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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오늘은 축제입니다 (16/69)

Chapter 15. 오늘은 축제입니다

황궁 전체가 연회로 바빠 수아 처소로 들어가는 후원 쪽의 복도는 적막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잔잔하게 울리고, 달빛만이 들이치는 그 한적한 곳에 수아와 리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암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수아는 그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던가.

“……수아.”

참고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꾹꾹 눌러 담은, 몇 년간의 서러움이 그가 불러 주는 자신의 이름에 터져 버리고 말았다.

“흐윽……! 으읍. 흑.”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수아는 손으로 입을 막고 오열했다. 아예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그녀를 리암은 더 이상 품에 안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함께 울어 주는 것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수아.”

이런 모습을 보려고 했던 게 아닌데, 이리 무너져 버리는 그녀를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가 그녀를 더 힘들 게 한 거 같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다 미안해.”

수아는 고개를 들어, 그녀만큼이나 눈물을 흘리는 리암을 보았다.

이 바보 같은 사람은 여전히, 늘 그랬듯 자신 탓부터 하고 있었다.

“왜 울어. 뭘 잘못했다고 우는 거야. 리암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잖아……!”

무엇이 겁나서, 이리 손 한 번을 뻗지 못하는 걸까.

그가 함께 도망가자고 하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버리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야속하게도 이 사람은 한 번도 그녀에게 그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저 한결같이 그녀만을 생각했다.

“……진짜 바보야.”

수아가 먼저 팔을 뻗어 리암의 목을 안았다. 리암은 순간 굳었지만, 이내 기다렸다는 듯 수아의 마른 몸을 꼭 안았다.

너무 익숙한 서로의 향기가 가득 번지고,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왜 이렇게 말랐어. 왜 이렇게 얼굴이 상한 거야.”

리암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오늘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가.

수아가 그렇게 억지로 궁에 들어간 후 그 역시 켈트 가문의 사병을 그만뒀다. 수아와의 추억이 가득한 그곳에 더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던 리암은 우연히 수아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말았다. 첫날 이후 황제께 버림받아 후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게 되었다고. 어쩌면 황제의 손에 의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그 소리에 머리가 띵했다.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리암이 프래카가 된 거야!”

“너 보려고 왔지.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방법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어.”

어떻게든 궁에 들어가 그녀의 안위를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서 프래카가 되어 들어왔다. 그나마 후궁 근처에 가장 가깝게 갈 수 있는, 황제의 최측근 근위대가 되었다.

“진짜 리암은 너무 바보야.”

수아는 그의 옷깃을 잡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프래카는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폐하의 친위대다. 그런 프래카에 들어오려고, 귀족도 아닌 기사 가문의 그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눈에 훤해서 마음이 아팠다.

“미안해.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그런데…….”

수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빨리 온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졌을까.

여전히 그녀는 아카시스일 테고 그는 프래카인 것을.

절대 이어질 수도, 아니 바라볼 수 도 없는 그런 관계다.

그걸 다 알면서도, 그는 왔고 그녀는 그저 기뻤다.

“수아.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리암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 수아의 양 볼을 감쌌다. 똑바로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대장군님은 출신 상관없이 실력으로만 봐 주시니까, 오히려 켈트 가문에 있을 때보다도 잘 지내고 있어. 잘 먹고, 잘 자고, 잘 훈련받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어. 너를 보려고. 너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눈물을 쉼 없이 흘리면서도 환히 웃는 그 모습이 수아를 아프게 했다. 그는 그저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항상 이리 미소 지어 준다.

그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된 이 순간에도.

“그러니까 수아야. 너도 잘 지내.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잘 떠들고. 그러면서 지내.”

이 말을 하러, 그리 힘들게 돌고 돌아 이곳에 왔나 보다.

“비록 보지 못해도, 닿지 않아도 나는 네 곁에 있어.”

수아는 그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리암을 따라 똑같이 환히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러 여기까지 온 그를 위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응. 그럴게. 리암이 그러라고 하면, 그럴게.”

