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 황금의 새가 날아오른다는 것은
“로엘 님의 미르 성 점령으로 시작해서, 이반 황자의 보울 성, 루카스 장군의 나시베 성까지 총 14개의 성이 카이로스의 군에게 점령당하였습니다.”
“여기에, 테바로스의 데릭 황제의 군대가 무서운 기세로 토일강까지 근접해 오고 있으며, 토일강 동쪽 지방은 이미 테바로스에게 넘어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희 군의 피해는,”
“그만.”
조지 황제는 그만 보고하는 장군의 말을 끊었다. 약 기운이 떨어졌는지, 또다시 두통이 느껴지는 거 같았다. 조지 황제는 한껏 얼굴을 찌푸리며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니까, 지금 그 로엘이 미르 성 일대를 점령했다고?”
“그렇습니다. 황녀님.”
“그게 가능해? 무슨 수로, 그년이 그런 일을 해!”
로엘의 소식을 전할 때 당연히 에리카의 이런 반응을 예상한지라 아무리 그녀가 씩씩대고 고함을 질러도 장군들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로엘 님에 대한, 이 자격지심이 어디 한두 해의 일인가. 어린 시절 장군들이 로엘과 친하게 인사하는 것조차 경을 치던 그런 황녀님이다. 그런 로엘 님이 당당히 대국 카이로스의 프란시아가 되어 토르티아로 오고 있다는데, 어찌 저 성질에 그 사실이 가만히 받아들여지겠는가. 이미 이렇게 보고하기 전에도, 로엘 님이 선봉으로 오는 것 자체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도대체 미르 성 성주는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깟 로엘 하나 못 막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성주가 된 거냐고!”
“미르뿐만이 아닙니다. 미르, 요르에 나르와 타르까지. 전부 일주일 만에 로엘 님께 함락당했습니다.”
장군들의 보고를 그저 듣고만 있던 벤 장군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쉼 없이 올라오는 긴급 소식이 너무도 많아 이제는 속보라며 달려오는 이들이 놀랍지도 않았다. 카이로스가 토르티아의 성 또 하나를 점령했구나 하며 덤덤히 받아들였다.
“미르는 새벽 기습으로 단번에 성주를 제압하였고, 요르는 미르가 함락당한 그 당일에 채 준비도 하기 전에 미르 내에서 포섭한 군사들을 데리고 바로 함락하셨지요.”
“뭐라고? 그렇다면 토르티아 군인이 반나절 만에 로엘의 군사가 되었다는 거야? 그런 배신자 놈들을 보았나……!”
“아니요. 기본적으로 타르타니 내에서 보기 드물게 물자 왕래가 많은 미르의 특성상 용병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으니 일부러 요르를 건너뛰고 미르부터 공격을 하셨겠지요.”
“이리. 토르티아의 황녀님께서도 모르시는 바로 그 사실을 이용하려고요.”
벤의 말을 이어 맥스가 정확히 에리카를 직시하며 말했다. 네가 무시하는 그 로엘은 네가 전혀 몰랐던, 아니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던 토르티아 외곽의 그 작은 성의 특성마저 꿰고 있었다고. 그래서 그 정보들을 모아 이리 멋지게 다른 나라에게 첫 승을 가져다주었다고.
벤과 맥스는 그 모든 로엘의 업적을 숨기지도 덜어 내지도 않은 채 정확히 전달했다.
“요르까지 그렇게 점령된 후에는 나르가 제대로 대비하여 수성하려 했으나, 요르의 소식에 이미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여서 로엘 님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성주가 죽고 난 후 그 어린 아들이 성주가 된 지 얼마 안 된 타르는 나르의 소식이 당도하기도 전에 바로 항복을 하였고요.”
“나약해 빠져 가지고선……!”
에리카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벤과 맥스의 보고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토르티아의 패전 소식을 전하는지, 로엘의 승전 소식을 전하는지 헷갈릴 정도로 그들은 로엘의 업적을 줄줄 나열하고 있었다. 로엘의 이름을 듣는 것 자체가 심기를 거스르는데 이런 승전 소식이라니. 에리카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속에서부터 타올랐다.
“그렇게 로엘 공주님께서,”
“누구 멋대로 공주님이야!!”
습관처럼 맥스의 입에서 나와 버린 공주라는 단어에 에리카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지 않아도 다른 장군들 입에서도 계속 로엘 님, 로엘 님 하는 것이 거슬렸는데 심지어 공주라니. 겨우겨우 참고 있던 그녀의 화가 바로 터져 버렸다.
“다른 나라의 첩이 되어서, 토르티아를 쳐들어오는 게 어떻게 공주야?!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붉으락푸르락. 목소리는 더 앙칼져 갔고, 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이미 다른 사람이 보이지도, 다른 말이 들리지도 않는 상태라 조지는 더 심해져 오는 두통에 머리만 꾹꾹 누를 뿐이었다.
거친 말과 상스러운 욕이 더해져, 듣는 이가 다 민망하고 불편한데도 에리카는 그런 심한 욕들만으로는 로엘에 대한 이 주체할 수 없는 화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겨우 목숨을 살려 줬으면 어떻게든 조국의 도움이 되려 하지는 못할망정 감히 뒤에서 칼을 꽂아?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계집 주제에!!!”
그러한 그녀의 패악에 그 누구 하나 말리지도 동조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또한 언제나처럼 제풀에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오히려 그러한 그들의 태도가 에리카의 화를 더 돋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떤 입장을 취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저 들을밖에.
“누가 반역자의 딸이 아니랄까 봐!!”
“황녀님!!”
그런데 그런 그들조차도 차마 넘길 수 없는 단어가 튀어나와 버렸다. 자신들의 검을 꾹 쥔 채로 눈을 감고 최대한 그 모든 욕들을 참고 듣기만 하던 벤과 맥스의 입에서 결국 큰 소리가 나왔다. 꽝 소리를 크게 울리며 검을 바닥에 내리친 두 사람은 약속이라 한 듯 동시에 에리카를 불렀다. 아무 감정도 의욕도 없다는 두 사람의 눈이 매섭게 일렁이는 것을 보자 에리카도 순간 입이 딱 다물어졌다. 그리고 감겨져 있던, 조지의 눈마저 다시금 떠졌다.
“제이드 님은 토르티아의 반역자가 아닙니다.”
“말씀, 가려 해 주십시오.”
감히 어디서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냐고. 감시 어디서 황녀에게 소리를 지르냐고.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려는 마음과 달리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한 번만 더 반역이란 소리가 나왔다간 저 노장들의 검이 자신의 목을 단번에 날려 버릴 거 같았으니.
에리카는 저도 모르게 자신이 겁을 먹어 버렸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질끈 물고, 화에 못 이겨 떨려 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놈의 제이드. 정말 진절머리가 난다.
“로엘 님께서 하나하나 성을 함락할 때마다 언제나 자신의 프란시아 깃발이 아닌 카이로스 황제의 깃발만을 꽂았다고 합니다.”
모든 선봉장들은 각자의 깃발을 가지고 있다. 루카스에겐 세버 가문을 상징하면서 루카스 자체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이. 이반에게는 카이로스 황자이자 이반만을 상징하는 노란 깃발이. 그리고 로엘에게는 프란시아를 상징하는 그녀의 깃발이 존재한다. 자신들이 이 성을 점령한 선봉장이었다고. 우리의 부대가 이 성을 점령하였다고, 그 공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물론,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는 카이로스를 상징하는 황금의 깃발을 걸어 놓으나 그 이외의 성벽에는 자신들의 고유 깃발을 종종 달았다.
그래서 한창 루카스가 땅따먹기를 할 때는 검은 깃발이 줄을 이었고, 이반이 북방 국경을 죄다 정리할 때는 노란 깃발이 국경을 따라 펄럭였다.
