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 떠오르는 별, 테바로스
“이런 미친!! 누가 어딜 쳐?!”
전령을 본 루카스는 집무실 테이블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원로회의가 겨우 끝나나 했는데 더 큰 폭풍이 찾아온 셈이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테바로스의 침공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모두가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에단의 황금 눈동자에 살벌한 한기가 등등했다.
“주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공격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애초에 그들이 선공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아론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카이로스의 최고 책략가인 그로서인 이번 침공이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이건 누가 봐도 철저히 계획된 기습 공격. 테바로스 전략의 승리다. 그러니 아론이 제일 분할 수밖에.
“우리 모두가 너무 방심했습니다. 니블 건으로 계획되었던 전략이 어그러지면서, 군사들은 동요했고 그 와중에 니블을 색출해 내겠다고 들쑤셔 놨으니 상대적으로 대비가 허약할 수밖에요.”
공식적으로 북방 국경을 담당하고 있는 이반 역시 표정이 어두웠다. 비록 그가 떠나 있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곳은 그의 영역.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한동안 국경 지역의 상태가 매우 안정적이었습니다. 이반 황자님과 저희가 떠나올 때까지만 하여도 근 1년간 작은 소란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반 님께서도 환궁을 결정하신 거고요.”
아론에 이어 콜린도 의견에 가세했다. 몇 년 동안 국경지대에서 북방을 연구하던 그들에게도 이번 테바로스의 침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애초에 테바로스 자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그 앞에는 타르타니도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겐 저 북쪽의 테바로스보다는 자연히 국경과 가까운 토르티아를 먼저 신경 쓸 수밖에. 그래서 토르티아와 인접한 국경 부근에 더 힘을 쏟았던 거다.
에단이 북방 정벌의 시작을 국경 지역의 삼국으로 결정한 것도 그에 대한 허를 찌르려는 거였는데, 같은 생각을 애석하게도 데릭도 하였던 거다.
그러니, 이 얼마나 분한 일인가.
만일 니블이 터지지만 않았어도, 지금의 이 어이없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에단은 머리가 뜨끈했다. 그가 평생을 준비해 오던 일의 시작이 내부의 적에 의해 가로막혀 제대로 어그러진 셈이다.
“솔직히 언젠가는 부딪히겠거니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야. 북방국경에 있으면서 지켜봐 온 그들의 성장은 가히 두려울 정도였으니까. 마치 이름만 알던 저 먼 곳의 북방국이 하루하루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 그런 기분이랄까. 조금 과장을 하자면, 그 옛날의 토르티아를 보는 것 같았어.”
이반은 슬쩍 로엘을 보며 말했다. 로엘은 일자로 입을 다문 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마저도 이번 일만큼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나 보다.
“……선봉장이 데릭이라고요.”
“예. 이번 작전은 데릭 황제의 친위대가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리 빨리, 아무도 모르게 완벽히 진행할 수 있었던 거군요. 테바로스 황실 친위대라서.”
그녀는 지도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테바로스의 수도서부터 시엘까지, 최소 군대를 끌고 온다 하여도 못해도 세 개의 주는 건너와야 한다. 아무리 가장 짧게 통과하는 지름길이라 하더라도 타르타니까지 거쳐 온다 하면, 못해도 일주일은 걸리는 대이동.
그걸 데릭은 소리 소문 없이 했다는 거다.
그러고는 이틀 만에 세 개의 도시 국가를 점령하고, 단 하룻밤에 시엘까지 차지한 셈이다.
가히 놀라운 기세다.
“데릭의 친위대는 원래 유명해요. 황자에게 개인 군대를 주는 테바로스의 전통상 지금 황실 친위대는 데릭 황자가 황자 시절부터 함께한 이들이죠. 장자를 우선시하는 테바로스에서 다섯 번째 황자를 황위에 오르게 할 만큼, 그들은 데릭에 대해 절대적 충성을 바치기로 유명합니다. 그들이 직접 움직였다는 건, 이번 침공이 절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더 큰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지. 예를 들어 중부로의 진출이라든가.”
