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0. 그들의 반란 (31/69)

Chapter 30. 그들의 반란

“이게 무슨……!”

“어서 길이나 터!!”

칠흑 같은 밤중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청객은 순식간에 로엘의 궁전, 세룸니르를 에워쌌다. 수아의 궁전을 침입했을 때보다 세 배는 보강된 인원으로 그들은 거칠게 세룸니르의 문을 부수다시피 하며 들이닥쳤다.

“수아 님……!”

그들이 앞세운 건 밧줄로 포박된 채 검으로 위협당하고 있는 수아였다.

수아의 상태가 그러하니 시에라도 선뜻 케인을 비롯한 몰브의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뭐 하고 있어? 사태 파악 끝났으면 당장 너네 잘난 주인 데려와!”

성질 급한 아리스의 호통이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이들을 목숨으로 막아 세우고 로엘을 피신시키고 싶었으나, 인질로 잡힌 수아를 보니 그러할 수도 없었다.

“하. 진짜 미쳤구나.”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와중, 뒤에서부터 로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생 암살에 시달린 그녀에게 이런 소란스러움이 들리지 않을 리 없다. 이미 계단 위에서 내려와 그 모든 상황을 내려본 그녀는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몰브가 미쳤나 보다.

“케인 몰브는 카이로스에 발을 딛는 순간 죽는 거 아니었나? 그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망령이라도 되나.”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로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강하게 몰브들을 대했다.

로엘의 대놓고 하대하는 그 태도에 오히려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은 케인과 아리스였다. 아무튼 끝까지 자기만 잘난, 재수 없는 여자다.

“입만 살아서는. 네년이야말로 목숨이 한 열 개쯤 되나 보지?”

“아니면, 수아 켈트 목숨이 열 개라든가.”

수아를 거칠게 당기면서 그녀의 목에 검을 더 바짝 대자, 그제야 로엘의 얼굴도 굳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로엘 님.”

“수아 님.”

로엘을 보며 똑바로 말하는 수아 역시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흔들리는 건 로엘이었다.

“누가 보면 친자매인 줄 알겠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하셨다고. 하. 진짜 역겨워서.”

아리스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대놓고 비웃었다. 평생 제대로 된 친구 한번 가져 보지 못한 그녀가 무얼 이해하겠는가. 오히려 로엘은 그리 반응하는 아리스를 한심하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당장 모든 키로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네년도 꿇어.”

케인은 친히 수아를 끌어다가 검으로 더욱 바짝 들이대며 로엘에게 경고했다.

로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저런 사병들 따위 몇 명이고 베어 버리고 이 말도 안 되는 불장난을 시작한 몰브가의 남매를 그녀 앞에 꿇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수아가 너무 위험했고 들이닥친 인원 수도 너무 많았다. 지난번 숲속에서의 암살 실패가 케인 몰브를 쓸데없이 신중하게 만들었나 보다.

로엘은 온갖 욕을 속으로 삼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에라. 무장 해제시켜.”

“하지만 마마!‘

“검을 버려.”

시에라의 다급한 말에도 로엘은 단호했다. 수아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시, 머리 하나는 좋아.”

그녀의 말에 케인과 아리스의 표정에 바로 화색이 돌았다.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여자라 내심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기에 순순히 그들의 말을 따르자 안심이 된 거다.

로엘의 처소가 아닌 수아의 처소를 먼저 치라던, 아버지의 말을 듣길 너무 잘했다.

“자. 모두 검을 버렸어. 그러니 수아 님을 풀어 줘.”

“아직 아니지.”

케인은 대충 수아를 병사에게 밀쳐 버리고 터벅터벅 로엘에게로 다가섰다. 잠자리에 들었다가 급하게 내려오느라 얇은 숄만 걸치고 있는 그녀는 케인에게 묘한 감정이 들게 할 만한 모습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굽히지 않은, 오만한 여자.

이 여자가 이 몸으로 그 잘난 에단 황제의 품에 안기는 거다.

“놔.”

“닥쳐.”

그런 로엘의 턱을 한 손으로 잡아 거칠게 들어오자 바로 로엘의 싸늘한 눈길이 케인을 쏘아보았다. 그럴수록 케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마음만 먹으면, 정말 이 여자를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입조심하는 게 좋아. 지금 나를 건드렸다간, 정말 무슨 짓이든 할 거 같으니까.”

“너 혼자서? 나를? 하. 너무 같잖아서 웃음도 안 나오네.”

