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 각자 시작과 끝을 준비하는 법
데릭은 그 흔한 호위 한 명 없이 혼자였다.
짧은 적막과 긴장이 흐르고, 이반은 자연스럽게 로엘의 앞에 섰다.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가 있나? 이제 엄연히 동맹국인데.”
이반의 굳은 얼굴에 데릭은 작은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동맹이 되었다고 하여 모든 것을 믿는다는 건 아닙니다. 수상하면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게 습관이라. 지금 이 상황, 누가 보아도 수상하지 않나.”
이 밤에. 홀로. 그것도 하필 로엘의 후궁으로 가는 길이라니.
이건 그 의도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로엘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카이로스의 황궁은 매우 넓습니다. 귀빈궁은 여기서 꽤 멀리 있을 텐데, 밤마실 치고는 너무 멀리 오셨네요.”
“많이 걷긴 하였지. 거의 끝과 끝이라.”
데릭은 피식 웃었다. 일부러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귀빈궁과 후궁은 매우 떨어져 있었다.
데릭은 느릿한 걸음으로 좀 더 로엘에게로 다가섰다.
물론 이반이 바로 그 앞을 막아섰지만.
“아무 이유 없이 걸은 건 아니야. 언제 어떻게 암살 당할지 모르니, 나도 살 길은 미리 파악해 두어야 하잖아?”
물론, 그 김에 그리운 이를 만나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데릭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 만나게 될 줄이야.
비록 이반이 버티고 서 있다 하더라도, 반가운 건 어쩔 수 없다.
그 훤히 드러나는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이반은 더 불쾌했다.
이자의 이 당당한 태도가.
“카이로스가 암살을 하려 했거든 진작 했을 테고, 설사 이제야 한다고 한들 이리 길을 알아 두는 것만으로 피하실 순 없습니다. 뭐. 고작 몇 걸음으로 카이로스 황궁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실 수도 없겠지만.”
이반의 말이 더 뾰족해졌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사람.
테바로스를 위한다고들 하지만, 이반의 눈에는 그것마저도 그저 데릭 자신을 위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황제가 되고 싶었고, 그 황제 놀이를 자신의 입맛대로 하고 싶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거야 닥쳐 보아야 알 일이고.”
데릭은 날이 선 이반의 반응에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보다는 매우 흥미롭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난번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궁금했다.
“내가 보기엔 충분히 이 그림도 수상한데. 여러 의미로.”
서로 반말을 주고받는다던 버리의 보고에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디 로엘이 말을 쉽게 놓는 그런 여자던가.
철저히 선을 긋고, 그 선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닌, 남편의 형제에게 말을 놓다니.
이건 그 관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다른 인연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늦은 밤, 단둘이, 반말을 하며 데려다주는 사이라. 이거 에단 형제도 알고 있는 건가.”
“폐하의 명이셨어요.”
“그렇다면 지나치게 안일하군.”
“황……! 데릭 폐하.”
또다시 버릇처럼 나오려는 황자 소리에 로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데릭이 무얼 말하려는지. 그리고 두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케인 몰브가 그러했듯, 데릭의 눈에도 이반과 로엘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상해 보이는 거다.
로엘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경험상 이러한 경우의 최선책은 그저 상대하지 않는 거다.
“편안 밤 되시길 바랍니다. 폐하.”
로엘은 살짝 이반의 뒤에서 나와 깊게 허리를 숙였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예를 지키는 그 모습은, 이제 그만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편안한 밤이라. 봐 버렸으니, 그건 안 되겠는데.”
물론, 데릭의 눈에는 그녀가 어떻게 나오든 그저 귀엽기만 할 따름이지만.
이반의 뒤에서 살짝 옆으로 나온 그녀에게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순간, 로엘은 한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바로 이반의 검집이 데릭의 가슴에 닿아 데릭을 저지했다.
당장이라도 데릭을 벨 수 있다는 그 눈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이반은 로엘처럼 상냥하게 의사를 전달할 마음이 없다는 거다.
“나에게 그렇게 예를 논하더니, 이것도 꽤나 무례 아니가.”
그렇다고 기죽을 데릭도 아니었지만.
“뭐 그러시다면, 대놓고 결례를 해도 상관없겠네. 피차 예를 지킬 만한 인격이 못 되는 거 같으니.”
이반 역시 물러날 위인도 아니었다.
“과거 인연. 그쪽만 있는 거 아니야. 원해서 한 것이 아닌 정혼 따위. 스스로 차 버린 그 지나간 인연. 이제 와 이렇게 들먹이는 거, 지나치게 뻔뻔한 거 아닌가.”
“이반.”
결국 로엘이 중재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하고 싶었으나 꺼내지 못한 그 말을, 이반을 거르지 않고 말했고, 그 말에 데릭의 입가에도 미소가 사라졌다.
더 이상 언쟁을 해 보았자 좋을 게 아무것도 없는 당사자인 로엘은 이반의 팔을 먼저 잡았다.
“그만해.”
그 손을 이반은 부드럽게 잡아 떼어 냈다.
그 역시 물러날 마음이 없다는 거다.
“끝난 인연을 붙잡아 봤자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 그렇다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살아. 당신이 아는 토르티아의 공주님은 없어.”
마치, 그의 네아가 더 이상 없듯이.
이반이 더 큰 사고를 칠까 봐 걱정하는 눈. 자연스러운 호칭. 친밀감이 느껴지는 손짓.
굳이 이반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와 로엘 사이에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쯤은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이리 이곳에 오지 않았을 때부터 데릭은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요는 너도 똑같이 끝난 인연이라 현재를 수긍하고 물러났다 이건가.”
에토르 전장에서 이반의 검술을 보는 순간.
그리고 로엘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 보는 순간.
“그런데 어쩌나. 나는 그러기 싫은데.”
제이드 네아레스의 검을 유일하게 쓰는 자.
로엘이 기꺼이 이름으로 부르는 자.
그리고, 그만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어린 로엘을 아는 자.
데릭 역시 이반이 매우 불쾌해졌다.
