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7. 지나간 인연에 대한 예의 (38/69)

Chapter 37. 지나간 인연에 대한 예의

토르티아 정벌이라.

“……이건 좀 들어 볼 만하군요.”

이반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나 데릭 테바로스가 그냥 버리를 보낸 게 아니었다.

“우리 둘만 들어서 되는 일도 아니고요.”

그의 말에 버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그들이 이 제안에 반응할 줄 알았다.

처음 데릭으로부터 들었을 때 버리 자신도 그리 놀랐는데 카이로스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리가 있나.

새삼, 자신의 주군의 번뜩임에 감사했다. 역시나 총명하신 분이다.

적어도 에단 카이로스를 협상 테이블로는 끌어낸 셈이다.

“황자님. 폐하께 보고드리세요.”

듣고만 있던 로엘은 이반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똑바로 버리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까와는 달리 굳어진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는 지금 꽤 심각했다.

다른 곳도 아닌 ‘토르티아’다. 만일 카이로스와 테바로스가 손을 잡아 그 붉은 나라를 무너트리고자 하면, 그 나라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녀가 이곳에 온 바로 그 이유. 그녀가 그렇게 원하던 염원이 진짜 실현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어찌 동요하지 않을까.

이반은 로엘의 굳은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토르티아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녀의 붉은 눈이 차갑게 식었다.

저 속이 어떨지, 이반은 감히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녀가 토르티아를 증오하는 만큼 그 나라를 사랑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이반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조금 힘을 싣자, 그제야 그녀의 눈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를 올려다보았다.

“혼자 상대하지 마.”

“알아.”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입은 웃었지만 눈은 여전히 차디찼다.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여서 이반은 그녀를 버리와 단둘이 두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가야 했다.

그가 말한 대로 이 사태를 그녀 혼자 짊어지고 결정하게 둘 수는 없었으므로.

그럴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께서 생각보다 오래 계시겠군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이반이 가고 다시 로엘과 버리 둘만이 남았다.

다소 가시가 돋친 로엘의 말에도 버리는 싱긋 웃으며 잘 받아넘겼다.

“이건 데릭 폐하답지 않은 도박입니다.”

“그만큼 자신 있으시단 거겠지요. 데릭 폐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요.”

버리는 정확히 로엘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그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는 분명 순수한 충정만이 들어 있었다.

로엘은 그래서 더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눈. 아버지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부하들이 가졌던 바로 그 눈이다.

“폐하께서는 불가능하셨던 황위를 쟁취하셨으며, 테바로스를 통일하셨고 이제는 북방 전역을 자신 발아래 두려 하십니다. 나아가 중부로 세력을 넓히려 하시지요. 이건 역대 북방의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위대한 업적입니다.”

맹목적인 믿음. 절대적인 신뢰. 그에 따르는 기대.

로엘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저 기대가 깨지면, 그는 그 실망감은 누구 몫이란 말인가.

“비록 아직은 카이로스에 미치지 못하나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테바로스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고 카이로스는 이미 성공의 타성에 젖어 가고 있지요. 영원한 일인자는 없는 법. 데릭 테바로스 치세 아래, 반드시 그 아성이 깨질 것입니다.”

로엘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이 어찌나 위태로운 자인가.

버리 한스가 총명한 줄만 알았더니, 그것만은 아닌가 보다.

“북은 변하고 있습니다. 제이드 네아레스 님의 서거 이후 토르티아는 무너졌고, 데릭 폐하의 즉위 이후 테바로스는 토르티아를 넘어섰지요. 분산되었던 북방의 소국들이 통합되고 있으며, 그 통일의 중심에는 데릭 폐하께서 계십니다.”

분명 버리의 말은 맞다. 그녀에게는 낯선 현실이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리, 지금의 북의 사람으로부터 듣는 북의 이야기는 마치 그녀가 더 이상 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기분이 웃기게도 그녀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제멋대로인 감정이다.

토르티아가, 북방이 그래도 처절히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가도, 그러함에도 그렇게 볼썽사납게 무너지는 것은 또 보고 싶지 않았다.

고향이라는 것. 뿌리라는 것.