역시나 바로 케인의 손이 그녀의 뺨을 거칠게 내려쳤다. 바로 우악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움켜쥔 그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똑같이 로엘을 쏘아보았다.

“입. 분명 조심하라고 했어.”

“손. 분명 놓으라고 했어. 나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케인의 팔굽치를 가격하고, 그대로 케인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 들어 케인의 목에 들이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그 수많은 사병들은 손 한 번을 쓰지 못했고, 아리스 역시 아 소리 한 번을 내지 못했다. 시에라마저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로엘은 자연히 입이 다물어진 케인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이 남자는 정말 멍청하다.

그녀가 누구의 딸이고 어떤 인생을 어떻게 보내왔는지조차 모르고 덤비다니.

아니, 과거까지 갈 것도 없이 지난번 사태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평생 곱게만 자라 온 공작가 자제의 몸으로 그녀를 어찌하려는 거 자체가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 정말 분노가 치밀었다.

이깟 것을 상대하려, 이리 참아야 하는가 싶어서.

“수아 켈트를 진짜 죽이고 싶어? 당장 오라버니에게서 떨어져!!”

뒤늦게, 아리스의 비명에 가까운 엄포가 울렸다. 로엘은 욕을 또 한 번 삼켰다. 욱해서 저질렀지만, 상황이 바뀐 것은 없었다. 오기 전에 제대로 교육을 받았는지, 몰브의 사병들이 수아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반격을 노려 볼까도 하였으나 수아를 겨눈 칼끝이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그러니 로엘의 선택지는 또다시 검을 내려놓은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함부로 손대지 마. 나도 내가 어디까지 해 버릴지 모르니까.”

서슬 퍼런, 그녀의 붉은 눈이 케인과 아리스를 보며 말했다. 언제라도 그들을 찢어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기분 나쁜 붉은 눈에 두 사람은 마른침을 꼴깍 넘겼다.

케인은 다시금 그 피로 물든 시체 더미 가운데 홀로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처음 그녀를 발견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는 그 표정은 가히 모든 이들의 소름을 돋게 할 만큼 평온했다. 사신이 생명을 거두면 저러할까 싶을 만큼.

공작가의 적자라는 이유로 단 한 번도 전장에 나가지 않은 케인으로서는 에단에 대한 숱한 소문에도 항상 코웃음을 쳤다. 분명 무지한 군사들이 제멋대로 지어내고 과장시킨 거짓말일 거라 치부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케인은 바로 그때의 로엘 모습을 보고 에단을 떠올렸다. 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 너무도 그가 아는, 그의 황제를 닮았으므로.

아마 전쟁에서 그가 저러지 않았을까.

저렇게 수많은 자들의 피를 손에 묻히고 또 묻히고, 그렇게 시체 더미를 넘어 지금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나 따위는 절대 상대가 되지 않을 텐데.

“제기랄.”

케인은 낮게 욕을 읊조렸다. 이렇게 이어진 생각의 끝은 항상 자신에 대한 비하였다. 그것은 한없이 그를 작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마치 자신을 이 나라의 왕재라도 되는 듯이 대하는 아버지 밑에서 한없이 비교되는 또래의 황제를 모시며 느꼈던 그 패배감.

“내가 왜 니블에 손을 댔는데……!”

케인은 다시금 욱신거리는 자신의 어깨를 잡았다. 아직도 한쪽 팔이 없어진 것이 적응되지 않아, 늘 이리 직접 만져 볼 때 실감이 났다. 그래서 더 분노가 치밀고 더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케인은 떨어진 검을 주워 이번엔 수아의 머리를 낚아챘다

“아악!”

“수아 님!”

로엘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 미치광이가 진짜 일을 내려나 보다.

“그래? 그럼 내가 이 여자를 범하면 되는 건가?”

“케인 몰브……!”

단번에 일그러진 로엘의 얼굴을 보며 케인은 만족스럽게 비웃었다. 그대로 수아의 얇은 숄을 거칠게 끌어내리자, 바로 수아의 붉어진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애써 자신의 입술을 깨물어 비명 소리를 내지 않고, 치욕을 참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 더더욱 로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알았어! 알았다고!!”

케인의 손이 더 수아를 만지기 전에 로엘이 먼저 소리치고 말았다.

“그럴 거면서 허세는.”

케인이 하는 짓들을 그저 지켜만 보던 아리스는 로엘의 당황하고 분노하는 그 표정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늘 자신을 비웃던, 그 잘난 듯한 태도가 사라지니 속이 다 시원했다.

수아가 케인에게 겁탈을 당하든 어떻든 아리스는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린, 저 붉은 여자만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 가면 그만이다.

