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1. 황제, 데릭 (42/69)

Chapter 41. 황제, 데릭

버리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꿈을 꾸고 있다고.

“여어. 보좌관.”

그렇지 않고서야 저분이 이렇게 자신의 눈앞에 있을 수 없다고.

“협상은 잘 하고 있나?”

아.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다.

데릭은 기어코 카이로스의 황궁 문에 들어섰다. 로엘이 인질로 잡혀 있기도 했고, 이반이 명령하기도 했으니 성문이 열릴밖에.

“저 새끼, 진짜 또라이네.”

그러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데릭과 테바로스의 소수 정예는 로엘을 포위하고 있었고, 또 그들을 카이로스의 황군이 포위하고 있었다. 아무리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한들 이건 압도적으로 테바로스가 불리한 상황.

이 상황을 만든 것도 테바로스이며 그 상황으로 스스로 들어온 것도 테바로스.

“적어도 정상은 아니지.”

이 소식은 바로 에단에게로 보고되었고 에단을 비롯한 그 측근들이 다 같이 본성의 망루로 나왔다.

그 높은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어떠할까.

“……제가 카이로스에서 죽으면 그건 전부 황자님 탓입니다.”

“그 전에 구해 줄 테니 걱정 마.”

퍽이나 그게 가능하겠다.

사신이 찾아온들 저 사람을 막을 수 있을까.

로엘이야말로 지금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싶었다.

멀리 자신을 내려 보는 저 황금의 눈을 보아하니,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

“…….”

이번엔 또 어떠한 변명을 하여야 하나.

참 많은 것들이 그녀의 마음 같지 않다.

그녀는 그저 더 추워지기 전에 카이로스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을 뿐인데.

갑작스런 전쟁에 고생 많았다고, 다 같이 잘 이겨 내었다고 작은 격려와 위로를 해 주고 싶었다. 보잘것없는 그녀를 이리 칭송해 주는 것이 그녀야말로 황송하여 고맙다는 그 말도 전하고 싶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연말에, 모두가 모두에게 하는 그런 감사의 인사말을 전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이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저 차디찬 황금의 눈을 보며 로엘은 울적해졌다.

이번에도 그녀는 본의 아니게 잘못을 했고, 그로 인해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으며, 그를 화나게 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만 같은 악순환에 로엘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탓했다.

그녀는 어디서부터 잘못을 한 걸까.

데릭이 카이로스에 있을 줄 그녀는 몰랐다. 그가 오래전에 끊긴 인연에 연연해할 줄도 몰랐다. 이리 테바로스의 정예군이 대기 중인 것도 몰랐으며, 그리하여 그녀 자신이 인질로 잡힐 줄도 몰랐다.

“그러함에도 내 탓이겠지.”

결국은 그 모든 중심엔 ‘그녀’가 있으니.

그를 이곳에 불러들인 것도. 그가 그녀의 옛정을 이용한 것도. 이리 그녀를 붙잡아 카이로스 성에 든 것도 전부 다 로엘이 관계되어 있다.

그녀는 그저 오늘 아침도 평범히 눈에 떴을 뿐인데 말이다.

“억울해?”

“조금요.”

그런 로엘의 생각을 데릭은 어디까지 읽은 걸까.

“억울해해 봤자 달라지지 않아. 처음부터 네 잘못은 없었기 때문이지.”

로엘은 피식 실소를 뱉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정확히 그녀의 생각을 읽었나 보다.

아니면, 너무도 똑같은 상황에 처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동질감이랄까.

“애초에 잘못하지 않아도 내 잘못이 된다면 그건 하늘을 탓해야지. 그 사실에 대해 네 탓으로 돌리는 이를 탓해야지. 내 탓으로 돌리는 건 아주 멍청한 짓이야. 그래서 나는 그 짓 안 하려고, 황제가 되었어.”

로엘은 물끄러미 데릭을 곁눈질로 보았다. 데릭 역시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눈으로만 그런 로엘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니 너도 노력하지 마. 네 운명이 그러하다면, 그 안에서 스스로 살아 남아.”

“……그러고 있어요.”

“그래. 그러니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거겠지. 덕분에 아주 훌륭한 나의 인질이 되어 있고.”

