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황제께 붉은 월계수 꽃을 6권
연아 장편소설
목차
Chapter 55. 황금의 황제가 이기는 법
“폐하. 전부 다 정비를 완료하였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시면 언제든 출정 가능합니다.”
제일 높은 망루 위에서 토일강을 내려다보던 데릭의 시선이 버리에게로 잠시 돌아갔다.
“그래.”
덤덤한 버리의 목소리만큼이나 덤덤한 반응. 토일강이 한눈에 보이는 이곳 토일 성까지 다다르는 데 꼬박 스무날이 걸렸다. 처음 계획하였던 한 달보다도 열흘이나 당겨진 빠른 시간이다.
“타르 점령을 마지막으로 프란시아 부대도 티벌에 당도하였으며, 이로써 카이로스의 전 병력 역시 티벌에 모두 집결하였습니다.”
문제는 그들만 빨라진 게 아니라는 거지만.
데릭은 버리의 보고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말은 곧, 토일강 동쪽 지역을 전부 먹어 치우는 동안 카이로스 역시 티벌의 이남 지역을 전부 해치웠다는 소리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입니다. 저희가 단축시킨 그 기준에 따라서도요.”
“오히려 우리가 저들에게 불을 지핀 셈이지.”
그걸 에단 황제가 노렸을 테고.
그 빤한 장난을 알면서도 데릭은 그 장단에 놀아 주었다. 아니 놀아 줄 수밖에 없었다. 데릭에게 다른 선택지가 딱히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토일강 동쪽 전역이라면, 저희에게 나쁠 것 없는 거래였습니다.”
“하. 과연.”
조심스러운 버리의 말에 데릭의 실소가 저절로 나왔다.
토일강의 동쪽이라. 토르티아의 타르타니를 가로지르는 이 잔잔한 강물의 동쪽은 어떤 곳인가. 토르티아의 수도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고, 상대적으로 험난한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국경의 역할은 하되 별다른 수익이 창출되지 않은 영지들.
테바로스의 입장에서야 테바로스와 인접한 지역으로서 그들의 영지를 넓힌다는 의미라도 있지, 카이로스 입장에서는 전혀 아쉬울 것이 없는 땅들이다.
제이드가 홀로 열심히 순방하여 어렵게 지켜온 그 땅들을, 조지 황제는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였으니, 그들 역시 자신의 국가에 대해 얼마나 큰 애정이 있으랴. 테바로스가 밀고 들어온다고 한들 누구 하나 본성으로부터의 원조를 기대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성을 지킬 거라 희망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무기력한 전쟁이었다.
“……재미없네.”
잔잔한 토일강의 강물만치 심심한 전투들.
분명 이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많은 영토를 점령하는 것은 매우 드문 기회다.
그것도 다른 땅도 아닌 토르티아의 영지를 뺏어 오는 것이니 그 상징성도 꽤나 있었다.
그러니 버리의 말대로 결과적으로는 확실히 나쁘지 않은 거래다. 아니, 객관적으로 판단하여도 이건 해야만 하는 거래였다. 그러함에도 데릭은 계속 기분이 좋지 못하였다.
뭐랄까, 자신이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한 흥정이 뒤돌아보니 손해인 그런 기분이랄까.
처음부터 계획했던 그대로이건만 무엇 때문에 이리 손해 본 기분이 드는 걸까.
“뻔하지.”
그건 카이로스가 더 큰 것들을 가져갔기 때문.
겉으로 보기에야 데릭이 가져간 영토가 월등히 광활하다. 토르티아의 반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넓고도 넓은 대지였다. 하지만 그 절반 이상이 타르타니였으며, 그 나머지의 절반은 거의 개발되지 않은 불모지였다.
그에 비해 카이로스가 가져간 것들은 어떠한가.
로엘의 미르 지역들은 북부로 들어가는 물자의 도입부와도 같고, 이반 황자가 휩쓴 성들은 보울을 비롯하여 토르티아 도성까지 가는 직진로에 배치된 주요 성들이었으며, 루카스가 점령한 나시베는 토르티아 도성 다음으로 많은 백성이 머무르는 대도시의 성이다.
테바로스가 얻어 간 땅뿐인 점령과는 감히 비할 바가 안 되는 요충지들뿐.
“처음부터 테바로스가 주역이 아니었던 정벌입니다. 이건 테바로스의 전쟁이 아니었어요.”
“나도 알아.”
여전히 시큰둥한 데릭의 대답에 버리는 작은 한숨을 삼켰다. 며칠 전부터 데릭은 계속 이 상태였다. 테바로스의 군대는 예상보다도 더 잘 싸워 주었고, 별다른 변수도 없었으며, 계획은 짜여진 듯 잘 들어맞았다. 그러함에도 데릭은 계속 무언가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맥이 빠져 보인다고 해야 하나. 버리는 그 원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주군은 지금 재미가 없는 거다.
“토르티아의 성을 점령하는 것은 카이로스로 정해져 있었고, 테바로스는 동맹군으로서 지원하는 위치였습니다. 저희는 카이로스가 밑에서 받쳐 준 덕분에 수월하게 영토 확장을 하였고, 그만큼 군의 손실도, 비용도 모두 줄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분한 거겠지.
테바로스와 비교되는 카이로스의 성과가. 그들의 우수함이.
“시기의 문제였을 뿐, 어차피 우리가 가지고 왔어야 영토들. 테바로스는 이 영토들을 카이로스의 전쟁에서, 카이로스를 아주 적절히 이용하여 얻어 낸 겁니다. 모두 영특하신 폐하 덕분에.”
