격.”
“공격!!”
그렇게 양 부대의 함성 소리가 본진까지 울려 퍼질 그때에 거대한 바위덩이가 정확히 토르티아의 수로 댐에 큰 굉음을 울리며 부딪혔다.
“제2부대 공격 준비.”
“제2부대 공격 준비!!”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수로 댐의 벽돌들이 부서져 내리고, 뒤늦게 달려 나온 토르티아의 군사들이 우왕좌왕할 때, 카이로스의 프래카들은 가차 없이 그들을 덮쳤다.
“공격,”
“공격!!”
그렇게 두 번째 굉음이 또 한 번 양옆에서 울리고, 우지끈 소리와 함께 댐에서부터 물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3부대 공격 준비.”
“제3부대 공격 준비!!”
그렇게 세 번째 바윗덩이가 부딪혔을 때,
“우와아!!!!”
거대한 물소리와 함께 오랫동안 막혀 있던 새몬의 강물이 터져나와 토르티아의 평원을 덮쳤다. 단번에 거대한 댐을 부숴 버리자 그 거대한 강줄기가 무서운 속도로 평원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막혀 있던 수로 댐마저 부숴 버렸다.
“이반.”
“황자 이반 카이로스. 황제 폐하의 부름에 답합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 일련의 상황 속에서 또 한 번, 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 부름에 바로 이반은 답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난 터.
“벤 플레어의 목숨을 가져와.”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에단이 대비해 두고, 로엘이 짜 놓은 전략에, 마무리를 장식하는 이는 다름 아닌 이반.
토르티아의 마지막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
휘몰아친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했다.
지금 토르티아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은.
“장군. 지금 이반 황자의 군대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래.”
“일단 성안으로 피하시는 편이……!”
“과연 좋을까.”
벤은 자조적인 실소를 뱉었다. 정말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이 막 틀 시점. 조금 사기가 오른 토르티아의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뒷단의 지휘부들은 열심히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정비할 것도 없었지만, 마지막 남은 이들인 만큼 마음가짐 역시 달랐기에 서로가 서로를 다독이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첫 황금의 부대를 후퇴시켰는데,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었나 보다.
“전군. 카이로스의 진격에 대비해!!”
“방어태세!!”
“방어태세!!!”
어쩌면이라는 짧은 희망을 그들은 물러나는 황금의 부대를 보며 가졌는지 모른다. 그들이 저대로 물러나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은 너무 기적 같은, 헛된 희망이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였으나 분명 토르티아인 모두의 마음에는 한켠에 바라고 있었다.
카이로스가 이곳 토르티아에 다다르기까지 딱 한 달. 성큼성큼. 정말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저 대군을 그들은 여기에서 기다렸다. 남모르게. 조용히 마음의 준비를 하며 기다렸다.
‘도대체 너희들은 뭐 하는 인간들이야! 적들이 쳐들어오는데 이렇게 넋 놓고 기다리고만 있을 거냐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서 저들을 막아!!’
겨우 다잡은 마음마저도 꺾어 버리는 에리카의 신경질 속에서도,
‘알아서 해. 어차피 끝나 버렸어.’
겨우 내 보려는 힘마저 허탈하게 만드는 조지 황제의 무능함 속에서도,
‘함께하지 않기를 바랐건만.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끝까지 남을 거라면. 그래. 우리라도 이 붉은 나라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 보자.”
오로지 한 사람. 벤의 지친 등만을 바라보고 버텼다. 모든 비난도 책임도 홀로 지는 이 우직한 노장은 이미 너무 지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토르티아의 병사들은 벤의 등 뒤에 숨었다. 그 뒤에만 있으면 왠지 안전할 것만 같았으니.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생각이 드는 거라면, 정말 그들은 아주 많이 비겁한 거다.
“너희들은 성안으로 들어가 폐하의 마지막을 지켜.”
그렇기에 무섭게 몰려오는 황금의 부대를 눈앞에 두고서도, 훨씬 어린 자신들을 뒤로 가라 하시는 거겠지.