리암의 미소가 진해졌다. 서로의 마음이 너무 똑같아서 말하지 않아도 전해졌다.

너무 아프고, 너무 슬펐지만, 두 사람은 함께하는 이 순간이 그저 좋았다.

리암 고든이 수아 켈트를 사랑하고, 수아 켈트가 리암 고든을 사랑한다는 것.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해도, 아무리 떨어져 있다 해도 그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충분했다.

***

“하아. 이제 좀 끝나 가는 거야?”

“네, 마마. 조금만 더 참으시면 될 거 같아요.”

딜리아는 로엘에게 부채질을 하면서 말했다.

수아가 그녀 곁에서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귀족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지금 실세가 그녀라는 걸 나타내듯 줄을 서서 그녀에게 얼굴 도장 찍으려는 그들에게 그녀는 형식적인 미소를 1시간 넘게 지어야 했다.

속이 훤히 보이는 아첨들이 이어져 표정 관리 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도대체 그는 이 말들을 어떻게 듣고 사는지 모르겠다.

“꽤 사람들도 빠진 거 같은데, 슬쩍 나가도 되지 않을……!“

“안 돼.”

순간 그녀의 드러난 어깨에 큰 손이 얹어졌다. 익숙한 그 목소리에 로엘은 자연히 고개를 뒤를 젖혀,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았다. 그러자 오늘 내내 멀리 있던 그가 그런 그녀를 내려 보며 미소 지었다.

“어딜 가시려나, 나의 아카시스께서.”

“그만 쉬려 합니다만.”

“나만 두고?”

“에이. 폐하랑 저랑 같습니까. 하늘 같으신 분은 끝까지 계셔야지요.”

“지금 비꼬는 거 같은데.”

“그럴 리가요.”

두 사람의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졌다. 두 사람이야 전혀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정작 주변은 두 사람의 모습에 경악했다. 에단이 먼저 찾아가는 것도 놀랄 일인데, 심지어 그분이 미소까지 짓고 있다니.

거기에 로엘의 태도는 더 가관이었다. 다른 비들이 그와 눈 한 번 맞추어도 쩔쩔매는 데 비해 그녀는 너무 자연스럽게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서로를 보며 미소 짓는 모습이 그저 평범한 연인의 모습이라, 이 모습 자체가 보고 있는 모든 이에게 충격이었다.

“그냥 해 본 소리였어요. 일개 아카시스가 어떻게 폐하보다 먼저 자리를 뜨겠습니까.”

“알아.”

“그런데 심술은.”

“네가 먼저 심술 나게 만들었어.”

“네?”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의 시선은 빤히 그녀의 몸으로 내려갔다.

위에서 보니 더 훤히 드러났다.

풍만한 가슴은 물론 깊이 패인 쇄골하며, 뽀얀 하얀 피부까지. 자연히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둔감한 그녀야 전혀 모르겠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죄다 남자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오늘 모습은 사냥 대회 때의 그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 같았던 그 거친 모습이, 오늘은 놀라울 정도로 순한 사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그냥 사슴이랴. 꽃사슴도 이런 꽃사슴이 따로 없다.

그러니 그 간극이 다양한 상상을 가능케 만들었다.

“뭐 하시는……. 읏!”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선을 타고 내려가 그녀의 쇄골을 누르자 바로 그녀가 움찔했다. 그녀의 예민한 부분을 뻔히 아는 그가 일부러 이러는 거였다.

“……지워졌잖아.”

그가 지난밤 남겨 둔 흔적이 지워졌다. 여기저기 남긴 그 많은 걸 다 기억하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그가 주는 야릇한 느낌에 금세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음을 뻔히 알기에 로엘은 바로 그를 흘겼다.

“화낼 거예요.”

“나는 벌써 화났어.”

그는 그녀의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의 드러난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바로 그녀가 부채를 펴 남들의 시선을 가렸지만, 가린다고 하여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그의 귀에만 들릴 작은 신음이 짧게 나오자 그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한 번에 깊이 빨아들이자, 똑같은 그 자리에 금세 붉은 꽃이 피었다.

