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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0. 이미 놓쳐 버린 것들 (41/69)

Chapter 40. 이미 놓쳐 버린 것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하였다.

북새통의 소란스러움이 멀어지고, 지나가는 이들이 흐릿해진 채로 오로지 눈앞의 한 남자만이 보였다. 절대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

“데릭 황자님…….”

“오랜만이네. 그 호칭.”

떨리는 그녀의 부름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린 날, 그녀를 바라보던 흔들림 없던 짙은 흑색의 눈동자가 이곳, 카이로스 한가운데에서 그녀를 올곧이 바라보았다.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키는 훌쩍 커 버려 시선은 그녀보다 훨씬 올라갔고, 어깨는 넓어져 그의 그림자가 그녀를 오롯이 덮었으며, 목소리는 굵어지면서 자연히 낮게 울렸다.

짙은 눈매. 남자다운 굵은 선. 훈련으로 다져진 단단한 체격.

에토르 전쟁 때 멀리서, 얼핏 보던 것과 달리 이리 눈앞에서 직접 마주하니 로엘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소년에서 남자가 되었다.

“데리러 왔다고, 방금 전에 말했던 거 같은데.”

데릭의 손이 그녀의 두건 끝을 살짝 당기자, 높이 올렸던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노을을 등진 채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색깔이다.

“여전하네.”

그 모든 것이,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데릭은 언제나처럼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 끝 조금을 들어 가볍게 키스했다.

“인사. 안 해 줄 건가.”

특유의 짧은 미소를 짓는 데릭에게 로엘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랐다.

눈앞에 있는 분은 아무리 보아도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테바로스의 황제 폐하였으나, 그녀에게 말을 걸고 웃어 주는 이는 그녀가 알던, 테바로스의 다섯째 황자였다.

그러니 어찌해야 하는가.

“어? 저 사람 머리색이…….”

“붉은색…… 아냐?”

뒤늦게 로엘은 퍼특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지나가는 이들이 하나둘 두 사람을 힐끗거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행히 골목 귀퉁이에 앉아 있어서, 그리고 훤칠하게 커 버린 그가 그녀를 거의 다 가려 주고 있어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진즉 그녀의 정체가 탄로 났을 터다.

이러다 그녀가 데릭과 함께 있는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어떨까.

정말 상상도 하기 싫다.

“하아. 정말이지……! 이쪽으로 오세요.”

그래서 로엘이 먼저 데릭의 소매 끝을 당겼다. 작은 손으로 열심히도 자신을 당기는 그녀의 모습에 데릭은 피식 웃었다.

그를 보고 놀라는 시간이 짧기도 하여라.

언제 그랬냐는 듯, 겁도 없이 자신을 골목 깊숙한 곳으로 데려가는 로엘은 무방비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의 시선이 무서운 듯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 작기도 한 뒷모습에 데릭은 한숨을 삼켰다.

지금 그녀가 도망쳐야 할 상대는 카이로스 백성이 아닌 자신임을 이 여자는 왜 모를까.

“꺅!”

“도망치기 전에 가리기나 해.”

뭘 믿고, 자신을 버린 옛 정혼자를 이리 믿는 걸까.

데릭은 자신을 가리고 있던 망토를 그녀의 머리에 대충 던지듯 씌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크기도 한 그 망토 덕분에 로엘의 붉은 머리는 순식간에 가려졌다.

로엘은 서두르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데릭을 다시 물끄러미 보았다.

데릭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런 로엘을 마주 보았다.

“이제야 제대로 인사라는 걸 해 주는 건가.”

인적이 없는 좁은 골목. 똑똑, 어디선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함께 잠시 정적이 흘렀다.

데릭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고, 로엘의 입은 일자로 다물어졌다.

아무리 보아도 정말 데릭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카이로스엔 왜 오셨나요?”

“벌써 세 번째 묻는 거 같은데. 그래서 너를 데리러 왔다고 세 번째 대답하고 있고.”

덤덤한 그의 똑같은 대답에 로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저 말이 진심이라면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할 수 없다.

아니 상대해선, 안 된다.

