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 조금 위험한 밤마실
살랑살랑 밤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밤, 유난히 달빛이 밝았다.
그 달빛을 한 몸에 받으며,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그녀가 마지막으로 붉은 머리를 올려 검은 모자를 눌러썼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그 붉은 눈동자를 보며 이반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무모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시끄러. 도와주러 왔으면 돕기나 해. 잔소리하지 말고.”
로엘은 그의 말을 단번에 묵살해 버리고 바로 몸을 낮추어 발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여인이 허락도 없이 황자와 단둘이, 궁 밖에 나온 것 자체도 기가 찰 노릇인데, 다른 곳도 아닌 몰브가에 잠입하다니.
진짜 누가 들을까 겁이 다 났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날에는 그녀 혼자 폐위되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둘이 정을 통했을 거라며 공개 처형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심각성을 그녀는 조금도 모르는 것 같으니 이반은 계속 한숨이 나올 수밖에.
“폐하께 허락은 받았을 리 없고. 어쩔 생각인 거야?”
“오늘 폐하는 하루 종일 정무회의에 잡혀 있을 예정이야. 에리카 황녀께서 무려 이틀이나 빨리 도착하시기 때문이지. 아무리 회의가 빨리 끝난다고 해도 적어도 지금부터 3시간은 안전 범위니까 얼른 끝내고 들어가야 해.”
“하아……. 도대체 나오긴 어떻게 나온 거야?”
“수아 님.”
“뭐?”
“아카시스 수아 님이 도와주셨어.”
이반은 바로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웠다. 그리고 정색한 얼굴로 로엘을 보았다.
그 반응에 이번엔 로엘이 한숨을 쉬었다. 또 그의 안 좋은 습관이 나왔다. 그녀의 일이라면 일단 걱정부터 하는 이 쓸데없고 안 좋은 버릇.
“켈트가의 수아 님을 말하는 거야?”
“어.”
“켈트가 영애한테 황궁을 나온단 사실을 말했다고? 너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약점을 숨겨도 모자랄 판에 다른 아카시스에게 이런 일로 도움을 청하다니. 너 정말……!”
“그만.”
로엘은 쉬지 않고 말하는 이반의 입에 조용하라고 손가락을 갖다 댔다.
“이보세요. 카이로스에 돌아온 지 한 달도 안 된 황자님. 뭘 모르면 조용히 합시다. 지레짐작하지 말고.”
“네아. 이건 그렇게 쉽게…….”
“쉿.”
또 한 번 더 로엘의 손가락이 이반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로엘은 그녀를 너무 순진하게만 생각하는 이반의 태도에 그저 한숨이 나왔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그녀가 숲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로 보이나 보다.
“이봐, 황자님. 내가 아무리 천덕꾸러기로 자라 왔다고 해도, 엄연히 왕족으로 평생을 살았어. 그런 내가 나에게 진짜 호의를 베푸는 사람과 가식인 사람 하나 구별 못 할 거 같아?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순진하지도, 아둔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그만 애 취급 해.”
똑바로 이반을 직시하며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에게 이반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다다다 쉬지 않고 말하는 그녀가 너무 똑 부러져 그가 뭐라 말할 틈조차 없었다. 허리춤에 손만 안 올렸지, 오히려 그녀가 그를 혼내는 말투라 이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애를 애 취급 했다고 애한테 혼나는 그런 기분이다.
“수아 님은 내가 카이로스에서 유일하게 편히, 거리낌 없이 말을 할 수 있는 분이야. 그래서 좋아해. 그래서 믿을 수 있어. 그래서 도와 달라고 한 거야. 그만큼 급해서.”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녀의 말을 들은 이반은 하려던 말을 그만 넣어 두었다.
그저 황궁에서는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고, 켈트 가문은 명망 높은, 그리고 뼈가 굵은 카이로스의 귀족가문이니 네가 쉽게 속을 보일 집안이 아니라고 걱정 어린 충고를 하려 했는데, 그녀는 그가 그러한 ‘실수’를 하기 전에 그를 멈춰 줬다.
그 어찌나 고리타분하고 귀족스러운 사고방식인가. 그리 생각하는 것이.
수아를 생각하는 로엘의 표정이 이반에게 그것을 깨닫게 했다.
“네가 나한테 해 줄 말은 수아 님을 믿지 말라는 게 아니라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고 칭찬해 주는 거야.”
이반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 흔들림 없는 붉은 눈동자에 이반은 결국 웃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녀가 옳다.
이반은 손을 올려 그런 로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대단하네, 네아. 카이로스 황궁에서 제일 뒷배 좋은 친구를 두었어.”
“그지? 무려 켈트가를 내 편으로 만들었다고.”
