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 가면무도회
두근두근. 불안감이 밀려왔다.
에리카가 저주에 가까운 말을 쏟아 내고 가 버린 후 로엘은 그 자리에 선 채 굳어 버렸다.
이 기분 나쁜 기시감.
분명 무언가 있다.
“마마. 괜찮으세요?”
“아……. 응. 괜찮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어 오는 딜리아에게 로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일, 절대 틀어져서는 안 된다. 겨우 잡은 니블의 몸통이자, 머리였다.
니블이 얼마나 그를, 그리고 그녀를 괴롭혀 왔던가. 그 결착을 오늘 지어야 하는데 정작 당일, 그 당사자인 에리카의 행동이 너무도 신경이 쓰였다.
저 태도. 저 눈빛.
분명 에리카는 그녀가 모르는 패를 가지고 있다.
“시에라.”
“네. 마마.”
“절대 에리카를 놓치지 마.”
“예. 실수 없이 수행하겠습니다.”
시에라를 비롯한 키로스 전원은 로엘의 명령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입지 않는 드레스 덕분에 조금 불편했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들은 재빠르게 동선부터 파악했다. 시에라의 무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키로스들은 자연스럽게 서빙 하는 시녀들 사이로 스며들어 흩어졌다.
이제 이 홀 안 어디에서든 그녀들의 눈을 피할 수 없으리라.
몰브든, 토르티아든 키로스가 그들 모두를 지켜보고 있다.
“믿음직스럽네.”
“키로스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로엘은 미소 지었다. 이렇게 일을 잘하는데 고작 후궁에서 마마님들 호위나 하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전장에 내보냈다면 훨씬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세상은 너무 좁아졌다.
“시에라.”
“네. 마마.”
“오늘만큼은 내가 아닌 에리카를 쫓아.”
“하지만, 마마…….”
“알아,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저 에리카야. 우리는 반드시 오늘 이 니블 건을 끝낼 거야.”
로엘은 멀리,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 에리카를 보며 말했다. 붉은 머리는 가면 아래에서도 숨겨지지 않아 사람들은 쉽게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머리 색뿐 아니라, 토르티아만의 화려한 드레스도 한몫했고, 그 도도한 태도 역시 한몫했다. 고고하게 사람들에게 손등을 내미는 그녀는 누가 보아도 긍지 높은 토르티아의 황녀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당연하지.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
로엘은 자신 있게 말했다.
황궁처럼 안전한 곳에서 그녀를 위협할 게 무엇이랴. 그보다는 니블이 더 중했다.
“오늘을 놓치게 된다면, 정말 기약이 없어. 그동안 니블은 계속 퍼질 테고, 폐하의 고민은 날로 깊어지실 거야.”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준비해 온 북방에 대한 계획도 틀어질 테지.
“그러니 꼭 오늘이어야만 해.”
그녀는 단호히 말했지만, 계속 이상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에리카의 그런 눈, 처음 봤다. 그렇게 순수하게 로엘을 적대시하던 그 눈.
언제나 그녀를 괴롭혔지만 한 번도 무섭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아니다. 이번만큼은 에리카의 알 수 없는 그 계획이 두려웠다.
그 계획이 그녀를 해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혹여 그에게까지 피해를 줄까 봐.
“절대, 절대 실패해선 안 돼. 만에 하나라도 그랬다간…….”
“그래도 괜찮아.”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단단한 팔.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로엘은 바로 고개를 들어 자신을 안은 그 사람을 보았다.
황제를 상징하는 도포를 입지 않았지만 그녀는 단번에 그임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모를까. 이 손길과 이 목소리에 이리도 익숙하고 이리도 안심이 되는 것을.
“오늘이 아니면 내일 잡으면 돼. 내일이 또 안 되면 그다음 날 잡으면 되는 거고. 그렇게 목숨 걸 필요 없어.”
그는 불안해하는 그녀를 달래 주려 이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바로 그녀를 찾아왔나 보다.
무심하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안아주는 그에게 로엘은 울컥했다.
“……화 풀렸어요?”
“아니.”
“그러면서 왜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요. 눈물 날 것 같잖아.”
에단은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그녀를 내려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화가 난다고 한들, 그녀를 이 늑대가 우글거리는 곳에서 혼자 둘까.
그녀가 회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많은 눈들이 그녀와 춤 한번 쳐 보려, 그 손목 한번 잡아 보려 혈안이 되었다. 그 눈치 게임 속에서 그가 제일 먼저 당당히 그녀의 소유권을 확인시킨 거다.
“그거와 이건 별개야.”
“그럼 계속 별개인 채로 있어 줘요. 당신이 화나는 건 싫으니까.”
“갈수록 제멋대로인데, 아카시스.”
“남편에게 배웠습니다.”
