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 나의 하늘, 나의 주군
데릭이 테바로스의 다섯 번째 황자로서 숨을 죽이고 살던 시절. 테바로스에도 한창 카이로스의 에단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러지 않아도 중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북부의 사람들이라 신의 축복을 받은 아름다운 황금의 황태자 이야기는 모두의 관심을 끌 만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황위가 보장된 평탄한 인생에 능력과 축복까지 함께라니.
황위는커녕,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데릭에게 그런 에단의 미담들은 항상 그의 신경을 건들 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데릭에게 에단은 뿌리 깊은 자격지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짜증 날 정도로 견고하네요.”
데릭이 황위에 오르자마자 쉬지 않고 영토를 넓혀 가는 이유. 북부를 넘어 이렇게 중부마저 넘보는 이유. 그리고 그 첫 타깃으로 카이로스를 선택한 바로 그 이유.
“견고해 봤자, 시간에는 무너지게 되어 있어.”
전부 에단을 향한 데릭의 일방적인 집착.
데릭은 저 에단을 쓰러트리겠다는 일념으로 이 전쟁을 시작했다.
아무리 승리의 원정이라 하더라도 4개월이 넘는 원정 기간 동안 분명 테바로스의 군대는 지쳐 있었다. 그래서 데릭은 욕심을 내지 않았다. 소삼국도 쉽사리 내주었고, 시엘도 순순히 빠져나왔다. 그렇게 얻은 마지막이 바로 에토르.
절대, 넘겨줄 수 없다.
“토르티아도 근 두 배에 달하는 인원이었어. 그 전투를 끝내고 채 나흘도 지나지 않았지.”
“그에 비해 저희는 그 사이 체력을 비축해 두었죠.”
버리는 망루에서 데릭과 함께 전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얄미울 정도로 영악한, 저 에단의 황제는 교묘히 테바로스의 군대를 에토르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었다. 일정 거리 이상으로는 나서지 않으니, 테바로스 역시 밖으로 나설 수박에 없었다.
성 안에서의 수성이었다면 훨씬 수월했겠으나, 카이로스 역시 공성이 훨씬 어려우므로 일부러 평지로 테바로스를 끌어낸 거다. 게다가 성안에서는 그들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을 테니 더더욱 그러하였을 거고.
적당히 도발하고, 적당히 빠지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가는 것.
저러한 군대를 가지고도 이리 신중할 수 있다니.
화가 날 정도로 완벽한 남자다. 저 황금의 황제는.
“폐하의 명대로 되도록 전면전은 피하고 자잘한 전투만 하고 있는데, 차라리 총공격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대로 더 시간을 끌었다간, 카이로스의 지방군들이 몰려올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럼 저희에게 훨씬 불리해집니다. 에단 황제에게 군사만 충분하다면,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어요.”
버리는 단호히 말했다. 그 말에 데릭은 반박하지 못했고.
아주 솔직히, 데릭은 카이로스의 황군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소문이란 본디 과장된 법이니까. 그의 성과가 화려했지만, 그래도 그에 맞는 여러 정황들이 받쳐 주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리 직접 상대해 보니, 소문이 잘못된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소문 따위가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폭발적인 능력. 누군가의 노력 따위가, 재능 따위가 감히 따라잡을 수 있는 그런 경지가 아니다. 마치 제이드 네아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더 이상 끌어선 안 됩니다. 이미 에토르를 점령하기로 마음먹으신 이상 저희 역시 어느 정도 피를 본다 생각하시고, 더 늦기 전에 마무리하세요.”
긴장이 서린, 단호한 버리의 눈에는 분명 두려움이 존재했다.
당연히 우위라고 생각했던 전투. 놀라울 정도로 계획대로 풀려 가고, 토르티아라는 예상치 못한 원군까지 얻어 진심으로 이번만큼은 하늘이 그들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수월히 승리를 쟁취할 거라 여겼다.
그런데, 에단 카이로스가 온 순간 그 모든 확신이 어그러졌다.
