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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2. 그가 황제인 이유 (43/69)

Chapter 42. 그가 황제인 이유

‘나는 황제가 될 거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로엘은 생각했다.

저 허무맹랑한 말은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꼭 그랬으면 좋겠다고.

아니. 그럴 거라고.

‘테바로스의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되겠어.’

그때 그의 나이, 고작 열 살이었다.

“열 살이 그런 눈을 할 수도 있나.”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투정 같은 헛된 꿈을 그는 참 열심히도 지켜온 거다.

밑바닥서부터 차근히, 참 많은 것을 희생해 가며, 그리고 포기해 가며.

그 포기한 것들 중 하나가 어쩌면 그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네가 테바로스의 황후다.’

자의든, 타의든 미래를 약속한 사이였다. 그것도 그냥 약속이 아닌,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이었다. 애초에 바뀔 가능성이 없었던, 정해진 인연. 로엘 역시 너무도 당연히 데릭과의 미래를 그렸다.

“참, 당연했는데…….”

고작해야 열 살 남짓 하는 어린 계집.

그 어린 나이에도 확신이 들었다. 이분이라면 평생을 함께할 수 있겠구나, 하고.

“그래. 그랬었지.”

이분이라면, 나를 이 거지 같은 토르티아의 황실에서 꺼내 주겠구나.

그렇다면 그때는 나의 삶을 살아야지.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행복해야지.

그렇게 이 사람과 평생을 나란히 걸어가야지.

“……어린애가 참 멀리도 생각했네.”

로엘은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참 맹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데릭이 확신을 주었던 소리.

사촌에 치여서, 숙부에 치여서, 그리고 제이드의 딸이라는 온갖 기대 속에 눈치까지 보느라 참 고달픈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그녀에게 데릭이 보여 주는 확신은 위로이자 위안이 되었다.

그런 그가, 정말 황제가 되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건만. 아니, 아마 비웃었던 이도 많았을 거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밟고 올라섰다. 그렇게 정말 황제까지 되었다.

“……그런 사람이 데릭 테바로스.”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그녀의 방을 울렸다.

여전히 해가 뜨지 않은 깊고 어두운 겨울밤.

“그런 그가 왜 여기에 왔을까.”

그녀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

그녀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바로 그 이유.

“얻을 게 있으니 왔겠지.”

혼자 생각에 잠겨, 그가 일어난지도 몰랐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에단의 낮은 목소리에 조금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입지 않아 맨가슴이 훤히 드러난 그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달빛에 눈이 부시는 듯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깨웠나요.”

“응. 네가 멋대로 다른 남자 생각만 해서 깼어.”

그가 이불만을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로 사색에 잠겼던 그녀를 가볍게 당기자, 그녀가 순순히 끌려가 그 품에 안겼다.

“틀렸어요. 나는 밤새, 카이로스를 생각하고 있던 거라고요. 당신의 아카시스로서, 그리고 이 나라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로서.”

꽤나 진지한 그녀의 눈에 에단은 미소를 지었다.

어련하실까. 이리 아름답고 사랑스러운데.

“저는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얼 꾸미고 있는지. 그게 얼마나 이 나라에 위험이 될지.”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랑스러운 여인은 그저 꽃같이 예쁘기만 한 게 아닌가 보다.

“몰라도 되고, 안 해도 돼.”

그런 그녀에 대한 그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빠르고 간단하다.

“상대의 모든 생각을 알고 협상에 들어갈 순 없어. 그걸 원한다면 그건 욕심이지.”

각자가 처한 상황은 그 본인만이 가장 잘 아는 법.

그 제각각의 상황들 속에서 제각각의 판단과 성격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한다

그 수많은 경우의 수를 어떻게 다 준비할까.

“그러니 최대한 많이 알아 가고, 최대한 많이 분석하려는 거야. 그자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그리고 나를 마주하겠다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거니까.”

언제나처럼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일정한 속도. 일정한 크기. 일정한 높낮이.

그의 화법은 친절하지는 않았으나 명확하고 정확하다.

그 여유가 상대로 하여금 그의 말을 신뢰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말은 곧 설득이자 명령.

그가 옳고 그가 맞다는 무언의 확신을 들게 한다.

“하지만, 그건 오만이야.”

그래서 지금 역시 그러했다.

에단은 정확히 로엘의 눈을 보았다.