로엘의 말을 받아, 이반이 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눈이 맞았다. 북방에 대해, 이리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여기서 딱 두 사람뿐이다. 평생을 북에서 살아온 공주와 청춘을 북에서 싸워 온 자. 두 사람의 의견은 확실히 믿음직스러웠다. 그만큼 냉철했고.
“테바로스의 황제는 영악한 자야.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상대가 가진 약점을 쥐고 흔들 줄 아는 이리 같은 자. 그들은 어쩌면 이번 니블 건을 알고 이용한 걸지도 몰라.”
“아니, 분명 그럴 거예요. 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요.”
그녀는 야망 가득한 데릭의 눈을 떠올리며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이반의 말. 너무도 정확하다. 자신의 형제를 넷이나 죽이고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로엘 님. 그 데릭 황제를 아세요?”
저도 모르게 데릭 황자를 생각하느라 생각에 잠긴 로엘에게 대뜸 루카스가 물었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그 질문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듯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그러지 않아도 다들 의아해하던 차였다.
테바로스의 황제와 토르티아의 공주라. 얼핏 보기엔 접점이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아. 예전 정혼자였어요.”
그런데 들려오는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에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쉽게 할 이야기가 아닌데 그 사실을 그녀만 모르나 보다.
로엘의 그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심지어 이반까지도.
“정혼자라고?”
그래서 에단이 있음에도 평소의 반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자연히 에단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저 친근한 말투. 계속, 아주 많이 거슬린다.
“말도 안 돼……. 정혼자라고요?!!”
“네. 물론 파혼당했지만요. 일방적으로.”
“도대체 왜…….”
“제가 고아가 돼 버렸거든요. 끈 떨어진 공주는 필요 없다, 뭐 그런 거죠.”
“뭐야. 완전 쓰레기 새끼네, 그거.”
“데릭 황자, 아니 황제께서 정하신 일은 아닐 테지만요.”
에단의 표정이 더더욱 찡그려졌다. 아까부터 그녀는 묘하게 데릭을 옹호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나, 그녀의 언행에는 분명 데릭 테바로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컸다. 그러니 에단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질 수밖에.
이반은 한숨을 삼켰다. 그녀가 둔감한 건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똑같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 데릭 테바로스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 기회를 잡았다는 거고, 그걸 놓치지 않고 성공시켰다는 겁니다. 시엘이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인지, 여기서 제가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로엘은 자연히 데릭을 떠올렸다.
그 눈. 그 목소리. 그 태도.
그래. 어린 나이에도 그는 그녀를 정혼자로서 대우해 주었고, 그에 따라 그녀와 함께 나아가자고 말했다. 함께한 시간은 너무도 짧았지만, 그러함에도 로엘은 안다. 데릭이 그녀에게 진심이었다는 것을.
“어찌 되었든 결론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란 소리예요.”
로엘은 덤덤히 말했다. 일말의 감정도 없이. 서운해할 것도 없고, 기분 나빠할 것도 없으며, 새삼스럽게 되짚어 볼 일도 아닌, 그저 그렇게 스쳐 지나간 인연.
“제가 무어라 말하기엔 제가 그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무언가 좀 더 알았다면,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그딴 도움 필요 없어.”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에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무룩한 말에 아주 단호히. 그리고 차갑게.
한기가 서린 그의 얼굴에 로엘은 그가 여간 화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곳의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주군의 심기가 많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루카스.”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래서 그의 부름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루카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명을 기다렸다.
“오늘 밤까지 출정 준비 완료해.”
“프래카 전군. 준비하겠습니다.”
예상대로 그의 선택은 전쟁.
그는 출정 명령에 일말의 망설임도 있지 않았다.
“이반.”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국경 2구역 파벤터에서 시엘 협공을 도와.”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이반 역시 바로 그의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남은 사람은 한 사람.