“싫다고 다른 방법이 있나? 없으신 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렇게 속 편히 생각해 버리는 건 그쪽 마음이고. 나는 불편하게, 오래, 열심히 생각 중이라.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을지에 대하여.”
이반의 주먹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아픈 부분을 데릭은 아주 제대로 후벼 팠다.
“나는 한번 놓쳤고 후회하였으며, 기회를 다시 잡았어. 한번 놓쳐으니 끝났다는 말로, 두 번 놓치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아. 네가 그랬다고, 나까지 그래야 하나?”
이반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애석하게도, 어떠한 명분과 이유를 갖다 붙여도 데릭의 말대로, 이반은 이번에도 그녀를 놓쳐 버린 건 사실이니까.
어김없이, 언제나 그랬듯 이반은 또 에단을 선택하고야 말았으니까.
그렇다면 후회라도 하지 말아야지. 미련이라도 갖지 말아야지.
여전히 이리 아프고, 여전히 이리 아쉽고, 여전히 이리 아리면, 그는 누구에 기대 이 마음을 토로하나.
“틀렸어요, 폐하.”
한동안 조용히 있던 로엘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이반의 앞에 나섰다.
“이반은 언제나처럼 나를 배려한 거예요. 당신이, 이번에도 제가 아닌 폐하 자신만을 배려하듯이.”
이반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것.
그를 위로해 주는 이는, 결국 돌고 돌아 그녀라는 사실.
굳었던 이반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데릭의 표정이 차갑게 식은 것과 대조되게.
“폐하. 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토르티아의 성에 유폐되었을 때 테바로스로부터 파혼 통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당신을 이해했기에 서운하지 않았다고 하였지요. 저는 처음부터 폐하를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해한다는 그 이유로, 당신에게 기대가 없었고,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었지요. 그런데, 폐하. 저는 이반 황자님은 기다렸답니다.”
데릭을 응시하는 로엘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는 그 목소리도 너무나 차분했다.
그저 지나간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저 편안히 말을 이었다.
그만큼, 과거를 이야기하는 그녀의 감정에 동요가 없었다.
그 모습을 데릭도, 그리고 이반도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꼈다.
그녀는, 두 사람과 달리 너무도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이반 황자님을 기다렸지요. 이 사람이라면 와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였으니까요. 그래서 실망도 컸답니다. 이 사람마저 나를 버리는구나 싶어서.”
“……네아.”
부르지 않는다고 해 놓고선 결국 또 나와 버렸다.
그런 이반에게 로엘은 싱긋 웃어 주었다. 그리고 살짝 손을 들어 더 말하려는 이반을 저지했다.
“하지만 그 실망도 사라졌지요. 이반마저, 제가 이해하기 시작하였거든요. 폐하처럼. 이 사람도, 사정이 있었겠구나. 그리고 그 사정에 내가 밀렸구나 하고.”
로엘은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이었다.
예전에는 기억하기도 싫은 아프고 끔찍한 시간들이었는데, 이제는 진짜 과거가 돼 버린 거다.
그 사실이 그녀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이제야 진짜 벗어나는구나 싶어서.
“그래서, 스스로 살아남아야겠다 결심하였지요. 그래서 이곳, 카이로스에 왔답니다.”
또 한 번 싱긋.
그녀는 두 사람을 보며 환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두 사람은 바로 알았다.
지금 그녀가,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그렇게 에단 폐하를 만났습니다.”
저 표정과 눈빛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하는데, 무얼 더 물을까.
이반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의 형제께서는, 이리 없는 곳에서마저 이기는구나 싶어서.
“데릭 폐하. 끊어진 인연에 대한 두 번째 기회 따위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 지나간 것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마시고 언제나 그러시듯 앞으로 나아가세요. 그리하여 카이로스의 동맹국으로서 카이로스의 도움이 되어 주세요.”
이 야밤. 승자를 따지자면 결국 그녀가 아닌가.
데릭은 자신을 응시하는 이 여인이 더 이상 토르티아의 공주가 아님을, 너무도 카이로스의 아카시스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데릭 폐하. 카이로스에서 평안한 밤 되시길, 다시 한 번 더 바랍니다.”
로엘은 또 한 번 허리를 숙이더니, 이번엔 정말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자연히 이반이 따랐다. 이반 역시 더 이상의 언쟁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데릭 혼자 덩그러니, 카이로스의 황궁 한복판에 남겨졌다.
“과거일 뿐이란 건가.”
데릭의 표정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무엇이 그의 심기를 이토록 건드렸을까.
이반은 기다렸지만 자신은 기다리지 않았다는 그 말일까.
아니면 그녀에게 그가 모르는 이반과의 인연이 있었다는 그 사실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너무도 단호하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는 그녀의 말 때문일까.
“다 아냐.”
데릭은 에단을 생각하는 그녀의 그 표정에 기분이 상한 거다.
너무도 훤히,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그 눈빛에 화가 나는 거다.
“……그렇다면 나 역시 나아가야겠네.”
데릭의 검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가 알던 토르티아의 공주가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면, 그래. 인정하고 나아가면 된다.
토르티아의 공주가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되었듯,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테바로스의 황후가 되지 못하리란 법은 없으니.
“끝이 아닌 시작이야. 로엘.”
데릭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원하는 건 손에 넣어야 직성에 풀리는 데릭의 눈에 나쁜 마음이 드려나 보다.
***
“들어가 쉬라고 했던 거 같은데.”
“잠이 안 와서요.”
한참 자료를 검토하고 겨우 돌아온 늦은 새벽. 기대하지 않았던 이가 그를 예쁜 미소로 반겨 주었다.
“보고 싶은 이가 있어서 그런가, 잠이 와야 말이죠.”
그의 피곤을 단번에 날려주는 그 사랑스러운 미소에 그 역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로엘은 그를 기다리며 한참을 보던 서류를 이만 정리하고, 자연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무거운 도포를 받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올걸 그랬네.”
그런 그녀의 가는 허리를 안으며, 그는 그녀를 좀 더 가까이 품으로 당겼다.
