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 숨겨진 사실, 들켜버린 마음
로엘은 숨을 삼켰다.
주변의 공기마저 얼려 버릴 거 같은, 서늘한 살기.
누구든 그의 손에 죽어 나가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에단은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카이로스의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검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그의 황금 머리칼 역시 반짝거렸다.
말로만 듣던, 죽음을 가져오는 황금의 사신.
로엘은 그 소문이 무성한, 그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진심으로 공포가 몰려왔다.
“……에……!”
이반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의 검이 정확히 이반의 급소를 노렸다. 그 순식간의 움직임을 이반은 거의 본능적으로 막았다.
“잠깐, 이거 너무 위험……!”
“마마가 개입하시면, 진짜 위험해져요.”
이반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로엘이 저도 모르게 말리려는데 그런 그녀를 루카스가 말렸다. 평소의 장난기가 빠진 냉랭한 얼굴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일을 이렇게 만든 그녀에 대한 무언의 원망이 있는 거 같아 로엘은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정말, 그녀는 여럿에게 들키고 여럿을 곤란하게 만들었나 보다.
정작 당사자인 이반마저도.
“폐하는 절대 이반 전하를 죽이지 못해요. 그러기엔 이반 님을 너무 사랑하시니까. 대신 못 걷게 하실 수 있지요. 한쪽 팔을 자른다거나.”
루카스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지극히, 너무도 진심이었다.
그래서 로엘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반이 밀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아는 이반은, 아버지를 제외하고 그녀가 만난 모든 이들 중 가장 강한 사람.
그런 이반이 명백히 밀리고 있었다.
“진심으로 해. 아니면 진짜 죽어.”
“그런 것쯤은, 나도 알아……!”
겨우겨우 에단의 검을 막던 이반이, 처음으로 맞 공격을 했다. 파고드는 그의 검을 쳐내고 곧바로 기습하는 이반을 그 또한 반사적으로 막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이반의 검이 그의 옆구리를 관통했을 테지.
순식간에 지나간 그 찰나의 위험한 순간에 루카스도, 로엘도 움찔해 버렸다. 그만큼 두 사람이 심각하게 진심이었다.
“그래. 이래야 재밌지.”
에단은 그 날카로운 공격에 미소가 더 진해졌다. 정말 환히 웃는, 그 모습에 로엘은 순간 척추를 타고 내려오는 소름을 느꼈다. 아니 공포가 더 맞을까.
그 정도로 그는 진심으로 이 상황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 결투를 즐기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만나 죽음을 사냥하는 사신처럼.
“……이반은 아주 강해요.”
“그거 모르는 카이로스 사람은 없어요.”
“정말, 정말, 강하다고요. 루카스가 알고 있는 그 이상으로.”
진심으로 웃는 에단에게 이반 역시 작은 미소를 지었다. 로엘은 저 미소를 안다.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났을 때 느끼는 희열. 기쁨. 그녀의 아버지, 제이드와 검을 맞댈 때마다 이반이 지었던 바로 그 미소다.
“지금부터 이반이, 진짜 이반이에요.”
루카스가 슬쩍 그녀를 돌아보기 무섭게, 또다시 강한 마찰음이 울렸다. 선공은 이반.
지금까지 방어적이던 이반과는 확연히 다른, 훨씬 더 공격이고 훨씬 더 날카로운 그가 에단을 몰아붙였다. 빛나는 여명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검 시위가 더욱 화려해졌다. 눈이 부시는 태양 빛을 받으며 쉼 없이 움직이는 그 모습을 로엘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참 아름다웠다.
혹여나 누가 다칠까 미친 듯이 심장이 뛰는 이 와중에도, 속절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누구도 밀리지 않는 이 팽팽한 접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그로인해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가히 멋지고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물론, 이러한 감상에 오래 빠져 있기엔 두 사람의 칼날이 지나치게 매서웠지만.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인 거 같은데요. 마마.”
“네?”
“전 단 한 순간도 폐하를 이겨 본 적이 없어요.”