이번엔 데릭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뚱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투명함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참. 이 상황 속에서도 그를 웃게 만들다니. 아무튼 대단한 여자다.

“그 인질. 오래할 생각 없습니다.”

로엘은 다시금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리고 정확히 그 옆에서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데릭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눈.

그 안에는 온갖 감정이 전부 들어 있었다.

사람을 눈으로도 죽일 것 같은 그에 대한 두려움

이 사태를 이 정도로 끌고 온 것에 대한 미안함.

그러하면서도 그녀의 탓이라 말하고 싶지 않은 억울함.

그로 인해, 그가 달라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까지.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로 통일되잖아.”

바로 그에 대한 깊고도 열렬한 애정.

그래. 지금 로엘은 사랑을 하고 있다.

“아카시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사랑을 받는, 모든 것을 가진 남자가 자신의 여인을 불렀다.

“네.”

아주 짧고 간결하게.

“이리 와.”

절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 높은 황금의 성.

그 성의 가장 중심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그 사람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이 소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여유로웠다.

하지만, 데릭은 안다.

그가 카이로스 성문을 로엘과 함께 들어온 그 순간부터 그의 눈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로 향했단 것을.

“네. 폐하.”

이 상황 속에서도, 그 혼자만이 여유로운 것이 사실일지도 몰라도 그가 아주 많이 화났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지금 가요.”

그건 저 남자가 이 여자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거다.

“누구 마음대로.”

그러니 데릭은 그 사실이 심히, 불편했다.

“프래카. 조준.”

한 걸음 나아가려는 그녀를 데릭이 잡는 그 순간, 프래카의 모든 화살이 정확히 데릭을 향했다. 그저 그는 한쪽 손을 들었을 뿐. 그 손동작 하나에 루카스의 명령은 낮게 울렸고, 프래카의 반응은 빠르고 정확했다.

자칫하다가는 데릭의 곁에 있는 로엘이 다칠 수 있음에도 그의 선택은 망설임이 없었고, 그에 따른 루카스를 비롯한 프래카의 행동은 더 망설임이 없었다.

“저분 마음대로요.”

여긴 카이로스의 황궁 안이다.

백성들이 우글우글하는 저 사람 많은 곳과 어찌 같을까.

그가 무얼 생각하고 무얼 노리든, 황궁 안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데릭은 더더욱 불리하고 위험해진 거다.

“놔주세요. 저를 이용하시는 건 충분히 하셨습니다. 여기서 더 하시려 든다면 여기까지 이용하신 것조차 잃게 되실 거예요.”

로엘은 또렷히 데릭을 보며 말했다.

“황자님께서는 저를 해하지 못하십니다. 그러실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셨다면, 그 흔한 포박이라도 했겠지요.”

심지어 방금 전, 이반에게 보여 주기 식으로 들이밀던 검조차도 데릭은 칼등으로 그녀를 겨누었다. 그녀의 몸에 아주 조금의 생채기라도 낼까 염려되어.

“황자님. 애석하게도 저분께서도 그걸 아십니다. 그러니, 저는 당신을 지킬 인질로서 가치가 없어요. 저분께서는 당신의 손에 제가 죽는 것을 보진 못해도, 자기 손으로 저를 죽이는 건 하실 수 있으니까요.”

데릭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를 죽이기엔 지금 그를 바라보는 에단의 시선이 너무도 뜨거웠으니.

정말 신경 쓰지 않았던, 그저 그런 아카시스였다면 그는 진즉에 프래카를 써서 인질이 된 아카시스와 함께 데릭을 저세상으로 보내 버렸을 거다.

이리, 그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부터가 데릭이 그러하듯 저 남자 역시 그러하다는 반증이다.

“황자님꼐서 이리 계속 제 곁에 계시는 것. 그리하여 저분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쌓인다면, 황자님. 저분은 거침없이 올렸던 손을 내릴 것이며, 그 순간 수백의 화살이 날라와 당신에게 꽂힐 겁니다.”

그녀의 말에 데릭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거짓이면서도 진실이었으니까.

“제가 지금 여기서 카이로스의 프래카가 얼마나 대단한지 황자님께 설명드려야 할까요.”

그럴 리가.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불과 한 달 전에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

데릭은 에단의 보좌진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버리를 바라보았다.