“아론. 우린 내일 후발대로 간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설마 그가 직접 출정할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즉위 후로 한참을 전장에서 살고 난 후 환궁하여 근 3년간은 황궁에만 있었다. 황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있었고 말 안 듣는 원로의 정리도 필요했으며, 내실을 위해 민생을 정비해야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전쟁에 나선 지는 까마득 오래전 일이란 생각이 드는데, 그런 그가 직접 나가겠다는 거다.
“정말 직접 가게?”
이반도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
그만큼 그가 화났단 소리다.
“감히 내 것을 넘봤으니.”
아름다운 그의 황금의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옅게 짓는, 그 살벌한 미소에 사람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제대로 건드렸나 보다. 그러지 않아도 황궁에만 처박혀 있느라 좀이 쑤시던 그다. 황제라는 굴레에 발목이 잡혀 한동안 묶여 있는데, 그런 그를 끌어내다니.
“그 대가를 치러야지.”
그는 비릿한 미소를 흘겼다. 이반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허리가 자연히 굽어졌다.
아아. 오랜만에 오시려나 보다.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피바람을 몰고. 죽음을 가져오는 이 아름다운 사신께서.
***
“지금쯤이면 카이로스에도 연락이 닿았겠네요.”
버리의 말에 데릭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속전속결로 해결한 덕을 톡톡히 보았다. 소삼국을 점령하고 지체 없이 진군한 결과, 시엘을 함락할 수 있었다. 카이로스의 성을 함락시켜 그 잘난 깃발을 불태운 순간, 전율이 데릭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군사들 역시 고된 일정 속에서도 상기되어 환호를 질렀다.
그런 의미인 거다.
북방국이 키이로스를 침범한다는 것은.
“고생 많으셨습니다, 폐하.”
“이제부터가 고생이지.”
“맞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넘지 못할, 난공불낙의 제국.
그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얼마를 기다리고 얼마를 참았던가.
“아마 여간 놀라지 않았을 겁니다. 감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렇게 잘난 척들을 하더니만, 자기들도 당해 보라지요.”
북쪽 제일 위. 영토는 넓었으나 비옥함이란 없는 척박한 곳.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던가. 광활한 대지. 비옥한 땅. 좋은 기후. 풍부한 자원. 모든 것을 가진, 배부른 자들은 절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진 것이 많아 누리는 것이 많은 주제에 그들을 그 오랜 세월 무시해 왔으니 어찌 쌓아 둔 한이 적으랴.
데릭은 그 모두의 설움을 풀어 주고 있는 거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려 줘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무얼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버리는 결의에 차 말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건 버리뿐만이 아니다. 카이로스 진격에 함께한 모든 군사들이 다 한마음이다.
“그가 올 거야. 생각보다도 빨리. 상상보다도 무섭게.”
“설마 에단 황제가 직접 나올까요? 그가 전쟁에 안 나선 지는 꽤 됐습니다.”
“그래서 더 나오겠지. 지금의 화를 풀어내려면. 꽤나 화났을 테니.”
데릭은 조소를 뱉었다. 그 잘난 황제께서 얼마나 분개해할지, 단 한 번을 만나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이는 남들이라면 평생 동안 수도 없이 느껴 보았을 패배감을 처음 느껴 보았을 테니.
아주 많이, 화가 나 있을 거다.
그럴수록, 그들에겐 유리하다.
“제2구역 토이르까지 진격하면 더 좋을 텐데요.”
“아니. 절대 무리해선 안 돼. 그래서 이길 수 있는, 그런 자들이 아냐.”
데릭은 솔직히 시엘과의 짧은 교전에도 많이 놀랐다. 카이로스의 군사 체계가 너무도 견고해서.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밤 기습이었는데도, 그 누구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건 잠시, 금세 대열을 갖춰 그들에게 대항하는 모습은 잘 교육된 군사의 모습이었다. 거기에 상황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인지했을 때 신속히 철수하여 피해를 최소한으로 만들었다. 훌륭한 판단력이었다.
당시 이반도, 그 아래의 콜린도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놀라울 만한 대응이다.
