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9. 파란의 시작 (30/69)

Chapter 29. 파란의 시작

루카스의 프래카 군대는 역시 빨랐다. 카이로스의 황군 중에서도 정예 중에 정예. 황제 폐하를 가장 최측근에서 지키는 그들의 명성답게 그들은 루카스의 지휘 아래 일사 분란했다.

밤에 장기간 이동한 것이 무색하게 루카스와 프래카는 단 1시간 만에 시엘을 고스란히 다시 수복했다.

“아무리 나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거 너무 많이 쉬운데.”

“예. 마치 처음부터 우리가 온다는 걸 아는 사람들 같았어요. 그래서 미리 대거로 군사를 뺀 거 같고요.”

“알고 있었다면 그건 당연하지. 문제는 그들이 다 어디로 갔냐 이거야.”

루카스는 성루에 기대 국경지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루카스의 심복인 리츠는 그런 루카스의 뒤를 지키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보여 주기 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일단은 그들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였다라든지 테바로스가 카이로스를 점령했다라든지 식의 말을 퍼트리기 위해서요.”

“그렇게 하자고 우리를 건드렸다? 그 정도로 바보일 거 같진 않은데 그들의 주군이. 나의 짐승같은 촉이 말하는데 이거, 분명 뭔가 있어.”

“동의해.”

갑자기 뒤에서부터 이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루카스와 리츠는 놀란 듯이 눈이었다.

“뭐야. 이반 님이 왜 여기에 있어요?”

“처음부터 파벤터에 들러 군사를 정비하여 시엘을 지원하는 계획이었습니다.”

뒤에 따라오던 콜린 역시 한마디를 보탰다.

“그게 생각보다 빨라진 거지.”

워낙 이반이 이곳에 도가 튼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고.

이반이 북방에 머문 지가 근 5년이 넘어가니 당연하다. 지금의 국경지대가 이리 안정화되는 데엔 당연히 이반의 공이 가장 크다. 초창기, 이반이 처음 총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만 해도 어린 황제의 아성을 얕보아 참 많이들도 넘봐 왔다. 아주 같잖게도.

그러니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굳건하고도 웅장한 카이로스의 성벽과 그 위에 걸린 카이로스의 국기뿐이었다. 그렇게 모두들 그 성벽을 넘지 못한 채 죽어 갔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항상 이반이 서 있었다.

“제법 대응을 잘했다고 합니다. 역시 이반 황자님이에요. 자리를 비우셔도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 두셨더라고요.”

“이런 일이 없어야 하니까. 애석하게도 일어났지만.”

“다시 되찾았으니 된 거죠. 여전히 분하긴 하지만.”

루카스도 제법 기분이 상한 거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단의 무패 행진에는 항상 루카스 그가 함께하였기에 그건 루카스의 전적이기도 하다. 물론, 루카스도 안다. 모든 전쟁에, 그것도 그들이 없는 전쟁에서까지 무패 행진을 이어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이라는 것을.

그러함에도 에단 즉위 이후 그들은 그걸 해냈다. 그러니 더더욱 카이로스의 부대가 무서워질 수밖에. 그건 그들의 사기는 물론 병사들의 사기, 나아가 국민들의 사기도 자연히 올려 주었다.

카이로스라는 자부심.

그건 에단의 힘이자 카이로스의 힘이다.

그런데 감히 그 자부심에 듣도 보도 못한 북방의 나라가 도전을 했으니 어찌 분하지 않을까.

“문제는 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또 세 번이 된다는 거야. 그게 이어지면 정말 전쟁이 끊이지 않은 무법시대가 이어질 테고.”

“그러니 초장에 다시 버릇을 들여 놔야지요.”

루카스의 눈에서 불이 이글거렸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추격하여 피바람을 몰아쳐야 분이 풀릴 거 같았다. 혹여 그럴까 봐 나오는 직전까지도 그렇게 잔소리를 해 댄 아론만 없었어도 정말 그랬을 거다. 괜한 일 벌이지 말고 제발 자중하라는 그 소리에 적어도 시엘에서만큼 한바탕 날뛰려고 했는데, 웬걸 그들이 부리나케 달려온 것을 무색하게 할 만큼 너무도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진짜 너무 빨리 포기했어요. 마치 처음부터 적당히 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처럼.”