침착하기로 유명한 버리가 저리 당황하는 걸 보니, 버리 역시 무언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데릭은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프래카에게 포위당할 것도. 에단 황제가 아주 많이 화낼 거라는 것도 전부 예상햇던 일.

그러나 그의 예상대로라면 좀 더, 로엘이 곁에 있어야 한다. 그녀는 아주 괜찮은 인질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그의 추억을 멋대로 꺼내 놓고 그의 마음을 멋대로 흔들어 놓는 여인이었으므로.

“저 모든 화살은 정확히 저를 비껴가 당신을 향할 겁니다. 화살 한두 개는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저 많은 화살 전부를 막을 수는 없어요. 이대로, 이 머나먼 적국에서, 이리 어이없이 죽어 버릴 겁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차치해야 하나 보다.

데릭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물러서야 할 거 같다.

“황자님. 저를 놔주세요.”

그렇게 그녀를 잡은 손을 이리도 빨리 놓아야만 했다.

로엘을 붙잡았던 손이 스르륵 내려가자, 그녀는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냉담하기도 한 뒷모습으로 그에게서 성큼성큼 기다렸다는 듯이 멀어졌다.

“테바로스. 무장해제 해.”

그리고 그와 동시에 데릭의 목소리가 드디어 카이로스의 황궁 내에 울렸다.

그 명령은 또 한 번 모든 카이로스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황자님……!”

뒤도 안 돌아보던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창백한 얼굴로 돌아보게 만들 만큼.

아. 역시나 놓치기엔 너무도 아까운 여인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저 가는 손목을 잡고 도망이라도 갈 텐데.

“테바로스의 황제로서 카이로스의 황제와의 독대를 청한다.”

그러기엔, 데릭은 너무도 테바로스를 사랑하는, 그렇게 테바로스만을 위하는 테바로스의 황제인가 보다.

***

“제 잘못입니다. 제가 생각이 너무 짧았습니다.”

바로 수아가 무릎을 꿇었다. 에단 앞에 고개를 숙이는 그녀는 마치 로엘를 지키려는 듯 로엘이 무엇을 하기도 전에 에단에게 용서를 구했다.

“제가 먼저 제안드렸고, 제가 나서서 폐하를 설득했습니다. 로엘 마마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십니다.”

그런 수아를 바라보는 에단의 눈은 당연히 차디찼다.

루카스마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정이니 지금 그 분위기를 더 설명해 무엇하랴.

누구라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다간 사달이 나고야 말 것 같아, 수아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무리 로엘 님에 대한 저분의 마음이 대단하다 할지언정, 저분이 에단 카이로스가 아닌 것은 아니다. 저 심사가 어떻게 뒤틀려 누굴 치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반항할 수 없다. 그래서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로엘의 목을 꺾어 버릴 것 같은, 살기 등등한 그의 모습이.

“제발 용서해 주세요, 폐하.”

“그만하세요, 수아 님.”

그런데, 정작 그 눈빛을 하게 만든 주인공께서는 여기 그 누구보다도 태연했다.

로엘은 자연히 수아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불안에 흔들리는 수아의 눈동자에도 그녀는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로 수아를 안심시켰다.

“베티. 수아 님을 데려가 주세요. 오늘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우선은 앞뒤 안 가리고 용서부터 비는 수아를 달래고, 자리를 피신시켰다. 그러고는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테바로스의 황제께서는 카이로스에 잠입하셨고, 저를 기다리셨으며, 저는 어리석게도 그분의 인질이 되어 이 상황이 된 것입니다. 더 더할 말도, 특별히 덜한 말도 없습니다. 책임을 지라시면 질 것이며, 벌하시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떨리지 않는 목소리. 고개를 숙이지 않고 허리를 꼿꼿히 핀 채로 당당하게 에단을 직시하는 태도.

“잠시 자리를 피해 주세요. 저는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의 입이 단번에 다물어질 밖에.

이반은 너무도 로엘다운 정면돌파에 깊은 한숨을 삼켰다.

당장 고개를 조아린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임에도, 지금 자신의 형제가 어떤 상태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들 나가죠. 이건 저희가 끼어들 일이 아닌 듯한데.”

