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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0. 붉은 월계수 꽃이 피는 날 (51/69)

Chapter 50. 붉은 월계수 꽃이 피는 날

“데릭 폐하.”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갈 거야. 정색하지 마.”

이리 요란스러운 안녕을 고했건만 데릭은 도통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혹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한데, 정작 그 원인이라는 사람은 너무도 태연했다.

“진짜 사람이라도 불러야 가실 거예요?”

“부를 거면 진즉에 불렀겠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테니, 일 크게 벌이지 마.”

데릭은 느긋하게 몸을 일으켜 발코니로 나갔다. 태평하기도 한 그를 보며 속이 타는 건 그녀뿐이었다. 정말 어쩌자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로엘은 짜증을 최대한 꾹꾹 눌러 담으며, 숄을 꽁꽁 싸맨 채로 그를 따라 발코니로 나섰다.

“애초에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지금 데릭 폐하에 대한 감시가 장난이 아닐 텐데.”

“방에서 나서는 게 어렵지, 그다음부터야 쉬워. 며칠 묵을 동안 교대 시간은 알 수 있었고, 동선도 몇 번 눈여겨보면 뭐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어. 이 잘난 황궁이 아무리 커 봤자 결국에는 거기서 거기니까. 그들만 피한다면야 후궁에 대한 호위쯤은 얼마든지 넘을 수 있지. 어느 나라든 후궁 호위는 상대적으로 안일하니.”

“필히 시정해야 할 사항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로엘은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몰브 때 수아의 궁이 지나치게 쉽게 뚫린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황제께서 기거하시는 본궁이야 몇 겹에 몇 겹으로 황군과 프래카들이 호위하고 있지만, 그러한 본궁 너머의 후궁의 경우는 키로스가 전부였다.

애초에 황제 이외의 남자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엄청난 제약도 있지만, 그 이외에도 후궁에게 호위가 필요하다는 인식 자체가 부족했다.

수많은 황제의 여인들 중 누구 하나 사라진다 해도 그 누가 얼마나 신경 쓰겠는가.

“키로스가 물론 황군보다 못한 건 아니지만, 워낙 궁마다 인원이 분산되어 있어서 효율적이지가 못해요. 흠. 이건 정말 고쳐야겠네요.”

심각해진 로엘의 표정에 데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도 그녀다운 반응이라 달리 할 말도 없다. 그야 이미 이렇게 들어왔으니 별수 없는 일. 그다음이야 알 게 뭐람.

오히려 그녀의 호위가 강화되면 고마워할 일이다.

데릭은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그녀 쪽으로 몸을 틀었다.

“테바로스는 내일 떠나.”

“알고 있습니다.”

“아쉬워?”

“전혀요.”

1초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 나왔다. 너무도 단호하여 데릭은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지나가 버리는 매초가 이리 아쉬운 것을.

“얼른 돌아가세요. 적어도 신년회는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일국의 황제께서. 심지어 그런 거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테바로스도.”

“걱정되면 직접 와서 준비해. 테바로스의 황후로서.”

“데릭 폐하.”

그녀에겐 조금도 유쾌하지 않은, 그리고 가볍지도 않은 데릭의 농에 로엘은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리 조금도 태도가 변하지 않을 거라면 방금 전 그 애절하던 작별 인사는 왜 했나 싶다.

“계속 이러실 거면, 저도 더는 참지 않…….”

“토르티아도 꽤나 화려하게 하지? 한 해의 시작 말이야.”

충분히 정색하고 있었으나, 더 정색하려는 그녀의 말을 그는 너무도 손쉽게 끊어 버렸다. 갑자기 토르티아를 언급하는 그에게 로엘은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거기도 한창 바쁘겠네.”

이제껏 아무렇지도 않게 토르티아를 언급해 왔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이러나 싶었으나 데릭이 토르티아를 말하자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지 않아도 붉은 나라가 더 붉게 물든다지.”

그건 아마 데릭의 입에서 나오는 그 토르티아가 직접 보고 들은, 진짜 토르티아이기에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기억을 자극하기 때문일 거다.

“하나같이 붉은 홍등으로 온 나라 구석구석 모든 골목마다 새해를 반기겠지. 그러고는 환히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새해의 처음을 맞이할 거야. 그래서 12월 31일의 밤은 굉장히 아름답다고 자랑했잖아. 네가.”

에단의 토르티아는 지도상으로만 보아 온, 정복 대상인 북방의 최강국일 테고, 이반의 토르티아는 정보 수집을 위해 관광으로 두어 번 가 본 스승의 조국일 테지.

그러나 데릭의 토르티아는 다르다.

수없이 가 본 이웃 나라. 너무도 서로들을 잘 아는 형제의 나라. 그리하여 국혼이 당연했던 옛 정혼자의 나라.

“이번에도 아름답겠지. 어김없이.”

그러니 데릭이 말하는 토르티아는 절대 에단과 이반이 말하는 토르티아와 같을 수 없다.

그 거리. 그 골목. 그 상점. 그 사람들.

이를 아는 이와 모르는 이가 어떻게 같을까.

“너는 지금 그곳을 진짜 붉게 물들일 예정인 거고.”

슬립을 움켜쥔 로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데릭의 말이 너무도 깊숙이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어 그녀를 아프게 했다. 쿵쿵쿵.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가빠지는 기분.

‘공주님! 오늘도 아름다우세요.’

‘아이고. 공주님. 생신 축하드려요!’

잊어버린 줄로 알았던 쓸데없는 기억들이 떠오르고,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부질없는 풍경들이 그려졌다.

한 해의 마지막 날. 황궁은 한창 바쁠 그 시기에 그 누구 하나 그녀의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요란스럽게 축하연을 열었던 에리카와 비교시키려고, 어쩌면 의도적으로 더 무시했는지 모르지.

그렇게 황궁 내에서 아무도 챙기지 못한 그녀의 생일은 언제나 황궁 밖의 사람들이 대신 축하해 주었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토르티아를 사랑하니까. 그곳의 모두를, 나는 사랑하니까.’

정말 부질없는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너무도 공허한 그 기억들이 그녀를 이토록 아프게 만들어서.

입술을 질끈 깨물고, 피가 통하지도 않도록 세게 쥔 작은 주먹을 바라보며 데릭은 한숨을 삼켰다.

역시나, 그녀는 아직 모르나 보다.

자신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저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시는 거예요.”

“네가 아직도 모르는 거 같기에 알려 주려고. 이미 해 본, 경험자로서.”