“못 살아, 내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그를 열심히 째려보았지만, 그는 오히려 심통 난 그녀의 입술에 짧게 키스를 했다.

벌써부터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딜리아는 아예 얼굴이 새빨개졌고, 아론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면 벌거 아닐 수 있다. 그저 짧은 키스를 목덜미에 한 것뿐이다.

그런데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하필 다른 이도 아닌 그분께, 그것도 모두의 시선이 주목되는 이곳에서 했다는 사실이 야한 거였다.

“어깨, 가려.”

“가릴 수밖에 없잖아요. 이렇게 대놓고 생겼는데.”

그녀는 딜리아가 미리 챙겨 준 숄을 어깨에 덮었다.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설마 했던 그 이유가 맞았다.

“그냥 저를 꽁꽁 싸매지 그래요.”

“그러지 않아도 고민 중이야.”

그는 그녀 어깨의 숄을 좀 더 끌어 올려 주고선 그만 허리를 폈다. 심통 난 그녀가 가려는 그를 보지도 않자, 그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은근히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하는지라 그녀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다시 그에게로 올라갔다.

“조금만 더 참아. 착하게 기다리면, 선물 줄게.”

그의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 금세 심통이 풀리고 말았다. 이런 엄청난 목걸이를 주면서도 쉽게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로엘은 그 선물이 뭘까 궁금했다.

무언지 몰라도 적어도 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건대 그녀의 마음에 들 것은 확실했다.

“……나 기대할 거예요.”

“얼마든지.”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에 살짝 키스를 남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그녀는 끝까지 바라보다가, 뒤늦게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어색한 헛기침을 뱉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녀의 시선 끝은 그를 향했다.

그런 그녀를 이반이 보았고, 그 모습을 수아가 보았다.

“왜 그래?”

갑자기 발걸음이 멈춘 수아에게 리암이 작게 물었다. 수아는 그런 리암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은 채 빤히 이반을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어렸을 적보다도 더 에단을 닮아 있었다.

그런데, 닮은 것이 외모만은 아니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 버렸네.”

저 눈.

어쩌나. 너무도 똑같다.

황제께서 로엘을 바라보는 그 눈과.

“알지 말아야 할 것도 알아 버린 거 같고.”

수아는 이반의 시선 끝에 있는 로엘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로엘의 시선은 에단을, 이반의 시선은 로엘을 향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반이라니.

수아는 걱정스런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로엘의 앞길에 파란이 기다리고 있는 거 같다.

***

“고생하셨어요.”

제롬이 안내한 대로 먼저 들어와 있던 로엘은 그가 들어오자 자연히 일어났다. 길기도 했던 연회가 드디어 끝난 거다. 로엘은 자연스럽게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그의 망토를 받아 들었다.

아까와는 달리 서슴없이 그 곁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그가 가볍게 그녀의 가는 허리를 안자 로엘은 금세 딸려 왔다. 폭하니 그의 품에 안겨 언제나처럼 그녀는 멀뚱멀뚱 에단을 바라보았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선물은 나중에 주셔도 돼요.”

“지금 아니면 안 돼.”

“네? 자, 잠깐만요!”

어느새 그의 손은 그녀의 드레스 뒷단추들을 톡톡 끌러 갔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한 로엘은 바로 몸부림쳤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금세 풀린 단추들 덕분에 스르륵 내려가는 드레스를 로엘은 필사적으로 잡았다.

“아니, 밖에 병사들이 몇이나 있는데……!”

“그래서?”

“여기서는 죽어도 안 돼요. 진짜 화낼 거야.”

얼굴이 불게 달아올라서는 단단히 경계 태세인 그녀의 모습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그만 그녀를 놔주면서 그녀의 앞머리를 헝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그저 옷 갈아 입는 걸 도와줬을 뿐이야.”

“……네?”

“아니면, 기대하신 건가? 나의 아카시스께서는.”

