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9. 월계수 나무에 꽃이 필 때, 까마귀는 날아오르나 (60/69)

Chapter 59. 월계수 나무에 꽃이 필 때, 까마귀는 날아오르나

“싫어요.”

에리카는 망설임 없이 바로 답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조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않아도 지끈거리는 머리에 제대로 앉아 있기도 어려운데, 하나뿐인 딸은 그런 조지를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다.

“저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아니. 도움은커녕 오히려 골치만 썩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조지는 그런 에리카를 혼낼 수 없었다. 그러기엔 지금 에리카의 표정이 너무 단호하였으니까.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것도 조금이라도 건들면 바로 울어 버릴 것 같은, 그런 절박한 얼굴을 한 채로 말이다.

자존심이 하늘인 이 아이가 이런 얼굴을 한다는 건 에리카도 절벽 끝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에리카.”

“싫어요. 절대 싫어요.”

드레스 자락을 꼭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인 양.

“내 성을 두고 내가 어딜 가요? 여긴 토르티아예요. 내 성. 내 토르티아라고요!!”

역시나 에리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늘 짜증이 가득하던 목소리가 오늘은 불안이 가득하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여도, 애써 괜찮은 척을 하여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온몸으로 드러나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하며, 펴질 줄 모르는 주먹하며, 떨리는 목소리까지. 조지 황제는 자신의 딸이 무슨 마음으로 이리 버티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화도 내지 못하였다.

아니. 화는커녕 미안하다고 빌어야 할 판이다.

애초에,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므로.

“카이로스가 벌써 로티를 점령했어. 비가 도와 시간을 벌었지, 이제 본성까지는 순식간이야.”

“그래서요?”

“이 나라가, 이 토르티아가 무너지기까지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는 거다.”

“아버지!”

조지를 부르는 에리카의 목소리가 홀 안을 울렸다. 그렇게 겨우겨우 참고 있던 에리카의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누구 마음대로 이 나라를 내어 줘요?! 어떻게 오른 자리인데! 아버지가, 내가,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쉬지 않고 흘렀다. 큰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굵기도 하여서 드레스는 빠르게 젖어 들었다.

“아버지 나라예요. 내 나라라고!!”

아름답고 찬란한, 붉은 민족의 붉은 나라.

북방을 호령하는,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고한 북의 수호자.

‘로엘 공주님. 제이드 님이 또 승리하셨습니다!’

‘어쩜, 로엘 님은 이렇게 제이드 님을 빼닮으셨는지.’

‘로엘 님만 오시면 승리라니까요! 토르티아 승리의 공주님이시지!’

그곳의 유일한 황녀.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유일한 적녀.

“그 계집이 뭐라고……!”

그래. 그녀는 바로 그 에리카 네아레스다.

‘에리카. 나는 네 것을 욕심내지 않아.’

‘카이로스의 아카시스. 로엘 네아레스입니다.’

아무도 그 자리를 뺏어 갈 수 없다.

“그 계집이 뭔데 내 걸 뺏어 가냐고!!”

악에 받친 에리카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넓은 홀을 울렸다. 굳게 닫힌 문 뒤의 시종은 물론, 성 밖의 경비병에게마저 들릴 만큼 쩌렁쩌렁한 그 목소리는 절규였다.

이미 끝나 버린 것을 홀로 놓지 못하고 있는, 그런 안쓰러운 절규.

조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에리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용히 자신의 딸을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 에리카.”

그런 조지의 위로에도, 에리카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포기할 순 없었다.

“미안해하지 마시고, 이 나라를 지키세요.”

“내겐 그럴 힘이 없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비해 조지는 너무도 덤덤히 말했다.

자기는 그럴 수 없다고.

“처음부터, 나에겐 그럴 힘이 없었어.”

그 힘없는 목소리에 화를 내던 에리카마저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제껏 이리 그녀가 소리치고 울부짖어도 그녀의 아버지에겐 조금도 그녀의 애절함이 닿지 않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순식간에 모든 것이 허탈해졌다.

“이 나라의 황위에 오를 그릇도. 이 나라를 지킬 힘도. 지금, 적이 쳐들어오는 이 순간 무언가를 할 능력도. 전부 다.”

자조적인 목소리. 아무런 의욕이 없는 눈동자.

모든 것을, 이미 애저녁에 놓아 버린, 무능하고 무책임한 태도.

에리카는 더 이상 자신의 아버지에게 소리칠 수 없었다.

“그래. 에리카.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기엔 자신의 아버지가 너무도 노쇠해 보였으니까.

노쇠하다 못해 불쌍해 보였으니까.

조지는 품에서 에리카를 놓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손을 들어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금지옥엽. 정말 귀하게 키운 딸 하나.

평생을 비교당하며 살아온, 그렇게 패배감과 자격지심 속에 살아온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려고 노력했건만. 오히려 그 노력이 자신의 딸을 더 큰 지옥 속으로 끌어들인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와아!!! 제이드 님 만세!!’

‘제이드! 제이드! 제이드!!’

‘토르티아의 영광! 제이드 님을 위하여!!’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건만.

처음부터, 알고 있었거늘.

“미안하다, 에리카. 나의 헛된 욕심이 너를 힘들게 했구나.”

옅은 미소를 짓는 조지의 입가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어디 입가뿐이랴. 이마에도, 눈가에도, 손에도. 주름이 가득한 조지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러니. 에리카. 우리 그만 놓아 버리자.”

그래. 그는 지쳤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움켜쥐고 있는 것에.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앉아 있는 것에.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에. 전부 다. 그는 정말 모든 것에 지쳤다.

“너도. 나도. 그만 우리의 것이 아닌 것에 힘을 쓰지 말자.”

여전히 드레스를 움켜쥔 에리카의 손은 떨려 왔으며, 억울함과 분노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지만 에리카는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아버지가 모든 마음의 정리를 끝냈음을 너무도 잘 알았으니.

그저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에리카. 나의 마지막을 너도 함께할 필요는 없단다. 내가 시작한 나의 지옥은 내가 마무리 지으마.”

자신의 아버지는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이거늘.

토르티아의 적자로 태어난 것도. 턱없이 부족한 자질로 태어난 것도.

태어나 보니, 넘어설 수 없는 자가 자신의 이복형제인 것도.

그 어느 것 하나 아버지가 선택한 것이 없는 것을.

어째서 아버지만 이토록 초라하고,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해야 하는가.

“아버지.”

그깟 이복형제 하나 죽인 것. 살아남은 조카를 추방한 것.

어느 나라 황실에서건 있을 법한 흔하디흔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게 무어라고.

에리카는 너무도 억울했다.

“아버지.”

그래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자신에게는 그저 철없는 자신을 늘 감싸 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보다 딸을 더 위하는 그저 인자한 아버지일 뿐인데.

“괜찮다, 에리카.”

“저는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아냐, 괜찮을 거야. 너는 어디서든 잘할 수 있어.”

아예 주저앉아 통곡하는 에리카의 등이 들썩였다. 조지는 그런 에리카를 묵묵히 토닥여 주었다. 어쩌면 지금이 자신의 딸을 품에 안아 줄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니.

“그래. 괜찮고말고.”