그녀에게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그저 태어나 보니 결정된 그 운명은 원래 그런 거다.

“그러니, 토르티아의 공주 마마. 더 이상, 마마께서 기억하고 계시던 테바로스도, 그 아름다운 시절의 토르티아도 없습니다.”

로엘은 잠시 대꾸하지 않았다.

분명 오만한 말이다. 건방지고도 무례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버리가 자신하는 바로 그 현실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버리 경.”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지금 버리가 전부 옳은 것은 아니다.

“버리 경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셨습니다.”

잠시 생각에 젖어, 아래로 향하던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버리를 향했다.

여전히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는 또렷한 눈.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을 테고, 조금은 마음이 상했을 거다. 그러함에도 그녀의 눈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올곧이, 자신의 앞에 있는 타국의 정무관을 보았다.

“버리 경은 철저히 테바로스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요.”

그녀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말이 빨라지지도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온화하게 말을 이었다.

“테바로스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테바로스의 역사상 가장 빠른 성장으로, 가장 높게 올라가겠지요. 그건, 버리 경이 그토록 자신 있고 자랑스러워하는 데릭 폐하 덕분일 겁니다. 저는 그걸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버리를 더 긴장시키는지도 모른다.

꽤나 도발적인 그의 말에 그녀는 너무도 어른스러운 대응을 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건 철저히 테바로스의 입장이지요. 카이로스가 보기에 테바로스는 여전히 발전이 한참은 뒤처진 성장 도시일 뿐이고, 토르티아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백 년 동안 뒤처져 온 이웃 국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어른스러움에는 매서운 충고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알던 북이 아니라는 말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테바로스가 아는 카이로스와 토르티아 또한 아니라는 것.

“토르티아가 아무리 쇠락하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토르티아의 성은 건재하며 그 군대 역시 체계가 확실합니다. 데릭 폐하의 즉위 이후 테바로스가 급격히 성장했던 만큼, 에단 폐하의 카이로스도 무서운 속도로 광영을 이루었지요. 그 이전의 테바로스와 카이로스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 과연 테바로스가 감히 카이로스에게 대등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버리를 직시하는 그 붉은 눈동자 역시 차가워졌다.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

그녀는 지금 버리를 혼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이 동맹 제의가 얼마나 무모한 모험인가요.”

아니. 어쩌면 버리를 통해 데릭에게 경고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아직은 아니라고. 지금은 숙여야 할 때라고.

“카이로스는 테바로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테바로스 역시 카이로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동맹을 제의하였다는 것은 테바로스가 카이로스에게 얻어 갈 게, 아니 배워 갈 게 많이 있다는 겁니다.”

버리는 대꾸하지 못했다. 아무리 자존심을 내세운다 한들, 그녀의 말이 틀리다고 차마 할 수 없었으니. 그래서 계속 여유롭던 버리의 표정에서 미소가 가셨다.

“카이로스 역시 이 동맹을 통해 얻어 갈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반 황자께서 바로 에단 황제께 달려가신 거겠지요.”

“그리고 단칼에 끊길 수도 있겠지요. 그분께, 이 선택지는 말 그대로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니.”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에단에게 데릭의 동맹 제의 따위, 얼마나 같잖을까. 그는 그 자체로 너무도 완벽한 사람이라, 그의 기준 아래에 테바로스는 아직도 갈 길이 먼 나라일 뿐이다.

그 도움을 그는 필요 없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버리 경.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겠습니까?”

“동맹 제의 따위는 받지 않겠다는 말씀 아니십니까.”

“아니요. 좀 더 공손해지실 필요가 있단 말을 하는 겁니다.”

로엘은 속으로 또 한 번 더 한숨을 들이켰다.

처음부터 느끼는 거지만, 역시나 버리 역시 그녀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물론 그녀가 하늘 높은 줄 몰랐던 버리의 자존심을 꽤나 상처 입힌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도 그녀의 말을 너무 꼬아 들었다.

그녀는 그럴 의도가 아닌데 말이다.

“데릭 폐하가 대단하다는 건, 그렇게 열심히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모두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들이, 그분이 걸어온 인생의 역사가 그걸 반증하고 있어요. 그러니 버리 경까지 그를 강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는 정말 좋은 마음으로, 충고를 해 주고 싶을 뿐이다.

