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1. 반격의 시간 (32/69)

Chapter 31. 반격의 시간

“몰브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버리는 몰브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를 보며 데릭에게 말했다.

데릭은 여느 때처럼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티아의 황녀가 이런 엄청난 선물을 가져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번 전쟁의 승리의 여신은 저희 편인가 봅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버리도 제법 상기된 목소리로 보고를 이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로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제1구역 에토르는 물론, 파벤터와 나아가 시엘까지 전부 테바로스가 점령할 수 있다. 그 세 구역은 말 그대로 요충지 중의 요충지.

앞으로 끊임없이 부딪힐 북부와 중부의 싸움에서 큰 고지를 점령하는 거다.

“몰브에 따르면 에단 황제가 반드시 움직일 거라고 합니다. 그만큼 로엘 네아레스를 총애한다고 하더군요. 지금쯤 그 친필의 편지가 당도했을 테니, 슬슬 에단 황제도 움직일 겁니다. 우리는 그때를 놓쳐선 안 되고요.”

쉬지 않고 버리가 신나서 떠들어도 어쩐지 데릭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지금 잔뜩 상기되어도 모자랄 판에, 뜨뜻미지근한 그의 반응에 버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데릭은 아니라고 선뜻 답하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었으므로.

처음 에리카 황녀가 찾아왔을 때 데릭은 이번이 하늘이 준 기회라고 여겼다. 토르티아가 그의 아래에 들어오는 것. 그로 인해 카이로스를 이기는 것. 모두 다 테바로스가 꿈꾸던 일이 아닌가.

“로엘이 인질로 잡혔다라…….”

데릭은 거기서부터 거슬렸다.

버리는 그의 입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로엘’이라는 단어가 거슬렸고.

지난번부터 분명 황제께서는 계속 그 쫓겨난 공주를 신경 쓰고 계셨다. 아니. 더 이상 쫓겨난 공주가 아니다. 이제는 엄연히, 대 카이로스 제국의 아카시스다.

“폐하. 제가 진짜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그분은 안 됩니다.”

“무슨 소리야.”

“로엘 네아레스는 이미 폐하와 끝난 인연이시라고요. 이미 다른 황제의 여인이 된 분께 괜한 마음 쓰지 마세요.”

데릭은 버리의 말에 조금 놀랐다.

버리의 눈에 자신이 그렇게 보였나 싶어서. 아니. 자신의 마음이 정말 그걸 원하는가 싶어서.

그는 그 붉은 머리의 소녀를 원하는 걸까.

“안 될 게 있나. 데려오고자 하면, 못 데려올 것도 없어 보이는데.”

“폐하!”

버리는 버럭 소리부터 높였다. 데릭은 정말 여럿 쓰러질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단 황제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의 축복을 받은, 모든 것들 갖고 태어난 바로 그 황제요. 그 사람의 여인을 뺏겠다니요. 그건 카이로스와 전면전을 하겠다는 겁니다.”

“원래 내가 먼저였어. 그자가 아니라.”

“폐하!!!”

버리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데릭은 눈썹을 찌푸렸다. 더 말했다간 읍소하며 그를 말릴 기세다.

“그냥 해 본 소리야.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그럴 마음도 없고, 그럴 가치도 없어. 네가 너무 안 된다고 정색을 하니까 장난 한번 쳐 봤어.”

“아, 정말! 진심이신 줄 알고 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버리는 그제야 휴- 하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데릭은 실시간 변하는 버리의 반응에 피식 웃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버리로 인하여 복잡해졌다.

과연 정말로 그 여자가 그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여자인가 하고.

“그러니까 얼른얼른 황후를 간택하시라고요. 도대체 혼담을 몇 번이나 까야 성에 차시겠습니까? 폐하가 보지도 않고 족족 거절하시는 바람에 이제 남은 황족도 몇 명 되지 않는다고요.”

알 게 뭐람. 이리 전쟁하기도 바쁜 와중에 국혼이라니. 생각만 해도 시간 낭비다.

“난 상관없으니 알아서 잘 골라 와. 적당히 효용 가치 있는 여자로.”

“데리고 가도 폐하께서 족족 까셨잖아요!!”

“내 기준에 성에 안 찼나 보지.”

“도대체 그 성에 누가 찬답니까!”

