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3. 그의 최선이랍니다 (44/69)

Chapter 43. 그의 최선이랍니다

“들었어? 지금 카이로스 상황.”

“들었지. 아침부터 그 소식으로 난리가 났잖아.”

아침 훈련을 마치고 들어온 벤 장군이 투구를 벗으며 말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30년 지기 맥스 장군은 얼른 그 옆에 앉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오늘은 비번이라 느지막하게 출궁하고 보니 토르티아 황군에 어마어마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거 진짜야? 확실해?”

“확실해. 공식 루트로 들어온 정보라고. 명색이 토르티아의 장군이란 것이 토르티아 정보력을 의심하는 거냐.”

“하도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 테바로스의 황제가 혈혈단신으로 카이로스에 갔다는데, 너 같으면 이게 바로 믿기냐?”

쉽게 믿기는 일은 확실히 아니지.

벤 장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가 급보라면서 들고 온 정보를 읽으며 본인도 몇 번이나 부하에게 확인을 거쳤다. 정말 그 소식이 사실이 맞냐고.

“와…… 그게 사실이라면 진짜 데릭 황제 어마어마하네. 아니. 세상 어느 황제가 그렇게 적진에 혼자 뛰어드냐고.”

“그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호위 입장에서는 죽어나는 거지. 거기 충성심 하나는 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지만.”

“유명하지. 거기야말로 자기 주군 말이라면 지옥 끝까지 따라갈걸.”

한때, 그들이 그들의 진짜 ‘주군’에게 그랬던 것처럼.

순간 씁쓸한 생각이 들어 잠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인생 전부를 걸고 따르고 싶었던 분. 분명 그들도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어쩌다 이렇게 뜻도 없고 볼품도 없는, 그런 인생을 살게 되었나.

“데릭 황제가 공주님을 인질로 잡았다고.”

“응. 말이 인질이지, 묘한 기류가 흘렀다던데?”

“묘한 기류가 뭐야.”

“뭐긴 뭐야. 두 사람 유별난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알 사람은 다 알지.”

맥스는 의자에 몸을 깊숙히 기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벤과 맥스 모두 제이드의 최측근이었던 만큼 로엘의 호위도 곧잘 했었다.

거의 전장마다 가족을 데리고 다니던 제이드여서, 로엘이 황궁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엇지만 큰 행사 때마다, 주로 맥스가 로엘을 지켰다.

그래서 더더욱 로엘과 데릭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두 분 다 많이 어렸지. 그런데도 이상하게 함께 있는 모습이 뭐랄까. 음. 부부 같다고 해야 할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데릭 황자는 눈에 뵈지도 않는 다섯째였고, 로엘은 대놓고 황제에게 눈칫밥 먹던 공주였다.

테바로스의 황태자비 자리도 눈앞에서 뺏겼고, 그렇게 좌천식으로 받은 자리가 바로 데릭의 비 자리였으니 이는 둘 모두에게도 썩 기분 좋지 않은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함에도 둘은 불만이 없어 보였다.

불만은 무슨. 마치 처음부터 둘이 인연이었던 양 너무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곁에 있었다.

1년에 만나 봐야 몇 번 보지 못하는 그 관계 속에서, 심지어 그렇게 어린데 얼마나 감정이 깊을까 싶지만, 둘은 분명 달랐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한다고 대놓고 티를 내는 어린아이의 귀여움 같은 건 전혀 없었지만, 서로를 자신의 짝으로 인정하는 그 모습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 바로 나타났다.

“그래 봤자 뭐 해. 공주님은 일방적으로 파혼당했다고. 마음이 있었으면 그때 공주님을 데려갔어야지.”

“그때 데릭 황제가 그럴 여력이 없었으니 그랬겠지.”

“변명이지, 그건. 하고자 하면 납치라도 해서 데려갔어야 했어. 데릭 황제에게 공주님은 그 정도밖에 안 됐다는 거야.”

맥스의 차가운 말에 벤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므로.

제이드 네아레스가 그렇게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뒤, 로엘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북방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 데릭 황제였다면, 시장에 떠도는 그런 소문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게 로엘의 상태를 알았을 텐데 그러함에도 그는 그녀를 모른 척했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이제 와 그가 로엘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내비치는 건 지나치게 뻔뻔한 거다.