“지금. 카이로스의 한복판에서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를 납치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나는 오래된 나의 정혼자를 만나러, 정혼자가 있는 곳까지 왔을 뿐이야.”

로엘의 표정이 더 굳었다.

이제야 ‘정혼자’라는 그 단어가 어떤 의미로 들리는지 알겠다.

이미 지나간 인연이라고. 어차피 깨어진 정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었다. 이리도 무거운 단어였다니.

새삼, 그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심했는지 깨달았다.

“저는 더 이상 폐하의 정혼자가 아닙니다.”

바로 바뀐 호칭, 로엘은 바로 선을 그었다.

한 걸음 다가가려는 그에게서 열 걸음 물러나는 그녀를 본 데릭은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10년 만에 이리 갑자기 만나도, 어린 시절의 그 눈과 목소리로 바로 ’황자님’이라 부르는 그녀에게 데릭은 저도 모르게 기대라는 걸 했나 보다.

그녀 역시 그만큼 그가 반가울 거라고.

“그 정혼은 이미 오래전, 테바로스에 의해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 이곳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되었지요.”

그 추억이 되살아나, 함께 그리워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데릭 폐하. 테바로스의 황자비를 만나러 오셨거든, 헛걸음하셨습니다. 더 이상 당신의 어린 정혼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녀 역시 그를 종종 생각하며 살았다 말해 줄 거라고.

그렇게 그의 손을 잡아 줄 거라고.

그렇게 멋대로 생각해 버렸나 보다.

이 차가운 눈동자에 이리 가슴이 쓰린 걸 보니.

“정말 여전하네. 거르지 않고 다 말하는 건.”

데릭은 로엘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난 만큼, 한 걸음 다가섰다.

좁은 골목. 그의 넓은 어깨는 그녀에게 조금만 다가와도 온전히 그녀를 그림자로 덮었다.

로엘은 그가 준 망토를 내리며, 다가온 데릭을 올려다보았다.

“파혼을 요구한 건 엄밀히 말하자면 테바로스야. 내가 아니라.”

구차한 변명. 데릭도 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구질구질한지.

하지만,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그 파혼. 나는 바란 적 없어.”

제이드 네아레스가 죽었다는 사실이 테바로스에 알려진 뒤, 파혼을 결정하기 까지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 아닌 이상 로엘은 그의 아버지에게 가치가 없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녀가 이리 오래 살아남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데릭 역시 ‘통보’받았다. 너의 약혼은 끝났노라고.

“할 수만 있었다면, 파혼하지 않았어. 나는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때 그는 무얼 하였는가.

형님들로부터 살아남으려 숨을 죽이고 힘을 기르고 있었다. 지지자를 모으고, 사람을 거르며 그렇게 그의 앞길을 닦았다. 그래서 파혼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저 ‘알았노라’라는 한 마디만 하였다. 그 당시 테바로스의 다섯 째 황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후회 안 해. 그때, 내가 너를 놓지 않았다면 나는 아버지의 눈 밖에 났을 테니, 나의 결정은 옳았어.”

“알아요. 그래서 원망한 적도, 서운한 적도 없어요. 나는 내 상황을 잘 알았고, 당신을 이해했으니까요.”

그녀가 이리 생각하리라는 것, 데릭은 그마저도 알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괜찮다 스스로에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로엘. 나는 그날 밤 단 한숨도 자지 못했어.”

너무도 소중한 걸 잃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니까.

“마음이 허해서. 몸이 추워서. 후회가 밀려 와서. 그런데, 되돌릴 힘도 용기도 없어서.”

데릭은 살며시 손을 들어 그녀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을 뿌리쳐야 하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도 애틋해서, 로엘은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외로운 미소. 그녀가 아는 데릭의 미소다.

“그래서 나중에 널 보게 된다면. 그럴 기회가 있다면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때, 데리러 가지 못해 미안했다고. 네 손을 놓아서, 그렇게 너를 홀로 두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로엘은 순간 울컥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정말 울어 버릴 뻔했다.