버리를 위해서. 데릭을 위해서. 그리고 테바로스를 위해서.

“욕심이 과하시거든 멈추게 하시고, 아첨이 들리거든 쓴소리를 아끼지 마셔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시려거든 올바른 길로 안내하시고, 그분이 감정적이실 때에도 버리 경께서는 이성으로 판단하셔야 합니다. 그게 버리 경이 그분 곁에 계시는 이유이자, 그분이 당신을 곁에 두는 이유입니다.”

나긋나긋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버리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버리는 좀 전, 자존심을 세우던 자신이 조금, 아니 매우 부끄러워지려 했다.

이분은 그저 호의를 베풀려는 거였다. 가면을 쓰지도 계책을 숨기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진심. 그의 주군. 데릭 테바로스를 위한 진심이다.

“그분을 부추기지 마세요. 버리 경. 버리 경께서 부추기지 않아도 그분은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를 처음 보았던 그 어린 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리는 그가 그녀는 그저 안쓰럽다. 그 끝없는 달리기를 그는 여전히 하고 있구나 싶어서.

“제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인지를 떠나 그저 옛 인연으로서, 그분을 위하는 저의 작은 진심이 전해졌길 바랍니다.”

정적이 흘렀다. 버리는 한동안 답을 할 수 없었다.

무언가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랄까. 스스로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제대로 혼난 그런 기분이다.

“로엘 마마께 결례를 범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였다.

“마마의 말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데릭에게 이분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던, 그 말이 조금 후회되려 했다.

오로지 테바로스만을 위하시는 그분께서 왜 이리 이분께 집착하시나 했더니만, 이제야 알 것 같만 같다.

이토록 황후에 어울리는 여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폐하의 말씀이 다 맞았다.

에단 카이로스는 불공평할 정도로, 다 가진 자다.

***

“하.”

에단의 입에서 짧은 실소가 절로 나왔다.

“테바로스가 미친 거 아냐?”

루카스의 격한 반응도 바로 나왔다.

“조금 많이 건방지군요.”

아론의 기분 나쁘다는 반응도 이어졌으며,

“상당히 무례합니다.”

제롬도 답지 않은 불편한 기색을 대놓고 표했다.

그만큼 테바로스의 동맹 제의는 카이로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심지어 에단조차도.

“하지만, 솔깃하지. 충분히.”

그나마 담담한 반응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이반 정도였다.

“아마 처음부터 동맹 명목을 내세우고 왔다면, 우리는 충분한 검토를 거쳐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강요했을 거야. 어쩌면 처음부터 받지 않았을 수도 있고. 하지만, 이렇게 아카시스 마마의 생일 선물이란 명목하에, 그 의례적인 형식으로 당당히 카이로스 성문을 넘었으며 그 속에서 본래 카드를 꺼내 들었어. 우리가 주도권을 잡기 전에, 그들이 먼저 우리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셈이야. 아주 영악한 방법이지.”

“대신에 효과적이고.”

에단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굳었다. 심히 심기가 불편했다.

감히 로엘을 내세워 동맹을 운운하다니.

테바로스 따위가, 카이로스에게 말이다.

“뭘 고민하세요? 당연히 쳐야죠. 테바로스의 도움 따위 없어도 단번에 토르티아를 점령할 수 있어요.”

루카스의 반응은 꽤나 냉담했다. 평소의 장난기 많은 미소도 없었다.

그만큼 루카스는 테바로스가 거슬린다는 소리다.

“패전국 주제에 어디서 동맹을 먼저 운운합니까? 설사 북방 정벌에 테바로스가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은 아닙니다. 제대로 침공에 대한 선공을 받고, 에토르 전쟁에 대한 보상을 치르라 하세요.”

물론 아론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저 조용히 그들의 다소 격해진 이야기를 듣던 이반이 에단을 보자, 에단 역시 정확히 이반을 보았다.

“네 생각은.”

다행히도 에단만큼은 ‘동맹’이란 단어에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았다.

처음 ‘로엘의 선물’이라는 단어에 차갑게 식은 그 눈과는 다른 살벌함을 띠었다.

