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 당신의 마지막을 위해, 붉은 월계수 잎을 드립니다
카티의 테바로스 국기가 불타오르는 모습은 토르티아의 본성에서도 훤히 보였다. 토르티아의 가장 높은 곳에서 그 큰불이 휘몰아치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부하의 다급한 보고를 받기 전부터 벤은 토르티아의 성루에서 그 불길을 지켜보았다.
기분 나쁜 검은 깃발이 붉은 불길에 휩싸이더니, 어느새 황금의 거대한 깃발이 걸렸다.
먼 곳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황금의 독수리가 유유자적하게 허공을 가르는 것을 보며 벤은 생각했다.
이번에도, 우리의 어여쁘신 공주님께서 큰일을 하셨구나, 하고.
“그러니, 이곳도 곧 불길에 휩싸이겠군.”
벤은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피제에 입성한 지 며칠이 지나도 꿈쩍을 않던 황금의 부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카티에서 불길이 치솟자 바로 토르티아 본성으로 진격했다. 마지막 보루라고 해 놓은 진지는 그 진격과 함께 단번에 박살이 났다. 조지 황제의 명령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준인 걸 뻔히 알면서도 겹겹이 쌓아 놨건만, 그런 조악한 것들로는 에단이 앞장서는 황금의 부대를 조금도 막아 세울 수 없었다.
“대장군. 에리카 황녀님께서 무사히 도성을 빠져나갔다는 전갈입니다.”
“그래.”
벤의 심복은 갓 들어온 소식을 바로 벤에게 전해 주었다. 그에게는 이제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그런 의미 없는 소식을.
나라가 무너져 가는 이 시점에서도 자신의 딸부터 챙기다니. 너무도 조지다워서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서로 부둥켜 앉고 오열하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며 벤은 생각했다. 그저 그렇게, 한 딸아이의 아버지로만 사셨으면 딱 좋았을 것을.
어쩌다 이 많은 붉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겠다는 되지도 않는 욕심을 부리셨는지.
그게 결국 모든 이들을 파국으로 몰아넣으리란 걸 뻔히 알았으면서도.
“……그 파국도 끝이 보이는 건가.”
벤은 무심하게 성루에 고개를 괴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카티의 불길이 사그라들 때쯤, 아마 그의 공주님께서는 눈앞의 저 거대한 부대에 합류하실 거다. 에단의 황제가 기다리고 기다린 그 이유. 벤이 어떻게 모를까.
그는 기다려 준 거다. 그리고 기회를 주려는 거다.
로엘 네아레스가 자신을 버린 토르티아에게 피의 복수를 할 바로 그 기회.
“참……. 제대로 찾아가셨어.”
원래 영특하신 분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딱 우리 제이드 님이네.”
이리 용감하고, 이리 대단한 것을 보면.
벤은 아까부터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계속 로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그저 생각하고 추억하는 것도 죄스러워 애써 피해 왔는데, 이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치달으니 그런 생각마저 없어졌다.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거다.
그렇게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있고.
“잘못 보낸 줄 알았는데, 이리도 잘 가셨을 줄이야.”
벤은 자신의 눈앞에 쉴 새 없이 펄럭이고 있는 황금의 깃발을 보며 계속 대답 없는 혼잣말을 했다. 어디 북에서의 에단에 대한 소문이 좀 무서웠나. 머리에 뿔이 달린 괴물이라는 소리도, 피도 눈물도 없는 포악한 황제라 그 손에서 피가 마를 날이 없다고 그 악명이 어마무시했다. 그래서 로엘이 먼저 에단의 비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아차 했다. 마치 하나뿐인 딸을 애먼 놈에게 잘못 시집보내는 기분이었다.
“그럴 주제도 아니었으면서.”
공주님에 자신이 무어라고. 감히 그런 생각을 가질까.
그분의 죽음을 외면했던 주제에 이제 와 걱정이라니. 그건 위선인 거다.
그래서 말 한 마디 못 한 채 그렇게 눈물을 삼키며 보냈건만, 그 선택은 결국 정답이었던 거다. 그냥 정답도 아닌, 너무도 대단한 상상 이상의 정답.
벤은 저 멀리, 황금의 깃발 중 유달리 크고 화려한, 카이로스 황제의 깃발을 보았다.
저 깃발 아래 황금의 황제, 에단 카이로스가 있는 거다.
“너무 잘 가셔서 탈이지.”
벤은 쓱, 카이로스의 군대를 눈으로 둘러보았다. 이 붉고 거대한 성을 다 에워쌀 만큼의 대군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신들의 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타르타니의 가호 아래. 그리고 붉은 민족에게 과분하였던 그분으로 인해. 단 한 번도 이 붉은 성 앞에 적군의 군대가 발을 딛고 서 본 적이 없건만.
이제는 온 붉은 대지가 황금의 깃발로 뒤덮혔다.
“얼마나 정의로운 결말인지.”
과분한 은총에 취해 오만을 떨다, 보란 듯 나락으로 떨어진 꼴이 아닌가.
벤은 계속해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이드 님이 그렇게 가신 지 벌써 10년이란 세월도 더 흘러 버렸다. 그 긴 시간을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벤은 그다지 생각나는 것들이 없었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도 모르게 무의미하게 살아왔던 거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기분. 그저 주어진 일을 하며 일상을 살아갈 뿐. 어떠한 의지도 욕망도 사라졌다. 그래서 늘 지옥이었다.
제이드 님이 돌아가신 사실이, 10년이 더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엊그제 일처럼 선명했으니.
“공주님이 저리 안 크셨으면, 정말 세월 간 줄도 몰랐을 거야. 안 그런가, 친구.”
대답 없는, 늘 자신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맥스 자리를 힐끗 보며 벤은 말했다.
‘하하. 그렇지. 우리 공주님이 저리 어여쁘게 크실 줄 누가 알았냐 말이야. 레아 님의 판박이라구.’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만 같고,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벤의 입가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먼저 공주님을 만나러 가겠다고 그렇게 신나 하더니만. 결국 그 공주님 한번 제대로 만나 보지 못하고 그리 허망하게 가다니.
“실속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그 못다 한 만남의 몫은. 그 만남으로 찾아올 뼈아픈 후회의 몫은. 그리고 그 사죄의 몫은 아무래도 벤이 전부 감당해야 하나 보다.
“좀 덜어 주고 가지. 아무튼 도움 안 되기는.”
벤은 투덜거리며 성 기둥에 지친 몸을 기댔다. 늘 함께하는 술 한 잔을 옆에 두어도 좀처럼 손이 가질 않았다. 평생을 애주가로 살았는데, 최근에는 그 술맛이 뚝 떨어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맥스가 죽고 난 그 이후부터. 그래서 그제야 깨달았다. 인생이 써서 술이 단 줄 알았건만, 쓴 인생을 함께해 준, 그렇게 술잔을 기울여 준 친구가 있어서 술이 달았다는 것을.
이제 그 파트너가 없으니 무슨 맛이 있고, 낙이 있겠는가.
그저 그 역시, 뒤늦게라도 그 뒤를 따라가야지.
“전초선이 전부 박살났다고?”
“네, 장군.”
벤은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카티에 불이 오른 지 벌써 하루 하고도 한나절 반. 슬슬 공주님께서 토르시아 본성으로 내려오실 시간이다.
그렇다면, 그 역시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뜻.
“가족들은 다 피신시켰지?”
“……네. 대장군.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잘 보냈습니다.”
“자네도 따라가라니까 그러네.”
“그럴 수야 없죠. 저에게는 장군님이 곧 아버지인 것을요. 아무리 마지막이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함께하겠습니다. 장군!”
한 명이 무릎을 꿇자 일제히 그 뒤의 사령관들도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도망갈 사람은 도망가라고 언질을 주었던 벤이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번 전쟁이 토르티아의 마지막이자, 자신의 마지막임을. 그러니 남은 이들에게도 마지막일 수 있음을 알렸다.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지만, 벤은 더 이상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목청껏 우리도 이길 수 있다고 떠들어 봤자 그 누구도 믿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 허망한 외침이 더 기운을 빼게 만들 거다.
그럴 바에야, 그딴 의미 없는 희망 따윌 붙잡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는 자식 같은 자신의 병사들의 목숨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미 침몰해 가는 배에 함께 타지 말고, 너희들이라도 먼저 빠져나가라 등을 떠밀었다.
그러함에도 남은 이들이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
‘저희에게 제이드 님은, 주군이시자 아버지이십니다. 함께하겠습니다.’
참 젊었을 적의 그와 맥스를 떠올리게 하는 눈이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 한 켠이 묵직했다.
그도 분명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저렇게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동경하는 이의 뒤를 쫓았던 그런 때가 있었는데.
‘이 자식들아. 아버지라니. 너희들이랑 나랑 나이 차이 얼마 안 난다고. 멋대로 늙은이 취급하지 마. 그냥 형님으로 하자. 형님으로.’
그 뒤를 쫓으면 항상 환히 웃어 주며 걸음을 맞추어 주던, 참 멋진 분이 계셨었는데.
그 모든 것을 놓치고 잃어버려 이 지경에까지 왔구나.
벤은 정말 계속해서 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순간, 맥스가 옆에 있었다면 서로 부둥켜 안고 울어 버릴 수도 있을 거 같다.
벤은 여전히 자신만을 빤히 응시하는, 결연한 부하들의 눈을 보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술맛이 떨어진 게 어쩌면 다행인지 모른다. 마지막까지 술에 취해 있는 볼썽 사나온 꼴을 공주님께는 보여 드리지 않을 수 있어서.
벤은 빈 술잔을 엎고선, 그만 삐딱하게 기둥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그들 앞에 제대로 서 그들을 마주했다. 토르티아의 문양이 하나같이 그들의 왼쪽 가슴에 달려 빛을 내고 있었다.
