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당신의 마음
“우와아아아!”
넓디넓은 황제 전용 욕장에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먼저 들어가라고 그를 밀어 넣더니 한참 후에나 쭈뼛쭈뼛 들어온 그녀는 황금으로 뒤덮인 욕장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예상한 반응이라 에단은 피식 웃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녀에게 유혹이라니. 백 년은 빠르다.
“세상에……. 무슨 욕장이 이렇게 커요? 와. 여기에 들어간 황금만 해도 나라를 세우겠네.”
“그만 감탄하고 가까이 와.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이미 탕에 들어가 있는 그가 손을 올려 젖은 머리를 넘기자 물소리가 울렸다.
샹들리에 아래 훤히 드러난 그의 근육 진 상체. 물에 젖어 대충 넘겨진 황금빛 머리. 거기에 그녀를 부르는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황금 욕장에 놀라 잠시 수그러들었던 심장의 두근거림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타월로 몸을 돌돌 말아 야무지게 가린 그녀는 어색하게 멀찍이 떨어져 탕에 발을 담갔다.
멀어도 너무 먼 그 거리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니라 너야. 같이 들어오자고 한 거.”
“알아요. 나도.”
“내가 가?”
“내가 가요.”
머뭇거리던 그녀의 발걸음이 물소리를 내며 천천히 옮겨졌다.
에단은 다가오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뿌연 수증기 탓에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져, 정말 그녀가 여신이라도 된 거 같았다.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는 매끄러웠고, 물기를 머금은 머리는 더욱 진한 붉은색을 띠었으며, 머리칼을 바짝 올려 묶은 덕분에 드러난 가는 목선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타월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깊은 가슴골에 다다랐다.
모든 것이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만 봐요. 부끄러워서 얼굴이 터질 거 같아.”
“예뻐서 보는 거야. 너무 눈이 부셔서.”
저런 말은 도대체 뭘 먹으면 할 수 있는 건지, 안 그래도 붉은 그녀의 얼굴이 진짜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신의 그였기에 로엘은 맞닿은 단단하고 뜨거운 그의 일부를 고스란히 느끼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당기며 좀 더 그녀의 다리를 열었다.
“이제 그만 애태우지. 진짜 미칠 거 같은데.”
“할 말, 있어요.”
달아오르는 숨결은 비단 욕탕의 열기 때문만은 아님을 그도, 그녀도 알고 있다.
그는 살며시 뒤로 여며진 그녀의 타월을 끌러 내려 단번에 그녀를 나신으로 만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가슴까지 오는 물이 조금 가려 주는 듯했지만, 실상은 훤히 맑은 물 아래 그 몸이 다 드러나 있었다.
에단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올렸다.
“켈트의 영애 따위, 내 알 바 아니야.”
“읏……!”
새된 소리가 그녀의 입가에서 새어 나와 욕실을 울렸다. 그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쥘 때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도,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닿아 깊이 들이마실 때의 그 물소리도 서로의 귓가에 울렸다.
“하아. 에단.”
“모자라.”
참았던 것을 터트려 내듯, 그는 쉴새 없이 그녀를 몰아세웠다.
고개를 틀어 가며, 가벼운 그녀를 당겨 가며 에단은 좀 더 깊게 키스했다.
숨 한 모금마저도 다 삼켜 버릴 듯한 그에게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려갔다.
“에단……. 아. 윽!”
이미 진즉에 닿아 마찰하던 부분이 더 이상 참지 않고, 안으로 단번에 들어왔다. 갑자기 들이닥친, 그 거대하고도 뜨거운 차오름에 로엘은 고개를 뒤로 꺾고 허리를 튕겼다.
며칠 만에 하는 그와의 사랑이 유난히 버거웠다. 아니, 유난히 자극적이었다.
“아. 응. 아. 아!”
그래서 멋대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의 위에서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거렸다.
그가 움직이는 건지 그녀가 스스로 움직이는 건지도 모른 채, 규칙적인 마찰음과 참방거리는 물소리로 욕장을 가득 메웠다. 누가 들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 소리가 너무 야했다.
“에단. 잠깐. 아. 잠깐만……!”
“잠깐은……. 내가. 안 돼.”
열기에 흐려지는 그의 황금빛 눈에 흔들리는 그녀가 고스란히 담겼다.
로엘은 자신만을 바라봐 주는 그의 강렬한 시선을 차마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그의 목을 안고, 그에게 좀 더 밀착했다.
그만큼이나, 그녀 역시 그와 떨어지기 싫었다.
“진짜……!”
사람 미치게 했다.