그래서 루카스가 먼저 운을 띄웠다. 이럴 때는 또 눈치가 세상에서 제일 빠른 그라서, 그는 제일 먼저 방을 나섰다. 그러니 자연히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아론도 마지못해 자리를 뜨고 이반 역시 그녀의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스르륵- 느릿하게 문이 닫히고 다시금 둘만의 시간이 돌아왔다.

지독한 침묵이 꽤나 오래 이어졌다.

“설명, 안 하겠습니다.”

에단은 자리에 앉았다. 높은 단상의 그를 올려다보며 로엘은 저절로 긴장하는 자신의 몸을 애써 숨겼다.

이런 느낌이구나.

황제 에단이 신하를 내려 보는 눈빛이란 게.

“더 이상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잘못했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것만 같다.

바로 살려 달라 애원해야만 할 것 같다.

그 정도로 소름 끼치게 무서운 눈이다. 지금 저 아름다운 황금의 눈은.

그래서 로엘은 마음이 아팠다.

어쩌다 그가 자신을 이리 보게 만들었을까 싶어서.

“그러시겠지. 잘나신 나의 비께서는.”

드디어 에단의 목소리가 울렸다. 낮게 울리는 그의 말에는 자조적인 한숨이 섞였다.

로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려움이 점점 더 커져 갔다.

“이번에도 너는 아무것도 숨긴 것이 없겠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겠지. 이번에도 그게 최선이었다고, 나에게 이해를 구하겠지.”

당당해지려던 그녀의 마음이 바로 무너져 내렸다.

불같이 화낼 줄 알았건만, 그는 오히려 덤덤히 그녀를 마주했다.

그래서 더더욱 무서워졌다.

“폐하, 저는…….”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런 너의 말을 듣겠지. 마치, 이반 때처럼.”

에단이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올 때마다, 로엘의 심장이 쿵쿵쿵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이렇게 저 사람이 무서웠던 적이 있었나.

로엘은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에단은 그녀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까부터 거슬렸다. 손목 안쪽의 생채기.

데릭이 남긴 흔적이다.

“그런데 어쩌나, 아카시스. 나는 이번에는 이해할 마음이 없는데.”

그는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놓아 버렸다. 그러자 툭 하고 힘없이 그녀의 손이 떨어지고,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에단.”

로엘은 다급히 그의 손목을 잡았다. 어찌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잡아 버리고 말았다.

그 다급한 손길에, 그 불안한 눈에 에단 역시 잠시 멈췄다.

조금만 건드려도 저 큰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겠지.

이 상황에서도 그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놔.”

“에단. 저는…….”

이봐. 이렇게 멋대로 울어 버릴 줄 알았다. 사람 마음도 모르면서.

뚝뚝 쉬지 않고 흐르는 눈물에 그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정말 자신더러 어쩌라는 건지.

“울지 마.”

어쩔 수 없이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덮었다. 눈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그녀의 눈에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에단은 한숨을 삼켰다.

이리 조금만 차갑게 대해도, 어린아이처럼 울 거면서.

“명령이야. 그쳐.”

늘 그를 먼저 안아 주고, 곁에 있어 줄 거라 속삭이는 그녀지만 그는 알고 있다.

자신만큼이나 이 여자가 지독히 외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만큼이나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살았다는 것을.

그래서 더 이리 불안해하는 거다.

혹여나 그가 그녀를 떠날까 봐.

“지금 울고 싶은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마치 그가 그런 것처럼.

그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흐르는 그녀의 눈가를 애써 닦아 주더니, 이만 그를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놓게 했다.

“그러니 오늘 밤은 안 볼 거야. 밤새 나만 생각해. 그게 벌이야.”

벌이라고 하면서, 끝에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주는 그였다. 그대로 지나쳐 버리는 그를 그녀는 다시 잡지 못했다. 울지 말라 그랬는데 멋대로 눈물이 흘러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건 늘 하고 있어요.”

당신이 찾아오지 않는 밤마다. 곁에 없는 매 순간.

하루도 빠짐없이.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그렇게 당신만을 생각해요.

라는 이 마음이 어째서 전해지지 않는 걸까.

“당신이 미워.”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이리 그가 싫어하는 유형의 그 뻔하디뻔한 약한 여인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지, 로엘은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서 화가 났다.

“정말 미워.”

