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6. 오래된. 잊지 않은 약속 (37/69)

Chapter 36. 오래된. 잊지 않은 약속

“누가 뭘 보내?”

간만에 여유로운 티타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던 로엘은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식에 반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테바로스의 데릭 황제께서 로엘 님께 생신 선물을 보내셨다는데요…….”

소식을 전하는 딜리아도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놀랄 일인데, 보내는 이가 테바로스의 데릭 황제라니.

“그 사람이 나한테 왜 생일 선물을 보내.”

로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평화롭게 안정을 취하려는데, 별일이 다 일어났다.

데릭으로부터의 생일 선물이라니.

그것도 한 달 전에 죽어라 전쟁을 하던 적국의 황제가 적국의 황제 비에게 말이다.

이건 누가 보아도 너무 이상한 일이다.

“마마. 어떻게 할까요? 후궁 앞에 다들 대기 중인데…….”

“거의 사신단 급으로 왔어요. 양이 어마어마하던데요?”

로엘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지 않아도 구설수가 많아 밖으로 안 나돌고 있는데, 구설수가 하나가 더 추가되게 생겼다.

그녀가 데릭의 정혼자였다는 사실은 나름 그녀의 측근들만 알고 있었는데, 왠지 이번 사건으로 그마저도 동네방네 소문이 날 것 같았다.

로엘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폐하한테도 소식이 전해졌겠지?”

“네. 뭐…….”

로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혼자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눈빛부터 바뀌었는데 그것으로 모자라 생일 선물이라니. 아마 난리가 날 거다.

“일단은 나가라도 보자. 받든 안 받든 그대로 둘 수는 없을 거 아냐.”

“네. 마마.”

로엘은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지난 에토르 전투에서 그와 얼핏 눈이 맞았다. 오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명확히. 분명 로엘은 데릭을 보았고 데릭도 로엘을 보았다.

그 검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로엘은 오랜 기억 속의 그 어린 황자 데릭을 떠올렸다.

그는, 변했으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소년이었던 그는 남자가 되었고, 황자였던 신분은 황제가 되었다.

그녀 역시 토르티아의 공주에서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되었지.

두 사람이 전쟁터에서 서로 적이 되어 만나게 될 줄, 그 당시 두 사람은 상상이라도 했을까.

“아카시스 마마를 뵙습니다.”

그녀가 후궁 성문까지 나오자, 미리 나와 있던 제롬이 제일 먼저 그녀를 맞이했다.

제롬 뒤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행렬에 로엘의 입이 다 벌어졌다.

페니의 말대로 거의 사신단이 온 수준이었다.

“용케 황궁 성문을 통과했군요.”

“외교적 결례를 범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분께서 쉽게 허락하셨을 거 같진 않은데.”

“설득의 시간이 필요했지요.”

제롬은 작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불태우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할, 그런 분위기였다.

아론과 제롬이 받고 나서 불태우든 말든 하시라고 겨우겨우 설득한 덕분에 황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사후 설득은 아무래도 제 몫이겠군요.”

“네 마마.”

이번엔 로엘이 한숨을 삼켰다.

“카이로스의 아카시스 마마를 뵙습니다.”

이 많은 짐을 들고 온 버리가 그녀 앞에 고개를 숙였다.

테바로스를 상징하는 국가 문양이 박힌 정복을 한 채로 그는 당당히 카이로스의 사람들 앞에 섰다.

제롬은 물론 제롬과 함께 온 황궁의 황군이 꽤 되었는데도 조금도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기죽기는커녕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 카이로스의 아카시스, 로엘 네아레스입니다. 테바로스의 전령은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세요.”

그녀의 붉은 눈이 또렷히 버리를 향했다. 버리는 역시 그런 로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또렷히 보았다.

이리 가까이서 보는 거, 처음이었다.

작고 하얀 얼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하며, 부드럽게 떨어지는 예쁜 신체 라인에 이상적인 몸매까지.

확실히 미인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아름다운 분이다.

이분이 그렇게 그의 주군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거다.