맞닿는 가슴에 단단히 솟은 그녀의 정점이 쓸릴 때마다, 그녀의 아래가 반응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파 올 정도로 터질 듯한 그를 단단히 잡고는 놔주지 않는 그녀의 깊은 샘은 점점 더 그를 조여 숨을 헐떡이게 만들었다.
이미 이성이란 오래전에 날아가 버렸다.
“에단……? 읏!”
그는 느릿한 그녀의 움직임에 참지 못하고 결국 그녀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몸을 뒤로 돌렸다. 이어진 채로 그녀 뒤에 서 버리자 그녀는 자연스레 벽에 손을 짚고 그의 무게를 버텼다.
“아읏!!”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깊은 침입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그녀의 한쪽 다리를 든 채, 좀 더 깊숙이 그녀 안으로 들어온 그는 가차 없이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짜릿한 무언가가 안쪽에서 터지는 듯한 그 낯선 쾌락에 로엘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 에단! 아아!”
“로엘……!”
한쪽 발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그녀의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며, 그는 그녀의 출렁이는 가슴을 아래서부터 움켜쥐었다. 마치 스위치라도 된 듯 바로 반응하는 그녀의 샘은 그의 속도를 더욱 재촉했다.
빨라지는 그의 허리 운동에 맞추어 그녀의 허리도 움직였고, 참방거리는 마찰음에 따라 욕장의 물결도 더 크게 번져 갔다.
“아아아!”
“윽!”
짧고 굵은 그의 신음과 길게 이어지는 그녀의 교성이 함께 울려 퍼지며, 드디어 그녀의 샘에 그의 뜨거움이 가득 몰려왔다. 여운에 잘게 떠는 그를 끝까지 느끼며, 겨우겨우 버티던 그녀는 결국 무너져 내렸다.
“하아. 하아.”
그녀의 거친 호흡이 이어지고, 에단은 그런 로엘을 단번에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편히 그의 허벅지 위에 앉혀 그녀를 쉬게 해 주었다.
열기가 가시지 않는 그녀의 이마에 작은 입맞춤을 남기자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전기에 감전이 된 듯, 불에 화상을 입은 듯 여전히 뜨겁고 여전히 저릿했지만 그게 대수일까. 이토록 서로가 서로를 원했고, 그만큼 만족했는데.
뒤늦게 몰려오는 부끄러움도 여전했지만, 지금은 부끄러울 기운조차 없었다.
“원래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나는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어.”
“못 살아, 정말.”
당당하기도 한 그에게 그녀는 웃고 말았다.
찬찬히 수아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무언가를 해도 하려던 그녀의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그래도 다행히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그와 눈을 맞추었다.
“이제 말해도 되나요?”
“그래. 실컷 해.”
보통의 여자라면 다른 여자 이야기가 나오기만 해도 질투를 할 텐데,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먼저 그 이야기를 못 해 안달이었다. 그는 작은 한숨을 삼켰다.
질투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그래도 조금 서운하려 했다.
그녀의 입에서 다른 남자 이름만 나와도 그는 피가 거꾸로 솟구칠 것 같은데, 그녀는 너무 의연했다.
“수아 님께 들었어요. 수아 님과 폐하의 일을…….”
그런데 그녀가 꺼낸 말은 그가 그런 유치한 질투를 할 일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친해진 수아를 위해 무언가를 부탁하겠거니 했는데, 이건 꽤나 민감한 이야기였다.
그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확실히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입 무겁기로 유명한 수아 켈트가 이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했다는 것 자체가 의외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수아 켈트가 내 앞에서 자결을 하려 했던 걸 말하는 건가.”
그래서 로엘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가 무서워서, 뭐가 어려워서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아니면, 정인이 있던 것을 알고도 수아 켈트를 아카시스로 만들어 유폐시킨 것을 말하는 건가.”
에단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급속도로 냉랭해진 그 분위기에 로엘은 입을 다물었다.
그게 아닌데, 아무래도 그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보다.
“그것도 아니면, 그 모든 일을 한 나를 비난하려는 건가.”
그녀는 깊은 한숨을 삼켰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잘 모르나 보다.
이리 나신인 채로 그의 품에 안겨 있는데도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이리도 모르다니.
그녀는 차가워진 그의 눈에도 아랑곳 않고, 양손으로 그의 뺨을 세게 잡아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전부 틀렸어요.”
그러고는 이내 그의 이마에 자신이 이마를 맞대었다.
“나는 당신에 대해 말하려는 거예요. 그날의 일이 당신에게 상처가 되었을까 봐, 걱정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의 말에, 에단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그를 똑바로 직시하는 그녀의 붉은 눈은 언제나처럼 흔들림이 없이, 오롯이 그만을 보았다.
무서워하고 있던 것은 그녀가 아닌 그였나 보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실망할까 봐.
그래서 그녀가 남들처럼 그를 두려워할까 봐.
