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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안개를 지나 안개 속으로(3권) (23/69)

나의 황제께 붉은 월계수 꽃을 3권

연아 장편소설

목차

Chapter 22. 안개를 지나 안개 속으로

“도대체 왜 잠이라는 걸 안 자는 거예요?”

로엘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안 자는 건 아니지.”

“그 정도면 안 자는 수준이라고요.”

로엘은 손에 든 촛불을 내려 두었다. 그리고 들고 온 담요를 바닥에 깔아, 차가운 베리타스의 대리석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를 당겼다. 그녀의 힘으로는 그를 옮기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끙끙대는 것이 귀여워 그는 순순히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 줬다.

“니블 사건 이후 제대로 안 자고 있는 거 알긴 해요? 자각은 하시냐고요.”

“왜 안 자고 온 거야. 먼저 자라고 제롬에게 말했는데.”

“내가 어떻게 자요. 말 안 듣는 황제 폐하가 계시는데.”

화내는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하여라.

그는 잔뜩 무서운 얼굴로 그에게 뭐라 하는 그녀가 그저 귀여워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무거운 드레스를 벗어 버린 그녀는 가벼운 원피스 차림이었다. 조금만 끈을 당기면 쉽게 벗겨질 거 같은 원피스라, 계속 가슴 쪽에 헐겁게 매어진 끈을 당기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지만 참았다.

여기서 그런 짓을 하면, 이 화난 토끼는 또 화들짝 놀라 도망갈 테니.

“게다가 이렇게 얇게 입고 나오시고! 진짜,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옷이 이게 뭐야.”

그는 담요를 끌어 올려 그녀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작은 그녀는 그가 덮고 있던 담요로도 충분히 감싸였다.

“가져오려면 좀 큰 걸로 가져오지.”

“이게 제일 큰 거거든요. 당신이 큰 거라구.”

그녀 입장에선 이 정도면 충분히 덮인 것 같았으나, 그는 좀 더 그녀를 꽁꽁 싸매고 싶었나 보다. 그녀는 담요보다도 더 따뜻한 그의 품에 기댔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딨어요.”

“많이 모르는 거 같은데.”

“아닐걸요.”

“맞을걸.”

예를 들어 당장이라도 실컷 사랑을 하고 싶다든지, 재잘재잘 열심히도 말하는 그 입술에 숨도 못 쉴 만큼 진한 키스를 하고 싶다든지 하는 야한 생각들은 아마 하나도 모를 거다.

“좋네요. 여기는 낮에든 밤이든.”

어쩌면 밤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세상과 동떨어진 그런 느낌이랄까. 너무 복잡하고 너무 번잡스러운 바깥세상과 달리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곳은 세상에 두 사람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차분해지고, 그래서 안정이 찾아왔다.

그래서 이곳을 좋아하는 거다.

그도. 그녀도.

“이제 해결의 실마리가 정말 보이는데, 왜 이 시간에 여기 계시는 거예요.”

“잠이 안 와서.”

“그럼 저한테 오시면 되잖아요?”

당당히도 말하는 그녀의 즉답에 에단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정작 본인은 조금도 모르겠지.

“그럼 너까지 못 자니까.”

“저 잘 자요. 폐하 옆에서도.”

“그러겠지. 거의 반은 쓰러져서.”

“아. 그건…….”

로엘은 그제야 그의 말뜻을 알아들어 살짝 그의 눈을 피했다. 귀까지 빨개지는 그녀가 귀여워 그는 또 한 번 웃었다.

참 안 웃기로 유명한 그를 그녀는 이리 너무도 쉽게, 자주 웃을 수 있게 했다. 지금껏 웃지 않고 살았던 건 이 여자를 만나 이리 자주 웃으려 그랬나 싶을 만큼.

그는 민망함에 도망가려는 그녀를 좀 더 품으로 당겨 안으며 자신이 보던 책을 보여 주었다.

“이건…… 마약에 관한 책이네요.”

“니블은 찾는다고 끝이 아니잖아. 그 뒤가 더 중요하지.”

로엘은 마약의 중독성과 폐해에 대해서 상세히 나와 있는 책 내용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다. 마약은 공급처를 끊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이미 니블굴에 들락거릴 만큼 중독된 사람들을 다시 사회로 돌려보내는 후속 조치도 필요하다.

그는 그걸 염두에 두는 거였다.

“……당신은 정말 다르군요.”

