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지나간 시간들에 대하여
오전부터 토르티아 궁전이 시끄러웠다. 국혼 상대로 아버지가 들이민 상대들이 죄다 황녀님의 성에 차지 않아, 그러지 않아도 신경질적인 황녀님께서 짜증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더러 일개 귀족 따위에게 시집가라고요? 장난하자는 거예요?”
“에리카.”
조지 황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금 그러지 않아도 최근 여기저기 문제가 터져 나라 상황이 좋지 못한데, 에리카까지 이 문제로 며칠째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에리카 성질이 안 좋다는 건 토르티아에서 모르는 이가 없고, 그 소문이 이미 다른 나라에까지 퍼진 판이라 그녀에게 백작가의 아들도 어쩌면 과분할 정도였다.
“에리카. 지금 나라 사정이 매우 좋지 못하다. 벌써 국경 지역의 많은 영토를 내어 주었고 수교 문제도 과도한 요구가 많아. 국가 재정이 좋지 못할 때 너라도 나라를 위해…….”
“나라를 위해 장사치한테 팔려 가라는 거예요? 다토 경은 유명한 상인 가문이잖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카이로스에 내가 갔지!!”
앙칼진 목소리가 대회의실을 울렸다. 어찌나 크고 까랑까랑한지 듣고 있던 궁인들마저 움찔했다. 보아하니 이거 쉽게 끝날 일이 아닌 거 같았다.
“아무리 포로로 팔려 간다고 해도 로엘은 황제한테 시집갔어요. 그것도 그냥 황제야? 카이로스 황제잖아!”
피와 눈물도 없는 잔인한 황제라 들었다. 아무리 자신의 비라고 할지라도 언제든 그 손에 죽어 나가도 이상할 게 없는 피를 부르는 남자.
에리카는 화친의 목적으로 자신이 지목되었을 때 사흘 밤낮을 못 가겠다고 울었다. 그런 무서운 사람 곁에서 한시라도 있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평생을 그 타지에서 찬밥 신세로 살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억지로 떼를 써서 로엘에게 떠민 자리 대신 얻은 혼처가 기껏해야 백작 부인이라니.
도저히 자존심 상해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백작 부인은 못 돼요. 그런 줄 아세요.”
“에리카!”
“왜 맨날 난 걔보다 밑이어야 하냐고!”
에리카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어렸을 적부터 계속된 이 뿌리 깊은 자격지심은 그녀의 아버지가 황제가 되어도, 그녀가 로엘을 제치고 황녀가 되어도, 그리고 기어코 로엘을 토르티아에서 내쫓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테바로스는요?”
미세하게 떨려 오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조지 황제 입에서 나오지는 않는, 에리카가 예전부터 바라 왔던 바로 그 자리.
“왜 테바로스 황비 자리는 말씀 안 하세요?”
“……그건 네 자리가 아니다.”
“왜요? 왜 안 되는데요? 로엘은 정혼자였잖아요!”
토르티아는 토르티아의 긍지가 있듯 테바로스는 테바로스의 긍지가 있다.
형제 국가로 출발하였으나 토르티아가 북방 패권을 독점한 지가 수십 년.
테바로스와 토르티아의 오래된 앙숙 관계는 쉽게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테바로스의 정식 후계자였던, 그리고 지금은 테바로스의 황제가 된 데릭 테바로스는 로엘을 정혼자로 삼았다.
“데릭 황제가 황제가 될 줄 알았으면, 나도 너를 정혼자로 보냈겠지. 그때 그 자리를 싫다고 마다한 건 너였어.”
“무려 다섯째 황자였다고요! 형들이 황위에 오르면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 그 자리를 누가 가요!”
“그래. 그래서 너는 첫째 황자와, 로엘은 가장 황위와 먼 데릭과 정혼을 맺었지. 결국 황제는 데릭이 되었지만.”
북방 황실의 정혼 이야기는 보통 열 살이 되기 전에 나온다. 당시 로엘의 아버지 제이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설 같은 장군이었고, 조지는 그런 배다른 형에게 밀려 자격지심만 가득한 포악한 후계자였다.
주기적인 테바로스와의 정략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테바로스는 로엘을 원해 왔다.
그들도 조지보다는 제이드가 더 황위에 가까워 보였던 거다.
“그러면 제가 다시 가면 되잖아요! 뭐가 문젠데요!!”
“이미 너는 데릭의 형과 정략을 맺었던 몸이야. 다시 데릭 황제의 황비가 될 순 없어.”
에리카는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도 안다. 그 당시, 테바로스가 로엘을 원했을 때 악을 쓰며 그녀는 로엘의 자리를 빼앗았고 로엘은 결국 데릭의 정혼자로 밀려났다.