데릭은 발코니 난간에 기대던 몸을 일으켜, 제대로 그녀를 마주하였다. 구두조차 신지 않아 그보다 눈높이가 한참 아래인 그녀는 작기도 하였다. 찬바람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어 그런지. 아니면 그가 억지로 끄집어낸 쓰라린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의 그녀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그저 악으로 버티는 그런 느낌이랄까.

“난 형제 넷을 내 손으로 죽였어.”

그래서 데릭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비록 어머니는 다를지라도, 엄연히 아버지가 같은 혈육, 내 형제인 사람들.

그저 경쟁자 하나 더 늘은 셈 쳤던, 다섯째라 인간 취급조차 안 했던, 그러하면서도 그 작은 위험이 두려워 수없이 그를 죽이려 들었던 형제들.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들에게 난 민폐였기에, 나는 한 번도 우애라는 걸 느껴 보지 못했어. 그래서 그들이 나를 죽이려 수없이 시도했을 때도 서운한 적 없었고, 내가 내 손으로 내 형제들의 목을 칠 때도 망설임이 없었지. 우린 주고받은 감정이 없었으니까.”

데릭은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누구나 다 아는 테바로스의 참 지독한 그 악습에 대하여.

그로 인해 발생해 버린 사실에 대하여.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그를 그녀 역시 덤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는 내 형제를 모두 죽이고 나서야 지금 자리에 올랐지. 그 행동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테바로스의 반복되는 비극을 잘 알고 있었고, 그 굴레 속에서 데릭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함부로 그를 연민하지 않았다. 함부로 슬퍼하지도 않았다.

당사자가 아닌 한 절대 그 당시의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으니까.

마치 모든 것을 잃었던 그 당시의 그녀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함에도, 로엘. 나는 내 형제를 찌르던 그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

그래서 로엘은 지금 데릭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거 같았다.

이 사람은, 그녀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거다. 앞으로 그녀가 할 일에 대해 그녀가 짊어져야 할 고통에 대하여.

“그렇다면, 너는 어떨까.”

데릭은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뒷목을 감쌌다.

굳어 버린 표정. 흔들리는 시선. 한 마디 대꾸 없는,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까지.

지금 그녀는 애써, 부단히 노력하여 눈물을 참고 있다.

“조금의 죄책감도, 일말의 후회도 없던 나도 그래. 나 역시 그래. 문득문득 그때의 장면이 떠오르고 그때의 시선이 생각나지. 그 순간의 느낌. 그 순간의 감정. 그래. 난 단 한 가지도 잊지 못했어. 그렇게 조금도 무뎌지지 않아. 시간 따위가 도와주지 않아.”

그렇다면 그녀라면, 하물며 그녀라면 어떨까.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던, 그녀와 같은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가진 그 사람들이라면 어떨까.

“……그들은 침묵했어.”

“그래, 맞아.”

“그들은 외면했어.”

“그 또한 맞지.”

“그런데 내가 왜 그들을 위해 아파야 하지?”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데릭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멈추고, 그 붉은 눈은 빠르게 식었다.

토르티아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기억만큼, 그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던 더 아픈 기억도 있었으니.

“내가 왜 그들에게 연민을 가져야 하지? 내가 왜 그 죽음을 두려워해야 해? 내가 왜 이리 아파해야 하냐고!”

“네가 사람이라서 그래.”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칠흑 같은 그 검은 눈동자에 그녀가 가득 찼다.

“나도 사람이라서 그러니까.”

감정이 없어도. 마음이 없어도. 사람이라 기억이 난다. 사람이라서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그들의 죽음을 평생, 바로 어제 그랬던 것처럼 기억하겠지.”

로엘의 커다란 눈에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마치. 네가 네 부모의 죽음을 지금 이 순간도. 이렇게 생생히 기억하는 것처럼.”

잔인하기도 하여라.

굳이 이 순간 그 기억을, 애써 외면하려는 그 생각을 끄집어낼 것은 무언가.

기어코 그녀를 울리고야 마는 데릭이 로엘은 야속했다.

“나는 네 복수를 말리지 않아. 네 고통이 토르티아를 피바다로 만드는 걸로 보상된다면, 기꺼이 그래야지. 그걸 그 누가, 무슨 자격으로 말리겠어. 감히 무슨 위선으로 비난하겠어.”

덤덤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데릭은 말을 이었다. 여전히 그의 눈은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본 채로. 저 무덤덤함이 웃기게도 그녀를 위로했다.

그는 정확히 이 억누를 수 없는 모순된 감정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는 절대 에단이 알 수 없는 감정이기도 했고.

“나는 그저 너에게 네가 하려는 그 일의 대가를 미리, 알려 주려는 것뿐이야.”

지옥 끝까지 떨어져 보아야 할 수 있는 이 처절함을.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곱게만 자라 온 그분께서 어찌 아실까. 안다고 한다면 그건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의 자만이다.

그래서 데릭은 자신하는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이 이 여자를 가장 이해해 줄 수 있다고 믿으니까.

“로엘.”

그는 나머지 한 팔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감싸 당겼다.

예상치도 못하게 데릭에게 한 방 먹은 그녀는 그가 이끄는 대로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나는 너를 더 이상 지난 과거 속의 정혼자로 대하지 않아.”

가까워진 그 거리만큼 진해진 향기가 데릭의 코끝을 간질였고, 그는 그런 그녀의 허리를 받친 채, 그녀 쪽으로 그가 상체를 기울였다.

“나는 그 목걸이를 주었고, 너는 그 목걸이를 받았지.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끝난 거야.”

다가오는 그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애써 몸을 뒤로 뺐지만, 그는 로엘을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바짝 다가가 그 귓가에 속삭였다

그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그러니 더 이상 네가 알던, 착한 황자님도 없어.”

“!”

순간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드러난 하얀 목에 이를 세웠다. 귓가를 간질이는 속삭임과 정신을 흔드는 진한 남자의 향기가 그녀를 방심하게 만드는 그 순간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읏!”

그렇게 단번에 하얀 피부 위 잘 보이는 위치에 붉고 진한 흔적을 남겼다.

일부러, ‘그’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은 바로 그 자리에 말이다.

“데릭……!”

그 짧은 고통과 밀려오는 수치심에 로엘은 바로 그의 가슴을 세게 밀었다. 뒤늦게 돌아온 제정신에 분노가 크게 일렁였다. 이건 그녀를 대놓고 모욕하고 희롱하는 짓이다.

“놔주세요. 놔 달라구요!”

진한 모욕감을 느낀 그녀가 무서운 얼굴로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오히려 그는 좀 더 세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나는 테바로스의 황제로서, 네 앞에 서 있어.”

그렇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로서 내 앞에 서 있지.”

낮게 깔리는 목소리.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눈빛. 단호한 말투.

데릭은 여전히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라면 필요 없어.”