“카이로스의 지방군이 몰려오기 전에, 혹은 저들이 한 보 후퇴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오기 전에 우리는 꼭 이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그래야 지난 4개월의 고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불안할 밖에.
하늘이 내려 준, 다시 오기 힘들 이 기회를 놓칠까 봐.
“우리가 더 빨라.”
“네?”
“카이로스의 지원군보다 우리가 더 빠르다고.”
그리고 그 마음은 데릭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버리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훨씬 많이 그러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기에 준비하고 또 준비한 전쟁.
상대가 상대인지라 마지막의 마지막에 쓰려고 남겨 둔 카드.
“우리가 더 먼저 올 거라고. 그 지원군.”
“네에?!”
금시초문인 버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계획에 두 눈이 커졌다.
지원군이라니. 지금도 나와 있는 테바로스 군사가 몇인데, 어디서 지원군이 나온단 말인가?
“근위대장 라이가가 제3군을 이끌고 오고 있어.”
“아니, 그렇게 중요한 일을 왜 이제야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할 마음이 없었으니까.”
데릭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이미 4개월이나 지속된 원정. 비록 승리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지쳐 가고 있었다. 들인 시간도, 돈도, 인력도 많았기에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러함에도, 데릭은 원정을 떠나기 전 근위대장에게 명했다.
혹시 4개월이 끝나 가더라도 승리 회군 소식이 없다면, 3군을 이끌고 출정하라고.
“절대로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아. 내 평생을 경험하며 배운 사실이지.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이로스를 상대한다면, 더더욱 그럴 테고.”
버릇처럼 세워 두는 플랜 B.
그래. 어쩌면 그는 아무리 계획대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 하더라도 에단을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대비해 두었다.
“내가 왜 이렇게 죽치고 기다리고 있겠어? 우리가 아무리 우세하다고 하더라도 저 괴물들은 테바로스 군인의 절반 이상을 먹어치울 거야. 그렇게 얻은 승리 따위, 나는 필요 없어.”
버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설마 가장 최측근인 자신에게까지 이렇게 커다란 비책을 숨기다니.
버리는 막연히 그 이유가 데릭의 자존심 때문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인정하기 싫으셨겠지. 그토록 싫어하던, 카이로스의 에단 황제가 생각 그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3군까지 합세하여 총공격을 한다. 목표는 에단 카이로스 황군의 전멸.”
이미 1군과 2군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3군까지 끌어들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나라의 모든 군사를 오로지 이 에토르 전장에 동원한다는 거다. 그만큼 테바로스의 황궁은 비어 있을 테고, 누군가 황궁을 공격해 온다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데릭은 지금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전투에 사활을 걸었다.
“전군 폐하의 명을 받들어 모든 준비를 완벽히 하겠나이다.”
데릭은 환히 불이 켜진 카이로스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평지를 가득 메운 군사들 사이사이로, 모든 이들을 두렵게 하는 카이로스의 깃발이 흩날렸다. 저 황금의 깃발 아래 모든 권력과 부가 모였지. 그리고 그 중심에 항상 그가 있다.
이 에토르 전투에서, 저 황금 깃발이 꺾이고 그 아래 신이 사랑하는 황금의 황제가 무릎을 꿇으리라.
***
“진짜 감질나서 못 해 먹겠네. 아니 쟤들은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뭣 좀 해 보려고 하면 쏙 들어가 버리고. 어쩌자는 거냐고!!”
루카스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내던지며 말했다. 벌써 여섯 차례나 부딪혔지만, 모두 일정 선만 넘어서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은 성문을 걸어 잠갔다.
“폐하. 그냥 시원하게 공성으로 나서면 안 돼요? 진짜 답답해서 못 해 먹겠다고요!”
“너는 그 병력을 눈으로 보고 그 소리가 나오냐? 공성을 하려면 적어도 수성 인원의 두세 배는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반토막이라고.”
“우리는 프래카야. 일당백이라고!”
“거기에 수성에 최적화되어 있는 에토르를 점령하고 있지. 공성은 절대로 안 돼.”
“아오, 짜증 나!!”
