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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7. 월계수 나무에 까마귀가 머무르는 순간 (58/69)

Chapter 57. 월계수 나무에 까마귀가 머무르는 순간

언제부터 데릭의 상징이 까마귀가 되었나. 생각해 보면 꽤나 오래된 일이다.

데릭의 황자 시절, 데릭은 늘 가장 어려운 적진으로 내몰렸다. 가장 야만적이라 불리는 민족의 침략을 막는다든지, 그들의 도적 떼를 소탕한다든지. 가장 고되고 가장 위험한 그런 일들. 그러나 정작 황권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뒤치다꺼리 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버리는 하늘을 가득 메운 까마귀 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데릭 역시 귀가 아프게 울어 대는 까마귀들을 말없이 응시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규모의 까마귀를 보는 건 꽤나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괜한 옛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이거 엄청 불길한 징조 아닙니까? 까마귀라니. 기분 나쁘게시리.’

‘그 새끼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아무 이유 없이 음침하고, 그렇다니까?’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다섯째 주제에 숙이는 법이 없어.’

까마귀가 왜 모이나. 당연히 피 냄새를 맡고 시체를 뜯어 먹기 위해 모이는 법이다.

데릭의 전쟁에 까마귀가 모인다는 건, 그만큼 데릭이 치열한 전쟁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증거. 그런데 그 피바다 한가운데 살아남은, 어린 황자에게 돌아온 건 불길하고 음침하다는 형님들의 오해와 질타였다. 그때 데릭은 생각했다.

아. 내가 까마귀가 되어야겠구나.

그렇게 저들을 뜯어 먹어야겠구나.

그래야 내가 살고, 그래야 내가 날아오르겠구나.

그 후 데릭은 일부러 까마귀를 불러 모았다. 테바로스처럼 야만족과 국경에 닿아 있는 북단의 전쟁은 중부의 전투보다 치열하고 참혹하다. 항복이란 단어가 없는 곳. 무조건 둘 중 한 쪽은 끝을 보아야만 끝이 났다. 뒤를 남기지 않는 데릭의 전쟁은 더더욱 그러하였고.

데릭은 그 시체들을 쌓아 올려 까마귀를 모았다. 그렇게 그가 다녀갔음을, 그가 승리하였음을 만천하게 알렸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세 번이 열 번이 되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데릭 황자의 지나가는 길에 까마귀 떼가 따라간다고. 그렇게 시체가 쌓여 간다고.

그리고 그 까마귀가 황궁을 향하고 있다고.

북방 끝자락에서 시작한 소문은 살에 살을 붙여 테바로스의 황궁에 닿아 자연히 데릭의 형님들 귀에 들어갔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을까. 그들이 불길하다 조롱하던 그 까마귀들이 진짜 자신들의 불행을 가져온 셈이다.

그렇게 데릭이 황제가 되던 날.

엄청나게 많은 까마귀가 테바로스 하늘을 가득 메워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이 정도면 토르티아에서 볼 사람은 다 보았을 테고, 지금쯤이면 카이로스 부대에도 소식이 들어갔을 겁니다. 꽤나 놀랐을 테지요.”

바로 그 까마귀들이 지금 토르티아의 가장 높은 곳. 카티에서 울고 있다.

그 말은, 카티 성 내에 붉은 머리를 가진 모든 이들이 죽었단 소리.

피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에 데릭은 유유자적하게 토르티아 도성을 내려다보았다.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하여, 저 멀리 모여 있는 토르티아 사람들이 보였다. 카티 성을 가리키며 웅성거리는 것이 이곳까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확실히 테바로스의 이름을 각인시켰군요. 토르티아뿐 아니라 북방 전체에. 어쩌면 카이로스를 비롯한 중부에까지도.”

소문이란 끝이 없는 법이니까. 입에서 입을 타고, 중부 전역으로까지 번져 나갈 거다.

테바로스는 마치 하이에나처럼, 카이로스의 북방 정벌에 발만 조금 담갔다 해도. 그렇게 자신들의 영토만 주워 갔다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테바로스를 그런 들러리로만 세울 거라면 무리하게 이 전쟁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깟 영토 편히 얻은 것은 사실이나, 그건 언제든 전쟁으로 가지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데릭은 그 이상을 원했다. 그리고 그 이상을 얻어야만 했다.

“폐하. 카티 성으로 바로 온 건, 정말 좋은 묘안이셨습니다. 아마 이건 에단 황제도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겠지.”

그 작자가 토르티아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카티를 제대로 알긴 했을까.

그 역시도, 로엘이 아니었으면 전혀 몰랐을 그런 작은 성일 뿐인데.

“도대체 이 생각을 어떻게 하셨어요? 처음부터 염두에 두신 건 아니었잖아요?”

“아니지.”

그저 토일강을 넘어 티벌 근처에 와 토르티아 본성에 가까이 다가가니, 온갖 옛 생각이 떠올랐을 뿐. 그 많고 많던 로엘과의 대화 중에 토르티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었겠는가. 카티 역시 그중 하나일 뿐이다.

‘저게 카티 성인 거야?’

‘네. 저도 딱 한 번 가 보았어요. 마차도 올라가기 힘든 곳이라 직접 말을 타고 걸어 걸어 갔지요.’

‘성보단 요새에 가깝군.’

‘네. 맞아요. 게다가 저 위에서는 토르티아가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더더욱 그렇죠. 여기서도 카티 성이 이리 잘 보이니, 카티 성에서는 토르티아가 얼마나 잘 보이겠어요.’

단지 데릭은 그 기억들을 적절히 사용했을 뿐.

데릭은 그녀와 토르티아 후원을 거닐면서 주고받던 그 당시 상황이 생생히 기억나 피식 웃고 말았다. 데릭은 그 어린 나이에도 그런 시답잖은 대화들을 주고받을 성격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로엘하고는 그런 소소한 대화들이 많았다. 그런 대화들을 주고받아도 한 번도 지루하게 느낀 적도,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그가 테바로스에서 결코 느끼지 못한, 그런 안정감이랄까.

“이제 슬슬 달려오시겠네.”

나의 붉은 공주님.

“어떤 표정으로 오시려나.”

아직까지도 그 밤의 일로 날을 세우고 있으려나.

아니면 그깟 일 아무것도 아니라며 태연히 그를 맞이할까.

그도 아니면 전쟁 중에 멋대로 굴지 말라고 혼이라도 내며 정색을 할까.

무엇이 되었든 데릭을 미소 짓게 하겠지.

무슨 행동을 하든, 무얼 말하든 데릭의 눈엔 전부 예뻐만 보일 테니.

데릭은 몸을 틀어 티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처럼, 토르티아 전역이 이곳 카티에서는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카이로스에 비할 수는 없지만 테바로스보다는 훨씬 비옥한 곳. 산이 푸르르고 하늘이 높은 아름다운 나라. 이 넓디넓은 땅을 그녀는 얼마나 거닐어 보았나.

한때, 데릭은 그녀와 함께 이 땅 역시 다스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렇게 토르티아와 테바로스를 다시금 형제의 국가로서 함께하고 싶었는데.

그 꿈을 그 스스로 깨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의 꿈에서 그녀가 사라져 버렸다.

‘토르티아 제1공주, 로엘 네아레스가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금 그의 눈앞에 나타나더니,

‘프란시아님이다!!!’

다시금 그의 인생에 비집고 들어왔다.

‘황자님. 황제 폐하가 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그렇게 멋대로, 다시금 그로 하여금 꾸지 말아야 할 꿈을 꾸게 만들었다.

데릭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또렷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던 어린 그녀도, 이제는 활짝 핀 꽃이 되어 버린 아름다운 그녀도 전부 다 데릭에게는 그저 소중한 그의 공주님인 것을.