환히 웃는 그녀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아 이반 역시 따라 웃었다.
아무래도 달빛이 너무 좋아 그녀가 그 달빛에 취했나 보다. 그를 대할 때마다 쌩쌩 불던 찬바람은 어디론가 가 버리고, 지금은 그가 알던 바로 그 네아가 되어 있었다.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관두고 얼른 들어가자.”
드레스가 아닌 편한 바지 차림에, 화장하지 않아도 뽀얀 얼굴. 화려한 장식 하나 없어도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는 분명 그가 알던 그 ‘네아’다.
‘이반.’
그래서 이리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불러 주는 그녀가 그저 고마웠다.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얼굴이 된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나 보다.
여전히 그녀의 기억 속에도 그 시절은 남아 있었고, 여전히 그녀는 그가 알던 바로 그 ‘네아’였다. 저절로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면, 그 역시 그녀를 쫓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네아. 서두르지 마. 몰브의 사병은 웬만한 황군 급이라고.”
“그래 봤자 사병 따위. 다 몰려오라지.”
“아니. 때려눕히라는 게 아니라 들키지 말라는 거야.”
“알아, 나도.”
그녀는 손쉽게 몰브의 담장을 넘어섰다. 발 하나는 남다르게 빠른 그녀였다. 그녀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몰브의 사병들이 평소보다도 훨씬 더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녀를 뒤에서 지켜보는 이반이 더 불안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몰브가의 중심에 다다랐다.
“저기가 케인 몰브의 처소인 거 같아. 일단 저기 안으로…… 읍!”
사병이 교대로 지나가자 이반은 바로 그녀를 품에 안고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그녀를 멋대로 안아 버리는 그에게 로엘의 따가운 논총이 쏟아졌지만, 그런 게 무에 대수랴. 그녀가 안전하기만 한다면 무얼 못 할까. 오히려 그는 품에 안은 그녀를 더 꼭 안았다.
참 오랜만에 안아 보는 가녀린 몸이었다. 몇 년 만에 안아 본 것인데도 여전히 작기만 한 그녀는 조금도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없는 긴 시간 동안 너무 많이 변해 버린 거 같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는데, 이리 변하지 않고 그대로라는 사실이 괜히 이반을 안심시켰다.
그에게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케인 님은 새벽 동트기 전에 떠나실 거다. 오늘 밤 안에 모든 채비를 끝내 놔.”
“예.”
애석하게도 느긋하게 그런 감상에 빠질 상황이 아니었지만.
집사로 보이는 이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케인의 이름이 명확히 두 사람의 귀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이 그 이름에 바로 어둠 속에서도 반짝였다.
“물건도 내일 들어오는 겁니까?”
“아니. 그건 계획이 변경되었어. 지금 워낙 경계가 삼엄해서 로플리에서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해. 일단은 그대로 카이로스로 들어온다.”
“그대로라면…… 토르티아 황녀가 직접 운반한단 말씀입니까?”
“그래.”
아. 설마 했던 사실이 너무도 빨리 확인되어 버렸다.
로엘의 꼭 쥔 주먹이 떨려 오고, 그 눈에 핏대마저 서렸다.
정말 아니길 바랐는데.
다른 건 다 해도 이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삼류 악질 장사치가 할 법한, 아니 뒷골목 양아치들이나 할 법한 일을 대제국 토르티아가 하다니. 그간의 역사가,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이 통곡할 일이다.
“로엘.”
로엘은 너무도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 아버지와 함께 죽어라 나라를 지키던 그 동료들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러려고…… 고작 이따위로 하려고……!”
내 아버지를 그리 처참히 죽였는가.
“차라리 망해 버리지. 차라리 아무 데에나 항복을 선언하고 고개를 조아리지,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목소리마저 떨리는 그녀의 손을 이반은 말없이 잡아 주었다. 오만 가지의 생각이, 지나간 날들에 대한 울분이, 그 모든 것을 초래한 조지 황제에 대한 분노가 섞여 그녀의 심장을 후벼 팠다.
“더 커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어. 이제라도 막을 수 있게 되었으니 된 거야.”
그런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이반은 조용히 안아 주었다.
차오르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다.
이 작은 몸으로 견뎌 내기에 참 버거운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네아. 네 손으로 막으면 돼. 네가 직접, 네 손으로 보란 듯이 막아. 그렇게 하려고, 바로 그걸 하려고 너와 내가 이곳에 있어.”
그녀를 진정시키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차분했다. 덕분에 그녀의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그의 말이 맞다. 그녀가 직접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면 된다.
“응. 그럴 거야. 그러려고, 여기까지 왔어.”
토르티아의 치욕은 토르티아의 손으로 끝내야 하는 법.
흔들리던 눈동자가 어느새 또렷이 정면을 응시했다.