“테바로스의 수석정무관 버리 한스.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님께 인사드립니다.”

소문이 무성한, 여명의 공주. 승리를 가져다주는 여신.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로 태어나 온갖 주목을 받더니, 부모를 한순간에 잃고 나락에 떨어졌다.

그러나 보란듯 다시 날개를 펴, 지금 이 자리 카이로스의 가장 높은 여인이 되었으니 그 인생이 얼마나 파란만장한가.

버리는 인생이 굴곡진 거로 친다면, 정말 그분과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얼핏 들었다.

“테바로스를 대표하여, 테바로스의 황제, 데릭 폐하의 전서를 전합니다.”

버리는 말과 함께 테바로스의 황제 문장이 박힌 서신을 그녀에게 건넸다.

찬찬히 그 두루마기를 펴며 로엘은 익숙한 필체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쩜, 그 어린 날의 소년의 글씨와 이리도 똑같을 수 있을까.

먼 곳에 있는 정혼자와 서신을 주고 받던 어린 날이 생각나 버렸다.

『오래된 약속을 새벽의 빛을 가진 그대에게, 생일을 축하하며.

황제 데릭 테바로스』

서신과 함께 따로 그녀에게 전해진 작은 상자를 로엘은 천천히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는 잘 세공된 목걸이가 있었다. 가운데 박힌 커다란 사파이어를 보는 순간, 로엘은 데릭이 말하는 그 ‘오래된 약속’이 무얼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기어코 지키셨네.”

사파이어는 9월의 탄생석. 황자를 상징하는 팔찌를 각자의 탄생석으로 하는 테바로스의 전통에 따라 데릭은 사파이어 팔찌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황위를 물려받는 황태자의 경우, 자신의 탄생석이 아닌 황제를 상징하는 테바로스 고유석을 받게 된다. 황태자와 황자는 엄연히 다른 존재라는, 눈에 보이는 차별이었다.

어린 데릭은 그것이 꽤나 못마땅했다.

‘그럼 저 주세요.’

‘뭐?’

‘그렇게 싫으시면 저 주시면 되잖아요.’

‘이건 테바로스 황자의 상징이야. 그렇게 쉽게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황제가 되실 때 주시면 되겠네.’

그때는 몰랐으나, 이리 어른이 되어서 생각해 보면 그때 그녀의 말이 그에게는 꽤나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황제가 너무 되고 싶었던, 야망이 많은 다섯째 황자. 그 어린 황자에게 황제가 되라 말해 주는 이는 아마 그녀뿐이었으리라.

‘그래. 내가 황제가 되는 날, 이건 너에게 줄게.’

작은 데릭은 작은 로엘의 손을 들어 그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며 약속했다.

데릭 황자를 상징하는 그 사파이어. 그가 황자의 자리를 박차고 올라 황제가 되는 그 순간, 믿음의 선물로서 너에게 주겠노라고.

‘사파이어는 불멸을 뜻하지. 그러니 로엘 네아레스. 나는 너와 나의 관계를. 우리의 인연을. 평생 함께할 것을. 나의 이름과 테바로스의 명예를 걸고 너에게 맹세해.’

어린아이의 그 맹세는 충분히 진지했다. 그리고 진심 어렸다.

어쩌면, 프러포즈였을지도 모르지.

어린 데릭이 평생 함께하겠다는 그 의미를 얼마나 깊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로엘은 그 말에 두근거렸다. 그리고 위안이 되었다.

‘그러니, 기다려. 내가 이 사파이어를 너에게 주러 갈 때까지.’

그 사파이어가 드디어 그녀의 손에 온 거다.

사는 데 버거워 잊고 있었던 그 약속을 그는 이렇게 지키고야 말았다.

어린 그가 생각이 나서, 순수했던 그 마음이 떠올라 로엘은 미소 지었다.

“마마.”

“아. 네.”

그 모습이 곁에 있던 사라의 마음에 아주 들지 않았다. 워낙 난리가 난 일이라 당연히 총괄하는 시녀장인 사라도 나와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구설수가 많으신 분인데 적국의 황제에게 받은 보석 선물에 저리 웃으시다니.