데릭과 몇 번을 보았을까. 정혼하던 그날 처음 보았고 주기적인 정기 행사 때 의례적으로 보았다. 때가 되면 보는 사람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사람.

연인이라기엔 너무 거리가 멀고, 남이라기엔 공식적인 관계가 있었으며, 친구라기엔 교류가 너무 없었다.

그런 애매한 관계. 그런 모호한 인연.

“나는 그 말을 하러 너에게 왔어.”

그게 무어라고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에 울고 싶어지는 걸까.

로엘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미 눈가에 눈물이 고였지만, 끝까지 울지 않는 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로엘은 뒤늦게 손을 올려, 어린 날처럼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잡았다.

“저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머리에서 그의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 사과, 받겠습니다.”

한 걸음. 또다시 그녀는 데릭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정면으로 그를 다시 마주하였다.

“황자님. 테바로스의 황제 폐하가 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드레스가 아닌 원피스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치마를 살짝 올리며 데릭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녀 역시, 어린 날 토르티아의 공주처럼.

“토르티아의 탑에 갇혀, 저는 폐하의 소식을 뒤늦게 들었지요. 그래서 폐하의 소식을 들었을 때 저 역시 전하고 싶었습니다. 진심으로 경하드린다고.”

그녀의 미소가 잔잔히 번졌다.

이 역시 데릭이 아는 로엘의 미소.

그를 안정시키는, 그 따뜻한 미소다.

“꿈을 이루시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그러니 이제 행복해지시라고.”

로엘이 울컥한 이유. 데릭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건 어린 날의 그들로부터 온, 지금의 자신들에 대한 위로.

너도 나도 참 많이 힘들었구나.

그런데도 이리 살아남았구나. 그러니 장하구나, 라고.

로엘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올곧고 흔들림 없는 시선.

단번에 바뀐, 그 붉은 눈에 데릭은 피식 웃어 버렸다.

아무래도, 그의 정혼자였던 토르티아의 공주님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카이로스의 아카시스. 로엘 네아레스. 테바로스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갑작스러웠고, 사과는 늦었으며. 위로는 따뜻했다.

그들의 과거 시간은. 그런 추억 여행은 딱 이 정도가 적당하다.

“내가 같이 가자고 하면, 함께 가 줄래?”

“거절합니다.”

“그래.”

뻔히 알고 있는 대답이에도, 이리 정식으로 확인받으니 느낌이 달랐다.

바로 그의 심장에 날아들어 아프게 꽂힌다고 해야 하나.

“내가 너무 늦었나 보다.”

씁쓸한 그의 자문에, 로엘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인연이 아니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나는 여기서 싫다는 너를 납치해 갈 만큼 멍청하진 않아.”

“알고 있습니다.”

고작 여자에 눈이 멀어 나라를 저버릴 위인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다.

데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서는 안 될 도박을 하려 했는데.

애석하게도 한때 그의 보물이었던 이는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카이로스의 아카시스. 나도 지금부턴, 테바로스의 황제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리고 그의 후드가 벗겨지기가 무섭게, 로엘의 표정이 굳었다.

“자.”

순식간에 달라진 분위기.

“일할 시간이다. 테바로스.”

좁고 깊은 카이로스의 골목의 그림자 속에서. 낯선 향기가 번졌다.

이 북방 특유의 모래 향.

로엘은 그제야 쿵 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카이로스의 환대부터 받아 볼까?”

자신을 둘러싼, 수십의 테바로스인들을 둘러보며 로엘은 주먹을 쥐었다.

멍청하게도, 추억에 젖어, 분위기에 휩싸여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사람은, 악랄하기로 유명한, 북방의 괴물.

테바로스의 황제, 데릭 테바로스다.

***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로엘은 자신을 둘러싼 테바로스의 자객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그녀가 데릭에게 정신이 팔려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기척을 눈치챘을 텐데, 전혀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할 만큼 하나같이 잘 훈련된 최상급의 병사들이었다.

그녀는 자연히 뒤쪽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최소한이라며 시에라가 챙겨 준 단검이 그나마 이곳을 빠져나갈 유일한 돌파구였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그런데 그 뻔한 생각을 데릭은 너무도 쉽게 저지했다.