이후 조지는 토르티아의 황위에 올랐으며 제이드는 목숨을 잃었고, 로엘은 갈 데 없는 유폐된 공주가 되어 테바로스로부터 파혼 통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그 데릭 황자가 자신의 형들을 전부 죽이고 황제가 되리라고는.
“……운도 지지리도 좋은 년.”
에리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무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데릭이 테바로스의 황제가 되기 전에 로엘이 파혼당했고, 카이로스로 쫓겨나 다행이지 만일 그대로 데릭이 테바로스의 황제가 되었다면 배가 아파서 잠을 못 이루었을 거다.
10년 전, 약혼식 날 처음 데릭을 얼굴을 보았던 그날 밤처럼.
“저는 테바로스로 가고 싶어요. 다토 백작가로 억지로 보내시면 확 죽어 버릴 거예요.”
“에리……!”
“폐하. 카이로스의 몰브가에서 사람을 보내 왔습니다.”
조지의 말을 끊고 밖에서부터 서기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에리카 혼사보다 더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일단은 나가 봐.”
더 이상 그녀가 보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조지 황제의 말에도 에리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카이로스에서 온 몰브가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정색하며 보았다.
“토르티아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그러지 않아도 간만에 생각난 로엘 때문에 심기가 아주 좋지 못한데, 카이로스의 사람이 오니 괜히 짜증이 올라왔다.
몰브가 사람이 토르티아 황실에 몰래 온 이유는 뻔히 알아 그만 자리를 나서려는데, 순간 번뜩 기발한 생각이 나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요, 아버지. 이거……. 제가 갈게요.”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다. 에리카.”
“아니. 카이로스에 가는 거, 제가 가겠다고요!”
에리카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카이로스에 직접 가 로엘이 지내는 꼴을 보고 싶었다. 분명 여기보다도 더한 천덕꾸러기로 살고 있을 터.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 같았다.
“어차피 이번 거래, 중요하잖아요. 역대 가장 큰 규모라고 들었고요. 차라리 황녀인 제가 사신으로 가면 의심받지 않고 좋을 거예요. 오로지 저한테 신경이 쏠릴 거 아니에요? 무려 토르티아의 황녀가 직접 갔는데!”
조지 황제는 에리카의 뜻밖의 제안에 살짝 놀랐다.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에리카의 속내야 로엘을 괴롭히러 가는 거겠지만, 에리카의 말대로 시선을 돌리기엔 제격인 방법이다.
최근 니블 밀수 수입이 황실 재정의 주력인 만큼 신중을 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제가 책임지고 다녀올게요, 아버지.”
무엇보다 이미 에리카는 마음을 굳힌 거 같았다. 혼사 문제로 계속 귀찮게 할 바에야, 조지 입장에서는 차라리 나가 주는 편이 고마웠다.
조지 황제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랜만에 에리카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카이로스라니.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에 대한 설렘도 있지만, 그보다는 로엘을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그래. 넌 평생 그렇게 살아. 네가 그런다고, 내가 달라지겠니?’
그 잘난 얼굴, 잘난 눈빛이 얼마나 처참히 망가졌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
“부럽네요.”
모두가 나가고, 회의실엔 에단과 로엘만이 남았다.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후, 한동안 말이 없다 혼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에단은 피식 웃었다.
“너무 밑도 끝도 없는 거 같은데.”
“그냥. 당신이 부러워서.”
“부러울 점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지.”
“취소. 완전 취소.”
시도 때도 없는 잘난 척 같으니라고.
참 얄밉게도 말하는 그를 로엘은 대놓고 흘겼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그녀의 머리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그녀의 바로 앞 테이블에 걸터앉자, 그녀의 시선이 자연히 위로 올라갔다. 높게 묶어도 길게 늘어지는 그녀의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뭐가 그렇게 부러우셨을까.”
“음, 뭐랄까……. 아까 그 상황 전부라고 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를 위해 언제든 목숨을 내놓을 것 같은 그들의 충성심도, 그와 격 없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분위기도, 한 목표를 향해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유대감도 전부 다 그녀에게는 낯설었다.
그런 충신을, 그런 동료를, 그리고 그런 형제를 가지다니.
그는 정말로 하늘이 예뻐하는 사람인가 보다.
“토르티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이렇게, 황제 폐하와 한 테이블에 앉아 함께 계획을 짠다는 건. 아니, 아마 카이로스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일 테지요. 당신이라서, 당신이기에 가능한 거예요.”
그녀의 눈에 그가 담겼다. 담담히 말하는 그녀가 누굴 떠올리고 있는지 그는 어렴풋 알 거 같았다. 그녀는 그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보나 보다.
그는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안아 세우고선 품에 안았다.
“나를 보면서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건 좋지 않아.”
“뭐야. 당신 지금 누굴 질투하는 거야.”
