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나는 자 위에 더 높이 나는 자
카이로스가 내놓은 새로운 경로는 기존의 것과 상당 부분 달라져 있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데릭 때문. 놀랍도록 정확히 그들의 예상 경로를 맞추는 그를 보며 이반과 로엘은 같은 생각이 들었다.
토르티아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처음부터 오만이었던 거죠. 토르티아로 갈 수 있는 최적의 길을, 우리만 알 거란 그 생각이.”
이반과 로엘은 잠시 서로를 보며 눈을 맞추었다.
에단에게, 그리고 카이로스의 사람들에게 타르티나에 대해 말하면서 두 사람은 조금 자만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타르타니를 모르고 자신들은 타르타니를 안다는 그런 우쭐함이라 해야 할까. 그래서 알고 있는 것들을 총동원해 자신 있게, 신난 듯 제안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로엘과 이반은 서로 상의하지 않아도 같은 길을 택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데릭도 생각할 수 있고, 토르티아의 장군들도 생각해 낼 수 있는 거다.
그들은, 두 사람만큼이나 타르타니를 잘 아니까.
아니. 어쩌면 두 사람보다 훨씬 더 ‘현재’의 타르타니를 잘 알지도 모른다.
“그걸, 감사하게도 테바로스의 황제께서 일깨워 주신 겁니다. 의도하셨든, 그러지 아니하셨든 간에.”
로엘은 정확히 데릭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들으면 살짝 데릭을 놀리는 거라 데릭 역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또 다른 변수가 생겼지요. 테바로스라는.”
역시나 영민한 여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데릭은 흥미롭게 로엘을 바라보았다. 이리 로엘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로엘의 의사는 아닌 것 같은 엄청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서는 이리 똑 부러지게 전쟁 전략을 설명할 줄이야. 제이드 네아레스가 워낙 그녀를 전장에 데리고 다니기로 유명하여, 이 똑똑한 여자가 카이로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리 전면에 나설 줄은 몰랐다. 그래서 처음 협상 자리에 그녀가 앉아 있을 때도 내심 많이 놀랐다.
에단 황제가 이토록 중차대한 일을 그녀에게 맡긴다는 사실도 놀랐고, 그녀가 이리 전면에 나서서 행동한다는 것에도 놀랐다.
그러니 더 탐이 날 수밖에.
“일부이긴 하지만, 엄연히 테바로스는 토르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거기에 타르타니의 가운데를 흐르는 물줄기는 정확히 테바로스의 국경을 따라 흐르고 있지요. 다시 말해 가장 비옥한 요르, 나르, 미르, 타르의 네 ‘르 지방’을 우리는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만일 테바로스가 변수가 되지 않는다면, 그 좋은 보급책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테바로스가 합류한 이상 카이로스는 이를 적극 이용할 셈인 거다.
“게다가 르 지방은 네 지방을 단번에 이어 주는 대 교역 다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 이용하면 훨씬 더 많은 양의 물자를 빠르게 보급할 수 있을 겁니다.”
로엘은 데릭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데릭 역시 피식 웃고야 말았다.
로엘이 꺼내려는 추억이 바로 데릭이 아는 그 추억이므로.
‘오. 정말 엄청나게 큰 다리네요.’
‘테바로스에서 가장 길고 커다란 다리지.’
로엘이 말하는 교역 다리의 완공식에 로엘은 데릭의 정혼자로서 함께 참석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테바로스의 기술력으론 엄청난 일이라 꽤나 시끌벅적하게 타국의 인사들까지 초대하여 완공식을 거대하게 치렀으니, 그녀가 그 다리를 기억 못 할 리 없다.
‘네 지방을 한 다리로 잇다니, 진짜 굉장하네요. 언제 기회가 된다면, 말을 타고 한 번에 달려 보고 싶어요.’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걸 이런 식으로 쓸 줄이야. 데릭은 그 사실이 조금 웃기면서도 씁쓸했다.
한때에는 그저 함께 달려 보고 싶은 멋진 다리였는데, 지금은 서로의 이해득실을 위한 거래의 수단이 되어 버린 거다.
너무도 달라져 버린 그 용도가 변해 버린 그들의 관계를 보여 주는 거 같아 데릭은 그저 쓴웃음을 속으로 삼킬 따름이다.