마지막일지라도, 예는 갖추어야 하는 법.
“함께하지 않기를 바랐건만.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끝까지 남을 거라면. 그래. 우리라도 이 붉은 나라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 보자.”
“예. 장군!!”
하나로 모아지는 목소리에는 좀 전보다 힘이 더 들어갔다.
벤의 하늘이 제이드였던 것처럼, 이들의 하늘은 벤이었다는 것을 이분께서는 모르시겠지.
세상 어느 장군이 저 말단 병사들의 가족까지 일일이 챙길까.
그들이 먼저 나서기도 전에 도성에 머물고 있는 부하들의 가족을 피신시키는 이분을 위해 그들은 언제든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
“모든 것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장군!”
붉은 나라의 자존심 따위. 무능하고 무력한 황제 아래에서 포기한 지 오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분에 대한 충성심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런 벤 장군께서 인생을 바친 곳이 이곳이라면. 그렇게 이분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 바로 여기. 토르티아에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그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장군과 함께하여 영광입니다!”
마치 벤이, 저 노쇠한 몸을 이끌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함께해서 영광이다. 토르티아.”
붉은 나라, 붉은 민족 토르티아.
그 유구한 역사의 진짜 마지막을 이제 시작하려 한다.
***
생각을 해 보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저 붉은 머리의 여인이 황금의 깃발을 펄럭이며 이리 달려오는 것을 설명하려면.
“프란시아 님의 부대다!!”
“와아!!”
에단은 땅이 울릴 만큼 환호성을 지르는 군사들을 보며 실소를 속으로 뱉었다. 로엘의 소식이 없을 때 비에 발이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을 적, 그들은 그 기간이 얼마나 된다고 로엘에 대한 온갖 억측을 쏟아 냈다. 그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다. 직접 귀로도 듣기도 하였고, 아론에 의해 전해 듣기도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그 모든 입과 귀를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 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진실을 감춘다는 역효과를 불러올 게 뻔하여 그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 기다림의 결과가 바로 이 순간.
“프란시아! 프란시아!”
“프란시아! 프란시아!”
워낙 높은 지대서부터 내려오는지라 그 모습이 모든 이들에게 한눈에 보였다. 이 수많은 카이로스 병사들 하며, 성루에 올라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토르티아의 병사들까지도 전부 다 승리를 쟁취해 온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더더욱 카이로스 군사들의 함성은 커져 갔고, 지켜보는 토르티아 사람들의 불안은 깊어졌다. 태양 빛을 한 몸에 받으며, 내려오는 그 붉은 머리의 여인은 가히 여신과도 같았으니. 이는 카이로스 사람들에게는 흔들리던 마음에 대한 확신을, 토르티아 사람들에게는 설마가 진짜가 되는 충격을 주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극적인 장면인가.
“이 하나를 위한 거였네.”
이반은 에단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만을 바라보는 에단의 시선을 따라 이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골칫거리였던 테바로스를 깔끔히 정리하고, 카티 성을 되찾아 돌아오는 프란시아의 모습이라.
말 그대로 승리를 가져오는 여신의 모습이다.
“오로지 이 하나를 위한 거였어. 너의 그 모든 인내가.”
에단은 별달리 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긍정이란 의미였다.
많은 이들의 수많은 억측과 불평, 불만을 딛고, 두 사람은 무얼 했나.
카티 성이 테바로스에게 기습 점령 당한 그 순간부터 로엘이 떠나기까지 고작 반나절. 그 반나절의 생각으로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계획했던 거다.
그녀는 키로스를 끌고 카티로 갔으며, 에단은 그를 묵인하였다. 대신 그녀의 출정으로 모두가 소란스러울 때 아무도 모르게 카이로스 본궁에 연락을 취해 칼슨가를 움직였으며, 테바로스의 반란을 이끌었고, 로엘은 혹여 테바로스가 알아챌까 싶어 데릭을 붙잡아 두었다.
로엘은 데릭의 곁을 지켰으며, 에단은 숱한 소문과 억측 속에서도 침묵을 지켰다. 로엘의 인내와 에단의 침묵은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였고, 결국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프란시아! 프란시아! 프란시아!”
그러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로엘이 카이로스의 본진으로 다가올수록 로엘을 연호하는 카이로스 군사들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얼마 되지도 않은 키로스 인원을 데리고 오는 것인데도 마치 엄청난 군대가 그들에게로 들어오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지금 카이로스 사람들에게 로엘이 갖는 상징성은 단순히 ‘프란시아’라는 그 네 글자만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거다.
“알고는 있었지만, 참 여러모로 대단해.”
이반은 슬쩍 에단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언제나처럼, 로엘을 바라보는 에단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언제는 저 황금의 눈이 흔들린 적이 있냐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에단이 로엘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달랐다.
무한한 신뢰. 그를 넘어서는 애정까지.
평소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로엘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그가 아닌 그녀에 대한 마음에서 나오는 거다.
이건 에단이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쏟아 본 적 없는 사랑.
그래서 이반은, 이 눈동자를 처음 본 순간 저절로 그녀를 포기하였는지도 모른다. 에단이 저런 눈을 하게 만드는 여자. 두 번 다시 없으리라는 걸 이반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네. 칼라리엔으로.”
이반은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에도 에단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로, 드디어 달려오는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이반의 말대로, 오로지 그 하나를 위해 참고, 또 참았다.
평생 살면서 이토록 무언가를 바란 적이 있었던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가진 그에게 이러한 간절함이 생길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거다.
로엘 네아레스가 칼라리엔이 되는 것.
그렇게 공식적으로 그의 옆자리에 앉는 것.
그가 원한다면, 그래. 어떤 반대가 있건 못할 일이 아니다.
그는 곧 카이로스이며, 그의 말은 곧 카이로스의 법이니 어느 누가 감히 그의 뜻을 꺾으랴.
하지만, 그건 그가,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그림이 결코 아니다.
그의 후광이 아닌. 그의 총애가 아닌 오롯이 로엘이라는 사람으로서 그녀가 인정받길 원했다.
그렇게 카이로스에게 사랑받길 원했다.
“다가가고 있지.”
에단은 나지막이, 뒤늦은 대답을 했다.
성큼성큼. 달려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에단은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가 칼라리엔이 되는 데에 그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빛이 나는데, 어느 누가 그녀를 인정하지 않을까.
“다가가고 있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씩씩하고 멋지게.
이반은 덤덤히 말하는 에단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언제부터, 에단 카이로스가 이런 표정을 지었나.
자신의 형제를 꽤 많이, 아니 전부 안다고 생각했는데.
네아는, 그가 모르는 그의 형제를 너무 많이 만들어 버렸다.
“그 프란시아님이 드디어 돌아오시네.”
이반은 그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자신이 아무리 곁을 지켜도 채워 주지 못했던 것을, 그녀가 채워 주고 있었으니까.
마치, 이반의 부족했던 바로 그 부분을 네아가 차고 넘치도록 채워 주었던 것처럼.
그러니 그녀는, 두 형제 모두에게 너무도 고맙고,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프란시아! 프란시아!'
어쩌면 카이로스에게도 말이다.
이제야 그가 눈에 들어오는지, 그와 눈이 맞자 환하게 웃는 그녀를 따라 에단 역시 미소를 지었다.
“프란시아님이 돌아오셨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 커지는 함성 소리 속에서, 그녀의 말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고작 일주일. 정말 그 짧은 시간이 무어라고 그토록 시간이 가지 않던지.
그가 얼마나 애가 탔는지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그녀는 절대 모를 거다.
“나의 주군.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니 이리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치 가벼운 아침 인사를 하듯 그 앞에 서 웃고 있는 거겠지. 그는 그저 한시라도 빨리, 언제든 손에 닿을 것 같은 그녀를 품에 안아 그녀가 진짜 돌아왔음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
고작 일주일이 뭐라고, 참 다들 요란스럽게도 그녀를 반겼다. 그만큼 하나같이 로엘을 걱정했다는 의미라 로엘은 그 마음이 그저 고마웠다.
그녀에 대해 숱한 말이 나왔으리라는 것. 그녀가 모를 리 없다. 데릭은 심지어 그마저도 일부러 의도하였는데 말해 뭐 할까. 평생을 소문 속에 살아온지라, 그런 소문 따위에 남들보다 무딘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소문의 무서움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소문은 항시 살에 살을 붙이고 발에 발을 더한다. 일주일이면, 카티를 넘어, 토르티아를 넘어, 저 멀리 카이로스 본성에까지 닿을 그럴 시간이다. 그리고 그 소문이 다시금 그녀의 귀에 들려올 때쯤이면 그녀는 말도 안 되는 나쁜 사람이 되어 있겠지.
특히 이렇게 모두가 예민해져 있는 전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했을 거다. 그녀에 대한 원색적이고 선정적인 말들이 난무했을 터인데, 그 와중에서도 그녀 눈앞에 있는 이들은 단 한 번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너무도 안도하는 이 눈빛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그녀를 걱정하였을 뿐 일말의 의심도 없었으며, 그 걱정이 다행으로 바뀌어 그녀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할 뿐이다.
각자의 방식과 각자의 표현대로.
무사히 돌아와 주어 감사하다고.
“폐하.”
물론, 그들 중에서도 그녀를 가장 많이 걱정했을 이는 단연코 눈앞에 있는 이분이겠지만. 로엘은 모두가 물러간 후에서야 제대로 에단의 앞에 섰다.
근 일주일 만이다.
“다친 데는.”
“전혀 없습니다.”
역시나 그는 제일 먼저 그녀의 안위부터 살폈다. 워낙 위풍당당하게 돌아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그는 여전히 그게 제일 중요한가 보다. 그 사실이 로엘의 미소를 좀 더 진하게 만들었다.