마음을 다잡은 듯한, 그 당찬 표정.
이반이 참 좋아하는 그녀의 얼굴이다. 이반이 작게 미소 지었다.
나아가는 그녀의 곁에 있다는 건 언제나 기쁨이다.
이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에도 참 속도 없이 그는 그녀의 곁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가자. 현장을 못 잡으면 물증이라도 잡아야지.”
“계약서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응. 분명 있을 거야.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꾸미면서 서류 한 장 안 남겼을 리 없잖아?”
확실히 로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니블 밀매는 토르티아의 입장에선 나라의 명운을, 몰브가 입장에선 가문의 운명을 건 일이다. 절대 구두로만 이 모든 일을 진행했을 리 없었다.
이 거래로 토르티아는 잠시라도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큰돈을 챙겼을 것이며, 몰브는 그러한 투자가 아깝지 않을 이윤을 얻어 갔을 거다.
그 모든 증거가 이곳, 몰브의 본가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그게 이 집에 있다면 있을 만한 곳은 딱 한 곳이지.”
“케인 몰브의 침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한곳을 향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았나 보다.
본디 사람은 이렇게 중요한 것일수록 자기 품에 두고, 제 손에 닿는 곳에 보관하는 법이다.
남을 불신하는 케인 몰브 유형의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그 중요 문서는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없고, 케인 몰브가 심적으로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다 생각되는 그의 침실에 있을 거다.
“저 말도 안 되게 삼엄한 경비부터 거슬려.”
“방주인은 별채에 있는데 말이지.”
이반은 저 멀리, 이 깜깜한 밤에 홀로 환히 불이 켜진 별채를 가리켰다.
처음 몰브가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선을 사로잡던, 참 멀리도 떨어져 있고, 참 시끄럽기도 한 바로 저 별채.
로엘은 저 안에서 귀족들이 무슨 일들을 할지 너무 빤히 보여서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온갖 교양을 다 떨더니만, 정작 자신들은 짐승만도 못하게 놀고 있었다.
“……역겨워.”
그러니 욕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수가 없다.
“우리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지.”
그녀를 뒤에서 따라가며 엄호하던 이반이 복면을 쓰며 이제는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만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순간이란 거였다.
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그의 행동에 그녀는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갔다.
“단번에 들어갈 거야. 이런 잠입일수록 속전속결해야 해. 아무리 사병이 뛰어나 봤자, 네 말대로 그래 봤자 사병. 황군의 경비와는 마음가짐부터 달라.”
어렸을 적부터, 이반은 진지해질 때마다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바로 지금이 그러하였다.
“심지어 지금은 야간 교대 시간이 다가오는, 집중력이 쉽게 흐트러지는 시간대라 더 그럴 거야. 우리는 교대하는 그 순간 빠르게 잠입하자.”
그녀를 완전히 가려 주고도 남을 만큼 넓은 어깨를 보며, 로엘은 저절로 안도하는 자신을 느꼈다.
‘위험하니까 내 손 잡고, 나만 보고 따라와.’
쓸데없는, 오래된 기억마저 멋대로 떠올랐다.
“네아. 집중해.”
“……응.”
토르티아가 그 배후라는 것을 의심하였을 때, 아니 깨달았을 때, 로엘은 제일 먼저 이반을 생각했다. 그리고 뒤늦게야 그런 자신을 꾸짖었다.
어쩌자고, 이제는 편히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그부터 떠올렸냐고.
“자. 대기해. 저 노란 머리만 지나가면…….”
그런데 그렇게 책망하면서도, 그녀는 함께 가 주겠다는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지금!”
이리 믿음직스러운데. 이리 안심이 되는데. 어찌 안 그럴 수가 있을까.
함께한 시간만큼의 믿음과 함께 수련한 만큼의 호흡이 있다.
“역시 네아. 죽지 않았어.”
이렇게 손발이 맞는 사람. 이렇게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반’이다.
“……당연하지. 바보야.”
로엘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른 찾기나 하자고. 바보 소리는 그다음에 들어줄 테니까.”
그 복잡한 마음마저도 다 안다는 듯, 이반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다행히 이반의 빠른 판단과 과감한 실행력 때문에 무사히 수많은 경비를 뚫고 케인의 침실이 있는 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황실에 비하면야 턱없이 작은 그곳은 황실의 침실 구조와 비슷하게 가장 안쪽, 가장 가운데에 메인 침실이 있었다.
“취향 한번…… 참.”
누가 봐도 황실을 따라 한 티가 마구 났다. 여기저기 어울리지 않는 황금 장식들이 특히 더 그러했다.
어찌나 황금으로 덕지덕지 꾸며 놨는지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왕이 못 되어서 마약왕이라도 되려는 건가.”