‘남편’.
아무튼 약았다. 에단은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끌어 내렸다.
“그 일은, 니블이 끝나고 나서. 그때까진 말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마.”
“네…….”
로엘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그저, 이리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먼저 다가와 준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녀는 자신을 지켜 주는 그의 곁에 서서 다시금 에리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왜 이렇게 초조해하는 거야.”
“……뭔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어요.”
그녀는 뚫어져라 에리카를 보며 말했다.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를 안은 그의 손에 힘이 좀 더 들어갔다.
“무언가, 내가 간과한 일이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일이 틀어질 거 같고. 그러다가 당신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만.”
에단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허리를 당겨 옆에 서 있는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렇게 제대로 마주하자 그녀의 불안한 눈동자가 더 선명히 드러났다.
도대체 무얼 이리 걱정하는 건지.
“여기는 카이로스야. 그것도 카이로스의 황궁이지.”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잡고 홀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 누구도, 감히 이곳에서 널 해하지 못해.”
주변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조금씩 더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너무 눈에 띄었다.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긴다고 한들 두 사람이 어디 숨겨질 그런 이들인가.
황제와 아카시스께서 춤을 추시겠다는데 자리를 비켜 주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자, 잠깐만요. 지금 춤을 추자고요?”
“못 추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무리 막 살았어도 엄연한 한 나라의 공주라고요.”
정말 그녀가 못 출 거라 생각했는지 반문하는 그에게 그녀는 순간 발끈했다. 자신이 어머니께 얼마나 혼나 가며 배웠는데 못 춘다니. 그녀는 제대로 그 앞에 섰다.
잔잔한 클래식에 맞추어 한 교양 하시는 분들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럿 커플이 되어 춤을 추고 있었다.
가면무도회의 꽃은 본디 누구인지 모르는 상대와 밤새 음악과 함께 춤을 추는 것.
삼삼오오 서로가 어느 집의 누구 자식인지, 어디 출신인지 전혀 모른 채 그저 이 밤을 즐기는 거다.
물론, 두 사람이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지금 이럴 때가……!”
“이럴 때야.”
그녀의 작은 반항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자연스럽게 홀 한가운데에서 그녀의 허리를 당겼다. 가늘기도 한 그녀의 허리가 그의 한 팔에 쏙 들어오고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살짝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면, 내가 다른 여자랑 추는 걸 보고 있을 건가.”
“……그건 싫어요.”
그 얄미운 한마디에 그녀는 순순히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치사하게. 아무튼 사람 치졸하게 만드는 데에 뭐 있는 남자다.
“그렇다면 한 곡 부탁드려도 될까, 아카시스.”
“기꺼이.”
두 사람은 낯간지러운 인사에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들을 위해 다시 클래식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자연히 손을 맞잡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져 로엘은 아주 많이 민망했지만 그러함에도 쉽사리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가면 너머 자신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황금 눈동자에 고스란히 마음을 사로잡혀 버렸다. 오로지 그에게만 집중하라는 무언의 명령.
그 눈이 그녀를 향하는 한,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꽤 추네.”
“저도 왕족이라니까.”
얼마나 지겹도록 배웠는데. 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을.
“어머니께서 엄하셨어요. 특히 이런 데엔. 저는 검술 배우는 것보다 이거 배우는 게 백배는 더 힘들었다고요.”
“하하. 그럴 만하지. 나의 아카시스께서는.”
에단은 웃었다. 어린 그녀가 조금은 상상이 되어서. 그래도 투덜대는 것치고는 정말 꽤 괜찮았다. 일단 여유가 있었고 박자도 잘 맞았으며, 처음 맞춰 보는 그의 리드에도 잘 따라와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대의 눈을 빤히 바라봐 주는 그녀의 맑고 투명한 붉은 눈이 마음에 들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밑이라서 더 그런 걸까.
오늘따라 그녀의 눈이 더 반짝거려 보였다.
“나쁘지 않군.”
“동감입니다.”
두 사람은 오로지 서로만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곳에 백 명이 있든 천 명이 있든, 니블에 대한 계획이 있든, 암살 모의가 있든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데 그것들이 뭐가 중요할까.
“진짜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큰 홀에서 춤을 추는 건.”
“그래.”
“당신도 오래되었을 것 같은데.”
“그런 거 일일이 따질 만큼 한가하지 않아.”
“어련하실까.”
두 사람 다 춤이라고 하는 이 형식적이고도 가식적인 행위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에단도, 로엘도 늘 예의상 어쩔 수 없이 하는 행위일 뿐이었는데 이마저도 상대가 서로이다 보니 마음가짐이 전혀 달라졌다. 이 따분한 행위마저 그저 즐겁고, 그저 좋았다.
