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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9. 영광은 오로지 나의 주군께 (50/69)

Chapter 49. 영광은 오로지 나의 주군께

드디어 테바로스와의 모든 협상이 끝이 났다. 토르티아 정벌에 한정된 동맹을 결정하기서부터 구체적인 조건을 협상하고, 전략을 확정지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2주.

“이로써 테바로스와의 동맹을 공포한다.”

에단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를 위해 모두가 밤잠을 설치며 하루를 이틀처럼 달려왔다.

문제는 그것이 워밍업이었고,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사실이지만.

“오히려 도성은 더 시끌벅적해진 거 같은데.”

“뭐 마음이 뒤숭숭하긴 해도, 사람들이 많이 올라오니까요. 지방에서 올라올 군사들도 거의 다 도착했다고들 하지요?”

“응. 두 부대 정도 남은 거 같은데, 그들도 내일이면 도착한다고 하더라.”

“그럼 진짜 전쟁이 시작되는 거네요. 슬슬 떨리기 시작하는 거 같아요.”

딜리아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에단이 한동안 전쟁에 나가지 않아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은 카이로스 자체가 오랜만이었고, 어린 딜리아의 입장에서야 전쟁에 직접 나가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성에 남아 있어도 된다니까.”

“에이, 마마께서 가시는데 저 혼자 어떻게 편히 지내요. 오히려 이곳에 남는 편이 더 가시방석 같을 거라고요.”

“맞아요, 마마. 저희도 따라가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해요.”

딜리아와 함께 그녀의 잠자리를 봐주러 온 헤더도 한마디 거들었다.

“마마가 따라오지 말라고 하시면, 키로스로 변복해서라도 따라갈 테니 그건 마마께서 포기하세요.”

저녁 차를 준비해 온 안나와,

“키로스가 그리 쉽게 사람을 받진 않아.”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밤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온 시에라,

“마마. 저는 공식적으로 재정부 소속으로 가는 거니, 빠질 수 없는 거 아시죠? 저는 무조건 따라가는 거라고요.”

그리고 페니까지. 결과적으로 그녀의 사람들 전원이 그녀를 따라 이번 정벌에 동행하게 되었다. 하나같이 결연하고 당차게 말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로엘은 웃고 말았다. 이 정도 기세면 충분히 따라와도 될 거 같았다.

“나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니까 그러지. 다른 궁녀들은 안 해도 되는 고생들이잖아.”

“에이. 마마. 그렇게 치면 이미 여러 번 하지 않아야 할 마음고생을 시키셨죠.”

“마마께서 어디 한두 번 위험하셨어요? 그때마다 저희는 진짜 수명이 쭉쭉 깎이는 기분이라고요.”

“하하. 그랬나, 내가.”

“그래서 저희끼리 결론을 내린 거예요. 어차피 마마께서 하루아침에 요조숙녀가 되어 성안에만 계실 거 같지도 않고, 그럴 바에 최대한 붙어 다니기로요.”

딜리아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모두 합의라도 본 그런 표정들이라, 로엘은 그저 민망했다. 자신이 참 많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굴었구나 싶어서.

“마마 돌아오실 때까지 마음 졸이느니. 차라리 전쟁터에 따라가겠어요.”

“그편이 정말 훨씬. 진짜 훠얼씬 속 편할 거 같아요.”

“그럼요, 그럼요.”

그녀들은 정말 키로스로 분장까지 해서라도 그녀를 쫓아올 거 같았다. 그러니 어떻게 말리겠는가. 이 고마운 마음들을. 로엘은 모두의 손을 모아 꼭 쥐었다.

“이 감사함을 어떻게 갚지. 난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마마. 그런 말씀 하시면 오히려 서운하다고요. 저희는 이미 충분히 받았어요.”

“아니, 넘치게 받았지요.”

그래서 그녀들 역시 미소와 함께 그녀들의 주인인 로엘의 작은 손을 꼭 겹쳐 잡았다.

따뜻한 서로들의 온기가 나눠지는 기분. 서로를 위하는 마음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치 진짜, 가족 같았다.

“우리 다같이 무사히 돌아오자. 내가 꼭 지켜줄게.”

“네. 마마. 저희도 마마님을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아니, 이제는 진짜 가족이 되어 버렸다.

***

모두가 물러간 그녀의 방에 적막이 흘렀다. 작은 등불마저 모두 꺼 버린 채, 겨울 달빛만이 조금 그녀의 창으로 들어왔다. 간간이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밤 벌레의 주기적인 울음까지 잔잔히 어우러져 딱 잠들기 좋은 환경이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에단이 없는 밤. 이제는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이튿날 출정식이라 마지막 조율을 하느라, 오늘만큼은 홀로 후궁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녀 역시 함께하고 싶었으나, 오늘 일정은 원로회도 함께인 결정 사항이라 차마 그러하지 못했다. 원로에게 여인인 그녀가 밤늦게까지 사내들 사이에서 어우러져 회의를 한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일 테니.

“고지식한 노인네들.”

그들보다 훨씬 도움이 될 자신이 있는데.

에단은 그저 그녀가 쉬기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를 돌려보냈다.