로엘만큼이나 두 사람을 넋 놓고 바라보는 루카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분 자체가 그 누구에게 져 본 적이 없다고요. 저, 이반 황자님을 포함해서.”
애초에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난 사람.
그냥 태어나 보니 모든 재능을 지닌, 그런 말도 안 되는 분.
“마마께서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폐하는 강합니다.”
루카스의 말에 뭐라 답하기도 전에 또다시 강한 쇠붙이 소리가 울렸다.
“늘었네. 형제.”
“북에서 놀고 먹기만 한 건 아니니까.”
“그 와중에 나의 아카시스를 만났군.”
챙! 바로 나오는 강한 반응. 이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나의 네아를 만났지.”
또다시 챙! 이번엔 에단의 검이 좀 더 무겁게 부딪혔다.
지극히 일부러 의도한 도발이다. 이반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자신과 참 많이도 닮은 에단의 황금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저 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리 흔들림이 없구나 하고.
“그리고 너는 잃었구나.”
이 목숨을 건, 현란한 검 시위 속에서도. 이 어이없는 지독한 인연의 굴레를 알게 되었을 때도.
이리 자신과 진심으로 검을 겨누는 이 순간에도.
무언들, 이 남자를 흔들 수 있을까.
“너는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그렇게 지키지 못하였구나.”
이리 그의 말 한마디에 바로 흔들리는 자신과는 참 다른 사람인 걸 이반은 또다시 깨달았다.
에단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검을 달리 잡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달려든 이반은 에단의 검을 강하게 내려쳤고, 그 순간 에단의 손에서 검이 잠깐 떠올랐다.
“그렇게 나를 지켰구나.”
그대로 에단의 검이 순식간에 이반의 검을 튕겨 냈다.
“에단!!”
바로 이반의 목을 내려칠 것 같은 에단의 검이 로엘의 다급한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멈췄다. 이반의 목 바로 옆에 검을 겨누며 에단은 여전히 이반만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너는 너보다 나를 지켰구나. 형제여.”
에단의 검 밑에서, 언제나처럼 표정 하나 없는 그를 올려다보며 이반은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어째서 이리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가.
“이번에도 나는 너의 것을 빼앗았구나.”
어째서 이리도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마는 걸까.
이반은 에단의 씁쓸한 미소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검을 거두는 자신의 형제를, 차마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다.
잠시라도 다른 마음을 품었던,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하였던,
그리고 잠시라도 그를 원망했던 자기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 모든 것을 알고도 마치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형제에게 너무도 미안해서.
***
“……폐하.”
“입 닫아.”
로엘은 그대로 에단을 따라 에단의 방으로 들어갔다. 누구라도 죽어 나갈 듯한, 그 살기등등한 매서운 분위기에 자연히 시녀들은 신속하게 궁을 비웠다.
마지막 시녀가 나가며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 황궁 가장 깊숙한 곳, 황제의 침소가 있는 본궁에 오로지 에단과 로엘만이 남았다.
로엘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전부 그녀의 탓.
처음부터 그에게 이반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그녀의 탓이다.
“폐하. 저는……!”
고개를 떨구던 그녀의 시선이 단번에 위로 올라갔다. 거칠게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린, 이제야 마주친 그의 황금빛 눈은 분노로 일렁였다.
로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절대 울면 안 된다. 내가 잘못해 놓고 우는 그런 볼썽사나운 짓 절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똑바로,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감히, 나를 속여.”
“속인 적 없어요.”
“로엘……!”
“에단. 나는 당신을 속인 적 없어요.”
화가 날 정도로 똑똑한 여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뻔히 알면서. 그녀쯤은 이 방에서 목을 꺾어 죽일 수 있는 그런 사람임을 뻔히 알면서도 조금도 물러나는 법이 없다.
여기서 울고불고해 봤자 역효과라는 것을, 과장된 변명과 억울하다는 애원이 더 독임을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이리도 정면으로 승부를 해 오는 거겠지.
이건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증거.
이 흔들림 없는 붉은 눈이 그를 미치게 하는 거다.
혹여라도, 아주 잠시라도 이 눈이 이반을 향하였을까 봐.