버리는 데릭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말했다. 진지함이 가득한, 버리의 그 노골적인 칭찬에 데릭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답지 않게 감정을 너무 드러냈나 보다.
에단 황제에 대한 이 자격지심. 이 열등감.
그를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보좌한 버리의 눈에는 이미 다 보이나 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그를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 이 마음 역시, 이런 식으로 위로해 주려는 거겠지.
“폐하. 조급해하실 것 없습니다. 폐하는 시작부터가 달랐어요. 시작점이 다른 이와 동등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애초에 불공정한 일입니다. 폐하는 덜 가지고 더 힘든 상황에서 여기까지 올라오신 거고, 그자는 더 가지고 덜 힘든 상황에서 겨우 그곳까지 간 겁니다.”
겨우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었지만, 데릭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버리의 말처럼 그가 가지고 태어난 것은 비교가 무의미해질 만큼 압도적인 것이었으므로. 만약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나, 데릭 역시 그 만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카이로스의 황제만큼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면.
만일 에단 카이로스가 고작 테바로스의 다섯 황자로 태어났더라면.
그때도 상황이 이와 같았을까.
“……아니. 절대 그러지 않았겠지.”
데릭 역시 그의 모든 업적을 환경 덕분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그는 카이로스의 역사마저 새로 쓰고 있었으므로. 같은 의미로, 에단 카이로스가 테바로스의 황자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가 테바로스의 역사를 새로 썼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만큼, 화가 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라는 남자는.
“그러니, 폐하. 조급해하실 거 없습니다. 이는 시간문제일 뿐. 저는 저의 주군, 테바로스 제국에 영광을 가져다줄 데릭 폐하의 앞날이 분명 카이로스의 에단 황제보다 더 찬란히 빛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충정심이 절절하다 못해 애절하기까지 하였다. 오히려 잠시라도 어리석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자신이 버리에게 미안해질 판이다. 그만큼이나, 이 번지르르한, 다른 이가 했으면 귀가 간지러웠을 과한 아첨이 너무도 진심으로 와닿아 데릭을 위로했다.
단번에, 무겁게 내려앉았던 마음이 가벼워질 만큼.
“굳이 황후가 필요하나. 그 역할 그냥 계속 네가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돌아가시자마자 바로 명단 만들 거라구요. 올해는 절대 못 빠져나가세요.”
황후 이야기에 바로 시어머니 모드가 된 버리의 말을 데릭은 귓등으로 듣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럼 마음에 드는 사람을 데려와.”
“폐하 마음에 들기가 어디 쉬운 줄 아십니까.”
“그럼 어쩔 수 없네. 내 손으로 직접 데리고 오는 수밖에.”
아주 많은 의미가 담긴 위험한 말이라, 버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바로 불같이 화내며 절대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잠잠한 그 반응에 오히려 데릭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버리를 보았다.
“뭐야. 이거 그래도 된다는 의미야?”
“제가 안 된다고 하면 포기하실 거예요? 그것도 아니면서 무슨…….”
버리는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폐하 마음대로 하세요. 폐하의 마음이 정 그쪽이면, 그래서 주군의 결정이 결국 그분이라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설사 그것에 대한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저는 폐하의 모든 결정이 결국 테바로스를 위한 것임을 믿으니까요.”
확신에 찬 눈빛이 데릭을 향했다. 데릭은 대놓고 반대하고 말리던 때보다도 이 한마디가 더 강하게 그를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테바로스를 위한 일이라는 것.
로엘을 데리고 오는 것이 과연 그렇다고 할수 있을까.
“……그건 두고봐야지.”
로엘이라는 여자 자체를 원하는 것도 사실이나, 황후 로엘 네아레스를 필요로 하는 것도 사실이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번 전쟁의 성과만 보더라도 그녀의 가치는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았다.
오히려 아직까지 실력을 안 보인 건 ‘그자’뿐.
“티벌에 다 모였다고?”
“네.”
이곳, 토르티아에 올라와 북방 전쟁을 시작하면서 로엘은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고, 이반 황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숨겨 두었던 실력을 여실히 보였으며, 루카스는 명성 그대로 훨훨 날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자는 그 모든 이들을 거느리는, 그들의 주군뿐.
“생각보다 쉽지 않을 텐데. 그 티벌이라면.”
데릭의 말에 버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타니 숲의 가호를 받는다 알려진 바로 그 티벌. 토르티아의 붉은 성벽을 보기 전 처음 만나는 최대 관문일 거다.
“에단 황제가 지금까지 해 오던 것과는 확실히 다를 겁니다. 토르티아가 괜히 토르티아가 아니니까요.”
설사, 그 제이드 네아레스가 없다 하더라도.
“게다가 오늘 아침, 토르티아 본성으로부터 원군이 티벌에 당도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습니다.”
“선봉장은?”
“토르티아의 공동 총사령관 중 하나인 맥스 퓨레입니다.”
“하.”
데릭은 작은 실소를 내뱉었다. 맥스 퓨레라니. 제이드의 오른팔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 아닌가. 이 망해 가는 토르티아에 남은, 몇 안 되는 진정한 장수 중 하나다.
데릭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일이 재밌어지는데?”
겨울 타르타니 속의 티벌 정복을 위해, 토르티아에 평생을 바친 맥스 장군을 상대한다라.
데릭의 입게 미소가 진해졌다.
“어디 그 실력 좀 봐 볼까.”
흥미롭다는 듯 웃는 그 모습에 버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티벌로의 출정은 좀 더 늦어질 거 같다.
