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4. 협상을 시작하는 법
“뭐야. 테바로스의 뜻대로 다 돼 버렸잖아.”
“다 된 건 아니지. 저들이 원하는 조건이 아니니까.”
투덜거리는 루카스에게 아론은 덤덤히 말했다.
에단의 결정으로 결국 테바로스와의 동맹이 확정되었다.
“나는 동맹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다고. 테바로스 따위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는데 왜 혹을 다냔 말이야.”
“그게 더 수월하니까 그렇지. 솔직히 우리에게 득이 되면 되었지, 손해 볼 건 없는 동맹이야. 그러니 폐하께서 결정하신 거고. 그분의 계산 아래, 카이로스에게 득이라 판단되셨을 테니까.”
그리고 그 판단은 결국엔 옳겠지. 지금껏 그래 왔듯.
이반은 생각에 잠겼다. 에단이 테바로스의 제안을 받을 거라는 것.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북방의 정벌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는 것을, 에단은 에토르 전쟁을 통해 충분히 깨달았으니 그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앞으로가 중요할 거야. 세부적인 건 이제 조율해 가야 하는 거고, 제일 중요한 군사들 간의 협약도 따로 체결해야 해. 지휘권이라는 건 아주 많이 민감하니까.”
“황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제야 하니 마니 하는 결정을 내린 것뿐이에요. 협상은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그것도 조금도 녹록지 않은, 그 뱀 같은 테바로스를 상대로.”
콜린 역시 아론을 따라 한마디 얹었다. 테바로스가 다른 북방의 국가들과 어떤 식으로 동맹을 맺어 왔는지 뻔히 알아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그만큼 쓸 보고서가 많아졌단 소리다.
“그 부분에 대해선 단 하나도 양보할 수 없어요. 난 내 부하들, 절대 다른 지시 안 받게 해.”
“그래. 그래서 제일 먼저 그것부터 짚고 넘어갔잖아.”
“그건 테바로스도 마찬가지예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엘도 입을 열었다. 로엘 역시 이반처럼 결국에는 에단이 동맹을 선택할 거라 생각했다.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으로만 판단한다면 분명 그 선택이 옳았으니까.
다만, 그의 선택이 생각보다도 빨랐다는 점과 데릭의 양보가 생각보다도 파격적이란 사실에 놀랐을 뿐이다.
“루카스 장군이 프래카를 설득해야 하는 것처럼, 테바로스 역시 자신들의 황군을 설득해야만 할 겁니다. 저들 입장에서야 남의 전쟁에 괜히 불려 나가는 그런 모양새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런 테바로스 군대가 혹이 아닌 창이 되도록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게다가 그들의 자부심이 어디 좀 높던가.
“그래서 내가 싫다는 거예요. 그냥 해도 골치 아픈 전쟁에 남의 새끼 데려다가 비위까지 맞춰야 하냐고.”
“네가 비위 맞출 마음은 있냐? 나는 네가 제일 걱정이야. 네가.”
“시끄러. 넌 원로원 설득할 생각이나 해. 보나마나 불같이 달려들 텐데.”
“그 얘긴 말도 꺼내지 마.”
아론의 깊은 한숨이 바로 나왔다. 그 문제에 관해선 정말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다.
테바로스가 막무가내 식으로 동맹을 던져 원로회의 합의를 얻을 시간도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에단의 결정은 독단에 가까웠다.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숙고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일지라도 원로의 눈에는 그저 성급한 충동일 뿐.
그러니 에단의 꼬투리 하나라도 잡으려는 그 고지식한 늙은이들에겐 이번 일이 에단을 괴롭힐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인 셈이다.
“결국엔 폐하의 말대로 할 거면서, 왜들 그럴까요.”
“그게 가장 큰 의문이지.”
