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 까마귀가 날아오를 때
에단의 타르타니가 티벌을 함락시키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티벌의 성 가장 높은 곳에 황금의 깃발이 펄럭였다. 토일강으로부터 일주일. 아주 느긋하고 여유롭게 오던 데릭의 테바로스 부대는 그 모든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기어이 티벌까지 가져가 버리네요.”
한동안 말이 없는 데릭 대신 버리가 먼저 운을 띄웠다.
갓 떠오른 태양 아래, 티벌의 성에 꽂힌 수많은 황금의 깃발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색을 하진 않지만, 내심 버리 역시 많이 놀랐다. 아니, 그 누가 본들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눈앞에서 그 오래된 예언이 실현되었는데.
“……대단하다는 건, 인정해야겠군요.”
동시에 그 예언을 보란 듯 실현시킨, 이 먼 거리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기가 하늘을 찌르던 테바로스의 군대마저도 그 모습에 숙연해질 정도니 말해 뭐랄까. 저들이 적이 아닌 한편이란 사실에 저절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건 인정받지 않은 적이 없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정받았겠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말의 고삐를 움켜쥔 데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또다시 격차가 벌어진, 그런 기분이었다.
그 사실이,
“……좀.”
화가 나려 한다.
아등바등, 죽어라 따라가 보았자 절대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
그는 너무도 손쉽게, 또다시 훌쩍 앞서가 버린다.
그러니 쫓아가는 사람 입장에서 어찌나 기운 빠지는 일인가.
마치 그의 노력과 최선을 비웃음 당하는 느낌이다. 심지어 상대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는데.
“폐하.”
“알아. 무슨 말 할지.”
데릭은 버리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먼저 잘라 버렸다. 이미 토일 성에서 충분히 위로받았고, 충분히 질책받았다.
또다시, 우는 소리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테바로스는 기죽을 시간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그럼요.”
버리는 의외로 담담한 데릭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토일강까지의 전투가 그저 심심하였을 뿐, 그래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시간이 많았을 뿐, 이리 직접 눈앞의 에단 황제를 보면 오히려 데릭은 굳건해지는 타입이다.
주어진 상황에 좌절하지 않는 것. 데릭 황제의 특기 아닌가.
그 힘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이가, 바로 데릭 황제다.
“티벌에서부터 토르티아 본성까지 얼마나 걸리지.”
“직선으로 대로가 뚫려 있고, 소성 세 개 정도가 있지만 카이로스를 막을 규모와 실력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본성까지 가기 전의 바깥 성문의 개념이지요.”
“그렇다면 일주일 안에 당도하겠군.”
“별일이 없다면, 무난하죠.”
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의 계획대로 정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잠시 티벌의 상황에 고전을 한 건 사실이나, 오히려 그 고전이 멋들어지게 역전되어 더 좋은 결과를 낳았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 믿는 백성들에게는 확실한 공포를, 그 공포 속에서 싸워야 하는 토르티아의 병사들에게는 크나큰 사기 저하를, 그리고 에단이 이끄는 카이로스 병사들에겐 승리의 확신을 심어 주었으니. 티벌 전투 하나로 도대체 몇 개를 얻어 간 건가.
“맥스 퓨레 장군은 전사한 거고?”
“예. 마지막까지 티벌 성을 지키다, 티벌 영주가 항복을 선언하자 바로 자결을 택하였습니다. 카이로스에게 붙잡혀 짐이 되느니, 스스로 끝을 선택한 거죠.”
버리는 숙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장군으로서, 그리고 가신으로서 너무도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평생을 한 나라에 목숨을 바친 것도. 그 나라의 끝의 끝까지 지키려 한 것도. 자신의 마지막이 그 나라의 짐이 되지 않길 바라는 것도 전부 다. 버리 역시 가지고 있는 충정이다.
다만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버리는 자신이 존경할 수 있는,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주군을 모시고 있다는 것.
“……끝까지 이 나라에 최선을 다한 겁니다. 비록, 자신의 진짜 주군을 잃어버렸어도.”
그 사실이 새삼 고마워지려 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데릭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데릭은 그저 묵묵히 버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별로 감흥이 없다는 표정이 너무도 데릭다워서 버리는 피식 속으로 웃고 말았다.
원래 충정은 외사랑인 법. 그의 충정은 그의 일이기에, 감상은 그만 접어 두고 버리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엄밀히 말해서, 테바로스의 역할은 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테바로스는 토일강 동쪽을 담당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고 우리는 그걸 훌륭히 해냈으니까요.“
테바로스가 동쪽을 맡아 준 덕분에 카이로스의 북방 진출도 훨씬 수월해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토일강 동쪽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카이로스가 지금 같은 인력과 시간으로 티벌까지 당도할 수 있었을까.
“절대 불가했을 거예요.”
토일 동쪽에서의 기습은 어떻게 감당할 거며, 신경 쓰는 테바로스는 또 어찌할까.
에단 황제가 데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분명히 있다. 그걸 아니, 데릭 역시 카이로스까지 가 이 협상을 따내 온 거고.
“테바로스도, 그리고 카이로스도 적어도 지금까진 원하던 걸 모두 얻은 셈입니다.”
“정확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데릭은 빙빙 돌려 말하는 버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버리는 잠시 뜸을 들이나 싶더니 이내 제대로 데릭을 마주하였다.
“테바로스는 이제 그만 발을 빼죠.”
뒤잇는 말은 역시나 데릭이 예상하던 그대로였다. 이번엔 데릭이 잠시 말이 없었다.
버리가 쉽게 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버리 역시 여러 것들을 고민하고 또 계산하여 내린 결론이겠지. 그 결론은 오로지 테바로스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폐하. 어차피 테바로스는 이번 전쟁에서 토일강 동쪽 지역 이외의 곳은 얻지 못합니다. 토일 강을 기점으로 동맹을 체결하였고, 카이로스가 협상한 그 이상을 내어 줄 리 만무해요.”
“동맹을 운운할 거면, 테바로스는 카이로스가 토르티아를 점령할 때까지 지원해야 해.”
“물론 그렇죠. 하지만 폐하도 아시잖아요. 어차피 저들은, 우리를 사용하지 않아요.”
에단 황제는 처음부터 테바로스 군사를 사용할 마음이 없었다. 이번 티벌 전쟁을 보아하니 더더욱 그러하였다. 자타공인 최강 정예군 프래카와 이 전쟁을 위해 준비된 카이로스의 황군. 그리고 이반이 몇 년을 교육시킨 이반의 북방군까지. 한 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충분하고도 충분한 인력이다.
“보통의 다른 나라 군대였다면 부족한 규모였겠지요. 일단 토르티아의 너무도 광활한 저 땅은 낯설고 척박하기까지 하니까요. 하지만, 카이로스 부대라면 말이 다르죠.”
저 티벌을 무너트린 그들인데 그런 것들이 뭐가 문제될까.
“에단 황제는 그저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고 싶었던 거뿐입니다.”
테바로스가 테바로스의 비용으로 그에게 있어 쓸데없는 땅들을 가져가는 동안 카이로스는 피해를 줄이고 시간을 줄이고 비용을 줄여 토르티아의 심장부까지 치고 들어가기 위해.
“테바로스가 카이로스를 이용했던 거처럼,”
“카이로스가 철저히 테바로스를 이용한 거지.”
데릭의 표정이 굳었다. 카이로스가 무서운 속도로 토르티아를 점령해 갈수록 데릭은 그 사실을 너무도 뼈아프게 깨닫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괜찮은 거래라 생각해 왔는데, 이제 보니 얼마나 에단의 손에 놀아났는가 싶다.
만일 데릭이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렇게 테바로스가 스스로 그들에게 이용당하려 가지 않았다면, 이 남자는 어떻게 했을까.
“……테바로스를 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그 결과는 뻔하디뻔할 테고.
“폐하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버리는 나지막이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데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거 같았으니.
데릭은 그리고 버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말 제법 많이 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나 보다.
“폐하.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버리는 충분히 설명했고, 이제 결정은 데릭의 몫이다.
테바로스는 이미 지쳐 있었다. 개개인의 사기와는 별개로 그들은 너무 오랜 시간 원정을 하고 있었다. 다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겠지. 하지만 그 누구 한 명 그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 테바로스를 위해. 그리고 데릭을 위해.
“……테바로스의 군대는 본국으로 복귀한다.”
“폐하!”
“단, 황군은 빼고.”
“네?”
화색이 돌던 버리는 1초 만에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느라, 그렇게 데릭의 말뜻을 이해하느라 고민을 하더니 바로 사색이 되었다.
“설마 폐하……!”