황궁에 눈이 얼마나 많은데, 이 무슨 생각 없는 처신인가.

누가 보아도 눈치를 주는 사라의 눈길에 그제야 로엘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폐하께서 공주님의 생신을 축하한다고 직접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공주님이 아니라 아카시스님입니다.”

“토르티아의 공주님이시기도 하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는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에서는 카이로스의 예법을 지키세요.”

제롬은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았다. 좀처럼 나서지 않는 제롬이라, 로엘은 조금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카이로스의 예법에 따라 아카시스님을 뵙고 있습니다. 다만, 데릭 폐하께서 마마께 드리는 이 축하 인사는 테바로스의 황제로서 옛 정혼자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건 토르티아의 공주님이 맞겠지요.”

‘옛 정혼자’라는 그 단어에 제롬과 사라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일부러 쉬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떠벌일 줄이야.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눈으로 역정 내는 그들의 반응에, 버리는 실소를 뱉었다.

살짝, 진짜 안 되는 거냐고 반문하던 데릭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천인공노할 말이라도 했다는 듯한 그들의 태도가 괜한 반발심을 일으켰다.

“버리 경. 말을 삼가세요.”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이리 대놓고 각을 세우는 것은 절대 버리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렇게 이곳에 온 것 자체도 아주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이리 받아쳐 버린 자기 자신에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러면 정말 폐하와 다를 게 무언가 싶다.

그렇게 저분은 안 된다고, 애먼 곳에 마음 쓰지 마시라 했는데 주군께서는 기어코 이 난리를 피우시고야 말았다.

물론 이 생일 선물이라는 명분하에 이리 많은 금은보화를 드린다고 한들, 데릭이 그녀와 무언가를 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님을 버리도 안다.

그러함에도 데릭은 저 목걸이를 기어코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거다.

그분께 있어서 그만큼이나 저분이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

버리는 빤히, 로엘을 보았다.

“그만하세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저 작고 여린 여인일 뿐인데, 왜 이리 이분께 집착하시는 걸까.

버리는 그저 한숨을 삼켰다.

그 이유가 애석하게도 너무 명확해서.

“버리 경. 저는 이 많은 것들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목걸이는 데릭 폐하와 저의 오래된 약조에 기인한 것이기에 받겠으나 나머지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녀가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어서도, 정치적으로 가치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마음에, 진심으로 품었던 거다.

“마마.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공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거기에 버리고 오라 하셨습니다.”

“하아. 정말 그분답군요.”

로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그녀가 받지 않으리란 걸 데릭은 알고 있었던 거다.

알고 있었으면 보내질 말든가. 로엘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렇다면, 이건 제가 카이로스의 백성을 위해 쓸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이미 마마의 것이니 어떻게 사용하시든 관계없습니다.”

로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데릭은 이마저도 예상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페니.”

“네. 마마.”

“일단은 정리하고, 나중에 어떻게 쓸지 고민해 보자.”

“네.”

어쩔 수 없는 장사꾼인 페니는 갑자기 들어온 북방의 값비싼 금은보화들에 아까부터 싱글벙글이었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물 장부를 받더니, 바로 그들을 그녀의 텅텅 빈 창고로 안내했다.

“버리 경.”

“네, 마마.”

로엘의 부름에 버리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버리는 괜히 긴장이 되었다. 적절히 낮아진 목소리와 진지한 붉은 눈이 그렇게 만들었다.

확실히 조용한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다.

“버리 경은 데릭 폐하의 최측근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분과 오래되었고, 그만큼 그분께 충성하고 있으며, 그만큼 그분의 신뢰를 받는 분이겠죠.”

“과찬이십니다.”

“그런 버리 경께서 이곳까지 직접 오셨다는 것은 단지 저에게 이 목걸이를 전해 주기 위함만은 아니겠지요.”

버리는 잠시 답이 없었다. 생각보다도 너무 빨리, 그리고 손쉽게 속마음을 들켜 버렸다.