“마치 그분처럼 말입니다.”
벤의 눈이 이번에는 정확히 조지를 향했다.
선봉장의 고유 깃발을 꽂는 일. 어찌 카이로스 만의 일일까. 토르티아 역시 그러했다.
그건 나라에 상관없이, 지방에 상관없이 모두의 공통된 관행과도 같은 일이므로.
그런데 제이드는 그걸 하지 않았다.
‘이건 나의 승리가 아니야. 토르티아의 승리지.’
벤과 맥스의 귀에 여전히 선연히 들리는 것만 같은 그 목소리.
마치 어제 보았던 것처럼, 여전히 선명히 아른거리는 호탕하게 웃던 그 모습.
로엘이 카이로스 황제의 깃발만을 꽂았다는 소리를 듣고 벤과 맥스는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찌도 이리 빼닮으셨는지.
먹먹함과 울컥함이 복받쳤다.
“그리고 모든 성주께 똑같은 말을 전했다지요. 모든 영광과 충성은 카이로스 에단 황제께 돌리라고.”
“이 역시, 그분처럼 말입니다.”
이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바로 그 이름. 조지 황제를 바라보는 벤과 맥스의 눈동자가.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토르티아 장군들의 눈동자가 무언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께 그렇게 충성을 맹세하던 그분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어쩌면 폐하께서 들을 수 있었던 말일지도 모르겠군요.”
만일 당신이 제이드 님을 그렇게 가게 만들지 않았다면. 만일 당신이 로엘 님을 그런 식으로 추방하지 않았다면. 그 충성들과 그 영광들은 토르티아를 향했겠지. 그렇게 조지 황제 당신의 치세가 하늘을 찔렀겠지.
그 모든 것을 어리석고 무능한 당신이 스스로 망쳐 버렸다고.
그렇게 토르티아의 영광이 끝나 버렸다고.
“……나시베와 보울까지 점령하였다면 이제는 티벌 하나 남았습니다.”
그들의 말에 이제는 역정조차도 내지 못하는, 너무도 무기력해진 조지 황제를 보며 장군들은 더더욱 허무함이 몰려왔다.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황제를 두고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벤은 조지 대신 침묵을 깨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티벌 다음은 토르티아 본성입니다.”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습니다. 폐하.”
그러니 정신 좀 차리시라는 그 생략된 한마디를 그들은 꾹꾹 눌러 담아 삼켰다.
전쟁을 시작한 지 고작 2주 만에 티벌이라니. 제이드 님이 살아 계셨다면 이미 미르에서 막혔을 것을.
“알아서들 하시게.”
거기에 고작 저 한마디 듣고자 이곳에 모두 모였다니. 자조적인 실소가 장군들 모두의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더 이상 내릴 명도, 들을 말도 없어 조지 황제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카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가는 조지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장군들 역시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카이로스가 토르티아 정벌을 시작한 지 14일째.
토르티아는 뒤늦게 티벌로의 지원군을 출병시켰다.
***
타르타니는 중부과 북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숲이다. 단순히 경계를 세우는 수준이 아니라, 그 숲의 지류가 끝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북방의 사람들은 타르타니가 북의 모든 곳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와……. 대단하긴 하네요.”
“그렇지?”
나무 한 그루일지라도, 한 줌의 흙일지라도 말이다.
북방의 그 모든 것들은 위대한 숲 타르타니로부터 시작되었다.
걷고 또 걸어도 끝이 나오지 않고, 태양이 떠올라도 쉬이 빛이 드리우지 않는 숲.
오직 허락된 자들만이 타르타니의 가호 아래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오직 타르타니의 자손만이 이 험난한 곳에 터를 이루게 될지니.
붉은 민족 토르티아는 그 타르타니의 가호를 받는 타르타니의 아들, 딸들이다.
“이렇게 큰 성이, 이렇게 깊은 숲속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티벌 성은 그게 제일 큰 특징이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거든. 타르타니 한가운데에 이런 성이 버티고 있으리라곤.”
겨우겨우 타르타니를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떡하니 등장하는 또 하나의 숲 같은 거대한 요새. 웬만한 도시국가의 수도 정도는 되는 커다란 성이다. 워낙 나무들이 우거지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타르타니의 특성상 자신이 어느 정도, 어느 위치까지 왔는지 가늠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저 하염없이 또 걷고 걷다 보면, 그렇게 지쳐서 더 이상 한 걸음도 걸을 수 없게 되는 바로 그 순간 티벌이 등장한다. 절대 열릴 거 같지 않은 굳게 닫힌 성문과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디높은 성벽과 함께.
“분명 미르 성도 숲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이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네요. 마치 숲 전체가 성을 보호하고 있는 거 같아요.”
“정확한 표현이야. 그래서 티벌 성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있어. 티벌 성은 타르타니 숲이 지켜주고 있다고.”
미르 성의 약 20배에 달하는 티벌성은 지대가 높은 곳에 있는 로엘 부대가 위에서 내려다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티벌 성을 알고 있던 로엘마저 이 웅장함에 압도당하는데 아마 이를 처음 본 카이로스의 사람들은 더 놀랐을 거다.
‘타르타니에 둘러싸인 토르티아 성이 어디 한둘인가 뭐.’
‘그래도 티벌은 달라. 절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몰라. 그 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로엘 역시 딱 한 번 와 보았던 성이다. 그것도 어렸을 적, 굳이 아버지가 영지 시찰에 데리고 갔던 바로 그 성이다. 아버지의 말에 함께 올라 티벌을 처음 내려다본 그 순간, 어린 로엘 역시 탄성을 내질렀다. 한여름 날, 타르타니를 거쳐 오느라 덥고 지쳤을 때 등장한 이 성은, 마치 다른 세상과 연결된 문과도 같았다. 그래서 저 성벽을 얼마나 뚫어져라 고개를 젖히며 올려다보았던가.
“……그랬었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라 로엘의 입가에 저절로 작은 미소가 걸렸다. 토르티아의 땅에 들어와 타르타니를 가로질러 오면서 로엘은 참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애써 외면하고 생각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토르티아 땅을 밟으며 타르타니의 숲 내음을 맡는 순간 저절로 찾아오는 이 안정감.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해 온 것들에 대한 익숙함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도, 낯설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더 강해지고, 그리워지지.”
그래서, ‘조국’이라는 거다.
아무리 발버둥 쳐 보았자, 그녀는 토르티아의 사람.
그렇다면, 애써 부인할 이유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면 그만.
그녀가 추억을 떠올리고, 그리움에 사무치는 것 역시 그녀의 마음이다. 그걸 인정하자 로엘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티벌 성은 토르티아 본성으로 가는 타르타니의 마지막 관문이자, 가장 큰 난관이기도 해. 많은 이들이 타르타니에서 한번 좌절했다면, 티벌은 그 타르타니를 넘은 이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는 그런 성이니까.”
그가 선물해 준 적마, 레아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로엘은 시에라에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장 우리가 타르에서부터 출발해서 이렇지, 그러지 않았으면 국경에서 여기 타르타니를 거쳐 오는 동안 가져온 군물자를 진작 다 써 버렸을 거야.”
“충분히 그러고도 남죠. 여기까지 어디 좀 멀고 좀 험난해요. 물자의 문제도 문제지만, 중간에 한 번씩 쉬어 준 것도 아주 큰 도움이 되었어요.”
워낙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쉬었다는 표현이 조금 어색했지만, 그래도 길바닥이 아닌 성안에서 숙식을 취한다는 건 군사들의 체력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로엘의 프란시아 부대도, 그 외 다른 성들을 거쳐 온 카이로스의 부대들도 지금껏 이곳 티벌을 함락하러 온 다른 이들보다는 훨씬 체력이 좋을 거다.