정말, 이 아이만 행복하면 되었던 것인데.

‘아우님. 나는 내 아내와 내 딸이 행복하면 그걸로 족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때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어째서 지금에서야 깨달은 걸까.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그 헛된 욕심에 눈이 멀지 않았다면 오늘 에리카의 이 비통한 눈물은 없었을 텐데.

‘그러니 괜한 걱정과 시기로 아우님을 망치지 마시게. 그러다 제일 소중한 행복을 스스로 놓쳐 버리고 말 거야.’

멍청하게도, 그 모든 기회를 놓친 것은 자기 자신.

돌이킬 수 없는, 조지 자신의 업보다.

그러니 이 나라를 무너트리고 자신을 베러 오는 조카님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그가 할 수 있는 지금의 최선은 그저 하나뿐인, 이 아이만이라도 살도록 도망치게 하는 것뿐.

“괜찮을 거야, 에리카. 너만은, 괜찮을 거야.”

조지는 쉴 새 없이 흐르는 에리카의 눈물을 닦아 주며, 밤새도록 에리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모든 것들이 너무 늦어 버린 그는 에리카처럼 후회의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도 없었다.

***

“꽤나 충직하네.”

“데릭 폐하.”

“정말 목숨이라도 걸 기세야.”

밤늦게 느닷없이 로엘의 방에 쳐들어온 데릭 덕분에 비 오는 새벽이 아주 소란스러워졌다. 카티에 들어온 이후 그녀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시에라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그런 시에라를 따라 그녀를 지키던 키로스들도 검을 들며 그런 데릭을 막아 세웠다.

“진짜, 목이 날아갈 뻔했고.”

그런 그녀들을 막아 세우는 건, 웃기게도 또다시 로엘이었다. 그녀가 멈추지 않았으면, 데릭의 말대로 그녀들 모두의 목숨이 위험했을 테니.

로엘은 천연덕스럽게 그녀가 몸을 누일 침대에 걸터앉는 데릭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검을 잠시 몸에서 떼어 놓은 것이 여간 후회되는 게 아니다.

“너무 그렇게 노골적으로 경계하지 마. 무얼 어쩌려고 온 건 아니니까.”

데릭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잔뜩 긴장한 로엘과 달리 데릭은 여유가 넘쳤다.

하긴, 어떻게 안 그러겠는가. 이 방에 단둘이 남아 두려울 건 로엘뿐인 것을.

“나가 주세요.”

“네가 가까이 오면.”

“폐하.”

“아님 내가 움직여?”

로엘의 눈을 직시하는 그의 눈에 순간 로엘은 입이 다물어졌다.

그가 움직여 다가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뻔히 알아, 로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동요해선 안 된다.

“선택해.”

“했어요. 이미.”

긴장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두려워한다는 것을 들켜서도 안 된다.

여유로운 그처럼 그녀 역시 여유로움을 연기해야만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로엘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섰다. 쓱 한 번, 자신의 검 위치를 확인하는 그녀의 곁눈질에 데릭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도, 아니 이 상황이니 더더욱 도망갈 구멍은 마련하겠다는 거다. 그 모습이 웃기게도 귀여워 보였다.

저 검이 있으면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그 순진함이 귀여운 거겠지만.

“더 가까이.”

오던 길을 멈추던 그녀에게 그는 또 한 번 말했다. 여전히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살짝 상체를 앞으로 굽혀 그녀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조금의 여유가 가득했다. 거기에 더해, 냉정함도 가득하여 그 눈은 차디찼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멋대로 하겠다는 무언의 경고랄까.

로엘은 두 주먹을 조용히 움켜쥐었다. 아까부터 뛰어 대던 심장은 데릭에게 다가갈수록 더욱 쿵쿵거리며 미친 듯이 뛰어 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데릭과 그녀는 단둘이 있는 적이 훨씬 더 많았다. 워낙 둘 다 천덕꾸러기 신세라 어린 시절은 아무도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고,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스스로 사람들을 피했다. 하는 말마다 귀가 아픈 아첨이 가득한 것도. 온갖 허례허식 속에서 가식과 위선이 판치는 것도 전부 다 두 사람이 경멸하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래서 데릭과 로엘은 얼마 있지도 않은, 1년에 두세 번 되는 그 몇 번의 만남 속에서도 서로를 늘상 찾았다. 두 사람만이 서로가 서로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으니.

그래서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이리 함께 있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더 어색하다는 게 더 맞을 거다.

“조용하네.”

데릭은 자신의 바로 앞에 서 있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뻣뻣하게 굳은 몸에는 경계심이 가득하고, 앙다문 입술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으며, 붉은 눈은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아주 많이 화가 났다는 것을 그녀의 모든 것들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데릭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녀는 이마저도, 이리 투명한가 싶어서.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이런 마음은 조금 숨겨도 될 법한데 말이다.

데릭은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정말 언제부터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이리 되었는지. 새삼 마음이 아팠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둘만이 있는 이 공간. 이 순간. 데릭은 그 모든 것이 소중하건만.

“로엘.”

데릭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다 로엘은 답하지 않았다.

조금의 미동도 없이, 차가운 눈동자로 그저 말없이 그런 데릭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답해.”

짧은 명령. 로엘은 살짝 아랫입술을 꺠물었다. 정말 대답하기 싫었다.

‘그’가 아닌 다른 이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이토록 기분 나쁠 줄이야.

연인이 아닌 이성에게 이름을 못 부르게 하는, 그 이상한 토르티아의 전통이 새삼 고마워지려 했다.

소중한 이름을 이리 막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끝까지 데릭의 부름에 답하고 싶지 않았다.

“네. 폐하.”

하지만 로엘은 순수히 그의 명령에 답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감정을 앞세워선 안 되었으니까. 작은 자존심을 세우려다, 더 큰 것을 내어 줄 수 있었으니 그녀는 물러서야만 했다.

그렇게 데릭의 기분을 맞춰야만 했다.

적어도, 이 적진에서 이 밤에 홀로 그와 방에 남겨졌을 때는 말이다.

그 순순한 대답에 데릭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뒤엉켜 지금 이 대답이 나왔는지, 그마저도 로엘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여전히 눈빛은 차디찼고 그를 바라보는 그 얼굴은 정이 뚝 떨어지는 살벌한 표정이었지만, 그러함에도 데릭은 그녀의 생각을 알 것만 같았다.

잔뜩 자존심을 구겼을 때, 티 내지 않으려 눈썹에 힘을 주는 그 버릇만큼은 여전했으니.

데릭이 손은 올려 그녀의 얇은 셔츠의 끝단을 잡았다.

그제야 그녀가 작게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바로 한 걸음 물러나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단단한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데릭 폐하……!”

“발버둥 치면, 오히려 역효과야.”

그녀가 아무리 힘주어 봤자, 절대 남자인 데릭을 이길 수는 없다. 그것도 그냥 남자도 아닌, 살기 위해 가장 좋은 선생에게 평생을 연마해 온 데릭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검이 없는 한 그녀가 데릭을 거스를 방도 따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로엘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자신이 기거하는 방이라고 하더라도 적진인데 이리 안일하게 검을 빼 두어선 안 었다고.

어디 검만 빼 두었는가. 그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지고 편한 옷차림이었다.