“나는 아직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어. 그러니 선택하지 않았지. 선택하지 않는 나의 선택을 스스로 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이 협상에서 잃기만 할 거야.”

에단은 버리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에 차 있던 버리의 기를 꺾었다.

권위로써 상대를 엎드리게 하는 것.

누군가에게는 독이고 누군가에게는 약이다.

헛된 권력에 기댄 자의 권위는 악효과를 가져오겠지만, 에단의 경우는 다르다.

지극히 누려야 한다고 인정받는 권력에서 기인한 권위. 그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자 어디에 있으랴.

테바로스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강했던 만큼, 버리의 입에 나온 ‘하늘 같은 황제 폐하’라는 단어는 참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절대 데릭이 아니면 숙여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고개가 땅을 향하는 순간 로엘은 새삼 놀랐다.

내가 올려다보는, 늘 내 곁에 있었던 저분은 정말 다른 사람이구나 하고.

“당신은 시간을 번 거군요.”

“맞아.”

“그걸 상대가 모르게 하면서.”

그는 그저 미소 지었다. 정확히 판단한 그녀에게.

어느새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서로의 눈에 서로를 가득 담았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전히 해가 뜨지 않은 한밤중. 불 하나 켜지 않은 곳에서, 달빛만을 의지하고 있는데도 서로의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대수일까. 이미 서로의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는 로엘을 보며 에단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녀는 한껏 진지한 것 같지만, 그는 그저 이 시간이 좋았다.

오롯이 둘만이 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기분. 그 기분이 그를 안정시킨다.

무겁다고 느끼지도 못하는 그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은 기분이랄까.

“당신, 나 지금 진지해요.”

“알아.”

“그러면서 왜 웃어.”

“네가 좋아서.”

결국 참지 못하고, 그가 다시 그녀의 당겨 품에 안았다.

아까부터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거 같은데, 그녀는 여전히 나신이었다. 제법 꽁꽁 이불로 감싸고 있어도, 얼핏얼핏 드러나는 하얀 속살은 그의 시선을 가져가기 충분했다.

눈같이 하얀, 부드러운 살 중간 중간 핀 붉은 꽃들이 그를 꽤나 만족시킨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겠지.

“네가 너무 좋아서.”

그는 품에 안은 그녀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기며 말했다.

애정 넘치는 그 행동에 로엘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회의실에서 진지하게 각 잡고 이야기해도 모자랄 판에 침대 위에서 살을 맞대고 속삭이고 있다니.

지나치게 애정이 넘쳐흘렀다. 물론 그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편히 그에게 몸을 기대며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테바로스가 이렇게까지 나왔다는 것은 폐하의 말대로 꽤나 오랜 시간 준비해 왔다는 거예요. 우리는 에토르 전쟁이 그 결과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거기서부터 틀렸는지 몰라요. 그들은 패배했기 때문에 다음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은 에토르가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카이로스와의 동맹이라든지.”

카이로스와의 동맹이라.

“카이로스의 동맹은 많아.”

“진짜 동맹은 없지요.”

하나같이 살기 위해 동맹이라는 명분하에 속국이 되었을 뿐.

동맹이라기엔 위계 질서가 너무도 확실했다.

“동맹은 동맹이지.”

“세상에 어느 동맹이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답니까.”

로엘의 흘김에도 에단은 심드렁했다.

“억울하면 파기하든가.”

“파기하고, 대놓고 속국으로 삼으시게요?”

“필요하다면.”

“못됐어.”

“훌륭한 거지.”

로엘은 한숨을 쉬었다. 내 편이기에 망정이지 적이었다면 정말 최악 중의 최악이었을 거다.

일단 자비와 관용이란 게 없었으니.

“제가 아는 데릭 폐하는.”

“이름.”

“아…… 정정. 테바로스의 황제요.”

에단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로엘은 웃고 말았지만.

귀여운 것과는 거리가 먼 분이 어째 갈수록 더 귀여워지는 거 같다.

“제가 아는 테바로스의 황제는 이곳 카이로스의 온 이상 절대 빈손으로 가지 않을 거예요. 버리가 가져온 토르티아의 정벌 카드. 어쩌면 그 이상을 제시할 수도 있지요.”

“아니면, 버리 한스보다 더 솔깃하게 제시하거나.”

이번엔 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이 하는 협상이라. 로엘은 상상이 가면서도 가지 않았다.