지극히 에단다운 반응이다.

만일 데릭의 선물이 정말 로엘의 선물일 뿐이었다면 그건 인간 에단의 문제지만, 동맹이라는 속 뜻을 내포한 것이라면 그건 황제 에단의 일이었으니까.

“들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이반 님!”

“그만큼 테바로스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할 테니까.”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이반은 살짝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제대로 에단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번 에토르 전쟁을 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건 북이 너무 멀다는 사실이야.”

혼자 다녔을 때는 몰랐다.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면서 왕래하였으니, 길은 익숙해지고 걸음은 빨라졌다.

거기에 보고 싶은 이마저 그곳에 있으니 어떻게 그 걸음이 무거울까.

하지만 군대는 달랐다.

“몰랐던 사실이 아니지. 혼자보다는 군대가 훨씬 이동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거,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야. 그런데 직접 북으로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해 보고 깨달았어. 아. 이거 큰일 났구나.”

고작해야 북의 진입로였다. 카이로스의 북쪽 끝이자 토르티아의 접경 지역.

“카이로스 입장에서는 가장 험난하나 토르티아의 입장에서는 가장 완만한 길. 고작 에토르에 가는 것이 이리 늦은데. 성 하나 전투도 이리 물자가 많이 드는데 어떻게 타르타니를 넘으며, 넘는다 한들 어찌 그 많은 성들을 수복할까.”

그래서 에단이 소삼국을 필요로 했던 거다.

그 소삼국만으로는 부족하고도 부족하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게 된 거고.

“우리에겐 어쩌면 테바로스와 같은 북방의 우군이 필요할지도 몰라.”

흥분하던 루카스와 아론의 입이 자연히 다물어졌다. 감정으로 맞받아치기에는 이반의 설명은 너무도 논리적이었고, 생각하는 에단 눈동자는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테바로스는 그럼 토르티아의 정벌로써 무얼 얻으려 할까요?”

“북방의 패권.”

그 침묵을 깨는 아론의 질문에 에단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루카스야 바로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지만.

“네? 우리가 토르티아를 정벌하는데도요?”

“우리가 정벌한다고 하더라도 직접 통치는 불가능하니까 당연히 패권은 테바로스에게 기울게 되어 있어.”

그래서 이반이 부연 설명을 붙였다.

토르티아는 광활한 대지를 가진 북방의 대국.

카이로스가 토르티아를 정벌한다는 의미는 그 모든 땅에 일일이 카이로스의 깃발을 꽂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린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그럴 이유도 없어. 그건 시간 낭비이자 자원 낭비이니까. 우리는 그저, 그 나라에 대한 지배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상징성이 필요한 거야.”

그러니 카이로스의 토르티아 정복은 곧 토르티아의 수도를 점령하고 항복을 받음으로써 그들을 카이로스의 발아래 두는 것.

그렇다면, 그곳의 자치는 여전히 토르티아에게 맡겨질 것이다. 단지 세금을 카이로스에게 내고, 카이로스의 지시 감독을 받을 뿐.

“지금까지, 중부의 영토를 수복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해. 단순히 영지 수준이 아닌 아예 다른 국가로서 인정하되 우리의 복속국이 되는 거지. 그렇다면, 북방의 패권은 어디로 넘어갈까?”

그 답은 너무도 명확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지 네아레스는 늙고 무능한 데에 비해 데릭 테바로스는 젊고 유능하지. 어쩌면, 테바로스는 이미 토르티아를 넘어섰는지도 몰라.”

설사 아직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들,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번 에토르 전쟁에서 모두가 느꼈다.

이반의 목소리가 한층 더 진지해졌다.

그리고 똑바로, 자신을 보는 에단의 눈을 보았다.

“나는 우리가 토르티아를 정벌하는 거 역시, 성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우리는 오래 준비해 왔고, 준비가 되었으며 나의 형제, 나의 주군, 에단 폐하는 그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황제라 확신하니까.”

에단은 이반의 이 눈을 안다.

이는, 에단을 설득하는 눈이다.