“그래. 너랑 나는 남는 거야.”
그리고 그 설마 했던, 제발 아니길 바라던 대답이 나왔다. 버리를 보며 씩 웃는 데릭에게 버리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지금 병사 지원도 안 된다고 말하는 판에 황제께서 직접 남으시겠다니. 심지어 그를 지키는 군사들은 죄다 집으로 돌려보내고.
“테바로스는 충분히 할 만큼 했어. 포상은 내가 돌아가서 제대로 한다고 전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왜 아니야. 공을 세웠으면 당연히 포상을 해야지.”
“지금 폐하가 홀로 적진에 가시겠다는 거잖아요!!”
너무도 예상된 버리의 반응이라 데릭은 놀랍지도 않았다. 심드렁하게 고함을 지르는 버리의 말을 대충 흘려 넘기며 다시금 티벌로 몸을 돌렸다. 버리의 한숨이 깊어졌다.
자신이 이리 난리를 쳐 보았자, 어차피 데릭의 마음은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 너무도 뻔하다.
“너도 같이 가잖아. 황군도 데려갈 거야.”
“하아. 차라리 다 데려가세요.”
“그건 안 돼. 누구 좋으라고.”
테바로스 군대가 누군가의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취급 당하는 꼴도 보기 싫고.
“자. 그럼 이제 바삐 움직여야겠지? 총사령관.”
버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무사히, 무난히 이번 전쟁은 끝나나 했더만, 역시나 데릭의 인생에 그런 건 없나 보다.
***
티벌 성의 전투가 일단락되었다. 결과는 당연히 카이로스의 압승.
난공불락의 티벌 성문이 열리지 않아 문제였지, 그 문이 열린 이상 카이로스에게 티벌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 티벌은 이미 카이로스의 깃발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웬만하면 생포하라니까.”
“그럴 새가 없었다니까? 그냥 나를 보자마자, 고민 없이 자기 몸에 검을 꽂았다고. 낸들 그럴 줄 알았나.”
루카스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는 맥스의 시신을 바라보며,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만.”
티벌 성의 가장 꼭대기 성루에서 생을 마감한 맥스는 마지막까지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비록 적일지라도, 그 충성심은 가히 존경받을 만했기에 루카스는 적의 수장에 대한 마지막 예우를 다하였다.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
아론 역시 노장의 고단한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주름진 손에는 끝까지 검이 쥐어 있었고, 피 묻은 갑옷에는 너덜너덜해진 토르티아의 문장이 달려 있었다. 이 사람의 생애가 어떠하였는지, 이 마지막 모습만 보더라도 알 것 같았다.
토르티아의 이름 아래에 희노애락을 다 느꼈을 테지.
기쁜 적이 있는가 하면 슬픈 적도 있었을 거고, 명예로운 순간이 있었는가 하면, 치욕스러운 순간도 있었을 거다. 그 모든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그는 토르티아의 이름 아래 마지막을 고했다.
“무책임한 분이시네.”
모두가 숙연한 가운데,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마지막으로, 에단과 함께 올라온 로엘이었다.
평소의 로엘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이 없는 표정. 목소리. 태도. 차갑게 식은 그녀의 모든 것들이 다른 이로 하여금 더 침묵을 지키게 했다.
맥스 퓨레가 제이드 네아레스의 오른팔이었음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나. 그만큼 로엘에게도 각별한 사람일 거라고 모두들 막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못하였을 뿐.
그런데, 지금 로엘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예상은 아무래도 맞는 듯했다.
“……진짜 무책임한 분이셨네.”
그것도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각별한, 그런 사이.
로엘이 맥스에게로 다가가자 자연히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길을 비켰다.
가지런히 검을 잡은 손이 가슴에 놓이고, 눈을 감고 있는 맥스의 모습을 그녀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맥스를 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암살자들로부터 몸을 피했을 때 그녀는 맥스를 찾았다. 그렇게 울부짖었다.
‘맥스!! 어딨어!!’
그때 그는 어디에 있었나. 항상 그녀를 지키던, 그녀의 삼촌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정말,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나.
“무책임하고도, 비겁한 사람이었잖아.”
그녀는 무릎을 굽혀 앉아, 좀 더 가까이 맥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기억 속 젊은 장군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머리가 희끗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장이 되어 있었다.
이리 가 버리시려고, 그리 매몰차게 구셨나.
이렇게 가 버리시면, 용서는 언제 구하시려고.
로엘은 좀 더 몸을 숙여 제대로 맥스를 마주하였다.
세월이 느껴지는, 고단한 노장의 마지막 표정은 꽤나 평온했다.
너무 평온하여, 조금은 허탈감까지 느껴졌다.
맥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로엘은 생각보다도 덤덤했다.
맥스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이리 만날 줄은 몰랐는데.”
로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맥스가 군대를 이끌고 티벌에 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맥스의 죽음을 예상치 못했나 보다. 그저 막연히, 아주 오랜만에 만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만 하였나 보다.
어리석고도 안일하게.
“……정말 몰랐는데.”
그녀는 살며시 손을 뻗어 아직은 온기가 남은 맥스의 주름진 손 끝을 잡았다.
맥스를 만나면, 그녀는 무얼 하고 싶었나.
화를 내고 싶었나. 그때 왜 그랬냐고 원망을 토해 내고 싶었나.
그도 아니면, 실은 보고 싶었다고. 건강은 어떠냐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안부를 묻고 싶었나.
무엇이 되었든, 이리 가 버리면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얼마나 너무한 사람인가.
“프란시아.”
에단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그녀는 이만 맥스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뒷수습을 부탁해요. 루카스.”
지금 이 감정을 굳이 정의하자면, 그래 슬픔에 더 가까운 게 맞을 거다. 맥스의 죽음을 기뻐하는 건 분명 아니었으므로. 그러함에도 로엘은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로엘.”
“네.”
그래서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부름에, 그녀 역시 여느 때와 같이 답했다. 다가온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그는 더 이상의 말없이 그만 몸을 돌렸다.
이제 그만하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성루에서 완전히 내려갈 때까지 다른 이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할 뿐.
오늘 밤은 아무래도 이 숙연함이 계속될 거 같다.
***
“괜찮아요.”
에단보다 먼저 로엘이 입을 열었다. 맥스와 마지막을 고하고, 이리 티벌 성의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받을 때까지 에단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그녀 곁을 지킬 뿐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로엘은 제대로 그 앞에 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옅은 미소를 짓는 그녀를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내려 보았다. 그 흔한 위로의 말 한 마디, 안타까워하는 눈빛 하나 없었지만 로엘은 이 무뚝뚝함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괜찮아서 나도 놀라고 있어요. 나 생각보다 결심을 단단히 했었나 봐.”
어색한 그녀의 웃음에도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로엘은 애먼 그의 손만 잡고 꼼지락대며 말을 이었다.
“맥스는, 나에게 삼촌 같은 분이에요. 아버지의 친형제 같은 분이라,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제 곁에 계셨거든요.”
맥스의 로엘 사랑은 유별났다. 그녀가 태어날 때도 제이드보다 더 유난을 떨어 정작 아버지인 제이드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갓난쟁이를 보고도 세상 미인이라고 떠들어 댔으니 모두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녀가 커 갈수록 맥스의 로엘 사랑은 더해졌다. 그녀가 실수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동행한 병사를 어찌나 호되게 혼내던지 늘 로엘이 맥스를 말리기 바빴다.
“진짜 철없는 삼촌 같다고 해야 하나. 아마 아버지보다 맥스 목마를 더 많이 탔을 거예요. 걸핏하면 저를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로엘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 버렸다. 정말 오래된 기억이 멋대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공주님. 그냥 결혼 같은 거 안 하시면 안 되나? 진짜 어느 놈에게 주냐고!’
‘안 돼. 나는 벤이랑 결혼할 거야.’
‘벤은 절대 안 되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녀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시절, 그녀와 가장 많이 놀아 준 이가 맥스였다. 아버지는 너무 바빴고, 어머니는 엄했으니까. 물론 아버지와 함께 늘 전장에 나서는 맥스라 그도 바빴지만, 그래도 맥스는 막사에 멋대로 뛰어놀던 어린아이를 항상 반갑게 맞으며 안아 주었다.
“폐하도 알겠지만, 제가 철이 좀 일찍 들었어요. 그런 나를 가장 안타까워하던 사람도 아마 맥스일 거예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티를 내지 못했고, 벤은 원래 말이 적은 사람이니. 맥스는 항상 내 곁에서 철들지 말라고 하던 사람이니까.”
그녀가 어린 나이에 데릭과 정혼할 때도, 대놓고 반대하던 사람이 맥스였다.