“당연히, 이 역시 그가 모두 계산할 일이 테지만.”
어디 그뿐일까. 언제든 물자를 지속적으로 댈 수 있는 성들을 확보해 놓음으로써 물자 걱정을 덜고, 그들로부터의 지원을 차단시키며,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후방으로부터의 공격을 사전에 없애 오로지 티벌 성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숲이 티벌 성을 둘러싸 보호하는 만큼, 그 역시 그 숲을 둘러싸는 모든 성들을 따로따로 점령하여 들어오면서 여기까지 다다른 거다.
“……아무튼, 대단해”
로엘은 저 멀리, 그녀와는 반대쪽, 평지로 걸어온 에단의 황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에단이 그들을 일부러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게 너무도 좋은 묘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더 나아가 어쩌면 데릭의 도발은 명분이었을 뿐 에단은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두었을지 모른다.
“슬슬 우리도 합류해 볼까?”
“네. 로엘 님.”
로엘이 천천히 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시에라와 그 뒤의 키로스들도 그녀를 따랐다.
에단뿐 아니라 루카스의 프래카, 이반의 북방군 모두가 이미 진을 치고 대기 중이었다.
아마 데릭은 약조대로 토일강까지 점령을 마치고 이곳으로 합류할 거다. 그 약삭빠른 성격을 고려했을 때, 아마 티벌 성의 승전 소식을 듣고 나서야 이곳에 등장할 테지만.
로엘은 이동을 하면서도 뚫어져라 티벌을 쳐다보았다.
그녀도 십 몇 년 만에 보는 건데, 정말 조금도 달라진 바 없이 여전히 웅장하고 견고했다.
가히 토르티아를 지키는 요새라 불릴 만하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번 티벌의 담당은 폐하의 황군인 거네요.”
“뭐 굳이 따지자면 그런데, 애초에 한 부대로 점령할 수 있는 그런 규모의 성이 아니라 이리 다같이 모여서 공성을 하는 거지. 선봉이 폐하라는 사실에 의의가 있을 뿐.”
“그게 제일 중요하죠. 다른 분도 아닌 폐하시잖아요. 누구든 무얼 걱정하겠어요.”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시에라의 말에 로엘은 작게 웃고 말았다. 정말 카이로스 사람들의 에단에 대한 이 뿌리 깊은 믿음 역시 흔들리지도, 작아지지도 않을 거 같다. 지금까지 실컷 이 성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지, 진짜 점령하기 어려울 거라고 말해두었는데 결론은 에단이니 괜찮을 거라니. 무뚝뚝하고 이성이 늘 앞서는 시에라의 입에서마저 이런 말이 나오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정말 그는 그들에겐 신인가 보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는데 저 새,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새?”
“네. 저 거대한 독수리요.”
시에라가 가리키는 허공으로 시선을 따라가자, 로엘도 그제서야 티벌 성문 앞에서 멀지 않은 평지에 그림자를 깔며 유유자적하게 날고 있는 독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독수리를 보는 순간 로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왠지 우리 진영에서부터 날아간 거 같은데요? 티벌 성 쪽으로요.”
너무도 낯익은 날갯짓. 잊혀진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주기적인 울음소리.
무엇보다도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저 건방진 시선까지.
“와. 근데 진짜 크네요. 저렇게 큰 독수리는 난생처음 보는걸요? 타르타니 숲을 지나면서 독수리는 한 번도 못 봤던 거 같은데, 이 숲에 독수리도 있나 보네요.”
이건, 의심이 확신이 될 수밖에 없다.
로엘의 시선은 자연히 이 먼 거리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그리고 저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명확히 보이는 그에게로 향했다. 왼쪽 팔에 차고 있는, 새 사냥 때 끼는 두꺼운 토시까지.
정말, 이 남자. 어디까지 준비한 걸까.
“독수리는 없어. 타르타니에.”
“네? 그럼 저건 독수리가 아닌 걸까요?”
“아니. 독수리 맞아. 누가 봐도 저 크기는 독수리잖아? 어느 대단하신 분께서 이 대계를 위해 굳이 데려온 거겠지. 친히 이곳까지 말이야.”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더 진해졌다. 그에게 저 독수리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이런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니. 그녀가 필요하다던 그 말이 어쩌면 예의상 하는 말이었는지 모른다. 이토록 완벽히 모든 것을 꿰고 있는데, 북의 사람이 뭐 필요할까 싶다.
“그게 무슨…….”
“우리도 저 엄청난 새를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소리. 자, 가자. 시에라.”
설마하니 저 귀한 새를 또다시 보는 날이 올 줄이야.
로엘은 아론과 루카스가 알지 못했던, 그 비싼 새의 용도를 너무도 알 것만 같아 계속 웃음만이 나왔다.
얼른 그에게로 달려가, 그 음흉한 계획을 단번에 알아맞혀 줘야겠다.
“이랴!”
천천히 걷던 레아의 옆구리를 살짝 차 주자, 레아는 바로 큰 울음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수많은 키로스들이 열을 맞추어 뒤따랐다.
당당히 프란시아의 깃발을 휘날리며.
***
“프란시아님의 부대가 도착하였습니다!”
카이로스의 전 부대를 울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로엘의 당도를 알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부대가 경쟁하듯 전투에 참여하여 다들 다른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로엘과 그녀들, 즉 프란시아 부대의 활약만큼은 실시간으로 전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그들의 존재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프란시아님께서 선봉에 서시는 것만으로도 세간의 이슈였는데, 심지어 그 부대가 전원 여성인 키로스 부대였다. 황궁에서 황제의 여인들을 지키는 무장 시녀들이 있다고는 얼핏 들었으나 키로스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로엘의 프란시아 부대로 인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린 셈이다.
무장 시녀라기보다는, 여자인 황군에 더 가깝다는 것. 그녀들 역시 엄격한 훈련을 통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선별이 된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전쟁에 나서도 전혀 남자 병사들에게 밀리지 않는, 아니 황군에 견줄 만한 실력을 가졌다는 것까지.
로엘의 말도 안 되는 연승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프란시아 부대의 이야기는 살에 살을 붙여 널리 널리 퍼져 갔다.
카이로스뿐 아닌, 테바로스와 토르티아에까지도 말이다.
“프란시아님!!!”
“우와아아!!!”
로엘이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높게 묶은 붉고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적마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은 출정식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는 하늘하늘한 베일에 가려 아름답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축복을 내려 줄 것 같은 여신님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당장에라도 이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줄 것 같은 당찬 여전사의 모습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결국 그들의 눈에 로엘이 여신으로 보인다면, 그것만으로 그녀는 프란시아 임무를 너무도 완벽히 달성한 셈이다. 프란시아의 존재가 카이로스의 있다는 것만으로도 카이로스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적들의 사기는 땅으로 꺼질 테니 말이다.
“프란시아님! 프란시아님!!”
그렇게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로엘이 주 부대에 도착하고, 키로스는 바로 각자의 자리에 가 대열을 맞추었다. 로엘이 시에라에게 부대 정돈을 지시하고, 레아에서 내려오기가 무섭게 루카스가 제일 먼저 그녀에게 달려왔다.
“로엘 님!”
반가워하는 그 모습에 로엘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도 아니었건만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장군님. 나시베 성의 대승을 축하드려요.”
“에이. 그걸로 축하받으려면 제가 로엘 님을 더 더 축하드려야죠. 대승이자 연승을 축하드립니다, 프란시아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프란시아님!”
루카스의 요란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주변의 프래카들 역시 허리를 깊게 숙여 로엘의 승전을 축하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프란시아님!”
연이어 약속이라 한 듯, 나머지 황군들 역시 바로 그녀에게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일제히 숙여지는 그 황금의 병사들의 축하 인사에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다소 과한 경향이 있지만, 이들 역시 자신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있다는 마음이 전해져 고마웠다.