“나에게 뭘 원하는 거야. 네놈 시중이라도 들라는 거야?”

“그건 차차 하기로 하고. 우선 황군부터 무장해제 시켜야지.”

“뭐?”

로엘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군을 무장해제 시키라니? 이 카이로스 수도를 지키고 황궁을 지키는 자들을 무장해제 시킨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설마…… 너네……!”

로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고작해야 자신을 납치하는 정도로 끝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자기들이 당한 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복수하려는 수작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몰브가는 그보다 더 엄청난 걸 꾸미고 있었다.

가당치도 않은 것을 욕심내며.

“반란이라도 일으킬 셈이야?”

이제야 제대로 된 반응이 나온다.

완전히 창백해진 채로 케인과 아리스를 번갈아 보는,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두 사람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얼굴이, 보고 싶었던 거다.

케인은 또다시 우악스럽게 로엘의 턱을 움켜잡아 들어 올렸다.

“그래. 오늘 밤. 카이로스의 황궁은 우리 몰브가 차지한다.”

정말 돌아도 단단히 돌지 않고서야, 감히 할 수 없는 말.

“그리고 너는 직접 에단 황제에게 편지를 쓰겠지. 살려 달라고. 당장 달려와 자신을 구해 달라고.”

로엘의 얼굴이 더더욱 파랗게 질려 갔다.

이 밤, 이 군사를 이끌고 후궁에 쳐들어온 진짜 이유. 그건 역시나 로엘이었다.

아니, 로엘은 그저 미끼. 그들은 좀 더 높은 곳, 좀 더 위대한 그 사람을 노리고 있다.

“그러면 그자는 어떨까? 너에게 미친 황제는 바로 돌아오겠지? 그러면 북방으로 진격한 군사는 아마 반이 되겠지. 어쩌면 그 이하일 수도 있고. 아? 생각해 보니 네년을 끔찍히 여기는 건 황제뿐만이 아니잖아? 이반 황제까지 달려오면 정말 볼만하겠는걸?”

피식. 케인은 소리나게 조소를 뱉었다.

어쩌면 정말 로엘의 편지 한 통으로 모두를 끝장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될까? 테바로스는, 그리고 토르티아는 그렇게 텅 빈 북방을 어찌할까? 서둘러 돌아온 그들의 길목은 또 어쩌고?”

이제야 로엘은 이 모든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아. 그렇구나. 그래서 이들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거구나.

“몰브의 생각이 아니구나.”

제정신이 아닌 케인과 아무것도 모르는 아리스의 머리에서 생각해 낼 수 없는 계획들.

그럼 누구일까? 권력욕에 빠지고 돈독에 빠진, 자존심만 센 늙은 공작 피어 몰브가?

아니다.

“테바로스가 뒤에 있구나.”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

음모와 계략 속에서 더 악랄한 음모와 치졸한 계략으로 원하는 것을 가져야만 하는 자.

그래. 이건 데릭 테바로스의 생각이다.

“너네가 이 나라를, 카이로스를 바치려는구나.”

케인과 아리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 테바로스와 접촉했다는 것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로엘은 너무도 쉽게 그 비밀을 알아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소름 끼칠 수밖에. 이 여자가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볼 수 있나 싶어서.

물론,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아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 네가 뭘 어떻게 알아내든 중요한 건 넌 이미 잡혔고 우린 이미 정보를 보냈다는 거지. 그러니 이번 전쟁에서 황제는 패배할 거다. 그것도 아주아주 처참하게. 그대로, 그렇게 죽어 주면 제일 좋고.”

“너 지금 네놈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너무도 잘 알고 있지. 난 이 꼴 보기 싫은, 황금 머리의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거야.”

누구는 황금의 머리를 가진 황족으로 태어나기 싫어서 이렇게 태어났는가.

태어나 보니 처음부터 황제가 될 수 없는 자로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사는 것도 억울한데, 그렇게 충성해 온 그에게 돌아온 것이 팔 하나로 평생 살아야 하는 거라니.

어떠한 말을 들어도 케인은 에단을 용서할 마음이 없다.

그 사실을 드디어, 이제야 로엘이 알아 버린 거다.

“자, 그럼. 황제에게 네년 목숨을 살라 달라고 애원하러 가 볼까?”

폭풍이 몰아치는, 이 밤. 몰브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

에단은 그 숱한 전쟁에서 단 한 번을 지지 않았다. 좋은 군대. 좋은 무기. 좋은 여건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놀랄 만큼 그는 항상 전쟁을 압도적 승리로 이끌었다. 15살, 처음 선봉을 맡은 이후부터 그의 손에 의해 멸망한 나라가 몇이며, 그의 손에 수복된 땅이 얼마인가.

