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 풀어야 할 숙제
“누가 와?”
“토르티아의 황녀 에리카 네아레스랍니다.”
한껏 경계 태세에 집중하던 시엘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보고를 하는 버리도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했고, 그걸 듣는 데릭 역시 눈썹을 찌푸렸다.
이 중요한 시기에 원치 않는 불청객이었다.
“어쩌라고.”
“어쩌긴요. 왔으니 만나 보셔야죠. 지금 에리카 황녀가 어떤 상태인지는 폐하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알다마다.
그 콧대 높은 자존심이 땅을 쳤을 테고, 억울함과 분함을 풀지 못해 애먼 주변 사람들만 고생이겠지.
데릭은 비록 몇 번 보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람을 그저 가진 것으로만 판단하는 사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 내면의 가치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 그리하여 탐욕에 눈이 멀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하는 자.
본디 에리카 네아레스는 데릭의 배필이 될 뻔하였으나, 기어코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가 그 상대를 그의 첫째 형님으로 바꾸었다.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죽어도 다섯째는 안 된다던 그들의 태도는 가히 무례하고 무지했다.
그에게 일말의 애정도 없었던 그의 아버지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큼.
물론 어린 그 역시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 어린 날, 아무런 잘못 없이 철저히 거부당한 셈이었으니.
그런데 세상일 참 아무도 모른다고, 그 에리카 대신 나온 로엘을 보는 순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녀라서 너무도 다행이라고.
“……쓸데없이 계속 생각나는군.”
“네?”
“아니야. 하던 보고 계속해.”
버리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으나 다시금 말을 이었다.
“이번 니블 사건에 주동자인 카이로스의 몰브가 장남은 한쪽 팔이 잘렸다고 하고, 연관되었던 귀족 인사들도 대거 숙청 또는 좌천되었습니다 그나마 에리카 황녀가 타국의 황녀였기에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살아나왔지, 아니었다면 그분 역시 무사하지 못했겠지요. 뭐, 토르티아 입장에서야 이번 일로 그러지 않아도 부담이 되었던 조공 물량이 세 배 가까이 늘었지만 말이에요.”
“다시 말해 엄청나게 궁지에 몰려서 독이 바짝 오른 상태라는 거지.”
“네.”
그렇다면 무언가를 가지고 왔겠지. 데릭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에단 황제가 쥐를 너무 궁지에 몰았나 보다.
쥐가 겁도 없이 호랑이를 물려 드는가 본데, 그 호랑이를 사냥하려는 늑대 입장에서야 나쁠 게 없다.
“어디 있어?”
“영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데릭은 버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가져온 선물이 가히 기대가 되었다.
어쩌면 그 선물이 이번 전쟁의 꽤나 큰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아무래도 에단 황제가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나 보다.
***
“데릭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에리카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데릭이었다.
수교를 이어 오던 토르티아와 테바로스는 종종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데릭이 황제에 즉위한 이후 워낙 공사가 다망하여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애가 닳는 것은 에리카 쪽이었다.
그녀 스스로 차 버린 그 남자는 만날 때마다 점점 멋있어졌고, 이내 테바로스의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고야 말았다. 그런 반면 하루가 다르게 토르티아는 쇠락하고 있으니 욕심 많은 그녀의 마음은 어떠랴.
나이가 들수록, 에리카는 더더욱 그가 탐이 났다.
“나는 지금 전쟁 중이다. 그런 나의 시간을 뺏었을 때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할 거다.”
“물론입니다. 폐하.”
에리카는 자신 있게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좀 더 황제에 가까워졌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위엄이 서고 말하는 한 마디마다 권위가 느껴졌다.
그때 그녀가 욕심을 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운명처럼 그와 정혼을 하였더라면 지금 저이의 옆자리엔 그녀가 앉아 있었겠지. 만일 로엘이 첫째 황자의 정혼자로만 지명되지 않았어도 에리카는 가만히 데릭의 정혼자가 되었을 거다.
그러니 이것 역시 전부 로엘의 탓.
