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황제께 붉은 월계수 꽃을 5권
연아 장편소설
목차
Chapter 46. 어느 새벽, 당신과 함께
“드디어 이날이 오네요.”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조금씩 밝아지려 하는 어두운 하늘 아래, 그와 그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당신한테 검을 겨누는 날이.”
쇠가 울리는 맑은 소리를 내며, 그녀는 미소와 함께 검을 빼 들었다.
“그 말. 꽤 위험한 발언이야.”
기대감이 가득한 그녀의 표정에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역시 그 기대에 맞추어, 맑은 소리를 울리며 황금 검을 빼 들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봐줄 생각이나 하지 말아요.”
“안 봐주면 너는 죽어.”
“아닐걸요? 당신 생각만큼 나는 약하지 않아요.”
날카로운 검날이 서로를 향했지만, 어쩐지 검을 든 두 사람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보였다. 자신만만한, 그 가소롭기도 한 귀여운 자신감에 그는 작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나는 강해.”
“우리 아버지보다 더? 아니잖아.”
그런 그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지, 그녀의 작은 도발이 나왔다.
“글쎄.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하지만, 그에 맞받아치는 더 큰 도발. 발끈.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가장 큰 자존심이자 자부심 아닌가. 그녀의 아버지는. 지금 그걸 건든 거다.
“와. 당신. 진짜 나 진지하게 만들어 버리네.”
그녀는 살짝 몸을 낮추고,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근력이 약한 여성의 신체 조건을 고려하려, 힘보다는 스피드에 중점을 둔 자세. 가늘고 가벼운 그녀에게 있어서는 최적의 시작이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붉은 눈동자에 그 역시 미소를 지었다.
참. 보면 볼수록 놀라운 여자다.
“기대해요. 재미있을 거야.”
챙! 소리가 순식간에 넓디넓은 새벽 후원을 울렸다. 예고도 없이 단번에 상대의 사정권 안으로 파고드는 도약력과 급소를 노리는 정확성. 순간 훅 하고 들어온 그녀의 향기에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한눈팔면, 죽어요. 폐하.”
씩. 그의 심장을 노리며 웃는 그녀의 미소에 그의 미소 역시 진해졌다. 챙. 또 한 번의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지고, 그녀는 두 걸음 정도 튕겨 나갔다. 하지만,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중심을 잡은 다른 발로 그에게 돌진했다.
“하!”
상대가 다음을 준비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공격. 그를 가능하게 하는 속도, 그것을 받쳐 주는 날카로움까지. 전부 아주 훌륭한 스승 밑에서, 꽤나 오랫동안 수련해야만 나올 수 있는 것들이다.
“재밌네.”
그러니, 이건 지루할 틈이 없다. 몰브의 사병을 홀로 몰살한 것, 역시나 우연이 아니다.
순수한, 그녀의 실력이다.
“정말 재밌어.”
가히 그를 웃게 만들 만하다.
그녀가 빠르면, 그는 더 빨랐다. 그녀가 쉬지 않고 공격하면, 그 역시 쉬지 않고 그 모든 공격을 넘겼다. 마치 넘실대는 커다란 파도 속에서도 유유자적하게 헤엄치듯 그렇게, 그는 거대한 바다 같았다.
“자. 나를 더 재밌게 해 봐. 아카시스.”
동시에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산과 같았다.
“하아!”
그녀는 안다. 그녀는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그와 이반이 검을 맞대었을 때 본능적으로 알았고 이리 직접 검을 맞대 보니 더더욱 알겠다. 그녀가 무얼 어떻게 하더라도, 그 어떠한 기적이 일어나도 이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러함에도, 그녀는 몸을 멈출 수 없었다.
정신을 깨우는 차가운 새벽 공기. 빠른 움직임에 따라 스치는 바람. 발걸음마다 번지는 풀 내음. 검과 검이 부딪히며 아침을 깨우는 이 맑은 소리까지.