그렇게 멀어질까 봐.
“당신은 놀라지 않았나요?”
그 걱정 어린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녹였다.
“당신은 정말 괜찮았나요?”
에단은 그제야 다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 쓴 미소에 로엘은 그를 더욱 꼭 안았다.
수아의 마음 아픈 사랑 이야기에도, 그녀는 제일 먼저 그가 생각났다. 그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당시의 그도 수아만큼이나 어렸으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역시 고작해야 열일곱 살의 어린 소년였으니까.
갑작스레 즉위한 어린 황제에게 수아의 자살 시도는 분명 충격이었을 거다.
한 번도 ‘거부’당해 본 적 없던 사람이 처음 겪은 자신에 대한 거부.
그것도 목숨을 내놓는, 그가 끔찍이도 싫다는, 지독한 거부였다.
아무리 얼음장 같다는 그일지라도 어찌 마음이 쓰이지 않을까.
로엘은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그날 밤, 아무도 그를 위로해 주지 않았을 것 같아서.
“괜찮았어.”
그래서 그가 너무 외로웠을 거 같아서.
“너무 괜찮아서, 괜찮지 않았어.”
그는 눈을 감았다. 그를 안아 주는 그녀의 품에 안겨.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았던, 그날의 밤을 떠올렸다.
일부러 몰브의 영애보다도 먼저 찾아간 켈트의 방.
열자마자 보이는 건, 죽으려고 스스로 매달린 창백한 수아 켈트였다.
궁인들의 야단법석에도 그는 멀뚱히 그런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리 죽으려 드는데 왜 살려야 하는가?
그게 정말 그녀를 위하는 것인가?
그런데 또 한편으로 그에겐 그렇게 죽으려 드는 수아 켈트를 위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살렸어. 살아 주는 게 내게 도움이 되니.”
로엘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누군가 들으면 피도 눈물도 없다고, 참 지독하기도 하다고 비난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로엘은 조금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공허해 보였다.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피 한 방울 없는 차가운 얼음 인형인 양.
“화도 안 났고, 별로 놀라지도 않았어. 나는 수아 켈트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상처받을 일도 없었지. 다만, 좀 허무하더라.”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는 그 때문에 죽으려 든다는 사실이.
“그게 상처인 거예요.”
로엘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안다. 그가 수아를 살린 것은, 그리고 그대로 방치한 것은 그의 배려였다는 것을.
수아 켈트가 아카시스가 된 이상, 수아는 절대 리암과 행복해질 수 없다.
하지만 그대로 도망쳤더라면 켈트가는 멸족하였을 테니 평생을 죄책감 속에, 도망자로서 지옥에서 살아갔을 거다. 어쩌면 리암이 죽었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는 최악 대신 차악을 행했다. 켈트 가문을 살렸고, 정인인 리암을 살렸으며, 무엇보다도 그녀의 정조를 지켜 주었다.
그는 수아 켈트를 단 한 번도 안지 않았으니까.
“당신은 그때도 어른스러웠구나.”
그를 안은 그녀의 팔에 힘이 더 실렸다.
그날 밤 우는 수아에게 독한 말을 쏟아 내고, 그는 홀로 돌아와 그 넓은 방에서 혼자 밤을 지새웠겠지.
그때 어린 에단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 어둡고 차가운 방에서 홀로 남아, 누구에게 위로를 받았나.
“왜 네가 우는 거야.”
“몰라요. 그냥 눈물이 멋대로 나와.”
쉬지 않고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에단이 닦아 주었다. 그가 양손으로 닦아도 닦아도 좀처럼 그녀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가 흘렸어야 할 눈물을 대신 흘려 주듯 그렇게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당신 곁에 있어요.”
“그래.”
그는 자신의 목을 세게 안아 주는 그녀의 허리를 당겨 품에 안았다.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욕실 가득 울렸다.
상처받았는지도 몰랐던 그에게 그녀가 전해 온 위로가 너무 따뜻해서, 너무 울컥해서 그는 목이 메었다.
아기 때 이후, 그는 울어 본 적이 있었나.
이런 게 울고 싶다는 감정인가 싶다.
“내가 안 보내.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그는 대신 울어 주는 그녀를 품에 안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너무 좋아서, 너무 사랑해서 저절로 지어지는 그런 미소를.
그의 마음이 너무 따뜻해지는 그런 기분이다.
***
“케인 경께서는 오늘 로플리로 떠나십니다.”
“하. 소낙비는 피하겠다? 아무튼 뱀 같은 자식.”
제롬의 보고에 루카스는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니블에 대해 조사에 착수하자 귀신같이 니블 굴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수사에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심증은 케인이 확실한데, 그 물증을 잡기 위한 꼬리들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좌천이 오히려 그에게 명분을 줘 버렸네요.”