“절대 폐하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에리카는 데릭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카이로스에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해 살아나온 것치고는 지나치게 자신 있었다.
멍청해 보이면서도 멍청하지 않고, 철없어 보이면서도 철없지 않은 것이 에리카 황녀. 욕심이 과하고 왕족으로서의 권위 의식이 지나치게 높아, 스스로 인망을 깎아 먹는 어리석음이 있을 뿐, 오랜 기간 황녀로서 교육받은 것이 헛되진 않았다.
그러니 니블도 기획한 거다.
자존심이 상하고 부끄러운 일일지언정, 그것이 엄청난 돈을 번다는 것은 사실이니.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수익을 얻고, 더불어 자신들이 조공하는 나라를 무너트릴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주는 거라면, 어찌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있을까.
만일 그것이 들키지만 않았더라도 니블은 꽤나 수완 좋은 토르티아의 수입원이었을 거다.
다만 상대를 아주 잘못 골랐을 뿐.
카이로스를 상대로 니블을 안 들키고 팔기엔 에리카의 역량이 그 정도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에리카 네아레스는 딱 거기까지.
데릭은 자신하는 그녀의 태도에도 쉽사리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이 영악한 이가 분명 카이로스에서 당한 일을 앙갚음하려는 것일 텐데, 감정에 치우친 그녀의 선택이 정밀할 거라고 데릭은 생각지 않았다.
“폐하. 저는 지금 카이로스에서 왔습니다. 폐하라면 이미 제가 카이로스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아시겠지요. 한 나라의 황녀에게 있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왔습니다.”
“한 나라의 황녀로서 할 수 없는 짓을 하기도 했지.”
그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냉정하기도 한 그 차가운 반응에 잠시 얼굴이 뜨끈했다. 워낙 북부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하고 중부 사람에 대한 반감이 큰 데릭이라, 자신에게 보다 동조할 줄 알았는데 애석하게도 그는 그럴 마음이 없나 보다.
그래도 에리카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폐하의 선전포고를 카이로스를 막 떠나는 시점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지요. 제가 당신의 대의에 도움이 되어 드려야겠다고.”
갈수록 가관이다. 데릭은 에리카의 같잖은 말이 귀찮고 피곤하였지만, 조금만 참으라는 버리의 눈치에 꾹꾹 참았다. 깔끔하게 본론만 말하면 좋으련만 쓸데없는 서론이 길다.
아무튼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이 황녀님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제가 폐하의 전쟁을 돕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카이로스의 공작, 몰브가를 통해 카이로스의 소식을 전해 드리지요.”
그제야 데릭의 눈이 제대로 에리카를 향했다.
확실히 귀가 솔깃할 만한 내용이다.
에리카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진해졌다.
“카이로스의 몰브가 테바로스를 돕겠다고 확약하였습니다. 그들은 카이로스 황실의 최측근. 기밀 정보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최고위층이죠. 그들을 통하면 이번 전쟁의 카이로스 전략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번엔 데릭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에단 황제가 쥐를 심하게 몰긴 몰았나 보다.
이토록 어리석은 이가 또 있을 줄도 모르고.
귀족이라는 작자가 자신의 나라를 팔아먹다니. 그 한 번으로 그 나라의 명운이 바뀔 수 있음을 어찌 모를까. 정말 어리석고도 어리석다.
카이로스의 오래된 원로들이 에단 황제의 가장 큰 적이라는 말, 너무도 이해가 된다. 아니, 이해를 넘어 처음으로 그 잘난 황제가 조금은 측은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정도 수준의 사람이 최고 원로라면, 그 늙은 원로들이 젊은 황제의 기를 꺾기 위해 참 부단히도 노력했겠지. 그러함에도 그는 보란 듯 빛나는 공적을 쌓아 올렸을 테고.
데릭은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들었던 측은함이 단번에 사라졌다.
아무튼 재수 없는 인간이다.
“거기에 저희 토르티아가 테바로스를 돕겠습니다.”