제이드마저 황실의 의무라며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는데, 맥스만이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어린애를 데리고 뭐 하는 짓이냐며 뻗댔다.
“어린 마음에 그게 어찌나 고맙던지.”
로엘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럴수록 그의 손을 잡은 손에도 힘이 더 들어갔다.
꼼지락꼼지락. 말을 하면서도 뚝뚝 말이 끊겼다. 그 끊긴 침묵의 시간 동안 그녀의 머릿속엔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지나가고 있을까.
묵묵히 듣고 있던 에단은 그만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전혀 괜찮지 않잖아.”
그대로 그녀를 당겨 그의 품에 안았다. 너무도 익숙한 그의 가슴에 뺨이 닿자, 거짓말처럼 울컥 눈물이 고였다.
“하나도 괜찮지 않아, 너.”
그래서 그녀 역시 그의 허리를 꼭 안아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말 울고 싶지는 않았다.
“아냐.”
그래서 그의 품에서 꾹 참았다.
지금 울어 버리면, 아버지와 어머니께 너무도 죄송할 거 같았다.
“맥스가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우리를 외면했는데.”
어떻게 그 죽음에 눈물을 흘리나.
“그럴 수는 없어.”
어떻게 그 죽음을 슬퍼하나.
“아니, 그러면 안 돼.”
에단의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에단은 자신을 아플 정도로 세게 안아 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울어 버리면 좋으련만.
아마 이 여자는 끝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을 테지.
“그래.”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슬퍼하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화내는 것도. 감내하는 것도 전부 다.
처음부터 그가 도와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이미 수많은 토르티아의 피가 그녀의 손에 묻었고, 이미 많은 붉은 민족의 생명이 그녀의 손에 의해 사그라들었다. 그러함에도, 이건 다르다.
내가 알고 지내던, 내가 믿고 있던, 그렇게 사랑하던 이의 죽음은 확연히 다르다.
어떻게 그것이 같을까. 함께해 온 시간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사람의 기억이란 잔인해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게 두질 않는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외면하던 맥스에 대한 기억도 있지만, 그 이전 그녀를 너무도 사랑해 주던 기억도 있으므로. 한 기억이 생생할수록 다른 기억마저 생생할 테니, 야속할밖에.
그만큼 힘들고, 그만큼 아픈 것은 오롯이 이렇게 홀로 살아남아 기억하는 그녀뿐인데.
에단은 그녀의 품을 좀 더 세게 안았다.
“네가 괜찮으면, 괜찮은 거야.”
그렇다면 안 괜찮아도, 괜찮은 거다. 그녀가 그리하고 싶어 하므로.
“응. 괜찮아요. 정말.”
마주 안은 팔에 힘이 더해진 채,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품에 안았다.
그렇게 로엘은 맥스와의 마지막을 고했다.
조금은 허무하고. 조금은 쓸쓸하게.
그리고 많이 아파하며.
***
“마마. 티벌 성이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마음 졸였는데, 기쁜 소식이구나.”
쥰이 전해 준 카이로스의 승전 소식에 수아의 얼굴에 바로 화색이 돌았다. 수아의 머리를 손질하던 베티 역시 기쁜 소식에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와. 정말 대단들 하시네요! 티벌은 조금 시간이 걸리는 듯하여 마마께서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그러게 말이야.”
수아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로엘이 혼자 미르 성으로 출정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멋지게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혹시라도 로엘 님이 다치셨다든가, 패전이라도 하셨으면 어쩔 뻔했나. 그만큼 폐하께서 로엘 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건 알겠으나, 수아는 조금 불만이었다. 신뢰하는 것과 로엘 님이 다치는 건 명백히 다른 일이었으므로.
“글쎄 폐하께서 숲을 움직이셨다네요? 지금 그 얘기로 다들 떠들썩해요!”
“숲을 움직이셨다고?”
“네!”
쥰은 신나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 머리 손질도 끝난 터라 수아도 제대로 쥰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티벌에는 오래된 전설이 있었는데, 타르타니가 티벌을 덮쳐 오지 않는 한 티벌은 망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래요.”
“그런데?”
“그런데 폐하께서 진짜 그 타르타니 숲이 움직인 거죠!”
수아는 들으면서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까닥하며 베티를 바라보았으나, 차를 따르던 베티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쥰은 좀 더 바짝 다가와 말을 이었다.
“저도 자세히는 듣지 못했어요. 하나같이 그냥 타르타니를 움직였다는 말만 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더라고요.”
“그러겠지.”
방법이야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에단 폐하께서, 정말 신과 같은 일을 하셨다는 거지.
그 비상한 분께서 또 엄청난 묘안을 내셨을 거라고, 수아는 지레짐작했다. 이런 소문일수록 삽시간에 퍼지는 법이다. 어디 토르티아와 카이로스뿐이겠는가. 아마 에단 황제가 일으킨 이 기적 같은 일은 주변 국가로 살에 살이 붙어서 전해질 거다.
그렇게 더더욱 두려움에 떨겠지. 그리고 그건, 이곳 카이로스에서 그에게 조금이라도 대척점을 세우려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그분께서 진짜 신이라도 되면 어쩌나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무엇이 되었든, 다들 무사히 티벌 성으로 들어갔다는 얘기구나.”
“네, 마마.”
“그럼 되었다.”
수아는 베티가 따라 준 차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녀의 안중은 오로지 로엘뿐. 솔직히 폐하께서 얼마나 대단해지시든 말든 상관없었다.
남들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지만, 솔직히 그녀는 이번 전쟁으로 폐하보다 로엘 님이 주목받길 원하였다.
“그럴 절호의 기회인데 말이지…….”
좀 양보를 해 주시면 안 되나. 수아는 살짝 입술을 내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물론, 이렇게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이미 로엘 님께서 자신의 몫을 넘치도록 해 주고 있었다.
“리암에게는 또 다른 소식은 없고?”
“네, 티벌 전투가 조금 오래 지속되면서 연통이 힘들었나 봐요.”
수아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리암은 지속적으로 수아에게 연통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자세하기도 한 설명들 덕분에 수아는 전쟁의 소식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아마 폐하께서 숲을 옮기신 그 비밀도 조만간 리암의 정성 어린 편지 속에 전부 들어 있을 거다.
“티벌까지 왔으니, 확실히 반은 넘었네.”
수아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며 말했다. 로엘이 떠나기 전, 수아에게 전해 준 지도였다. 수아는 펜으로 티벌 성에도 표시를 하였다. 수아의 방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은 이 지도는 전쟁이 시작한 이후부터 한 번을 접히지 않았다.
‘왜 이걸 제게…….’
‘궁금해하실 거 같아서요. 경로라도 알고 있으면 좀 낫잖아요?’
수아는 지도를 쓸며 미소 지었다. 세상 어느 분이 이리 자상하신가. 여인에게 전쟁 계획표를 알려 주며, 기다리라는 멋진 남자는 세상에 없다.
로엘 님이라, 그렇게 기다리는 이의 마음을 아는 그분이라 이리할 수 있는 거다.
“마마는 정말 로엘 님이 좋으신가 봐요.”
“응. 너무 좋아. 남자분이셨으면, 나 리암을 배신했을지도 몰라.”
너무 진지한 수아의 대답에 오히려 물어본 베티가 웃고 말았다. 옆에 있던 쥰 역시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러게요, 마마. 저도 이렇게 마마님의 마음을 가져갈 수 있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맞아요. 그런 측면에서는 진짜, 진짜 로엘 님이 대단하신 거죠.”
수아를 켈트가에서부터 보아 온 베티와 쥰이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오느라 재미도, 의욕도 없이 살아온 수아 켈트를 이 정도로 변화시킨 인물이라니.
이건 그녀가 사랑을 바친 리암과는 또 달랐다.
“응. 그래서 나도 그 대단하신 분을 위해 무어라도 할 거야.”
리암은 그녀로 하여금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살아가게 만든 남자라면, 로엘은 그녀로 하여금 의지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만든 이다.
수아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전신 거울을 통해, 베티가 공을 들여 꾸며 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예쁘네.”
“감사합니다.”
수아의 짧은 칭찬에 베티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수아는 켈트가의 부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 화려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리스 몰브가 워낙 화려하게 하고 다녔던지라, 상대적으로 수아는 단아하고 우아한 이미지가 강했다. 실제로 수아 역시 아리스만큼 주렁주렁 보석을 달고 다니는 타입이 아니라 그편을 더 선호하였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오늘만큼은, 이 나라의 아카시스로서, 그리고 대공 켈트가의 공녀로서 위엄을 보여야만 했다.