“정작 잠이 필요한 게 누구인데…….”

로엘은 진심으로 걱정이 앞섰다. 그가 바쁘며 얼마나 잠을 청하지 않는지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나마 그녀 옆이라면 제대로 숙면을 취하는 거 같아서, 로엘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일부러 더 그와 잠자리를 함께하였다.

물론, 그가 그녀를 안는 바람에 오히려 더 체력을 방전된다는 아주 안 좋은 부작용도 있었지만.

‘정말. 이러면 제가 제롬에게 면이 안 선다고요. 폐하를 재우려고 함께 자는 건데.’

‘몇 번을 말해. 이게 나에게는 더 충전이라니까?’

‘그건 당신이 억지 부리는 거잖아. 저는 다음 날 얼마나……!’

‘오늘은 안 힘들게 할게.’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요!’

괜히 홀로 낯부끄러워지는 거 같아 로엘은 양 볼을 감쌌다. 아무튼 호색한 같으니라고. 그 힘든 와중에도 어찌나 기운이 좋은지 모르겠다.

“……걱정되어 그러는 건데.”

그러다가 몸이 상할까 봐. 혹시라도 쓰러질까 봐 매일 불안한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몰라주고.

로엘은 오늘따라 넓게만 느껴지는 침대의 옆자리를 쓸었다. 그러고는 그의 자리 쪽으로 몸을 기울여 누웠다.

“원로원들이 빨리 놔줘야 할 텐데.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고.”

그러면 그녀에게로 오려나, 오늘도. 너무 늦으면 절대 오지 마시라고. 그냥 폐하의 침실에서 주무시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어차피 네가 없으면 잘 못 자.’

그러함에도 그녀를 찾아오겠지. 그것이 로엘은 안쓰러우면서도 고마웠다.

눈을 뜨면서부터 잠들 때까지 오로지 카이로스를 위해서만 사는 그가, 잠들어서까지 카이로스 걱정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 안쓰러웠고, 그런 그가 그래도 그녀 곁에서는 편히 잠들어 주는 것이 고마웠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당장이라도 그 손을 끌고 와 억지로 눕혀 이불을 덮어 줄 텐데.

“왜 하필, 많고 많은 사람들 중 당신이 황제인 거야.”

그것도 그냥 황제도 아닌 성실한 황제라니. 뭐가 그리 특출 나시고 특별하신지.

그저 매일 밤 편히 잠들어 줄 수 있는 그라면 충분한데.

“……빨리 와서 자요.”

로엘은 있지도 않은 그의 자리를 여러 번 쓸며 눈을 스르륵 감았다.

얼른, 이 차가운 옆자리에 온기가 서리길 바라면서.

그렇게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

“들어가, 이만.”

“그건 제가 할 소리죠, 폐하.”

이반은 보고 있던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원로들이 어찌나 깐깐하게 구는지, 별 같잖은 것들을 트집 잡아 그러지 않아도 없는 시간을 더 까먹었다.

“노인네들 밤잠이 많아서 그나마 다행인 거지. 아마 체력이 더 좋았으면 더 붙잡고 있었을 거야.”

이반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하등 쓸모없는 인간들. 이거 맡기고 떠나도 되는지 몰라.”

“켈트를 믿어 봐야지.”

에단은 그나마 켈트가 제대로 일을 해 줘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몰브가 아무리 못된 권세를 누렸다고 하나 그들이 맡고 있던 국정 업무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몰브의 공백을 어떻게, 누가 어떻게 메우나 아론은 참 많이 걱정했었다.

그런데 그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켈트는 너무도 훌륭히 해 주고 있었다. 그것도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아주 적당히, 선을 지켜 가며.

욕심을 버린, 진정한 의미의 충신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켈트 공이 많이 도움이 되긴 하지. 켈트가에 유능한 인재들도 많고.”

“진작에 좀 이럴 것이지.”

에단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최근에는 이제껏 이러지 않은 게 괘씸하단 생각이 들 정도다. 자신의 금지옥엽 딸이 죽었다 살아나서 그러나. 아니면 한번 권세를 잃었다가 다시 되찾아 소중함을 알아서 그러나. 확실히 켈트는 많이 변화하였다. 단순히 조용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수동적으로 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먼저 발 벗고 나서 국정을 관장했다.

그것도 꽤나 에단의 입맛에 맞게, 잡음이 나오지 않게 말이다.

“뭐. 솔직히 요새 들어서는 너무 켈트 중심으로 주도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당장은 국정을 안정시킬 사람이 필요하니까. 게다가 한동안, 형제께서 성을 비우실 거잖아? 그동안 사고 안 치고, 별 탈 없이 유지시켜 주는 걸로는 확실히 켈트가 제일 제격이야.”

에단은 이반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의 입장에서야 정말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런데 형제. 켈트가 국정을 단단히 잡아 주면 좋긴 한데, 그러면 슬슬 황후 자리 이야기가 나올걸? 워낙 황후 가문으로도 유명했고, 실제 지금 사교계에서는 조금씩 얘기가 나오는 거 같던데.”