“으읍!”
그녀의 턱을 움켜진 손이 강압적으로 그녀의 입을 열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의 혀에 그녀는 숨이 다 턱 막힐 지경이었다. 다정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거친 키스는 그녀를 먹어 치울 듯 매섭게 달려들었다.
로엘은 그런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를 달래듯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하아, 에단……. 윽!”
이 표정.
남자를 갈구하게 만드는 이 얼굴.
그만 아는 얼굴이다. 그만 알아야 하는 얼굴이다.
“자, 잠깐. 에단. 잠……. 악!!”
그는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그녀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던 그녀는 갑작스럽고도 우악스러운 그 침범에 바로 비명을 내질렀다. 몸이 둘로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허리가 꺾이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아무리 그를 받아 주겠다고 마음먹었어도 본능적으로 그를 밀고 손톱을 세웠다.
“아윽!”
그럴수록 그는 더 거칠게 그녀를 밀어붙였다. 일부러 활동하기 편하려고 입은 얇은 원피스는 그의 손길에 반쯤 끌려 내려갔고, 멋대로 들쳐진 치마와 제대로 벗겨지지도 못한 속옷이 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훤히 드러난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움켜쥐며, 그는 그녀의 뽀얀 상체에 아프게 붉은 흔적을 새겨 갔다.
손길 하나하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이제껏 그와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조금의 배려도 없는 일방적인 사랑 행위였다. 그녀의 눈가에서 저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안해요. 먼저 말하지 않아서.”
“입 다물어.”
“미안해. 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요.”
그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이 다시금 그녀의 입을 입으로 막았다. 여전히 성난 그가 그녀의 안을 멋대로 휘저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흔들리는 장식장을 잡고 버텼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거친 움직임 속에서 그의 불안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는 지금 상처받은 거다.
“아. 아. 응!”
그녀가 그에게 비밀을 만들어서.
“아읏. 에단. 에단……!”
그는 그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는데, 그녀가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 비밀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형제에 관한 일이라서.
그 형제가 자신보다도 먼저 그녀를 알아 버려서.
“아아. 아아아!”
그 모든 분노와 서운함을 쏟아 내듯 그의 뜨거움이 그녀에게로 몰려왔다. 얼마나 길고도 끈질기게 그녀를 몰아붙였는지, 그가 들어왔다 나간 곳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허벅지에 흘러나오는 끈적한 액체를 느끼며 겨우겨우 그의 목을 안았다.
상처받은 그의 눈이 그녀를 계속 울렸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 얘기하려고 했어요. 당신에게, 당신의 형제를 내가 안다고. 그 형제가 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했다고.”
그녀가 서 있을 힘조차 없는 것을 잘 안다. 그만큼, 그는 멋대로 그녀를 안아 버리고 말았다. 밀려오는 후회감이 마음을 쑤셨지만, 그러함에도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그녀가 야속했다.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보다도, 그보다 먼저 이반을 만났다는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어째서 이제야 내 곁으로 온 걸까.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품에 왔으면 좋으련만.
“에단. 잘못했어요. 이반과 나는…….”
“이름. 부르지 마.”
그는 힘들어하는 그녀의 허리를 결국엔 잡아 주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그녀를 들어 제대로 침대에 눕혔다.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어 정돈한 후 위아래로 끌어올려지고 내려져 엉망인 원피스를 제대로 벗겨 그가 잘 아는 나신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그녀의 가는 발목을 잡고, 당겨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다른 남자 이름. 부르지 마.”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다는 듯이 안아 주는, 그녀가 아는 에단.
“응. 그럴게요.”
그녀는 순순히 다리를 열어, 그런 그를 다시 품었다.
방금 전의 거친 관계로 아직 통증이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를 위로해 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에단. 나의 폐하. 나의 처음과 나의 마지막이 당신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요.”
당연한 소릴.
방금 전 그녀를 안았음에도 금세 다시 단단해진 그가 단번에 그녀의 안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가득 참에 로엘은 시트를 꼭 쥐고 최대한 그를 놔주지 않았다.
