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8. 모두의 한 걸음 (39/69)

Chapter 38. 모두의 한 걸음

“누가 왔다고?”

“아카시스 수아 님께서 오셨습니다.”

한창 보고를 받고 회의를 하고 있는 와중에 너무도 예상치 못한 손님이 에단의 집무실에 찾아왔다.

이반은 물론 루카스와 아론까지. 모두 다 제법 놀란 눈으로 서로를 보다 에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다른 이들에 반해, 에단의 반응은 언제나처럼 지극히 무미건조하였다.

“어찌할까요, 페하.”

“들여.”

그리고 그 대답 역시 짧았다.

닫혔던 문이 열리고, 곱게 단장한 수아가 에단의 집무실에 발을 들였다.

아마 로엘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그의 집무실에 들어온 여자일 거다.

오로지 측근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에게는 꽤나 사적인 공간인지라 그는 함부로 이곳에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유가 어떠하건 수아가 이곳에 찾아오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다.

“하늘 같으신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함에도 들이는 것은, 영민한 수아 켈트가 바로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이곳에 왔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고.

이반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이 버젓이 있음에도, 그녀의 자세는 올곧았다.

오히려 더 빳빳히 고개를 들어 에단과 눈을 마주했다.

“아카시스 마마님을 뵙습니다.”

그 고고한 모습에, 아론과 루카스, 그리고 콜린의 허리가 숙여졌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이반 역시 수아와 맞절하듯 고개를 숙였다.

묘하게 이반에 대해 냉랭한 그녀의 반응에 이반은 쓴 미소를 삼켰다. 그녀가 로엘을 아끼는 만큼, 아마 이 냉랭함은 더해질 거다.

그러니 씁쓸하면서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리도 잘난 영애님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다니.

역시 네아라는, 그런 생각이 든달까.

“폐하. 감히 독대를 청하옵니다. 사람을 물러 주시옵소서.”

등장만으로도 놀랐는데, 수아의 첫마디는 더 놀라웠다. 사람을 물러 달라니. 다시 말해 나머지 사람들은 필요 없으니 나가라는 거였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의 측근들을 말이다.

“오. 이거 좀 센데?'

“조용히 해. 멍청아.”

루카스가 아론에게 속삭이자 아론은 바로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루카스를 나무라면서도 아론 역시 속으로 많이 놀랐다. 너무도 그들이 알던 수아와는 많이 달라져 있어서.

예전의 수아였다면 이리 자기 발로 여기에 찾아오는 것 자체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거기에 감히 폐하의 눈을 저리 똑바로 쳐다보다니.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 만큼 일체 공식석상에 나오지 않았던 그녀다.

그 어린 날부터 에단만 만나면 고개부터 숙이는 영애님이셨는데, 언제부터 저리 당당한 아카시스님이 되셨나.

“……당연히 그분 때문이겠지.”

“말해 뭐 해.”

이 역시도, 멀리서 오시어 하루하루 더 빛나고 계시는 그분 때문이다.

“저희가 있으면 안 되는 말씀이신가 봅니다.”

“예.”

이반의 의도적인 짓궂은 질문에도 수아의 대답은 간결하고도 단호했다.

“어차피 결국은 다 알게 될 텐데, 그냥 하시죠.”

그런다고 물러날 이반은 아니었지만,

“황자님. 선을 넘지 마세요. 저는 아카시스이고, 지금 저는 황제의 여인으로서 황제 폐하께 독대를 청하고 있습니다. 황자님께서 끼어드실 일이 아닙니다.”

그건 수아도 마찬가지였다.

팽팽한 기 싸움에 서로를 보는 눈빛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었다.

수아는 이반이 왜 저러는지 안다. 절절하기 그지없는 그의 옛 연인 때문이겠지.

그녀와 에단이 함께 있음으로써 마음 아파하고 신경 쓸, 로엘을 걱정하고 있는 거다.

데릭 테바로스에 대해 너무 안일한 그녀를 조금 깨닫게 해 주려는 마음 조금과 눈에 띄게 동요하는 그 귀여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들어 버린 짓궂은 마음 조금을 품고 이곳에 왔다.

