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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9. 나의 마음. 당신의 생각 (40/69)

Chapter 39. 나의 마음. 당신의 생각

그는 성급했고,

“으응!”

그녀는 서둘렀다.

“아. 에…… 단!”

그렇게 한시라도 빨리 서로가 하나이고 싶었다.

그가 단번에 그녀의 몸에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평소보다도 턱 하고 받혀 오는 그 가득 참에 로엘은 발끝을 치켜세웠다.

“하아. 로엘.”

그는 그 가득 참에 오히려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어떻게 이리 딱 들어맞는 걸까.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그녀를 안았지만, 매번 그녀는 기대 이상으로 그를 만족시켰다.

“로엘.”

그 정도로 너무 좋았다. 아니,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더 미칠 거 같았다

그녀의 모든 것이 그를 위해 맞춰져 가는 기분.

작고 여리던 꽃봉오리가 이리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소녀였던 그녀가 그로 인해 여자가 되어 간다.

그 순간을 함께하는 쾌감을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다.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으니.

“에단……!”

가볍게 묶었던 머리는 그의 손에 의해 풀러지고, 길고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에 흐드러졌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가는 몸이 흔들리며 다 벗기지 못한 얇은 슬립이 그녀의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열기에 흐려지는 눈. 가쁘고도 뜨거운 숨결. 그를 찾는 애타는 교성.

그를 위해 흐트러지는 이 모습은 오로지 그만이 볼 수 있다.

“아아……!”

그만이 아는, 그만이 느낄 수 있는, 그만의 여자.

“하아. 하아. 에단.”

오르락내리락. 환한 불빛 아래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이 흔들렸다. 막 뜨거운 파도가 밀려온 직후라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그는 가볍게 그런 로엘을 안아 올려 그 앞에 마주 앉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열기에 취해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붉은 눈을 마주하며,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내 거야.”

“네?”

“내 것이라고.”

“읏!”

그녀가 다시 되묻기도 전에 그는 한 번 더 깊숙이, 예고도 없이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 갑작스러운 침범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꺾었다.

“아! 잠시, 잠시만요. 에단. 너무……!”

너무 깊었다. 그리고 뜨거웠다.

이미 한차례 밀물이 들어차듯 그가 그녀의 안을 채웠는데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 안에서 더 단단하고 커지면서, 깊이 그 속을 파고들었다.

“아, 으응!!”

끝이 끝에 닿는 느낌. 온 세포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그 짜릿한 쾌감에 그녀는 눈물을 떨어트렸다. 저절로 가는 허리가 움직이며, 아플 정도로 단단해진 그의 것을 본능적으로 놓으려 들지 않았다.

“로……엘……!”

덕분에 그 역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아까부터 걸리적대던 그녀의 옷가지를 단번에 벗겨 버리며, 울며 매달리는 그녀의 입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

어디 입술뿐일까. 그는 그녀의 하얀 몸에 그의 흔적을 붉게 남겨 갔다. 유독 쇄골 근처에 아프게 표식을 남기는 그를 느끼며, 그녀는 그 자리가 정확히 목걸이가 닿았던 자리임을 깨달았다.

지금 그는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거다.

그녀가 잠시라도 데릭의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는 사실에.

“아읏!”

동시에. 경고하는 거다.

두 번의 용서는 없다고.

“에…… 응!”

그는 그녀의 가는 다리를 당기더니 한쪽 어깨에 걸친 채로, 더 깊게 그녀를 몰아세웠다.

조금의 틈이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집요하고도 사나웠다. 속살이 쓸리는 마찰음이 방안을 울리고, 그 깊고 거친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신음도 높아졌다. 그가 들어왔다 나가는 아래에서 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아! 앗! 아!”

로엘은 눈물을 떨어트리며 무게를 실어 오는 그를 꼭 안았다. 눈앞이 하얘지는 이 말도 안 되는 쾌감을 도무지 홀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 로엘……!”