로엘은 평소 그들이 해 온 짓들을 돌이켜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지 않아도 힘든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그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폐하께 대항할 용기도 명분도 없으니 더 그러는 겁니다. 폐하의 선택이 틀린 적 없으니 그분의 결정을 반대할 수도 없고, 반대 안 하고 시키는 대로 승인만 하자니 자신들의 입지가 걱정된 거지요.”
“그렇다고 되도 않는 어거지를 놓는 게 말이 되냐? 아무튼 쓸모없는 인간들.”
루카스의 짜증이 한층 더해졌다. 아론 역시 원로가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라, 그 역시도 얼굴을 찌푸렸다.
“하아. 그거 아니어도 조율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에요. 그러지 않아도 갑작스러운 에토르 전쟁 때문에 연말 예산이 꼬였는데, 여기에 내년 신년 예산도 바로 토르티아 정벌에 쓰게 생겼어요. 이미 벌려 놓은 사업에 충당할 것도 많은데.”
“어차피 우리 돈 많잖아?”
“그나마 다행인 거지. 예산까지 없었으면 정말 답 없는 상황이라고 지금.”
아론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갑작스러운 동맹에 모든 게 정신없고 어수선했다.
자고로 카이로스에게 동맹은 늘 그들의 입맛대로, 하고 싶은 때에, 하고 싶은 조건으로, 하고 싶은 상대하고만 이루어졌다. 이리 갑작스러운 적도, 이리 그들이 원하지 않은 때에, 이리 예상치도 못한 상대와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처음.
비록 에단이 그 주도권을 가져왔고, 카이로스에게 득이 되는 조건으로 받아 왔다 한들 낯설고 어색한 건 변함이 없다.
그만큼, 데릭 테바로스가 일으킨 파장은 꽤나 엄청난 일인 거다.
“……어차피 하기로 한 동맹. 정식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대로 테바로스에게 끌려다니다 끝나고 말 거예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로엘의 목소리가 방 안에 낮게 울렸다.
굳이 로엘이 짚어 주지 않아도,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난리를 치고 카이로스에 들어오더니만, 데릭은 기어코 원하는 동맹을 얻어 냈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이곳에 모인 이들이 어리석진 않다.
“기다렸다는 듯, 테바로스의 협상단이 카이로스로 오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보다도 훨씬 더 오랜 기간 철저히 준비해 온 거겠지요.”
“어쩌면, 지금 우리가 내건 그 조건들을 모두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응책을 짜 올 테고.”
“그걸 선수 쳐야 한다는 소리군요.”
“네, 맞아요.”
아론의 말에 로엘은 단호히 말했다. 에단이 동맹을 발표하고 난 후, 데릭이 짓던 그 득의양양한 미소. 로엘은 둘만이 있던 그 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적어도 데릭은 그가 내어 줄 것을 내주고 에단에게서 원하는 바를 얻었다.
에단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손해 안 보는 정도가 아닌 큰 득이 되는 일을 하였다는 것. 로엘은 의심치 않는다.
문제는 데릭 역시 결코 손해 보는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렇다면, 그 손해는 무엇이며 그가 원해서 얻은 그 득은 무엇일까.
“결국 모든 결정은 폐하의 몫이죠. 폐하 혼자 감당하고 폐하 혼자 감내 해야 할 폐하의 책임. 저는 그 책임이 언제나처럼 그분의, 그리고 이 카이로스의 영광이 되길 바라요.”
오로지 그를 위해 고민하고 그를 위해 프란시아를 받아들였으며 그를 위해 이 자리에 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아래를 향하던 로엘의 고개가 정면을 향했다. 그러고는 정확히 회의실에 모인 이반을 비롯한 에단의 참모진들을 돌아보았다.
그런 마음인 게 비단 로엘뿐일까.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저는 저의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해 그분의 고민을 덜어 드리고자 합니다. 그렇게 그분이 가시는 길이 조금이라도 가볍기를. 조금이라도 수월해지길 바랍니다.”
그녀를 올곧이 바라봐 주는, 기꺼이 경청해 주는 이들이 그의 곁에 있다.