아. 이 모든 것들이 얼마 만인가.
“검을 누구에게 배웠다고?”
“남자.”
“그뿐만이 아닌 거 같은데.”
“그리고 여자.”
“그거 마음에 드네.”
마치 아버지와 검을 맞대는 것 같았다. 한때, 이반과 수련했을 때와 같았다. 하지만, 그 두 사람과는 또 다른 벅참.
쿵쿵쿵.
로엘의 심장이 갈수록 더 힘차게 뛰었다.
“아주, 마음에 들어.”
그저, 그의 검이 아름답다.
“저도요.”
눈이 부시고, 경이롭다.
“저도 너무 마음에 들어요.”
당신이 만들어 내는 이 모든 순간들이.
끝을 알리는 청아한 울림과 함께, 그의 황금빛 머리를 비추는 붉은 태양이 떠올랐다.
예견되었던, 너무도 뻔한 결말. 단 한 번. 눈을 깜빡이는 그 찰나의 공격에 섬세하게 세공된 그녀의 가벼운 검이 튕기고, 그는 가볍게 그 가는 허리를 안았다.
“어쩌지.”
붉은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순간 폐부를 가득 채워 오는 그의 향기에 정신이 아득하다. 자연히 상체를 기울이는 그에게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될 거 같아.”
어찌 이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 사랑하면 돼.”
오로지 서로만을 위한 환한 미소.
이미 수십 번은 맞추었을 입술은 그렇게 서로를 찾아, 뜨거음을 전했다.
또다시 새로운 아침을 알리는, 눈부신 태양 아래에서.
***
“이제 만족해?”
“네. 아주 만족해요.”
새벽의 찬 공기에 혹여 감기라도 걸릴까 하여, 그녀를 돌돌 싸매고 온 담요가 꽤나 유용해졌다. 두 사람은 거뜬히 앉을 수 있는 부드러운 담요 위에 나란히 앉아 에단과 로엘은 밝아 오는 아침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검을 잡은 거야?”
“음. 네 살? 근데 토르티아 사람들은 대개 그래요. 아. 북방 사람들이라 하는 게 더 맞겠다. 테바로스도 대충 그런 거 같으니까.”
에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중부에 비해서는 빠른 나이다. 카이로스를 비롯한 중부의 경우, 대개 남자아이를 중심으로 일곱 살 근방부터 검을 쥐여 준다. 여아의 경우도 함께 시작하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대개는 기초 체력을 위한 운동에 가깝고 정식으로 검술을 가르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신 예법에 좀 더 치중하는 경향이 컸다.
“워낙 크고 작은 전쟁도 많고, 그만큼 징병도 많아서 더 검과 가까이 지냈던 거 같아요. 황실의 여인도 예외 없이 반드시 수료해야 할 기본 코스가 있었거든요.”
“넌 거기에 더해서 한 거고.”
“네. 아시다시피 제 부모님께서 워낙 대단하셔서.”
그녀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신 분이 유별나기까지 하셨으니 말 다한 거 아닌가. 검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아주 고생스럽게 배운 것도 사실이었다.
“나머지 한 분이 그럼, 어머니셨군.”
“네. 맞아요. 제게 검을 가르쳐 준 또 다른 분. 어머니세요.”
생각해 보니 그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모두의 관심사가 언제나 아버지였기에 항상 그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알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녀가 설명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게 조금 서운하다면 서운하달까. 로엘은 자연히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랐다.
그녀 기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 언제나 인자한 미소로 그녀를 품에 꼭 안아 주었다.
패망한 나라의 공주라고 멸시당할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유폐당했을 때도, 암살자들에게서 끝까지 자신을 지키실 때도. 그분은 단 한 번도 아름답지 않은 적이 없다.
언제나 품위가 있는 고고하신 분. 그녀는 어머니를 참 많이 동경했다.