“그럴 줄 알았으며 넌지시 알려 줄 걸 그랬네.”
장난스럽게 속삭이는 그녀의 말에 그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어찌 이리 모든 행동이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그녀의 허리를 안은 그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가자, 그녀는 이만 들고 있던 황제의 도포를 살포시 근처 의자에 올려 두고 두 손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환궁하였다고 이반이 그러던데, 다시 나온 건가?”
“네.”
“아무 이유 없이?”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잠이 안 와 직접 왔다는 건 이유가 되지 않나요?”
“그럴 리가.”
충분하여도 너무 충분하지.
그는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남기며,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되도록 데릭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아, 바로 안으로 들여보낸 건데 그녀는 그의 숨은 뜻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나 보다.
품에 꼭 안은 그녀의 머리 너머로 보이는, 그녀가 읽고 있던 저 많은 서류를 보아하니 그가 이 늦은 시간까지 일할 만큼, 아카시스께서도 제 자리에서 열심히 하였나 보다.
에단은 살짝 로엘을 품에서 떨어트리고는, 다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내가 들어야 할 말이 있는 건가.”
“음. 저 서류들을 말씀하시는 거면, 네. 맞아요. 해 드리고 싶은 말들이 많아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응?”
“지금, 이 밤에, 당신의 침실에, 홀로 들어온 나를 두고 서류를 보시겠다는 건가요. 폐하.”
그런데 그녀의 생각을 그 역시 알지 못하였나 보다.
예상치 못한, 꽤나 위험한 그녀의 유혹에 에단은 한 박자 늦게 피식 웃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살짝 홍조를 드리우며 환히 미소 짓는 그녀에게 어떤 남자가 넘어가지 않을까.
“당신이야말로 나에게 해 줄 말 없어요? 내가 이렇게, 목걸이 하나도 풀지 않은 채로 왔는데?”
게다가 이리 사랑스러울 건 또 무언가.
로엘은 그녀의 허리를 좀 더 세게 안았다. 평소에 절대로 하지 않는 애교가 오늘따라 넘쳐흘렀다.
갑작스러운 이 바람직한 변화의 이유를 에단은 잘 모르겠으나, 그게 무엇이든 무슨 상관일까.
이리 귀엽고, 이리 사랑스러운 것을.
에단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저 오늘 힘 많이 준 거예요. 1시간 넘게 치장만 했어.”
“설마 그 애송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아닐 테지.”
“당연히, 눈치 없이 예쁘다는 말 한 마디 안 해 주는 남자를 위해서죠. 다른 사람들은 다 한마디씩 했다고요. 당신만 안 했어, 당신만.”
쀼루퉁한 그녀의 얼굴엔 서운함이 역력했다.
그 서운함이 그를 기쁘게 만든다는 걸 로엘은 모를 테지.
에단은 살포시 품 안의 그녀를 침대에 내리자, 로엘은 좀 더 얼굴을 붉혔다.
당차게 찾아와 유혹할 때는 언제고 또 막상 판을 깔아 주니, 그녀는 다시금 소녀로 돌아갔다.
너무도 예상되었던 그녀의 반응에 에단은 그저 웃고 말았다.
그의 품에서, 뜨겁게 울 때는 천상 여자이면서, 그녀는 아직도 이리 부끄러움이 많다.
그는 망설임 없이, 훌훌 상의를 벗어 던졌다. 단번에 근육이 잘 잡힌 그의 가슴이 환한 불빛 아래 훤히 드러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버렸다.
“유혹한 건 너야. 피하면 안 되지.”
“누, 누가 피했다는 거예요.”
씨익. 그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위로 올라서 그녀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로엘은 양팔로 겨우 몸을 지탱하며, 최대한 다가오는 그를 버텼지만. 이내 풀썩 하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그녀가 그렇게 온연히 그의 그림자 밑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잠깐만요. 폐하. 오늘 제가 할…….”
“네가 하면 속 터져서 안 돼.”
누굴 피 말려 죽일 일 있나.
여전히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는 그녀에게 무얼 맡길까.
어차피 애만 닳다가 그가 나설 게 뻔하다.
그럴 바엔,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고 싶었다.
“이대로 입고 왔다는 건 마음대로 벗겨도 된다는 말인 거지.”
에단은 그녀의 가슴을 팽팽이 동여매고 있는 드레스 매듭 끝자락을 들어, 살짝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어느새 열기와 욕망이 가득한 남자의 눈을 하고 있는 그의 뜨거운 시선에 그녀의 심장이 쿵쿵 멋대로 뛰어 댔고, 그 커다란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다.
그런데도, 그녀의 손은 덥석, 리본을 풀려는 그의 손을 잡아 저지했다.
바로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 손 뭐야.”
“당신, 아직 말 안 했어요.”
물론, 그녀 역시 단호했지만.
그제야 에단은 그녀가 뭘 바라는지 알아챘다. 그저 장난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만, 진짜로 듣고 싶었나 보다.
“예뻐.”
너무나도 당연한, 이 한 마디가.
“한 순간도 안 예쁜 적이 없지만, 오늘은 더 예뻐.”
그래서 그는 기꺼이 그녀가 바라는 그 말들을 속삭였다.
“그래서 다른 놈들 앞에 내보이기 싫었어.”
그 역시 진심을 가득 담아, 솔직하게.
그러자 그녀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손을 뻗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당신을 위해 꾸민 거예요. 그러니, 당신 마음대로 해요.”
부끄러움과 열기가 더해진, 붉은 눈동자가 예쁘게 휘어지면서 속삭인 그 한마디는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이 여자는 그 한마디가 무얼 의미하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하는 거야.”
“아니까 하는 거예요.”
새빨개져서도 자존심을 세우는 이 귀엽고도 순진한 여우 때문에 그는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너는 전혀 모르고 있다고, 안다면 그리 쉽게 말하지 못할 거라고 말해 주려다 말았다.
“그렇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말보다는 경험이 더 빠를 테니.