그의 말대로 지금만큼은 일국의 황제로서.

“나는 반드시 너를 되찾으러 온다.”

한 명의 남자로서.

너무도 갑작스레, 벼락처럼 떨어진, 폭풍처럼 밀고 들어오는 선전포고.

그에게는 아름다운 겨울밤 아래의 절절한 사랑 고백일지 모르지만, 그녀에겐 덜컥 겁이 나 버리는 무서운 협박으로만 들렸다. 그래서 그녀는 하얗게 질린 채, 경악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니 잘 있어, 로엘. 내가 데리러 올 때까지.”

물론 그 모든 거부 의사표시를 그가 조금도 수용하지 않았지만.

“읍!”

로엘이 더 모진 말을 못하도록, 저항할 틈도 없이, 반항할 틈도 없이 그는 그대로 입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막아 버렸다.

처음, 그 시장 북새통에서 만났을 때부터, 그를 참 아프게도 하는 말을 쏟아 냈을 때에도, 한결같이 바라던 이 도톰한 붉은 입술을 기어코 데릭은 훔치고야 말았다.

“으읍!”

따뜻하고 달콤한 감촉. 정신이 아찔해질 것만 같은 진한 그녀의 향기.

바람에 흩날리는 부드러운 붉은 머리카락과 이 뜨거움 숨결까지.

이깟, 키스 한 번이 무어라고 이리 좋을 건 또 뭐람.

그녀의 극심한 저항에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데릭은 결국 진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살며시 입술을 떼어 냈다. 그제야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녀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한 번만 더 내 눈앞에 나타났다가는 정말 죽여 버릴 거예요.”

살기 가득한 그녀 매서운 눈길이 그를 원망하듯 노려보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만큼 원하던 키스였다.

“당장 내 방에서 나가세요.”

그녀는 그가 닿았던 입술을 닦으며, 신경질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확연히 달라진 냉랭한 태도. 착한 황자님 놀이가 끝나 버리니 그녀는 바로 등을 돌렸다.

“로엘.”

그렇다 한들, 여전히 데릭은 물러서지 않았지만.

“어김없이, 올 한 해도 너무 고생 많았어.”

결국 이 아름답고도. 아픔 많은 여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그래서 마지막에 그 옆에 서게 되는 사람은 자신일 테니.

“생일 축하한다. 나의 공주님.”

빛 하나 없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한밤중.

하나부터 열까지 제멋대로인 생일 축하 인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요란스럽고도 특별하게.

절대, 그녀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강렬하게 말이다.

***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

로엘은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데릭이 가 버린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진짜 뭐 하는 거야, 나.”

괜히 억울함과 분함에 눈물이 차올랐다. 원하지 않은 키스에 원하지 않은 흔적마저 남아 버렸다. 이걸 또 어떻게 그에게 설명하나. 이 때문에 또 그는 화가 나겠지.

“하아.”

깊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밀려오는 자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저 편히 잠을 자려던 것뿐인데, 그가 없는 이 밤.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몸을 쉬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데릭 테바로스가 이곳에 온 이후, 단 한 개가 그러했다.

“고작, 이 하룻밤인데…….”

고작 이 하룻밤마저 얌전히 보내지 못하고, 그 짧은 순간에 이런 사건을 만들어 버리다니.

로엘은 아무리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자신은 억울하다고 속으로 소리쳐도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안다.

멋대로 데릭이 쳐들어온 것인데도, 그녀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고, 그녀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여도 사람들은 결국 결과만은 바라볼 테니까.

순식간에 지나간 지금 이 일의 결론은 ‘테바로스의 황제가 한밤중에 카이로스 황제의 아카시스의 방에 들어와 한동안 머물다 갔다.’일 뿐. 나머지 전후 사정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지.

로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지 않아도 바쁜 사람인데…….”

이 일을 알면 그가 또 신경 쓰게 될 텐데.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정말 귀찮은 짐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아서 로엘은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그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것도,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없으니 언젠가 들킬지 모른다는 것도, 그래서 순간은 편할지 몰라도 어느 때 갑작스레 더 크게 찾아와 더 큰 후회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것까지.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그녀의 입은 꾹 다물어져 있었다.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지친 그 사람을 이런 일로 괴롭히고 싶지 않다. 조금이라도 더 쉬게 만들고 한숨이라도 더 자게 하고 싶을 뿐.

로엘은 데릭이 남긴 붉은 흔적을 손으로 감쌌다. 하필이면 그가 지난 아침 그녀에게 짓궂게 남긴 바로 그 위치일 건 무언가.

데릭이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화를 더 돋운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직도 제 스카프가 거슬리시나요, 폐하.’

그렇다면, 더더욱 숨길 수밖에.

‘처음부터 거슬리지 않았어. 뭘 해도 예쁘니까.’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나중에 후회하게 되더라도, 당장의 소낙비부터 그녀는 피하고 싶다.

이 중요한 시기에는 더더욱 그러하고 싶다.

“……그냥 말을 들을걸.”

괜히 방에서 혼자 잠들지 말고, 그가 없어도 그의 본궁에서 자라던 그의 말.

괜히 원로회로부터 시답잖은 잔소리를 그가 들을까 봐 거절했는데 이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로엘은 침대 위에 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여전히 이 상황에서도 홀로 반짝이는 데릭의 사파이어 목걸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또 어쩐담.

그녀가 데릭 테바로스에게 저 사파이를 다시 돌려주었다는 것을 분명 그 사람도 보고받았을 텐데. 직접 저 목걸이를 가져다준 그녀의 사람들에게 또 무어라 한단 말인가.

“하아.”

데릭의 변덕 같은 밤마실. 그러나 명확한 목적이 있던 그 불청객의 행차는 너무 많은 것들을 그녀에게 남기고 가 버렸다.

로엘은 뒤늦은 후회에 짜증을 한껏 삼킨 채로 그녀의 목을 가리는 스카프를 동여맸다. 그러고는 그 커다란 사파이어를 손에 짚히는 아무 손수건으로 대충 감싼 채로 침대 옆 테이블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제발. 한동안은 열지 말자. 딜리아.”

그렇게, 결국엔 들켜 버릴, 말 못 할 거짓말을 만들고야 말았다.

***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테바로스가 드디어 토르티아를 떠났다. 동시에 에단과 데릭의 서명과 인장이 모두 들어간 문서가 양국간에 교환이 되고 같은 날 같은 시각 양국에서 공표가 됨으로써 두 나라의 동맹이 만국에 알려졌다.

“드디어 테바로스가 돌아갔네요.”

“속이 다 시원해요, 정말.”