일방적이기만 했던 방금 전에도 마지막엔 아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는 걸 숨길 필요도 없거니와 숨길 마음도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녀 역시 그를 원한다고 그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렇게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하아. 로엘.”
“에단.”
노력하는 그녀의 농밀한 허리 움직임에 맞추어 그도 뜨거운 한숨을 뱉었다.
하얀 등선을 타고 올라가는 척추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그는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아래서부터 움켜쥐었다. 이미 진작에 솟은 정점을 살살 지분거리며, 그는 허리 움직임을 계속했다.
“아아. 아. 하아.”
규칙적인 움직임에 맞추어 그녀가 짙은 신음을 내뱉고, 그마저도 그는 전부 다 삼켜 버렸다.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에 집요할 만큼 흔적을 남기는 그는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물건을 계속 확인받듯이,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에게 확인받고 있는 거다.
그답지 않은 초조함. 불안함. 간절함. 그 모든 것들이 전해져 와 그녀는 그저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아무 데도 갈 생각이 없는데. 그녀는 이제 갈 수가 없는데 그는 무얼 이리 확인받고 싶은 걸까.
“로엘.”
“하아. 네. 에단.”
“로엘.”
“네.”
그녀는 쉼 없이 자신을 부르는 그에게 빠짐없이 답했다.
나는 여기 있노라고. 당신의 곁에, 한결같이 있을 거라고.
서로의 마음이 넘쳐흘러 뜨거운 두 사람의 시간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 둘만의 시간이 그렇게 한동안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받으며.
***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네.”
여전히 일어나지 않고 있던 이반에게 루카스가 다가가 손을 내밀자, 이반은 쓴 미소와 함께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자신의 검을 가볍게 돌려 검집에 넣으며 그는 대충 옷에 묻은 잔디를 털어 냈다.
“묻지 않아 주면 고맙겠는데.”
“네.”
“잊어 주면 더 고맙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자님.”
루카스는 바로 답했다. 형식적인 미소 없이 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루카스의 입술을 보며, 이반은 새삼 느꼈다. 저와 그녀의 인연은 정말로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그런 심각한 관계구나 하고.
처음 이 사실을 눈치챈 콜린이 정색을 하며 이반에게 안 된다고 할 때, 이반은 순간 울컥했었다.
카이로스의 오기 전의 일이라고. 에단을 만나기도 전의 그런 인연이라고.
그게 무어 대수냐고 따져 물으려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벼운 만남이라 치부하는 건 스스로가 싫었으니까.
“대신. 저 좀 상대해 주세요, 황자님.”
루카스는 덤덤히 자신의 검을 뽑아 이반을 향해 곧게 뻗으며 말했다.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는, 그 흔들림 없는 루카스의 모습을 이반은 잠시 말없이 보았다.
지금 저 눈을 보아하건대 쉽게 물러날 거 같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이반 역시 다시 제대로 검을 들었다.
“진심으로, 제대로 해 주셔야 해요. 아니면 제가 황자님을 죽여 버릴지 몰라요.”
이반을 응시하는 그 검은 눈은 진지했으면 그 말 역시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반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러지 않아도 방금 에단과 한바탕 하느라 진이란 진은 다 뺐는데 다음 상대가 루카스 세버라니.
자타공인 현 카이로스 최강자이다.
“하앗!”
물론 에단과 이반을 제외하고.
“하!”
진심인 루카스는 이반 역시 진심이어야만 상대할 수 있다.
그가 괜히 지옥의 개라 불리고, 사신의 검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헤에. 진짜 더 강해졌네요. 황자님.”
“그건 내가 할 소리인 거 같은데.”
정확하고 빠르게, 날카롭고 매섭게 루카스는 이반을 공격하여 들어왔다. 묵직한 그의 검을 받아치며 이반은 루카스가 자신이 없는 사이에 정말 많이 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북을 떠돌아다니고, 에단의 부름에 북을 지키고 있을 때 루카스는 묵묵히 에단의 곁을 지켰다.
‘루카스는 진짜 타고났네. 세버가의 후계자다워.’
