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8. 그녀가 ‘월계수’인 이유 (59/69)

Chapter 58. 그녀가 ‘월계수’인 이유

그러지 않아도 팽팽하던 긴장감이, 데릭의 한마디로 더 차갑게 얼어 버렸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이 잠시 이어지는 듯하였으나, 곧 테바로스의 군대는 주군의 명을 받들어 움직였다.

“마마를 보호해!”

물론, 그건 키로스도 마찬가지.

키로스들이 더 바짝 그녀를 에워싼 만큼, 테바로스 역시 한 걸음 더 그녀들에게 다가섰다. 매서운 칼날이 태양 아래 빛을 반사하며, 서로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렇게 데릭의 눈은 오롯이 로엘을 향했다.

“하.”

로엘 역시 그런 데릭의 눈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작은 실소를 뱉으며, 그녀는 가볍게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곧게 팔을 뻗어, 그녀의 가늘고 아름다운 검이 정확히 데릭을 향하였다.

“누구 마음대로.”

“당연히, 내 마음대로.”

그녀는 조금의 당황함도,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여유로운 태도. 그 속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러했다. 그건 버리의 눈에도 마찬가지라, 버리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만만찮은 분이다.

이 상황에서도 저리 당당할 수가 있나. 누가 보아도 적진 한가운데에 이미 포위되어 당장이라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건만.

아무리 그녀가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고, 그 이름이 아깝지 않을 실력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한들 여기서 저분 혼자 무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건 당사자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 그러함에도 로엘은 굽히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그녀는 여전히, 진짜 여신님이라도 되는 양 고고하게 그들을 내려 보았다.

“……폐하.”

“알아. 무슨 말을 할지.”

문제는 그것이 너무도 데릭을 자극한다는 사실이지만.

데릭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데릭은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섰다.

“어쩌시게? 진짜 여기 테바로스 정예군을 상대라도 하겠단 말인가?”

“못할 것도 없지요.”

“그건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거지.”

“당신도 무시하고 있잖아. 카이로스를. 내 사람들을. 그리고 나를.”

로엘은 데릭을 직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더 냉철해졌다. 그래서 마치 숨겨 놓은 다른 패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기세에 티를 내진 않아도, 테바로스의 정예군 역시 조금은 움찔하였다. 자신들에게는 하늘같으신 데릭 폐하께 이리도 정면으로 맞서는 이를 그들은 본 적 없었으므로.

자신들이었다면 아마 진즉 저 가녀린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테바로스는 카이로스의 동맹국입니다. 이번 정벌을 함께하기로 양국이 모두의 앞, 같은 하늘 아래에서 맹세를 하였지요. 지금 나를 포박하라 명하시는 것은 그 맹세와 신의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내가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하여 설명하는 건가.”

“아니요. 설명이 아니라 경고지요. 당신이 알고 있고, 걱정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전부 일어날 거라고.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마시라고.”

아. 세다. 정말 세다. 버리는 마른침을 남모르게 삼켰다.

로엘을 대면하는 것. 버리 역시 벌써 몇 번이나 되었지만, 그때마다 이분에게 놀라고 또 놀랐지만 오늘이 최고였다. 버리의 기준으로는 지금 그녀의 상황은 죽음 바로 문턱 앞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어찌 사람이 저리 침착할 수가 있나. 여자의 몸으로, 아무런 보호 없이 이리 적진 한가운데에 걸어 들어온 것만도 놀랄 지경인데 그녀는 그 이상을 하고 있었다.

처음 데릭이 로엘이 홀로 올 거라 말했을 때 버리는 조금 긴가민가하였다. 로엘밖에 대안이 없다는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그녀가 홀로 와 무얼 할까 싶었다. 차라리 본성 공격을 늦추는 한이 있어도, 루카스 세버를 보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미친개처럼 날뛰는 루카스 세버라면, 프래카 소수 정예를 데리고 와 한바탕 칼춤이라도 출 테니. 차라리 그편이 카티 성을 되찾는 데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버리의 예상을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깨트렸다.

“나는 카이로스의 프란시아.”

루카스 세버가 왔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어쩌면 그녀가 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피를 보지 않고, 대화로 마무리 짓는 것. 누가 봐도 최상의 선택지가 아닌가.

“나는 카이로스의 대표로서 동맹국 테바로스의 카티 점령을 축하하러 친히 발걸음 하였다. 테바로스는 감히 나의 걸음을 막지 말라.”

문제를 해결하려 온 이. 지금 이 사태를 타개할 자.

정말 손색이 없다.

“테바로스는 예를 갖추라.”

결국 데릭의 입에서 명이 떨어지고, 그녀에게 검을 겨누던 테바로스의 군대는 바로 그녀에게 길을 터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일사불란하게 양쪽으로 갈라진 테바로스의 부대는 그녀에게 데릭에게로 가는 길을 텄다.

“로엘 네아레스 님을 뵙습니다.”

토르티아의 공주도,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도 아닌 ‘로엘 네아레스’.

이건 그녀를 어느 나라의 누군가가 아닌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로 받들겠단 소리다.

끝까지 저들 입에서 ‘카이로스’의 단어는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며, 로엘은 참으로 잘도 교육받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는 데릭을 응시하며 로엘은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저 능글맞은 미소 뒤에 숨겨진, 아무도 모르는 그 음흉한 모략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까마귀가 울어 대고, 피 냄새가 진동하는 카티에서의 시작이 영 순탄치가 않다.

***

“공주님께서 카티로 가셨다고?”

“예. 장군님.”

“이런, 젠장할!”

벤은 자신의 심복이 가져온 소식에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토르티아 본성에서도 카티에 버젓이 걸린 테바로스의 검은 깃발이 보이는데 그곳에 가셨다니. 벤은 도통 카이로스가 무슨 생각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에단 황제는 뭘 하고 공주님을 카티로 보내?”

“에단 황제는…… 본성으로의 진격을 시작하였습니다.”

“하.”

벤의 입에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공주님은 사지와도 다름없는 데릭의 카티에게로 보내 놓고, 자신은 아랑곳 않고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겠다는 거였다. 이건 로엘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말 아닌가.

벤의 로엘에 대한 애정을 익히 알고 있는 벤의 심복은 이리 그가 불같이 화를 낼 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고하기 전에 그리 머뭇거린 건데, 역시나 이리 화를 내실 줄 알았다.

벤은 이 토르티아의 전설 같은 장군 중 한 분이다.

워낙 범접할 수 없는 신 같은 존재가 토르티아 역사에 있어서, 하필 그분과 동시대에 계셔서 빛을 덜 받으셨을 뿐, 그렇다 한들 벤의 대단한 업적이 바래진 건 아니다.

오히려 제이드는 너무도 현실성이 없어 그저 신화 속의 신 같은 존재라 거리감을 느끼지만, 벤은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며 토르티아를 지켜 온 그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가 화내시는데 어떻게 눈치를 안 볼까.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벤이라 더욱 긴장이 바짝 올라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저 그게…… 어쨌거나 카이로스의 부대는 워낙 대군이라 본성 앞, 토르티아 황군의 진영까지 다다르는 데에는 수일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로엘 님께서는 본인의 소수 부대인 키로스를 이끌고 출정하셔서 훨씬 빠르게 카티에 당도하시겠지만요. 어쩌면 지금쯤이면 이미 데릭 황제를 만났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카이로스 황군도 아닌 키로스 부대. 하. 진짜 기가 차는군.”