그녀의 머리를 하나로 올려 잘 고정시키고 있는 핀이 그의 손에 의해 단번에 끌러지더니, 길고 긴 그녀의 붉은 머리가 아름답게 흘러내렸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며시 그녀의 뒷목을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겨 가까이 했다.
오로지 그녀만 볼 수 있는 그의 미소, 눈빛. 목소리.
“아카시스의 밤을, 어디 받아 볼까.”
받는다고 하나 주고 있는 그에게, 그녀 역시 환히 미소 지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를 위로하기 위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니. 그저 그가 괜한 의심을 할까 스스로가 두려워서 찾아온 이 밤.
카이로스의 승리의 여신께서, 카이로스의 아름다운 황제 폐하께 성과 열을 다하여 뜨거운 밤을 드리려나 보다.
***
“마음에 안 들어.”
“뭐가?”
“그 테바로스의 황제라는 사람.”
수아는 입술이 잔뜩 나온 채로 말했다.
리암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아, 피식 웃었다.
“로엘 님 때문에?”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겨우 평안해지신 분을 이렇게 굳이 들쑤시는 건 무슨 심보냔 말이야.”
수아는 거의 식은 찻잔의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생각할수록 데릭이 괘씸하여 열불이 더 났다.
한참 죽이고 살았던, 불같은 예전 수아 켈트의 성질이 다른 이도 아닌 데릭 때문에 다시 드러날 거 같다.
“너무 열 내지 마. 그래 봤자 타국의 황제고, 로엘 님은 이미 이 나라의 아카시스님이야.”
“누가 그걸 몰라? 다 아는데도 저렇게 뻔뻔하게 구니까 더 화가 나는 거라고! 도대체 폐하는 무슨 생각이신 건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지금 이 상황에서 동맹이 웬 말이냐고? 만날 일도 없게 만들어야 하고 엮일 일도 피해야 할 마당에, 이제 아주 공식적이고도 주기적으로 부딪히게 생겼잖아. 난 그게 진짜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사람들이 그 모든 만남에 대해 별의별 말들을 다 지어낼 테니. 그 소문들 또한 살이 붙어 결국엔 로엘을 좀먹을지 모른다.
수아는 그게 무서운 거다.
“나는 몇 년간 죽은 사람으로 살았어. 온갖 지어낸 말들이 마치 사실처럼 떠돌아, 나중에는 어느 게 진실이고 어느 게 거짓인지 나조차도 분간이 되지 않더라. 고작 폐하의 선택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 그거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난리였는데, 다른 나라의 황제라니. 옛 정혼자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나와 리암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새어 나갔다면.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면, 소문은 자기 멋대로, 듣고 싶은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전해지니, 나는 천하의 못된 여자가 되었겠지. 어쩌면 카이로스 백성들의 돌에 맞아 죽었을지 몰라.”
“수아야.”
리암은 감정이 격해지는 그녀를 달랬다.
수아는 그저 로엘이 혹시 자신처럼, 그런 허황된 소문에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는 거다.
“나는 그게 너무도 싫어. 사람들이 그저 로엘 님을 로엘 님으로만 바라보았으면 좋겠어. 토르티아 출신이니 뭐니, 그런 거 말고. 그저 그분 자체로 그분이 어떤 말을 하시고 어떤 행동을 하시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가지는지, 그걸 봐 줬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모두가 알게 될 거야. 그분이야말로 이 나라의 황후에 어울리는 분이라는 걸.”
결연하기도 한 수아에게 리암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할 필요도 없었고.
리암 역시 로엘에게 큰 빚을 진 입장.
로엘이 두 사람을 어떻게 위했으며, 수아를 어떻게 살렸고, 리암 역시 어떻게 살렸는지 잘 안다.
그래서 리암도 로엘에게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충성을 바칠 준비가 되었다.
그런 로엘을 수아가 황후로 만들겠다는데, 리암이 따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그저 수아가 과도하게 나서다 다칠까 그게 걱정될 뿐. 어떻게 그 앞에 서서 방패가 되어 줄지, 그렇게 수아 대신 자신이 다칠지 그걸 고민하여야지 수아를 말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로엘 님을 황후로 만들 거야. 절대 손 놓고 있지 않아.”
물론 말린다고 하여 말려질 수아도 아니지만.
“당장 무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기회가 오면, 때가 오면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아.”
“아니. 그러면 늦어.”
수아는 바로 답했다.
때가 오면 그때 잡으라니. 그러다 그 때가 안 오면 어쩌란 건가.
“기회는 만드는 거야. 절대로 기다리고 있다고 알아서 오지 않아. 그랬다면,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오는 거였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되지 않았어.”
기다리면 기회가 언젠가 온다는, 그 안일한 마음이 지금의 그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리암을 놓치고 너무도 오랜 시간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있었다. 수아는 그런 미련한 짓,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로엘 님에게 그런 실수를 반복하게 하지도 않아.”
이미 결심을 굳힌 눈. 리암은 더 이상 수아를 말려도 의미가 없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말하는 걸 보니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다는 것 또한 안다.
“그래서 무얼 하고 싶은 건데?”
“로엘 님을 황후, 칼라리엔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짙은 흑색의 아름다운 수아의 눈동자가 또렷히 빛났다.
수없이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로엘을 도울 수 있는지.
그녀는 로엘만큼 대단하지 못하여 직접 전쟁에 따라가 그녀 대신 화살을 막아 줄 수도 없고, 언변이나 사교술이 뛰어나 정치적으로 도와줄 수도 없다.
만일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녀의 몫이 아닌 아버지, 즉 켈트가가 할 수 있는 일들.
수아는 켈트가의 영애로서도지만, 친구로서도 로엘을 돕고 싶다.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돕고 싶었다.
“나는 그저, 로엘 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황후가 된다고 꼭 행복해지는 건 아니야.”
“맞아. 그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시겠지. 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곁에 있으면 행복하실 거야. 그리고 그분이 바로 폐하시고. 그래서 나는 로엘 님이 황후가 되셨으면 하는 거야. 그분이 당당히, 영원토록, 사랑하는 이 곁에서 행복하길 바라니까.”