버리의 목소리가 또다시 높아졌다.

“충분히 폐하에게 도움이 되는 분들로 모신 거라고요. 다른 나라 왕녀도 싫으시다, 공작 영애도 싫으시다. 아니, 외모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예요?”

“보지도 않았는데 무슨.”

“그니까 말입니다. 보지도 않고 죄다 그렇게 싫다고 하시니 후보를 받아 오는 저도 민망하다고요. 그런데 그 와중에 애먼 분을 신경 쓰시니 제가 어떻겠습니까?”

“신경 쓴 건 아니지.”

“알아보라고 시키신 건 신경 쓰신 겁니다.”

따박따박 받아치는 버리의 말에 데릭은 할 말이 없었다. 버리의 말대로 로엘에 대해 알아보라 한 건 맞으니까.

그리고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어떠했는가.

“……아쉬웠지.”

“네?”

“불행하지 않아서, 아쉬웠다고.”

버리는 밑도 끝도 없는 그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뒤를 더 캐묻고 싶었으나 이미 자기 생각에 빠져 버린 데릭임을 알아 말았다.

뭐가 되었든, 지금 저분 마음에 여자가 들어갈 여지는 없어 보이니 이 이야기는 그만하는 것이 피차 좋았다. 황궁에서도 설득되지 않은 이야기인데 이 중요한 전쟁터에서 설득될 리 없으니.

“그럼 저는 추후 상황을 좀더 지켜보겠습니다.”

그대로 버리가 나가 버려도 데릭은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번 생각하기 시작한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생각에 휩싸였다.

그도 제 인생이 너무 바빠 잊어버렸던 여자.

황제에 즉위하고 제대로 중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카이로스를 조사하면서 뒤늦게 그녀가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때 분명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자신처럼 늘 치여 사는 그 인생이 결국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 비참한 꼴이 되었구나.

그 얼음장 같은 황제 아래에서 그녀는 시들어 갈까.

아니면 그 순간에도, 시궁창에 홀로 핀 꽃처럼 반짝일까.

그게 궁금했다. 전자라면 구해 주고 싶었고, 후자라면 데려오고 싶었다.

“그래. 그게 속마음이었어.”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랬다.

그런데 들려오는 대답은 둘 다 아니었다. 그래서 서운했다. 그래서 마음이 상했다.

그러니 얼마나 자신이 웃기는가. 그가 그녀에게 무어라고. 그렇게 매몰차게 파혼시킬 때는 언제고. 그렇게 잊고 살 때는 뭐 하다가.

“뻔뻔한 거지.”

이제야 그가 먼저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데 왜 이제야, 이리 계속 그의 인생에 다시 그녀가 등장하는 걸까.

“인질이 되었다고. 그 로엘이.”

다시 등장해 이리 그의 마음을 흔드는가.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닌데.”

데릭은 피식 웃었다. 데릭의 말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이번 일에 마음이 걸리는 건 바로 그거다.

로엘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반란군에 의해 이미 감금당해 계신 아카시스께서 무얼 어떻게 할까 싶기도 하지만, 데릭은 왠지 그녀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만 같았다.

“밤에 검을 들고 몰브를 암살하려 들지도 모르지.”

너무도 가능성 있는 일이라, 데릭은 진지하게 걱정이란 게 되었다.

그 여자가 야생마처럼 카이로스의 황궁에 피바람을 몰아치려나 싶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추억이 하나둘씩 떠오르나 더더욱 보고 싶었다. 어떻게 자랐는지, 소문대로 리아 칼리드의 딸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미인이 되었는지.

무엇보다도, 루비 같았던 그 반짝이는 붉은 눈이 여전히 빛나고 있는지.

모든 게 다 궁금했다.

“언젠가는 볼 날이 있겠지.”

끊어진 그 인연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데릭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지금 할 수 있는 건 결론이 어떻게 나는지 지켜보는 일일 뿐이므로.

카이로스 황궁에 홀로 남은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조금 기대가 되었다.

***

“카이로스 황궁은 넓죠. 아무리 몰브가 용병을 많이 고용했다고 하더라도 절대 감당할 수 없어요. 지금 황군 중 상당수가 폐하를 따라 출정을 했기에 망정이지, 아마 본래의 황군이었으면 당연히 들어오지 못했겠죠. 아무리 아리스가 후궁 문지기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요.”