그녀의 장난에 아직까지 뒤숭숭해하고 있을 로엘에게 안 그래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수아 역시 들고 있었지만, 그건 로엘을 너무도 친자매처럼 사랑하는 수아가 할 일이지 이반이 할 일이 아니다.

“다들 나가.”

그러니 그 승자는 당연히 수아다.

이반은 할 말이 있었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사정이 어떠하건 엄연히 수아 켈트는 카이로스의 아카시스. 다시 말해 에단의 부인이다.

부부 사이에 할 말이 있다는데, 어떠한 변명으로 그 사이에 끼어드랴. 이반은 그만하라는 에단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집무실을 나서야만 했다. 스르륵 문이 닫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원하는 대로 했으니, 네 할 말을 해.”

역시나 그는 수아에게 차갑다. 아니, 차갑다기보다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던 저 황금의 눈이 너무도 무서워, 제대로 보는 것조차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더 이상 수아는 저 눈이 무섭지 않다.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 켈트가의 수아. 황제 폐하께 이 작은 목숨을 걸고, 청이 있나이다.”

수아는 에단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예법에 맞추어 허리를 숙이는 그 모습은 황제를 받드는 아카시스의 자세로서 완벽하였다.

평생을 황제의 여인으로 살기 위해 교육 받아 온, 공작가의 영애다웠다.

처음 에단을 만났던, 어린 수아 역시 이러하였다. 그리고 아카시스로 간택되어 그를 만날 때마다, 그녀의 예법은 늘 완벽했다.

그만 보던 덜덜 떨 때에도 그거 하나는 확실했다.

“달라졌군.”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완벽함은 같을지라도 눈과 목소리, 태도, 그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야 제대로 말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어.”

에단의 말에 수아의 고개가 들렸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또렷한 눈이 그를 향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을 한 그녀는 가히 아름다웠다.

그도 그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처음으로 수아 켈트라는 여인을 마주한 기분이다.

“예. 폐하. 저도 이제야, 카이로스의 하늘. 위대하신 에단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를 여럿 배출한 공작가의 유일한 영애.

아름다운 외모. 수려한 머리. 단아하고 온순한 성품.

정확히 그가 원하던, 그저 옆자리만 채울 ‘인형’.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갖춘, 전형적인 황후의 감이었다.

“켈트가의 수아. 이 나라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로서, 이 나라 켈트 공작가의 유일한 장녀로서, 이곳 카이로스 성전의 주인 에단 카이로스 폐하께 맹세합니다. 저의 모든 것을 바쳐, 로엘 네아레스 님을 칼라리엔으로 옹립하겠나이다.”

거기에 이제는 이런 눈까지 할 수 있게 되다니.

얼마나 완벽한 황후 후보인가.

순진무구한 그 바보가 제 손으로 가장 막강한 라이벌을 만들어 버린 셈이다.

“그러니, 그때가 된다면 저를 아카시스에서 폐위해 주시옵소서.”

동시에, 그 라이벌을 단번에 물러나게 만들었으니 세상일 참 웃기지 않은가.

에단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래서 로엘처럼 빛나고 있는 수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정말 그녀는 못하는 게 무엇인가.

다 죽어 가던 수아 켈트마저, 이리 살려 놓았다.

“아카시스가 황제 앞에서 정인을 따라가겠다는 말을 당당히도 하는구나.”

천인공노할 일을 이미 그가 알고 있다는 말에도 수아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저 잘난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 수아야말로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윤허하여 주십시오. 폐하.”

그래서 더더욱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것을 알고도 자신을 들이는 에단의 선택이라면, 절대 바뀌지 않겠구나 싶어서.

그런데 그 사실이, 이리 몇 년이 지나서는 그녀에게 오히려 다행인 일이 되었다.

적어도, 그 사실을 일일이 그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거니와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가 동요할 일도 없었으니.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물러서지 않으면 된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게 용기라는 것을 ‘그녀’가 가르쳐 주었다.

“하.”

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살려 두다 못해, 아예 새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나 보다.

에단이 이리 웃는 것을 처음 본 수아는 조금 놀랐으나,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그 답을 기다렸다. 에단은 흥미롭다는 듯, 그 모습을 보며 한쪽 손으로 머리를 기댔다.

“가히 용기가 가상하다.”