”저는 아마 토르티아 황궁에서 도망치다시피 나왔을 때 이후론 처음일걸요? 그렇다면…… 근 10년은 되었겠네요.”
“어린아이였군.”
“어린아이였죠.”
로엘은 어린 날 토르티아 성에서의 무도회가 생각나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곳도 이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것 같기도 하다. 토르티아 황궁은 안 좋은 기억이 너무 많아 전부 다 싫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간간이 나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어린 날의 무도회가 그중 하나였으려나.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던, 그렇게 그녀의 앞에 섰던 사람이 너무 갑작스럽고 뜬금없이 생각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음. 당신보다 먼저 내 손을 잡았던 남자 생각?”
그는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허리를 당기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며 로엘은 속으로 웃었다. 너무도 예상된 반응이다.
“그때도 이랬는데. 나랑 그 파트너만 춤을 중앙 홀에서 추고, 나머지는 다들 우리를 지켜보았지요.”
‘우리’라니. 그의 눈썹이 더 꿈틀거렸다. 가면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의 못마땅함에 그녀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녀는 그저 이 순순하기도 한 반응이 재밌었다.
“그래서 그게 누구야. 토르티아의 귀족인가.”
“아니요. 좀 더 높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근데 신분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지요.”
그래서 좀 더 그를 놀리고 싶었다. 질투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너무 귀여웠으니까.
“내 정혼자였거든요.”
그런데 말을 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진심으로 차가워진 그의 눈에.
“뭐라고?”
화났을 때 나오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 마침 한 곡이 끝나자, 그는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잡고 휘적휘적 홀 안을 빠져나왔다.
바깥공기를 쐴 수 있는 테라스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두 사람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바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럴 거면 가면은 왜 쓰는 거예요. 어차피 다 알아보는데.”
로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각한 그에 비해 그녀의 반응은 태평하기만 했다. 에단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살짝 울컥했다. 갈수록 애가 닳는 건 그뿐만인가 보다.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애였다고요, 애. 어른끼리 멋대로 정한 정혼이 뭐가 그리 중요해요. 누가 보면 내가 정혼자랑 뭐라도 한 줄 알겠네, 진짜.”
에단의 눈썹이 더욱 더 꿈틀거렸다. 그놈의 ‘정혼자’. 그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리에 핏대가 섰는데 그녀는 참 쉽게도 말했다.
테라스에 나온 김에 숨을 크게 들이켜며 딴짓을 하는 그녀의 허리를 그는 다시금은 단단히 안았다.
“난 중요하니까 말해.”
“우리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은데…….”
“그러니까 얼른 말해. 누구냐고. 그 거지 같은 정혼자가.”
보아하니 그는 그녀가 말하기 전까진 절대 놔주지 않을 거 같았다. 로엘은 한숨을 삼켰다.
가끔, 아니 종종 느끼지만 그의 소유욕은 유별나다. 은연중 그녀가 그의 여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행동들이 사라나 제롬의 눈에는 그의 철저히 계산되고도 의도된 행동이라 생각될지 몰라도, 그녀가 느끼기엔 그저 순수한 그의 소유욕에 불과하다.
그저,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확실히 하려는 본능일 뿐.
그 외의 정치적 의미는 그에 따른 부수 효과일 뿐이다.
“당신이 너무 진지하게 정색하니까 조금 기분이 상하려고 하는데. 진짜 내가 뭐라도 한 거 같잖아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한 거, 당신이 제일 잘 알면서.”
첫 키스. 첫 경험. 첫사랑.
여자로서 남자에게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그가 주었으면서, 이제 와 무얼 질투하는 건지.
말하다 보니 아주 상당히 억울해지려 했다.
“당신을 거친, 그 수많은 여자들에 대해 말해 주면 나도 말해 줄게요.”
뾰로통하게 말하는 그녀의 반격에 에단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그녀의 말대로 그가 안은 여자가 많긴 했으니까.
한 번도 이 사실에 대해 로엘에게 미안하다든지 하는 그런 감정을 가지지 않았는데 새삼스럽게 그야말로 불륜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그래서 조금 풀이 죽어 버렸다. 그녀를 안은 팔에서 힘이 빠지자 로엘이야말로 그 반응에 잠시 심통 부리려던 마음이 저절로 녹아 버렸다.
이토록 귀여운 황제를 보았나.
수백 명의 여인을 비로 거느려도 그 누구 하나 비난할 수 것이 카이로스의 황제인데, 그게 뭐 대수라고.
애초에 불륜이란 단어가 가당키나 하나.
이 높고도 위대하신 분께.
“그래서 진짜 말 안 할 생각이야?”
“말 안 해도 알아볼 거잖아요. 충분히 알아낼 수 있으시면서.”
“말 안 하겠다는 거군.”