그의 고갯짓이 가리킨 곳에는 곱게 개인 옷이 놓여 있었다.

그걸 이제야 발견한 로엘은 자신 혼자 상상한 일에 더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짓궂게 웃는 그가 얄미워 그녀는 그의 가슴을 있는 힘껏 밀었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못됐어.」

그를 욕할 때만 나오는 토르티아어는 찰지기도 했다. 금세 종종거리며 멀어진 그녀는 그에게 뒤돌란 말도 하지 않은 채, 혼자 홱하고 돌더니 서슴없이 드레스를 벗어 버렸다.

그 모습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옷 갈아 입으라 했지만, 이 정도로 개의치 말란 말은 아니었다.

훤히 드러난 하얀 속살들이 괜히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는 말없이 다가가 아무리 보아도 불편해 보이는 그녀의 코르셋 끈을 풀었다.

그러자 그제야 그녀가 그를 뒤돌아보았다.

“벗어. 불편하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럼 저 멀리 가 주세요, 뒤돌아보지도 마시고.”

참 빨리도 말한다.

아무래도 맨가슴이 드러나는 건 부끄러운지 그녀는 한 박자 늦게 다시 경계 모드였다.

잔뜩 웅크린 채로 말하는 그녀의 단호한 지시를 가볍게 무시했다.

“어차피 혼자 벗을 수도 없잖아.”

“그야…….”

“그리고 부끄러워하기엔 지나치게 새삼스러운 거 아닌가. 이미 오래전에 다 봤…….”

“그거랑 다르다고요!”

귀까지 빨개진 그녀의 반응에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속옷만 입은 건 괜찮고, 그 속옷을 벗는 건 왜 안 괜찮은지 그는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됐지만 뭐가 되었든 귀여운 반응을 보았으니 되었다.

그는 그녀를 그만 놀리고, 제대로 줄을 당겨 단단히 조여진 그녀의 가슴을 헐겁게 만들었다. 어찌나 단단히 조여 놓았는지, 하얀 살이 붉게 올라와 있었다.

자연히 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런 것 좀 입지 마.”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랍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는 옷까지 입혀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핏 보이는, 그가 잘 아는 그 말캉하고 기분 좋은 그녀의 가슴을 마음껏 만지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는지라 꾹 참았다.

그녀에게 큰 남성복을 입혀 놓자 그러지 않아도 작은 그녀가 더욱 작게 느껴졌다.

몇 시간 만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편하다.”

“그러겠지.”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상의도 벗었다. 화려하고 무거운 황제 옷을 벗자 그도 살 것 같았다.

그 많은 전쟁통에도 말끔한 그의 상체를 언제나처럼 빤히 바라보며, 그녀는 살짝 수줍음을 탔다. 이 역시 새삼스럽지 않지만, 그러함에도 반복된 이 반응이 그는 좋았다.

“폐하까지 이렇게 갖추어 입고. 도대체 무슨 선물을 주시려는 거예요?”

“이미 눈치챈 거 같은데.”

그가 마지막 벨트까지 매자 그녀는 얼른 까치발로 그의 머리에 모자를 씌웠다.

이미 반짝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온갖 기대를 한아름 품고 있었다.

이런 평민 복장으로 환복하는 거. 목적이야 뻔하지 않는가.

“진짜 제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요?”

“아마.”

“세상에!”

그녀는 진짜 기쁜지 얼굴까지 상기되었다. 발까지 동동 구르는 모습이 얼른 산책 나가자는 강아지 같았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그는 그녀가 어지간히 답답했구나 싶어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얹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밖으로 나간다는데 무엇인들 못 할까. 그녀는 그의 팔짱을 꼭 끼며 얼른 말하라고 재촉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자를 살짝 들어 눈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이름으로 부를 것. 암행 가는 걸 들킬 순 없잖아.”

암행보다는 데이트에 가까웠지만, 명목은 엄연히 암행이므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결심한 듯 다시 한 번 더 까치발을 들어 그의 귀 가까이에 속삭였다.

“좋아요.”