또 한 번 데릭의 시선이 에리카를 향했다. 그리고 놀란 얼굴의 버리 역시 바로 데릭을 보았다. 에리카의 자신만만함이 이제야 이해된다.
“하.”
이번엔 데릭이 얕보았나 보다. 그녀가 품은 로엘에 대한 분노를.
“지금 시엘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토르티아의 군대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 대 토르티아 제국은 테바로스의 형제국으로서 테바로스의 중부 정벌에 함께하겠습니다.”
정말 상상치도 못한 파격적인 선물. 기껏해 봤자 군수물자 정도 가져왔으려나 싶었는데, 카이로스의 기밀 정보에 토르티아의 군대라니.
비록 토르티아가 말도 못하게 쇠락하였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북방의 수호국. 그 군대의 실력이 기본 이상은 충분히 한다.
즉, 이건 엄청난 지원이다. 전쟁의 승패를 가를 만한.
“그러니 테바로스의 황제시여. 부디 그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황금의 제국을 무너트려 주소서.”
에리카는 허리를 깊이 숙여 황제께 예를 갖추었다.
세상일 아무도 모른다더니, 그 에리카 황녀에게 도움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이 빚은 갚겠다.”
한 번을 그녀에게 웃어 주지 않는, 그 무심한 말에도 에리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 폐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거.
이번에 반드시 로엘을 죽이겠다는 그 말.
반드시 이루리라고 에리카는 다짐했다.
모든 증오와 저주를 담아.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며.
***
“아카시스 마마를 뵙습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이반은 출정을 하기 전 에단을 만나러 왔고, 로엘은 에단의 방에서 그제야 나섰다. 공식적인 인사가 오가고, 어색한 침묵이 뒤따랐다.
에단에게 그들의 관계가 들키고 나서, 아직 두 사람 다 에단과 제대로 이야기해 보지 못했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터져 버렸으니까.
“폐하께서 안에 계십니다. 그럼 말씀 나누고 가세요.”
“네아.”
그만 지나쳐 가려는 그녀를 이반이 붙잡았다.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어찌나 살며시 잡았는지 그 손은 그녀가 조금만 뿌리쳐도 놓아줄 듯했다. 그래서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로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이반과 그녀의 관계에 대하여.
로엘은 자신의 팔뚝을 잡은 그의 손을 잡으며 살며시 그녀의 팔에서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똑바로 그를 보았다.
“해. 하려는 말.”
그 차가운 태도에 이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씁쓸하고도, 안타까운. 그래서 애절한 미소.
처음부터 나와 있던, 바꿀 수 없는 그 결말을 그는 슬슬 받아들이려나 보다.
“처음부터 그러하였듯, 네아. 너는 그 자리에 있어. 나는 내 자리에 있을게.”
이번에도, 그의 선택이 아닌 그의 상황이, 그의 마음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요구된.
오로지 이반, 그만이 포기하는 그런 결말을.
로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이곳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로, 그리고 나는 황자로. 그렇게 있으면 돼.”
왜 항상 이반만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게 싫어서,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가 너무 싫어서 그렇게 화를 내 왔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그에게 포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또다시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
이리도 잔인하게.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어. 나도, 너도. 그리고 그도.”
차라리 웃지라도 말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녀에게 도망가자고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 봤으면 좋겠다. 응답받지 못할지언정 한 번만이라도 욕심내 볼 만한데 그는 이번에도 그러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렇구나. 역시나 그렇구나.
스스로 체념하고 포기했다. 그러니 그녀의 마음을 이리 아프게 하는 거지.
“그럼 너는.”
그래서, 되묻고야 말았다. 어차피 응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너는 그걸로 괜찮은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반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괜찮아. 너만 괜찮으면.”
안쓰러운 사람.
무슨 인생이 이리 다 뺏기기만 하는지.
“나는 지금 너를 묻고 있어. 너가 괜찮은지 묻고 있는 거라고.”
로엘은 정말로 화가 났다.
“너가 괜찮으면, 그리고 내 형제가 괜찮으면 나는 괜찮아.”
그런데 정작 이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진심으로 그는 괜찮다는 얼굴을 했다. 절대로, 괜찮을 리가 없는데.