“승전을 축하합니다. 카이로스.”
그러니 그녀 역시, 자신의 승리뿐 아니라 각자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감사를 표했다. 나의 승리가 곧 그들의 승리이고, 그들의 승리가 곧 그녀의 승리이며, 이 모든 승리가 곧 카이로스의 승리임을.
병사들을 향해 감사를 표하는 것이 그녀의 진심 어린 한마디에 전부 담겨 있었다.
“프란시아님을 뵙습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아론 경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루카스에 이어 아론 역시 그녀 곁에 와 인사를 건넸다. 에단의 독단으로 그렇게 로엘을 보내고 난 후 아론이 얼마나 불만이 많았을지는 전해 듣지 않아도 뻔히 알 것만 같았다. 아마 많은 반대를 했겠지. 특히 키로스를 데리고 프란시아 부대를 구성하여 갔다는 그 소리에 당장이라도 지원군을 보내든 그녀를 회군시키든 하라고 난리를 쳤을 거다. 이미 결정을 내린 에단이 무서워 그 앞에서는 한 번 이상 말하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믿어 줘서, 고마워요.”
아론을 향해 옅게 미소 짓는 그녀에게 아론은 어색한 헛기침을 뱉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뻔히 알면서도 이리 말하는 그녀가 조금은 얄미웠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속마음을 들킨 거 같아 조금 부끄러웠다.
“……딱히 그런 적이 없습니다.”
만일 이 계획을 아론에게 사전에 상의해 왔다면 아론은 분명 반대했을 거다. 그건 이렇게 로엘의 완벽한 연승을 보고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아론이 로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미 로엘이 출정을 하였고, 에단이 미르 지역을 맡기기로 결정하였으며, 로엘이 밤에 타르타니 숲길을 소수 정예를 끌고 미르로 제일 먼저 달려갔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아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 나게도 그녀가 아주 최적의 것들만 선택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아론 경께서 일부러 키로스 부대에게 처음부터 미르 지역 교육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폐하의 갑작스런 결정이 아니더라도, 키로스를 미르 전투에 투입하실 계획이셨겠지요.”
까칠한 아론의 대답에 오히려 로엘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아무튼 자존심하고는.
처음부터 그녀를 믿지 않았다면 이 전쟁에 그녀를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다. 아마 기를 쓰고, 에단을 말렸겠지. 아론 역시 그녀를 믿었기에, 이리 키로스가 참전하는 것까지 수용한 거다.
그러니 고마울밖에.
“나의 키로스를 대표하여 이 전쟁의 총전략가, 아론 경께 감사를 표합니다.”
모두가 정신없을 만큼 급박하게 진행되는 전쟁이라, 이 고마움을 표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리 우연히 기회가 생겼으니 로엘은 망설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인 그녀의 인사에 순간 아론은 귀가 새빨개졌지만, 그녀의 미소는 여전했다.
이런 반응 역시 예상한 거여서, 그저 언제나 빳빳한 이 순진한 그의 지략가도 그저 귀여워 보였다.
“그럼 저는 이 나라의 황자로서 프란시아님께 고마움을 표해야겠군요.”
“황자님.”
이어지는 익숙한 목소리. 자연히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을 받아 옆에 두는 이반은 어느새 그녀의 곁에 와 있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프란시아님을 뵙습니다.”
로엘은 타르 전쟁이 끝난 후 이곳 티벌로 오면서 뒤늦게 이반의 소식을 들었다. 이반 역시 예상보다도 빨리, 훨씬 적은 피해로 임무를 완수했다는 소식에 내심 뿌듯했다.
먼 외지, 북방에서 고생한 이반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모두에게 보여 준 것 같았다.
심지어 이반이 골라 맡은 곳들이 여간 까다로운 곳들인가.
“저야말로 황자님의 승전을 경하드립니다.”
직접 발로 가서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쉽사리 점령하지 못했을 그런 곳들뿐이란 사실을 그녀는 잘 알기에, 이반의 이 승전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역시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라 만만하게 보기 쉽지만, 어느 곳보다도 힘든 곳임을 압니다. 이리 미리 손써 두지 않았더라면, 나중에 두고두고 골치 아팠겠지요. 그러니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그 어려운 곳을 이리 쉽고 빠르게 해결해 주셔서. 아마 이반 황자님이 아니셨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너무 대놓고 하는 칭찬들. 굳이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아도 되는 쓸데없는 사족까지 붙여 로엘은 열심히 이반의 공적을 높여 칭찬했다. 같이 고생한 콜린은 그런 로엘이 이뻐 죽겠지만, 이반은 그 노골적인 의도가 너무 뻔히 보여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네아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분했었나 보다.
이반에 대한 카이로스 사람들의 태도가.
“이리, 무사히 돌아와 주신 것은 더 감사드리고요.”
그렇게 한참 이반을 대놓고 치켜세우다 갑자기 훅 나와 버린 그녀의 진심 어린 한마디가 순간 이반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정확히 이반이 로엘을 보자마자 하고 싶었던 말이라.
하지만, 이반 역시 여전히 미소 짓는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를 올려다보며 ‘무사해서 다행이야.’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도 어린 시절, 그가 자리를 한동안 비웠다 돌아왔을 때 그를 보던 어린 네아의 눈이라 순간 그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저 역시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런 이반의 마음 역시 안다는 듯, 그녀가 먼저 하지 못한 그의 말에 답을 했다.
“이번에도 말이에요.”
싱긋 웃는 그녀의 대답에 이반은 피식 웃고 말았다. 네아의 추억이 가득한 대답이었으니까.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사라지는 이반을 네아는 기약 없이 기다렸고, 주기적으로 황실로 돌아가야 하는 네아를 이반 역시 기약 없이 기다렸다. 그사이 엇갈림도 많았고, 기다림도 길었지만 항상 무사히 돌아오라는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아 그렇게 몇 번을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
“이번에도 그러하셨구나. 감사하게도.”
그 기약 없는 만남과 헤어짐이 익숙해질 때쯤 영원한 이별이 찾아와 버렸나 했는데, 운명의 장난으로 이리 만나 버렸고, 다시금 이런 추억을 되짚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네, 황자님.”
이리 추억을 공유하는 순간에도 이제는 마음의 거리낌이 없었다. 숨길 필요도 없었고, 애써 외면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이 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두 사람은, 저절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저도 그러하였습니다. 프란시아님.”
그래서 이리 서로를 보며 짓는 미소와 이 눈빛에도 더 이상 남녀가 아닌 남매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만 남아 버렸나 보다.
“조심……!”
물론, 그런 남매간의 눈빛마저도, 꽤나 못 마땅한 이가 있어서 문제지.
갑자기 로엘과 이반에게 돌진해 오는 그 커다랗고 귀하신 독수리 덕분에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츠렸지만 채 그들에게 닿기도 전에 독수리는 방향을 꺾어 다시 날아올랐다.
“와씨. 놀라라……. 폐하! 위험하잖아요!”
옆에 있던 루카스와 아론 모두가 다 놀란 상황이라, 바로 로엘부터 지키려고 했던 루카스가 제일 먼저 소리쳤다.
“폐하. 진짜 놀랐다구요.”
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그 독수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유유자적하게 하늘을 날더니, 이내 부드럽게 그의 팔에 안착하였다. 이번에도 그의 품에서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루카스는 분통이 터졌다.
“못 살아…….”
당연히 그녀의 입에서도 어이없다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모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와중에 홀로 여유로운 그 남자는 이 난리통에서도 느릿하게 걸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황금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흔들림 없는 황금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를 향했다.
아. 이 얼마 만에 만나는 건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그 애매한 기간 속에서 그녀는 그를 얼마나 생각했던가.
