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 니블이 남긴 것
“저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뿐입니다.”
에리카는 에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뻔뻔하기도 한 그 태도에 에단은 머리가 다 뜨끈했다. 마음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거짓을 고하는 그녀의 혀를 잘라 버리고 싶었다.
“맞습니다. 폐하. 이 모든 건 로엘 마마께서 계획하신 일로, 저희 몰브는 아카시스님의 명령을 따랐을……. 아악!!!”
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단의 검이 그의 손등에 찍혔다.
“아아악!!”
머리를 조아리느라 땅에 공손히 놓인 그의 고운 손은 에단의 검에 의에 가차 없이 짓이겨졌다. 그러지 않아도 에리카의 뻔뻔함에 겨우겨우 화를 꾹꾹 눌러 담고 있었는데, 더 뻔뻔스러운 케인의 변명에 그의 인내가 제대로 끊어진 셈이다.
“내가 정도껏 하라고 분명 말했던 거 같은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제롬은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이러니저러니 하여도 에리카는 타국의 황녀다. 그러니 그 만행을 벌이고도 포박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거다. 그런데 케인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카이로스의 귀족이자 에단의 신하가 아닌가.
“저는 단지 로엘 님의…… 크악!!”
그러니 지금의 그가 참을 이유가 없다.
“으아아아악!”
순식간에 케인의 한쪽 팔이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그 찰나로 멀쩡했던 케인의 팔은 이제 썩어 버릴 살덩이가 되어 버렸다. 한 박자 늦은 비명 소리가 울리고, 바로 옆에 있던 에리카에게 솟구친 피가 흥건히 튀었다.
에리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반사적으로 덜덜 몸이 떨려 왔다. 삽시간에 엄청난 공포가 그녀의 몸을 덮쳐 눈을 뜨는 것조차도 무서웠다.
언제 저 칼이 그녀를 향하게 될지 모르는 거였다.
“큭. 사, 살려 주십시오. 폐하.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만……!!”
팔 하나는 잘려 나가야 제대로 된 반응이 나오나 보다.
에단은 바로 목숨을 구걸하는 구차한 케인을 보며 더 표정을 구겼다. 정말 한 치의 빗나감도 없는 비굴함. 그는 케인의 피가 묻은 칼을 짜증스럽게 털어 냈다.
“감히 누구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가.”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세요. 폐하……. 흑. 제가 잘못했습니다.”
“너의 어리석음에 치가 떨린다.”
지금 지혈을 하지 않으면 분명 케인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조금도 자비도 베풀 생각이 없었다. 그저 차가운 눈으로 고통에 일그러지고 두려움에 비굴해지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배후가 누구든, 상황이 어떻든 너는 살지 못해. 감히 카이로스의 녹을 먹고 마약을 이 땅에 들여온 죄. 너와 네 가문의 피로 갚아라.”
그는 그의 도포 끝자락을 겨우겨우 붙잡고 있는 그를 거칠게 뿌리쳤다. 여전히 고통과 울음 섞인 애원을 계속하는 케인을 제롬이 수습했다. 여기서 이런 식으로 죽어 버리면 더 골치가 아팠으므로.
그렇게 케인이 반쯤 죽은 상태로 나가자 에리카와 에단, 단둘이 남았다.
에리카는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평생 황실 속 화초로, 금지옥엽 귀하게만 자라 온 그녀다. 단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본 적 없었고, 이런 대우를 받은 적도 없었다.
불과 몇 십 분 전까지 로엘이 진범이라고 자신 있게 떠들었건만, 그 사실이 너무도 후회가 되었다.
“에리카 네아레스.”
지잉. 그의 차가운,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검이 에리카의 숙여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디 감히 황녀를 이리 대우하냐고, 아무리 카이로스의 황제라 하지만 무례하다고 소리를 치고 싶은데 그의 황금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 모든 말들이 쏙 들어갔다.