그리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미 이성이라곤 멀리 날아간지라, 그는 오로지 본능에 충실했다. 힘으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조금이라도 더 그를 이리도 미치게 만드는 그녀의 따뜻한 안으로 들어가려고 움직였다. 허리 운동이 빨라질수록, 그의 커다란 손이 흔들리는 그녀의 가슴을 움켜쥘수록 그녀의 안은 요동쳤으며 그녀의 교성은 높아졌다.

“아아아!”

그렇게 또 한 번.

큰 파도가 밀물처럼 들이 닥치듯 순식간에, 그의 뜨거움이 그녀의 안을 가득 채웠다.

***

“살이 빠진 거 같아요.”

“더 먹여야겠네.”

“그 말 하는 게 아니잖아요.”

로엘은 일부러 못 알아듣는 그를 흘겼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는 체력적으로 그를 쫓아가기 힘들었다.

너무 바빠 그가 오지 못하는 날을 제외한다면, 그는 정말 밤이면 밤마다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그의 품에서 울면서 쓰러져 잠든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어떻게 된 몸이길래 저리 정력이 좋은지, 한 번으로 끝낸 적이 없다.

“정말 안 힘들어요?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하고. 얼마 자지도 못하고.”

“안 힘들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나 때문에 못 자는 거 같아서…….”

그는 피식 웃었다.

자기 때문이라니. 마치 그가 그녀를 위해서 봉사라도 하는 줄 알겠다.

“다행스럽게도 아카시스께서는 내가 만족스럽나 보네.”

“아니.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면 더 분발하란 소리인가.”

“폐하!”

진이 빠져 엎드려 있던 그녀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이런 짓궂은 농담에 일일이 반응하는 그녀가 그의 눈에는 그저 귀엽다.

그는 한쪽 손으로 머리를 기댄 채, 다른 손으로 그녀의 젖은 머리를 넘겨 주었다.

진한 미소를 지으며, 에단은 조금 멀어진 그녀를 다시 당겨 품에 안았다.

둘 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인지라, 맨살과 맨살이 닿아 적나라하게 서로가 느껴졌지만 그 두근거림조차도 따듯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맞추었다.

“너무 안 주무시니까, 진짜 걱정된다고요.”

“걱정할 거 없어. 충분히 건강하니까.”

“잠을 안 자는데 어떻게 건강해요.”

“훨씬 더 못 잤어. 네가 없을 때는. 나는 네가 와서 자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 덤덤한 대답에 로엘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뒤이어 마음이 아팠다. 그의 말이 조금의 과장도 없는 진실인 걸 너무도 잘 알아서.

금세 속상해진 그 얼굴에 그는 미소 지었다. 참 투명한 사람이다. 이 사랑스러운 여인은.

“너는 모르겠지만, 네가 처음 온 그 날. 아마 황궁의 모두가 놀랐을 거야. 내가 후궁에서 잠이 든 건, 처음이었으니까.”

“설마.”

“심지어 그날 너를 안지도 않았지.”

그의 미소가 진해졌다. 잠이 들어 버렸다는 그의 말에, 제롬을 비롯한 모두가 놀라던 표정이 생각났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제서야 자각했지만 실은 그도 많이 놀랐었다.

처음 본 여인 곁에서 자신이 너무도 무방비하게 잠들었다는 그 사실에.

“정말 한 번도 없어요? 다른 여자랑 많이 잤을 거 아냐.”

“많이 안 잤어.”

“거짓말.”

“진짜야.”

조금 투정 어린 그녀의 말에 그는 당당히도 말했다.

로엘은 그럼 몇 명이냐고. 나 말고 몇 번이나 다른 이와 몸을 맞대었냐고 물으려나 말았다.

그렇게까지 어린애처럼 유치해지고 싶지 않았다.