단지 카이로스의 좋은 조건만을 들먹이기엔 그의 전적은 눈이 부셨다.

“하. 진짜네. 에단 님 말씀이 맞네.”

“……이거 복잡하게 돌아가네.”

그런 그의 영토에 처음으로 다른 이가 발을 들여놨다.

국경 제1구역 에토르에 흩날리는 두 국기. 테바로스와 토르티아.

이미 점령당한 그 거대한 성은 굳게 성문을 걸어 잠근 채 경계태세로 그들을 맞았다. 테바로스도 테바로스이지만, 그에겐 토르티아의 국기가 더욱 거슬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오로지 온통 붉은색인 그 깃발은 아무리 토르티아가 쇠락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파급력이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 저 깃발이 한때 최강을 나타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

“설마 파벤터가 아닌 토르티아 국경을 통해 갔을 줄이야.”

“와……. 에단 님. 진짜 어떻게 아신 거예요? 더 늦었으면 이거 더 아래로 내려왔겠는데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에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이들은 바로 사태를 파악하고 파벤터에서 가장 지름길로 이곳까지 오게 한 에단의 판단력에 감탄할지 몰라도 에단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아주 많이 화가 났다.

이건 단순히 이들을 국경 지역으로 묶어 놔서 다행이라는 태평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이반.”

“어. 이거 진짜, 위험할 수도 있겠어.”

다른 군대도 아닌, 토르티아의 군대다.

무능한 왕을 만나, 허송세월을 보내며 맥없이 저물어 가는 그들은 훌륭한 지휘관이 고팠다. 그들을 최강으로 이끌었던 그분. 제이드 네아레스 같은 이가 있다면 당장에라도 목숨을 바칠 의향이 있는 그런 자들이다.

그들이, 게으르고 사치스러운 왕에게서 벗어나 제대로 된 지휘관을 얻는다면 그들은 다시 무적이 될 수 있다.

“어쩔 작정이야. 이대로 에토르를 넘길 순 없잖아.”

“에토르는 절대 넘길 수 없습니다. 제1구역은 북방으로 나아가는 가장 효율적인 출입구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장 많은 병사와 가장 많은 자본을 쏟아 키워 왔고요. 무슨 일이 있어도, 에토르는 꼭 사수해야 앞으로가 있습니다.”

이반보다도 먼저 아론이 정색하며 말했다.

여기에서 에토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이,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에단이 처음 이반을 국경지대로 보낸 것도 에토르였으며, 그 이후 이반이 터전을 잡은 것 역시 에토르였다.

그러니 지금 그 에토르에 다른 나라 국기가 당당히 펄럭이는 걸 보니 아주 많이 분할 수밖에. 에단만큼이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은 이반도, 자신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에토르의 침공만큼은 꽤나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일단은 상대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어. 에토르 안에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의 병력을 가늠할 수 없으니까.”

“프래카가 바로 침투하겠습니다.”

루카스는 바로 답했다. 정말 에단의 한마디라면 바로 나갈 듯한, 잔뜩 화난 사냥개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 그만큼, 루카스도 아주 많이 참고 있다는 거다.

“에토르 병력의 피해 상황은.”

“정확히 추산할 수는 없으나 생각보다는 경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시엘이 침공당한 이후 에토르 지휘관 맥스가 신속하게 파벤터로 병력을 파병하였습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누가 보아도 테바로스가 그대로 파벤터로 진격할 거 같았으니까요.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덕분에 에토르가 너무 쉽게 함락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가 생긴 거나 다름없어. 그만큼 우리의 병력을 살릴 수 있으니.”

“그럼 관건은, 저 안에 얼마나 있느냐인데…….”

모두의 눈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결국 결정하는 것은 에단이므로.

“폐하. 명을 내려 주소서.”

수많은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 신의 가호를 받는 황금의 황제.

그 승리들 속에서 그는 몇 번의 결정을 홀로 하였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결정은 결국 그의 몫이었다.

“루카스. 황군과 프래카를 정비해. 방어 진영을 구축한다.”

“방어 진영이요? 아니, 왜…….”

“이반. 에토르의 잔류 병사와 함께 파벤터로 가. 그곳 역시 방어 태세에 돌입해.”

“폐하. 잠시만요. 지금 당장이라도 총공격을 해도 모자랄 판에 방어라니요!”