그가 어렵고 힘들 때도. 어리고 작을 때도. 매 순간 함께하였다. 그렇게 그의 곁을 지켜 그의 길을 닦았다.
“그러니 저의 미약한 힘이 그분께 도움이 되듯,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도움이 그분께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도록 폐하의 곁을 지켜 주세요.”
그렇다면 무엇이 두려울까.
“그렇게 그분의 힘이 되어 주세요.”
로엘은 기꺼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에 대한 감사함을 담아.
“카이로스의 프란시스로서. 아카시스로서. 그리고 그분의 여인으로서 부탁드립니다. 부디 그분을, 열과 성을 다해 지켜 주소서.”
그 절절한 진심이 어찌 안 전해질까.
자연히 모두의 고개가 숙여졌다.
“카이로스의 축복. 프란시아님을 따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깊게 고개를 숙여 가며 전하는 그 진심은 결국 한 사람을 위한 마음으로 통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을,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고 그렇게 앞으로도 살아갈, 그 한 분을 위한 애정.
“모든 영광은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폐하를 위해.”
누군가에게는 사랑이고 누군가에게는 우애이며 누군가에게는 충정인 바로 그 마음.
이 아름다운 나라, 카이로스의 영광은 그 마음이 모여 이루어졌나 보다.
***
“테바로스가 얼마 있을 거라고?”
“못해도 2주는 있겠지.”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었다. 한겨울인 만큼 꽤나 어두워진 길을 이반은 기꺼이 로엘을 에스코트하였다. 로엘의 마음 같아서는 베리타스에 남아 좀 더 서료를 들춰 보고 싶은데, 도통 반대들이 심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테바로스 일이 터지고 워낙 그녀에 대한 시선들이 많아졌다. 그러지 않아도 온갖 주목은 혼자 받는 그녀인데 거기에 옛 정혼자라니. 그 상대가 테바로스의 황제라니.
어떻게 시선이 안 쏠릴까.
아마 그녀가 제때 궁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수만 가지 억측이 살을 붙여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테바로스의 황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이리 한가로이 후궁에 처박혀 있을 때가 아닌데! 아오, 짜증나!”
“짜증나도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이게 최선이라고.”
이반은 대놓고 투덜거리는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콩 하고 튕겼다. 주위에 사람만 없으면, 멋대로 옛날의 철없던 남매 관계로 돌아가 버리는 그녀에게 이반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리 격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 아마 이 황궁에서 이반이 유일한 거다.
“무슨 최선이 이래. 나에게만 너무 일방적으로 안 좋잖아. 나는 쉬고 싶은 게 아니라 도움이 되고 싶은 거라고. 꽃이 아니라 검이 되겠다고!”
“알아, 알아. 네가 꽃보다는 검이 어울리는 거.”
그 생각을 하면 의미 없는 우월감과 뿌듯함에 절로 미소가 나오다가도, 혹여 누가 볼까 걱정되는 마음에 금세 미소를 숨겼다. 결국 돌고 돌아 남매로 귀결되고야 만다는 사실에도 씁쓸함이 뒤따랐지만, 그녀에게 이 넓은 황궁에서 이리 편한 사람이 단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꺼이 그 오빠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알면, 침소가 아니라 베리타스로 데려다줘.”
“그럴 순 없지. 저도 명 받은 게 있답니다. 마마.”
그러니 이 관계가 무엇이든 그게 무엇이 중요할까.
중요한 것은 그저, 그의 눈에는 한없이 작고 여린, 이 아름다운 공주님을 지키는 것일 뿐.
이리 함께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것. 편히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간간이 농담에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반은 충분하다.
“테바로스, 가 본 적 있어?”
“있지. 주기적으로 오갔어. 어쨌거나, 내가 황자님의 정혼자였던 건 사실이니까.”