그녀는 정말, 얼마나 멋지고도 막강한 뒷배를 만들어 버린 건가.

“네 말대로, 조건은 단 하나. 로엘을 칼라리엔으로 만들 것.”

자신의 옆자리에 당당히 서 있을, 칼라리엔 로엘이라.

상상만 하여도 에단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잃어버린 네 인생을 찾고 싶거든, 그렇게 네 존재를, 그 가치를 증명해. 너의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해내.”

울컥하고. 순간 감정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수아는 환히 웃었다.

그의 말대로, 이건 그녀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기회다.

평생을 어느 가문의 자식으로, 어느 나라의 마마님으로만 살아온 인생.

드디어, ‘수아 켈트’로 살 수 있다.

아. 역시 용기 내길 잘했다.

“위대하신 이 나라의 황제이시여. 저의 모든 것을 바쳐 그 아름다운 분을 반드시 이 나라 가장 높은. 폐하의 옆자리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수아에게 준, ‘그녀’는 수아의 영웅.

“칼라리엔 로엘 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도 아름다운, 수아 켈트 인생의 구원자다.

***

수아는 그렇게 엄청난 폭탄을 떨어트리고, 아무 말 없이 나섰다. 로엘이 당황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수아는 언제나처럼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덕분에 로엘은 탕에 들어앉아 한참을 목욕하면서도, 괜히 심란했다.

“수아 님이 이번엔 좀 짓궂으셨네.”

로엘은 자조적인 한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수아가 그저 놀리는 것임을 그녀도 안다. 수아가 그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도 알고, 리암을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도 안다.

그래서 그와 수아의 만남은 지극히 공적인 일임을 너무도 잘 안다.

그러함에도 사람의 마음이 이리 간사하다.

“……못났네, 못났어.”

그저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수아 님이잖아.”

그녀 기준으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

어머니 다음으로 그리 예쁜 여자는 처음 보았다. 물론 화려하기 짝이 없는, 지금은 한순간에 몰락해 버린 아리스 몰브 역시 평생에 손 꼽힐 미인이었으나 로엘 입장에서는 수아가 훨씬 더 취향이었다.

“세상에 그런 여자가 웃어 주면, 없던 마음도 생기는 거 아닌가. 나는 그러던데.”

수아 님을 보자마자 정확히 로엘이 그러했다.

로엘은 수건으로 긴 머리를 툭툭 털며 느릿하게 욕실에서 나왔다.

“로엘 님. 아까부터 뭘 그렇게 중얼거리세요?”

“아니, 뭐…….”

“수아 님이 신경 쓰이세요?”

“아니.”

그녀는 따끈한 차 한 잔을 따라 주는 딜리아의 물음에 바로 답했다.

그건 고민할 것도 없는 명확한 답이었으니까.

“그럼, 설마 폐하가 신경 쓰이시는 거예요?”

“그것도 아냐.”

이리 투덜거린다 해도, 그녀 역시 에단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수아가 예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걸로 마음이 동하기에는 평생 보아 왔던 시간이 아까웠다.

“나라면 진즉에 반하고도 남았겠다.”

“네?”

“수아 님이 너무너무 예쁘다고.”

저녁 다과를 준비해 주던 안나 역시 그녀의 진심 어린 투정에 딜리아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미모를 논하나 싶다.

“적어도 마마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요.”

“그래요, 마마. 그건 너무 양심 없다.”

“에이. 그렇게 말하는 너네가 양심 없는 거지. 객관적으로 내가 수아 님 미모에 댈 건 아니지.”

로엘이 너무도 진지하여, 오히려 딜리아와 안나의 말문이 막혔다.

한두 번 느끼는 게 아니지만, 역시나 그녀는 자기 자신의 외모에 대해 지나치게 박한 평가를 한다.

조금만 신경을 써 줘도, 몰려드는 시선이 그리 많은데 어찌 이리 무디신지.

“참……. 그게 마마의 매력이면서도 단점이라니까요.”

“응? 뭔지 모르지만 고마워.”

“단점이라고요, 단점.”

“매력이란 말도 했어.”

예쁘게 웃으며 받아치는 로엘에게 두 사람은 그저 웃고 말았다.