다들 몰브와 에리카를 잡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그는 이리 홀로 그의 백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 밤중에 잠도 자지 않고 혼자 고민하고 공부하면서.

어찌 성군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은 정말…… 하늘이 내렸네요.”

“뭐야, 그게.”

그는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의 반응에 작게 웃었다. 또 이상한 곳에서 그녀를 감동시켰나 보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의 금은보화를 주었을 때나 이런 반응이 나오는데,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 애쓰는 모습에 더 감동했다.

그 마음이, 지금 그의 마음과 같기에 에단은 그녀가 그저 예쁘기만 하다.

“모든 일에는 뒷처리가 더 중요한 법이니 당연한 걸 하는 거야.”

“아무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만이 이렇게 밤을 새우고 있잖아.”

로엘은 피곤함에 거칠어진 그의 뺨을 감싸며 말했다.

“당신을 황제로 모신다는 그 자체가 이 나라의 영광이자 축복이에요. 당신이 있기에 이 나라가 있고, 당신이 있기에 이 나라 백성들이 웃을 수 있습니다.”

그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심.

그 따뜻한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에단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나 보다. 이리 그녀가 그의 노력을 알아줄 때마다 벅차오르는 걸 보면.

그는 자신의 뺨을 감싸는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고맙네.”

“제가 고마워요. 내가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주니까. 당신이. 이렇게 매 순간.”

어떻게 이리 하는 말마다 예쁠 수 있는 걸까.

그는 좀 더 그녀의 허리를 바싹 당겨 안았다. 그리고 예쁘게 말하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것뿐만이 아닐 텐데. 후회하지 않게 되는 건.”

“지금 되게 감동스럽고 진지하고 막 그랬거든요? 분위기 좀 깨지 말래요?”

“나도 엄청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어휴. 좀!”

시도 때도 없이 야해지려는 그를 밀어 버리고,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그의 손에서 책을 뺏어 버렸다. 피곤이 역력한 얼굴을 보아하니 그는 좀 잘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탕탕 치며 말했다.

“자, 누워요. 무릎베게해 줄게요.”

“뭔가 되게 남자다운데, 지금.”

“내가 원래 좀 든든해요. 여러모로. 그러니까 얼른 누워요. 얼른.”

그녀는 기어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눕혔다. 가늘기도 한 허벅지라 기대는 것조차 미안했지만, 하도 성화인 그녀의 말에 못 이겨 그는 그녀의 무릎을 베게 삼아 누워 눈을 감았다.

그를 감싸는 손으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고, 그녀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저절로 몸이 노곤해지면서 긴장이 풀리는 느낌.

잠이 온다.

“졸리네.”

“조금이라도 눈 붙여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

워낙 장신인 그라서 다리가 담요 밖으로 삐져 나갔지만, 에단은 편했다. 그가 이리 바닥에 누워 있는 걸 보면 정말 여럿 기함을 토하겠지. 하지만 여기에는 그와 그녀, 두 사람 말고 아무도 없다. 그러니 괜찮다. 이리 둘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

“이반이 새벽부터 올 텐데.”

“그런가요.”

눈을 감은 채로, 그는 말했다. 그녀는 그 이름에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그를 계속 토닥이며 그 말을 들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참 자연스럽다. 이반을 생각하며 짓는 그의 미소가.

“이반은 늘 나와 같아. 내가 생각하는 걸 그도 생각하고, 그가 생각하는 걸 나도 생각하지.”

그래서 로엘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그의 형제에 대해서.

“내가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이반 역시 같은 생각으로 같은 것을 알아보고 있었어. 또 한 번 서로 웃고 말았지. 어떻게 이리 똑같으냐고.”

그녀만이 아는 그녀의 이반에 대해서.

그를 토닥이던 그녀의 손이 저도 모르게 멈췄다.

“그랬군요.”

나지막한 그녀의 대답.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떠졌다.

“늘 그렇군요. 당신과 당신의 형제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묘하게 그의 신경에 거슬렸다. 또렷한 그 황금 눈이 정확히 로엘의 붉은 눈을 마주하자 그녀 역시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반이 불편해?”

“네.”

망설임 없는 대답. 에단은 가만히 생각했다.

왜 그럴까 하고.

“어째서.”

“당신이 너무 그를 사랑해서.”

그녀는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올라왔다.

“그 역시 너무 당신을 사랑해서.”

그런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는 내 형제를, 에단을 배신할 수 없어.’

울면 안 되는데 정말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너도 더 이상 잃을 수 없어.’