그 사람은 말보다는 검이 먼저인 사람. 그 나라의 문화가, 그 사람의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애초 대화의 테이블에 앉을 수 없었던 데릭이라서, 데릭은 대화를 하기 전에 검을 들어야 했고 검을 들면 피를 보아야 했다.

그런 사람이 먼저 대화를 하러 왔으니, 그녀는 더더욱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카이로스와 테바로스가 전쟁을 끝낸 지 불과 한달이에요. 카이로스는 이겼으며, 테바로스는 졌지요. 패전국이 승전국의 나라에 잠입해서 동맹을 요구한다는 이 상황은 분명 주객이 전도되었어요. 그들은 선수를 친 거고, 이번에도 카이로스는 그런 테바로스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어요.”

마치 에토르 때처럼.

에단 역시 그 사실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판을 그리고, 말을 움직이는 것은 그의 몫. 그런데 계속 데릭 테바로스가 건방지게도 그의 판에 멋대로 올라와 멋대로 말을 움직였다.

이미 여러 수를 내다보며 한 수를 드는 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하고 불쾌할 수밖에.

만일 데릭이 그 도를 조금만 더 지나쳤다면 그는 단번에 판을 엎어 버렸을 거다.

“그래서 생각을 했어요. 테바로스가 이렇게까지 해서 카이로스에게 얻으려는 게 무얼까.”

그들에게 카이로스는 질투의 대상이자 선망의 대상.

그렇기에 비록 에토르 전쟁에서 졌을지라도 그들은 잠시나마 카이로스보다 우세하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아직까지 열광하고 있을 거다.

“카이로스의 모든 것을 원하겠지.”

그 열광은 희망으로 바뀔 것이고 그 희망은 기대가 되었을 거다.

우리도 카이로스가 될 수 있다는 바로 그런 꿈.

“맞아요. 그들은 카이로스의 모든 것을 원할 거예요.”

카이로스의 힘. 기술. 제도. 지식.

지금의 카이로스를 가능케 했던 그 모든 것들.

“그걸 얻으려면, 그걸 배우려면 그들은 카이로스의 곁에 있어야 해요. 좋든 싫든.”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지. 먹거나, 먹히거나.”

“그는 그 둘 다를 거부한 거고요.”

그러니 데릭이 영민하다는 거다.

이번 전쟁으로 힘의 격차를 느꼈고, 그 판단과 동시에 그는 결정한 거다.

그들을 먹을 수 없으나, 먹힐 수도 없다고. 그러니 선수를 쳐야겠다고.

“결국 당신의 선택이라는 거군요.”

데릭이 가져온 제3의 패를 받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로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선택의 몫은 오롯이 그의 것이라서.

저 무거운 어깨에 또 하나의 짐이 얹어졌다.

“당신이 덜 똑똑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결정이 쉬웠을 텐데.

고민 않고, 감정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였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는 지나치게 머리가 좋아 계산이 빨랐고, 감정을 공적인 일에 끌어오기엔 책임감이 너무 컸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카이로스를 너무 사랑해. 어쩌면 나보다 더.”

마치 그의 아버지처럼.

그녀를 뒤에서 안고 있는 터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그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훤했다.

조금은 서운한, 그러면서도 이해한다는 그런 얼굴.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의 표정이다.

그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그를 마주 보게 만들었다.

“서운해?”

“아주 조금.”

순순히 그렇다고 말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그는 또 한 번 그녀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하지만, 그런 당신이라서 사랑하는 거예요. 나는 카이로스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아. 이건 이마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

양 볼을 손으로 감싸며, 따뜻한 입술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언제나처럼 수줍음으로 시작해 뜨거움으로 끝나는, 서로의 향기가 섞이고 서로의 열기가 합쳐지는 느낌.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연인의 행위다.

“그러니 폐하,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의 결정을 도울게요. 당신의 곁에서 나의 모든 것으로, 당신이 가는 길을 함께할게요.”

“그래.”

그것만으로 그는 넘치도록 충분하다.

그는 또 한 번 그녀의 입술에 짧게 키스하며 말했다.

“나는 네가 있기에, 테바로스와 대화라는 걸 하는 거야.”

로엘이 가진 경험과 지식을 그는 믿는다.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그의 선택은 그저 정벌. 그는 테바로스와 같은 테이블에 앉지 않았을 거다.