“이리 와. 프란시아.”
매일, 매 순간 생각했다.
마치 그가 그러한 것처럼.
“나의 하늘. 카이로스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에단의 등장에 자연히 로엘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졌고,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어서, 로엘의 뒤에 있던 프란시아 부대원들의 허리도 깊게 숙여졌다.
느릿한 그의 발걸음이 점점 더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그녀에게 곧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작해야 20일 남짓 보지 못했을 뿐인데, 그 기간이 무어라고 그리도 애틋한지. 그녀의 눈에 그가 들어오는 순간 울컥할 뻔했다. 당장이라도 그의 품으로 달려들어 그가 괜찮은지,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프란시아.”
그런데 그 마음이 어찌 그녀만의 마음일까.
그녀를 부르는 그 낮은 목소리에도 같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 감정이 실리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지만,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애정이 깃들었고, 그 애정을 그녀는 느낄 수 있다.
닿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들.
로엘은 그거면 되었다.
“프란시아의 부대. 폐하의 명을 받아 미르와 요르, 나르와 타르를 수복하였음을 고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프란시아의 일을, 그리고 그는 황제의 일을 하였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군더더기 없는 보고가 이어지고, 그녀는 깊이 숙였던 허리를 다시 폈다. 그렇게 정확히,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눈앞의 그를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더 선명히, 그를 감싸는 그의 황금빛들이 반짝였다.
이 험한 전쟁터에서마저 이리 아름다울 건 또 무언가.
로엘은 시도 때도 없이 빛이 나는 그를 빤히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러니 사람들이 그를 신의 축복을 독차지한 신의 아이라 칭하나 보다.
“그 모든 영광은 오직 카이로스의 황제 폐하께 바칩니다.”
좀 더 힘이 들어간 목소리와 강한 어조로, 그곳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그녀는 프란시아로서의 마지막 한 마디까지 완벽히 하였다.
저 길지 않는 한 문장을 널리 널리 알리기 위해,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리의 여신이라 불리는 이의 축복과 영광을 한 몸에 받는 자. 그분이 바로 우리의 황제시라고. 그러니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카이로스는 승리하리라고.
“모든 영광은 오직 카이로스의 황제 폐하께!”
그렇게 이 믿음이 수많은 이들을 통해 전해지고 또 전해지겠지.
아론은 매우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정말 완벽히 프란시아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한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폐하를 위하면서.
“……그 영광 받기로 하고.”
문제는 그 프란시아의 축복을 받는 분께서, 그에 대해 상당히 시큰둥하다는 거지만.
그는 주변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는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목을 당겨 그의 품에 안았다.
“으왓!”
그렇게 그녀를 숨기다시피 꽉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안은 채 말했다.
“나머지는 해산. 각자의 위치로.”
“각자의 위치로!”
다행히 그 어심을, 그곳 모든 이들이 전부 알아챘다.
그의 입에서 나온 해산이라는 두 음절에 다들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주변으로 삼삼오오 흩어졌다. 그래서 더 로엘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일부러 그녀의 곁에 철저히 다가오지 않을 때는 언제고, 또 이렇게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티를 낼 것은 뭔가.
“정말, 폐하……!”
“프란시아도 본인의 위치로.”
“네?”
“따라오란 소리야.”
프란시아의 위치는 언제나 황제의 곁이므로.
불평하려는 그녀의 말 따위는 딱 잘라 버린 채,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을 통해 언제나처럼 차가운 그의 손에 그녀의 온기가 전해지고, 그녀만이 볼 수 있는 부드러운 미소가 이제야 그의 입가에 걸렸다.
그가 워낙 철저히 그녀를 멀리하여 이 기나긴 전쟁 중에는 닿을 일 없고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또 왜 이러시는 건지. 로엘은 그의 변덕에 작은 한숨을 삼켰다.
물론, 조금도 싫지 않았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막사로 가시는 거 아니셨어요?”
“원한다면 그리로 가고. 물론, 들어가는 순간 내일 아침까지 안 내보낼 테지만.”
“폐하……!”
절대 농담이 아닌, 아주 현실성 다분한 그의 말에 로엘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혹여라도 그랬다간 이 많은 군사들 사이에서 무슨 소문이 돌겠나. 로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혼자 상상하고 혼자 걱정하며 혼자 결론 내리고 혼자 결심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전부 얼굴에 드러나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가면서도 그를 웃게 만들었다.
이리 허술하고 빈틈 많은, 이 투명한 여자가 여신이라니. 그의 눈에는 그저 여전히 어리고 여린, 그의 여인일 뿐인데.
“폐하. 어디까지 가시려고요. 타르타니는 이렇게 함부로 깊이 들어가시면 안 된…… 우와.”
뭐가 그리 걱정인지, 그가 사람들을 피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감에 따라 그녀의 잔소리도 길어졌다. 그런데, 그 종알종알 쉬지 않고 말하던 잔소리는 에단의 예상대로 그가 원하는 장소가 닿자 바로 뚝 그쳤다.
“아니, 그 정신없는 와중에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
“능력껏.”
“아무튼 잘났어, 진짜.”
말은 투덜거려도 얼굴이 환해질 정도로 그녀는 그에게 이끌려 온 비밀장소를 좋아라 했다.
굽이굽이. 유독 깊고 빼곡한 나무숲으로 되어 있는 티벌의 타르타니라, 그 근방 숲에는 나무에 가려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낮에 걸어와도 지금은 낮인지 오후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티벌의 숲에도 이렇게 해가 들어오는 곳이 있긴 했네요.”
그런데 그를 따라 조금 걸어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해가 들이치는 공터가 존재했다. 비록 크지는 않아도 몇 십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원형터. 그곳만은 빼곡한 나무들 사이를 피해 하늘 위 태양 빛이 곧이곧대로 들어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당신은 진짜…… 태양의 신이라도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하면 진짜 믿을 기세네.”
“네. 저 지금 진지하게 묻는 거예요.”
진심으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눈이라, 에단은 웃고야 말았다.
전쟁에 나올 때마다,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기 위해 에단은 항상 사색 공간을 따로 만들었다. 그것이 이와 같은 주변 숲속일 수도 있고, 말을 타고 조금 나가면 있는 평원일 수도 있다. 황자 시절부터 늘 하던 그의 전쟁에서의 버릇 같은 일이라, 이제는 아론과 루카스마저 호위를 데리고 가라 말하는 것도 포기한 상태였다. 그렇게 이곳 역시 우연히 찾게 된 건데 그게 그녀에게는 꽤나 신기한 일이었나 보다.
“아무튼, 이래저래 폐하는 운이 너무 좋아요.”
“알아. 부인할 생각 없어.”
“대신 겸손이 없지요.”
“그 역시 알지. 나에겐 필요가 없으니.”
“어휴!”
대놓고 잘난 그를 그녀는 흘겨보기 바빴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더 진해졌다. 이런 일상의 투닥거림.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이 피부로 와닿았다. 그래서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그 운 좋은 폐하 덕분에 이 예쁜 곳을 알게 되었네요.”
물론, 그녀 역시 말은 투덜대도 입가의 미소만은 그를 따라 진해졌다. 그가 그녀의 이리 곁에 있다는 이 안정감. 그녀야말로 요 며칠간 너무도 바라던 거였으니.
“여기, 마음에 들어요.”
해가 들이치는 만큼, 따스함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겨울임에도 풀꽃이 하얗게 올라왔다. 어두운 숲속 가운데의 꽃밭이라니. 마치 그에게 깜짝 선물이라도 받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 한가운데에 서서, 그는 그녀와 마주 보았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아름다운 황금의 머리가 빛나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 황금의 눈동자도 빛이 났다.
이제야 겨우, 제대로 마주한 눈.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올렸다.