“어머니는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나라, 칼리드 왕국의 왕녀셨어요. 도시 국가에 가까운 작은 나라에는 철이 많이 났지요. 토르티아는 철이 필요했고, 칼리드에는 철이 많이 매장되어 있으니 어쩌겠어요. 점령하는 수밖에.”
“그 선봉장이 제이드 네아레스고, 덕분에 북방 최고 미녀이자 칼리드 왕국의 왕녀, 레아 칼리드는 제이드 네아레스의 부인이 되었지.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아니, 아마 웬만한 제이드 네아레스 팬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신이라 불리는 이가 최고의 미녀를 취하였으니, 어찌 소문이 나지 않을까. 살에 살을 붙여 파다하게 퍼졌다. 타르타니를 넘어 이곳 중부에까지.
지금 그 전설 같은 이야기 주인공들의 딸이 그의 곁에 있는 거다.
그 사실이 조금은 신기하면서도 웃겨서, 그는 작은 웃음과 함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철이 나는 나라에서 검술이 발달하지 않을 수 없지요. 어머니는 꽤나 실력자셨어요. 아버지가 인정할 만큼. 아주 조금의 사심이 섞인 평가였을 테지만.”
“나는 사심 없이 네 실력을 인정해.”
“그건 그거 나름대로 별로인데. 사심을 섞어서 더 좋게 평가해 줘요.”
애교 섞인 농담에 그는 또 한 번 웃었다. 그녀는 좀 더 그에게 기대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기초 외에는 알려 주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처음부터 자신의 검술을 남길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그걸, 이반이 깨트렸지만.”
보란 듯이 아버지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만큼 이반은 남달랐고, 진실했으며 간절했다. 철옹성 같은 그녀의 아버지의 마음을 단번에 흔들 만큼.
“그래서 결국, 제가 검을 쓰는 방식은 어머니를 따른 것이에요. 엄밀히 말하자면 칼리드의 검술이지요. 이제는 그 칼리드 왕국이 없으니 저밖에 쓰지 않는 그런 검술이 되었군요.”
그녀가 조금 씁쓸히 말했다. 여자가 쓰기에는 최적인, 꽤나 괜찮은 검술인데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네가 가르치면 되잖아. 네 딸에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어찌 그렇게 정확히 알아채는 건지. 다정하기도 한 그 따뜻한 말에 로엘은 순간 울컥했다.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그의 미소가 진해졌다.
“내 딸이기도 하겠지.”
“에단…….”
“난 딸이 좋아. 미리 말하지만.”
꽤나 진심인 그의 말에 이번엔 그녀가 웃고 말았다.
“어쩌나. 나는 첫째는 아들이었으면 하는데. 당신을 너무 똑 닮은 아들이면, 진짜 귀여울 거야.”
얼마나 잘생기고 얼마나 예쁠까. 그를 닮아 눈도 크고 코도 높을 테지. 그와 똑같이 생긴 아이가 자신의 품에 안겨 온다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할 것 같았다.
“얼른 보고 싶네. 아들이든, 딸이든.”
“그럼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어휴.”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는 그의 짓궂은 속삭임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그의 품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아들이라니. 딸이라니. 이제는 그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분명, 그의 여자가 되지 않겠다 선언했건만.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그 모든 것들이 민망해질 만큼 그녀는 이미 그와의 사랑에 푹 빠져 버렸다. 이 아름다운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아주 깊이.
***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해가 꽤나 올라와 있었다. 환한 하늘을 보니 그만 들어가 봐야하는데도 이 평화로운 시간을 끝내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은 이 밀회를 계속했다.
아침부터 기분이 아주 좋으신 아카시스께서 그의 품 안에서 꼼지락대며 쉬지 않고 속닥거렸고, 그는 그 모습이 그저 귀여워 이 시간이 좋았다.
“진짜 잘 가르칠 수 있어요. 검을 들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제일 예쁜 검을 선물해 줘야지.”