“윽……!”

그는 단번에 그녀의 손목을 잡아, 그녀의 손끝에 닿을 뻔한 단검을 땅에 떨어트렸다.

간단한 호신술조차도 쓰지 못할 만큼 강한 악력이 그녀의 가는 손목을 아프게 움켜쥐자, 그녀의 표정이 바로 일그러졌다.

“아무리 제이드의 딸이라고 해도, 단검 하나로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야. 이들도, 그리고 나도.”

그는 덤덤히 말했다. 그런 데릭을 로엘은 매섭게 노려보았다.

5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살벌한 눈이 아니었는데.

데릭은 적대감이 가득 찬 붉은 눈에 씁쓸함을 삼켰다.

“아파요. 놔주세요.”

그런 그의 마음 따위 로엘이 알 리가 없다.

정확히 데릭과 눈을 맞추며, 명령에 가까운 말투로 그녀는 데릭에게 손을 놓아 달라 요구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 확답을 받으려다, 데릭은 말았다.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는 그녀가 제일 잘 알 테니, 쓸데없는 실랑이를 하지는 않을 터다.

그는 순순히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금세 붉어진 하얀 피부를 보며, 그는 자연스레 그녀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잠깐……!”

그리고 그녀가 어쩌기 전에, 그녀의 손목 안쪽에 입술을 올려 작은 생채기를 남겼다.

“이왕 남을 상처라면, 이편이 더 나을 테지.”

그녀는 바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한층 매서워진 눈으로 데릭을 쏘아보았다.

너무도 예상된 반응에 데릭은 피식 웃었다.

참. 못된 짓을 하고 싶게 만드는 솔직한 반응이다.

“여기는 카이로스입니다.”

“나도 알아.”

“저를 데리고 이들과 나가시면, 폐하는 한순간에 죽습니다.”

“그럴지도.”

그는 또 한 번 작은 웃음을 뱉었다.

잔뜩 날을 세운 그녀와 달리 그의 여유는 한층 더해 갔다.

그래서 더더욱 로엘은 데릭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저 의뭉스런 머릿속엔 도대체 무엇이 든 건지, 불안하고 불길했다.

“그래서 네가 필요해. 적어도 저 황금의 성에는 들어가야 하니.”

데릭이 그녀의 팔을 당기자, 그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바로 그의 품에 떨어졌다.

데릭은 그녀의 허리를 안아 좀더 바짝 그녀를 당겼다. 여전히 매섭고 살벌한 붉은 눈이 데릭을 쏘아보았지만, 그녀의 앞머리를 넘기는 그의 눈엔 웃기게도 부드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진짜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 라인을 타고 내려와 그녀의 목선을 훑어갔다.

“꽃으로 활짝 피었어.”

드러난 하얀 피부에 닿는 낯선 손길. 로엘은 저절로 몸을 긴장시켰다.

“그대로 꺾어 버리고 싶게.”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뒷목을 한 손으로 잡으며 당기자, 로엘은 최대한 버텼다.

확연히 달랐다. ‘그분’이 만지는 것과는. 이 불쾌감. 이 치욕스러움.

그녀의 두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황자님. 더 이상 저를 희롱하지 마세요.”

“필요할 때만 황자군. 너도 참 약았어.”

어쩜 이리 가늘기도 한지. 조금만 힘을 주어도 툭하고 부러질 것만 같았다.

데릭은 뼈가 다 드러나는 그녀의 어깨와 쇄골을 보며, 그녀가 참 말랐다 생각했다.

그 옛날. 어린 시절에도 그러더니만 이리 커서도 그녀는 전혀 살이 붙지 않았다. 데릭은 그게 싫었다.

같은 토르티아의 공주임에도 에리카는 전혀 그러지 않았으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놓고 차별하는 것이 뻔히 보여 그의 심기를 매우 거슬렀다. 그래서 더 기를 쓰고 테바로스에서 제일 좋은 것만 구해다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토르티아가 해 주지 않는 것들을 보란 듯이 더 좋은 것으로 해 주고 싶었으니까.