카이로스에 건장한 장군이 몇인데 그곳에 로엘을 보낸단 말이다. 허울뿐인 동맹. 애초에 카티 성에 테바로스 깃발이 걸린 순간 그들의 동맹은 깨졌다고 보아야 한다. 카이로스가 티벌을 점령하였는데, 그런 티벌을 거치지도 않고 테바로스 소수 군만 카티로 간 것부터가 수상하지 않은가. 이건 누가 보아도 데릭 황제의 돌발 행동이다. 그 돌발 행동에 카이로스가 제대로 뒤통수 맞은 셈이고.

“정벌이 지체되는 걸 우려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요? 다른 장군들이 모두 주역이고, 아무리 대군이라도 한들 황군을 쉽사리 뺄 수도 없고요. 어쨌거나 제일 중요한 건 에단 황제니, 에단 황제를 지켜야 되…….”

“그럼 공주님은? 공주님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그 말인가?”

“아, 아니. 물론 그런 건 아니지만…….”

“프란시아라고 떠받들고 이용할 때는 언제고, 이런 식으로 사지로 몰다니. 그러다 정말 위험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벤은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로엘이 그 어떠한 장정에게도 뒤지지 않을 실력자라는 것, 벤도 너무 잘 안다. 그녀를 가르친 사람 중 한 사람이 그이기에 더더욱 잘 안다. 그래서 로엘이 전쟁에 나선다고 한들, 정말 다른 여타 공주님을 걱정하듯 걱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그녀를 지켜 주는 이들이 곁에 있을 때 이야기.

벤은 공주님 곁에 항시 에단이 있기에 마음을 좀 놓았던 거다.

그런데 이리 홀로, 저리 위험한 곳을 가시다니.

에단 황제에게 벤은 배신감마저 들려 했다.

“데릭 황제를 몰라도, 정말 너무 모르는군.”

벤은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벤의 집무실에서도, 창문을 통해 버젓이 카티에 걸린 테바로스의 깃발이, 그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가 선명히 보였다.

‘로엘 공주는 테바로스의 황후가 될 사람이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 단호히 말하는 어린 데릭을 보며 벤은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그 눈동자에 서린 로엘에 대한 욕망이 결코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어서.

그 아이가 성인이 되고, 황제가 된 거다.

그렇게 그녀를 드디어 아무런 방해 없이 만나는 거다.

“……몰라도 너무 몰라.”

데릭 테바로스는 로엘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그런 작자인 것을, 그게 테바로스의 방식인 것을, 에단 황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러니 벤의 표정이 더더욱 굳어질밖에.

벤은 말없이 맥스와 나눠 가진, 검장의 표식을 손에 꼭 쥐었다.

“……너라도 좀 해라.”

지금의 벤은 할 수 없는, 그러나 먼저 가 버린 형제는 할 수 있는 바로 그 일.

로엘 공주님을 지키는 일을 맥스가 하늘에서라도 해 주길, 벤은 그저 속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

데릭과 로엘. 둘만이 남은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테바로스의 군사들에 의해 키로스의 출입이 저지당한 것처럼, 버리를 비롯한 테바로스 사람들 역시 방에서 물러났다. 꽤나 많은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사라지고, 두꺼운 방문이 닫힌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말없이 그저 서로를 응시했다.

이리 둘만이 마주한 건 로엘의 방에서 있었던 그 밤 이후 처음이었다.

“다시는 나를 안 볼 기세였는데.”

“마음 같아선 그랬지요.”

그러니 두 사람의 분위기가 어떻게 같을까.

시종일관 데릭은 여유로웠으며, 시종일관 로엘은 살기가 등등했다.

“그렇지만 이리 네 발로 나를 찾아왔지.”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바로 맞받아치려다, 로엘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데릭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이곳 카티까지 왔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반응하지 않기. 뻔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기. 옛 추억과 감상에 흔들리지 않기. 그를 알고 있다는, 어리석고도 순진한 착각에 빠지지 않기.

입 밖에 꺼내지 않은 그 다짐들을 그녀는 여기까지 와, 이리 그의 앞에 앉기까지 수백 번은 더 되뇌었다.

그러니, 절대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

“카티를 되찾아야 하니까요.”

“오면, 내가 주나?”

“안 주시면 뺏어야지요. 본디, 카이로스의 것이므로.”

일말의 망설임 없는 대답. 흔들림 없는 눈동자.

당당히 카이로스의 것이라 답하는 붉은 머리의 토르티아 공주의 모습이라니.

이질적이어야 하는데 너무도 자연스러워 놀랄 지경이다.

그만큼, 이제 그녀는 카이로스의 사림이 되었다는 말.

“뺏을 수는 있나.”

그 말은 곧 온전히 에단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

데릭의 심기를 매우 거슬리게 했다.

“고작, 후궁 따위를 지키는 여자들을 데리고?”

그래서 말이 생각보다도 더 빨리, 더 세게 나와 버렸다. 특유의 조소를 뱉으며 상대를 조롱하는 저 태도. 저 태도에 루카스도 아론도 그리고 이반마저 어디 한두 번 울컥했던가. 로엘 역시 삐딱한 자세로 그녀를 철저히 무시하고 하대하는 눈빛에 두 주먹에 힘을 불끈 들어갔다.

“막을 수 있으시겠어요? 고작 테바로스 황실을 지키는 저 소수의 군사들로.”

그가 도발한다면 그녀 역시 도발한다.

“카이로스 후궁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테바로스는 한 걸음도 들어오지 못할 곳이지요. 당장이라도, 키로스는 폐하의 정예군들을 베어 버릴 수 있습니다.”

작은 조소를 뱉는 그녀의 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거. 데릭도 알고 로엘도 안다.

그녀의 부대, 키로스가 강하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다. 여성으로만 구성된 부대로 그녀가 함락한 성이 무려 네 곳이다. 더 이상 어떤 수식어가 필요할까. 그 자체로서 그녀들은 그녀들의 존재와 가치를 이미 증명하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이들은 테바로스의 정예. 그것도 일반 테바로스 황군도 아닌 데릭의 황자 시절부터 함께한 황제 정예군이다. 이러지저러니 해도 키로스는 ‘생각보다’, ‘상상 이상으로’ 강했을 뿐, 테바로스의 최정예를 압도할 실력은 되지 못한다.

그러함에도 그녀는 이 뻔한 허풍으로 그를 자극했다.

당장이라도 베어 버릴 수 있단 저 말. 어떤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는 사실일 테니.

“나의 그녀들을 함부로 평가하지 마세요. 그녀들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오로지 자신들의 주군을 지키려 한다면, 그래. 못 할 것도 없지.

데릭이 끔찍했던 황자 시절을 함께해 온 그들이 애틋한 만큼, 그녀 역시 낯선 곳에서 자신을 위해 충성을 맹세해 준 키로스가 애틋할 거다. 내가 모시는 주군께서 나를 귀히 여겨 주신다는 것. 그보다 더 확실한 충성 요인이 어디 있겠는가.

데릭의 정예군이 황권 싸움으로부터 목숨을 바쳐 그를 지키고 황제로 옹립하였듯, 키로스 역시 그녀를 이 사지에서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 들 거다.

결국 그 결과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그렇게 모두가 희생당하는, 그래서 아무 의미 없는 피바람으로 끝이 나겠지.

그러니, 그녀의 허풍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꽤나 무서운 위협이 되기도 한다. 주군을 지키고자 하는 그 마음의 크기가 무얼 만들어 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므로.

“하.”

데릭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상대를 조롱하는 그런 비웃음이 아닌, 저절로 나와 버린 진짜 웃음이었다. 너무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자신감이라 그저 데릭을 웃게 만들었다.

아무튼 그녀는 한시를 가만히 있지 못한다.

이리 부지런히도, 그녀의 모든 것들이 데릭의 흥미를 끌었다.

“그러나, 어쩌나. 나는 양쪽 다 피바람이 불어도 내어 줄 마음이 없는데.”