“테바로스는 항상 예측할 수 없는 변수였습니다. 정보가 압도적으로 부족하기도 했고,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해가 될지 몰랐으니까요. 그런 테바로스라는 변수가 사라진다면, 이 정벌은 훨씬 수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로엘은 그다지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순순히 인정했다. 테바로스의 동맹으로 카이로스가 도움을 받는 건 분명 사실이었으니까.
“요는 테바로스를 십분 이용하겠다는 거군.”
데릭의 말에 로엘은 싱긋 웃었다. 테바로스와의 동맹이 확정된 후, 카이로스 사람들은 뭔가 일이 데릭 황제의 의도대로 돌아가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상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동맹이 꽤나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릭 황제 즉위 후 데릭이 수복한 영토가 어디 한둘이던가. 거기에는 토르티아의 알짜배기 땅들도 상당수였다. 토르티아에 접근하기 가장 수월한 모든 통로를 테바로스가 가지고 있었으니, 그 길을 이용한다는 것은 엄청난 혜택이었다.
“다시 말해, 카이로스가 이렇게 잘난 듯이 뻗댈 게 아니란 거죠.”
버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들이 가져온 전략들이 죄다 그들의 동의 한마디 구하지 않은 채 테바로스의 것들을 이용하는 거라 심히 기분이 좋지 못하였다.
“대신 테바로스는 안 건들면 된 거 아닌가? 충분히 호의를 베푸는 거, 맞는 듯한데.”
물론 루카스 역시 지지 않았지만. 에토르 전쟁부터 두 사람은 참 끈질기게 부딪혔다.
버리는 갈수록 말이 더 짧아지는 루카스를 대놓고 흘겨보다, 이내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동맹을 결정한 이상, 테바로스는 카이로스의 정벌에 최대한 협력합니다. 대신 그 대가는 제대로 계산하셔야 할 겁니다.”
“그걸 지금부터 이야기해야겠지요.”
한동안 잠자코 있던 이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에단과 목소리마저 닮은 이반에게 자연히 데릭의 시선이 갔다. 로엘이 열심히 설명한 이 카이로스의 전략. 분명 이반의 머리에서 상당수 나왔을 거다.
“카이로스는 테바로스에서 지원받은 모든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겁니다. 거래되는 시세 그대로 정확히 계산해 드리지요.”
돈이라면 정말 아쉬울 게 없는 부자 나라. 전쟁 물가를 시세로 쳐주겠다는 그 말은 정말 카이로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버리는 생각보다도 좋은 조건에 조금 놀란 눈으로 데릭에게 슬쩍 시선을 보냈다. 그의 주군이야 언제나처럼 그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걸로는 안 되지. 겨울 날 식량을 통째로 갖다 바치게 생겼는데, 그럼 테바로스는 무얼 먹고 사나? 당연히 그 이상으로 받아야 수지가 맞지.”
데릭은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며 느긋하게 말했다. 시세라면 꽤나 파격을 던진 셈인데도 더를 바라는 데릭에게 이반 역시 작은 실소를 뱉었다. 역시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얼핏 보면, 카이로스가 후한 듯하나 실질을 생각하면 그렇지도 아니하였다. 척박하기로 유명한 북쪽의 땅. 그것도 한겨울에 움직이는 전투다. 애초 계획에서 보울국으로부터 식량을 조달하려는 이유도 보울국이 그나마 북방의 교역국으로 물자를 가져올 능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한 다리 거치지 않고, 테바로스에서 직접 직송으로 받게 된 거다. 시가로 사는 것. 조금도 아깝지 않은 일이었다. 그걸 데릭은, 바로 간파한 셈이다.
“카이로스 군대는 물론, 테바로스 군대의 군비까지 전부 카이로스가 지불할 것. 애초에 우리는 하지 않아도 될 전쟁에 뛰어드니 그 정도는 카이로스가 하셔야지. 모든 영광은 카이로스에게 돌아가는 거잖아?”
씩 웃는 데릭이 참 얄밉기도 했다. 로엘이 했던 그 말 고스란히 돌려받은 셈이다.
로엘은 잠시 이반을 보았다. 테바로스 삼십만 대군의 군자금까지 감당하는 것은 꽤나 출혈이 큰 일이라, 그녀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 로엘의 시선에도 이반은 언제나처럼 그녀를 안심시키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에단 대신 자리한 이곳. 그 역시 물러설 마음이 없다는 거다.