“그래서 불편해요.”

그의 눈은 흔들리는 그녀의 눈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뒷목을 잡아당겼다.

“그만 사랑하라고 해야겠네. 나의 아카시스께서 질투가 심하시니.”

그러고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로엘은 그 모든 행동들이 너무 부드러워 도리어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 역시 안다. 자신의 행동이 지금 아주 많이 이상하다는 것을.

그러함에도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무엇 하나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말해 주기를.

“폐하. 제가 폐하께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면 저를 죽이실 건가요?”

“아니.”

“저를 미워하실 건가요?”

“아니.”

기어코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그의 뺨에 닿았다.

“저를 더 이상 사랑해 주지 않으실 건가요?”

그녀의 입에서 ‘사랑’이라니.

그녀만큼이나 그에게도 낯선,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 단어에 에단은 제법 놀랐다.

“그건 처음부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

그녀를 사랑한다고 너무도 당연히 인정해 버리는 자기 자신에게.

“내 마음대로 되었다면 지금 여기, 이곳에 너는 없어.”

사랑이라. 이토록 허망하고 덧없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 헛된 감정에 참 많은 이들이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았다.

‘저는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엘은, 그래서 에단은 평생 사랑 따위는 안 할 줄 알았다.

“나는 이 순간, 내 눈앞에 있는 너를.”

“사랑해요.”

그의 말을 끊고, 그녀가 먼저 말했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올리며, 진심을 다해 전했다. 그녀의 이 넘치는 마음을.

“몸과 마음을 다해, 당신을 사랑해요.”

참. 이 한마디가 무어라고 이리 어렵고, 이리 절절해서야.

그는 애절하기도 한 그녀의 고백에 좀 더 진한 입맞춤을 남겼다.

“알아.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쯤은.”

이리 눈물을 흘리며, 이리 진심을 쏟아 내는데 어찌 모를까.

그는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버리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당신은 몰라. 하나도 몰라.”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그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절대 모를 거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그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우는 그녀를 토닥이며 말했다.

이 말도 안 되는 마음을, 어찌 나 아닌 다른 이가 알까.

설사 이 사랑의 주인공인 그녀도 당사자가 아닌 한 절대 모를 수밖에 없다.

무엇이 그녀를 이리 울리는지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확실한 건 그녀의 마음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는 그걸로 충분했다.

“나,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는 로엘 네아레스를 사랑해. 그리고 그 로엘 네아레스는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를 사랑하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와 마주 보았다. 눈물범벅이 되어 버린, 못난 상태에도 그는 세상에서 그녀가 가장 예쁘다는 듯이 웃어 주었다.

“더 이상 내가 들어야 할 말이 있나?”

그렇다면 그녀 역시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니요.”

기다렸다는 듯이.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아 서로를 갈구했다.

서로의 숨결조차도 삼켜 버릴 듯한 깊고 진한 키스 속에서 두 사람은 같은 생각했다.

이리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아니, 감사할 정도로 차고 넘친다고.

***

에단은 곤히 잠든 그녀를 그의 침대에 살포시 내려 두었다. 혹여 깨울까 봐 그녀를 다루는 그의 손길이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많이 피곤했는지, 잠귀가 밝은 그녀답지 않게 그가 베리타스에서 침실로 안아 옮길 때까지 한 번을 깨지 않았다.

그를 재우겠다던 그녀가 먼저 잠이 들어 버린 거다.

“으음. 에단.”

이제는 잠결에도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단 사실이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잠들어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없이 곤히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에단은 이 시간을 좋아한다. 잠들어 있는, 아기 같은 그녀를 아무 방해 없이 실컷 볼 수 있는 이 시간을.

아마 그녀는 모르겠지. 그가 업무 때문에 그녀 곁에 없던 밤에도, 그는 늘 세룸니르에 들러 그녀가 자는 모습을 보고 간다는 사실을.

아마 알게 된다면 분명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다 화를 낼 거다.

그 귀여운 모습이 보고 싶어 넌지시 말할까도 했지만, 그랬다간 내내 그가 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릴 것 같아 말하지 못하였다.

“에단…….”

“그래.”

그녀의 부름에 그 역시 답했다.

“로엘.”

언제 불러도 기분 좋은 울림이 나지막이 그의 커다란 방을 울렸다.

무엇이 그녀를 이리 몰아붙이는 걸까.

‘이반이 불편해?’

‘네.’