“하나도 안 웃겨.”
이반의 입에서 시답잖은 농담이 흘러나올 만큼 정말 악취미였다. 침대마저 금빛인 그곳을 한심하게 쓱 둘러봐 주며 그녀는 누가 보아도 중요한 물건이 있을 것 같은 침대 옆 테이블 탁자에 다가섰다. 자물쇠가 걸려 있는 걸 보며 로엘은 말했다.
“열어 봐? 없을 거 같긴 한데.”
“응. 여긴 아니야. 그러기엔, 너무 번잡스러워. 본인이 언제든 꺼내 보기에는.”
“그럼 어디에 있을까?”
“찾아봐야지. 이제부터.”
이반은 바로 베개와 이불부터 들추었다. 손으로 짚어 가며 혹여나 넣어 두었나 했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다.
침대 근처를 중심으로 부지런히 만져 보는 그와 달리 그녀는 찬찬히 둘러보았다.
거의 불안 증세에 가까운 케인 몰브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이라.
“이반. 이리 와서 누워 봐.”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
“시끄럽고, 얼른 누워.”
로엘은 그의 옷자락을 당겨 거의 반강제로 케인의 침대에 이반을 쓰러트렸다. 로엘이 무얼 원하는지 알 것 같아 이반은 한숨을 쉬면서도 순순히 따랐다.
“케인 몰브가 너보다 살짝 작으니까 누우면 손이 닿는 거리가 비슷할 거야. 누워서 손 좀 뻗어 봐.”
“이렇게?”
이반은 편히 누워 양손을 최대한 뻗어 보았다. 워낙 큰 침대라 중앙에 누우면 테이블에 닿기도 힘들었다.
“안 닿는데.”
“닿는 곳이라고 해 보았자 협탁 정도야. 여긴 뭐가 있을 게 없고,”
“촛대 안?”
“아까 이미 봤어. 그리고 그런 건 하인들 손에 쉽게 들어가서 안 돼.”
로엘은 여전히 누워 있는 이반의 옆에 앉았다. 이제 곧 있으면 다시 나가야 하는데, 생각보다 쉽게 찾지 못했다.
이반은 한쪽 손으로 머리를 괴며, 고민하는 로엘을 보았다.
“못 찾더라도 괜찮아. 일단 우리 귀로 사실 정황을 들었으니까.”
“그런 건 증거가 되지 않아.”
“계약서를 찾는다고 해도 완벽한 증거가 되는 건 아니야. 발뺌하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잘하면 어디서 거래하는지, 어떻게 거래하는지도 알 수 있고.”
로엘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렇게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나온 만큼 무엇이 되었든 가져가고 싶었다. 단순히 몰브가의 하인들의 떠드는 이야기만을 듣고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아쉬웠다.
“분명 쉽게 손이 닿는 곳일 텐데…….”
“아니면, 자신의 눈에만 잘 보이는 곳이거나.”
“으왓!”
이반이 예고도 없이 그녀의 팔을 휙 당기자, 로엘은 바로 그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얼떨결에 이반의 옆에 누워 버린 로엘은 매섭게 이반을 쏘아봤다.
“뭐 하는 짓이야! 지금 이럴 때가…….”
“맞지? 찾았네. 공주님이 원하시던 바로 그 증거.”
이반은 씩 미소 지었다. 이반의 시선을 따라간 로엘의 눈에 그렇게 찾던 것이 들어왔다.
케인 몰브가 나름 열심히 생각해서 숨겨 둔 바로 그 계약서.
“이번 건 인정. 몰브가 머리를 좀 썼네”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 사이로, 드리워져 있는 어색한 그림자. 침대에 바로 누워 천장을 보아야 겨우 보이는 그 그림자의 정체는 아주아주 고급진 양피지 뭉치였다.
“이반.”
“알아.”
이반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침대에서 일어나 그 양피지를 꺼냈다. 그 정도의 키라면 손쉽게 꺼낼 수 있는 그런 위치였다.
몰래 숨겨 둔 것 치고 먼지가 거의 묻지 않은 그 양피지 뭉치는 여러 번 꺼내어진 흔적이 보였다. 아마 케인 몰브가 자다가도 일어나 꺼내 봤겠지.
로엘은 천천히 그 양피지를 풀어 보았다.
그러자 선명히 토르티아의 붉은 문장이 드러났다.
“……맞네. 토르티아.”
알고는 있었지만 이리 눈으로 보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로엘은 최근 들어 참 자주도 보게 되는 그 붉은 문장이 그저 부끄러웠다.
카이로스에 니블을 판 그 범인은 진짜 토르티아였다.
“……로엘. 이제 가야 돼.”
“응.”