이곳에 오기 전에, 투덜거리는 버리에게 데릭이 그랬다. 절대 로엘을 만만히 보지 말라고. 그랬다가는 정말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내어 주고 올 거라고.

그런 말씀은 웃으면서 하지 마시라고 짜증을 냈지만, 솔직히 버리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일이다. 이 눈앞에 서 계신 공주께서 카이로스의 황군을 이끌고 와 테바로스에게 패배를 안긴 것이.

“그렇다면 우리는 할 이야기가 있겠군요”

그런데 어찌 이분을 만만히 볼까.

“버리 경. 저와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잔잔히 미소 짓는 그녀의 말에, 버리는 깊게 허리를 숙였다.

“마마의 명을 받듭니다.”

태양이 내리쬐는 카이로스 황궁에서 토르티아의 공주가 테바로스의 사신을 맞이했다.

***

“그리하여 지금 마마께서 버리 경과 차를 들고 계십니다.”

“하.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제롬의 상세한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한 자리에 있었던 루카스의 너무도 예상된 반응이 나왔다.

아론 역시 바로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우리가 테바로스와 전쟁을 한 지 한 달이 되었냐고, 두 달이 되었냐고. 아직도 에토르에서 죽고 다친 내 새끼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열불이 나는데. 뭐? 테바로스에서 뭐가 와? 이건 우리를 기만하는 거라고요!”

루카스는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 버리에게 칼을 겨눌 듯이 흥분하며 말했다.

여기서 가장 테바로스와 치열하게 싸운 게 루카스인지라, 아론 역시 이번만큼은 루카스를 나무라지 않았다.

솔직히 아론 입장에서도 로엘의 행동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마마께서 경솔하셨습니다. 아직 테바로스에 대한 군사들과 백성들의 감정이 좋지 못한데, 이렇게 대대적으로 선물을 받으시다니요. 그러지 않아도 마마의 작은 흠이라도 잡으려 하는 원로들에게 빌미를 주기 너무도 좋은 상황입니다.”

“애초에 그 어린 자식은 왜 그렇게 마마한테 집착하는 건데? 아니. 자기가 먼저 파혼했다면서. 그러면서 이제 와서 뭐 어쩌자고? 다시 무르고, 데려가겠다는 거야, 뭐야.”

“대장군.”

제롬이 바로 루카스의 말을 끊었다.

안 그래도 매우 심기가 좋지 못한 폐하의 마음에 더 불을 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폐하. 마마께서는 무언가 생각이 있으신 듯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 마마께서 테바로스가 단순히 생일 선물만을 주기 위해 이곳까지 왔으리라 생각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야 그렇겠죠. 만일 그랬다면, 애초에 그 수석정무관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어요.”

아론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솔직히 로엘이 왜 그랬는지 아론도 안다.

“버리 한스가 데릭 황제의 오른팔이자 왼팔인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건 마치 저와 루카스가 동시에 간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의도가 있겠지요. 그 버리 한스를 보낼 만큼의 꽤나 커다란 의도.”

알고 있으니 더 화가 나는 거다.

아론이 표정이 구겨졌다.

“제일 괘씸한 건 그 의도를 폐하 앞이 아닌 로엘 마마를 통해서 전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손하며, 그 불손함을 알면서도 받아 주는 그녀는 또 얼마나 안일한가.

“그 자식이 진짜 마마에게 치근덕거리고 있다니까?!”

“넌 좀 조용히 있어.”

아론은 짜증스럽게 받아쳤다.

정말 테바로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아도 에토르 건으로 한 방으로 먹은 셈이라 그 버리라는 인물에 대해 아론은 심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번에는 또 어떠한 꿍꿍이를 가지고 왔는지, 연달아 한 발짝 밀리는 기분이라 자존심이 상했다.

“야. 네가 제일 똑똑해.”

“그런 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한번 당했다고 풀 죽지 말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20년 넘은 죽마고우

단번에 아론의 마음을 알아챈 루카스의 무심한 위로에 아론은 웃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 차렸다.