“한 번도 다른 이 옆에서 잠든 적 없어. 늘 손이 닿는 곳에 검을 두었지. 내가 지금 안고 있는 여자가 어느 순간 암살자로 돌변할지 모르니까.”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는 이 나라의 황제이기에 그가 무너지면 카이로스가 무너진다고 배워 왔으니까.

그래서 늘 스스로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지켜 왔다. 그게 곧 이 나라를 지키는 애국이었다.

그런데 처음 마주한 이국의 공주가 그를 잠들게 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으랴.

에단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어쩌면 처음부터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

로엘 역시 그런 에단의 손에 자신의 작은 손을 덮었다.

“운명이 아니라면, 나를 놓을 건가요.”

“아니.”

“그럼 운명이네요.”

로엘은 환히 미소 지으며, 그에게 짧은 키스를 남겼다.

그 사랑스러운 키스에 그 역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 말이 맞다. 운명이 아니면 뭐 어떠랴.

지금 이 품에 이리 그녀가 있으면 된 것을.

“에단 당신이 잠드는 동안, 세상 그 무엇으로부터도 내가 당신을 지킬게요. 그러니 마음 편히 자요. 나는 늘, 이곳. 당신의 곁에 있어요.”

이 작은 몸으로 맨날 뭘 그리 지켜 준다는 건지. 에단은 언제나 자신을 지켜 준다고 말해 주는 그녀의 말에 어김없이 웃고 말았다.

늘 자신이 해야 하는 말을 빼앗기는 기분이다만,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많이 좋았다.

세상 어느 누구가 그에게 지켜 준다는 말을 할까.

“그래. 너는 나를 지켜. 나는 너를 지킬 테니.”

“그럼 당신이 밑지는 장사인 건데.”

“어쩔 수 없지. 내가 로엘 네아레스를 사랑해 버렸으니.”

그만이 볼 수 있는 그녀의 얼굴이 있듯, 그녀만이 볼 수 있는 그의 미소가 있다.

그녀를 위해 환히 웃어 주는, 사랑이 넘치는 이 따뜻한 미소에 그녀 역시 환히 웃었다.

같은 이불 아래, 살을 맞대며 온기를 나누는 이 순간.

사랑을 속삭이는 이 아름다운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로엘은 그의 품으로 좀 더 파고들었다.

“이러면 곤란해, 아카시스. 내일 진짜 못 걸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폐하가 업고 다니셔야죠, 뭐.”

“그럼 매일 업고 다녀야겠네. 매일 재우지 말고.”

“으휴.”

그녀는 반 진심인 그의 농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끝까지 그의 허리를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실은 마음 한켠에 수아랑 무슨 이야기를 하셨냐고, 얼마나 오래 그녀와 있었냐고. 그녀가 당신의 침실에 들어갔냐고.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으나 로엘은 이 역시 말았다.

그녀가 이리 추궁하듯 묻지 않아도 어차피 알게 될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심지어 그것이 폐하를 통해서도, 수아를 통해서도 말이다.

“내가 너무 체력 좋은 분의 비가 되었네요.”

“이제 와 새삼스럽다는 듯이 말하면 조금 자존심 상하는데.”

“새삼스러울 리가 있겠어요. 폐하는 처음부터 날 안 재웠는데.”

그러니 지금은 그저, 그의 품에서, 그녀를 안고 웃는 그와 두 사람만의 대화를 하고 싶었다.

데릭도. 수아도. 테바로스도, 동맹도 없는,

그저 그와 그녀만의 일상을, 사랑을 함께 속삭였다.

***

카이로스의 성은 눈이 아프도록 화려하고 웅장했다.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은 복도에, 외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아니하는 거대한 규모, 모든 곳이 황금으로 뒤덮힌 이곳은 몇 천 년이 흘러도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버리는 사신들을 위한 별궁으로 안내받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이 황금의 제국은 절대 무너질 수 없겠구나.

“편히 쉬십시오.”