재촉하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이반은 감상에 젖어 있는 그녀를 불렀다.
로엘 역시 잘 알고 있어 금세 정신을 차리고, 그 양피지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잠시 풀어 두었던 복면을 꼭꼭 싸매 얼굴을 가렸다.
“이반 너도 다시 해.”
“난 괜찮아.”
“안 괜찮아. 얼핏이라도 보면 어떻게.”
“아무도 못 알아봐.”
“다 알아봐. 다.”
아닐 텐데. 몇 년씩이나 도성을 떠난, 황위에 앉지 못하는 황자 따위. 아무도 모를 텐데.
이반은 그녀의 말이 아니라고, 구질구질한 설명을 하려다 말았다. 그 말을 했다간, 그런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고 그녀에게 핀잔을 들을 것만 같았다.
대신 친히 까치발까지 들어 그의 얼굴에 복면을 묶어 주는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까이 다가온 그 몸을 품에 안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 이 둘만의 분위기를 그의 작은 욕심 때문에 망치고 싶진 않았으니까.
“자. 들어올 때 한 것만큼 잘 나가자.”
“그래.”
단단히 그의 복면까지 묶어 주고 나서야, 그녀는 안심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물러섰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그 붉은 눈은 이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잘 부탁해. 이반.”
그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이반은 미소 지었다. 오롯이 그를 믿는다는 신뢰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반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공주님. 무사히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손을 감싸 쥐는 그의 손을 로엘은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세게도 쥐어 오는 그의 따뜻한 손은 참 많은 그리움과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한때 많이도 잡았던 손.
로엘은 그런 이반의 손을 마주 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를 지키겠단 그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져 왔다.
당연했던 이 마음이 버거워져 버렸단 사실에 로엘은 그저 마음이 아팠다.
인연 한번, 정말 얄궂다.
***
“에리카 황녀님. 카이로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황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플리의 영주이자, 케인의 숙부인 칸 몰브는 먼 길을 온 에리카를 제일 먼저 반겼다.
근 닷새를 달려온지라 에리카는 피곤함에 그다지 심기가 좋지 못했다. 자다가 깬 얼굴로 그녀는 짜증스럽게 칸의 환영 인사를 받았다.
“네. 환영해 주는 건 고마우나, 오늘은 너무 피곤하군요. 일단은 들어가서 쉬고 싶어요.”
“그러시겠지요. 이리 오십시오. 이미 쉬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미 에리카의 성질은 소문이 날 대로 난지라, 칸은 그런 에리카의 짜증을 잘 넘겼다. 그저 싸가지 없는 아리스 조카를 대한다 생각하기로 처음부터 각오하니 한결 수월했다.
몰브가의 돈줄이 잡혀 있는데 이 정도 접대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로플리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알겠으니, 얼른 가기나 하죠. 내일 말하고.”
“예. 예.”
에리카는 말이 참 많은 칸이 귀찮았다. 쓸데없는 말을 듣는 것보다 얼른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여 자고 싶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몇 번이나 다시 돌아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태어나서 처음 장거리 이동을 해 본 그녀는 닷새 내내 마차 안에 있느라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럼 푹 쉬십시오. 황녀님.”
그렇게 겨우 그녀가 하룻밤 묵을 로플리 성의 귀빈 방에 당도했다. 모든 것이 짜증났던 에리카는 칸이 나가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모자를 벗어 던졌다.
“아니. 눈치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딱 봐도 상태가……!”
한껏 신경질을 막 부리려던 찰나, 에리카의 말문이 순간 딱 막혔다.
활짝 열린 창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로플리의 야경에.
“세상에. 정말 아름답네요. 황녀님.”
토르티아에서 같이 온 에리카의 시녀들도 그런 로플리의 야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화려한 불빛이 집집마다 이어지고, 불을 환히 켠 배들이 바다를 수놓았다. 늦은 밤임에도 시끌벅적한 도시의 소리들은 높은 성벽을 넘어 에리카의 테라스에까지 들려왔다.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역시 카이로스는 카이로스네요. 진짜 아름다워요.”
신난 에리카의 시녀들과 달리 에리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야경은 다른 한편으론 그들의 발전을 보여 주었다.
북방의 토르티아는 이리 이 밤에 환히 불을 킬 수 없다.
아무리 철이 없고, 사치 속에서 사는 에리카일지라도 그 정도는 안다.
잘 닦인 카이로스 길을 오며, 크기도 한 그들의 시장을 보며, 에리카는 피부로 느꼈다.
카이로스와 토르티아의 차이를.
“로플리가 제3의 도시라고 했던가요? 그럼 도성은 더 대단하겠지요?!”
“너무 기대되어요. 황녀님! 카이로스 도성이야말로 모든 유행의 시작점이라잖아요!”