북방과 무언가를 협상하기엔 그가 아는 정보가 너무도 적었으니까.

그는 그런 불확실한 상황에 베팅 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그러니 더 확실한, 전쟁이라는 수를 두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있다.

그 누구보다도 북에 대해 잘 아는 자. 그 누구보다도 북방의 전쟁을 많이 경험한 자.

그녀가 있음으로써 그에게 다른 선택지가 생겼다. 덜 죽고 더 얻는, 더 쉬운 길이 열린 거다.

“너는 이 나라의 프란시아야. 내가 너를 선택했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였어.”

그는 그녀를 좀 더 세게 품에 안았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이 그녀를 자신에게 보내 준 것에 대해.

어찌 승리의 여신이라 칭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나의 프란시아. 이 아름다운 나라, 카이로스를 위해 네 역할을 다해.”

이번엔 그녀가 그 무엇보다도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이 말이 듣고 싶었다.

“나의 아름다운 황제 폐하. 저는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나이다.”

몇 번을 말하고, 또 말해도 아깝지 않을 말들.

로엘은 또 한 번 더, 그에게 충성을 아니, 사랑을 맹세했다.

말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깊고 깊은 마음을 담아.

***

“와아……. 오늘 진짜 힘주셨네요. 마마.”

“응. 헤더가 고생 좀 했지.”

진심으로 놀라 하는 딜리아에게 로엘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침 일찍 에단이 가고 난 후부터, 로엘은 제대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생이라뇨. 평소에도 얼마나 이러고 싶은데요.”

헤더는 삐져나온 잔머리를 마지막으로 정돈해 주며 말했다. 오늘은 좀 예쁘고 멋있어 보였으면 좋겠다고. 그러니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데 헤더가 어찌 가만히 있을까.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발 벗고 나섰다.

워낙 꾸미는 데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 최소한의 최소한만 하고 다니시지만, 마음먹고 꾸민다면 세상에서 아름다움으로 이길 자가 없는 분이다.

“자. 끝났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헤더의 손이 드디어 떨어지자, 로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거울 앞에 드러난, 아침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에 그녀 자신도 제법 놀랐다.

“마마. 전부 기죽이고 시작하자구요.”

아주 자신만만한, 헤더의 만족스러운 미소에 로엘도 따라 웃고 말았다. 자신이 부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와. 이건, 거의 마법 수준인데.”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마마. 그러니 자주 꾸미시라고요.”

“그러게. 내가 인재를 너무 썩히고 있네.”

길고 붉은 머리는 촘촘히 땋아 단정하게 올라갔고, 그 위로 작은 다이아 왕관이 얹어졌다.

드러난 하얀 목선이 잘 보이는 적당히 파인 드레스는 우아하게 허리 라인을 따라 떨어졌으며, 카이로스를 상징하는 황금빛의 비단에는 자잘한 펄이 들어가 있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반짝였다.

화려하지만 과하지 않은, 우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드레스였다.

마지막 포인트는 그녀의 목에 걸린, 그가 준 붉은 루비 목걸이. 토르티아의 상징이자, 그녀의 상징이기도 한 그 붉은 보석은 깊이 파인 그녀의 쇄골 사이에서, 새하얀 그녀의 피부에 대비되어 더욱 붉게 반짝였다.

“고마워, 헤더.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마마.”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그녀에게 헤더 역시 환하게 미소로 답했다.

워낙 스스로가 예쁘다는 사실을 자각 못 하는 주인님께서 오늘만큼은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보다. 빤히 거울을 바라보며, 살짝 홍조를 드리우는 로엘의 모습에 헤더는 물론 지켜보는 다른 이들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자. 그럼 가 볼까.”

아침부터 긴 시간의 치장을 끝내고 드디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바로스와의 협상 첫날. 로엘은 동석을 명받았고, 그녀는 당당히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로서 그 자리에 함께한다. 여자는 원로회에 들어갈 수도, 프래카에 들어갈 수도 없는 지극히 남성 중심사회인 카이로스에서 이는 꽤나 파격적인 일.

로엘은 이 카이로스에 와서 이러한 파격을 하나씩 하나씩 이뤄 내고 있다.

그녀가 후궁을 나설 때, 후궁의 시녀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여 충성을 표함으로써 그런 로엘을 무언으로 응원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후궁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이반이 제일 먼저 그녀를 맞았다. 로엘이 먼저 이반에게 살짝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으나, 이반은 그런 로엘은 한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황자님.”