‘타고나기로는 너만 할까. 루카스는 아직 멀었어.’
‘말은 그렇게 해도 무지 아끼잖아. 그래서 곁에 두는 거고. 훨씬 더 강해질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야지. 루카스는 내 검이야. 절대 부러지지 않는 나의 검.’
어린 날, 루카스를 보며 망설임 없이 그 말을 하던 에단이 생각났다.
루카스는 마치 주인을 쫓는 강아지처럼 에단을 쫓아다녔고, 에단 역시 시끄러운 루카스에게 면박을 주면서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진짜 주인과 강아지처럼.
그 아끼던 강아지는 늠름한 수호견이 되었고, 그는 항상 그를 곁에 둔다.
‘하하. 나는 폐하의 개잖아. 누구든 물라면 물어야 하니까 강해질 거야. 그 누구도 물어뜯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나의 주인을 지킬 수 있을 만큼!!’
루카스는 항상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쳐 보이지만, 그의 검은 절대 그렇지 않다.
평소 실없이 행동하는 것과는 달리 그 검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상당히 계산적이다.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가장 확실하게 가장 치명적인 급소만을 노린다. 그래서 그의 검은 자비가 없다. 그렇게 그 한 번의 휘두름에 참 많은 생명들이 죽어 갔다.
“이거 진짜 죽을 수도 있겠는데.”
“응, 그러니까 제대로 해요. 더 이상 이반 님이 봐주면서 할 정도가 아니야. 나는.”
그건 애저녁부터 그랬다고 말하려다 훅 들어오는 루카스의 공격에 말하지 못했다.
에단과 검을 맞대면서, 그리고 루카스와 이렇게 검을 맞대면서 이반은 생각했다.
자신만 나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구나 하고.
다른 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구나. 그 누구 하나 안주하지 않았구나.
나만 달라졌다고, 나만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큰 오만이었구나.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반 역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이반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쥐었다.
탕!
또 한 번 강한 마찰음이 울리고, 그 반동에 두 사람의 거리가 잠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한쪽 발에 체중을 실어 반격해 오는 루카스를 이반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쯤 몸을 기울여 그대로 루카스의 뒤를 노렸다.
“하! 이래야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아니 짐승 수준의 반사 신경을 가진 루카스는 그마저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리고 동시에 반사적으로 이반에게 검을 뻗어 기습했지만 이반은 도리어 씩 웃었다.
이 본능적인 반응을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 허를 찔리는 공격이 실패할 리 없다.
“이긴 거 같네.”
“역시 황자님이시네요.”
이번엔 이반이 루카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루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황자님도 그렇고, 폐하도 그렇고 너무 사기예요.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기가 죽는다고요.”
“와. 그건 진짜 네가 할 소리는 아니다.”
이반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진짜 천재적인 재능과 타고난 신체를 가진 게 누구인데. 선천성을 가지고 루카스는 절대 투덜거려서는 안 된다. 그도 충분히, 정말 충분히 축복받은 영재니까.
다만 이반은 그런 루카스에 비해 좀 더 판단력과 분석력이 좋을 뿐. 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스승을 만나 그의 능력치, 그 이상을 끌어냈을 뿐이다.
만일 루카스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아니 조금만 더 ‘머리’로 검을 썼다면 이반조차도 이기지 못했을지 모른다.
“……진짜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그런 루카스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성장.
한때 에단과 이반에게 전혀 미치지 못했던 그가 이제는 제법 그들과 비슷한 경지에 올라와 있었다. 가히 폭발적인 성장이라 볼 수 있다. 얼마나 노력했는지, 이반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노력하는 천재라니. 감히 누가 이길까.
“얼마 안 남은 거 같은데. 카이로스의 대장군께서 진정한 의미의 최강자가 되는 건.”
“꼭 그럴 거예요. 폐하보다 강해져야 폐하를 지키죠. 이러다가 잘리겠어요.”
루카스는 진심으로 투덜대며 말했다 .
“하하.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 말고 다른 대체재가 없거든. 아무도 너만 하지 못하니까. 게다가 네 주군께서는 너를 너무 좋아해.”