그녀를 토닥이던 그의 손길이 멈췄다. 안타까움이 깃든, 그리고 슬픔에 잠긴 목소리. 그 눈동자.

에단은 안다. 그녀가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토르티아에 관한 것도, 카이로스에 관한 것도 아니다.

아리스에 관한 것도, 수아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건, 그가 그녀만큼이나 사랑하는 그의 형제에 관한 거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를 알고 있었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그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그녀를 토닥였다.

이반의 시선이 종종 로엘을 향한다는 거, 알고 있다.

어떻게 모를까. 그 역시 항상 그녀에게 시선이 가 있는데.

다른 이였다면 아마 그 눈을 뽑아 버렸을지도 모르지. 조금이라도 그녀에 대해 다른 마음이 보였다면 바로 그 목을 쳤으리라.

그래서 애써 무시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애써 괜찮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애초에 그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어야 했으므로.

중요해서는 안 될 일이었으므로.

“이반이라.”

다른 누구도 아닌 이반. 그는 에단에게 있어 절대 잃을 수 없는 존재다.

이반의 일에 대하여 로엘이 예외이듯, 로엘에 대해서도 이반 역시 예외인가.

에단은 자신의 질문에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화살은 어쩌다 맞은 거야.’

‘……이반 황자님을 지키다가.’

처음 로엘이 이반과 함께 궁 밖을 나갔다고 했을 때, 그는 의외라고 생각했지 그 두 사람에 대해 화가 난다든지, 배신감을 든다는지 하는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그 둘을 다른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형제’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화났던 것은 그녀가 그에게 숨기고 행동했다는 것. 거기다 다치기까지 했다는 것.

딱 그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을 뿐이다.

근데 이리 뒤늦게 생각해 보니, 어쩔 수 없이 ‘왜’라는 질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반과 로엘이 부딪혀 보았자 기껏 몇 번이나 되겠는가. 니블이 터지고 난 이후, 회의에서 마주친 것이 고작이다. 아주 가끔 오가며 마주쳤을 수도 있겠지.

성격 좋은 이반은 로엘을 깍듯이 모셨을 거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그녀는 자신의 형제에게 여느 때처럼 햇살 같은 따뜻한 미소로 반겼을 거다.

딱 거기까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아니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녀는 왜 하필 루카스도 아닌 이반에게 함께 나가자고 했을까.

그 밤에, 다른 곳도 아닌 케인 몰브의 집에 몰래 가자는 그 어려운 부탁을.

“제길.”

에단은 욕이 절로 나왔다.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상상. 단 한 번도 세워 본 적 없는 가정.

이반과 로엘. 로엘과 이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그는 염두에 둔 적이 없다.

‘……많이 아끼나 보네.’

그런데, 지금 그 두 사람이 같은 선상에 나란히 서 있었다.

‘이반 전하는 당신의 ‘형제’였군요.’

에단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나의 황제시여. 오로지 이 나라와, 이 민족과,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당신을 사랑해요.’

여전히, 이 순간에도 그는 두 사람이 모두 소중했으니까.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

자정이 훌쩍 지나가 버린 늦은 밤. 황궁에도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다. 최소한의 불빛만이 켜 있는 그곳에서 이반은 늦은 퇴궁을 준비하였다.

“조용하네.”

에단과 같은 생각으로 니블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리 지났다. 미리 콜린을 억지로 퇴궁 시켰던 그는 혼자서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황궁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을, 이젠 그에게서 너무 멀어진 붉은 그녀를 생각하며.

“오늘 밤도 평안하기를.”

이반은 잠시 발걸음을 멈춰 그녀가 있는 후궁을 보며 작게 읊조렸다.

매일 밤, 이렇게 그녀를 위해 빌었다는 것을, 아마 그녀는 평생토록 모르겠지.

넘을 수 없는 성벽 위에서 그녀를 그릴 때보다도, 이반은 지금의 그녀가 더 멀게 느껴졌다.

그의 키보다 조금 더 높은 후궁의 담이, 절대 넘을 수 없었던 국경의 성벽보다도 더 높을 줄 누가 알았으랴.

“아……. 진짜 일진이 사납네.”

이반은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아쉬운 발걸음을 겨우 옮기는데 뜻하지 않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 역시 뜻하지 않은 이반의 등장에 바로 얼굴부터 찡그렸다.

하필이면 케인 몰브였다.

“이 시간까지 황궁에 계시다니, 황제 폐하와 작전 회의라도 하셨나 봅니다?”