이반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몰브가 사건을 벌인 이후, 켈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종종 황후 자리의 부재 문제도 계속 언급되었다. 애초에 황후 자리가 굳건하였다면, 그렇게 외척 가문이 버티고 있었더라면 이러한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붙여서 말이다,

“그건 켈트의 생각이 아니야.”

에단은 단호히 말했다. 그런 뜬소문이 급격히 퍼졌다면 그 출처는 뻔하다. 이번 기회로 한자리 차지한 켈트의 먼 친척들이나, 켈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첨하는 이들이 멋대로 지어내고, 지레 짐작하여 만들어낸 말들이겠지.

‘저의 모든 것을 바쳐, 로엘 네아레스 님을 칼라리엔으로 옹립하겠나이다.’

‘그러니, 그때가 된다면 저를 아카시스에서 폐위해 주시옵소서.’

에단은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던 수아가 떠올랐다. 그 당찬 눈동자.

참 오랫동안 수아를 보아 왔지만, 에단은 처음 보는 수아의 모습.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그 간절함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래서 두려울 것이 없는 여인의 눈이었다.

황제를 앞에 두고 다른 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황제의 여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게 평생을 착한 공작가의 영애로 살아온 수아 켈트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가. 그랬던 수아를 그렇게 바꿔 놓았으니.

“수아 켈트는 황후가 될 마음이 없어. 그 의사를 드보아 켈트는 존중하고 있고.”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 그리함으로써 황제의 신뢰를 얻는 것.

아주 현명한 판단이다.

이미 한번, 가문의 욕심으로 금지옥엽 외동딸을 사지에 몰아넣었으니 드보아 켈트는 더 이상 황후 자리에 대한 미련이 없다. 켈트가의 명성이 무너지지 않은 이상, 언제든 켈트 출신의 황후는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기꺼이 이번 세대는 포기하되 다음 세대를 위한 초석을 다지는 편이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는 훨씬 옳은 판단이다.

드보아 켈트는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그런 결단을 내릴 줄 아는 자다.

“수아 켈트는 진심으로 로엘을 칼라리엔으로 밀고 있어. 어쩌면 당사자보다 더 염원하고 있는지 모르지.”

그 태평한 여자는, 칼라리엔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테니.

에단의 한숨 섞인 반응에 이반 역시 알 것 같은 표정으로 동조했다.

“그렇다면, 황후 자리에 대한 쓸데없는 여론이 조성된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어. 정작 추대받는 수아 켈트가 전혀 마음이 없으니까.”

마음이 있는, 아니 욕심이 과했던 또 한 명의 후보는 알아서 나가떨어졌고.

생각해 보면 그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결과적으로 로엘의 손에 의해 몰브가 내쳐졌고, 수아 역시 로엘로 인하여 스스로 물러났다.

다시 말해 로엘은 자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황후의 자리에 가까워지고 있단 소리다.

에단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손에 쥐여 주는 그런 것이 아닌, 그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점이.

“거기에 프란시아로서 인정을 받는다면, 거의 확정이라 봐야겠지?”

이반의 말에 에단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긍정이라는 거다.

‘저는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여인이 아닌 신하로서, 평생 곁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고집스럽던 붉은 소녀가 황후라니. 에단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붉은 머리에 얹어진 황금의 왕관은 너무도 잘 어울릴 테지. 분명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울 거다. 그렇게 그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 그의 빛이자 이 나라의 힘이 될 거다.

‘당신을 위해, 그리고 이 나라 카이로스의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나이다.’

그런 그녀를, ‘카이로스의 황후, 칼리리엔 로엘’을, 그는 어느 순간부터 간절히 바랐던 거다.

“그래서 전면에 내세우는 거지? 그녀에게 아무 소리 하지 못하도록.”

이리, 생각만으로도 벅차고 기쁠 정도로.

“그 누구도 그 정당성에 의문을 갖지 않도록.”

“맞아.”

에단은 부인하지 않았다.

이반의 눈을 직시하며 대답하는 에단의 눈동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그래서 이반은 더 이상 뒷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형제의 결정은 끝났으므로.

그렇다면,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결정은 현실이 될 거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겠지.”

대신, 에단이 말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의도를 꺼냈다.

로엘이 똑같이, 에단에게 물었던 바로 그것. 이번엔 이반의 올곧은 시선이 에단을 향했다.

“그래. 그 또한 맞아.”

그래서 에단 역시 또 답했다. 로엘이 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반은 예상했던 에단의 즉답에 작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형제는 정말 어디까지 자신을 위하려는지 모르겠다.

“선봉은 너야.”

“에단.”

“그러니 잘해.”

다른 말을 못 하게 만드는 짧은 명령. 이반은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북방 정벌은, 에단의 오래된 염원이다.

그가 꿈꾸고 동경한 대지. 그들이 밟지 못한 미지의 땅.

북방 정벌을 위해 그가 들인 시간은 황자 시절부터 근 십여 년이 넘는다. 아무리 바빠도, 베리타스에 눌러앉아 밤새 북방을 연구하던 게 바로 에단이다.