그 이유는 얼굴에 전부 드러났다. 할 말을 잃은 듯한, 멍한 표정. 로엘은 민망함에 부끄러워졌다.

“그 정도까지는 아냐.”

“그 정도인데?”

이반은 진심으로 답했다. 말 그대로 그는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애초에 이반의 기억 속의 로엘은 드레스보다는 바지가 더 어울리는 소녀였다. 찻잔이 아닌 검을 들고, 왈츠가 아닌 검술을 배웠으니 그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여전히, 이반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한껏 치장을 한, 사교계의 여인으로서의 로엘이 낯설었다.

“이상하다고 놀리는 거야?”

“당황스러울 정도로, 과하게 예쁘다고 칭찬하는 거야.”

객관적으로 여신은 아니라던 에단의 말을, 당장이라도 찾아가 정정해 주고 싶을 정도로.

카이로스에서 처음 그녀를 만나던 날. 그녀는 반쯤 찢어져 버린 드레스에 피를 뒤집어쓴 채로, 암살자들의 시체 더미 위에 서 있었다.

한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그때의 로엘의 모습은 아마 그녀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사교계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거다.

그러나 이반은 그 엉망의 모습보다도, 카이로스 황궁의 후원 언덕에서 노을을 등지며 그를 돌아보던 그 ‘아카시스 로엘’의 모습이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분명, 그가 알고 있는, 그가 참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바로 그 네아인데 네아가 아닌 느낌이랄까. 그래서 일부러 한동안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고운 드레스에 싸여 시녀들에게 시중을 받는 저 모습이, 진짜 토르티아의 공주, 로엘이겠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아는 네아가 아닌데 어쩌나 고민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리 지나치게 아름다운 네아 역시 이반에게는 한없이 낯설다.

낯선 만큼 두근거리고, 낯선 만큼 긴장되는 법.

그는 애써 당황하는 마음을 숨긴 채, 자연히 그녀의 손을 그의 팔에 얹었다.

“작전이 미인계야? 그럼 통할 거 같고.”

“시끄러워.”

그런 이반의 마음을 전혀 눈치챌 리 없는 그녀는 이반의 농에 그저 퉁명스럽게 답할 뿐이다. 그렇게 로엘은 이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반의 친위대와 그녀의 키로스가 두 사람의 뒤를 따랐고 황궁 복도의 궁인들은 그들의 발걸음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보통은 무도회나 파티 때 이렇게 꾸미는 거야. 협상 자리가 아니라. 그때는 대충하면서 지금 이러는 이유가 뭐야?”

“그때도 대충한 적 없거든.”

“그러기엔 차이가 심한데…….”

“조용히 가자구요, 황자님.”

결국 그녀의 손이 그의 팔뚝을 세게 꼬집었다. 손힘이 좋기도 하지. 이반은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다시 웃고 말았다. 이렇게 놀리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괜한 추억들이 떠올랐다. 이런 말장난이 일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참 많은 것이 속절없이 바뀌고 말았다.

“테바로스의 분위기는 어땠어.”

“좋았지. 그것도 아주 많이. 데릭 테바로스의 말이라면 당장에라도 목숨을 바칠 기세라고 해야 하나.”

이리 그녀와 카이로스에서 테바로스에 대해 말하게 될 줄 그 당시에는 상상이라도 했을까.

이반은 살짝만 걸친 그녀의 손을 잡아 좀 더 제대로 그의 팔에 얹었다. 그런 이반을 로엘은 잠시 빤히 올려다보았으나, 이내 다시 정면을 보았다.

이반의 행동. 표정. 눈빛. 목소리.

그 작은 것들만으로도, 여전히 로엘은 이반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원체 말이 없이 눈과 웃음으로 대화을 하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우리에겐 별로란 소리네.”

“아마도.”

그래서 일부러 모른 체했다. 그가 꺼내는 추억 속에 그들은 더 이상 없었으므로.

그런 로엘의 모른 척을 이반 역시 안다는 게 문제였지만.

“‘우리’라. 이제는 너무 자연스럽네. 진짜 카이로스의 사람이 된 거 같아.”

“아니, 난 평생 그러진 못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토르티아 사람이지.”

이 붉은 눈과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는 한, 그녀는 평생 이방인일 거다.