카이로스 황궁이 큰 만큼 로엘의 궁까지의 거리도 멀어 꽤나 걸어야 했다. 다른 마마님이라면 마차를 탔을지도 모를 거리. 그 길을 로엘은 늘 걸어다녔다. 그러니 이 밤에는 아무리 황궁 내라고 하더라도 이반이든 루카스든 따라나서야만 했다.
물론 이반은 로엘의 걸음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음. 내가 보았던 테바로스는 항상 치열했어. 그 나라가 가진 것들이 그러하였고, 그 나라가 발전해 온 역사가 그러했고, 그로 인한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했어. 뭐, 북방의 나라 중 기후 좋고 비옥한 땅이 많은 나라가 몇이나 되겠냐 물어보면 할 말이 없지만 테바로스는 그중에서도 꽤 척박한 측에 속했으니까.”
“그러함에도 그렇게 큰 영토를 가지게 되었고.”
“맞아. 그래서 더 엄격했는지도 모르지. 서로가 서로들에게.”
그 피해는 왕위 계승권을 갖고 태어난 남자 황자들이 제일 많이 보았다.
“말보단 칼이 먼저인 민족. 강함이 곧 정의라 믿어. 그래서 그만큼 강인하고. 토르티아도 기본적으로는 기사국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테바로스처럼 모든 관료가 무인인 나라는 아니야. 그들은 기본적으로 기사 시험을 치러야 관직에 오르게 되어 있으니, 말 다한 거지.”
로엘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린 날 처음 테바로스에 갔던 날이 문득 생각났다.
이미 데릭과의 정혼이 결정된 이후, 테바로스에서 만나는 날이라 의례적으로 가야만 했던 때였다. 타르타니 어딘가에서 뛰어놀다가, 억지로 황궁에 돌아와 정신없이 차려입고 하루 온종일을 마차에 틀어박혀 있어야 겨우 테바로스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피곤함에 잠도 덜 깬 상태라 눈을 비비며 잠시 마차의 창을 열었을 때 로엘은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 자신을 안내하는 군사들의 어마어마한 행렬에.
“그건…… 말 그대로 나라 전체가 군대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 워낙 겹겹이 군사들에게 싸여 있어서 일반 백성들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 와중에 얼핏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죄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지. 그들에겐 검이 마치 늘 몸에 차고 다니는 회중시계 같은 거야.”
이반도 처음 테바로스에 갔던 때가 기억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은 아마 로엘보다는 좀 더 장성하여 그곳에 들렀음에도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이 생각났다.
“나도 놀랐지. 한창 검술에 꽂혀 있을 때였는데, 그곳은 모두가 고수인 거 같았으니까.”
“하하. 그럴 수 있겠다. 게다가 거긴 한 집 걸러 죄다 무기상이잖아.”
“맞아. 그랬지. 처음 간 이유도 검 사러 간 거였어.”
카이로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
정비되지 않은 길들만 보아도 카이로스보다 발전이 뒤처져 있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사람들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뭐랄까, 묵묵히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는 병사 같다고 해야 할까. 고작 시장을 돌아다니는 데에도 기사도를 지켜야 할 것 같은 그 숨 막히는 분위기에 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이에 대해서 얼마나 잘 교육받아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도 생각했어. 어쩌면 북방의 복병은 토르티아가 아닌 테바로스일 수도 있겠구나.”
이들이 황자들끼리의 황자 다툼에 세를 나누지만 않는다면, 그 여파로 국정이 불안해지지 않는다면.
마치 에단 같은 훌륭한 황제를 만난다면, 그렇다면 정말 강해지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진짜로 만나 버린 거지. 그러한 지도자를.”
그 험난한 곳에서 살아남은 다섯째 황자.
모든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마저 억지로 끌어내린 참 여러 의미로 지독한 황제.
그의 즉위에 희생된 이들이 흘린 피는 작은 전쟁에서 흘린 피와 맞먹을 거다.