로엘 역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붙잡아 놓고 심문해도 모자랄 판에 수도를 떠나다니. 무언가가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다.
이 와중에 토르티아의 에리카 황녀마저 방문해 주신다니 에단은 그 문제로 내내 원로원에 붙잡혀 있었다. 그가 얼마나 짜증스러운 얼굴로 정무회의에 앉아 있을지 안 봐도 훤해 로엘은 또 한 번 한숨을 삼켰다.
아무튼 정말 무얼 하든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혈육이다.
“뭐 좌천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토르티아 사신은 오래전부터 몰브가 담당해서 영전해 왔습니다.”
“몰브가요?”
“예. 토르티아 사신단이 카이로스로 들어오는 길목인 로플리 영주권은 오래전부터 몰브 산하입니다. 북에서 카이로스 도성으로 들어오는 관문 같은 요충지이기에 상업도 발달되었고, 그만큼 치안도 좋습니다. 그곳의 영주세가 몰브가 재산의 큰 몫을 차지하지요.”
“흠. 북과의 교류가 커지면서 로플리도 꽤나 성장했겠어요.”
로엘은 지도를 보며 말했다.
확실히 좋은 자리이긴 했다. 만일 그가 북 정벌에 성공하여 통일이라도 한다면 로플리는 말 그대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는 알짜배기 땅이다.
영악한 몰브는 아마 오래전부터 그 또한 염두에 두었을 터.
그러니 그가 즉위하기 전부터, 아주 오랜 역사 동안 몰브가 그 요충지를 꿰차고 앉아 있는 거다.
“그럼 경비나 치안도 모두 몰브가 담당하나요?”
“기본적으로 중앙군의 관찰사가 감독으로 내려가긴 하지만, 그 병사들은 거의 몰브의 사병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로플리 관찰사로 가는 이들도 몰브가의 일원이지요. 지금 몰브의 영주는 케인 몰브의 숙부이며, 내려가 있는 관찰사는 조카뻘 됩니다.”
“완전 몰브 땅이네요.”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개국공신이라는 게 이래서 무서운 거다. 나라가 세워진 지가 언제인데, 그놈의 개국공신 공덕을 아직도 우려먹고 있다니.
에단이 저 땅을 뺏고자 한다면 모든 개국공신 가문들이 일어날 거다. 어느 나라든 매한가지인 저 고질적인 귀족 병폐에 로엘의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어쨌거나 케인은 이대로 안방이나 다름없는 로플리에 가 있다가, 사신단을 영전한다고 화려하게 도성으로 돌아오겠군요. 돌아오고 나선 한동안 사신단을 응대하느라 수사도 제대로 못 할 테고요.”
“진짜 야비한 새끼네 이거.”
노골적인 루카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은 능구렁이처럼 이리저리 잘도 피해 갔다. 답답한 그 상황에 아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건 니블이 들어오는 그 루트를 찾는 겁니다. 어디서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알아야 막든 찾든 할 테니까요.”
“그래서 육로며 해로며 가능성이 있는 곳은 싹 뒤졌는데 단서 하나 안 나오잖아. 그것도 몰브가 영역을 중심으로 빡세게 수색했다고. 그런데도 하나같이 니블의 니 자도 모르는 눈치였어.”
“그게 문제라는 거야. 어디서 누구로부터 어떻게 들어오는지도 모르는, 심지어 비싸기까지 한 그 마약이 어떻게 퍼져 나가는 거냐고.”
“그건 몰브가의 시종들이 그 시작일 거예요.”
로엘은 담담히 말했다. 니블의 속성을 조금만 알고 있다면, 그건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제가 말씀드렸듯 니블은 자랄 수 있는 환경도 한정적이고 재배하기도 까다롭지요. 대신 소량임에도 효과가 확실하고 중독되기 전까지는 흡입해도 티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가인 거고요. 그런 마약을 처음부터 평민들이 접할 수 있을 리 없을 테니, 당연히 그 시작은 우연이었을 겁니다.”
우연히 술을 나르고, 우연히 다과를 챙기다 맡아 본 그 잠깐의 향. 그 향과 그 순간의 감각을 잊을 수 없었을 거다.
“게다가 니블은 꽤 강한 최음제예요. 그렇다면…….”
“여자가 필요하겠네.”
그녀 대신 루카스가 말해 주었다. 로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가지고 나온 그 한 움큼. 그것이 시작이었을 거다.
“귀족들을 상대로 몰래 팔면서 아마 몰브가는 꽤 많은 수익을 냈을 겁니다. 그러면서 슬슬 욕심이 났겠지요. 귀족들만을 고객으로 상대하기엔, 한계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다 자신의 전 재산을 들고 오는 화류계 사람을 보며 생각했을 겁니다. 이거, 장사를 해야겠다고.”