“오래 준비하고, 오래 기다렸어. 그 어떠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최선을 택한다. 더 이상 테바로스는 지지 않아. 설사 그게 카이로스일지라도.”
이리 믿음직스러울 수가 있나. 버리는 만족을 넘어 감동을 받은 얼굴로 데릭을 보았다.
데릭은 물론 그 뒤의 근위병까지 모두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북방의 별. 테바로스의 희망. 데릭 님을 따릅니다.”
카이로스의 북쪽 끝 시엘의 밤.
데릭에게는 잊지 못할 밤이다.
***
“오라버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아리스는 잘려 버린 케인의 팔을 보며 통곡하였다. 자연히 이번 니블의 여파는 아리스에게도 끼쳤다. 폐위는 절차상으로 문제가 되어 미루어졌지만, 출궁 조치만은 바로 단행되었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 아리스가 후궁에서 볼썽사납게 쫓겨나다니.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끝까지 나가지 않겠다고 발악하는 그녀의 모습은 딱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거의 혼절 상태로 몰브가로 쫓겨 왔더니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한쪽 팔이 잘린 케인의 모습이었다.
“울 거 없어.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을 테니.”
누워 있던 케인은 자신의 옆에서 세상 무너져라 우는 여동생을 달래며 말했지만, 속에서는 천불이 솟아올랐다. 정말 하룻밤 사이 모든 비극이 한꺼번에 몰브를 덮쳤다.
모든 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니블의 배후임을 들켰으며, 굴욕적으로 체포당하였고, 팔은 잘렸으며, 영구 추방까지 당하였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숨겨 놓은 니블이 더 있을지 모른다며 추가 수색하겠다는 명분으로 온 집안을 들쑤셨고, 마지막 남은 아리스까지 맨몸으로 내쫓겼다.
몰브의 역사상 이런 치욕은 없다.
“절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아. 감히 몰브를…….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몰브를……!”
피어 몰브 역시 케인만큼이나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에단의 성격으로 미루어보건대 이제 시작한 것임을 그는 너무도 잘 안다. 꼬투리가 잡혀서 무너져 내린 가문이 어디 한둘이랴. 마음만 먹으면 그는 몰브를 몰살하고도 남을 그럴 잔혹한 황제다.
“몰브는 카이로스의 개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가문이다. 우리가 카이로스 황가에 충성을 바친 세월이 몇 백 년인데 우릴 이리 대하다니……!”
피어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하늘이 두 쪽이 나고, 땅이 꺼지는 한이 있어도 에단 황제의 목을 따고 그년의 몸을 갈가리 찢을 테다. 그렇게 해서라도 땅에 떨어진 몰브의 위신을 일으켜 세울 거다.”
케인과 아리스 역시 두 주먹을 쥐었다. 후회와 뉘우침 따위는 전혀 없는, 오로지 원망과 증오만 있는 눈.
“토르티아의 황녀가 언제 떠난다고?”
이미 몰브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다.
***
“유폐 중 아니신가.”
“놀리지 말아요.”
그는 자정이 한참 지나서야, 그것도 제롬의 잔소리에 이기지 못해 방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불 꺼진 곳에 귀한 손님께서 촛대 하나를 켜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귀여운 도선생이다.
“멋대로 유폐를 결정한 건 너야.”
“이루 말할 수 없이 후회되니까 말하지 마요.”
“난 너무 다행이란 생각이 이제야 드는데.”
그는 무거운 휘장을 내려 두고 쓰러지듯 침대 위의 그녀 위로 누웠다.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그녀의 품으로 파고드는 그를 그녀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토닥여 줬다.
그의 피곤함이 그녀에게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유폐 기간이라, 네가 따라온다는 소리를 안 할 테니.”
“……설명해 주지 않아도 당신의 생각쯤은 나도 알아요.”
그리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녀가 이리 뒤늦은 후회를 하는 거고.