그러시겠지.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일으키지 않았을 테니.

로엘 그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편히 의자에 기대앉아 한쪽 손으로 머리를 살짝 괴며, 로엘을 빤히 바라보는 데릭은 로엘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어디 자신을 좀 더 재미있게 해 보라는 듯한 오만한 태도.

지금 그가 그녀에게 꽤나 재미있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 옛날부터 그는 항상, 그녀의 이런 모습에 끌려왔으므로.

‘네가 이래서 내가 좋아하는 거야. 너는 조금도 무료하지 않거든.’

눈치 보지 않고, 자기 할 말 하는 것. 패기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

모두가 아니라고, 안 된다고 할 때에도 끝까지 자신의 소신대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

그렇게 보란 듯이 해내는 것.

그래. 로엘이 어디 한두 번 그러하였나.

“너무 너다워서, 할 말이 없네.”

그 어린 날, 모두가 최악이라 불리던 다섯 번째 황자와의 혼인이 정해졌을 때 홀로 슬퍼하지 않은 것도. 토르티아에서 쫓겨나듯 카이로스의 갔을 시절, 그렇게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한 그 순간에도 보란 듯 카이로스의 사랑받는 아카시스가 되어 버린 것도. 에토르 전쟁에서 데릭과 몇 년 만에 만났을 때, 당당히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로 나타나 다 이긴 그의 전쟁을 뒤집은 것도. 전부 다, 데릭이 사랑하는 로엘의 모습이다.

“그러니 테바로스는 더 이상의 혼란을 가중시키지 마세요.”

이 기죽지 않는 아름다움에 끌려, 그야말로 한눈에 반해 버렸다.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로 명합니다. 테바로스는 당장 카티에서 나가세요.”

다만 이미 뺏겨 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이리 멀리도 가 버렸지만.

데릭은 로엘과 자신 사이에 놓인 고작 테이블 하나 정도 들어가는 그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그녀의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표정이, 너무도 카이로스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모든 행동들이 한데 모여 그렇게 두 사람의 거리를 멀게 만들었다.

이리도 가까이, 바로 눈앞에 있건만. 그녀는 조금도 그에게 다가오질 않았다.

“말 한마디에 물러날 거면, 나도 이 짓을 시작하진 않았어.”

“저도 테바로스의 안 된다는 말 한마디에 물러설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로엘은 바로 데릭의 말을 받아쳤다. 데릭이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리란 것을 뻔히 알고도. 그 많은 반대들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다. 고작 저 차가운 한마디에 물러날 거라면 그녀야말로 보내기 싫다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애써 외면한 채로, 그렇게 그를 걱정시키며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로엘 역시 조금도 물러날 마음이 없다.

“이미 카이로스의 본군은 토르티아의 본성으로 진격을 시작하였습니다. 토르티아가 총력을 다해 본성을 지킬 테니, 당연히 본성 남문 앞 대지에 진을 치겠군요. 그 대치 상황까지 다다르는 데, 작은 성 두 곳을 지나쳐야 한다고 한들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습니다. 만일 두 성이 저항을 포기한다면. 아마. 사나흘이면 충분하겠네요.”

심지어 티벌에서 지체한 그 시간만큼 체력을 배분하여 쓴 이점도 있었다. 티벌 전투 이후 잠시 쉴 기간마저 있었으니 카이로스 병사들의 체력은 다시 최고치를 찍은 셈이다.

거기에 무려 타르타니 숲을 움직이시는 황제 폐하에, 승리를 가져다주는 프란시아님이 함께 계시는데 마지막 전투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이 어찌 무거울까. 카이로스의 사기는 가히 하늘을 찌르고 있을 거다. 그건 굳이 누가 보고하지 않아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너무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테바로스의 황제는 이 카티 성의 검은 깃발이 내려가기 전까지 카이로스의 부대가 출발조차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적어도 본성으로의 첫 진격 명령을 안 할 거라 생각하겠지요. 토르티아의 가장 높은 곳이 테바로스의 것이 되었다는 상징 때문에 카이로스가 오랜 숙원 사업인 북방 정벌의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테니까요.”

아주 정확하다. 지금 로엘이 말한 바로 그 이유. 데릭이 티벌을 돌아 카티까지 숨죽여 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카티가 가지는 그 상징성을, 카이로스가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니.

“맞아. 그리고 그건 사실이지.”

“네. 맞는 말입니다. 카티에 엉뚱한 깃발을 꽂아 놓고 토르티아를 점령할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겠네요. 카이로스가 토르티아의 붉은 성벽에 다다르기 전에 저 검은 깃발을 모두 없애는 수밖에.”

싱긋. 그녀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

여전히 똑바로 그를 응시한 채로. 조금의 떨림도 없이.

적절한 긴장과 여유가 섞여 더욱 차분한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게 제가 되었든, 지옥의 개가 되었든, 황금의 그가 되었든 말이죠.”

무슨 협박이 이리도 투명한지. 그 솔직함에 오히려 협박당하는 이가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아마 버리가 옆에 있었으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속으로 온갖 욕을 했겠지.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나 하며.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는,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데릭의 입장에서야 ‘이런 여자’이기에 사랑하는 거지만.

***

로엘이 카티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이미 조금씩 지기 시작할 때였다. 겨울인지라 해가 워낙 짧은 탓에 이리 데릭과 한방에 앉아 마주하고 있으니 어느새 어둑한 밤이 되었다. 밖에서 귀가 아프게 울어 대던 까마귀 소리마저 잠잠해진 걸 보니 밤이 오긴 왔나 보다.

“비가 오나 보네.”

그러게요, 라고 순간 대답할 뻔한 걸 로엘은 참았다. 대신 고개만, 탁탁 소리가 들려오는 창문을 향했다.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유리창에 맺히더니, 이내 빗소리를 울리며 시원스럽게 쏟아졌다.

“좋아하잖아. 비 오는 거.”

그녀와 같이 비 내리는 창을 바라보던 데릭이 자연스레 물어 왔다. 나지막이 방 안을 울리는 그 목소리에 자연히 창을 보던 그녀의 시선이 데릭을 향했다.

‘비 오는 거. 좋아하잖아?’

‘그건 황자님이 더 좋아하시잖아요,’

그리고 자연스레 옛 기억이 떠올랐다.

‘너랑 보는 걸 좋아하는 거지.’

쓸데없이도 선명한 기억. 참 꺼내 올 추억이 많기도 하다.

1년에 몇 번 보지도 않은 그인데 그날들 중 꽤나 많은 날, 비가 왔다. 그래서 성의 모퉁이에 둘이 앉아, 비 내리는 것을 말없이 지켜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큰 행사가 있어야지만 만나는 두 사람이라 늘 화려한 조명 아래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하여도, 두 사람을 신경 쓰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천덕꾸러기 신세들. 그래서 두 어린아이는 곧잘 사람들을 피해 조용한 그늘을 찾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리 들려오고 화려한 조명이 닿지 않은 그늘진 곳에 앉아 그렇게 아이 둘은 하염없이 비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한번은 커다란 토르티아의 창문 아래서. 또 한 번은 드넓은 테바로스의 후원 앞에서.

그 말 한 마디 없는 시간이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떠한 시간보다 편했다.

“나는 여전히 좋아.”

그때는 분명 그러하였는데 어쩌다 이리 불편해졌을까. 그의 시선은 자연히 다시금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지금은 네가 있어 더 좋고.”

또렷한 검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붉은 그녀만이 머물렀다.

다른 어떤 여인도 이 눈에 담아 본 적이 없다. 단 한 순간도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어 본 적도 없다. 소년이 남자가 되고. 그 남자가 황제가 되어 가며. 그의 밤을 달래 준 여인이 어디 한둘일까. 그 수많은 여인들 중 기억나는 얼굴 하나 없다.