“그때 공주님은 거의 유폐당하다시피 했어. 괜히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람들이 주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까 봐. 만약 데릭 황제가, 자신의 아버지의 파혼 요구에 맞서서, 그렇게 그때라도 공주님을 데려가고자 했다면 폐하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거야.”

눈엣가시인 그녀를 영영 토르티아에서 치워 버릴 수 있는 기회였으니.

거기에 당시까지만 해도 데릭은 황위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으니, 그 한 자리에 보내는 데에 아쉬울 게 없었다.

“그래서 난, 데릭 황제가 직접 카이로스에 가서 공주님을 데리고 카이로스 황궁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아주 불쾌했어. 필요 없어서 버려 놓고, 이제 와 필요하니 다시 찾는 거랑 뭐가 달라?”

“괘씸한 거지. 아주. 이제야 사랑받고, 편히 사시는 거 같은데 괜히 들쑤시는 거잖아.”

그러지 않아도 눈에 띄는 외모시라, 그 안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반대와 배척이 있을 텐데 말이다.

“시기도 너무 안 좋다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러냔 말이야. 상식적으로, 지금 카이로스 사람들 입장에서 테바로스가 어떻겠냐고? 그 와중에 직접 카이로스에까지 가서 공주님과의 과거를 만천하에 드러냈으니. 아오. 속 터져.”

걱정이 가득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 다 자각하지 못하였지만, 둘 다 ‘우리 공주님’이라는 호칭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아마 에리카가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면,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난리가 났을 거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에리카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 준 적도 없으니.

그만큼, 그들의 마음가짐이 다르다는 것이 너무도 티가 났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뿐일까.

매 순간, 매 대화 속에서 그들은 티를 냈고, 조지 황제와 에리카 황녀는 그때마다 치욕을 느꼈다.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이들이 사실은 다른 이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

윗사람으로서 그보다 더 자존심 상할 일이 있을까.

“잘 지내시는 거 같던데. 예쁘게 크신 건 말할 것도 없고.”

“예쁘다뿐인가. 아주 멋있어지셨던데.”

“맞아. 나도 멀리서밖에 못 봤지만, 제법 주군의 느낌이 났어.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봐.”

에토르 전쟁 당시, 토르티아는 괜한 피를 많이 보았다.

테바로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조지 황제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고, 자기 사람밖에 모르는 데릭 황제는 그런 토르티아를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한때, 그들이 넘보지도 못할 존재였는데 이제는 그들의 방패 정도로 쓰이다니.

맥스와 벤은 티 내지도 못할 그 치욕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그래. 피는 못 속이는 거지.”

그 와중에 공주님이 나타났다.

한동안 뵙지 못했던, 참 많이 그들의 주군을 닮은 유일한 혈육.

그들이 지켜야만 했던, 그러나 지키지 못햇던 바로 그 공주님.

“우리를 기억하실까.”

“그 영특하신 분이 기억 못 하실 리 없지.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죄스러운 거고.”

나중에 어찌 그분의 얼굴을 볼까. 어떻게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하나.

에토르 전쟁의 막바지에, 로엘이 군사를 이끌고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나타났을 때 두 사람은 단번에 로엘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퇴각하는 그 와중에도 당장이라도 말을 타고 달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때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했다고. 실은 자신들은 너무도 공주님의 편이고 싶었다고.

자신들이 무능해서, 용기가 없어서, 그래서 공주님을 그리 힘들게 했다고.

“다 부질없는 짓이지.”

참. 사람의 후회라는 게 원래 이런 건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힘들었다.

“부질없는 생각이고.”

로엘이 그런 식으로 쫓겨나듯 토르티아에서 나간 뒤, 어쩌면 둘은 무의식적으로 로엘을 잊어버리려 했는지 모른다.

생각해 보았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그저 마음만 아프니.

그런데 그렇게 외면해 온 그들 앞에 그녀가 나타난 거다.

그것도 보란 듯, 적국의 여신이 되어서.

“우리가 벌받는 거지. 누굴 탓해.”

“맞아. 우리가 우리 손으로 놓쳐 버린 거야. 멍청하게도.”