“사, 살려 주세요.”
그리고 멋대로 말이 나와 버렸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눈물이 뚝뚝 흘렀다. 본능적으로 느끼고야 말았으니까. 이 남자는 그녀를 진짜 죽여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죽음을 몰고 다닌다던 사신의 아들. 피의 황제.
처음 그녀의 상상이 맞다. 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어도, 그는 괴물이다.
“네 아비의 무능함이 토르티아를 무너트릴 줄은 알았다만, 그 딸이 재촉까지 하는구나. 네가 니블을 가지고 이 땅에 오는 순간 나는 너를 살려 둘 이유가 없다.”
서늘한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고, 그녀의 목에 닿은 검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점점 더 에리카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창백함이 번졌다. 살려 달라는 말조차도 할 수 없었다. 어찌나 몸이 떨려 오는지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마저 울렸다.
“그런데 감히 그 이름까지 네 더러운 입에 올렸구나. 그러니 더더욱 나는 너를 살려 둘 이유가 없다.”
“나, 나, 나는!! 대 토르티아의 유일한 황녀. 나를 죽이는 건 토르티아와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래도 살겠다고 마지막 발악은 나오나 보다. 그는 빌어도 모자랄 이 와중에 받아치는 그 가소로운 모습에 저절로 비웃음이 나왔다.
“모를 리가. 그래서 뭐?”
정말로 비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지금의 토르티아가 감히 누구와 뭐를 해? 네 아비가 나와? 하.”
에리카는 이토록 치욕스러운 그의 말에 한 마디도 반문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너무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래.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다. 지금의 토르티아가 지금의 카이로스를 쳐들어온다는 것을.
설사 에리카 그녀가 이 방에서 죽어 나간다고 한들, 아비가 에단에게 복수해 줄 수 있을까.
이 처참한 치욕을 갚아 줄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다.
“황족의 어리석음은 나라가 갚아야 하는 법. 너와 네 아비의 무능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토르티아는 멸망한다.”
서늘한 사신의 선고와 함께 그의 검이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아름답게 늘어트렸던 에리카의 머리칼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그녀의 목에 피가 흘렀다. 아슬아슬하게, 생채기만 내고 머리카락만 자른 검시위.
조금만 더 깊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우욱.”
그 찰나의, 몸을 덮치는 죽음의 공포에 그녀는 뒤늦게 토악질을 했다. 연신 헛구역질을 하는 에리카를 에단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만 방을 나섰다.
“크흡. 흑. 으윽!!”
뒤늦게 터져 나온 울음이 방 안을 울렸다
이곳, 카이로스의 온 것이 정말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
“지금 여기 오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누구 마음대로.”
되도 않는 그녀의 걱정에 그는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일부러 후궁 성문 앞에서 그를 못 들어오게 사람까지 보내 놨건만 그는 기어코 그녀의 세룸니르로 찾아오고야 말았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저 지금 첩자로 의심받고 있는 처지라고요.”
“내가 의심 안 해.”
“아니. 그거야 저도 알……!”
그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그녀의 입을 입으로 막았다. 그녀가 무얼 어떻게 할 수도 없게 다짜고짜, 아주 깊이 파고들었다.
“흐응.”
로엘은 그런 그를 밀어내려다 말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녀를 달래 주려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으니까.
부드럽고 느릿한 키스. 그녀의 향기를 만끽하고 그녀의 열기를 오르게 하는 그의 다정함이 넘쳐흘렀다. 그가 주는 그 안도감에 로엘의 눈가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혀 갔다.
“하나도 기죽지 않았다고. 그래서 엄청 멋있었다고, 루카스가 그러던데.”
“엄청 멋있었지요. 당신 없는 사이에.”
“그런데 왜 울어.”
“몰라. 나는 당신만 보면 눈물이 나나 봐.”