그 위대하신 분께서 오직 그녀에게만 이리 사랑을 속삭이는데, 어찌 기적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아주 찰나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가 곁에 있어 준다면 그녀는 그저 감사하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허리를 당겼다.
“아니요.”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와 함께, 기꺼이 그에게 져 주었다.
“나의 모든 처음을 가져간 나의 황제께서 물으시는데 답해야지요.”
이 짧은 한마디에도 금세 마음을 풀어 주는 이 남자에게 이겨 무엇 하리.
로엘은 그저 웃어 버릴 뿐이다.
“그래서 누구야.”
“데릭.”
“……누구?”
“데릭 테바로스. 현 북방의 새로운 패권국. 테바로스의 황제요.”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인물.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경악했을 엄청난 대답.
에단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이 폭탄 같은 이야기를 너무도 담담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에게.
“테바로스와 토르티아 왕족간의 정혼은 오래된 전통이에요. 형제국의 의의를 지켜 가자는 일종의 혈맹이죠. 그래서 전 당시 황위와 거리가 먼 다섯째 데릭 황자와 정혼했습니다. 저 홀에서 웃고 계신 에리카 황녀께서는 가장 황위와 가까운 첫 번째 황자와 정혼했고요.”
정말 오랫동안 잊었던 사람인데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새록새록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에단에게 말하면 화낼 테지만, 그녀는 데릭 황자가 자신의 정혼자인 게 싫지 않았다. 에리카와 조지 황제의 견제에 밀려 가장 최악의 선택지를 선택한 거였지만, 그녀 입장에선 데릭이 최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황위 따위 관심 없는 그녀에게는 그녀를 평탄하고 평안히 살게 해 줄, 황위와 거리가 먼 그런 황자가 필요했으니까. 심지어 또래에, 잘생기기까지 했고.
“아시다시피 저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고, 당연히 테바로스에게도 파혼당했어요. 콧대 높으셨던 테바로스의 전 황제께서 끈 떨어진 공주를 며느리도 받을 리 없었거든요.”
당시 이미 탑에 유폐되어 있던 터라, 당시의 로엘에게 파혼은 때 되면 돌아오는 저녁 식사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멋대로 해 버린 정혼이 멋대로 깨져 버렸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니, 그 데릭 황자는 황제가 되었더군요. 그 기라성 같은 네 명의 이복형제를 전부 제 손으로 죽이고.”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로엘은 놀라면서도 놀라지 않았다. 어린 로엘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어린 데릭의 눈은 남달랐으니까. 야망이 가득 찬, 그래서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이 깃든 눈동자. 파국으로 치닫든, 영예에 다다르든 무엇이든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황제에 되었단 소식에 결국엔 해냈구나 싶었다.
‘그럼 너는 나를 선택한 거구나.’
‘흠. 선택이라고 할 순 없지만, 결정된 이상 받아들인 거죠. 나는 내 인생만 선택해요. 황자님 인생은, 황자님께서 선택하세요.’
‘내 선택은 너야.’
참 가진 것 없던, 아니 언제 형들에게 죽을지 몰라 목숨 부지조차 위태롭던 황자 주제에 당돌하기도 하지. 로엘은 아직까지도 선명한 그때의 기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의든, 타의는 오늘 너와 나는 정혼을 했고 그걸 너는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어. 그럼 그 또한 너의 선택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로엘은 그때의 데릭이 꽤나 믿음직스러웠던 거 같았다.
늘 전쟁터를 전전하시던 아버지와 이미 멸망해 버린 속국의 마지막 공주였던 어머니 밑에서 그녀의 어린 시절은 평탄할 수 없었다. 크나큰 부모의 사랑 속에서 분명 행복하게, 부족함 없이 자랐음에도 끊임없이 아버지를 사지로 모는 숙부와 지독히도 자신을 괴롭히던 사촌 밑에서 어쩔 수 없이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눈치가 빤하고 남들보다 영특했던 그녀의 눈에 어찌 세상 돌아가는 것이 안 보일까.
언제라도 숙부가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는 공포는 늘 그녀를 남 몰래 울게 만들다.
그런 와중에 그녀의 인생에 등장한, 가장 힘 없고 뒷배 없던 타국의 황자.
‘그 선택.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 주지. 가장 높은 곳. 그 바로 옆에 네가 서게 될 거다. 로엘 네아레스.’
그 아무것도 없는 황자의 자신감 넘치고 흔들림 없는 눈은 그녀로 하여금 이상한 안도를 주었다. 아니 희망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그녀에게 무엇을 해 준다거나, 그로 인하여 그녀의 인생이 바뀔 거라는 그런 허황된 바람이 아니라, 그 데릭 황자를 보며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다른 미래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절대 가능성 없는 테바로스의 다섯째 황자가 정말 황위에 오를 수 있다면, 그럼 그녀의 아버지라고 못 할 게 무어냐는 그런 헛된 희망.