“아. 그럼 테바로스는 이 전쟁으로 그 어떠한 전리품도 얻어 갈 마음이 없단 소리네. 테바로스가 한 푼도 투자할 마음이 없다는 건, 그저 카이로스의 용병 노릇만 한다는 말 아닌가? 그렇다면 카이로스는 기꺼이 그 용병, 사지요. 테바로스 황제 폐하.”
씩. 이반 역시 편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긴장감. 이 자리 그 누구 하나 만만한 자가 없었다. 서로가 상대로부터 최소한을 내어 주고 최대한을 얻으려 하니, 쉬이 타협점을 나올 리 만무하다.
이래서 협상하는 이가 중요하다. 이 자리에 아주 조금이라도 안일하거나 느슨한 자가 있었더라면, 분명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집어삼켰을 터.
카이로스는 암묵적으로 테바로스가 필요했고, 테바로스는 카이로스에게 실질적으로 숙이는 입장이니 그 긴장 상태가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거다.
“하. 투자를 안 하다니? 테바로스는 처음부터 뛰어들지 않아도 되는 전쟁에 제 발로 뛰어드는 거야.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북방의 최강국, 토르티아를 상대로. 북방 국가의 이름을 달고, 침략자인 중부의 편에 서서. 이보다 더 큰 투자가 어디 있지? 우린 충분히 투자한 거 같은데. 토르티아 영토의 반을 요구할 만큼.”
순간 아론과 콜린, 그리고 루카스는 귀를 의심했다.
특유의 미소를 입가에 건 채, 데릭은 아주 당당히 요구했다.
무려 토르티아의 반을.
“지금, 반을 달라고? 고작 삼십만을 대고?”
“고작? 타르타니를 전혀 모르는 중부의 오십만보다 몇 배는 더 쓸모 있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요구입니다. 이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정확히 테바로스의 입장이군. 테바로스 역시 마찬가지다. 테바로스의 모든 군자금을 카이로스가 충당하며, 수복하는 토르티아 땅의 절반을 내어 줄 것. 이 조건이 아니면 그 어떠한 동맹도 없어.”
하. 로엘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데릭 테바로스. 진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닌 줄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데릭이 홀로 이곳 카이로스까지 들어와 그녀를 인질로 잡고, 에단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이유가 있었다.
데릭은 처음브부터 카이로스의 돈과 병사로 토르티아의 절반을 얻어 갈 목적이었던 거다.
“……이거 진짜 도둑놈 심보네.”
이반 역시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와 버렸다.
데릭은 태연히 한쪽 손으로 고개를 괴었다.
“자. 뭣들 하시나? 이제 잘난 댁들의 황제 폐하께 가서 고해야지.”
로엘은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는 데릭의 검은 눈동자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처음 그녀를 만난 카이로스의 시장에서부터, 그는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던 걸까.
아니, 그녀에게 그 사파이어 목걸이를 보내면서인지도 모르지.
정말 그 속을 알 수 없는, 뱀 같은 인간.
아주 오래전부터 농락당한 거 같아 로엘은 너무도 분했다.
“내 조건, 단 토씨 하나 빠뜨리지 말고 전하시지요. 카이로스의 아카시스 마마.”
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테바로스의 협상, 아직 끝나지 않았다.
토르티아로 가는 출발이, 참으로 험난하기도 하다.
***
“제법이네.”
원로회와 재정 문제로 한바탕하고 온 에단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테바로스와의 협상 결과에 짧게 웃음을 뱉었다.
데릭 테바로스가 순순히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에 합의해 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맞받아칠 줄도 몰랐다.
“절반은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테바로스를 많이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가치가 있진 않습니다.”
“택도 없는 소리죠. 내 병사들이 목숨 걸고 얻은 땅을 뭐가 아쉬워서 내어 주냐고요! 군사지휘권 우리가 가져와도 난, 믿을 수 있는 내 애들을 데리고 전방에 나서지 절대 테바로스 군을 앞세우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절반은 절대 안 돼요!”
그러니 아론은 심각했고, 루카스는 불같이 화냈다.
“테바로스가 협력함으로써 우리가 얻게 될 이점은 확실히, 아니 생각보다도 더 많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군자금 전부에 영토 절반은 우리의 면이 서질 않아요. 애초에 이건 이 정벌의 영광을 카이로스에게 전부 돌린다는 그 전제 조건부터 들어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어요. 자칫하면, 카이로스의 정벌이 아닌, 카이로스와 테바로스의 정벌로 인식될 수 있단 소리입니다.”