그렇다면 그녀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은 무얼까.
카이로스에서 평생 이방인이라는 낙인? 뒷배가 없어서 밀리는 권력?
가지고 내려온 것이 없는 부?
그 무엇도 아니거니와, 그 어떤 것도 수아가 스스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로엘 님이라면, 그리고 리암이 폐하라면 무엇이 제일 마음 한 켠을 불편하게 할까? 리암. 나는 너무도 단순하여 답이 바로 나왔어. 나라면, 네 곁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게 제일 싫을 거야. 비록 그것이 허울뿐이라도.”
아리스 몰브가 그렇게 몰락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이 후궁에는 많은 황제의 여인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폐하는 아마 그 누구도 마음에 담지 않으시겠지. 아마 앞으로 그 누구도 찾지 않으실 거야. 그건 나도 알고, 그녀들도 알아.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들도 알겠지. 그러함에도, 나는 싫을 거 같아. 그러함에도 나는 내 남자에게 나 아닌 다른 여자가 공식적인 여인으로 남아 있는 게 너무도 싫어.”
리암은 그제야 수아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알 거 같았다.
그리고 그 계획을 아는 순간 철렁했다.
꽤나 엄청난 일을 벌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상상 이상이다.
“나는, 나를 포함하여 이곳에 있는 모든 황제의 여인들을 출궁시킬 거야. 그렇게 로엘 님을, 이 나라 유일한 황제의 여인이자, 카이로스의 황후로 만들 거야.”
리암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나왔다.
로엘 님을 만나면서, 수아는 그저 예전의 수아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보다.
그보다도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리암 역시 머무르고만 있을 수 없는 법.
“……나의 아가씨. 나의 여인. 수아 켈트 님을 따릅니다.”
리암은 수아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하며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마디의 반대도 없는, 그 긍정의 대답에 수아 역시 리암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리 그녀를 전적으로 지지해 주고 믿어 주는 남자니, 그 오랜 시간을 사랑한 거다.
“응, 리암. 우리 함께 로엘 님을 황후로 만들자.”
이런 두 사람이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수아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아는 리암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오늘따라 청명한 겨울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이반의 뒤에서부터 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엘을 그렇게 데려다준 후, 이반은 홀로 카이로스 황궁의 가장 높은 망루에 올랐다.
로엘 님을 모셔다 드리러 가신 분이 올 때가 한참 지나도 돌아오지 않길래, 콜린이 알아서 찾아 나선 참이다.
“회의하다 사라지시면 어떡하냐구요.”
“조금만 바람 쐬다가 들어가려고 했어.”
“밤이 너무 깊었습니다.”
“하하. 벌써 그렇게 되었나.”
콜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로엘 마마와 그 잠깐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워낙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으시는 분인데, 그분만 개입되면 이리 생각이 읽혔다.
생각이 많아지고 심란해하는 것이 너무도 훤히 보였다.
“또 무슨 일이세요. 로엘 마마께서 황자님이 싫으시데요?”
“하하. 그럼 차라리 낫지.”
서론을 잘라 버리고 콜린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구질구질하게 아니라고 설명할 것도 없었고, 어떤 마음 상태인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 사실이 이반은 민망하면서도 고마웠다.
그만큼 콜린은 이반의 곁을 오랫동안 지켰다는 반증이니.
“로엘 마마께서 자신도 모르게 황자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군요. 그게 그분 잘못이 아닌 걸 알아서, 그게 에단 폐하 잘못이 아닌 것도 알아서 그래서 심란하신 거고요.”
“너무 정확히 알아채지 마, 콜린. 무섭다고.”
이반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참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간사한지, 이미 마음 정리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리 멋대로 상처받고 멋대로 실망해 버리고 말았다.
에단을 떠올리며 웃는 로엘의 모습은, 그 어떠한 말보다도 잔인하게 이반의 마음을 후벼 팠다.
정말, 이제 끝이라는 기분.
이미 그녀는 그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너무도 확연히 너무도 단호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닐 테지.”
데릭 테바로스. 그 역시 같은 기분을 뼈저리게 느꼈을 거다.
여유롭던, 오만하던 그 미소가 사라지고 정색하는 표정.
살기등등해지는 그 차가운 눈동자에 이반은 위협을 느꼈다.
이반이, 마음 아파했다면 그는 ‘분개’하고 있었다.
“데릭 황제를 만나셨던 겁니까?”
“응. 아무래도 조심해야겠어. 그 자식, 멋대로 카이로스 황궁 안을 나돌고 있었다고.”
“그건 확실히 문제가 좀 있네요.”
“경호를 강화하라고 하고,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 혼자서 무얼 하겠냐는 그 안일함. 그 안일함이 모든 걸 망칠 수 있어.”
“예, 전하. 전달하겠습니다.”
콜린은 바로 수긍했다.
이반의 말이 전부 맞기도 하였거니와, 지금 이반의 상태를 보아하니 그다지 다른 소리를 해 보았자 귀에 들어올 거 같지도 않았다.
“데릭 황제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손에 넣으려 하겠지. 설사 그게, 이미 다른 나라의 황후가 된 자신의 옛 정혼자라도.”
로엘로 인해 생각이 많았던 눈이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깊숙히 숨겨진 분노가 느껴진달까.
콜린은 황자가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기도 바쁜 와중에, 데릭이라는 또 다른 변수가 점점 더 커지는 거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로엘 마마는 어떤 분인지, 사건 사고가 도통 끊이질 않는다.
이리 그 인생이 요란스러우니, 더더욱 이분 마음이 정리가 안 되는 것이 아닌가.
그저 평범한 아카시스였으면 애초에 황자님과 마주칠 일도 별로 없었을 터.
그런데 이분은 매일같이 회의장에 나타나 황자님과 머리를 맞대고 있으니 마음을 정리할 틈이 없었다.
“도리가 없는데 어쩌겠습니까. 포기하기 싫어도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누군가의 노력으로, 오기로 바뀔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도 황자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콜린은 그래서 답답했다.