곱기도 한 시녀가 버리를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친 후 방문을 닫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가 있는 성문 전체에 버리를 감시하는 군사가 가득했다. 어쩌면, 시녀들 역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언제든 그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새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이곳 별궁의 모든 이들이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선물을 왜 챙기시냐고요. 나 참.”

버리는 쓰고 있던 모자를 대충 벗어 던지며, 편히 소파에 앉았다. 불만과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그는 있지도 않은 데릭을 향해 한껏 투덜거렸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죽도록 싸울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동맹을 하자면 세상 어느 누가 미친놈으로 안 보냐고. 그것도 상대가 카이로스인데!”

허공에 대고 힘껏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방문 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이들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카이로스’라는 단어에 더 바짝 긴장했을지도.

그러든가 말든가, 버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당장 내일 어떤 얼굴로 에단의 얼굴을 봐야 할지 몰랐다.

“만나 주기는 하려나. 그 잘나고도 잘난 분께서.”

버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에토르 전장에서 마주한 그는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그 정신 없는 곳에서 홀로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여유로움.

고고하기 그지없는, 그 지체 높으신 분의 눈은 저절로 상대의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었다.

어디 그 앞에서 말 한 마디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아. 정말, 뭘 믿고 이러시는 건지.”

버리는 아예 소파에 누워 버렸다. 천장마저도 눈이 아프게 화려했다. 모든 것이 반짝반짝. 사치라고 눈살을 찌푸려야 하는데, 뭔가 기품과 품위가 넘치는 듯해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뭐 그리 다 잘난 거야. 이 축복받은 나라는.”

이러니 어찌 얄밉지 않을까.

처음부터 다 가지고 시작한 나라와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나라.

차이가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다.

“성에 돌아가면 성 내부부터 다시 손보시라 말씀드려야겠네.”

이거 어디 자존심 상해서 원.

“그 전에, 그걸 담당할 황후부터 해결해야 하고.”

성에 여자가 없으니 무언가를 하려 해도 진척되지 않았다. 아무리 버리가 만능이라고 하나, 테바로스 황실의 내부 살림마저 도맡아 할 수는 없었다. 진즉에 암살 당하신 폐하의 모친은 물론이거니와 그 흔한 여자 누이마저 데릭은 없었다. 그가 즉위한 이후 황위가 위협되는 핏줄이란 핏줄은 죄다 죽여 버렸으니 누가 그 넓디넓은 성에 남아 있으랴.

그 흔한 정부마저 없어, 테바로는 말 그대로 안주인이라 할 만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황후가 필요하단 말이지.”

버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 순간 왜 이리 당연하다는 듯, 로엘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그분을 부추기지 마세요. 버리 경. 버리 경께서 부추기지 않아도 그분은 나아가고 계십니다.’

단 한 번의 독대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왜 황후감인지.

왜 여태껏 그의 주군이 마음에서 놓지 못하고 계시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엄한 생각을 하려 하시는지 말이다.

“……엄하고도 엄한 생각이다마다.”

그런데 왜 그 엄한 생각을 자신도 하고 있는가.

버리의 한숨이 또다시 새어 나왔다.

“……폐하께서 정 그리 못 잊으시겠다면, 절대 안 될 것도 없긴 하지.”

게다가 전쟁의 여신이라는 칭호까지 얻은 마당에, 테바로스의 백성들은 반대하지 않을 거다. 바짝 엎드려 사는 관료들 역시 어쩌면 반길지 모른다.

그녀를 데려온 그 상징성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빼앗아 올 순 없겠지. 그랬다간…….”

테바로스가 멸망해 버릴 테니.

버리는 잠시 누였던 몸을 다시 일으켜 앉았다.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이며 턱을 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인데 말이지…….”

카이로스가 직접 로엘 네아레스를 버리게 한다면, 그래서 그녀가 카이로스를 나와야만 한다면, 분명 승산이 있다.

“절대로 토르티아는 못 갈 테니까. 그렇다면, 한 곳밖에 안 남을 테지.”