그렇게 몰브가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기른 거다.
에단의 눈을 피해, 아무의 통제도 받지 않는 무법 지대서부터.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몰브가에 니블을 대 주는 공급책을 찾아야 해요. 그 공급책을 찾아야, 그들이 카이로스로 들어오는 길목을 찾아야 니블을 막을 수 있어요.”
단호한 그녀의 눈을 보며, 아론은 속으로 생각했다.
참 영리한 여인이라고.
상황 판단도 빠르고, 결단력도 있으며, 심지어 행동력까지 갖추었다.
적어도 그가 봐 왔던, 찻잔을 들고 왈츠를 추는 그런 아가씨들과는 참 많이 달랐다.
그 영민함이, 그 남다름이 어쩔 수 없이 아론의 눈길마저 끌고 있었다.
“……몰브가 작정하고 꼬리를 숨겼다면 당연히 시종들도 입단속을 시켜 놨을 겁니다. 어쩌면 다 죽였을 수도 있죠. 만약을 위해.”
“그렇다면 남은 건 예쁜 언니들뿐이겠군. 그건 내가 알아볼게. 케인 몰브가 주로 이용하는 곳이 어디인지.”
역시나 손발이 척척 맞았다.
로엘은 믿음직스러운 두 사람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문득 이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의를 하고 있다 보면 오겠거니 했는데, 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자 그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 로엘을 보며 콜린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뻔히, 누구를 찾는지 눈에 보였다.
“정무회의에 들어가셨습니다.”
“네?”
“이반 황자님께서도 폐하와 함께 정무회의에 가셨다고요. 다른 곳도 아닌 북방의 토르티아가 온다는데, 몇 년 동안이나 국경을 지킨 이반 황자님께서 빠지실 수 있겠습니까?”
가시가 잔뜩 돋친 콜린의 차가운 응대에 로엘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누가 보아도 이반의 심복으로 보이는 콜린은 아무래도 그녀가 여간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그녀를 대하는 태도나 눈초리만 보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이유 역시 그녀는 너무도 잘 알아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이반이 참 좋은 사람을 곁에 두었는가 싶을 뿐.
“그랬군요. 하긴. 당연하네요.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황자님의 의견이 가장 도움이 되겠어요.”
“……예.”
“그럼 폐하께서도 가장 의지하시겠군요.”
그녀는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그런 로엘을 콜린은 빤히 보았다.
황제의 아카시스를 이리 마주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건만, 이분은 참 많은 것들이 예외였다.
무엇이 이분을 이리 특별히 만드는지, 무엇 때문에 그분께서 그리 마음을 주시는지 콜린은 처음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콜린 경의 보고서를 보았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분을 마주할 때마다 콜린 역시 조금씩 이해가 되고 있었다.
왜 이분이 특별한지에 대해.
“노력이 많이 들어간 보고서였어요. 꾀를 부리지 않는 그 정직함은, 읽는 사람이 오히려 미안함을 느끼게 할 정도였어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바로 그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있는 겁니다. 그분을 대신해서.”
잔잔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번졌다. 칭찬이 참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항상 상대방의 눈을 마주하는 그녀는 어느 순간이든 진심으로 상대를 대했다.
아랫사람 입장에서 그 마음이 어찌 고맙지 않을까. 시녀들과 함께 발을 맞춰 걸어가며, 시답잖은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녀를 보며 콜린은 생각했다.
참 이반 황자님을 닮은 분이라고.
“수많은 북경에 대한 보고서 중, 폐하께서 제일 먼저 제게 건네주신 것이 콜린 경의 것이었습니다. 당시 콜린 경을 몰라 누구냐 물으니 폐하께서 그러셨지요. 유능한데 성실하기까지 해서, 언제나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오는 인재라고. 곁에 두고 싶었으나 나의 형제가 먼저 청하여 기꺼이 그리하라 했던 인물이라고.”
이리 시도 때도 없이 ‘그분’을 치켜세우는 것 역시 빼닮았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표현하지 않으셔도 그분 역시 알고 계세요. 누가 얼마나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래서 폐하께서 콜린 경을 많이 아끼신답니다. 그걸 콜린 경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쓸데없이, 사람의 속을 꿰뚫는 것마저도.
콜린이 어떤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는지, 몇 번 보지 않아도 그녀의 눈에는 그 속이 다 보였나 보다.
콜린은 물끄러미 그녀를 다시 보았다. 여전히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지나치게 호의적이었다. 아니, 호의를 넘어 따뜻하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다른 쓸데없는 배경 따윈 보지 않고, 그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콜린 역시 진심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그럼 되었습니다.”
