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3. 프란시아의 시간 (54/69)

Chapter 53. 프란시아의 시간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새벽. 굳게 닫힌 미르 성 아래, 낯선 무리가 숨을 죽을 죽이며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마. 모든 준비 끝났습니다.”

몸을 숨기기 좋은 검은 복장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시에라의 보고에 로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 중 부상자는 없었으며, 각자 맡은 역할을 모두 숙지시켰고, 도착 후 1시간 동안 휴식, 충분히 체력을 보충하였습니다.”

절도 있는 시에라의 보고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시에라뿐 아니라 로엘 역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복장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 붉은 눈동자만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자연히 시에라의 뒤에서 시에라와 같은 복장으로 그녀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전원. 마마의 명을 기다립니다.”

어둠 속에서 낮게 울리는 시에라의 목소리에 따라 일제히 ‘그녀들’의 고개가 그녀에게 숙여졌다. 어둠이 내린 타르타니를 로엘은 이들, 프란시아 부대와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녀의 선봉이 결정된 후, 에단은 그녀를 위한 부대를 만들어 주었다. 누구를 원하냐고 묻길래 그녀는 망설임 없이 키로스를 원한다고 답했다.

“키로스는 전투 부대가 아니야.”

“몰브 반란으로부터 카이로스 성을 지킨 건 키로스예요.”

“황군도 있었어.”

“그 황군을 구한 게 키로스죠.”

에단은 탐탁지 않아 했다. 키로스를 그저 황궁 내의 여인을 지키는 이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 그러나 로엘은 달랐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야.”

“그건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평생 성보다 전쟁터에서 더 오래 살아온 나에게 그걸 이제 와 설명하겠다는 건가요.”

아니 로엘만이 제대로 알고 있었다.

키로스가, 얼마나 아까운 존재인지를.

“로엘.”

“에단. 나는 당신이 무얼 걱정하는지 알아요. 당신은, 내가 걱정되겠지. 홀로 보내는 나를, 좀 더 강한 부대가 함께하길 원하겠지. 그렇게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지키고 싶겠지. 그런데 폐하, 그걸 해 줄 수 있는 이들이 바로 키로스예요.”

에단을 설득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렇게 그녀의 안위와 관련되어 있는 일은 더더욱 그러하였다. 그러함에도 로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전쟁에서 이기는 부대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첫째는 오랜 시간 정식 훈련을 받아야 하고, 둘째는 함께해 온 시간이 길어 합이 맞아야 하며, 셋째는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에단. 나에게 이런 부대는 카이로스에서 단 하나, 키로스뿐이랍니다.”

에단을 바라보는 로엘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만큼 로엘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소리. 에단의 고민이 깊었다. 키로스라니.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늘상 카이로스 황궁에 존재하였던 이들이다.

황제 이외의 남자는 후궁에 출입할 수 없다는 오래된 전통 아래, 황제의 여인들을 지키기 위해 따로 창설한 여성 부대. 처음에는 기존 시녀들 사이에서 소질이 있는 이들을 차출하여 기본적인 호위 교육을 시켰지만 이제는 독립된 부대로서 따로 부대원들을 뽑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시에라와 같이 명망 높은 군부 가문의 딸들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고 기사 가문에서 키로스를 목적으로 딸들을 훈련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그들은 키로스가 되기 위해 처음부터 길러졌던 이들. 당연히, 그녀들만의 자부심이 있다.

단지, 그 자부심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을 뿐.

“키로스는 강해요.”

그걸 로엘이 알아본 거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어요. 안주할 수 있고, 안일할 수 있음에도 매일 아침 훈련을 하고 매일 저녁 자기 관리를 하죠. 나는 그녀들처럼 부지런하고 성실한 이들을 본 적 없어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쉬는 법이 없다. 철없는 비들의 멸시 속에서도, 다른 기사들의 무시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들의 역할을 다해 오는 것을, 로엘은 똑똑히 보았다.

“그렇기에, 저는 자신 있게, 카이로스의 군대에 뒤지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요.”

로엘은 에단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었다.

“에단. 나를 믿어 줘요. 당신에 비해서야 턱없이 부족한 경험이지만, 나 역시 많은 전장을 보고 자랐어요. 목숨이 오가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 나를 진정으로 따르는 이들과 함께이고 싶어요.”

그 한마디에 에단은 결국 허락하고야 말았다.

충성심 없는 백 명의 용병보다, 충직한 한 명의 내 사람이 더 강하다는 걸 누구보다 에단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로엘은 겨우 허락을 받았다. 이번 전쟁에 키로스 부대를 그녀의 프란시아 부대로 데리고 나오도록.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키로스 모두가 울었다.

처음으로 주어진 기회가 너무도 벅차서.

그러한 기회를 준 로엘이 너무도 감사해서.

그러니, 이 마음과 이 충정으로 무엇인들 못 할까.

“프란시아님의 명을 기다립니다.”

그 마음을 로엘 역시 알기에, 갑작스러운 에단의 제안에도 기꺼이 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들을 믿었으니까.

계획과 달라진 테바로스의 행보를 로엘은 이동 중에 들었다. 하루하루 앞당기는 그들의 승전 소식을 전해 들으며 로엘은 생각했다. 에단이, 무언가를 하리라고.

그런데 그 무언가의 시작을 그녀에게 맡길 줄은 몰랐다.

‘저요?’

‘그래. 너.’