“무슨 작전 회의를 말하시는 걸까? 되게 궁금하네요.”

역시나 케인이 이반을 곱게 보낼 리 없었다. 차라리 그냥 무시하면 좋을 것을 케인은 꼭 이렇게 한 번씩 이반을 걸고 넘어졌다. 특히 이렇게 아무도 없는 둘만 있을 때면 더더욱.

케인에게 있어 이반은 가장 만만한 황족이자 가장 눈엣가시인 황족.

최고 권세가의 후계자로서 그가 가지고 누려야 하는 것들을 이반이 뺏어 갔다고 생각해 왔다.

케인이 원하던 직책들이며, 카이로스 도성 내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별장도 그러하고, 황제 다음의 2인자라는 타이틀까지 전부 다 이반이 가져갔다.

형제의 총애 말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가장 좋은 것들만 다 가졌으니, 케인 입장에서야 이반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 비겁한 새끼. 끝까지 모른 척하기는.”

그런 이반을 이 밤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났으니 케인이 제대로 예의를 갖출 리 없다.

보아하니 니블 건으로 아리스에게 들렀다 가는 것 같은데, 심지어 술까지 잔뜩 취해 있었다. 아니. 과연 술에만 취했을까 싶다.

이반은 평소보다도 훨씬 세게 나오는 케인을 그저 지켜보며 한숨을 삼켰다.

공작가의 신분으로, 황궁 한복판에서 이리 약에 취해 있다니.

간도 크다.

이반이 아닌 에단이 보았다면, 케인의 목은 이미 날아갔을 거다.

“너지? 내 집에서 도둑 새끼처럼 훔쳐간 놈이.”

어차피 내일이면 모든 것이 드러날 터. 이반은 굳이 케인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마치 케인이 없는 사람인 양 지나쳐 가려는데, 케인의 손이 그런 이반을 잡아 세웠다.

“너 맞잖아? 그 붉은 년이랑 함께 내 방에 온 도둑놈이.”

그런데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내용이 나왔다.

로엘이 워낙 꽁꽁 싸매어서 머리카락 한 올도 안 보였을 텐데 잘도 그를 알아보았나 보다. 아니, 알아보았다기보다 직감적으로 맞춘 것 같았다.

이반과 로엘이 함께 밤에 궁 밖을 나갔다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에단에게 알려지는 것과 또 다른 의미로 엄청난 일이다.

“하. 내가 너네 둘. 처음부터 이상했어. 설마 했는데, 진짜 붙어먹다니. 네가 그렇게 끔찍이 하는 네 형제도 그 사실을 아나?”

온갖 추문에 상상이 더해져 로엘을 궁지로 몰고 갈 터.

이반은 결국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네 형제가 진짜 자기가 아끼는 여인도 준다던?”

“……입, 다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왜? 또 니 형제한테 가서 이르게?”

“아니. 그냥 죽여 버리고 보고만 하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진심.

예고도 없이 들어온 그 섬뜩한 경고에 케인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금세 살기를 띠며, 언제든 생명을 거둬들일 준비가 된 황금의 눈은 꽤나 에단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 케인은 잔뜩 취해 있던 술마저 깨 버렸다.

“내가 말했던 거 같은데. 난 잃을 게 없어 참을 이유도 없다고. 내가 놀아 주는 선까지, 내가 닥쳐 주는 선까지만 까불어. 이런 식으로 선을 넘어 버리면, 내가 진짜로 너를 죽여 버릴 거 같잖아.”

이반은 싱긋 조소를 뱉었다. 그의 오른손이 아까부터 계속 에단이 내려 준 황자의 검 끝을 만지작거렸다. 이반이라면 당장이라도 검을 빼 들어 단칼에 케인의 목숨을 거둬들일 실력이라는 것은 케인 역시 너무 잘 안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 밖에.

“두 분 다 이 밤에 황궁에서 무얼 하시는 겁니까.”

자칫하면 터질 것 같은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을 깨트리는 또 한 명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번 역시 뜻밖의 사람.

시녀장 사라였다.

“내일 중요한 황궁 행사가 있습니다. 케인 경. 이만 퇴궁 해 주십시오.”

“어디 한낱 시녀 따위가……!”

“아니면 황군이라도 부를까요.”