로엘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녀는 정말 그걸로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콜린은 그것마저도 참 이반을 닮았다 생각했다.
네 마음이 그러하면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더 이상 그에게 충성심을 강요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콜린은 이반의 그런 점이 참 좋아, 그녀가 이리 이반을 닮은 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이럴수록 아쉬움과 안타까움만 커질 뿐이므로.
“꽤 담소가 즐거우신가 봅니다?”
“황자님.”
어느새 이반이 그들의 뒤에 나타났다. 언제 들어왔는지 그는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든 표정으로 서 있었다.
로엘은 콜린과 대화할 때와는 다르게 바로 차갑게 표정이 굳었다.
“회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계속하고 있지요. 귀하신 분께서 친히 오시니.”
로엘은 눈썹을 찌푸렸다 참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북방 출전 코앞에, 니블마저 터진 이 와중에 방문이라니.
에리카 네아레스는 진짜 무얼 해도 그녀에게 방해만 되는 인물이다.
로엘은 저도 모르게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이리 갑작스럽게, 멋대로 찾아오는데 예의를 차려야 하나요? 이건 엄연한 외교 결례입니다.”
“뭐 오라는 것도 아니고, 한 나라의 황녀가 직접 오시겠다는데 못 오게 막을 수도 없지요. 문전박대 하는 건 전쟁하자는 거나 진배없으니.”
“그럼 대충 하라 하세요. 괜한 세금 낭비하지 말고.”
“그래도 국격이라는 게 있습니다. 마마.”
꼬박꼬박 받아치는 이반이 얄미워 로엘이 매서운 눈총을 보냈지만, 그는 오히려 능글맞게 웃을 뿐이다.
에리카와 로엘의 관계가 어떠한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이반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유난스럽게 못된 그 황녀를 굳이 로엘과 다시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은 것도 그의 속마음이었으나, 그러할 명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 나름대로 마주침을 최소한으로 하려고 노력 중이다.
“마마께서 직접 응대하실 일은 별로 없으실 겁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그러니 괜한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런 이반의 마음을 로엘이 모를 리 없기에 로엘은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소리 소문 없이 그녀를 배려하고 있단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반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만 보는 그녀에게 싱긋 미소 지었다.
“정 싫으시면 어디 좀 나가 있을까요? 아예 마주치지 않게.”
“됐습니다.”
아무튼 조금을 진지하지 못하지.
그녀는 일부러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는 그가 매우 얄미워 그대로 그의 이마를 밀어 버렸다.
조금만 다가서도 쪼르르 도망가 버리는 그녀가 귀여워 이반은 그저 웃어 버렸다.
보고 있는 콜린은 속이 타들어 갔지만.
“왜 이렇게 일찍 오셨습니까? 회의는 아직 다 안 끝난 거 같은데.”
“뭐 나야 정보만 주면 그만인 거고, 전담은 몰브니까. 이게 더 중요해서 빠져나왔지. 토르티아 영접은 오랫동안 케인 몰브가 담당해서 솔직히 그쪽이 더 베테랑이야.”
이반이 오자 이야기 중이던 루카스와 아론도 다가왔다. 몰브의 이야기에 아론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상하게 몰브는 예전부터 그렇게 토르티아 사신 영접에 집착했습니다.”
“로엘 마마가 이곳에 온 것도 몰브의 추천이 가장 컸을걸요?”
“맞습니다. 몰브가 주도해서 추진한 국혼이었습니다.”
“되게 아이러니하네. 다른 아닌 로엘 마마를 몰브가 데려왔단 사실이. 세상일 이래서 아무도 모른다는 거구나.”
로엘도 루카스의 말에 작은 실소를 뱉었다. 그와 그녀가 이렇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아리스 몰브가 유독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자기 손으로 굴러 들어온 돌, 로엘을 택한 셈이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까.
“아무튼 특별히 이권도 없어 보이는데도 몰브는 늘 토르티아를 전담해 왔어요. 이번도 다름없고요.”
“듣기로는 로플리에서 사비까지 털어서 호위를 한다던데요? 그런 지극정성이 또 없답니다. 이거 북방 통일을 염두에 놓고 무슨 사업권 같은 거 미리 약속받은 거 아냐?!”
순간 로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도 모르게 이반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동그렇게 커진 눈으로 로엘을 보았다.
“설……!”
“자.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이리 모여 있으면 괜한 의심을 살 것도 같은데.”
이반은 그녀의 말을 끊어 버리고, 그만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그의 말에 아론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어쨌거나 원로들은 지금 사신 맞이에 바쁜데 우리만 이리 떨어져 있을 수 없지요. 아무리 몰브가 전담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일이 있으니까요.”