“무사히 잘 다녀왔어요. 폐하.”
그녀는 먼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큰 손은 언제나처럼 얼음장같이 차가웠지만, 그 속은 누구보다도 뜨거운 것을 로엘은 안다. 지난 일주일, 이 남자가 했을 걱정과 불안을 감히 어느 누구와 비할까. 매일매일 당장이라도 카티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또 참았겠지. 그 또한 결국 그녀를 위한 일임을 너무도 잘 알아 로엘은 그저 그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로엘이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그 역시 좀 더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붉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렇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익숙한 향기가 코안 가득 차고, 익숙한 온기가 빠르게 전해져 왔다. 두근두근. 빨리 뛰는 이 심박수가 맞닿은 가슴을 통해 느껴지자 그제야 에단은 비로소 실감했다.
그의 여인이 무사히 자신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다녀왔습니다.”
로엘 역시 그런 그의 품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제야 그녀도, 잔뜩 들어가 있던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저절로 올라가던 어깨에 힘이 빠지고, 긴장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피곤도 한 번에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힘껏 그의 넓은 등을 안았다. 그가 그녀의 모든 것이 익숙하듯 그녀 역시 그의 모든 것이 이제는 너무도 익숙하기에, 이 향기와 이 온기를 느끼자 바로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정말 그깟 일주일이 무어라고. 이리 애틋할 건 또 무언가.
“다녀왔어요. 에단.”
로엘은 자신을 마주 안아 주는 그의 품을 한동안 놓지 않았다.
드디어,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
“어째서 다시 피제로 돌아오신 거예요?”
“그게 편하니까.”
고민이 가득한 그녀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지나치게 간결하였다. 대충 대답하는 것 같아 그녀가 살짝 눈썹을 찌푸려도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녀의 몸을 단단히도 동여맨 갑옷을 하나둘 걷어 냈다.
“다시 돌아오실 거면, 굳이 토르티아의 진지를 박살 낼 건 없잖아요? 오히려 이동 손실만 들 텐데.”
“대신 사기를 높이고 또 다른 사기를 꺾었지.”
누구의 사기가 높아지고 누구의 사기가 떨어졌는지를 굳이 말하는 건 입 아픈 일.
핏자국이 낭자한, 휑한 대지를 바라보며, 조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카이로스 부대에 합류하자마자, 그는 다시 피제로 일보 후퇴했다. 그대로 토르티아로 진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마 꽤 많은 군사들이 예상했을지 모른다. 그만큼 비가 그친 후 피제 성으로의 진격도, 그 이후 토르티아 본성의 마지막 보루인 최후 진지로의 진격도 전부 다 너무도 카이로스가 압도적이었으므로.
그런데 예상을 깨고 에단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결정에 누구보다 루카스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루카스가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건 아니었다. 투덜거리면서 군사들을 다독일 뿐이다. 어쨌거나, 그녀 입장에서는 다시 피제에 도착한 덕분에 성 안에서 조금 더 편한 하룻밤을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또 다른 진지를 이 밤에 세우면요?”
“그럼 더 쉽게 부서지겠지.”
로엘은 그의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 토르티아의 본성만을 남겨 둔 상황.
그는 신중하고 있다. 동시에 가장 최적의 투자를 통해 가장 최대의 이득을 보기 위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그가 평생을 준비한 북방 정벌의 위대한 시작이자 전부가 될 기념비적인 전쟁.
많은 시간과 많은 노력이 들어간 만큼 그는 반드시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단순한 최고가 아닌, 에단 카이로스가 만족할 만한 수준의 그런 최고.
그 안에는 분명 그녀도 들어 있을 터.
“내 등장을, 알리고 싶었구나. 모두에게.”
그것도 매우, 기적처럼 극적이게.
그래서 그는 일부러 그녀가 카티에 불을 올린 그 시점에 진격을 한 거다.
그녀의 승리를 알리는 카티의 불길이 결국 또 다른 에단의 승리임을 보이기 위해.
거기에 적절히 황금의 독수리가 날아올라 그녀에게서 그에게로 날아왔으니, 정말 순진무구한 백성들이 본다면 승리의 여신의 새가 황제께로 날아왔다고 굳건히 믿을 수밖에 없다.
“……다들 백성들 속이느라 너무 바쁘시네요.”
저 ‘다들’의 의미에는 데릭도 포함되어 있었다. 데릭 역시 카티 성에 로엘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바로 테바로스의 군사와 백성을 속이려 들었으니.
마치 승리의 여신이 다시금 그에게로 돌아온 양.
정작 그 승리의 여신이라 불리는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너무도 평범한 여인인데도 말이다.
신 따위가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목청 높여 너 나 할 것 없이 그 있지도 않은 여신님을 두고 백성에게 말 전하기 바쁜 거 같아 그 모습들이 조금 우습고 씁쓸했다.
“엄연히 말하면 속인 건 아니지.”
“속이는 거죠. 그들의 무지를 이용하는 거니까.”
“틀렸어. 그건 똑똑하고 멍청하고의 문제가 전혀 아니야”
높게 묶은 그녀의 머리를 풀며 답하는 그의 대답은 제법 단호했다. 긴 머리가 아름답게 흘러내리며,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정확히 에단의 황금 눈을 향했다.
“저들도 알아. 북방에서 오신 붉은 머리의 공주님께서는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그들은 그저 믿고 싶은 거야. 그래야, 그들의 불안이 조금이라도 가시고, 없던 자신감이 조금이라도 생기니까.”
백성을 속인다라.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니. 반이라도 맞다고 하면 그는 조금 서글퍼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그 수많은 침묵들이 결국엔 거짓말이 되어 버리니.
“나는 그저 저들이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고 보고 싶은 것을 보여 줄 뿐이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백성은 그들의 고된 일상과 힘든 전쟁을 버티지 못할 테니.”
로엘은 그제야 자신이 의도치 않게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결국 그들을 위했다는 것은 조약한 변명이 되지 않는다고 다른 누군가가 말한다면 로엘은 쉽사리 반박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들을 위한 이 마음이 외면당한다면 그때는 조금, 아니 많이 화가 날 거 같다.
그러기엔 백성을 생각하는 이 사람의 마음이 너무도 애틋하니.
“……그렇게 나의 등장은 당신의 카이로스에게 도움이 되었나요.”
“큰 도움이 되었지.”
환호를 하며 열광을 했으니. 분명 오늘 밤에도 두고두고 그녀의 등장을 두고 이야기꽃을 피울 거다. 그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더 대단해질 거고 더 아름다워질 거며 더 멋있어질 테지. 그러다 결국 그 이야기의 끝은 카이로스의 승리로 귀결될 거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얼 걱정하고 무얼 두려워할까.
승리의 여신이 자신의 편인 것을.
“그럼 되었습니다.”
그녀는 올곧게 자신을 응시하는 그를 보며, 진심을 담아 답했다.
그녀에게는 정말 그걸로 되었으므로.
그녀는 그에게 자신을 이용하지 말라고 투덜거리는 게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프란시아라는 그 호칭과 그 대우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하기 싫다는 뜻 역시 아니다. 그것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녀는 기꺼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을 프란시아님이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손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뻔뻔스럽게 잡아 주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은 오로지 그를 위한 일이므로.
그리고 그것이 곧 그들을 위한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므로.
“그래.”
일일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녀의 마음에 그 역시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 의해, 그녀는 얇은 민소매와 허벅지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얇은 바지만을 입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여기서 제가 눈치 없게, 내일 어쩌실 작정이냐 물어보면 안 되겠지요?”
“잘 알고 있네.”
그는 가볍게 그녀를 안아 들어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섰다.
초소를 만들지 않고 피제로 돌아온 이유. 여기에도 있다면 그녀는 눈을 흘기겠지.
그러니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느라 시간을 쏟을 필요가 없다.
그는 그녀를 살포시 내려놓으며 자연스레, 훤히 들어난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 로엘은 얼굴을 조금 붉히며, 그런 그를 마다하지 않았다.
너무도 중요한 전투 전에 이러시면 안 된다고. 다 끝난 후에 당신에게 뜨겁게 안기겠다고 말려야 하는데 그러한 이성의 말을 그녀의 몸이 듣질 않았다.
그보다는 얼른 저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내리눌러, 그의 열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니, 이제 좀 눈치 있게 조용해지시려나.”
그 마음이 민망할 정도로 솔직히 드러나, 그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셔츠를 당기는 작은 힘이 귀엽기도 하다.
이 모습을 혹여 데릭 테바로스가 볼까 봐 얼마나 많이 불안했었는지, 그녀는 결코 모를 거다.
“조용해진 건 아까 전부터였어요.”
그런데도 이리 귀엽게 그를 유혹하고 있으니, 어찌 이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까.
그를 당겨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하여 이곳이 피제라는 것도, 전쟁 중이라는 것도 전부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도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에단.
이대로 가만히, 밤을 지새우실 건가요?”
앙큼하기도 한 그녀의 수줍은 유혹에 그는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나오신다면, 지금 상황이 어떠하건 당연히 응해 드려야지.
“이거, 아주 위험한 여신님이었네.”
더 이상의 말없이, 그저 웃기만 하는 그녀의 입술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뜨거운 키스를 선사했다. 순식간에 서로의 열기가 타오르며, 두 사람은 애써 괜찮은 척했던 지난 일주일의 회포를 이제 진짜로 풀려 했다.
조금은 야하고, 많이 뜨거운, 그런 둘만의 방식으로.
***
서로를 욕망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열기가 번지는 건 순식간이다.
“하아.”