“데릭 테바로스는 지금 그 일어날 일들을 좀 더 수월히, 좀 더 빨리 이루자는 거야. 누가 보아도 그게 서로에게 더 경제적이니까.”

쉽게 말해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서로 조금씩 자존심을 덮고 서로의 이득을 취하자는 것.

에단에겐 여전히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다.

문제는 그러함에도 그것이 꽤나 타당하다는 거지만.

“그러니 폐하. 그들의 제안을 한번 들어 보시는 것,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저는 들어 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정해진 이반의 답을 이반은 너무도 잘 설명하고 잘 설득했다.

그러니 에단의 고민이 더 깊어질 밖에.

에단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처음 로엘의 생일 선물을 가져왔다고 할 때부터 당장이라도 쫓아내어 테바로스의 어떠한 것도 황궁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선물 속에 숨겨 놓은 것이 자기들에게 뻔히 유리하기만 한 동맹이라니.

아주 영악하기 그지없다.

“이반. 테바로스에 대한 보고. 오늘 안으로 끝내.”

“예. 폐하.”

그들의 폐하께서는 아무대로 그 영악한 여우를 제대로 상대하시려나 보다.

“아론. 에토르 전투를 기반으로 예산안 다시 검토하고, 테바로스의 동맹을 전제로 한 초안. 다시 짜 와.”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루카스. 테바로스의 군의 전력 분석, 제대로 해서 보고해.”

“하아. 네.”

그가 마음의 결정을 끝내자 바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마음이 안 동하여 미적거렸을 뿐, 제대로 임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가 머뭇거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롬.”

“예. 폐하.”

“버리 한스를 사신으로 예우하되 절대, 아카시스와 접촉하게 두지 마.”

그러니 이 또한 확실히 해야지.

그는 그녀가 테바로스와 엮이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정혼자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데 그걸 기어코 이리 만천하에 알리다니.

거기에 그도 몰랐던, 그녀의 생일을 이리 대놓고 먼저 챙겼다. 그것도 마치 그 보란 듯이.

이건 분명 도발이다.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겠나이다.”

그러니 그의 심기가 아주 불편할 밖에.

제롬은 그러한 주군의 심기를 너무도 잘 알아,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단호한 명에 바로 허리를 숙였다.

두 분 사이의 일은 엄연히 시종관인 제롬의 몫. 제롬이 챙길 일이다.

그렇게 모두에게 명을 내린 후, 에단은 의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느릿하게 세웠다.

속으로 작은 한숨을 삼켰다.

조금은 평화로이, 그녀와 숨을 돌리려 했는데 참 다양하게 그를 귀찮게 만든다.

“귀찮은 일. 더 귀찮게 만들지 말고 제대로 해 와.”

기어코 그 앞에 앉겠다면야. 기꺼이 상대해 줘야지.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의 오른팔과 왼팔들의 목소리가 한 데로 모여 그의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

“고생 많으셨어요. 로엘 님.”

홀로 앉아 있는 그녀 뒤로, 언제나 부드러운 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라에게 근 1시간 동안 귀가 따갑게 잔소리를 들은 로엘은 수아의 목소리만으로도 반가웠다.

“수아 님.”

그래서 절로 어리광이 나왔다. 엄마한테 실컷 혼나고 언니를 찾는 느낌으로.

그런 로엘을 수아는 미소로 맞았다.

“꽤나 소란스러워졌네요.”

“그러게요.”

로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의 아니게 정말 궁 전체를 흔들어 놓은 셈이다.

그저 선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거기에 동맹 제의까지 얹었으니 소문이 어떤 식으로 날지 벌써부터 무서웠다. 겨우 잠잠해졌건만 또다시 북의 첩자란 소문이 돌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좋은 쪽으로 날 수도 있지요. 알고 보니 진짜 프란시아님이어서 일부러 북방의 테바로스가 챙기는 것이라든가?”

“에이. 그건 너무 좋게만 생각하시는 거다.”

“저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요새 로엘 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보면.”

“그게 다 수아 님의 작품이지요.”

수아는 그저 미소 지을 뿐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그 소문의 시작점이 수아라는 거, 로엘은 진즉 알았을 거라고 수아는 생각했으니까.