그런데도, 그 오랜 세월 보지 못한 로엘만은 놀라우리만치 또렷이 기억했다.

그래서 에토르에서 몇 년 만에 다시, 멀리서 그녀를 보았을 때 데릭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자신의 기억 속, 그 어린 소녀의 얼굴이 여전히, 너무도 아름답게 핀 그녀의 얼굴에 남아 있어서. 그게 너무도 고마워서.

“……여전히 비 오는 건 좋아해요.”

듣고만 있던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역시나 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 한마디에도 같은 추억을 꺼내고 있었다. 데릭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이제는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보는 걸, 좋아하지만요.”

단지 그 미소가 오래가지 못할 뿐. 솔직하기도 한 그녀의 올곧은 대답에 데릭의 미소가 씁쓸하게 흩어졌다. 애석하게도, 그녀의 눈과 마음은 이미 다른 이를 담아 버렸고 그의 자리는 조금도 남지 않았으니까.

“변했네.”

“네.”

일말의 망설임 없는 대답.

예전부터 알고 있던, 인정하기 싫은 그 사실이 유난히 아프게 데릭의 마음을 후벼 팠다. 또다시 침묵이 이어지고 정적이 가득 찼다. 덕분에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빗소리가 더 선명히 울렸다. 투둑투둑. 시간이 지날수록 나뭇잎에 튕기도, 창에 부딪히는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만큼 비가 굵어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다시금 그녀의 시선이 창밖을 향하면서 조금씩 표정이 어두워졌다.

딱 보아도,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들어찼다.

그녀는 지금 데릭을 앞에 두고 다른 이를 생각하고 있는 거다.

이 순간 이동하고 있을,

‘황자님. 저는 더 이상 당신의 기억하던, 토르티아의 공주가 아닙니다.’

지금 그녀의 온 마음을 가져간, 그 황금의 남자를.

‘더 이상 당신의 어린 정혼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데릭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다시 변하면 되겠네.”

그 목소리 역시 더 낮게 깔렸다. 여유롭던 미소가 사라지고 정색하는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한번 변해 봤으니, 다시 변하지 말라는 법. 없지 않잖아?”

로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한숨을 속으로 내쉴 뿐.

이 쳇바퀴 도는 것 같은 대화. 상황. 그녀도 이제 지겨웠다.

설득도 했고, 설명도 했다. 화도 냈고, 부탁도 했다. 사건도 있었으며 사고도 있었다.

그 많은 이들이, 그와의 재회 이후 끊임없이 일어났으나 여전히 데릭은 로엘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무서울 지경이다. 이렇게 끝끝내 그가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까 봐.

그렇게 조금이라도 ‘그’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녀가 직접 이리 데릭을 상대하러 온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그의 이 집착이 이 카티 성 사태의 원인임을 그 누구보다도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 그녀의 손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폐하. 저는 지금 카티를 돌려달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두 사람의 추억으로 돌려졌던 화제를 본론으로 끌고 왔다.

“나는 돌려주지 못하겠단 말을 하고 있고.”

“도대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정말 루카스 장군이 프래카라도 끌고 오길 기다리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지옥의 개가 프래카 전원을 끌고 오면 여긴 몰살이지. 나까지도 포함해서.”

“그걸 아시는 분이 그러고 계십니까?”

“어. 루카스가 아닌 네가 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이리 내 눈앞에 왔고.”

데릭은 턱을 살짝 괴며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여유로운 미소마저 입가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야 그도 테바로스의 황제로서, 진지하게 그녀를 대하려는 거다.

“나도 알고. 너도 알고. 그리고 에단 황제도 알겠지. 내가 카티를 점령한 이유.”

그게 어디 한두 가지일까.

이 약삭빠른 사람은 아주 많은 것들을 고민하고 계산하여 카티를 택했다.

“토르티아를 넘어 북방에, 그리고 중부에 테바로스를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해. 카이로스의 잘난 북방 정벌에 조금이라도 제동을 걸기 위해. 한심하다 못해 연민까지 느껴지는 토르티아에게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보라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신이라 불리는 에단 황제의 심기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게 하기 위해. 그렇게 그 위대하신 분의 화를 돋우기 위해.”

데릭은 줄줄이 쉬지 않고 말했다. 로엘이 지나치게 솔직했던 만큼 데릭의 대답도 매우 솔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를, 이렇게 만나기 위해.”

듣는 로엘이 조금 당황할 정도로.

“이렇게 그 누구의 방해 없이, 오로지 너만을 마주하기 위해.”

데릭의 뜨거운 시선이 로엘을 향하고, 로엘은 마른침을 남몰래 삼켰다.

자신만을 응시하는, 저 깊은 검은 눈에 마치 빠져들어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다.

그렇게 결국, 그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더 욕심을 내면, 그런 너를 되찾기 위해.”

아니. 어쩌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니 아직 달성하지 못한 그의 마지막의 희망사항만큼은 절대 실현되지 않아야 한다.

데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서서히 다가갔다.

“오히려 질문은 내가 해야 하지 않나? 아무리 네가 카이로스에서 오기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고 하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온 거지?”

그렇게 미동 없이 자리를 지키는 그녀의 앞에 갔다. 살짝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의 시선이 자연히 위로 올라갔다.

호위 한 명 없이 이 방에 남녀가 단둘이 있으면서도, 그녀는 그저 적을 경계하는 고양이의 눈으로만 그를 보았다. 지금 그가 위험한 것은 그가 적국의 황제여서가 아닌 ‘남자’여서임을, 그녀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네 말대로, 내가 여기서 계속 물러나지 않고 있으면 루카스 장군이든 이반 황자든 누구든 카이로스의 병사를 끌고 오겠지.”

그렇다면 그의 검은 깃발이 황금의 깃발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리라.

어디 그뿐이라. 카티를 함부로 점거한 테바로스의 피가 낭자할 거다.

“나는 그런 멍청한 싸움은 하지 않아.”

그는 적에게 무자비할 뿐 자신의 병사들은 귀히 여기므로.

데릭은 천천히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차가운 손이 턱에 닿자 그녀는 아주 살짝 움찔거리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와의 기 싸움에 물러서지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긴장한 얼굴로 잔뜩 그를 경계했다.

“그럼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이대로 저와 같이, 이 의미 없는 대화만 계속하실 건가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데릭 폐하.”

“아니면, 그 짧은 일주일 내에, 내 손에 들어온 꽃을 꺾어 버릴 수도 있고.”

그녀의 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이내 그는 조금 더 그녀를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렇게 서로의 숨결이 닿는 가까워진 거리에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붉은 눈동자 가득 들어차는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면, 그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아무렇지도 않음이 데릭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가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싸며 그런 그녀를 좀 더 바짝 당겼다.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 테지?”

그녀의 살결로부터 전해져 오는 체온. 달콤한 향기. 미세하게 전해지는 규칙적인 심박수.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심장 소리를 빠르게 만드는데,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마치 그의 손이 닿지 않았다는 듯.

그렇게 눈앞의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철저히 그의 존재를 외면했다.

“글쎄요. 저는 별로 달라질 것이 없을 거 같은데요.”

대놓고 한 도발에 돌아온 것은 너무도 무미건조한 답변.

“그러신다고 한들, 당신과 저의 관계도, 당신에 대한 저의 마음도. 그리고 저의 그분에 대한 마음도. 전부 다. 그 어느 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일말의 가능성도 남기지 않은, 단호한 대답.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 눈동자, 표정. 지금 그를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화를 내지도, 흥분하지도, 슬퍼하지도, 분개하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히 그에게 사실을 말했다. 그에게는 참으로 서글프고 잔인한, 그 변하지 않은 사실을.

