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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 꼬리가 길면 밟힌다 (17/69)

Chapter 16. 꼬리가 길면 밟힌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갑자기 내려진 소집령에 신나게 놀던 루카스는 물론, 오늘만큼은 일찍 귀가한 아론까지 전부 모였다.

그렇게 와 보니 기다리고 있는 건 평민 차림의 에단과 로엘,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말도 안 되는 악재였다.

“……마약은 절대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한시도 조치를 지체할 수도 없고요.”

“네. 맞는 말이에요. 니블은 마약 중에서도 중독성이 아주 강하기로 유명해요.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 본 사람은 없다는 마약인 만큼, 초장에 잡아야 합니다.”

아론의 말을 로엘이 받았다. 이번 일만큼은 그녀도 몸을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만큼 니블은 위험해도 너무 위험했다.

“니블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기력증이에요. 강도가 세질수록 환각도 강해지고, 그 이후 찾아오는 무기력증은 더 강해지죠. 니블에 중독된 사람의 대다수는 밥을 먹지 않고 약만 하다, 그 중독증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약이 중부보다 자유로운 토르티아에서조차 니블만큼은 금지품이에요.”

갈수록 모두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마약을 금지시키는 카이로스로서는 이러한 마약 자체가 유통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반 역시 굳은 표정으로 로엘의 말을 이었다.

“니블은 한때 북방의 소국에서 군사용으로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환각 상태일 때는 힘이 솟고 용기가 생기니, 적절한 양만 이용하면 전투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지요. 다만 그것이 오래가지 못할 뿐.”

“니블은 군 전체를 중독시켰고, 뒤늦게 금지시켰지만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국방이 무너졌고 그 나라 역시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카이로스 군사들 사이에도 니블이 번지기 시작한다면…… 폐하 북방 정벌은 접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쾅 소리를 크게 내며 루카스가 세게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들여온 거야……!”

루카스는 술이 단번에 깰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루카스의 과한 반응에도 다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북방의 꿈은 이들 모두가 몇 년을 준비해 온 일.

니블은 그 몇 년의 노력을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몰브가가 의심됩니다.”

로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로엘에게로 쏠렸다.

믿기지가 않는다는 그 놀란 눈들을 보면, 그리고 뒤늦게 분노하는 그 반응을 보면 루카스가 당장이라도 케인의 목을 따러 달려 나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제가 얼마 전 케인 경과 부딪혔을 때 미세하지만 분명 니블의 향을 맡았어요.”

“케인 몰브. 이 개자식!!”

루카스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고 아론의 표정은 더 심각해졌다. 아론은 차가운 얼굴로 로엘에게 따지듯 물었다.

“확실하십니까? 지금 마마께서 하신 말씀, 거짓이면 책임지셔야 합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합리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로엘은 그런 아론에게 물러서지 않았다. 신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이 일을 해결하는 거 역시 중요했다.

로엘은 아론의 눈을 똑바로 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까 말씀드렸듯 니블은 북방에서도 금지품입니다. 한때 북방 국가들을 휩쓸었던 그 마약은 쉽게 구할 수 없죠. 그래서 제작부터 구입까지 철저히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그만큼 돈도 많이 듭니다. 그러니 자연히 그 수요층은 유흥을 즐기면서 부유하기도 한 황족, 혹은 귀족계층이 되었지요.”

“그래서 몰브가 북방 귀족의 유흥 거리라도 가져왔다 이겁니까?”

“그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요 애초에 귀족들의 사치품을, 서민이 백성에게 유통할 목적으로 가져왔을까요? 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시작은 귀족이었을 거예요.”

타당한 추론이다. 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이 이상할 정도로 그녀에게 날을 세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는 트집을 잡는 사람은 아니다. 아무리 싫은 상대라도 상대의 말이 타당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자이기에 콜린과 그렇게 치고받고 싸우면서도 함께할 수 있었다.

콜린은 아론을 살피며 꽤나 논리적인 그녀의 말을 계속 들었다.

“게다가 북방과의 교역은 이제 막 시작한 초기 단계죠. 사실 명목상의 화친일 뿐 카이로스와 토르티아는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입니다. 그러니 카이로스로 들어오는 물품은 물론, 어린아이 한 명까지 철저히 조사한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그런 북방과의 마약 밀수를 과연 일개 상인이 할 수 있을까요?”