네오는 손에 잡힌 검집을 힘을 주어 쥐었다.
두렵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것은 아니다.
“장군님과 함께하겠습니다.”
그저, 이분과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을 뿐.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전투였다는 것. 어차피 토르티아에게 희망은 예전에 사라졌다는 것.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인정하는 데에 사람마다 시간 차가 있었을 뿐.
“장군님과 토르티아의 마지막을 지키겠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 때, 황녀는 온갖 금은보화를 긁어모아 도망쳤고,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황제란 작자는 그런 황녀의 뒤를 봐주라는 명령 따위나 하고 있으니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을 수가 없다. 그 상황 속에서도, 홀로 이 붉은 성을 정말 우직하게 지켜 내신 분이다. 그 모습을 자의든, 타의든 곁에서 지켜본 지금 이들은 절대 벤의 마지막을 홀로 둘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들이 받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쓸데없는 감상에 젖지 마. 너희들은 최선을 다했고, 도망간다 해서 아무도 너희를 비난치 못해. 이 나라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건 이미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함에도 저희는 지금 장군의 곁에 있는 거예요.”
칼같이 예의를 지키던 네오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벤을 직시하며 미소를 짓는 네오의 모습에 잠시 벤의 시선도 네오에게 향했다.
네오는, 그리고 네오 뒤에 있는 수많은 병사들은 지금 벤과 마지막을 함께하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자신의 진심을 다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제이드 님과 함께하겠습니다.’
그 물러서지 않음에 벤은 계속 옛생각이 떠올랐다. 이 순간, 그러면 안 되는데도 계속 되새겨지는 그날의 기억에 벤의 가슴 한 곳이 묵직하게 아파 왔다.
자신도 그때 이랬더라면, 지금 이 순간이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제이드 네아레스 장군께서 사망하셨습니다.’
나의 우상, 나의 스승. 나의 아버지.
그 어떠한 칭호도 아깝지 않는, 그의 일생의 전부였던 분이 그렇게 억울하게 사그라졌을 때, 가족을 핑계 삼아 목숨을 보전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그래. 적어도 남은 생을 이리 지옥 속에서 살진 않았겠지.
“토르티아 황군 제1부대 전원. 끝까지 벤 장군님을 지키겠습니다.”
벤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그 뼈아픈 후회들 속에서도 네오를 비롯한 토르티아 병사들의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뻔뻔스럽게도 위안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나 부끄러운 선배인가.
삶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후배를 통해 그 부끄러움을 여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들처럼 그분과 마지막을 함께했더라면, 그분께서도 그리 외로이 가시진 않으셨을 텐데.
정말 어떻게 그분을 다시 뵙나.
그게 무서워서, 죽는 게 무서울 지경이다.
“그래.”
하지만, 그러함에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다면 함께해야지.”
벤은 자신의 오래된 검집에서 마지막으로 검을 빼들었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그의 오래된 검은 태양 빛 아래서 빛을 냈다.
터져 버린 새몬의 강줄기는 여전히 무섭게 토르티아의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양옆의 수로 댐에서는 임무를 완수한 루카스와 콜린의 부대가 중앙으로 합류하고 있었으며, 그보다도 빨리,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며 이반의 부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 이 모든 공격의 중심이자 최전방인 곳에 ‘그’가 있었다.
‘제이드 님. 진짜 맞을 각오 하고 묻는 건데. 혹시 숨겨 둔 아들 있으신 거예요?’
‘야. 맥스!’
‘아니. 이상하잖아. 이렇게 주기적으로 만날 일이냐고!’
‘적당히 질투해라, 진짜. 빨리 사죄드리고!’
에단 황제와 꼭 닮은 황금의 머리를 흩날리며.
‘제이드 님. 혹시 저 금발…….’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그쪽 혈통이야.’
‘제이드 님!! 이거 큰일 날 일이라고요!!’
‘하하. 벤. 너도 소리칠 줄 아는구나. 하하!’