“그러니, 헛된 희망을 품거나 부질없는 노력은 하지 마세요. 지금 폐하가 생각하시는 바로 그 일은, 데릭 폐하께도, 그리고 테바로스에게도 최악입니다.”

오로지 두 사람뿐인 이 방을 이토록 숨막히는 공간으로 바꿔 버리다니.

정말 그녀는 잔인하기도 했다.

여전히 그녀의 뒷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싸고 있던 데릭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적어도 너를 보는 그의 눈빛은 바뀔 수 있겠지. 그게 더 나아간다면 그자와 네 관계를 흔들 테고, 그는 너와 나의 관계를 흔들 수도 있는 법이다.”

전혀 변화가 없을 거라는 그 말, 너는 정말 확신하냐고 되물어 오는 데릭의 눈에 로엘은 다시금 일자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어떻게 에단의 마음마저 그녀가 확신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물건 하나도 남의 손을 타는 걸 싫어하는 그에게 자신의 여인이 다른 이에게 안겼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정말 아무도 모를 일이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붉은 눈동자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여도, 데릭의 눈에는 그 미세한 동요가 전부 보였다.

어떻게 동요하지 하지 않을까.

아무리 깊은 믿음이 있다고 한들, 사람의 마음은 아무도 모르는 것을.

“그자에게 네가 특별하다는 것. 네가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지. 지금까지 에단 카이로스가 보여 준, 너에 대한 모든 예외들이 그걸 반증하니까.”

그래서 참 많은 말들이 전해지고 부풀려지지 않았는가. 황금의 황제 품에 안긴 붉은 머리의 공주님. 알고 보니 승리의 여신이었다는, 그래서 운명이 만났다는 사랑 이야기.

제멋대로 부풀리고 제멋대로 지어낸 그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테바로스의 그에게까지 들려왔다.

카이로스의 황제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로엘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데릭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이야기들은 카이로스 황제가 로엘을 철저히 이용하기 위해, 지극히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일지 모른다고. 그렇지 않고서 이리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수 있나. 로엘이 무슨 마음으로 토르트아를 떠났으며 무슨 마음으로 그 무시무시한 소문의 황금의 황제에게 자처해서 간 건지 데릭은 그 어떠한 설명 없이도 바로 이해했다.

그러니 그런 그녀의 계획에도 전혀 없었던, 에단과의 사랑이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데릭은 지금 그 기적을 흔들어 보려는 거다.

“특별한 만큼, 소중한 만큼 느끼는 배신감은 크겠지.”

“저는 그분을 배신하지 않아요.”

“그래. 너는 그럴 테지. 하지만 나는 너로 하여금 그를 배신하게 만들 수 있어.”

그녀의 목덜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당기자 그와 그녀의 입술이 거의 닿을 듯 가까워졌다. 움찔. 지금까지 태연하던 로엘이 처음으로 대놓고 긴장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는 그녀의 경계 태세에 그는 피식 웃었다.

이제야 마음에 드는 반응이 나왔다.

“이제야 자신이 무슨 상황인지 조금 자각이 되었나 보군.”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글쎄.”

닿을 듯한 그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듯 떨어졌다. 그대로 그가 다시 멀어지자 로엘은 참았던 숨을 그제야 작게 내뱉었다.

“나는 너를 붇잡아 둘 수 있지. 네 말대로 기다리다 못한 카이로스의 부대가 올 때까지. 그럼 여기까지 와 버린 카이로스 프란시아님의 체면은 좀 많이 구겨지겠지. 그 명성도 금이 갈 테고. 기껏 그자가 애써 쌓아 올렸는데 말이야.”

데릭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앉아 있는 그녀의 뒤로 갔다. 허리를 꼿꼿히 세운 채로 미동 없는 그 모습이 고고하기도 하였다. 여전히 버거워 보이는 갑옷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고 그 위로 높게 묶은 긴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떨어졌다. 꽁꽁 싸맨 갑옷 사이에 언뜻 보이는 하얀 그녀의 목덜미는 가늘기도 하여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꺾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카이로스가 오면 테바로스는 죽어요.”

“무슨 명목으로? 그들이 오면 나는 기꺼이 성문을 열 텐데.”

“그럼 당신은 무얼 얻나요? 고작 나 하나 끌어내리자고 이 일을 벌인 건가요?”

“고작이라니? 누구 마음대로.”

그는 또 한 번 피식 웃음을 뱉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그녀의 어깨 위에 커다란 손을 올렸다. 예상대로 가늘기도 한 어깨뼈가 한 손에 잡혀 쇄골까지 손끝에 닿았다.

참. 이 작은 어깨로 잘도 그 많은 것을 짊어지고 살아왔다.

“네가 이곳에 오는 순간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카이로스 사람들은 말하겠지. 프란시아님께서 이번에도 승리를 거두러 가셨다고. 그럼 테바로스는 뭐라 할까? 카이로스 승리의 여신님께서 테바로스를 벌하러 가셨다고 할까?”

아니. 절대 그럴 리 없다. 자존심이 하늘인 그들이 그럴 리가.

그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말을 전할 거다.

예를 들어,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자 카이로스 승리의 여신께서 드디어 테바로스의 품으로 돌아왔노라.”

로엘은 순간 머리가 띵했다. 드디어, 이제야 데릭의 진짜 의도를 알 것만 같다.

그는 카이로스와 대적할 마음도, 그렇게 카티를 차지할 마음도. 그렇다고 토르티아를 도와줄 마음도 없다.

그저 오로지 그는 테바로스를 위할 뿐이다

“……일부러 말을 퍼트릴 생각이군요.”

“글쎄. 일부러가 맞나. 우린 그저 사실을 전할 뿐이야. 네가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라는 것. 카이로스의 프란시아가 되었다는 것. 내 정혼자였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네 발로 나에게 왔다는 것. 이 중 하나라도 거짓이 있나?”

로엘의 어깨에 얹은 손에 무게가 실렸다. 미세하게 그녀의 어깨가 떨려 옴이 그의 손에 느껴졌다. 최대한 참으려 두 손을 테이블 밑에 숨긴 채, 꼭 쥐고 있는 그 모습마저 데릭의 눈에 들어왔다.

“로엘. 네 아버지는 무엇으로 신이 되었는가. 그 말도 안 되는, 범접할 수 없는 실력? 모든 이들을 따르게 만드는 타고난 지도력? 그 고매한 성품? 그래.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 지금의 ‘제이드 네아레스’를 만들었지.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부풀린 사람들의 ‘말’이 있었기에 그 제이드가 만들어진 거야. 마치 진짜 신이라도 된 듯이, 그렇게 네 아버지는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어. 토르티아를 넘어, 북방을 넘어, 전 세계에.”

어깨에서 느껴지는 그의 손이 유달리 무겁게 느껴졌다. 그 무게감은 결코 내리누르는 데릭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아닌 그의 말이 그녀 자체를 내리눌렀다.

지금 데릭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로엘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너무도 알 것만 같았다.

“너는 분명 네 스스로 나에게로 왔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네 의도가 어땠는지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다가갔다. 검은 그의 머릿결이 다가와 그녀의 뺨에 스치고, 그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가득 울려 퍼졌다.

“중요한 건 결과지. 네가 카티를 되찾으면 너는 자랑스러운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님이 되는 거고, 네가 카티를 되찾지 못한다면 그저 내 품에 안긴 테바로스 황제의 옛 정혼자가 되는 거야.”

귓가에 닿는 그 뜨거운 숨결에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정말 떨지 않으려 온 몸에 힘을 주고 버티는 데도 멋대로 몸이 떨려 왔다.