“나는 그걸로 충분해. 그러니, 형수님. 폐하가 돌아오실 때까지 부디 건강히 계세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형수라니. 그 낯선 두 음절이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팠다.
이반에 대해 일말의 감정이 남아서도 아니고, 괜한 미련이 남아서도 아니다. 그저 포기하는 것이 너무도 태연한 이 태도 때문에 이리도 슬픈 거다.
로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그녀의 이 감정을 그에게 전해 보았자, 그렇게 화를 내 보았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 어차피 응해 주지 못할 바에야 그의 포기를 눈 감고 모른 척하는 게 최선이라는 거,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차마 다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 네아.”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반 역시 너무도 잘 알지.
이반은 이만 로엘의 머리에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싱긋 웃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아카시스 마마.”
그 마지막이 될 것 같은 공허한 웃음에 결국 로엘이 저도 모르게 이반을 잡고야 말았다. 이반과는 다르게 강한 힘으로.
이반은 그런 로엘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기껏 놓아준다는데, 왜 또 그를 잡는 걸까. 얼마나 더 자신을 잔혹한 헛됨 속에서 허덕이게 하려고.
“아무 데도 다치지 말고, 건강히, 무사히 잘 다녀오세요. 아카시스로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황자님.”
이기적이고 잔인한 여자.
자기 말만 해 버리고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그녀를 보며 이반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그 짧은 형식적인 인사가 뭐라고 이리 그의 마음을 흔드는지.
너무도 힘들게 결심한 그의 마음을 단번에 무너트렸다.
“제일 잔인한 건 너야.”
야속하고도 미운 사람. 그 와중에도 이리 속도 없이 그를 웃게 만드니.
이반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
“출정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폐하께 보고 올리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정중히 에단에게 고개를 숙이며 출정 보고를 하는 이반의 모습은 완벽한 신하의 모습이었다.
예상대로 이반의 일 처리는 빠르고 깔끔했다.
에단은 묵묵히 보고를 올리는 자신의 형제를 바라보았다.
“이반.”
“예. 폐하.”
그는 황제의 도포를 걸친 채, 높고 높은 황금의 제단에 앉아서.
이반은 장군의 복장으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이반.”
“……어.”
“너에게 시간을 줄게.”
이반은 잠시 말없이 에단을 보았다. 그 일 이후, 단둘이 제대로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여전히 에단의 황금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이반을 향했고, 그 빛나는 눈에 이반은 작아졌다. 이번에도 에단이 먼저 그에게 손을 내민 거다.
참 염치없게도, 이반은 그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로엘에게 묻지 않았어.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 입에서 너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일종의 질투인 거지. 내 형제에 대해.”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에단의 말에 이반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질투라니. 누가 누굴.
이반은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에단다운 정면승부.
그래, 너무도 그의 형제답다.
이반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마주했다.
“그럼 내가 해야겠네.”
혼자 생각하고, 혼자 의심하고. 그래서 더 최악으로 치닫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그의 형제는 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영민한 사람이니까.
감성보다도 이성이. 거짓보다는 진실이. 희망보다는 현실이 더 우선시되는 사람.
그러니 이 얼마나 훌륭한 왕재인가.
처음으로 생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걸린 이 일에 대해서도 그의 해결 방식은 같다.
“내가 말할게. 내가 어떻게 네아를 만났는지.”
떠나가기 전. 이반은 생각했다. 다른 곳도 아닌, 서로에 대한 신뢰가 가장 중요한 그 전쟁터에 과연 이 해결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 가도 되는 것인가 하고.
에단의 이반에 대한 신뢰를 의심한다거나 이반의 에단에 대한 충성을 의심한다는 그런 말이 아니다. 그저 이 심적인 불편함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형제께서 감사하게도 이리 먼저 그 기회를 준 거다.
그러니 대답을 할 수밖에.