에토르 성루 위에서 들은 그의 계획에 로엘은 잠시 당황했다. 엄연히 카이로스의 공식적인 첫 전투인데, 그걸 로엘에게 맡기겠단 소리였다. 그만큼 중요하고, 그만큼 실패해서는 안 될 막중할 일.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러나 이내 로엘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그녀에게 준 그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로엘은 몸을 돌려, 자신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키로스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미르 성을 그가 언급했을 때, 그녀는 미르 성이야말로 프란시아 부대가 가장 적합한 공략지점이라 생각했다. 토르티아 국경 끝자락이자 타르타니 중앙에 위치한 이곳은 타르타니의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작은 성이다.

타르타니 자체가 거대한 성벽이 되어 주는 이 지역은 군사가 접근하는 것 자체가 너무도 어려웠다. 대군이 들어오기엔 좁고 험난한 길이었으며, 성문 앞에 부지 자체가 거의 없어 대군이 들어올 자리조차 없었다. 그러니 애초에 많은 병사들이 의미가 없었다. 그보다는 소수 정예의 기습이 적절한 곳.

그렇다면 당연히 키로스가 제격 아닌가.

암투가 비일비재하는 후궁의 키로스들이다. 암살을 하는 일도, 암살을 막는 일도 지겹도록 교육받은 이들에게 숨을 죽이고 몸을 숨기는 것은 특기 중에 특기다. 어떤 부대보다도 몸집이 작으며, 어느 병사들보다도 민첩성이 좋은 그녀들이니 지리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위치에, 자연이 준 방어만을 믿고 안일하기만 한 미르에 숨어들기에 이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다.

에단 역시, 그 사실을 파악했기에 그녀들을 택한 거다.

“키로스는 들으라.”

로엘은 입을 가리던 두건을 내리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이 원정의 시작. 그리고 프란시아 부대의 처음.

두근두근. 힘차게 뛰는 이 심장은 그녀뿐만이 아니리라.

“우리는 이 위대한 전쟁의 시작을 맡았다. 황군도, 프래카도 아닌 바로 우리. 프란시아 부대가 위대한 여정의 시작을 끊는 거다.”

어둠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들이 반짝였다. 이 벅찬 감동. 이 뛰는 심장. 절대로 이 임무를 완수하고 말겠다는 다짐.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에 계신. 그녀들을 이곳에 있게 한, 로엘에 대한 충정이 그녀들의 눈동자에 가득했다.

“그러니, 키로스. 나의 소중한 이들이여.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우리가 이 전쟁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보여 주자.”

긴장 가득한 전쟁 속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잔잔한 목소리. 친근한 그 목소리가 과하게 힘이 들어간 그녀들의 마음을 조금씩 안정시켰다. 너무 잘하려 들면 오히려 망치는 법. 적당한 여유가 필요한, 그녀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귀중한 처음을 로엘은 망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들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할 수 있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는 오늘, 저 미르 성 같은 높은 곳에 황금의 깃발을 꽂는다.”

결의에 찬 그녀의 목소리가 타르타니의 숲을 울리고,

“키로스. 프란시아님의 명을 받듭니다.”

그 명에 맞추어 키로스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였다. 마치 하나의 몸인 듯 절도 있게 그녀에게 예를 표하는 그녀들을 로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토록 믿음직스러울 수가 있나.

“자. 가자. 키로스. 위대한 첫 승은 우리가 만드는 거야.”

여전히 해가 뜨지 않은, 타르타니의 밤. 그 중앙의 작은 미르 성으로부터, 프란시아의 시간이 시작되려 한다.

***

“로엘 님은 어떤 분이세요?”

“응?”

한창 전투 중인 차에 들려온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반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마무리가 되어 가는 전투라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검이 오가는 피 튀기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제 와 이리 묻기에는 지나치게 새삼스럽지 않은가. 이제껏 봐 온 시간이 얼마인데, 이제야 로엘이 어떤 사람이냐니. 이반은 콜린이 하는 질문의 의도를 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떤 분이긴. 이 나라의 아카시스이자, 이 전쟁의 프란시아지.”

“제가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콜린은 가볍게 이반에게 향하는 검을 쳐내 반격하며 말했다. 콜린 역시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질문이라, 이반이 황당해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승패는 진즉에 결정난 전투라, 이반과 콜린은 자연히 상대하던 이들만 대충 마무리 짓고 잠시 검을 거두었다.

이반은 두어 번 칼을 휘둘러 피를 털어 내고선, 제대로 콜린을 보았다.

“무얼 묻고 싶은 거야.”

“말 그대로예요. 그냥 그분이 어떤 분인지 새삼 궁금해졌어요.”

“새삼스러운 걸 아니 다행이네.”

장난 아닌 진심인 콜린의 얼굴에는 많은 생각들이 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들려온 로엘의 승전 소식 때문인 거 같았다. 이반은 그제야 콜린이 무얼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거 같았다. 콜린은 아무래도 조금 놀란 거 같다.

로엘이란 사람에 대해서. 그 로엘이 무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에단 폐하의 갑작스러운 작전에 투입된 지 이제 이틀이 되었어요. 그런데 벌써 세 번째 승전보가 왔습니다. 이건, 상식적인 속도가 아니잖아요.”

“아니지.”

“그것도 피해는 전무에 가까워요.”

이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콜린이 놀라 하는 것이 놀랍지 않았다. 이반 역시도 로엘의 성과가 꽤나 놀라웠으니. 잘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잘할 줄은 솔직히 이반도 몰랐다.