에단 앞에서 별로 적극적이지 않은 콜린마저 나서서 말했다. 그만큼 이번 데릭이 던진 돌의 파장은 컸다. 데릭은 조금도 물러설 마음이 없어 보이니 더 골치가 아픈 마당이다.
처음 시세로 충당한다는 제안을 던졌을 때만 해도, 조금 아쉬운 감은 있어도 이 정도만 카이로스가 투자할 만하다고, 괜찮은 딜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거야말로 데릭의 입장에선 택도 없는 소리였다는 거다.
“토르티아의 절반이라. 하. 확실히 해볼 만한 도박이었네.”
이반은 실소를 뱉으며 말했다. 참. 그 어린 황제. 맹랑하기도 하여라.
“데릭 테바로스가 목숨 걸고 이곳에 온 이유가 있었던 거지.”
지금 어디서 누굴 상대하는지 알고도 이러는 거라면 그 용기와 자신감에는 확실히 박수를 쳐 줄 만했다.
“제법이야. 뒤통수 맞은 거. 그래, 인정.”
하지만, 그건 엄연히 에단이 어여삐 봐주었을 때 이야기.
이반의 눈은 자연히 에단에게로 향했다.
“물론, 내 형제께서는 더 제법일 예정이시지만.”
모두가 심각한 이때에, 에단은 홀로 여유로웠다. 살짝 띤 미소에 이반은 지금 에단이 꽤나 재미있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재밌다는 건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는 그만큼 데릭 테바로스가 꽤나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용기가 만용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곧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제법이네.”
그 생각을 로엘 역시 읽었나 보다. 로엘은 그런 에단을 빤히 보았다. 언제나처럼 여유가 넘치는 평온한 눈. 흔들림 없는 그 황금의 눈동자는 깊고 깊어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어느새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 뒤늦게 보고를 받으러 온 그는 하루 종일 온갖 정무에 시달려 식사 한 번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거다.
며칠 밤을 새워도 꿈쩍 않는 강철 체력에 워낙 겉으로 티가 안 나는 사람이라,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듯하나 그녀의 눈에는 그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새삼스레 새벽부터 그를 괴롭힌 자신이 후회되었다. 1시간이라도 더 자게 둘 것을. 이 바쁜 사람을 두고 무얼 했나 싶다.
“아카시스.”
“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를 그는 화들짝 깨웠다. 딴생각했다는 것이 너무 티가 나 에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 심각한 와중에, 혼자 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를 보니 그녀의 생각이 고스란히 읽혔다. 보나마나 그를 걱정하고 있을 테지.
본인 걱정은 하지도 않은 채.
“네 생각은.”
“네?”
“네 생각을 말해 보라고. 테바로스의 조건에 대해.”
로엘은 순간 당황했다. 에단이 그녀의 생각을 이렇게 대놓고 물어 올 줄은 몰라서.
자연히 그녀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다시 말해 대답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
살짝, 이반 쪽으로 시선을 돌려 도움을 구했으나, 이반 역시 미소와 함께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생각을 말하라는 거였다. 그 생각이, 곧 이반의 생각일 테니.
“……저는 테바로스의 동맹이 이 전쟁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입을 열었다.
북부, 그것도 토르티아의 공주라는 입장. 이 상황에서 참으로 불편한 자리였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더 고민이 많다.
“테바로스를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염두조차 너무 안일했던 건지도 몰라요. 이리 테바로스가 이 전쟁에 대해 이 정도로까지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얼마든지 방해를 할 수 있단 소리도 되니까요.”
그에게 토르티아를 바치겠다는 이유로 이곳에 왔고, 그 명분으로 그의 아카시스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그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했던 건지. 그리고 얼마나 믿을 수 없는 말이었던 건지 몰랐다. 이리 닥쳐 보고 나서야, 자신이 이 일에 대해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원로원에서 아마 제일 먼저 그녀를 걸고넘어졌겠지. 아마 에단이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폐위시키든, 궁에 유폐시키든 뭐든 했을 거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본 처음부터 프란시아를 언급했는지 모른다.
그 반대부터 애초에 차단시키기 위해.
참.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만일 테바로스가, 정말 그 조건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면 고려해 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마!”
“아니면, 테바로스까지 점령하시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시든지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루카스의 반대에도, 로엘은 올곧은 눈으로 에단을 직시하며 단호히 말했다.