“나는 절대 당신에게 안기지 않아요.”

“너무 그렇게 단정 짓지 마. 오기로라도 안고 싶어지잖아.”

네가 울든 말든. 좋든 싫든 간에.

데릭은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한쪽으로 넘겨주었다. 그제야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던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제대로 드러났다.

“이미 네가 이곳에 오는 순간. 로엘. 너는 카이로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신의 씨앗을 심어 버린 거야. 그리고 또 한 번 인식시킨 거지. 너는 이방인이라고.”

이제야 겨우, 참 많은 노력으로 겨우 지워 놓은 그 주홍글씨. 그녀는 카이로스의 사람이 아니라는 그 뼈아픈 약점을 멍청하게도 그녀 스스로 이리 다시 꺼내 놓은 거다.

“에단 카이로스는 너를 황후로 만들고 싶겠지. 그걸 위해 위험한 줄 알면서도 널 이리 데리고 나온 것일 테고.”

데릭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만큼 로엘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막연히 그가 그녀를 부르기 위해 카티로 갔단 생각을 했지만, 그게 단순히 ‘얼굴을 본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야, 이렇게 카티로 와 그와 함께 있는 이 시점이 되어서야 깨달은 거다.

“북방 토르티아의 공주를 카이로스의 황후로 만드는 일. 그건 쉬운 일이 아닐 테지. 카이로스처럼 역사가 길수록, 발전이 깊을 수록, 그리고 풍요가 넘쳐날수록 더더욱 그러할 거야. 카이로스에서 황제 다음으로 높은 그 자리를 외부인에게 뺏기는 기분일 테니. 그 말은 네가 카이로스의 황후가 되는 것을 탐탐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고, 에단 카이로스는 그 모두를 납득시켜야 된다는 의미야. 넌 지금 바로 그들에게 그 빌미를, 그것도 적국의 황제와 내통할지도 모른다는 너무도 막강할 빌미를 내어 준 거야.

이것만으로도 에단 카이로스에겐 배신 아닌가?”

질끈. 로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데릭의 한마디, 한마디가 참 아프게도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팠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여기에 오겠다고 했을 때,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그녀는 정말 한 번이라도 제대로 생각했던가?

그저 그의 승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녀 자신의 복수를 위해 결정하진 않았나?

그녀의 카티 성으로의 발걸음에 다른 오해와 시선이 있을 수 있음을 뻔히 알았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지는 아니하였나?

그렇게 그의 노력을 헛수고로 돌리고, 그 내색하지 못하는 마음을 아프게 한 건 아닌가.

꼭 쥔 로엘의 양 주먹이 새하얗게 변해 갔다.

“결국 너도 명분만 좋을 뿐 전부 널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거다.”

그게 곧, 그에 대한 또 다른 의미의 배신임을 모른 채.

“그럼 카티에서 좋은 시간 보내길. 카이로스의 프란시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데릭의 입술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드러난 목덜미에 올라 그 새하얀 피부에 붉은 생채기를 남겼다. 아 소리 한 번을 못 하고, 짧은 저항조차 못 한 채 로엘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검은 까마귀의 마수에 제대로 걸려들어 버렸다.

***

저녁 어스름부터 내리던 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폭풍 같았던 데릭과의 독대가 끝나자, 짙은 정적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녀의 요구로 다행히 키로스들이 그녀를 호위하고, 그런 키로스들을 테바로스의 황군들이 지켜 섰다. 혹여 데릭이 그녀를 안 놔주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에 비해, 다행히 그는 그녀만의 시간을 주었다. 그 정도의 선은 지키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 마음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마마. 괜찮으십니까?”

긴 침묵을 깨고, 결국 시에라가 먼저 로엘을 불렀다. 그제야 하염없이 비 내리는 창문 밖을 바라보던 로엘의 시선이 시에라에게로 갔다.

“응. 괜찮아.”

그녀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다른 게 있다면 항상 걸려 있던 그 미소가 없다는 정도랄까. 데릭과 어떠한 말을 주고받았는지 시에라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대화들이 로엘의 고민을 아주 깊게 만들었다는 것만은 그녀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습관처럼 짓는 미소마저 사라질 만큼, 그녀는 지금 매우 심각했다.

“……비가 그치지 않네.”

다시금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미 해가 떨어져 깊은 어둠이 내린 카티의 밤. 숲속 꼭대기에 세워진 성답게, 밖에 보이는 것들은 오로지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 제멋대로 높고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뿐이었다. 그 나뭇잎들 사이로 빗방울이 쉴 새 없이 튀고, 간간이 밤새들의 울음이 처량하게 울렸다. 짙은 어둠이 끝없이 이어지는 숲속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다시는 해가 드리우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평생 여기에 발이 묶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비가 많이 와.”

그녀는 또 한 번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비로, 그녀의 발이 묶인다면, 그 역시 발이 묶일 터. 로엘은 데릭과의 대화 중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도 바로 그 사람부터 생각했다.

이동 중인 그가, 저 비를 맞고 어디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나. 카이로스의 부대들은 무사히 진지를 쳤나. 그들에게 감기가 돌지 말아야 할 텐데. 큰 전투를 앞에 두고 괜한 체력 소비를 하면 안 되는데 등등.

에단으로 시작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카이로스에 대한 걱정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데릭과의 추억을 저도 모르게 떠올리면서도, 마음 한켠엔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로엘은 그런 자기 자신에게 속으로 혼자 웃고 말았다.

정말, 그녀는 카이로스의 사람이 다 되었구나 싶어서.

‘좋아하지 않나? 비 오는 거.’

여전히 좋아한다.

비 올 때의 이 선뜻함도. 다른 소리들을 가라앉히는 빗소리만의 정적도. 이 물내음도 전부다 그녀의 기분을 차분히 안정시켰다.

이를 공감해 주는 이가 데릭이었을 뿐. 그 때문에 비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어린 날 함께했던 추억들이 비를 ‘더’ 좋아하게 만들었을 뿐.

그래서 늘 비가 내리면 데릭을 생각해 오곤 했다.

그녀가 아직 평범한 토르티아의 공주님이었을 시절에도. 어느 전장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인 시절에도. 천애고아가 되어 목숨만 부지한 채 탑에 유폐당해 살았던 시절에도.

언제나 비가 오면 그녀는 버릇처럼 데릭을 기억했고, 그런 데릭을 저도 모르게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비를 보며 데릭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안 좋아해. 성가셔.’

‘진짜 낭만 없다.’

‘틀렸어. 성가신 와중에도 비를 뚫고 너를 보러 온, 그 사실이 낭만인 거야.’

그 이유야 너무도 뻔하지만.

‘그러네. 그건 좀 낭만이네. 감동이고.’

그저 데릭과의 추억을 덮어 버릴 만한, 더 크고 소중한 추억이 생겼을 뿐이다.

‘나도 당신을 위해서 비바람을 뚫고 가야겠어.’

‘그 말이 아니잖아.’

로엘은 눈썹을 찌푸리며, 빗물이 튀긴 자신의 옷을 툭툭 터는 그의 모습이 생각나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지독히도 비가 쏟아지던 밤이었는데. 비를 좋아하는 그녀가 밤늦게까지 창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그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비를 뚫고 그녀에게로 왔었다.

‘낭만도, 감동도 다 내가 해. 그러니 너는 네 자리에 있어. 어디든 내가 너에게로 갈 테니.’

누가 보면 한동안 보지 못했던, 아주 먼 곳에 있는 연인인 줄 알겠다고 웃었던 기억마저 생생했다. 말은 그렇게 하여도, 그 말에 꽤나 감동받았던 것까지도 말이다.