그녀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자 그 역시 그녀의 작은 몸을 안았다. 품에 쏙 들어가는 작은 체구. 이 작은 몸으로 그 많은 시련을 잘도 버텨 왔다. 그런데도 또다시 이러다니.
에단은 끊임없이 어렵기만 한 그녀의 인생이 그저 안쓰러웠다.
“당신이 나를 울보로 만들었어.”
에단은 가볍게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아직까지 벗지 못한 화려한 드레스는 그녀의 몸보다도 더 크고 거추장스러웠다. 살포시 침대에 그녀를 내려다 놓으며, 그는 능숙하게 그런 그녀의 드레스를 벗겨 내려갔다.
“당신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로 만들어 놨다구요.”
가슴을 세게도 죄어 놓은 코르셋까지 마저 풀어 나신으로 만들어 놓자, 그녀는 그의 목을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는 토닥토닥 그녀의 뼈밖에 없는 등을 두드려 줬다.
“나 없어도 너무 잘해서 문제야. 나의 아카시스는.”
이내 시트를 끌어 올려 그녀를 덮어 주며, 그도 하나둘 옷을 벗었다.
딱히, 오늘 밤에까지 힘든 그녀를 안을 생각은 그도 없었다.
“나는 그게 화나. 네가 내가 없어도 너무 잘하는 게.”
물론, 그의 맨살에 여전히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귀여운 반응을 보며 겨우 자제하고 있었던 욕망이 꿈틀거렸지만. 그 역시 무거운 옷들을 죄다 벗어 버리자 한층 가벼워졌다. 몇 번을 보아도 적응되지 않는 말끔한 그의 근육 진 몸이 그녀를 그림자로 덮으며 다가오자 그녀는 수줍음에 살짝 시선을 피했다.
이대로, 그와 뜨거운 밤을 또 보내나 했는데……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그는 얌전히 그녀의 옆으로 누웠다. 그러고는 맨살인 그의 품에 그녀를 꼭 안았다.
“그래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게.”
그제야 그녀는 오늘 밤, 그가 그녀에게 주려는 것이 뜨거운 밤이 아닌 따뜻한 밤임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나와 버리는 그의 뜨거운 신체 변화는 애석하게도 숨겨지지 않았지만, 그만큼 그녀에 대한 배려가 크다는 것을 반증하기에 그녀는 그저 이런 그가 고마웠다.
그래서 더 꼭 그의 허리를 안았다.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은 적이 없는걸. 지금 이 순간에도, 폐하 없는 밤을 상상할 수 없어요. 나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어요. 에단.”
그런 배려 많은 그를 그녀는 조금도 배려해 주지 않고 이리 예쁜 말과 얼굴로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본능을 억누르느라 힘든 사람을 더 힘들게 말이다.
“그러면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잖아.”
“그거야 괜한 소문이 나돌까 봐 그런 거 뻔히 아시잖아요. 어차피 들어오셨으면서, 뭘.”
“그래도 그런 거 하지 마. 마음 상해.”
“네네. 알겠습니다. 폐하.”
어린아이 같은 그의 투정에 그녀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품에 안겨 그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그의 앞머리를 쓸어주었다.
“이봐. 이 상황에도 당신 때문에 웃잖아요. 내가. 그런데 뭘 내가 혼자 하겠어. 당신 없이.”
그녀는 조금 몸을 들어 그의 입술에 먼저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괜찮아요. 당신이 옆에 있어 주잖아, 이렇게.”
빨간 그녀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이번엔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 그녀의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를 똑바로 보는 붉은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정했다는 거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좀 더 당겼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해 줘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전부 당신을 위한다는 말.”
그는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없어, 좀 더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그의 입을 막듯, 뜨겁고 진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그녀의 속삭임이 너무 달콤해서. 너무 애절하고, 간절해서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그녀가 부단히도 애쓰는 키스를 만끽했다. 그렇게 그녀를 위로했다. 용기를 주었다.
그녀의 뜻대로 하라고.