그런데 그는 그 기다리던, 기쁨의 순간을 이반에게 돌리는 거다,

“중부가 처음으로 북방을 정벌하는 건 역사적인 순간이야. 당연히 모든 영광은, 나의 형제. 나의 주군. 에단 폐하가 갖는 게 맞아.”

“선봉에 서지 않아도, 내가 카이로스의 황제라는 건 변하지 않아. 그 자리에 나도 있을 거고. 어차피 카이로스에게 하는 항복인데, 카이로스의 누가 선봉에 서든 이상할 거 없어.”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깟 선봉 자리, 이반이 하면 뭐 어떤가.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이반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누굴 바보로 아나.

“너는 그저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나를 무시하는 이들로부터 나를 인정받게 하기 위해 너가 마땅히 누려야 할 제일 큰 영광을 양보하는 거야. 나는 그게 싫다는 거고.”

이반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진지하게.

이반은 에단이 이런 식으로 스스로 낮추면서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 싫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나의 형제 것을 탐낸 적이 없었어.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이미 차고 넘치도록 받은 것을.”

카이로스의 사람들 중 에단의 검 실력을 아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늘 뒤에서 지휘를 하는 저 사람이 실은 루카스보다도, 그리고 이반보다도 더 강하다는 것을 아는 이가 있기는 할까.

아마 그의 최측근 이외에는 아무도 모를 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로엘마저도 직접, 우연히 보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에단은, 자신을 단 한 번도 스스로 높인 적이 없으니.

어렸을 적이야 이반과 종종 검을 겨루며 배워 왔으니, 가르치는 스승 정도야 알고 있었겠지. 그러나 이 역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모른다.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그라서. 언제나 그 누구보다도 잘하는 에단이라서 아무리 뛰어나게 잘해도 그 누구 하나 놀라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히들 생각했다.

그러니 그의 노력을 보려 들지 않았다. 이반은 항상 그것이 답답하고 억울했다. 에단은 묵묵히 귀족들의 멸시를 받아 내는 이반을 착해 빠진 바보라고 하지만, 이반에게는 그 모든 귀족들로부터 이반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에단이 더 답답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형제가 또다시, 자신이 돋보여야 할 자리를 이반에게 넘겨주려는 거다.

“그러함에도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너의 것을 양보하며 나에게 준다면 나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는 욕심쟁이가 되어 버려. 그건 나에게도, 그리고 너에게도 전혀 도움 되지 않아.”

“도움 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아. 네 진심이 무엇인지, 가장 중요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대신 괜한 억측과 헛된 희망으로 분란의 씨앗을 만들지.

“나는 나로 인해 조금도, 네 앞길에 누가 되고 싶지 않아.”

이반은 좀 더 제대로 에단의 앞에 섰다.

지나치게 심각한, 이반에게 에단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이럴 줄 알아서 일일이 말하지 않았던 거다.

“누가 된 적, 단 한 번도 없어.”

로엘은 실망시킬까 걱정하고, 이반은 누가 될까 걱정하고.

기껏 나서서 꽃길을 깔아 주려 하건만, 그걸로는 부족하고, 그 위를 걷게끔 회유까지 해야 하나 보다.

“그래. 너도. 그리고 로엘도 이번이 가장 좋은 기회라 생각한 거 맞아. 로엘은 북방 공주 출신이고, 너는 오랜 시간 카이로스의 북을 지켜 왔으니까. 그래서 너를 천거하여도 그 누구도 다른 말을 할 수 없겠지. 아주 객관적으로 네가 가장 제격인 그런 자리니까.”

아마 이 전쟁이 중부끼리의 전쟁이었다면, 이리 큰 군대의 군사 지휘권을 이반에게 준다고 했을 때 난리가 났을 거다. 그 노인네들이라면 차라리 루카스에게 주라고 말했을지도 모르지.

그들에게 이반이란 그런 존재다. 어떻게든 누르기 바쁜, 숙이지 않아도 될 황족.

이반의 실력이 검증되어도 칭찬보다는 흠집을 것을 찾는 게 우선인 그들이다.

그런 자들 속에서 이렇게 이반이 전면으로 나설 수 있는 기회란 절대 흔하지 않다.

그 흔하지 않은 기회를 에단은 놓칠 마음 없다.

“그리고 그렇게 아름다운 의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에단은 잠시 세웠던 상체를 다시 편히 의자에 깊이 기대며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야.”

“선봉장이 너 혼자가 아니란 소리.”

에단의 대답에 이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에단의 의중을, 바로 알 것만 같았으니.

“설마…….”

“그래. 나는 로엘을 선봉으로 세울 거야.”

그리고 그 예측이 바로 적중하였다. 이반은 놀란 표정으로 다시 에단의 앞에 앉았다.

“이번 전쟁은 상징하는 바가 커.”

공식적으로, 중부가 한 번도 넘어 보지 않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북방의 땅을 정복하는 역사적인 일. 그건 중부의 역사에도, 그리고 북방의 역사에도 새로운 전환점이 될 거다.

“카이로스의 많은 것들이 토르티아로 들어가겠지. 중부의 문화. 제도. 기술. 자원. 그 모든 것들은 북방 전반으로 번질 테고, 자연히 북방의 많은 것들을 집어삼킬 거야.”