무섭게 몰아치는 그의 키스를 겨우겨우 따라가던 로엘이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분명 시작은 불이 붙은 그와 정신없이 키스를 하는 거였는데. 겨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침대 위에 눕혀 있었다.
“다친 곳은 진짜 없어?”
“전혀요.”
도대체 몇 번을 물어보시는지. 그녀의 위에 올라타 상의를 벗는 그 순간에도 그는 그 사실을 물어 왔다. 그만큼 그에게는 그녀의 안위가 그 무엇보다도 우선순위인 거다.
“나는 정말 괜찮아요.”
그래서 그녀도 몇 번이고 같은 대답을 했다.
그게 그를 편하게 만들어 준다면 이깟 말. 수백 번 수천 번 해도 상관없다. 그는 그녀의 똑같은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충 다 벗어 버린 상의를 침대 밑으로 던져 버렸다.
샹들리에를 등지고 있어 그늘이 진 그의 탄탄한 복근이 그녀의 눈에 선명히 들어오고, 그와 함께 그녀의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오늘따라 유달리 부끄러워하는 그 순수한 반응에 그는 여느 때처럼 피식 웃고 말았다.
“지나치게 새삼스러운 거 아닌가.”
“됐거든요.”
이렇게 놀릴 줄 알았다. 하지만 멋대로 이리 열이 오르는 것을 어찌할까.
너무도 그가 그리웠고, 또 그리웠기에. 그래서 스스로가 생각해도 민망할 정도로 그에게 안기고 싶어 몸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이리, 그의 탄탄한 복근만 보아도 저절로 불이 들어왔다.
“너무 빤히 보는데.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하지만…… 볼 때마다, 아름다운걸.”
당신의 이 조각 같은 몸이.
로엘은 근육이 잘 잡힌 그의 가슴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어쩜 이 남자는 근육마저도 이리 완벽한지, 누가 빚어 놓은 듯한 균형 잡힌 몸에 로엘은 남몰래 감탄했다.
“……진짜 예쁘단 말이에요”
처음 그의 품에 안긴 날, 그녀가 다른 것보다도 그의 이 아름다운 몸에 마음이 뺏겼다는 것을 그는 상상도 못 하겠지. 한껏 성난 나신의 남자를 처음 보면서도, 끝까지 눈을 안 돌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만큼 로엘은 그의 몸이 좋다.
“예전에도 말했던 거 같은데.”
에단은 작은 한숨을 쉬며, 그의 몸 위에서 꼼지락대는, 그래서 그를 자극하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남자로서 그 말, 하나도 기쁘지 않아.”
그러고는 그대로 그녀의 손을 올려, 하나 남은 그녀의 얇은 상의를 벗겼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건 너야.”
달콤한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고, 뜨거운 손길이 그녀의 가녀린 몸을 쓸었다.
누가 누구의 몸을 칭찬하고 있는지.
그야말로 그녀에게 제대로 알려 주고 싶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이리 얼굴을 붉히며,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너야말로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다고.
“아.”
그러니 그만이 볼 수 있다.
그녀의 모든 것은.
“응…… 에단.”
그는 이미 봉긋 솟은 그녀의 가슴을 머금었다. 다른 한 손으로도 나머지 한쪽 가슴을 움켜쥐자, 바로 그녀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단해진 분홍 정점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그는 손안 가득 차는 이 부드럽고도 말캉한 촉감을 원껏 즐겼다.
유달리 가슴에 집착하는 그가 일부러 붉은 흔적을 남기는 것을 알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그를 그저 내버려 두었다.
“아읏……!”
솔직히 다른 방도가 없었지만.
그의 입술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며 꽃을 피우자 그녀는 자연히 열기에 몸을 비틀었다. 배꼽 부위를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갈수록, 허리가 저절로 들썩였다. 마지막 남은 천 조각을 그가 쉽게 걷어 낼 수 있게 살짝 엉덩이를 드는 스스로에게 놀랄 지경이다.
“아. 에……단……!”
그런 적극적인 그녀를 그가 마다할 리가 없다. 그는 잔뜩 오므려진 그녀의 다리를 부드럽게 열고 그녀의 허벅지 안쪽서부터 꽃을 피워 갔다. 점점 더 뜨거운 열기가 쏠리는, 그래서 샘이 차오르는 그녀의 중심에 다다르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머리를 밀었다.
"자. 잠시만…… 으응!“
물론 그런다고 멈출 그가 아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뜨거운 샘을 맛보았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단번에 몰려오면서도 그를 넘어서는 쾌감이 그녀의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움찔거리며 오히려 더 그를 반기는 그 깊고 깊은 샘으로 그는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 아아!”
작은 스위치를 조금만 괴롭혀도 저절로 문이 열린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아 그의 손은 금세 그녀의 몸에서 힘을 빼 버렸다. 거침없이 파고든 굵은 손가락이 쉬지 않고 왕복할수록 그러지 않아도 차오른 그녀의 중심이 더더욱 넘쳐흘렀다.
“아아읏!”
그렇게 그보다 한 박자 빠르게 그녀의 눈앞에 새하얘졌다. 허리를 꺾으며 소리를 높이는, 그렇게 쾌락과 열기에 젖어 드는 모습에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아. 하아.”
작은 절정이 지나가느라 얕은 숨을 헐떡이는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작은 키스를 남겼다. 이대로 좀 숨을 돌리게 하려 했는데.
“빨리…….”
그 잠시만의 허전함조차, 그녀는 싫었나 보다.
민망함과 수줍음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렇게 절대 그녀의 입에서 나올 거 같지 않은 단어가 나와 버렸다.
그 순간, 그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를 원해 하는 그녀의 모습이 무서울 정도로 위험해서.
“빨리 뭐.”
그래서 그 모습이 더 보고 싶었다.
“제대로 말해야 알아듣지.”
로엘은 그가 이렇게 짓궂게 말할 줄 알았다. 저도 모르게 나온 재촉에 그러지 않아도 부끄러워 미칠 지경인데 그걸 또 넘어가지 않고 이리 놀릴 건 뭐란 말이다. 그녀의 열기 어린 눈이 조금 가늘어졌지만, 오히려 그 반응에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눈가에 키스했다. 그러고는 바로 그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신이 되었다.
“진짜…… 계속 애 태울 거예요?”
자연히, 잔뜩 성난 그의 중심으로 시선이 쏠리고 그녀는 꼴깍 침을 삼켰다.
함께한 밤을 생각한다면 이제는 낯설다기보다 익숙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테지만, 로엘은 정말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저 크고 단단한 것이 자신의 안으로 들어온단 생각을 하면 두렵기까지 하다.
문제는, 그 두려움을 잊어버리게 하는 그 쾌락을 알아 버렸달까.
“그렇게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면 안 되지.”
“내가 언제……!”
“오늘따라 많이 귀여우시네. 나의 비께서.”
하지만, 여전히, 여유로워 보이는 그가, 실은 그녀보다도 여유롭지 않다는 것은 모르겠지.
“아주 감사하게도.”
“아읏!”
그는 단번에 그녀의 안으로 들이쳤다. 한 번에 가득 차는 그 느낌에 그녀는 큰 교성을 내지르며 허리를 꺾었다. 아까부터 성난 그의 중심은 너무 단단해져 이제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서 조금 전의 열기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를 기다려 줄 수 없었다.
“윽!”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가득 참. 단번에 끝까지 들어온 그에게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함락당했다. 저절로 튀어 오르는 허리를 안아 들고 그는 바로 그 안을 거칠게 두드렸다.
“아! 윽! 으읏! 에…… 단……!”
“로엘……!”
그의 단단함을 뜨겁게 조여 오는 그녀의 안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진해진 서로의 체취와 서로의 몸이 엉키는 야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워진 열기에 이 한겨울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갔다.
“으응.”
틈틈이 입을 맞춰 서로를 더 진하게 느끼며, 그들은 하나로 이어짐을, 그 짜릿한 쾌감을 같이 만끽했다.
“하아. 하아. 으읏……!”
그는 정말로 그녀를 쉬게 할 마음이 없나 보다. 이때쯤 조금은 속도를 줄여 갈 법도 한데, 그는 바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그녀의 몸을 돌렸다. 뼈밖에 없이 마른 그녀가 힘이 얼마나 되겠는가. 열기와 쾌락에 취해 정신이 없는 그녀가 엎드린 채로 그를 뒤돌아보자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한 번 더 그녀의 안 깊숙이 들어가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아앗. 읏!”
규칙적인 움직임에 맞춰 그녀의 입에서 교성이 토해져 나왔다. 흘러내리는 머리와 함께 흔들리는 가슴이 그를 유혹했다. 한껏 세게 움켜쥘 때마다 그녀의 안은 그를 더 죄어 왔다.
“하아. 로엘.”
정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좋았다. 사람의 몸이 어떻게 이리 좋을 수 있을까 매번 생각하지만, 그 생각과 기대를 훌쩍 넘어설 만큼 매번 말도 안 되게 좋았다. 에단의 단단함도 이제는 한계에 치달았는지 움직임의 속도가 빨라지자 그녀 역시 또 한 번 그녀의 몸에 올 그 큰 파도에 저절로 행복한 긴장을 해 갔다.
양팔로 몸을 지탱한 채로, 들어차는 그를 버티며 그녀도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이제는 남자를 어떻게 미치게 하는지 저절로 터득해 버린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가르친 보람이 있지 않은가.
“아……! 아아아아!”
결국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훨씬 기나긴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읏. 로엘……!”
그 역시 짧은 숨을 토해 내며, 잘은 진동과 함께 그녀의 안 가득히 그의 뜨거움으로 채웠다.
그렇게 또다시, 두 사람은 함께 아찔한 쾌락을 나누었다.
그들에겐 너무도 길었던 그 일주일을 보상하듯,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아찔하게.