로엘은 자신의 검을 가볍게 들며 미소와 함께 말했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그 곧은 검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가늘고 얇아서 딱 보아도 월등히 가벼워 보이는 그녀의 검은 마치 잘 세공된 보석 같았다. 제법 손때가 묻은 흔적이 있음에도 조금의 흠집도 없으니, 평소의 그녀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아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에단은 그녀로부터 검을 건네받아, 그 역시 가볍게 두어 번 휘둘러 보았다.
어찌나 가벼운지, 손에 든 것 같지도 않았다.
“좋은 검이네.”
“네. 명검이죠.”
로엘은 자신 있게 말했다. 이게 뭐라고, 그녀는 그가 그녀의 검을 살펴 주는 게 괜시리 뿌듯했다. 100점 맞은 시험지를 엄마에게 확인받는 그런 느낌이랄까.
“너를 위해 제작된 검이야. 그것도 아주 솜씨 좋은 대장장이 손에 의해.”
“네. 북방 최고의 마스터가 직접 제작해 주신 검이에요. 아주아주 구하기 힘든 검이라고요. 아마 이 검이 제 인생의 최고 사치품일걸요?”
성인이 되는 열여덟 살, 생일선물로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버지와 그 아래, 아버지를 신처럼 모시던 그 수많은 삼촌 같은, 아버지의 부하 장수들에게 받은 거지만.
“만드는 데만 1년이 걸렸다고 들었어요. 깜짝 선물이라 저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직접 오셔서 저를 관찰하셨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검을 들고 휘두르는지. 무엇이 약하고 무엇이 강한지. 그래서 저의 강점은 살리고 약점은 보완해 줄 수 있는, 오로지 저만을 위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검인 거죠.”
로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소중히 여기는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전히 그의 손에 있는 자신의 검을 보며, 잠시 오래된 기억을 꺼내는 그녀는 마치 열여덟, 그 검을 처음 받던 소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에단은 알았다.
그녀가 소중히 하는 것은, 비단 이 검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정성이 많이 들어간 검이네.”
이 검에 들어간, 그녀를 사랑해 주었던 이들의 그 마음을 소중히 하는 거다.
“……네. 많은 정성이 들어갔지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픈 거고.
“그래 봤자 다 부질없지만.”
그래서 더 슬픈 거다.
로엘은 이만 그에게서 검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완전히 떠올라 하늘 높이 자리 잡은 태양을 바라보았다.
“부질없는 그 마음이 참 질기기도 하네요.”
이리 토르티아를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운 것을 보면.
‘맥스!’
‘아이고, 공주님. 성안에서는 그렇게 뛰어다니시면 안 된다니까요.’
쫓겨나듯 나와, 보란 듯 돌아가는 그 걸음이 세상 어느 걸음보다도 가벼울 줄 알았건만.
붉은 대지와 붉은 성이 그들의 피로 물들면, 세상 어느 때보다 기쁠 줄 알았건만.
사람 감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버지를 외면했던, 그 모든 이들이 죽일 듯이 미웠다가도, 지나간 기억들에 마음이 아프고. 야속하다가도 다시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말했잖아. 쉬운 일 아니라고. 절대 네 맘 같이 않을 거라고.”
에단은 그녀의 어깨를 안아 주며 말했다.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인지, 그는 감히 알 것 같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작은 여인의 속이 많이 다쳤다는 것을. 그 상처가 곪고 곪아 터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역시 마음이 아팠다.
이 여자의 상처가 앞으로 더, 고통을 줄 것을 알기에.
“가자. 토르티아로.”
작은 그녀의 손 위로 그의 큰 손이 덮였다. 자신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듯, 꽉 쥐어 주는 그에게 그녀는 작은 미소로 화답했다.
“네. 폐하.”
더 이상 붉은 머리의 소녀는 혼자가 아니다.
태양보다도 환히 빛나는 이가, 그녀의 곁에 있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사랑해 준다.
“가요. 토르티아로.”
그러니 무엇이 두려울까.