“……아주 역효과지.”

두꺼운 갑옷 속에 입고 있던 그 하얀 셔츠는 얇기도 하여, 조금만 빛을 받아도 그녀의 하얀 살갗이 고스란히 비쳤다. 로엘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자각이 없는 듯하였지만, 데릭은 정확히 그 부분이 제일 신경 쓰였다.

무섭기도 한 키로스를 제치고 억지로 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한 없이 무방비한 로엘의 모습이었다.

“폐하……!”

로엘의 가는 허리를 안은 데릭의 팔에 힘이 들어갈수록 그를 부르는 로엘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단단한 그의 팔뚝을 한 손으로 다 잡지도 못하는 그녀의 작은 손은 있는 힘껏 잡아 세웠지만, 데릭에게는 안쓰러울 정도로 약한 악력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같잖은 저항이 더 독임을, 이 똑똑한 여자는 왜 이리도 모르는 건지.

그는 힘을 주어 그러지 않아도 가까운 거리를 더 좁혔다. 훅 하고 그의 코 가득히 달콤한 향기가 퍼지고, 앉아 있는 그의 코끝에 그녀의 가슴이 거의 닿을락 말락할 정도로 밀착되었다. 그는 분명 얼마 전에는 이보다 더한 얇은 나이트 드레스 차림의 그녀를 마주하였건만, 이번은 그때보다도 훨씬 더 큰 자극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카이로스라는 적진의 한가운데였기에 애초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던 반면,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다르다.

여기는 테바로스의 병사들로 가득 찬, 테바로스의 깃발이 펄럭이는 토르티아의 카티.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그의 품 안에 놓인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가.

“놔주세요. 죽여 버리기 전에.”

그런데 이 여자는 뭘 믿고 이리도 꼿꼿한지.

정말 나쁜 마음이 들 것만 같다.

“너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왔냐고. 이렇게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왜 나에게로 왔냐고.

그건 어떤 마음이었냐고. 나에 대해 남아 있는 아주 조금의 미련이라도 되는 거냐고.

아주 짧게, 그리고 간결하게 말한 그 한마디에는 많은 생각들이 담겨 있었다.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덤덤히 물어 오는 그의 눈에는 그 모든 마음이 고스란히 비쳤다. 그래서 로엘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이 남자의 그 많은 생각들을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분 생각.”

그래서 더 잔인하게 말했다.

“나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바로 그 사람 생각.”

잔인함이 단호하기도 하여라. 데릭은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를 빤히 내려다보며 정확히,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는 무언가를 기대하기에는 조금의 여지도 내어주지 않았다.

‘제가 선택했든, 선택하지 않았든 제가 황자님의 비로 결정된 이상, 저는 당신에게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니 황자님께서도 최선을 다해 주세요. 저에게도, 그리고 황자님 스스로에게도.’

분명, 자신이 더 먼저였는데. 저 눈동자가 올곧이 향하던, 그렇게 나란히 걷던 이는 자신이었는데. 언제 이리 멀리 가 버렸나.

“그러니 이제 그만 놔주세요.”

그렇게 다른 남자의 여인이 되어 버렸나.

“데릭 폐하.”

그런데도, 어째서 이 마음이 접어지지가 않는가.

이토록 아프고, 자존심이 상한데 어째서 포기라는 게 안 될까.

“싫어.”

그는 또 한 번 거절했다. 확실하게 말한 만큼, 이제는 놔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로엘의 편한 생각이었나 보다. 얼핏 보였던, 그 상처받은 눈과 이 문젠 별개라는 거다.

“읏……!”

그가 살짝의 힘만 주자 바로 가벼운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등이 닿았다.

“폐하!”

그렇게 순식간에 데릭과 위치가 바뀌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로엘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의 아래에 놓였다. 자신의 몸 위에 드리우는 그의 그림자에 안 그래도 정색하던 얼굴이 더 차갑게 식었다.

“나는 꽤나 참고 있는 거야.”

그만큼 데릭의 눈도 차갑게 식었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냉정한 눈.

다른 사람을 보는, 로엘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원래의 데릭의 눈이다.

‘로엘 공주.’

‘황자님.’

그래서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 눈이라면, 그녀가 무의식중에 믿고 있던, 바로 데릭에 대한 그 최소한의 신뢰마저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이대로, 남들이 최악이라고 상정했던 바로 그 일로 가 버릴 거 같아서.

“너에 대해서만큼은, 항상 참았어.”

평생을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다시 만난 지금 이 순간까지.

토르티아에서 어린 그녀가 그런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대로 테바로스로 데려오고 싶었고, 유폐당한 소식을 들었을 때 다 내팽개치고 달려가 구해 주고 싶었으며, 뒤늦게 카이로스로 인질처럼 쫓겨 갔단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당장에라도 달려가 빼내 오고 싶었다.

그런데 그 무엇 하나 하지 못했다. 늘 참아야만 했다. 참고 또 참아야만 했다.

“매번. 매 순간. 너를 볼 때마다. 나는 참았어.”

그는 그래야만 했다고. 테바로스의 황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그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는 한 번쯤은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너를 위해 달려가고 싶었노라고.

그걸 참느라, 아주 많이 아팠다고.

“그럼 계속 참으세요.”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그 생각을 읽었나 보다.

이리도 시작도 전에 끝내 버리는 것을 보면.

그의 아래에서도 그녀는 생각보다도 침착했다. 처음은 놀란 마음에, 그리고 덜컥 드는 두려움에 그를 매섭게 노려보던 그 눈마저도 차분해졌다. 분노가 사라진,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시선. 그가 손을 올려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를 쓸어도 그녀는 미동치 않았다.

“내가 이대로 너를 안으면, 너는 나를 다시는 보지 않겠지.”

“네.”

고민 없는 대답.

“네가 나에게 안기면, 이대로 카티 성에서 물러나 순순히 테바로스로 돌아가겠다 해도, 너는 내 품에 안기지 않겠지.”

“네.”

이 역시 일절의 망설임이 없이 바로 대답이 나왔다.

그의 눈에 그녀가 온전히 담기고, 그녀의 눈에도 그가 온전히 담겼다.

손만 뻗으면 잡힐 것만 같이, 그녀는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다.

“데릭 님.”

그런 그녀가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당신은 무얼 원하시는 건가요.”

“나는 너를 원해.”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를 포기시켜야 한다는 것.

그녀는 참 여러 번 깨닫고, 여러 번 잔인했다.

그렇게 지금도 그녀는 그에게 잔인하다.

“나는 너만을 원해.”

그에 대한 미안함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 그러기엔 그녀에게 데릭 테바로스와 함께한 기억과 공유한 감정들이 생생히 기억되고 있었으므로.

지난밤, 그녀의 방에 찾아와 황자 시절의 목걸이를 건네는 그는 그랬다.

더 이상 그녀가 알고 있는 황자는 없을 거라고. 이제는 테바로스의 황제로서 그녀를 뺏으러 올 거라고.

“……황자님.”

그런데, 역시나 그건 거짓말이다.

이 순간에도. 그녀를 억지로 눕혀 얼마든지 그녀를 안을 수 있는 이 상황 속에서도.