***
“어째서, 물어보지 않는 거예요.”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채로, 그의 품에 있는 그녀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그녀의 젖은 머리를 넘겨주던 그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관심 없으니까.”
짧고 간결한 대답에 로엘은 그를 빤히 보았다.
내가 무얼 물어보는지 알고 그렇게 단번에 대답하냐고, 되물으려다 말았다.
이 눈치 빠른 분께선, 지금 그녀가 무얼 묻고 무얼 말하려 하는지 이미 다 알고 계실 테니.
“저는 말하고 싶어요. 카티에서, 지난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래서 일부러 더 그녀는 말을 이었다.
관심 없다는 그의 말 속에 어떤 진심이 담겨 있는지는, 누구보다도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전부 말하고 싶어요. 폐하.”
카티에서의 일주일을. 데릭 테바로스와 함께한 그 시간을 로엘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 주고 싶었다. 그렇게 그의 이유 없는 불안과 분노를 없애 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까. 어떻게 알고 싶지 않을까.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사랑하는 또 다른 이와 일주일 넘게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예전, 수아가 그녀에게 일부러 폐하의 하룻밤을 달라고 했을 때, 로엘은 그 한마디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래서 폐하를 알현하는 수아의 그 짧은 시간마저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두 사람만의 대화.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그 순간의 모든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싫었다.
그런데 그녀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온 세상에 떠들고 있는 데릭 테바로스라면 말해 무얼 할까.
아마 에단은 그 모든 시간 매분 매초를 알고 싶을 거다.
로엘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저는 카티에서 당신을 생각했어요.”
데릭 테바로스부터 시작할 줄 알았던 그의 예상을 깨고 그녀의 시작은 다름 아닌 그였다.
그 사실에 시큰둥하던 그의 눈이 조금은 놀란 표정을 하더니 이내 그녀를 제대로 마주하였다. 저도 모르게 기뻐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여, 로엘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데릭 황제는 저가 올 줄 알고 있었고, 제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저희를 에워싸 포박했지요.”
“뭐?”
에단의 눈썹이 바로 꿈틀거렸다. 순식간에 정색하는 그의 눈은 너무도 예상된 일이었다.
하긴. 어디 감히 카이로스의 사신을 포박할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타국에게 카이로스의 사신이란 말 그대로 가장 극진한 대접을 받는 최고 귀빈이다.
속국의 조공을 받든, 동맹국의 대접을 받든, 무슨 일이 있건 카이로스의 사신으로 간다는 것은 그 나라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었다. 그러니 움직이기 싫어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귀족들도 사신으로 나가는 것만은 언제나 앞 다투어 하려 했다.
그런데 감히, 다른 이도 아닌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를 포박하다니.
에단의 머리가 뜨끈해질 수밖에.
“키로스들은 뭘 하고 있었어.”
“목숨을 걸고 저를 지키려고 하길래,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목숨 건 보호 같은 거, 정말로 원치 않으니까요.”
“원래, 그런 거야.”
“저는 그 원래가 싫어요.”
로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해서 에단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괜한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으니.
목숨을 바쳐 지킨다는 것.
그걸 받아들인다고 하여 그가 한 생명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평생 황족으로 살아왔다고 하여, 누군가가 자신을 목숨으로 지키는 것을 당연시 여길 수는 없는 법. 에단은 그런 멍청한 위정자가 아니다. 그저 그들의 긍지와 소명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걸 부인하기에는, 이미 그를 위해 죽어 간 너무도 많은 생명이 있으므로.
‘위대하신 나의 하늘. 나의 폐하. 저는 폐하의 검이자 방패. 오로지 폐하를 위해 대신 피를 묻히고 대신 피를 흘리겠나이다.’
루카스를 대장군으로 임명하던 바로 그날. 그를 올려다본 루카스 세버의 눈을 그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루카스가 그를 위해 죽는다는 것.
그래. 꽤나 그에게도 아픈 일이다. 아니, 두고두고 평생을 두고 괴롭힐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한들, 에단이 어떻게 루카스에게 나를 위해 죽지 말라는 그 말을 할까. 그것이 카이로스의 대장군, 루카스 세버에게는 최고로 영광스러운 죽음인 것을.
황자님을 위해. 황제 폐하를 위해. 카이로스를 위해.
참 많은 카이로스의 생명이 사그라들었고 참 많은 양의 피가 대지를 적셨다.
그는 절대 그 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절대 그 희생을 잊어서도 안 된다.
그저 감사하고, 그저 미안하며, 그저 그가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기억하고자 노력할 뿐.
“……그래서.”
“그래서 카티 성으로 들어갔지요.”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아 로엘은 침묵을 지켰다. 키로스의 목숨을 받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았으니.
그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아마 그는, 오늘 그녀를 반겨 준 그 모든 이들을 생각했을 거다.
그래서 그녀야 말로 더 이상 묻지 않은 채,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데릭 황제는 저를 성에 묶어 두었습니다. 가는 길마다 키로스가 함께했지만, 그곳에는 늘 테바로스의 정예군이 따라붙었고, 카티 성 어디든 저를 보는 눈들이 가득하였지요. 제가 당도하였을 때까지만 하여도 피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시체를 뜯어 먹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 댔고, 저는 그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물론 까마귀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곳에서 편히 잘 순 없었겠지만.
로엘은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시트를 끌어당겨 가슴을 가린 채 그와 제대로 마주 앉자, 마지못해 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제대로 그녀와 마주 보았다. 그가 버릇처럼 그녀를 좀 더 당겨 그 맨어깨에 무어라도 덮어 주자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경계가 높았지요. 무장한 테바로스 군사가 저에게 검을 겨누었고, 그들의 숫자는 키로스보다 훨씬 많았으니까요.”
“그랬겠지.”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아무리 데릭의 정예군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한 성을 함락시킬 수준의 인원일 것이 자명하다. 그에 비해 키로스는 딱 그녀 하나 지킬 규모에 불과하니 그 차이가 어떠랴.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다.
“네. 그래서 겁이 났어요.”
좀처럼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그녀의 입에서 쉽게 나올 수 없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그는 조금 의아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 눈길에도 여전히 그녀의 눈은 흔들림 없이 올곧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걱정을 할까 봐, 힘들어도 힘들단 소릴 잘 하지 않는데, 지금의 그녀는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그만큼 그녀가 이 일에 관하려 그에게 조금도 숨기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많이, 겁 났어요. 폐하.”
시에라는 카티 성 내내 그녀에게 대단하다고 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냐고. 실은 그러하지 않다고. 자신도 많이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있다고. 아니 무섭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로엘은 그저 웃었다. 불안과 불안이 만나 보았자 더 큰 불안만 만들 뿐이므로.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고 그 감추어진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걱정이 앞서고 또 앞섰다.
혹여나 자신 때문에 같이 따라온 시에라들이 죽을까 봐. 혹여나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카이로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 봐. 그렇게 정말로 카티에 발이 묶일까 봐.
그렇게 데릭 테바로스에게 잡혀, 다시는 그에게 돌아가지 못할까 봐.
“그렇지만 잘 해내 주었지.”
에단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머리 위로 그 익숙한 묵직함이 느껴지자, 살짝 아래를 향하던 그녀의 시선을 다시 위를 향했다.
“내 기대보다도 훨씬 더 잘 해 주었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는 그녀에게 잘하였다 말해 주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선생님께 칭찬받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 짧은 한마디가 무어라고 로엘은 순간 뭉클했다.
몰랐는데, 아무래도 그녀는 잘 해내 주었다는 이 한마디를 그로부터 듣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그녀를 쓰다듬어 주는 기분 좋은 손길에 좀 더 어리광을 피우려는데,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자정을 알리는 소리였다.
“어느새 꽤나 밤이 깊었네요.”
로엘은 조금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에단을 보았다.
“폐하. 혹시 피곤하시면…….”
“전혀.”
그는 그런 그녀의 걱정을 단번에 잘랐다. 이건, 끝까지 듣겠다는 말이다.
관심 없다는 그를 기어코 일으켜 세워 이야기를 시작한 건 로엘인데, 정작 로엘이 이제는 머뭇거리게 되었다. 이 좋은 분위기를 굳이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시작한 건 너야. 끝맺음을 맺어.”
그런 로엘의 망설임을 그는 바로 알아챘다. 그녀를 올곧이 바라보는, 그렇게 그녀의 속마음까지 다 꿰뚫어 볼 것 같은 그 황금 눈동자에, 로엘은 결국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굳이 지금 말할 필요가 없는 것도 맞지만, 굳이 지금 안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지금 안 하는 것이 나중을 더 힘들게 할지 모른다.
“테바로스는…… 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할밖에.
조금 낮아진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방 안을 울렸다.
“말 그대로, 저는 데릭 황제와 일주일을 함께했습니다.”
일주일을 함께했다는 말.
대수롭지 않다면 대수롭지 않고, 위험하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는 말이다. 일주일간 남녀가 함께였다면, 참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으므로.
에단은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이 여인은 지난 일주일간 데릭 테바로스와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그 기준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데릭 테바로스를 죽이면 죽였지, 그녀는 절대 그녀 자신을 다른 이에게 허락할 사람이 아니다.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걷고.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에단에게는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저 한마디만으로도 매우 불쾌하였으므로.
사랑을 나누고 확인하는 건 남녀 사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마음을 나누는 것. 생각을 나누는 것. 그렇게 함께함으로서 서로에게 안정을 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평온이 되는 것.
그 자체가 소중한 거다.
지금 데릭 테바로스는 로엘과 바로 그런 시간을 보낸 거다.
그러니 그의 눈빛이 차갑게 식을밖에.