테바로스의 요구를 받아들이자고. 아니면, 테바로스와 전쟁을 하자고.
에단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살짝 이반과 눈을 마주하자, 이반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의 결론도 그러나 소리였다.
“폐하. 절반을 내어 주느니 전쟁을 하죠. 제가 총대 메겠습니다. 지금 당장 데릭 테바로스부터 죽이면 되잖아요.”
“온갖 오명은 카이로스가 짊어지고?”
“내가 진다고, 그 오명. 그럼 되잖아.”
“네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니야. 카이로스는 카이로스의 위엄이 있어. 그런 양아치 짓이야. 할 수 없어. 아니, 안 해. 카이로스가 뭐가 아쉬워서 그래.”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거 같은 루카스의 태도에 아론은 딱 잘라 저지했다.
루카스의 방법은 당장 간단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악수 중에 악수일 거다.
데릭 테바로스 한 명쯤, 루카스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로 인해 목숨을 걸고 복수하러 들이닥치는 테바로스는 또 어쩔 것이며, 고귀하고 고귀하신 에단 폐하에 대한 백성들의 실망감은 또 어찌할 것인가. 지금까지 완벽에 가까운 이분의 역사에, 그런 오물을 튀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정정당당하게 동맹 파기하고, 곱게 돌려보낸 다음에 테바로스부터 치자고. 깔끔하게.”
“테바로스와 토르티아를 둘 다 상대하는 건 무리야.”
“이길 수 있어.”
“그래. 이기겠지. 그래도 피해가 너무 커. 너는 안 죽겠지만, 다른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게 될 거라고. 그래서,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거야. 단 한 명이라도, 소중하지 않은 목숨은 없으니까.”
아론의 말이 무겁게 내려앉아, 루카스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 말에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폐하.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테바로스의 요구는 확실히 무리가 있습니다. 원로원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폐하. 이 굴욕적인 조건을, 정말 받아들이진 않으실 거죠? 예, 폐하?”
아론과 루카스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이반과 콜린, 그리고 로엘도 자연히 그를 보았다.
그는 편히 몸을 기대고 있던 의자에서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달라면, 줘야지.”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아주 태평하게.
“폐하!”
“테바로스가 필요한 건 맞으니까.”
에단의 대답은 명확했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도 순순히, 데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이 조금 낯설 뿐이었다.
“단, 자기가 가져갈 것은 자기가 알아서.”
그런데 그 낯섦은 단번에 사라졌다. 에단은 아주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테바로스의 영토를 넓히는 건, 테바로스가 하지 않아야 할 전투가 아니지. 그렇다면 자신들이 말하는 그 투자의 정당성. 사라지는 거 아닌가.”
아주 당연한 이치. 로엘과 이반은 그제야 에단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바로, 토르티아의 지도를 보았다.
영토의 반. 당연히 테바로스와 접경지를 의미할 터.
“그러면, 자기 돈으로 자기들이 해야겠군. 그 토르티아 영토의 반은.”
어차피, 테바로스가 탐낼 땅이다. 어차피 테바로스와 끊임없이 부딪힐 곳이고.
다시 말해, 멀고 먼 카이로스가 관리하기엔 지나치게 힘든 지역.
쓸모없는 땅이란 소리다.
“정확히 반. 토일 강을 경계로 오른쪽은 테바로스가 전담한다. 그때까지 모든 전투는 테바로스가 선방. 테바로스의 군사에게 지휘권도 넘겨.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거긴.”
로엘과 이반은 서로를 보며 자조적인 실소를 뱉었다.
에단은 가 본 적조차 없는 그곳. 두 사람은 참 많이도 밟았던 그 땅.
어째서 그 자리에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리도 뻔한 일인데.
“우리의 전투는 그 이후부터. 그 전까지는 병사 한 명도, 쌀 한 톨도 내어 주지 마. 말 그대로, 방관만 하는 거다. 우리의 진짜 토르티아 정벌이 시작될 때까지.”
에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원로회와 협상한 예산에서 30%는 깎을 수 있겠군.”
그 만족스러운 미소에, 다른 모든 이들의 입가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테바로스의 절반. 그리고 데릭 황제가 말한, 참여하지 않아도 될 전투에 참여했다는 그 투자가 인정되는 부분에 한한 군자금 전부.
“테바로스에게 전해. 그 조건, 얼마든지 모두 받겠다고.”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이로스의 에단 황제다.