아까부터 혀 끝에 느껴지던 쓴맛이 더 진해졌다.

에토르 전쟁에 괜히 나섰나 보다. 어차피 의미도 없고 마음에도 없었던 전장. 아무나 보낼 것을.

그랬다면 두 눈으로 그분을 보아 이리 마음이 어지럽진 않았을 텐데.

로엘을 보고 난 뒤, 단 한 밤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거 같다.

너무도 공주님께 죄스러워서.

너무도 스스로의 선택이 후회스러워서.

그리고 너무도, 그분이 보고 싶어서.

“뭐가 되었든, 우리 공주님. 잘해 주셨으면 좋겠네.”

“그래. 그분만 행복하다면야 그분이 카이로스에 있든 테바로스에 있든 상관없지.”

토르티아에 있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참…… 보고 싶어지네.”

“그러게.”

생략된 바로 그 이름.

벤과 맥스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

“우선 이 화친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가죠.”

“바라는 바입니다.”

아론이 운을 띄우자 바로 버리가 답했다. 애초에 우호적이지 않은 두 국가가 만나는 자리니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참 많은 계산들이 오고 갔다.

“카이로스의 북방 원정은 이미 5년이 넘도록 준비되어 온 일입니다. 그 계획 속엔 동맹 따위는 없었고, 그 동맹이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리 갑작스레 들어온 동맹 제안. 저희는 썩 달갑지 않군요.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으려는 뻔한 수니까요.”

당연히 가는 말도 곱지 않았다.

“다 차려 놓은 거, 아닌 거 같던데. 에토르 때 보니.”

당연히 오는 말도 곱지 않았고.

“덜 차려도 그 정도인데, 제대로 하면 말 끝난 거 아닌가.”

데릭의 반말에 이반의 말도 짧아졌다. 데릭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싱긋 웃는 이반의 태도에 로엘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반 특유의 저 능글거림. 역시나 상대가 황제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이반에 맞추어, 데릭의 한쪽 입꼬리도 살짝 들렸다.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이. 글쎄. 아버지와 형님이 죽고 나서 처음 아닐까.

그러니 꽤나 신선했다. 아주 많이 건방졌고.

“숟가락 얹는 거. 그래, 뭐. 여기까지 와서 이 정도까지 하는데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엄연히 뒷단에서 필요할 때 쓰는 지원병의 형식일 뿐. 테바로스는 딱 거기까지. 그 이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테바로스의 자존심을 아주 바닥까지 긁는 이반의 발언에 버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그들이 아쉬운 쪽이라고 하나, 일국의 황제를 앞에 두고 황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이반 황자님. 말을 삼가세요. 감히 황제 폐하 앞에서……!”

“버리. 앉아.”

바로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버리를 바로 데릭이 막아 세웠다. 흥분한 버리와 다르게 오히려 데릭의 미소는 좀 더 진해졌다. 어디 할 만큼 해 보라는 여유로운 표정. 일부러 도발한 과한 말에도 데릭은 평정심을 아주 잘 유지했다.

“하지만, 폐하. 저들이 너무……!”

“앉아. 이제 시작이니까.”

그러니 어찌 만만한 상대이랴.

로엘은 어쩌면 자신의 생각보다도 더 데릭은 큰 결심을 하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하지. 하고 싶은 말.”

시작은 분명 그녀였다.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하던 그 눈. 목소리. 분명 진심이었다.

그래서 막연히 그녀는 데릭의 이곳까지의 걸음에 자신의 영향이 컸다고 자만하였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날의 황자 데릭이 그러하였듯, 지금의 황제 데릭 역시 그녀는 그의 고민에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인데도 말이다.

만일, 자신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면. 그는 정말 목숨을 걸고 이 협상을 이루기 위해 온 거란 소리다. 단순한 변심도. 충동도 아닌 철저한 계산과 고뇌 끝에 내린 결정.

“……이반.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알아. 충분히 그러고 있고.”

그렇다면 그는 반드시 패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지 못한 패.

조금의 흔들림 없는, 그 자신만만한 데릭의 눈동자에 로엘과 이반은. 그리고 아론은 잠시 숨을 골랐다.

“……카이로스가 테바로스의 동맹 제안을 받는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데릭의 눈에 그들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그들 역시 철저한 이성과 계획으로 그를 상대해야 하므로.