“얼마 걸렸다고?”

“1시간 조금 더요.”

“타당한 의심이 들 만하네.”

이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 점이 많았다. 일단 시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파벤터가 너무 평화로웠다. 만일 그들이 시엘에서 퇴각하려면 당연히 가장 최적지는 근교인 파벤터이다. 그렇기에 에단도 제1군 진영이 아니라 제2군 진영으로 이반을 보낸 거다.

그런데 이반이 파벤터로 왔을때 이미 방어 진영을 구축한 그들에게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반도 이리 빨리 시엘로 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마 제1구역은 아니겠지요?”

“그건 불가능해. 파벤터를 거쳐 가지 않은 이상 토르티아 영역을 지나쳐 가야 하니까.”

“파벤터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잖아요?”

“그게 문제인 거지. 아니면 소삼국으로 갔다거나.”

이반은 멀리 에단이 노렸으나 데릭이 선수 쳐 버린 소삼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쪽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어. 그들이 우리가 소삼국을 노렸는지 처음부터 알고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어쨌건 저들은 꽤 많은 걸 이미 이룬 상태니까. 폐하께서 출정하신다는 초 강수를 접했다면 충분히 그 퇴로를 소삼국으로 삼을 수도 있지. 무엇보다도 저들 스스로 느꼈을 테니까. 카이로스와 싸우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비록 시엘이 점령당하기 하였으나 시엘의 대응은 충분히 훌륭했다. 이반 그가 그동안 철저히 교육시킨 보람이 있을 만큼.

이미 파벤터에 이반이 도착했을 때 파벤터에는 시엘의 잔류 병사들이 들어와 있었고 중앙의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바로 다시 출격할 준비를 마쳐 둔 상태였다.

그러니 이반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는 그들에게 이반은 질책할 수 없었다.

이는 곧 테바로스의 피해도 충분히 컸다는 말.

결코 그들의 승리가 그들의 상상했던 승리가 아니란 거다.

“그들이 이긴 건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이긴 것도 아니지. 분명 그들의 원래 목적은 파벤터까지였을 거야. 시엘을 정복한 순간 여기서 멈췄을 테지만.”

“똑똑하네. 그 데릭이라는 황제.”

“맞아. 다른 한편으론 그 자제력을 높이 평가해야 돼. 만일 그들이 욕심을 내서 파벤터까지 진격해 왔다면 오히려 더 우리에게 좋은 상황이었을 거야.”

이미 시엘의 정보를 들어 파벤터는 제1진영의 군사까지 합세에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을 테고, 그렇다면 그만큼 시간은 지체되면서 중앙군이 합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데릭 황제는 승리가 아닌 패전장으로서 다시 북으로 쫓기듯 돌아갔을 거다.

그런데 그 멍청한 실수를, 그 숱한 승리를 거친 직후 격양한 상태에서도 하지 않았다.

로엘의 말이 맞다. 그는 결코 얕보아서는 안 되는 무서운 인물이다.

“……폐하께 보고는 드렸나?”

“네. 시엘 일을 정리하자마자 바로 드렸어요. 짐작컨대 아마 폐하께서도 생각보다 빨리 출발하셨을 거예요. 니블만 아니었으면 진격할 상태로 황군을 준비시켜 놔서 솔직히 명령만 떨어지면 되었거든요. 무엇보다, 폐하께서 워낙 화나 계시기도 하고.”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엘이 점령 당하였단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두었는데 생각보다도 빨리, 그것도 쉽게 끝나 그 고민이 무색해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찜찜하단 말이지.”

“제가 지금 딱 그래요.”

루카스는 이반의 혼잣말에 동조했다.