당연스럽게 루카스의 반발이 제일 먼저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만큼은 이반도, 아론도 에단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전력이 파악 안 돼서 섣불리 나설 수 없다는 건 알겠지만, 그럼 더더욱 여기에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 파벤터로 병력을 분산시키는 건 좋지 않아.”

“황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폐하. 신중하시는 건 좋으나, 저희가 굳이 방어 태세로 나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저들은 이미 오랜 전쟁 중이고 저희는 아직 아무것도 못해서, 설사 토르티아 병사가 많이 들어왔다 하더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승산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이길 수 있어요. 폐하. 다른 군대도 아니고 프래카와 황군이라고요!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그만.”

에단은 한목소리로 말하는 다른 이들의 말을 끊었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이 모든 것들이 짜증스러웠는데 그들까지도 그의 짜증에 한몫 보태고 있었다.

“문제는 테바로스가 아니야. 토르티아지. 지금 이 상황의 키는 토르티아가 테바로스에 가담했다는 것이고, 여기는 바로 그러한 토르티아의 접경 지역이라는 거야.”

에단은 한숨과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정말 니블로 시작하여 많은 것들이 꼬이고 어그러졌다. 니블만 아니었으면 엄한 에토르를 가지고 걱정할 일도, 괜한 병력 낭비를 할 일도, 그리고 북방정벌의 탄력을 이런 식으로 뺏길 일도 없었다.

시작을 테바로스에 뺏겨 버린 마당에 잠자고 있던 토르티아마저 깨운 격이니, 머리가 아플밖에.

“내가 데릭 테바로스라면, 토르티아의 접경 지대의 토르티아 군사를 갖고 멍청하게 에토르에만 머물러 있지 않아. 우리가 병력을 에토르로 이동시킨 이 순간을 노려서 파벤터를 점령하고 그렇게 에토르와 파벤터에서 그 중간에 낀 우리를 공격하겠지. 그래야, 그나마 우리랑 대등하게라도 싸움이란 걸 할 테니.”

그녀의 말이 맞았다. 데릭 테바로스는 영리한 자다.

그가 북방을 꿈꾸면서 생각해 두지 않았던 복병.

이리 선공을 하는 것도, 다른 곳도 아닌 소삼국을 먼저 공격하고 그다음 시엘을 노린 것도, 나아가 그렇게 점령한 시엘을 기꺼이 포기하고 이리 에토르까지 차지한 것도 모두 다 놀라울 정도로 치밀했다.

야망이 가득한 젊은 피.

이제껏 그가 상대해 오던 타성에 젖은 이들과는 달랐다.

그러니 더욱 그를 자극했다. 여러모로.

“……폐하의 예측이 맞다면 서둘러야겠습니다.”

모두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에단의 예측이 맞다면, 이건 절대 가볍게 끝날 일이 아니었으니까. 잠자코 있던 이반 역시 굳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만일 이대로 토르티아가 파벤터를 공격하고 연이어 에토르를 공격하는 우리를 뒤에서부터 공격한다면 아무리 황군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이곳이 카이로스의 영토 내라고 하더라도 피해가 적지 않을 겁니다. 나아가 토르티아에서부터 원군까지 도달하여 북쪽으로부터 밀고 내려온다면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겠지요. 그런 최악의 상황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이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테바로스의 황제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제야 모두의 마음속에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토르티아는 어떠한가. 토르티아는 어디까지 그를 믿고 그에게 군사를 내줄 건가.

“이 판에 처음부터 토르티아가 개입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다면 처음부터 파벤터를 노렸겠지. 시엘이 아니라.”

“그렇다면 중간에 들어왔다는 건데, 이미 4개월 동안 전쟁 중인 테바로스 측에서 먼저 조율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합니다. 데릭 테바로스 즉위 이후 테바로스는 토르티아 영토를 제법 많이 가져가서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하거든요.”

콜린 역시 이반의 말을 거들었다. 북방에 관해서라면 콜린 역시 전문가. 콜린이 보아도 지금 상태는 꽤 좋지 못하였다.

“결국 시엘을 함락한 이후 급하게 토르티아가 합류하였다는 건데, 그 시기는.”

“정확히 에리카 네아레스가 카이로스에서 쫓겨났을 때지.”

에단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놈의 니블. 니블.

정말 끝의 끝까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에리카 네아레스가 움직였다면 토르티아 군사 전원이 움직여도 이상할 게 없어. 지금의 조지 황제는 애초에 전쟁에 능력이 없는 자고, 테바로스가 카이로스를 운운하며 군사를 내어 달라 하면 군말 없이 내줄 사람이니까.”