벤 역시 만난 적 있는 바로 그 사람.
제이드가 참 예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워낙 사람이 좋아, 또 어디서 사연 있는 불쌍한 애를 데려다가 조금 돌봐주나 보다 하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지. 하지만 만남이 반복되고, 함께하는 시간이 늘며, 로엘 님과도 함께 있게 하는 걸 보며 이반만은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대 다른 이에게 검을 가르치지 않는 제이드가 아무도 모르게 이반에게 검을 가르치는 걸 알아 버렸을 때는 젊은 날의 벤도 많이 질투했었다.
‘짜증 나. 왜 하필 그 꼬맹이냐고.’
‘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그저 어른으로서 어린애에게 유치하게 굴지 말자는 생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철이 들기 시작할 적부터 제이드 님 곁을 지키는 우리인데, 어째서 우연히 만난 적국의 황자를 선택하신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딱 한 번 로엘 님과 함께 검을 휘두르는 이반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이반인지를.
‘서운한 거 알아. 너도, 맥스도. 하지만, 누구에게도 전수하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을 단번에 흔들어 버린 아이야.’
‘그저, 가르치고 싶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지금 그 이반 카이로스가 토르티아에게로 달려오고 있다.
그의 스승을 죽게 만든, 스승의 나라를 무너트리기 위해.
그 죽음을 방관한 자신들을 벌하기 위해.
그렇다면, 기꺼이 그 검을 받아야지.
“토르티아. 마지막까지 함께해서 영광이다.”
“영광이었습니다, 장군!”
짧고 굵은 기합 소리와 함께, 토르티아 황군 제1부대.
붉은 성을 지킬 그 마지막 부대가 마지막 전투를 위해 힘차게 달려 나갔다.
***
“생각보다 끈질기군요. 마지막이라 그런가.”
검을 휘두르며, 콜린이 이반에게 말했다. 워낙 상대가 되지 않은 싸움이라 투항도 많고, 자포자기도 많을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그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전력으로 목숨을 다해 끝까지 버텼다.
“지금까지와의 토르티아와는 확실히 다릅니다.”
물론 그래 보았자, 카이로스의 시간과 공이 더 들 뿐 결론은 같을 거다. 생각보다 끈질겼을 뿐, 이길 정도는 결코 아니었으니. 그저 그 마지막 발악이 그들을 좀 더 안쓰럽게 만들 뿐이다.
“다르겠지. 지금은 제대로 된 지휘관이 있으니.”
이반은 지척에서 쉬지 않고 카이로스 병사를 상대하고 있는 벤을 보며 말했다. 노장이 기운도 좋고 실력도 좋아 제법 카이로스 병사를 많이 쓰러트렸다. 깔끔한 검 시위가 어찌나 교과서적인지 그의 군인으로서의 삶이 어땠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아직도 이 토르티아에 저런 장군이 있다는 게 놀랍네요.”
이걸 안타깝다고 해야 하나 안쓰럽다고 해야 하나.
꽤나 냉정한 측에 속하는 콜린의 눈에도 벤은 인상 깊었다. 몰락을 앞둔 조국을 위해 저렇게까지 싸울 수 있는 장군은 정말 흔하지 않았으니. 같은 군인으로서 가히 존경할 만했다.
“조금씩 정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황자님.”
애석하게도 딱 그 정도까지일 뿐.
“슬슬, 끝을 내도록 하죠.”
냉정한 콜린의 말이 이반에게로 향했다. 제일 선두에 섰던 만큼 가장 많은 생명을 거둬들인 그는 이미 많은 피를 온몸에 뒤집어썼다.
“그래.”
이반은 이렇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이를 상대하는 것이 정말 썩 달갑지 않다. 특히 어떤 나라의 마지막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이미 끝나 버린 조국임을 알면서도 끝까지 지키려 드는 이의 마음이 어떨지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나쁜 황제의 치하 속에 살았어도, 조국의 멸망에 통곡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 유구한 역사의 토르티아를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는 저 노장의 마음이 어떠랴.