두 사람 모두 전쟁이라면 이골이 난 이들. 에단과 함께 청춘의 반 이상을 전쟁터에서 살아왔다. 그런 두 사람의 촉이 계속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고.

“도대체 폐하는 언제 오시는 거예요?! 그냥 같이 출발할 걸 그랬나 봐. 이럴 때는 진짜 폐하가 딱 결정해 주셔야 하는데. 그래야 깔끔한데.”

루카스는 살짝 짜증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고민하는 것은 그의 역할이 아닌가 보다.

이반 역시 에단이 가장 생각났다. 루카스의 말대로 이런 때에 결정을 해 주는 이는 당연히 그들의 주군, 에단이다.

“이반 님. 차라리 제가 소삼국으로 일단 진격할까요? 어차피 원래 저희가 노렸던 곳이고 이대로 저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요!”

“아니, 섣불리 움직이는 건 좋지 않아. 일단은 폐하께서 오시고 계시니 기다려 보자.”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어차피 도망가는 자들이고, 저희는 이제야 도착했다구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루카스는 발을 동동 굴렸다. 이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이대로 퇴각해 버리면 안 된다는, 그리고 그들이 갈 곳이 그곳밖에 없다는 루카스의 말은 전부 타당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감정에 잔뜩 치우친 그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제가 먼저 가서 칠게요. 처음부터 저희 프래카의 일이었어요!”

“루카스 진정해. 분한 마음은 이해되지만, 테바로스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잖아.”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는 한 그들은 이 근처 어디로 갔을 테고, 그중 가장 가능성 높은 곳이 소삼국이라면 당연히 가야죠!”

아무래도 루카스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거 같다. 이 정도로 이반이 말리면 그만 포기할 법도 한데 그는 한 치도 물러남 없이 당장이라도 이반의 오케이 사인만 떨어지면 달려나갈 기세였다. 그러니 이반의 머리가 더 아팠다.

이성으로는 루카스를 보내는 것이 맞고, 그렇게 한다 해도 에단에 대한 월권도 아니다.

하지만 도리어 이반의 감성이 선뜻 그러라 하지 않았다. 묘하게 이반을 계속 신경 쓰이게 하는 그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계속의 결단을 방해했다.

“참 새삼스럽게 대단하게 느껴지네.”

“네? 제가요?”

“아니.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주인님의 능력이.”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 결단력이.

그는 이러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다거나,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맞닥뜨린다거나, 아니면 우열순위가 전혀 없는 무언가를 선택하여야 할 때. 그는 언제나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었고 그 결단에는 항상 평가가 뒤따랐다.

정말, 너무도 피곤한 인생이다.

“이반 님. 저 가요? 갑니다?!”

“가긴 어딜 가.”

또 한 번의 깜짝 등장.

“폐하!!”

에단이었다.

이반과 루카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콜린과 리츠까지 모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이분이 어떻게 이리 일찍 여기 계시나.

“소삼국은 이미 정리했어.”

게다가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

이제야 막 황궁에서 신하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하셨어야 하는 분이 이곳 시엘에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의 말은 더더욱 이상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우리 계획대로 이제 그들은 카이로스의 속국이야.”

“그게 무슨…… 언제 그랬는데?”

“음. 오는 길에?”

모두가 어이가 없어 말을 못하는 와중에도 에단 홀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놀라는 건 주위 사람의 몫. 에단은 유유자적이 그들 사이를 지나 성루에 나섰다.

참 오랜만이다. 국경지대의 성루에 올라 이리 넘지 못했던 타르타니를 마주하는 것이.

“생각보다 시엘이 잘 해결될 거라 알고 있었고, 그렇다면 굳이 내가 이곳에 군사를 끌고 올 이유가 없으니까.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소삼국을 치는 게 효율적이므로 그렇게 했어.”

“이렇게 빨리요?”

“마지막 하나 남은 리모아는 알아서 항복했습니다.”

에단과 함께 온 아론이 대신 답해 주었다. 이반은 한숨을 삼켰다. 도대체 얼마나 기가 질리게 하셨으면 나라 하나가 항복을 할까.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치긴 했나 보다.