로엘은 수아는 물론 딜리아, 시에라 등 그녀의 사람이라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그녀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에 대해.

“딜리아가 알려 준 바깥의 소식에 따르면, 황군은 전원 무장 해제 상태로 황궁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지휘관들은 모두 감금되어 있는 상태구요.”

워낙 성안에 친척이 많은 딜리아는 이리 감금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바깥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식료품을 전달해 주고 세탁 거리를 처리하는 등의 일상 업무 속에서 그녀에게 정보를 줄 이들은 아주 많았으니까.

“문제는 그렇게 나간 이들을 모아 줄 구심점이 없다는 거예요.”

카이로스의 황군은 대 제국 카이로스의 황실과 그 황족을 지키는 군대다. 가장 좋은 무기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은 최고의 병사들. 에단이 황실에 소수의 군대만 남겼어도 걱정이 없는 건 그 때문이었다.

다만 그런 황군이라고 하더라도 황제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아카시스가 인질로 잡혀, 그 목에 검이 겨눠진 상태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로엘은 군소리 한 번을 못 하고 그 잘난 군사들이 쫓겨나는 것을 보며 새삼, 아주 많이 겁이 났다.

에단이 있었더라도 저랬겠구나 싶어서.

그렇게 자신이, 그 완벽한 사람의 가장 큰 약점이 되었겠구나 싶어서.

그래서 더더욱 이 사태를 그녀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의 도움 없이.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보란 듯이 헤쳐 나가야 한다.

로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행인 건 알아서 집결해 있다는 점이죠. 그 말은 누군가의 도움이 있다면. 누군가 이끄는 이가 있다면 반격이 가능하다는 말. 저는 켈트가 그 도움을 줄 수 있고, 제가 그 구심점이 되어 볼까 합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강단 있는 목소리.

이미 그녀는 결심을 마쳤다. 그리고 그 결심을,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말릴 생각이 없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그녀를 믿고 따르는 수밖에.

“제가 무얼 하면 될까요, 로엘 님.”

“똑똑하게도 몰브는 최대한 몸을 사리고 있어요. 황군들이 나감으로써 어느 정도 소문이 번져 나가긴 했지만 극히 조심하고 있죠.”

애초에 황군의 의복을 훔쳐 입고 황군인 척한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반란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에단 황제에 대한 지지는 가히 절대적이니까.

혹여 에단 폐하께서 출정 중에 몰브가 반란을 일으켜 황궁을 침범했다는 소문이라도 난다면 민심의 화살은 당연히 몰브로 향하게 된다. 그러다 백성들이 되레 봉기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정말 골치 아파질 수 있다.

그렇기에 저들은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에단 황제가 테바로스에게 죽어 주면 감사하고, 혹여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테바로스의 군사들이 이미 카이로스를 점령한 그때를.

“어리석고도 무모하지. 테바로스가 어찌 자신들을 곱게 살려 둘 거라 믿는 건지.”

로엘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들의 한심함에 질릴 지경이다.

이 불장난의 불길이 결국은 자신들을 덮칠 것이란 걸 그들은 왜 모를까.

“황군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이 소식이 분명 폐하께 갔으니 폐하든 황자님이든, 아니면 루카스 장군이든 누구든 그들을 지휘하고 명령을 내려 줄 분을요. 문제는 그걸 기다리기에는 지금 국경의 상황이 썩 좋지 못할 거란 거예요.”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제가 아는 테바로스의 데릭 황제라면 절대 그리 허무하게 이 일을 끝낼 리가 없어요. 사상 처음으로 카이로스를 선공하였고, 성을 점령하였으며, 심지어 카이로스 귀족과 내통하여 내부 반란을 꾀하였어요. 게다가 저희를 이렇게 인질로 잡기까지 했지요. 이렇게까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계획을 짜 놓고 이제 와 쉽게 접을 리 없어요. 분명. 그는 이곳에 폐하든 누구든 와서는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놨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를 볼모로, 와서는 안 되는 그를 오게 만들 테고.

“그러니 꼭 저희가 먼저 몰브를 치고 이 황궁을 되찾아야 합니다.”