침대 위 말고, 이리 말짱한 제정신으로는 처음 불러 보는 그 이름을.

“에단.”

비밀이라도 말한 듯 조심스럽기도 한, 겨우 말해 놓고 배시시 웃는 그 모든 모습이 사랑스러워 그는 결국 그 도톰한 예쁜 입술에 진한 키스를 남기고 말았다.

***

“세상에……!”

연회에서도 민망할 정도로 혼자 신나 했던 로엘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카이로스의 밤은 꺼지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들의 축제는 이제 시작인 듯, 춤과 노래가 끊이지 않았고 여기저기 호객 행위까지 더해져 카이로스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화려하게 이어진 등불을 따라 걸으며 로엘은 연신 탄성을 뱉었다.

“너무 예뻐요! 축제하면 카이로스라더니 빈말이 아니었네요! 여기 안 왔으면 진짜 서운했을 뻔했어요.”

“그래. 알았어.”

에단은 이리저리 잘도 다니는 그녀의 어깨를 안아 조금 진정시켰다.

사람이 워낙 많아 정신이 없는 통에 다들 두 사람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어 정체가 들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여자 혼자 몸으로 이 밤에 다니는 건 충분히 위험했다.

“신기하고 재밌건 알겠는데, 그래도 같이 다녀. 위험하잖아, 그렇게 훌쩍 가 버리면.”

“아……. 하긴. 그러네요. 저야 괜찮지만 폐하는 폐하신데……. 제가 경솔했어요. 최대한 눈에 안 띄게 가로 걸어요. 제가 앞장설게요.”

마치 그를 자신이 보호해 주겠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에단은 어이가 없었다.

누가 누굴 지켜 준다고 하는 건지. 아무리 검 좀 쓰는, 아니 꽤 잘 쓸 줄 아는 여자라 해도 이건 아니었다. 로엘은 아예 발걸음을 멈추고 아주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진짜 너무 호위 없이 다니는 거 아니에요? 물론 근처에 다들 있겠지만, 이런 건 밀착 경호가 중요하다고요.”

아무래도 그녀는 그를 보호만 받는 공주님으로 생각하나 보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누구 하나라도 폐하를 알아보면 어떡해요? 그러다가 누가 암살이라도 시도하면…….”

“그만.”

그는 그녀의 허리를 바짝 당겨 안으며 쉬지 않고 말하는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힘이 들어간 그의 팔에, 그리고 바짝 가까워진 그 거리에 그제야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카시스께서는 나를 너무 무시하시는 거 같은데.”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저는 폐하가 걱정되어서…….”

“에단.”

“아. 네. 그죠. 에……단.”

역시나 어색한 호칭에 로엘은 살짝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름 부르는 게 원래 이리 낯 간지러운 일인지 정말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느꼈다.

물론 그 입장에서는 그렇게 일일이 수줍어하는 그녀가 그저 귀여웠지만.

“로엘.”

“……네.”

“나는 네가 걱정되는 거야. 네가 위험한 거라고. 내가 아니라.”

“저야 제 몸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지킬 수 있죠.”

“그럼 나는?”

늘 루카스를 비롯한 프래카에 둘러싸여 있다고 한들, 설마 내 몸 하나 지키지 못할까.

루카스조차 그를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유치하게 일일이 말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꽤 진지한 그의 눈을 보고 그제야 실수한 걸 알아 웃음이 나왔다.

본의 아니게,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나 보다.

아이고. 귀엽기도 하셔라.

“저런. 제가 실수했네요.”

그 스스로 생각해도, 아주 많이 애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보호받을 만큼 약한 취급을 받고 싶진 않았다.

그 마음을 알아챈 그녀는 그의 팔짱에 팔을 꼭 끼며 말했다.

“에단.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 주셔야 해요.”

아무튼 앙큼한 여우 같으니라고. 금세 그의 기분을 풀어주는 그녀에게 그는 당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즐겁고 활기찬 카이로스의 축제 분위기는 그들이 지금 얼마나 풍요롭게 살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 주었다.