지금도 이리 두근두근, 그 말을 하던 그가 생각나 이리 가슴이 뛰는 걸 보면 로엘은 저 말이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늘, 그녀는 그녀의 자리를 지켰음에도 아무도 그녀에게로 와 주지 않았으니.

쓸데없이 애틋했던 그때가 빗소리와 함께 선명히도 떠올라 연신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시에라 역시 작게 미소를 지었다.

데릭과 대면한 이후, 한 번을 웃지 않던 그녀가 진심으로 미소를 짓는 모습에 시에라는 바로 로엘이 지금 황제 폐하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항상 그녀의 곁을 지키다 보니 이제는 시에라마저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주군이 황제 폐하를 생각하실 때 짓는 바로 그 눈과 표정을.

따뜻한 애정이 가득 담긴 저 얼굴. 지금 로엘 님은 황제 폐하를 생각하고 있다.

그 생각이 무엇이든 그로써 그녀가 웃는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시에라는 생각했다.

로엘 스스로 찾아온 카티.

시에라는 로엘이 이대로 주저앉을 거라 생각지 않는다.

“시에라.”

“네. 마마.”

이곳에 오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분명 저 머릿속엔 더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으리라.

“이 정도 빗줄기라면, 황군도 한 번은 쉬었다 가겠지?”

“네. 저희가 카티에 당도하였을 때쯤, 본부대도 이미 토르티아 본성 전의 첫 번째 소성 로티에 당도하였을 테니 거기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시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지.”

그 작은 로티 성의 성주가 에단에게 맞설리 만무하니, 성문은 활짝 열려 있을 테고 이 거센 비를 억지로 뚫고 나갈 이유가 그에게는 없었으므로.

“그렇다면, 우리에겐 아주 잘된 일이네.”

그만큼 그에게, 그리고 그녀에게 시간을 벌어 준 셈이니.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그건 무언가 그녀의 마음에 꽤 마음에 든다는 의미다.

이 표정 역시 시에라가 알고 있는 로엘의 얼굴이다.

“어쩌면 하늘이 도와준 걸지도 몰라. 이 비마저. 그 사람을.”

무언가 그녀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을 때. 그렇게 승리로 걸어가고 있을 때.

그래서 너무도 그녀가 멋있어질 때. 바로 그럴 때, 그녀가 짓는 그 표정이다.

“그렇다면 나도 도와야지.”

아름답고도 위대한 그녀의 황제를 위해.

로엘은 데릭이 또다시 남겨 버린, 자신의 목덜미 위의 붉은 생채기를 손으로 덮었다.

이깟 의미 없는 자국 따위, 며칠이면 사라질 부질없는 것임에도 이 작은 생채기는 그녀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넌 내 거야. 그 누구도 손댈 수 없어.’

그 유치한 말에 진짜 세뇌라도 된 건지. 이 크나큰 죄스러움은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그만. 보이지 않으면 그만.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쉬울 것을, 마음이 그렇게 되질 않았다. 그 때문에 그가 화낼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이번에도 솔직히 말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로엘은 데릭이 자신에게 닿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생채기를 가린 손에, 힘이 들어가고 그녀의 눈이 다시금 차갑게 식었다.

“입으로 전하는 소문이라.”

확실히 그건 무섭긴 하지.

없던 사실을 만드는가 하면 있는 사실을 없애기도 한다.

과한 것을 더 과하게, 덜한 것을 더 덜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게 입소문이란 것.

데릭이 말한, 데릭의 진짜 의도에 솔직히 잠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거기까진 그녀가 생각지 못했던 데릭의 속내였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사실이 사실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야.”

로엘은 조용히 읊조렸다.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거고.”

중요한 건 끝까지 가 봐야 한다.

종국에 웃는 자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시에라.”

“네, 마마.”

로엘의 부름에 바로 시에라는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단순히 자신을 부르는 것이 아님을 시에라도, 그리고 그 뒤의 키로스들 모두 느꼈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마쳤고, 그 생각에 따라 그녀들에게 명령을 내리려 한다.

“다들 카티 성은 처음이겠지?”

그 명령을 받들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그녀들이 그녀와 함께 있다.

“처음이라면 내가 안내를 해 줘야겠네. 그래도 내가 명색이 토르티아 출신인데.”

그녀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좀 전의 긴장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다시금 여유로운 로엘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키로스는 상황과 맞지 않는 그녀의 말이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되묻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를 믿고 그녀의 명을 기다렸다.

모든 생각이 끝났다는 저 여유로운 표정.

처음 뵈었을 때부터 그들에게 보여 준 바로 그 미소다.

“데릭 황제의 말이 맞아.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왔는데, 이렇게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갈 수야 없지.”

그렇기에 그녀의 용기가 만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오로지 하나. 결과만이 중요할 뿐.

“그럼, 우리. 새벽 산책을 가 볼까?”

그녀는 다시금 데릭이 남긴 붉은 생채기를 가리듯 손으로 감쌌다.

이 흔적이 사라질 때쯤. 카티 성 가장 높은 곳에는 황금의 깃발이 흩날리리.

그렇게 그가 가는 길에 빛이 되어 영광을 바치리라.

***

“폐하.”

에단을 부르는 이반의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그가 슬쩍 이반을 돌아보더니 이내 다시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밖을 응시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야 할 거 같습니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닌 듯합니다.”

예상되었던 이반의 보고에 그는 특별히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들어온 성. 하룻밤 쉬어 가는 게 큰 대수랴. 그치지 않거나 비를 피할 데가 없다면 문제지, 그저 하룻밤 지나가는 비고 이렇게 안락하게 머물 곳이 있다면 바쁠 거 없다. 오히려 이리 쉬어 감으로써 병사의 기분을 환기시키고 기운을 차리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비를 좋아해요.’

‘알아. 여러 번 이야기했어.’

그보다는 이 비를 카티에서 보고 있을, 지금은 그의 곁에 없는 그녀가 문제지.

‘폐하가 별로 안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하셨지요.’

‘그러면서 왜 자꾸 이야기하는 거야.’

‘그러함에도 나는 당신이랑 비를 보는 게 좋으니까.’

싱긋 그를 빤히 보며 웃던 모습이 눈앞에 선명했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같은 비이건만, 뭐가 그렇게 좋은지 정말 그녀는 몇 시간이건 비 내리는 걸 바라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아무리 늦어도 비 내리는 밤에는 꼭 그녀에게 가려 노력했다.

분명, 이 빗속을 뚫어져라 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에단.”

묵묵히 비만 바라보는 그를 이반은 또 한 번 불렀다.

이번에는, 신하가 아닌 형제로서.

“걱정되는 거야?”

이번에도 에단은 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반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했지만, 참 멍청한 질문이 아닌가. 어떻게 걱정이 안 될까. 자신도 이리 걱정이 되는 것을.

애초에 무모해도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그래도 믿어. 잘 알잖아. 얼마나 영특한 사람인지.”

“알지.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

그래서 늘 그녀에게 설득당하고,

“너무 강해서 탈이고.”

그 때문에 이리 그의 곁을 떠나니까.

그렇게 그녀의 강함에 그가 의지해 버리고 마니까.

에단은 살짝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댔다.

데릭이 무얼 의도하고 그녀를 부르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 의뭉스러운 자는 그녀가 그에게 왔다는 그 사실조차 이용하겠지. 테바로스는 분명 의도적으로 로엘의 데릭에게로의 행차를 퍼트릴 거다.

제이드 네아레스 딸이라는 환상.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라는 부러움.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녀는 어느새 테바로스가 뺏어 버린 여신님이 될지도 모르지.