로엘은 시에라가 가져다준 황궁 지도를 펼쳐 놓았다. 이미 딜리아의 사촌 언니가 식료품을 가져다주면서 몰브의 병사들이 배치된 곳을 표시해 두었다.

“이 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누가 뭐래도 딜리아야. 딜리아가 책임지고 연락책 역할을 해 주어야 해.”

“맡겨 주세요. 제가 마마의 입과 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누구에게든 마마의 메시지를 전달하겠습니다.”

당차게 말하는 딜리아는 충분히 믿음직스러웠다.

처음 로엘과 만났을 때의 그 소심하던 딜리아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이리 로엘을 지켜 주고 도와주는 든든한 시녀가 되었다.

“우선, 가장 먼저 연락해야 하는 곳은 당연히 켈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수아 님의 아버님이시자 켈트가의 수장, 드보아 켈트 님이시죠.”

로엘의 눈이 수아를 향했다. 수아는 그런 로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 역시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아버님께 제가 서신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켈트가는 로엘 님과 함께합니다.”

로엘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몰브가 움직일 수 있는 사병, 당연히 켈트도 움직일 수 있다.

평생을 라이벌로 살아온 두 가문은 몰브가 무언가를 가져가면 켈트도 가져야만 했고, 켈트가 뺏기면 기어코 몰브도 뺏겨야만 직성에 풀렸다.

원로원 수장 자리도 번갈아 가면서 해야 하는 그들인데, 이번 대의 경우 유달리 몰브가 강세였다. 피어 몰브는 욕심과 야망이 너무 과하였고 드보아 켈트는 지나치게 신사적이었다.

그런 아비들의 성격을 똑 닮은 두 딸이 한날한시에 궁에 들어와 아카시스가 되었다. 그러나 수아는 첫날 에단의 눈 밖에 났으며, 아리스는 상대적으로 후궁의 일인자가 되었으니 그 권력의 집중은 당연히 몰브로 향했다.

그렇게 켈트가가 죽어 산 지가 몇 해나 되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몰브의 반란은 켈트에겐 기회가 될 수 있다.

“수아 님. 우선 켈트의 사병을 최대한 모아 주세요. 몰브 역시 지방 영지서부터 살뜰히 모아 온만큼 켈트도 최대한 모아 주셔야 합니다. 몰브가 할 수 있는 만큼, 켈트 역시 할 수 있겠지요?”

“그럼요.”

수아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일부러 가문의 자존심을 들먹거린 걸 뻔히 알지만, 기꺼이 그 도발에 넘어갔다. 수아 역시 지금 이 사태에 대해 제법 화가 나 있었으므로.

“드보아 공께는 최대한 빨리 사병을 모아 황궁 사대문에서 대기하라 전해 주세요.”

“바로 황궁으로 진격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네. 황궁을 되찾는 건 황군이어야지요.”

더 이상 공작가의 사병이 황궁에서 날뛰게 할 수는 없는 노릇.

로엘의 시선이 이번엔 시에라를 향했다.

“시에라.”

“마마의 명을 듣습니다.”

시에라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칼슨가의 시에라. 나는 아카시스로서 시에라의 아버지이자 카이로스의 대장군, 라다 칼슨을 만나고 싶어.”

순간 시에라의 숙여졌던 고개가 단번에 올라왔다.

아버지라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마마. 하지만 시에라는…….”

“할 수 있지?”

로엘은 무릎을 굽혀 시에라와 눈을 맞추었다. 한 번도 흔들림 없던 그녀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로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께 인정받지 못한다는 거. 너무 억울하고 어이가 없어서 기가 찰 일이다. 이 아이가 얼마나 능력이 있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그 아비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깟 성별이 무어라고 자신의 딸을 이리 작게 만들까.

로엘은 꼭 라다 경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당신의 딸이 이리 대단하다고. 그런 딸을 당신이 평생 외면하여 상처 입혔다고.

그러니, 이제는 제대로 봐 달라고.

이번 일을 계기로 로엘은 시에라의 평생 한이 되었던 일도 풀고 싶었다.

“할 수 있어.”

“마마…….”

“네가 딸이라고 칼슨가 사람이 아닌 건 아니야. 네가 딸이라고 네 오라버니들보다 못난 것도 아니야. 내가, 이 황실의 아카시스가 위험할 때마다 나를 지켜 준 건 너, 시에라 칼슨이지. 그리고 이 반란군을 소탕할 역할을 하는 것도, 시에라 바로 너야.”