“첫째. 이 동맹은 오로지 토르티아의 정벌에 한정할 것.”

로엘은 차분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밤새 그와 이반이. 그리고 아론과 콜린이. 그리고 루카스가 함께 고민하고 정리한 그들의 협상을.

“둘째. 테바로스의 군대의 지휘권은 카이로스에게 있을 것.”

“그 무슨……!”

“셋째. 이 정벌은 오로지 카이로스의 영광으로 돌릴 것.”

편파적이다 못해 굴욕적인 협상안.

처음 이 문구를 작성할 때 로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화친이 아닌 전쟁을 하자는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다고.

그래서 속으로 에단은 애초에 데릭과 화친을 할 마음이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그는 처음부터 데릭을 상대하지 않았을 거다.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거나, 아니면 이 협상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겠지.

그 사람이 이 상황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 에단도 테바로스와의 동맹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걸 로엘은, 그리고 이반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얼 해야 하나.

“토르티아는 오로지 카이로스의 깃발 아래에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 어심이 원하는 대로 판이 나올 수 있게, 그렇게 그의 몇 수 앞을 깔아 주는 그 첫수가 되어 주기 위해 이 상황에서의 최선을 다해야 했다.

“테바로스는 그저 뒤를 봐주는 역할뿐. 테바로스의 깃발 그 어느 하나도 토르티아의 땅에 꽂히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로엘의 붉은 눈이 정확히 데릭의 검은 눈동자를 보았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 데릭은 자신의 눈에 가득 찬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오롯이 카이로스의 사람이구나 하고.

그 사실이 이렇게 배 아픈 일이 될 줄, 왜 과거의 그는 몰랐을까.

“카이로스는 토르티아를 정벌하는 영광을 그 어느 하나도 다른 이와 공유할 마음이 없습니다.”

뺏기면 분명 후회할 거라는 거. 아깝고도 아까운. 완벽한 황후가 될 그런 여인임을 가장 먼저 알아챘는데.

이리 직접 마주하는 매 순간이 후회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안 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단 하나라도 싫으시다면. 테바로스의 폐하. 더 이상의 협상은 없습니다. 이만 카이로스에서 나가 주세요.”

그런데 어쩌나. 이리 봐 버린 것을.

“하.”

데릭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그러고는 아예 대놓고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오늘 밤엔 잠이 안 올 거 같다.

이 여인을 놓쳐 버린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서. 배가 아파서.

“폐하.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이건 협상을 하자는 태도가 아닙니다……!”

“아니, 이거 너무 재밌어.”

“폐하……!”

진심으로 웃음을 터트리는 데릭을 버리도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장 칼을 들고 상을 엎어도 이상할 거 없는, 무례와 무시가 가득한 조건들이었는데도 데릭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테바로스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이신 분인데, 버리는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저 속이 부글부글 끓을 뿐.

“데릭 폐하. 진지하게 임하세요. 국가간의 협상은 장난이 아닙니다.”

“나는 충분히 진지해.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네잖아? 안일하다 못해 순진한, 중부의 도련님들. 도대체 뭘 믿고, 이리 자신하는 거지? 가소롭게.”

순식간에 변해 버린, 상대를 잡아먹을 듯한 매서운 야수의 눈빛.

데릭이 큰 소리로 웃을 때부터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말아야겠다 굳게 다짐했건만, 로엘은 변해 버린 눈빛 하나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 지금의 카이로스. 위대하지. 현 황제는 더 위대하시고. 그걸 감히 누가 부인하겠어? 나도 부인할 마음 전혀 없어. 그건 사실이니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데릭의 말문이 트였다.

지금껏 혼자 울분을 삭이고 있던 버리는, 데릭의 그 목소리와 눈빛에 다시금 제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제야 버리가 기대했던, 테바로스의 황제께서 나타나시나 보다.

“하지만. 그거 전부 중부에서의 일이잖아? 단 한 번이라도, 타르타니를 넘은 적이 있던가. 그 잘난 황금의 황제께서는.”

마음에 드는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 짓는 저 미소. 저 눈빛.

데릭이 저 표정을 하고,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던 것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테바로스의 차례.