“가자.”
“뫼시겠습니다. 아카시스 마마.”
베티와 쥰은 깊게 허리를 숙였다.
모두 각자의 싸움이 있는 법. 오늘 수아는 로엘을 위해, 수아만의 싸움을 하러 간다.
***
“도대체 왜 모이라는 거야? 소식 들은 거 없어?”
“몰라. 이 시국에 모이긴 왜 모이냐고.”
“애초에, 지가 우리를 왜 불러? 너무 웃기지 않아?”
카이로스 후궁의 후원이 오랜만에 소란스러웠다. 수아가 전부 모이라는 명을 내려 황제 폐하의 여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수아가 아무리 숨을 죽이고 살았다 하더라도, 엄연히 황실의 작위를 받은 아카시스. 일개 귀인들과는 격이 다른 지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른이기에 수아의 소집 명령에 그녀들은 응할 수밖에 없다.
“진짜 웃긴 거지. 언제부터 자기가 아카시스 행세를 했다고.”
“막말로 우린 폐하와 적어도 하룻밤이라도 보냈잖아? 수아 님은 그 하룻밤도 없는 거라고. 첫날에 바로 까였으니까.”
“내 말이. 켈트가의 여식이 아니라면 여기에 있지도 못할 주제에.”
“그렇다고 아카시스가 아닌 건 아니지요.”
짜증스러움이 가득 담긴 귀인들의 목소리를 뚫고, 묵직한 수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실컷 뒷담화를 까고 있던 이들은 바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아카시스 수아 님을 뵙습니다.”
어차피 이럴 거면서.
수아는 하나같이 한심스러운 그녀들을 보며 작은 한숨을 삼켰다.
이런 이들이라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황제의 눈 밖에 난 그녀를 뒤에서는 실컷 무시하면서도, 현재 최고 권세가인 켈트의 영애 앞에서는 차마 그러지 못하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 아마 그녀가 사라지고 나면 또 잘난 듯 그녀의 뒷담화를 하겠지. 수아가 죽어 살던 시절, 이들 입에서 그녀가 얼마나 악의적으로 오르내렸는지 그 누구보다도 수아가 가장 잘 알기에 수아의 눈에 이 후궁의 여인들은 조금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 오셨나요.”
“예. 마마.”
그래서 무시로 일관하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말은 어쩌면 저들을 상대하기 싫은 그녀의 변명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로엘을 만나면서 들었으니까. 피하는 것은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 그러니 직접 마주하여 부딪혀야 한다는 것. 로엘이 몸소 보여 주었다.
수아는 천천히 가장 상석인 자리에 앉았다. 오랜 시간 교육받아 기품이 넘치는 행동들은 괜히 사람을 긴장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감정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 그녀의 무표정은 말 그대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앉으세요.”
“네, 마마.”
그래서 괜히 귀인들도 바짝 긴장이 되었다. 이리 수아 켈트와 가까이에서 이야기하는 것, 솔직히 처음인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만큼 수아는 성에 들어와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고, 행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근 로엘 덕분에 그녀가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라도, 어디 수아가 그녀들을 조금이라도 상대해 주었나. 늘 로엘의 옆에서 로엘하고만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는 모두에게 어색하고도 불편했다.
“지금 황제 폐하께서는 카이로스의 오래된 염원. 북방의 정벌을 위해 토르티아와 전쟁 중이십니다. 또한, 아카시스 로엘 님 역시 프란시아로서, 폐하의 곁에서 그런 폐하를 도와 카이로스를 위해 싸우고 계십니다.”
그걸 모르는 이가 여기 어디에 있다고 저리 목소리를 깔고 말하나. 고작 그 얘기 하러 이 많은 이들을 부른 건가 하는 생각들을 하나같이 하고 있었지만, 다들 묵묵히 수아의 말을 들었다. 괜한 소리 한번 했다가 저 차가운 눈초리를 받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폐하의 총애가 없다고 한들, 그녀는 켈트가의 유일한 영애 아니신가.
켈트의 입김이면 그녀들의 가문 하나쯤 어찌 되는 것, 일도 아닐 거다.
그러니 숙이고 또 숙일밖에. 아리스 몰브는 어디 폐하의 총애를 받아 그리 왕 행세를 했었나. 결국에는 권세와 권력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다.
“전장에 계신 분들은 목숨을 걸고, 이 카이로스를 위해 싸우고 있는데 어찌하여 황실의 여인만 이리 편히 지내고 있나요. 이게 과연 옳은 일입니까.”
아주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나왔다. 워낙 수아의 성향을 알지 못한지라 수아가 이리 그녀들을 모집할 때 그 누구도 선뜻 수아의 심중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런 교과서 같은 말이 나올 줄이야. 귀인들의 입가에 슬쩍 비웃음이 올라왔다.
가장 떵떵거리고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 지금 무얼 말씀하시는 건지.
“옳지 않지요. 저희도 당히 무언가를 해야지요.”
그래서 보란 듯, 다시금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네, 지극히 맞는 말씀입니다. 수아 님. 그러지 않아도 저희 가문도 카이로스의 귀족 가문 중 하나로서 크게 지원을 하였지요.”
“저희 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폐하께서 무사하시기를 매일 밤 간절히 기도한답니다.”
조금이라도 본인들 생색을 낼 기회가 오자 그녀들은 기다렸다는 듯 여느 때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물론, 수아가 기대한 그 방향과는 전혀 딴 방향으로.
“우리 다 같이 신전에 기도를 드리러 가는 건 어떨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평소에도 항상 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다같이 가 한마음으로 기원하는 것도 의미가 있으니까요.”
“백성들에게 보이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무얼 얼마나 기부를 하였는지를 가지고 경쟁하듯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수아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작 생각해 낸 것들이 자기 가문의 돈을 쓰는 것과 신전에서 기도를 하는 거라니. 그것도 명분만 좋을 뿐, 지극히 보여 주기 식의 기도인 게 뻔했다.
***
“신전 나들이라니.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이왕 나가는 김에 근처 저희 별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오, 럼브 경의 별장은 유명하지요! 얼마 전에 새로 크게 지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한 번쯤 뫼실려고 했는데, 잘됐…….”
“그만.”
참다못한 수아가 결국 말을 끊었다. 나들이라니. 별궁이라니. 전쟁 중에 나올 수 있는 단어가 맞나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곱게만 자란 영애님들이라고 하나, 이렇게까지 철이 없을 수 있나. 일부러 우리들만 아무것도 안 하고 편히 지낸다는 말을 했음에도 이리 나오다니. 수아는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결심을 굳혔다.
역시나, 이들은 굳이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다.
“폐하께서는 타지에서 밤잠을 설치며 고생하시는데, 지금 별장이라 했습니까? 나들이라고요? 제발 생각들 좀 하고 말하세요.”
정색하고 말하는 수아에게 그녀들은 바로 꼬리를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수아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엄연히 그녀들도 시녀들을 데리고 왔는데, 아까부터 계속되는 수아의 상전 노릇에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어차피 황제의 눈 밖에 나 버린 아카시스.
자신들과 뭐 얼마나 차이 나나 싶기도 하다.
“그럼 아카시스님의 의견을 말씀해 보세요.”
그래서 조금 까칠한 대꾸가 나와 버렸다. 귀인들 중에서 그래도 꽤 상위 계층에 속한 백작 가문의 자제인 그녀는 똑바로 수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한테만 말씀하지 마시고, 수아 님께서 말씀해 보세요. 보아하니 나름 생각이 있으신 거 같은데. 그래서 저희도 이렇게 갑작스레 모이게 한 거 같고.”
“귀인. 예를 갖추세요.”
따져 묻는 듯한 그 당돌한 대답에 뒤에 있던 쥰이 먼저 발끈했다. 비단 아카시스와 귀인의 관계가 아닐지라도, 공작 영애와 백작 영애의 상하가 있건만. 너무도 건방졌다.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수아 님. 지금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잖아요. 그럼 얼른 하세요. 괜히 간 보면서 역정 내지 마시고.”
수아는 작은 웃음을 뱉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귀인들을 쭉 돌아보았다.
한 사람이 총대를 메었을 뿐 모두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인 것이 뻔히 드러났다.
하긴. 그들의 입장에서야 지금 그녀의 이 태도가 얼마나 낯설겠는가. 그동안 죽은 듯 살아온 그녀의 황궁 생활을 기억하자면 우습기까지 할 테지.
수아는 새삼 이 눈 많고 귀 많은 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게 굴어 왔나 뼈저리게 느꼈다.
“로엘 님도 없겠다, 폐하도 없겠다. 그 기회에 괜한 상전 행세하시고 싶으셨던 거 같은데, 그런 거면 저희는 이만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
탕!