아무도 없는, 그 넓고 넓은 방 안에 홀로 남아 로엘은 한동안 숨을 죽였다.

그저 상황을 이렇게 끌고 와 버린, 나약해진 자신을 탓할 뿐이었다.

***

“다행히 포박은 안 당했네요.”

“그러게.”

“지금 그 말이 나오십니까!!”

로엘이 에단의 곁으로 가자, 에단은 그대로 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이상 데릭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 데릭의 입장에서는 아주 많이 굴욕적인 반응이었다.

“폐하. 정말! 제가 제 명에 죽질 못하겠습니다!!”

차라리 불같이 화내며 포박하라 했으면 이보다는 기분이 나았을 것을.

데릭은 환히 불이 켜진 카이로스 도성을 내려다보며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보란 듯,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대로 뒤돌아섰다. 단 한 번도 눈을 돌리지 않은, 그 잘난 황금의 황제께서는 지금 어떤 기분이시려나.

“나만큼은 화나 있어야 조금 덜 억울할 거 같은데 말이지.”

“폐하!”

버리는 진짜 욕이 절로 나오는 것을 꾹 참고 또 참았다. 데릭 황제가 로엘 마마를 붙잡고 황궁 앞에 나타났다는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정말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그런 기분이었다.

아니, 지금 이곳 이 상황에서 데릭 황제의 이름이 왜 나오냔 말이다.

“이러실 거면 적어도 저에게 조금은 언질을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야 제가 어떻게 대비라도 할 것 아닙니까!”

“내가 말했으면 네가 퍽이나 그러라고 했을 거고?”

“당연히 목숨을 걸고 막아섰겠지요. 지금도 그러지 못한 것을 엄청나게 후회 중이고요.”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지. 어차피 난 하고 싶은 대로 할 거고, 너는 괜한 힘만 뺄 테니. 그리고,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할 말 못 했을 거 아냐? 뒷일을 감당할 생각 하느라.”

“하아. 그야 당연히 이런 미친 짓을 하시는데 제정신일 수 있겠습니까!”

황제고 뭐고 동생이라면 진짜 딱 한 대만 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데릭은 자신의 걱정에 10년은 늙은 것 같은 버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 충분히 설명했잖아. 나도 많은 고민을 했고, 그 고민한 결과가 이거였어. 그래야. 적어도 우리가 목표했던 것의 반은 얻어 올 수 있을 테니까.”

버리는 깊은 한숨을 또 한 번 내쉬었다. 저리 쉽게 미안하다고 하시니 할 말이 없어졌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버리는 데릭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저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결국엔 테바로스를 위한 일.

그렇다면 반대할 것도 없으면 화낼 것도 없다.

“에단 황제는 절대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아. 우리가 열을 제시하면 백을 요구할 자.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열을 걸고 백을 내보여야지. 그래야 제대로 된 협상의 시작이라도 할 수 있어.”

그저 믿고 따를 뿐.

버리는 너무도 정확한 데릭의 판단에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버리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 황제를 데리고 오라는 에단의 속내를 어쩌면 데릭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테바로스의 버리 한스. 테바로스의 황제 폐하를 따릅니다.”

데릭은 어김없이 나오는 데릭의 감동 같은 충성 인사에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호화롭기 그지 없는 귀빈실로 안내받은 터라 방이 넓기도 했다. 데릭은 발코니에 기대 이번에는 그 눈이 아프도록 화려한 방을 보았다.

테바로스에게는 엄청난 사치가 카이로스의 황실에겐 사치가 아닌 거다.

참. 돈이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이 귀빈실에 묵었을 많은 황제들이 기 죽고 나갔겠지.

“협상은 이제 시작이야.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고 간다. 그것이 테바로스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이 목숨. 몇 번이라도 걸어 주겠어.”

버리는 목숨은 신하가 거는 거지 황제가 거는 게 아니라고 또 한 번 잔소리를 하려다 말았다. 말을 한다고 들을 위인도 아니신 데다, 저 결의에 가득 찬 눈을 보아하건대 데릭이 어떠한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지 어렴풋이 알 만했다.

잠시라도 불같이 화냈던 자신이 죄송스러워질 따름이다.

“그 목숨, 함께 걸겠습니다. 폐하.”