단호한 그녀의 태도는 이미 확신에 차 있었다.

“이건 토르티아의 무역 물자가 들어오는 항구도시의 상권을 잡고 있는 귀족 이외에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몰브는 호보체의 몰락 이후 그 관리를 맡았지. 수로 사업 지원의 대가로.”

드디어 에단이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지금 그의 심기가 얼마나 안 좋은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론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

만일 정말 몰브가 배후라면 이건 정국을 뒤흔드는 수준이 아닐 거다.

잘하면, 그 오랫동안 권세를 누리던 몰브 자체를 무너트릴 수 있는 그런 사안이다.

“북방 출정 계획을 중단한다.”

“네?! 폐하 안 됩니다!”

깊은 고민 끝에 내린, 정말 뼈아픈 그 결정에 바로 루카스는 반대했다. 좀 더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루카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출정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출정 날짜만 기다리며 전투 사기를 올려놨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갑자기 취소라뇨. 기밀을 유지하면서 준비하느라 모두가 힘들었고, 그만큼 기대도 컸습니다. 한번 꺾인 사기는 절대 처음 그 수준으로 올릴 수가 없어요!”

“올려놔.”

“폐하!”

“그만큼 심각하다는 겁니다, 대장군.”

가만히 있던 이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에단이 폭발 직전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반은 우선 루카스부터 말려야 했다.

“만일, 황군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니블을 했다면. 그래서 모두 다 낯설고 힘든 환경인 북방 정벌에서 그러한 니블에 의존한다면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몇 년간의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겠지요.”

“우리 황군 중엔 절대 없습니다!”

“그걸 증명하세요. 아니면 사실로 만들든가.”

로엘의 목소리 역시 평소보다 무거웠다.

“전장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습니다. 갑자기 역병이 돌 수도 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최악의 날씨를 맞닥트릴 수도 있어요. 그런 변수 하나하나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것쯤은 제가 여기 있는 모든 분들께 감히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 루카스 역시 잠시 잃었던 이성을 찾았다. 한 나라의 장군으로서 로엘의 말이 다 맞았다.

“니블은 그러한 변수 중 하나입니다. 그것도 전쟁을 충분히 패배로 이끌 수 있는 엄청난 변수지요. 그걸 뻔히 알면서도 묵과하고 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확실히 해야 합니다. 황군에 니블을 단 한 번이라도 사용한 이가 있는지. 있다면 당연히 제외시켜야 하며, 모두에게 똑똑히 교육시켜야 합니다. 전쟁 중 그 어떠한 마약이라도 손댔을 시에는 군법으로 즉결 처형이라고.”

로엘은 이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로엘이 하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물론 에단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로엘은 말을 이었다.

“만일 정말 몰브가가 배후라면 이 일의 조사는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감찰하는 사람이 범인인데 어떻게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눈 가리고 아웅을 하든, 아니면 잠시 숨기고 있든 어떤 수를 써서라도 피하겠지요.”

로엘의 눈이 다시 에단에게로 향했다. 에단의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할지 그저 안쓰러웠다.

참 별의별 일이 다 터진다.

생각을 정리한 에단은 잠시 의자에 기댔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대장군 루카스.”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의 부름에 루카스가 무릎을 꿇는 건 거의 자동이었다.

“프래카를 비롯한 황군 전체. 책임지고 조사해.”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아론. 콜린”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문인은 문인의 예로서, 무릎 대신 허리를 깊이 숙였다.

“도성 내의 모든 니블 굴을 찾아서 처리해.”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다. 이럴 때는 또 합심이 잘 되는 두 사람이다.

“황자, 이반.”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니블의 본거지, 몰브의 꼬리를 잡아.”

역시나 가장 까다롭고, 가장 어려운 일은 이반을 시켰다.

믿음을 빙자하여 늘 가장 위험한 것만 시키는 거 같아 콜린은 속으로 작은 짜증을 냈다.

이반에 대한 에단의 신뢰를 반증한다 하더라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의 하나라도 몰브를 조사하다 일이 틀어지면, 자칫 이반이 모든 것을 뒤집어쓸 수도 있는 일이다.

물론 이반이야 그런 복잡한 계산 따위 하지 않고, 자신의 형제의 부름에 언제나처럼 답했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일사천리로 일을 분담하여 명을 내린 에단의 결단은 명확했다.