시답잖은 그의 말에 로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기게도 울적해지려던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다시 그를 보았다.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리 알아채 버리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에게도 루카스 같은, 아론 같은,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부하들. 아버지와 형제 같은 동료들. 아버지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면 수많은 백성들까지.”
기억 속 아버지는 늘 사람들 속에서 웃고 있다.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친근한 리더십은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끌었다. 그분께 마음을 열고 충성을 맹세한 이가 어디 한둘이랴.
그런 이들 사이에서 아버지는 늘 중심을 지키셨고 그들을 이끌었으며, 또한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왔다.
그래서 더 사랑받고, 그래서 더 칭송받았다.
“그 사랑과 칭송이 본디 향했어야 할 사람보다도 더 많이 받았지요.”
어린 마음에 늘 궁금했다. 사람의 마음이 사람을 향하는데 그게 왜 잘못된 걸까 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 간단했다.
‘아버지가 황제가 아니라서.’
너무 간단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신이 부러웠어요. 정말 다 가진 폐하라서. 황위에 오를 적자라는 그 지위. 그거 딱 하나 가지지 못한 내 아버지가 불쌍해서.”
씁쓸한 미소가 진해졌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바로 울어 버릴 것 같은 그 얼굴에 에단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얼핏 보이는,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항상 위태롭다. 꾹꾹 눌러 담은 한이 언제고 터져서 그녀를 다치게 할지 몰라 불안했다.
에단은 토닥토닥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네 아버지는 위대한 사람이야. 그건 변하지 않아.”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평소의 그다운 무미건조한 말이었지만, 그 뻔한 말이 뭐라고 제법 위로가 되었다. 로엘은 서툴기도 한 그의 위로가 좋아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응. 알아요. 누가 뭐래도 내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잘났어.”
“그럼 나는?”
“그런 거 진지하게 묻지 말아요.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잖아.”
“진지하게 묻고 있는 거 맞아. 그러니까 대답해.”
기어코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그에게서 이리저리 도망치는데 꺄르르 웃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분명 내내 아버지 생각으로 울적했던 거 같은데, 금세 이리 웃고 있었다.
이 역시 그이기에 가능한 일.
어느새 그에게 붙잡혀 널찍한 테이블에 눕혀진 로엘은 자신의 위에서 야릇한 미소를 짓는 그에게 얼굴을 붉히며 그의 가슴을 애써 밀어냈다.
“아, 진짜! 밖에서 다 들린다고요!”
“그게 뭐?”
“당신은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요. 다들 우리가…….”
“우리가 뭐?”
“그니까 우리가……!”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한 채 얼굴만 붉히는 그녀가 귀엽기도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지레짐작하고 금세 열기를 띠는 그녀의 붉은 눈이 장난만 치려던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작은 손이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 보았자, 이미 붉어진 얼굴로 안 된다고 말해 보았자, 남자에겐 충동질밖에 되지 않는다는다는 것을 어찌 알는지.
“이 정도면 깨달을 때도 되었는데 말이지.”
“네?”
“늘 네가 더 문제란 거야.”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진한 키스를 했다. 양손을 맞잡아 테이블에 내리누르며, 그는 지그시 입술을 눌러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수줍게 입을 열어 그런 그를 받아들였고, 이제는 제법 숨을 쉬게 될 줄 알아 그의 애태우게 만들기도 했다.
야릇한 소리가 서로의 귓가에 울리고, 점점 뜨거워지는 체온이 온기를 나누었다.
익숙한 향기. 익숙한 체온. 익숙한 이 짜릿함.
천하의 에단이 그의 전략 회의실에서 이리 여자를 안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을 줄 누가 알았으며, 그녀 역시 카이로스의 회의실에서 카이로스의 황제와 이리 야한 일을 벌일지 누가 알았을까.
정말 인생이란 아무도 모르는 거다.
“하아. 이거, 너무 불경스러운 거 아니에요. 신성한 회의실인데.”
“알 게 뭐야. 내 나라, 내 회의실에서 내가 내 여자를 안겠다는데.”
“진짜 제멋대로인 황제 폐하라니까.”
“더 제멋대로일 예정이야. 더 야해질 예정이고.”
답답했던 목의 단추를 헐겁게 푸르고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섹시하기도 한, 그 허스키한 목소리에 저절로 심장이 뛰는 걸 느끼며 그녀는 마지못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의 입술을 다시 찾았다.
실은 그녀 역시 그의 키스를 너무 좋아한다고.
그래서 언제든,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괜찮다는, 전하지 못한 그 진심을 그녀는 애써 숨겼다.
***
로엘은 헝클어진 머리를 애써 정리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그는 단순한 키스로 끝내지 않았다. 기어코 그녀의 드레스를 풀어헤쳐 키스마크를 이곳저곳 만들어 버린 그 덕분에 머리며 옷이며 엉망이 되었다.
밖에서 제롬의 내무대신이 기다린다는 소리만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끝까지 갔을 거다.