“야. 둘 중 하나는 살아남아야지. 그래야 내 나라가 살지.”

“저는 제 생전 폐하가 돌아가시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못 보겠으니, 둘 중 하나가 죽는다면 그건 무조건 접니다. 인간적으로 그건 양보합시다. 진짜.”

“너 너무 맞먹는다?”

“침소, 준비시킬까요?”

능글맞는 게 점점 더 자신을 닮아 가는 버리에게 데릭은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정말 백 번이라도 죽어 줄 신하들이 곁에 있으니 데릭 역시 이리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거다.

“이 황금의 나라에서 나도 한번 호사를 누려 볼까.”

데릭은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선, 들어오는 찬 밤바람을 맞았다.

다사다난했고 요란스러운 하루가 또다시 지나가고 있었다.

이 넓고 넓은 성 어딘가에 있을, 붉은 머리의 소녀를 생각하며 데릭은 어쩔 수 없이 미소 지었다.

마지막, 결국 그녀는 그를 돌아보았다.

“……네가 계속 들게 하는 거야.”

참고 또 참고 있는, 그런 못된 마음을.

내일 또다시 시작될, 고되고 힘든 하루를 위해 데릭은 이만 안으로 들어섰다.

카이로스에서 맞는 첫 밤이었다.

***

“상대해 줘?”

“아니. 지금 누구라도 앞에 있으면 죽일 거 같아.”

“그 정도라면 상대해 줘야겠네.”

만월의 밤. 청명한 밤 하늘 아래, 달빛이 아주 밝았다.

넓고 푸르른 그의 후원에서 오랜만에 주인께서 검을 휘두르고 계셨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고 왔는지, 그와 참 많이 닮은, 또 한 명의 황금의 사내가 기꺼이 자신의 형제를 위해 검을 들었다.

챙! 소리가 청량하게 후원을 울리고, 잠들어 있던 새들의 밤을 깨웠다.

“와. 빈말이 아니네. 나 진짜 죽는 거 아냐?”

“그러니 똑바로 해.”

에단은 망설임 없이 바로 일격을 가했다. 이미 충분히 똑바로, 진지하게 하고 있단 말을 할 틈조차 그는 이반에게 주지 않았다. 몰아치고, 또 몰아치고. 그의 공격 세례에 이반은 막고 피하기 급급했다.

“워워. 형제. 방금 건 진짜 위험했어.”

“알아서 피해.”

챙!

쉼 없이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미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격한 움직임에 따라 튕겼고, 두 사람의 황금 머리 역시 바람 없는 후원에서도 쉬지 않고 흩날렸다.

잠시 에단의 말을 들어주고 기분을 풀어 주려 온 이반은 갑작스러운 진검승부에 괜한 승부욕이 올라왔다.

“형제. 이건 내가 생각하던 그림이 아닌데. 이러면, 주객전도라고……!”

열심히 방어만 하던 이반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맞받아쳤다. 이반의 움직임이 확실히 달라지자, 아주 얼핏 에단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반이 달라진 만큼, 에단도 더 즐길 수 있을 테니.

“너도 알잖아. 네아 잘못이 아니라는 거. 늘 그렇듯, 그 여자는 가만히 있었을 뿐이야.”

그 주변이 평생을 못살게 굴 뿐.

에단은 이반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걸 모르는 게 아니지만, 반복되는 상황에 짜증이 올라왔다.

그 작은 체구에 무슨 역경이 그리 많은지, 잠시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오늘 역시 그녀에겐 잘못이 없다는 것. 그녀가 데릭과 처음부터 내통한 것도 아니었으며, 데릭 테바로스가 마음먹은 이상, 다른 피해 없이 그 정도로 마무리된 것이 최선이었다는 것. 에단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다른 남자의 곁에서 다른 남자의 흔적을 달고 온 그녀를 보는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언제까지 내가 참아야 하지.”

“윽……!”

챙! 또다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번만큼은 이반도 미처 제대로 막지 못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겨우 중심을 잡은 그 순간 에단의 매서운 검이 이반의 검을 튕겼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그의 검이 이반의 목 바로 앞에 겨눠졌다.

“죽어 버렸네.”