그녀의 무릎 위에 그의 머리를 베게 하면서, 그녀는 눈을 감은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그 손길에 에단은 몰랐던 노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눈이 저절로 감겼다.
잠들 시간이 없는데, 이러다간 정말 깊게 잠들어 버릴 거 같다.
언제나, 그녀 곁에서 그랬듯.
“데려가지도 않으실 거면서 프란시아로는 왜 만드신 거예요.”
“나의 프란시아께서는 이곳에서 나의 승리를 기원해 주면 돼. 언제나처럼 내 곁에서 도움이 되는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이곳, 카이로스의 황궁을 맡기는 거야.”
정말 말이라도 못하면.
“맡기는 게 아니라 지켜 주는 거겠죠.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안전한 곳에서.”
그녀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러더니 그녀는 일부러 그의 손을 찾아가 꼭 쥐었다.
감겼던 그의 눈이 떠지고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바로 위의 붉은 그녀를 보았다.
은은한 촛불 빛을 배경으로 그녀는 불안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요, 폐하. 당신 없는 이곳은 하나도 안전하지 않아요. 나에게 가장 안전하고, 편한 곳은 당신의 곁이에요.”
그 역시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불안과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작고 하얀 뺨을 감쌌다.
“얼른 올게.”
“무사히 와 줘요.”
그 큰 손을 양손으로 감싸며, 그녀는 허리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에단 역시 다가온 그녀의 머리를 좀 더 당기며, 진하게 그녀의 입술을 만끽했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향기와 열기를 느낄 수 있게. 그렇게 그녀를 달래기 위해.
“데릭은, 그리고 테바로스는 위험한 나라예요. 너무하다 싶을 만큼 춥고 척박한 나라지요. 하지만 그 민족들은 지나치게 똑똑하고 자긍심이 높아요. 그래서 그들에게 중부는 참 오랫동안 한이 있는, 그런 나라지요.”
토르티아에 치이고, 중부에 치이고.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내전도 많은 나라. 한순간도 평화로운 적이 없었던, 늘 싸우고 늘 다치던 그런 나라.
그래서 발전이 더디었다. 너무 전쟁이 잦아서. 그만큼 뒤처졌고, 그만큼 가난했으며, 그만큼 멸시당했다. 야만국이라고.
그들의 상황과 사정을 조금도 알지 못하면서.
어린 시절 북방을 돌아다니며 보았던 그 핍박을 생각해 본다면, 로엘은 그들의 울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로엘은 더 무서웠다.
“지금 테바로스는 그 한을 풀고 있어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가 있죠.”
그토록 오르고 싶던 테바로스의 황제 자리.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그는 성공시키고야 말았다.
그런 그가 군대를 정비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 그로 인해 부족했던 식량과 물자를 얻는 것.
“데릭은 늘 제일 높은 곳에 자신이 간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높은 곳이 황위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의 목표는 제 생각보다도 훨씬 더 높았나 봐요. 그는 테바로스의 황제가 아닌, 북방의 황제. 나아가 이 세계의 황제가 되려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 그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거다. 그가 지금부터 싸울 상대는 이제껏 그가 싸웠던 상대들과 다를 거라고. 그 마음가짐과 그 절박함이, 그를 힘들게 할 거라고.
“바로 그 예언을 당신이 받았습니다.”
그 경고에 그 역시 또렷이 그녀를 응시했다.
진짜 태양의 신이라도 되는 양 빛나는 아름다운 황금의 눈.
그에게 내려진 그 모든 예언을 진실이라 믿을 수밖에 없는 외모를 타고났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폐하는 데릭이 가장 원하던 것을 뺏어 버린 셈이에요.”
그러니 데릭 입장에서는 그가 얼마가 미울까.
먼저 태어났단 이유만으로 황위를 얻은 무능한 형제들을 그는 정말로 싫어했다. 그가 가장 증오하는 것이 바로 대가 없이, 노력 없이 얻어 버리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니, 폐하. 나의 황제시여. 항상 조심하세요. 마음을 놓지 마시고 한 번 더 생각하시고, 한 번 더 뒤돌아봐 주세요. 그렇게 폐하 자신을 지키소서.”