그만큼 카이로스의 모든 것들이 월등히 발전되어 있으므로.

“이걸 우리만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 북방의 모두가 알고 있어. 그래서 더 거부감이 심할 테고.”

에단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이반에게 하는 지금의 에단의 대답.

어쩌면 많은 것들을 아우르는 이유일는지도 모른다.

그가 지금 이 시점에 북방 정벌을 하는 이유이자, 테바로스의 동맹을 받아들인 이유이며, 로엘을 프란시아로 만든 이유라 할 수도 있고, 이반과 로엘을 선봉으로 세우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순히 카이로스와 토르티아만의 전쟁이 아니란 소리구나.”

“그래. 이건 중부와 북부 사이의 자존심이 걸린 충돌이야.”

카이로스의 북방 정벌.

이건 단순히 이웃 나라끼리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른 민족이 자신들의 터전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그 공포. 두려움. 그에 대한 거부감은 본능적이다.

“로엘의 아버지이자 너의 스승. 그리고 북방의 자부심인 제이드 네아레스가 살아 있었더라면 내가 과연 이 정벌을 시도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나는 시작도 하지 않아.”

그건 그자의 개인 실력 때문만도, 그가 있는 토르티아 군대의 강함 때문만도 아니다.

제이드 네아레스라는 사람 자체가 북방의 구심점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북방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힘. 국가에 상관없이, 북방의 민족을 한마음으로 싸우게 하는, 그렇게 북을 스스로 지키게 만드는 그 능력.

제이드 네아레스가 무서운 건 사람을 끌어들이는 바로 그 힘이었다.

그래서 그 어린 날, 제이드를 처음 보며 에단은 생각했다. 제이드 네아레스가 있는 한 카이로스는 절대 북방을 넘지 못하겠구나. 그렇게 저자가 굳게 지키는, 그 문을 끝끝내 열지 못하겠구나.

“그 제이드 네아레스가 없어진 거야.”

토르티아는 그 무너지지 않을 성을 스스로 무너트린 셈이다. 아주, 멍청하게도.

“그렇다면 내가 왜 너를 앞세울까.”

그는, 그조차도 제이드 네아레스의 명성에 기대려는 거다.

그만큼 그자가 북에서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이니까.

세상 어느 누가 온들, 그 아성에 비할까. 북부를 넘어 중부까지도 그의 이름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가 없다.

“제이드 네아레스의 유일한 딸로서, 그리고 유일한 제자로서 너희는 전면에 나설 필요가 있어. 그 자체가 이 정벌의 정당성이 되어 줄 테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제이드 네아레스의 핏줄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이드 네아레스가 인정한 유일한 후계자다.

북을 점령하는 데 이보다 더 완벽한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너는.”

한동안 침묵하던 이반은 나지막이 물었다.

그들을 선봉에 세우는 에단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나, 그렇다 한들 이반의 근본적인 질문의 답이 되진 못했다.

그렇데 하면 에단의 영광은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나는 너희들의 황제지.”

그 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이 나라, 카이로스의 주인이지.”

그 당연한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했다.

눈이 부시는 샹들리에 아래, 빛나는 황금빛 머리와 눈동자를 반짝이며, 에단은 언제나처럼 여유로이 황금의 황좌에 앉아 있었다. 오로지 카이로스의 현 황제만이 앉을 수 있다는 황금의 의자. 에단은 아마 태어나는 순간부터 저 자리가 자신의 자리인 양 잘 어울렸을 거다.

그 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이반의 입에서 피식하고 짧은 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렇네.”

누가 누구의 명성에 기댄다는 것인지.

“형제 말이 맞네.”

이미 그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전설이 되어 버린 것을.

“나, 이제 보니 너무 괜한 걱정을 한 거잖아.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인데.”

‘카이로스의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더 이상 어떠한 설명이 더 필요한가.

“나의 형제. 나의 주군이신데.”

그는 이미 그 스스로가 이 나라의 영광인 거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이반에게 에단은 언제나처럼 심드렁하게 지나가듯 말했다.

“알면, 쓸데없는 감상에 젖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해.”

무심한 듯하나 언제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을.

“너를 제일 믿고 있으니까.”

정확히 이반을 바라보는 올곧은 시선. 이반은 홀 안을 낮게 울리는, 그의 빈말 아닌, 진심 가득한 그 한마디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믿는다’라니. 참 그의 입에서 나오기 어려운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믿고 있다고.”

그 말이 이반에게만은 너무 쉬웠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러니 이리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거다.

이반의 황금빛 머리가 깊이 내려간 만큼, 진심 가득한 그 목소리도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왜 북이 좋아?’

‘음. 자유로워서?’

‘대신 외롭잖아.’

‘외롭긴 하지. 아주 많이.’

언제나 혼자였어도 늘 그리워하던 북으로 가는 길.

이번만큼은 이반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모든 영광은 오로지 나의 주군께.”

가장 사랑하는 그의 형제가 있다.

함께 지도를 보며 하나하나 짚어 나갔던 그 세월이 몇 해랴.