평생 문을 닫고 산 이분께서 겨우 문을 연 상대가, 그의 마음의 문을 또다시 굳게 닫아 버리게 만들어서.
이제 또 얼마를 기다려야 저분의 마음을 열어 줄 이가 나타날까.
그게 로엘 마마였으면, 참 좋았으련만 하늘은 이반 황자에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정리하셨고, 그래서 스스로 포기하셨으며, 그렇게 홀로 아파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매일매일 지켜보는 콜린은 그저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 와중에 데릭 테바로스라는 옛 정혼자까지.
겨우 정리되고 있던 마음이 이 멋대로인 젊은 황제의 등장으로 또다시 흔들리는 것이 화가 났다.
“황자님께서는 이번 전쟁만 생각하셔야 합니다. 황자님께서 데릭 황제를 신경 쓰실 일은, 데릭 테바로스가 북방에서 어떻게 우리를 노리는지. 이번 동맹에서 그들이 무얼 꾸미고 있는지. 그 꿍꿍이를 파헤치시고 그들에게서 얻을 것을 얻어 이 전쟁을 또다시 승리로 이끄시는 겁니다.”
콜린은 꽤나 단호했다.
처음부터 이반의 로엘에 대한 마음을 지지할 수 없었던 상황.
이반의 상처에 뒤에서 아파할 순 있어도, 앞에서 위로를 건넬 순 없었다.
그보다는 그가 할 일을,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고 상기시켜 주는 것.
그게 진정으로 그를 위한 일임을 알기에 콜린은 더 냉정히 이야기했다.
“황자님. 이번 북방 정벌. 황자님이 실질적 총책임자라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에단 폐하의 신뢰는 하늘 같고, 이반 전하가 북방에 바친 세월이 길며, 북방 전쟁을 주도할 군사 역시 이번만큼은 프래카가 아닌 우리 정예군이지요. 처음으로, 이반 황자님 이름으로 중앙군을 이끌고, 당당히 나서는 그런 전쟁입니다. 그러니, 황자님. 부디 로엘 마마 일은 이제 그만 접으시고, 카이로스의 황자님으로서 황자님을 따르는 저희를 돌아봐 주세요.”
구구절절 옳았다. 그 진심과 그 충심도 전부 와닿았다.
그래서 이반은 콜린의 말에 다른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런데 어쩌나.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인 것을.
“하아. 아무튼 고집불통이시라니까. 지금 속으로 로엘 마마를 어떻게 지킬지만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그 마음은 바로 들통나 버렸다.
“그렇다고 너희를 생각 안 하는 건 아닌 거 알잖아.”
“예예. 그러시겠죠. 진짜 그거 하나 알고 제가 이리 살고 있는 거 아닙니까.”
콜린의 포기했다는 깊은 한숨에 이반은 피식 웃었다.
쓴소리를 해도. 그 흔한 위로 한 마디가 없어도 콜린은 늘 이반의 우군이다.
항상 그의 곁을 지켜 주는 그의 편.
“데릭 황제가 조금이라도 손을 뻗치면, 나는 가차 없이 죽일 거야.”
“……그거 꼭 황자님께서 하셔야 합니까. 폐하께서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실 거 같은데…….”
“에단에게 들키면 당연히 그러겠지. 내 눈에 먼저 들면, 그때 말이야.”
번뜩이는 그 눈동자를 보아하니, 우연으로 발견하는 정도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아마 불을 켜고 시시각각 주시하고 지켜볼 거다.
이 성격에, 무엇 하나 쉽게 놓치지 않을 테니, 데릭 황제는 정말 엄한 사람의 미움을 사 버린 셈이다.
이반 황자라는 복병은 아마 그 잘난 황제의 계획에도 없었을 터.
“정말…… 데릭 황제는 두고두고 후회할 겁니다. 황자님의 심기를 거스른 거.”
이반은 대답 없이 그저 씩 웃었다.
로엘에 대한 마음 정리. 그래.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도 또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데릭 황제라는 이 공공연한 적은, 이반이 얼마든지 마음대로, 드러내고 로엘을 지킬 이유가 되어 줄 테니.
로엘을 바라보던 그 눈.
이반과는 달리, 두 번의 포기는 하지 않겠다는 그 오만 방자한 말.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손으로.
***
오늘따라 그의 손길이 느긋했다.
“하아.”
그래서 애가 탔다. 그는 느릿하게 그녀의 가슴 부근의 리본을 당겼고, 다른 한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를 쓸었다. 로엘은 그 손길 하나하나에 숨을 들이켰다.
“좀……!”
“불만인가 보네. 원하시는 대로, 부드럽게 하는 중인데.”
“이건 부드러운 게 아니라, 놀리는 거잖아요. 읏!”
툭 하고 그녀의 어깨에서부터 화려한 드레스가 떨어졌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와중이라, 밝은 불 아래 정면으로 드러난 속살이 부끄러워 로엘은 바로 손부터 올렸다. 물론, 금세 제지당하였지만.
“내 마음대로 하라 했던 거 같은데.”
“그야 그런데…….”
“그럼 뱉은 말은 지켜야지.”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가슴을 단단히도 동여매고 있는 코르셋의 끈마저 당겼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쉽게 들리는 그녀에게서, 그런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치우는 일은 그에게 큰일이 아니다. 그는 하나하나 천천히 그녀의 몸을 참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던 것들을 거두어 냈다.
“목걸이 예쁘네.”
“……당신이 준 거예요.”
“알아.”
“정말? 너무 많아서 모르실 거 같은데…….”
“알아. 직접 골랐으니까.”
제롬이 그녀 좋으라고 한 빈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나 보다. 절대 그답지 않은 세심함.
별것 아니라면 아닐 수 있지만, 그녀에게는 절대 별것 따위가 아닌 아주 큰일이었다. 이리 큰 사람이. 이리 위대한 사람이. 고작 자신을 위해 그 많은 것을 일일이 챙겼다니. 어떻게 그 일이 작은 일에 불과할까. 로엘은 얼굴에 짙은 홍조를 띤 채로 환히 미소 지었다.