“네가 즉위하고, 나는 북으로 갔지. 나를 살리기 위한 너의 선택으로. 그리고 너의 부담을 줄어 주기 위한 나의 선택으로. 그렇게 아무도 없이 홀로 그곳으로 떠났을 때 나는 어렸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그래서 하염없이 위로 갔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거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에단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비단 로엘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북에서 만나고 싶은 이라면 한 사람 말고 누가 더 있을까.
너무도. 정말로 너무도 명백한 답이다.
“너의 동경이자, 나의 동경. 모든 이들의 동경인 바로 그분을 보러 갔지. 그리고 너무도 다행히, 우연히. 나는 그분의 제자가 되었어.”
에단은 어렴풋이 이반이 제이드의 제자가 되었겠구나 싶었다.
검을 맞대었을 때 달라진 그의 스타일과 실력을 보며.
제자를 만들지 않기로 유명한 그가 제자를 들이다니.
“그자가 보는 눈이 있었네.”
“하하. 내가 운이 좋았지.”
이반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자가 이반을 선택한 이유. 그건 아마 에단이 이반보다도 더 잘 알 거다.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이반이라서 이반은 항상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만, 그런 이반의 진가를 가장 옆에서 가장 오랫동안 봐 왔던 이가 에단이다.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했다. 함께 틀리고 함께 고쳐 갔다. 그러니 어찌 모를까.
이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운이 아니야.”
에단은 자신의 타고남에 대해 부정할 마음이 없다. 부정하기에는 너무도 그 남다름이 확실하였으니.
타고난 신체와 머리.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습득 능력과 응용 능력. 그건 노력으로 메꾸어질 것들이 아니었다. 거기에 최고의 교육 환경 속에서 스스로 배움을 즐겼으니 말해 뭐하랴.
그는 일생이 ‘최고’였다. 누구에 비하든.
그런 그 옆에서 이반은 어떠하였을까.
“응?”
“너니까 그자 눈에 든 거야.”
그런 에단을 유일하게 쫓아올 수 있는 자. 그 옆에서 함께 걸을 수 있는 자. 그게 이반이다.
루카스는 무서운 성장 속도를 가지고 있어 그 잠재력이 무기라면, 이반은 기본적으로 머리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천재라는 단어가 제일 어울렸다.
무언가를 똑같이 가르쳐도 훨씬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되니, 그는 확실히 가르칠 맛이 나는 그런 제자다. 에단의 곁에서 같이 좋은 교육 기회를 얻었기에, 이반은 그 기회를 정말 십분 이용했다.
이반이 황위에 가장 위협되는 인물이라는 원로원들의 말.
단순히 그가 황자이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어중이떠중이 황자였다면 감히 천하의 에단에게 위협이 되었을 리 없다.
그런 이반이니까. 원로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반이기에 그렇게 경계했던 거다.
“나의 형제께서는 나를 너무 높게 평가하니까.”
“그게 객관적인 거야.”
에단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반은 그런 에단에게 웃었고.
황제가 되어도, 신이라 불려도, 그리고 이렇게 로엘과 연관이 되어도.
그에겐 언제나 이반이 최고다. 주변이 아무리 악독한 말로 이반을 끌어내려도. 한결같이 그는 그의 형제를 치켜세웠다. 그 한결같음이 고마워서, 이반은 스스로 에단에게 묶이는 거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그렇게 네아를 만났어.”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물론 제이드의 제자였단 것도 에단이 너무도 듣고 싶은 이야기지만 지금은 그 ‘네아’가 제일 중요했다.
솔직히 이반에게 불리는 그 ‘네아’라는 이름이 에단은 아주 많이 거슬렸다.
멋대로, 그녀의 로엘을 다르게 부르니까.
마치 그 이름이 그가 모르는 두 사람의 관계를 만드는 것 같아서, 두 사람만의 다가설 수 없는 친근함을 나타내는 것 같아서 아주 싫었다.
그에게는 ‘로엘’인데. 불러도 불러도 부르고 싶은, 나의 로엘인데.
멋대로 다른 남자의 네아가 되어 버리다니.
다른 이였으면 진작 목을 쳤을 거다.
“그렇게 만나 버렸어.”