“딱 한 번 데릭 황제가 밤에 찾아왔어요.”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마주하고 있는 그가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 그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갈 때마다, 그녀의 심장도 쿵쿵쿵 미친 듯이 뛰었다.
그가 그녀에게 질려 버리면 어쩌지. 그렇게 너무도 화가 나 다시는 안 보겠다고 하면 그때는 무슨 말로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 그를 위해서였다는 말을 하더라도, 그가 이해해 주지 않으면 어쩌지.
그 짧은 한마디를 하는 순간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진실에 덜하고 더함이 있을 수 없기에 그녀는 온전히 모든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 밤을 멋대로 빼놓고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을 한 것과 진배없으니.
“폐하. 저는 그 밤. 그와 함께하였습니다.”
아. 정말. 그녀는 어디까지 그를 시험에 들게 하려는 걸까.
에단은 머리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고 싶지 않은 오해를, 하고 싶지 않은 상상을 해 버릴 것만 같았다.
에단은 손을 올려 그녀의 가는 뒷목을 감쌌다. 그러고는 힘을 주어 그녀를 가까이 했다.
힘이 들어간 그의 손에 그녀의 턱이 조금 들리고, 마주하고 있던 그의 황금 눈이 보다 더 가득히 그녀의 붉은 눈에 들어찼다.
“말, 생략하지 말고 똑바로 설명해.”
낮게 깔린 목소리.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노가 가득 찬 눈.
그러지 않아도 빨리 뛰던 그녀의 심장이 더 미친 듯이 뛰었다.
쿵쿵쿵. 아마 그녀의 뒷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도 이런 그녀의 심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질 거다. 어쩌면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것마저 눈치채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녀가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그게 그의 화를 더 돋울 수 있어서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 적어도 그녀의 판단은 이게 최선이다.
“그가 제게 물었습니다. 테바로스가 카티에서 나가는 것을 조건으로, 안기겠느냐고.”
“뭐라고?”
그녀의 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과도하게 들어갔다. 아픔이 느껴져 저절로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
지금 이 성에 데릭이 있었다면, 그는 당장 그 목을 내려쳤을 거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라도 군사를 보내 테바로스를 피바다로 만들지도 모르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충분히 그리할 수 있는 이 세상에 유일한 사람이니.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러한 에단 앞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그를 피하지 않았다.
그 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그건 그녀가 해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것에 대해 거짓이 없다는 것도 알고, 그것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런 건 지금 그가 느끼는 이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데릭 테바로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그 순간이 어떠하였을지. 그 말을 하는 데릭 테바로스의 머릿속에 어떤 욕망이 들끓었을지, 에단은 너무도 잘 알기에 이토록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거다.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당신이 모르는 그자와의 시간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엄밀히 말한다면, 그래. 그녀는 실수한 게 없다.
그녀는 작전에 따라 카티에 데릭을 붙잡아 두어야만 했고, 그의 시선을 오로지 그녀에게 집중시켜야만 했으며, 그를 위해 그녀는 그의 장단에 맞추어 준 것뿐이다.
그 과정에서 지나간 하룻밤.
그 밤 그녀가 데릭의 품에 안기지 않았으니, 그녀는 분명 실수한 것도, 잘못한 것도 없다.
그러니, 그녀는 당당하여도 된다. 그걸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화가 주체되질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잖아.”
이는 그녀의 그 시간에 다른 무언가가 있기 때문.
“네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전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야.”
그제야, 드디어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는 그 밤. 그 일주일에 깨달아 버린 거지. 데릭 테바로스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나 보다. 이 아름다운, 황금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의 커다란 손은 그녀가 어디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그녀의 목을 잡고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만이 귀 안을 울릴 뿐, 그 흔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흘렀다.
그에게 말한 그대로 그녀는 그저 솔직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어쩌면 솔직함을 명분으로 한 그녀의 이기심일지 모른다. 그에게 낱낱이 소상히 밝히면 그녀는 떳떳해진다고 멋대로 합리화해 버릴 수 있으니. 그걸 앎으로써 받는 그의 상처와 분노는 그의 몫임에도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한때, 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가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 듣기 좋은 구실로 데릭과 있었던 일들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찌 되었나.
결국 모든 것들을 뒤늦게 들켜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고, 더 문제를 만들었다.
그 여러 번의 반복된 실수 끝에 그녀는 결정하였다.
비록, 그가 화내고 싫어할 일일지라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저질러진 일이라면 빠짐없이 털어 놓자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말한다는 그런 어쭙잖은 핑계로 도망가지 말자고. 그렇게 애초에 비밀을 만들지 말자고. 그렇다면 그 비밀로 인한 오해도 생기지 않을 테니.
“너는 알아 버린 거야. 그자의 마음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그런데, 그 결심이 실행으로 옮긴 이 순간 후회가 밀려오려 한다.
로엘의 붉은 눈동자에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네가 외면하고 있었던, 네가 애써 부인하던, 그 자신의 진심을 봐 버린 거지.”
그래서 마음 아프고. 너무도 미안했겠지.
그걸 알아 버린 바로 그 시점에 그녀는 그자에게 가장 잔인한 짓을 해 버렸으니.
로엘의 눈동자에서 기어코 굵은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놓지 못했지. 나도 어쩌지 못할 만큼,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여기서 울어 버리면 안 되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당당히 말해야 하는데. 멋대로 눈물이 떨어지고 멋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데릭 테바로스가 무어라고, 이리 눈물이 나는가.
이미 옛날에 끝나 버린 인연.
그녀가 가장 힘들고 아플 때 정작 곁을 지키지 않았던 사람을, 그녀는 한동안 기억 저편에 묻어 두고 꺼내 보지도 않았다. 추억을 되짚기엔 그녀의 상황이 너무도 힘들고 아팠으니. 그렇게 영영 그녀의 인생에 만날 일이 없다 여기던 그가 다시금 이리 그녀의 삶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그가 반가웠나. 아니, 그렇지 않았다.
반갑다고 말하기엔, 그녀는 너무도 오랜 세월 그를 잊고 있었으므로.
“울지 마.”
에단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힘을 주던 손에서 힘을 풀고, 그대로 그녀의 뺨에서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른 남자 때문에 자신 앞에서 우는 황제의 여인이 역사상 있기는 하였나. 그랬다면 전부 그 황제의 손에 죽어 나갔을 테니 아예 기록조차 없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에단 역시, 데릭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화가 나는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한들 이 울고 있는 여인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다.
그래서 이만 정리를 해 주고 싶다.
외면하기 바빠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감정을.
영영 몰랐으면 했으나, 이미 알아 버렸고. 알아 버렸다는 그 사실마저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
“너는 데릭 테바로스를 너무도 잘 알지. 그자의 욕망을 알고, 그자의 야망을 알며, 그자의 비열함을 알아. 그래서 막연히 생각했을 거야. 그가 너에게 속삭이는 모든 애정 표현 역시 철저히 계산되어 있는 거라고.”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라는 칭호.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를 뺏어 왔다는 명성. 좀 더 나아가면 이전 자신의 것이라 믿었던 것에 대한 뒤늦은 집착까지.
오로지 그것들 때문에 데릭이 자신을 원한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그자는 네 생각보다도 훨씬 더 순수하게 너를 마음에 두었던 거지. 데릭 테바로스답지 않게. 어떠한 계산 없이. 순수하고 진실되게. 그렇게 데릭 테바로스는 로엘 네아레스를 사랑해 왔어.”
그녀가 그를 잊고 있었던, 그래서 에단과 사랑에 빠진 바로 그 순간에도.
에단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엔 여러 감정이 뒤죽박죽 얽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들을 줄,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
“네가 이렇게 우는 거는, 로엘. 나의 여인아. 너 역시, 그런 데릭 테바로스를 한때는, 진지하게 사랑했기 때문이야.”
남녀 간의 사랑을 운운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
그래. 데릭과 로엘의 그 시절 사랑은 성적인 불손한 것들이 끼어들 수 없는 순수함이 있었다.
그저 함께하여 감사하다는, 존재하여 고맙다는 그 마음.
남녀 간의 두근거림이 없더라도, 그건 분명 사랑이다.
“너는 그 사랑을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은 채, 영원한 안녕을 고한 거지. 네가 우는 건 바로 그 때문이야.”
그 오래된, 순수했던 그 시절.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던 그를, 그녀는 그 흔한 작별 인사 없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이제야, 드디어 제대로 끊어 버렸기에 이토록 슬픈 거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너무도 마음이 여린 착한 사람이니.
그렇다면, 그는 그만 그녀를 안아 주기로 했다. 지금 화를 내 보았자 무얼 하나.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것도, 그녀가 데릭 테바로스를 남자로 사랑하지 않는 것도 전부 변하지 않은 사실인 것을. 그녀의 지난 일주일이, 그 끈질긴 인연의 끝이라면, 그래. 에단은 화를 낼 필요가 없다.
“괜찮아. 울어도 돼.”
그는 그녀를 당겨 품에 안아 들썩이는 그녀의 가는 어깨를 토닥였다. 그 따뜻한 위로는 오히려 기폭제가 되어,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동안 소리 없이 울었다. 너무 많은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쏟아져 내렸다.
‘그러니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그때는 정말 죽여 버릴지 몰라.’
그녀는 그저 마음이 아픈 거다. 그 어린 날부터 시작된 질긴 인연의 끝이 이리도 서로를 죽여야 하는 최악으로 끝나 버려서.
“괜찮아,”
그 사실이 너무도 그녀를 허망하게 만들었다.
“괜찮아. 로엘.”
하필 이곳이, 토르티아라 더 그러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로엘은 드디어 ‘황자님’과의 진짜 이별을 고했다.