정리되지 않았던, 참 오래도 그녀를 괴롭힌 조국, 토르티아와의 악연을 끊으러,
붉은 머리의 공주는 붉은 성으로 돌아간다.
***
“너무 농땡이 피웠나 봐요. 진짜 완전 늦었어……!”
“괜찮아.”
“당신만 괜찮아, 당신만!”
그녀의 손이 분주해졌다. 헤더도 없이 혼자서 열심히 치장하는 그녀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 성에서 아카시스인 그녀가 황제인 그와 함께 밤을 지새우다 늦었다고 하는데, 뭐라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저리 걱정을 하는지. 에단은 혼자 참 바쁘기도 한 그녀가 귀여워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런데, 거울로 훤히 보이는 그 모습이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누구는 한참은 늦어 버려서 이리 울상인데, 그는 혼자만 너무 여유로웠다.
“너 때문이지. 아침부터 황제에게 검을 겨눴는데 지각 정도로 끝나면 양호한 거 아닌가.”
에단은 열심히도 그를 흘기는 그녀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한쪽 귀걸이가 말썽인지 아까부터 살짝 고개를 꺾어 애쓰고 있는 그녀 대신, 그녀의 뒤에서 직접 귀걸이를 채워 줬다.
“폐하께서 씻을 때 건드리지만 않으셨어도 진작에 나갔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거치곤, 지나치게 즐겼던 거 같은데. 나도. 그리고 나의 비께서도.”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올리면서, 그는 거울을 통해 금세 새빨개진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목욕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에 밴 향유가 은은한 향기를 냈다. 물론, 적당히 따끈한 그 열기도 식지 않았고.
그녀가 지금 가려는 곳이 데릭과 이반이 있는 정벌 작전 회의라는 것을 뻔히 알기에 그는 그녀가 예뻐지는 것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이리 훤히 드러난 목덜미는 더더군다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다른 거 입으면 안 되나.”
“지금도 늦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아!”
그래서 유치한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그녀의 짧은 비명과 함께, 그의 표식이 선명히 그녀의 오른쪽 목에 새겨졌다. 누가 보아도, 누가 만들었을지 알 것 같은, 대놓고 한 야한 표식.
바로 붉게 올라오는 그 자국에 로엘은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애가 따로 없다.
“진짜……. 이 사실을 누구한테 말해야 하지.”
“널리 말해. 그래야 파리가 안 꼬이지.”
“말하면 누가 믿어 주기나 할 거 같아요? 당하는 나도 가끔 안 믿기는데.”
이렇게 유치한, 질투쟁이가 내가 아는 그 위대한 사람이 맞자 싶어서.
그녀가 무어라 하든 그는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대놓고 생겨 버린 그의 표식이 아주 흡족스러울 뿐. 로엘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그러고는 이내 웃고 말았다.
어디 한두 번일까. 이 감당 안 되는 소유욕이.
“가기나 하죠?”
그녀는 손에 잡히는 스카프를 대충 목에 감으며 말했다. 헤더가 봤으면 아마 경악을 했을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으나 어쩌랴. 그의 부군께서 그녀의 패션 감각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니.
그는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자신의 팔에 얹었다.
두 사람이 갈 채비가 다 되자 굳게 닫힌 문들이 차례로 열리며 황제 부부가 나왔다. 그들의 걸음걸음마다 수십 명의 고개가 숙여졌고, 곧 시종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게 더 티 내는 거 아닌가.”
“훤히 드러내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보라고 만든 거야.”
봐서 자각 좀 하라고.
로엘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이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
“저는요, 폐하. 혹여 당신 목에 내가 모르는 키스 마크가 있다면, 엄청 질투 나면서도 저절로 야한 생각이 들 거 같은데요. 어떤 여자가 어떤 식으로 당신의 목에 그 자국을 남겼는지 상상하면서.”
그제야 에단은 그녀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그래서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다른 남자가 나를 보면서 그런 생각 하는 거, 싫어요.”
“하면 죽여야지.”