데릭은 지금쯤 카티의 소식을 듣고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을 그녀가 상상이 되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기나 해.”

두 팔 벌려 반겨 줄 테니.

카티 성의 가장 높은 곳. 한바탕 피바람이 분 그곳에서 까마귀는 쉬지 않고 울었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듯. 누군가에게 보란 듯 말이다.

***

“맥스 장군이 전사하였습니다.”

토르티아의 조정이 숙연해졌다. 그리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조지 황제도, 에리카도. 아부하기 바쁘던 원로들도. 무기력하던 토르티아의 장군들도. 전부 다, 오랜 세월 토르티아를 위해 목숨 바쳤던 노장의 마지막을 애도하였다.

“티벌 성이 카이로스에게 넘어갔으며, 오늘 새벽 테바로스 데릭 황제가 카티 성을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애도할 시간마저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연이어 들려오는, 예상되었던 최악의 소식들은 저절로 작은 탄식을 만들어 냈다. 티벌만큼은 오래 버텨 줄 줄 알았는데. 아니 좀 더 욕심을 내자면 티벌에서 그들이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건 부질없는 희망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티벌이 무너졌으면 다음은 당연히 본성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일깨워 주듯 오늘 새벽, 까마귀 떼가 카티 성에서 울지 않았는가.

토르티아의 새벽을 일깨운, 그 기분 나쁜 까마귀 떼들은 여전히 카티 성 상공에서 울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아직도 먹어 치울 시체 더미들이 많다는 거다.

까마귀 떼의 울음소리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로 잠이 깬 이곳의 모든 이들은 창문 너머로 카티 성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저 불길한 까마귀가 곧 불행을 가지고 그들에게로 오겠구나.

그게 카이로스가 되었든, 테바로스가 되었든 말이다.

“카이로스의 군대가 곧 본성을 향해 진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때, 그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아니 무얼 해야만 할까.

아무도 그 말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카티 성이 함락된 이상, 카이로스는 늦어도 일주일 안에 본성에 도착할 겁니다.”

애초에, 그들에게 주어진 답이 없었으므로.

그 답 없는 상황에서도, 결국 총대를 메고 입을 여는 이는 벤이었다.

모두들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그곳에서, 그는 보고한 병사를 물리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모두가 나서지 않는다면 그가 나서는 수밖에.

“토르티아는 총력을 다해, 카이로스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맥스가 가 버리지 않았는가. 치사하게도, 이리 그만을 남겨두고. 먼저 선수를 쳐 버렸다.

티벌 성으로 자청에서 간다고 했을 때, 벤은 속으로 그를 말리고 싶었다. 그 자리가 맥스의 사지임을 누구보다도 벤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내가 늘 말하는 거지만, 원래 내가 너보다 모든 빨랐다고. 하하!’

마지막 술잔이 될 수 있음을 직감한 그 밤. 호탕하게 웃던 맥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맥스의 전사 소식을 누구보다도 빨리 들었던 벤은, 그 보고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많이 눈물을 흘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도 덤덤히 반평생 넘게 함께한 친구의 마지막을 받아들였다.

곧, 자신도 그 뒤를 따를 거란 생각이 너무도 들었으니.

“토르티아 총사령관 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목숨을 다해 토르티아를 지키겠습니다.”

벤은 자신의 손때 묻은 낡은 검을 앞으로 내밀며, 조지에게 기사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의 목소리가 넓은 토르티아의 중앙홀을 울리고, 다른 이들은 왠지 모르게 애처로운 노장의 결의에 침묵으로 비겁한 응원을 보냈다.

외롭고도 고단하여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뜻을 같이하는 동료라도 있었건만.

이제는 홀로 남아 아등바등, 이미 진즉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이곳을 그는 여전히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다.

***

“카티 성은 가는 길이 험할뿐더러, 갈 수 있는 인원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곳으로 황군 전체가 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무의미할뿐더러 지나친 시간 낭비에 자원 낭비예요. 애초에 카티 성은 항복 선언으로 마무리할 그런 계획이었습니다.”

아론과 콜린은 지도를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데릭이 카티 성을 점령함으로써 계획이 또 한 번 꼬여 버렸다.

“데릭 황제의 의중을 알 수가 없으니 그게 제일 문제입니다.”

두 사람에 이어 로엘 역시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일직선으로 본성까지 진격해야 하는데, 중간에 살짝 경로에서 비껴 존재하는 카티 때문에 이 고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카티 성이 지도에 표시된 것보다 훨씬 험하고 높은 곳에 있다는 걸 잘 아는 로엘이라 더 걱정이 앞섰다.

“카티 성을 점령한 의도는 폐하의 말씀대로, 그리고 하는 짓거리를 보니 명확해졌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고 싶을 뿐이에요. 이 전쟁의 승패가 어찌 되든 말이에요.”

“실제로 그 목표한 바를 이루었고. 그것도 아주 요란스럽게.”

이반 역시 그런 로엘의 말을 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불편한 동맹이 있기는 한가. 아니, 이젠 토르티아보다 테바로스가 더 걱정이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제멋대로인 그 젊은 황제 한 명 덕분에 카이로스는 계속 하지 말아도 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반은, 그리고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그 사실에 화가 나는 거다.

“카티 성을 점령하는 데에는 테바로스의 황제 정예군만 간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나머지 병력들은 이미 방향을 틀어 테바로스로 환궁 중이고요.”

“하. 진짜 끝까지 제멋대로네.”

“애초에 테바로스는 토르티아 본성 공격에 참여할 마음이 없었던 거지요.”

“마치 우리가 테바로스의 군대를 쓸 마음이 없었던 것처럼.”

루카스가 볼멘소리를 했다. 테바로스의 동맹을 결정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루카스는 지속적으로 말했다. 자신은 자신의 부하들 이외의 병사를 단 한 명도 쓸 마음이 없다고.

설사 그것이 맨 앞에 세우는 무의미한 화살받이 용도일지라도 말이다.

그런 루카스의 단호함에 아론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내심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략가로서, 그리고 지휘관으로서 루카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으니.

특히 카이로스부대처럼 오랜 시간 함께 훈련하여 손발이 아주 잘 맞는 정예군들일수록 더더욱 외부 인력의 충원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방의 모집병들조차 전선에서 배제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 타국의 병사라니. 그들과 억지로 손발을 맞추려 들었다간 분명 득보다 실이 더 클 것이었다.

“그래도 진짜 웃긴 새끼들이네. 쓰든 안 쓰든 병사는 보내야 하는 거 아냐? 명색이 동맹 협상을 했는데.”

“그러니 안하무인이라는 거지. 나라 간의 약속을 이따위로 어기고.”

그것도 카이로스를 상대로 말이다. 이를 젊은 황제의 패기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만용이라고 해야 하는지. 이 문제에 대해 문제 삼으면 분명 데릭 황제는 뻔뻔스럽게 답할 거다.

어차피 쓰지도 않을 병력 아니었냐며.

너무도 그 오만한 태도가 눈에 훤히 그려져 저절로 카이로스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어쨌건, 지금 카티 성에 있는 병력만으로는 저들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겠지. 그깟 병력으로 우리를 칠 거야, 토르티아를 칠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나 참.”

“딱 거기까지만 하려는 거지. 만천하에 자신들의 이름과 두려움을 알렸으니 그걸로 그들은 족한 거야. 더 이상 얻으려고 들어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더 이상의 비용은 쓰지 않겠다는 거고.”

그러니 어찌나 영악한 자들인가. 딱 자신들이 가져갈 최선만을 최소로 투입해서 가져간 셈이다. 데릭 황제는 뱀 같고 여우 같다는 그 표현이 너무도 정확하다. 이리도 자신의 것을 잘 챙겨가기도 힘들다.

“뭐가 되었든, 카티 성에 있는 테바로스 국기는 내려야 합니다.”