“맞아. 황궁에 오면 어쨌거나 우리 황군이 호위하는 거라고. 아오. 또 귀찮아지겠네.”
루카스가 투덜투덜거리며 먼저 자리에 일어나자 나머지 사람들도 자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론과 콜린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루카스 뒤를 따라 나가자 자연히 로엘과 이반만이 남았다.
로엘이 먼저 이반의 팔을 잡았다.
“같은 생각 한 거, 맞지?”
급하긴 급한가 보다. 그녀가 먼저 그를 잡아 세운 것은 물론, 이리 반말이 먼저 튀어나온 것 보면.
이반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결국 심각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맞아.”
“그런데 왜 말 못 하게 하는 거야?”
“토르티아가 주범이라면 이건 몰브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야. 아주 악질적인 선전포고라고.”
로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반의 말이 맞았다. 동맹국에 마약을 밀매시키다니. 이건 전쟁하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로엘은 덜덜 떨려 오는 손에 힘을 꼭 쥐었다.
아무리 토르티아가 바닥을 친다고 하나, 이렇게까지 하다니.
마약 밀매라니. 너무너무 낯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아닐 거야. 설마…… 설마 토르티아가……. 아무리 갈 데까지 갔어도 이건 아니지.”
“하지만 토르티아라면, 이 모든 것이 설명돼.”
북쪽에서 자라나는 니블을 카이로스로 들여오는 것도, 그 어떠한 밀매 항을 통하지 않는 것도, 케인 몰브가 주요 공급책이라는 것도 전부 다 설명이 되었다.
로엘의 이반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전쟁이지. 당장.”
이반은 고민하지 않고 단번에 답했다. 그 단호한 대답에 순간 로엘은 말문이 막혔다.
“내 형제는 이 일을 절대 그냥 넘기지 않아. 토르티아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어. 충분히.”
‘토르티아의 멸망이라. 나에겐 너무도 쉬운 일이지. 너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고.’
그 말을 하던 그가 생각나 로엘의 미세한 떨림이 더 심해졌다.
분명 그녀는 토르티아의 멸망을 바라고 이곳에 왔다.
그 나라가 너무 미워서. 그 붉은 민족이 너무 야속해서 그 모든 것을 망가트리려 이곳에 왔다.
그런데도, 이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평생을 바치던, 그녀의 조국이 무너지는 건 싫었다.
그렇게 두기엔 토르티아에 평생을 바친 그녀의 아버지가 너무 불쌍했다.
“……확인해야 해.”
로엘은 이반을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이반과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흔들림 없는 그 붉은 눈은 이미 결심을 마친 듯,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래서 이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 공주님이 또 무모한 짓을 하려나 보다.
절대 물러설 그녀가 아님을 알기에 이반은 그녀를 말리지 못한 채 그저 그 곁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
“토르티아 황녀가 카이로스로 갔다고?”
“예.”
데릭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카이로스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주기적으로 상납을 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황녀까지 직접 행차하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데릭도 의아한 눈으로 보고를 하는 버리를 보았다.
“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버리의 말에 데릭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현 토르티아의 상태는 그 누구보다도 테바로스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지금 토르티아를 가장 위협하는 것도, 가장 괴롭히는 것도, 모두 테바로스였으므로.
제이드 서거 이후 테바로스는 오랜 침묵을 깨고 토르티아를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는 아주 양호했다. 토르티아가 독점하던 북방의 상권마저 차근차근 잠식해 갔으니, 말 그대로 테바로스는 토르티아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그런 토르티아가 갑작스럽게 카이로스로 간다?
분명 무언가 그들이 모르는 일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혹시 지원군이라도 요구하려는 걸까요? 명색이 동맹국인데.”
“하. 속국도 그런 속국이 없는데, 동맹이라니. 카이로스가 잘도 그리 생각하겠다.”
“아니면 상납금이라도 줄여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어요. 지금 토르티아 사정이 매우 안 좋으니까요.”
“그 역시 카이로스가 응할 리 없어. 지금의 카이로스는 토르티아에게 조금도 아쉬울 게 없으니. 혹 완전한 항복을 요구한다면 모를까.”
데릭은 담담히 말했다. 절대 대수롭지 않은 말을.
토르티아가 무얼 하건 이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카이로스가 움직인다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다.
최근 북방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카이로스의 국경은 그 누구도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그 국경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카이로스 군대는 일말의 자비 없이 단번에 북방의 소국들을 무너트려 버렸다.
그러니 더더욱 북방의 이들은 카이로스의 국경을 감히 넘보지도 않았다.
그런 카이로스가 언제까지든 국경에 머물 거란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에단 황제의 칼은 반드시 북방을 향하게 되어 있어. 그 시작이 토르티아일 테고, 그 끝은 테바로스야.”