그 비밀이 들켜도 너무도 당당한 수아의 태도에 로엘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수아가 무슨 생각과 마음으로 그녀를 프란시아로 소문내었는지, 너무도 뻔해 그 이야기까지 지금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 이 상황에, 그 이야기는 그보다도 더 머리 아픈 이야기이므로.

“뭐 소문이야 어떻게 나든 상관이 없는데, 문제는…….”

당장 에단을 어찌 봐야 할지 몰랐다.

“분명이 불같이 화났을 텐데…….”

그가 어떤 표정과 어떤 눈으로 그녀에게 올지 너무도 상상이 됐다.

아마 그 누구 하나 말 붙이기 힘든, 그런 사신 모드겠지.

“이 정도라면, 확실히 폐하께서도 신경이 쓰이시겠네요.”

그런 로엘의 걱정이 그저 사랑싸움으로 들리는 수아는 로엘을 위해 준비해 온 차를 찻잔에 따르며 덤덤히 말했다.

“아주 귀한 사파이어네요.”

그런 수아의 시선이 데릭의 사파이어로 향했다. 아직 치우지 못한 채 고스란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데릭의 사파이어 목걸이가 영롱한 푸른빛을 빛내고 있었다.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그 바짝임은 마치 빨려 들어갈듯 아름다웠다.

“귀한 보석에 정성이 담겼군요.”

쉽게 구할 수 없는 크기의 원석. 거기에 작은 다이아들이 빼곡하게 박혀 사파이어의 아름다움을 더욱 높였다. 귀족의 영애로서 숱한 보석들을 보았으나 이토록 아름다운 사파이어 목걸이는 처음이었다.

이 목걸이가 귀한 건 단순히 비싸서가 아니다. 그 비싼 보석을 통해 정성과 진심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 목걸이가 위험했다.

“……당연히 귀한 거겠지요. 테바로스 황자의 상징인데.”

그 목걸이를 보는 그녀의 눈 역시 위험했고.

“아마. 테바로스에서, 아니 어쩌면 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사파이어일지도 몰라요.”

수아는 작은 한숨을 삼켰다. 왜 사라가 그리 잔소리를 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녀는 너무도 무방비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참 무심하다.

“로엘 님.”

수아는 잠시 찻잔을 내려 두었다.

“네?”

“폐하 앞에서 그런 눈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사라가 그러하듯. 똑바로 로엘의 눈을 직시했다.

이번엔, 수아 역시 로엘에게 제대로 말해 두어야 할 거 같다.

“도대체 제가 어떤 눈을 하고 있길래 다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눈이요.”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그분께 무심한지에 대해.

“누군가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듯, 눈앞의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을 그리고 있지요. 마치 제가, 눈앞에 없는 리암을 그리듯 말이에요.”

로엘은 턱 말문이 막혔다.

바로, 데릭을 그리워한 적 없다고 반박할 수 없었다. 그리워하진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그와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걸 추억이라고 한다면, 분명 추억이겠지.

“마마는 황자님과의 기억을 추억하실 때도 그러한 눈이셨겠지요. 아마 폐하 앞에서도 그러셨을 겁니다.”

“그건 그저…….”

“그저 어린 날의 일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저도 압니다. 추억이라 할 것 없는 의미 없는 일들이 기억났을 뿐이라고. 그런데 마마. 의미가 없었다면 기억하지도 않아요. 그저 잊어버리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추억한다는 것.

로엘은 옛 정혼자로서의 데릭을. 그리고 타르타니에서의 이반을 늘 추억했다.

그것도 에단 앞에서.

“폐하께서 자신의 침대를 거친 여인들에 대해 그 누구 하나 기억한다면, 로엘 님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이리 표현하니 이제야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겠다.

그래서 바로 표정이 굳어 버렸다.

“아주 사소한 것일 수 있지요. 어떤 여인의 팔찌가 마마의 것과 비슷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실 수도 있고, 마마의 드레스가 번뜩 다른 누군가를 떠오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저 기억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마는 알지만, 그래도 마마는 싫지 않습니까?”

싫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를 지나쳐 갔던, 그의 머릿속에 있는 모든 여인을 지워 버리고 싶을 만큼.