그는 그만 그녀를 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에 대한 걱정에 금세라도 그녀가 울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품에 안아 그녀를 토닥였다.
“네 말대로 그 예언의 주인공은 나야.”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었지만, 태어나 보니 그리되어 있었다.
그라고 한들, 그 예언이 달갑기만 했으랴.
“그 예언 없어도, 나는 그럴 예정이지.”
그가 중부를 통일시키고 북부로 진출하는 것. 그건 그 거지 같은 신탁 때문만도, 선대의 바람 때문만도 아니다. 그저 그가 원한 그의 꿈이다. 그를 위해 노력했고 그를 위해 버텨 왔다. 그러한 그의 노력을, 마치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양 당연히 여기기도 싫고, 누가 내렸는지도 모를 그런 예언 따위와 공을 나누고 싶지 않다.
오로지 이것은 그의 의지.
“알아요. 당신은 그 모든 일들이 가능한 위대한 사람이라는 거. 나는, 폐하. 그래서 불안한 거예요.”
그녀는 그 모든 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걱정하고 더 마음 쓰는 거다.
누군가에게 떠밀려서가 아닌 나의 의지로 나아가는 자는 뒤가 없을 테니까.
그래서 불처럼 빛나 순식간에 사그라들지도 모르니.
마치, 그의 아버지처럼.
“괜찮아.”
그의 마음을 그녀가 알듯, 그 역시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에단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 대한 소중함이 더 커져만 갔다.
그래서 더 간절하고 더 무서웠다. 혹여라도 이 여자가 자신의 품 안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나의 아카시스. 나의 프란시아.“
그렇게 사라져 버리면, 그래서 그녀 없는 삶을 살라 하면 어찌해야 하나.
에단은 진심으로 자신이 없었다.
“이곳에서 나를 기다려 줘. 언제나처럼 이리 아름답고 예쁘게. 햇빛과 달빛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면서. 그렇게 기다려 주면 내가 올게. 너를 위해 달려올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일까 싶을 정돌 달콤한 말들. 그 어떠한 고백보다도 따뜻한 그의 명령은 기어코 그녀를 울리고야 말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힘껏 안았다.
소중한 사람.
너무도 소중해서 겁이 나는 사람.
“네. 기다릴게요. 이곳에서 당신을. 해가 지고 달이 져도. 별빛이 사그라들고 어둠이 찾아와도. 저는 여기에 있어요. 여기서 당신을 기다려요.”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단 한 번을 져 보지 않은 그와 어린 시절을 전쟁통에서 자랐던 그녀에게 언제부터 이리 전쟁이라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나.
두 사람은 처음으로 전쟁이 왜 그토록 잔인한지 깨달았다.
전쟁이 잔인한 건 이런 기다림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그렇게 걱정하게 만드는 이별이 무서운 거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은 그 헤어짐이 오기 전까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
“조금이라도 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에겐 이게 더 필요해.”
그는 그녀의 나이트 드레스에 손가락을 걸며 말했다. 촛불 하나 켜져 있는 은은한 불빛 속에 적막이 흘렀다. 새삼스럽게, 그녀는 너무도 가슴이 뛰었다.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 누가 보면 처음인 줄 알겠네.”
“긴장되는 걸 어떡해요.”
그녀는 양 볼을 빨갛게 붉히며 말했다. 한결같기도 한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고 귀여운지 그의 입가가 저절로 휘어졌다. 침대 위에 마주 보고 앉은 채로, 그녀의 얇은 드레스가 스르륵 내려가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수줍게 가슴을 가리는 그녀의 가는 팔목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그는 그녀의 허리를 받쳐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녀의 말이 맞다.
가슴이 뛰는데 어찌하리.
그는 자신을 열기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아무렇게나 침대 밑으로 던졌다.
점점 더 서로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뭔가 오늘따라 당신이…… 되게 야해.”