루카스의 짜증에도 아론은 단호했다. 이반과 콜린 역시. 아론의 말에 동조했지 루카스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에토르는 기본적으로 성벽이 높고 평원이 넓어요. 성 위에서 공격하기 수월하고 성 아래서는 올라가기 힘든 구조죠.”
”하지만 반대로는 그들 역시 성 안에서는 전투를 끝낼 수 없는 구조기도 해. 그대로 성 안에 박혀서 몇 날 며칠을 버틸 식량을 축내지 않는 한, 성문 밖으로 나와야 끝낼 수 있어. 그 말인즉.”
”저들이 언제가는 기어 나온다는 거지.”
콜린의 말을 이반이 받고 이반의 말을 에단이 마무리했다.
에단의 고민이 깊어졌다. 누구나 뻔히 아는 그 사실을 어째서 테바로스는 이행하지 않는가.
어째서 그 많은 군사를 눈에 보이고도 이대로 숨을 죽이고 있는가.
“황궁으로부터는 아직 소식이 없어?”
“없어. 여기서 오고 가는 데만 나흘이 걸리는 거리야.”
“하. 진짜. 돌겠네. 아니면, 일단은 가장 가까운 영지군부터 동원해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아마 폐하가 반대하실걸.”
아론은 슬쩍 에단을 보았다. 표정만 보아도 반대하는 그 의사가 명확히 드러났다.
“그리고 너도 반대할 거 아냐.”
“뭐, 그야…….”
루카스 역시 답답한 김에 생각해 낸 대안으로 말했지만, 그다지 찬성하진 않았다.
하긴. 어떻게 비교가 될까. 황군 정예와 안일하기 그지없는 영지군들을.
호흡이 맞지 않은 군사들은 없느니만 못하다. 특히 프래카와 황군처럼 철저히 함께 교육받아 한 몸과 같은 군대에겐 더더욱.
“……일단 퇴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반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일단 황궁으로 환궁하여 몰브를 정리하시고,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 다시 오면 됩니다. 에토르를 다시 되찾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스 소리냐고,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바로 소리칠 것만 같던 루카스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반의 직언이 가장 현실적임을, 카이로스의 대장군이자 프래카의 수장으로서 잘 알고 있었으므로.
“폐하. 폐하시라면 에토르를 다시 수복하는 것.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황궁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때, 이 전투를 무리하게 이끌고 나가실 이유, 전혀 없습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기다렸다.
이번에도, 결정을 하는 것은 오로지 그였으므로.
“퇴각은 없어.”
그런데 의외로 그의 결정은 빠르고 간결했다.
“폐하.”
“퇴각은 안 돼.”
동시에 단호했다.
“폐하. 이건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심이……!”
“다른 이유, 있는 거지?”
바로 반박하려는 아론의 말을 끊고, 이반은 에단을 바라보았다.
이미 결정을 끝마친 눈. 저건 절대 감정과 감상에 치우친 눈이 아니다.
철저한 계산 아래 내려진, 가장 이성적인 판단.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그들이 보지 못했던 그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
“저들이 기다리는 무언가가 분명 퇴각하는 우리를 노릴 테니까.”
에단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전쟁이 바로 이렇게 ‘정보’가 없는 전쟁이다. 이 막연함과 불확실성이 그가 하는 생각들을 너무도 복잡하게 만들었다.
“테바로스는 지금 기다리고 있어. 만일 총공을 할 생각이었다면, 우리에게 전략을 노출하였을 그때 했어야만 했지. 그러지 않은 건, 데릭 테바로스에게 또 다른 카드가 있다는 거야.”
“다른 카드요?”
“그래.”
테바로스가 기다리고 있는 경우의 수는 다양하다. 단순히 유리하고 자원 많은 그곳에서 체력을 보강하고 전열을 가다듬을 수도 있으며, 토르티아에 추가 병력을 요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다시 토르티아와 협상해서 추가 병력까지 당도하려면 적어도 보름은 소비됩니다. 이렇게 많이 죽어 나갔는데 더 줄 것 같지도 않고요.”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콜린의 부정적인 의견에 이반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는 한 박자 늦게, 에단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
“처음부터, 테바로스의 지원군이 오고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해.”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몰브는 무슨 생각으로 황궁을 점령하였는가? 몰브는 진정으로 내가 돌아가도 자신의 반란이 성공할 거라 믿는 건가?”