그것만으로도 테바로스는 카티를 차지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상징’을 위해 움직였던 그들이 아닌가. 토르티아의 가장 높은 곳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았다는 것. 그렇게 그들이 이번 원정의 들러리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언제든 그들은 토르티아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건 훗날 이 크나큰 토르티아의 영지를 지배한 카이로스에 대한 선전포고일지도 모르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에단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응. 중요한 건, 그게 아냐.”

그리고 그 중얼거림에 이반 역시 중얼거렸다. 그의 마음속 생각이 무엇인지는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제야 에단은, 참 자신을 많이도 아는 자신의 형제를 제대로 돌아보았다. 일자로 다물어진 자신의 입처럼 이반 역시 일자로 입이 다물어져 있었다.

같은 생각을 한다는 거였다.

“중요한 건 그자의 마음.”

이반은 당당히 자신의 앞에서 로엘의 이름을 부르던, 그렇게 마치 자신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듯 구는 그 건방진 태도가 떠올라 저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에단이야 ‘마음’이라는 그 단어만으로도 차갑게 눈빛이 식었지만.

“여전히, 아직까지도 놓지 못하고 있는 그 감정.”

이반은 에단을 응시하였다. 자신과 꼭 닮은 그 황금의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그리고, 자연히 갖게 되는, 남자로서 여자를 취하고자 하는 그 욕망.”

“그만.”

결국 에단이 먼저 이반의 말을 끊었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떠올라 버리는 상상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뜨끈해지는 것이 느껴질 만큼 폭발하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의 품 안에서만 보여 주는 표정. 열기에 가득 찬 목소리. 뜨거운 숨결.

전부 다 오로지 그만이 독점할 수 있다.

그 누구도 감히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간 거야. 너의 프란시아는. 오로지 너를 위해.”

이반은 로엘의 데릭에 대한 마음을 안다.

그저 지나간 인연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함에도 놓지 못하는 그를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마치, 한때 이반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가 과연 이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그녀는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비꼬아 보는 사람들의 질타를 기꺼이 감수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네아는 잘 알고 있어.”

다시는 부르지 않기로 했는데, 결국 나와 버리고 말았다.

이반에게는 참 많은 감정이 섞여 있는 그 이름을.

부르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은 에단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에단에게야 이반이 로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할 테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만큼 로엘이 괜찮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가 올 때까지 조금도 잠을 취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형제를 조금이라도 쉬게 하고 싶었다.

“그 의미가, 데릭에게 안기겠다는 말이 아닌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이반. 선.”

“송구합니다.”

서슬 퍼런 에단의 눈에 이반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이었으면 진즉 목부터 날아갔을 위험한 발언. 오로지 이반만이 에단에게 할 수 있는 그런 말이다.

그래서 이반은 말을 이었다.

“네가 인정하기 싫은, 아니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있지 않은 네아와 그 자식과의 유대를 그녀는 믿고 있는 거야.”

억지로 그녀를 안지 않겠다는, 그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리라는 데릭에 대한 신뢰.

로엘은 그 굳건한 신뢰 아래에 움직였다.

“그게 싫어도, 이번만큼은 너무도 필요하지. 그게 아니면, 아주 큰일 날 테니.”

에단의 표정이 점점 더 살벌해졌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이 죽어 나갈 것처럼 살기가 등등하여 이반은 깊은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말하고 있지만, 정말 위험천만한 말들이다. 황제의 여인은 그 자체로도 금기인 것을. 에단은 정말 많은 것을 참고 있는 중이다.

그걸 표하지 않고, 저리 혼자 꾹꾹 눌러 담고 있으니, 보고 있는 이반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더 그러하였다.

이반은 한 걸음 더 에단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검을 정중히 양손으로 잡아 앞으로 내리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폐하. 당신의 선택은 최선이었고 그 최선을 위해 지금 우리의 프란시아가 홀로 적진에 있습니다. 그분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그분께서 또다시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다주도록 그저 믿고 기다려 주소서.”

예를 갖추어 말하는 이반을 이번에도 에단은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아론이 아닌 이반이 일부러 온 것을 에단은 안다. 이 형제는 이번에도 그를 위로하러 온 거겠지. 위험천만한 발언으로 그의 화를 받을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 그에게 필요한 말을 하기 위해.

그들이야말로 그 정도의 유대와 신뢰는 탄탄히 갖추고 있으니.

“알고 있어.”

전부 다. 이반이 말한 그 모든 것을.

‘나의 폐하. 나의 사랑. 나의 하늘. 토르티아 가장 높은 곳에, 당신의 황금 깃발이 흩날릴 거예요.’

에단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정말 당장이라도 그의 품에 뛰어들 것같이 눈앞에 이리 선명한 것을. 어쩌자고 그리 멀리 홀로 가 버렸나.

황금의 깃발 따위, 어디에서 흩날리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이리 그의 곁에 그녀가 없으면 전부 다 부질없는 것을.

그저 믿고 기다리는 것.

그것 말고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한가.

“실제로 그리하고 있고.”

에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로스의 승리의 여신 프란시아.

그만의 승리의 나무, 월계수 로엘(Laurel).

그에게 승리와 영광을 가져다준다는 그 아름다운 여인은 지금 홀로 무얼 하고 있나.

이 순간에도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나.

그렇게 홀로 고군분투하며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나.

그는 그런 것을 한 번도 바란 적이 없는데. 그저 무사히, 안전하게 그의 곁에 있어 주기 바랄 뿐인데.

“참 말을 안 들어.”

“안 듣지.”

이반의 알 것 같은 반응에 에단은 피식 작은 웃음을 뱉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녀를, 그 누구보다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으니.

무엇에 긁히기만 하여도 가슴이 철렁한데, 이리 홀로 그녀를 원하는 위험한 남자에게 보냈으니 어떻게 걱정이 안 될까.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고 걱정하지 말라는 건 그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다.

“말은 안 들어도, 일은 잘하니 그 또한 문제일 테고.”

이반은 천천히 에단에게로 다가가 에단의 옆에 있는 기둥에 몸을 기댔다.

굳이 에단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로엘이 비를 좋아한다는 것. 이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반과 함께 본 비만 해도 몇 번인가.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비를 보고 있으리라는 것도, 그 비를 보며 오로지 한 사람만을 생각하리라는 것도 이반은 잘 안다.

이반은 슬쩍 자신의 옆에 있는 에단을 보았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 얼굴.

늘 심드렁하던 에단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 그 누가 알았던가.

이반의 얼굴에서 저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러니, 남들은 모르는 무언가 있는 거잖아? 우리의 프란시아와 나의 황제 폐하께선.”

슬쩍만 보던 에단의 눈이 드디어, 제대로 이반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황금의 눈동자에 이반은 씩 웃음을 지었다.

설마 모를 거라 생각했을까.

“어디까지 알고 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어. 하지만 알고는 있지. 나의 형제께서 아무런 준비 없이 모험을 하진 않는다는 것을.”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를 두고.

“그러니 걱정 마. 형제. 언제나 그렇듯 네 선택은 최선이고, 최고의 결과가 뒤따를 거야. 그렇게 너의 프란시아가 네 곁으로 돌아올 테니, 나의 폐하. 이제 그만 좀 주무시죠.”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마지막 한 마디.

에단이야말로 웃고야 말았다. 굳이 그게 무어냐 묻지 않고, 그저 믿으란 말과 함께 잠을 자라는 잔소리를 하는 것이 너무도 이반다워서.

“……그래.”

이반의 말이 맞다. 그는, 그리고 그녀는 지금 까마귀를 잡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녀가 월계수인 이유를 또 한 번 세상이 알게 되겠지.

그를 위해 그는 숨을 죽이고 있는 거다.

아름답게 피울 그녀의 꽃을 위해. 그 승리의 영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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