“하긴. 그건 그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로 수긍하는 루카스에게 이반은 웃고 말았다.
에단의 말이 맞다. 말 그대로 루카스는 그냥 루카스다.
너무도 순수하고, 너무도 투명한, 그래서 강한, 그래서 믿을 수 있는 그런 충견.
그가 가장 신뢰하는 그의 오른팔이다.
“이반 님. 저는 이반 님이 강해서 좋아요.”
루카스는 이반을 직시하며 말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숨은 아직 살짝 헐떡였지만, 이반을 마주하는 그 시선은 차분하고 단호했다.
아무래도 루카스의 방식대로 정면 승부를 하려나 보다.
지금까지 눈감아 주고, 모른 척했던 거. 이제 그만 하려나 보다.
“에단 님은 태양 같으신 분. 처음부터 저와는 너무도 다른 분이라, 감히 올려다보기도 황송스러운 그런 분이라, 에단 님을 보며 닮고 싶다거나 넘어서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마음은 가져 본 적이 없어요. 그저 우러러보는, 그저 올려다봐야 하는 나의 주군. 그런데 이반 님은 달라요.”
루카스의 흔들림 없는 눈이 이반을 향했다. 루카스가 이런 말을 이반에게 했던 적이 있었나.
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감정을 속이지 않는 루카스일지라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반에게 마음을 말한 적은 없었다. 조금은 부끄럽고, 조금은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새벽. 또다시 이반에게 패배하며 루카스는 충동적으로 말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감정을.
깨트리고 싶지 않은, 그들 모두의 관계를.
“이반 님을 아주 많이 동경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저는 이반 님의 등을 보고 쫓아가고 있어요. 당신과 나란히 서기 위해서. 당신처럼 강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폐하의 곁을 지켜 드리고 싶어서. 그래서 나의 우상은 이반 님. 당신이에요.”
이반은 말문이 막혔다. 너무도 루카스의 진심이 전해져 왔다.
이건 사랑 고백에 가까운 절절한 고백이다.
“그러니 이반 님. 제 손으로 이반 님을 죽이게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데 이 역시 결국엔 ‘로엘’.
“저는 폐하께서 죽이라 명하시면 죽여야 합니다. 거부할 권리도,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그게 제 일이고, 제 존재이유니까요. 그러니 이반 님. 나의 주군께서 그런 명령 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이반은 안다. 그가 계속 로엘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됨으로써 제가 당신을 베지 않게 해 주세요.”
루카스가 걱정하는 바로 그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형제, 에단. 그가 황제가 된 날, 모든 이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장성한 황자는 황위를 위협한다고. 그러니 모든 역대 황제가 그러했듯 죽이라고.
‘내 형제를 모함하는 자. 곧 반역이다.’
그런 그들을 그는 단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는 이반에 대해선 단 한 순간을 망설이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런 형제다. 그런 은인이고, 그런 주군이다.
그러니 그가 끝까지 로엘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에단으로 하여금 이반이 죽게 된다면 그 죽음에 누가 가장 슬퍼할까. 보나마나 에단일 거다.
“황자님. 주군의 형제로 돌아와 주세요.”
그 사실을 이반은 너무도 잘 안다.
“저의 우상으로, 저의 친구로 돌아와 주세요.”
사라 때처럼 이번에도 이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제부터 다들 그에게 왜 이러는 걸까. 왜 그렇게 이토록 아픈 사실을, 다 알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켜 주는 걸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을.
그래서 잠시만 허락해 달라는 건데.
“……잠시면 되는데.”
조금만 더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 아주 작은 욕심을 냈을 뿐인데, 아무래도 이반에겐 그마저도 욕심이었나 보다.
“정말 조금이면 되는데.”
그마저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치였나 보다.
***
“아무리 금슬이 좋으시다지만, 이렇게 중요한 날은 좀 참으세요, 마마.”
“진짜 겨우겨우 시간 맞춰서 다행이니 어쩔 뻔했냐고요.”
“하하. 미안해.”
로엘은 어색하게 웃었다.