아니. 절대 그럴 수 없다.
아무리 지금의 몰브가 제정신이 아니라도 하더라도, 그런 판단이 안 될 만큼 그들이 멍청하진 않다.
“그들은 믿고 있는 거지. 내가 아닌 테바로스의 군대가 올 거라는 것을. 테바로스가 그렇게 확신을 주었을 테니까.”
에단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감히 카이로스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도 모자라, 카이로스 귀족을 꼬여내 반란을 지휘하다니.
그에 넘어간 몰브가 더 괘씸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하여 테바로스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테바로스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번 전쟁에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거야.”
이제는 모두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하나같이 젊은 나이어도 전쟁에 뼈가 굵은 베테랑들. 목숨 걸고 끝까지 이기려 든다 하여 언제나 이기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같이 죽을 수는 있는 법. 테바로스가 저리 마음먹었다 하여 카이로스가 질 거라 생각지는 않지만 결코 피해가 작지 않을 거란, 아니 엄청난 피해가 나올 거란 그 직감이 바로 들었다.
”공성이 수성보다 유리하지. 하지만 도망가는 자보단 좇는 자가 더 유리해. 여기서 우리가 퇴각한다면,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우리 뒤를 쫓을 거다. 지금까지 성안에만 박혀 있던 것과는 다르게.”
그러니 이대로 퇴각하는 것이 최악이다. 불명예스럽게, 자존심을 구겨서까지 후일을 도모하려다 모든 걸 어그러트릴 수 있었으니.
“……어떤 경우든 프래카는 지지 않습니다. 폐하. 믿고 맡겨 주세요.”
”그런 것쯤은 모두가 알아. 카이로스가 질 리가 없잖아. 문제는 그 피해지. 적어도 반은 죽어 나갈 거란 소리라고, 이건.”
루카스의 말을 아론이 받았다.
전쟁은 목숨을 걸고 한다. 반드시 희생이 따르고 그 희생의 아픔은 그들의 가족에게까지 번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마냥 기뻐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가 죽어서 얻은 그런 피의 승리니까.
그런데 심지어 흘린 피가 더 많다면. 그게 정말 승리하였다고 할 수 있나.
“그럼 어쩔 작정이야. 폐하 말대로라면, 이대로 대치 상태를 지속하였다간 테바로스 원군이 올 테고, 퇴각한다면 더 큰 피해가 기다릴 텐데.”
“기어 나오게 해야지.”
에단의 목소리가 낮게 막사 안을 울렸다. 당장이라도 저 손에 사람이 죽어 나가도 이상할 게 없는, 말 그대로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 지금 에단이 내뿜는 분위기가 그러하였다.
“니블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챈 것. 그로 인해 북방 계획이 어그러진 것. 몰브에 대한 사후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에리카 네아레스를 끝까지 감시하지 못한 것.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테바로스를 간과한 점.”
에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살면서 이토록 많은 실수를 해 본 적이 있던가.
“전부 다 내 탓이다.”
그는 너무도 단호해서. 단호하다 못해 무서워서 다른 이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전쟁에서 죽어 나가는 모든 카이로스의 생명도 전부 내 탓이야.”
그건 너무 심한 자책이라고. 세상에 어느 누가 그 모든 것을 예측하고 피할 수 있겠냐고. 이건 폐하의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몰브와 악랄한 수법을 쓰는 테바로스의 탓이라고 일일이 따져야 하는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들의 주군께서는 이미 이 사태에 대해 너무도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더 이상의 잘못된 선택을 해선 안 돼. 퇴각은 최악이고, 대치는 차악일 뿐.”
에단은 눈이 모두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다시 에토르를 수복한다.”