딜리아와 안나는 로엘에게 다과를 챙겨 주며 말했다. 한동안 테바로스 사람들이 황궁에 들어와 있던지라 괜한 긴장감이 내내 감돌았다.

황군들의 호위 주기는 더 짧아졌으며 지나가는 시녀들마다 붙잡아 감시하기 일쑤였다.

“이 정도로 서로를 못 믿는데도, 동맹이 이루어지는 거 보면 정말 신기해요.”

“어쩌면 그래서 더 괜찮은 동맹 관계가 될지 몰라. 그 누구도 서로에 대해 안일하지 않을 거 아니야.”

로엘은 따뜻한 차 한 모금을 삼키며 덤덤히 이야기했다. 이번 협상을 진행하면서 내내 생각했던 거였다.

오히려 이런 적대적 관계 사이의 동맹이 더 효율적일지 모르겠다고.

“누구 하나 손해를 보려 들지 않겠지. 누구 하나 서로를 믿지도 않을 테고. 그러니 더 꼼꼼히 더 많은 것을 챙기게 되어 있어. 그건 목적 달성을 위해선 나쁘지 않지.”

단지 한쪽이 배신할 리스크가 있을 뿐.

특히, 다른 누구도 아닌 데릭이라면 더더욱.

“어쨌거나 외부인이 가니 이제야 좀 연말 준비를 하는 거 같아요.”

“맞아요. 원래 연말 연초 행사가 엄청 많은데, 이번 전쟁 준비로 거의 안 하고 있었거든요. 거기에 테바로스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런데 이제 다들 나갔으니, 뒤늦게 최소한이라도 준비하라고 시종장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렇구나.”

로엘은 다시 채워진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평화로운 아침이라고 로엘은 생각했다.

딜리아와 안나는 평소처럼 도란도란 궁안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였고, 테이블에는 향긋한 차 내음과 달콤한 과자가 준비되었고, 햇빛은 얇은 하얀 커튼 사이로 적절히 들어왔다.

햇빛으로 환한 발코니의 창문을 바라보며, 로엘은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데릭이 이 방에 다녀갔다는 걸 안다면 다들 경악을 할 테지.

“마마?”

“아……. 듣고 있어. 계속해.”

그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정말 그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했다. 혹여 돌아가는 길에 누구에게 발각될까 조마조마했는데, 이리 성안이 조용한 걸 보니 그가 말한 실력이 자신할 만하긴 했나 보다.

아마 테이블 서랍 속의 저 사파이어마저 없었다면, 그녀조차도 어제 일이 진짜였는지 꿈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다. 그 정도로 그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너무도 태연히 카이로스를 나갔다.

“마마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거예요? 지난번부터 스카프 하고 계신 것도 그렇고.”

“혹시 목이 좀 아프시면 좋은 차라도 내올게요.”

“그런 건 전혀 아니…….”

“안 된다고요. 이런 건 초기에 잡아야 해요. 카이로스의 겨울 감기는 무섭다고요.”

“그럼요. 제가 얼른 따끈한 모과차를 다시 내올게요.”

로엘이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안나가 먼저 일어나 차를 내오러 나가 버렸다. 로엘은 작은 한숨을 내쉬면서 스카프로 야무지게도 동여맨 목덜미에 손을 가져갔다.

사파이어가 아니어도 남긴 흔적이 하나 있긴 했다. 그녀 입장에서야 얼른 사라지길 바랄 뿐이지만. 정말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마님. 수아 님께서 오셨습니다.”

로엘이 데릭 생각에 또다시 멍을 때리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왔다.

“수아 님이? 얼른 들어오시라고 해.”

언제 와도 반가울 그런 손님.

테바로스가 와 있는 동안 로엘은 너무도 바빠 수아를 한동안 보지 못했다. 회의는 회의대로 많았고, 감시는 감시대로 많았으니 그녀 역시 테바로스와의 협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수아 역시 그런 바쁜 로엘의 시간을 뺏을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두 사람은 한동안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수아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테바로스가 카이로스를 나서자마자 바로 그녀부터 찾았다.

“수아 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로엘 님.”

로엘이 문 앞까지 나와 수아를 안자 수아 역시 로엘만큼이나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안았다.

그녀와 손을 잡은 채로 얼른 안으로 안내하는 로엘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자매를 만난 듯한 즐거움이 역력했다.

“저를 부르시지 그랬어요. 오늘은 날도 추운데.”

“제가 와야지요. 제가 마마를 보고 싶은 건데요. 그리고 드릴 것도 있고요.”

오늘도 어김없이 싱그러운 풀꽃처럼 청초한 수아는 싱긋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수줍게 로엘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로엘 님. 생신 축하드려요.”

그렇게 환한 웃음과 함께, 진심을 전했다. 로엘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제가 마음대로 골랐는데, 로엘 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축하 인사. 로엘은 제법 많이 놀라고, 또 기뻤다.

“수아 님……. 제 생일인 건 어떻게 아시고…….”

“테바로스 황제 덕분에 알게 된 건 많이 기분 나쁘지만, 그래도 지나치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에요. 로엘 님의 생일은 꼭 챙겨 드리고 싶었거든요.”

로엘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주책없이 눈시울마저 붉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그녀의 생일을 기다렸다가 챙겨 주는 이라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얼마나 오랜만에 있는 일인가.

데릭의 대대적인 선물 행렬은 생일 축하라기보단 외교적인 전략으로 느껴져 정작 그녀에겐 조금도 생일 선물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리 곱게, 직접 포장한 것 같은 정성이 담긴 선물 상자를 보니 수아가 자신의 선물을 고르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그러니 그 마음이 더 고맙고 더 미안했다.

“저는 수아 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못했는데…….”

“다음 생일에 챙겨 주세요. 그러면 되지요. 로엘 님. 저희는 오래오래 볼 거잖아요.”

수아는 로엘의 손을 두 손으로 마주 잡으며 말했다. 진심 가득한 예쁜 마음. 로엘 역시 수아를 따라 웃었다.

“그럼요. 제가 수아 님 생일 선물은, 진짜 좋은 걸로 드릴게요.”

당차게도 말하는 그녀에게 수아는 그저 웃었다. 그 미소에 로엘 역시 더 환히 따라 웃었고.

정말 이곳에 수아가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로엘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곱게 포장된 선물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작은 크기를 보아하건대 반지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일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로엘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작은 상자 속에 놓인 것은 수아의 여성스러움이 듬뿍 담긴, 팔찌였다.

“가넷이네요.”

“네.”

바로 알아봐 주는 로엘에게 수아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저 흔치 않은 보석을 바로 알다니.

이럴 때 보면 이러니저러니 하여도 그녀는 천상 사교계를 떠날 수 없는 왕족 출신이다.