큰 소리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들의 몸을 일시 정지시켰다. 들고 있던 부채로 테이블을 세게 내려친 그 소리는 적막한 후원을 울리기에도. 건방지기 짝이 없는 그녀들의 정신을 단번에 휘어잡기에도 충분한 소리였다.
“내가 지금, 장난을 하는 것으로 보이나?”
낮게 깔린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서슬 퍼런 시선이 그녀들을 향했다.
“귀인은 아카시스에게 예를 갖추라.”
짧고 간결한 그 명령에,
“아카시스 수아 님을 뵙습니다.”
꼿꼿하던 그녀들의 허리가 저절로 깊게 숙여졌다.
언제부터 수아 켈트가 이런 눈을 할 수 있게 되었나 하는 두려움을 품은 채로.
수아는 숙여진 그녀들을 내려 보며 한숨을 삼켰다. 이리 조금만 눈에 힘을 주어도 바로 궁지에 몰린 쥐처럼 비굴하게 굴 거면서 괜한 자존심에 허세라니.
수아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던 그 귀인을 바라보면 턱을 괴었다.
상대의 태도가 매우 무례하였으나 오히려 그녀의 그 행동이 수아로 하여금 훨씬 수월하게 운을 뗄 수 있게 만들어 버렸다. 결심은 굳혔으나 전할 방법이 애매하여 고민하던 차에 그녀는 아주 명확한 답을 준 셈이다.
“귀인들은 들으세요.”
괜한 수 쓰지 말고. 애매하게 돌려 말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정면승부하자고.
“아카시스 수아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그렇게 확실하게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키자고.
“모든 귀인들은 폐하의 여인으로서, 이 나라의 어른으로서 영지에 내려가 백성을 다독이세요.”
그렇게 로엘 님을 위한 일을 하자고.
딱 티타임을 하기 좋은 나른한 오후 3시.
간만에 사람들이 모인 후궁의 후원에, 적막이 한동안 흘렀다.
벙찐 그녀들 사이로 수아만이, 환히, 당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이거. 금기 아니에요?”
“누가 그래?”
“그러던데. 지나가는 병사들이.”
“하.”
에단은 머리에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털면서 짧은 비웃음을 뱉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로엘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여분의 수건을 들고 갔으나, 키 차이가 하늘이라 어쩌지도 못한 채 그런 그 앞에 서있었다.
그가 목욕하고 나올 때마다 매번 이러는 그녀의 이 행동이, 그리고 손이 닿지 않아 직접 해 주지 못해 조금은 뾰로통한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 그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없어.”
“아니던데. 원래 카이로스는 옛날부터 전장에 여자를 들이는 걸 금기시했다고……. 그래서 내가 오는 것도, 키로스가 오는 것도 말들이 많았잖아요?”
“그건 그렇지.”
“같은 맥락으로 전쟁 중에 여인을 취하면 부정을 탄다고, 특히 폐하 같은 지휘관이 그러면 더더욱 그러하여 금기시했다고…….”
“그런 거 없어.”
그는 가볍게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여전히 그 앞에서 대기 중인 그녀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순순히 침대맡에 걸터앉자, 그제야 그녀는 들고 있던 수건을 쓸 수 있었다. 그의 배려라는 것을 뻔히 알아, 그녀는 미소 지으며 그의 물기 젖은 머리를 닦아 주었다.
매번 할 때마다 느끼지만, 참 볼수록 신기한 색깔이다. 사람의 머리카락이 이토록 황금빛을 띨 수가 있나.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찬란한 태양 아래에서도, 이리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도. 그녀는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 감촉이 좋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따지면 그 여인에게 모든 패전의 책임이 있는 건가?”
“아니죠. 그걸 알면서 취한 그 남자에게 책임이 있는 거죠.”
살짝 발끈한 그녀의 반응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녀다운 반응이었다.
에단은 이제 그만 그녀에게서 수건을 뺏어 들었다. 평소의 그라면 처음부터 머리를 대충 털고 말았겠지만, 혹여나 같이 잠드는 그녀에게 한기를 줄까 싶어 그녀가 곁에 있는 밤이면 열심히 물기를 제거했다. 물론, 그녀가 직접 이리 그의 머리를 만져 주는 것도 기분 좋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안아 당겼다.
“전쟁에 여자가 없는 역사가 어디 있어. 어딜 가든, 어느 원정이든 여인은 있었고, 그 수많은 여인들 속에서도 나는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어.”
“……당신의 여인도 있었나요?”
“아니. 난 전쟁 중에 절대 외부 사람을 들이지 않아.”
그 여자가 어디 출신인지 무얼 가지고 있는지 어찌 안다고 그 위험한 짓을 할까.
에단은 그런 미련하고도 무모한 짓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애초에 전쟁 중이 아니어도, 나는 원래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너한테만 아니겠지.”
그녀의 가는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이 좀 더 들어갔다. 너무도 정답을 말한 그가 예뻐,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가 그녀 외에는 아무도 곁을 주지 않는 것.
그건 로엘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 너무도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전쟁 시작하고 곁에도 안 오셨으면서.”
“그래서 나의 비께서는 외로우셨나?”
“나의 황제께서 외로우셨겠지요.”
가볍게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히는 그에게 몸을 맡긴 채 그녀는 그의 뺨을 감싸며 말했다. 커다란 침대 위에 그녀가 곱게 눕고, 그 위로 그가 올라섰다.
아. 이리 가까이 두 눈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 너무도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어 심장이 두근댔다. 이미 그가 오기 전에 깨끗이 목욕을 마친 그녀에게서는 좋은 향이 나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떨려 한다는 것이 고스란히 그에게도 전해질 만큼, 조금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처음 오는 낯선 환경. 평소와 다른 침실. 거기에 너무도 오랜만에 만난 연인까지.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충분히 설렐 만한 상황이다.
“그건 어쩔 수 없었어.”
“설명하지 않으셔도 알아요. 폐하께서 왜 그러셨는지.”
설마 그걸 모를까. 그녀의 프란시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데.
그는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던 그녀의 한 손을 자연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는 괜찮다는 것도 알겠네.”
“아니, 그건 아니죠. 여전히 전쟁 중…….”
“이나, 이미 증명이 되었지. 나의 프란시아는 나의 인형 따위가 아닌, 스스로 일어나 승리를 가져다주는 진짜 프란시아라는 것을.”
그러니 그 많은 이들이 그녀의 존재에 그리 환호하고, 안도하며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나는 프란시아에 대한 예우와 배려를 충분히 했어.”
그렇게 좋아하며 그녀에게 승리를 애원하겠지. 마치 진짜 여신이라도 되는 듯한 눈과 표정으로. 울먹이며. 진심을 다해, 진지하게.
그것이 이 작은 여인에게 어떠한 부담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면서.
“그러니 오늘 밤은, 다시 나의 아카시스로 돌아와.”
그에게는, 그저 작고 여린 그의 여인인 것을.
에단은 미소로 대신하는 그녀의 대답을 진한 키스로 화답했다.
많은 생명이 사그라든 티벌의 밤.
오늘 그는 밤새 그녀를 위로해 주려나 보다.
***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고 제대로 목욕이라는 것을 한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물론, 에단이나 로엘 같은 황족 같은 경우야 전장에서도 간이 시설을 만들어 씻을 수 있었다만, 그런 것하고 한 성주의 욕실이 같을 수는 없었다. 한 깔끔을 떠는 에단에게 전쟁 중 가장 힘든 게 무어냐 묻는 다면 그는 바로 씻는 걸 들지 모른다.
“당신, 목욕한 게 기분 좋구나.”
그 상쾌함이 너무 얼굴에 드러나 로엘은 웃고 말았다.
“맞아.”
그 역시도 그 사실을 너무도 순순히 인정했다. 딱히 부인할 이유도 없었으니.
“물론, 가장 좋은 건. 내 눈앞에 있는 여신님을 안는 거지만.”
“어우. 그렇게 부르지 마요. 너무 민망해.”
진짜 싫은지 학을 떼는 그녀의 반응이 그의 눈엔 오히려 더 귀여웠다. 그는 부드럽게 자신의 밑에서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 그녀의 앞머리를 쓸었다. 전쟁 내내 바짝 높이 묶은 머리가 지금만큼은 자연스레 풀어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훨씬 편해 보여 한결 나았다.
“사실이잖아. 여신 프란시아님.”
“으으. 그만해요, 진짜!”
그를 힘껏 흘겨보았자, 그가 꿈쩍이라도 할까. 그의 입가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그는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춤에 있는 원피스 리본에 손을 올렸다.