공성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인원. 알고 있다. 그래서 무리라고 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평지에 그들이 나오길 버텼다. 그런데도 그들이 기어코 이리 질질 싸움을 끈다면 어쩔 수 없지.
어려울 뿐 안 되는 건 아니니까.
“선두 침투는 루카스의 프래카. 황군은 그 뒤로 공성 진영을 구축해서 따라간다.”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는 진지한 황금의 눈.
세상 만사를 귀찮아하던, 황궁의 에단에게서는 볼 수 없는 눈이다.
모두는 작은 한숨을 삼켰다.
최선이라 선택하신 바로 그 결정은 가장 위험하고도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으므로.
그러나 이분께서 그게 최선이라면, 최선인 거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빠르게 밀고 들어간다. 최대한 중심을 파고들어 진형을 무너트리고, 프래카는 신속하게 성벽을 넘어. 이건,”
“당연히 제가 해야죠. 맡겨 주세요. 눈 깜짝할 사이에 올라가서 바로 문 열어 드리겠습니다. 폐하는 천천히 걸어 들어오시면 됩니다.”
루카스는 신이 나서 말했다. 루카스 입장에선 이 방식이 훨씬 깔끔하고 적성에 맞다.
그저 앞길을 막는 이들을 죽이고, 주군이 오시는 길을 평탄히 만드는 것,
이리저리 따지고 잴 게 없다.
무엇보다도, 루카스는 자신들이 엄하게 키운 프래카들을 믿었다.
이대로 꽁지 빼듯 도망치는 거. 절대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문만 열리면, 확실히 승산 있지. 문제가 바로 그 성벽이었으니까.”
“예. 루카스 장군께서, 그리고 프래카가 제대로만 해 준다면 피해도 생각보다 작을 수 있어요.”
“무엇보다, 어떠한 의미로는 사기가 아주 극에 달해 있고요.”
누구는 성안에서 편히 있고, 누구는 간이 막사에서 불편히 있는 것. 그들도 원정을 안 해 본 건 아니었지만 워낙 속전속결을 좋아하는 에단이라 이런 상태로 오래 지속된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저 성은 얼마 전까지도 그들의 성이 아니었는가.
도둑놈처럼 빈집을 턴 주제에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까.
제대로 붙어 보면 상대도 되지 않을 거라 자부하는 카이로스 부대에게 이리 치고 빠지는 테바로스 군대가 너무도 얄미웠다. 그런 상황에서 퇴각까지 명받으면 반발이 꽤나 있었을 참이다.
“지금까지 일정 선을 지켰던 우리가 갑작스레 성벽에 가까워지면, 테바로스는 당황할 겁니다. 그 때 루카스와 프래카들이 빠르게 성벽을 올라야 합니다. 다른 성벽에 비해 높고 험하겠지만, 평소에 그렇게 자랑질 하던 프래카라면 가능하겠지요? 대장군.”
“물론입니다. 수석 보좌관님.”
일부러 존칭을 쓰는 아론에게 루카스는 피식 웃었다. 절대 공성은 안 된다더만, 막상 공성이 확정되니 저리 바로 전략부터 짠다. 이러니 아론을 카이로스의 최고 지략가라 하는 거다.
“높을수록 가까이 다가가면 시야가 좁아지게 되어 있어. 그러니 프래카 전원보다는 소수로 움직이는 편이 차라리 나을 거야. 그편이 우리가 엄호하기도 편할 거고.”
“에토르 성문은 도르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벽을 넘으시자마자 쓸데없는 충돌은 최소화하시고 바로 측면으로 뛰어 내리시면 내려갈 수 있는 발판이 보입니다. 그곳을 이용하시면 제일 빨리 그 도르래에 도달하실 수 있습니다. 그 부분만 부수시면 그다음은 밖에서 직접 밀면 됩니다. 출발하시기 전에 좀 더 상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반과 콜린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서 에토르를 가장 아는 이들이 바로 두 사람이니 확실히 가장 구체적인 경로를 짚어 줄 수 있었다.