한시라도 빨리 니블의 싹을 잘라 사건을 바로잡는 것.

그 칼의 끝이 다른 누구도 아닌 몰브가를 향할지라도.

“모든 일은 철저히 기밀에 부친다.”

“예. 폐하!”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로 겹쳤다. 에단에게 고개를 숙인 그들을 보며 로엘은 그제야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토록 믿음직스러운 이들이 있는데, 어떤 일이든 무얼 걱정할까.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다.

그가 카이로스 황군 부대를 선황 대신 이끈 것이 고작 열두 살 때의 일.

그 누가 그의 통솔력을 의심할까.

로엘은 흔들림 없는 그의 눈에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그가 이리 굳건히 버티고 있는 한 이번 일 역시 잘 지나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시끌벅적하고 화려했던 연회가 끝나고, 로엘은 꽤 오랜만에 수아의 정원에 왔다.

그녀 입장에서야 갑자기 터진 니블 사건으로 인해 에단을 돕느라 오랜만인 거였지만, 수아 입장에서는 영문을 알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

로엘은 아직 니블에 대해 말할 수 없어, 조금 난감한 상황이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녀답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덕분에 오랜만에 두 사람의 티타임에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로엘 님.”

“네, 네!”

그런 로엘의 마음이 너무도 훤히 보여 수아는 그저 미소 지을 따름이다.

오히려 긴장해야 할 쪽은 리암을 들킨 수아이건만 어떻게 된 것이 로엘이 더 긴장하고 있었다.

“최근에 바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게…….”

“말씀 않으셔도 됩니다, 로엘 님. 저는 그저 오랜만에 로엘 님과 차를 마시고 싶어서 연락드린 거예요.”

이미 쥰을 통해 로엘이 한동안 낮에 처소를 비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처소에 없다는 것은 에단의 곁에 있다는 것이고, 그 의미는 무언가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수아가 알 필요가 없다.

폐하와 관련되었다면, 수아는 일말의 관심도, 마음도 없으니까.

“……감사해요. 수아 님. 저도 수아 님을 오랜만에 뵈어 좋아요.”

로엘은 그제야 편히 미소 지었다. 바로 긴장을 풀고 평소와 같이 오도독 과자에 먼저 손을 뻗는 그녀가 수아는 그저 귀여울 따름이다.

“로엘 님. 지난 연회 때는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수아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을 들이켜며 실은 그녀를 부른 진짜 이유를 꺼냈다.

“그 프래카는 켈트가의 사병이었고, 저와 한집에서 함께 자랐으며, 제가 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제 호위 기사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연인이죠.”

찻잔을 들던 로엘의 손이 순간 멈췄다. 로엘은 입가로 가져가려던 찻잔을 그만 내려 두고 수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자 수아 역시 그런 로엘은 직시했다.

황제의 아카시스로서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이는 곧 죽음이다.

그런데도 수아는 조금의 망설임조차도, 일말의 흔들림조차도 없었다.

“로엘 님께서 그러셨죠. 저와 폐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가 말하고 싶을 때 말해 달라고. 그럼 그때 들어 주시겠다고. 아무래도, 그날이 오늘인가 봅니다.”

수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이 끔찍한 황궁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아카시스에게 리암에 대해 말할 날이 올 줄이야.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오로지 에단과 수아만이 알고 있는 그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날이 올 줄 정말 몰랐다.

그러함에도 수아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로엘 님.”

“네.”

아마 그 상대가 로엘이기 때문이겠지.

“리암은 저를 지켜 주는 기사였고, 저는 그의 아가씨였어요. 그래서 늘 함께였지요. 언제나 자신보다 저를 더 위해 주는 그를 저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리암을 생각하는 수아의 얼굴은 평소의 그녀와 참 달랐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해야 할까.

“나이가 들면서 신분 차이를 깨달았는데도, 저는 한 번도 리암과의 미래를 포기한 적이 없었어요. 저는 막내딸이었고, 부모님은 인자하셨으며, 제가 잘 말씀드리면 제 행복을 위해 도와주실 거라 믿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리암을 너무 사랑했어요.”

수아의 미소가 진해졌다. 이토록 아픈 사랑을 하여도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이 이리 아름답다는 것을 로엘은 처음 알았다.