“로엘 님이 북방을 잘 아는 건 알겠어요. 그건 이미 이번 전쟁을 준비하면서 여러 번 느꼈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르잖아요.”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을 결코 따라갈 수 없었고 타고난 통찰력과 분석력은 남달랐다. 그녀의 조언들은 귀중했으며, 그녀의 제안에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콜린 역시 그녀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펜을 들고 자료를 보며 전쟁을 기획할 때의 일. 이리 직접 전장에 나와 활약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다를 거 없어. 그러기엔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살아왔어. 그 시간만큼 검을 들었고.”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제이드 네아레스의 밑에서 말이다.

이반은 이제 다들 항복을 선언하며 검을 버리는 적군들을 바라보며 이만 검을 치켜올려 세웠다. 이 전투가 그의 승리로 끝이 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연히 그의 군사들은 환호를 질렀다.

압도적인 전투였어도 승리는 승리니.

그렇게 또 하나의 토르티아 성에 카이로스의 깃발이 흩날렸다.

“제이드 님이 살아생전 몇 번의 전투를 치렀을 거 같아? 국경을 지키면서, 콜린. 너도 느꼈겠지. 북방에서의 전쟁은 흔해도 너무 흔한 일이라는 것을. 제이드 님은 평생을 그 넓은 국경 전역을 달리며 토르티아를 지켜 온 거야. 그때마다 항상 로엘이 함께했어.”

그러니 보고 들은 전쟁만 어디 한두 건이랴. 중부와 달리 끊임없이 서로가 충돌하는 이곳에서 그녀는 크고 작은 전쟁들을 겪으며 유년기 내내 배워 왔던 거다.

“심지어 가장 완벽에 가깝다는 그분의 전쟁만을 봐 왔지.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잘한 일인지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그녀는 저절로 터득한 거야.”

그녀의 남다른 환경이 그걸 가능케 했다.

로엘이 에토르에서 제일 먼저 출정하는 것을 이반은 에단과 함께 에토르의 성루에서 바라보았다. 그 밤중, 그녀와 그녀의 키로스들이 말을 타고 순식간에 달려 나가는 것을 보며 이반의 마음에는 솔직히 걱정의 마음이 더 컸다.

아니, 걱정이라기보다 의심이란 표현이 더 맞을 거다.

그래. 이반은 선봉장으로서의 로엘을 의심했던 거다.

“……그런데 내 형제는 믿은 거지. 처음부터.”

그녀가 이토록 잘해 내리라는 걸.

이반은 에단에게 물었다. 정말 자신하냐고. 로엘과 그녀의 키로스에 대해서.

‘정말 괜찮겠어? 아카시스 혼자서. 그것도 키로스만으로.’

‘괜찮으니 가겠다고 했겠지.’

‘이론과 실전은 달라.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래서 보낸 거야. 다른 그 일을, 잘 해내라고. 모두가 프란시아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도록.’

확신에 가득 찬 믿음. 떠나가는 로엘을 바라보는 에단의 눈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래서 이반도 더 이상의 반대의 목소리도, 걱정의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형제가 이토록 확신하는 일이라면, 그건 믿어야 하는 일이므로.

그리고 그 믿음을 확인시켜 주는 데에 로엘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출정한 그날 당도한 미르에서 그녀는 동이 트기 전 카이로스의 깃발을 미르 성에 꽂았고, 바로 요르로 진격하여 요르마저 단번에 점령했다.

걸린 시간은 고작 이틀.

“이제 나머지 나르와 타르를 점령하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이반은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네 성이 붙어 있는 지역이라고 한들 수월해도 너무 수월하였다. 그만큼 미르와 요르 모두 그녀를 대비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치고 들어갔단 소리다.

“대동한 키로스는 고작 5백 명이에요.”

“그래.”

“5백 명으로 지금 성 두 개를 이틀 만에 점령한 거라고요.”

“심지어 앞으로 더 점령할 예정이고.”

“이건 누가 보아도,”

“승리의 여신의 축복 같겠지?”

에단은 정확히 그걸 노리는 거고.

이반의 헛웃음이 또 한 번 나왔다. 정말 어디까지 서로를 내다보고 움직이는 건지.

이제는 에단은 물론 로엘의 생각마저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벌써 군사들 사이에서 로엘 님의 소문이 파다하게 번졌습니다.”

“덕분에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잘된 일이잖아.”

“그야 그렇지만…….”

콜린은 말끝을 흐렸다. 프란시아의 부대가 부각되면서 자연히 이반의 부대는 주목을 못 받고 있었다. 이제야 이반은 콜린의 말 못 한 걱정이 무엇인지 알 거 같았다. 그래서 피식 웃고 말았다.

아. 어쩌면 이마저도 에단은 내다보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군사들의 경쟁심도 아주 하늘을 찌르고 있고?”

콜린은 말없이 이반을 보았다. 자신의 내비치지 못하는 속마음을 역시나 이반은 단번에 알아챘다. 이번 전쟁에 이반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그 마음.

그건 카이로스의 승리의 여신, 프란시아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얻은 그 기회인데, 이번에도 이인자로 머물란 말인가.

“루카스 장군의 부대도 승전보를 이어 가고 있어요.”

“그러겠지. 그 성격에 첫 승을 뺏긴 건만으로도 충분히 분할 테니.”

이반은 생각할수록 로엘을 제일 먼저 출정시킨 에단의 선택이 탁월했다고 느꼈다. 마치 테바로스와 경쟁하듯 로엘을 보냈으나 실상은 테바로스뿐 아니라 자신과 루카스의 부대에게도 경쟁심을 부추긴 거다.