“거기 원래 제 거였잖아요, 폐하! 치사하게 먼저 선수 치시다니!”

“네가 느린 거야.”

서운함이 역력한 루카스의 진심 어린 투정에 돌아오는 그의 반응은 역시나 무미건조했다. 무거운 것이 싫다고 하여 갑옷도 가장 최소한만 갖춰 입는 그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는 그 유유자적한 모습은 세 나라를 무너뜨리고 온 사람이 아닌 마치 어디 잠깐 외곽에 순찰 나갔다 돌아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니 보는 사람에서야 한숨이 나올밖에.

“도대체 얼마나 빨리 정리하신 거야.”

“한 9시간 걸렸나.”

함께했던 아론은 루카스의 말에 답했다. 어찌나 몰아치던지 말릴 겨를도 없었다.

세상에 어느 나라 황제가 제일 선봉에 서냐고. 좀 뒤에 물러서서 밑에 사람들에게도 기회라는 걸 주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건만 이미 충분히 짜증이 오른 그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오랜만이었으니. 몸 좀 풀었겠네.”

이반은 그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조심해. 너도 예전 같지 않다고.”

“나이 들었단 소리를 하는 건가.”

“어.”

시답잖은 이반의 말에 에단은 피식 웃었다. 나이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모를 만큼 에단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이반의 마음을 알기에 그는 미소 지었다.

그가 말하는 예전과 다르다는 말.

너무도 많은 것을 담고 있었으므로.

그의 위치가 그러하였고, 딸린 그들의 병사가 그러하였고, 지금의 상황이 또 그러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저 멀리, 카이로스 황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아카시스가 있다.

그가 다치면 제일 슬퍼할 이.

이제는 생겨 버린 거다. 그러니 얼른, 돌아가는 수밖에.

“시엘 상황. 제대로 보고해.”

“보고하고 말 것도 없어요. 들이닥쳤고 1시간 좀 넘겨서 상황 종료. 이미 주 부대는 빠져나간 뒤인 거 같았어요.”

“아마 우리의 출정 소식을 듣고 미리 몸을 뺀 거 같은데…….”

“그것치고도 지나치게 빠른 감이 있네요. 마치 우리의 출정 시기를 처음부터 알았던 사람들처럼.”

아론은 이반의 말을 받아 말했다. 모두가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그 사실을 막상 귀로 들으니 그들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요지는 하나다.

만일 그들이 카이로스의 움직임을 미리 알았다면 그건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 나간다는 말.

그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엄청난 일이다.

“폐하께서도 출정하는 길에 시엘의 소식을 미리 접하고 진로를 변경하신 겁니다. 만일 정말 주둔군이 빠져나갔고 그것이 파벤터가 아니라면, 소삼국일 가능성이 아주 높으니까요.”

“문제는 거기에 아무도 없었다. 이거지?”

“맞아.”

에단과 이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분명 테바로스의 군은 대군이다. 데릭 황제가 직접 출전하였고 황군 전원이 동원되었으며, 북방의 중부부터 남부까지 내려와 카이로스에 닿을 때까지 무려 4개월에 걸친 정복 여정이 지속되었다.

“적어도 십만은 될 텐데.”

“그 많은 군사가 어디로 간 거냐고.”

그런데 그런 대군이 아무리 시엘에서 피해가 있었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많이 사라졌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에단은 그저 듣고만 있을 뿐 잠시 말이 없었다. 대신 생각을 했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과연 이대로 물러났을까.

전쟁의 사기라는 것은 쉽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승패가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듯, 그러한 승리가 이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야 한다.

그렇게 한창 사기가 올랐을 때, 게다가 이리 상징적인 승리마저 쟁취한 그 순간에 과연 테바로스의 데릭은 그대로 물러나 이리 허무하게 자신의 황궁으로 돌아갔을까.

당연히 그 대답은 '아니다'다.