그래. 그는 언제나 그녀에겐 어쩔 수 없는, ‘황자님’이다.

“어린 시절에도. 지금도. 저는 그런 당신을 이용하고 있어요.”

“알고 있어.”

알면서도 당해 주고 있을 뿐.

“대신 나는 너와의 시간을 얻지.”

그렇게 여기, 카티까지 온 거다.

이 전쟁에서 테바로스의 위상을 알리는 것. 카이로스의 프란시아에 대한 소문을 이용해 그의 위치를 높이는 것. 그런 것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나는 그저 너를 한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이야.”

이렇게 서로를 마주하며,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처럼, 아무의 방해도 없이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럼 저는 이번에도 당신을 이용해야겠군요.”

로엘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두근두근 빠르고 힘차게 뛰는 심장이 고스란히 그녀의 손에 느껴졌다.

이 순간, 이 남자는 왜 이리 슬픈 눈을 하는 걸까.

이 눈이야말로 그녀가 보고 싶지 않은 눈이다.

“데릭 폐하. 그 오래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당신과 나 사이에서 나쁜 건, 언제나 저예요.”

이런 눈만큼은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으니.

스르륵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지고, 그가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데릭은 그만 눈을 감았다.

“상관없어.”

역시나, 제일 잔인한 건 그녀다.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곧 다가올 미래에도.

***

“비가 오래 내리네.”

이반은 벌써 닷새째 쉬지 않고 내리는 비를 보며 말했다. 빗줄기가 약해질 법도 하건만, 때아닌 장맛비처럼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겨울비는 세차게 내렸다.

“원래 북은 겨울비가 안 내리기로 유명한데 말인데요.”

“그건 눈이 와서 그런 거고.”

콜린의 말에 아론이 답했다. 조사할 만큼 조사해도 역시나 변수는 언제나 생기는 법이다. 올해 북부의 겨울이 별로 춥지 않을 거란 거. 그래서 눈이 적게 와 상대적으로 이동이 수월거라 예상했는데 이런 비에 발이 묶이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아 벌써 여기에 온 지 닷새라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이미 충분히 휴식을 취한 루카스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로엘이 떠나고 난 이후 바로 출발을 한 카이로스는 성문이 활짝 열린 로티를 너무도 손쉽게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시간과 체력을 버나 싶더니 이게 웬걸 거짓말처럼 카이로스가 로티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비를 무서워했다고 이렇게 대기 타야 해.”

로엘이 홀로 떠난 거부터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루카스는 이래저래 심통이 잔뜩 나 있었다.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으며 흔들흔들 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 위험해 보여 보는 사람마저 신경 쓰이게 했지만, 뭐 저 과하게 튼튼한 이가 벌러덩 넘어진다고 한들 상처라도 날까 싶어 그냥 냅두었다.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무리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지.”

“어차피 피제 성도 활짝 열려 있을 건데 급할 이유도 없고.”

아론의 대답에 이반이 살을 붙였다. 어김없이 로티의 회의실에 모인 이들은 어제처럼 오늘도 비 내리는 하늘만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군사들을 쉬게 하고, 말들에게 건초를 먹이며 전략을 다듬는 것도 할 만큼 했다. 병사들도 바짝 긴장하던 게 슬슬 풀어질 만한 그런 기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전쟁 중에 일주일 가깝게 쉬다니.

어디 카이로스의 전쟁에, 그것도 에단이 출정한 전투에 있을 법한 일인가 말이다.

“뭐 프래카나 황군이나 바보 멍청이들이 아니니 이런다고 한들 딱히 긴장을 완전히 놓을 거라 생각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들도 사람이야. 전쟁이란 건 흐름이 있는 거고.”

연이은 승전에 사기가 올라오고 있는데 이렇게 찬물을 끼얹는 꼴이라니.

그들을 훈련시키는 루카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것도 하필 로엘 님이 카티로 떠난 시점부터 이러잖아? 지금 병사들 사이에선 로엘 님이 카이로스를 버리고 데릭 황제 품에 안…….”

“루카스.”

결국 이반이 루카스의 말을 끊었다. 순간 욱해서 루카스도 입에 담지 말아야 할, 절대 있을 수 없는 유언비어를 말할 뻔했다. 덕분에 모두의 사이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른 이들도 한 번쯤은 이 이야기를 어떠한 경로로든 들었다는 거다.

하긴 어떻게 말들이 나오지 않을까.

잘나가던 카이로스의 군대가 로엘 님이 떠난 그 시점부터 이리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발목이 잡혔는데. 카이로스와 테바로스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은 세상천지가 다 아는 일. 얼마 전 에토르 건도 그러하며, 이번 카티 성도 그러하고. 늘 카이로스의 입장에서 테바로스는 뒤통수만 치는 제멋대로인 야만 족속이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

그런 테바로스의 황제가 로엘 님의 정혼자일 건 또 뭔가.

루카스는 짜증스러움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부대장들이 단속을 한다고는 하는데, 그렇다 한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을 무슨 수로 막느냐 말이다.

테바로스 군사들은 마치 원래 로엘 님은 테바로스의 승리 여신이었는데, 중간에 카이로스가 뺏어 가 버렸다고 굳건히 믿는다. 지난번 에토르 전쟁 때 로엘의 극적인 등장은 그 믿음을 오히려 더 폭발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건 카이로스도 마찬가지. 자신들의 눈으로 로엘이 만들어 낸 기적 같은 일들을 목격했는데, 어찌 그 아름다운 분을 여신이라 믿지 않을까. 불길하다 여겼던 붉은 머리. 붉은 눈동자는 이제 신비롭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결국 한 여신을 두고 두 나라가 경쟁하는 꼴이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걱정되겠는가.

프란시아님을 진짜 프란시아님으로 믿는 그들에겐, 가장 중요한 전투를 앞둔 이 시점에서 바로 그러한 승리의 여신을 잃어버린 셈이다.

“문제는 그 불안이 몇몇 이에게는 실망과 분노가 될 수 있다는 거야.”

이반은 심각한 얼굴로 말하였다. 이반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거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여 자신들이 받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받지 못한 것들만 기억하는 법이다.

로엘의 테바로스로의 행차는 어느 누군가에게는 큰 배신. 그녀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든, 어떠한 이득을 취해 오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알고 보니 그러했다더라, 이런 말들을 믿고 안 믿고는 오로지 자신의 몫이므로.

결국 그녀에 대해 악의적인 사람이라면 이번 일은 결국 카이로스에 대한 배신이고, 돌아온 그녀는 그런 배신자 혹은 첩자에 지나지 않을 거다.

이반은 혀끝에 씁쓸함이 느껴졌다.

마치 그와 같지 않은가.

아무리 자신이 험지에서 노력해도.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항변해도. 카이로스의 누군가에게 그는 그저 황권을 노리는 장성한 황자일 뿐인 거다.

그건 사람을 꽤나 맥 빠지게 만든다는 것을 이반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더더욱 이번 로엘의 행차를 걱정했던 거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무작정 남의 성에서 기다리는 거. 진짜 좋지 못해요.”

갑자기 아무 말도 없어진 정적 속에서 다시금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프래카의 수장으로서, 장난기를 뺀 진지한 모습이었다.