“네가 할 소리는 아닌데.”
“으응.”
정말 그녀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도톰하고 향기로운 그녀의 먹음직스런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위에서 아래로 조금 그의 몸무게가 실렸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그녀의 혀와 그의 혀가 얽히게 내버려 두었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야릇한 물소리가 귀 안에 울리자 자연히 아래쪽 배에서부터 열기가 번져 갔다. 움찔움찔. 이미 그에게 길들여진 그녀의 몸은 그와 닿을 때마다 흠칫 놀랐다. 싫어서가 아닌 좋아서. 아파서가 아닌 기대감에.
그렇게 그녀의 마음을 애닳게 했다.
“하아, 에단…….”
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열기에 젖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 목소리. 이 얼굴. 이 눈동자.
그 모든 것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아앙.”
부드럽게 가슴을 움켜쥐자 그녀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뽀얗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그의 손을 가득 채우는 그녀의 가슴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단단하게 솟은 그녀의 분홍빛 정점을 그가 입으로 머금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자연히 다리를 오므리며 뒤로 도망가자, 그는 놓치지 않고 그런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아…….”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그의 길고 굵은 손가락이 뜨거워진 그녀의 아래를 두드렸다. 이미 알아 버리고야 만, 그가 주는 쾌락에 그녀의 몸이 멋대로 반응했다. 열이 한 곳으로 모이고 아래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 그녀의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이름.”
“하아. 에단……!”
“잘했어.”
“읏!”
오늘따라 왜 이리 짓궂게 구실까.
샘을 찾아 떠난, 그의 손가락이 하나가 더 들어오면서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쉬지 않고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길을 넓혀 가는 그의 손짓에 시트를 쥔 그녀의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아. 아앗. 아. 응!”
“이름 불러.”
“에단. 하아. 에단……!”
“그래. 로엘.“
“응……!”
평소와 다르게 이름에 집착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에게 거스를 방법이 없었다.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명령하는 대로 따랐다. 그러지 않고서야 채워지지 않은, 이 부족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나만 불러.”
“아아!”
속도를 높이던 그의 손가락은 결국 그녀의 뜨거운 샘을 터트려 넘치게 만들었다. 그녀가 허리를 활처럼 꺾으며 고개를 뒤로 젖히자,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안아 들며 그대로 키스했다. 작은 신음마저도 삼키겠다는 듯이 목 끝까지 닿는 그의 키스에 그녀의 정신은 이미 아득히 넘어갔다.
“하아. 하아. 정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 잠깐만요. 저 지금 방금……!”
“괜찮아. 할 수 있어.”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얼굴이 확 붉어졌지만, 로엘은 자신의 발목을 당기는 그의 미소에 별달리 저항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럴 마음이 없었다.
“진짜……. 당신 때문에 바보가 돼 버린 거 같아.”
점점 더 길들여지는 느낌. 이제는 그가 없으면 살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
“어떡할 거예요. 당신 때문에 내가 너무 야해졌어. 원래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었는데.”
“그거 듣던 중 아주 반가운 소리네. 내 부인께서 이제야 제대로 제 나이에 맞는 성 관념을 갖게 된 거니까.”
“원래부터 제대로 가지고 있었거든요.”
“전혀 아니거든.”
얼마나 천천히 가르치느라 고생했는데. 그가 기다린 그 인내의 시간을 들으면 백이면 백 혀를 내두를 거다. 적어도 남자라면 그러하다. 이런 몸과 이런 향기를 내뿜는, 그것도 그 여자가 나의 여자임에도 매일 밤 곁에서 잠드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열흘을 굶은 방랑자에게 오아시스 앞에서 목이 말라 죽으란 소리와 진배없다.
“너무 당신에게 길들여지는 거 같아서 분하단 말이에요.”
“아까부터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를 하는 거지.”
그는 저절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살짝 들어 자리를 잡고는, 뽀얀 그녀의 허벅지에 진한 키스 마크를 남겼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길들여진 건, 나야.”