“으응.”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드럽게 그녀의 뒷목을 감싸 왔다. 그 익숙한 열기와 익숙한 감촉에 그녀 역시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어 그를 반겼다.
진한 체취가 코 안을 가득 채우고, 뜨거움이 입안으로 번져 갔다. 금세 달아오른 몸의 열기에 심장이 빠르게 뛰며, 서로가 서로에게 닿아 뜨겁게 얽히었다.
“하아. 응……!”
얼마 만에 서로에게 닿은 걸까. 얼마나 애타게 그리웠던가.
가볍게 하려고 해도 가벼울 수가 없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한 키스가 한동안 이어졌다. 숨에 겨운 그녀가 작은 신음을 토해 내며 투정 부려도 그는 쉽사리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제대로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치다 보니 어느새 닿은 단단한 나무에 기대어 그녀 역시 그런 그를 강렬히 원했다.
“하아. 에단.”
“로엘.”
그놈의 ‘폐하’와 ‘프란시아’.
한동안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들은 호칭이다. 두 사람만 남은 지금에서야 둘은 겨우 오롯이 서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참을 이유가 있으랴.
“아. 에단……!”
그는 망설이지 않은 채, 두꺼운 옷으로도 숨길 수 없는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진영에 오자마자 무거운 갑옷부터 벗은 그녀를 칭찬하고 싶을 지경이다. 높이 묶은 머리 덕분에 훤히 드러난 하얀 목에 진한 자국을 남기며 그는 한동안 느끼지 못한 그녀의 체취와 온기를 원껏 누렸다. 나무로 둘러싸여 소리가 조금 울리는지라 혹여라도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 걱정에 그녀는 최대한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를 거부하진 않았다.
아니 거부할 이유가 없지. 그만큼이나 그녀도 그가 그리웠으니.
열기에 취해 볼은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신음을 내뱉는 그녀는 꽤나 위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를 놔주지 않겠다는 듯 꼭 안은 가늘기도 한 팔에 작은 키스를 남기며, 그는 그녀의 품에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막사로 가야겠는데. 아니면 여기서도 괜찮고.”
“절대! 절대 안 돼요. 절대!!”
“아닌 거 같은데…….”
“절대, 절대, 절대!”
짓궂은 미소와 함께 좀 더 바짝 그녀의 허리를 당기는 그의 가슴을 그녀는 애써 밀었다. 그러지 않아도 너무 오랜만에 닿는 그라서 심장이 미칠 것같이 뛰고 있었는데, 그녀를 원한다는 이 열기 어린 남자의 눈은 그녀를 너무도 쉽사리 무너트릴 수 있었다. 그러니 아주아주 위험한 눈이다. 그녀로 하여금 이성적인 생각을 못 하게 만드니까.
“프란시아. 축복을 내려 줘야지, 나에게.”
“이런 식으로 내려 준다고 한 적 없어요.”
“이보다 더 확실한 것도 없지 않나.”
“정말……! 좀!”
그녀를 애태우는 아슬아슬한 손길이 그녀의 척추를 쓸어 올리고, 그의 한쪽 무릎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일부러 지그시 뜨거운 중심을 눌러 오는, 그 익숙하고 애태우는 감각에 바로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로엘.”
거기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이 뜨거운 속삭임이라니. 로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곳은 인적이 드물고, 두 사람이 같이 있는 한 그 누구도 오지 않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려 했다.
가슴이 맞닿은 밀착된 거리, 아마 그의 귀에도 이 미친 듯한 심장 소리가 들리겠지.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열기가 아래로 쏠리는 것이, 어찌 그 뿐만일까.
그녀 역시도 부끄러울 정도로 그를 원했다. 그렇게 이 남자에게 안겨 그가 여전히 내 앞에, 언제나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장난이야.”
그래서 그녀의 입에서도 저도 모르게 허락의 대답이 나오려는데, 그보다 먼저 그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그러고는 잔뜩 긴장한 그녀를 안정시키듯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가 공주님을 그렇게 함부로 대할 리 없잖아.”
그 부드러운 손길에, 그녀의 몸에서 바로 힘이 풀렸다.
오만 가지 생각을 혼자 한, 그리고 저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허락을 잠시나마 하려 했다는 부끄러움에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물론 투덜거림에도 여전히 마주 안은 손에는 힘을 풀지 않았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됐거든요.”
조금 토라진 목소리에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고양이같이 점점 더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이 여자는 그저 제 나이에 맞는 어린 여인일 뿐인데. 어째서 그 사실을 그만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 작은 여인에게 다들 무얼 그리 많이들 바라는지.
에단은 잔뜩 힘이 들어간 그녀의 어깨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역시나 데려오지 말걸 그랬나 싶다.
“티벌까지 오시는 데 별다른 일은 없으셨나요?”
프란시아니 뭐니 하며 세상 앞에 내세우지 말고 그저 그 품 안에서 편히 지내도록 할걸 그랬나 보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는 거죠?”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이야.”
에단은 자신의 품에서 고개만 빼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며 말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녀는 그를 너무 걱정한다. 이 나라의 그 누구도 그런 종류의 걱정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 대해서 전혀 하지 않는데도 그녀는 끊임없이 그의 안위를 물었다. 그것이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아 그녀가 그럴 때마다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에게 괜찮으냐고 묻는 이 사랑스러운 이가 그의 겨울 같은 일생에 나타날 줄 예상이라도 했을까.
“너는? 어디 다치지 않은 거지?”
“그럼요. 저는 언제나 멀쩡하죠.”
“언제나 같은 건 없어. 그 누구도 다칠 수 있어. 심지어 루카스조차도.”
그러니 절대 자만은 금물이다. 언제 어디서든 그게 누구라도 다칠 수 있으며, 이 전장은 그런 위험이 곳곳에 도사린 곳이다. 아무리 많은 전쟁을 겪어 왔어도, 아무리 강해져도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 그래서 항상 긴장하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
조금, 아니 많이 진지해진 그의 눈에 로엘은 금세 다시 대답을 했다.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며, 그와 정확히 눈을 맞추며 말이다.
“조금도 다치지 않았어요.”
그가 하고 있는 것은 결국 그녀에 대한 걱정이므로.
그 불안을 그녀는 없애 주고 싶었다.
“미르 때도, 요르 때도. 나르 때도, 타르 때도 저는 다치지 않았어요.”
그렇게 그녀에 대해서 잔뜩 긴장해 있는 그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여기, 티벌에서도. 저 멀리 토르티아에서도. 저는 항상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폐하.”
방긋. 그녀는 그의 눈을 정확히 마주하며 예쁘게 웃었다. 가식이 없는 그 순수한 미소에 그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정말이지 당해 낼 수가 없다.
“내 걱정이나 하라는 말로 들리는데.”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주 건방진 거야, 아카시스.”
“당신을 아주 사랑한다는 거죠. 폐하.”
이 미소를 이 전장에서 볼 수 있다니. 얼마나 사치인가.
역시나, 아무리 온갖 것들을 계산하여도 그녀를 데려온 일은 잘한 거 같다.
“맞다! 그 독수리!”
그의 품에서 좀 가만히 있나 싶더니, 그녀는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는 듯 바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며 반짝이는 걸 보니 여간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너무도 그가 예상했던 그녀의 반응이라 그의 입에서 또 한 번 짧은 웃음이 나왔다.
“티르의 독수리던데!”
“그건 또 언제 본 거야.”
“그렇게 커다랗고 잘생긴 독수리는 티르밖에 없다고요.”
그녀는 자신 있게 답했다. 당장 보고 싶다는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는 잠시 품에서 그녀를 떨어트려 놓고 몇 걸음 움직여 하늘을 보았다. 역시나 저 높은 허공에서 주인의 주위를 열심히 맴돌고 있었다. 로엘은 한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들며 그 아름다운 새를 올려다보았다. 단순히 크기가 커서, 어떤 새보다도 사납고 매서워서 저 새가 칭송받는 것이 아니다.