그래서 그저 묵묵히, 그리고 담담히 수아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녀가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아무 눈치 보지 않고 그녀의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도록.

“그런데, 폐하께서 즉위하시고 그분은 저를 아카시스로 지명하셨어요.”

에단이 등장했다. 리암을 이야기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목소리가 낮아지고 표정이 사라졌다.

바로 냉정해진 수아의 모습에 로엘은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연회에서 잠시 마주친 때 역시 이랬다. 에단은 수아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고, 수아 역시 고개를 조아릴 뿐 전혀 그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는 사람인 양. 두 사람은 정말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다.

“그분께서는 균형이 필요하셨겠죠. 몰브과 켈트의 적절한 균형. 그로 인한 정국의 안정까지. 아버지 역시 그런 폐하의 마음을 아셨기에, 고민 않고 저를 궁으로 보내셨습니다. 제 생각 따위는 전혀 묻지 않은 채.”

수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참 많이 울었다. 리암은 많이도 맞았고.

“아버지는 리암을 죽이겠다고 하셨죠. 어머니는 저에게 무릎을 꿇고 눈물로 비셨구요. 정계에 진출한 오빠도, 다른 일가친척들도 오로지 저만 바라보았어요. 제가 황제의 여인이 되어 가문에 득이 되어 주기를요.”

그래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리암을 두고, 그렇게 그녀는 궁에 들어와 황제의 아카시스가 되었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그날. 저는 몸도, 마음도 이미 죽은 사람이었어요.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아무런 기대도 없었습니다. 저에겐 그 사람이 없으면 살아갈 아무 의미가 없었거든요.”

잠시 찻잔을 향했던 수아의 눈이 다시 로엘을 향했다. 그리고 한숨, 뜸을 들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죽으려 했습니다. 첫날, 그분 눈앞에서.”

찻잔을 들려던 로엘이 순간 덜그럭 소리를 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도 다물지 못하는 로엘은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었다.

그에 비해 수아는 너무도 차분히 이야기를 이었다.

‘그날’의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이야. 하고 있는 이 순간도 믿기지가 않았다.

“궁인들이 다 나가고 아무도 없는 그 방에 홀로 남으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리암 아닌 다른 남자에게 안긴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했고, 무서웠습니다. 설사 그게 황제 폐하일지라도요.”

그래서 시트를 끌어다 목을 맸다. 불행히도 죽기 전에 폐하께서 도착하셨지만.

궁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발을 애써 들 때도 그는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들어온 그대로 서서 뒷짐을 진 채 발버둥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어찌나 소름이 돋던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시야가 흐려질 때쯤에야 그는 검을 뽑아 단번에 그녀가 매달린 천을 잘랐다.

그녀가 그대로 땅에 떨어지고 숨을 몰아쉬며 헛기침을 해도 그는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았다.

‘죽을 용기도, 죽을 자격도 없는 주제에 어리석기까지 하구나.’

궁인 모두가 나가서야 그는 한쪽 무릎을 꿇어 거칠게 그녀의 턱을 잡아 눈을 맞추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본 그 황금의 눈은 그녀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네가 이대로 이 방에서 죽어 나가면, 네 아비는 정인을 가진 딸을 아카시스로 올려 황제를 능멸한 대역 죄인이 된다. 켈트 성을 가진 모든 아들들은 피를 토하며 죽어 갈 것이며, 켈트 성을 이은 모든 딸들은 알 수 없는 곳들로 팔려 가겠지. 전부 네가 이리 무책임하게 굴어서.’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라 수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꼭 쥐었다.

‘죽을 용기도, 가문을 버릴 자신도 없으면 숨소리 내지 말고 살아. 그렇게 죽은 듯이 살다 이 황궁 안에서 죽어. 그래야 네 아비가, 네 어미가, 네 일가친척들이 산다.’

그녀 하나쯤은, 아니 그녀의 가문쯤은 단번에 몰살시킬 수 있다는 그 차가운 황금의 눈.

잊었던 그분에 대한 공포는 아직 그녀의 안에서 여전한가 보다. 그러니 이리도 몸이 떨려 오는 거겠지.

로엘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수아의 떨고 있는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수아와 눈을 맞추었다.

“수아 님.”