“벤 플레어의 목숨을 가져온다.”
한 나라의 군인으로서. 한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한 스승의 제자로서.
이반은 그 마지막에 대한 예우를 다하고자 한다.
***
이반이 전쟁에 나선 건 몇 번이나 될까.
에단이 처음 선봉장으로 나섰던 그 열다섯 살 때의 전장에, 당연스럽게 이반도 함께하였으니 그 역시 반평생을 넘게 이 피 튀기는 전장에서 살아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남았다.
“하아!!”
“으윽!!”
누군가의 기합 소리와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살아남은 자의 거친 숨소리와 죽어 가는 자의 갸날픈 숨소리가 뒤섞였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와 땀이 흩어지고, 누구의 검인지 모를 검들이 힘없이 떨어졌다.
생과 사가 순식간에 오가는 정신없는 곳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군이 아군인지, 적군이 적군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그래. 전장이란 그런 곳이다.
“벤 플레어를 노려! 저자가 마지막이다!!”
벤을 지목하는 콜린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쉼 없이 달려드는 토르티아의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그런 벤의 앞을 막아섰다. 콜린의 말처럼 그들은 마지막에서만큼은 비겁해지지 않기로 하였나 보다.
“장군님을 지켜!!”
“장군님을 지켜라!! 아악!”
그 모습이 더 애처롭고 안쓰러울 뿐인 것을.
지금껏 카이로스가 지나쳐 왔던, 그 많은 성들의 토르티아 병사들이 이런 기세로 방어했다면 글쎄 어쩌면 현재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결론이야 바뀌지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이만큼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무너지진 않았겠지.
“생각보다 더 필사적이군요.”
콜린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은 상황에 살짝 짜증을 내비쳤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토르티아 병사들이었다면 이미 진즉 반 이상은 쓰러져 나갔을 텐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덜하였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시체를 밟지 않는 한 절대로 넘어가게 두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너무 강렬해 괜한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러니 좀 집중해 주세요, 황자님.”
또 한 명의 생명을 사그라트리면서, 콜린은 힐끗 이반 쪽을 바라보았다. 무서운 얼굴로 달려나간 것과는 달리 이반은 제 실력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에토르 때, 모두의 눈앞에서 검을 휘둘러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할 때는 언제고 또다시 이렇게 자신을 숨기는 그의 모습에 콜린은 속이 탔다.
더 이상 이반을 황금의 제국의 황제로 옹립할 욕심은 없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리 몸을 사리게 두고 싶진 않았다. 그것도 대놓고 판을 깔아 준 이 상황에서 말이다.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그 짧은 투덜거림은 바로 들어가게 되었다. 뒤에서부터 달려오는 토르티아의 병사를 보지고 않고 단번에 베어 버리는 그 섬뜩한 칼날에.
“으윽!”
잠시, 토르티아의 마지막에 저도 모르게 감상에 젖었던 이반은 그만 그 감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그의 검이 달라졌다. 아니, 그를 둘러싼 분위기도, 눈빛도 전부 다 순식간에 돌변했다.
“아악!!”
그건 진심을 다하겠다는 소리였다.
설렁설렁한다고 해도, 처음부터 제일 선두에 섰던 만큼 이반은 가장 많은 피를 온몸에 뒤집어썼다. 그저 좀 더 빠르게, 좀 더 많이 그리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아니하였을 뿐.
“끝까지 장군님을 지켜!!! 토르티아!”
“토르티아!!”
토르티아의 병사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수록 이반은 느꼈다. 어쩌면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토르티아가 아닌 벤인지도 모른다고.
‘스승님은 누가 제일 상대하기 어려우세요?’
‘그야 뻔하지.’
‘뻔해요?’
‘뻔하고말고. 어느 전투이건, 어느 나라이건, 어느 순간이건. 자고로 ‘지키려는 자’가 제일 강한 법이야.’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이를 상대하는 것은 정말 썩 달갑지 않다.
어느 상황에서건 자신이 아주 나쁜 가해자가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니까.