그 설렘을 분명 그때의 데릭 테바로스가 그 당시의 로엘 네아레스에게 주었다.
“그만.”
오래된 기억에 홀로 빠져 말이 없는 그녀 대신 그가 그녀를 다시 현재로 돌려놓았다.
여전히 안고 있던 그녀의 허리를 좀 더 당기며,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그를 또다시 화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 생각해.”
감히 황제 앞에서 다른 남자를 생각하다니.
당장 그 남자를 찾아 목을 베어도 시원찮을 일이다.
“네 멋대로 다른 남자 생각하면서 웃지 마.”
에단은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낯간지럽고 유치한 말에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아서, 이렇게 놀릴 줄 알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유치하다고 한들, 싫은 건 싫은 거니까.
“웃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고. 가지고 있는 기억도 전부 잊어.”
가능만 하다면 그녀의 지난 모든 시간으로 되돌아가 그녀와 그 어떠한 남자도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
이반도, 그 거지 같은 정혼자라는 테바로스의 황제도 모두 다.
어째서 이리도 늦게 그의 곁에 왔는지. 에단은 두고두고 그 사실이 제일 분했다.
“그렇게 나만 생각해.”
그녀는 단호하고 매섭기도 한 그의 명령조에 오히려 미소가 진해졌다.
그녀 역시 손을 올려 그의 목을 꼭 안으며, 까치발을 들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도 그러고 있어요.”
그가 유치할 정도로 솔직해져 준 만큼 그녀 역시 솔직해지고 싶었으니까.
“저는 폐하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매일 눈을 뜰 때부터 다시 잠드는 때까지, 저는 늘 당신을 생각해요. 이렇게 아주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는 이 순간에도, 그때의 당신은 무얼 했을까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가 다른 황자님의 손을 잡고 정혼을 하던 그 시절, 이 아름다운 황제께서는 무얼하셨나.
그때도 이 황금의 나라를 위해 잠 못 드셨을까. 아니면 그녀처럼 다른 예쁜 귀족 여아의 손을 잡고 춤이라도 추셨나. 그렇다면 조금 샘이 날 것도 같은데.
로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나의 폐하. 나의 황제시여. 당신은 이미 저의 모든 것을 가지셨습니다. 비록 제가 저의 과거의 시간을 드릴 수는 없어도, 앞으로의 시간은 기꺼이 드리지요. 그러니 폐하. 폐하께서도 앞으로 올 당신의 시간들을 제게 주세요.”
에단 역시 그녀를 따라 웃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녀는 그에게서 제일 비싼 것을 요구했다.
앞으로 다가올 황제의 시간을 달라니. 그건 황제가 되겠단 말과 진배없다.
그러니 이 어찌나 앙큼한 여인인가. 사랑하지 않으려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기꺼이.”
그가 결국 그녀의 가면을 들어 올리자 그제야 그녀의 환한 얼굴이 전부 드러났다. 만면에 미소가 한 가득인, 아름다운 그녀에게 언제나처럼 그는 진한 키스를 남겼다.
마치, 장래를 함께하겠다는 서약이라도 하듯. 뜨거운 사랑과 깊은 진심을 담아.
***
“그러다 정말 큰일 내십니다, 황자님.”
버릇처럼 로엘을 좇는 이반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나 할 것 없이 화려한 이곳에서 홀로 단아한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우아한 여인. 긴 머리를 단정히 옆으로 내리며, 유일하게 화려한 가면 앞으로 깃털 부채를 펴는 그녀는 수아였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황자님.”
은둔의 아카시스께서 또 이런 큰 연회에 나오시다니. 확실히 그녀가 달라지긴 했나 보다.
“요새 자주 뵙습니다.”
이반은 자연스레 수아에게 손을 내밀었고, 수아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손을 잡았다. 새로운 춤을 시작하는 잔잔한 선율의 음악이 흐르자 두 사람은 능숙하게 스탭을 밟았다.
한 명은 한량인 황자이고, 다른 한 명은 외톨이 영애였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황족과 귀족이 아닌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몸에 배도록 배웠던 이깟 사교계 댄스 정도는 몇 년을 추지 않았어도 자동적으로 나오는 법이다. 지금 이반과 수아가 딱 그러하였다.
“오랜만이군요. 어렸을 때 종종 파트너 했던 거 같은데.”
“그 시절 이야기를 하기엔 너무 많이 변했군요. 황자님도, 저도.”
수아는 담담히 말했고,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의 등쌀을 이기지 못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에단의 파트너가 별로 되고 싶었지 않았던 수아는 이러한 사교 파티 때 항상 이반의 손을 잡았다.