로엘은 시에라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또렷이 그 눈을 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그 눈에 시에라의 흔들리던 마음 역시 단단해졌다.

“그러니 당당히 네 아버지께 가서 요구해. 이 나라를 위해, 칼슨가의 명예를 걸고 네가 하겠다고. 그러니 도와 달라고.”

시에라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이분이 믿어 주시는데 무엇인들 못 할까.

“칼슨가의 시에라. 아카시스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번에도 로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갔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수아는 생각했다. 참 대단하다고.

칼슨가라니. 그 가문을, 카이로스도 아닌 토르티아의 사람이 어찌 생각해 냈을까.

그것도 이리 위험하고, 다급한 상황에서.

“그리고 페니.”

“네. 마마.”

“독스 경과의 이야긴 이미 마친 거지?”

“그럼요. 다만 저희 아버지와 거래하시면 이자가 좀 셀 거예요. 전 분명히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우리 페니가 알아서 잘 흥정해 주겠지.”

“진짜 가만 보면 저보다 마마님이 더 하시다니까.”

거기에 카이로스 최대상단, 독스 가문까지.

이미 군비까지 완비해 두었단 소리다. 수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마마?”

“아니. 그냥 너무 신기해서.”

그런 수아의 웃음에 쥰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수아는 여전히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그 눈은 한결같이 로엘을 향했다.

그녀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람이 저리 반짝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너무 신기하고, 대단해서.”

승리의 여신이 있다면 지금 그녀의 모습이 아닐까.

“정말 프란시아님께서 재림하신 거 같네.”

수아의 말에 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그녀도 하고 있었던, 그런 생각이라.

“자. 그럼. 우리도 반격을 해 볼까요?”

모두를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며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숙여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한마음이었으므로.

아아. 카이로스에 프란시아님이 오셨나 보다.

***

지난밤 그토록 보이지 않았던 달이 다시금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여전히 에토르에는 테바로스의 군대가 있었으나, 에단은 공격을 명하지 않았다. 대신 바로 군영을 정비하여 처소를 세우고 방어에 집중했다. 그렇게 대치하고 있은 지 벌써 사흘.

절대, 카이로스답지 않은 대응이다.

“군사들의 불만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군요.”

“그렇겠지. 자존심이 상하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니까.”

아론의 보고에 에단은 예상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타공인 현 시대 최강군이라 불리는, 불패신화의 카이로스의 황군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영지를 빼앗겼음에도 이리 아무것도 못 하고 지켜만 보고 있으라니 어떻게 불만이 없을까.

에단이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그들이 나선다면 저깟 성 하나 찾아오는 것 따위 일도 아닌 것을. 그런데 어째서 그들의 주군께서 평소답지 않으신가 하고 투덜거렸다.

“아무리 그런다 한들, 폐하의 예상이 맞다면 이게 맞습니다.”

에단은 아론의 말에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루카스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만하니, 지금 그의 상황이 최악이긴 최악이란 거였다.

“이반 전하는 파벤터에서 무사히 도착하셨습니다. 전국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언제 올지 모르는 공격에 완벽히 대비하여 대기 중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판단하시어 다시금 공격의 시간이 돌아온다면, 그렇게 저들을 벌하게 된다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론의 보고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했다.

파벤터로 가라는 그의 말에 그토록 반발하는 이반은 처음이었다. 이반은 여전히 에단의 명령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역시 별달리 다른 방안이 없었다.

그의 예측은 충분히 무서울 만했고 그 상황에서 그의 판단은 너무도 옳았으므로. 그래서 이반도 파벤터로 가서 대기하고 있는 거다. 로엘이 있는 황궁이 아니라.

“아직까지 테바로스든, 토르티아든 별다른 움직임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들도 몸을 사리려는 것일 테지요. 우리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을 테니.”

아론은 작은 조소를 뱉으며 말했다. 지금 그들이 꽤나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아론은 안다.

전쟁에서 전략가란 늘 자신의 계획이 제일 완벽하고 최선이라 믿게 되는 법. 아마 이 전쟁을 꾸민 테바로스의 책략가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폐하가 아니셨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을 겁니다.”