일이 어떻게 되든, 내가 너를 지켜 주겠노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 모든 것들이 전해졌다.
그에게서, 그녀에게로. 그리고 그녀에게서 그에게로.
***
“원로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결국 그녀의 거취를 정하기 위한 중앙원로회의가 열렸다. 이틀 사이 케인은 팔이 잘렸으며, 에리카는 겁에 질려 자신의 잘못임을 쉽사리 시인하였다. 그러함에도 원로들은 여전히 로엘에 대한 시시비비를 논하기 위해 회의를 열고야 말았다.
에단은 정말로 짜증이 났다.
그들의 노골적인 속내가 너무도 우스웠다.
“아카시스 로엘 님께서 이번 니블 사건을 주도하셨다는 밀고가 드러났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밀고는 아니지요.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악에 받쳐 토해 낸 소리니.”
“아론 경은 말을 끊지 마시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 드린 겁니다. 끊은 게 아니라.”
원로들은 자신들보다 한참 어린 주제에 또박또박 잘도 받아치는 아론과 루카스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그런 아론과 루카스 쪽을 흘겼지만, 그래 봤자 제 주인을 꼭 닮은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폐하의 가장 측근이신 아카시스님께 이런 불경스러운 일이 발생하다니요. 당장 잘잘못을 따져 내치실 사람은 내치고, 살릴 사람은 살리셔야 합니다.”
내칠 사람이 아니라 내치고 싶은 사람이겠지.
에단은 실소를 뱉었다. 로엘이 그들에게 무얼 그리 잘못했다고 이리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에단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임을 알고 있다. 이번 일로 인해 그와의 기 싸움에서 한 번이라도 이겨 보려는 거다. 그러니 이 얼마나 치졸하고 한심한 생각들인가.
이 나라의 최고 귀족 가문이 주도하여 다른 나라와 내통하였고, 그 나라에서 마약을 들여온 엄중함보다 이 하찮은 젊은 황제와의 기 싸움에 이들은 더 목을 매는 거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죄다 쓸어버리고 싶었다.
“이런 일일수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폐하.”
“신중이라.”
그편이 이 나라에 더 득이 된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어디 한번 신중해 보지.”
그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뒤에서 로엘이 걸어 나왔다.
단정하게 올린 붉은 머리. 화려하다기보다 품위 있는 우아한 드레스.
거기에 지난 연회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던, 바로 그 다이아 목걸이까지.
당당히 에단의 옆에 앉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황후’의 모습이었다.
남성들만이 가능한 원로회의에 여자인 그녀의 등장은 꽤나 파격이었다. 그래서 바로 쓴소리를 내뱉어야 하는데, 원로들은 누구 하나 선뜻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엔 너무도 에단이란 범접할 수 없는 이가 그 뒤를 지키고 서 있었고, 그에 맞추어 그녀 역시 너무도 또렷이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아카시스 마마를 뵙습니다.”
자연히 모든 원로의 허리가 일제히 숙여졌다.
“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하시길래 제가 왔습니다. 첩자를 색출해 내는데 직접 심문해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반면 원로들은 아주아주 심기가 불편했다.
어린 아카시스가 건방지게 대 카이로스의 원로회의에 참석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저리 당당히 그들 앞에 서서 그들을 하대하는 것도 매우 불쾌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고개조차 함부로 들지 못하는,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이들이 이곳 카이로스의 원로 아닌가. 선대 황제들마저 무시하지 못했던, 그런 원로회다.
최근에야 이 어린 황제께서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가지고 태어나시어, 이리 살고 있을 뿐 그렇다 하더라도 감히 저 북방, 야만국의 공주 따위가 이리 대해선 안 될 이들이었다.
“제가 원로분들을 불편하게 한 겁니까.”
그러니 에단 입장에서야 이 어찌 웃기지 않으랴.
원로를 보며 예쁘게도 웃는 그녀를 보며 에단은 웃음을 삼켰다.