선봉으로 그녀를 앞세워 처음 전투에 나서는 키로스 부대를 이용하여 북방 전쟁에서의 첫 승을 거두게 함으로써 수많은 전쟁을 치러 왔고, 수도 없이 선봉을 섰던 이반과 루카스를 자극한 셈이다. 너희뿐 아니라 그녀도 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녀들이 이토록 잘해 낼 수 있음을 직접 보여 줌으로써, 너희는 더 잘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준 거다.

“내 형제지만 진짜…….”

“아주아주 영악하신 분이죠.”

콜린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잘난 머리. 얄미워도 너무 얄밉다.

“콜린. 큰일 날 소리.”

“사실이잖아요.”

콜린은 입을 삐쭉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무얼 하든 그분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에단이야 이렇게 콜린이 부들부들 분해 하고 조급해하리라는 것마저 노리고 있었겠지.

덕분에 이반의 군대 역시 사기에 활활 타올라 계획보다 훨씬 더 빨리 목표 거점을 점령할 수 있었다. 에단의 입장에서야 정말 손 안 대고 코를 푼 셈이다.

“그래서 폐하가 대단한 거야. 우리가 테바로스의 승전보에 감정적으로 분해 있을 때 그분 혼자 여기까지 내다보았다는 거니까. 덕분에 우리가 벌써 이곳, 나시베에 있는 거고?”

특별히 그들을 압박하지 않아도. 특별히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아도. 이리 알아서들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것. 그렇게 테바로스의 도발을 로엘로 받아쳤고, 그 로엘을 이용해 이반과 루카스마저 움직였다.

이보다 효율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이반의 입가에 못 말리겠다는 자조적인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정말. 당해 낼 수가 없다. 자신의 형제에게는.

“짜증이 날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무섭지. 그 머릿속에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이반을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그보다 위쪽의 가장 높은 곳에 에단을 상징하는, 황금의 카이로스 깃발이 펄럭였다. 저 황금의 깃발 아래 함락당한 성이 몇 개이고, 고개 숙인 사람이 몇 명인가.

“그 때문에 나는 내 형제가 좋아. 그 끝을 알 수가 없거든.”

이반은 고개를 들어, 그 빛나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쿵. 쿵. 쿵.

카이로스의 깃발 아래에 이리 심장이 뛰는 것을 보면 이반 역시 어쩔 수 없는 카이로스의 사람. 에단은 늘 이반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니, 이반은 자신의 심장을 이리 뛰게 만드는 이는 결국 사랑하는 형제, 에단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 옆에 있으면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어.”

그래서 존경하고, 그래서 믿으며, 그래서 따른다.

콜린은 이반의 시선을 따라, 그 펄럭이는 황금의 깃발을 보며 생각했다.

새 세상이라. 그래. 맞는 말이다.

지금 이곳 북방, 토르티아의 땅에서 카이로스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정말 따라잡을 수가 없겠네요. 그분은.”

“그러니 열심히 쫓아가야지.”

이반은 씩 웃으며 답했다.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그 진심인 미소에 콜린이야말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그래. 이분을 이리 웃게 만든다면, 그걸로 된 거다.

꼭 황제의 자리에 앉을 필요도, 꼭 일인자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함께하자, 콜린. 새로운 세상. 새로운 카이로스를 위해.”

그저 지금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를 향해 가면 될 뿐.

“네. 황자 전하.”

콜린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이반의 승리를 울리는 커다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북방 정벌을 시작한 지 아홉 날. 카이로스의 열두 번째 승전보였다.

***

“너 이 자식. 진짜 멋대로 할 거야!”

“아, 뭘!”

정말 변함이 없는 아론과 루카스의 투닥거림이 막사를 뚫고 나왔다. 막 전투에서, 그것도 대승을 거두고 온 루카스는 한껏 신이 난 상태였다. 정말 얼마 만에 마음껏 날뛰었는지 모른다.

“이기면 됐잖아. 이기면.”

“그렇게 막 나갈 거면 전략은 왜 짜고, 계획은 왜 세우냐? 그냥 혼자 나가서 싸우다 뒤질 것이지!”

“거참. 딱 한 번 설쳤다고 되게 뭐라 하네. 빡빡한 새끼.”

“그 한 번이 그냥 한 번이냐!”

아주 피바람이 휘몰아치는 한 번이지.

거의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는 아론의 목소리에 루카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론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앞으로 치고 나갈 때부터 아론의 이런 불같은 반응을 예상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때는 그러고 싶었던 것을.

루카스는 마음 같아서는 쓰고 싶지도 않은 무거운 투구를 막사 테이블 위에 올려다 놓으며 편히 의자에 앉았다.

“덕분에 빨리 끝났잖아.”

“네놈 돌발 행동에도 당황하지 않은 프래카 덕분이지.”

“내가 우리 애들 잘 키웠어. 아주 훌륭해.”

“이 자식이 반성하지는 않고!”

반성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루카스의 태평한 태도에 아론의 화는 한층 더해 갔다. 진격이란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앞으로 박차고 나가는 루카스는 지옥의 개라는 악명에 걸맞게 적들을 무참히 물어뜯었다. 세상에 어떤 대장이 제일 앞장서서, 뒤에 쫓아오는 병사들은 손도 못 쓰게 자기 혼자 처리한단 말인가. 루카스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이였다면 진즉에 시작도 하기 전에 황천길을 넘었을 거다.

“네가 엄청 강하다는 건 세상천지가 다 알아. 그런데 그걸 꼭 이 전쟁에서 그렇게 드러내야 속이 시원하냐? 이 철없는 인간아. 네가 그런 식으로 해 버리면,”

“뒤에 오는 내 병사들이 힘들겠지. 특히 이렇게 공성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하겠고.”