그러지 않아도 이반에게 당하고 있는 게 분한 마당인데 사라까지 등장해 케인의 속을 뒤집어 놨다. 평소 가문의 시종들에게 하듯 함부로 하려던 케인은 바로 서슬 퍼런 눈으로 자신의 응시하는 사라의 기세에 눌려 이번에도 그저 분을 삭여야 했다.

사라가 그저 그런 시녀 따위가 아님을, 이 황궁의 숨어 있는 실세라는 것을 모를 만큼 케인이 멍청하진 않다.

“……이번만큼은 절대 마음대로 안 될 거다. 너도, 그 잘난 분께서도.”

“그래그래. 알았으니 그만 꺼지세요. 케인 경.”

케인은 끝까지 씩씩거리면서 사라졌다. 이반은 그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사건이 마무리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케인 몰브만큼은 정리하라고 에단에게 말해야겠다.

물론 그가 말하지 않아도 에단이 먼저 처리할 것 같지만.

“오랜만이네. 사라.”

“황자님을 뵙습니다.”

사라는 깍듯이 이반에게 허리를 숙였다. 사라가 이 카이로스 황궁에서 보낸 시간이 오래된 만큼 늘 에단과 함께였던 이반을 본 시간도 많았다.

황제와 꼭 닮은 소년은 어느새 청년이 되었고, 앳된 어린 궁녀였던 사라는 제법 나이가 든 시녀장이 되어 있었다.

에단이 황제가 된 이후, 늘 나가 있던 이반을 이리 마주하는 것은 사라에게도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이반의 눈길이 향하는 곳이 로엘임을 알았을 때 사라는 속으로 안타까움을 삼켰다. 닮다 닮다 하필 이것까지 닮으셨나 싶어서.

이반이 에단의 그림자로 산다는 것.

그 삶이 무엇인지 사라가 에단보다도 더 잘 알지 모른다. 사라는 늘상 그들을 한 걸음 뒤에서 지켜봐 왔으니까.

“사라는 여전하네.”

“황자님도 여전하십니다.”

에단을 위해 준비된 모든 것들을 그저 지켜만 봤던 이반이라는 것을 이곳 황궁에서 사라보다 잘 아는 이가 뉘 있을까.

그래서 이반을 보는 사라의 눈에는 항상 안타까움이 숨겨져 있었다. 이반이야 그런 사라의 드러나지 않는 마음에 속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이네.”

“아시니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하지 않아도, 알아서 옳은 선택을 하실 테니까요.”

절대 안 된다는 콜린의 천 마디 잔소리보다도, 웃음을 가장한 루카스의 경고보다도, 사라의 지금 한마디가 이반의 가슴을 후벼팠다.

‘옳은 선택’이라.

참 잔인하기도 하여라.

“……잘 모르겠는데. 그게 뭔지.”

“황자님은 알고 계십니다. 스스로에게 모르는 척하시는 거지.”

사라의 눈은 정확히 이반의 눈을 향했다. 그저 지나칠 말일 수 있다. 그저 무시해 버리면 되는 그런 사안이었다면 아마 이반은 평소처럼 시답잖은 근황 이야기로 이 주제에서 빠져나갔겠지. 그런데 이반은 그러지 아니하였다.

케인의 뻔한 도발에도 넘어가고, 케인의 일상적 무례에서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 순간, 사라가 던진 질문에 이미 정해진 그 답을 그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반에게 로엘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그래서 포기가 안 되는 사람이란 거다. 사라의 안타까움이 한층 더 깊어졌다.

하필, 처음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이 형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라니.

많고 많은 것 중에, 왜 하필 그거인 걸까.

“모르는 척이 아니라 모르는 거야. 난 정말 모르겠어.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이반에게 세상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에단이라도 그 하나는 줄 수 없다.

안 주는 게 아니라 못 주는 거다. ‘사람의 마음’은 그런 거니까.

“왜 안 되는 거지? 정말 안 되는 건가? 어차피 지레짐작하는 거잖아. 미리 안 된다고, 절대 안 된다고 예단하는 거일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요. 황자님. 이미, 이리 고민하고 있으시잖아요.”

달빛조차 희미한 어두운 밤. 사라의 눈은 이반을 향했다.

“황자님께서는 단 한 번이라도 황제 폐하의 생각과 다르셨던 적이 있으십니까? 그분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 생각의 끝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 의중을 모르셨던 적은 있으십니까?”

단연코 없다.

그러기엔 에단과 이반은 항상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그래서 그리 쉽게 속내를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폐하도. 그리고 황자님도.”

사라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 목소리는 단호했다.