휘익.
주인의 짧은 휘파람 소리에도 저리 단번에 알아채는 것.
망설임 없이, 어디에 있든 주인에게 곧바로 날아오는 것.
주인 주위의 위협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언제든 달려들 준비가 된 것.
마치 한 명의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자신을 거둬 주고 길들인 주인에게 충성하는 그 영특함이 저들을 영물이라 불리게 만드는 거다.
“디케.”
그가 나지막이 부르며 왼쪽 팔을 들어 올리자, 전속력으로 날아오던 독수리는 바로 속도를 줄이고 부드럽게 그의 팔에 안착하였다. 그에게 오기 직전 큰 날개를 펄럭이는 바람에 그의 황금빛 머리칼이 흩날리고, 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로엘은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게다가…….”
멀리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내리치는 태양을 한 몸에 받으며, 영물과도 같은 거대한 독수리와 함께하는 그 모습이 무언가 그들만이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아버지의 새잖아요.”
그 아름다운 모습에 조금 얼굴을 붉힌 채로,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작은 중얼거림은 너무도 정확한 정답이라 그의 입가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역시나 그녀는 바로 알아차릴 줄 알았다.
“그래. 네 아버지, 제이드 네아레스의 독수리지.”
조심스럽게 그녀는 한 걸음씩 새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새였다. 근육으로 다져져 꽤나 장골인 그의 상체를 덮을 정도였으니, 그녀쯤이야 얼마든지 날개로 온전히 덮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낯선 이가 다가옴에 바로 경계 태세를 갖추며 눈을 매섭게 떴지만, 그를 진정시키는 그의 타이름과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듯 눈을 맞춰 오는 그녀의 조심스러움에 디케 역시 긴장을 풀었다.
“이름이 뭔가요.”
“디케.”
아까 얼핏 들었던 그 이름이 맞았다.
디케라니.
“당신……. 정말 북방에 대해 많이 공부했구나.”
그건 북방의 승리의 여신의 이름이다.
북방 전장을 누비는 새의 이름으로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다.
“나름 했지.”
아니. 나름이라고 하면 서울할 정도로 아주 오랜 기간, 꽤나 열정을 가지고 하였다.
“그러다 이 새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용케도 구했네요.”
“아론이 고생했어.”
“아주 많이 했겠어요.”
티르국의 국보인 이 독수리는 티르족에겐 신의 대리인이라 불릴 만큼 영물로 여겨져 그 반출이 금기시된다.
제이드가 티르국을 점령하지 않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을 때, 그리고 외침으로부터 그들을 호의적으로 도와주었을 때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 표시로서 티르의 독수리를 선물한 거였다.
그 정도로 귀하디귀한 새가 바로 이 아름다운 독수리, 이걸 구해 오라는 그도, 구해 오라고 했다고 진짜 구해 오는 아론도 진짜 여러 의미로 대단했다.
“아버지와 전쟁을 나갔던 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상징적인 독수리였어요. 카이로스처럼 전서용이든 사냥용이든 대개는 매를 사용하지 독수리를 사용하진 않으니까요.”
심지어 조지 황제조차도 매를 사용하였으니, 더더욱 논란이 되었던 새였다. 조지 황제가 고르고 고른 혈통 있는 매를 단번에 제압하는 것을 두고 반역이니 뭐니 한창 시끄러웠다.
그까짓 새가 뭐라고 노발대발하는 그들을 보며 그 어린 나이에도 참 한심하다 생각했던 기억마저 떠올라 버렸다.
물론, 오랜만에 만나는 이 티르 독수리는 아주 많이 반가웠지만. 어린 나이에 꽤나 무서워했던 적도 있었던 거 같지만 나중에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아버지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아버지의 새를 날려 보낸 것 역시 그녀였으니 그 기억이 남다를밖에.
로엘은 조심스럽게, 디케가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간질거리는 손길이 좋은지 디케 역시 그녀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호감을 표했다.
“예뻐라. 암컷인가요?”
“수컷이야.”
“그것까지 마음에 드네.”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왠지 그가 해야 할 대사를 요새는 종종 그녀가 따라 하는 기분이다. 디케를 길들이기 위해 그가 꽤나 고생했던 것을 무색하게 할 만큼 디케는 곧잘 그녀를 따랐다.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그녀와 곧잘 장난치는 모습이 아무래도 디케는 그녀가 좋은 모양이었다.
“잘 따르네.”
“원래 동물은 착한 사람을 알아보거든요. 그래서 눈이 맑잖아.”
“전혀 상관없는 거 같은데.”
“많거든요.”
반 정도는 진심인 그녀의 대답에 그는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그녀가 동물과 잘 어울린다는 건 사실이었으니. 예상대로 디케를 좋아해 주는 그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대뜸 디케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올곧게 그를 향했다.
“당신. 일부러 데려온 거죠? 토르티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때마침 잔잔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를 흩날렸다. 높게 하나로 묶은, 붉은 긴 머리가 흩날리고 그 바람에 맞춰 디케가 날아올랐다. 올곧은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잔잔한 목소리가 숲 소리를 타고 퍼져 갔다.
“그렇게 내 아버지를 이용하려는 거군요.”
에단은 바로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가장 확실하니까.”
대신 숨기지 않은 본심을 답했다.
“엄밀히는 너를 통해 그자의 명성을 이용하는 거지.”
애초에 숨길 수도 없을뿐더러, 숨길 이유도 없었다.
“더 정확히는 토르티아 사람들의 너에 대한 죄책감과 그자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는 거고.”
조금도 거르지 않는 그의 지나치게 투명한 대답에, 전혀 거리낌 없는 그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이번엔 로엘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
너무도 그다운 대답이다.
“내가 기분을 상하게 한 건가.”
“아니요.”
그는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당겼고, 그녀는 그의 힘에 따라 한 걸음 더 그에게로 다가섰다.
그렇게 조금 떨어진 거리가 다시 좁혀졌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거리. 서로의 숨결이 닿고 서로의 온기가 전해지는, 그렇게 오로지 이 세상에서 서로에게만 허락된 거리다.
“기분 상하지도, 화나지도 않았어요.”
그녀는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드러나지 않은 그의 깊숙한 내면에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한가득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새를 보면서 가졌을 그녀의 기분을, 그를 통해 떠올린 그녀의 추억을,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나. 아마 전혀 모른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그 모르는 부분에 대해, 그는 많은 고민을 하였을 테지.
“너무도, 당신다워서 오히려 웃고 말았지.”
로엘은 한 손을 올려 그의 뺨을 감쌌다. 그녀가 그만을 바라보듯 그의 황금 눈동자 역시 오롯이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담담히, 그리고 차분히 말하는 그녀의 대답에, 아니 괜찮다는 그 위로에 에단 역시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가 너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서 조금 화가 나려 했다.
“안 그래도 돼.”
“네?”
“안 괜찮아도 된다고.”
그래서 그녀의 허리를 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다른 한 손으론 자신의 뺨을 감싸던 그녀의 손을 감싸 쥐어, 그대로 그녀의 가슴 위에 얹었다. 쿵쿵쿵. 빠르게 뛰는 그녀의 심장박동이 그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너, 지금 괜찮지 않잖아.”
그녀의 머릿속을 울리는 그의 그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여전히 태양은 푸르른 숲을 내리쬐었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숲의 소리를 전했으며, 저 높은 곳에서 두 사람을 호위하는 디케는 유유자적하게 하늘을 날았다. 그 모든 것들이 여전한데, 로엘은 순간 그와 자신의 시간만 멈춘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진짜 괜찮은데.”