***
길었던 밤이 지나고, 다시금 태양이 떠올랐다. 일찍이 잠에서 깬 로엘은 잠든 에단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나왔다. 워낙 잠귀가 밝은 그라 평소라면, 그녀의 움직임에 바로 눈을 떴을 텐데 오늘 새벽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지쳐 있단 소리였다.
로엘은 잠든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한동안 그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와 만난 첫날밤에도, 그는 그녀 옆에서만큼은 잠이 들었다. 평생을 불면증에 시달린 황제 폐하라, 그 사실만으로 온 황궁이 떠들썩했단 것을 나중에 전해 들었을 때, 그녀는 그 이유를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이상하잖아요. 원래부터 저를 아시던 것도 아니고.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저를 달가워하지 않으셨던 거 같은데…….’
‘편했나 보지. 너를 처음 본 바로 그 순간부터.’
‘내가 막 편하고 그럴 외모는 아닐 텐데?’
‘엄청 긴장하게 되는 외모도 아니지?’
‘폐하!’
딱히 명확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 역시도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으니.
‘굳이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나? 그냥 운명인가 보지.’
하지만, 그녀는 어쩌면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듯 말했던 그 한 마디에 분명 설렜으니까.
전쟁 중에 그가 밤을 새우는 일이 어디 새삼스러운 일인가. 그는 전쟁 내내 거의 잠을 자지 않기로 유명하다. 워낙 예민하신 분께서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전장에 계시니 쉽게 잠들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그녀마저 가장 보내기 싫은 곳에 내보내 그 생사조차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을 테니 그는 그녀가 카티에서 머문 그 일주일 내내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했을 게 뻔하다.
오늘은 드디어 폐하가 잠드실 수 있을 거라 말하던 제롬의 그 안도의 한숨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거다. 그러니 잠든 그의 머리를 쓸어 주고, 토닥토닥 그 등을 두드려 주며 그녀는 그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부디 오늘 밤만은 편히 쉬시길. 그렇게 피곤이 좀 가시길 바랐다.
“일찍 일어났네.”
“눈이 떠졌어.”
피제의 성루에서 홀로 일출을 보나 했는데 뒤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이반이었다. 낮게 대충 묶은 그녀의 붉은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며 뒤를 돌아보자, 이반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의 겉옷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괜찮은데.”
“나도 괜찮아.”
어차피 도로 가져가지 않을 것을 뻔히 알아 로엘은 두 번 말하지 않고 이반의 겉옷을 걸쳐 입었다. 살짝 추운 감이 없지 않았다.
“수고했어.”
“고마워.”
뒤늦은 짧은 인사가 오갔다. 그녀가 막 피제에 왔을 때는 워낙 하나같이 정신없이 그녀를 반기느라 이반이 나설 차례가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굳이 그때 나서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래서 그저 눈인사로만 그녀의 귀환을 축하하고 그녀의 고생을 다독였다.
“아름다운 성이야.”
“아름답지.”
그런 두 사람의 눈에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는 토르티아의 성이 들어왔다. 카이로스의 전체 대군이 겨우겨우 둘러쌀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성. 온통 붉은 벽돌로 싸인, 이름마저도 ‘토르티아’인 그 성은 토르티아를 상징했다.
“가장 아름다운 성이라 불릴 만해.”
“그렇지.”
거대한 성을 가득 채우는 토르티아의 문양들이 한데 모여 거대한 하나의 토르티아 문양을 형성하는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괜히 토르티아 사람들의 자부심이 아니다. 그녀 역시 성에 불려가는 것은 싫었으나, 이렇게 밖에서 토르티아 성을 바라보는 것은 좋아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응. 드디어 왔어.”
그런 붉은 성이 그녀의 붉은 눈 가득히 들어왔다. 피제와 정확히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토르티아는 언제나처럼 굳게 그녀에게는 닫혀 있었다. 저 문이 어찌나 야속하던지. 목숨 걸고 승전하고 돌아온 그의 아버지에게도 항상 저 거대한 문은 마지못해 열리곤 했다.
활짝 열어 맞이해도 모자랄 판에.
“저 문 너머에 있어.”
그 문 너머, 걷고 또 걸어 다다르는 토르티아의 가장 높은 곳. 그곳에 앉아 있던 조지 황제의 시선은 언제나 일관되었다.
평생을 넘어서지도, 아니 따라잡아 보지도 못한 이복 형제에 대한 질투. 분노. 경멸.
그 온갖 증오의 시선을 아버지는 평생 인내하였다.
그 끝이 그런 억울한 죽음인지도 모른 채.
“어쩌면 알고 있으셨는지도 몰라.”
조지 황제가 결국에는 자신을 죽이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겠지.”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이반은 바로 알아들었다.
이반도, 로엘도 오로지 시선은 토르티아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나.”
제이드의 죽음이 사무치게 억울한 것. 어떻게 로엘뿐이랴. 이반 역시 참 많이도 울었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콜린이 당황할 정도로 그는 그 자리에서 오열을 터트렸다. 그만큼 가슴이 미어지고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지금 저 토르티아 너머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그자에게 닿는 것은. 그리고 그자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보는 것은 로엘의 염원이자 이반의 염원.
두 사람 모두의 숙원인 셈이다.
“그러니 반드시, 자신이 한 짓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어.”
로엘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늘 맑고, 늘 올곧은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어울리지 않는 증오가 조지를 향해서만큼은 가득 차올랐다.
한때 조지가 제이드를 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지금 로엘이 조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망하기만을. 그저 무너져 내리기만을. 그렇게 처절하고 비참하게, 목숨을 구걸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래야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피눈물을 흘렸던 그녀의 과거가. 그 끔찍했던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것만 같았다.
“그 시작을 열어 줘. 이반.”
로엘의 시선이 이반에게로 돌아가자, 이반 역시 그런 로엘을 마주했다. 여전히 떠오르고 있는 태양을 등지며, 그녀는 그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그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 잘 알아 이반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마지막 전투의 마무리가 그녀라면, 그 시작의 포문은 이반이다. 그렇게 에단이 설계를 하였다.
‘그걸 내가 하라고?’
‘그래. 너도 갚을 빚이 있을 거 아냐.’
갚을 빚이라. 있고말고.
‘빚’이라는 그 한 단어에 이반은 두말하지 않고 그리하겠다 답했다.
이 전쟁은 에단의 숙원 사업이자, 로엘이 목숨 걸고 하고자 했던 복수.
그곳에 그가 빛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더더욱 주목받는 무언가를 맡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림자처럼 그저 뒤에서 에단과 로엘의 승리를 뒤받쳐 주려 했다.
그런데, 에단은 그런 이반에게 이 전쟁은 그의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제이드 네아레스의 유일한 제자라는 사실. 그걸 밝히기까지도 참 많은 고민을 하였다.
에토르 전쟁 때, 처음 그 사실을 밝히게 된 것도 결국은 에단의 등 떠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반은 에단이 어디까지 알고 그리했는지 솔직히 알지 못한다. 막연히 저 총명하신 형제께서 자신이 제이드 네아레스의 제자라는 것을 미리 눈치챘고, 그걸 일부러 북방 전쟁에 이용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도 안다.
근본적으로는 전부 이반을 드러내는 일.
그림자로 사는 그를 기어코 빛으로 끌어 오는 일련의 작업이었던 거다.
그런 그가 이번엔, 드러내지 못했던 제이드에 대한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친히 귀한 기회를 준 거다.
“정말 어디까지 위할 생각인 건지.”
이반은 에단을 생각하며 피식, 작은 웃음을 뱉었다.
이제는 이반의 눈만 보아도 에단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로엘 역시 그런 이반을 따라 미소 지었다. 무슨 형제가 정말 이리도 애틋한지. 서로를 생각하는 눈동자에 애정이 가득 실렸다.
로엘 역시, 이 마지막 전투의 선봉을 이반과 자신에게 맡긴다고 하였을 때, 에단의 배려에 꽤나 놀랐다. 그는 그녀의 복수심은 물론, 이반의 복수심마저 염두에 두었던 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이반의 깊은 상처를 알아주며.
‘이반이 한다고요?’
‘그래. 네가 서운해도 어쩔 수 없어.’
‘하나도 안 서운해요. 서운할 리가 없잖아요.’
이반에게 아버지가 어떤 의미인지 아는데 어찌 그럴까.
이반에게 제이드란 이반의 인생을 바꿔 놓은 스승이자, 일생의 아버지와도 같은 분.
로엘은 제이드를 바라보는, 이반의 그 순순한 동경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남모를 상처가 많고, 인내가 습관인 이반을 온전히 드러나게 해 주신 분.
다른 어떠한 가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표현하고 좋아하고 또 존경했던 그런 아버지.
이반의 인생에 있어서, 그녀조차도 감히 아버지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니, 서운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에단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함께해 줘, 이반.”
“그래. 네아.”
다시금 두 사람의 시선이 토르티아로 향했다. 여전히 굳게 닫힌 그 붉은 성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부서뜨릴밖에.
반드시, 저 아름다운 붉은 성을 후회와 참회의 피눈물로 물들게 하리라.
***
모두가 기다리던, 마지막. 토르티아의 본성을 향한 전투의 시작은 조금은 맥이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장기간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연승 중인 카이로스의 군대가 모두 한 곳에 모였으며, 기라성 같은 카이로스의 장군들 역시 각자의 부대를 인솔하며 전방에 서 있었다. 아무리 북방의 수호자라 불리며 호령하던 붉은 민족의 붉은 성이 가로막고 있다 한들, 전의를 상실한 토르티아의 군대 따위가 그런 황금의 군대를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늘이 내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진격 중지!!”
그런데 그러한 기적까지는 아니어도, 붉은 민족의 마지막 발악은 있었나 보다.
카이로스는 그 마지막의 마지막을 간과하였나 보다.
“진격 중지!! 진격 중지!!”