그럴 거면서.
로엘은 예상된 반응에 피식 웃었다.
“아직도 제 스카프가 거슬리시나요, 폐하.”
그를 슬쩍 옆으로 보며 미소 짓는 그녀를 따라 에단 역시 웃고 말았다.
어쩌다 이 꼬리 백 개 달린 여우에게 홀렸는지.
“처음부터 거슬리지 않았어. 뭘 해도 예쁘니까.”
그는 가볍게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는 이만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원로들과 예산을 확정하러, 그녀는 테바로스와의 전략 회의를 마무리 지으러 가야 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건만 여전히 헤어지는 것이 이리 아쉬운지 모르겠다. 이제는 중증이 되었나 보다. 이 사람에 대해.
“되게 아쉬운 표정인데.”
“자존심 상하게도 사실이니까.”
예상외로 솔직하게 수긍하는 그녀에게 그는 좀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옆으로 서 있던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당기자, 그녀는 순순히 그의 앞에 섰다. 자연히 손을 올려 그의 옷매무새를 한 번 더 고쳐 주며, 그녀는 그를 빤히 올려 보았다.
붉은 눈동자에 그가 담기고, 그의 황금 눈동자에도 언제나처럼 그녀가 담겼다.
“얼른 가요. 늦었어요.”
“그냥 다시 돌아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되도 않는 소리를 참 진지하게 말하는 그에게 그녀는 또 한 번 피식 웃고 말았다.
헤어지기 아쉬운 건 다행히 그녀뿐만은 아니었나보다.
“잘 하고 오세요. 나도 그럴 테니.”
“어련하시겠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걸 서로가 알아 두 사람은 마지막 짧은 키스와 함께 떨어졌다. 그녀의 허리를 놓아주는 그의 손길에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그를 재촉하는 제롬의 무언의 시선이 있기에 결국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넓고 길기도 한 거리를 당당히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만 있는 그녀에게 이번엔 딜리아의 잔소리가 뒤를 이었다.
“마마. 충분하신 거 같은데요.”
“응?”
“충분히 아쉬워하셨고, 충분히 늦으셨다고요.”
“아……!”
로엘은 그제야 자신이 이리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뒤늦게 발걸음을 서두르는 그녀의 모습에 딜리아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래도 두 분의 사랑 넘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다들 오셨겠지?”
“음, 아론 경께서는 진즉에 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나머지 분들은 모르겠네요. 이반 황자님도 시간 약속에 늦는 편은 아니시니까, 아마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어휴. 내가 못 살아 정말……!”
로엘의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뛰고 싶은데, 이놈의 드레스는 평소보다 더 화려해 발걸음을 옮기기가 여간 불편했다.
이것도 전부 데릭 탓. 엄연히 타국의 황제께서 와 계시니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말 같지도 않는 예법에 로엘은 입을 수밖에 없었다.
“회의하러 가는데 드레스가 웬 말이냐고. 편한 차림이어도 번뜩이는 생각이 날까 말까인 그런 때에.”
“아무리 투덜거리셔도 어쩔 수 없으세요. 사라 님께서 얼마나 신신당부하셨는데요.”
“하아. 시녀장께서는 참 공사도 다망하실 텐데 언제 그런 보고를 일일이 받으시는 건지.”
사라만큼은 로엘도 이길 재간이 없어 로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곧 데릭이 황궁을 떠날 때까지는 매일 이런 차림으로 다녀야 한단 소리였다.
“마마. 좀 천천히 가세요. 그러다 진짜로 넘어지시기라도 하겠……!”
“으왓!”
딜리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의 뛰다시피 하던 그녀가 결국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제대로 밟아 버렸다. 덕분에 짧은 비명과 함께 바로 고꾸라지는 그녀를 바로 단단한 팔이 잡아 세웠다.
“조심.”
훅 그녀의 코끝을 가득 채우는, 진한 북방의 향. 낮게 울리는 허스키한 목소리.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데릭임을 로엘은 바로 알았다.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되어도, 넘어지는 건 여전하네.”