“그리고 가넷은 우정을 상징하고요.”

“네. 맞아요. 로엘 님.”

수아의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다행히, 그녀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영민하신 공주님께서는 이 선물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려 주셨다.

로엘은 조심스럽게 상자에서 팔찌를 들어 올렸다. 금으로 된 얇은 줄이 세공된 가넷 꽃들을 촘촘히 이어 주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금빛 줄은 짙은 붉은색을 띠는 가넷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거기에 붉은색은 그녀의 색이 아닌가.

“수아 님……. 너무 마음에 들어요.”

로엘은 바로 착용하여 자랑스럽게 수아에게 보였다. 새하얀 피부에, 붉은 머리카락이 한데 어우러져 너무도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수아 역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처음부터 그녀의 것처럼 잘 어울릴 줄 알았다.

데릭 테바로스가 생일 선물이랍시고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를 들고 왔을 때부터 수아는 오기가 생겨서라도 더 좋은 걸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넷이라는 보석을 고른 후에도, 팔찌 디자인부터 세공 방식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던가.

“마음에 들어 하셔서 다행이에요.”

다행히 그 고민이 헛되지 않았나 보다.

“너무너무. 정말 너무 마음에 들어요.”

로엘이 이리 얼굴에 홍조를 드리우면서까지 좋아해 주는 걸 보면.

분명 에단에게 받은 귀한 보석이 수도 없이 많을 텐데도, 그녀는 가넷 같은 비싸지 않은 보석에도 이리 기뻐해 주었다.

물론 수아도 얼마든지 귀하디귀한 보석을 구할 수 있고, 기꺼이 로엘에게 그러한 돈을 쓸 의향이 있었지만 수아는 그런 물질적인 가치로 로엘의 선물을 고르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로엘을 아끼는 그녀의 마음을, 그녀를 좋아하는 이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 바로 이 ‘가넷’.

수아는 언제나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이 보석을 고른 진짜 이유를 고백했다.

“로엘 님. 이 붉은 보석에는 한 가지 의미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붉은색이라기보단 검붉은 색을 띠는 가넷은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보석이었다. 보고 있노라면 끝없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묘한 매력이 있는 어른의 보석이랄까.

“대개 가넷을 우정의 보석이라고들 하지요. 그래서 친구끼리, 전우끼리의 우정을 상징하며 반씩 쪼개어 가지는 것으로 유명해요. 그런데 가넷의 본래 의미는 ‘불변’이랍니다.”

로엘은 조용히 수아의 말을 경청했다. 햇빛이 따듯하게 들이치는 오전. 햇빛을 등진 채로 찬찬히 이야기를 풀어 가는 나긋나긋한 수아의 목소리가 너무도 듣기 좋아 로엘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뭐랄까, 어린 날 어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는 그런 기분이었다.

“가넷은 화려하지 않아요. 루비처럼 빨갛지도, 사파이어처럼 푸르지도 않지요. 다이아몬드와 비교할 반짝임도 아니고요. 많은 이들이 혼탁한 색깔이라고 경시하던 이 검붉은 색깔은 실은 사연이 있는 있답니다.”

수아는 찻잔을 들어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역시나 로엘과 함께하는 시간은 늘 즐겁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이렇게 세상 재미있게 들어주는 로엘도 너무 좋았고, 그녀와 함께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이 평화로움도 좋았다.

수아는 로엘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가넷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카이로스 신화 속 지하세계의 신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지요. 그녀는 지상의 곡물 여신의 딸로 실은 지상의 여신이었어요. 그녀를 너무 사랑한 지하세계의 신은 그녀를 지상에 돌려보내기 싫어서, 지상에 올려 보내기 전에 석류 몇 알을 먹이는데 그 때문에 그녀는 지상으로 완전히 돌아가지 못하고 지상과 지하를 오가게 되었답니다. 가넷은 그런 석류를 상징하는 석류의 보석이랍니다.”

로엘은 흥미로운 얼굴로 수아의 말을 경청했다. 흔히 알고 있던 가넷에게 이러한 스토리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수아가 카이로스 성에 들어와서 그렇게 책만 읽었다는 소리를 얼핏 들었는데, 뜬소문은 아니었나 보다. 종종 수아에게 듣는, 로엘이 모르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로엘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가넷은 붉은색 속에 검은색을 품고 있어요. 붉은색은 살아있는 자를, 검은색은 죽은 자를 상징하죠. 그녀가 지상의 여신이자 지하의 여신인 것처럼, 가넷 역시 붉은색이자 검은색인 거죠.”

“그렇구나…….”

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더 자세히 가넷을 들여다보았다. 맑고 투명한 이 보석은 분명 다른 보석들보다는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무게감이 있었다. 어우러진 검붉은 색이 로엘은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혼혈인지라 다른 토르티아 사람들보다 머리카락색이나 눈동자색이 옅은 붉은색을 띠는 로엘의 입장에서야 이렇게 혼화된 색이 좀 더 마음이 갔다.

“가넷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는 불멸. 그리고 충성. 지상과 지하를 잇는 여신은 어디서든 존재하는 불멸을 상징하고, 이는 자연히 그녀의 지상과 지하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기도 되었지요.”

수아는 살며시 로엘의 손을 마주 잡으며, 그녀의 붉은 눈과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그녀를 너무도 좋아한다는 마음이 다 드러나는, 그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로엘 님과 변하지 않는, 그런 우정과 충성을 드리고 싶었어요.”

로엘 역시, 그런 수아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정말 과한 사람이 그녀에게 왔다. 이리 아름답고, 이리 진솔한 사람이 어쩌다 그녀의 친구가 되어 주었을까.

“저도요. 수아 님. 저도 수아 님과 변하지 않을 우정을 맹세해요.”

너무도 마음에 드는 생일선물을 받아 버렸다. 매년 돌아오는 이런 생일 따위.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부모님을 한 해에 전부 잃어버리고 난 후로는 더더욱 그러했다. 하루하루 사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데, 생일을 어떻게 기뻐할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고통이 없었을 거란 생각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닌데, 그런 그녀에게 이런 감동스러운 생일선물이라니.

“수아 님, 너무 감사드립니다. 평생 소중히 간직할게요.”

“생신 축하드려요, 로엘 님. 태어나 주셔서, 이리 저의 곁에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진심을 전하는 수아에게 로엘 역시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심란했던 오전이었는데, 서서히 들이치는 정오의 햇살만큼 따스한 마음을 받아 버렸다.

다시금, 그녀의 생일이 의미 있어지려나 보다.

***

“아무리 그래도 로엘 님 생신이신데…… 이건 진짜 아니지 않아요?”