“왜 그러실까. 나는 진짜 여신님이라도 품에 안는 거 같아, 좀 흥분되는데.”
“어휴!”
그의 짓궂은 농담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수줍은지. 여전히 소녀 같은 모습이 한가득이라 그 모든 행동들이 전부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물론, 비단 귀엽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난 여신님이 아니에요.”
스르륵. 그가 느릿하게 리본을 당기자 리본은 힘없이 풀어져 아래로 떨어졌다.
두껍고 무거운 갑옷으로 한동안 꽁꽁 숨겨 두었던 그녀의 속살에 한기가 돌자, 바로 그녀의 얼굴이 좀 더 붉어졌다. 그만큼,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미소엔 사랑이 더해졌지만.
“그저. 사랑하는 이에게 안기는 한 명의 여인이지.”
로엘은 손을 들어 그의 목을 살며시 안아 당긴 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금의 과감하게. 그리고 야하게.
“지금 이 순간. 나의 위대한 폐하께서, 황제가 아닌 내 남자인 거처럼.”
말을 어떻게 이리 예쁘게 하는 건지.
고작 몇 마디로써 그를 이렇게 웃게 만드는 이는 온 세상에 오로지 그녀 하나뿐일 거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예쁜 말만 하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으응.”
살짝 열린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서로의 열기를 나누었다. 티벌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충분히, 회포를 담은 키스를 하고 또 했지만, 그런다고 한들 그 부족함이 채워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하아. 에단.”
그래서 더더욱 서로를 갈구했다. 그가 드러난 그녀의 하얀 몸에 진한 흔적을 남길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애타게 그를 찾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전히 물기가 어린 그의 황금빛 머리를 부드럽게 안으며, 그녀는 그런 그의 향기를 만끽했다. 그가 곁에 있다는 이 안도감. 그녀를 단단히 안아 오는 이 팔과 가슴에 모든 불안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읏……!”
그의 손이 거침없이 그녀의 드러난 가슴을 움켜쥐고, 그의 뜨거운 혀가 이미 단단해진 그녀의 정점을 머금었다. 그러자 바로 그녀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가 유독 가슴에 민감한 만큼, 그 역시 유독 그녀의 가슴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한다. 일부러 그녀의 분홍 돌기를 튕기며, 지분거리는 그 짓궂은 애무에 그녀의 중심은 진즉부터 뜨겁게 차올랐다. 이를 모를 이 없는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오므리는 그녀의 반응에도 물러서지 않은 채 집요하게 그녀를 불두덩을 헤집었다.
“아. 에단…….”
그를 찾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이 목소리도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른다. 프란시아로서의 그녀의 위치가 혹여나 그로 인해 흠집이 날까 싶어 멀리했던 그 시간. 본래는 토르티아 정벌이 모두 끝날 때까지 참으려 했으나, 역시나 그건 무리였다.
이 한 달도 얼마나 애가 닳았는가.
눈앞에 있는 그녀에게 닿지 못하는 것.
그건 생각 이상으로 짜증 나는 일이었다.
“로엘.”
그래서 그는 원껏 그녀의 몸을 탐했다. 그의 손은 그녀의 몸 구석구석 열기에 열기를 더해 갔다. 그녀의 향기에 그의 향기가 덮이는 그런 기분이랄까. 이 달콤함이 그로 인해 좀 더 진해지는 이 쾌감은 절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거다.
“으읏!”
그의 손이 마지막 남은 얇은 천을 헤쳤다. 이미 열기가 가득한 그녀의 뜨거운 샘을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단번에 파고 들어가자 익숙한 뜨거움이 그의 긴 손가락을 감쌌다. 그 끈적임을 헤치고 그가 그녀의 약한 부분을 찾아 움직이자, 반복적인 움직에 맞추어 짙은 물소리가 울렸다.
“하아……. 에……단……!”
그를 찾는 그녀의 목소리가 좀 더 농후해졌다. 손가락만으로는 부족하고도 부족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눈물이 어렸다. 그 모습에 그는 바로 걸리적거리던 마지막 천조각을 완전히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러자 새삼 환한 불빛 아래 온전히 나신이 된 자신이 부끄러운지, 그녀는 다리를 웅크리며 몸을 뒤로 뺐다.
“몇 번을 말하는 거야.”
그 모습은 남자에게는 너무도 위험천만했다.
“그게 더 역효과야.”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는 그녀의 무릎을 잡아 열고 그대로 잔뜩 성이 난 자신을 그녀의 안으로 밀어붙였다.
“윽!”
너무 오랜만에 들어차는 뜨거움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꺾었다. 등이 활처럼 휘면서 고개가 젖혀지자,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런 그녀의 뒷목을 잡아 받쳐 주었다.
“하아, 로엘.”
“아…… 읏……!”
그녀가 오랜만이라 버거워하는 게 느껴졌으나, 그 역시, 너무도 오랜만이라 통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단번에 그녀의 안으로 끝까지 들어가, 그녀의 안을 가득 메웠다. 두근두근. 그의 중심의 빠른 혈류 흐름이 고스란히 그녀의 내부에 전해지고, 그녀의 샘이 더욱 뜨겁게 차올라 들어온 그를 놔주지 않았다.
“아. 앗. 아앗! 에……!”
여기는 카이로스 성이 아니라고. 지금은 전쟁 중이라고. 수없이 되뇌어도 멋대로 질끈 깨문 입술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매번 그렇듯, 이리 그가 그녀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에는 그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온통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기분.
로엘은 자신의 안을 뜨겁게 두드리는 거친 그의 움직임에 쾌락의 울음을 터트렸다.
“좀. 천. 천히……! 읏!”
“그런 거 못해.”
지금도 충분히 참고 있다는 걸 왜 모를까.
마음 같아서는, 정말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원껏, 멋대로, 엉망진창으로 안고 싶다는 것을.
그녀에게 최대한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자신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그의 팔뚝에 핏줄이 섰다. 힘 있게 움직이는 만큼, 긴장한 근육이 도드라졌고, 그만큼 그를 잡는 그녀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에단. 에……단……!”
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좀 더 잦아지고, 그의 주기적인 움직임에 맞추어 그녀의 허리도 움직였다. 그에 의해 흔들리는 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는 모르겠지.
“로엘……!”
그녀를 찾는 그의 목소리에도 이미 이성이 날아간 지 오래였다. 완전히 열린 그녀의 허벅지를 들어 올려 그는 조금이라도 더 그녀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몸을 밀착시켰다. 미칠 것 같은 쾌감이 온몸을 휩쓸어도 좀처럼 숨이 죽지 않던 그의 열기는 그녀가 항복을 선언하며 애원할 때가 되어서야 끝을 알리는 마지막 속도를 올렸다.
“아! 으읏!”
속살과 속살이 끈적한 마찰 소리를 내고, 그 소리에 맞추어 커다란 침대가 들썩이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로엘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진한 키스를 해 주는 그를 온연히 받아들이며 그의 목을 꼭 안았다.
“아아……!”
그렇게 자신 안에 들어차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그녀는 그의 품에서 긴 울음을 터트렸다, 그의 뜨거움이 그녀의 안을 가득 채울 때까지, 잘은 진동이 이어지고 그녀는 마침내 그의 목을 안은 팔에서 힘을 풀었다. 긴 교성을 터트린 후에야 겨우 늘어지는 그녀의 몸을 그녀는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
“괜찮아,”
그리고 토닥토닥 가쁜 숨을 고르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북방 정벌을 시작한 지 이제야 한 달. 그녀에게 있어 아픈 생명 하나가 사그라든 밤.
그는 일부러 그녀를 품에 안았다. 생각도 많고 감정도 많을 이 밤. 조금이라도 그로 인해 편히 잠들라고. 그렇게 조금이라도 잊기를 바랐으니.
“괜찮아. 로엘.”
그 마음을 그녀가 어찌 모를까.
그의 배려임을 너무도 잘 알아서.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그라서 그녀 역시 그에게 안겼다. 그렇게 그에게 투정을 부리고, 위로를 받았다
“응. 괜찮아요.”
로엘은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들리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이만 눈을 감았다.
부디, 이 밤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어디에서 뭐를 해?”
“들은 그대로야. 데릭 황제가 카티 성을 점령했다고.”
아론의 어이없다는 질문에 루카스는 짜증스럽게 다시 답했다. 루카스 역시 오늘 새벽에 들어온 급보에 자다 말고 급하게 뛰쳐나온 터였다. 물론, 그건 아론 역시 마찬가지였고.