“소중히 할게요.”
“그래. 그러니까 내가 준 것만 해.”
다른 놈들이 준 것 따위, 걸지 말고.
생략된 그의 의도가 너무도 명확히 읽혀서, 로엘은 좀 더 진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는 질투가 새삼스럽지 않다. 이 남자가 이리 질투 많고 독점욕 강한 사람이라는 걸,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알까. 적어도 그녀가 그중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할 수는 있을 거 같다.
어느새, 그의 손에 의해 나신이 되어 버린 그녀는 애써 몸을 웅크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제일 먼저 풀어 버린 긴 머리가 그녀의 가슴 굴곡에 따라 아름답게 흘러내렸고,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에 어우러져 불빛에 빛났다.
붉은 머리. 붉은 눈동자. 붉어진 볼. 뜨거운 숨결. 그리고 그 가운데, 마치 그의 것이라고 이름을 새겨 놓은 듯한 붉은 루비 목걸이까지.
하나같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목걸이. 안 풀어 주실 거예요?”
“풀지 마.”
“네?”
“그것만, 입고 있어.”
“목걸이는 입는 게 아니라 거는……!”
그녀의 반발은 안중에도 없이, 그는 그녀의 손목을 들어 그 안쪽에 입술을 올렸다. 짜릿한 감이 조금의 고통과 함께 그녀의 손목에 그의 자국을 남겼다. 살짝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하는, 열기가 가득한 그 황금 눈동자는 먹이를 바라보는 짐승과도 같이 사나움을 숨기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것.
“……이거. 생각보다 훨씬 부끄럽다구요.”
그렇다면 그녀 역시 그를 원한다고, 솔직해져야만 한다.
잔뜩 긴장하고, 웅크리고 있던 몸에서 힘을 푼 채로, 그녀는 순순히 그의 아래에 몸을 드러냈다. 붉은 머리카락들이 하얀 시트 위에 흐드러지고, 스스로 팔을 위로 올려 온전히 드러난, 그 새하얀 피부 위에 빛나는 루비. 아름다운 곡선이란 건 아마 여인의 몸을 말하는 것이었나 보다. 그조차도 숨을 들이켜게 만드는 하나의 작품 같았다.
“아름다워.”
“아!”
건드리면 부서질라, 흠집 날까 무서운 그런 소중한 작품.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한쪽 가슴을 움켜쥐자, 그녀는 바로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그의 손안에 가득 차는 딱 알맞은 크기. 그녀가 자극받는 곳을 이미 훤히 꿰고 있는 그가 아래서부터 감싸올려 그 정점을 지분거렸다.
“하아……!”
이미 단단히 솟은 정점을 한 입에 머금고, 다른 손으로 남은 한쪽을 괴롭혔다. 여인의 가슴이 이리 기분 좋은 것이라는 것을 그는 정말 그녀를 통해 처음 알았다. 마음만 먹으면 정말이지 밤새도록 만질 수 있단 생각마저 든다.
“에단. 으응.”
그리고 그 손길마다 반응하는,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인,
그의 입술이 가슴을 거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그녀의 숨이 더욱 진해졌다. 매끈히 떨어지는 잘록한 허리 부근을 지나 완곡히 퍼지는 탐스러운 엉덩이까지. 그는 그녀의 몸에 빼곡이 붉은 꽃을 피웠다. 그러다 다다른, 아까부터 그를 부르는, 뜨겁고도 달콤한 그녀의 샘.
“잠깐. 잠깐만요, 당신 지금 무얼……! 아아!”
마음대로 하라는 그 말. 그녀는 너무 쉽게 뱉었나 보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혀끝으로 그 샘을 퍼 올렸다. 뜨거운 곳에 뜨거운 혀가 닿는 느낌. 그녀는 허리를 깊게 튕기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교성을 내뱉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우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아…… 응!!”
그녀의 진한 체취가 그의 코안 가득 메우고, 차오르던 샘물이 단번에 차올라 그녀의 불두덩을 잔뜩 적셨다. 그녀가 준비되었음을, 그리고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러니 너무도 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이다.
“하아. 당신…… 진짜 못됐어.”
“좋다는 말을 어렵게 하지 마.”
그는 손끝에 끈적하게 묻어 나오는 샘물을 만족스럽게 핥으며 그녀 아래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홀로 절정에 다달은 그녀가 매우 만족스럽다는, 그 여유로운 미소라니. 로엘은 부끄러우면서도 그가 너무 얄미워 그를 대놓고 흘겼다.
“나만 맨날…… 꺅!”
“2회전을 해야지.”
문제는 그 시선마저 그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운 뿐. 그는 씩 웃음을 지으며, 바로 그녀의 발목을 당겼다. 그리고 지체 없이, 진즉부터 뜨겁고 단단해진 그를 그녀의 안으로 밀어붙였다.
“아윽!”
이미 한 차례 파도가 지나갔던 그녀는 한껏 예민해진 와중에 들이닥친 거대한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아, 응! 아!”
그가 더 깊숙이 들이치자 그녀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그를 찾았다. 그의 목을 안아 당기는 그녀에게 기꺼이 붙잡히며 그는 깊게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한 자락의 교성마저 전부 삼켜 버리듯 사납게 그녀의 안을 헤집었다.
“하아. 로엘……!”
이미 차올라 있는 뜨거움. 그를 격하게 반기다 못해 놓아주지 않는, 이제는 그에게 완전히 길들여진 이 따뜻함. 눈물을 떨어트리며 그를 찾는 이 상기된 얼굴까지.
그녀와 지나온 그 모든 밤들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지난번보다 더 훌륭히, 그녀는 그를 미치게 했다.
“로엘.”
그래서 그녀를 찾았다. 그래서 그녀를 놓아줄 수 없었다. 여전히 그를 온전히 쫓아오지 못하는 그녀가 힘겹게 그에게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절로 움직이는 허리를 어쩌지 못했다.
“에…… 응!”