핏대 세워 가며 당신이 얼마나 예쁜지 설명할 시간은 아니었으니까.

추워지는 겨울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이리 도란도란 그녀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만족했다.

“그럼 뭐가 이리 우리 마마님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거예요?”

“당연히 나 때문이지.”

이 역시 로엘은 바로 답했다.

마음이 심란한 그 이유를 로엘은 너무도 명확히 안다.

“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한심스럽게 속이 좁아지려 하거든. 그래서 심란해. 내가 이리 못난 사람이나 싶어서.”

이 솔직함 역시 딜리아와 안나를 웃게 했다.

세상 어느 주인이 자신의 시종들 앞에서 이리 꾸밈 없을 수가 있나. 너무도 귀여운 자기 성찰에 두 사람의 엄마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그건 속이 좁은 게 아니에요. 못난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저 사랑을 하고 계신 거잖아요.”

그래서 그에 맞는 정답인 위로를 해 드렸다.

너무도 답이 정해진 답.

아마 로엘도 알고 있었을 바로 그 답.

“세상에 유치하지 않은 사랑은 없어요, 로엘 님.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질투하지 않는 사랑도 없고요.”

“그러니 더 티 내셔도 되어요. 저희한테도, 그리고 폐하께도.”

그라면 분명 질투하는 그녀를 엄청 놀릴 거라고. 그게 자존심이 상해서, 계속 괜찮은 척하게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말았다.

아닌 척하는 것보다도 솔직하게 표현하는 편이 훨씬 그를 더 미소 짓게 만들 거라는 사실을 로엘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마마. 수아 님과 이 밤에 함께 계신 건 사실이니까 조금의 심통은 이해해요.”

마지막으로 그녀의 잠자리를 봐 주면서 딜리아가 말했다. 끝에는 결국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그녀들이라 로엘은 결국 웃고 말았다.

그렇게 모두가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언제부터 이 방이 이리 컸나.

그녀는 새삼 넓게만 느껴지는 그녀의 화려한 방을 둘러보았다.

예전 토르티아의 탑에 유폐되어 있었을 때는 상상도 못 하던 호사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세상일 아무도 모르는 거지.”

그녀가 이리될 줄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로엘은 어차피 잠들기는 그른 것 같아, 낮에 읽다 만 책을 집으며 천천히 방 안을 거닐었다.

몰브가는 몰락하고 에리카는 치욕스롭게 토르티아로 돌아갔다.

그에 비해 그녀는 대 제국 카이로스의 프란시아가 되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몰라서 무서운 거고.”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 말도 안 되는 행운의 연속이. 행복의 충만함이 어느 한순간 무너질 수도 있는 법. 로엘은 홀로 침대에 앉아, 언제나 그녀의 곁을 지켜주던 그의 빈자리를 쓸었다.

“……그래서 더 무서운 거라고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로엘.’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다.

자신의 이름이 이리 사랑스러운 울림이라는 것을, 그녀는 그를 통해 처음으로 알았다.

‘나의 로엘.’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그가 더 사랑해 줄수록 애가 닳았다.

더 독점하고 싶고, 더 독차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가 그녀만을 사랑해 주길 바랐다.

“……수아 님은 이제 가셨으려나.”

그러니 황제의 여인으로서, 이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인가.

로엘은 자조적인 실소를 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아무의 눈길도 닿지 않는 곳에 두고 혼자만 보고 싶단 그의 질투 어린 말들이, 이제야 그녀도 이해가 간다.

정말, 그녀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도. 그녀를 안아 주는 그 따뜻한 품도. 그녀만 위해 웃어 주는 그 아름다운 미소도 전부 다,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

“다른 여자랑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오롯이, 그녀만이 알고 그녀만이 누리고 싶다.

“내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있으면 난리 났을 거면서.”

그에게 닿지 않는 공허한 그녀의 투정이 방 안을 울렸다.

딜리아가 아무리 사랑은 유치한 거라고. 질투는 당연한 거라고 말해 주고도 여전히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쉽사리 멈춰지지가 않는 법이다.

로엘은 침대에 홀로 누우며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혼날 준비 되어 있으니까, 얼른 와요. 에단.”

아무래도 오늘 밤.