“괜찮아. 생일이 뭐 별거라고.”

“별거죠! 아주아주 별거라구요!”

로엘의 심드렁한 말에 딜리아는 발끈했다. 로엘의 생일은 12월 31일.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1년 중 제일 바쁜 날 중 하나다. 어딜 가든 송년회와 신년회 준비로 정신이 없을 때라 로엘은 옛날부터 제대로 생일을 챙겨 보지 못했다. 특히 공주로 태어난 그녀인지라 황실에서 제일 바쁜 그때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원래 그랬는걸. 다들 신년회를 준비하는데 나 혼자 눈치 없이 생일파티를 할 순 없잖아.”

“그게 왜 눈치 없는 거예요? 명색이 생일이라고요.”

“전혀 괜찮습니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이 챙겨 주면 되는 거지 뭐.”

로엘은 안나가 직접 구워 준 생일 케이크를 한 입 먹으며 말했다. 로엘은 지난주부터 아주 신신당부를 했다. 절대 그녀의 생일을 소문 내지도 말고, 챙기지도 말라고.

데릭이 아주 요란스럽게 그녀의 생일을 알리는 바람에 모두가 그녀의 생일이 근방인 걸 알아차려 버렸지만, 로엘은 그걸 챙길 마음이 전혀 없었다.

주변부터 입단속을 시켰고 혹여라도 그녀에게 선물을 보내는 이들이 있으면 죄다 정중히 거절하여 돌려보냈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않고, 차 한 번 마셔 보지 않은 이들로부터 받은 선물. 부담스럽기만 하지 조금도 고맙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더더욱 올해는 내 생일을 챙길 때가 아니잖아. 이제야 겨우 테바로스와 협상이 끝나고 곧 있으면 대대적인 출정이야. 이런 민감한 시기에 내 생일 같은 걸 챙기고 있을 수는 없어. 그랬다간 괜한 욕만 듣는다고.”

그녀를 탐탁치 않아 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녀가 파티 비슷한 거라도 열었다면 원로원들이 아마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거다. 지금 시기가 어느 때인데 그런 사치스럽고 태평한 일을 하냐면서 말이다. 정작 자신들의 생일은 아주 요란스럽게 챙겼으면서도 말이다.

차마 그녀의 말을 부인할 수가 없어 그녀의 시녀들은 쀼루퉁한 얼굴로 말을 못 했다.

“나는 이렇게 소소하게 주변 사람들과 챙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로엘은 한 가득한 선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나는 그녀의 입맛에 제일 맞는 맛있는 케이크를, 헤더는 입기 편한 예쁜 원피스를, 시에라는 들고 다니기 좋은 단검을, 페니는 그녀가 자주 쓸 수 있는 만년필을, 그리고 딜리아는 그녀가 책을 읽을 때 편히 기댈 수 있는 푹신한 쿠션을 선물해 주었다.

하나같이 그녀의 일상생활에 유용할 것들.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오랫동안 관찰하지 않으면 선물할 수 없는, 애정이 듬뿍 담긴 것들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가.

“다들 바쁜 와중에 어떻게 준비들 한 거야. 하나같이 너무 내 마음에 쏙 들어서 놀랄 정도라고. 다들 나가기 전에 꼭 생일 적어 두고 가야 해. 아니면 못 나갈 줄 알아.”

고마워하면서 미안해하는 그녀의 마음이 다 드러나, 그녀의 시녀들은 미소로 그저 답했다. 세상 어느 공주님이 자신의 시녀들과 이렇게 한 테이블에서 케이크를 먹으며 생일을 축하할까. 단연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그녀들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 그녀들이야말로 이 보잘것없는 선물들에 이리 기뻐해 주는 그녀가 고맙고 또 고마웠다.

“당일에 축하드리고 싶었는데……. 내일은 정말 시간이 없으실 거 같아서요.”

“괜찮아, 괜찮아. 당일이든 하루 전이든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이렇게 마음 써 주는 게 고마운 거지.”

로엘은 살짝 울상인 딜리아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녀 입장에서야 생일 당일이든 아니든 전혀 개의치 아니하였고, 실제 딜리아의 말대로 당일에는 이 방에 제대로 있을 시간이나 있을까 싶다. 다른 날도 아닌 한 해의 마지막 날. 아무리 카이로스가 전쟁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도 하루 종일 행사가 이어지는데 어느 세월에 이리 선물을 받고 케이크를 자를까.

“오늘 챙겨 준 게 고마울 따름이지. 내일은 아마 이 시간쯤 녹초가 되어 뻗어 있을 거야.”

로엘은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올해는 전쟁 준비로 다같이 바쁘니 좀 대충 하자는 에단의 말이 있어도, 파티를 안하면 죽는 병에 걸린 귀족분들께서 기어코 송년회를 열고야 말았다. 백성들 눈치에 간소하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엄연히 황실에 열리는 파티니 다들 며칠 전부터 아주 난리가 났다. 테바로스가 사라진 후에야 제대로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으니 모두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아. 그러니까 각자 집에서 가족들과 하면 되잖아. 그러지 않아도 폐하는 바빠 죽겠는데 정말 생각 없는 사람들…….”

로엘은 볼멘소리를 뱉었다. 그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전략을 가다듬고, 1시간이라도 더 자야 하는데 세상 편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자기들은 속 편히 안전한 도성 내에 있으니 저 먼 낯선 곳으로 긴 원정을 떠나는 이들의 마음을 알 리가 없다.

“지금 며칠째 폐하는 하루에 3시간도 제대로 주무시질 못하고 일만 하는데,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인간들이야. 테바로스가 떠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를 들이미는 건 무슨 경우냔 말이야.”

이렇게까지 주군이 전쟁 준비로 바쁘면, 국정 정도는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데 맨날 에단이 결정해 주고 지시를 내려 주니 갈수록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았다. 덕분에 에단과 그 밑의 참모진들만 과도한 업무에 죽어나는 거다.

테바로스의 협상이 얼추 마무리되기 시작한 때부터 서류 더미에 파묻혀 그녀조차 못 볼 정도로 바빠진 그 때문에 로엘은 속이 상했다. 이렇게 죽어라 일만 하다가 바로 전쟁에 뛰어드는 거 아닌가.

“그 사람도 사람인데…….”

이제 보니 그 커다란 나라 전체가 오로지 그에게만 의지하고 있었다. 귀족이며 백성이며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만 바라보고 있는 거다.

그러니 그 어깨에 얹힌 짐이 얼마나 무거울까.

“……짜증나.”