‘찾았어. 여기가 보울국이네.’

‘물자가 많을 수밖에 없겠는데? 타르티니의 완전 중앙이야.’

‘그럼 나중에 이곳을 기점으로 삼자. 토르티아에 들어가려면 한 번쯤은 쉬어 주어야 한다고.’

지도에 파묻혀 베리타스의 부족하기 그지없는 북방의 책들을 정독해 가며 그렇게 북으로 갈 날을 준비했다. 다달이 받는 북방 소식지를 그들이 얼마나 기다렸던가.

북방의 땅에 카이로스의 깃발을 꽂는 것.

이건 에단의 꿈이자 이반의 꿈이다.

“가자, 형제. 북으로. 토르티아로.”

드디어. 두 형제가 함께 그토록 염원하던 그 붉은 땅으로 간다.

***

달빛조차 희미한, 깊은 겨울밤. 작은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은 무거운 정적이 그녀의 침실을 가득 메웠다. 그녀의 작은 숨소리조차 겨우 들리는 고요함 속에서, 오랜만에 그녀 혼자 잠이 들어 있었다.

“으음.”

문제는 그 오랜만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거지만.

고맙게도, 버릇처럼 살짝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초대받지 않은 이가 들어왔다.

“……지나치게 무방비한데, 이건.”

낮은 목소리가 고요한 그녀의 방에 울렸다. 아무리 조금 열어 놨다고는 하나 그래도 꽤나 찬 겨울바람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어 그녀는 두꺼운 이불에 파묻혀 있다시피 했다.

그가 들어오느라 조금 더 창문이 열려서 그런지 움츠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자연스레 완전히 창문을 닫았다. 그러자 정적이 더 깊어졌다.

“로엘.”

낮은 목소리가 또 한 번 울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너무 예민하다 싶을 정도로 잠귀가 밝은 그녀였는데, 언제부터 이리 마음 편히 잠들 수 있게 된 걸까.

그만큼 이제 이곳이 편하다는 증거겠지. 데릭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되었구나.”

잃어버린, 나의 어린 정혼자.

데릭이 살며시 그녀의 커다란 침대 위에 앉고, 잠들어 있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쓸었다.

“으응. 에단.”

차가운 감촉에 그녀는 움찔거리며, 당연하다는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폐하도 아닌. ‘에단’. 또 한 번 데릭의 혀 끝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편안히 풀어진 붉은 머리가 하얀 시트 위에 흐드러지고,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는 부드럽고 새하얀 피부결. 조금만 닿아도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얇은 슬립 사이로 얼핏 보이는, 아름다운 곡선. 하나같이, 품에 안고 싶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입에서 에단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 울컥했다.

너무 무방비한 그녀에게 나쁜 마음이 들 것만 같았다.

“……흐음.”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드러난 그녀의 가는 목을 부드럽게 감싸자, 웅크리던 그녀의 눈이 조금 떠졌다.

“에……!”

그러고는 순간 느껴지는, 그 낯선 감촉에 바로 번쩍 눈을 떴다. 훌륭히 교육받은 대로, 손이 닿는 곳에 둔 단검에 손을 뻗었으나 그녀보다 데릭이 먼저 빨랐다.

“소리. 안 지르는 게 피차 좋을 거 같은데.”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바로 그녀의 입부터 막았다. 양손을 가볍게 포박하고 제 입을 막는 그의 힘에 로엘은 속수무책이었다. 너무도 놀라 어쩌지 못하던 로엘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자신의 침실에 침입한 초대하지 않은 손님.

두려움에 떨 법도 하건만, 그녀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분노할 뿐이었다.

데릭은 피식 웃었다. 아무튼 자존심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동의를 해야 이 손부터 놓지.”

데릭의 말에 로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릭은 그녀의 입을 막던 손을 내렸다.

“손. 놔주세요.”

“네가 얌전히 있겠다는 답을 하면.”

“놔주세요.”

그녀의 눈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여기서 더 괴롭히면 그녀가 혀라도 깨물 것 같아 데릭은 순순히 그녀의 손을 놔주고 그녀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가 조금 떨어지자마자, 로엘은 바로 몸을 일으켜, 뒤로 몸을 물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무례입니까. 몇 주간, 양국의 노력을 모두 수포 돌릴 수 있는 일이에요.”

이 와중에도 동맹 타령.

당장에라도 소리부터 질러 자신의 가신들을 불러들어도 모자랄 판에, 그녀는 그를 꾸짖는 것부터 하였다. 데릭은 자신이 먼저 쳐들어왔지만 작은 한숨이 나왔다.

이걸 안일함이라고 해야 하는지, 자신감이라고 해야 하는지.

그녀는 너무 위기의식이 없었다.

“보통은 동맹 전에 너의 안위부터 걱정해. 내가 지금 마음만 먹으면, 너 하나 넘어트리지 못할까.”

“못 하실 거 같은데요.”

데릭의 도발에, 그녀 역시 도발로 맞받아쳤다.

피식 웃는 그녀의 실소에 그 역시 피식 웃었다.