“당연히 내려야지. 아니 당장 내려야지!!”

“그 말을 듣지 않을 거 같으니 이러는 거 아니야.”

아론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이리 대놓고 카티 성으로 오라는 서신을 보낼 정도인데 그들이 퍽도 국기를 내리겠다. 그들의 말 한마디로 내릴 거였으면 처음부터 달지도 않았을 거다. 그러니 문제일밖에.

아무리 카이로스가 토르티아 본성을 점령한다고 할지라도, 버젓이 토르티아에서 훤히 보이는 카티 성에 테바로스 국기가 흩날리고 있을 예정이라는 건데 그것이 말이 되냔 말이다.

“그건, 내려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잠자코 있던 이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무얼 노리고 있는지 뻔히 보여 더 신경을 긁었다. 토르티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곳에 흩날리는 테바로스 국기라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내려야지요.”

그건 로엘 여기 마찬가지. 이반만큼이나 심각한 목소리로 로엘이 단호히 말했다.

이건 자칫하다가 카이로스의 토르티아 정벌 자체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일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위치라니, 그 상징성이 어떠한가. 결국에는 백성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말이 전해지는 게 세상일이다. 이미 까마귀 떼로 시선을 집중시킨 테바로스의 소식이 북부를 넘어 중부에까지 전해질 텐데, 거기에 더해 테바로스의 국기가 끝까지 가장 높은 곳에서 흩날리고 있더라는 소문까지 내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제가 갈게요.”

그래서 로엘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돼.”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바로 에단의 단호한 반응이 나왔다.

“폐하.”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어.”

에단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 표정만큼이나 그의 목소리 역시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상대를 순식간에 긴장시키는 그 매서운 눈에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로엘은 그의 반응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라고 이 반응을 예상하지 못하고 가겠단 말을 했을까.

“제가 가겠습니다.”

“황자님은 안 됩니다.”

물론, 이리 이반이 나서겠다는 거까지, 너무도 뻔히 예상되었던 일.

바로 자원하는 이반의 말을 이번엔 로엘이 단호히 반대했다.

“토르티아 본성에서, 이반 황자님께서 맡으신 역할을 모르십니까? 황자님은 본성 전투의 선봉장이세요. 선봉장께서 어딜 가신다는 거예요.”

“선봉장으로 나선 건 프란시아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맞지요. 그래서 제가 가는 겁니다. 이번 전장의 프란시아로서. 가장 높은 곳의 토르티아를 카이로스의 것으로 돌려놓기 위해.”

에단만큼이나, 그리고 이반만큼이나 로엘 역시 물러설 마음이 전혀 없었다.

만일 토르티아 본성 전투만 아니었으면, 그래. 로엘 역시 이반에게 가라 하였을 거 같다. 그녀 역시 데릭과 마주하는 일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아무도 없이 그녀 혼자 가야만 하는 상황이니 에단이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녀의 일이다.

토르티아 본성에서 이반에게 맡긴 일이 무엇인지, 왜 그가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되는지 로엘은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이반을 선봉장으로 세운 에단의 마음. 그리고 이반이 토르티아 앞에 제이드의 유일한 제자로서 나서는 그 의미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제가 얼른 다녀올게요. 누구보다도 빨리, 확실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항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다 쓸어버릴 겁니다.”

“루카스 장군은 프래카의 수장이십니다. 이 전쟁의 최고 전력께서 지금 폐하의 옆자리를 비우시겠다는 겁니까?”

로엘은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삼켰다. 다들, 지금 너무도 감정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데릭이 그녀의 정혼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절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제가 카티로 가겠다는 것은 데릭 황제에게 옛정을 운운하며 감정을 호소하러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카이로스의 대표로서, 프란시아로서 지금 우리의 전쟁에 누가 되고 있는 이에게 경고를 하고 잘못된 것을 되돌려 놓기 위해 가겠다는 거예요.”

로엘이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 솔직히 모르는 이가 이곳에 누가 있을까.

그저, 그녀의 말대로, 그들의 감정이 불편한 것뿐이다.

“이제 전쟁의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께서 고생을 해 주셨고 그 끝이 눈앞에 보여 가지요. 이제 와서 지금까지의 수고와 희생을 수포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불편한 이는 당연히 에단.

그녀의 올곧은 시선이 에단을 향했다. 흔들림이 없는 붉은 눈동자. 일자로 다물어진 다부진 입. 그녀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거다.

“전쟁은 생명이 걸린 일. 카이로스의 단 한 명이라도 헛된 희생을 하지 않기 위해, 가장 최선만을 선택한다는 것. 폐하의 말씀이셨습니다.”

에단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 정말,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이토록 똑똑한 것이 화가 났다.

조목조목. 하나하나 이렇게 그녀가 따져 들지 않아도, 그녀가 가는 것이 최선임을, 그래서 결국은 그녀가 가 버릴 것임을 그 또한 잘 알고 있다.

“폐하. 허락해 주세요.”

그저 그는 그래야만 하는, 이 상황이 화가 날 뿐.

에단은 목 끝까지 올라온 안 된다는 그 한 마디를 결국 삼켜 버리고 말았다.

“……마음대로 해.”

그는 어쩔 수 없는 이 나라, 카이로스의 황제이므로.

“감사드립니다.”

깊게 허리를 숙이는 그녀를 뒤로한 채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역시나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다.

“폐하.”

로엘의 목소리가 티벌 성의 복도를 울렸다. 그대로 나가 버린 그를 그녀가 바로 뒤쫓았다. 다리가 길기도 하여 보폭이 워낙 큰 그를 그녀는 거의 뛰다시피 따라가고 있음에도 좀처럼 그의 발걸음은 멈춰지질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녀가 달려 나가 그의 앞을 막아 세웠다.

“폐하.”

“나와.”

“에단.”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의 눈이 제대로 그녀를 보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말은커녕 눈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할 차디찬 분위기. 로엘은 냉랭한 그의 눈을 보며, 그가 꽤나 화나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이게 최선인 거, 알잖아요.”

냉랭한 눈빛만큼 차가운 그의 손에 그녀의 따뜻함이 전해졌다. 그를 달래는 부드러운 목소리. 눈을 맞춰 오는 따뜻한 눈빛. 그의 큰 손을 양손으로 꼭 잡는 그 작은 손은 언제나처럼 그에게 온기를 전해 주어 그의 마음을 녹였다.

그래서 그의 속에선 깊은 한숨이 나왔다.

또다시 이렇게, 그녀에게 져 주는구나 싶어서.

“몰라.”

“당신은 알아. 나보다 더 잘 알아.”

그렇게, 그녀를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지에 내모는구나 싶어서.

‘나의 사랑. 나의 폐하. 저의 모든 것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그를 올곧이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결심이 끝나 있었다. 아무리 그가 반대를 해 보았자 결국은 카티로 갈 그녀인 걸 그도 안다.

“그러니 괜찮아요. 나를 보내는 당신의 선택은 정답이야.”

그렇게 그녀는 가고야 말겠지.

에단은 자신의 손에 온기를 주는 그녀의 손을 제대로 맞잡았다.

“보내기 싫어.”

에단의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투정 가득한 말. 로엘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 높디높은 남자가 어제부터 이리 귀여운 투정쟁이가 되셨나.

그 투정 속엔 그녀에 대한 애정과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무사히 다녀올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예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까치발을 들어 살며시 그의 목을 안았다.

주위에 호위병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지금 그런 눈치를 보고 싶진 않았다.

그보다는 마음이 상한 그를 달래 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에단 역시 안겨 오는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마음에 안 들어.”

“뭐가요.”

“전부 다.”

그녀가 이리 영민한 것도, 용감한 것도, 강한 것도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품 안의 꽃이면 좋으련만. 그렇게 성안에서 무사하고 안전하게 그를 기다리기만 하면 다치지도 않고 위험하지도 않을 텐데.