파트너가 누가 되든 상관없었던 이반 역시 그에게 전혀 관심 없이, 그저 조용히 춤만 추는 수아가 편해, 그녀를 종종 이용했다.
쉽게 말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 셈이다. 여러모로.
“어떤 의미로는 안 변한 것일 수도 있지요.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이용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수아가 이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도 참 묘한 인연이구나 싶었다.
자연스레 턴을 하며, 일말의 감정도 없는 눈으로 두 사람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수아 님은 오늘 일,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몰브가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과 그 일에 토르티아가 동조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다 알고 계시군요.”
“그래서 저는 제 능력껏, 로엘 님을 돕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황자님과 이리 춤을 추면서도요.”
수아의 또렷한 눈동자가 이반을 향했다. 이반은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몰리는 것을 느끼며 수아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황금빛 머리의 이반과 춤이라니. 주목받는 걸 싫어하는 수아답지 않은 행동이다. 자연히 시선이 몰리고, 주의가 집중되었다.
마치 에단과 로엘이 춤을 추었던 그때처럼.
수아는 이걸 노린 거다.
“……정말 그분을 아끼는군요.”
“네.”
로엘을 보는 시선을 돌리고, 혹여나 그 시선을 다른 이가 눈치챌까 일부러 자신에게 주목시킴 셈이다.
“그러니 황자님. 황자님도 이제 그만 마음을 주세요.”
거르지 않은 수아의 직설에 이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단호한 수아의 눈은 차가운 듯했지만 그 이면엔 그를 짠하게 여기는 안쓰러움이 보였다.
그래. 동정이 있었다.
“그만 욕심내시고, 그만 바라보세요. 아무리 그래 보았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잔인하기도 하여라.
여전히 음악은 흐르고, 춤은 계속되었지만 더 이상 이반에겐 음악 소리도, 춤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쩜 모두가 다 이리 일관되는 건지. 야속하기도 하다.
“그게 잘 안 된다는 거, 수아 님은 아시잖아요.”
잠시 수아의 눈이 커졌다. 이반은 대충 얼버무리려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수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이미 이반은 아주 오래전부터 리암과 그녀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랬다면 진작, 정말 진작에 그만두었겠지.
그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오래전에. 그녀를 그리워하던 그 외로운 시간들에.
그리고 이 카이로스 황궁에서 형수로 만났던 그 거지 같은 시간에.
가능했더라면 이미 예전에 그의 마음에서 그녀를 놓았을 거다.
“수아 님은 그게 되던가요.”
음악과 함께 춤이 서서히 끝나 갔다. 모두가 그러하듯 이반과 수아 역시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이반은 고개를 숙이고, 수아는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려 허리를 숙였다.
“……아니요.”
이반을 비난하고 나무랐지만 생각해 보면 수아가 할 말들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엔 사람의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그 마음 때문에 참 많이 아프다는 것.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지금도 그녀를 뒤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리암을 보며, 그 와중에도 그녀와 눈이 맞으면 웃어 주는 저 바보 같은 남자를 보며, 이렇게 그를 힘들게 하는데도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는 자신을 보며 수아는 생각했다.
이반이 참 자신과 닮았다고.
그래서 불쌍하다고.
“저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황자님.”
마지막 인사와 함께,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곡이 끝나 다음 팀을 위해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반은 끝까지 수아를 에스코트했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
“수아 님.”
“로엘 님.”
수아와 이반의 춤이 막 끝날 쯤, 로엘 역시 에단과 함께 테라스에서 나왔다.
바로 수아에게로 걸어가는 로엘을 보며 에단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옆에서 이반이 있는 곳으로 가다니.
복잡한 거 같으면서도 참 단순한 사람이다. 투명한 사람이고.
“찾고 있었답니다.”
“죄송합니다, 중요한 날에.”
그녀는 슬쩍 에단을 흘기며 수아의 손을 잡았다.
“오늘 일, 혹여 수아 님께 해가 갈까 봐 염려됩니다. 마음은 감사하나, 부디 수아 님은 한걸음 물러나 있어 주세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아주 서운하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만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아의 손을 마주 잡은 로엘의 손에 힘이 좀 더 들어갔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수아는 이미 많은 것을 해 주었다. 시에라와 키로스를 메이드로 꾸밀 수 있도록 헤더와 함께 도움을 주었고, 그들이 무사히 잠입할 수 있도록 켈트가가 힘을 썼다.
“그래도 다치시는 건 안 되니까, 위험하면 바로 제 뒤로 피하셔야 해요.”
“그건 로엘 님도 마찬가지예요. 절대 위험한 일은 하시면 안 됩니다.”
두 손을 꼭 잡으며 서로를 걱정하는 모습이 돈독하기도 하여라.