홀로 잠들기는 그른 것 같다.

***

“이제 괜찮아. 나와도 돼.”

자정이 넘은 늦은 밤. 수아의 후원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리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험하다니까.”

“조심할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이렇다. 처음 만나지 못하였을 때는 그저 무사히 살아만 있어 라고. 보지 못하여도 되니 건강히 잘 지내기만 해 달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이리 한번 얼굴을 보고 품에 안으니. 도저히 그것만으로 마음이 멈춰지지가 않았다.

“추워. 안아 줘.”

“응.”

황궁 안. 같은 공간 지척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고, 사람의 눈을 피해 서로에게 닿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이리 밀회에까지 이르렀다.

“올 때 괜찮았어?”

“그럼. 쥰과 베티만 아니면, 아무도 몰라. 그래서 난 두 사람이 제일 무서워.”

“그건 나도 그래. 나도 두 사람이 제일 무서워. 그리고 제일 믿을 수 있지.”

수아는 리암의 품에 폭 안겨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리암 앞에서만 이리 어리광쟁이가 되는 그녀를 리암은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녀의 사람들인 쥰과 베티가 아닌, 다른 이들의 눈에 띄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 다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일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 두 사람은 생각지 않았다.

들킬 게 무서워 못 만날 사이었다면, 그들은 이미 10년 전에 헤어지고도 남았다.

이미 한번 목숨을 걸고 사랑했기에, 다시 주어진 이 기회에 그런 위험 부담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리암. 오늘 하루는 어땠어.”

“좋았어. 오늘따라 활이 잘 맞았거든.”

“이제부터 교육에 들어간다고 했나?”

“응. 오랜만에 가르치는 거라, 즐거워.”

“그게 다 로엘 님 덕분이지.”

“나도 알아.”

이제는 습관처럼 로엘 칭찬하는 하는 수아라서, 리암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가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리암 역시 그분께 무한히 감사했다.

두 사람이 지금 이 순간 같이 있을 수 있게 된 것도, 엄밀히 따지자면 그분 덕분이니.

“에토르 전쟁 이후 많이 인정받게 되었지. 로엘 마마께서 기회를 주지 않으셨으면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서 나도 많이 감사드리고 있어. 내 주제에 감히 먼저 찾아뵐 수 없으니. 수아, 네가 대신 전해 줘.”

“응. 이미 전했어. 리암이 말하지 않아도, 나 역시 아주 많이 감사하고 있으니까. 리암을 믿어 주신 것도, 리암에게 귀한 기회를 주신 것도. 전부 다.”

이제는 로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수아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너무도 순수히 로엘을 좋아하는 것이 느껴져, 리암 역시 그런 수아를 보며 미소 지었다.

리암과 못 만난 시간 동안 그에게 로엘 자랑을 못 해 어떻게 살았나싶다.

입궁한 이후부터 몇 년을 죽은 인형처럼 살았다는데, 이리 말하고 싶어서 안달 난 그녀였다. 이리도 조잘조잘 잘도 말하는 앵무새가 벙어리 목석으로 살았던 거다.

“역시 우리 수아.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너무 잘 알아.”

“당연하지. 아마 리암보다도 내가 더 리암 마음을 잘 알걸?”

그 생각을 하면 자신에게만큼은 이리 무장해제 되는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 때문에, 그 오랜 세월을 죽은 척 살았던 거다. 그래서 더더욱 리암은 수아의 어리광을 받아 주고 싶었다. 못 만났던 그 시간들을 어떻게서든 보상해 주고 싶었으니까.

“이렇게, 오늘 밤 달려온 것도. 질투 나서 그런 거잖아. 내가 그 밤에, 폐하를 찾아갔단 소식을 듣고.”

정말이지. 모르는 게 없다.

리암은 자신을 빤히 보며, 좀 더 진하게 미소 짓는 수아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런 속 좁은 마음 정도는 몰라줬으면 하건만, 수아는 너무도 리암의 마음을 잘 알았다.

“알면 아무 일 없이, 잘 다녀왔다고 얼른 말해 줘. 걱정 많이 했단 말이야.”

“걱정만?”

“질투도 했지.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단둘이 있다고 하니.”