“그걸 아는 놈이,”

“하지만, 나도 성질났다고. 나만 멀뚱멀뚱 있는 기분이란 말이야.”

루카스는 잔뜩 심통이 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볼멘소리에 아론은 한숨을 삼켰다. 역시나 원인은 그거였다.

“멍청아. 나시베는 멀잖아.”

“그런 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네가 늦어질 수밖에 없는 거고.”

“누가 모른대? 그래도 기분이 그런 걸 어쩌라고.”

투덜투덜. 루카스의 볼멘소리가 더 커졌다. 너무도 뻔한, 예상된 반응이라 아론은 놀랍지도 않았다. 정확히 폐하가 원하던 그 반응일 거다.

“로엘 님은 대놓고 첫 승을 거두셨고, 이반 님도 예상보다 이틀이나 빨리 중형급 성을 세 곳이나 점령하는 동안 나만 아무것도 안 했어.”

“뭘 안 해. 열심히 달려와서 그중 제일 크고 중요한 나시베를 네 멋대로, 거의 너 혼자서 온통 들쑤셔 놔 놓곤.”

“그래도 늦었단 말이야. 열세 번째가 뭐냐구, 열세 번째가!”

“그게 뭐가 중요해.”

“제일 중요해.”

아론의 한숨이 깊어졌다.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는 애 같은 인간이 방금 전까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단번에 앗아 간 바로 그 루카스 세버가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이 되는 순간이다. 씻지도 못 하고 바로 들어온지라 여전히 갑옷에서 피 냄새는 진동하였고, 채 식지도 않은 어느 누군가의 피가 그의 널브러진 투구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데릭의 승전보로 시작하여 연이어진 로엘과 이반의 활약까지 듣는 동안, 루카스는 꽤나 자존심이 상했을 거다. 카이로스의 전쟁에서 루카스가 선봉이 아닌 적도, 주목받지 못한 적도 없었다. 늘 에단의 검으로서, 황제의 사냥개로서 루카스는 가장 앞장서 카이로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그런 루카스가 이 중요한 전쟁에서 선봉을 양보한 것도 모자라 이리 첫 승까지 뺏겨야 하니 그 속이 속이랴. 자존심 강하고 승부욕 강한 루카스를 아주 제대로 건드린 셈이다.

“뭐……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그 응축된 감정이 나시베에 도착하자마자 폭발하였다. 진격 나팔 소리가 채 울리기도 전에 제일 먼저 치고 나가는 그를 보는 순간, 아론은 아차 싶었다. 저 미친개가 간만에 제대로 고삐 풀린 듯하여.

나시베는 로엘의 미르 성들과 이반이 점령한 보울 성과 그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토르티아 도성까지 다다르는 길목의 첫 번째 관문과도 같은 곳. 그래서 토르티아 역시 카이로스의 출정 소식이 들리자마자 바로 나시베에 진부터 쳤다. 그래서 성문 앞에 두껍게 펼쳐진 몇 겹의 창병들을 보며, 저들이 꽤나 방어에 집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창병에 약한 기마병들을 뒤로 빼고 보병들로 진격하려 계획을 다 짜 두었는데, 루카스는 그런 보병을 뒤에 두고 전속력으로 말을 타고 달린 거다. 그러니 어찌 아론의 입에서 욕이 안 나올까.

문제는 그렇게 혈혈단신으로 달려든 그가 그 많은 방어군들을 단번에 쓸어 버렸다는 거다.

뒤에 성급히 쫓아온 프래카들이 민망할 정도로, 루카스의 활약은 말 그대로 피바람이 불었다.

“……하아. 그마저도 전부 생각하셨던 거겠지.”

그 정도로 날뛰는 루카스라니. 철없던 어린 시절, 통제되지 않은 루카스가 처음 전장에 나섰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수백 개의 화살을 쏘아 내려도, 수십의 창이 오가도 그는 한 번을 맞지 않은 채 자유자재로 상대의 진을 흐트러트렸다.

“대열이야 깨지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지.”

아론의 못다 한 말을 루카스가 씩 웃으면서 이었다.

“무너지는 군대의 성문을 여는 거야 식은 죽 먹기고.”

천진난만하기도 한 그 미소에 아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순진하고도 순수한 개 한 마리를 에단은 아주 잘 활용한 셈이다.

“적어도 반나절을 생각했던 점령을 1시간으로 내가 줄여 준 거라고. 군사님.”

“시끄러. 이 자식아. 진짜 얼마나 위험했는 줄 알기나 해?”

“누가? 저들이?”

“하아. 말을 말자.”

아론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손사래를 쳤다.

이미 벌어진 일. 심지어 루카스의 말대로 훨씬 빠르고 훨씬 손실 없이 달성해 버린 목표. 더 이상 문제 삼을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안 그럴게. 오늘은 진짜 기분이 좀 멋대로 나 버렸어.”

“다음에도 또 나면 또 그러겠단 소리로 들리는데…….”

“앗. 역시 예리해. 역시 천재는 달라도 달라.”

“야!”

아론이 루카스의 반응을 내다보듯 루카스 역시 아론의 이런 반응을 훤히 내다보기에 불같이 화내는 아론을 루카스는 아주 잘 피해 가며 놀렸다.

이렇게 큰 전쟁에서 그것도 지휘관이란 놈이 이리 멋대로 굴면 안 된다는 거. 루카스가 어떻게 모를까. 결과에 상관없이 이건 분명 루카스가 잘못한 일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그렇게 무리하다 인질로 잡혔다든가, 당황하는 군사들의 미숙함에 따라 대열이 흐트러지는 게 우리였다면 그건 바로 패배로 직결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까? 당연히 멋대로 군 루카스의 몫일 거다.