“조금의 후회가 있다면 그때 바로 에단에게 테바로스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은 점이지. 그때도 테바로스가 훗날 위협이 될 거란 생각에 바로 에단을 떠올렸는데도 말이야.”
“어째서 알리지 않았어?”
“그 당시엔 다른 사람에게 미쳐 있었거든.”
그토록 사랑하는 형제를 잊을 만큼.
이반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그리운 사람이 또 떠올랐다. 잠시 말없이, 잔잔한 미소를 짓는 이반을 보며 로엘은 바로 그 사람이 누군지 알 거 같았다
그래서 그녀 역시 이반을 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 아버지구나.”
“맞아.”
이반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너이기도 하지.”
물론, 그 다른 사실까지.
로엘은 바라보는 이반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실은 테바로스도 사부님과 함께 간 거야. 억지로 사부를 이기려 들다 검을 부러트려 버렸거든. 그래서 사부님이 사 주시겠다고, 조금 멀리 나간 거야.”
“뭐야. 나는 한 번을 안 데려가셨으면서.”
“너는 못 가지. 네 말대로 너는 엄연히 테바로스의 황자비 신분이었는데.”
“알 게 뭐람.”
로엘은 진짜 서운했는지 투덜거렸다. 그런 로엘이 이반은 그저 귀여웠지만.
두 사람은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기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테바로스에 가면서 아버지가 내 이야기를 안 하셨어? 이반은 몰랐잖아. 내가 황자님의 정혼자였다는 거.”
또 황자님.
이반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아니 오래전부터 계속 거슬렸다.
그놈의 ‘황자님’이라는 호칭이.
“응. 안 하셨어.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 전에, 그 호칭부터 좀 고치자. 너 전혀 자각 못 하는 거 같은데, 데릭 황제는 이제 황제야. 황자가 아니라.”
“아……. 나는 황자가 편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 편하다는 거. 그게 제일 문제야.”
아. 또 지적당했다.
사라에게 혼나고 수아에게도 혼났는데. 이번엔 이반이었다.
로엘은 똑같은 지적을 받는 자신에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처음 사파이어를 받아 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는 눈빛이었고 그다음은 호칭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들이. 그저 익숙하고 편해서 하는, 그 아무 생각 없는 행동들이 이리 온갖 군데에서 데릭과의 추억과 친밀감을 나타낼 줄이야.
“다들 황제라고 호칭하는데 너 혼자 황자라고 부르는 거. 그건 애칭이야. 너희 둘 사이에서 공유되는 그 기억 속의 호칭. 마치, 내가 너를 네아로 부르듯.”
“아니. 이건 정말 입에 붙은 호칭 같은…….”
“그래서 데릭 황제도 너를 공주라고 부르지. 다들 아카시스라는 칭호로 부르는 이곳에서. 그게, 너와 데릭 황제의 이어진 관계라 생각하니까.”
로엘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이반의 말이 너무도, 구구절절 옳았으므로.
“내가 무슨 마음으로 너를 네아라고 부르는지, 너는 정말 몰라? 그렇다면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너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외면을 강요하면서.”
거기에 더해 더 아무 말도 못 할 이야기까지 이반은 해 버리고 말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반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순진한 건지, 순수한 건지.
정말, 이반은 에단의 고생이 안타까워질 지경이다.
“네아라는 호칭, 나는 에단 앞에서 되도록 쓰지 않아. 그게 내 형제의 기분을 그다지 좋게 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 단지 너와 둘이 있으면, 그때는 이게 편하니까. 그리고 그 추억이 강하니까. 이리 자연스럽게나오는 거야. 그런데 나도 이제 더 이상 부르지 않을 거야. 더 이상 그때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이반은 찬찬히 말을 이어 갔다. 데릭의 일에 관해서 그는 철저히 에단의 편이다.
조금도, 그 오만하고 악랄한 이방의 황제에게 로엘의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럴려면 무엇보다도 로엘을 주의시켜야 했다.