참 유별나기도 한 두 사람을 지켜보며 에단은 한숨을 쉬었다. 세상 어떤 황제의 비들이 이리 서로를 위할까.
솔직히 그녀가 수아와 친해지든 말든 에단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다.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다.
만일 수아가 로엘을 해하려 든다면 그때야 말이 달라지겠지만, 그런다고 당할 그녀도 아니거니와 조금이라도 그런 낌새가 있었다면 그녀가 이리 마음을 내어 주지도 않았을 거다.
“켈트가의 사람들도 몰브가를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그들 곁에 붙어 있으라 했으니, 로엘 님께서 움직이시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아리스 몰브는, 제가 확실히 잡아 둘게요.”
“수아 님. 엄청나게 믿음직스러운데요.”
“과찬이십니다.”
평생 최고 귀족 가문인 켈트 공작가에서 나고 자란, 콧대 높고 고고한 수아의 마음을 잘도 샀다. 여전히 수아는 에단과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지만, 분명 수아는 로엘로 인하여 많이 변하였다. 뭐랄까. 어렸을 적 자존심 세던, 절대 아리스에게 물러나지 않았던 그때의 수아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누가 보면 친자매인 줄 알겠네.”
“내 말이.”
정확히 에단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던 이반의 혼잣말에 평소처럼 에단은 답을 했다. 그런 에단을 이반은 빤히 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 파란이 일어났는데도 그의 형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듯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짜증나.”
그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 속이 어떤지, 그는 알 수 없었으니까.
“……폐하.”
“정리 안 된 거 너도 알고 나도 알아. 그래도 그건 니블 건이 끝난 후에. 죽여도 그때 죽일 테니, 지금은 언급하지 마.”
에단은 단호했다. 다른 말을 잇지 못할 만큼. 차갑고 냉랭한 그 태도에 이반은 도리어 안도가 되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그는 감사했다.
“……고마워.”
“그 말도 하지 마.”
에단은 얼굴을 찌푸렸다. 가면을 쓰고 있어도 그 표정을 너무 눈에 훤해 이반은 피식 웃었다.
풀지 못한 감정이 있다는 것, 알고 있다. 어쩌면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함에도 이반은 절대 자신의 형제가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수많은 시련 속에서 위대한 그의 형제는 늘 그러하였으니.
‘그렇게 너는 나를 지켰구나.’
진짜 지켜 준 게 누군데. 그런 말을 해 버리면 무슨 대답을 하라고.
“로엘을 지켜. 나를 지키듯.”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여전히 이리 믿어 주는데, 무슨 말을 더 이상 할까.
“수아 켈트.”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부름에 로엘과 함께 있던 수아는 화들짝 놀랐다.
더 놀라는 건 그가 수아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
“네 역할을 해.”
“……황제 폐하를 받듭니다.”
에단이 무얼 의미하는지 수아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내밀어진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 모습에 아주 살짝 로엘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정확히 에단에게 들키고야 말았다. 수아와 함께 지나쳐 가는 순간, 로엘을 보며 살짝 짓는 그 미소가 아주아주 얄미웠다. 일부러 저런 거다. 이반과의 일에 대한 아주 치졸한 복수.
“잘 어울리네.”
“몰브한테 가려는 거야. 일부러 켈트를 데리고.”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둘이만 있으면 나오는 이놈의 반말은 도무지 고쳐지지가 않았다. 로엘은 에단에게 들킨 이 와중에도 아무렇지 않게 이반을 대하는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워 살짝 짜증을 내 버렸다.
그 속을 모를 리 없는 이반은 그저 살며시 로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역할을 해 볼까? 아카시스님.”
“……네. 황자님.”
에단과 수아가 어울리듯, 이반과 로엘 역시 함께 있으니 어울렸다. 솔직히 에단의 측근들이야 로엘과 이반이 함께함이 낯설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꽤나 신선한 조합이다.
에단 황제가 제일 아끼는 형제와 현재 가장 총애를 받는 아카시스라.
실세와 실세의 만남이다.
“주목받네. 네아.”
“그건 너 때문이잖아.”
“과연 그럴까.”
아무리 봐도 아닌데.
이반은 쓱 자신의 팔에 손을 얹고, 정면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았다.
이런 말하기 조금 민망하지만, 정말 가면 따위에 가려질 미모가 아니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백옥 같은 하얀 피부. 아름다운 어깨 라인에 깊게 팬 쇄골. 남자의 눈에 가장 이상적인 풍만한 가슴과 가는 허리까지. 꽃이 피듯, 원래 예뻤던 그녀는 더더욱 예뻐졌다
그래서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다.
“사랑받는구나, 네아.”
“응. 사랑받고 있어, 이반.”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 즉답에 이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튼 잔인한 여자다.