루카스의 말대로 쓸데없는 감정을 소모할 때가 아니었으므로. 이건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제 좀 제대로 된 의견이 나오겠군. 그럼 테바로스의 상황을 말해 봐.”

에단 역시 그런 이성적인 아론을 원했나 보다. 정작 자신이 지금 충분히 감정적이므로.

마음 같으면 당장이라도 테바로스에서 온 모든 것들을 불사르고 싶은 그런 심정이다.

“그건 내가 할게.”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이반이 콜린과 함께 들어왔다.

지금 이 순간 딱 필요한 인물이었다.

“다녀왔습니다. 폐하.”

에단은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반에게 밀명을 내렸다. 테바로스에 대해 알아 오라고.

카이로스는 테바로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패배라고 할 수도 있었다.

최근 10년 동안 가장 큰 피해를 보았으며, 몰브에 의해서였더라도 황궁도 잠시나마 점령당했다.

그런데 그 장본인인 테바로스에 대해 카이로스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에 비해 테바로스는 몇 년간 철저히 카이로스를 분석한 덕분에 잠시나마 승리의 근처까지 갈 수 있었던 거다.

이건 명백히 카이로스의 안일함과 자만이 낳은 결과다.

언제든, 누구든 그들의 자리를 뺏을 수 있다는 거. 그렇게 사방에서 치고 올라오고 있다는 거.

그렇기에 절대 안주하지 말고 그들 역시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는 거.

이번 테바로스와의 전쟁은 이를 다시 한 번 똑똑히 상기시켜 주었다.

“이거 황궁이 엄청 시끄럽던데. 테바로스가 왔다고?”

“네. 그것도 로엘 마마에게로요. 시끌벅적하게 생일선물을 보내 왔답디다. 그 잘나신 테바로스의 황제께서.”

“누가 뭐를 보내?”

어이없어하는 이반의 반응이 너무도 정상적이라 루카스와 아론은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이반 님. 심지어 버리 한스가 들고 왔고, 지금은 로엘 님께서 그분과 티타임을 즐겁게 가지고 계시답니다.”

“‘즐겁게’라고 보고드리진 않았습니다.”

이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도 로엘다웠다. 분명 버리 급이 내려왔으니 무언가를 알아내려 한 거겠지만, 참 눈치가 없다.

아무리 그 의도가 순수하고 좋았다고 한들, 이곳 황궁에서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을.

원로원들의 질타와 황궁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그렇다 하더라도, 정작 제일 중요한 사람의 심기를 이리 모르다니. 정말 참으로 로엘답다. 이리 눈치 없는 건.

“에토르 전쟁 이후 테바로스는 잠시 휴기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래도 잠시 전쟁을 멈추고 내정을 돌보기로 결정한 거 같습니다.”

“일단 백성들이 엄청나게 황제를 칭송하는 분위기야. 워낙 원정에 성공한 것도 이유가 되지만, 잠시라도 카이로스의 성을 함락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듯했어. 뭐랄까 이번에는 실패해도 다음은 성공할 수 있다는 그런 분위기랄까?”

“하. 누구 마음대로.”

“참고로 루카스는 진짜 괴물 개로 변신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어요.”

콜린이 무표정으로 한 말에 루카스는 어이없단 표정이었으나, 다른 이들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얼굴이었다.

“좀 날뛰었어야지.”

아론은 쯧쯧 혀를 찼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나, 속으로는 매우 흡족했다. 루카스 세버가 어느 정도인지 널리 널리 알려지는 건, 카이로스 입장에서 나쁠 게 없으니.

“소문이 루카스만 난 게 아닐 텐데.”

에단의 눈이 이반을 향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말이지 당해 낼 수가 없다. 뭐 저리 모르는 게 없을까.

콜린 역시 이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반 전하에 대한 소문도 엄청나게 퍼진 듯합니다. 현 카이로스 황제의 유일한 형제로서, 오랜 기간 북방에서 지냈다고. 그 모습이 마치 그분을 닮았다고.”

“콜린.”