그 잠깐 자는 시간마저도 제대로 잠 못 이루는 그를 보면 너무도 속이 상했다. 속이 상하다 못해 화가 났다. 그가 이리 카이로스 걱정에 밤잠 설쳐 가며 일할 때, 그 녹을 먹는 이들은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쉬겠지. 그러면서 쓸데없는 트집이나 잡고, 잘하면 잘한다고 못하면 또 못한다고 난리를 친다.

로엘은 이미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딜리아들이 들어오기 직전에서야 아론과의 회의가 끝났다고 들었다. 바로 본궁으로 돌아가 쉬어야 할 텐데 제대로 쉬고 있나 걱정부터 되었다.

“또 이 밤에 혼자 일하시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걱정되시면, 직접 가 보시면 되잖아요.”

“그게 사정이 좀 있어.”

“네?”

로엘은 되묻는 딜리아의 말에 답하지는 못한 채, 괜히 하루 종일 하고 있는 스카프에 손이 갔다. 이 붉은 자국이 며칠 만에 사라지는지 이제야 의문이 들었다. 얼마나 진하게도 흔적을 남겨 놨는지 붉게 올라온 자국이 새하얀 그녀의 피부에 너무도 잘 드러났다. 일부러 에단의 흔적 바로 위를 덮은 것 같아 어쩌면 에단이 못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그를 속이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용기도 없으니, 이리 피하게 되는 거다. 이것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본궁으로 달려가 억지로라도 그를 재울 텐데.

생각할수록 데릭이 용서가 되질 않았다.

“내가 두 번 다시…….”

상종하나 봐라. 로엘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혼자 다짐을 곱씹었다.

“아카시스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그렇게 다시 속으로부터 분노가 일렁이는데, 이 한밤중에 갑작스런 전갈이 도착했다. 친히 제롬이 후궁 앞까지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였다.

로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분이 진짜 쉬지 않고 북방 지도라도 보고 계시나.”

로엘은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가 책이랑 지도부터 뺏어야겠단 생각이 앞서 들었다. 그래서 입고 있는 나이트 드레스 위에 두꺼운 숄 하나만을 덮었다.

“마마. 이대로 가시게요?”

“응 숄이 워낙 두꺼워서 괜찮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폐하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도 없잖아.”

그냥 드레스가 입기 싫을 뿐이면서 말은. 헤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딜리아가 의미하는 것은 아마 그녀의 옷차림이 꾸민 정복 차림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자기 직전의 아주 사적인 옷차림이란 거였다. 그나마 두껍고 커다란, 밍크 숄로 거의 발끝까지 덮고 있어 다행이다만, 숄 아래로 보이는 얇은 레이스는 그 안에 그녀가 무엇만을 입고 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가능했다. 그래서 머뭇거렸던 거다.

“마마. 제롬 경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재촉하는 목소리가 또 한 번 문밖에서 들려왔다. 제롬 경답지 않게 서두르는지라, 딜리아와 헤더는 조금 마음에 걸렸으나 이내 그녀를 말리지 못하였다.

“저렇게 가시면 혼나실 거 같은데…….”

“그야 그렇지만, 뭐 뻔하잖아? 이 밤에 부르시는 거.”

“뻔하지.”

다행히도 저 순진하신 분만 모르시는 거 같지만.

딜리아는 폐하의 부름에 얼굴 색부터 환해지는 자신의 마마를 지켜보며 작은 한숨을 삼켰다.

“그래. 서두르셔야지. 늦으면 안 되잖아.”

“그렇지. 그냥 이대로 넘어가시나, 내가 다 서운했는데. 다행이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 마마. 사랑받고 계시네.”

딜리아와 헤더는 제롬과 함꼐 멀어지는 로엘을 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12월 31일. 그녀들의 주군께 다시금 특별해질 거 같다

“어? 본궁으로 가는 거 아닌가요?”

“네. 폐하께서는 베리타스에서 기다리십니다.”

본궁이 아닌 다른 길로 접어드는 제롬에게 로엘의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제롬은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베리타스로 간다는 그의 말에 로엘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였으나 이내 작은 한숨을 뱉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요. 회의 끝냈으면 얼른 들어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야지, 진짜 폐하는 이 정도면 병이라구요. 아니, 이 시간에 왜 또 베리타스를 가냐구요.”

로엘은 투덜투덜 대놓고 불만을 터트렸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되레 에단을 걱정하는 그녀를 보며 제롬은 웃음을 겨우 삼켰다. 혹여 그녀가 제법 긴 이 길을 돌아오는 동안, 폐하께서 몰래 준비하시는 일이 들켜 감동이 줄어들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언제나 남들보다 눈치가 빠르고 영특한 분이, 어째 이런 쪽에서는 이리도 둔감한 것인지.

“여기서부터는 마마 홀로 가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에단이 있는 베리타스의 문 앞까지 로엘을 안내하고, 제롬은 그만 발걸음을 멈추었다. 베리타스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인지라 로엘은 제롬의 멈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언제나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늦은 시간 고생 많으셨어요.”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 어여쁜 마마님께 제롬은 깊이 허리를 숙이며, 축하를 건넸다.

“아카시스 마마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만수무강하소서.”

그러자 자연히 제롬 뒤에 있던 시종들 역시 일제히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드렸다.

격식을 갖춘 갑작스러운 축하 인사에 로엘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저 형식적인 말일 수 있으나, 이들의 인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를 보는 눈들 사이에 진심으로 축하를 전하는 것이 느껴져 그녀의 화답도 진심이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제롬과 그 시종들의 축하 인사까지 야무지게 받고서는, 그녀는 천천히 베리타스로 들어섰다.

이 한밤중의 베리타스는 참 오랜만이다. 워낙 그가 늦게까지 이곳에 있는 것을 좋아하여 그녀도 두어 번 이런 한밤중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녀 역시 이 베리타스가 풍기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유리로 된 돔 형식의 높디높은 천장은 언제나 별이 쏟아질 듯 환히 비추고 있었고, 달빛이 아름답게 들이치며 그녀의 길을 밝혀 주었다.

“폐하.”

이 거대한 서고에 그와 단둘이 있는 기분이라. 어떻게 말로 설명할까.

이 세상에 오로지 둘만 존재할 거 같은 기분. 정적이 사방을 메우는데도,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는 그 안정감은 배가 되었다. 넓디넓은 곳에서, 바로 그 님을 찾아 로엘은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에 계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리고,

“쭉 걸어와.”

그 화답이 또 기분 좋게 울렸다. 어디서 보고 있는 건지. 멀리서도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로엘의 입가는 저절로 휘어졌다.

“정말. 이 밤에 여기에 있으시면 어쩌자는 거냐구요. 얼른 들어가서 쉬셔야지.”