“‘네아’는 나에게 있어 너와의 추억이자, 우리 두 사람 인연의 증거이기도 해. 내가 너를 네아로 부를 때만큼은 너는 아카시스가 아닌, 그저 내가 타르타니 숲에서 우연히 만난 로엘이라는 한 사람일 뿐이니까. 그래서 둘만의 호칭이 중요한 거야. 두 사람 사이에 관계를 너무도 명확히 보여 주므로.”
로엘은 점점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자신이 너무도 편한 대로, 생각 없이, 멋대로 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이미 한 번 수아에게 지적받고, 에단 앞에서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단 거다.
“……내가 잘못했어.”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
“진짜야.”
로엘은 잔뜩 풀이 죽었다. 그 모습에 이반은 자신이 너무 로엘을 몰아붙였나 싶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자님 호칭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치, 어린 네아가 어머니에게 혼나 잔뜩 풀이 죽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반은 언제나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황자님이라고 부르면 안 돼.”
“응.”
착하게도 로엘은 바로 답을 했다.
“싫은데.”
문제는 바로 또 다른 대답이 들려온다는 사실이었지만.
“나는 그 호칭이 좋은데.”
너무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데릭에게 이반과 로엘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안 그래? 로엘.”
그 두 사람의 반응이 어떠하건, 뻔뻔히 자신의 말을 하는 그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카이로스의 밤이 깊어만 갔다.
***
“폐하. 이건 좀 더 숙고하셔야 합니다. 이리 쉽게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테바로스는 유명한 야만국 아닙니까? 게다가 그 황제는 아주 비열하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들이 폐하 앞에서 웃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뒤통수를 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절대 믿을 수 없는, 그런 족속입니다.”
에단은 속으로 조소가 절로 나왔다.
가장 믿지 못할 족속도. 자신의 앞에서 웃으면서 뒤통수칠 인간들도. 그렇게 비열하고 야만스러운 것도 전부 다. 이 하릴없는 노인네들 이야기가 아닌가.
누가 누굴 비웃는 건지.
적어도 데릭 황제는 실력이라도 있고, 순수히 자기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라도 있다.
“게다가 아주 무례하지 않습니까? 세상 어느 황제가 다른 나라에. 그것도 불과 한 달 전에 치열하게 전쟁했던 나라에 이리 말도 없이 찾아와 문을 열어 달라고 합니까? 세상에 이런 외교적 결례는 없습니다.”
“이건 엄연히 우리 카이로스를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폐하!”
에단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이 쓸모없는 이야기를 1시간 넘게 들어주고 있으려니 역시나 두통이 몰려왔다. 그러지 않아도 테바로스를 상대하느라 머리가 딱딱 아프고 지쳐 있는데,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자신이 원로회의 승인 절차가 필요한 일을 독단으로 한 것은 맞으니, 아무리 그 승인이라는 것이 전혀 쓰잘머리 없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일지라도 이번만큼은 그가 잘못한 바도 있고 하여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저들이 원하는 대로 실컷 들어주고 결국 승인을 받으려고 했는데, 이 멍청한 원로들이 그가 봐주는 선에서 적당히 끊을 줄을 몰랐다.
그러니 그의 호의가 어찌 계속 갈까.
“애초에 아카시스님의 선물이랍시고 들이밀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아니 지들이 뭐라고 아카시스님께 선물을 보냅니까? 그것도 버젓이 폐하가 계시고 저희 원로가 있는데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것 역시 저희 원로와 폐하를 무시한 게 아니면 무엇입니까? 아무리 아카시스님의 생일 명목이었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순서라는 게 있는데요. 그걸 그런 식으로 무시하고 하고 싶은 대로만 하다니. 이래서 야만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근본이 없어요, 근본이.”
왜 이리 테바로스에게 학을 떼나 했더니만, 에토르가 그 원인이 아니었나 보다.