역시나 지나치게 똑똑하고 지나치게 잘났다. 그녀의 아카시스께선.
“……아닙니다. 아카시스 마마.”
친히 이곳 원로회의에까지 와 직접 해결하겠다고 하였을 때 걱정이 조금 앞섰지만, 역시나 기우였다. 절대 기죽을 위인이 아니다.
그는 좀 더 편히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자 그럼 어디 찬찬히 따져 볼까요?”
로엘은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갔다.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모두의 긴장감도 배로 커졌다. 눈에 띄게 아름다우신, 붉은 머리와 붉은 눈을 가진 이국의 공주 마마.
그녀는 분명 사람을 압도하는 아우라가 있었다.
마치 그녀 뒤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그분처럼.
“유일한 증거인 에리카 황녀의 증언은 스스로 번복하였고, 동조하였던 몰브가의 케인 경마저 부인하신 걸로 아는데. 제가 잘못 전해 들었나요?”
당연히 이 자리에 증인으로 나온 두 사람은 그녀의 반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도 치욕스럽고 분하였지만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고작 하루 만에 부인한 것도 사실이고, 그에 대해 다시 말을 번복할 용기도 없었다.
그러기엔 케인은 이미 팔 하나를 내주었으며, 에리카는 너무도 겁에 질려 있었으니까.
“어머. 케인 경. 벌써 이리 앉아 계셔도 되는 겁니까? 몸져누워 계실 줄 알았는데.”
케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리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지끈지끈 쑤시고 없어진 팔이 너무도 아팠다. 하루아침에 불구 된 기분. 어찌 무슨 말로 설명하랴. 눈에 핏줄이 터질 만큼 분통하였으나, 그는 그녀의 뻔뻔한 물음에도 아 소리 한 번 내질 못하였다. 어찌 케인뿐이랴.
케인의 없어진 한쪽 팔에 하나같이 경악하였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묻는 자가 없었다.
아니.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감히 누가 언급하랴.
저 팔을 자른 이가 너무도 명백한 한 것을.
“정도껏, 욕심부리지 그러셨어요. 몰브. 아니면 잘 숨기기라도 하든가.”
그녀는 케인과 피어 몰브를 보며 작은 비웃음을 흘겼다. 그 조소에 피어 몰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장남이 저리된 것이 누구 때문인데, 감히 모두의 앞에서 몰브를 조롱하다니.
피어와 케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갈가리 찢어 죽이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비록 그 앞에서는 단 한 마디 말도, 얼굴 내색 한 번도 하지 못할지라도.
그녀는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피어의 시선을 깔끔히 무시한 채, 이번에는 에리카의 옆으로 다가섰다. 에리카의 작은 어깨를 감싸며 그녀는 원로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흐음. 토르티아의 첩자라.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저는 너무 무능한 첩자였네요. 그동안 아무것도 토르티아에게 전하지 못하였으니. 애초에 토르티아에 제 소식을 받을 이가 있긴 합니까? 내 생각엔 아무도 없을 거 같은데. 아닌가요, 에리카 황녀님.”
그녀는 살짝 상체를 숙여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에리카에게 말했다.
지금 에리카의 모습이 얼마나 볼썽사나운지는 그녀 자신이 제일 잘 안다. 자존심에 치장을 하고 이 자리에 섰지만 모두가 있는 가운데 둘러싸여 작은 의자에 앉혀졌고, 그 뒤로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포박할 것만 같은 카이로스의 황군이 지키고 서 있었다.
에리카야 황녀라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느라 감옥행은 아니었으나 나머지 토르티아의 가신들은 모두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내 귀와 내 손과 내 발을 모두 자른 에리카 황녀시라면 잘 아실 텐데. 그곳에는 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처음부터 첩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아. 내 친애하는 사촌께서 받아 주셨으려나. 그래서 그리 말하셨나.”