수아의 눈이 예쁜 초승달처럼 휘었다.

‘내 여자’라니. 그녀가 너무도 듣고 싶었던 말이다.

워낙 출신 차이가 심하게 나, 언제나 그녀 앞에서 주눅이 들던 리암이 이제는 당당히 그녀를 자신의 여자라 말했다. 수아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래서, 왜 간 거야. 아니 그 전에, 괜찮은 거지?”

“그럼.”

한번 서로를 잃었던 적이 있는 만큼,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양보하거나 물러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거다. 여전히 걱정이 앞서는 리암에게 더 환히 웃으며 수아는 손을 올려 리암의 뺨을 감쌌다.

“나는 그저 용기를 내고 싶었어.”

리암은 그런 수아의 손을 감쌌다.

“마치 로엘 님처럼.”

그리고 좀 더 세게, 힘을 주어 수아의 고운 손을 잡았다.

이제야 수아가 왜 그 높고 높으신 분을 찾아갔는지 알 거 같다.

그녀는, 말 그대로 용기를 낸 거다.

두 사람의 함께하는 미래를 위해.

“로엘 님이 내게 보여 주었듯. 나도 그분처럼 그러고 싶었어. 그렇게 빛나고 싶었어. 너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이 넘치고 넘치는 마음을, 더 이상 놓칠 수도 숨길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나서야 할 때.

로엘은 수아에 그리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거다.

“리암. 나는 최선을 다할 거야. 너와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그토록 꿈꿔 왔던 바로 그 미래를 위해.”

그래서 더 이상 수아는 두렵지 않다.

로엘이 등을 떠밀어 주고, 리암이 곁에서 그녀를 지지해 주는데 어디든 못 갈 것이며, 무엇이든 못할까.

이제, 수아는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리암.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이제는 내가 리암에게 갈게.”

결심 어린 수아의 눈동자에 리암이 가득 찼다.

“그렇게 하루라도 빨리 달려갈게.”

이번에는 리암이 수아보다도 먼저 울컥했다.

아아. 어찌나 과분한 사랑인가.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줘. 리암.”

그가 뭐라고, 이 어여쁜 이가 이리 그를 사랑해 주는가.

“평생을 기다릴게.”

리암은 그대로 수아를 품에 꼭 안았다.

“사랑해, 수아야.”

이 사람이 그를 사랑해 주는데, 더 이상 그도 두려울 것이 없다.

이대로 돌아가는 길에 걸려 소리 소문 없이 죽게 된다고 해도, 기꺼이 그녀를 위해 죽으리라.

“나도 사랑해.”

부디 이 절절한 사랑의 끝이 해피엔딩이길.

리암과 수아는 달빛조차 없는 곳에서, 오로지 두 사람의 눈동자 빛에 기대어 서로를 보았다. 그렇게 사랑을 다짐하였다.

***

“으음. 폐하?”

어느새 잠들었는지, 그녀는 익숙한 손길에 무거운 눈꺼플을 다시 떴다.

책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엎드려 잠이 들었나 보다.

수아가 가고 난 뒤, 하던 일을 마무리하던 그는 늦은 새벽에나 되어서야 그녀의 방에 올 수 있었다.

“언제 오신 거예요. 오셨으면 저를 깨우시지.”

비몽사몽 한 그녀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려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의 손이 가볍게 그녀를 저지했다.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그저 로엘을 바라보는 에단은 왠지 모르게 그 눈이 차가웠다.

“에단?”

그제야 로엘은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깨달았다.

“아. 이거…….”

바로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데릭이 준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홀로 밤을 지새우는데, 갑작스레 그녀의 눈에 이 사파이어가 들어왔다. 워낙 고가의 귀한 물건이라, 그리고 그녀에게 사정이 있는 듯하여 페니가 이 목걸이만큼은 쉽사리 치우지 못하였다. 수아에게 충고를 들은 후, 얼른 치워야겠다 생각했지만 수아가 더 큰 폭탄을 떨어트리고 갔기에 그마저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두운 방 속에서도 빛나는 그 반짝임에 저도 모르게 손이 가 버리고야 말았다.

“그냥 한 번만 해 본다는 것이 이대로 잠들어 버린 거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모습을 그가 보고야 말았으니.