***
에단의 프래카가 전쟁을 한 횟수가 몇 번이나 될까. 그 전쟁으로 함락한 성은 몇 개이며 수복한 영토는 얼마일까. 유독 유별나게 잘나신 에단 폐하라서, 어린 황자 시절부터 선봉을 맡아 왔으니 그 밑에 있던 이들도 참 오랫동안 중요 전투의 맨 앞에서 싸워 왔다.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백전백승.
괜히 에단을 신이 사랑하는 황제라 부르는 게 아니다.
동시에 그의 군대를 괜히 승리의 황금 부대라 칭하는 게 아니다.
“와. 살다 이렇게 견고한 성은 또 처음 보네.”
루카스는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식이라면, 진짜 답이 없는 건데…….”
이반 역시 답답한지 펜을 던지듯 테이블에 놓아 버렸고,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일도 아닌 듯합니다.”
콜린 역시 묘안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모두가 모인, 회의장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티벌로 집결하여 공격을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 그들은 티벌의 군사 단 한 명을 보지 못하였다.
“……이건, 정말 생각과는 많이 다르네요.”
아론의 표정이 갈수록 더 굳어졌다. 기껏 벌어 놓은 시간들을 정작 수월할 줄 알았던 티벌에서 갉아먹고 있었다. 티벌에 오기까지 워낙 많은 성들이 있었고, 하나같이 공략하기 까다로운 것들이라 티벌에 오기까지가 고비인 줄 알았는데, 그 숱한 고비를 수월히 넘고 보니 이런 예상치 못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우리 모두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잠자코 있던 로엘이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티벌에 온 후, 한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던 그녀라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어쨌건, 지금 이곳에서 가장 티벌을 많이 아는 이는 누가 뭐라 해도 그녀뿐이었으므로.
“티벌은 토르티아 본성으로 가는 직선 경로에 있는 성입니다. 가장 큰 대로를 가지고 있기에, 언제나 이 성문은 열려 있기로 유명해요. 어떠한 교역품이든 이곳을 지나지 않고서는 토르티아로 갈 수 없기 때문이에요.”
언제나 열려 있던 토르티아의 길목. 그 문이 닫혔을 때 어떠할지에 대해서 그들은 너무 무지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녀 역시 티벌 성문이 굳게 닫힌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토르티아의 교역품들이 오가는 주요 성이자, 토르티아의 방어 최전선이 되기에 제이드가 자주 드나들었던 티벌은 항상 외부인이 많고 시끌벅적했다.
“애초에 이곳까지 침공을 당한 역사도 드물거니와, 평소에도 닫혀 본 일이 드문 곳이니 우리는 정보가 너무 없었던 거예요. 이 성이 어떤 식으로 싸우고, 어떤 식으로 성을 지키는지.”
티벌이 싸우는 방식은 너무도 간단하였다.
바로 문을 걸어 잠그는 일.
토르티아 본성으로부터 맥스 장군이 데려온 군사는 별로 많지 않았다. 겁쟁이 조지 황제가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많이 내어 줄 거라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아서 로엘은 그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문제는 그 맥스 장군이 도착한 이후였다.
맥스는 티벌에 당도하자마자 제일 먼저, 성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티벌의 성을 넘지 못하였으므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많은 원군이 필요하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싸우지 않고 있으니까요.”
로엘의 목소리가 회의가 진행 중인 막사에 울렸다. 또 한 번,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말 그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공격을 해 보았자 상대가 받아 주지 않는다면 그 공격은 절대 진척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한가.
“하. 진짜 돌겠네.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잖아? 차라리 내가 성벽을 기어 올라가 성문을 따는 편이 빠르겠다.”
루카스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루카스의 전쟁 역사에서도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미친개라 불리는 그가 날뛰고 싶어도 어디 날뛸 대상이 없는 셈이니 속이 터질 만하다.
“우리가 정보가 없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부터가 문제였어. 프란시아의 말처럼 우리는 너무 안일했던 거야. 티벌이 항상 열려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선봉장이 폐하라는 사실에.”
이반의 말에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이반의 말은 꽤나 그들의 아픈 부분을 후벼 팠다.
이반의 말대로, 그들은 어쩌면 너무도 에단만을 믿고 있었는지 모른다.
토르티아를 정벌하는 데 있어서 티벌 성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티벌보다 그 이외의 성들에 더 중점을 두고 연구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곳들은 에단 폐하가 함께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건 저의 불찰입니다.”
아론은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말했다.
단순히 토르티아 본성 다음으로 큰 성이라는 것. 가장 높은 성벽을 가지고 있다는 것. 성 주위에 울창한 타르타니가 존재하여 공성 무기들을 사용할 수 없고, 대규모 군대가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
이외에 아론은 무엇을 알아냈는가.
아니 이것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얼 준비했는가.
“우리 모두의 불찰이지요. 저희 모두, 같은 마음이었으니까요.”
폐하가 어떻게든 해 주시겠지 하는, 안일하기 짝이 없는 마음.
그 안일함이 지금의 사태를 가져와 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히 아래로 향하였다. 차마 에단을 볼 수 없었다. 그동안 그들이 그의 곁에서, 그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니, 단순 의지가 아닌 책임 회피이자 직무 유기에 가까웠다.
에단을 보좌해야 할 그들이 오히려 에단의 뒤에 숨어 그만 바라보고 있었던 꼴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을까. 아론과 루카스는 물론, 이반과 로엘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덕분에 긴 정적이 이어졌다. 그러지 않아도 무거웠던 분위기가 더 무거워져 버렸다.
에단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어쩌자고. 다 같이 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자숙이라고 하겠다는 건가.”
살짝의 짜증이 섞인 그의 목소리에 오히려 긴장이 더해졌다. 그가 입을 열어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자신들을 자책하는 그들을 보며 그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누굴 탓할까.