순간 수아의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로엘은 그런 수아 대신, 손수건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이제 됐어요. 그만 말씀하셔도 돼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로엘은 충분했다. 어려울 것도,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황제는 켈트의 영애가 정치적으로 필요했고, 켈트의 영애는 그에 따라 황제의 아카시스가 되었다. 뻔한 황실의 정략결혼이었으며, 뻔한 귀족 영애의 정해진 운명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수아 님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그저 그 영애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이리도 절절히 사랑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될 정인이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수아의 탓으로 할까.

로엘은 그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수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갈수록 폐하의 독단이 심하십니다!”

“맞습니다. 영지 상인의 상납금은 오래된 관행입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그걸 중간에 가로채시겠단 거 아닙니까!”

에단에게로 가던 길에 로엘은 정무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원로 무리를 만났다. 다행히 마주치기 전에 미리 복도 사이로 빠져 피할 수 있었으나, 좀처럼 에단의 뒷담화를 하느라 자리를 옮기지 않는 그들 때문에 다시 나올 수가 없었다.

궁인들도 다 들리게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원로들의 말은 가히 가관이었다. ‘가로채다’니. 로엘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잘한다, 잘한다 해 주었더니만……. 원로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아니, 막말로 지금 그 자리를 누가 만들었냔 말입니다?”

“그 어린 나이에 즉위하시고 다 우리가 곁에서 있어 줬기에 이 나라가 유지되었다는 걸 왜 모르시는 건지.”

“전쟁만 잘한다고 나라가 굴러간답니까? 폐하가 전쟁 중이실 때 이 나라를 이끈 건 우리 원로였습니다!”

듣다못해 로엘이 나서려는데 딜리아가 먼저 그런 로엘의 팔을 잡아세웠다. 소리는 내지 못한 채, 그저 눈으로 지금 나가면 폐하께서 더 곤란해지실 거란 그녀의 만류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저들을 보아하건대 아카시스인 그가 폐하의 집무실에 들락거린다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아 할 게 뻔했기에 로엘은 주먹을 쥐었다.

그는 저들 대신 국정을 돌보느라 밤잠 설치는데 뚫린 입이라고 저따위로 말하다니.

화가 나고 억울해 머리가 다 뜨끈했다.

“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열을 더 올리는 이가 등장했다. 몰브의 케인이었다.

그가 뒤늦게 걸어 나오자 원로들은 자연히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케인 경 아닙니까.”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그깟 권력이 뭐라고. 훨씬 나이 많은 이들도 몰브의 장남에게만큼은 쉽게도 그 허리가 숙여졌다.

에단을 뒷담화할 때와는 달리 잘도 조아리는 그들의 모습에 로엘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케인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폐하가 저러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저희가 참아야지요.”

“그렇다고 상납금을 이리 쉽게 포기할 수는…….”

“제가 참으라 했지 포기하라 했습니까? 상납금은 영지 주인의 몫입니다 영지를 내린 이가 역대 황제들인데 무슨 권리로 이를 빼앗습니까? 이건 폐하의 독단으로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뭘 모르시고 하시려는 일에 일희일비하지 마세요.”

당당히도 말하는 케인은 아주 듬직했다. 그제야 투덜거리던 원로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들은 더욱 케인을 에워싸며 귀가 간지러운 아첨을 늘어놓았다.

분명 에단 앞에서도 똑같이 저랬겠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그 미천한 패배 근성이 너무 여실히 드러나 로엘의 얼굴은 갈수록 더 찡그려졌다.

“황제의 부족한 점을 메꾸는 게 원로의 할 일 아니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저희는 몰브가만 믿고 기다리지요.”

불손하기 짝이 없어라. 하는 일도 없이 세만 축낸다는 그의 말이 딱이다.

로엘은 한심한 원로원도 원로원이었지만, 그들보다도 그 중심에 서서 황제 행세를 하는 케인이 더 꼴 보기 싫었다. 그가 뒤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심증이 가는 와중이라 더욱 그러하였다.

카이로스를 망치고 있는 주제에, 혼자서 나라 걱정하는 꼴이라니.

로엘은 케인을 중심으로 하하 떠들며 지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만 가시죠, 마마.”

“……그래.”