“오케이. 그럼 성문을 열고 우리가 밀고 들어가서 쓸어버리면 되는 거죠?”
“아니. 성문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퇴각해.”
“퇴각하라고요?”
“그래.”
에단은 바로, 단호히 답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평원이 제일 유일한 법. 에단은 끝끝내 그들을 평원으로 끌어낼 생각이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공성을 하고자 들면 안 나올 수 없어. 에토르 내에서는 공격에 한계가 있으니까 성문이 뚫린 이상 저들도 어쩔 수 없이 결착을 지을 수밖에.”
“아하. 그렇게 기어 나오게 하시려는 거구나.”
“그다음은 이반, 너야.”
에단의 눈이 이번에는 이반을 향했다. 이반은 이미 그의 계획을 어느 정도 파악했는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테바로스 군대가 쏟아져 나오면, 우리 보고 상대하라는 거지.”
“그래. 네가 제일 잘할 테니까.”
확고한 에단의 믿음에 이반은 피식 웃었다. 아무튼 형제님은 그를 너무 신뢰한다.
이반은 자신 있는 눈으로 기꺼이 그런 에단의 기대에 응했다.
“황자 이반. 북방 정예군 니온.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단 한 명의 테바로스 군도 이 에토르 영역에서 무사히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에단 역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머리로 생각하여도, 가슴으로 생각하여도 그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이.
역시 이반이다.
“앞은 이반 님의 니온이. 뒤는 루카스의 프래카가. 그리고 그 너머 카이로스의 황군이라면 충분히 이 전투 승산이 있습니다.”
아론은 지도 내에 결전 포인트를 짚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말에 루카스는 물론 이반과 콜린도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이리 모두의 결정이 끝났으면, 이제 주군의 명만이 남았으므로.
“내일, 카이로스는 에토르에 입성한다.”
지루하고도 한심하게 끌고 또 끌었던 테바로스와의 이번 전쟁.
드디어 그가 끝을 보려나 보다.
***
에단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카스는 프래카와 황군들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콜린 역시 지지 않고 이반의 정예군을 신속하게 출정 준비시켰다.
“이반 님.”
이반은 작은 중턱에 앉아 그런 카이로스의 군대를 내려다보았다.
이 지루한 싸움을 끝내는 마지막 전투임을, 그리하여 어쩌면 많은 희생을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는지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전운이 감돈다고 해야 할까.
“적막하네.”
“그러게요.”
세상에서 이반 찾는 것을 제일 잘하는 콜린은 훌쩍 사라져 버린 이반을 또 이렇게 어김없이 찾아냈다.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앉는 콜린에게 그는 피식 웃었다.
“나한테 첩자 같은 거라도 붙여 놨나.”
“경험과 세월이 주는 지혜죠. 일종의 능력이랄까.”
한숨이 가득 섞인 푸념이었건만, 이반은 오히려 더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극한 충성심이 아닐 수 없다.
“내일, 아마 희생이 클 겁니다. 아무리 루카스 장군과 프래카라 할지라도, 애초에 너무 불리한 싸움이에요.”
“알아. 하지만 그게 최선임에는 변함이 없지. 애석하게도 그 정도가 최소의 피해라는 거야. 폐하께서야 그 피해를 감수하는 것도 싫어하시겠지만.”
“그분이 그런 걸 신경이나 쓰실까요?”
“엄청 쓰지.”
콜린은 물끄러미 이반을 바라보았다. 조금도 공감하지 못한다는 얼굴이었다.
그에 이반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측근도 이리 그를 모른다.
“그다지 죽음에 대해 슬퍼하실 분은 아닐 것 같은데요.”
“내 형제가 그 하나하나의 모든 죽음에 슬퍼한다고는 나도 말 못 해. 하지만, 적어도 그 죽음의 무게는 충분히, 정말 충분히 느끼고 있어.”
이반은 불이 환히 켜 있는 에단의 막사를 바라보았다. 저 막사의 불은 아마 진지가 세워지고 난 후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을 거다.