그는 가볍게 그녀를 제대로 일으켜 세우고는 순순히 그녀를 놔주었다.
꽤나 민망한 상황인지라 로엘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하필 마주쳐도 이 사람과 마주칠 건 무언가. 차라리 이반이라면 이리도 민망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 상황. 꽤나 익숙한 거 같은데.”
민망해하는 그녀와 달리, 데릭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절로 옛생각이 떠올라 버렸다.
‘도대체 아무것도 없는데 왜 넘어지는 거야?’
‘드레스가 불편해서 그래요. 황자님은 안 입어 봐서 몰라.’
‘여기서 드레스를 불편해하는 사람은 너 혼자야.’
‘알게 뭐람. 저는 쟤들처럼 이런 치렁치렁한 것들을 매일 입고 살지는 않는다고요.’
그 옛 기억은 애석하게도 그녀 역시 떠올라 버렸다.
몸에 맞지 않는 긴 드레스에 종종 휘청하는 그녀를 잡아 주는 건, 항상 그녀의 파트너였던 데릭이었다. 어린 그녀가 드레스가 어색한 만큼, 그가 그녀를 잡아 준 횟수가 많다는 거다.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그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살짝 붉어진 얼굴의 그녀에게 습관처럼 손을 뻗으려 하자, 그녀는 바로 그의 손을 제지했다. 그제야 그녀가 제대로 데릭을 보았다.
언제 민망해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태연하게.
“늦으셨네요.”
“나야 일부러 늦었지. 누구와 운명처럼, 시간을 맞추려고.”
“아주 쓸데없는 우연이겠지요.”
“과연, 아닐 수도 있을걸. 설마, 내가 적진 한가운데, 이 넓디넓은 카이로스 황궁 내에서 내 사람 하나 안 심었을까.”
카이로스의 눈이 몇 개인데 어디서 허세를.
로엘은 데릭의 저 자신만만한 태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워낙 사람을 현혹하는 데에 능숙한 사람. 절대 그가 보여 주는 말과 행동들을 쉽게 진실이라 믿으면 안 된다.
만일 이곳이 다른 황궁이었다면. 그래. 멀리 갈 것도 없이 토르티아의 황궁이었더라도 데릭은 쉽게 사람을 매수하고도 남았을 거다. 워낙 의심이 습관인 사람. 누구도 쉬이 믿지 않는 그가 적진 한가운데에서 아무 정보 없이, 그저 머물기만 할 그런 위인이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카이로스다.
“못 심으셨을 것 같은데요. 애석하게도.”
지금 이 순간에도 데릭을 향해 있는 이 따가운 시선들이 어디 한둘이랴. 평소보다 훨씬 많이 배치된 황실 호위병들만 보더라도, 지금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상황마저도, 낱낱이 그에게 보고될는지도 모르지.
“폐하께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폐하의 말과 행동을 보고 들으며 기록하고 있을 겁니다. 모든 사내는 황병일 테고, 모든 여인은 키로스겠지요. 만일 테바로스의 황제께서, 정말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매수하셨다면, 그때는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이 우연 같은 만남도 운명이라는 것을.”
데릭을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하는 로엘로 인해 데릭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녀 말대로, 그는 단 한 사람도 매수하지 못하였으니까.
차라리 버리 혼자였으면 모를까, 데릭까지 와 버리니 카이로스의 감시는 가히 최고조에 달했다. 그가 워낙 도발을 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후회하지는 않는다. 데릭은 충분히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였으므로.
눈앞에 있는 이 여인과 다시 만난 것을 포함하여.
“그럼 더 열심히 해야겠네. 아직, 이곳에 머물 시간은 많으니. 그 안에 성공하면, 나는 너와의 운명을 다시 만드는 건가.”
“……성공이나 하시고 말씀하시지요.”