그 사실이 로엘은 조금 부러웠다. 아무리 축제라고 한들 토르티아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요.”

“축제니까.”

“그것뿐만은 아니에요.”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 활성화된 시장. 춤과 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활기찬 분위기.

누가 봐도 태평성대였다. 지나가며 황제를 칭송하는 소리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다.

그녀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잠시만 보아도 알겠어요. 당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저들이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건, 당신 덕분이에요.”

로엘은 그를 올려다보며, 환히 미소 지었다.

“당신. 정말 성군이셨군요.”

귀에 닳도록 많이 들었던 말이었는데도 그는 순간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말은, 아첨 따위가 아닌 진심이었으니까.

“고생 많았어요, 에단.”

맞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돌이켜보면, 그 누구도 그에게 고생했다는, 그 한 마디를 해 주지 않았다.

감히 황제께 그런 말을 할 용기도 없었겠지만, 그보다는 당연히 황제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더 컸을 거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최고의 황제가 될 거란 신탁을 받은 사람.

무엇을 잘하다고 한들, 그건 당연한 것이 되었다.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당신 울 것 같은데.”

“아냐.”

그는 피식 웃었다. 아기 때 이외에 평생 울어 본 적이 없는지라, 우는 법을 몰랐지만 알았다면 그녀 말대로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에게는 꽤나 듣고 싶은 말이었다는 걸 그도 듣고 보니 알았다.

이래서 에단은 로엘이 좋았다. 자신도 모르는 그의 마음을, 그 감정을 이렇게 알아채 주고 위로해 주니까.

“민생 점검. 계속해 볼까요? 일단 저 사탕부터 사 주세요.”

예고도 없이 감동시켰으면서, 그녀는 금세 평소처럼 다시 그를 끌었다.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커다란 막대사탕이 탐이 났다 보다.

잔돈 따위 가지고 다닐 리 없는 그라 그가 손짓 한 번 하자 금세 프래카 한 명이 그의 곁에 왔다. 다짜고짜 돈을 요구하는 그 대신 그녀가 조용히 사 달라고 부탁하여 사탕 하나를 입에 물 수 있었다.

“당신, 이게 얼마 정도일 거 같아요?”

“대략 10프랑.”

“오오? 의외네요? 적어도 100프랑은 부를 줄 알았는데.”

“누구 말대로 나는 성군이라 물가쯤은 알고 있어.”

그녀는 진짜 놀랐다. 아마 웬만한 귀족들도 이런 서민 물가 따위 전혀 감도 못 잡을 거다.

그런데 그는 생각보다도 훨씬 정확히 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만 한 사탕을 열심히 핥아 먹으면서 말을 이었다.

“매번 이렇게 직접 나와요?”

“매번이라고 할 순 없고, 이렇게 사람들이 많을 때 주로 나오지. 평소에도 아론이나 루카스가 제법 정확하게 보고하지만, 직접 보는 거와는 다르니까.”

“숨통도 트이고?”

“그래.”

그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의 백성들을 보았다. 확실히 그가 즉위하기 전보다 생활이 나아진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황자 시젊만큼 자주 나오지는 못하여, 이렇게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나오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들을 보고 들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얼 걱정하는지. 누가 힘들게 하는지. 그가 궁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고 싶었다.

유능한, 그리고 정직한 부하를 둔 덕에 나름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함에도 이렇게 나오는 것이 좋았다.

그녀 말대로 숨이 트였으니까.

그리고 지쳐 가는 그에게 계속 가라는, 가야 한다는 의지의 동력이 되어 주었으니까.

“앗!”

갑자기 뒤로부터 튀어나온 사내가 로엘의 팔을 툭 치고 지나갔다. 순간 프래카가 움찔할 정도로 근접한 거리였는데, 상대는 그런 로엘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에단은 바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제게로 당겨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네. 그냥 부딪힌 거예요. 사탕은 떨어졌지만.”