이반이 잠시 콜린을 제지하였으나, 콜린은 사실을 말했으니 떳떳하다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루카스 세버가 대단한 건 만천하가 알던 일이라 새삼스러울 게 없다.

그러나 이반은 다르다. 지금껏 평생을 가진 것에 비해 숨죽이고 살았던 분.

비록 황좌에 올리는 것을 포기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반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콜린은 에단만이 이반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이반 역시 루카스 세버만큼 강하다는 것을. 에단 카이로스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그런 그가 카이로스에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릴 거다.

그리하여 이분께서 받아야 할 대우를 받게 하는 것이 콜린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토르티아가 난리 나겠군.”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그 정도까지야.”

에단은 이반의 겸손을 일축했다.

이반이 가진 가치만큼 인정받기 원하는 것. 콜린보다도 에단이 훨씬 오래전부터 염원하고 노력하던 일이다.

이반을 가장 많이 아는 이 역시 에단이고, 이반을 가장 오래 봐 온 이도 에단이다.

이제야 그의 진가가 세상에 알려진다는데 에단은 그저 기쁠 뿐이다.

“아무튼, 테바로스가 그렇게 휴기에 돌입했어. 그동안 미뤄 두었던 제도를 정비하고 인사도 단행하고 있지.”

“무엇보다 이번 원정으로 수복한 영지가 많아 그것도 편입시키면서 관리해야 하고요. 뭐랄까, 체계 없이 넓기만 했던 테바로스를 좀 더 제국처럼 만든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롤모델은 너무도 확실하지.”

바로 카이로스.

이반이 두 눈으로 보고 온 테바로스의 수도는 정말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가 10년 전에 갔었던 그 테바로스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참 카이로스를 많이 닮아 있었다.

“카이로스를 베끼다니. 확실히 똑똑하네요. 그 황제.”

“절대 안 그럴 거 같더만, 필요할 때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는 거잖아. 더 열받게.”

에토르 전쟁 때도 느꼈지만. 참 영악한 황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

그러니 몰브도 이용하고, 그러니 토르티아도 이용할 수 있다.

양심이라든가, 선이라든가. 테바로스의 황제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그의 우선순위는 단 하나. 바로 테바로스의 영광.

“그렇다면 답이 나왔네.”

잠자코 있던 에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자연히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반. 로엘에게 가.”

이반은 조금 놀란 눈으로 에단을 보았으나 에단의 눈에는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차디찬, 그 황금의 눈을 보며 이번에는 이반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보아하니 그의 형제가 여간 화난 것이 아니다.

“테바로스는 화친 제의를 할 거야.”

화친이라. 테바로스에게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단어가 나왔다. 그래서 모두 다 놀란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았다.

선전포고라면 모를까 화친이라니.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당연하다. 불과 한 달 전에 멋대로 쳐들어와 그렇게 카이로스를 들쑤셔 놓고 이제 와 아무렇지 않은 척 우방을 맺자니.

이건 기만이다. 저들이 감히, 카이로스를 이용하려 드는 거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여자를 통해.

그러니 그가 화날 밖에.

“싫어요.”

루카스는 바로 말했다.

“보나마나 꿍꿍이를 가지고 접근했다가 필요한 것만 가지고 뒤통수 치려는 속셈인 거예요. 충분히 그럴 인격이라고. 그 황제.”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데릭 황제라면 아주아주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요. 그러니 거절하시죠, 폐하. 우리는 아쉬울 게 전혀 없습니다.”

“그건 들어 봐야 알지.”

조금 격해진 루카스와 아론과 다르게, 이반은 차분히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나오리라는 거. 모를 리 없어. 그러함에도 이렇게 시끄럽게 화친을 제의하러 왔다는 건 그만한 패를 가지고 왔다는 거야. 그게 무엇이든 우리가 쉽게 거절하지 못할 바로 그런 패.”

이반은 데릭과 테바로스를 생각했다.

정말 몸으로 느껴지도록 테바로스는 급격히 발전했으며, 백성들은 놀라울 정도로 데릭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다.