로엘은 바로 이 뻔뻔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데릭을 마주할 때마다 느끼지만, 어렸을 때 없었던 능구렁이 같은 성격이 생겨 버린 거 같다. 그나마 그때는 황제가 되겠다는 무모한 야망이 순수하기라도 했었는데. 로엘은 속으로 작은 한숨을 쉬었다.
“가시죠. 다들 기다리시는데. 조금만 더 가면……!”
“에스코트받는 것도 예법인 거 모르나. 그 잘난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께서는.”
역시나 순순히 그를 놔줄 데릭이 아니다. 그는 어느새 그녀의 손을 자신의 팔에 얹었다. 빼내려는 그녀를 힘으로 제지한 채 데릭은 그대로 걸음을 옮기었다.
그의 말대로 그 역시도 예법이니, 로엘 역시 결국에는 몸에서 힘을 뺐다. 아침부터 그에게 말려드는 기분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두가 예민한 이 시기에 이런 작은 일로 실랑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도, 이리 보는 눈 많은 곳에서.
“불만인가 보군.”
“예. 아주 불만입니다.”
“그러면서도 뿌리치지는 않고.”
“말씀하신 대로 예법이니까요.”
“흠. 언제부터 로엘 네아레스가 이리 예법에 충실하셨던가. 이건 내가 알던 토르티아의 공주가 아닌데.”
“더 이상 당신께서 알던, 그 공주가 아니까요. 저의 작은 행동이 그분께 누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으로부터 이러한 모욕을 당하면서도요.”
모욕이라. 참 단어 선택 한번 아프게도 했다.
데릭은 그저 이리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기분이 좋아지려 하는데, 애석하게도 그녀에겐 치욕인가 보다. 냉랭하기도 한 그녀의 표정에 데릭은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그녀는 갈수록 더 곁을 내어 주지 않았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곁에 두고 싶은데.
“테바로스의 황제께서는 지금 저를 신경 쓰실 때가 아닙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로엘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응시하며 계속 걸었다.
“저는, 그리고 카이로스의 참모진들은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이 전쟁에 필요한, 테바로스가 가진 모든 것을 얻어 낼 겁니다. 그게 제가 이 회의에 가는 이유이자,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이유기도 하지요.”
그녀는 담담히 말을 이어 갔고, 데릭은 가만히 들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는 알 거 같았다.
그래서 저절로 미소가 다시 지어졌다.
“테바로스는 절대 카이로스와 동등한 위치가 아닙니다. 이미 한번 패배하였고, 이 동맹 역시 먼저 숙이고 들어오셨지요. 그 상황에서, 테바로스가 카이로스에게 원하는 만큼 얻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신다면 그건 오만입니다.”
건방지다면 건방지고, 주제넘다면 주제넘은 말들.
하지만 그 본질은 엄연한 충언이다.
“제대로 정신 차리고 계시지 않는다면 테바로스는 하나를 얻고 열을 내어 줄 겁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직도 저만 신경 쓰고 계실 겁니까. 테바로스의 황제 폐하.”
그래서 결국엔 그를 웃게 했다.
그녀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언제나 그녀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옳은 길로 가도록 일깨워 준다. 그 어린 시절에도. 이리 적이 되어 마주하는 껄끄러운 관계 속에서도.
그래서 곁에 두고 싶었다. 이 여자만큼은, 항상 그의 편에서서 그를 위해 줄 것만 같아서.
“하나만 얻을 수야 없지. 그게, 만일 너 하나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어느새 도착해 버린 회의실 문 앞에서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손을 빼려 했지만, 데릭 역시 그 손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살짝 그 하얀 손등을 들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에스코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역시 에스코트의 끝자락 예법이기에, 로엘은 그의 손키스 역시 마음처럼 뿌리치지 못했다.
“협상. 기대되는걸.”
씩 웃는 데릭을 본 로엘은 순간 움찔했다.
자신만만한 미소.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
“자. 그럼 들어가 보실까.”
그의 패가 아무래도 더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