이 여자는 왜 이리 쓸데없이 멋있는 건가.

로엘을 안은 그의 팔에 힘이 좀 더 들어갔다.

“꼭 가야 하나.”

“가야 해요.”

그를 위해. 카이로스를 위해.

그것이 곧 그녀를 위한 일이므로.

로엘 역시 마주 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그녀의 몸을 온전히 덮어 주는 이 넓고 따뜻한 가슴이 언제나처럼 그녀를 안정시켰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 품 안이 그녀를 지켜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 역시 그저 꽃처럼, 이 품 안에 안겨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 살기엔 그녀의 운명이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렇게 그에게 조금이라도, 이 아름다운 분께 도움이 되어야지.

로엘은 그의 품에서 나와 그의 가슴에 턱을 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이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

이 눈빛이 그녀를 향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벅찬지 이 남자는 절대 모르겠지.

“당신이 토르티아 본성에 도착하기 전에 올게. 꼭 그럴게요.”

그 품에 안겨 그녀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진에 홀로 가겠다는 여인치고 지나치게 밝은 그 미소에, 에단은 작은 한숨이 나왔다.

그에게 있서는 그저 보기도 아까운, 귀한 여인.

그런 여인을 홀로 그자에게 보내는 거다.

‘로엘 공주.’

이제는 그만이 부를 수 있는 그 이름. 너무도 자연히 나오는 그 호칭은 그의 신경을 매우 거슬리게 하였다. 데릭이 로엘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 눈 안에 가득 찬, 이 여자에 대한 열망을 그가 제일 잘 알기에 에단은 데릭이 순순히 로엘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카티 성을 점령하면서, 버젓이 보내온 그 서신. 그자는 로엘이 가리라는 걸 염두에 두었겠지.

그렇게 속을 알 수 없는 꿍꿍이를 가지고 그녀를 그에게서 떨어트려 자신에게로 부르는 거다.

그녀가 이리 가겠다고 나설 것을 알고. 카이로스가 이런 그녀를 보낼 것을 알고.

그러기에, 더더욱 에단은 그녀를 보내기 싫었다.

“아니다 싶으면 당장 돌아와.”

“그럴 거면 뭐 하러 거기까지 가요. 갔으면 뭐라도 하고 와야지.”

“아니. 필요 없으니까, 바로 와.”

마음 같아서는 평생, 그 어떤 남자의 눈에도 띄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이 여자는 왜 모를까.

벌써부터 데릭과 그녀가 마주하고 있을 상황을 생각하면 머리가 뜨끈해지는 것 같다.

데릭 테바로스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몇 번이고 그 품에 안겼겠지.

처음 그녀를 인질로 잡아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버젓이 그의 눈앞에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던 모습에 에단은 그 자리에서 그자를 베어 버릴 뻔했다.

“……정말 꼭 가야 하나.”

카티 따위 얼마든지 다시 가져오면 되는 것을.

로엘은 좀처럼 자신을 놔줄 기미가 없는 그의 넓은 등을 토닥토닥 해 주었다.

그답지 않게, 투정이 길었다. 그만큼, 그는 정말로 그녀를 보내기 싫은가 보다.

데릭과 그녀를 엮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동맹보다는 적에 가까운 테바로스에 홀로 보내는 걱정도. 그저 곁에서 떨어트리고 싶지 않은 욕심도. 모두 다 이해가 되기에 로엘은 그런 그의 투정을 그저 받아 주었다.

“가야 돼요.”

그러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모든 마음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못하는 이유가 그녀에겐 있었으므로.

“에단.”

그를 부르는 나긋한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귀 안 가득 울렸다. 품에 안은 그녀로부터 진한 그녀의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고 따뜻한 온기가 그에게로 전해져 왔다.

“나의 폐하. 나의 사랑. 나의 하늘.”

이 여인이 무얼 원하는지. 무엇 때문에 가려는지 그가 어찌 모를까.

“토르티아 가장 높은 곳에, 당신의 황금 깃발이 흩날릴 거예요.”

알기에 더 보내고 싶지 않은 거다.

“다른 그 누구의 것도 안 돼요. 오로지 한 사람. 위대한 카이로스의 황제 폐하의 상징만이 그곳에서 빛날 겁니다.”

그녀의 모든 이유가 결국 그를 위한 것이므로.

“제가 꼭 그렇게 만들겠어요.”

그의 옷깃을 손에 꼭 쥔 채, 단호히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결의에 차 있었다.

그런 그녀를 그는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그녀에게 이런 눈을 하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아무리 그가 그러지 말라 하여도,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라고 하여도 그녀는 멈추지 않을 테지. 당장이라도 그를 위해 기꺼이 죽겠다고 말할 것만 같은 그 붉은 눈동자에, 에단은 그저 그녀를 품에 안을 뿐이다.

부디, 이 작은 여인이 한시라도 빨리 그의 품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며.

***

“배웅해 줄 줄 알았어.”

“그럼 영광이네.”

에단의 마지못한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로엘은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허락받기가 힘들었던 만큼 에단과의 인사는 충분히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더 이상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그녀의 키로스들과 떠나기면 하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레아를 이끌고 길을 떠나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둠 속에서 낯익은 이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반.”

타르타니에 와서 ‘이반’이라는 호칭이 계속 이리 멋대로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야지. 황자님이라 해야 몇 번을 되뇌어도 생각보다도 습관이 먼저 나와 버렸다.

그저 주변에 다른 병사들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곳은 황궁이 아니라는 것. 그 두 가지의 특별함을 내세우며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지만, 이리 아차 할 새도 없이 먼저 나오는 걸 보면 평생 고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다 언젠가는, 이런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는, 그렇게 편히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은 그런 시기가 오겠지.

“정말 혼자 가도 되겠어?”

“너까지 나를 무시할 셈이야?”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이반에게 로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장난이었는데, 그 장난마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지금 이반은 과하게 진지했다.

“따라가려 나온 건 아니네. 복장을 보아하니.”

“따라가도 돼?”

“당연히 안 되지.”

그럴 거면서.

잠시 환해졌던 표정이 금세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투덜거리는 이반을 보며 로엘은 순간 그 모습이 방금 전의 에단과 너무 닮아 속으로 웃고 말았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이런 모습까지 닮았나 보다.

“이건 위험해. 데릭 테바로스가 어떤 자인지,”

“내가 제일 잘 알지.”

로엘은 에단을 설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운 빼서, 이반과도 실랑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바로 이반의 말을 끊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이반 역시 이내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깊은 한숨을 쉴 뿐.

애초에 그에게 붙잡힐 그녀였으면, 에단 선에서 이미 눌러 앉혔겠지.

그렇게 이미 가는 것이 결정되었다면, 이반은 자신까지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보단,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가는 길을 응원할 뿐이다.

“되도록 몸조심 해. 최대한 빨리 끝내고.”

“응.”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오고.”

“지금, 폐하와 엄청 똑같은 거 알긴 해?”

“그럼 형제가 어디 가겠어. 당연히 똑같겠지. “

너무 똑같아서 늘 탈이었지.

이반은 에단을 똑 닮았다는 로엘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살면서 정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말이다. 무슨 사촌들이 이리 닮았냐고. 황금빛 머리카락의 뽀얀 피부하며 예법을 갖춘 걸음걸이. 사교계에서 춤을 추는 모습까지 전부 다.

두 사람은 마치 서로 생각이 통하는 쌍둥이처럼 서로 닮아 있었다.

닮다 닮다 못해, 끝에는 한 여인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이반은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당연히 같지. 우린 형제인걸.”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두 분의 우애.”

“그러니 너를 걱정하는 이 마음도 같은 거야.”

물론 이제는 그 사랑의 형태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로엘에 대한 남매의 사랑을 키우고 있지만.