“익숙지 않은 길을, 그것도 한 나라의 도성을 공격하러 가는데 이 빗속을 뚫고 가는 건 더 좋지 못해.”

물론, 아론은 더 진지하였지만.

“아 그럼 어쩌라고!”

“기다려. 비가 그칠 때까지. 하늘에 기도라도 하든가.”

“아오!”

그래서 루카스의 진지함은 얼마 가지도 못하였다. 고개를 젖히며 빽 소리를 지르는 루카스의 짜증 가득한 외침에 다들 그저 작게 한숨을 뱉었다. 소리 지르고 싶은 게 어디 루카스 뿐일까. 그들도 정말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진짜 이놈의 나라. 무슨 날씨가 이 모양이냐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어!”

“그래서 타르타니가 무서운 거고, 그래서 북이 척박한 거다.”

그 와중에 토르티아에 부흥을 일으킨 제이드는 더더욱 대단한 것이고.

아론은 넓디넓은 토르티아의 지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이렇게 많은 영지가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는데 이 코앞에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정말 승리의 여신이 사라져서 이런가 싶기도 하고, 난공불락이라 불리는 토르티아의 천운이 도와주는 거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아론 역시도 마음이 조급해졌다

“황자님. 정말 폐하께서는 조금도 움직이실 마음이 없으신 거예요?”

“응.”

“일부 먼저 가는 것도 허락 안 해 주실까요?”

“아마?”

아론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뭉뚱그려 말했지만 이반의 목소리에는 분명 확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저건 곧 어심이 맞다는 소리다.

“솔직히 저도 이렇게 큰 전투에서 무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계획과 많이 틀어진 상태인데, 그런 변수들 속에서 저희까지 우왕좌왕하는 건 패배의 지름길이니까요.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폐하는 지나치게 신중하세요.”

루카스 말대로 언제부터 폐하께서 비가 온다고 발걸음을 멈추셨는가. 그분은. 그리고 우리의 부대는 그리 나약한 이들이 아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빗발 속에서도 그들은 언제나 진격하였으며 언제나 승리하였다.

“우리가 처음 싸워 보는 토르티아라는 것. 이곳에 대한 우리의 정보가 지극히 미미하다는 것. 테바로스라는 변수가 항시 존재한다는 것. 가장 큰 성. 이번 원정의 마무리인 본성의 전투만이 남았다는 것. 그건 토르티아의 존폐가 걸린 싸움이니 그들은 모든 사활을 걸고 맞서 싸을 거란 것.”

아론은 천천히 그 모든 것들을 나열했다. 계속 말했다시피, 아론은 폐하의 결정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저 모든 것들을 감안하면 그래야만 한다.

“근데 그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생각이 많은 아론의 말을 끊고 루카스는 말을 툭 던지듯 끼어들었다.

심드렁한 표정이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듯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일 아니냐고. 변수가 많은 것도. 토르티아를 멸망시키는 일이니 저들의 최선과 싸워야 한다는 것도. 그게 왜 새삼스럽지? 그게 정말 우리가 이토록 발목이 묶일 이유가 되나?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폐하께서?”

아론이, 그리고 이반도 절대 반박할 수 없는 한마디.

그래. 에단 카이로스인데 비 따위가 대수랴.

빗길마저도 그분의 걸음에 길을 열어 줄 것만 같은데.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네.”

이반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기지개를 켰다. 속으로 자신들의 고민하던 것을 이들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는 사실이, 그래서 같은 생각에 다다른다는 사실이 조금 기뻤다.

“네. 결국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지요.”

아론은 또렷이 자신들을 응시하는, 흔들림 없는 이반의 눈동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로티에 도착한 지 다섯 번째 밤을 새울 때의 아론의 결론이 맞다는 거다.

“하아. 정말. 답답하다, 답답해.”

그건 한바탕 시끄럽게 투정을 부린, 루카스 역시 그건 마찬가지.

“참……. 꽁꽁 숨기시는 걸 잘하시네요. 폐하는.”

이반의 곁에서 본의 아니게 종종 에단을 마주한 콜린 역시 다르지 않다.

결국 모든 생각은 원점으로 돌아간 거다.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다.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 아니신가.

“폐하께서는 다른 계획에 있으신 거군요.”

아론과 루카스와 콜린의 눈동자가 정확히 이반을 향했다. 이반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이제는 자신뿐 아니라 그의 측근 모두가 그를 파악하고 있나 보다. 이반은 느긋하게 기대고 있던 의자에서 상체를 세워,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좀 더 제대로 마주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나, 에단은 사람 복이 참 많은 황제다.

“그러니 언제나 그렇듯, 믿어 보자고. 형제들.”

그의 사람은, 하나같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것도 오롯이 단 한 사람. 그만을 위해.

***

지나가는 소나기인 줄로만 알았던 비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토르티아에 내렸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일어나는 중이라 모두의 마음이 뒤숭숭한 때에 비는 적절히 모두를 잠시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적어도 이 비가 지속되는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카이로스는 비가 내리는 동안 무리하지 않고 가만히 로티 성 안에 머물러 정비를 가다듬었다.

“화창하네.”

“네. 마마.”

그리고 그건 로엘도 마찬가지.

로엘은 성루에 나와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언제 비가 그렇게 세차게 몰아쳤냐는 듯 하늘은 맑고 푸르기만 했다. 쨍쨍 내리쬐는 태양이 마치 당장에라도 겨울을 녹이고 봄을 데려다줄 것만 같았다.

“하아.”

로엘은 성루에 양손을 짚고 한 번 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머리가 아플 정도의 맑은 공기가 잔뜩 들어오니 가슴을 꽉 누르는 답답함이 조금은 괜찮아지는 듯했다. 비를 핑계 삼아, 그리고 인질을 이유로 그녀는 카티 성에 벌써 일주일째 머무르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당당한 요구에 그녀는 성 안에서라면 어디든 키로스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녀가 진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항상 그녀를 따라다니는 또 다른 눈들이 있으니, 그녀가 무얼 하려 들지 않아도 괜히 마음이 불편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 키로스는 어떠랴.

“……로엘 마마.”

그 상황 속에서 그녀를 지켜야만 하는 그녀들은 더 죽을 맛이었다. 데릭이 그녀와 함께 있을 때마다 시에라는 수명이 쭉쭉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응.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그 마음을 로엘이 모를 리 없다. 그렇다고 딱히 무언가를 해 줄 수도 없었지만.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그 아무 의미 없는 말은 오히려 그녀들을 맥 빠지게 만드는 일일 수 있어, 여기에 와서는 그 말마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키로스가 이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것을. 만일 이들마저도 없이 이곳에 왔다면,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못했으리라.

“알지, 그럼.”

무언가를 도모하기는커녕 먹고 자는 것마저 제대로 못했을지 모른다.

마음이 불안한데,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그 걱정에 무얼 했을까.

그나마 키로스들이 함께니 그녀는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시에라는 로엘이 있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했지만, 오히려 키로스가 있기에 로엘은 이곳에 올 수 있었다. 로엘은 자신을 올곧이 바라보는 시에라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어제 그녀들을 불러 모든 것을 설명했을 때, 그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왜 진작에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서운해할 법도 하건만 그러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그럼 되었다고.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로엘이 울컥할 뻔했다.