“잔소리하는 목소리치고 너무 활기찬 거 아닌가.”

“아니거든요. 저 지금 꽤나 화났다고요.”

그 목소리에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직 그녀의 눈에는 그가 보이지 않는데 그의 눈에는 그녀가 훤한가 보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신 거예요.”

“쭉 들어오라니까.”

평소 그가 자주 있는 중앙 홀 같은 곳을 지나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후원 쪽 문으로 더 가까워지는지라 로엘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서류 더미에 파묻여 계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평소 굳게 닫혀 있는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보아하니 그는 베리타스 안이 아닌 밖에 있는 것 같았다.

문 쪽으로 다가갈수록 외부의 빛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괜히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저 문 뒤에, 왠지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에…….”

그리고 그 근거 없는 기대는 헛된 기대가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어제는 그렇게도 보이지 않던 달이 오늘은 만월이었으며, 수없이 많은 별이 어두운 밤하늘에 수놓듯 빼곡히 들어찼다. 그 모든 밤빛 아래, 그 빛보다 빛나는 그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무와 함께.

“이건…… 월계수 나무잖아요.”

“그래. Laurel(로엘)이지.”

이 한겨울에도 푸릇푸릇한 초록 잎이 달빛을 받아 하나하나 반짝이고, 잔잔히 부는 겨울바람에 흔들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그 푸른 나무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언제 이 거대한 것을 이리 옮겨 놓으셨나.

로엘은 천천히 월계수 나무 아래 미소 짓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 큰 나무를…… 도대체 언제 준비한 거예요.”

“제롬이 고생했지.”

까다로운 그의 취향에 맞게 푸르고 거대한, 그러면서 아름다운 월계수를 찾느라.

“내가 아주 유능한 시종장을 뒀거든.”

다가온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으며, 그는 그녀를 월계수 나무 쪽으로 에스코트했다. 나무를 우러러보는 그 눈에 기쁨이 가득해, 그 역시 저절로 미소 지어졌다.

무얼 줄까 꽤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한 보람이 있다.

“이렇게 큰 월계수 나무는 처음 봐요.”

“북방의 나무들이 상대적으로 작으니까. 이건 남방에서 공수해 온 거고.”

“그래서 꽃이 폈구나…….”

“그래. 꽃 같은 이에게 꽃 없는 나무를 줄 순 없잖아.”

달콤한 말과 함께 그는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런 그를 그녀는 촉촉해진 눈망울로 올려다보았다.

“너무 예뻐요. 이렇게 멋진 나무를 본 적도, 이런 예쁜 월계수 꽃을 받은 적도 없어요. 이건 너무…….”

감동이잖아.

로엘은 괜스레 목이 메었다. 최근에 그가 얼마나 바빴는지 그녀가 제일 잘 알기에 더욱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계속되는 살인적인 일정 뒤에도 침실에 들어와 두어 시간은 더 서류를 들추고 나서야 그는 겨우 그녀 곁에서 잠들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일이었는지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고맙고, 그래서 더 미안했다. 정말 그깟 생일이 무어라고 다들 이리 그녀의 생일을 못 챙겨 줘서 안달일까. 로엘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겨우 꾹 참았다.

“진짜 이럴 필요 없는데……. 매년 오는 생일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예요.”

“네가 태어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감사한 날이지.”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에단…….”

또 한 번 감동에 찬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그는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깟 나무 한 그루가 무어라고, 이리 고마워하는 건지.

그녀가 원한다면 세상을 다 가져다줄 텐데.

“너무 고마워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내가 받아 본 생일선물 중에 제일 의미 있고, 제일 감동적이에요.”

“아직 안 끝났어.”

잠자리에 들려다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된 구두도 신지 못해, 그보다 한참은 작은 그녀에게 그는 두 번째 선물을 목에 걸어 주었다. 짤랑 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긴 목걸이가 그녀의 가슴 부분에서 반짝였다.

“아무리 그래도 나무만 줄 수는 없으니까.”

순식간에 받아 버린 두 번째 선물에, 로엘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월계수네요.”

“맞아. 네가 나에게 선물한 것과 같은 거지.”

그의 목에 걸린 그녀가 선물한 월계수 목걸이가 그의 가슴께에서도 빛이 났다.

“아마 네가 준 것보다는 비쌀 거야.”

시답잖은 농에 로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어련하실까.

“네가 나에게 이걸 주며 말했지. 월계수의 꽃말은 승리라고.”

“네. 맞아요.”

“그래. 그리고 동시에 영광과 영예를 뜻하지.”

에단은 로엘의 손에 들린 월계수 펜던트를 함께 들어 올렸다. 순금을 세심하게 세공하고 그 위에 작은 다이아가 빼곡히 들어찼다.

“월계수 나무의 가지는 승리와 영광, 영예를. 이 잎은,”

“죽어도 변하지 않을 불변.”

역시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배신을 뜻하는 월계수 꽃을 펜던트에 달지 않은 그 뜻도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겠지. 영특한 그녀에게 그는 미소 지어 보였다.

“나의 여인. 나의 로엘, 그대가 나의 변하지 않을 영광이자, 영예야.”

그렇게 그녀를 기어코 울리고야 말았다.

겨우겨우 참았던 눈물이 맑고 붉은 눈동자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태어나 줘서,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나 줘서 고마워.”

그렇게 한 방울을 시작으로, 쉼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진짜 뭐야, 당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 할 만큼, 그렇게 주책없이 눈물이 흘렀다.

“뭐냐구, 진짜.”

오열에 가깝게 울어 버리는 그녀가 귀여우면서도 안쓰럽고, 또 사랑스러워서 그는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뭐가 그렇게 서럽고 뭐가 그렇게 감동스러운지.

“생일 축하해.”

두 번 생일 축하 했다가는 울다가 쓰러질 판이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여자인 거 같으면서도 이렇게 그 앞에서는 눈물이 많은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이 여자가 홀로 참아 온 서러움이 전해 오는 거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내년도, 그다음 해에도, 그렇게 매년 너의 생일 축하해 줄게. 그렇게 너가 태어난 걸 매년, 감사할게.”

그래서 더 이 작고 여린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 고통의 시간을 배로 보상해 주고 싶었다.

에단은 그의 품에서 그의 옷이 다 젖도록 울고 있는 그녀를 좀 더 세게 품에 안았다.

“사랑해. 로엘.”

평생 소중히 여기고 싶은, 평생 지켜 주고 싶은, 그렇게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이 마음이 부디 전해지길.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시작하는 0시. 그녀처럼 푸르른, 그녀같이 한결같은 월계수 나무 아래에서 그렇게 에단은 그녀의 생일을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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