그리고 지키려는 자의 그 간절함과 절박함에 저도 모르게 멈칫하게 되는 법이다.
어쩔 수 없이, 모두는 지키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므로.
“조준.”
그 망설임을 논하기에 전장은 너무도 잔인하고,
“발사.”
그 잔인함 속에서 ‘그’는 더 잔인하다.
들릴 수 없는 에단의 목소리가 이반의 귓가에 들리는 듯하더니, 아차 하는 순간 엄청난 양의 화살들이 정확히 토르티아 군사들의 가슴을 맞혔다. 두꺼운 갑옷을 단번에 뚫고 들어가 처절하게 싸우는 그들의 마지막을 가차없이 선고했다.
얼마나 많은 화살들이 예고도 없이 정확히 토르티아를 향하였는지, 카이로스의 부대들마저 순간 흠칫하며 숨을 쉬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짧은 정적이 흘러 버렸다.
너무도 순식간에 전멸해 버린, 토르티의 부대 앞에.
“나 참. 이러실 거였으면 처음부터 하시지.”
“일부러 시선을 돌려 놨던 거 알고 있잖아.”
콜린의 짧은 투덜거림에 이반이 짧게 답했다.
아무래도 형제께서,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으셨나 보다.
“내버려 두셨어도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었어요.”
뒤늦게 진심이 되어, ‘그 사람’의 검을 휘두르는 이반을 에단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반이 답답하다고 하기에 이반의 손끝에선 이미 너무도 많은 생명이 사그라들었고, 그 많은 피를 뒤집어쓴 이반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쌩쌩했다. 그러니 이대로 두고만 본다면 결국 이반과 이반의 부대는 기어코 마지막 남은 토르티아의 군대를 몰살시키고 벤의 목을 가져왔을 거다.
단지, 에단이 그 시간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을 뿐.
“결국 폐하가 나서게 되었잖아요.”
“그게 아니야, 콜린.”
콜린의 입장에서야 이반의 독무대를 에단이 참지 못하고 끼여든 거겠지만, 이반은 에단의 속내를 알고 있다.
‘선봉장은 너야.’
에단은 그저 더 돋보이는 무대를 만들어 주고 싶은 거다.
모두가 뒤엉켜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분간 안 되는 그 상황이 아니라, 모두가 명확히 볼 수 있는 그런 순간을.
‘폐하가 분하게도, 내가 아닌 너를 선택한 거지. 나를 포함하여, 그 누구보다도 네가 빛나라고.’
이 전투가 실질적으로 토르티아 정복의 마지막 전투임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함에도 에단은 그 중요한 자리를 이반에게 양보했고, 이반은 그 선택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
‘그렇게 너의 말 못 한, 그 한을 풀라는 거야.’
선봉으로 나서라며 자신을 올곧이 바라보던 그 황금의 눈.
‘그건 내 한을 푸는 것이기도 해. 이반.’
그때 그 에단의 눈을 마치 알 것 같다는 로엘의 붉은 눈까지.
이반은 검을 고쳐 들었다. 그는 충분히, 토르티아의 마지막을 애도하였다.
“끝을 내자.”
이제 남은 병사는, 화살을 맞고도 끝까지 벤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병사 대여섯뿐.
“네. 황자님.”
그 대여섯을 끝내는 것은 콜린의 몫이기에, 콜린은 먼저 박차고 나가는 이반을 바로 따랐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마지막의 마지막 사람들.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장군!”
왼쪽 가슴에 화살을 꽂은 채 달려가는 그들의 마지막 기합은 쩌렁쩌렁하기도 하였다.
“벤 플레어 만세!!”
“토르티아 만세!”
그렇게 붉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리고 남은 단 한 사람.
자신을 끝까지 지키던 모든 부하를 바라보는 노장의 눈에는 슬픔이 없었다.
“그래.”
그보다는 지칠 대로 지친, 고단함이 역력했다.
“나도 영광이었다.”