그런데 하필이면 그의 형제가 그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그에게조차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그런 미소를.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무 잘못도 없이 불편한 존재가 되어 버린 이반은 늘 자신을 노리는 수많은 반대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마치 자기방어처럼 그렇게 형식적인 미소를 짓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 실없는 웃음이 에단은 정말 싫었다.
“……그래.”
그런데 그런 이반이 그의 네아를 말하면서 진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서 우러나, 스스로 미소 짓는지 자각조차 못 하는 그런 자연스러운 미소.
그러니 어찌, 그가 이반에게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이제야 그의 사랑하는 형제가 웃겠다는데.
“네아는 아름다웠지.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과도 같았어.”
지금이야 누가 봐도 아름다운, 북방 최고의 미녀라는 레아 칼리드의 딸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그런 미인이 되었지만 그때의 그녀는 꽤 어렸다. 그래서 여자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까웠다.
“그 여자가 그 정도였을 것 같진 않은데.”
“하하. 부정할 수가 없네. 그런데, 그런 작은 소녀여도 내 눈엔 정말 작은 여신 같았어. 그만큼 반짝반짝 빛났으니까.”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 준 아이.
사람의 온기를, 따뜻한 마음을 알려 준 작은 천사.
“정말 별다를 게 없었어. 나와 스승님 밑에서 함께 검을 잡고 대련하고, 때 되면 먹고, 함께 만들고 그런 것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 나이의 아이처럼 만나, 그 나이의 아이처럼 굴었다. 단지 서로의 처지가 전혀 평범하지 않았을 뿐.
한 명은 황권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아무 잘못 없이 나라의 외곽으로 쫓겨 온 황자였으며, 다른 한 명은 숙부와 사촌의 위협을 피해 숨어 살던 공주였다.
그래서였을까. 서로의 처지를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가 편했다.
“나는 그녀가 부러웠어. 네아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겠지만, 나는 알았거든. 타르타니 숲속 어딘가 척박한 토르티아의 국경지대에서 숲속을 뛰어노는 저 아이가 대 제국 토르티아의 공주라는 것을.”
허름한 옷에 그 흔한 목걸이 하나 걸치지 않은 소박한 아이.
그 누가 저 아이를 토르티아의 공주이자, 전설의 무인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제이드와 레아는 오히려 그 점을 노렸을지 모른다. 그들의 딸이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토르티아의 공주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만큼 그녀에 대한 위험도 커진다는 것일 테니.
그렇다 하더라도, 부귀와 영화 속의 황궁 생활을 어린 공주에게서 뺏은 것은 사실이었다.
중요한 건 그걸 받아들이는 어린 로엘의 태도.
“누가 보아도 안쓰럽고 억울한 상황인데. 그래서 나와 참 비슷한 처지인데, 나랑 너무 달랐거든.”
늘 햇살이 들이치던 타르타니의 숲속 어딘가 붉은 머리의 소녀가 항상 그를 기다렸다.
햇살보다도 따스한 미소로. 태양보다도 빛나는 눈으로. 언제나 그렇게 이반을 맞았다.
‘만사에 일일이 우울해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워서. 그래서 웃어. 그러니 너도 웃고 살아, 멍청아. 아무도 네 인생을 대신 살아 주지 않아.’
이리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거늘.
언제 그녀는 그리 멀리 가 버린 걸까.
그렇게 멀리 가 버려서 이리 잡지도 못하게 돼 버린 걸까.
“그래서 부러웠어. 그래서 눈이 가고 그래서 마음이 갔어. 그렇게 좋아했어.”
이반은 담담히 말했다.
어쩌면 이 말이 자신의 목을 날아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마 에단이 아니었다면, 다른 여타의 황제들이라면 이반은 진즉 죽었을 거다.
당연하다. 황제의 여인과 눈만 마주쳐도 죽어 나가는 게 황실인데 이리 대놓고 당당히 그녀와의 과거를 말하고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고 하다니.
이반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말도 안 되는 불경이다.
어쩌면 에단의 절대적 신뢰를 악용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래.”