그 사실을,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걷던 이반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꽤나 슬픈 말을 너무도 덤덤히 하는 그녀를 보았다.

“그렇지 않아.”

“아니, 그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게 되어 있어. 어쩔 수 없는 거지. 다르게 생겼다는 건, 꽤나 거부감이 크니까.”

마치 은빛 머리를 가지고 토르티아에 시집온 그녀의 어머니처럼.

반평생을 아버지께 헌신하고, 토르티아 황실에 헌신한 그녀의 어머니도 결국엔 이방의 공주로 생을 마쳤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그리고 그 어머니의 딸임을 증명하듯 옅은 붉은 머리를 가진 채 살아온 그녀로서는 그 ‘다름’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황자님이 아무리 홀대당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황자님에게 고개를 숙이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 머리 때문이에요. 누가 보아도 이 카이로스 황실의 황족이라는 상징. 그 황금빛 머리 자체가 권력이 된 거죠. 그러니 저의 이 붉은 머리가 토르티아의 상징인 이상, 저는 절대로 카이로스의 사람이 될 순 없어요.”

로엘은 이반의 황금 머리와 황금 눈동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새삼 저 또렷한 황금색이라도 있어, 그를 최소한이라도 지켜 주었단 생각에 새삼 고마웠다.

차마 다음 말을 하지 못하는, 이 착한 남자는 그런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열심히 해.”

이반은 결국 그녀의 팔을 잡았다. 살짝 힘주는 그의 손에 로엘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역시나 괜한 말을 해 버리고 말았나 보다.

“그럴 걸 알면서 뭘 그렇게 목숨 걸고, 무모하게 싸우냐고.”

로엘은 그런 이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살짝 힘을 주었다.

그는 너무도 뻔한 답을 묻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너무도 사랑하는 나라니까.”

그렇게 그녀를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이 너무도 열심히 지켜 온 나라니까.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어.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있어.”

스르륵. 그녀의 팔을 잡은 이반의 손이 떨어졌다.

서서히 마음 정리를 해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놓고 이리 그녀의 입을 통해 들어 버리면 아직은 마음이 많이 쓰렸다.

이반의 입가에 버릇처럼 나오는 미소가 걸렸다.

그 의미 없고 공허한, 참 쓰디쓴 미소에 이번엔 로엘의 미간이 조금 찡그려졌다.

이러니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정말 괜한 말을 해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네가 나고 자란 곳이니까.”

그래서 결국, 로엘은 하고 싶지 않았던 뒷말을 잇고야 말았다.

이 역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그녀의 진심.

“네가 나를 버리면서까지 택한, 그렇게 소중한 나라니까.”

버려진 강아지처럼 풀이 죽었던, 그렇게 서운함을 숨기지 못했던 그의 얼굴에 자연히 환해졌다. 어쩔 수 없음 기쁨을 드러내는, 그답지 않은 솔직한 반응.

“그래. 이반. 나에게는 너 역시도 중요해. 어떻게 안 그러겠어. 너와 내가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부인할 할 수도 없고, 부인할 필요도 없다.

서로가 외로웠을 때 분명 두 사람은 서로의 곁을 지켜 주었다. 그 고마운 시간을 한때는 부정했고, 한때는 모른 척했으나, 로엘은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평생을 보아야 할 인연.

그 인연의 중심에 ‘그’가 있고, 그는 이반도, 그리고 그녀도 이겨 버렸다.

그래서 정리된, 아니 정리되어 가는 관계. 로엘은 그 과정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 줄 때까지, 그렇게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그래서 진짜 ‘남매’가 될 수 있을 때까지 로엘은 이반을 마주하기로 그렇게 정했다.

“그리고 나의 사람이 생겼어. 이방인인 나를 진심으로 받아 준 이들이 있어.”

로엘은 헤더가 오늘 아침 정성껏 올린 머리를 살짝 만졌다. 안나는 치장하며 먹기 좋은 음식들을 내왔고, 딜리아는 분주히 헤더의 치장을 도왔다. 페니는 그녀가 협상에 가져갈 자료를 정리했고 시에라는 든든히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저 안에는 그녀에게 잘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은 아론이 있을 테고, 그녀를 보자마자 예쁘다고 난리 칠 루카스가 있을 거며, 언제나 그녀에게 깍듯한 예를 차리는 제롬 역시 있겠지.