그녀는 아쉽다는 듯 조금 입을 다시며 말했다. 비틀거리며 지나간 사람은 술이 꽤 취했는지 로엘뿐 아니라 길거리의 다른 행인들과도 계속 부딪혔다.

“어디서 맡았던 향인데…….”

로엘은 그 취객을 쳐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가까이 다가왔었을 때 순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훅하고 독한 향기가 풍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지독한 향을 어디선가 맡았던 느낌이 계속 들었다.

“왜 그래?”

“아니. 뭔가 기억날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

느리게 걷던 로엘의 발걸음이 순간 딱 멈췄다.

‘언제까지 그 예쁜 얼굴로 웃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그리고 기억나는 며칠 전, 케인과의 만남.

순간 다가왔을 때, 알콜 향에 가려지지 않는 그 지독한 향내. 로엘은 반사적으로 그의 팔뚝을 세게 잡았다.

“저 남자, 따라가야 해요……!”

그녀는 그에게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은 채, 일단 그 남자를 먼저 뒤쫓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에단은 외진 곳으로 서슴없이 가려는 그녀를 일단 잡아 세웠다.

로엘의 심각한 얼굴에 에단 역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설명해. 그 뒤에 따라가도 되니까.”

“니블이에요!”

“뭐?”

“저 남자, 니블을 하고 있어요!”

그를 붙잡은 그녀의 양손에는 힘이 들어가고, 그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은 더 심각해졌다.

뻔히 알고 있는 이 향기를 이제야 알아채다니, 로엘은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니블(NEBEL)이라고 북방에서 유명한 마약이에요. 처음 소량일 때는 그저 안개가 낀 것처럼 붕 뜨는 느낌이 고작이지만, 중독이 되어 양을 늘릴수록 환각 현상이 심해진다고 알고 있어요.”

‘마약’이라는 단어에 에단의 표정이 굳어졌다.

카이로스 수도 한복판에서 마약이라니. 그것도 귀족이 아닌, 평민들 사이에서. 이런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건 이미 어느 정도 평민들 사이에 퍼졌다는 의미였다.

에단의 눈빛이 달라졌다.

“니블은 기본적으로 향로를 통해 향을 맡는 거예요. 그렇다면 분명 니블을 피우기 위한 폐쇄된 공간이 필요하죠. 북방에서는 보통 니블굴이라고 부르는데, 일단 그곳부터 찾아봐야 할 거 같아요.”

“프래카.”

그의 작은 목소리에도 바로 프래카들이 그의 곁에 왔다. 정체를 숨기는 만큼 무릎을 꿇는 대신 고개를 숙인 그들은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저자를 쫓아. 절대 놓치지 마.”

“예!”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프래카들은 그자를 쫓아갔다.

에단 역시 그들이 간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여기서 기다…….”

“기다리라고 하실 건 아니죠? 자. 얼른 가요!”

무어라 말릴 틈도 없이 그녀가 먼저 앞서 달렸다.

예상한 반응이라 에단은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혼자 두느니, 차라리 곁에 두는 편이 마음 편할 거 같아 그는 금세 그녀 옆으로 갔다.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시끌벅적한 밖과는 달리 빛 하나 없는 그곳에는 쓰레기가 썩는 악취가 진동했다. 여기저기 토사물이 보이고, 무언가에 취해 인사불성인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참담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건 로엘뿐만이 아니었다. 에단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 갔다.

“……에단.”

로엘이 조심스레 그를 살피자, 그가 그녀의 어깨를 안아 좀 더 바짝 그 곁으로 당겼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정면을 향했다. 그곳에 먼저 간 프래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프래카 가리킨 곳에는 허름한 가옥이 하나 있었고, 그 앞에 문을 지키는 장정 둘이 있었다. 무장까지 한 걸 보아하니, 딱 보아도 불법의 냄새가 났다.

이미 에단과 로엘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그들은 아무래도 쉽게 물러날 거 같지 않았다.

“열어.”

물론 그래 봤자지만.

그의 짧은 두 음절에 프래카는 순식간에 문을 지키던 장정을 때려눕혔다.