이반은 자조적인 한숨과 함께 양손을 들며 항복의 의사를 표했다. 잠시였지만 확실히 느껴 버린 살기에 이반은 순간 숨을 멈췄다. 그 정도로 지금의 에단은 전혀 제어가 되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계속 참고 있는 거야.”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에단은 가볍게 검을 거두어 들며 말했다.

참고 있다는 그 말이 너무도 무겁게 울려 이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반이 진지했던 만큼, 에단 역시 진지했기에 에단의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작게 숨을 몰아쉬는 그를 보며, 이반은 더 이상의 말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라도, 이 밤에 형제와 대적해 준 것으로 그의 역할은 다했다. 더 이상은 이반에게도 월권이다.

“……난 언제나 네 편이야.”

“상당히 거짓말로 들리는데.”

“진심이라고, 형제.”

에단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이반은 자신의 역할이 고작 검을 맞대는 것뿐이라 생각하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에단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말하지 않아도 이리 전해지는 것을.

“내일 네 역할이 제일 커. 그러니 가서 자.”

“예. 폐하.”

이반은 금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디 나의 형제께서도 평안한 밤 되시길 바라옵니다.”

그 칼 같으면서도 애정 넘치는 밤 인사에 에단은 그저 미소로 화답했다.

달빛이 환하게 빛나는 만월의 밤.

참 많이도 닮은, 황금빛 두 머리카락이 달빛에 아름답게 빛났다.

***

“안 온다고 했던 거 같은데.”

불 하나 켜지 않는 어두운 방. 그녀의 붉은 머리가 창가의 달빛에 비쳤다. 에단의 목소리가 낮게 그녀의 방에 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진짜 안 오셨으면,”

“그랬으면?”

“쳐들어갔을 거예요.”

고작 몇 시간 지났는데, 이리 애절하게 반기는 건지.

에단은 자신에게 손을 뻗는 그녀를 품에 순순히 안아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팔이 여느 때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잘못했어요.”

그리고 그의 귓가에 용서를 빌었다. 그녀의 잘못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제일 잘 알기에, 불안에 떨며 먼저 나오는 그 용서의 말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화가 났던 것도, 그녀에게 실망했던 것도, 지켰던 것도 다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에게 이런 불안감을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도 잘못한 거 없어.”

그저 다른 남자가 너와 엮이는 게 싫었을 뿐인데.

그 속 좁은 마음을 숨기고자, 조금 못되게 굴었을 뿐인데.

아무래도 그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나 보다.

에단은 작고도 여린 그녀의 몸을 꼭 안아 주었다.

“미안해. 내가 지나쳤어.”

그 한마디에 로엘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억울했던 모든 마음이 단번에 사르르 녹았다.

“나 말고 다른 남자가 너에 대해 아는 게 싫어.”

에단은 살며시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그녀와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끝까지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던, 참 못난 마음.

“내가 모르는 너의 생일을 다른 남자가 먼저 챙겨 주는 것도 싫어.”

그 못난 마음을 그는 기어코 꺼내 놓고야 말았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본심은 쉬지 않고, 숨기지 않고 술술 이어졌다.

“나 아닌 다른 이가 너를 부르는 것도, 너무 싫어.”

그 못난 마음들이 곧 사랑임을. 그 유치하고도 낯부끄러운 질투와 독점욕이 너무도 큰 사랑임을. 이 남자는 정말로 몰라서 이리 고백을 하는 걸까.

로엘은 너무도 진심 어린 그 사랑 고백에 뺨이 뜨거워졌다.

“할 수만 있다면, 너를 기억하는 모든 남자들의 머릿속을 지워 버리고 싶어.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못하게. 아무도 너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게.”

그저 눈앞의 이 아름다운 남자가 너무도 사랑스러울 뿐.

로엘은 환한 미소와 함께 그의 양 볼을 감싸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러자 감겼던 그의 눈이 스르륵 다시금 떠졌다. 그리고 그 황금의 눈 가득히 그녀가 찼다.

“그러면 네가 나에게서 도망쳐 버릴까.”

조금 풀이 죽은 그 눈에 오히려 그녀의 미소가 진해졌다.

“아니요. 더 옆에 꼭 붙어야겠지요.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다 알려 주어야 하니까.”