“반성을 하든 자책을 하든 알아서들 하고, 지금은 생각을 해. 어떻게 저 문을 열어 제대로 된 전투라는 걸 하게 만들지.”
역시나 에단은 그들을 비난하거나 책망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자책 따위는 전혀 그의 안중에 없는 거 같았다. 그보다는 이 중요한 시기에 쓸데없는 감정놀음 하지 말고, 방안을 내라는 채찍질이 돌아왔다.
너무도 그들의 주군다운 반응이라 모두 같은 마음으로 쓴 미소를 삼켰다. 에단의 말대로 이 자책과 반성은 그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
이제라도 그들 역시 자신들의 일을 해야 했다.
“폐하. 진짜 제가 밤에 몰래 급습이라도 할까요?!”
“넌 아무 생각 하지 마.”
루카스의 진지한 말에 에단은 바로 표정을 찌푸렸다. 적나라한 그의 표정에 로엘은 작게 웃음을 삼켰다. 루카스의 진지한 고뇌의 결과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는 효과는 아주 확실했다.
언제나처럼 그 자체가 루카스의 역할이니, 그는 훌륭히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그러니 진짜 고뇌가 필요한 나머지 그의 두뇌들이 그들의 역할을 해야겠지.
“이리 문을 걸어 잠그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것은 티벌 성의 최고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어. 자신들의 방어 체계가 이리 완벽하다는 건, 자신들이 제일 잘 알 테니 그 자체가 그들을 안일하게 만들 수 있거든.”
“그건 지극히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티벌은 성 규모에 비해 상주하는 군대가 소규모에 가깝고 군사 시설도 조악한 편에 속합니다. 성 자체가 워낙 견고하게 지어진 덕분인지, 다들 자신들이 침공당할 생각조차 못 하는 듯했어요. 저희는 그들의 그 안일함에 덩달아 안일해진 셈이고요.”
이반에 이어 콜린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이반과 함께 이곳 티벌에 실사를 와 본 콜린은 티벌만큼은 다른 토르티아 성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다른 성들에 비해 훨씬 군기가 빠져 있다고 해야 하나. 상업 도시로 발달되어 그런가 싶을 정도로 군사 도시라 여겨지진 않았다. 그 때문에 티벌 공략이 쉬울 거란 결론으로 다다르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이건 모두가 허를 찔린 셈이다.
“그런 티벌에, 토르티아에 평생을 바친 최고 사령관 맥스 장군까지 더해졌고요.”
로엘은 에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맥스 퓨레. 제이드 네아레스의 유명한 오른팔이다. 굳이 따지자면, 벤 장군보다는 맥스 장군 쪽이 보다 루카스에 가깝다. 그만큼 행동파에 항상 제이드와 함께 제일 앞에서 전장을 누볐던 분. 제이드가 그녀의 호위를 맥스에게 맡길 정도로 신뢰가 두터웠던 바로 그 장군이 이제는 토르티아의 최고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하필이면 제이드가 죽자마자 바로 벤과 맥스를 제이드의 자리였던 최고 사령관에 앉혀, 한때 로엘은 두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벤과 맥스의 충성심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어쩌면 더 배신감이 들었는지도 모르지.
그 두 사람의 속사정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
“맥스 장군은 절대 실수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성적인 분이 나이가 들고 연륜이 쌓이면서 더 신중해지셨죠. 무엇보다 저분은 토르티아에 평생을 바친 만큼 토르티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이 티벌 성이 지금 어떠한지. 이 티벌 성의 강점은 무엇이며 약점은 무엇인지. 나아가 지금 이 전투에서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우리의 행군을 저지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까지도요.”
로엘은 지극히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맥스 퓨레 장군에 대해. 그리고 그 맥스 퓨레가 지금 이곳 티벌에 왔다는 사실이 무얼 의미하는지에 대해.
“그 말은 곧, 저 성문이 절대 열리지 않을 거란 소리군.”
“네.”
로엘은 에단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답했다.
기어오를 수도 없고, 활로 쏘아도 닿을 수 없으며, 공성 무기가 접근하여 성벽을 부술 수도 없다.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철옹성.
“그건 처음부터 공성이 불가능하다는 소리잖아.”
“그러니 자신 있게 성문을 열어 두는 거죠. 닫기만 하면 지킬 수 있으니까요. 괜히, 토르티아의 제일 수성이라 불리는 게 아니에요.”
로엘은 작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전부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들. 귀로 듣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이리 다른 거다.
“예전부터 토르티아에서는 티벌에 대해 이런 말이 전해져 왔어요. 타르타니 숲이 티벌을 덮쳐 오지 않는 이상, 티벌은 절대 망하지 않을 거라고.”
얼마나 견고한 성이면 그런 말까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올까. 로엘의 한숨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런데, 오히려 로엘의 그 한마디에 에단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다시 말해 봐.”
“네?”
“다시 말해 보라고. 방금 전 한 말.”
갑작스런 그의 되물음에 로엘은 물론 다른 이들까지 살짝 당황하였다. 전혀 되물을 말한 특별할 것이 없는 말들이었는데 그의 반응은 전혀 그런 거 같지 않았다.
“타르타니의 숲이 티벌을 덮쳐 오지 않으면, 티벌은 망하지 않는다고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그 시선에 괜히 주눅이 들어, 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이 반응에 영문을 알 수 없어 로엘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하. 그럼 간단하네.”
그런데, 그 대답이 그는 만족스러웠나 보다. 여전히 다른 모든 이들은 그의 의중을 전혀 알 수가 없어 당황해하는데, 정작 그는 홀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숲이 움직이면 되는 거잖아.”