워낙 거대한 규모의 군대인 데다, 그것도 흥분에 차올라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터라, 저 뒤 지휘부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 간격이 생길 수밖에 없다.
둥! 둥! 둥!
그것도 이리 적군의 북소리가 주변 나무들의 에워싸여 커지는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퇴각의 나팔 소리는 토르티아의 북소리에 묻혀 버렸다.
“제1선발대, 진격 중지!!”
그래서 제일 먼저 이상한 점을 알아챈 에단이 재빨리 퇴각 명령을 내렸대도, 그 명령이 돌격부대인 루카스 부대에 닿지 않았다. 그렇게, 루카스 부대는 밟지 말아야 할 것들을 밟아 버렸다.
“이런, 썅! 뒤로 후퇴해! 물러나!!”
이반이 선봉이라도 돌격대장은 당연히 루카스. 루카스가 담당한 제1선발대의 프래카는 고스란히 꺼져 가는 늪지대에 발이 묶였다.
“토르티아. 조준.”
이미 한 번 무너져 내린 전초 사이사이에, 그리고 그들의 발을 숨겨 주는 이 짙은 안개에 숨어 어느새 붉은 머리카락의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사.”
그것도, 하필 토르티아 군대의 자랑. 궁병들만으로.
기마병이 닿기엔 아직 멀지만, 궁병이 닿기에는 아주 수월한 거리에서 수백만의 화살이 카이로스 군대로 쏟아져 내렸다.
“아아악!!”
“으윽!”
“방어태세!! 방어태세!!!”
광활한 평원에 갑자기 등장한 진흙 늪은 기마병의 발을 완전히 묶었다. 당황하는 말들 아래에 낙상하는 이가 속출하고, 겨우 말을 진정시켜 나가 보려 해도, 점점 더 깊숙이 빠져 내려갔다. 그러니 쏟아져 내리는 화살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프래카. 대답해!”
“프래카. 루카스 장군의 명을 듣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장 앞으로 달려간 이들이 가장 훈련을 잘 받은 프래카라는 것과 전장에서 가장 순발력이 좋은 루카스란 점이다. 루카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가까스로 화살을 막아서고 있던 프래카들의 대답도 반사적으로 돌아왔다.
“말을 버리고, 최대한 땅에 박힌 화살들과 쓰러진 말을 발판으로 디디면서 움직인다!! 신속하게 후퇴해!!!”
고함을 치는 루카스의 목소리는 북소리와 나팔소리를 꿰뚫으며 프래카들에게 명확히 전달되었다. 시범을 보여 주듯. 루카스가 먼저 자신의 애마를 망설임 없이 버린 채 빠른 걸음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서며 벗어났다.
“장군님을 따라!!”
당황하지만 않는다면, 그래 이따위 늪지대, 프래카는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 이 정도로 화살 세례를 받아 낼 만큼 몰린 적도 없었지만, 그런다고 한들 그들이 준비되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초반에 몇몇 부상자가 속출하였으나, 이내 바로 정신을 차리고 적어도 자신들의 급소만큼은 맞지 않도록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후퇴!! 후퇴!!”
그렇게 최소한의 피해만을 남기고 프래카는 이 전쟁 이후 처음으로 퇴각을 하였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뒤에서 보고 있던 일반 군사들의 동요가 말없이 전해져 왔다. 웅성거리지도 못한 채 신나서 진격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처음으로 부상당하는 프래카를 지켜보았다.
그러니 덜컥 겁이 몰려왔다. 너무도 새삼스럽게 지금은 전쟁 중이고, 그들도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단 황제 폐하가 계시고, 이반 황자님이 계시며 루카스 장군이 계시는 전투.
거기에 또 한 번의 승리를 이끈, 프란시아님이 함께하시는데 패배라니. 부상이라니. 죽음이라니. 정말 자신들이 놀랄 정도로 확고히 그럴 일이 없을 거라 믿었나 보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그 숱한 전투의 승리보다도 단 한 번의 패배가 이래서 무서운 법.
마치 이미 승리를 쟁취한 양 하늘을 찌르던 카이로스 군대의 사기가, 고작 이 작은 패배에 단번에 꺾여 버렸다.
“으윽! 후퇴!!”
“후…… 악!!”
모든 일이 그러하듯 사람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건 승리하는 것도 마찬가지. 늘 이기기만 하던 이에게의 패배는, 가끔씩 이기던 이에게 있어서의 패배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다. 지금 카이로스의 군대가 딱 그러했다.
전쟁은 더더욱 그러한 기세라는 것이 있어, 패배에 기세가 뒤집히기 어렵듯 승리의 기세를 꺾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카이로스가 원정을 길게 하면 길게 할수록 오히려 더 전투 시간이 짧아지는 것도, 늘 에단이 첫 전투에 상징을 부여하고 힘을 쏟는 것도 바로 그 이유다.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은 자신감을 낳고, 그 자신감은 한데 모여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마련이라 두려워하는 이와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달려드는 이의 검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그러한 연승을 계획하는 에단인데 지금 토르티아는 바로 그러한 연승을 가장 중요한 시점에 끊어 버린 셈이다.
“이 정도면 선방했네요.”
되돌아오는 군사들을 말없이 지켜보던 에단 옆으로 로엘이 다가서며 말했다.
공식적인 첫 패전인데도, 의외로 에단은 덤덤했다. 분명 그도 예상하지 못했던 벤의 함정이었을텐데도 말이다.
성격상 불같이 화내지는 않더라도 자존심 정도는 상할 거라고, 그래서 꽤나 화가 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로엘의 착각이었나 보다.
그러기엔, 로엘 생각 이상으로 그는 숱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너무도 노련한 주군이다. 전투 하나에 일희일비할 만큼 그는 어리지 않다.
“루카스가 빠르게 대처했고요.”
그래서 로엘 역시 덩달아 차분해졌다. 워낙 겨울 안개가 짙게 끼기로 유명한 토르티아라 일부러 새벽 전투를 피해 아침을 기다렸건만, 여전히 안개는 낮게 깔려 발걸음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무너진 진지의 잔해까지 어지럽게 놓여 있어 더더욱 기동에 신경 쓰라 주의를 주었는데, 단순히 그러한 주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그녀가 카티에 머물고, 에단이 피제에 머둘던 그 시간. 벤 장군 역시 가만히 토르티아에서 그들을 기다린 게 아니다. 내리붓는 세찬 빗줄기 속에서, 넓은 평원의 땅을 고르고 진흙을 메워 발을 묶을 수 있게 만들었다. 점도가 높은 토르티아의 흙 속성에 일주일 내내 내린 비와 적당히 살 얼게 만든 날씨. 그 모든 것들이 박자가 맞춰 만들어진 꽤나 성의가 많이 들어간 함정인 셈이다.
워낙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붉은 성 앞에, 아무것도 없이 펼쳐진 대평원이라 누구든 그 앞에서는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긴 원정의 끝. 마지막의 대승리를 위해 무작정 달리는 그들에게, 안개가 자욱한 지면의 이상함을 눈치채기엔 역부족이었던 거다.
그러니 얼마나 잘 짜여진 함정인가.
“마지막을 지킬 자가 없진 않았나 보군.”
비웃음 섞인 에단의 말에 로엘은 답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그 마지막인 자가 누군지, 너무도 뻔하였으므로.
‘벤!!’
‘공주님. 위험해요. 안에 계시라니까.’
맥스가 철없는 막내 삼촌이라면, 벤은 그보다는 좀 더 어른스러운 큰 삼촌 같았다. 마냥 그녀를 오냐오냐하는 맥스보다는 엄격하고, 그녀의 잘못을 짚어 줄 줄 아는 어른. 그렇다고 그녀를 위하지 않는 것도, 귀여워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맥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과잉보호랄까. 다른 장군이나 부대장들이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다가오기만 해도 매서운 눈초리로 말도 제대로 못 붙이게 했다. 맥스가 종종 그녀를 목마 태워 줬는데 그때도 늘 벤이 위험하다고 하도 그래서 맥스랑 그런 벤을 피해 도망 다니기까지 했다.
그러한 존재다. 로엘에게, 벤과 맥스는.
‘제이드 님을 따릅니다.’
그러한 애정의 시작은 당연히 그녀의 아버지, 제이드를 마치 연인 사랑하듯 사랑했던 이가 바로 벤이다.
제이드 네아레스를 무작정 따르던 이가 어디 한둘인가. 아마 그 당시 토르티아의 황군치고 그러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 수많은 이들 중 벤이 특별한 것은, 제이드를 향한 벤의 동경이 곧 토르티아의 충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건 정확히, 제이드가 원하던 방향.
‘아버지는 벤을 가장 아끼잖아. 다 보이는걸?’
‘그래, 맞아. 나는 벤을 가장 아끼지. 맥스에겐 비밀이지만.’
그래서 로엘은 막연히 맨 마지막까지 토르티아를 지키는 이는 벤일 거라 생각했다. 무력하고 무능한 조지 황제야 자기의 황실에 앉아만 있을 테니, 결국 이 붉은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벤이 될 거라고.
조국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이 장군으로서는 치욕일지 모르나, 그녀는 가장 영예로운 마지막 이라 생각했다.
희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을 조국의 마지막과 함께한다는 것.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어리석다면 어리석고, 대단하다면 대단한 그 일을 지금 저 안개 너머의 노장이 하려는 거다.
오로지 ‘그녀’를 기다리며.
“……좀 돌아가요, 폐하.”
“그래.”
그렇다면 그녀 역시 최선을 다해, 달려갈밖에.
“다음 선봉은 제가 맡겠습니다.”
너무도 오랜만에, 너무도 좋아했던, 그녀의 벤을 보러 가야겠다.
7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