그들이 간과한 것은 에단 그 자체. 남들이 한 수를 앞서 볼 때 세 수를 앞서 보는 그가 있다는 것을 테바로스의 책략가는 몰랐던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아론.”

“예, 폐하.”

“성안으로 보낸 세작들이 돌아오면, 공격을 감행한다.”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기다림의 시간. 참으로 길기도 하였다.

에단은 저 멀리 에토르에서 흩날리는 테바로스의 국기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

“루카스, 대기시켜.”

“예, 폐하.”

감히 그의 영지에 손을 대는 것으로도 모자라 저 멀리 그의 여자에게까지 손을 대다니. 단 한 명도 용서하지 못할 일이다.

에단의 황금 눈빛이 차갑게 식어 갔다.

너무도 오래 기다리고 있고, 너무도 많이 참아 주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당장이라도 전부 목을 베어도 시원찮을 판에.

「저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리하여 당장에라도 황궁으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을 텐데.

「그러니 언제나 그러하셨듯, 무사히 광영과 함께 돌아오소서.」

지금이라도 그녀가 그에게 달려와 사랑을 속삭이고, 그에게 고생 많이 하였다고 위로해 줄 것 같다. 그렇게 그녀의 모든 것이 이리 생생한데, 그런 그녀의 안위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이 상황이 그는 그저 짜증이 났다.

아니, 아주 많이 화가 났다.

“카이로스는 테바로스를 친다.”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러니 그 대가를 치르리라.

에단의 황금 눈동자에 차가운 살기가 번져 가고, 불같은 분노가 일렁였다.

아론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자신의 주군이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 아론,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누군가 아주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순간 아마 폭발해 버리시겠지.

그리고 그 끝은 피바람이리라.

“모든 것은, 나의 주군. 카이로스의 영광 폐하의 뜻대로 되시길 카이로스의 모든 신께 비나이다.”

그러니 그의 책사로서 그는 기다릴 뿐이다. 그 뒷수습 역시 그의 몫이므로.

달빛이 서서히 드리우는 에토르의 밤.

피를 몰고 다니는 아름다운 황금의 사신, 에단 황제께서 죽음과 함께 성큼성큼 테바로스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

카이로스의 원로에 몰브와 켈트가 있다면, 카이로스의 군부에는 세버와 칼슨이 있다.

모두 카이로스의 개국공신 가문.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경쟁자로서 끊임없이 대립해 왔다.

이번 세대 원로에서 몰브가 강세이듯, 이번 에단의 군부의 실세는 당연히 세버다.

루카스 세버라는 어마어마한 천재가 세버 가문에 태어난 반면, 칼슨가의 아들들은 지나치게 평범했다. 결국 그 루카스는 에단 황제의 눈에 들었고, 당당히 그의 검이 되었다. 그러니 자연히 황군의 실권은 세버가 차지하게 되었다.

시에라는 그 칼슨가의 적녀.

“아카시스 마마를 뵙습니다.”

역시나 시에라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녀가 만나고 싶다고 한 지 채 하루가 되지 않아, 그녀의 눈앞에 칼슨가의 수장이 고개를 숙였다. 삼엄한 몰브의 경계를 어떻게 넘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검은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지금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이들이 칼슨가의 수장과 그 아들들임은 확실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다 경.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영광입니다. 마마.”

라다는 로엘은 빤히 보며 답했다. 행사 때 멀리서만 지켜보았지 이리 가까이에서 알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시에라가 새로 온 아카시스의 키로스로 들어갔다는 소식에도 그는 시큰둥하였다. 키로스 따위, 누구 밑에 들어가든 똑같으리라 생각했으니.

그런데 그런 시에라가 아카시스 곁에서 활약한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들려오더니, 이제는 이리 몇 년 만에 직접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가 알던, 항상 자신의 앞에서 기가 죽던 딸이 아닌 당당한 키로스의 모습으로.

“몰브의 반란으로 유폐 중이신 마마께서 저를 이곳까지 부르신 연유가 있으시겠지요? 부디 그 연유가 제가 이곳까지 이 큰 위험을 무릅쓰고 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할 겁니다.”

“마음에 안 드시면 저를 밀고라도 하실 분위기십니다?”

진심이 가득 담긴 로엘의 농에 라다는 그저 미소 지을 뿐 답하지 않았다.