보통 다른 동맹국들이 선물을 보내올 때 자연히 원로들의 선물도 챙겨 가지고 온다. 화친이라는 명분하의 사실상 속국인 그들에겐 어떻게든 카이로스의 끄나풀이라도 잡아야 했기에, 철옹성 같은 에단 황제를 구워 삶으려 들기보다 그 아랫단의 원로들을 공략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원로들은 사신단 행렬에 아주 호의적인데, 이번 테바로스는 그런 절차마저 다 무시한 채로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그 많은 금은보화를 쏟아 부었다.
이미 자신들의 눈으로 그 어마어마한 양을 확인했을 테니 어찌 배가 아프지 않을까.
로엘이 백성들에게 구제품으로 그 보석들을 나눠 주었을 때도 아주 약이 올랐을 거다.
그들 생각에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들 것으로 보였을 테니까.
“애초에 아카시스님도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아니…… 옛 정혼자라니요. 그런 중차대한 일을 이제야 말하는 것도 너무 어이가 없을 마당인데, 그 옛 정혼자가 주는 선물까지 받은 셈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저는 정혼자 이야기가 나왔을 때 경악을 했습니다. 당장이라도 토르티아에게 따지려 공문을 쓸 뻔했다니까요?”
“충분히 항의할 일이지요. 솔직히 토르티아가 제 발 저려 인질 대신 보낸 분 아닙니까.”
“그만.”
기어코 에단의 입에서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신나서 떠드는 원로원들의 말을 단번에 끊게 하는 그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본회의실을 울렸다.
그의 차가운 눈에 그제서야 원로들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이 건들지 말아야 할 부분까지 건들었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아카시스의 정혼은 이미 오래전에 정식으로 파기되었다. 이미 파기된 정혼을 무슨 명분으로 문제 삼을 건가.”
“하오나…… 아무리 파기되었다고 한들 카이로스 황실에 들어오실 분이었습니다. 이런 중차대한 일은 당연히…….”
“그래? 그럼 그 중차대한 일을 나는 왜, 이 시점에 와서야, 그것도 아카시스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 하지? 내가 알기론 아카시스를 추천하고 천거한 것도, 전부 다 그대들이었는데.”
더 이상 후궁의 여인을 늘리고 싶지 않았던 에단은 토르티아와의 화친 명분의 국혼이 썩 내키지 않았다. 에단의 북방 정벌은 이미 마음이 굳혀 있었고, 그 정벌의 끝에는 토르티아의 침공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마당에 괜히 토르티아의 공주를 맞이해 골치 아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토르티아에게 어떤 뇌물을 받았는지 원로회가 발 벗고 나서 추진한 그런 국혼이었다.
“그대들은 무얼 하다 이제야 나에게 그 중차대한 일을 묻는가.”
원로원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제 발등을 아주 제대로 찍은 셈이다.
“아카시스에 대해 테바로스와의 정혼을 문제 삼는다면, 나 역시 이 국혼을 추진한 이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러니, 토르티아와의 국혼에 동의한 그 누구도 책임질 마음 없으면 그 입 다물라.”
단호한 그의 말에 원로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서로들 눈치 보기에 바빴다.
바로 꼬리를 내리는 그 한심스런 모습에 에단의 짜증이 한층 더 깊어졌다. 정말 자신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시간에 하나라도 더 테바로스에 대해 알고 토르티아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너무도 시간을 아깝게 쓰는 기분이다.
그러니 이제 끝내야겠다.
에단은 한쪽 손으로 머리를 받치던 것을 풀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리고 제대로 원로들을 내려 보았다.
“테바로스는 분명 무례했고, 경솔했으며, 오만했다. 그들이 외교적 결례를 범한 것도, 순서와 절차를 지키지 않은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과 우리의 이해득실은 별개의 문제다.”