그런 로엘에게 딜리아는 조심스레 재촉했다. 딜리아는 그저 다른 사람의 눈에 띌까 불안했다. 그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로엘은 겨우 발걸음을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자연히 제롬은 그녀를 에단이 홀로 있는 집무실로 안내했다. 여러 개의 문을 거쳐서 겨우 도착한 그곳에, 그는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로엘은 말없이 다가가, 그의 뒤에서 그의 목을 꼭 안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데.”

에단은 다가온 그 익숙한 향기에 눈을 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봐 주는 그에게 그녀 역시 미소를 지었다. 저절로 그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피곤한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떠드는, 좀 전의 그들이 생각나 더 그러하였다.

“힘이 부족하단 말이 아니야.”

“나도 알아요. 그 정도는.”

그녀는 그의 양 볼을 잡고 그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예상외로 순순히 먼저 다가온 그녀에 조금 놀랐으나, 그는 마다하지 않고 그녀를 만끽했다.

서로의 혀가 얽히고 온기가 전해지는. 그 기분 좋은 입맞춤이 한동안 이어지자 그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웬일이실까. 나의 아카시스께서.”

“저 또한 변덕인가 보지요.”

“좋은 걸 배웠군.”

그는 결국 그녀를 당겨 그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녀는 순순히 그에게 안겨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더더욱 의아한 눈으로 로엘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보네.”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데. 오다가 원로원들이라도 만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퉁퉁 불은, 무언가에 단단히 화난 그 표정만 보아도 그는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멍청한 주제에 입까지 가벼운 늙은이들 말이 그녀에게까지 들어갔나 보다.

“내 편을 들어주는 건 고마우나, 그런 쓸데없는 인간들 때문에 기운 쓰지 마.”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게 싫어요. 화나고 짜증나.”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반응에 그녀는 괜스레 울컥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밤을 새우며, 종일 서류에 더미에 파묻혀 사는 그다. 그 와중에 북방에 대해 공부하고, 군사 전략을 짜며, 민생을 돌보고, 좀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1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그 누가 돌을 던지랴.

화가 날 정도로 아무도 그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거 같아서, 로엘은 정말이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 짜증나.”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숨겼다.

그의 옷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며 그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오늘따라 늙은이들의 말이 심했나 보다. 그의 어린 공주님을 울릴 정도로.

그는 자신을 위해 울어 주는, 그리고 화를 내주는 그녀를 달래 주었다.

“어리광은 좋으나, 우는 건 곤란해. 네가 이러면, 내가 마음 아프잖아.”

“안 울어요.”

“우는 거 같은데?”

“안 운다니까!”

눈이 빨개진 채로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으면서도 자존심은.

그는 눈물 맺힌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침대로 갈까? 제대로 달래 줄 자신 있는데.”

“이미 충분했습니다.”

짓궂으면서도 야릇한 그의 속삭임에 그녀는 금세 평소의 그녀로 돌아왔다. 그의 가슴을 밀며, 금세 품을 빠져나간 로엘을 보며 그는 그저 웃었다.

“이거 보니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진행 상황이 궁금한 거네. 나야말로 갑자기 서운해지려는데.”

“아니요. 보고 싶어서 온 거 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말씀해 주세요. 루카스 장군은 나머지 소굴도 다 찾으셨나요?”

“아니.”

그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도성 내부 지부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산발적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관리하는 중심 세력이 있는 거 같아. 덕분에 그날 이후 소문을 듣고 전부 일시 폐쇄 상태야.”

“흠. 그렇다면 단속이 느슨해지면 분명 다시 열겠군요? 보나마나.”

“그렇지. 그러니 머리를 잡아야 해.”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바로 그 수괴.

로엘은 방금 전 보았던 케인의 오만한 비웃음이 떠올라 저절로 표정이 굳었다.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뻔뻔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인물이라면 쉽게 꼬리를 드러내진 않겠지.”

“네. 걸리면 죽는다는 걸 아주 잘 알테니까요. 차라리 공급책을 찾는 건 어떨까요? 니블이 북에서 생산되는 만큼, 분명 공급 활로가 한정되어 있을 거예요.”

“그러지 않아도 아론이 밀수 항을 수색 중이야.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움직이고 있지만, 이미 우리가 움직인다는 사실이 퍼진 듯해. 처음 소굴을 발견했을 때 너무 안일하게 대응한 거지. 그때 프래카라는 걸 들키지 말았어야 했어.”