밑지는 거래를 할 리가 없다.
“생각지도 못한, 혜택이 들어왔군. 감사하게도.”
씩 웃는 그의 미소에 다들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
“당신은 진짜 천재인 거 같아.”
“지나치게 새삼스러운데.”
너무 당연하다는 것을 말한다는 에단의 반응이 매우 얄미웠지만, 로엘은 별달리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재수 없게도 그는 진짜 천재가 맞았으니까.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건데.”
“나도 그 자리에 있으면 바로 생각지 못했을 수 있어. 좀 더 편한 자리에서, 좀 더 여유로운 상황이었으니까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거고.”
“거짓말. 아마 당신이 있었으면 바로 말했을걸. 난 그걸 못 해서 분한 거고.”
진심으로 분해 하는 그녀라, 에단은 그저 귀여웠다. 그래서 살짝 심통이 난 그녀의 입가에 짧은 입맞춤으로 달랬다.
“기세에 눌린 거 같아요. 데릭 황제가 너무 자신 있게 밀어붙이니, 생각지도 못한 그 패에 저도 모르게 말렸어요.”
“이해해.”
그건 이반도 마찬가지. 산전수전 다 겪어서 웬만한 기세 싸움에는 밀리지 않는 이반마저도, 데릭이 훅 하고 던진 예상치 못한 패에는 잠시 기가 눌렸던 거다.
그래서 그 영토가 결국엔 필요 없다는 것을, 협상에 여지가 있고 필요하다면 버리는 패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로엘과 이반, 둘 다 두 사람의 입으로 그 영토는 추후 테바로스와의 접전이 예상되므로 대비책이 필요할 거라는 말까지 했으면서 말이다.
“데릭 테바로스가 협상을 잘한 거지.”
그냥 잘하는 수준이 아닌, 아주 잘하는 거다. 에단은 포도주 한 모금을 넘기며 말했다.
처음 데릭 테바로스가 로엘과 함께 카이로스의 성문을 넘었을 때. 데릭은 태연히 버리에게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자는 절대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자신을 반드시 앞에 앉혀 협상을 하려 들 자라고.
그리고 실제 그는 그러하였고, 원하는 바를 얻어 냈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수없이, 정말 수없이 많은 일들을 거쳐 얻어 낸 배짱과 패기다.
1을 10이라 당당히 던질 수 있는 허세와 그 허세를 결국엔 진실로 만들 실력이 갖추어져, 그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거다. 그러니 어찌 만만한 상대일까.
기꺼이 그가 대비할 가치가 있는 자다.
“그걸 역이용하는 건 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요.”
로엘은 비어 버린 그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지금 당신. 데릭 황제의 멋진 패를 이용해, 군비를 얼마나 줄였는지 알기나 해요.”
“추후 들 비용까지 줄였지. 그곳을 제대로 지키려면 말이야.”
“그러니 얼마나 득 본 셈이야, 진짜.”
“천재 맞다니까. 부인하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도 태연히 말하는 그를 보며 로엘은 웃고 말았다.
“그래요, 그래. 내가 천재 남편을 두었네.”
남편이라는 두 단어에 에단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세상 천지에 황제를 남편이라 부르는 이도 흔치 않다고, 아니 매우 드물다고 말하려다 대신 그 예쁜 입술에 작은 입맞춤을 했다. 인사 같은 키스에도 여전히 살짝 얼굴을 붉히는 그녀가 귀여워 진하게 한 번 더 했지만.
“그런 천재 남편을 얼른 쫓아가야 할 텐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실망시켜서 미안해요.”
키스를 위해 한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감싸고 있던 그는, 그녀의 생각지도 못한 진심 어린 사과에 잠시 놀라다 이내 들고 있던 잔을 내려 두고 제대로 그녀와 마주했다.
“실망했다고 말한 기억이 없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건 맞잖아요.”
“그 말도 한 기억이 없어. 난.”
“당신이 그 자리에 나오지 않은 이유. 나랑 이반 황자에게 기회를 준 거 잖아요.”
그를 빤히 보는 그녀의 눈은 시무룩해져 있었으나, 에단은 살짝 놀랐다. 원로회의 재정 회의라는 꽤 그럴싸한 명분이 있어서, 그녀가 그의 숨은 의도를 거기까지 파악한 줄은 몰랐다.