아무래도, 이번 역시 그 혼자 답을 발견했나 보다.
***
달빛 하나 없는, 어둠이 내린 겨울 밤.
타르타니에 둘러싸인 티벌의 밤은 한층 더 어두운 것만 같았다. 맥스는 그런 타르타니를 등진 채 티벌 성을 마주하는 카이로스의 대군을 바라보았다. 이 밤중에도 환히 불을 피운 황금의 군대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덮쳐 올 것만 같았다.
“맥스 장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그런 맥스의 긴장감을 깨트리는 실없는 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티벌의 오래된 성주, 게일이었다.
“여기는 티벌이라고요. 티벌 몰라요, 티벌?”
볼 때마다 더 살이 찌는 이 속 편한 이는 티벌을 오랫동안 다스려 온 게일 가문의 7대손으로 이 부유한 도시의 호사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다. 검 한 번 제대로 쥐어 보지 않은 금수저 귀족 나으리.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전장 속에서도 술 냄새를 풍기며 웃고 떠드는 그를 맥스는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티벌 성 벽이 쌓아진 이래에 침략이란 걸 당해 본 적이 없다고! 이 티벌 역사에!”
지나치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그러지 않아도 정색한 맥스의 표정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부터 그렇게 연회에 초대하겠다고 부산을 떨더니만, 맥스가 끝끝내 참석하지 않은 그 연회를 자기네들끼리 아주 제대로 즐긴 모양이다.
“많이 취한 거 같은데 그만 들어가시죠.”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니까!”
가까이 다가오자 더 느껴지는 그 술 냄새와 취기에 맥스의 차가운 눈이 게일을 향했다. 맥스를 모시는 주변의 군사들은 당장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거 같아 식은땀이 절로 나는데, 게일은 지금 그런 분위기를 읽을 정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목소리만 더 커지고, 말만 짧아졌다.
“맥스 장군 성실하고 우직한 건 토르티아 사람 다 아는데, 진짜 이렇게 밤새 성벽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봐? 저 카이로스도 며칠째 아무것도 못 하고 있잖아?”
게일은 손으로 환히 불을 밝힌 토르티아 대군을 가리키며 말했다. 몸을 반쯤 성벽에 기댄 채 게일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일이라도 한 듯 큰 소리로 비웃었다.
“나는 처음부터 걱정이란 걸 안 했다고. 왜? 여긴 티벌이니까! 그래서 솔직히 얼마나 같잖던지. 신의 축복을 받는 황제? 하! 어린놈의 새끼가 말이야!”
맥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화낼 가치가 없을 정도로 이미 게일은 만취 상태였다. 그저 눈으로 얼른 게일과 함께 올라온 가신들에게 그를 데리고 가라 명령할 따름이었다.
“성문은 굳게 닫혔지. 기어오를 수 없는 성벽은 튼튼하지! 심지어 겨울이라고! 가만히 있어도 체력이 뚝뚝 떨어지는 그런 토르티아의 겨울!”
게일은 성벽을 손으로 탁탁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 맥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배부른 영주의 말을 귀담아듣고 싶지 않았지만, 솔직히 게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게일의 말대로, 이 전투는 티벌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압도적으로 공성이 불리한 성 구조에, 숲속 한가운데라는 악조건. 상대는 이미 장기간 전투를 이어 오고 있고, 추후에도 그럴 거라는 원정군의 한계와 익숙하지 않은 험난한 타르타니의 환경까지.
“이번 타르타니 겨울이 예전만 못한 게, 그게 아쉽지만 말이야. 진짜 타르타니 겨울이었으면 지금 저렇게 있지도 못…….”
“오히려 그게 더 득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심지어 날씨까지 토르티아의 편이다.
한참을 잠자코 있던 맥스가 결국 한마디 뱉었다. 조금이라도 상대를 해 줘야 그나마 더 빨리 이 짜증 나는 상황이 끝날 거 같았다. 여기 오기 전에 벤이 카이로스도 카이로스지만 게일 영주를 상대하는 게 더 짜증 날 거라고 하더만, 그 말이 사실일 줄이야.
맥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게일 경 말대로 평소의 겨울이었으면 이미 온 일대가 얼음판이었겠지요. 그런데 이번 겨울은 유독 따뜻해 초봄에 가까운 날씨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카이로스의 진격도 훨씬 더 빨라졌다. 바깥출입이 힘들 정도로 매서운 추위로 유명한 북방의 겨울이 올해는 마치 그가 오는 것을 반기듯 그 흔한 눈 한 번이 내리지 않았다. 덕분에 카이로스 군대들은 북방의 겨울 고생 없이 진격할 수 있었고, 그만큼 준비되지 않은 토르티아는 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 말이 그거 아니야. 원래대로의 겨울 추위라면 저들이 저렇게 밖에서 버틸 수도 없었을 거 아니야?”
“그랬다면 출발조차 하지 않았겠지요.”
“아…….”
맥스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은데 이 멍청한 영감 때문에 계속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럼 뭐가 우리에게 득이라는 거요?”
“얼다가 만 지반.”
역시나 게일은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놀랍지도 않아, 맥스는 설명을 이어 갔다.
“카이로스의 공성 장비는 중부, 북방 할 것 없이 최강입니다. 그 어떠한 성벽도 날려 버릴 수 있다고 전해지지요. 게일 경이, 그리고 티벌이 그렇게 자랑하는 이 티벌의 성벽조차도 제대로 된 공격을 받으면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게일의 입이 이제야 좀 다물어졌다.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이 굳건한 성벽이 무너질 수 있다는 맥스의 진지한 말은 만취한 게일의 정신을 충분히 깨울 만했다.