“거기에 토르티아 군사들 역시 데릭 황제의 지휘를 반길 테고요.”

요약하자면, 데릭 테바로스가 사기가 잔뜩 오른 테바로스 군대에 더하여 토르티아의 정예까지 손에 넣었다는 거다.

“폐하. 우선은 파벤터부터 확보하시고, 중앙군을 좀 더 불러오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예. 지금의 군사만으로는 한계가 있……!”

아론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갑작스러운 전령의 소식이 울렸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다급한 전령의 나팔 소리는 분명 카이로스의 황궁으로부터의 소식이었다.

“폐하! 황궁으로부터의 전령입니다!”

황궁이라니.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로워야 할 황궁에 전령이 올 일이 무엇이 있을까.

순간 모두의 마음에 불안이 엄습했다.

“하늘 같으신 폐하를 뵙…….”

“뭐야.”

그 마음은 에단도 예외가 아니었다.

에단은 거추장스러운 전령의 예를 끊고 바로 본론을 추궁하였다.

쿵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황궁 안에 있는, 그곳에서 그를 기다린다고 말하던 단 한 사람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폐하. 몰브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아카시스님을 인질로 삼으셔서 모든 황궁의 무장을 해제시킨 상태입니다.”

불길한 예감은 어찌도 이리 빗나가질 않는지.

황궁의 상황을 전하는 전령의 보고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두들 갑작스레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몰브가 반란이라니.

그 몰브가 아카시스님을 인질로 삼다니.

“누가, 누구를 인질로 삼아?”

바로 에단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말을 전하는 전령은 그 살기등등한 싸늘한 눈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넘겼다. 당장이라도 그의 손에 사람이 죽어 나가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수아 님을 먼저 인질로 확보하셨고, 그 때문에 로엘 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로엘 님과 수아 님 목숨을 담보로 황군 전원을 무장해제 시킨 후, 임시적으로 몰브의 사병들이 황궁을 점령하였으며, 로엘 님과 수아 님은 로엘 님의 궁에 감금되어 계십니다. 이건, 로엘 님으로부터의 전서입니다.”

에단은 전령이 두 손으로 건네는 두루마기를 바로 펼쳤다.

간결한 글씨체. 그가 알고 있는 로엘의 글씨체가 맞다.

“폐하.”

에단의 표정이 더 굳어지자, 자연히 다른 이들의 걱정도 커졌다. 에단은 두루마기를 이반에게 건넸고, 다른 이들 역시 함께 그 내용을 보았다.

“……아카시스님의 필체가 맞습니다.”

“이 인장 역시 아카시스님의 것이 맞고요.”

내용은 간결했다.

인질이 되어 상황이 이러하니, 폐하께서는 부디 신속히 환궁하셔서 후일을 도모하시라고.

“폐하. 누가 봐도 이건 함정입니다.”

“로엘 님이 잡힌 것은 사실이지요.”

아론의 말하기가 무섭게 이반이 말했다.

에단만큼이나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진 이반은 바로 에단을 보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안 돼.”

그러나 에단의 대답은 단호했다.

“폐하!”

바로 이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늘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이반답지 않게, 아예 한걸음 나서는 이반을 바라보며 콜린은 한숨을 내쉈다.

기어코 폐하께 들키고 말더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로엘을 챙기려 들었다.

그것도 이 시국에. 다른 누구도 아닌 폐하 앞에서.

“몰브가 일부러 이러는 거, 여기 있는 모두가 압니다. 폐하를 흔들려는 거겠지요. 그렇게 군사를 분산시키고 그 틈을 타 테바로스와 토르티아가 가세하여 역공을 펼치려는 계획. 너무도 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 홀로 가서 아카시스님을 구하겠습니다.”

“황자님!”

그러니 콜린의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이반은 로엘이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에 에단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켜 주겠다고 마음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일을 터트리시는지, 정말 그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하늘은 너무 가혹했다.

이반은 에단의 싸늘한 표정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대로 몰브의 손에 황궁을 내버려 둘 수도 없어. 그들에게 시간을 주었다간, 더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이반은 에단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 단호한 눈에는 로엘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에단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이반이 말하는, 더 걷잡을 수 없는 일.

바로 ‘에단의 폐위’다.

“……황자님의 걱정, 일리가 있습니다.”

이반의 말뜻을 바로 이해한 아론이 말했다.

그만큼 개국공신 몰브가의 영향력은 지대하였으므로.