“원로회의가 있어서 안 간 거야.”
“그건 얼마든지 날짜를 바꿀 수 있다는 거 알아요.”
“그 노인네들 피곤해. 조금의 빌미라도 주면 한 푼이라도 더 뺏으려 든다고.”
“아니면 테바로스의 회의를 미룰 수 있었어요.”
“그건 외교적 결례지.”
“당신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그건.”
“어허. 아카시스. 그 발언이야말로 무례야.”
대충 넘어가 보려 했지만, 역시나 그녀는 쉽게 속아 주지 않았다.
하긴. 이 정도 변명에 속아 줄 거라면 처음부터 알아채지도 못했을 테지.
“당신이 기회를 준 거, 알아요. 나도. 그리고 이반 황자에게도. 북방 전쟁은, 저와 이반 황자의 힘이 필요한 전쟁이죠. 특히 중부에서는 지금까지의 실패가 있어 워낙 민감한 부분이라 더 그러하고요. 그래서 쉽게 인정받지 못하고, 인정하기를 꺼리는 우리를 전면에 내세우신 거잖아요. 이번만큼은, 주목받으라고. 그렇게 인정받으라고,”
황위계승권을 가질 수 없는 황자와 북방에서 온 이방인 공주.
이보다 더 무시하기 좋은 위치가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절대적 권력을 지닌 황제께서 가장 사랑하는 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에단의 마음이 쓰일 밖에.
“폐하는 이반 황자님을 이번 정벌의 선봉에 세우실 요량이시죠.”
“맞아.”
“그렇게 빛날 기회를 주실 거고요.”
“그래. 이반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로엘은 미소 지었다. 정말 유별난 형재애다.
이 마음을 이반 역시 알기에, 이반도 오늘 밤이 편치 않을 거다.
그녀처럼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생각할 테니.
“그리고 저에겐 프란시아의 지위를 더 견고히 해 주고 싶으셨을 테고요. 제가 제일 빛날 수 있는 이번 정벌에서.”
“그래. 너 역시,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에단은 그녀를 당겨 그의 무릎 위에 앉히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실망한 적 없어. 너에게도, 그리고 이반에게도. 이번 전략의 대부분은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시작했고, 나는 두 사람이 건넨 제안들 중 결정만을 했을 뿐이야.”
“지나친 겸손이신 거 같은데요.”
“두 사람에게 도움을 많은 받은 건 사실이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
에단은 좀 더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리고 살짝 그녀의 몸을 틀어, 제대로 그의 눈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나는 그저, 너와 이반. 그리고 아론과 콜린. 루카스가 준비해 준 수많은 최선의 선택지들 중 제일 최선의 것을 고르는 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러니, 그 결정 하나를 내 선에서 했다고 너희에게 실망하지 않아. 내 결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노력과 능력이 들어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위로를 받고자 한 투정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리 위로를 받아 버렸으니 투정이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이 괜히 부끄러워지면서도, 마음이 누그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쩜, 이마저도 이리 다정한지. 로엘은 그의 목을 세게 안았다.
“새벽부터 바보같이, 너무 애처럼 굴었어요. 미안해요.”
“하긴. 너와 검을 맞대는 것도 즐겁지만, 아마 침대 위에서 더 즐거웠을 거야. 그건 확실히 애 같은 게 맞네.”
“어휴. 진짜. 진지하게 들어 달라구요. 심각하게 반성 중인데.”
“반성하지 말라는 거야. 충분히 잘하고 있고, 충분히 나를 기쁘게 하니까.”
그는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 간질간질한 감촉에 그녀가 움찔했지만, 그는 그녀를 좀 더 세게 안을 뿐이었다. 코 안에 가득 차는 향기. 부드러운 살결. 따뜻한 체온까지. 그야말로, 이 품 안에서 너무도 안정이 되었다.
“실망시키기 않을게요. 정말 열심히 해서, 당신에게 도움이 될게.”
“그래.”
“그래서 이 나라에 프란시아로서,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결연하기도 하여라.
에단은 그저 미소 지었다. 이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위로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무거운 짐을 너무도 많이 덜어 주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 로엘. 잘 부탁해. 나의 아카시스. 나의 프란시아.”
그저 이리 품에 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일 뿐이지만, 그 안에는 그의 감사 역시 가득하다는 걸 언젠가 그녀가 알아주기를. 에단은 그녀의 입술에 진한 입맞춤을 하며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