“아니지. 너는 그저 믿고 있는 거야. 내가, 그 정도까지 최악은 아니란 것을.”

정곡인 그의 말에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일자로 다문 그 침묵의 대답에 데릭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역시나 그녀는 너무 무방비하다.

남자에 대해서도, 그에 대해서도.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창문으로?”

“지금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데릭은 편히 양손을 뒤로 하여 몸을 받치며, 그녀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찌나 화려한지 불을 쳐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 정도 넓이라면 테바로스의 황후 방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여기. 아무리 보아도 네 취향은 아닌데.”

“말 돌리지 마시고요.”

태연히 시답잖은 말을 하는 그에게 로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카이로스의 아카시스 방에 쳐들어오는 엄청난 일을 벌여 놓고 이 상황에서 그는 혼자 태평했다.

“폐하.”

“그래.”

“지금이라도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부를까요.”

“네가 안 그럴 거, 나도 알아. 네가 그러는 순간, 네 말대로 지금까지의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니까. 오직, 너 때문에.”

로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치사하고 야비한 사람.

이 북방 정벌에 어떠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지, ‘그’가 얼마나 애써 왔는지 충분히 알고 있는 그녀라면 절대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이 남자는 알고 있는 거다. 그래서 이리 당당할 수 있는 거고.

“어떻게, 들어오셨냐고요.”

“들켰을 거라 걱정되는 거라면, 걱정 마. 누구 하나 때리지 않았고, 누구 하나 기절시키지 않았어. 그랬다면 벌써 난리가 났겠지.”

“카이로스의 황군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요.”

“알지. 하지만 나도 암살 시도를 한두 번 당한 건 아니라서. 남의 눈 피해서 도망가고 숨는 건 자신 있어. 그러니 무사히 이렇게 카이로스에도 들어왔겠지? 알다시피.”

태연히 말하는 데릭에게 로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위험천만하고 태평한 분이다. 이러다 누구 눈에 띄기라도 했으면 그는 진즉에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에단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를 절대로 정말 절대로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돌아가세요. 가시는 길도 절대 들키지 마시고.”

“이렇게 쉽게 돌아갈 거면 오지도 않았어.”

“데릭 폐하.”

“괜히 온 것도 아니고.”

데릭은 가지고 온, 이미 한 번 그녀에게 건넨, 그러나 그녀의 시종을 통해 다시 돌아온 사파이어 목걸이를 내밀었다.

그 커다란 사파이어는 처음 그녀가 보았을 그때처럼, 여전히 아름답게, 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냈다.

“……저는 이미 돌려 드렸습니다.”

“나는 그 전에 줘 버렸지.”

“저는 받을 수 없어요.”

“그럼 직접 버려.”

데릭은 단호히 말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그 검은 눈동자는 로엘만을 향했고, 로엘 역시 그런 데릭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삼켰다. 그는 그녀가 이 목걸이를 받을 때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란 걸 그녀가 제일 잘 알아서.

“……그렇다면 제가 버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로엘은 덤덤히 말했고, 데릭 역시 덤덤히 답했다. 로엘은 머뭇거리다, 그와 그녀 사이에 놓인 사파이어 목걸이에 손을 뻗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폐하.”

그런데 다시금 그 귀하디귀한 목걸이를 손에 잡는 순간, 그녀의 손목을 데릭이 잡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으나, 역시나 남자의 힘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차갑게 닿은 그의 커다란 손 감촉에 그녀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이 사파이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잖아.”

“예. 알지요. 그래서 못 받겠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받아야지. 그래야. 너와 나의 끝내지 못한 인연이 제대로 끝나는 거니까.”

순간 로엘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험악하게 굳었던 표정 역시 조금 놀란 표정으로 풀리더니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그의 검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 역시 그녀의 손을 세게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어, 직접 그 목걸이를 들었다.

“황태자가 아닌, 일개 황자를 상징하는 이 사파이어. 고작 다섯 번째 황자였던 나에게 이건 족쇄였어.”

반짝반짝. 그의 손에 들린 사파이어는 계속해서 빛나기만 했다. 어찌나 크고 투명한지, 볼 때마다 이 푸른빛에 끌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 아름다운 것을, 그는 참 싫어하기도 했다.

“그런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한마디로 이 족쇄를 풀어 버린 거야.”

‘그렇게 싫으시면 저 주시면 되잖아요.’

‘이건 테바로스 황자의 상징이야. 그렇게 쉽게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황제가 되실 때 주시면 되겠네.’

데릭은 오래전에 떠오른 기억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순수하기도 했던 그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아마 이 여자는 평생이 지나도 모를 테지.

‘그래. 내가 황제가 되는 날, 이건 너에게 줄게.’

어쩌면 그 약속을 위해서라도, 그는 황제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 사파이어가 데릭에게는 너무도 특별하다.

“나에게 이 사파이어는 너에게 진 빚 같은 거야. 너에게 이걸 주겠다고 했던 그 약속. 내 인생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숙제 같은 거였으니까.”