“파벤터. 안 지나쳤던 거 확실해?”

“확실해.”

“그럼 하나밖에 없잖아.”

에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머리를 스치는 생각.

“토르티아의 황녀가, 언제 떠났지?”

언제나 그렇듯 답은 간단하고, 항상 그 주위에 있다.

에단이 생각해 낸 바로 그 인물.

지금 가장 카이로스를 증오할 사람이자, 카이로스를 해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자. 그렇기에 테바로스를 위해 토르티아의 국경을 열어 줄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한 사람밖에 더 있을까.

에리카 네아레스다.

“제기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루카스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지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네요. 처음부터 테바로스와 카이로스는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이해관계가 맞으니.”

콜린 역시 알아들었다는 얼굴로 표정이 심각해졌다.

“자칫하단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겠는데요…….”

걱정이 가득한 아론의 목소리도 낮았으며,

“이거…… 확실히 위험할 수 있겠는데.”

마지막으로 이반까지 정색했다. 지금, 모두의 머릿속에 드는 바로 그 한 곳.

“에토르로 출발한다.”

카이로스 국경 제1구역 에토르.

토르티아 국경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으며 파벤터와 일방통행로밖에 없는 그곳은 당연 북경 지역의 최고 요충지에 해당한다. 지금 테바로스는 토르티아를 거쳐 바로 그 에토르로 간 거다.

“당장 준비해.”

그러니 에단의 분노가 극에 달할 수밖에.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금방, 쉽게 끝날 줄 알았던 테바로스의 도발.

아무래도 카이로스는 테바로스를 너무 얕보았나 보다.

그가 그토록 준비해 오던 북방과의 전쟁이 그가 의도치 않게 이미 시작되어 버린 거다. 그것도 토르티아까지 합세하여. 아주 제대로 말이다.

***

“평화롭네요.”

“그러게요.”

나른한 오후. 수아와 로엘은 여유로운 티타임을 가졌다. 이제는 곧잘 자신의 궁 밖을 나오는 수아가 먼저 로엘을 찾아왔다.

“제가 걱정되어서 오셨구나.”

“조금은요. 근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역시.”

수아는 언제나처럼 미소 짓는 로엘을 보며 말했다.

“평소와 다름없으셔서 안심했어요.”

로엘은 대답 없이 그저 미소 지었다.

평소와 다름없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남들보다 좀 더 잘 숨길 뿐.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루 종일 풀 죽어 있을 수도 없잖아요. 그런다고 그분께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으로 무사히 돌아오길 바랄 뿐, 저는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로엘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말이 아니었다.

상대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가질 수 있는 강인한 마음이자, 스스로 몰아치는 불안과 걱정 속에서 평정심을 찾으려는 무단한 노력까지 더해진 그런 대답이다.

한때 리암을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던 수아에겐 로엘의 그런 마음가짐이 더욱 와닿았다.

수아는 로엘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걱정 마세요, 로엘 님. 그분이 강하시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일인걸요.”

“그걸 너무 본인이 잘 알아서 그게 좀 문제죠.”

그녀의 말에 수아가 웃고 말았다.

그래도 사실은 사실. 수아의 말대로 감히 누가 그의 몸에 흠집이라도 낼 수 있을까.

“시엘을 비롯해서, 파벤터, 에토르 모두 북방의 요충지예요. 토르티아든 테바로스든 소삼국이든. 북방국은 그 세 성을 넘지 않고 카이로스에 다다를 수 없어요. 그래서 더욱 테바로스의 첫 공격이 시엘이란 사실에 상징성이 부여된 거 같아요. 폐하께서도 그래서 더 화나신 거 같고요.”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공작가의 영애로 살아온 수아에게 이런 이야기는 꽤나 낯설었다. 수아가 딱히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지만 누군가 특별히 말해 준 적도 없었다. 그녀 아니어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말할 집안 남자들이 아주아주 많았으니까.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연히 문외한이 되었다.

그래서 새삼, 하나하나 친절이 설명해 주는 로엘이 신기했다.