“손. 치우세요.”

그런 그의 마음을 그녀는 알까.

추억을 되짚는 그와 달리 그녀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다.

데릭은 매서운 그녀의 눈빛에도 더 바짝 그녀를 당겼다. 훅 하고 번지는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그의 코를 가득 메우고, 따끈한 그녀의 체온이 고스란히 그에게로 전해져 왔다.

그저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 채워지는 이 충만함. 그녀는 여러 의미에서 그를 흔들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주제에 가슴은 풍만하고, 허리는 가늘었으며 엉덩이는 알맞게 살이 올랐다. 이래저래 남자라면 눈길이 가는 몸매. 향기. 피부. 얼굴.

“……진짜 약았어. 너.”

이렇게 아름다워질 거면서, 이리 이 마음을 흔들 거면서 멋대로 다른 이의 여자가 되어 버리다니.

이미 놓쳐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새삼 강하게 밀려와 데릭의 속을 쓰리게 했다.

사는 게 너무도 치열해서, 그렇게 바빠서 여자를 취한 게 언제 적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의 마음을 흔든 이가 눈앞에 이 여인 말고 있기는 했던가.

단연코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이리 육체적으로도 그를 미치게 할 이 역시 눈앞의 이 여인이었나 보다. 얼마 만인가. 남자로서 심장이 쿵쿵 뛰고 열이 오르는 것이.

“이리 멋대로…….”

아름다워지다니.

쇄골을 거쳐 내려간 손이 기어코 가슴까지 내려갔다. 거침없이 움켜쥐자, 한 손에 가득 차는 그 말캉한 감촉에 데릭은 숨을 삼켰다.

짜릿한 무언가가 그의 등골을 타고 내려와 그의 본성을 깨워서.

그리고 동시에 차가운 쇠붙이가 그의 목에 닿아서.

“더 하시면, 정말 죽여 버릴지 몰라요.”

언제 그의 단검을 또 이리 봐 놨는지. 데릭이 그녀에게 취하던 그 순간에도 이 잘난 여자의 이성은 아주 제대로 깨어 있었나 보다.

워낙 침범할 수 없는 사적인 영역이라, 데릭의 행위에 호위병들은 그저 숨을 죽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는데 그 와중에 로엘이 선수를 쳐 버리자 그들은 빠르게 검을 빼 들었다.

“알아. 너라면 충분히 그러하겠지.”

“잠깐……!”

데릭은 망설이지 않고, 맨손으로 그 단검의 날을 쥐었다.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자, 로엘은 바로 손을 놓았다. 피가 흐르는 그의 손을 보며 창백해지는 그녀의 반응에 데릭은 작은 실소를 뱉었다.

죽일 듯한 눈으로 죽이겠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또 이리 옛정에 못 이겨 그를 걱정하는 눈빛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너무 무방비하다.

“보지만 말고 얼른 지혈해. 너 때문이잖아.”

“……진짜 순 제멋대로.”

로엘은 잠시 망설이나 싶더니, 결국은 대충 목에 걸쳐 주었던 두건으로 그의 손을 동여맸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상처가 깊어 쉽게 지혈되지 않았다.

“아야. 아파.”

“더 아파야 돼요.”

그런 출혈을 어떻게 해서든 막겠다는 듯, 그녀는 세게 동여맸다.

테바로스의 황자로서 목숨이 날아갈 뻔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랴. 이깟 손의 상처 따위 그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는데,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주는 이가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퍽 좋았다.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두 번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뭘 말 하는 거야.”

“전부 다요.”

야무지게 매듭을 지으며, 그녀는 이만 다시 데릭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놀라고 걱정하던 눈은 온데간데없고, 얼음장 같은 차가운 눈만이 돌아왔다.

“이리 저를 찾아오시는 것도, 그리 저를 희롱하시는 것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요.”

단검을 망설임 없이 쥐는 데릭을 보며 로엘은 에단과의 첫날밤을 보낸 후, 촛대로 손을 긋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상처에 무덤덤한 모습이 어쩜 이리 똑같은지.