패전하고 돌아온 황제를 이리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백성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솔직히 이반은 이번 테바로스 실사를 다녀오고 제법 충격을 받았다.

“폐하. 저희는 조금 더 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북방 정벌을 지나치게 안일하게 생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나선다면, 얼마든지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건 자만입니다.”

이반의 말이 세게 나왔다. 루카스와 아론의 자존심을, 아니 에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만큼.

하지만 이반이 보고 느낀 건 정확히 그러했다.

우리가 너무 안일했다고.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하였다고.

“그러니 폐하. 테바로스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상대하셔야 합니다.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여서는 쓰러트릴 수 없는 상대입니다.”

직언을 하기에는 조금 상황이 안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그래도 이반은 말해야만 했다. 이렇게 갑작스런 테바로스의 방문. 어쩌면 이것도 그들 모두가 뒤통수를 맞은 일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 이것 역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저들을 대해야 한다.

지금 로엘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거다.

누구보다도 빠른 판단 아래에, 누구보다도 성실히.

“황자 이반. 가서 아카시스를 도와.”

그걸 에단 역시 안다.

그러니, 이 유치한 질투에 사로잡혀도 이리 삭여야만 하는 거다.

“예. 폐하. 명을 받듭니다.”

테바로스와의 악연이 좀처럼 쉽게 끊길 거 같지가 않다.

***

“테바로스에서 귀한 차군요.”

“예. 황실에서만 마실 수 있지요. 이거 역시 폐하께서 챙기신 겁니다.”

로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오랜만에 마시는 것임에도 그 향을 기억하고 있을 만큼, 그녀가 꽤나 좋아하던 차다.

그녀가 이를 즐기는 것을 알고 있어, 데릭은 주기적인 정혼자와의 만남에 늘 이 차를 가지고 왔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로엘은 그 작은 배려에 제법 감동했었다.

자주 보지도 않는 그녀를 위해 날마다 기억해 주고 챙겨 오는 것.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한 일이니까.

“데릭 폐하는 잘 계시나요. 잘 계신 거 같지만.”

“잘 계십니다. 아직까지 황후 간택을 안 하고 계시지만요.”

로엘은 별다른 답을 하지 않고 그저 차 한 모금을 마셨다.

버리가 무슨 의도로 그 말을 하는지 굳이 따지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버리 역시 그런 로엘의 반응에 뒷말을 잇지 않았다. 정말 이럴 마음으로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닌데 계속 이상한 심통이 났다.

그래서 카이로스 사람들 앞에서도, 이분 앞에서도 계속 데릭과 로엘의 인연을 언급했다.

그리고 반응을 살폈다.

자신의 주군만 그렇게 답답스럽게, 이미 지나가 버린 인연을 붙잡고 있는지.

아니면 이분 역시 그 이어지지 못한 그 인연에 조금이라도 매어 계신지. 알고 싶었다.

“많이 바쁘신가 보군요.”

“아니면 마음에 두신 분이 계시거나.”

이번에도 로엘은 침묵했다.

이 주제는 대꾸하는 거 자체가 현명하지 못한 처신이므로.

이리 직접 버리와 단둘이 마주하고 보니, 사라가 눈에 불을 켜고 잔소리할 게 훤했다.

“그저 바쁘신 거겠지요. 지금 한창 바쁘실 때 아닙니까, 그분.”

그런데 그 전에, 더 먼저 그녀를 혼낼 사람이 등장했다.

언제 후원에 들어왔는지, 이반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로엘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이반을 보자, 이반은 그저 싱긋 웃었다.

“이렇게 봅니다?”

“카이로스의 황자님을 뵙습니다.”

능글맞은, 그러면서도 조금은 날카로운 이반의 인사에 버리는 당황하지 않고 예를 갖추었다.

칼 같은 그 반응에 이반의 미소가 진해졌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이 바로 느껴졌다.

“지난번 만남이 너무 강렬하여 찾아왔습니다. 카이로스에서 이렇게 차 마시며 마주하면 매우 신선할 거 같아서.”