“앞에 있는 황제의 동생께서는 북방에 있었다지. 한 6, 7년은 되었으려나. 그 6, 7년 동안 토르티아는 다 넘어 보셨나? 테바로스는 몇 번을 와 봤지?”

고작 6, 7년.

카이로스에서는 굉장한 전력이 될 수 있는 북방의 경험일지 몰라도, 그걸 이 북방 토박이들 앞에서 내세울 건 아니다. 아무리 날고 기어 보았자 이방인으로서 모아 온 정보. 그곳에서 평생을 산 이들의 정보력을, 그 경험을 따라갈 리 만무하다.

“그 옆에는 나의 아름다운 정혼자셨던 토르티아의 공주께서 계시는군. 그런데 그 평생을 살아온 공주님은 제이드 네아레스가 죽고, 근 5년간 무얼 보셨을까. 토르티아 성문을 넘기는 하셨나? 홀로 타르타니를 달려보긴 하셨나? 북방은커녕 변화하는 토르티아도 알지 못했을 거 같은데.”

상대를 대놓고 비웃는 조소. 가소롭다는 말투.

로엘과 이반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카이로스가 테바로스를 힘으로써 내리눌렀던 것과는 다르게, 테바로스는 정확히 카이로스이 아픈 점을 찔렀다.

북방에 대해 경험이 없다는 바로 그 사실.

너희들이 한 그 준비라는 거. 실상 북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단 경고까지.

“그런데 무얼 믿고 이리 자신들을 하시나. 카이로스는 강하지. 평지에서 싸워 이 나라를 이길 군대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북방은 그런 비옥한 평지가 아니라는 거.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오로지 지금의 영광에 기대어 승리를 자신하는 건 오만이야. 그 오만은 실패로 끝나고 그 실패는 카이로스의 피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지금껏 중부의 북방 정벌 역사가 그러하듯.”

데릭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당장이라도 그렇지 않다고. 우린 다를 거라고. 우리의 주군은 하늘이 내렸고 실패한 적 없으며 승리의 여신이 함께한다고 맞받아쳐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데릭이 말한 그것들. 전부 그들이 막연히 두려워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니까. 그 최악을 피하려 수년을 준비하였음에도, 결코 완벽하다 자신있게 말하지 못했다.

전쟁이란 본디 그런 것이므로.

아무리 준비해 보았자,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북방을 안다고 자부하시는 이반 황자와 로엘 공주가 있으니, 소삼국을 노렸겠지. 지금까지 타르타니로 먼저 진입하던 그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그래서 내가 먼길을 돌아서 그곳을 노렸다는 거, 정말 몰랐나? 그대들은. 아마 카이로스 황제는 알았을 것 같은데. 내가 일부러 본인을 자극하려 벌인 노림수였다는 거.”

애초에 에토르는 미끼. 들어오면 감사하나 시작은 분명 소삼국 중 하나인 사우어였다.

사우어를 쳐야만, 그렇게 그의 계획을 흐트려야만 그가 움직일 것임을 데릭은 알았으므로.

“자. 그럼 소삼국을 시작으로 북서쪽으로 움직이겠군. 보울의 물자 지원이 필요할테니, 소삼국의 끝, 비터를 이용해 보울을 점령할 테고. 그렇게 나시베 근처에 진을 칠 테지. 그 기점으로 테바로스를 견제하면서 토르티아에 밀고 들어가야 하니까.”

정확해도, 너무 정확했다.

카이로스가 생각하던 바로 그 루트. 마치 내부에 간자가 있어 모든 것을 데릭에게 알려 준 것처럼 데릭은 너무도 완벽히 카이로스의 북방 계획을 꿰뚫어 보았다.

“놀랄 것 없어. 그 방법이 최선의 중에 최선이라는 거. 너뿐만이 아닌, 나도 알았을 뿐이야. 애석하고, 당연하게도.”

단 한 마디를 할 수 없었다.

테바로스가 복병일 수 있단 말을 분명 그녀의 입으로 에단에게 했는데,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그걸 염두에 두었으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리 데릭을 마주하고 그의 입에서 그녀의 모든 생각을 간파당한 이 순간에 와서야 깨달았다.