그 반응 자체가 어떤 유년시절을 보내왔는지 반증하는 거였다.

아직 에단과 로엘의 마음이 서로에게 향하지 않았던 때였음에도, 그가 그렇게 화냈던 이유를 로엘은 이제야 알겠다.

“그렇게 무섭게 말해 봤자, 나를 걱정하는 걸로밖에 안 들려.”

데릭은 그가 잘 여며 준 손을 두어 번 접었다 폈다 해 보았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적어도 지혈은 된 것 같았다.

데릭은 정확히 그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과하지 않게.

또다시 세게 당겼다면 이번만큼은 제대로 명치라도 가격할 생각이었는데, 그 약한 힘에 로엘은 순순히 그의 곁에 섰다.

“걱정이 아니라 경고예요.”

“그래, 그래. 경고든, 걱정이든. 일단은 그만 여길 나가자. 밖이 시끄러워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너를 찾는 거 같군.”

데릭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단단하게 어깨를 잡는, 그 다친 손을 슬쩍 보더니 로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코, 그녀와 함께 이 골목을 벗어나려나 보다.

“……꼭 이리하셔야겠어요? 공식적으로 카이로스에 방문하시면 되잖아요.”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께서 직접 성문을 열어 주실 테니, 이보다 더 공식적일 수 없지.”

“정말 저는 하나도 생각해 주지 않으시는군요.”

“지금 테바로스의 황제에게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를 배려하란 말인가? 그건 과한 욕심인데. 네가 토르티아의 공주라면 모를까.”

아주 마음에 들지 않은지 로엘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이미 대형을 맞추어 사방으로 그들을 호위하는 테바로스의 군대와 함께, 드디어 로엘이 그늘진 골목을 벗어나 대로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한동안 보이지 않는 그녀 때문에 키로스들이 바쁘게 그녀를 찾고 있었다.

“마마……!”

어찌 키로스뿐일까. 켈트가의 사병들도, 동원된 황군들도 모두 다 등장한 그녀와 그녀의 동행들 모습에 바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럴 줄 알았어.”

로엘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반면 데릭의 미소는 한층 더 진해졌다.

언제 이리 궁병들을 많이들 배치했는지. 건물 위로 빼곡히 활들이 그들을 겨누었다.

물론 그에 맞추어 그의 병사들 역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로엘. 생각보다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는가 보네. 아주 난리가 났어.”

“……정말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하세요.”

순식간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상황에 백성들은 영문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이미 자선 행사는 끝물이라 사람들은 거의 다 돌아가고 황실의 사람들이 그 뒷정리를 하던 와중이었다. 그 때서야 로엘이 사라진 것을 파악한 이들이 그녀를 조용히 찾아 나선 거였는데, 이런 소란이라니.

게다가 데릭에게 두건을 주는 바람에 훤히 드러난 붉은 머리가 겨우 숨기고 있던 그녀의 정체마저 모두에게 고스란히 드러냈다.

“프란시아님이야……!”

“프란시아님이 괴한들에게 인질로 잡히셨어!!”

자연히, 소란은 삽시간에 번졌다. 웅성웅성. 그녀를 놔주라고 소리를 지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멀리서 울음을 터트리는 이들도 있었다.

테바로스에게 돌을 던지고 달려들려는 이들을 황군이 겨우 저지하고, 그들은 이 팽팽한 대치 상태를 유지하면서 신중하게 접근했다.

“괴한은 어서 아카시스님을 풀어 주고, 무릎을 꿇으라!”

제일 먼저 나선 것은 수아였다. 이곳에서 로엘과 함께 가장 높은 신분이기에, 당당히 수아가 그 앞에 나섰다.

로엘을 인질로 잡은 만큼 무서울 법도 한데, 망설임 없이 나서는 수아의 모습에 로엘은 이 와중에도 감동을 받았다.

이미 카이로스의 정보는 꿰고 있는 데릭은 고운 자태로 겁도 없이 나서는 수아의 모습에 작은 조소를 뱉었다.

“왠지, 네 영향을 받은 거 같은 눈인데.”