외교적 예의는 분명 중요하나, 그것이 국가적 이득과 손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예의는 예의일 뿐.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하거나 나쁘게 할 수는 있어도, 부자로 만들거나 가난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우리는 타르타니 숲을 모르고, 북방의 기후가 낯설며 그들의 국가들이 처음이다. 그런 우리가 북방의 정벌을 택했고, 그곳에 많은 것을 이미 투자했지. 우리의 목표는 토르티아로 결정되었으며 그 길목은 항상 테바로스가 지척에 있다. 토르티아가 아무리 쇠락한다 한들 그들은 여전히 토르티아이며 그 저항은 상당할 터. 테바로스라는 위험을 안고, 과연 카이로스는 무사히 토르티아를 정벌할 수 있는가? 그대들은, 그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럴 리가 있나. 전쟁에 확신이 어디 있다고.
원로들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들은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그들은 에단의 결정을 의심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을 무시하고 멋대로 결정한 그 사실에 화가 났을 뿐.
누가 더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당연히 그들은 저 잘나고도 잘난 젊은 황제를 이길 수 없다.
지금 그 황제께서는 그 이유를, 친절히도 직접 설명해 주시려나 보다.
“테바로스와의 동맹이 없다고 한들, 북방 정벌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 그래, 인정한다. 그만큼 우리의 군대는 강하고 우리의 준비 기간은 길었으므로. 하지만, 테바로스가 개입한다면 분명 전쟁은 길어지고 그 피해도 커질 거다. 그리고 그 손실을 메꾸는 것은 당연히, 원로겠지. 백성들에게 신망받는 원로들이란, 나라가 어려울 때 제일 먼저 나서서 재산부터 풀어야 할 테니까.”
원로원들의 눈이 바로 흔들렸다. 전쟁에서 지면 그 피해가 자신들에게 온다니. 그저 자신들은 전쟁이 일어나도 출전하지 않으므로 평소와 같은 생활을 영위하리라 생각했는데, 이건 좀 다른 이야기다.
“테바로스는 그 위험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확답을 주었고, 우리는 그 확답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북에서 전쟁하는 이상 테바로스라는 위험 요소를 없애는 건 비록 한정적이고 일시적일지라도 카이로스의 원정에는 크나큰 이득을 가져올 테니까. 데릭 테바로스가 영악하고 그가 언제 배신을 할지 모른다는 그 새로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러니 그 동맹은 당연히 옳은 선택이다.
이미 원로원들도 알고 있듯.
자신들의 재산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소리에 바로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더 숙인 원로원들의 모습을 보며 에단은 또 한 번 한숨을 삼켰다.
이들의 이런 반응을 너무도 예상했다.
어쩜 이리도 자신밖에 모를까.
자신들의 조부가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정작 본인들만 모르나 보다.
“나는 그저 나의 조국, 카이로스를 보다 부강하게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 부강 속에서 그대들의 호의호식을 지키려는 거야. 이 나라가 풍요로워야, 그대들의 풍요도 보장될 것 아닌가.”
원로원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로스가 풍요로워야 자신들이 풍요롭다는 것. 그 풍요로운 나라를 이 젊은 황제는 즉위하기 전부터 꾸준히, 쉬지 않고 풍요롭고 강하게 만들었다는 것.
여기 있는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러니 그대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 나라의 부강을 위해 그대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그중 무엇보다도, 이리 쓸데없는 트집으로 그의 시간을 뺏지 말라고 말하려다 에단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살아온 연륜이 있는데 그 정도 행간은 읽을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
“내가 더 들을 말이 있는가.”
에단의 질문에 원로들은 침묵으로 답했다.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황제께서 저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데.
“그럼 이만 파하도록 하지.”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꽤나 피곤에 지친 그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황금 용포를 끌고 회장을 나섰다. 그 걸음걸음마다 원로원들은 고개를 숙였고 예를 갖추었다.
테바로스 동맹에 대한 카이로스 원로원 동의. 무사히 통과되었다.
첫 관문을, 이제 넘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