그녀를 위해 기꺼이 성문을 열어 줄, 그리고 그곳 가장 높은 곳에 앉게 할,

그녀가 본디 있어야 할, 진짜 자리.

“……원래 테바로스가 먼저였어.”

바로 테바로스의 황후.

버리는 자신이 그토록 뭐라고 하던 데릭의 생각을 자신이 이리 진지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숨이 절로 났다.

하지만 이 또한 주군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무얼까.

이방의 공주를 내쫓게 하는 거야. 어렵지 않으므로.

조금만 소문을 흘려도 아마 삽시간에 퍼질 거다. 그녀의 위치는 순식간에 흔들리겠지.

그러다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다.

그때 그 남자가 얼마나, 어느 정도까지 그녀를 지키고 있는가가 관건.

“황금의 황제께서는 어디까지 하시려나.”

‘그건 좀 궁금하네.’ 라고 데릭은 말하겠지.

버리는 낮에 자신이 들었던 로엘의 모든 말들을 곱씹었다.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모두 데릭과 버리를 위한 말들뿐. 그 진심을 버리는 비꼬아 들을 수 없었다.

버리는 그런 분을 원했다. 그렇게 오로지 폐하만을 위할 수 있는 영민한 분을 바라왔다.

거기에 차갑디차가운 그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여 준다면, 그래서 안정을 찾아 준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다.

“젠장할. 괜히 와서 고민만 더 깊어졌잖아.”

버리는 다시 털썩 소파에 누워 버렸다.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해서 머리가 다 아파 왔다.

“잠이나 자자. 이 호사스러운 곳에서.”

한숨 섞인 버리의 혼잣말이 간간이 들려오며, 그렇게 카이로스에 찾아온 불청객은 이만 잠을 청하려 준비하였다.

***

“용케도 폐하께서 허락하셨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로엘과 수아는 함께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황궁에서 입는 화려한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편안한 활동복 차림이 된 그녀들은 나란히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었다.

“수아 님의 생각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뭐,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요.”

우선은 꼴도 보기 싫은 데릭의 선물들을 처분하고 싶으셨을 테고, 백성들에게 로엘에 대한 신망을 좀 더 높이고 싶으셨을 것이며, 버리가 와 있는 동안 되도록 그와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으셨을 테니.

그 모든 이유들이 합쳐져 지금 이 자선 행사가 성사되었다.

“켈트가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리 빨리 자선물품들을 구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려요, 수아 님.”

“저희도 저희지만 독스 가문이 많은 역할을 했지요. 저희도 내심 많이 놀랐답니다. 독스가가 가지고 있던 물량이 그리 많았다는 것에요.”

“괜히 카이로스의 대상인이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페니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답니다.”

로엘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수아가 고안해 낸 자선 행사를 에단이 허락하자마자, 켈트가는 판을 깔았고 독스가는 물품을 댔다.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페니의 아버지인 독스 남작을 만났는데, 로엘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는 모습이 귀여울 지경이었다.

엄청 꼬장꼬장하고 지독한 장사치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 선입견을 제대로 깨 준 셈이다.

“아버지의 겉모습에 속으시면 안 된다니까.”

곁에 있던 페니는 멀리 일을 하고 있는 독스 경을 빤히 보는 로엘에게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아버지가 세상 순수한 마음으로 마마를 받드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호구는 아니세요. 아마 마마가 받으셨던 그 모든 물품들, 아버지여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였을 거예요. 그걸 마마는 고작 밀가루로 바꾸신 거라구요.”

“괜찮아. 나에게 필요한 건 목에 걸 목걸이가 아닌, 나눠 줄 식량이니까.”

이미 소문이 단단히 퍼져 길게 늘어진 백성들의 인파를 보며, 로엘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녀의 시녀들은 물론 후궁 내의 전 시녀들이 총출동했으며 황군들도 돕기 위해 많이 동원되었다. 그만큼, 갑작스럽게 열린 황궁 자선이 꽤나 큰 행사가 되어 버렸다.