“……이 나라의 아카시스 수아 님이십니다. 예를 갖추세요.”

“보시다시피 내가 예를 갖출 처지가 아니라.”

데릭의 손짓 하나에 앞을 막아서던 호위병이 양쪽으로 길을 텄다. 그러자 수아의 모습이 좀 더 명확히 시야에 들어왔다.

데릭은 여전히 한쪽 손으로 로엘의 어깨를 단단히 잡은 채 정확히 수아와 눈을 맞추었다.

“나는 테바로스의 황제. 데릭 테바로스. 카이로스 황실의 여인은 타국의 황제에게 예를 갖추라.”

순간 수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쩌렁쩌렁한 데릭의 목소리에 숨을 죽이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충분히 그럴 만한, 귀를 의심할 내용.

다른 누구도 아닌, 테바로스의 황제가 이곳 카이로스의 수도에 당당히 서 있다니.

그 누가 놀라지 않을까.

“로엘 님…….”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로엘을 바라보는 수아에게 로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말 일을 너무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맞습니다. 길을 터 주세요, 수아 님.”

불안과 두려움에 수아의 눈이 심히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로엘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이가 테바로스의 황제라니. 수아는 이 갑작스러운 사태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몰랐다.

이대로 길을 터 저 극악무도한 자를 카이로스의 성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이대로 버티고 서 있으면서 폐하의 결정을 기다리는 게 맞는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만일 그녀가 뜸을 들이다 로엘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건 또 어찌할까.

“수아 님.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길을 터 주세요. 이건 아무래도 황실에 가서 해결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런 수아를 달래는 것은 역시나 로엘의 몫이었다.

로엘은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정확히 수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와중에도 작은 미소마저 지어 보이며 수아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는 로엘에게 수아는 울컥했다.

조금 성장한 줄 알았더만, 그녀의 비해서는 역시나 아직 멀고도 멀었나 보다.

“황군과 켈트군은 길을 터……!”

결국 길을 트라는 수아의 명령이 채 내려지기 전에, 어디선가 날아온 활이 수아의 옆을 스쳐 지나 정확히 데릭을 향했다. 반사적으로 활을 쳐 낸 데릭은 그 활을 쏜 주인을 정확히 응시했다.

저 먼 곳의 말 위에서 정확히 그들을 노려보는 이.

“……이반.”

또 한 명의 황금의 머리. 이 나라의 황제의 유일한 형제, 황자 이반이다.

“이름, 함부로 불러도 되나.”

“폐하께서 모르는 인연이 있나 보죠.”

데릭은 물끄러미 로엘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로엘의 시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 달려오는 이반을 바라만 보았다. 눈썹 한 번을 찡그리지 않는 그 올곧은 시선 속에는 뭔가 남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저 시동생을 바라보기에는 과하나 연인이기에는 덤덤한 그 중간 어디쯤이랄까.

무엇이 되었든, 그녀가 ‘이름’을 부를 만한 사이인 건 확실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데릭은 심기가 불편했다.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네. 저 황자.”

처음, 에토르에 등장할 때부터 엄한 이의 검을 따라 하여 기분이 나빴는데 이제는 로엘과의 인연이라. 이리 가까이 달려와 죽일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보는 순간 그 불쾌함은 더했다.

로엘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이반의 감정이 어떤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별로 이러고 싶진 않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미리 사과하지.”

“어련하시겠어요.”

그녀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데릭은 피식 웃었다. 그가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눌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다.

자연히 이반의 표정은 더욱 굳었다.

“구면이군.”

그에 비해 데릭의 입가엔 오히려 미소가 번졌다.

“칼 내려.”

로엘의 한숨은 더더욱 깊어만 갔고.

“이반. 일단은…….”

“칼, 내려. 데릭 테바로스.”

이반은 로엘의 말에도 아랑곳 않았다. 당장이라도 데릭에게 달려들어 목을 내려칠 것만 같은 살기 가득한 눈에 로엘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카이로스는 황자가 황제와 맞먹는 거였나. 지금 처음 알았네.”