“제가 데릭 황제라면, 이번 기회를 쉽게 놓치지 않을 거예요. 자신들의 백성에 대해서도, 그리고 북방의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아주 의미 있고 상징적인 시작이 되었으니까요. 이걸 이대로 끝내기엔 많이, 정말 많이 아쉽죠.”

로엘은 진지했고, 신중했다. 지도를 보며, 보고 문서를 읽으며 생각하려 하는 그 모습을 수아는 가만히 보고 들었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그녀와는 참 다른. 그래서 멋있는 사람.

그저 부러울밖에.

“그러니, 이건 일종의 기싸움이죠. 테바로스에게는 이 승기를 잡아 이제 그들의 시대라는 것을 알리느냐의 문제라면, 카이로스에게는 이번 역시 처절히 굴복시켜 다시는 중부를 넘보지 못하게 하느냐의 문제니까. 양쪽 다에게 이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인 거예요.”

수아에게 상황을 설명할수록 오히려 로엘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생각할수록 이건 쉬운 전쟁이 아니었다. 빨리 끝날 전쟁은 더더욱 아니었고.

“테바로스는 강한 곳인가요?”

“아주 강하죠. 특히 지금은 더더욱 강하고요. 북방은 기본적으로 군사 국가가 기반인데, 테바로스는 우리 카이로스보다 더 심했어요. 워낙 척박한 환경이라 거칠기도 했지만, 스스로 무신의 아들이라는 신화가 있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

수아에게는 테바로스라는 그 이름마저도 낯설다. 수아뿐 아니라 다른 중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그러니 얼마나 이번 일이 분하겠는가. 입버릇처럼 야만국이라 부르는 북방의 민족이 감히 중부 최고의 제국을 선공하다니.

지금 에단이 느끼고 있는 그 분노는 그를 따르는 군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는 거다.

“문제는 너무 정보가 없다는 거예요.”

로엘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북방에서 전쟁이라면 볼 만큼 본 그녀도 테바로스와의 전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토르티아와는 기본적으로 형제국이기도 했으며, 그녀가 있는 동안 제이드에 대한 테바로스 사람들의 지지가 거의 광기에 가까워서 더더욱 그러했다.

“더군다나 이번에 새로 데릭 황제가 즉위하면서 테바로스 자체 내에서도 변화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테바로스가 쇠락한 가장 고질적인 원인인 그 고인물을 데릭은 즉위하자마자, 아니, 즉위하는 과정에서 전부 숙청했다. 하나같이 젊은 피로 무장한 그들은 오로지 그의 주군 데릭에게만 충성을 바쳤다. 데릭을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 조직된 사조직이 황군의 중추를 가졌으니 그 추진력이 어떻겠나.

즉위하는 순간부터 단 한 순간을 쉬지 않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거다.

그러니 강할밖에.

“……그래도 폐하시잖아요.”

생각에 빠진 로엘 대신 계속 잠자코 있던 수아가 말했다.

아주 짧은 한마디. 그러나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단 한 번도 패전해 보신 적이 없으신, 역사상 가장 위대하신 황제 폐하 아니십니까. 그런데 무얼 그리 걱정하시는 건가요?”

수아는 정말 아무런 감정 없이. 역사책을 읽는 듯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 애정도 감정도 없는, 지극히 이성적인 말에 로엘은 순간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이래저래 따졌던 자신이 허탈해졌다.

“그러게요. 제가 바보였네요.”

저리 간단한 것을.

그저 그라서. 상황이 어떠하고 상대가 누구라서가 아닌, 그냥 에단 카이로스 아폴리우스라서 그는 강한 거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언제나 그렇듯 그 황금빛 눈을 빛내며 그가 그녀에게로 올 테니.

“수아 님 말씀이 맞아요. 고마워요, 수아 님. 너무 당연한 걸 잊고 있었네요, 제가.”