에단은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로엘을 안았다. 그녀가 그의 체력을 이기지 못해 쓰러져 잠들고 나서야 그는 멈췄고,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그가 나간 후였다.
곱게 그녀를 눕혀 이불까지 꼭 덮어 준 그는 나가기 전 딜리아를 불러 그녀의 옷가지를 챙기기까지 했다.
아무튼 이상한 데서 세심하기는.
로엘은 그 대낮에 나신인 채로 에단의 방에서 시녀를 맞은 것도, 그 상황 속에서도 그녀를 배려해 준 그의 유별남도 전부 다 부끄러웠다.
“하루 종일 치장해도 부족한 판에, 어휴. 저희가 못 산다고요.”
“알았어, 알았어. 이제 그만해. 진짜 부끄럽단 말이야.”
“좀 부끄러우시라고 하시는 소리예요. 다른 마마님들이 들으시면 엄청나게 질투하실 일이지만.”
로엘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와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눈 것은 맞지만, 그래서 아직도 허리가 아프고 아래가 얼얼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한 것도, 또 용서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만큼 그녀를 안고 난 후에 제대로 대화를 하려 했다. 그런데 눈 떠 보니 이미 대낮이 지나 버렸고, 그는 이미 나가 버렸다.
그래서 로엘도 미처 그와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오후에는 너무도 중요한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바로, 그토록 그 모두를 괴롭히던 그 니블을 결착 짓는 날.
“그래도 할 건 다 했잖아. 좀 과할 정도로.”
“마마. 다른 분들을 보고도 과하단 말씀이 나오세요? 저기 사람들을 좀 보시라고요.”
헤더의 한숨 섞인 말에 로엘은 입을 다물었다. 헤더의 말이 맞았다. 정말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사람들의 향연이었다. 가면무도회라는 특별한 이벤트 덕분에 안 그래도 화려한 사람들이 작정하고 더 화려하게 꾸미고 왔다.
물론, 그 사람들 속에서도 로엘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헤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짜 마마는 꾸미는 보람이 있어요.”
“그렇게 말해 주면 나야 고맙지.”
평소 하얀 피부에 맞추어 밝게 입었던 그녀와 달리, 무언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가면무도회 분위기에 맞추어 이번에는 어두운 붉은 계통의 드레스로 선택했다. 검은색이 매치된 레드 컬러로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에단이 처음 선물해 준 루비 목걸이로 포인트를 주었으며, 깔끔히 올린 머리에 검붉은 모자를 장식하여 마무리하였다.
거기에 가면무도회의 하이라이트인 가면은 붉은 깃털과 검은 깃털을 조합하여 만들었는데, 눈가에 포인트로 들어간 자잘한 보석이 그녀의 깊고 붉은 눈동자를 더욱 돋보이게 해 신비함을 더했다.
“그나저나…… 확실히 이건 좀 딴 세상 같긴 하다.”
헤더가 머리 손질을 하건 말건, 로엘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로엘은 이렇게 화려한 무도회는 처음이었다. 황실 연회는커녕 웬만한 귀족 사교회 연회도 나가 본 경험이 없는 로엘에겐 이렇게 화려한 가면무도회는 꽤나 신선한 풍경이었다.
“우리 마마님. 너무 좋아하신다.”
“아니 그냥. 전부 반짝반짝하는 게 너무 예뻐서.”
누가 이분을 한 나라의 공주 출신이었다고 할까.
시녀들은 속으로 쓴 미소를 삼켰다. 가끔 자신들보다도 더 이러한 사교계를 모르시는 거 같아 마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긴. 네가 이런 걸 경험했을 리가 없겠지.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 밑에서 뭘 배웠겠어.”
그 와중 참 못되게도 말하는 앙칼진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에리카였다.
“아무튼 교양 없고 몰상식하기 짝이 없어라.”
비록 멸망한 국가의 공주였어도 로엘의 어머니는 왕족이고, 에리카의 어머니는 귀족이다.
에리카가 입버릇처럼 그녀의 어머니 출신을 들먹일 때마다 로엘은 그 사실을 따져 묻고 싶었다. 아니 실제로 여러번 따져 묻기도 했었다. 돌아오는 것은 악에 받친 에리카의 성질이었지만.