“아마 도성 모든 시민이 몰려올 거예요.”

“그러겠지요. 다른 누구도 아닌, 프란시아님께서 직접 나오신다는데 안 그럴 리가 어디 있겠습니다.”

직접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 주며 먹을 음식을 나눠 주는 프란시아님이라니.

이 어찌 감동스럽지 않을까.

아마 눈물을 흘리는 백성들도 많을 거다.

수아는 그걸 노린 거다.

‘손에 닿지 않는 여신님의 강림이라. 제법이군, 아카시스.’

그리고 에단 역시 그걸 노리고 있다.

로엘을 칼라리엔으로 올리겠다는 수아의 맹세는, 결코 빈말이 아니다.

에단이 말했듯, 그녀는 모든 것을 걸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오늘 하루 열심히 일해 봅시다!”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인이면서, 기꺼이 소매를 걷어 올리는 이분을 위해.

“네. 로엘 님.”

수아는 밝게 웃으며 로엘의 뒤를 따랐다.

그저 이렇게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수아는 오늘도 로엘의 곁에서 함께했다.

***

“카이로스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드디어 만났다. 버리는 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긴장되고 떨렸다.

“테바로스는 토르티아의 정벌을 위해, 카이로스에게 화친을 제안합니다.”

버리는 반쯤 숙였던 허리를 꼿꼿이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단상 위,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에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예의를 지키세요. 버리 경.”

그 직시가 제롬의 심기를 거슬렀다.

감히 일개 신하 주제에 누구를 저리 똑바로 본단 말인가.

“저는 지금 테바로스의 대표로 이곳에 있습니다. 제가 고개를 숙일 분은 이 세상에 오로지 한 분. 테바로스의 대표로서 예우해 주십시오. 테바로스는 타국의 황제께 머리를 조아리지 않습니다.”

그놈의 자존심하고는. 제롬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난번 로엘 님을 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같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다.

“하. 진짜. 멋대로 쳐들어와 놓고선, 완전 제멋대로잖아?”

그 불쾌함은 제롬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역시나 루카스가 먼저 튀어나왔다.

“이건 화친하자는 게 아니라 싸우자는 거 아냐?”

“저는 분명 화친을 제안드렸습니다, 세버 장군.”

“그렇다면 제대로 하라고. 오만방자하게 굴지 말고.”

“당신이 내 입장이라도 똑같이 굴었을 테니 나서지 말죠. 아주 많이 웃기니까.”

“하! 당신? 네놈이 아주 그냥 죽을 자리를 보고 왔구나!”

“루카스.”

바로 검에 손을 올리는 그를 옆에 서 있던 이반이 막아세웠다. 루카스가 먼저 무례하게 반말을 했으니, 버리가 기분 나쁠 만했다.

물론 그렇다 하여 저렇게 맞받아치는 것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그의 태도는 문제가 있었다. 이반이 한 소리 하기도 전에 이번엔 아론이 입을 열었다.

“버리 경. 테바로스의 황제가 한 분이듯, 카이로스의 황제도 한 분이십니다. 당신께서 조아릴 분이 한 분이시듯 나에게도 조아릴 분은 오로지 한 분이지요. 그러니 내 주군을 능멸하지 마십시오. 카이로스는 황제 폐하에 대한 불손을 용납지 않습니다.”

‘잘한다, 잘한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루카스는 꾹 참았다.

아마 속으로는 온갖 욕을 내뱉고 있을 아론이었지만, 정말 꾹꾹 참아 아주 이성적으로 대응했다. 하나하나 잘근잘근 씹는 그 말에 버리는 잠시 침묵했다.

확실히, 단순한 루카스 세버보다는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저는 누누이 화친을 하러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화친은 나라와 나라가 대등한 지위에서 한 목적을 위해 잠시 함께하는 동맹이지요. 어찌 대등한 이가 대등한 이에게 고개를 조아립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저는 테바로스의 대표이므로, 곧 테바로스입니다. 테바로스는 카이로스에게 머리를 숙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무례가 아니지요.”