“테바로스는 예의가 넘쳐 타국의 비를 인질로 삼나 보군.”

이반이라면 테바로스의 최정예 군일지라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칼 내려. 다 죽여 버리기 전에.”

그러다가 어쩌면 데릭마저 죽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그녀의 안전이 보장된 경우에 한정이다.

“그러다 로엘이 먼저 죽겠지.”

만일 그녀가 조금이라도 피를 본다면, 이반은 망설임 없이 검을 버릴 자다. 그래서 로엘은 더 골치가 아팠다.

자신에게 상처 하나 못 낼 거면서 죽이겠다고 하는 데릭이나, 다 상대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 때문에 꿈쩍도 못 하는 이반이나.

이래저래, 고집만 센 두 사람이다.

“네 신하가 어찌 되어도 상관 없나 보군.”

“지금 일개 신하와 이 나라의 아카시스를 거래하자는 건가? 너무 계산이 맞지 않는 협상인데.”

“그러시겠지. 일개 신하. 벌써 내 주군의 손에 죽어 버렸을지 모르니.”

이반의 말에 잠깐이지만 분명 데릭은 움찔했다. 바로 옆에 있는 로엘이 느낄 정도로.

말로만 일개 신하라고 했을 뿐 버리의 존재가 데릭에게 어떤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다.

그녀마저도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사태에 대해 전해 들었을 그가 버리 한스를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데, 데릭 입장에서야 당연히 걱정할 수밖에 없다.

미소 짓던 좀 전과는 달리 얼굴을 굳힌 데릭의 옆모습을 보며 로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 어렵게도 사시는 분이다.

“황자님. 어차피 데릭 황제는 저를 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일단은 황궁으로 가요.”

“네아. 너……!”

“어서요.”

말고삐를 잡은 이반의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칼이 목에 겨누어져 있는데 당당하기도 하지.

너무도 당연하게 데릭이 자신을 해치지 못할 거라 확신하는 그녀에게 이반도 그리고 데릭도 할 말을 잃었다.

“너무 자신하시는 거 아닌가.”

“충분히 주목받으셨으니 이제 그만하죠. 슬슬 짜증 나려 하는데.”

짜증이야 아까부터 났고 화는 점점 더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막상 이리 이반까지 달려오는 걸 보니, 뒤늦게 너무도 ‘그’의 반응이 걱정되었다.

뭐라 설명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머리가 너무도 아파 왔다.

“그만 카이로스의 황궁으로 가시죠. 이반 전하.”

그러니 더 이상 여기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차피 맞을 매. 피하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맞는 편이 낫다.

“……아카시스님을 호위하라.”

“예. 황자 전하.”

결국 이반은 로엘의 말을 따랐다. 서슬 퍼런 데릭의 검이 여전히 로엘을 향하고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의사가 너무도 명확했다. 그리고 그 생각마저 정확히 읽혔다.

그녀는 더 이상 백성들 앞에서 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거였다.

그러니 그 말을 들을밖에.

“네 도움. 이렇게 필요했던 거야.”

마지못해도 칼같이 줄과 열을 맞추며 일자 대형으로 황궁 문 앞까지 길을 트는 황군의 모습에 데릭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카이로스의 환대. 아주 마음에 들어.”

로엘은, 그리고 이반은 그 데릭의 미소에 주먹을 꽉 쥐었다.

똑똑한 머리를 이용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비열한 이.

그들은 그러한 테바로스의 황제에게 아주 톡톡히 이용당한 셈이다.

“네 환대 역시 아주 마음에 들었고.”

그녀의 어깨에 얹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데릭의 품 안에서 로엘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테바로스가 무얼 들고 왔든 적어도 지금의 마음 같아서는 화친 따위, 그녀가 들어가 뒤엎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니 내일도 잘 부탁해. 로엘.”

저놈의 ‘로엘’.

당장이라도 함부로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런 사소한 일 따위로 싸울 상황도 아니었고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바꿀 그도 아니었으니 그마저도 말았다.

그저 얼른 이 거지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길.

로엘은 새삼 멀게도 느껴지는 황궁으로 걸어 들어가며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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