“장난 아니고 이번에 진짜 마지막. 다시는 안 그럴게.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진짜?”

“진짜. 나라고 한들 마음이 완전 편한 줄 아냐. 지금도 폐하가 한소리 하실까 봐 엄청 쫄고 있다고.”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는 루카스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하긴. 무서울 법하지. 아론은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루커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여기저기에서 천재라고 추앙받던 시절. 루카스는 황태자인 에단과의 출정에서 에단의 명을 어기고 멋대로 앞서 나간 적이 있었다. 당연히 루카스의 검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서웠고 적들은 가을바람 앞의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지만, 먼저 가 버린 루카스를 쫓다가 아군이 대거 함정에 빠져 버린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에단이 미리 손을 써서 피해가 적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승패를 가를 만한 엄청난 실수였다.

당연히 이 일은 원로회에까지 넘어가 루카스의 장군 자격 박탈까지 논의되었는데, 당시 황태자 신분이던 에단이 원로회에게 다툼이 있었던 사업권까지 넘겨주면서 루카스를 구했다. 그렇게 구해 놓고서는 에단은 추후 전투에서 루카스를 제외시켰다. 그때 루카스가 울면서 읍소를 할 때 에단의 한마디는 아론도 잊히지가 않는다.

‘주인 명을 듣지 않는 개는 필요 없어.’

차가운 눈으로 말하는 그 한마디가 어찌나 냉정하던지, 아론마저 옆에서 한마디 거들지 못했다.

이제 와 얘기하지만, 루카스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렵다’는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그때 에단의 살기등등한 태도는 정말 다시는 루카스를 보지 않을 듯했으니. 실제로 그다음, 꽤나 중요한 전투에서 에단은 주변의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루카스를 참전시키지 않았다. 당연히 그다음 전투 때는 루카스가 눈물로, 진심을 다해 뉘우치고 사죄를 해서 용서받았지만 말이다.

아론이 보기에 처음부터 에단은 그럴 요량이었던 거 같지만, 뭐가 되었든 그 일 이후 루카스는 에단의 명이라면 칼같이 받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전쟁에서 말 안 듣는 건 진짜 싫어하시는데…….”

“아는 놈이 그러냐.”

“짜증 났다고. 그렇게 멋대로 군 것도 아니고…….”

“몰라. 나는 안 도와줄 거야.”

“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만 친구지, 이럴 때만.”

말은 저렇게 해도 아마 루카스가 말 꺼내기도 전에 아론이 먼저 에단에게 상황 설명을 하면서 루카스 편을 들 걸 뻔히 알아 루카스는 씩 웃었다. 치고받고 하루 종일 싸워도, 언제나 서로를 위해 주고 있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잘 안다.

동료라는 말보다는 친구란 말이 더 어울리는 사이. 분명 두 사람은 함께여서 더 강해졌다.

루카스를 실컷 질책했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루카스는 무난히 나시베를 점령했다. 그것도 아주 단번에. 훨씬 더 빠르고 쉽게. 아론은 지도를 펼쳐 지금까지 점령한 성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일정이 많이 당겨졌어. 하나같이 생각 이상으로 열심히 해 줘서.”

“묘하게 경쟁을 붙이시는데 열심히 할 수밖에.”

“그걸 알면서도 그러냐.”

“사람 마음이 머리대로 따라가는 게 아니라구. 그걸 이용하는 우리 폐하가 진짜 진짜!! 대단하신 거지.”

아주 조금은 얄밉고.

루카스는 아론을 따라 지도로 눈을 돌렸다. 다음 지역은 나시베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토르티아 수도 다음으로 커다란 성, 비터였다.

“여긴, 폐하가 맡으시는 거지?”

“뭐. 엄밀히는 나시베에 다 같이 집결해서 가는 거니 폐하 단독이라 할 순 없지만, 지휘는 그러하지.”

“어찌하시려나. 여기, 좀 까다로워 보이던데. 크기도 크기지만, 성 위치가…….”

루카스는 저 커다란 성 전체가 타르타니 숲으로 깊게 둘러싸인 지형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 정도 크기면 꽤나 많은 인원이 필요해 보이는데, 그 인원이 접근하기에 매우 불리해 보였다.

“그나저나, 폐하는 아까부터 어디에 계신 거야? 도통 보이시질 않네.”

“하아. 그것도 또 할 말이 있지.”

아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아주 바쁘셔. 그 비싼 새랑 놀아 주느라.”

“그 비싼 새가 설마 저거니.”

높은 허공으로부터 들려오는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막사에서 나온 두 사람의 시선을 자연히 위로 향하게 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을 유유자적하게 나는 그 거대한 새는 마치 이 곳을 모두 감시하고 있다는 듯 매서운 눈으로 느리게 주변을 돌고 있었다.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땅에 드리우는 그림자에 사람이 가려질 정도였다.

“저거 독수리 아니야?”

“그냥 독수리가 아니지. 영리하기가 웬만한 사냥개보다 뛰어나고, 매섭기가 웬만한 사자보다 더하다는 티르 부족의 독수리야. 저건 그중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혈통 있는 티르 왕족의 독수리님 되시고. 그러니 그 몸값이 얼마겠니?”

웬만한 성 하나는 살 수 있는 그런 가격이었다. 뭐 돈이야 차고 넘치는 카이로스 황실에서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치더라도, 다른 왕실에서 국보라 상징하는 독수리를 빼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냥 카이로스의 매사냥을 위해 키우는 매로 하면 안 되냐고 말했다가 혼만 났다.