버리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반은 피식 웃음을 삼켰다. 정말 만만하지 않은 인물이다. 왜 데릭 테바로스가 이 중요한 일에 버리 한스를 보냈는지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이곳, 카이로스의 접견실에서 그는 홀로 모두를 상대하고 있음에도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도움되지 않는 혹들을 장식품처럼 달고 오느니 차라리 제대로 된 한 명을 보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데릭 테바로스는 알았던 거다.

“테바로스는 에토르 전쟁에서 졌습니다. 인정하였고, 깔끔히 물러났지요. 하지만 카이로스가 잠시지만 시엘을, 그리고 에토르를 처음으로 빼앗긴 것도 사실입니다.”

“야.”

“가만히 있어, 루카스.”

이번에도 루카스가 울컥하였고 이반이 막아세웠다. 버리는 슬쩍 루카스 쪽을 바라보았지만, 말을 멈추지 않았다. 똑바로 이 모든 말을 심드렁하게 듣고 있는 에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피해는 컸지만, 테바로스는 이번 원정으로 자신감을 얻었고 그다음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폐하, 테바로스의 황제께서는 그다음을 카이로스와 함께하고자 합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압도하는 위엄에 여전히 심장이 뛰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버리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여기서 벌벌 떨며 할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그렇게 기죽고 주눅 든 채로 그를 대하는 것, 그 자체로 이미 테바로스는 패한 것이니. 시작부터 모든 것을 망칠 순 없었다.

그래서 더 당당히 나왔다. 그래야만 저 남자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이로스의 칼이 북방을 향하고 있다는 것. 모르는 이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습니까. 중부도 알고, 북도 압니다. 그리고 그 끝의 처음이 토르티아가 되리라는 것. 그 또한 알고 있지요.”

중부에게는 토르티아 자체가 곧 북방이므로.

“그래서 제가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하여 테바로스는 카이로스에게 제안을 합니다. 북방의 판도를 새로 짜고, 새 시대를 여는 데에 함께하자고.”

역시나 건방지다.

그러나 설득력있다.

“그 누구보다도 북방을 잘 알고, 그 누구보다도 토르티아를 잘 아는 테바로스가 카이로스의 토르티아 점령에 함께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에단은 어찌할 것인가.

이반은 자연히 에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곳에 들어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버리가 지껄이는 것을, 루카스가 화내고 아론이 발끈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서 이반은 조금 무서웠다.

저 심드렁한 표정 뒤에,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조금도 가늠이 되지 않아서.

에단은 천천히 반쯤 기울어져 있던, 몸을 제대로 일으켰다.

그렇게 여전히 자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버리를 좀 더 제대로 마주하였다.

“패전국.”

그리고 그 시작부터 버리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테바로스는 들으라.”

그 당당하던 버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저 황금의 눈앞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패전국의 신하를 상대하지 않는다.”

꼿꼿하던 버리의 고개가 자연히 숙여졌다.

그리고 두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 이거. 처음부터 잘못 생각한 듯하다.

“내게 할 말이 있거든, 그렇게 부탁할 바가 있거든. 테바로스의 황제는 직접 와서 말하라.”

간교한 수 따위, 그는 받지 않는다.

화려한 언변 따위, 그를 현혹할 수 없다.

그는 패전국은 패전국으로 대할 뿐. 그들이 어떤 패를 들고 있는지 관심 없다.

그의 관심을 끌려면, 좀 더 예의 바르게 나와야겠지.

그래야 그가 상대라는 걸 해 줄 테니.

‘좀 더 공손해지실 필요가 있단 말을 하는 겁니다.’

버리의 주먹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처음부터 그녀의 말을 경청할 걸 그랬다.

“그러니, 일개 패전국의 신하는 꿇어라.”