카이로스 황궁의 잔뼈가 굵은 베테랑 시녀장께서는 참 많은 것을 보았고 참 많은 것을 들었다. 그래서 사라의 말이 이반에게도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구구절절 너무 옳아 힘이 들 지경이다.

“폐하께서 먼저 아실까 봐 불안해하시는 것도, 폐하께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하시는 것도. 전부 다,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반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마 아니라고, 실은 내가 먼저였다고, 내가 늦어 잠시 엇갈렸던 것뿐이라고. 처음부터 그 여자는 내 여자였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었다.

그게 분하고, 그게 억울했다 .

사라에게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 말들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어찌할까.

“황자님. 부디 늘 그러셨던 대로 올바른 길을 가시리라 믿습니다. 황자님께서는 이 나라 카이로스의 자랑스러운 황자이시자, 황제 폐하께서 가장 신뢰하시는 형제임을 잊지 마세요.”

사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반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그가 카이로스의 황자라는 것. 나아가 그 카이로스 황제의 형제라는 것.

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잊어 본 적 없는 사실이다.

“이반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황자 전하.”

그렇게 오래도록 그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리 두고두고 그를 괴롭힐 테지.

“평안한 밤 되소서.”

이렇게 아프게. 이렇게 잔인하게.

그에게 참 많은 것들을 가져가면서.

***

아침 이슬이 맺히는 이른 새벽. 로엘은 홀로 에단의 후원에 나왔다.

시원한 새벽공기가 정신을 깨우고, 나무와 풀 내음이 코끝에 기분 좋게 번져 갔다. 아침의 시작을 준비하는 동틀 무렵, 로엘은 검을 잡고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려 이곳에 왔건만 애석하게도 그리 생각하는 이는 그녀만이 아니었다.

로엘과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그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안녕, 네아.”

여느 때처럼 그녀를 불러 주는 부드러운 목소리.

“……안녕, 이반.”

그 부름에 그녀는 답했다. 그녀의 분위기가 다른 것처럼, 그의 분위기도 평소와 달랐다.

지난밤, 두 사람 모두에게 ‘생각’이 필요했단 걸 두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정말 두 사람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아니 같은 고민을 가지고 이곳에 왔나 보다.

“오랜만이네, 그 검.”

“그러게.”

이반의 손에 들린, 그녀에게는 참 익숙한 낡은 검을 보며 로엘은 생각했다.

자신들의 인연이 저 오래된 검만큼 참 질기기도 하다고.

황제가 될 수 없는 카이로스의 황자와 핍박받는 토르티아의 공주가 만나 어린 시절을 함께했고, 떨어진 시간만큼 서로를 그리워했으며, 지금 이 순간 다시 형수와 시숙으로 만났다.

“상처는 괜찮아?”

“괜찮아.”

진작 묻고 싶었는데, 물어보지 못했다. 그 이후 마주친 적도 많았고, 말을 걸 기회도 많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좀처럼, 이렇게 둘만 있을 기회가 없었으니까.

“정말 괜찮아.”

그녀가 다치고 이반이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그러함에도 얼굴 한 번을 보러 가지 못했다. 괜찮냐는 이 한 마디를 묻지 못했다.

어쩌다 우리가 이리되었을까.

어쩌다 그 한 마디를 물어보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을까.

무얼 잘못했다고 이리되어야만 했을까.

이반은 그저 그의 운명이, 그렇게 만든 하늘이 야속했다.

“괜찮은지 시험해 볼래?”

그녀는 곧게 팔을 뻗어 검을 이반을 향하게 하며 말했다.

“상대해 달란 소리야?”

“응.”

잔잔한 그녀의 목소리가 둘밖에 없는 후원에 울렸다.

이반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다운 배려였다.

그녀에게 미안해하는 그에 대한 위로였고. 그 역시 로엘을 향해, 그에게는 이제 한 몸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아버지 제이드가 선물한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이 제법 그녀의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그리 쫓아다니더만 결국에 진짜 ‘그분’이 되려나 보다.

“나 상대하려면, 고생할 텐데.”

“얼마든지.”

몇 번을 져도 다시 하게 될 테니.

그는 가볍게 검을 한 바퀴 허공에 가르더니 곧 자세를 잡았다.

로엘 역시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검을 세웠다.

“하!”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로엘이 먼저 이반에게 달려들었고, 이반은 부드럽게 그런 로엘을 받아쳤다.

챙.

쇠붙이가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새벽을 깨웠다.