“이반. 저기.”
더 큰 문제는, 그렇게 그의 마음을 후벼 파 놓고도 이리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당긴다는 것.
로엘은 대뜸 이반의 팔을 잡아당겨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보는 눈 많은 곳에서.
“나. 봐 버린 거 같아.”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니블로 가득 차, 갑자기 다가온 그녀의 향기와 따듯한 숨결에 이반의 가슴이 쿵 떨어진 것 같은 심정 따윈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반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맞는 거 같네.”
그 와중에 주어진 일까지 너무 잘한다.
로엘의 시선이 가리킨 곳을 보자 이반의 눈동자 역시 진지해졌다.
똑같은 검은 드레스에 똑같은 헤어스타일. 똑같은 가면. 심지어 비슷한 체형들까지.
얼핏 보면 절대 알아차릴 수 없다.
“바뀌고 있어. 몰브와 토르티아의 시녀들이.”
그렇다면 그녀들은 어떻게 서로를 알아볼까. 그들 역시 처음 보는 사람들일 텐데.
에리카와 아리스의 전담 시녀들뿐 아니라 켈트가와 토르티아 사신단들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까지 포함하면 못해도 각자 서른은 된다.
음식을 나르는 시녀들 사이에서 그들은 자신의 주인들이 손짓을 하면 빈 칵테일 잔을 바꿔 주고 필요한 것을 갖다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사람들이 어찌 그들뿐이랴. 이곳에는 그런 전담 시녀들이 충분히 배치되었고 그들의 드레스는 동일하다.
“너무 어렵게 생각했네, 우리가.”
“그러게.”
그녀는 작은 실소를 뱉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애초에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냥 단순하게 에리카를 모시는 이들이 아리스에게 가고 아리스의 시녀들이 에리카에게로 가면 그만. 사람이 바뀌면, 그들이 입은 옷도 자연히 바뀔 테니.
“방금 에리카에게 새로운 카나페를 건넨 저 시녀. 카이로스의 사람이야. 토르티아는 칵테일과 카나페를 권할 때 카나페를 먼저 건네는 게 예의야.”
“정확히 우리와 반대군.”
사소한 습관이 이리 무섭다. 카이로스의 사람이 에리카를 시중을 든다는 것은 에리카의 본래 시녀 한 사람은 지금 아리스의 곁에 있다는 것.
“저기네.”
이반의 가리킴에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로 최대한 가린다고 한들, 훈련된 탄탄한 체형은 드러나는 법이다. 가녀린 듯하나, 잘 발달된 어깨 근육는 단번에 토르티아의 무장 시녀임을 나타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뭘 어떻게야. 덮쳐야지.”
준비된 신호대로 그녀가 들고 있던 부채를 활짝 피더니 정확히 세 번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바로 근처에 대기 중이던 시에라와 키로스가 다가왔다.
“마마.”
“시에라도 눈치챘을 거 같은데.”
“네.”
로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더라면 그녀의 시선이 어느 시녀를 향하는지 알았을 테고, 그 시녀를 본다면 시에라 역시 눈치 못 챘을 리 없다. 누구보다도 눈썰미 하나는 확실한 게 시에라니.
“키로스들. 알아차릴 수 있겠어?”
“할 수 있습니다.”
“그래. 한 번에 체포하는 거. 가능하겠지.”
“맡겨 주십시오.”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심중을 알아챈 시에라는 다시금 자신의 자리로 갔고, 키로스들은 빠르게 명령을 공유했다. 일사불란한 그 체계에 이반은 속으로 제법 놀랐다.
키로스들이 움직이는 것을 처음 보는 거였는데, 루카스의 말대로 확실히 아까운 인재들이다. 그저 후궁에만 있기엔.
“감사하게도 다 모여 있네.”
“그러게.”
로엘은 피식 웃었다. 에단의 말대로 수아는 자신의 역할을 아주 잘하고 있었다.
황제의 눈 밖에 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던 켈트가의 아카시스. 그 수아가 당당히 에단의 옆에 있으니 자연히 몰브가들이 화들짝 놀라 모여들었다. 제일 먼저 아리스가 달려왔고, 그녀와 함께 있던 케인과 에리카 역시 자연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황제 에단에, 켈트가와 몰브. 그리고 이곳의 주인공인 토르티아의 황녀까지.
비밀을 밝히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타이밍이다.
“내가 해?”
“아니, 내가 해.”
로엘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큼성큼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이반은 잘도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곱게 끝나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럴 거 같다.
그것도 하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손에 의해, 제대로 판이 벌어져서 말이다.
그렇게 모두를 괴롭히던 니블의 끝이 드디어 보이는 것 같았다.
모두가 정말 그러는 줄 알았다.
애석하게도 세상은 그리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알면서도 간과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