그러지 않아도 이번 니블 사건으로 인해 잔뜩 독이 올라 있을 터. 귀족들은 한쪽 팔이 잘린 케인을 보고 에단에게 다시금 공포를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불만도 커졌다.

늙기만 한 그들에게 어린 젊은 황제의 권력은 항상 불편하였으므로.

그러니 황궁을 차지한 몰브에게 마지못해, 스스로, 충분히 설득당할 수 있다.

“할 테면 해보라지. 내가 죄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야.”

루카스마저 이반의 말을 이해했다. 그만큼, 몰브가 황궁을 점령했다는 것은 큰 위협이 되었다.

거기에 아카시스님이 인질이라니.

자신의 주군에게 그분의 의미가 어떠한지는 이들이 제일 잘 안다.

절대 녹을 거 같지 않던, 얼음장 같은 그를 변화시킨 이.

기꺼이 마음을 주고 사랑을 주게 했던 단 한 분.

그 붉은 머리의 공주님이 위험에 처하신 거다. 그것도, 지금 절대 제정신일 수 없는 위험한 자 손 아래에 놓여.

“네가 걱정할 일이 없도록, 내가 처리할게. 최소한의 병력이면 돼. 그마저도 들킬 걱정이면 나 혼자 들어가도 되고.”

“프래카 소부대만으로도 몰브의 사병 따위 얼마든지 뚫을 수 있습니다. 그때 바로 로엘 님을 구해 드리면 되고요.”

“대신 절대, 이곳 군사를 움직이시는 건 안 됩니다. 방금 폐하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대로 저희가 파벤터를 지키지 못하면, 그리하여 역공이라도 당한다면 이보다도 더 작은 병사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반이 말하면 루카스가, 루카스가 말하면 아론이 이때다 싶어 말을 이어 받았다.

그렇게 이어지는 말들은 전부 각자의 목적이 있었다.

이반은 그저 로엘을 구하는 것이고, 루카스는 프래카의 수장으로서 몰브의 뒤를 치려는 속셈이었으며, 아론은 지금 폐하가 계신 이 전쟁의 승리를 원했다.

에단은 그 모든 말들을 그저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뚫어져라 다시금 로엘이 전해 준 전서를 읽었다.

“……전령은 이 편지를 쓰는 아카시스를 직접 보았나.”

“아닙니다.”

“그럼 누가 이 편지를 전했지.”

“아리스 마마입니다.”

에단은 실소를 뱉었다. 역시나 이 편지는 몰브의 협박 아래에 로엘의 손으로 써진 거다.

모두의 예상대로 이 편지가 노리는 것은 바로 에단.

로엘의 편지임이 함정인 것을 인지했음에도 그의 마음을 흔들려는 아주 뻔한 수법이다.

문제는 그 뻔하고 유치한 수법에도 이리 마음이 흔들린다는 거다.

“이반. 파벤터로 가.”

“하지만……!”

“루카스. 예정대로 군대를 정비해.”

“폐하! 그럼 로엘 님은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달려가 두 눈으로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고, 두 팔로 그녀의 무사함을 느끼고 싶었다.

뿐만이랴. 한 순간이라도 그녀를 위협했던 모든 이들의 목을 치고, 이 모든 일들을 벌인 몰브가 전원을 직접 몰살시켜 모두에게 본을 보이고 싶었다.

“아카시스는 아카시스의 일.”

그런데 그러한 그의 마음을, 그 생각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나 보다.

「아카시스는 프란시아의 일을 합니다.」

그래서 이리 그를 다잡나 보다.

에단은 서명란에 서명 대신 빼곡히 적힌 토르티아의 문자를 읽으며 작은 웃음을 삼켰다.

몰브 중 그 누구도 토르티아어를 알지 못한다는 확신에서 나온 위험한 도박.

이 비밀 아닌 비밀 편지는 그 의미가 명확했으며, 그 진심이 뜨거웠다.

그 모든 의미와 진심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져 왔다.

결국 그녀는 그녀 스스로 알아서 할 테니, 그에게는 그의 일부터 잘하라는 것.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한다.”

이 어찌나 그녀다운 대답인가.

“황궁은 국경의 모든 사태가 안정되고 돌아간다.”

이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

“지금쯤이면 도착했겠네.”

“네?”

“아. 그 편지 말이에요.”

수아의 되물음에 로엘은 덤덤히 말했다. 벌써 몰브의 반란 이후 그녀 궁 안에 갇힌 지 나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몰브는 적은 사병의 수로 이 큰 황궁을 관리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두 사람을 한 번에 감시하겠다는 미명하에 수아 역시 로엘의 성에 유폐시켰다.