“그럼 저들이 왜 이리 가만히 있는 거요?”
“그걸 못 쓰게 되었으니까.”
맥스는 바로 답하였다. 전쟁의 ‘전’ 자도 모르는 게일은 이렇게 설명해도 여전히 맥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공성병기는 평지에서도 장정 여럿이 붙어야 움직이는 무거운 장비입니다. 명중만 한다면야 무너트리지 못할 성벽이 없겠지요. 하지만 그만큼 사용 횟수가 제한되어 있어 한 발, 한 발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티벌과 같이 두껍고 높은 돌성일수록, 공성병기는 보다 근접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얼었다가 녹아 버린 질퍽한 땅 상태로는…….”
“그게 안 된다 그 말이로구만!”
드디어 게일이 오랜 맥스의 설명 끝에 이해라는 걸 하나 보다. 아까 잠시 티벌 성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소리에 사색이 되었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 머릿속이 너무도 훤히 드러나 맥스는 한편으론 이 속 편한 양반이 매우 투명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맥스는 다시금 저 멀리 카이로스의 부대를 바라보았다. 환히 불을 밝히고 있어도, 그 수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군대라 그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희미하게 형체만이 보이는 거대한 공성병기들을 보며 맥스는 속으로 하늘이 도왔단 생각이 들었다.
저것들이 제대로 움직여 공격할 수 있었다면, 티벌은 진즉에 무너지고 말았을 거다. 자연이 준 특혜에 익숙해지고, 평화의 타성에 젖어 안일하기 그지없는 이 티벌의 군대가 대 카이로스 부대에 어찌 상대라도 될까.
처음 티벌에 당도하였을 때, 아무런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티벌 군대를 보며 맥스는 기운이 다 빠져 버렸다. 아무리 절대 성이라고 불린다고 하나 이 정도로 안일해질 수 있나 싶었다.
“하하! 그럼 결로는 티벌은 안전하다는 거구만. 하하!”
카이로스의 공성병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말에 다시 신이 난 게일은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여긴 티벌이라고! 타르타니가 덮쳐 오지 않는 이상 무너질 리 없지! 하! 하!”
전쟁이 안전한 게 어디 있냐며, 그렇다고 너무 안심할 일은 아니라고 한마디 더 얹으려다 맥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괜한 말을 해 이 시끄러운 대화가 더 이어지는 건 질색이었으므로.
그렇게 겨우 안심한 게일이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금 성루에 정적이 찾아왔다.
“……하늘이 도왔지.”
맥스는 혼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카이로스가 티벌에 집결한 지 벌써 닷새란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들이 보여 준 그 무시무시한 속도를 생각하자면 아주 많이 몸을 사리는 거다.
다른 이도 아닌, 무려 황금의 황제가 선봉인 전투. 티벌의 사람들은 그래서 더 고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대단한 에단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티벌이라며.
그렇게 카이로스를 조롱하고 티벌을 치켜세우며, 마음을 놓았다.
“……어리석고도 멍청한 거지.”
맥스의 입에서 실소가 절로 나왔다.
오히려 맥스는 그런 에단을 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티벌에 도착하자마자 에단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군대를 뒤로 물리는 일이었다. 직접 티벌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하자, 지금까지 해 오던 공성의 정석으로는 티벌의 문이 열리지 않으리란 걸 바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흔한 공격 명령 한 번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이은 승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이리 이성적일 수 있다니.
맥스는 젊은 황제의 그 판단력과 결단력이 무서웠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는 것. 어쩌면 선봉장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일 수 있지.’
‘그 어려운 걸 할 줄 아는 자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거다.’
어제 들었던 것처럼 선명히 기억되는 목소리. 맥스는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그분의 모습에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 멀리, 불빛이 환한 황금의 부대 어딘가에 그분의 딸이 계신다. 붉은 깃발이 아닌 황금의 깃발을 흩날리며, 그렇게 내게 오시겠지.
‘맥스!’
벤의 말대로 그분께서 죽으라 하시면, 그래. 이번에는 죽어야 한다.
이 죄 많은 목숨, 이 구질구질한 인생. 더 이상 어떠한 미련도 없다.
“장군. 이제 그만 들어가시죠.”
“……됐다. 먼저 들어가.”
문제는 그러함에도 이리 끝끝내 토르티아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지만.
“벤 자식 말이 맞네.”
맥스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티벌로 떠나기 전 벤이 했던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분께 죽을 준비가 다 되어 있어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토르티아 성문을 지킬 거라는 그 말. 너무도 사실이다.
“언제 오시려나.”
아름답고 어여쁜 우리의 공주님.
빛 하나 없는 티벌의 밤이 적막하기도 하였다.
***
로엘은 문득 수아의 말이 생각났다. 에토르 전쟁으로 에단이 출정하고, 그를 카이로스 성에 남아 기다릴 때 수아는 그를 걱정하는 그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폐하시잖아요? 무얼 그리 걱정하시는 건가요.’
그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수긍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로엘은 뒤늦게 실소를 뱉었다.
다른 아무 이유도 필요 없이, 오직 ‘그’라는 바로 그 이유 하나.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딱 그러하였다.
“타, 타르타니가 움직인다!!”
둥! 둥! 둥!
거대한 북소리가 타르타니의 새벽을 깨우고,
“타르타니가 움직이고 있어!!”
둥! 둥! 둥!
티벌의 군사들은 몰려오는 두려움에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아아악!!”