로엘은 저절로 가시방석이었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질투라는 걸 해 보려 했는데, 애석하게도 그 선수를 빼앗긴 것 같다.

“허락한 적, 없는 걸로 아는데.”

낮은 그의 목소리가 드디어 나왔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쇄골을 쓸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두껍고 무거운 목걸이 밑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가는 목을 감쌌다.

“나 말고, 다른 남자가 네 몸에 닿는 거. 허락한 적 없어.”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읏.”

“그건 물건도 마찬가지.”

일부러 목걸이가 그녀의 맨살에 닿지 않게 하도록, 그는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서부터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손으로 단숨에 이음쇠를 풀자 무거웠던 목걸이가 툭하고 침대 위로 떨어졌다.

“다른 남자가 준 그 어떠한 것도 닿게 하지 마.”

“읏……!”

그는 망설임 없이, 정확히 사파이어 목걸이가 닿은 부분에 입술을 올려 진하게 흔적을 남겼다. 일부러 아프게 자국을 남기는 것이 느껴져, 로엘은 그가 꽤나 화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순순히 다가온 그의 머리를 안았다.

“대답.”

“……네.”

그러고는 흘러내린 그의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제대로 그와 눈을 맞추었다.

정말이지. 요 몇 시간. 이 눈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대신. 당신도 마찬가지야.”

로엘은 살짝 심통 난 목소리로, 좀 더 바짝 그를 당기며 말했다.

아니 경고했다.

“다른 여자랑 단둘이 있지 말아요.”

물론, 그 경고에 차가웠던 그의 눈을 단번에 사르르 녹여 버렸지만.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여자. 아주 귀여운 질투를 하고 있었나 보다.

“단둘이 나만 모르는 비밀을 만들지도 마.”

“만든 적도 없어. 없으려고 이렇게 바로 달려왔잖아.”

에단은 가볍게 힘을 주어 로엘의 상체를 세웠다. 그러자 성큼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워졌다.

“그것도 이 새벽에. 그 많은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리 나의 공주님께서 심통 나신 채로 기다리실까 봐 걱정되어.”

“……거짓말.”

로엘은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마음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닌가 보다.

생각보다도 질투를 제대로 하고 있었던 거 같아, 에단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어쩜 이리 귀여운지 모르겠다. 에단은 쪽 소리 나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말이 아닌 몸으로 알려 줘야겠네.”

“됐거든요.”

“난 안 됐어. 진심을 오해받을 수야 없지.”

말로는 됐다고 하면서도, 로엘은 다가오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순순히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에단은 웃음을 꾹 참았다. 그녀가 먼저 눈을 감는 모습을 항상 에단이 지켜본다는 사실을 이 귀여운 여자는 잘 모르는 거 같다.

그러니 그 수줍어하는 모습을 그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지.

“으응.”

그녀의 새된 소리와 함께 언제나처럼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뜨거운 혀가 얽히면서,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서로의 머리에 울려 퍼졌다. 적막한 밤일수록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서로가 닿는 그 소리에 두 사람은 금세 뜨거워졌다.

에단은 낮부터 얼마나 그녀에게 닿고 싶었으며, 그녀는 이 짧은 밤 얼마나 그를 그리워했는가.

“하아. 에단.”

“부족해.”

그래서 더더욱 서로를 놓을 수 없나 보다.

숨을 헐떡이는 그녀를 봐주지 않고 그는 다시금 그녀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질수록 그에게 매달리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안으며,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다시금 침대에 눕혔다. 그 역시 그녀의 위로 올라타며, 더 깊고 더 진하게 키스를 이어 갔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면서 서로의 체취도 열기도 섞여만 갔다.

“나도 부족해요.”

“알아.”

분명 할 말이 있었고 들을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말은 나중에 들으면 되지만, 이 타오르는 욕망에겐 나중 따위가 없으니.

“잘 생각. 하지 마. 안 재울 거야.”

“……언제는 재웠나 뭐.”

두 사람에겐 그저 지금 이 순간, 이 열기가 제일 중요할 뿐이다.

아무래도 로엘과 에단의 언어로서의 대화는, 이 뜨거운 몸의 대화가 끝난 뒤에야 가능할 듯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