데릭은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비아냥거림도, 장난스러움도, 조소도, 비웃음도. 그 어느 것 하나 없이. 그 옛날 어린 황자 데릭과 어린 공주 로엘이 대화하듯 그렇게, 서로의 눈을 보며 거짓 없는 진심으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로엘은 그를 뿌리칠 수 없었다. 그 말을 끊을 수도 없었다.

그저, 그 이야기를 들어줄 밖에.

“내가 어째서 너를 택했을까.”

“……택한 거 아니에요. 정해졌을 뿐이죠.”

“아니. 나는 너를 분명 택하였어. 나의 정혼자로. 나의 반려자로.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로엘은 답하지 않았다. 데릭의 말대로, 그녀 역시 그때는 그러하였으니.

비록 나라 사이에 멋대로 정해진 정혼자였지만, 분명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선택했다.

평생 함께 나아갈 사람으로.

“나는 너를 지키고 싶었던 거야.”

그걸 부정하기엔 서로가 서로에게 준 믿음이 너무 컸다. 함께한 공감대가 너무 컸다.

“나조차도 지킬 수 없는 내가, 너만큼은 지키고 싶더라. 너를 지킴으로써 나를 지킬 것 같았으니까.”

자신처럼 천덕꾸러기 신세의 황족. 그러면서도 한 번을 숙이지 않는 그 도도함.

데릭은 분명 로엘을 통해 자신을 보았다. 그 안쓰러움과 그 안타까움. 그 고통을 너무도 이해했기에 차마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던 거다.

외면할 수 없을 만큼 그녀가 빛났던 것도, 그 빛으로 그가 매번 위로받았던 것도 전부 사실이었으므로.

“그래서 너를 내 정혼자로 택한 거야. 비록. 결과적으로, 이렇게 지키지 못했지만.”

데릭은 씁쓸히 웃었다.

빛 한 자락 없는 어두운 겨울밤. 토르티아도, 테바로스도 아닌 카이로스의 침실에서 이리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을 줄, 어린 그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정말 인생이란 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받아 줘. 이 약속만큼은 지킬 수 있게.”

데릭은 다시 그녀에게 목걸이를 건넸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살며시 그리고 조금은 조심스럽게. 그 모습이 마치 상대가 받아 주길 속으로 떨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라, 로엘은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그를 떠올려 버렸다.

“그렇게 너와의 오래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그래서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너에게 있어서, 나에게 있어서. 내가 진짜 테바로스의 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그렇게, 너와의 모든 인연을,”

나의 어린 공주님. 나의 아리따운 정혼자와의 인연을,

“전부 마무리 지을 수 있게.”

짧은 침묵.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

이내,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손 위에 놓인 목걸이를 잡았다.

“……저는 분명히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그 목걸이를 소중히 감싼 채 가슴으로 가져가 자신이 이 목걸이를 받았음을 표했다. 그렇게 그를 마주했다.

“황제가 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그 어린 날, 그가 그녀에게 참 듣고 싶었던 그 한마디.

그게 무어라고. 순간 데릭은 울컥하여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 흔한 달빛, 별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

그는 너무도 아름답게 빛나는 사파이어와 그 사파이어보다 아름다운 그녀를 보았다.

그가 먼저 말했건만, 정말 그 말대로 그녀와의 모든 인연이 이대로 청산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끝나 버리는 것만 같았다.

“역시나, 내 생각대로 예쁘네. 주인 손에 들어가니.”

“감사합니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작 얇은 슬립 하나. 그리고 구색을 맞춘 얇은 숄 하나 덮은 채로 이렇게 예쁠 건 무언가. 이 잠자리에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은 화려한 보석이었건만 마치 처음부터 그녀 것이었던 것처럼 그 사파이어 목걸이는 너무도 그녀에게 어울렸다. 그 사실이 데릭을 아주 많이 기쁘게 했다.

데릭은 살며시 그녀의 손을 들어 그 손등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안녕. 토르티아의 로엘.”

로엘은 그런 데릭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제껏 말하지 못하였지만, 고마웠어. 그리고 미안했어.”

그는 진정으로 그녀에게 안녕을 고하고 있었고,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릭의 말대로, 그래.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은 끝을 맺어야 했다.

“저도 감사했습니다. 황자님.”

다시는 부르지 못할, 그 한 마디와 함께.

아아. 이반에게 다시는 그를 황자님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는데.

“아무도 잡아 주지 않았던, 저의 손을 잡아 주셔서.”

그런데도 지금만큼은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이반과의 인연이 있듯, 데릭과의 인연도 있는 거니까.

로엘도, 데릭도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거다.

“많이 외로웠던 토르티아의 공주 곁을 조금이라도 지켜 주셔서.”

그래서 그 지나간 인연에 대한 마무리가, 그에 걸맞은 예의가 필요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데릭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였다.

단지 그 ‘먼저’가 ‘현재’가 아닐 뿐.

“그 모든 것들이 토르티아의 공주로서 감사했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 지나가 버린 처음에 대하여 그녀는 예의를 차리는 거다.

그래서 로엘은 어린 그때의 토르티아의 로엘로서 눈을 감았다.

“안녕히 가세요. 황자님.”

그렇게 어린 황자 데릭과, 드디어 영원한 안녕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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