로엘은 수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생긋 웃는 그녀가 왜 그런지 수아는 잘 모르겠으나, 그저 로엘이 웃으면 그만이었기에 수아 역시 그런 로엘을 따라 미소 지었다.

“그리고, 폐하는 이미 로엘 님을 믿고 계셨네요. 로엘 님께서 이곳 황궁에서, 자신의 자리를 멋지게 굳건히 지키고 있을 거란 것을.”

수아의 눈길이 로엘 뒤, 벽에 걸려 있는 한 검으로 향했다.

그가 출정하던 날 새벽. 그가 그녀와 마지막 인사를 하며 건네준 바로 그 검.

바로, 프란시아의 상징이다.

“폐하께서는 프란시아의 축복을 안고 가셨군요.”

수아는 미소 지었다.

그 말에 로엘은 조금 얼굴을 붉혔다.

“과분한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기다리려 합니다. 그분이 없는 그분의 황궁에서. 그분의 승리를 기원하며.”

“승리의 여신께서 함께하시니, 폐하께서는 대승을 하시려나 봅니다.”

수아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진중하고 늘 진솔한 사람이라.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어 로엘을 안도시켰다.

지금처럼 마음이 흔들리는 때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수아 님이 안 계셨으면 어쩔 뻔했을까요.”

“그건 제야 할 말이지요. 로엘 님.”

수아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수아가 로엘에게 진심인 만큼, 로엘 역시 항상 수아에게 진심이었으니까. 로엘은 그 자체로 수아에게 빛이 되어 준, 따뜻한 사람.

그저 이 아름답고 강인한 분이 행복하길, 수아는 진심으로 바랐다.

“로엘 님. 카이로스에서는 황제와 황후가 동등합니다. 아무리 남성주의 사회라도, 부부관계는 동등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그건 황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로엘 님. 폐하께서 안 계시는 지금. 이곳 카이로스 황궁의 주인은 로엘 님이십니다.”

수아의 눈은 흔들림 없이 로엘을 향했다. 진지한 그녀의 단호한 그 말에 로엘은 저절로 긴장했다. 아니라고. 이 궁에는 수아 님도 계시지 않느냐고. 자신은 황후가 아니라 말하려다 말았다. 그건 수아에게 의미 없는 말을 그저 반복하게 할 뿐.

그럴 바엔, 이제 그만 부인하고, 그만 거부해야 할 거 같다.

‘황후가 되세요, 마마.’

어느날 그녀를 찾아왔던 사라의 말이 떠올랐다.

이 황금의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

그건 그를 사랑하는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일지도 모른다.

“저를 지옥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로엘 님. 켈트가의 수아. 이 나라의 국모가 되실 로엘 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수아의 뒤에 있던 베티와 쥰 역시 기꺼이 그녀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예를 갖추었고, 그에 따라 그녀의 사람들 역시 허리를 숙였다.

“로엘 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저 날이 좋은 오후. 차를 한 잔 마시던 그런 평범한 티타임이었다. 그런데 마치 처음부터 기다렸다는 듯, 그녀들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로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 역시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진심’이란 거다.

“……과분한 마음을 제가 샀군요.”

로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게 기꺼이 고개를 숙여 주는 그들에게 로엘 역시 답을 주어야 했으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와 함께해 주세요.”

절대 그의 여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첫날밤.

그녀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

절대 황후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건만, 이미 그녀는 모두의 황후가 되어 가고 있던 거다.

그렇게 한 걸음씩. 차근히.

붉은 나라에서 온 붉은 머리의 여인이 황금의 나라의 가장 높은 곳으로 가고 있다.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처럼.

***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오랜만의, 황제께서 출정하시는 전쟁에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였고, 많은 황군이 자리를 비워 황궁은 더욱 그러하였다.

조용한 황궁의 밤이 고요하다 못해 침묵의 늪에 빠진 것 같은 그런 밤.

수아의 궁에 많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윽!”

그리고 아 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수아의 궁을 지키던 키로스들이 하나둘, 숨을 거두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순식간에 번지고, 엄습하는 살기가 궁 안의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수, 수아 님!!!”