이반이 로엘을 봐주고 있는 것쯤은 로엘도 안다. 그 어린 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로엘은 단 한 순간도 이반을 이겨 본 적이 없으니까. 아니, 그 근처에도 가 본 적 없다.

그만큼 이반은 타고난 검객. 가히 제이드의 눈에 들 만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래서 그가 처음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앞에 등장했을 때 로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중부의 귀족 도련님께서 재능까지 타고나셨구나 하고.

“많이 늘었네. 네아.”

“하아!”

저 얼굴에 저 능력까지 가지다니, 정말 다 가졌구나.

여기에 아버지에게 검까지 배우면, 고향으로 돌아가 나라의 영웅이 되겠지.

그렇게 칭송받는 사람이 될 거라고, 그렇게 멋지게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리 평생을 그림자로 살아야 할 운명이라니.

솔직히 이럴 줄 알았다면, 정말 이렇게 비참히 살 줄 알았다면 그녀는 그를 붙잡았을지도 모른다. 피차 거지 같은 운명을 타고났으니 같이 떠나 살자고.

너는 내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내 오빠가 되고 그러자고.

그렇게 가족으로, 함께 다 버리고 떠나 살자고

정말 그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운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참, 세상일, 맘대로 되지 않는다.

“너나 나나 평탄한 인생은 아닌 거 같아.”

“너무 동감.”

“전생에 큰 죄를 진 걸까.”

“현생에 안 지면 다행이지.”

“하하. 맞는 말.”

벌써 몇 합째 부딪히는지 모른다. 아무리 이반이 봐준다고 한들 힘이 부치는 로엘은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에 비해 이반은 그저 즐겁기만 하여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역시나 좋다. 로엘과 함께하는 수련은.

그 어린 날, 타르타니의 숲에서도 그러하였고, 이 카이로스의 후원에서도 그러하다.

“즐겁다.”

“나도.”

로엘은 이반의 말에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것이 조금 놀랐는지, 이반은 조금 방심하다 훅 들어오는 로엘에게 조금 진심으로 대응해 버렸다.

탕! 하고 힘에 밀려 잠시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로엘은 쉬지 않고 다시 이반에게로 달려들었다.

일부러, 그녀는 그러는 거 같았다. 괜한 대화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아서. 대화가 길어져 괜히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도 즐거워, 이반.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그래서 이리 필사적으로 덤벼드나 보다.

이반은 쉬지 않고 공격만 해 오는 그녀를 받아 주며 생각했다. 그녀가 궁지에 몰린 거 같다고.

“너와의 시간은, 즐겁지 않은 적이 없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반’ 그 때문에.

“그런데 이 즐거움을 이제 그만둬야 할 거 같아.”

로엘을 받아치는 이반의 검에 저도 모르게 힘이 실렸다.

“그래야 할 거 같아. 이반.”

바로, 바로 말해야 했다.

싫다고. 정말 싫다고.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고. 다 버리고 떠나서, 카이로스도, 토르티아도 아닌 타르타니로 가자고.

그 시절처럼, 그저 함께인 것에 감사하면서, 서로의 가족이 되어 주며 살자고.

그런데 목 끝까지 올라온 그 말을 이반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이반.’

그러기엔 자신의 형제가 너무도 눈에 아른거렸다.

다 가진 자신의 형제가. 자신이 감히 걱정하고 동정할 수 없는, 하늘이 내린, 이 나라의 황제가 너무도 눈에 아른거렸다.

“그러자, 이반.”

“네아. 나는……!”

챙!!!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엄청난 소리.

그 강한 울림에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들어온 ‘그’에 의해 로엘은 저절로 뒷걸음질 쳤고, 이반은 반사적으로 진심을 다해 방어했다.

진심에는 진심이 되는 법.

만일 이반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지금쯤 아주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을 거다.

“……폐하.”

꼬리가 길더니만 결국 밟히고야 말았다.

“이건 지나치게 부지런한 건데. 아카시스.”

낮게 깔린 차가운 목소리.

에단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 황금빛 눈이 오롯이 이반을 향했다.

“……에단.”

주변을 맴도는 그 서늘한 살기에 로엘은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소문만 무성하던, ‘그’다.

가는 길마나 피가 끊이지 않는다는, 하늘이 내렸으나 사신이 되어 버렸다는.

태양 같은 죽음의 황제.

“형제. 오랜만에 놀아 볼까.”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리고 그 화는, 항상 피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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