이반은 언제나처럼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에 툭 얹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니 조심해.”

“응. 너도.”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주는 이반이 손길에는 애정이 담겼다. 그녀를 차분히 안정시키는 그 따스함에 로엘 역시 미소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겠지만, 이반도 로엘도 딱 이 정도만 하였다.

“타르타니는 우리 구역 아니겠어?”

“당연하지.”

그들이 추억이 함께 머물러 있는 이곳.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되돌아가는 데에는 이 아름다운 숲이 많이 도와주고 있었다.

***

“폐하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밑도 끝도 없이 뭘 말하는 거야.”

“로엘 님이요.”

버리는 데릭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 이름을 정확히 말했다. 그의 성격답게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진짜 밑도 끝도 없네.”

그래서 데릭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의 부하지만 참 돌려 말할 줄 모른다 생각하며.

대충 웃음으로 무마하기엔 버리의 표정이 너무 결연하여 딱 보아도 쉽게 물러날 거 같진 않았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말 그대로입니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그분을 데려오실 건지. 그런 생각이시라면 어떻게 데려오실 거며, 어떻게 뒷감당을 하실 건지. 아니면 이대로 혼자 그리워하시며 황후를 들이시지 않을 건지요.”

“와. 너무 쎄다, 이거.”

데릭의 웃음이 한 번 더 나왔다. 오늘만큼은 정말로 버리가 그의 속내를 제대로 들으려나 보다.

“그리고 꽤나 무례야.”

“송구합니다.”

버리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물러날 기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카티 성의 가장 높은 망루에 앉아, 데릭은 계속 카티 성의 길목을 바라보았다. 높고 험한 산지에 있는 이곳으로 오는 유일한 길목을 그는 동이 막 트기 시작할 때부터 달이 떠오를 때까지.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바라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카이로스의 황군은 오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어.”

“이반 황자도 오지 못할 테지요.”

“그러겠지.”

제일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선봉장을 뺄 수 없을 테니.

“같은 의미로 루카스 세버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알아.”

황제를 지키는 검이 전장에서 황제의 곁을 떠날 수는 없으므로.

“그럼 결국 한 분 남는군요.”

데릭은 답하지 않았다. 그 한 사람은 너무도 뻔하니까.

“결국 폐하께서는 그분을 불러들이셨군요.”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속내를 드러내며.

데릭을 똑바로 응시하는 버리의 시선에 데릭은 잠시 침묵했다. 짧은 정적이 카티 성의 망루에 한동안 흘렀다.

버리의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데릭의 눈동자 역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조금은 장난스러웠던 분위기가 가시고 차가운 정색이 감돌았다.

버리가 진지하게 ‘로엘’에 대해 물어 오니 그럴 수밖에.

그에게 있어 로엘 네아레스는 단 한 순간도 가벼운 적 없는, 언제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존재이므로.

“그래. 맞아.”

데릭은 결국 버리의 말에 답했다.

네가 예상하고 있던 바로 그 사실이 맞다고. 버리는 답이 정해져 있던 그 뻔한 대답에 깊은 한숨으로 속으로 삼켰다.

아니길 바랐건만 결국 그거였다.

“오시면 어쩌시려고요. 납치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못 할 것도 없지.”

“폐하.”

“알아. 정색하지 마.”

데릭은 평소와 달리 소리치지 않는 버리의 이 반응이 더 무섭단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눈동자로, 마치 그가 당장이라도 사고라도 칠 것 같이 걱정하는 그 진지함에 도리어 데릭을 수그러들게 했다.

그만큼, 지금 데릭의 생각이 어떠한지가 테바로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거였다.

“카이로스 황제는 절대, 그분을 놔주지 않을 겁니다.”

“그러겠지.”

“그런 분을 테바로스에 데려오신다는 건, 에단 황제와 제대로 부딪힌다는 것이고, 그건 테바로스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한 번 더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는 좀 더 길고, 좀 더 깊게.

신하로서 감히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말. 하지만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현재의 테바로스와 현재의 카이로스를 생각하자면.

“카이로스가 마음먹고 테바로스를 치려 한다면, 테바로스는 카이로스를 막을 수 없습니다.”

많은 희생이 나올 거다. 테바로스는 생각보다 많이 강해졌지만, 카이로스에 비할 바는 아니니까.

이번 전쟁으로도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나.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그 격차를.

“카이로스가 토르티아를 지목한 것. 그렇게 테바로스에게로 향하지 않은 것. 그건 단순히 에단 황제의 선택일 뿐입니다. 그자가 테바로스를 원한다면, 테바로스의 전역은 테바로스인의 피로 물들고 그 위에 황금의 깃발만이 흩날리겠지요. 지금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분. 폐하가 욕심내시는 바로 그분의 가치가 정말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한 것이 맞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뼈아픈 물음.

오늘만큼은 버리가 진심으로 작정하였나 보다. 데릭을 직시하는 버리는 직설적이다 못해 노골적이었다.

데릭이 원하는 바로 그 로엘이 테바로스의 명운을 걸 만한 여인이냐는 그 질문에 데릭은 선뜻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테바로스는 카이로스에게 지지 않을 거란 말도 못 하였으며, 에단 황제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거란 그 말조차 하지 못했다.

구구절절. 버리의 모든 말들이 맞다.

로엘을 데려온다면, 그렇게 그의 여자로 만들어 버린다면 에단 황제는 테바로스를 이 지도상에서 아예 없애 버릴지도 모르지.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건 아니지.”

어떤 여자도 테바로스와 바꿀, 그럴 가치는 없다.

그건 명백한 사실.

“그럼 답은 정해져 있네요.”

버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데릭이 보여 준, 절대 데릭답지 않았던 비이성적인 행동들을 생각해 본다면 버리는 그에게서 다른 대답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심 걱정을 하였는데, 그래도 최악만큼은 피한 셈이다.

“답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어. 내가 계속 다른 답을 찾으려 했던 것뿐.”

문제는 그 최악이 차악이 되었을 뿐이지만. 버리는 깊은 한숨을 삼켰다.

요는 뭐가 되었든 아직 로엘을 포기하지 않으셨단 말씀이므로.

“다른 답이 있긴 한가요.”

“만들어야지.”

이번엔 데릭이 단호히 답했다. 여전히 시선은 카티 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카티 성을 점령한 지 벌써 사흘째. 카이로스의 귀에 들어가고, 그녀의 출정이 결정되어 이곳에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에단 황제가 순순히 허락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로엘이 아닌 다른 대안이 있을 거라 생각지도 않았다.

“그 답. 이번에 만드시는 겁니까?”

“글쎄.”

“폐하.”

또 한 번 낮게 버리가 데릭을 불렀다. 이번에도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도록.

버리는 한 걸음 더 데릭 앞으로 움직여, 자신을 바라보지 않은 데릭의 시선을 억지로 돌렸다. 그러고는 정면으로 자신의 주군을 응시했다.

“제가 아무리 반대를 하더라도 폐하는 결국 폐하의 의중대로 하시리라는 것,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투덜거리면서도 그런 폐하를 믿고 지금까지처럼 따르겠지요. 폐하께서 목숨이 위태롭던 다섯째 황자 시절에도. 즉위 초기 황권이 흔들리던 때에도 그랬듯이요.”

애써 외면하고 싶고, 애써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 그러나, 버리의 말대로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러기엔 이미 그는 충분히 끌어왔으므로.

이렇게 로엘과 재회한 이후에도. 아니, 그보다 훨씬 전 그 수많은 구혼들에도 끝끝내 황후를 들이지 않은 그 시절까지도. 그렇게 데릭이 로엘을 놓지 못하고 있단 사실을, 어쩌면 데릭보다도 그를 옆에서 지켜봐 온 버리가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폐하. 저는 언제나 폐하의 편입니다.”