로엘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러니, 이반. 나에겐 그 모두가 나의 ‘우리’야.”

굳이 카이로스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녀가 카이로스의 사람어야만 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안다.

그저 내 사람들에게 내가 그들의 사람이면 되었다.

“나는 그러한 우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어.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이반은 결국 피식 웃고야 말았다.

진짜, 이길 수가 없다.

“나보고 더 노력하라는 소리로 들리네.”

“제대로 알아들었네.”

이반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 그의 팔 위에 얹었다.

처음 황자로서 아카시스를 에스코트하던 그 자세 그대로.

그래. 허락된 건 딱 거기까지.

“가실까요. 마마.”

“예. 황자님.”

그리워해 온 시간이, 후회한 나날이 길어 아직은 이리 서운함이 더 크지만, 그러함에도 이반은 진심으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이 정도까지라도, 그에게는 감사했으니.

두 사람의 걸음이 그렇게 테바로스가 기다리는 대회의실을 향했다.

***

“이건 생각지 못한 그림인데.”

회의실에 들어온 데릭은 눈앞이 펼쳐진 광경에 헛웃음을 뱉었다.

그를 맞이하는 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서.

“테바로스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가장 상석. 정중앙에 앉은 로엘은 이반을 비롯한 에단의 사람들을 양옆에 두고선, 당당히 데릭을 맞았다.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로서, 하늘 같으신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테바로스와의 협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정확히 데릭의 눈을 직시하는 그녀의 입은 늘 버릇처럼 짓던 옅은 미소마저 없었다.

철저히 카이로스의 대표로서, 그리고 그 협상의 책임자로서 데릭을 마주했다.

그러니 데릭의 입장에서는 놀랄 밖에.

당연히 에단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준비했던 계획의 시작부터 틀어진 셈이다.

“이건 상당히 무례하군요. 테바로스 황제께서 오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이로스의 황제께서는 나오시지 않다니요. 이건 테바로스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태입니다.”

“아무런 기별 없이 한 나라의 비를 인질로 삼아 이 황궁에 쳐들어온 쪽에서 무례를 논하는 건 아닌 듯싶군요. 그 일이 있음에도 이리 자리를 마련한 것 자체가 카이로스는 최대한의 예를 표한겁니다. 하필 그 무례를 범한 장본인이 이 앞에 계신 황제 폐하시라.”

로엘은 또박또박 버리의 말을 맞받아쳤다. 물론 그 시선은 오로지 데릭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을. 단단히 마음을 먹고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그녀의 눈이 말해 주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시선. 깊고 깊은, 그리고 붉고 붉은 눈동자.

보석처럼 빛나는 그녀의 눈은 일말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가 언뜻 저도 모르게 보였던 그에 대해 조금이나 남았던 감정들.

어린 날의 그리움. 힘든 시간을 함께했던 연대. 그로 인한 서로에 대한 동정. 그 바탕이 되는 애정. 그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카시스님. 말씀이 지나치……!”

“됐어, 버리.”

철저히 한 나라의 대표로서 적국의 황제를 바라보는 그 차가운 시선에 데릭은 쓴 미소를 삼켰다. 지난밤, 아무래도 그녀는 저 혼자 온갖 마음과 생각의 정리를 끝냈나 보다.

같은 밤, 그는 그녀와의 재회를 어쩔 수 없이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내가 먼저 무례를 범한 건 사실이지. 옛 추억에 취해 먼저 손을 댄 건 사실이니까.”

데릭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살짝 위로 올라간 시선. 삐딱한 자세.

로엘은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일부러 오해하게 만드는 저 애매한 표현. 다양한 상상이 가능한 그 한마디는 분명 그녀에 대한 희롱이었다.

“데릭 폐하. 예를 갖추어 주세요.”

“충분히 예를 갖추어 말한 거 아닌가. 더 세세히 말하면, 더 무례일 텐데. 아마.”

그러니 얼굴이 굳는 건, 비단 로엘뿐이 아니었다.

이반은 물론 루카스와 아론, 제롬을 포함한 그 자리 모든 카이로스의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데릭이 일부러 저런다는 것. 그들을 감정적으로 몰아세워 판단력을 흐리게 하려는 그 뻔한 수법임을 알지만 그러함에도 올라오는 불쾌함과 분노를 쉽사리 억제할 수 없었다. 바로 욕부터 뱉으려는 루카스를 아론은 최대한의 이성으로 겨우겨우 말렸다.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정말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다.