낮이며 밤이며, 그들의 주군께서 그의 군사들을 위해 잠 못 이루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계실 테니.
”카이로스를 위해 흘린 모든 피를, 그 생명을 내 형제는 단 한 번도 가볍게 생각한 적 없어. 그러니 저리할 수 있는 거야.”
남들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절대 당연하지 않은 온갖 부담을 홀로 짊어진 채, 저렇게 잠 한 번 편히 못 잔 채로 평생을 혼자서 버티고 있는 거다.
“솔직히 놀랐잖아.”
“뭐가요.”
“나의 형제님이 너무 대단해서.”
콜린은 잠시 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
이반은 콜린의 저 고집스런 침묵이 무얼 의미하는지 안다.
“황제 폐하께서 대단하다는 것쯤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거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있긴 합니까.”
“그 생각보다도 더 대단해서 짜증나고 있잖아. 어쩔 수 없이, 저분을 황제로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콜린이 이반을 잘 찾는 것처럼, 이반 역시 콜린의 생각을 너무 잘 안다.
함께한 세월이, 붙어 다닌 시간이 그 정도는 가능하게 만들었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일 테지. 전장에서 에단이 어떠한지.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대단한지.”
그건 절대 입소문 따위가 전할 수 없다.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몸으로 느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하며,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놓치는 것들을 잡아낸다. 모두가 가까운 것에 집착할 때 더 먼 곳을 볼 줄 알며, 남들이 감성적일 때 홀로 이성적이지.
“그러기에 언제나 그는 최선을 택해. 그래서 카이로스는 항상 이길 수 있는 거야.”
같은 날에 태어난, 같은 나이의 형제.
다 가진 그 형제를, 넘을 수 없는 그 벽을 이반은 부러워했을까. 질투했을까.
아니, 전부 아니다. 이반은 그저 안쓰러웠다.
“모든 선택은 오롯이 한 사람. 에단의 몫. 수만의 목숨이 그의 말 한마디에 결정되는 거야. 너무도 잘난, 내 형제께서는 무려 열다섯 살 때부터 그 결정을 강요받았어. 아주 잔인하고도 무책임한 일이지.”
열다섯에 그를 전장의 선봉에 세운 선대 황제께서도, 그를 선두에 세워 직접 피바람을 불게 한 장군들도, 수십만의 목숨이 걸린 전쟁의 승패를 그로 하여금 결정하게 한 전략가들도 전부 다. 얼마나, 그 어린 에단에게 잔인했던가.
“가장 큰 문제는 그 모든,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내 형제께선 전부 완벽히 해냈다는 거야.”
그러니 ‘더’를 요구하고 또 ‘더’를 요구했다.
“콜린. 너는 항상 나를 왕재라고 하지만, 나의 세상에서 황제라 부를 수 있는 이는 내가 살아온 이 평생, 오직 한 사람뿐이야.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야.”
늘 생각했다.
에단이었다면, 자신도 그럴 수 있었을까 하고.
그 어린 날 수십만의 목숨이 달린 전쟁에 선봉장이 될 수 있었을까.
기껏해야 사촌뿐인 형제를 위해 그 모든 원로들을 꿇릴 수 있었을까.
평생에 걸친 그 숱한 기대들을 묵묵히 다 충족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이 상황에서, 로엘에게 달려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다.
“나의 주군. 나의 황제폐하는 오로지 한 사람뿐.”
그래서, 에단이 이 황금의 제국. 카이로스의 황제인 거다.
“그러니, 콜린. 이제 그만해. 그만 헛된 희망을 품어. 나는, 이 나라의 황제가 될 수 없어.”
매번 듣던 그 말이,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크게 콜린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반은 그런 콜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야, 그의 충성스런 신하가 인정을, 포기를 하려나 보다.
“울지 마.”
“안 울어요.”
이반은 안다. 콜린에게 자신이 꿈이었음을.
마치 루카스와 아론이 에단을 받들 듯, 그렇게 콜린이 자신을 받들었음을.
그래서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임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내버려 두었다.
언젠가는 그 스스로 깨달을 날이,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는 걸 이반은 알았으니까.