에리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앞에 있는 로엘을 죽일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다.
“에리카. 네가 늘 그랬지. 너는 토르티아의 유일한 적녀라고. 그러니 나 따위와는 신분이 다르다고. 네 아비가 곧 토르티아이며 네가 곧 토르티아라고.”
로엘은 에리카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천천히 그녀의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며, 그녀는 에리카를 안쓰러운 듯 내려 보았다. 그러고는 속삭였다.
“네가 토르티아를 망친 거란다. 네가 그토록 자부심 가지던 그 붉은 나라를 피바다로 만드는구나. 그렇게 사그라들겠구나.”
그녀의 오래된 한이 고스란히 담긴, 소름 끼치는 저주를.
“그러니 에리카. 토르티아와 함께 죽으렴.”
덜덜덜. 에리카는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핏기가 완전히 가신 창백한 얼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하였다. 물론, 그래 보았자 얼음장같이 차가운 로엘의 눈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지만.
원로원들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그녀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는 건 에리카뿐만이 아니었다.
다시금 그녀의 눈이 원로들을 향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볼까요. 지금, 여기 카이로스의 원로분들께서는 저를, 토르티아의 첩자라 주장하시는 거였지요.”
언제부터 이 작은 여자가 이리 섬뜩했나.
그들은 그녀의 생긋 웃는 물음에,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케인 몰브와 에리카 네아레스가 거래하였다는 계약서가 있고, 그들의 거래 현장을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직접 보셨습니다. 그 모든 일을 밝히는 데에 운이 좋게도 제가 함께하였지요. 그러함에도 저를 그 배후로 주장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저를 범인으로 몰고 싶으시다면 이 명백한 증거들보다도 더한 무언가를 가지고 오세요.”
말은커녕 눈조차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돌아보는 그 붉은 눈은 당장이라도 그들을 피로 물들일 것만 같았다.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을 하여도, 아무리 귀를 닫고 떠들어도 거짓이 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알고도 이러시니 이 어찌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 우매함에 너무도 부끄러워 낯이 다 뜨겁습니다.”
그녀의 입가에 더 이상 미소가 깃들지 않았다. 일자로 다물어진 입은 그녀가 그만 이 어이없는 상황을 끝내고 싶다는 것을 의미했다.
에단은 그 모든 것들이 재미있다 구경하며 한 손으로 턱을 괴었지만, 원로들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떨구고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스스로 알고도 애써 외면했던 그들의 부끄러운 속내를 모두에게 까발려진 그런 기분이었다.
“친애하는 대 제국 카이로스의 원로님들. 저는 거짓된 모함에 순순히 폐위당할 만큼 나약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홀 안을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원로들은 새삼스럽게, 사냥터에서 그녀가 수십의 장병을 죽였다는 소문이 생각났다.
그리고 자연히 따라오는 생각. 그녀는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라는 것.
“한 번만 더 그 세 치 혀로 나를 모욕한다면, 나는 거짓 고하는 그 혀를 뽑고, 거짓을 보는 그 눈을 파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보게 만들 겁니다.”
그건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쯤이야 단번에 죽일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함부로 그 입 놀리지 마세요. 원로. 나는 대 제국 카이로스의 아카시스입니다.”
에단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루카스와 아론의 미소 역시 진해졌다.
아. 게임이 끝난 듯하다.
“대제국 카이로스의 아카시스 마마를 받듭니다.”
그녀의 완승이다.
***
“고생했어.”
그녀가 그만 회의장에서 나오자 이반이 반겼다. 그러고 보니 아론과 루카스마저 들어가 있는 저 원로회의를 이반은 들어가지 못했다. 그 사실을 로엘은 오늘 처음 알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실까. 그건 내가 너한테 해야 하는 눈인데.”
“……왜 너는 안 들어가는 거야.”
“황위에 오르지 못할 황자는 원로가 될 자격이 없거든.”
“그런 게 어딨어.”