티벌의 모든 이들을 깨우는 그 비명 소리에, 몇 날 며칠 꿈쩍도 안 하던 티벌의 군사들을 순식간에 혼비백산시켰다.
“타르타니가 티벌을 덮쳐 온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
“티벌이 무너진다!!!”
오직, ‘그’만이, 오직 ‘그’라서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한 거다.
동이 트는 티벌의 새벽.
에단은 자신의 말 그대로, 정말 타르타니를 움직이고야 말았다.
“참…… 오래 봐 왔지만, 갈수록 더 놀라워. 내 형제는.”
이반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지막이 말했다.
“……오래 안 봐 온 나는 어떻겠어, 그럼.”
그 옆에 있던 로엘 역시, 눈앞의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주 많이 놀랍겠지. 이 말도 안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저 신 같은 이가.”
이반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잘난 듯 로엘에게 말하고 있지만, 솔직히 이반 역시 많이 놀랐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상황에. 이 상황을 만든 에단에게.
‘하. 그럼 간단하네. 숲이 움직이면 되는 거잖아.’
어둠이 걷히고 눈부신 태양이 막 떠오를 무럽. 티벌의 병사들은 순간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카이로스 부대가 몇 날 며칠을 꿈쩍을 안 하는지라 안 그래도 안일한 티벌의 군사들인데 지루한 대치 상태에 조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런 그들의 잠을 단번에 깨우는 갑작스런 북소리가 울리더니,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타르타니가……. 타르타니가 진짜 움직이다니…….”
“카이로스 황제는…… 진짜 신인가 봐!!”
둥! 둥! 둥!
그들 눈에 보이는 건 빠른 속도로 그들에게 다가오는 타르타니의 숲.
아직 해가 온전히 떠오르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녘에, 오로지 특유의 푸른빛만이 저 멀리서 형체를 보일 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높은 성루라 제대로 아래가 보이지도 않는데, 심지어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눈부신 태양 빛을 받으며 지켜보니, 뭐로 보나 티벌 병사들 눈에는 숲이 움직이는 것으로만 보였다. 실상은 몇 날 며칠을 타르타니 깊은 숲에 들어가 나무를 잘라 직접 등에 진 카이로스의 황군들이었지만 말이다.
빼곡히 들어찬 잘 교육받은 부대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은 사실을 알고 있는 카이로스 수장들의 눈에도 마치 숲이 티벌을 덮쳐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그걸 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공포스러울까.
지금, 눈앞에 그들의 오래된 멸망 예언이 실현되고 있는 거다.
“황군 제1포격단. 이동 준비.”
그것도 아주 철저히 계획되고 준비된 절차를 밟아 가며 말이다.
“이동 준비!”
아론의 명령 한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1포격단이 각자 맡은 공성병기에 자리 잡았다. 황군들과 마찬가지로 타르타니의 나무들로 뒤덮힌 공성병기는 교묘하게 움직이는 타르타니 속에 숨겨져 이동을 준비했다. 수만의 군대가 만들어 낸 움직이는 타르타니에 온 신경과 정신을 빼앗긴 티벌의 군사들은 이 뻔한 위장마저도 분간할 여력이 없었다.
“이동!”
“이동!!”
그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공성 포격부대는 이미 어제 밤새 작업을 끝낸 통나무 깔판을 깔아 가며, 이동을 시작했다. 타르타니의 숲으로 위장하기 위해 베어 버린 나무들은 그들에게 튼튼한 나무 기둥을 제공했고, 그 기둥은 바로 공성병기의 훌륭한 깔판이 되어 주었다. 진흙처럼 질퍽해진 지반 위에 깔판을 깔아 평평하게 만든다면야, 바퀴를 통해 움직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동! 이동! 이동!”
심지어 이리, 적들의 눈을 피해 공격조차 받지 않고 움직이면 더더욱 수월할밖에.
둥! 둥! 둥!
“이동!!”
구호와 같이 포격 부대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카이로스의 북소리도 점차 더 커졌다. 티벌 군사들의 귀에는 카이로스 대군의 함성과 자기네들의 비명, 그리고 이 세상 떠나가게 울려 대는 커다란 북소리에 정신이 없어 정작 성큼성큼 다가오는 포격부대의 구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티벌 바로 코앞까지 ‘숲’이 다다랐다.
“조준.”
그리고 그 오래된 예언과도 같이,
“발사.”
티벌의 성문이 무너졌다.
순식간에 덮쳐 온 ‘에단의 타르타니’에 의해.
***
지반을 흔들 정도로의 큰 굉음이 세 번쯤 울렸을 때,
“무, 무너진다!!”
티벌 역사상 절대 무너져 본 적 없는 난공불락의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낙상 조심! 얼른 피해!!”
“성벽이 무너져 내린다고!!!”
정확히 성문 옆, 가장 취약하다 불리는 접합점을 연달아 공격하자 성벽은 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카이로스의 공성병기를 무력화시켰던 약해진 지반이 이번엔 역으로 성벽의 지지를 약화시켜 공성병기의 공격력을 높여 준 셈이다.
덕분에 고작 세 번의 공격 만에 작은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우르르 거대한 먼지 바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루카스.”
그리고, 드디어 이 모든 일을 계획한 그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보는 이도, 하는 이도, 당하는 이도 모두가 하나같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따라가기 바쁜데 정작 그를 계획한 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고고하게, 가장 높은 곳, 가장 위대한 자리에서 모든 것들을 내려다볼 뿐이다.
이 소란스러움 가운데에서도 모든 이의 귀에 정확히 꽂히는 그 낮은 목소리.
루카스는 자신을 찾는 에단의 부름에 씩 미소를 지었다.