그런 카이로스의 황궁에 로엘이 간 거다. 자신을 대신하여.
에리카는 자신을 위해 준비해 둔 로플리의 방을 훌쩍 둘러보았다. 토르티아에 있는 그녀의 방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었다.
이런 방을 일개 영주 따위가 손님에게 내어 주다니.
시녀들의 말대로 카이로스 황궁은 어떠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지지리 복도 많은 년.”
에리카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불쌍하게 찌그러져 있는 그녀를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왠지 기분이 싸했다. 뭔가 익숙한 상황의 반복인 것만 같았다.
‘누가 테바로스의 황제가 되었다고요? 데릭 황자?! 그 다섯째?!!’
에리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느낌이 좋지 못했다.
이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로엘의 팔자 좋은 꼴을 보게 된다면, 정말 며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만 같다.
***
“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
“동감.”
로엘과 이반은 무사히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런데 들어올 때와 달리 갑작스레 소란이 일더니, 별채에서 놀던 귀족들이 대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 귀족들의 각 집안 사병들이 각자의 주인을 모시고 가기 위해 총출동했다.
“아니…….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 꼴불견 아니니?”
“그것도 동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인사불성이 된 자가 있는가 하면, 아예 시종에게 업혀서 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어찌나 지저분하게들 노셨는지, 그들이 나오자 지독한 술 냄새와 니블 냄새가 섞여 로엘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거 좀 골치 아프겠는데. 우리가 올 때 이용했던 길은 쟤네들이 이용할 거 같아.”
“하아. 진짜.”
하나같이 떳떳하지 못한 상태라 그들 역시 뒷문을 이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가장 인적이 드문, 한적한 통로는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평소에는 온갖 소란을 피우면서 자신을 드러내기 바빴던 그들이, 지금은 도둑고양이처럼 몸을 숨기기 바빴다.
“아무래도 여긴 안 될 거 같아.”
“다른 길이라도 있어?”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이반은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길을 이용하려다 갑자기 들려온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에 근처 으슥한 그늘에 두 사람은 겨우 몸을 숨기고 있는 차였다. 바로 코앞에 있는 담을 넘기만 하면 되는데, 그 한 번을 못 하고 다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지금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조차 힘들겠어. 아니, 도대체 이게 몇 명이야? 어이가 없어서.”
“성급히 움직이는 것보다 차라리 저들이 다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안전하겠어. 괜히 여기서 걸리면 더 골치 아프니까.”
“그건 안 돼. 수아 님께서 계속 기다리고 계실 거야. 게다가…….”
에단이 그녀를 찾을지도 모른다.
로엘은 말끝을 흐렸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에단이 오늘은 미리 자라고 연통까지 해 주었다지만, 그의 마음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수아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수아의 궁에 있다고 하면 그가 거기까지는 오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혹시 하는 마음이 계속 들어 영 불편하였다.
“역시 안 되겠어. 다른 길을 찾아보자. 이대로 여기에서 밤을 지새울 수 없어.”
이반은 그런 로엘을 그저 바라보았다. 선뜻 그러자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무얼 저리 걱정하는 걸까.
자신과 함께하는 이 밤을 자신의 형제에게 들킬까 겁이 나는 걸까.
“움직이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녀와 함께 성을 빠져나오고 밤까지 지냈다고 하면, 에단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때도 자신의 형제는 언제나 그랬듯 심드렁하게 시시하다고 반응할까.
아니면 이번만큼은 자신을 죽이려 들까.
“……괜찮아.”
“응?”
“걱정하는 일 없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반은 자조적인 미소를 뱉었다.
참 못났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반은 낮췄던 몸을 조금 세우며,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아야 하는 건 저들도 마찬가지인지 움직임이 성급했다. 좁은 길을 따라 화려한 마차들이 줄줄이 멈춰 귀한 자제분들을 한 명씩 데려가니 갈수록 정체는 심해졌고 소란은 커져 갔다.
“차라리 저기를 노려 볼까?”
“같은 생각 중이었어.”
그러니 정작 정문 쪽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최소한의 인원만이 지키고 서 있어, 생각보다 쉽게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움직이자.”
“응. 몰브의 사병들도 죄다 여기…….”
“꺅! 도둑이야!!”
다만, 생각만큼 쉽지 않을 뿐.
몰브의 사병이 죄다 여기 있는 것도 맞고, 그들의 관심이 취해서 제대로 거동도 못 하는 귀빈들에게 집중되어 있던 것도 맞았다.
그렇다고 이 거대한 저택에 사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다가 깨어 지름길을 이용해 화장실로 가려던 어린 시종의 놀란 목소리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병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역시 사람은 처음 계획대로 해야 하는 거야.”