“여깄어.”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로엘의 얼굴을 찌푸려졌다.
이반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살짝 헝클어 줬다.
“막 위로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네가 나를 위로를 하면 어떻게.”
“……위로한 적 없어.”
“지금 그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 날 위로하는 거야. 아무도 내가 원로회의에 못 들어간단 사실에 그런 표정을 짓지 않으니까.”
그녀의 표정이 더 찡그려졌다.
정말,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다 체념했다는 이반의 태도가.
그녀가 아는, 이반과는 너무도 달랐으니까.
“아직 저 안은 시끄럽네.”
“응. 루카스와 아론이 엄청 싸우고 있거든. 원로원이 내린 결론에 대해.”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이반의 표정이 구겨졌다.
밖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었던 이반은 그들이 내린 결론에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그녀의 말에 입 한 번을 뻥끗거리지 못했던 주제에 결국에 내린 다수결은 그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토르티아의 공주’ 신분이라는 그 자체로.
“그래도 첩자 의혹은 벗었잖아?”
“그딴 의혹은 처음부터 없었어.”
그러니 얼마나 웃긴 결론인가.
되도 않는 억지 주장이 그녀에 의해 철저히 깨져 버리자, 구차하게 겨우겨우 생각해 낸 그들의 변명이 그녀가 토르티아 출신이란 거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구겨진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세우고 싶었던 거다.
“뭐. 토르티아가 벌인 일에 대해 토르티아 출신으로서 책임을 지라고 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 내가 이 눈과 이 머리를 가지고 있는 이상?”
“하. 진짜 웃기지도 않아서. 하등 이 나라에 쓸모없는 인간들. 정말 몇 년 만에 돌아와도 변하질 않는군.”
어쩜 이리도 에단과 똑같이 말하는지. 로엘은 그저 신기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반은 한숨이 나왔다.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는 너도 참 대단해.”
“폐위당할 뻔했는데 3개월 궁에 유폐되는 정도에 그쳤다면, 뭐 나쁘지 않지.”
“네아.”
“괜찮아.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
그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그녀를 유폐하는 결정을 내린 원로에게 에단이 바로 일어나려 하자, 로엘이 제일 먼저 그를 붙잡았다. 당장이라도 피바람을 일으킬 것 같은 그 무서운 표정에 그녀는 애써 웃어 보이며 그를 막아 세웠다. 그리고 눈으로 말하였다.
이게 바로 그녀의 결정이라고. 이 정도는 그녀가 감수하겠다고.
그러니, 더 이상 그녀로 인하여 듣지 않아도 될 비난을 듣지 마시라고.
“대신, 케인 몰브는 잡았지.”
로엘은 씩 웃으며 말했다. 원로회의 수장이자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피어 몰브는 이미 케인의 팔 하나가 잘린 것에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차였다. 로엘을 끌어내리는 것은 물론, 목숨까지 노리고 있었는데 보란 듯 원로회를 물 먹이고 덤으로 몰브까지 대놓고 망신을 주었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선 그녀의 3개월 유폐는 약해도 너무 약한 처벌이었다.
그러니 당장이라도 케인을 죽이려 드는 에단으로부터 피어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잡은 것도 아니지. 몰브 성만 아니었어도 진작 죽은 목숨이야. 다른 것도 아닌 마약이라니. 절대 용서받을 수 없어. 특히 에단에겐.”
“그 정도 급의 일이긴 하지. 니블은.”
로엘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묵인할 뿐.
그 니블에 관련된 귀족 자제가 어디 한둘이랴. 몰브는 아마 그것을 약점 잡았을 테다.
심지어 케인이 한쪽 팔까지 잘리고 왔으니, 아비 되는 입장에서 어찌 무섭지 않을까. 당연히 그에게 걸릴까 두려워 몰브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래도 평생 이 땅에 발 못 붙인다는데 그건 카이로스에서의 사형이나 다름없잖아? 카이로스에서만 사라져 준다면야 나는 충분히 만족이야.”