그녀는 그의 목을 안은 손에 좀 더 힘을 실어 그를 당겼다. 그리고 살짝 상체를 들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생일은 한 해가 저무는 겨울 12월 31일이에요. 월계수의 떡잎이 나는 날이라 알려지죠. 내 어머니는 그 월계수를 아버지께 선물을 받으며, 저를 처음 안았어요. 그래서 제 이름이 ‘로엘(Laurel)’이에요.”

나긋나긋한 목소리. 달콤한 향기. 따뜻한 체온.

그리고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녀의 미소.

“에단. 나의 황제 폐하. 이건 내 부모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제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거든요.”

그는 결국 웃고 말았다. 그의 마음을 풀어 주는 법을, 이 영악한 여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에단은 자연히 그녀의 옆에 몸을 뉘였다. 그리고 옆으로 돌아 그녀와 마주 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발갛게 홍조를 드리우며, 그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또.”

“저는 흰색을 좋아해요. 눈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또.”

“그런데 바뀌었지요. 나는 이제, 당신의 색을 가장 좋아해요.”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배시시 웃는 그녀를 따라, 그 역시 그녀의 부드러운 붉은 머리칼을 쓸었다. 마치 물처럼 그의 손가락을 간지럽히며 스르륵 빠져나가는 그녀의 머리칼을 달빛에 비추어 보며, 그도 입을 열었다.

“나는 네 붉은 머리칼이 좋아. 처음 베일을 쓰고 있었던 그 처음 만남부터, 나는 네 붉은색에 온 시선을 뺏겼지.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아주 마음에 들었거든. 네 모든 색이.”

조금은 부끄러운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고마운 말이었다.

옅은 붉은색의 머리칼은 어린 날 그녀에게 꽤나 스트레스였으니. 에리카가 지독하게도 그것 가지고 그녀를 못살게 굴기도 했지만, 아버지와도, 어머니와도 닮지 않은 머리 색이 괜히 그녀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밤 이후. 그 마음은 확실히 없어질 것 같다.

그의 한마디에 이리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보면.

“계속 말해 주세요.”

에단은 자신에게 좀 더 바짝 다가와 안기는, 작은 고양이 같은 그녀를 좀 더 꼭 껴안았다. 그녀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한 그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이었다.

“나는 나에게 안길 때 보여 주는 네 표정이 좋아.”

“아…….”

“그래. 이 부끄러워하는 표정.”

그의 몸이 어느새 그녀를 올라탔다. 그러자 자연히 나란했던 시선이 마주 보게 바뀌고 그녀의 뺨은 좀 더 붉어졌다.

“동시에 나를 원한다고 솔직히 말하는, 이 야한 표정.”

“그 정도는…….”

“봐. 더 붉어졌어. 지금.”

물론 그의 미소는 더 진해졌지만.

그는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면서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사과 같은 그녀의 볼에 쪽 소리 나게 키스를 남겼다.

다가온 그의 목을 다시 고쳐 안으며 그녀 역시 미소와 함께 속삭였다.

“이 세상에서 당신만 아는 표정이에요.”

“당연하지.”

“앞으로도 영원히.”

피식. 그의 입에서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정말. 화를 내려야 낼 수 없게 만드는 여자다.

“그 또한 당연하지.”

이번엔 그녀의 입술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지금까지의 아이 같았던 키스는 접어 두고 그는 깊게 그녀의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로엘 역시 그런 그를 마다하지 않고, 뜨겁고도 격렬한 키스를 받아들였다.

입맞춤이 이리 마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걸 이제껏 왜 몰랐나. 몇 번을 하고 또 하여도 이 뜨거움이 달라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더 할수록 더 좋았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이에게 잠시라도 양보할 수 있나.

이 독점욕은 당연한 거다.

“맞아요. 당연해요.”

숨을 몰아쉬는 로엘은 열기에 흐려진 눈으로 또 한 번 그에게 속삭였다.

“너무도 당연한 거예요.”

그 예쁜 말에 그의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짧은 떨어짐도 아쉽다는 듯 두 사람은 다시금 서로를 찾을 뿐, 이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그렇게 오늘 역시 두 사람이 함께하는 밤이 무르익고 있었다.

잠시라도 서로에게 서운하게 했던 마음을 달래듯. 더 뜨겁고 더 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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