“로엘 님. 황자님과의 일도, 데릭 황제와의 기억도 폐하 앞에서는 묻어 두세요.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저 어린 날의 좋은 추억으로라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그분께 알리지 마세요. 어쩌면 그건 폐하에겐 상처일 수 있습니다. 고작 제가 지어낸 거짓 이야기에도 상처받으신 로엘 님처럼요.”

수아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며 미소 지었다.

처음부터 에단의 침대에 올라간 여자는 몇 되지 않는다고. 그리고 몇 안 되는 그녀들은 그가 절대 기억할리 없다고. 분명 그녀는 모든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이리 질투에 휩싸여 버렸다.

이리 보면, 로엘 역시 그저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인임을 새삼 알게 된다.

“그러니, 그러지 마세요. 옛이야기는 제가 대신 들어 드리겠습니다.”

언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으려나.

로엘은 진짜로 수아에게 어리광을 부려 버렸고, 수아는 그런 로엘을 위로를 해 주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저는 정말로 수아 님이 너무 좋아요.”

“네. 저도요.”

수아의 잔잔한 미소에 로엘 역시 따라 웃었다. 수아는 언제나 따뜻한 말로 그녀를 달랬지만, 항상 그 속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조언들이 담겨 있었다. 자칫하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어려운 말들조차도 수아가 하면 바로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로엘은 그녀가 자각하지 못한 실수를 늘 바로잡아 주는 수아가 그저 고마웠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당연한 것인데도, 제가 그걸 몰랐네요.”

그녀에겐 그저 아무 의미 없는 과거일 뿐이라고 수천 번 말하여도, 상대에겐 의미가 없지 않다는 거. 수아의 비유 덕분에 너무도 뼈저리게 알아 버렸다.

그랬는데, 그리 이반과 데릭에 대해 말해 왔으니.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눈치가 없었나.

“고마워요. 수아 님.”

“저야말로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아의 손을 꼭 잡는 로엘의 손을 수아 역시 힘주어 마주 잡아 주었다.

이까짓 일이 무어라고 이리 여러 번 감사의 인사를 들을까.

그녀는 무려 그녀의 목숨을 살려 주었는데.

“일단 이 사파이어부터 치워야겠네요.”

“네.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언제 들이닥치실지 모르니, 수아 님 가시면 바로 페니에게 나머지 선물들도 제대로 치우라고 해야 겠어요.”

그녀는 결심한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다 난지라 숨길 것도 없는데도 그녀 스스로 마음이 급해졌나 보다.

사랑하는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노력하는 거.

너무도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수아의 눈에는 그저 로엘이 귀여웠다.

‘화 풀어. 정말 그런 거 아니라니까? 걔가 멋대로 손잡은 거야!’

‘리암 따위, 진짜 싫어!’

‘내가 다 잘 못했으니까. 응? 수아!’

그 사랑스러운 모든 행동들이 수아의 오래된 추억들도 떠오르게 만들었다.

수아는 또 한 모금 차를 들이켰다.

그녀가 에토르에 가 있었던 그 시절. 황궁에 홀로 남아, 로엘을 대신하여 몰브의 뒤처리를 하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엄밀히는 로엘을 생각했다.

몰브로부터 자신을 구하고, 황궁을 구하고, 나아가 이제는 폐하를 구하러 떠나는 그녀를 보며 스스로가 참 부끄러웠다. 같은 여자로 태어나 비슷한 세월을 살아왔는데 어찌 이리 다를 수 있을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로엘에 비해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해 보려 들지 않았다고.

“로엘 님.”

“네. 수아 님?”

그래서 나도 더 이상 숨지 말아야겠다고.

“저도 이제 용기를 좀 내어 보려고요.”

그렇게 로엘을 닮아 봐야겠다고.

“오늘 밤. 폐하의 시간을 제게 주세요.”

조금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럽기도 한 수아의 선전포고에 로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에 비해 수아의 미소는 오히려 더 진해졌다. 역시나 이리 당황해하실 줄 알았다.

해가 저물어 가는 카이로스 황궁의 저녁.

로엘에게도, 에단에게도. 그리고 수아에게도.

참으로 정신없는 그런 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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