이 거대한 붉은 성문 앞을 지키곤 선, 남은 마지막 붉은 머리의 사람이라.
상대를 압도하는 이 크나큰 성을 홀로 지키기엔, 이 노장의 어깨는 이미 너무 많이 굽어 있다.
“곧 따라가마. 형제여.”
이반은 그런 벤에게 예우를 다하고자 한다.
그래서 가차 없이 단번에 그의 가슴에 검을 꽂았다.
“큭.”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벤은 뜨거운 핏덩이를 토해 냈고, 그의 몸은 무겁게 이반의 어깨로 쓰러졌다.
“크윽.”
그렇게 좀 더 깊숙이 검을 꽂았다.
“제법 비슷하네. 꼬맹이.”
“비슷한 게 아니라, 같은 겁니다.”
그 옛날 벤이 이반을 보았듯, 이반 역시 벤을 보았다.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겠지. 벤은 항시 제이드의 곁에 있었으므로.
“아니. 그건 아니지. 같다고 하기엔, 내가 너무 서글프지.”
참. 이런 식으로 재회를 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이반은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를 느끼며, 이만 검을 거두어 들었다.
그러자 또 한 번 쿨럭하고 벤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너무 서글프니…….”
그 상태로, 벤은 다시금 자신의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이 정도는 봐 주시게.”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말고삐를 다시 잡을 힘이 나왔는지. 어떻게 붙잡기도 전에 벤은 말을 출발시켰다.
“아니……!”
그런 벤을 쫓아가려는 콜린을 이반이 먼저 멈춰 세웠다.
“……저 정도는 봐주자.”
그렇게 벤이 달려가는 곳은, 카이로스의 본진이었다.
눈앞에 가득 찬 끝도 없는 황금의 부대. 그 한가운데, 벤이 수년을 기다려 온 그의 아름다운 공주님께서 계신다.
‘벤!’
이리 평생을 아파해 왔는데. 이리 평생을 힘들게 살아왔는데.
그 마지막에 이 정도 어리광은 부려도 되지 않은가.
아무리 애를 써도 저절로 감겨지는 시야의 끝에서, 벤은 자신을 향해 홀로 달려오는 붉은 여신을 보았다.
‘벤! 같이 가!’
아아. 어여쁘신 나의 공주님.
분명 평생을 지켜 드리겠다고 약속했건만.
“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인의 마지막 길을 이리 배웅해 주시나.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로엘의 목소리에 결국 주름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얼른 죄송했다고. 실은 너무도 제이드 님을 지키고 싶었다고. 그렇게 공주님을 지키고 싶었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공주님.”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요.”
그저 소리 없이, 후회와 죄책감이 가득한 한 많은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이분은, 이 순간 자신에게 웃어 주는 건가.
“이제 그만, 아버지께로 가셔도 돼요.”
이러시면, 어떻게 눈을 감으라고.
“아버지께 안부, 전해 주세요.”
벤에게도 참 익숙한, 그 얇고 아름다운 로엘의 검이 벤의 몸을 또 한 번 관통하고,
“고생 많았어요. 벤.”
그의 어깨를 오랫동안 짓누르던 짐이, 그 한마디에 사라져 버렸다.
네. 공주님. 저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라는 그 한마디를 너무도 하고 싶었는데,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손을 올려 로엘의 붉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을 뿐.
그 주름진 손이 묵직하게 그녀의 머리에서부터 떨어졌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그렇게 벤은 로엘의 품에서 마지막을 고했다.
‘공주님. 어여쁘신 우리 공주님.’
너무도 늙어 버린 지금과 다르게, 참 젊기도 했던 시절. 그때 그가 얼마나 그녀를 예뻐했던가.
로엘은 더 이상 미동이 없는 벤을 품에 꼭 안았다.
‘이대로 건강하게만 자라 주세요.’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던 그 시절의 모든 것들이 스쳐 지나가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녀의 과거들은 어찌 이리 아프게만 가 버리는지.
“안녕, 벤.”
그렇게, 그녀는 또 다른 그녀의 영웅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