그래서 이리 힘들고 이리 부끄러운지 모른다.
이반은 잠시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다시 들어 에단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네아를 사랑했어.”
자신의 형제는 어떻게 할까. 이 모든 비밀을 듣고도 과연 자신을 살릴까.
아니면, 모두가 예상하고 바라는 대로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나 버리는 걸까.
이반은 늘 그것이 궁금했다.
“그랬구나.”
그런데 애석하게도 에단의 대답은 너무도 짧았다. 이반이 아주 많이 허탈해질 정도로.
“그래서 너는 그때로 돌아가면 그녀를 만나지 않을 건가.”
“……아니.”
“그럼 그다음은.”
이반은 자신의 형제가 지금 무얼 묻는지 알고 있다.
그가 그녀와 헤어져야 했던 이유. 그렇게, 제이드와 로엘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
그건 ‘에단’이 그를 불렀기 때문.
에단은 이반에게 다시 시간을 돌린다면 그에게 오지 않고 그녀를 떠나지 않았을 거냐고 묻고 있는 거다.
“……나는 많이 후회했어. 많이 그리워했어.”
다시 말해, 그는 선택을 묻고 있다. 그와 로엘을 두고.
“넘을 수 없는 북의 국경에서 하염없이 북을 보며, 너무도 돌아가고 싶었어. 그때로. 내가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이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역시 수없이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
그래서 너는 그렇게 후회하던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거냐고. 그렇게 너의 형제를 배신할 거냐고.
“그런데 에단, 나의 형제여. 나의 답은 애석하게도 매번 같아. 나는 아무리 시간을 돌려도, 수없이 후회하고 아파해도, 너에게로 갔을 거야.”
에단을 직시하는 이반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그의 오래된 아픔이, 진심이 모두 담긴 눈물이다.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이를, 그렇게 지켜 주고 싶었던 이를 이렇게 너의 여자로 마주하게 되어도. 그렇게 매일매일이 아프고 억울하더라도. 여전히 나의 선택은 나의 형제. 나의 분신. 나를 살아가게 했던, 나의 주군.”
이반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차마 떨어트리지 못했던, 그 오래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내가 어떻게 너를 배신하겠어. 내가 어떻게 너의 부름에 응하지 않겠어.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너인 걸 아는데. 그렇게 홀로, 외롭게 평생을 싸워 온 너인데. 내가 어떻게 나를 위해 너를 저버릴 수 있겠어. 애초에 그런 선택지는 없어. 아무리, 수백 번 시간을 돌린다 하더라도.”
그래서, 절대 포기가 안 될 것 같은 그녀도 포기가 되는지도 모르지.
“위대하신 나의 하늘. 카이로스의 태양. 에단 폐하. 당신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에단은 고개를 조아린 이반을 내려다보았다. 에단은 안다. 이반이 그가 이 일의 책임을 물어 죽으라면 죽고, 그저 마음을 접으라면 접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이번에도, 어김없이 포기하려는 것을.
“로엘 네아레스는 나의 아카시스.”
불쌍한 그의 형제는 그리 선택한 거다.
“황자 이반에게 명한다. 황자는 목숨을 바쳐 아카시스를 지키라.”
그래서 에단 역시 선택했다.
처음부터 그도 다른 답은 없었으므로.
“내가 허락하는 것은 거기까지. 그 이상은 바라지 마.”
놀란 눈으로, 그리고 떨리는 눈동자로 이반이 에단을 보았다.
여느 때처럼 무심한 듯이, 그는 그런 이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키라는 건 곁에 있어도 된다는 것.
다시 말해, 그의 짝사랑을 눈감아 주겠다는 거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머리를 깊게 숙인 이반의 눈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떨어졌다.
정말 상상치도 못한 결론이다. 적어도 다시는 로엘을 보지 말라 할 줄 알았는데, 지키라니. 이반은 그것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하다.
그러니 결국엔 양보해 주는 것은 에단.
“폐하의 명을 목숨 바쳐 따르겠나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렇게.
에단은 이반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