뒤늦게, 가장 안쪽의 궁에 있던 수아의 침실에 다급한 쥰의 목소리가 울렸다. 잠귀가 밝은 수아는 바로 눈을 떠 초를 밝혔다.

“수아 님. 얼른 피하셔야 합니다. 이, 일단 밖으로…… 악!”

“베티!!”

쥰이 성급한 손길로 수아에게 대충 숄을 덮는 사이. 방문을 열고 있던 베티의 뒤에서 나타난 복면의 사람이 베티의 등을 가차없이 베었다. 비명에 쓰러지는 그녀의 목에 검을 드리우며 그 남자는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쥰은 바로 수아의 앞을 막아섰다.

“네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는 거냐!”

쥰의 호통에서 아랑곳 않고 더 많은 남자들이 수아를 둘러쌌다. 베티를 툭하고 밀어내자, 바로 쥰과 수아는 베티를 부축했다. 벌써 베티의 등에는 피가 많이 번졌다.

“베티……!”

“저는 괜찮습니다. 얼른, 수아 님 피하셔야 하는데…….”

수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불안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다친 베티의 모습에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아 갔다.

아무리, 폐하의 눈 밖에 난 아카시스라 하지만 엄연히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인 중 하나다. 그런데 감히 이리 함부로 대하다니.

수아는 베티를 쥰에게 부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감히 황제의 아카시스 처소에 함부로 들어오는 자. 이런 무례를 저지르는 자. 목숨을 건질 거라 생각하는가? 당장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라.”

켈트 공작가 영애의 자존심이 있지,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쥰과 베티는 그런 수아의 뒤에서 수아를 보며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래. 이 모습이 그녀들이 아는, 자존심 높고 긍지 높은 켈트가의 수아다.

“하. 잘도 나불거리네. 언제부터 네가 황제의 여인이었다고.”

그런데, 그런 수아를 비웃는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

“아리스 몰브……!”

바로 아리스였다. 그리고 그 뒤에 함께 들어오는 자는 당연히,

“첫날밤에 소박맞은 계집 주제에 입만 살아 가지고선.”

한쪽 팔이 없는 케인 몰브.

그제야 수아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아. 저들이 드디어 미쳤나 보다.

“……돌았네, 몰브.”

아무리 황제께서 안 계신다고 하여도. 아무리 많은 황군이 자리를 비웠다고 하더라도 카이로스의 황궁이다. 단 한 번도 침략이란 걸 당해 본 적 없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성벽이 바로 이곳.

이곳에 사병 따위가 들어올 수 있을 리 없는데, 그래. 너무도 이해가 된다.

아카시스의 이름으로, 아무도 없는 이때를 틈타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온 거다.

“표정을 보아하니, 상황 판단은 된 거 같네. 역시 똑똑해, 수아 켈트.”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그건 끝까지 지켜보면 알겠지?”

아리스의 손짓에 몰브의 사병들이 수아를 포박하려 들자 수아는 바로 그들의 손을 뿌리쳤다.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 당장 안 비켜?”

“아무튼, 저 자존심 하곤. 상황 파악 좀 해?”

“윽!”

“수아 님!!”

몰브의 사병들은 바로 수아의 팔을 거칠게 뒤로 잡아 무릎을 꿇렸다. 베티와 쥰이 다가서려 하자 서슬 퍼런 검이 수아의 목에 다가가 어쩌지도 못한 채 눈물만을 흘렸다.

“자, 이제 가 볼까?”

수아는 안다. 지금 이들이 무얼 하려고 하고, 왜 자신을 노렸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로 가려는지.

“그년 면상, 보러 가야지.”

이미 악에 받쳐 제정신이 아닌 케인의 비릿한 조소가 입에 걸렸다.

수아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건, 진심으로 위험하다.

“갑시다. 그 잘난 붉은 공주님을 뵈러.”

달빛 하나. 구름 한 점 없는 고용한 카이로스 황궁의 밤.

엄청난 파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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