아론은 급하게 나오느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허리띠를 제대로 동여매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게 말이 되냐고? 카티 성이면 티벌 성을 통과해야 하는데, 어떻게 토일 강에 있던 데릭 황제가 카티 성을 점령해?”
루카스며 아론이며 할 거 없이, 전쟁 내내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티벌에서 잠시 병사들의 체력을 보충하고 가자는 에단의 명에 따라 두 사람도 전쟁 이후 겨우 제대로 잠을 자 보려던 거였는데, 그새를 못 참고 또 이리 일이 터져 버린 거다.
“여기서 더 짜증 나는 건 뭔 줄 알아?”
그것도 아주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적 같은 동맹.
그놈의 데릭 황제 때문에.
“그걸 잘난 듯 지들이 먼저 알려 왔다고! 서신 한 장으로!!”
루카스는 데릭 황제의 문장이 명확히 찍힌 서신을 책상에 쾅 소리 나게 내려치며 말했다. 아론은 바로 그 서신부터 들어 읽었다. 루카스의 말대로 별다른 설명 없이 자신들이 카티 성을 점령했으니 이리로 오라는 소리였다.
“진짜, 이 새끼들 너무 건방진 거 아니야? 어디서 오라 가라야! 심지어 거긴 지들이 점령해야 할 곳도 아니었잖아!”
아론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카티 성은 티벌 성에서 토르티아 본성까지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성들 중 하나이다. 토르티아 본성까지 가는 데에는 총 세 개의 작은 성들을 더 거쳐야 하는데, 그중 가장 큰 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곳. 지금 그곳이 하루아침에 데릭에게 넘어갔단 소리다.
“카티 성이 넘어갔다고?”
“오셨어요.”
아론에 이어, 이반과 콜린도 급하게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오자마자, 이반과 콜린은 카티 성 지도부터 살폈다.
“솔직히, 우리 모두 카티 점령에 어려움을 예상하지는 않았잖아.”
“그러기엔, 지금 토르티아 상황이 너무 궁지에 몰렸으니까요.”
게다가 토르티아 조지 황제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카티 성은 토르티아가 포기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 겁쟁이는 고민 않고 본인이 있는 본성에 집중할 테니.
“그 예상이 정확히 맞았네. 이리 소리 소문도 없이 데릭 황제의 손에 카티 성이 넘어간 것을 보면.”
이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갈수록 계획에 없던 변수가 생겨났다.
물론, 변수가 있다 하더라도 에단이 워낙 대처를 잘해서 지금까지는 탈이 없었으나, 아니 어쩌면 더 좋은 결과로 흘러갔으나 그것에 언제까지나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식이면 매우 곤란한데.”
“네. 곤란하죠. 그것도 이렇게 한 사람에 의해 계속 변수가 생긴다면 더더욱.”
이반의 나지막한 말에 옆에 있던 콜린이 동의했다. 처음 시작부터 데릭 황제의 계획에 어긋난 전투 시간표가 모두의 시간을 당겨 놓았다. 결과적으로 카이로스 모든 부대의 성과를 극대화시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변명일 뿐. 이건 결코 옳은 방식이 아니다.
“카티 성이 넘어갔다고요?”
마지막으로, 로엘의 목소리와 함께 에단이 회의실에 도착했다. 심각한 표정의 로엘의 뒤를 이어,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의 에단이 들어오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에단과 로엘은 바로 데릭 황제의 서신부터 보았다.
“이게 언제 도착했다고요?
”바로 보고드렸으니, 1시간도 되지 않았습니다.”
에단은 들고 있던 데릭의 서신을 대충 던져두고 자신의 앞의 지도를 살폈다.
“정찰부대는?”
“바로 보냈으니 오전 중으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조금이라도 보고할 것이 있으면 바로바로 소식들을 전하라고 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에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큰 전투를 치르기 전에 병사들을 좀 쉬게 하려 했건만, 데릭의 독단 행동이 멋대로 그의 계획을 제대로 어그러트렸다.
그 사실이, 에단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지금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데릭의 심중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에단도 정확이 알 수는 없다. 워낙 의뭉스러운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속마음을 쉬이 내비치는 성격의 인물도 아니었으므로.
그런 데릭을 이 판에 끌어들이는 이유는 분명 명확했다.
첫째는 그자와 테바로스가 카이로스에게 득이 된단 사실이고, 둘째는 그의 계획 선상 위에 올려 둠으로써 그를 어느 정도 통제코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토록 제멋대로 날뛸 줄이야.
“……거슬리네.”
그의 낮은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고작 네 음절의 그 짧은 한마디에 순간 적막이 흘렀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대 놓고 불쾌감을 드러낸 거다.
이럴 경우, 대개는 피바람이 불고 끝이 났으므로 자연히 긴장부터 되었다. 이러다 조지 황제의 목이 날아가기 전에 데릭 황제ㅋ의 목이 날아갈 거 같아서.
“만일 티벌을 거치지 않고 카티로 향했다면, 소수 부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커요.”
그 적막을 깬 것은 다름 아닌 로엘이었다. 지금껏 묵묵히 듣고만 있던 로엘은 다른 이들이 에단의 눈치를 보는 동안 조용히 지도를 살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넓은 타르타니에서 길이야 얼마든지 다양하게 개척할 수 있어요. 돌아가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 가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요.”
“대신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얼마나 힘든지는 다른 문제지요.”
“얼마나 많은 이가 지나갈 수 있느냐의 문제도요.”
로엘은 자신의 말에 이어 말하는 이반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지금 이반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미 알 거 같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계속하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즉, 카이로스가 일부러 공략하기 어려운 티벌의 경로를 선택한 것은, 카이로스의 병력이 지나치게 많다는 이유였어요. 그런데, 데릭 황제가 이렇게 티벌을 거치지 않은 채 카티로 향했다는 것은…….”
“티벌의 경로를 통과하지 않을 만큼, 매우 소수의 부대라는 거네요.”
“네, 맞아요. 루카스. 그러니 더 위험한 거예요. 그 소수 부대를 가지고, 이리 아무도 모르게. 순식간에 카티 성을 가져가 버렸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카이로스의 뒤통수를 치면서.
로엘은 가만히 데릭이 보내온 서신을 한 번 더 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필체로, 카티에 있으니 오라는 그 내용은 심히 건방지고 무례했다. 이리 직접 점령 사실을 알리고 초대를 하는 걸 보니, 아직 동맹을 깰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더 골치가 아플밖에. 로엘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 데릭의 속을 조금도 모르겠다.
“테바로스가 토일 강 이동 지역을 점령한 지는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부대를 정비하는 시간이 있다고 쳐도, 이곳까지 오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었지요.”
“티벌 전투에 끼기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거잖아요? 물론, 우리야 그깟 테바로스 없어도 멋지게 성공했지만, 아주아주 괘씸하고 비겁한 행동인 거지.”
“명색이 동맹이라는 자가.”
데릭에 대한 싸늘한 루카스의 반응에 아론은 더 싸늘하게 대꾸했다. 두 사람도 지금 여간 화가 난 상태가 아니란 거였다.
“간을 본 거겠지. 티벌 성을 우리가 어떻게 점령하는지.”
“괜한 싸움에 끼어들어 자기들의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는 거고요.”
물론 이반과 콜린의 반응도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테바로스에 대해 정말 조금의 신뢰도 없는 모두라 로엘은 작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이런 상태에서도 양국의 인장이 동맹 서류에 찍힐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네. 아마 그랬겠지요. 테바로스는 처음부터 티벌 전투에서 낄 마음이 없었을 겁니다. 어쩌면, 티벌 점령 그 자체를 의심하고 있었을 수도 있어요.”
실제로, 에단이 아니었다면 그럴 뻔도 했고.
삼켜진 그녀의 말을, 모두가 함께 삼켰을 테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슬쩍, 새삼스럽게 이 티벌 성에서의 회의를 가능케 해 준, 지금 매우 심드렁한 그분께 감사를 표하면서.
“그런 테바로스가 다시 움직였다는 것은, 그리고 그 장소가 이미 상황 정리가 끝난 티벌이 아닌 카티라는 것은 좀 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데릭 황제의 계산으로 그 선택이 테바로스에게 가장 이득이 된다는 거니까요.”
문제는 바로 그 선택이 결코 카이로스에게 좋게 작용하지 않을 거란 거다.
“가장 이득이 된다는 말씀은…….”
“당연히, 테바로스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겠지요.”
로엘은 바로 답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데릭 황제다. 그 사람이 어디 사리사욕을 위해 테바로스를 움직일 위인인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본인이 형제들을 제치고 황제에 오르는 것조차도 테바로스를 위한 일이라 굳게 믿는 그자에게 다른 의중과 의도라니.