“하아. 돈다, 돌아. 뛰어!”
검은 복면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늘에 숨어 있으니 어느 누가 도둑으로 안 볼까.
몰브가 시종의 옷이라도 훔쳐 입었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도둑이다!”
“도둑이야! 잡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그런 사병들 사이로 요리조리 잘도 피해 빠져나갔다.
그 앞으로 마차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본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동시에 그 마차 위에 훌쩍 뛰어올랐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아무나 가서 잡으라고!”
뒤늦게 정신 차린 몰브의 사병들이 부랴부랴 칼과 창을 들이밀었지만 이미 두 사람은 담 위로 올라간 뒤였다.
마침 마차를 몰 말까지 준비되어 있으니 이대로 쭉 몰브로부터 벗어나면 완벽했다.
“네아. 이대로 쭉 가면 나오는…….”
“알아. 어딘지.”
손발이 착착 너무 잘 맞았다. 가볍게 마차에 묶여 있는 말을 풀어내고, 뭣도 모르고 덤벼드는 사병들을 상대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말 위에 올라타나 했다.
“그럼. 먼저 가. 내가 뒤를 봐줄…….”
“이반. 조심……!”
아주 잠시 로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는 것이 실수였다.
팟!
어느새 정비를 마치고 활을 잡은 몰브의 사병들은 이반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이를 먼저 알아챈 로엘이 아슬아슬하게 이반을 제치고 그 화살을 대신 맞아 버렸다.
“윽.”
“네아!”
“괜찮으니까, 출발해!”
사색이 된 이반이 그녀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로엘이 먼저 소리쳤다.
사병들이 사정없이 그들에게 화살을 쏘아 대고 있어서 로엘의 말대로 지금은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화살을 맞은 허리춤에서 피가 번져 가는 것이 검은 천 위로도 선명히 보였으나, 이반은 어쩔 수 없이 말을 출발시켰다.
“좀만 참아. 거의 다 왔어……!”
다행히 워낙 좋은 말들이라 좋은 기수를 만나니 순식간에 그들로부터 멀어졌다. 좁은 길에 마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처음부터 추격하기가 힘든 상황인 것도 한몫했다.
사병들이 어쩌기도 전에 훌쩍 멀어진 두 사람의 말은 아무도 없는 고요한 카이로스의 밤을 울렸다.
점점 더 창백해져 가는 로엘을 보며, 이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괜찮아.”
그런 이반의 마음을 훤히 아는 로엘은, 앞만 보며 달리면서도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괜한 자책하지 마. 같이 가 달라고 한 건 나야. 네가 품에 안고 있는 그 서류를 찾은 건 너고.”
달빛을 배경 삼아, 로엘은 슬쩍 이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숨이 차는지, 눈 밑까지 올려 쓰던 복면을 끌어 내리며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이반. 내 부탁 들어줘서.”
끝까지 도도하고 잘난 여자 같으니라고.
고삐를 잡은 이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품에 안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고집 센 그녀가 절대 허락하지 않으리란 걸 알아 위태위태하게 말 위에 있는 그녀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 대신 화살 맞은 건 별개니까, 이건 나중에 갚아야 된다, 너.”
말이라고.
일부러 그의 맘 편하라고 하는 농담인 걸 잘 알아 이반은 그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얼마든지. 이자까지 붙여서 받아.”
“너 후회할 텐데.”
정말 변한 게 조금도 없다. 그와 그녀의 관계는.
아무리 신분이, 환경이, 상황이 바뀌어도 여전히 편하고 좋을 뿐이다.
“그런 거 안 해.”
이반은 나지막이 답했다. 그녀 대신 죽으라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후회라니.
“말만 해. 뭐든 할 테니.”
이반은 자신과 나란히 달려 주는 그녀를 묵묵히 보았다.
달빛 좋은 이 밤. 아무도 없는 이 넓은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오래전, 나무가 우거진, 바람이 좋았던, 함께여서 더 좋았던 그때처럼.
***
“세상에……. 로엘 님!”
“마마!”
켈트가의 마차를 타고 무사히 로엘은 다시 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나갈 때는 그녀 혼자 나갔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반도 함께 들어왔다.
그에게 안겨 피를 흘리는 그녀를 보고 수아와 그녀의 시녀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 대신 화살을 맞았습니다. 일단 소독을 할 수 있는 걸 가져다주세요. 지혈부터 해야 합니다.”
로엘이 이렇게 되도록 뭘 했냐는 수아의 책망에도 이반은 침착하게 대처했다.