이 테바로스의 어린 황제는.

“이리 아름다운 옛 정혼자께서 직접 나를 상대하시겠다는데 마다할 리가.”

데릭의 미소가 좀더 진해졌다.

에단이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이 자리, 중앙에 세웠는지 알 만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데릭이 순순히 물러날 리도 만무하다.

“자. 그럼. 어디 한번 시작해 볼까. 토르티아의 로엘 공주 마마.”

북방에 대해 지식만 있을 뿐 지혜가 없는 이 카이로스의 중진들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쉬웠을 테지만, 로엘 역시 데릭에게는 나름대로 유리하다. 그녀가 그를 잘 알고 있는 만큼 그 역시 그녀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으니.

“카이로스의 로엘입니다.”

이리 바로 받아치는 그녀의 다음이 예측 가능한 것처럼. 버리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아론을 상대할 마음으로 준비하였던 버리의 1안은 소용이 없어졌지만, 그들에겐 이미 북방에 경험이 있는 이반을 생각하고 생각해 둔 2안이 있다. 그 상대가, 이반보다 좀 더 북을 잘 아는 로엘로 바뀌었을 뿐이다.

“일단 테바로스의 입장을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죠.”

버리는 카이로스의 협상단의 심기를 상당히 흔들어 놓은 데릭의 화법에 살짝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늘 그렇듯 그의 주군은 더러운 방법이든 아니든 개의치 않는다. 그저 테바로스를 위할 뿐.

그러니 아무리 비열한 방법일지라도, 버리는 그의 주군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 또한 희생임을 버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테바로스는 세 가지를…….”

“잠시만요.”

그렇게 데릭이 깔아 놓은 판 위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협상이라는 걸 해 보려고 하는데 순간, 로엘이 버리의 말을 끊어 버렸다. 여전히, 그 시선은 데릭을 향한 채로.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계신 듯한데. 카이로스는 테바로스의 입장을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뭐가 아쉬워서, 패전국의 상황을 듣고 있나요? 이 아까운 시간에.”

또다시 나온 단어, ‘패전국’.

에단과 똑같은 단어 선택에 버리는 바로 얼굴이 굳었다.

에단이야 일개 신하인 버리를 상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테바로스의 황제인 데릭이 아닌가.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직접 말하니 데릭의 심기를 꽤나 심하게 건드렸을 거다.

“테바로스의 결례를 받아 주어 이 황궁에 들이신 것도. 어거지에 가까운 이 협상 자리를 허하신 것도, 그렇게 테바로스에게 기회를 준 것도 전부 다 대제국 카이로스의 에단 황제 폐하의 크나크신 관용 덕분입니다. 그러니. 테바로스의 황제 폐하. 지금 이곳에서 테바로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듣는 것’뿐입니다.”

로엘은 숨 한 번을 삼키지 않고 눈썹 하나를 깜빡이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나긋한 목소리. 적당한 말의 속도. 정확한 발음.

거기에 정자세로 곧게 허리를 피고, 꼿꼿하게 세운 고개까지.

“제안도, 설명도, 결정도 카이로스가 합니다. 테바로스는 그저 듣고, 그저 따를 뿐. 그게 싫으시면 여기서 나가세요. 물론 안전은 보장해 드리지 못합니다.”

나는 위이고 너는 아래라고 우아하게 돌려 말하는 그녀에게 데릭은 결국 피식 웃고야 말았다.

“영민하신 데릭 폐하. 그럼, 협상을 계속해도 될까요?”

아. 어쩌면 자신이 너무 로엘을 쉽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거 재밌네.”

데릭은 의자에 기댔던 상체를 살짝 세워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렇게 빤히 로엘을 보았다.

그와 이리 눈을 맞추며 겁도 없이 대드는 이라니, 얼마나 오랜만인가.

너무도 오랜만이라, 데릭은 헛웃음이 계속 나왔다.

하필 그 오랜만의 주인공이 그녀일 건 또 무엇인가.

아무리 그녀가 부정한다 해도, 이미 한번 끊긴 인연이라 해도, 그와 그녀는 여전히 지독한 인연 속에 있는 거다.

“어디 계속해 봐. 그 협상.”

아. 역시나 그녀가 이리 나온 건 그에게 잘된 일이다.

승패 여부를 떠나, 이리 재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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