무례하기 짝이 없어라.

라다는 깍듯이 예를 차리고 있었지만 분명 로엘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그보다 어린 여자라는 사실 때문. 이러니 시에라의 진가를 못 알아보지.

로엘은 고리타분하기도 한, 이 꽉 막힌 노장의 성향을 대번에 파악했다.

“그런데 어쩌나, 라다 경. 나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하려 그대를 불렀는데.”

그렇다면 그 성향에 맞는 대우를 해 주는 수밖에.

정중했던 로엘의 존대가 단번에 사라졌다. 그녀는 곧게 앉아 있던 몸을 의자에 편히 기대며 다리를 꼰 채로 칼슨가의 남자들을 내려 보았다.

명확한 하대.

“칼슨가는 아카시스의 명을 받으라.”

그 당돌한 태도는 뒤에서 지켜보면 수아마저도 놀라게 만들었다. 서글서글한 세버 장군과는 다르게 엄격하기로 유명한 장군이 바로 라다 칼슨이다. 그래서 웬만한 군부 간부들조차 말 붙이기 힘든 그런 자인데, 그런 라다에게 하대라니.

정말 에단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카시스 님의 명을 받듭니다.”

칼슨가의 아들들은 그런 로엘의 태도에 순간 당황하다, 한 박자 늦게 정색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러면서 애먼 여동생인 시에라를 노려보았으나, 시에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라다 칼슨은 그런 로엘의 반응에 오히려 작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재밌다는 듯이.

“물론, 명령에 가까운 부탁이자 믿음이지만요.”

그 미소를 예상이라도 했듯 그녀 역시 싱긋 웃었다.

꼬장꼬장한 노장은 토르티아에도 쌔고 쌨다. 그러니 로엘 역시 이런 분을 상대하는 데는 도가 텄다.

피어 몰브의 유형이라면 이미 자신이 전부 옳다고 굳건히 믿은 채 귀를 닫는 자이므로 오로지 힘으로 눌러야 한다.

반면 라다 칼슨의 경우 권위에 숙이는 자. 다시 말해 자신이 더 높은 권위를 인정하면, 기꺼이 권위에 고개를 숙인다.

그래서 로엘은 그 권위를 보인 거다.

황제의 여인으로서 이 나라의 아카시스에 있는 자.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는 라다에 비해 권위자다.

“라다 경. 지금 상황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폐하께서 황군의 주축군과 함께 성을 비운 틈을 타 몰브의 사병이 황궁을 점령하였고, 저와 수아 님은 인질로 잡혔으며, 덕분에 황군은 무장해제 당한 채 성 밖으로 쫓겨났지요.”

전부 알고 있는 사실.

아니 칼슨뿐 아니라 모든 원로가 아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작스레 성문이 굳게 닫혔고, 몰브는 보이지도 않으며, 황군은 맨몸으로 쫓겨났다,

뻔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뒤에 테바로스가 있다는 것쯤은, 당연히 라다 경이시라면 진작에 파악하셨겠지요.”

라다는 가만히 로엘을 응시했다. 테바로스가 그 배후라는 것까지 알아챈 이 상황에서, 그녀가 자신을 불러 무얼 하려는지 라다 경은 꽤나 궁금했으므로.

“저는 라다 경께 이 황궁의 재수복을 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호기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돌하기도 하여라. 라다는 웃고야 말았다.

“켈트가가 이미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켈트가는 도망가는 몰브를 잡아야지요. 황궁은 황군이 되찾아야 합니다. 귀족의 사병이 아니라요.”

이 작고 가녀란 여인께서 얼마나 엄청난 것을 계획하고 계신가.

“대장군 칼슨. 명망 높은 칼슨가가 어찌하여 이 사태에 침묵하고 계십니까.”

“현 황군의 지휘권은 세버에 있으니까요. 저희가 나설 일이 아닙니다. 폐하의 명이 계시지 않는 한.”

“그 기회를 제가 드리겠다는 겁니다.”

로엘의 미소가 진해졌다.

“루카스 세버 장군. 훌륭하지요. 아마 그분께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폐하의 치세 하에 세버의 군부 장악은 지속될 겁니다. 그럼 상대적으로 칼슨가는 ‘지금’과 같겠군요.”