“티르 왕국이 어디 가깝기라도 하냐고.”

“나도 티르는 안 가 본 거 같은데.”

“아마 끝까지 티르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면, 그냥 통째로 점령할 그런 기세셨다고.”

“하하. 폐하라면 그러고도 남지. 티르 왕의 선택이 현명했네.”

무조건 티르 왕족의 혈통 있는, 가장 좋은 독수리를 가져오라는 명에 정말 이 바쁜 원정 중에 제롬과 아주 고생을 했다. 아마 독스 상인의 거래 독점권이 없었으면, 절대 얻지 못했을 거다.

“그렇게 귀하신 새님과 놀고 계신다?”

“그러니 내가 속이 안 터지냐.”

아론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루카스는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는 독수리를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하찮은 전투에서도 1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 분이, 다른 전쟁도 아닌 북방 원정에서 놀고 계신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분명 뭔가 있을 텐데…….”

“그래. 뭔가 있겠지. 우리가 봐 온 저분이라면.”

아론과 루카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다는 듯, 그 독수리 역시 천천히 그들이 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그림자로 두 사람을 온전히 가릴 정도로 고도를 낮추더니, 그 귀한 새님은 두 사람이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보란 듯 속도를 높여, 그들보다 먼저 에단에게로 내려앉았다.

커다란 날개를 그 앞에서 우아하게 접으며, 그 매섭던 새가 순한 양인 양 그의 팔에 곱게 내려앉는 모습이 에단의 빛나는 황금 머리와 어우러져 마치 신화의 한 장면 같았다.

“착하네.”

그가 옅은 미소와 함께 쓰다듬자 새는 기분 좋다는 듯이 작게 울며 그의 팔에 얼굴을 부볐다. 매섭게 두 사람을 주시하던 그 새와 같은 새가 맞긴 한지 아론과 루카스는 헛웃음이 나왔다.

“폐하. 사냥이라도 하시게요.”

“못 할 것도 없지.”

“폐하!”

루카스와 아론이 좀 더 다가오자, 에단은 팔을 들어 다시 그 독수리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너보다는 말을 잘 들을 거 같은데.”

“아. 그건 말이죠…….”

에단의 뼈 있는 한마디에 루카스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론은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멍청이가 지금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또 저렇게 생각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폐하. 제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러려고 그런 건 맞는데. 결과적으로 얘가 날뛰어 줘서 피해도 예상보다 더 작고, 상황 정리도 더 빨리 되었습니다. 적절히 우리 사기는 높아졌고, 적들의 사기는 많이 떨어졌을 거고요.”

루카스에게 그렇게 뭐라 했지만, 결국 아론이 먼저 발 벗고 나서 루카스 편을 들어 주었다.

분명 계획을 어기고 멋대로 한 것은 잘못이었으나 그 돌발 행동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었으니. 소문도 아마 파다하게 퍼졌을 거다. 말로만 듣던 그 지옥의 개가 진짜 있더라고. 홀로 튀어나와, 순식간에 나시베 성 전체를 피바다로 만들었는데 어느 누가 그 모습에 공포를 느끼지 않으리. 피칠갑을 한 채로 씩 웃는 그 모습은 가끔 아론도 소름이 돋는다.

“두 번 다시 안 그러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아론의 옹호에도, 에단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루카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루카스가 더 쪼그라들 수밖에. 루카스는 바로 고개부터 숙였다.

“폐하. 루카스가 잘못한 건 맞지만, 이번은 루카스도 나름 이유가 있었고, 또……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시길, 저도 간청드립니다.”

아론 역시 루카스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생각보다 에단이 쉽게 넘어갈 거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이러다 설마, 정말 이 중요한 전쟁에 루카스가 또 빠지는 최악이 생기나 걱정이 앞섰다. 이분이 화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 아니던가.

에단은 잔뜩 긴장해 있는 두 사람을 한동안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새삼 이들도 자신을 무서워하긴 하는구나 하고 느꼈다. 그러니 자연히 그녀가 생각났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그가 아무리 무섭게 해도, 한 번을 물러서질 않았다.

그러니 얼마나 맹랑한 여인인가.

이 기라성 같은 장군과 대신도 이러는데, 그 어린 여자는 처음부터 그를 정면으로 맞서 왔다.

그래서 이리, 이토록 한순간도 빠짐없이, 매순간 그녀가 눈에 밝히게 되었나 보다.

“그래.”

에단은 한 바퀴를 돌고 다시금 그에게 다가온 독수리에게 들고 있던, 마지막 남은 간식거리를 던져 주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

“그러라고.”

사람을 잔뜩 긴장시키는 그 무표정과 대조되는 너무도 심드렁한 대답이 들려와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의 의중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이 조금 귀찮다는 듯,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용서한다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럴 것도 없지만.”

그 한숨에도 두 사람은 이어진 말이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갸우뚱하는 두 사람에게 더 이상 설명할 마음이 없는지 그는 그대로 두 사람을 두고 걸어갔다. 그제야 아론과 루카스가 바로 폐하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 제가 잘못한 게 없어요?”

“멋대로 구는 건 잘못이야.”

“그런데 왜…….”

“명을 어긴 적이 없을 뿐.”

에단의 말에 아론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그러고는 한 박자 늦게 탄식을 뱉었다.

이제야 에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 같았다.

“하아. 진짜……. 폐하!”

그래서 더 크게 억울함과 울컥함이 팍 올라왔다.

이제 보니 루카스도 자신도 완전 폐하에게 놀아나고 있었다.

“뭐야, 뭐야?!”