“계획대로 간다면, 그래. 그렇게 무난히 진행되었다면 카이로스는 토르티아를 정벌했겠지. 무한정에 가까운 자원에, 실력 좋은 군대에 잘난 장군들까지. 거기에 신의 은총이 있잖아? 그대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이 카이로스의 황제께서는. 그런데 어쩌나. 나는 그 꼴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 같은데.”

데릭은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로 오고 어디로 갈 줄 아는데 왜 손놓고 있어야 하지? 나라면, 가는 길목 족족 그 뒤를 칠 거 같은데.”

그런다고 한들 카이로스의 정예군이 무너질 거라 데릭은 생각지 않는다.

그러기엔, 황금의 군대는 지나치게 강할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카이로스의 토르티아 정벌은 막을 수 있다.

“아무리 쇠락하고 있다 한들, 토르티아는 토르티아. 기본 이상은 하게 되어 있어. 그 붉은 깃발 아래서, 그 붉은 성벽을 올려다보며 죽은 이가 어디 한둘인가. 그런 토르티아를 후방의 끊임없는 간섭 속에서 무너트린다? 글쎄. 나는 안 될 것 같은데. 아무리 카이로스라고 해도.”

정말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로엘도. 이반도. 아론도. 콜린도. 루카스도. 전부 다.

그만큼 데릭의 말에 차마 그렇지 않다고, 그러함에도 카이로스는 카이로스라고 소리칠 수 없었다.

분명 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만 하여도 카이로스가 명백한 우위였는데.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테바로스를 내리눌렀는데, 데릭이 입을 떼는 순간부터 분위기는 단번에 바뀌었다.

버리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그의 주군. 괜히 그 많은 형제들 속에서 살아남은 게 아니다.

상대의 약점을 잡고, 그 약점만을 물어뜯어 기어코 원하는 걸 뺏어 내는 수법.

악랄하다면 악랄한 그의 방식은 효과만은 확실하다. 그러니 저리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는 거다.

“그렇다면 먼저 테바로스를 치면 되겠군.”

단, 한 사람의 입만 빼고.

“그럼 해결된 거 아닌가.”

모든 좌중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는 목소리. 어느새 등장한 에단은 자연스레 가장 상석, 중앙에 앉아 있는 로엘의 뒤에 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폐하.”

카이로스의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의 도포. 그 정통성을 나타내는 황금빛 머리. 황금빛 눈동자.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잡는 이 큰 손까지.

아. ‘그’다.

이 상황을 단번에 종료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

이 아름답고도 화려한 황금의 제국의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그가 드디어 나섰다.

***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에단은 데릭을, 그리고 데릭은 에단을 마주했다. 같은 높이에서 동등하게.

이리 가까이 서로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 만남은 피가 튀던 전장.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어야 할 상대로 만났다. 이기고 있던 에단은 백마 위에서 유유자적하게. 패배에 임박한 데릭은 치열하게 대치하면서.

두 번째 만남은 로엘을 옆에 둔 데릭과 그런 데릭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만남. 그때 역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전장에서보다는 주변이 차분했고,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훤한 대낮이었다. 그러함에도 거리는 꽤나 멀었다. 고귀하신 카이로스의 황제 폐하를 지키는 호위가 워낙 유별나, 그 때에도 데릭은 멀리서 에단을 보아야 만했다.

그리고 이번이 바로 그 세 번째.

세 번째가 되어서야 드디어 데릭은 제대로 에단을 마주한 기분이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자. 그토록 자격지심에 증오했던 다 가진 황제, 에단. 지금 데릭의 눈앞에 그 에단이 앉아 있다.

“시작하지. 시작하려고 이리 다 사람을 무른 같은데.”

당연히 반말.

에단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타국의 황제도 그 앞에서는 먼저 고개가 숙여지고 존대가 나오기 마련이다. 데릭에겐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그에 대해 고민조차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어찌 웃지 않을까.

저 밑도 끝도 없는 패기만큼은 인정해 주고 싶었다.

“나는 시작할 게 없다. 이미 답을 했으니.”

에단은 평소와 다름없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반말에 대한 그의 답변은 하대. 평소 그가 신하를 대하는 것 그대로였다,

“토르티아보다 테바로스를 먼저 점령하면 그만. 내가 더 할 말이 있어야 하나.”