“테바로스에서 제법 빨리 오셨군요. 좀 더 계셨으면 저희가 공식적으로 초청하였을 텐데 아쉽습니다.”

정말 만만치 않았다.

로엘도 이반을 따라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데릭의 최측근. 다섯째 황자 데릭 테바로스를 황위에 올린 장본인.

그게 바로 눈앞에 있는 버리 한스다.

루카스가 데릭을 향해 달려들 때 제일 먼저 그 앞에서 자신의 주군을 지킨 그는 말 그대로 데릭의 왼팔이자 오른팔.

왜, 그 의심 많고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그래서 쉽게 곁을 주지 않은 데릭이 버리를 곁에 두는지 이 잠깐의 대면으로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거 아쉽네. 이리 공식 초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오실 줄 알았으면 나도 그럴 걸 그랬어. 응? 네아.”

“황자님.”

“이리 우리 아카시스님의 생신을 챙길 줄 알았다면, 기왕 간 거 대신 밥이라도 먹고 올 걸 그랬네.”

이번만큼은 버리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 어느 황자가 형수 되는 아카시스를 애칭으로 부르며, 반말을 하겠는가.

누가 보아도 친밀감이 느껴지는 그 태도가 자연히 두 사람 사이에 그들이 모르는 관계가 있으리라 짐작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로엘이 한숨을 삼킬 밖에.

이반이 이러는 이유를 뻔히 알지만, 참으로 유치한 방법이다.

“지금 충분히 공식적인 자리이니 예를 갖춰 주세요, 황자님.”

“아. 공식이었나요.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일관되게 비공식적으로 행동하시는 거 같아 그런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능글맞게 웃으면서 비꼬는 거 하나는 정말 타고났다.

로엘은 잔뜩 날이 서 있는 이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이반 역시 꽤나 이 상황에 대해 화가 났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이리 더 드러내려는 거다. 정혼자였다는 그 오래된 인연, 데릭 황제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로엘 네아레스와의 지난 인연은 나 역시 있다고.

그러니, 그깟 흘러간 인연 따위에 기대지 말라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괜한 말로 시간 뺄 상황은 아닌 거 같으니.”

“네, 그러시죠.”

이 유치한 기싸움에 로엘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테바로스의 목적. 그리고 데릭의 심중

“화친을 제안하러 오셨나요?”

그래서 버리가 선수 치기 전에 로엘이 선수 쳤다.

너무도 정확한 그 ‘화친’이란 단어에 버리는 놀란 눈으로 로엘을 보았다. 이반 역시 에단이 화친을 이야기했을 때보다도 더 놀란 눈으로 로엘을 보았다.

그녀는 가장 정신없었을 이 사태의 주인공이었으면서도 정확히 테바로스를, 그리고 데릭을 보고 있었단 거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는 얼굴로 싱긋 웃으며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잘 하셔야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솔깃하지 않는다면, 버리 경께는 그리고 테바로스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뒤늦은 실소가 나올 밖에. 로엘을 도우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제 보니 그녀는 전혀 그의 도움이 필요 없다.

“역시 너무 멋져. 반하겠어.”

“……조용히 해.”

그녀의 귀에 슬쩍 말하는 이반에게 로엘은 찌푸렸다.

도움을 주는 건지 구경하러 온 건지 모르겠다. 물론 앉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 든든하긴 했지만.

에단이 보냈다는 거, 이반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로엘도 안다.

그러니 더 열심히 잘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협상을.

버리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곧게 허리를 폈다. 그리고 정확히 로엘의 붉은 눈을 직시하였다.

“대 테바로스는 카이로스에게 제안합니다.”

잔잔한 바람이 로엘의 머리를 흩날리고, 하늘 가운데 떠오른 태양이 빛을 내리쬐었다.

“토르티아 정벌을 위한, 동맹을.”

태양처럼 빛나는 카이로스와 별처럼 떠오르는 테바로스.

이 두 나라가 손을 잡을지 모른다니.

새로운 시대, 새로운 바람이 부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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