워낙 명문가 집안인 수아는 이반과 안면이 있었지만, 이리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행사 때마다 늘 에단의 그림자였던 이반이 이리 정색하는 것도, 초조해하는 것도 처음 본 수아는 이 남자가 로엘을 얼마나 아끼는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역시나, 지난 행사 때 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쥰. 얼른 뜨거운 물 준비해 주고, 붕대를 될 수 있는 대로 다 가져와.”
“네, 마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정신을 못 차리는 딜리아 대신 쥰과 베티가 빠르게 대처했다.
이반은 바로 뜨거운 물수건을 받아 들고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윗옷을 찢어 환부가 드러나게 했다.
감히 황제의 여인 몸에 손을 대는 것도 모자라 그 옷을 찢다니.
수아는 눈을 부릅뜨고 이반에게 한소리 하려다, 로엘의 상태를 눈으로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충 살대만 분질러 놓고, 촉이 꽂힌 곳을 보니 여전히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이 몸으로 어떻게 말을……. 황자님께서는 정말 무얼 하셨던 겁니까……!”
“황자님은 절 열심히 데리고 오셨답니다.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수아 님.”
내내 말이 없던 로엘이 겨우 입을 떼었다. 로엘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수아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어 주었다.
“죄송해요. 어려운 부탁도 드렸는데, 이런 민폐까지 끼쳤습니다.”
“민폐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렇게 다치고 오실 줄 알았으면 절대 그 부탁 들어 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로엘은 수아가 정말 고마웠다.
그녀가 궁에서 나가고 싶단 말에 이유 한 번을 묻지 않고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한 것도 그러하고, 이리 그녀가 다친 모습에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것도 그러했다.
정말 자매라도 된 거 같아 로엘은 이 와중에도 마음이 든든했다.
“네아. 아플 거야. 좀만 참아.”
“윽!”
이반은 로엘이 수아와 우애에 젖어 있는 틈을 타, 단번에 그녀의 활촉을 뺐다. 다행히 깊이 박히지 않아 수월히 빠졌지만, 그래도 피는 꽤 많이 났다.
잠시 마비되었던 감각이 다시 살아나자 로엘은 밀려오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깊숙이 박히지 않아 그나마 다행입니다. 따로 조치할 거 없이 지혈하고 있으면 피가 멈출 것 같습니다.”
이반은 아파하는 그녀가 안타까워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까는 저도 모르게 수아 앞에서 ‘네아’라고도 부르고, 반말도 썼다. 지금은 다시 존대를 하고 있지만.
로엘은 그 모든 것이 다 그녀를 위한 일임을 알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 참 여러번 그에게 고마웠다. 그러나 그 말을 차마 이들 앞에서 하지 못한 채 그저 마음 아파하는 그와 눈을 맞추며 괜찮다는 무언의 답을 해 줄 뿐이다.
“이제 저희가 하겠습니다. 이만 가시지요, 황자님.”
수아는 여전히 그녀를 지혈해 주고 있는 이반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정색하는 얼굴로 이반을 보며 말했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이반은 자신이 수아에게도 이 마음을 들켰단 사실을 깨달았다.
콜린의 말대로 참 많이도 흘리고 다녔나 보다.
“……지혈이 다 될 때까지만 있겠습니다.”
“황자님.”
수아의 목소리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눈에 이반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로엘이 수아와 자신과의 관계를 함부로 왜곡하지 말라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이 맞다. 그가 두 사람의 우정을 너무 쉽게 보았나 보다. 더 있겠다고 했다간, 진짜로 그를 칠 기세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반은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반은 시에라가 그녀를 제대로 지혈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뗐다.
한 번 더 뒤돌아 그녀를 보려던 걸 수아가 바로 막아섰다.
“황자님. 진심으로 로엘 님이 걱정되신다면 한시라도 빨리,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이곳을 나가세요. 이곳에 황자님이 계신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시지 않잖아요.”
냉랭하기도 한 수아의 말은 이반의 아픈 현실을 콕콕 짚었다.
수아는 이반에게 대놓고 경고하고 있었다.
로엘을 만나지 말라고.
“부디 황자님의 어리석은 행동과 당치 않을 욕심에 로엘 님이 다치지 않길 바랍니다. 안녕히 가세요. 황자님.”
수아는 자기 말만 하고 뒤돌아섰다. 연륜이 깊은 쥰 역시 그런 수아의 태도와 맞물려 바로 문을 닫아 버렸다.
단단히 닫혀 버린, 그 문 앞에 서 이반은 길 잃은 사람처럼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 언제부터 이리 장벽이 많았나.
참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도 했다. 그는 절대 안 된다고. 그러니 얼른 물러나라고.
“……우리 네아. 생각해 주는 사람 많네.”
이반은 쓴 미소를 삼켰다. 오랜만에 그녀와 함께한 이 밤이 결국 이렇게 끝나 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만 홀로 남겨 둔 채로.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서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