이 남자는, 애초에 버리가 상대하고 말고 할 분이 아니었던 거다.

“하늘 같으신 카이로스의 황제 폐하께 예를 표합니다.”

드디어, 버리의 입에서 제대로 된 예가 나왔다. 그 꼿꼿하던 허리도 제대로 숙여 고개를 조아렸다.

카이로스의 황제를 알현하는 일.

버리는, 그리고 테바로스는 너무도 안일하게 생각했던 거다.

그 오판의 대가를 아주 톡톡히, 버리 홀로 치른 셈이다.

***

“너무 쉽게 생각했어.”

로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선 행사에 로엘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로엘을 더 보려 안달이었고, 그녀의 손 한 번 잡으려 혈안이 되었다.

마치 그녀가 진짜 여신이라도 된 양, 그녀의 손을 잡고 병을 낫게 해 달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집안이 잘 풀리게 해 달라고 면전에서 기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저 감격스러워 눈물을 뚝뚝 흘리는 노모 앞에서 로엘은 할 말을 잃었다.

카이로스 백성들에게 프란시아가 어떤 의미인지 정말 똑똑히 알아 버린 셈이다.

“처음부터 이랬을 것을.”

그러니 행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결국 로엘은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제대로 된 나눔이란 걸 할 수 있었다. 수아는 자신의 불찰이라 했지만, 로엘은 안다. 카이로스 백성과 직접 만나고 싶어 했던 자신의 욕심이었음을.

결국 로엘 님이 준비한 물건을 나눠 준다는 선에서 마무리되었고, 행사는 그대로 로엘을 뺀 채 장시간 진행되었다.

그들에겐 로엘을 직접 보는 것도 귀중했지만, 로엘 님의 선물과도 같은 보급품을 받는 것도 너무도 귀중했으므로 아쉽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맛있게 드세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접고 돌아갈 로엘이 아니었지만.

로엘은 결국 헤더의 도움을 받아 완벽히 한 명의 황실 시녀로 변장하였다. 특유의 붉은 머리를 감추느라, 머리를 두건으로 아주 동여매듯이 해야만 했다.

“로엘 님께 감사하다고 꼭 전해 주세요.”

“예, 어르신.”

그렇게 일반 시녀 복장으로 변복하니 당연히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바로 전, 직접 마주하던 이들도 복장이 바뀐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애초에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귀한 비단 옷을 입고 있을 때부터, 혼란은 피할 수 없었던 거다.

“휴. 그래도 다행히 온 사람들은 다 대접할 수 있게 되었네.”

로엘은 하도 숙여 있어 뻐근한 허리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가 돼서야 제대로 펼 수 있었다. 딜리아와 시에라의 잔소리가 한껏이었지만, 동행이 없어야 될 거 같아 그녀는 기어코 홀로 나섰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정신도 없었고, 지금 카이로스 황도는 워낙 평화 상태라는 것도 한몫하여 겨우겨우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음식을 나르고 치우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을 만나는 게 로엘은 너무도 즐거웠다.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폐하와 로엘을 찬양하는 말들뿐이었다.

면전에서 직접 그 과한 칭찬을 들으니 많이 민망했지만, 그들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히려 로엘이 더 감사했다.

로엘은 잠시 가에 있는 허름한 상자 더미 위에 앉았다. 머리에 두르고 있었던 두건을 풀어 잠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그녀는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예쁘다.”

정신없이 일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벌써 아름다운 노을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게.”

그렇게 홀로 노을을 감상하는 그녀의 말에, 갑작스레 다른 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너를 닮았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로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그리고 그자 역시 대충 기대고 있던 몸을 제대로 일으켜, 그런 로엘을 마주했다.

눈에 띄게 동요하는, 그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에 남자는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오랜만이네. 로엘.”

이 세상에서 로엘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던, 또 한 명의 남자.

“데리러 왔어.”

테바로스의 황제, 데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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