“으응!”
그 간지러우면서 뜨거운 감각에 그녀는 다시금 열이 확 올라왔다. 아까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아래가 욱씬거렸지만, 그건 분명 고통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곧 찾아올 쾌감에 대한 기대감에 휩싸여 더더욱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얼른 이 부족함을 채워 달라고.
그러한 그녀의 부끄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속도는 오늘따라 느리고도 느렸다.
“너에게 미쳐서 바보같이 흔들리는 건, 바로 나라고.”
“하아. 에단……!”
“그러니 아카시스. 오늘 밤은 나를 달래 줘.”
그는 그녀의 한쪽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친 채, 깊게 그녀의 안으로 단번에 들어갔다.
“아아!”
그녀의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고, 그녀의 가슴이 격하게 출렁거렸다. 끝의 끝까지 닿은 느낌. 그녀의 안에서 불이 이는 것만 같았다.
“아. 아앗. 읏.”
마치 밀물이 들이차고, 썰물이 빠져나가듯. 그의 거대하고 뜨거운 중심은 그녀의 안을 멋대로 휘저었다. 규칙적인 움직임에 따라 물기와 함께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 두 사람의 거친 호흡이 깔렸다. 그는 빠르게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틈틈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하아. 에단. 하아. 앗.”
어디 입술뿐일까. 그는 목이며 가슴이며 할 것 없이 죄다 그의 흔적을 남겨 갔다.
마치 그가 없는 동안이라도 절대 잊지 말라는 듯이.
“로엘.”
“에단. 조금 천천히……!”
그는 조금도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안에 머문 채로 그녀를 가볍게 돌렸다. 안쪽 살이 쓸릴 때마다 그녀가 흠칫흠칫 놀라 그러지 않아도 흥분한 그를 더더욱 재촉했다. 엎드린 그녀가 열기에 흐려진 눈으로 그를 돌아보기가 무섭게,
“아윽!”
그는 다시 한 번 더 그녀의 안을 가득 채웠다.
“하아. 로엘……!”
그가 뒤에서부터 힘으로 그녀의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가슴이 침대에 눌리며 쓸렸지만, 로엘은 그마저도 자극으로 다가왔다. 격해도 너무 격해 호흡마저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을 못 할 정도로 그가 주는 짜릿함이 좋았다.
그녀가 팔을 세워 상체를 잠시 들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두 사람의 이어진 부분을 지그시 누르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함이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아. 앙!”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자, 그는 그마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에게 깊은 키스를 돌려줬다. 아아. 정말 정신이 저 멀리 아득해지는 거 같았다. 다른 모든 문제들은 죄다 까먹고 오로지 그와 그가 주는 이 쾌감만 있으면 족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함께 쾌락의 늪으로 함께 꺼져 가는 거 같았다.
“조. 좋아……. 응!”
“나만 할까.”
그녀의 말, 하나하나가 그에게 얼마나 큰 파급력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솔직하기도 했다. 그는 본의 아닌 그녀의 재촉에 좀 더 속도를 냈다. 더 이상 그도 한계였다. 그녀의 안에서 어찌나 커졌는지, 이제는 아플 지경이었다.
“에단. 하아. 이제 그만……. 응!”
“나도……. 알아……!”
그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이어진 부분에서의 물소리가 더 커지고, 서로의 호흡도 더 빨라져 갔다. 결국 그녀의 긴 신음 소리와 그의 잔진동과 함께 그녀의 안은 그의 뜨거움으로 가득 채워졌다.
끝을 보았다는 그 쾌감에 그녀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지고, 그는 그녀의 위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녀를 만족시켰다.
“얼른 올게.”
“응. 그래 줘요.”
뜨거운 열기와 거친 호흡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괜찮다고 말하지만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무언으로 보여 주듯이. 그리고 서로에게 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드는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애써 외면하듯이.
두 사람의 뜨거운 밤은 길고 또 길어졌다.
그렇게 서로에게 만족할 때까지 서로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