프래카가 문을 열고 좀 더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사병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프래카들에 의해 쓰러지는 사병들을 밟고 두 사람은 걸음을 계속했다.

“폐하. 뒤에……!”

그녀가 뒤에서 기척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그의 검이 그자의 심장을 찔렀다.

순식간에, 심지어 뒤돌아보지도 않고 정확히 급소를 찌른 그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거둬들였다. 피가 사방에 튀었고, 또 한 명의 남자가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그 일련의 과정에 그는 눈썹 한 번을 꿈틀거리지 않았다.

로엘은 그 모습에 순간 숨을 멈췄다.

왜 그가 ‘피의 황제’라 불리는지 이제 좀 알겠다.

한 번도 그가 검을 잡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막연히 그에 대한 그 어마어마한 소문들의 정체는 루카스에게서 비롯된 과장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단단히 착각한 거 같았다.

그러기엔 그는 상상 이상으로 빠르고 정확했으며, 지나칠 정도로 평온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놀랐다.

자신과 너무 닮아서.

“가지.”

“네.”

로엘은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깊숙이, 수많은 장정들을 넘어 다다른 지하는 입구에서부터 냄새가 진동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연기를 보며 로엘은 자신의 손수건으로 그의 코를 막았다.

“다들 이 향을 맡으면 안 돼요. 최대한 코로 숨 쉬지 마시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그는 자신부터 막는 그녀의 손을 다시금 그녀의 코로 가져다가 막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대충 로브를 찢어 코를 막았다.

그렇게 대충이라도 대비를 하고 마지막 지하실의 문을 열자, 훅하고 갇혀 있던 연기가 밖으로 쏟아졌다.

“세상에…….”

눈앞에 보이는, 자욱한 연기 속의 인영들.

로엘은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다른 것이라고 오해하려야 오해할 수 없는 마약장.

말로만 듣던, 바로 그 니블굴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정도로…….”

남녀 할 것도 없었으며, 연령층도 다양했다. 아니 신분마저 평민에서부터 귀족까지 다양했다.

이건 상상 이상이다.

“절대 여기만 있을 리가 없어요. 분명 다른 곳에도……!”

다급한 그녀의 말은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끊겼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눈빛이 있다면 이런 눈이 아닐까. 진심으로 화가 난 그의 황금빛 눈에는 살기 어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감히 카이로스 수도 한복판에 마약장을 만들어 놓다니.

그의 머리가 뜨끈해졌다.

“또 어디서 맡았어.”

“네?”

“이 니블이라는 거, 최근에 또 어디서 냄새를 맡았냐고.”

로엘은 확실하지 않아 조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론 심증뿐이라고 하나, 솔직히 로엘 역시 확신했다. 그때 케인의 행동. 지나치게 도발적이었다. 단순히 술이 덜 깼다고 하기엔 무언가 위험한 느낌을 풍겼다.

게다가 그 눈.

니블(NEBEL)의 어원이 ‘안개’인 것처럼 안개가 드리운 듯 흐리멍덩하여 그 초점이 흔들렸다.

“……케인 몰브입니다.”

“하.”

그의 짧은 헛웃음이 나왔다.

만일 공작가인 몰브가 진짜 이 니블을 밀수하여 백성들에게 유통하였다면 이는 삼대를 멸족해도 분이 차지 않는 대역죄였다.

“프래카.”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에단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정리해.”

“예!”

이미 제정신이 아닌 이들을 상대로 무얼 할까 싶지만 프래카는 순식간에 움직여 그들을 구금했다.

그제야 조금이라도 덜 취한 이들은 놀라 도망가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로엘은 조심스럽게 에단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마약이라니.

귀족들 사이의 사소한 일탈일 수 있지만 이렇게 백성들 사이에 퍼지면 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된다. 그런데 겁도 없이, 마약을 유통하다니.

에단은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그만 궁으로 들어가지.”

“네.”

그녀는 군말 없이 대답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는 그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곧 있으면 카이로스 황실에 휘몰아칠 폭풍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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