“이제 슬슬 때가 된 거 같아.”

그러니 시에라와 그 뒤의 키로스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믿어 주세요. 폐하.’

‘너를 믿지 않는 게 아냐.’

‘아니. 저는 지금 키로스를 믿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에단이 마지못해 허락을 한 것도 어쩌면 키로스 덕분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녀야말로 정말 뭐든 할 수 있다. 이들과 함께라면 말이다.

로엘은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 피제 성으로 눈을 돌렸다.

토르티아의 본성 바로 앞의 수문장 같은 작은 성. 정말 저 성 하나만 넘으면 토르티아의 도성이다. 카티에서 멀리 보이는 그곳은 이미 황금의 깃발이 흩날렸다.

“오늘 새벽에 걸렸지.”

그녀의 뒤로부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연히 그녀의 고개가 살짝 돌아가고, 데릭은 그런 그녀의 시선에 옅게 미소 지었다. 감정 하나 깃들지 않은, 참 매정한 눈길일지라도 적어도 그 붉은 눈이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은 기쁠 수밖에 없었다.

“비가 그칠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하늘이 개자마자 바로 카이로스는 피제로 향했어.”

“그리고 점령했지요.”

“그래.”

데릭에게 향했던 시선이 다시금 피제로 돌아가는 데에는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데릭이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로엘은 알고 있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이 비가 그치자마자 그가 달려갈 것을.

“어이없을 정도로 순식간이었지.”

참고 참은 건, 그녀뿐이 아니었을 테니.

아니. 어디 그와 그녀뿐이라. 이반도. 루카스도. 아론도. 콜린도. 그리고 카이로스 군 모두가 참고 또 참았을 거다.

그러니 하늘이 해를 내보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제로 향했을 테고, 피제 역시 기다렸다는 듯 성문을 열었을 거다.

“뭐. 민망할 정도의 무혈입성이었다만.”

조금의 조소가 섞인 데릭의 비아냥에 로엘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어라 반박하기엔 너무도 사실이었으므로.

하긴, 죽음이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어느 누가 도망치지 않으랴.

지금 토르티아를 위해 목숨 걸 붉은 민족 따위는 아무도 없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요?’

‘당연히, 사랑하는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지.’

어쩔 수 없이, 저절로, 문득문득 생각나 버리는 아버지 때문에 로엘은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던 그 아름답던 나라는 어디로 가 버리고, 어쩌다 이리 무력한 나라가 되어 버렸을까.

매일매일 무너져 내리는 나라에 아파하는 이도, 안타까워하는 이도 없이 그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바쁘다.

“……그럼,”

내 아버지는 무엇이 되나.

저들을 위해 평생을 고생한, 그러다 죽어 버린 내 아버지는 불쌍해서 어쩌나.

로엘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많이 허탈하고, 조금 화가 났다.

“그런 표정 지어 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그런 그녀의 생각을 데릭은 바로 알아챘나 보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덤덤히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아 있는 피제는 처음부터 카이로스의 성이었던 것처럼 온통 황금의 깃발로 뒤덮혀 있었다.

“너는 무너트리러 왔고, 그들은 그런 너를 피해, 카이로스를 피해 살기 위해 달아나는 거야. 그러니, 너도 저들을 비난할 수 없어. 침략자는 너니까.”

곧 저 깃발이 토르티아 성마저 뒤덮겠지.

그렇게 붉은 성은 황금의 황제 아래 철저히 무너져 내릴 거다.

“저들을 비난할 수 있는 이는, 네 아버지뿐이야.”

로엘의 시선이 데릭을 향했다. 데릭의 입에서 아버지가 나올 줄은 몰랐다. 의외라는 그녀의 시선에 오히려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네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나도 너만큼은 알고 있어. 그건 토르티아 사람들, 아니 북방의 모든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리 칭송을 받는 거다.

다 가진 그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이들만치 열심히 고되게 살아갔으니.

“그러니 네가 저들을 비난하지 못하듯 저들 역시 너를 비난치 못해. 네 아버지의 최후가 그리 되었다는 것 역시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의도했건, 그러지 않았건 제3자의 입장에서 덤덤히 말하는 데릭의 말은 꽤나 그녀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데릭은 말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

정말 이 하나에, 이토록 빠져버린 거다.

“……데릭 폐하.”

그런데 그녀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토록,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슬픈 것을 보면.

“이제 하나 남았어요.”

로엘은 살짝 몸을 돌려 제대로 데릭을 마주 하였다. 높게 묶은 붉은 머리가 살랑살랑 바람에 흩날렸다.

“그래.”

그녀가 이곳에 온 지 일주일. 비가 도와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다.

이곳에 와 그녀를 기다렸고, 그녀는 그에게로 왔다. 첫날이야 살벌함이 가득했지만,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그녀는 꽤나 순순히 카티 성에 머물렀다.

매일 식사를 했고, 매일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었으며, 매일 밤 비 내리는 창을 바라보며 차까지 마셨다. 그 소소한 일상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데릭은 어쩌면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간 거였다. 그저, 정말 그녀가 자신과 같은 성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런데 그 밤에 깨달았다. 두 번은 찾아가지 말아야겠구나 하고.

그랬다가는 정말, 용서받지 못할 실수를 할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에도, 지금도. 저는 그런 당신을 이용하고 있어요.’

로엘은 그의 뺨을 감싸며 고백을 하듯 말했다. 안쓰럽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에 데릭은 바로 알았다. 이 여자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구나. 그렇게 지금 이 꿈같은 소소한 일상도 결국 거짓된 것이겠구나.

그렇다면 이 여자는 결국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겠구나.

“그래. 드디어 마지막인 거지.”

그걸 알면서도 데릭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에게 찾아온, 꿈꾸던 이 짧은 일상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진짜 마지막.”

데릭은 덤덤히 말하며 그녀를 보았다. 토르티아의 붉은 성을 뒤로한 채, 정오의 태양 빛을 받는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데릭은 손을 뻗어 높게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들어 입을 맞추었다.

“그래서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건가. 카이로스의 사람들을.”

“아니요.”

이 전쟁이 아닌, 그녀와의 마지막일 것 같은 이 예감은 무언가.

망설임 없는 그녀의 아니란 대답에 잠시 내려갔던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저는 카이로스를 기다리는 게 아니에요.”

나무가 울창한 카티 성에 잔잔한 그녀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들에 계속 그녀의 머리가 흩날리더니, 이제는 검은 테바로스의 깃발도 조금씩 펄럭이기 시작했다.

둥둥둥.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로부터의 서신이 급박하게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자연히, 테바로스 병사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으나, 그만은 여전히 그녀만을 응시했다.

이 소란스러움 속에서, 그녀와 그녀의 키로스들은 일체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당황하는 이들은 오로지 테바로스의 군사들뿐.

“저는 테바로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 말은 곧 그녀가 이미 저 서신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소리.

데릭은 피식 작은 실소를 뱉었다.

“토마 장군으로부터의 서신입니다!!”

아아. 정말, 다 알고 있었는데.

“테바로스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리하려고 이곳에 왔다는 것을.