수아는 로엘의 빈 찻잔을 채우며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그 편지를 보신다면, 로엘 님을 많이 걱정하실 텐데요. 그러다 큰일을 그르치실까 봐 걱정됩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저희는 이리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있는데 말이죠.”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는데 로엘은 꽤나 진심이었다.

그만큼 그녀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거였다.

“폐하께서 그 편지가 미끼임을 모르실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몰브가 생각해 낸 수법 따위를 그분께서 간파하지 못하실 리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로엘 님.”

중요한 건 그녀가 인질로 잡혔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당장이라도 이곳으로 달려오고 싶을 거다.

이게 함정이든 아니든 말이다.

“……그러니 바로 알아채 주셔야 할 텐데.”

로엘 역시 그가 그럴까 봐, 억지로 몰브가 원하는 대로 받아 적으면서 몰래 서명했다. 그저 평범한 토르티아의 서명처럼 보이려 어찌나 고민했던가.

“괜찮을 거예요, 로엘 님. 아시잖아요, 폐하가 어떤 분인지.”

로엘은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수아의 위로에 작게 미소 지었다.

수아는 로엘과 한 궁에서의 생활이 불편할지 몰라도 로엘은 좋았다. 이렇게 불안한 때에 직접 곁에서 지켜 주는 것도 좋았고, 차분한 수아가 그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도가 되어 그녀의 생각이 너무 감정에 치우치지 않도록 잡아 주곤 하였으니까.

이래저래 둘은 함께 있는 편이 좋았다.

“폐하께서 제 의미를 알아들으시고, 그곳에서 폐하의 일을 하신다면 저 역시 이리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제가 이 상태에 있단 것만으로도, 그리고 황궁이 이리 몰브의 손에 넘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분의 많은 신경을 쓰이게 할 테니까요.”

로엘은 보란 듯 그녀에게 검을 겨누며 비웃던 그 두 남매가 떠올라 저절로 표정이 굳었다.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이야. 테바로스에게 이용을 당해도 정도껏이지.

니블로는 에리카에게 그리 이용당하더니만 그다음은 테바로스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무엇이 되었든 로엘 님을 돕겠습니다.”

그런 로엘 곁에서 수아는 두 번을 묻지 않았다. 그러니 로엘 역시 두 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함께하는 것이 좋을밖에.

“우선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어요. 지금 밖의 상황이 어떠한지, 테바로스는 어디까지 나아갔고 그 전쟁은 얼마나 진행되었으며 다른 변동사항은 없는지. 토르티아는 괜찮은지.”

“토르티아요?”

“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이번 일에 토르티아도 연관되어 있을 거 같거든요.”

그녀는 생각에 잠기며 신중히 말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내린 결론은 결국 이 일 역시 에리카와 연계되어 있단 거였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참 쉽게 설명되었다.

에리카라면 몰브와도, 테바로스와도 모두 다 쉽게 연결할 매개체가 될 수 있으므로.

전혀 연고가 없던 몰브의 반란에 테바로스가 힘이 되고, 테바로스의 중부 전쟁에 몰브가 힘이 되고 있다.

“세상에 그런 우연은 없거든요. 제 경험상.”

“그렇다면 중간 다리를 토르티아가 놓을 수도 있겠네요.”

“높은 확률로요. 그렇다면 여기에 이렇게 많은 황군들이 묶여 있으면 안 돼요. 한시라도 빨리, 폐하 곁으로 가야만 합니다.”

로엘의 표정이 더 진지해졌다.

이제는 로엘 님이 어떤 일을 하셔도 놀라지 않기로, 그저 믿음을 가지고 따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였건만 이번 말은 수아를 또다시 놀라게 만들었다.

지금 로엘은 직접 황군을 끌고 황제에게 갈 생각이다.

“그러니, 마음이 급하네요. 그 모든 게 다 타이밍이 중요한 것이라.”

그러함에도 로엘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그래서 수아 역시 이내 평소와 다름없이 그녀를 응원했다.

“제가 무얼 도우면 될까요, 로엘 님.”

수아는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당연히 켈트의 돈과 권력이죠.”

로엘 역시 그 직설적인 물음에 직관적으로 답했다.

간단하면서도 참 어려운, 바로 그런 답.

“수아 님. 저에게 켈트가를 빌려 주세요.”

로엘은 씩 미소를 지었다.

충분히, 당할 만큼 당하였으니 이제 반격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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