그녀는 진심이었다. 솔직히 그녀 입장에서는 케인 몰브가 그렇게 쉽게 죽어 버리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자기가 한 짓들이 있는데 단번에 죽는 고통 없는 죽음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자기도 어디 한번 당해 보라지. 평생을 멸시와 굴욕 속에서 살아 보면서.”
이반은 가슴이 찡했다. 지금 그녀가 무엇에 화내고 있는지 모를 만큼, 이반은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싫었나 보다. 케인 몰브가 이반을 대하는 그 태도가.
“그러면 조금이라도 깨닫겠지. 자신이 얼마나 오만불손했는지. 샘통이다. 흥.”
이러니 마음이 접히지 않는 거다. 이러니 놓을 수 없는 거고.
이반은 손을 올려, 자기 혼자 화를 내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네아.”
그 부드러우면서도 익숙한 손길에 로엘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 보았다.
‘고마워, 네아.’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반은 이 말을 참 자주 했다. 툭하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세상 진심을 다 담은 듯한 눈으로 이리 그녀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뭐가 그리 맨날 고마운지 어린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카이로스의 황궁에 들어와 황자 이반을 만나 보니 그 고마움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저 그는 그녀와의 일상 모든 것이 감사했던 거다.
그를 끈 떨어져 힘없는, 평생 누군자의 그림자여야 하는 존재로 대하지 않아서.
항상 있는 그대로의 그를 봐 주어서 그 당연한 것이 고마웠던 거다.
“그거, 하지 마.”
“쓰다듬는 거, 아니면 고맙다고 말하는 거.”
“둘 다.”
“곤란해, 둘 다.”
“그래도 하지 마.”
그녀의 말을 덮는, 에단의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로엘이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기도 전에,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 위에 닿은 이반의 손을 떼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일을, 이제 정리해야지. 형제.”
이반은 이내 에단에게 잡힌 손을 내렸다. 그러자 자연히 에단은 그녀의 허리를 당겨 그의 옆에 세웠다. 바로 눈앞에서, 모든 것을 인지하고 보니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내가 무얼 하면 될까.”
이반은 담담히 말했다. 로엘은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이반이 이리 죄인일 이유가 전혀 없다. 비록 그가 카이로스의 황자인 것을 숨겼다 하지만, 그리하여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녀의 형수가 되어 버렸지만, 그와 그녀 사이의 문제일 뿐 에단과의 일이 아니다. 이반은 에단의 여자가 될 줄 모른 채 어린 날의 사랑을 한 것일 뿐이고, 그 사랑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 채 홀로 지켜 온 것뿐이다.
그걸 로엘, 그녀가 제일 잘 안다.
“폐하. 이건 제가…….”
“입. 다무는 게 좋아. 아카시스.”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낮게 깔린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그와 상의도 없이 멋대로 유폐를 받아들인 것도 모자라 그 앞에서 감히 이반의 편을 들다니. 에단은 진심으로 화가 아주 많이 올라왔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그런데, 그 팽팽한 세 사람의 긴장을 깨트리는 다급한 목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제롬이었다.
“방금 북방 국경 아시르부터 급한 전령이 당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야. 똑바로 말해.”
그는 답답스러운 제롬의 보고에 짜증스럽게 전령을 건네받아 보았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는 순간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테바로스가 저희가 계획하던 북방 경계 지방의 소삼국, 사우어, 리모아, 비터를 점령하였습니다.”
그 말에 이반과 로엘의 표정도 단번에 굳었다.
“그리고 지난밤, 테바로스의 황제 데릭 테바로스가 카이로스 북방 국경 제3구역, 시엘을 점령하였습니다.”
하나의 태풍이 지나가나 했더니만 더 큰 태풍이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카이로스 제29대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즉위 이후, 카이로스는 처음으로 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