여전히 이해를 못 한 루카스는 그런 아론과 에단을 번갈아 보면서 뒤를 쫓아갔다. 아론은 아예 바짝 에단의 곁에 붙어 온갖 울분을 토해 냈다.

“진짜 이러실 거예요! 진짜 저한테도 이러실 거냐고요!”

“내가 뭘.”

“저한테는 말해 주셨어야죠!!”

“말했어. 알아서 하라고.”

“아니, 그게 그 말이 아니잖아요!”

“아, 뭐냐고!!”

답답한 루카스의 고함까지 더해져 양옆에서 시끄럽게 구는 두 사람 때문에 결국 그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함께한 지 몇 해가 지나도 둘은 정말 변함이 없다.

여전히 루카스는 잘 못 알아듣고, 알아들은 아론은 몰랐던 사실에 분해하고. 어린 황태자 시절의 그 관계가 이리 그는 황제가 되고 두 사람은 이 나라의 대장군과 대신이 되어도 변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 웃겼다.

“이거, 보아하니. 또 우리 폐하께서 두 사람을 화나게 했나 보네.”

“황자님!”

그 와중, 이반까지 가세했다. 언제 도착을 했는지 이반과 콜린이 어느새 세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웅성거림이 커진다 했더니만, 그들의 부대가 전원 도착했나 보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할 건 해야 하는지라 두 사람은 흥분한 상태에서도 바로 이반에게 허리부터 숙였다.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건 물론 콜린도 마찬가지였고.

이반 역시 그들의 생각보다 더 빨리 도착한지라 아론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거 경쟁을 붙여 버린 폐하의 전략이 지나치게 효과를 발휘해 버렸나 보다. 그들의 일정 시계를 대대적으로 당겨서 다시 계산해야 할 만큼.

“보울은.”

“문제없이, 깔끔히 정리했습니다. 필요한 물자도 전부 가져왔고.”

“물자 옮기느라 더 지연되었습니다. 아니라면 오늘 아침에는 당도하였을 겁니다.”

조금이라도 이반의 공적을 올리고 싶은 콜린은 바로 말했다. 마음 같아서 그 중요한 보울 전투가 얼마나 완벽하게 끝이 났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으나 참았다.

“그래서. 또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거야? 잠시 들어 보니, 루카스가 아주 제대로 한 탕을 한 거 같던데.”

“말도 마세요, 황자님. 아니 기껏 대형 다 맞추고 시간 맞추고 해서 진격시켰는데 이 새끼가 지 멋대로 튀어 나가서 다 흐트러졌다니까요?”

“아 그래서 잘못됐냐고. 니가 말했잖아. 결과적으로 훨씬 잘 됐다고!!”

“훨씬이라고는 안 했어.”

“하하. 또 루카스가 미친개처럼 날뛰었구만.”

“문제는 그게 다!! 전부!!! 폐하의 계획이었다구요!”

아론은 진영이 울릴 만큼 고함을 꽥 질러 버렸다. 그 말에 한 박자 늦게 루카스는 그 모든 정황이 이해되었고, 콜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며, 이반은 호탕하게 웃었다.

“아이고. 그래서 이리 화가 나셨구만. 우리 똑똑한 지략가님께서. 폐하가 너무했네.”

“아니, 잠깐. 잠깐만요. 그러니까 애초에 폐하는 내가 그렇게 튀어 나갈 걸 알고 계셨단 거예요? 나 한마디도 안 했는데! 엄청 충동적이었는데!”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놀아난 거냐고! 폐하께!!”

어쩌다 보니 루카스보다 아론이 더 분해하는 거 같았다. 루카스야 뭐 생각 없는, 본능에 충실한 놈이니 그렇다 쳐도 함께 전략을 짜고 대형을 맞춘 아론은 에단이 조금 야속했다. 자신에게 언질이라도 한마디 해 줬다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진심으로 많이 서운해하는 아론이 이해가 되어 이반은 아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줬다.

“우리 폐하가 너무했네.”

“너무한 게 아니라, 믿은 거지. 루카스가 멋대로 나가도, 알아서 바로 대응하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물론, 아론의 심통 따위야 에단의 저 무심한 한마디면 바로 사그라들 테지만 말이다.

이반이야 그런 에단의 수법을 흐뭇하게 바라볼지 몰라도 콜린 입장에서야 진짜 에단 황제가 여우 같았다. 연애를 하는 연인들도 아닌데, 이리 밀고 당기기를 잘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루카스가 선봉에서 잘 싸우도록 계획한 대형이었어. 그건 아론, 네가 짠 거고, 나는 그 정도를 좀 더 크게 노렸을 뿐이야.”

“거기에 프래카가 그런 루카스를 뒷받침할 만할 실력이 되는 부대라는 것도, 이미 신뢰하고 있던 거네. 형제님. 자기 부하들을 너무 편애하는 거 아냐? 나한테는 그런 신뢰 보여 준 적 없는 거 같은데.”

“시끄러.”

장난스러운 이반의 능청에 분위기는 바로 평소로 돌아왔다. 아론과 루카스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뭐라 해도 자신들은 저분 손바닥 위라는 걸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그럼 나도 멋대로 해도 된다는 거네?”

“절대 아냐.”

이반의 이어지는 실없는 농담에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에단을 바라보며, 결국 두 사람은 피식 웃고 말았다. 평생 놀아나면 어떤가.

저리 대단하고, 저리 멋진 분이 자신들을 믿어 준다는데.

“아. 같이 가요.”

북방 정벌을 시작한 지 12일째. 열세 번째 승전보.

나시베의 성이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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