이번 역시, 순수하게, 데릭은 그저 황제로서의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거다.
심각한 로엘의 말에 잠시 회의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평소대로라면 루카스가 바로 걱정하지 말라고. 카이로스가 세계 최강이라고 자신 있게 한마디 해야 하는데 이번만큼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로엘은 다시금 제대로 지도를 보며 말했다.
“……티벌에서 눈치 못 챌 정도의 소수 부대라면, 분명 데릭 황제의 정예군이 움직였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지. 카티 성을 이렇게 빨리 점령한 걸 보면 더더욱 그러하고.”
그리고 이반 역시 같은 지도를 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카티의 지형도였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뻔하지.”
한동안 아무 말 없던 에단의 목소리가 로엘의 말을 끊었다. 로엘과 이반뿐 아니라, 그 역시 데릭의 의도를 알아차렸단 소리다.
“도대체 카티에 뭐가 있는데요?”
“아무것도 없어요.”
“네?”
“아무것도 없다고요.”
이해하지 못한 루카스의 반문에도 로엘은 한 번 더 명확히 답했다. 오히려 말문을 막히게 하는 그 단호한 대답에 루카스가 입을 벙긋거리고 있을 때, 아론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왜 셋 중 가장 가까운 성과 가장 커다란 성을 제치고,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의 길목의 카티를 선택하였는지, 그게 어째서 테바로스의 이름을 높이는 선택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왜 카티인데요? 아무것도 없다면서요?”
“아무것도 없지만, 제일 높거든요.”
로엘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세상 똑똑한 아론이 이리 바로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저 순전히 타르타니를 몰라서. 토르티아를 몰라서. 그리고 북방으로 몰라서 그러한 거다.
로엘은 지도상 카티가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카티는 토르티아 본성에서 보이는 가장 높은 언덕이자, 가장 가까운 언덕에 해당하지요. 기본적으로 본성에 다가갈수록 평지에 가까워서 그 근방 일대는 평원이 펼쳐지게 되는데 카티는 그중 유일한 고지대 성입니다.”
“그래서 성이 작을 수밖에 없는 거야. 상대적으로 성을 쌓을 수 있는 편평하고 안정적인 지대가 좁으니까.”
“대신 가늘고 높게 올렸지요.”
또 한번 이반과 로엘의 말이 이어졌다. 간간이 서로와 눈을 맞추어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의 호흡은 누가 보아도 훌륭했다. 굳이 서로들의 생각을 미리 확인하지 않아도 미리 알고 있는 그런 기분이랄까. 함께 경험한 시간과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 같아서 그런지 서로의 생각은 제법 자주 수렴하였다. 심지어 서로가 할 말들까지도.
“덕분에 카티 성에서는 토르티아 본성을 동쪽 끝부터 서쪽 끝까지, 남쪽 끝부터 북쪽 끝까지 전부 내려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도 가능하지요.”
이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카티 성이라.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 성이 아닌가.
토르티아 본성에 갔을 때마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던 바로 그 탑 같던 성.
그 성을, 이리 쓸 줄이야.
“토르티아 본성 수도에서는 어느 곳에 있든 바로 그 카티 성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성 사람 사이에 카티 성은 시계 같은 역할을 해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그 성을 기준으로, 카티 성의 어디쯤 해가 걸려 있는지 확인하면 시간을 알 수 있었으니까요.”
즉, 토르티아 사람들은 언제나, 의식하지도 못한 채 카티 성을 보고 있는 셈이다.
데릭 황제는 바로 그런 카티 성을 점령한 거다. 그것도 이리 갑작스레, 소리 소문도 없이, 당당히 카이로스를 제치고서.
어차피 이 전쟁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테바로스가 아닌 카이로스.
테바로스가 아무리,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테바로스는 그저 카이로스의 지원군으로서, 형식뿐인 동맹군으로서 카이로스의 들러리밖에 되지 못한다. 데릭은 바로 그 점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다.
“어떻게 해서든 증명하고 싶었겠지요. 자신들이 이 전쟁에 참여한 이유를.”
“동시에 알리고 싶었던 거야. 자신들의 힘과 무서움을. 토르티아 외곽뿐 아닌, 토르티아 본성 모두의 사람들에게.”
그것도 카이로스를 제치고 가장 높은, 카티 성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는 그런 유치한 상징을 통해서.
“진짜 영악한 새끼네.”
이제야 루카스도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이해가 되자 데릭의 숨은 의도가 얼마나 의뭉스러웠는지 뒤늦게 짜증이 밀려왔다.
“역시나 무언가를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군요.”
아론 역시 루카스에 이어 매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토일부터 티벌까지 그렇게 뭉그적대며 움직일 때는 언제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리 빛의 속도로 움직이다니.
아무튼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들.
“그럼 카티 성이 불타오르는 것도, 그 성에 테바로스 국기가 걸리는 것도 전부 다 보았겠네요.”
“아마도요. 테바로스는 그걸 노렸을 테니까요.”
“뭐 국기까지 정확히 보일 수는 없겠지. 아무리 그래도 거리라는 것이 있으니까. 아마 봉화를 올리거나, 성벽 전체를 테바로스 상징 깃발로 채우는 수를 쓰지 않을까 해. 어떻게든 카이로스가 아닌 테바로스가 선수 쳤다는 것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이반의 합리적인 추론에 모두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생각해도 그런 식이 아닐까 싶었다. 로엘은 모든 설명이 끝나서야 그제야 다시금 에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 않나요, 폐하?”
정답을 맞추지 않았느냐고 선생님께 허락받는, 조금은 뿌듯한 눈으로.
그 생각이 훤히 드러나 에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 와중에 기특하면서도 귀여울 건 또 무언가.
“그래. 알리는 방법은 다양하니.”
에단이 이제 그만 기댔던 의자에서 상체를 일으키려는 그 순간 갑자기 밖에서부터 커다란 나팔의 소리가 울렸다. 카티로 보낸 전령이 급하게 당도하였다는 것을, 모두들 바로 알 수 있었다.
“폐하, 전령입니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전령이 뛰어 들어왔다. 오늘 새벽에 보낸 거 치고 생각보다도 빨리 돌아왔다. 물리적으로 카티 성에 들어갈 수 없는 시간이라, 이 전령은 카티 성에 당도하기도 전에 돌아와 보고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다들 긴장할밖에. 바로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전령에게 쏠렸다.
“뭐 해, 보고 안 하고!”
숨을 고르느라. 그리고 하늘 같으신 폐하와 프란시아님 앞이라 어린 전령이 머뭇거리자 성질 급한 루카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전령은 정신을 차리며, 한 번 더 에단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하늘 같으신 폐하를 뵙습니다!”
이리도 급하게, 중간에 먼저 회군에서 돌아와 보고를 드리는 바로 그 이유를.
“현 시점. 카티 성은 테바로스에게 점령된 것을 확인하였으며, 지금 카티 성 상공이 까마귀 떼로 뒤덮여 있음을 보고드립니다!!”
아. 로엘은 전령의 보고를 듣자마자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까마귀 떼라니.
까마귀는 데릭의 황자 시절부터의 별명 아닌가.
“까마귀 떼라고?”
“예. 장군님. 멀리서도 보일 만큼 엄청난 무리의 까마귀 떼였습니다. 저희가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였는데, 어스름 해가 올라오기 시작할 때부터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어 대며 그 허공에 모여드는데. 장관 같기도 하면서 섬뜩한 것이, 딱 테바로스다웠습니다.”
에단의 말이 맞았다.
테바로스를 알리는 방법은, 정말 참 많았다.
“……요란스럽게도 알렸네.”
이반은 헛웃음을 뱉었다.
까마귀 떼라. 어린 전령의 말대로, 아마 모든 이들의 시선을 강탈하였을 거다.
새벽녘, 막 하루를 시작하려던 토르티아 모든 사람들의 잠을 단번에 날려 버릴 만큼.
“이걸 노린 거였어. 그 뱀 같은 인간.”
그러니 얼마나 두고두고 회자될 일인가.
“와. 데릭 황제……. 남다른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 줄이야.”
“이대로 퇴장하나 싶더만 막판에 한 건 하셨군.”
이대로, 들러리로만은 퇴장하지 않겠다는 거다.
이반의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테바로스가 카티 성을 차지했다고 들었을 때도 심드렁하게 반응하던 에단의 태도가 전령의 이야기를 듣고는 미세하게 달라졌다.
“하. 까마귀.”
뭐랄까.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갑게 얼었다고 해야 하나.
티벌 성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
카이로스는 까마귀가 날아올랐다는 소식을 먼저 듣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