에단은 두고두고 그 사실이 후회되었다. 그때 좀 더 신중히 처리했더라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한 명이라도 덜 니블에 중독되었겠지.

도성 한가운데에 마약굴이 있단 사실에 그답지 않은 실수를 해 버린 거다.

“아니에요.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알잖아요.”

이번엔 로엘이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어두워진 그의 얼굴에 깊은 후회가 깃들었다.

니블이 유통된 것이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자책하는 거 같아 로엘은 마음이 아팠다.

정말 누가 알까 싶다.

오로지 백성만을 생각하는, 이런 그의 마음을.

“지금이라도 안 이상, 바로잡으면 돼요.”

“그래야지.”

마음 같아서는 케인 몰브를 잡아다가 자백을 받아 내고 싶은 심정이다. 고작 돈 때문에 위정자라는 것들이 백성들을 파탄에 내몰다니.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 반드시 똑똑히 받아 낼 거다.

“저도 작은 힘이라도 보탤게요.”

“그래.”

그를 걱정하는, 그리고 응원해 주는 그녀의 진심 어린 말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위로가 된다는 것을 일일이 말해 주고 싶다.

에단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폐하. 제롬입니다.”

그렇게 그녀를 품에 안고 그대로 침실을 가려던 찰나, 문밖에서 들려오는 제롬의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토르티아로부터의 사신 명단이 왔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보고가 들어왔다.

‘토르티아’라는 그 단어 로엘 역시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게다가 사신 명단이라니.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에단은 제롬을 불러들였다. 제롬은 언제나처럼 정중히 그에게 예부터 갖추었다. 그러고는 들고 온, 토르티아를 상징하는 붉은 서신을 그에게 내밀었다.

곁에 있던 로엘 역시 그에게로 다가가 그 문서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한 이름을 보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조지 황제의 영애이자 토르티아의 제1황녀. 에리카 네아레스 님께서 사신단을 이끌고 오십니다.”

참 오랜만에 듣는, 언제 들어도 달갑지 않은 바로 그 이름.

로엘은 자신을 지독히도 괴롭히던, 그 표독스러운 얼굴이 떠올라 벌써부터 피곤했다. 아니, 머리가 다 아팠다. 되도록 평생 만나고 싶지 않은데, 이리 친히 먼 곳까지도 오시나 보다.

분명, 그녀를 괴롭히러 오는 거겠지.

“오지 말라고 할까?”

“네?”

“그러라면 그러고.”

“뭐예요, 그게.”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그 때문에 그녀는 웃고 말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너무 그녀의 생각이 드러났나 보다.

그는 바로 앞에 제롬이 있음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를 당겨 그의 품에 안았다.

“말해. 하라면 할 수 있어.”

“아니요. 괜찮습니다. 폐하.”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무표정이지만 로엘은 그의 눈에서 그녀에 대한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안은 단단한 팔도, 그녀를 온전히 가려 주는 넓은 가슴도 모두 다 그녀에게 안정을 주었다. 더 이상 그녀가 혼자가 아님을 똑똑히 상기시켜 주었다.

로엘은 그걸로 충분했다.

“특히 원하시는 게 있으면, 준비하겠습니다. 마마.”

“그런 거 없어요. 저야말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돕겠습니다.”

이어진 제롬의 배려 역시 그녀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항상 조용히 그녀를 지지해 주는 제롬을 그녀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로엘은 다시금 토르티아 사신 명단을 살펴보았다. 꽤나 요직의 인물들로 구성된 사신단이었다.

“조지 황제가 워낙 애지중지하는 에리카 황녀가 껴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사신 명단이 화려하네요. 외무대신은 당연한 거지만 중앙 대장군에 황실 경호대까지 동원되었어요.”

찬찬히 살피던 로엘은 생각이 깊어졌다.

주기적인 상납 일정으로 방문하기에는 확실히 과했다. 특별히 카이로스가 부른 것도 아니었고, 별다른 안건이 있는 것도 아님에도 조지 황제의 측근들이 죄다 움직이다니.

분명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저의 기우인 거 같긴 한데……. 이건 너무 조지 황제의 최측근들이 움직인 거라, 다른 목적이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화친 조건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할 수도 있고요.”

“토르티아가 그럴 주제가 아닐 텐데.”