버리는 이리 카티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로엘에 대하여 절대 불가라는 입장이었다.

솔직히 아주 잠시, 로엘 네아레스란 인물에 대해 욕심이 난 적이 있었다.

‘그분을 부추기지 마세요. 버리 경. 버리 경께서 부추기지 않아도 그분은 나아가고 계십니다.’

너무도 황후에 자리에 어울리시는 분이라서, 폐하의 곁에 있으면 그분께, 그리고 테바로스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 분이라, 버리 역시 한 명의 신하로서 욕심이 났다.

저분이 데릭 폐하의 곁에서 함께 이 나라를 이끌어 주기 바랐으니까.

하지만 카이로스를 보면서, 그리고 에단을 보면서 느꼈다.

그 욕심이 테바로스를 끝장낼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래서 바로 접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데릭을 포기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 굳은 결심은 생각보다도 쉽게 무너져 버렸다.

‘또 여기에 계십니까.’

‘여기가 제일 잘 보이잖아.’

‘토르티아가요?’

‘아니. 카티로 오는 길목이.’

별다른 말이 없어도, 알아챌 정도로 흘러넘치는 마음.

후회하고 자책해도, 하염없이 기다리게 되는 그 마음.

그렇다면, 그 긴 세월이라면, 그 넘치는 감정이라면 그래. 인정해 줘도 되지 않을까.

“폐하. 저는 이번에도 폐하의 선택을 믿습니다. 그리고 따릅니다.”

그렇게 이분이, 나의 주군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버리는 생각했다.

데릭은 말없이 그런 버리를 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저 우직하게 눈앞에 계신 자신의 주군을 마주했다.

그러기에 데릭은 이 충정에 진심으로 답해야만 했다.

“그러니 제게 무슨 일을 계획하시든 말씀해 주세요. 저는 저의 열과 성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그가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마음을.

“설사 그것이, 카이로스의 황후가 될 분을 뺏어 오는 일일지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그와 반평생을 함께한 그의 보좌관이 이 정도로 솔직하게 나오는데, 어떠한 거짓으로 둘러댈 수 있을까.

“……그래.”

언제나처럼, 그의 모든 길에 함께한 자신의 충신에게 곁을 내주고 진심을 보일밖에.

***

“이 무슨…….!”

수아의 격양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리암이 보내온 서신을 읽자마자 표정을 찡그린 그녀는 결국 쾅 소리를 내며 서신을 내리치듯 내려놓았다. 좀처럼 화를 내지도, 흥분하지도 않는 그녀라서, 낯선 그 모습에 베티와 쥰은 눈치가 절로 보였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을 하셔야지. 도대체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거야…….”

수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매일같이 전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나, 리암의 서신만을 기다리는데 티벌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와 조금 마음을 놓고 있었다. 적어도 며칠간은 로엘 님께서 티벌에서 쉬실 거라 생각했으므로.

그런데 웬걸, 갑작스런 서신이 말도 안 되는 소식을 가지고 온 거다.

로엘 님이 홀로 데릭에게 간다는 기가 차는 내용으로.

“수아 님. 좀 진정하세요.”

“네. 폐하께서도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쥰과 베티는 수아가 단번에 들이켜는 바람에 비어 버린 수아의 찻잔에 다시금 차를 따르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건 쉽게 삭일 화가 아니었다.

로엘에 대한 수아의 마음이 끔찍하다는 것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그런 로엘이 사지로 내몰렸다는 소식을 듣고 수아가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그냥 사지인가. 무려 테바로스의 데릭이 버티고 있는 사지다.

매일같이 기도를 드리며 로엘이 무사하기 바라는 수아에게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그러지 않아도 전쟁이 시작된 이후 좀처럼 편히 잠을 못 드는 수아인데, 이제는 로엘이 무사히 본군에 합류했단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 아예 한숨도 자지 못하게 생겼다. 그러니 쥰과 베티로서는 한숨이 나올밖에.

웬만한 연인이 전장에 나가도 이 정도는 아닐 거란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만큼, 수아에게 로엘이 중요한 것을.

“도대체 무슨 장대한 계획이시길래 로엘 님 혼자 카티 성에 가야 하는 건데? 다른 작자도 아니고 그자야. 오만하고 무례한 바로 그 테바로스의 황제. 그 황제가 로엘 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솔직히 다들 알고 있잖아?”

“수아 님.”

쥰은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위험한 발언에 바로 수아를 타일렀다.

카이로스 황제의 여인을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라니.

정말 당장이라도 목이 날아갈 위험한 발언이다.

“데릭 황제는 그런 로엘 님의 유일한 약점이 될 수 있단 말이야.”

수아는 엄지손톱을 살짝 물어뜯으며 말했다.

어렸을 적 고민거리만 생기면 종종 나오던 이 버릇이 이젠 없어졌나 했는데, 이리 다시 손톱을 물어뜯는 모습을 보이시다니.

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지금 수아의 고민은 매우 깊단 소리였다.

“너무 걱정 마세요. 폐하께서도 생각이 있으실 거고, 로엘 님께서도 분명 생각이 있으시니 가신 거예요.”

“맞아요, 수아 님. 로엘 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는 수아 님도 잘 아시잖아요.”

“잘 알지. 너무 잘 알아서 더 걱정되는 거고.”

수아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그 대단함을 모두가 알아서 화근인 거다.

그녀가 얼마나 멋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는지 이미 모두가 알아차려 버린 게 문제다. 그 기대가 한데 모여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기보다 부담을 안겨 줄 테니.

“……폐하께서도 그러하고.”

수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처음 로엘이 키로스를 이끌고 전장에 나간다고 할 때, 수아는 머뭇거렸지만 이내 웃으며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가 걱정되었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대단함이 너무도 멋있어서 보란 듯 해낼 그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니까. 그래서 조심하시라는 뻔한 말을 두 손을 꼭 잡고 말할 뿐이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은, 그녀 혼자 미르로 출정했다는 간이 떨어지는 소식이었다.

그때 얼마나 수아가 후회했는지 모른다. 로엘 님의 출정을 한 번이라도 말릴걸. 아니면, 적어도 폐하의 곁을 꼭 지키라는 말이라도 할걸. 그랬다면 이리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셨을 텐데 하고.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폐하께 놀랐다.

그렇게 로엘 님의 단독 출정을 명하시리라, 수아는 절대 생각지 못했으니까.

“폐하께서는 로엘 님을 지켜 주실 거예요.”

“……그러겠지. 하지만 모든 건 ‘때’라는 게 있는 거야.”

거기에 더해 상황도 맞아야 하고, 운도 맞아야겠지.

이미 로엘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나서 지켜 주겠다고 말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수아는 그것을 걱정했다.

“나는 로엘 님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야. 그저 그 믿음을 넘어서는 불운이 올까 봐, 그걸 걱정하는 거지.”

로엘을 믿는 걸로 치자면 충분히 에단에 버금간다고 수아는 자부한다. 아니, 어떠한 방면에서는 그 믿음이 에단을 능가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 믿음과 로엘의 안위는 정말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서 더더욱 수아는 에단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도 사랑하는 그녀를 그토록 위험한 곳으로, 심지어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보낼 수 있나.

“……그건, 어쩌면 어리광일지 몰라.”

대단한 그녀에 대한, 더 대단하신 그분의 어리광.

그녀는 해낼 수 있다는 믿음. 지금까지 그녀가 해내 온 전적. 그리고 그녀의 의지까지 더해져 에단은 그녀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가 성공만 해 낸다면 그 결과가 결국 최선이므로.

“그걸 매번 해내시니…….”

괜찮다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는 거지.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그녀의 강인함에 에단은 저도 모르게 의지하고 있는 거다.

“……폐하뿐만이 아니지.”