“내가 황제가 되지 않겠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여전히 너는 나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신하이자, 형제이자, 친구야.”
그리고 그건 아마 에단도 알고 있을 거다.
비리를 저지르고 반역을 꾀한 가문의 장자. 좀처럼 부탁하지 않는 이반이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청했기에 콜린은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콜린이 직책을 높여 가며 이반의 곁을 지킬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에단이 과연 몰랐을까. 이반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나라, 카이로스의 신하지.”
콜린이 이반에게 보이는 그 맹목적인 충성심과 에단에게 드러내는 말 못하는 적대감.
어떻게 에단이 모를까. 콜린의 주군은 이반임을, 그래서 이반이 황제에 오르기 바란다는 것을 에단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러함에도 에단은 콜린을 이반 곁에 두었다.
이번에도, 그에게 있어 형제는 예외였으므로.
‘네가 좋으면 됐어.’
그저 이반이 콜린을 원해서. 그리고 콜린이 이반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니.
에단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속마음이 누굴 향하든, 그 불손함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콜린. 언제나 그러했듯 이 나라를 위해, 나와 함께하자.”
그러니 이반에게 에단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그의 형제는 자신을 배려하지 않은 것도, 양보하지 않은 것도 없다.
“네 두 눈으로 본, 이 나라의 황제께서는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신 분이야. 나는 그 대단함을 평생을 걸쳐서 지켜봐 왔기에 나에겐 애초에 에단 외의 황제는 상상할 수 없어.”
이반은 콜린의 어깨를 강하게 안아 주며, 말을 이었다.
”나의 꿈은 나의 형제가 중부를 통일하고 나아가 저 타르타니를 넘어 북방까지 카이로스의 깃발로 뒤덮는 것. 그리하여 에단의 시대가, 우리의 시대가 두고두고 우리의 후대에 찬란한, 전설로 회자되는 것.”
‘함께하자. 이반.’
이반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그 순간, 정말 카이로스의 영광의 신께서 어린 에단에게 내려온 줄 알았다. 그렇게 그 반짝이는 황금의 눈동자를 보고야 말았다.
그렇게 그의 형제, 에단이 그의 ‘꿈’이 되었다.
“내 꿈을, 이 카이로스의 꿈을 함께하자, 콜린.”
참 ‘함께’라는 단어가 쉬우신 분.
저런 믿음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데 애초에 거절이란 선택지가 있을 리 없다.
“제가 황자님과 함께 안 하면 누가 한답니까.”
“하하. 이거 부인할 수가 없네.”
콜린은 눈물을 쓱 훔쳤다.
그리고 똑바로, 한결같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반과 눈을 맞추었다.
“제가 이반 님이 황좌를 포기한다고 해서, 제가 에단 폐하를 카이로스 황제 폐하로서 받들고 따른다 해서, 저 역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 주군은 오로지 이반 님뿐이에요.”
“콜린.”
”그건 이반 님이 누가 뭐라 해도 폐하가 주군인 것처럼,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반 님이라 하셔도 그건 바뀌지 않아요. 제 평생을 걸, 저의 주군은 오로지 한 분, 이반 님이십니다.”
이반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아마 아론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도끼눈을 뜨고 황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엄청난 불경이라 난리 쳤을 거다. 물론, 그런다 한들 콜린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 것 같진 않았지만.
아무튼, 이 아이도 참 고집스럽다. 그게 고맙기도 하고.
“그러니, 이반 님의 결정이 진정 그러하다면. 나의 주군. 저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이 나라 카이로스의 영광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나이다.”
콜린은 기꺼이 이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검을 들어 이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어쩌면 이조차도 이반이 아닌 에단에게만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콜린의 말대로 그건 다른 이가 요구할 수 없는 ‘마음’의 문제이므로.
“앞으로도 잘 부탁해. 콜린.”
마치, 그의 선택이 항상 에단인 것처럼.
마치, 그의 마음이 언제나 로엘인 것처럼.
그저 콜린의 선택이 이반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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