“가서 물어.”
짧고 간결한,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명령에 루카스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갔다.
성문이 열리지 않았던 게 문제였을 뿐, 길이 터졌으면 무얼 망설일까.
그는, 황금의 황제가 데리고 다니는 지옥의 개다.
“하!”
사신의 검이라 불리는 이유. 루카스는 제대로 보여 줄 요량인가 보다.
“……게임 끝이네.”
“그렇다고 봐야지.”
로엘의 말에 이반은 바로 수긍했다.
루카스를 필두로 프래카는 빠르게 안으로 치고 들어갔고, 타르타니 역할을 하던 황군 역시 무거운 나무 위장을 벗어던지고 빠르게 대형을 맞춰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가진 것이라곤 자연이 주는 방패막과 조상이 세운 성벽뿐인 곳.
그것들이 무너진 지금, 티벌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말 그대로, 타르타니 숲이 덮쳐 와 티벌을 무너트린 거다.
“심지어, 저것까지 하시네.”
로엘은 하늘을 울리는 커다란 새의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어 디케를 바라보았다. 위풍당당한 날개를 크게 펼치며, 거대한 독수리는 유유자적하게 난리통이 돼 버린 티벌의 성 위를 날았다. 언제 또 황금색을 입히셨는지.
황금의 새가 되어 버린 디케를 보며 로엘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조금, 너무하단 생각이 들려 했다.
“뭐야……. 저건 제이드 님의 독수리잖아?”
“제이드 님의 독수리야…….!”
그러지 않아도 두려움에 빠진 티벌은 그 거대한 독수리의 등장에 한층 더 공포에 빠졌다. 일부러 저공비행을 하는 디케는 단번에 티벌의 병사는 물론 티벌 백성들의 시선까지 사로잡았다.
제이드의 승리의 독수리. 그걸 모르는 토르티아 사람이 있기는 한가.
“제이드 님의 독수리가 돌아왔어…….”
그 승리의 독수리가 황금의 새가 되어 나타난 거다.
“카이로스에게 승리를 주려고 돌아온 거야…….!”
제이드가 죽고 난 이후 단 한 번을 볼 수 없었던, 토르티아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그 거대한 독수리의 재등장이 이리 극적일 건 또 무언가.
아침 태양의 빛을 온몸에 받으며, 황금색으로 빛나는 디케는 누가 보아도 카이로스의 승리를 알리러 온 것 같았다.
“제이드 님의 새라니……. 티벌은 진짜 끝난 거야.”
“제이드 님이…… 우리를 벌하러 오신 거야…….!”
승리의 새는 카이로스를 위해 빛나고, 타르타니의 숲은 티벌의 멸망을 위해 다가왔으니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준비된 이들이 덮쳐 오는데 어떤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에단의 타르타니가 움직일 때부터, 이미 승패는 나 버린 거다.
“……제이드 님의 독수리라.”
그것도 모자라 토르티아 사람 모두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죄책감을, 그에 대한 공포를 이토록 대놓고 이용하다니. 맥스는 공포에 질려 사색이 된 채로 우왕좌왕하는 티벌의 군사들을 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건, 조금 너무한데.”
맥스는 묵묵히 허공을 나는 디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고고한 독수리,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다.
거짓말처럼 제이드가 사망한 이후 아무도 처분하지 않았던 제이드 님의 독수리가 사라져 버렸다. 마치 그분께서 자신의 죽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그렇게 그의 새를 다시 돌려 보낸 것만 같았다. 벤과 맥스가 슬픔에 젖은 공주님을 위해 그 새를 얼마나 찾아헤맸는지 모른다.
“저걸 또 이리 보네.”
같은 새가 아니란 것쯤은 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맥스는 하늘을 나는 디케를 보며 절로 그리운 마음이 올라왔다.
‘맥스! 정말 이럴 거야!’
‘위험하다고요, 공주님. 이래 봬도 맹금이라니까요?’
아, 정말. 노장의 추억을 이토록 후벼 파실 건 또 무언가.
저 멀리, 선명한 붉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티벌은 포위되었고, 그가 있는 마지막 성루까지 황금의 군대가 들어찼다. 자연히 그를 둘러싸는 프래카를 둘러보며 맥스는 작은 웃음을 뱉었다. 한껏 피를 뒤집어쓴 검은 머리의 루카스가 천천히 올라와 그런 맥스를 마주했다.
“토르티아 최고 사령관 맥스 퓨레. 카이로스의 이름 아래 투항하라.”
한 번쯤은 품에 안고 죄송하다고 울어 보고 싶었는데, 역시나 사치였나 보다.
맥스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오래된 검을 뽑았다.
아. 하필 이 검마저 그분께서 하사한 것이 아닌가.
“이미 티벌의 성주는 투항하였다. 고집부리지 말고, 투항해.”
“그럴 수야 없지. 내가 이 나라에 바친 세월이 있는데.”
루카스는 순간 아차 싶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맥스의 저 미소. 너무도 진심이었으므로.
“나의 조국. 토르티아를 위해.”
그렇다면, 그다음이 뻔한 것을.
“나의 어여쁜 공주님, 로엘 님을 위해.”
그리고 평생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나의 주군. 나의 왕. 제이드 네아레스 님을 위해.
“잠…….!”
토르티아의 전성기를 함께한, 대장군 맥스 퓨레.
토르티아의 붉은 국기 대신 황금의 깃발이 뒤덮혀 가는 티벌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홀로, 쓸쓸히 마지막을 고하였다.
카이로스가 북방 정벌을 시작한 지 한 달.
열네 번째로 토르티아의 최고 수성 티벌이 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