“중부 사람들에겐 토르티아가 곧 북방이니, 당연히 시작은 토르티아이겠지요. 그 토르티아를 넘고 나서야 우리가 보일 테고요.”
“지금까지는 그러했겠지. 하지만 앞으론 아냐.”
데릭은 단호히 말했다.
“당연히 아니지요.”
버리 역시 그런 데릭의 결의에 찬 말에 기꺼이 동의했다.
더 이상 토르티아가 북방의 전부도 아니며, 북방의 패권국도 아니다. 그들의 시대는 제이드 네아레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북방의 주인이 일어나려 한다.
그 시작이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어린 황제, ‘데릭 테바로스’.
“카이로스는 반드시 북으로 온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북방의 패권을 잡아야 해. 그래야 카이로스를 막을 수 있고, 그래야 카이로스에게 잠식당하지 않아.”
데릭은 상황 판단이 빠른 황제다.
“카이로스가 토르티아를 넘는 그 시점에선 이미 늦어. 우린 그 전에 먼저 카이로스를 막을 모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그래야 우리도 북을 지키고, 나아가 중부로 진출할 수 있어.”
그는 세 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고, 두 보 나아가기 위해 한 보 물러날 줄 아는 인내를 가졌으며, 하나의 목표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결단력을 지닌 자다.
그 덕에 그 많은 형들을 제치고 지금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야망이 절대 황제가 되는 것에서 끝날 리 없다.
“우리라고 언제까지 북에 머물러야 하는가? 어째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만 북방의 꿈을 꿀 수 있는가? 어째서 테바로스는 풍요로운 땅, 중부로 갈 수 없는가? 테바로스는 북방을 제패하고 중부로 간다. 그러니 절대 카이로스가 북방을 잠식하게 두지 않아.”
버리는 데릭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북방의 그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한, 바로 그 꿈을 데릭은 이리 당당히 좇아왔다.
그래서 이분께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나의 주군.”
버리는 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데릭 역시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충성 맹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황위 계승권과 거리가 멀던 시절부터 버리는 그의 곁에 있었던 심복이기에, 데릭은 버리가 언제나처럼 그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 기꺼이 믿었다.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는 이제까지의 황제들과 달라. 그동안의 북방 정벌 실패를 되풀이할 만큼 어리석지도, 무모하지도 않지. 그러니 더더욱 우리는 그를 경계해야 해.”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에단 황제의 행보를 보면 가히 경이롭다 할 수 있지요. 그가 중부를 제패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전쟁한 일수는 3년이 조금 넘을 뿐입니다. 그런 그가 한동안 전쟁을 쉬고 있어요. 이건 누가 보아도 전열을 가다듬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군대는 북을 향할 테고.”
거기에, 그의 곁에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바로, 제이드의 딸, ‘로엘 네아레스’.
한때 그의 정혼자였던, 그 붉은 머리의 공주가 에단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데릭은 계속 마음 쓰였다.
그녀는 분명 카이로스에 팔려 간 것인데도 왠지 데릭은 그녀가 팔려 가라면 그대로 얌전히 따르는 사람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황자님께서도 황자님 인생을 사세요. 태어난 순서 따위에 얽매여 살지 마시고.’
절대 그렇게 시키는 대로 순순히, 포기한 채 살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부모의 복수를 하는 편이,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드는 편이 훨씬 그녀에게 어울렸다. 그 당돌한 여자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이번 일은 잘 주시해. 토르티아 황녀가 왜 카이로스에 갔는지. 카이로스에서 무슨 말들을 주고받는지. 토르티아 첩보든, 카이로스 첩보든 총동원해서 알아와.”
“예. 폐하.”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말씀하세요.”
“로엘 네아레스에 대해 알아봐.”
버리는 뜻밖의 이름에 잠시 고개를 들어 데릭을 보았다.
이미 지나가 버린 정혼자에 대해, 그것도 진즉에 끈 떨어진 그 공주에게 뭘 알아보라는 건지 버리는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데릭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일자로 다물어진 입을 보건대, 이미 데릭은 마음을 굳혔고, 그 명령을 철회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다시 말해 토 달지 말라는 것.
“예. 폐하. 토르티아의 공주가 카이로스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워낙 카이로스 황실이 보안이 철저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동원해 볼게요.”
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아도 그녀의 근황 정도야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딜 가든 눈에 띄는 여자라는 걸, 다른 누구도 아닌 그는 너무도 잘 아니까.
무엇이 되었든 그녀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이 괜한 신경 쓰임이 조금은 가실 것 같다.
그게 안 좋게 지낸다는 소식이든, 좋게 지낸단 소식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