“리버스 후작가가 군대를 결집하여 이미 로스 강을 넘었다고 합니다. 아직 본부대가 도성까지 도착하지 않았으니…… 폐하. 도성이 위험합니다!!”

이렇게 그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붙잡아 두고, 그저 시간을 벌고 있다는 것을.

그 시간이 무얼 위해 쓰이는지 궁금했다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말했잖아요. 언제나 제일 나쁜 건 저라고.”

로엘은 사색이 된 테바로스의 병사들 앞에서도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으며 말했다.

대신 손을 뻗어, 얼마 전부터 이곳을 배회하던 독수리 한 마리를 불렀다. 그 흔한 휘파람 소리 하나 없이도, 거짓말처럼 그녀의 팔 위로 앉은 그 거대한 황금의 새가 무엇인지 데릭은 바로 알아챘다. 지난 에단의 티벌 전쟁에서 이미 토르티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던 바로 그 새였다. 그 새의 이름이, 승리의 여신을 뜻하는 디케라는 것을 데릭은 몰랐겠지.

“데릭 폐하.”

그 영민한 새는 가볍게 날아올라, 정확히 활활 타오르고 있는 횃불 하나를 날카로운 발로 잡아챘다. 그러고는 그대로 이 성의 제일 높은 곳에 걸린 검은 기발의 기둥 위에 앉았다.

그녀가 매일같이 저곳에 오른 이유. 단순히 테바로스 군대를 보기 위함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저리도, 활활 테바로스의 깃발이 타오르는 걸 보면.

“이제 그만, 테바로스로 돌아가세요.”

잔인도 하여라. 그녀의 말이 다 맞다.

제일 나쁜 건, 역시나 그녀 쪽인 거 같다.

***

토르티아의 중심이자 북방의 중심.

토르티아의 수도 토르티아는, 성 이름마저 토르티아였다. 온통 붉은 벽돌로 뒤덮인, 역사가 깊은 붉은 성은 가히 아름답다는 말이 아깝지 않다.

에단은 지금, 바로 그 토르티아를 마주하고 있다.

“폐하.”

에단을 부르는 아론의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일주일을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그친 새벽. 에단은 피제의 성문을 열었다. 문지기가 없는 성문을 여는 일 따위 너무도 쉬워 당장에라도 본성으로 달려갈 기세들이었지만, 에단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더 기다렸다.

바로 눈앞의 붉은 성을 마주하며.

‘저를 믿어주세요, 폐하.’

저 붉은 성에서 울고 또 울었을, 한 여인을 생각하며.

‘저는 반드시 당신에게로 돌아올 거예요.’

이제는,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된 그녀를 기다리며.

“카티 성에 불이 올랐습니다.”

아론은 흥분하지 않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고 그 보고는 이미 완전 무장한 채로 준비가 끝난 이반과 루카스, 그리고 콜린의 귀에도 선명히 들렸다.

“카티 성의 검은 깃발이 모두 불타고 있습니다.”

때마침 울리는, 힘찬 독수리의 울음소리. 저 멀리 카티 성의 불길 속에서 날던 황금의 새가 언제 이곳까지 날라왔는지 지금은 그들의 머리 위를 유유자적하게 유영했다.

저 영특한 새가 어떤 일을 하였는지 알고 있는 에단은 속으로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공을 들여 길들인 값을 아주 제대로 한 셈이다.

‘나랑 서신이라도 주고 받을 요량이야?’

‘참 나. 여보세요, 폐하. 우리가 무슨 10대 소년소녀입니까? 아저씨가 되어서는 무슨…….’

‘엄청난 불경이야 지금.’

‘됐고요. 다 이유가 있답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그 유명한 아버지의 승리의 새도 아버지가 아닌 제가 먼저 길들인 거랍니다.’

그때의 그 자신만한 미소를 에단은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어렵게 구한 것도, 비싼 값을 치르고 데려온 것도 정작 그인데, 그녀와 함께하며 온순한 양이 되어 버린 디케를 보고 있노라면 이미 그녀에게 뺏긴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에단은 새벽녘 디케와 알콩달콩 훈련을 하는 그녀를 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에단은 고개를 살짝 들어 낮게 날고 있는 디케를 응시했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번에는 에단의 팔 위에 살포시 앉는 디케는 그의 팔 위에서 활짝 자신의 날개를 펼쳐 뽐냈다.

황금의 독수리가 피제의 성 위를 난다는 것은, 그리고 이리 그의 곁에서 위용을 뽐낸다는 것은 이미 카티의 검은 깃발이 활활 불타고 있단 소리다.

동시에 데릭 테바로스의 마음이 타 버리는 소리겠지.

“진격해.”

그건, 그녀가 기어코 성공했다는 의미다.

“진격하라!!”

동시에 카이로스의 마지막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셈이다.

마지막의 시작을 알리는 프란시아의 가호가 화려하기도 했다.

***

활활. 테바로스의 깃발에 붙은 불길은 순식간에 옆에서 옆으로 번졌다. 워낙 작은 성이라 성벽과 성벽을 따라 빼곡히 깃발을 꽃아 놓은 터라 불이 붙기만 한다면 바람에 의해 너무도 자연스레 불길이 번질 수밖에 없었다.

“너는 이걸 위해 기다렸구나.”

그 화기 속에서, 데릭은 나지막이 말했다. 우왕좌왕하며 불길을 잡으려는 테바로스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차분히 그녀만을 응시했다. 속였다는 생각에 꽤나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로엘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덤덤한 그의 반응에 오히려 그녀가 마음이 아팠다.

이 말은 곧 그는 어느 정도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거였다.

그녀가 이렇게 그의 뒤통수를 칠 것이란 사실을.

“네. 저에게는 당신을 붙잡아 둘 시간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녀는 그 속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보다는 안타까워하는 그 감정을 숨긴 채 차가운 눈으로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그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다.

“더 이상 카이로스는 테바로스가 필요치 않고, 테바로스는 그런 카이로스의 전쟁에 나가 주려 하지 않으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억지로라도 당신을 다시 테바로스로 돌아가게 하는 수밖에.”

그리고 데릭을 움직이기에 가장 확실한 것은 당연히 테바로스일 테니, 로엘은 그런 테바로스를 이용했다. 아주 치사하고, 야비하게.

맨 처음 이 이야기를 늦은 한밤중, 에단에게 꺼냈을 때 그는 그랬다.

네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그 말에 그녀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너는 어쩔 수 없는 올바른 아이야. 그런 네가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이용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욕망을 이용해 너의 이익을 취한다는 건 두고두고 너를 불편하게 만들겠지.’

‘알아요. 저는 이 일을 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둘 거예요. 하지만, 그건 저의 몫입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요.’

그 밤. 그녀가 에단을 마주하며 했던 그 말은 너무도 진심이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놀랄 만큼 그녀는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데릭 테바로스가 자신에게 얼마나 진심인지도, 그런 데릭에게 테바로스가 어떤 의미인지도. 형제 간에 피바람이 지속되는 테바로스 역사에서, 데릭이 가져온 평화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전부 알면서 로엘은 그 모든 것을 단번에 깨트려 버렸다.

아주 철저히, 자신을 사랑하는 데릭을 이용하여.