그래서 저도 몰랐던 감정이 한 번에 복받쳐 올랐다.
투둑. 굵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 떨어지더니,
“괜찮지 않았나 봐.”
쉴 새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에단은 정말로 놀란 것 같은 그녀의 눈을 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 바보 같은 여자가, 자신의 감정도 이리 몰랐나 보다.
얼마나 토르티아에 대해 꽁꽁 싸매고, 누르고 살았으면 이러는 건지.
에단은 말없이 그런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미안해. 기억나게 해서.”
“아니, 아니에요. 저 진짜 괜찮았어요. 정말, 당신과 티르의 독수리를 보는데 반갑기까지 했어. 그런 생각을 하는 당신이 너무 천재여서 놀랐고, 아버지의 새를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그냥 고마웠고. 그만큼 준비한 당신이 너무 대단하고 대단해서…… 난 그래서…….”
“아버지가 보고 싶었구나.”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많이 보고 싶었구나.”
그녀의 등을 토닥이는 손만큼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덕분에 그녀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잡았던 끈을 놓쳐 버리면 주체할 수 없을 줄 알았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토르티아의 붉은 성에 황금의 깃발이 꽂힐 때까지 절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절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가 멋대로 이리 그녀의 꽁꽁 숨겨 놓은 마음을 알아채 버렸다.
“진짜…… 당신 짜증나.”
“그래.”
양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꽉 쥔 채로, 그녀는 절대 얼굴을 보여 주지 않겠다는 듯 더 깊숙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평생을 염원하던 북방 정벌. 그녀가 목숨을 걸고 바랐던 토르티아의 멸망.
그 모든 것이 걸린 전쟁에 프란시아로서 이곳에 왔다. 이를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을 알기에, 그 마음과 열정을 알기에 절대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마음을 더 다잡고 다잡았다.
이건 자신만의 사사로운 복수가 아니라고. 그런 감정적인 마음으로 임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그에게 짐이 될 수 없다고.
“그런데 나는 화가 나. 네가 나한테까지 괜찮다고 할수록.”
에단의 입가에 쓴 미소가 번졌다.
제이드의 ‘승리의 독수리’라고 불리는 거대한 새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에단은 이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엄밀히는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계획해 두던 일이다.
그런데도, 그 오래된 계획을 잠시 고민하게 할 만큼 그에게 있어 그녀는 너무 소중한 이가 되어 버렸다.
“네가 나한테까지 필사적으로 숨길수록.”
그렇게 그녀를 걱정했다.
“나의 아카시스가 나를 의지해 주지 않는 거 같으니까.”
어쩌면 에단은 시험을 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티르의 독수리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이유도 분명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다.
이 독수리를 보며 그녀가 좋아할지, 싫어할지. 기뻐할지, 아파할지. 솔직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과거의 그녀를 오롯이 알지 못하므로.
이반이 아는 타르타니의 로엘. 데릭 테바로스가 아는 토르티아의 로엘.
두 사람이 간직하는 그 로엘을 그는 모른다. 그 사실이 그를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그를 얼마나 유치하게 만드는지 이 여자는 평생 모르겠지.
‘이 표정. 이 얼굴. 이 눈빛은 당신만 알아요. 아니, 당신만이 만들 수 있어.’
지금, 그의 품 안에서 울고 있는 이 여인은 분명 그만이 아는 로엘일 텐데도. 그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보다. 현재의 로엘은. 그리고 미래의 로엘은 당신 것이라는 그녀의 말들이 그를 안심시키면서도, 데릭과 이반이 간직하고 있는 그 기억들이 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거 아니라는 거,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알지. 나의 여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그래서 네가 솔직해 주길 바란 거야.”
이러저러한 여타의 사정들, 환경들, 상황들 따위 고려하지 말고. 적어도 그 앞에서만큼은 그저 오롯이 그녀 자신만을 생각하여 감정들에 충실해 주기를.
그렇게 어떤 추억이든 함께 공유해 주길 바랐다.
이리, 홀로 아파하지 말고.
“나는 과거의 로엘에게 갈 수 없어. 과거의 너를 위로해 줄 수 없지. 나의 최선은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내 품에 있는 너를 위로하는 거야.”
그의 손이 눈물범벅인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네가 과거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렇게 놓아주지 않으면 나는 너에게로 갈 수 없어. 그러니 로엘. 내가 지금의 너를 위로해 줄 수 있게 과거에서 나와.”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싼 채로 들어,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그를 향하게 만들었다.
눈물이 가득하여 흐려졌는데도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그의 황금빛들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너를 온전히 위로해 줄 수 있게 해 줘.”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리자, 그제야 그녀 역시 겨우 미소를 지었다. 이리 따뜻하게 안아 주고 위로해 주는데 그 어떤 아픔이 치유되지 않을까.
외면하기 바빠 그녀도 몰랐던 이 아픔을 그는 그녀보다도 먼저,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보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그 아픔을, 그 그리움을, 그 한을 이리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보고 싶어.”
그러는 순간 이렇게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결국 이리되고야 말았다.
이반의 위로와 데릭의 경고에도 꿋꿋히 버텼건만. 역시나 그에게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너무너무 보고 싶어.”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만 같은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녀의 진심을 알아채 버린 순간, 모든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그래서 터져 나오는 오열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토르티아의 대지를 밟는 순간부터, 타르타니의 숲길을 걷는 매 순간마다 모든 것들이 떠올라요. 모든 것이 너무도 생생해서 끔찍할 지경이야.”
처음 토르티아의 국경을 넘는 순간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쿵쿵쿵. 아무 이유 없이 심장이 뛰어 댔다. 그렇다고 기쁜 감정인 것도, 증오에 가득 찬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이곳, 토르티아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반응했다.
조국에 돌아왔다고.
“미르 성의 사람들을 보았어요. 토르티아 군복을 입은 병사들을 보았고, 그들을 찔렀고, 그들을 죽였지요. 그렇게 토르티아의 생명을 거둬들었어요.”
아버지가 일생을 바쳐서 지켰던 바로 그 생명들을, 그녀의 손으로 거두고 또 거두었다.
붉은 피가 그녀의 얼굴에 튀었을 때, 그 뜨거움이 살을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에단. 나는 정말 토르티아가 싫어요. 붉은 민족, 붉은 대지. 그 모든 것들이 증오스러워. 너무 증오스러운데. 그렇게 미워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렇게 복수하러 왔는데. 왜 나를 아직도 공주라 부르는 거야!”
저도 모르게 나와 버리는, 버릇 같은 호칭.
그래. 어떻게 안 그러겠는가. 그들에게 그녀는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죄송스럽고도 죄송스러운 공주님인 것을.
“그렇게 불러 버리면, 더 생각나잖아. 더 보고 싶잖아.”
그때의, 그 행복한 나날들의 모든 것들이.
에단은 주저앉아 버린 그녀를 따라 몸을 숙여 그녀를 더 꼭 안아 주었다.
토르티아에 대한 그녀의 감정. 한 번쯤은 이리 터트릴 필요가 있었다. 그게 앞으로의 원정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앞으로 닥칠 많은 것들에 대해서라도. 그를 전부 감내할 그녀를 위해서라도.
“괜찮아.”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그의 프란시아를 위해서라도.
“보고 싶어 해도 돼.”
그는 쉼 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어깨를 그저 두드려 주었다.
“마음껏 그리워해도 돼.”
저 멀리, 높은 허공에서 디케는 또 한 번 큰 소리로 울었다. 제이드의 독수리가 그렇게 울었던 것처럼 우렁차게. 눈부신 태양을 온몸으로 받아, 황금빛을 내며.
“얼마든지, 그리해도 돼.”
그렇게 디케는 한동안 그녀의 위를 날았다.
그 모습이 마치 그녀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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