그러한 에단의 하대에도 데릭은 놀랍지 않아 했다. 먼저 반말이라는 무례를 저지른 건 자신이 맞았으니 별로 존대를 기대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하대가 나올 줄도 몰랐지만.

자신과 나이도 비슷한 저 젊은 황제께서 테바로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 생각이 정확히 테바로스의 현실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데릭은 그저 들었다. 이깟 치욕쯤,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훗날, 갚아 주기면 그만일 뿐이므로.

“테바로스 점령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말처럼 못 할 일도 아니지. 나라면.”

너무도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한 저 자신감. 상대의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내가 못할 것 같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주 실망인데. 테바로스의 황제.”

그래서 데릭 역시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이로스가 마음을 먹는다면, 그렇게 에단 황제가 결정했다면.

그래. 테바로스라고 한들 넘지 못할 이유가 무언가.

피해의 정도가 달라질지언정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 굳이 이러고 있는 이유가 뭐지? 이렇게 모든 이들을 물리면서까지 나를 독대하는 이유. 있는 거 아닌가?”

“있지.”

에단은 바로 답했다. 역시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고는 느긋하게 몸을 의자에 기댔다.

“나는 그대에게 기회를 주는 거다. 지금 이 순간. 그대가 나를 마주하고 있는 이 때에. 그대가 테바로스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기 위해.”

나긋한 그의 말 한마디에, 데릭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그의 심중을, 애석하게도 바로 알아채 버렸으므로.

“테바로스가 나의 계획을 알았고, 그 계획에 차질을 만든다면 나는 그것을 묵인할 마음이 없다.”

테바로스라는 변수 아래서 최선은 테바로스를 먼저 치는 일.

그것이 카이로스의 최선이라는 것을, 이번에도 데릭은 알아 버린 거다.

“그러니 카이로스는 테바로스를 치겠지. 그것이 나의 최선이고, 나는 허언을 하지 않으니.”

카이로스에 온 이후, 내내 지워지지 않았던 형식적인 미소.

자신감에 바탕이 되었기에 나올 수 있는 데릭 특유의 비웃는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에단은 지금 데릭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면 테바로스의 선택은 두 가지겠군. 지금 이대로 돌아가 카이로스와의 전쟁을 준비하든가. 아니면, 여기서 고개를 숙이고, 다시, 정중히 화친을 청하든가.”

이미 답이 정해진, 바로 그 선택.

데릭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자. 테바로스의 황제여. 그대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저 그는 가지고 태어난 것이 많다고. 그렇게 시작점이 달랐다고.

그 구차한 변명에 매달려 데릭은 외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의 대단함을. 그렇게 자신과의 차이를.

어쩌면 에단 황제는 데릭이 로엘에게 목걸이를 건네며 화친을 제안한 그 순간부터 지금을 내다보았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 전략은 철저히 데릭의 실패.

데릭은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세게 쥔 주먹을 도로 펴고, 깊은 숨은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물러섰다.

“카이로스의 황제 폐하.”

딱 한 번, 눈을 감으면 그만.

테바로스를 위해서라면, 그래. 무언들 못하랴.

데릭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테바로스는 정식으로 카이로스와의 동맹을 요청드립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고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꼿꼿하던 고개가 숙여지고 자신 있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 모습을 에단은 그저 바라보았다.

이것이 테바로스의 최선이라면, 아. 달갑지 않다.

“카이로스는 테바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필이면 그가 생각했던, 테바로스의 최선이라서.

그 최선을 절대 선택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에단이 너무 데릭을 얕보았나 보다.

“감사드립니다.”

이런 수모 따위, 치욕 따위. 테바로스를 위해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거다. 이 어린 황제는.

이런 황제라면, 그 나라의 미래는 불보듯 뻔하다.

아마 승승장구하겠지. 그것도 무서운 속도로.

“테바로스와의 동맹.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에단의 고민이 깊어질 밖에.

저 속을 알 수 없는, 지나치게 영악한 테바로스의 황제마저 신경 써야 하니.

에단은 고개를 숙인 데릭을 바라보며,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데릭 테바로스를 결코 만만히 보지 말라는 그녀의 말이 계속 떠올라서.

그리고 그 말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