“토마 장군이면, 당숙을 이용한 거네.”

“네 맞습니다.”

“그 소심한 능구렁이를 잘도 꼬드겼군.”

데릭은 웃음이 나왔다. 그의 세력이 하나둘 앞선 형님들을 넘어서기 시작하자, 당숙은 빠르게 그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발밑에 바짝 엎드리는 그를 보며 데릭은 이 비굴함 속에는 야망이 숨어 있음을 바로 알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정리해야지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형님들을 상대하기 바쁘고 국력을 키우기 바빠 이 작은 불씨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잠깐의 무심함을 파고들다니.

이건 절대 에단 카이로스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생각이다.

이건 테바로스의 역사를 알고 문화를 알고 상황을 아는 로엘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

심지어 그 당숙을 로엘은 한번 만나기까지 했었다.

‘비굴하네요.’

‘그런 경향이 있지.’

‘그러면서도 묘하게 숙이질 않아요.’

‘정확해.’

‘그렇다면 불씨가 되겠군요.’

당시 북방의 최강국이자, 신이라 칭송받는 제이드의 딸로서 데릭의 당숙은 로엘에게 아주 친절히 먼저 예를 갖추었다.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던 때에도 그녀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친히 상체를 숙여 작은 그녀와 눈을 맞추는 데에도 그녀는 그런 그의 당숙에게 조금도 호감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뻔히 보이는 음흉한 마음에 한 걸음 물러서게 되었다.

그 어린 기억을 더듬어 그는 카이로스를 통해 도크 테바로스를 움직인 거다.

“카이로스의 전 병력이 여기에 있을 텐데.”

“황궁과 수도를 지키는 최소한의 병사는 상주해 있습니다. 거기에 사병을 많이도 거느리는 돈 많은 원로들도 많고요. 다른 나라의 분란을 조장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인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말만 잘 전하면 그뿐.

장문의 편지를 리암을 통해 수아에게 전달하고 그런 수아는 켈트가를 움직였으며 켈트는 루카스의 사촌 형으로서 황군에 남아 있던 루이 세버를 통해 도크 테바로스를 부추겼다.

어린 조카님께 언제 죽을지 모를 목숨. 한번쯤 도전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도성이 텅 빈 채로, 데릭 테바로스가 저 멀리 떠나 있는 바로 지금이 적기라고.

“도크 테바로스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러하겠고."

그 뻔한 수법에 넘어갈 만큼 얄팍하기도 한 판단력이라니. 데릭은 놀랍지도 않았다.

카이로스는 아마 절대 도크 테바로스를 ‘도와주겠다’고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 마음도, 이유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 이건 엄연히 다른 나라의 내정일 테니.

그저 카이로스로부터 자신을 알고 사람이 찾아왔다는 사실. 그 사람이 카이로스의 기라성 같은 원로 가문 출신이란 사실 등등이 도크를 괜히 흥분시켰을 거다. 그래서 너는 할 수 있다고, 지금은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말에 언감생심 황제를 꿈꿔 본 거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게도.

“테바로스의 모든 깃발이 불타고 있습니다. 도성의 검은 깃발까지 태우실 요량이 아니시라면. 데릭 폐하. 이만 본국으로 돌아가세요.”

단번에 상황 파악이 되었음에도 데릭은 여전히 로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든 일련의 생각들을 넘어 그는 그저 허탈감이 몰려왔다.

고작 일주일. 그것이 무어라고 이리 마음이 허할 건 무언가.

심지어 그녀는 그에게 그다지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 준 것일 뿐.

그런데 그것이 그의 생각보다도, 그리고 그녀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그에게는 커다란 것이었나 보다.

데릭이 손을 뻗어 로엘의 머리에 닿으려 하자 로엘은 바로 한 걸음 물러섰다.

“손. 대지 마세요.”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명확한 거절의 의사.

이제는 더 이상 다가오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는 거였다.

“저는 더 이상 데릭 테바로스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오늘따라 왜 이리 완전 무장을 했나 싶었다. 오늘은 가겠다고 말하려나 했더니만. 오히려 그가 먼저 가게 생겼으니 헛웃음이 절로 날밖에. 그를 향해 곧게 뻗은 그녀의 검이 내리쬐는 태양 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날카로운 그 검에는 살기가 서렸고, 그가 조금이라도 다가섰다가는 당장이라도 베어 버릴 거다.

“하.”

데릭의 입에서 짧은 실소가 나왔다.

“하. 하!”

아니, 그는 아예 연이어, 소리 내며 웃었다. 키로스는 그 웃음에 더욱 긴장한 채로 로엘의 주위를 에워쌌지만, 로엘의 속은 오히려 더 아팠다.

저 웃음이 어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지 뻔히 알고 있었으므로.

“저는, 폐하께 분명 경고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이용할 거라고.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거라고. 그러니 정신 차리고 그만 나를 사랑하시라고.

“그런데도 나는 너를 놓지 못했지. 나도 어쩌지 못할 만큼,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마 데릭의 입에서 처음 ‘사랑’이란 단어가 나오는 걸지도 모른다.

그 단어가 어찌나 아프게 들려와 가슴에 꽂히는지 로엘은 그에 대한 안쓰러움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참 많은 이들에게 최악일지라도 그녀에게만큼은 언제나 최선이었던 사람.

“네가 한 짓은 겨우 찾아온 테바로스의 평화를 또다시 흔들어 놓을 테지. 그리고 난, 또 다시 얼마 남지 않은 내 친척들을 찾아 한바탕 피바람을 불게 할 거야. 테바로스 전역에는 피 냄새가 진동을 할 거고, 테바로스의 사람들은 불안에 떨겠지. 이는 내가 당장에라도 너를 죽여야 할 일.”

덤덤하지만, 진심이 담긴 그의 눈동자에 키로스는 한 걸음 더 바짝 로엘을 둘러싸며 그를 경계했다. 그 키로스들 사이로 데릭은 로엘을 보았으며, 로엘 역시 그런 데릭의 눈을 끝까지 응시했다.

말만, 저리할 뿐 그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조금의 살기도, 아니 냉기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러니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이 말도 결국엔 후회할 거면서.

“그때는 정말 죽여 버릴지 몰라.”

그렇게 또다시 그녀를 그리워하겠지. 어리석고 또 어리석게도.

데릭은 계속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어떻게 도크 테바로스를 욕할까.

그야말로 헛된 욕망과 희망에 평생 눈이 멀어 있는 것을.

지금. 이 지경이 된 이 시점에서도 말이다.

“안녕히 가세요. 데릭 폐하.”

그녀의 목에 길게 걸린, 금빛 월계수 목걸이가 짤랑하는 소리를 내며 햇빛에 비칠 때 검은 까마귀는 카티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테바로스의 검은 깃발은 더 이상 카티에서 흩날리지 않았다.

대신, 프란시아의 깃발이, 황금의 깃발과 함께 힘차게 펄럭였다.

이 기나긴 전쟁의 마지막이. 그리고 로엘 네아레스의 멀고 멀었던 복수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온 토르티아에 알리며.

카이로스의 북방 정벌을 시작한지 두 달.

열일곱 번째, 토르티아의 가장 높은 성 카티가 함락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