한때 저 말들에 울컥해 뒤에서 울었던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뭐. 어디서 개가 짖나 하고, 흘려듣고 만다.
그런 의미 없는 시비에 반응하기보다는 에리카와 그 시녀들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예상대로 에리카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드레스로 한껏 멋을 냈다.
에리카뿐만 아니라, 그녀를 시중드는 그녀의 시녀들도 그러했다.
로엘은 에리카 뒤에서 똑같은 검은색 드레스들로 차려입은 시녀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곁눈질로 시에라를 보았다. 아무래도 시에라도 같은 생각인 거 같았다.
단순한 시녀들이 아니다. 저들 역시 키로스 같은 무장 시녀 출신.
아무리 화장과 드레스로 가려도 조금만 주의 깊게 그 행동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었다.
“맞는 거 같지?”
“확실합니다.”
시에라를 비롯한 다른 키로스들 역시 평소의 복장이 아닌 드레스를 입고 가면을 써도 행동 하나하나에 티가 났다. 절제 있는 발걸음이라든지 무의식중에 나오는 경계 태세들. 몸에 밴 습관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금 에리카의 시녀들처럼.
“늘 너는 그랬지. 네 분수에 안 맞는, 분에 겨운 것들을 가졌어. 그래서 끝이 안 좋은 거야, 로엘.”
에리카는 로엘이 반응하지 않아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늘 그랬듯 사람을 끌어내리려는 악독한 그런 말들로.
“분에 맞지 않는 명성. 분에 맞지 않는 지위, 분에 맞지 않는 운. 하나같이 네 것들이 아니야. 하나같이 네가 가지지 말아야 할……!”
“너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니.”
로엘의 붉은 눈이 에리카의 붉은 눈과 맞았다. 둘 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 서로의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만으로도 서로에 대한 적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 전부 내 것이었어야 했어.”
에리카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별다른 특별한 말도 아닌데, 괜히 정곡을 찔린 거 같아 에리카는 순간 울컥했다.
로엘은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에리카를 보았지만 에리카에겐 뼈아픈 자격지심이다.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다.
같은 공주였고, 같은 붉은 머리에, 같은 붉은 눈동자를 가진 외동딸.
비교당하지 않을려야 비교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든 면에서 에리카는 뒤처졌다.
누가 봐도 영특한 로엘과 남들보다도 조금 느렸던 에리카.
로엘은 먼저 말을 하고 먼저 글을 익히고. 먼저 검을 잡고 먼저 수를 놓았다.
거기에 토르티아, 아니 토르티아를 넘어 전 세계에서 칭송받는 제이드의 딸이라는 그 칭호. 명실상부한 직계 황족이자 정식 황녀는 에리카였음에도 늘 로엘이 주목받았다.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태어나 보니 제이드의 딸이자, 북방 최고 미녀 레아 칼리드의 딸이라니.
그래서 사랑받았고 그래서 아름다웠으며 그래서 모든 면이 뛰어났다.
그 사실이 에리카는 너무도 화가 났다.
어째서 로엘만 사랑받는가.
어째서 로엘만 모든 것을 가져야만 하는가.
아무리 뺏고 아무리 훔쳐도, 로엘이 가진 게 더 많았다.
로엘이 더 좋은 것을 독차지했다.
그래서 싫었다. 그래서 증오했다.
그렇게 그녀가 죽어 버렸으면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음으로, 사지로 몰아도 그녀는 또다시 에리카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로스 황제의 사랑을 받는 아카시스라니.
그녀가 이리 살 줄 상상이라도 했을까.
“기대해, 로엘. 이번엔 꼭 너를 죽여 줄게.”
나지막히 말하는 에리카의 경고에 로엘은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에리카의 눈이 평소와 분명 달랐다. 단순히 투정을 부리는, 못된 짓을 하려는 그런 눈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를 죽이고 싶다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꼭 그럴게. 로엘.”
이 아이가 또 다른 무언가를 꾸미고 있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