살과 살이 쓸리는, 야한 물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울수록 두 사람의 열기도 올라갔다. 힘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간지라 여전히 작고 여린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를 안을 때면, 늘 몸이 이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좀 더 깊숙이, 그를 돌게 만드는 그녀의 뜨거운 안으로 들어가고 싶단 생각뿐.
“에단. 에단……!”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또 한 차례 큰 절정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갔다. 그녀의 안에서 그의 잔진동이 이어지고, 그녀의 새된 소리도 방 안에 흩어졌다. 거친 숨소리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그는 자신의 품에 안았다. 땀이 송골송골 이마에 맺히고, 눈가에 남은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그녀는 수줍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거 버릇이야.”
“……알아요. 그런데 어쩔 수 없어요. 엄청 부끄럽다고요.”
그녀는 귀끝까지 빨갛게 되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이 그저 사랑스러워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그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그리고 좋아한단 말이에요. 당신의 심장 소리.”
오로지 그녀를 위해 힘차게 뛰는 이 소리.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을. 이 남자가 그녀로 인해 뜨거워진다는 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버릇처럼, 그녀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 품에 파고들었다.
“이러니 내가 애 취급을 하지.”
“애 아니거든요. 이렇게 야한 애가 어딨어.”
“야하다고 하기엔 멀었지. 아직 멀고도 멀었지.”
“……후회할 텐데? 그 말.”
그는 반농담으로 한 말이, 그녀의 자존심을 꽤나 건드렸나 보다. 그녀가 가볍게 그의 위로 올라가자 그는 피식 웃었다.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니 기분이 조금 색달랐다.
그 후회 좀 해 보고 싶다.
“자. 이제 어쩌시려나. 나의 아카시스께선.”
“……기다려 봐요. 생각 중이니까.”
아무튼 조금 섹시한 쪽으로 가려다가도 금세 이리 귀여워져 버려 그를 웃게 만든다. 그녀는 수줍게 그의 한쪽 손을 들어 그녀의 부풀 대로 부푼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의 손에 가득 차는 그 부드럽고도 따뜻한 감촉에 그가 반사적으로 움켜쥐자, 바로 그녀가 움찔거렸다. 그의 손길에 예민하게 느끼는 모습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 그의 미소가 진해졌다.
이거 좀 더 장난치고 싶어진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그니까…….”
“내가 좀 도와줘도 될까.”
“아니요. 아니…… 읏!”
필요 없다는데도 굳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든 그는 그녀가 일부러 외면하고 있던 바로 그 위치로 옮겼다. 이미 진즉에 다시 단단해진 그의 중심을 눈으로 직접 보며, 그녀는 숨을 꼴깍 삼켰다.
“나는 안 기다려. 공주님.”
엄밀히는 못 기다리는 거지만.
“아무것도 안 할 거면……!”
그렇게 예상대로 그가 움직이나 했다.
“할 거라구요……!”
그런데 그가 먼저 상체를 일으키기 전에, 그녀가 먼저 움켜쥐었다.
두근두근. 그녀의 손으로 고스란히 힘찬 맥박이 느껴지는, 그 단단하고 뜨거운 그를.
“윽.”
자연히 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많은 밤 속에서도, 이 작은 손으로 그를 움켜쥐는 건 아마 처음일 거다.
“뜨거워요……!”
“그야 당연하지.”
늘 그녀가 뭘 어쩌기 전에, 그는 안으로 들어가기 바빴으니.
태연한 척 대꾸했지만, 그는 조금도 태연하지 않았다.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부끄러워하면서도 열심히 그의 것을 관찰하는 그녀의 순수한 행동들이 그에게는 너무도 자극적이었으니까.
“로……!”
결국 참지 못하고 그가 나서려는 찰나, 그녀는 예고도 없이 그대로 그가 원하던 바로 그 자리를 찾아갔다.
“아…… 아!”
그러고는 정확히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그녀가 먼저 그를 품었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그녀의 안쪽 주름 하나하나가 그를 전부 느낄 수 있도록. 더 깊고 더 뜨겁게 그의 끝까지 전부 밀어넣었다.
“으응!”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여전히 서툴지만, 조금씩 그녀 스스로 움직일 때마다 그는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되어 버렸다.
귀엽다고 하기엔, 지금은 지나치게 야하다.
“하아. 로엘……!”
위에서 흔들리는, 열기에 취한 그녀를 보며 정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에단은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바꾸었다.
“읏!”
그녀의 안에 들어가 있는 채로 단번에 그녀를 돌리고선, 뒤에서부터 더 깊숙이, 그를 미치게 하는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에단……!”
그녀의 등뼈가 고스란히 그의 가슴에 느껴지고,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전해졌다.
“아! 응! 읏!”
한껏 거칠어진 그의 왕복운동에 따라, 그녀의 가녀린 몸이 아름답게 흔들리고, 그를 찾는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로엘……!”
그렇게 서로를 탐하고 또 탐했다.
이보다 더 뜨겁고 이보다 더 아찔한 것이 세상에 있을까.
오롯이 둘만을 위해 불타오르는 거 같다.
“하윽!"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래서 이 밤에 억지로 찾아온 거였는데.
“에……으응!”
조금 전 데릭을 마주했다고, 그는 여전히 자신을 원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모질게 그 마음을 포기시켜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더라고.
그렇게 또 당신을 신경 쓰게 할까 봐 두렵다고.
“에단……!”
그런데, 그 모든 걱정과 불안 속에서도, 나는 당신을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더라고.
그만큼이나 내가 당신을,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고.
“로엘……!”
그 모든 말들을 그에게 직접 전하러 왔는데 결국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 아아!!”
그러나 그는 그 모든 말을 들었다.
그녀가 두 팔 벌려 그를 안아 주는 포옹으로. 그에게 웃어 주는 그 환한 미소로. 그를 녹여 주는 모든 예쁜 말들로.
그는 충분히 그녀의 진심을 받았다.
“하아. 하아. 에단…….”
또다시 시작되려는, 예고된 파란의 시간.
“그래.”
에단은, 그리고 로엘은 서로의 곁을 지키는 것으로 그 시간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와 그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