‘지금’. 그 두 음절에 라다와 그 아들들이 움찔했다.

요직에서 배제되고 외곽을 도는 그런 상황.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루카스 장군의 아래에서 항상 그 뒤를 서포트 해야만 하는 굴욕. 아무리 노력하여도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절망.

지금 칼슨가는 그 늪에 빠져있다.

“이번 몰브의 반란은 카이로스 황실에게는 비극이나 칼슨가에게는 희극이 될 수 있습니다. 향후 몇 년 동안은 오지 않을, 그리고 올 가능성이 거의 없는 기회가 왔으니까요. 황군을 지휘하여 폐하를 구하는, 그런 기회.”

칼슨들의 눈이 번쩍 뜨일 밖에.

숨죽여 산다고 하여 야망마저 죽은 것은 아니다.

황군 지휘권이라. 가히 몇 년 만에 가져 보는 권한인가.

“누가 보아도 지금은 위급사항입니다. 아카시스는 납치되었고, 황군은 무장해제 당했으며, 황궁은 반란군에 의해 점령당했지요. 여기에 몰브의 계획대로라면 곧 테바로스의 군대도 들어올 겁니다.”

사태의 심각성 따위, 설명하지 않아도 라다 역시 알고 있다.

이 사태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때, 그리고 켈트가 움직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칼슨은 고민이 깊어졌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이대로 숨을 죽이고 있다가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상황을 정리해 주길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켈트와 같이 로엘 마마에게 접촉하여 반란군을 토벌할 것인가.

그러나 숨죽여 산 지, 외곽으로 돈 지 너무 오래된 것이 화근이었을까. 칼슨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였다. 너무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만일 그들이 나섰음에도 일이 잘못된다면? 아카시스님이 죽고 그 화살이 자신들에게 돌아온다면? 아니면 최악으로 치달아 테바로스가 황궁까지 진격해 그들이 모두 죽는다면?

그럴 바에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옳은 판단 아닌가?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한심한 채로 기다렸다.

그 와중 딸이 찾아온 거다. 성벽을 넘고, 칼슨가의 담벼락을 넘어 자신에게로.

굳은 결심과 단호한 마음을 가진 채, 그를 마주하며 요구했다.

칼슨가는 아카시스님께 힘이 되라고.

“아카시스 로엘. 칼슨가의 수장 라다 칼슨에게 명합니다. 아카시스의 이름으로 라다 칼슨에게 현 황군의 총 지휘권을 내리니, 그대는 지휘관으로서 황군을 무장시켜 황궁을 탈환하세요.”

“아카시스님의 명을 받습니다.”

황송하고도 황송한 명령. 바로 칼슨가 전원의 무릎이 꿇었다.

로엘은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다. 기다렸다는 듯, 시에라는 프란시아를 상징하는 검을 로엘에게 건넸다.

그 문양을 모를 이, 카이로스에 아무도 없다.

“카이로스의 프란시아, 로엘 네아레스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칼슨가는 황군의 지휘관으로서, 황제 폐하의 북방 전투 지원을 위한 출정을 명합니다.”

프란시아.

카이로스의 사람들에겐 살아 있는 여신이다.

그 누가 거역할 수 있는 이름인가.

고개를 숙였던 칼슨가의 사람들은 아예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

“카이로스의 광영. 카이로스를 수호하는 승리의 여신. 우리의 프란시아시여. 칼슨가의 목숨을 걸고 명을 받듭니다.”

자신의 발밑에 일제히 머리를 숙이는 칼슨을 내려 보며 로엘은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이건 부담감일 거다. 이 자존심 높은 칼슨이 이 정도라면, 그녀를 바라보는 카이로스의 백성들은 어떠할까. 그들에게 그러한 칭송을 받을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 하는, 너무도 당연하고 원초적인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보았자 그녀가 프란시아가 되어 버린 사실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늘 그러하듯,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 정해진 운명의 굴레 속에서 이번에도 그녀는 힘껏 헤쳐 나가면 된다.

“칼슨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길.”

자, 이제 군사는 갖춰졌다.

테바로스가 아직 오지 않은 이때, 몰브의 사병 따위 군사만 있다면 무엇이 문제랴.

승리에 굶주린 자들이 반란군 제압을 위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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