주변의 그 대단한 양반들이 모두 다 그러고 있다. 한 번쯤은 말렸겠지. 아니, 꽤나 강하게 여러 번 안 된다고 했을 거다. 누가 보아도, 객관적으로 그녀에게 위험한 상황이므로. 그러함에도 결국엔, 그들도 로엘을 보내고야 말았다.

그녀가 가겠다는 그 한마디에 기대어.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그녀가 가져올, 그들이 원하던 그 결과를 기다릴 거다.

그러니 수아의 한숨이 깊어질밖에.

“진짜 프란시아님이 되셨네.”

카이로스에 영광을 가져다주는 승리의 여신님.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녀를 의지하고 있으니, 진짜 프란시아가 아닌가.

수아가 그토록 원하던 일이었으나, 기분은 매우 복잡했다.

“……이제 보니 나도잖아.”

“네?”

“나도 로엘 님에게 멋대로 기대 버렸어.”

그분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그분이 짊어질 부담은 생각지 않은 채로, 멋대로 그분을 칼라리엔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을 부린 거다.

결국엔 수아 본인의 자유를 위한 일이면서.

“나도 잘난 듯이 말할 때가 아니었잖아.”

수아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로엘은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욕심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칼라리엔에 되는 것에도, 프란시아가 되는 것에도 한 번을 그러고 싶다 답해 준 적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주변의 기대와 예상에 평소와 같은 온화한 미소만을 지을 뿐.

그분의 마음이 어떠한지 물어본 적은 있었나.

“나도 강요하고 있었던 거야. 혼자 들뜨고 신나서.”

너무 로엘이 좋아서. 멋있어서. 동경해서.

그렇게 멋대로, 그녀의 바람을 로엘에게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뒤늦게 깨달은 그 사실에 수아는 꽤나 충격을 받아 버렸다. 그녀 딴에는 최선과 진심을 다해 로엘을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아 버린 거다.

이건 마치,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황궁으로 보내며 그녀에게 했던 말이 아니던가.

‘이게 다 너를 위해서다.’

그게 본인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수아, 그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알면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수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하얘지도록 꽉 잡은 그 손을, 베티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잡아 주었다. 지금 수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의 오래된 유모는 바로 알아차렸다.

자책하고 후회하는 이 얼굴. 아주 많이 봐 왔으니까.

“수아 님.”

그래서 이번에도 베티는 수아와 눈을 맞추며,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아 주었다.

이제는 그녀의 눈빛만 보아도,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수아의 또 다른 어머니. 베티는 다시 날개를 펴고 세상에 나가려는 자신의 아가씨가 다시금 주저앉기를 바라지 않는다.

“수아 님이 무슨 걱정을 하시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 걱정을 수아 님만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차분히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설득했다.

지금 그녀가 가고 있는 그 길이 맞는 길이라고.

“그건 폐하도, 그리고 폐하의 주변에서 로엘 님을 지지하는 많은 분들의 걱정이기도 하지요. 그러함에도, 모두들 로엘 님께서 칼라리엔이 되길 바라십니다. 그건 결코, 로엘 님에 대한 그분들의 마음이 작아서가 아니에요. 로엘 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두들 생각하고 내린 결론인 거지요.”

수아는 그런 베티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가 기쁠 때뿐 아니라 힘들고 슬플 때도 항상 그녀의 곁을 지켜 준, 그녀의 유모는 언제나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조언의 목소리를 주었다. 리암과 헤어지고 황궁에서 죽어지내다시피 하였을 때에도, 베티는 그저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키기만 했을 뿐.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공허한 위로로 그녀를 피곤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수아를 너무도 잘 알고, 위하는 이가 바로 그녀의 유모다.

“로엘 님은 대단하시지요. 그 대단함에 부응하듯, 그분이 가시려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그 어렵고 험한 길을, 그분은 열심히 나아가고 계세요. 지금까지, 그분의 인생이 그러하였듯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 이 착잡한 마음을 달래 주어 다시금 그녀에게로 제대로된 판단을 하게 만들 이 역시 베티인 거다.

“수아 님. 저는 지금 로엘 님의 운명이 그러하니 괜찮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분께서 그렇게 묵묵히 인내하시는 이유에 대해 말하려는 거예요. 과거 토르티아의 성에 갇혀 계실 때에는, 그리고 이리 카이로스로 오실 때에는 그분의 마음에는 한 가지만이 있었겠지요.”

“……부모님에 대한 복수.”

“네. 그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그분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버티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지요. 그래서 지금, 카티 성으로 가고 계시는 거고요.”

연륜에서 오는 통찰력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수아가 로엘과 가까워지면서, 그리고 로엘을 만나면서 베티는 로엘에 대해 참 많이 보고 들었다. 여러 소문을 건너 듣기도 하였으며, 직접 대면하며 느끼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베티는 늘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이분은 참 단단하시구나, 라고.

“칼라리엔은 달라.”

“다르죠. 그래서 생각해 보았어요. 지금, 로엘 님의 원하는 바가 진짜 무엇일까 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녀는 그녀의 복수만 하면 되는 걸까?

그렇게 그 바람만을 이루면, 그렇게 토르티아가 멸망하면, 그녀는 아무래도 좋은 걸까?

“……아니. 그렇지 않아.”

수아는 나지막이 답했다.

그리고 베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로엘 님의 목표는 그것뿐만이 아니야.”

“네. 맞아요. 지금의 로엘 님은 또 다른 목표가 생기셨죠.”

바로 ‘에단의 곁’에 남는 것.

“로엘 님을 그를 위해 칼라리엔이 되셔야 합니다.”

베티의 말이 묵직하게 수아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동시에 수줍게, 그녀의 앞에서 폐하를 생각하며 미소 짓던 로엘도 생각났다.

‘폐하를 정말 많이 사랑하시는군요.’

‘네. 맞아요.’

그렇다면, 이건 로엘에게도 ‘최선’인 거다.

수아의 어두웠던 표정이 다시금 환해지고, 베티 역시 그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야, 못 할 게 없어.”

“네. 그리고 수아 님은 그를 위해 참 많은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에요.”

수아에게 용기를 주는 베티의 말에 이번엔 수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베티의 손을 맞잡았다.

“고마워. 또다시 애먼 생각으로 풀 죽지 않게 해 줘서.”

“무얼요, 마마. 저는 언제나 마마의 편인걸요”

베티가 그녀의 편인 것, 그렇게 그녀의 곁에 어느 상황이든 지켜 주리라는 것.

누구보다도 수아가 제일 잘 안다. 그래서 이리 미안하고 또 고마운 거다.

수아는 맞잡은 베티의 손에 좀 더 힘을 주어 또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눈으로 했다. 그러면서, 다시금 반짝 눈을 빛냈다.

로엘 님이 카티 성에서부터 무사히 폐하의 곁으로 가실 수 있기를 믿고 또 믿지만, 그 믿음이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그래서 카티를 넘어 토르티아까지 황금의 물결을 이루기를.

그렇게 두 분께서 돌아오실 적에는, 로엘 님을 칼라리엔으로 옹립하는 데에 그 어떠한 장애물도 없기를.

꼭 그렇게 만들겠노라고, 수아는 홀로 한 번 더 굳은 다짐을 하였다.

***

“로엘 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벌써 열 번은 더 넘게 물어 온 시에라의 걱정 어린 말에 로엘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긴장해 있는 키로스들과 달리 너무도 여유로운 그 모습에, 시에라는 마음이 잠시 놓였다가도 이내 걱정만 더 커졌다.

로엘을 너무도 믿는 시에라와 키로스는 선뜻 로엘이 카티 성으로 가겠다는 말에 따라나섰지만, 이리 카티 성을 눈앞에 두고 보니 하나같이 말문이 막혔다. 첩첩산중 속에 우뚝 서 있는 탑과 같은 성. 성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작고 높은 이 영지는 이미 피바다가 되어 있어 먼 거리에서도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저희가 마마를 지키겠습니다.”