그는 저절로 실소가 나왔다. 나날이 쇠락해지는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조건을 내건단 말인가.

지금의 토르티아 황제는 카이로스 황제에게 감히 반기를 들 위치가 아니다.

“그야…….”

“뭐가 되었든 조심하는 건 나쁠 거 없으니, 일단 보안을 좀 더 신경 쓰는 걸로 하지. 루카스 입부터 좀 단속시키고.”

“예. 폐하.”

“나머지는 아론에게 준비시켜.”

“예.”

제롬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들고 있던 사신 명부를 제롬에게 돌려주며, 로엘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는 좀 더 있다 갈게요.”

“그런 거 일일이 보고하지 마. 어차피 내가 안 보내.”

괜히 민망한 로엘은 그런 에단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지만, 에단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제롬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그저 보기 좋았다. 정말 딱, 두 사람의 나이대에 맞는 신혼의 모습이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폐하. 마마.”

그렇게 제롬은 눈치껏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궁인까지 물러나고, 드디어 둘만의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에단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녀에게 말도 없이 바로 저벅저벅 침실로 데려가는 그를 보며 그녀는 웃고 말았다.

어찌 참았나 싶다. 이리 기다렸다는 듯이 침실로 향하는 걸 보면.

“제가 걸어서 가도 되는데.”

“안 간단 소리는 안 하는군.”

“안 갈 이유가 없어서요. 여러 가지로.”

당돌한 그 말에 그도 피식 웃고 말았다. 엷게 얼굴을 붉히는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그의 품에 폭 안겼다.

규칙적인 심장 소리와 따뜻한 체온이 맞닿은 살로부터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의 큰 보폭으로 몇 걸음도 걷지 않아 금세 도착한 침실에 그는 살포시 그녀를 내려 두었다. 망설임 없이 그녀 위로 올라타는 그를 로엘은 얼른 제지했다.

“잠시만요, 폐하.”

그의 가슴을 살짝 밀며 거부의 의사를 표시하자, 바로 그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할 말이 있어요.”

“나중에 해.”

“수아 님 일이에요.”

죽은 듯이 사는 아카시스 따위 관심 없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꽤나 단호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쉽게 물러날 거 같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말해.”

그는 짜증스럽게 단추를 풀렀다. 이미 심통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동안 일에 치여 오늘에서야 겨우 시간을 내는 거였다. 일부러 미리 그녀의 처소에 오라고 연통을 넣어 이제야 이리 품에 안는 건데, 그래서 이리 애가 타고 안달이 나는데, 그녀는 그런 그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마음 상하셨어요?”

“아니.”

그 속마음이 훤히 다 보여 그녀는 속으로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귀엽기도 하여라. 어떻게 된 것이 그녀의 눈에 폐하는 날이 갈수록 귀여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 때문에 반쯤 뉘였던 몸을 일으키고 친히 그의 앞에 서,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끌러 내려갔다.

병 주고 약 주는 건지.

그는 다가온 그녀를 빤히 내려만 보다, 결국 그 가는 허리를 강하게 당겼다

“빨리 말 안 하면, 안 기다릴…….”

“같이 목욕할래요?”

“뭐?”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그의 말문이 딱 막혔다. 그런 그에 비해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예쁜 미소를 지으며 발끝을 올려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같이 목욕해요. 우리.”

서운한 마음을 단번에 날려 버리는, 아니 모든 생각을 단숨에 멈추게 하는 속삭임.

“싫으면 말고.”

이 앙큼한 여우에게 그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 도저히 당할 수가 없다.

“그럴 리가.”

그러니 이 귀여운 유혹에 응해 드려야지.

이번엔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허리를 바짝 당기며, 살짝 고개를 숙여 그도 귓가에 속삭였다.

“물론, 목욕만 하지는 않겠지.”

예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 아니,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그건 거짓말이다.

그러함에도 확 달아오르는 이 열기를 어찌할 수 없었다.

“가실까요. 아카시스.”

로엘은 쿵쿵 들리는 심장 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헷갈렸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그녀의 심장을, 그리고 그녀가 그의 심장을 이리 빨리 뛰게 한다는 사실이다.

신혼이라기엔 너무 장해물이 많은 두 사람에게 오랜만에 뜨거운 밤이 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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