“아니. 내가 아니라 너희를 지켜야지. 내 안위는 내가 챙길 테니, 너네는 너희 안위를 챙겨. 내가 너희들까지 걱정하다 위태로워지는 그런 일이 없도록.”

그녀들을 위하는 말이지만, 그 말 속에는 꽤나 묵직한 경고가 들어 있었다.

쉽게 말해, 그녀의 짐이 되지 말라는 소리다.

“네. 마마. 새겨듣겠습니다.”

그 말뜻을, 시에라는 물론 그 뒤를 따르는 키로스 모두가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바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제 안위는 물론, 마마의 안위까지 모두 다. 그 누구도 건들 수 없을 정도로 완벽히 지키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조금 매정하게 들릴지 모르나, 결국엔 그들을 걱정하고 믿는다는 소리이니.

결연한 시에라의 다짐에 로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참으로 시에라다운 대답. 로엘의 마음에 아주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마마. 이제 카티입니다.”

시에라와 이야기를 하며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부터 키로스의 말이 들려왔다.

눈에 카티 성이 보인 지는 꽤 되었으나, 눈에 보이는 것만큼 쉽게 당도하지 않았던 그 카티 성이 이제야 그녀들 눈앞에 제대로 나타났다. 굳게 닫힌 성문을 맞닥트리며 겨우 그녀들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러게. 카티네.”

그녀 역시 고작 한 번밖에 와 보지 못한 이곳. 오랫동안 보수가 되지 않은 흔적이 역력한 낡은 성은 그저 그 높이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오르는 길이 힘들고 힘들어, 또 한 번 와 볼 일이 있을까 했는데 이리 오게 될 줄이야.

이 낡고 효용 없는 성을 지키던 붉은 토르티아의 사람들은 이미 테바로스의 손에 의해 명을 다하였는지, 비릿한 피 냄새와 맞물려 까마귀 소리 이외의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데릭을 상징하는 검은 테바로스의 깃발만이 꽂혀 흩날릴 뿐.

“마마. 제가 먼저 안으로 들……!”

시에라가 그녀의 곁에서 말을 하는 와중, 삐걱 소리를 내며, 낡지만, 거대하기도 한 성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그 문 안쪽에는 무장한 테바로스의 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이 무슨……!”

그들은 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빠져나와, 정확히 로엘을 비롯한 키로스 모두를 에워쌌다. 자연히 키로스 역시 반사적으로 그들에게 검을 빼 들며 로엘을 에워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잔뜩 긴장한 키로스들과는 달리 로엘의 표정은 일말의 변함도 없었다.

마치, 이 정도쯤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는 그런 표정이랄까.

누구든 한 명이라도 먼저 움직인다면 바로 반격할 자세. 잘 훈련된 키로스들만큼 너무도 완벽한 자세로 그녀를 포위한 데릭의 정예군은 생각보다도 더 숫자가 적았다. 딱, 그녀가 데려온 키로스 숫자 정도랄까.

로엘의 주먹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테바로스는 길을 트세요.”

그렇다면 이 인원으로 카티 성을 점령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도 그 빠른 시간 내에. 아무도 모르게.

“다시 한 번 더 말합니다. 테바로스는 길을 트세요.”

비록 로엘 역시, 소수의 키로스를 데리고 미르를 비롯한 그 지방 4성을 점령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엄연히 평지의 낮은 성으로 잠입이 쉬운 쪽이었다. 그에 비해 카티는 들어오는 길목이 유일하여 잡입하려는 순간, 바로 발각이 되어 적들이 벽을 타 보기도 전에 죽어 가는 곳이다.

그렇다면, 이 적은 군사로 어찌했겠는가. 말 그대로, 다른 꼼수 없이 정공법으로 싸웠다는 거다. 아무리 카티 성이 방치된 외딴 성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성을 지킬 최소한의 병력은 배치해 놓았을 터.

다시 말해, 눈앞의 이들은 자신의 열 배 가까운 숫자를 전부 죽이고 나서야 이 성을 점령한 거다. 그러니, 아직도 이 많은 까마귀들이 울고 있는 거겠지.

진동하는 피 냄새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로엘은 여전히 꿈쩍도 안 하는 테바로스의 검은 정예군들를 둘러보며 더더욱 표정을 굳혔다.

“테바로스는 동맹국을 이리 대우하는가.”

딱히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높은 나무들에 둘러싸여 울리는 차가운 목소리.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로서 테바로스에게 명령한다. 당장 나에게 길을 열라.”

작고 여린 체구와 어울리지 않은 그 매서운 눈길에 테바로스의 정예군들도 순간 움찔했다.

눈앞의 이 아름다운 분은 현재 카이로스의 승리의 여신이라 불리는 분.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가히 여신이라 칭할 만했다. 그런 저분이 카이로스의 맨 앞에 서 북방을 넘어 토르티아를 무너트리러 온 거다.

그러니, 북방의 한 사람으로서 두려울밖에.

괜히 저분의 눈에 잘못 들어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틀렸어.”

그렇게 저절로 몸이 굳으려는 찰나, 그들의 뒤로부터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에게도, 그리고 로엘에게도 참 낯익은 그 낮은 목소리는 로엘의 목소리처럼 숲속을 울렸다. 그렇게 데릭이 꿈쩍도 안 하는 테바로스의 병사들을 양옆으로 가르며 나타났다.

언제나처럼 그 시선은 오로지 한 사람. 로엘만을 향한 채로.

“카이로스 프란시아의 명령을 테바로스는 들을 이유가 없거든.”

물론,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했지만.

데릭과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너무도 똑똑히 기억하기에.

전쟁이 시작한 후 그의 행보가 얼마나 많은 수고를 낳았는지 직접 지켜봤기에.

그리고 이리, 테바로스의 사람들로 뒤덮힌 카티 아래에 그가 서 있는 것이 카이로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고 있는지 가장 잘 알기에.

로엘은 데릭을 결코 곱게 볼 수 없었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누구를 볼 때보다도 매섭게 그를 직시하였다.

절대 이 남자의 지저분한 수법에, 음흉한 모략에 말려들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지금 너무 결연한 거 아닌가?”

문제는 그 바짝 긴장한 경계 태세가 오히려 데릭을 웃게 만든다는 거지만.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가 상상한 그대로다.

아무도 없이 그녀 혼자 그녀의 부대를 이끌고 이리 카티의 성에 오른 것도.

오자마자, 테바로스에게 호통을 치는 것도.

그리고 그를 보며 이리 차갑게 정색하는 것까지도.

그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데릭의 자부심이 입증된 그런 느낌이랄까.

눈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이 딱 들어맞아 데릭은 웃기면서도 좋았다.

“테바로스의 군대를 움직이려면, 로엘. 테바로스의 황후가 되면 돼.”

물론, 이리 그를 증오하는 눈빛으로 보는 건 역시나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그런 데릭의 마음을 꽁꽁 숨긴 채로, 데릭은 너무도 평소의 그처럼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와 맞물린, 데릭의 오만한 미소에 로엘은 살짝 마른침을 삼켰다.

홀로 떨어져 있다는 느낌.

이번 전쟁에 출정한 이후 이토록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었나.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세상에, 나 홀로 떨어진 그런 기분이다.

“그래? 그럼 나도 더 이상의 호의는 없어.”

이렇게, 카티에 도착하자마자, 데릭을 마주하자마자 그가 보고 싶어질 줄이야.

“테바로스. 로엘 네아레스를 포박해.”

어쩌면, 그녀야말로 너무 오만했나 보다.

그렇게 데릭을 너무 믿었었나 보다.

그의 본질은 결국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한 황제, ‘데릭 테바로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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