“내가 못 살아. 진짜.”
얼굴이 화끈거려 나오는 길에 제롬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정리하긴 했지만 이미 빨개진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가 둘이 무언가를 했다는 것을 너무 여실히 드러냈다.
눈치 없게도 제롬에게 투덜거리며 까칠하게 받아치는 그 때문에 로엘은 더 부끄러웠다.
발정 난 짐승들도 아니고 벌건 대낮에, 모두가 드나드는 회의실에서 무슨 짓을 한 건가 싶다.
“내가 다시는……!”
서두르던 그녀의 발걸음이 순간 딱 멈췄다. 황실 복도 한가운데서,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마주쳐 버렸다. 자연히 시에라가 그녀 앞을 막아섰다.
경계가 가득한 시에라의 태도에 케인 몰브는 피식 웃었다.
“신수가 좋아 보이십니다, 마마?”
껄렁거리는 태도. 비꼬는 말투.
아무래도 쉽게 비켜 줄 것 같지 않아 로엘은 한숨을 삼켰다.
로엘 암살을 계획한 자라는 사실이 뻔히 드러났는데도 이리 태연히 그녀를 보며 인사를 건네다니.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권력이라는 게 무언지, 참 여럿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 거 같다.
“케인 경은 신수가 안 좋아 보이는군요. 계획했던 일이 잘 안 되셨나 봅니다. 안타깝게도.”
“덕분에요.”
한 걸음 더 로엘에게 다가서자, 바로 시에라가 검집을 들어 그를 막아 세웠다. 케인은 바로 정색하였지만, 시에라는 그 살벌한 눈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로엘이 시에라를 뒤로 물렸다. 중요한 시기에 괜한 잡음을 넣고 싶지 않았다.
“혹시 좌천 또한 내 덕인가요? 그럼 저도 기쁘겠군요.”
케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가까이 다가간 그에게도 아랑곳 않고 버젓이 미소를 띠며 그를 조롱하는 그녀는 확실히 강적이었다.
케인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로 바짝 얼굴을 댔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에 닿아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옅은 알콜 냄새와 섞인, 어디선가 맡아 본 기분 나쁜 향이 느껴졌다.
케인은 낮게 그녀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제까지 그 예쁜 얼굴로 웃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저는 계속 그럴 거 같습니다만, 케인 경은 얼마 안 남은 듯합니다.”
그녀의 붉은 눈이 슬쩍 케인에게로 돌아갔다.
“이따위로 계속 무례하게 굴면, 내가 언제 그쪽을 죽여 버릴지 모르거든.”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그 경고는 제법 섬뜩했다. 케인은 피식하고 조소를 뱉었다.
“무지하면 용감하다더니. 천지 분간 못 하는 계집 같으니라고. 네가 뭐라고 감히 몰브가의 장남을 죽여. 내가 죽으면, 넌 찢겨 죽게 되어 있어.”
“적어도 네놈은 죽겠네.”
살짝 입꼬리를 들어 로엘은 그 조소를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순간 울컥한 케인이 그녀의 얇은 팔을 아프게 잡았다. 통증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그 와중에도 로엘은 끝까지 시에라는 저지시키며 똑바로 케인을 쳐다보았다.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지 모르겠으나 네년, 내가 꼭 죽여 주마.”
“이번엔 직접 오세요, 케인 경. 비겁하게 사병 따위로 암살하려 들지 말고. 아? 직접 올 실력이 안 되시나?”
“너……!”
그녀의 도발에, 케인은 정말로 한 대 칠 것처럼 손을 올렸다. 다급해진 시에라가 먼저 그 손을 잡으려 팔을 뻗으려던 찰나,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더 큰 손이 케인의 손을 거칠게 잡았다.
“오랜만에 봅니다? 케인 경.”
그리고 그 손은 가차 없이 힘을 주어 케인의 손을 꺾었다. 케인은 짧은 비명과 함께 반사적으로 로엘의 팔을 잡은 손을 놓아 버렸다.
지난번엔 루카스였는데 이번엔 이반이라니. 기사님이 많기도 하셔라.
케인은 신경질적으로 이반의 손을 뿌리쳤다.
이반의 말대로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재수 없는 황제의 면상과 어쩜 저리 닮았는지, 케인은 이래저래 짜증이 올라왔다.
이반이 돌아왔단 소식을 듣고 조만간 황궁에서 부딪히겠거니 했는데, 이런 거지 같은 상황으로 부딪힐 줄이야. 케인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황자께선 여전히 쓸데없이 공사가 다망하신가 봅니다. 이렇게 아무 데나 사리 분별 못 하고 끼어드시는 걸 보면.”
로엘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 말이 귀족 자제 따위가 황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던가.
그런데도 경악하는 로엘과 다르게, 이반은 별일 아닌 듯 담담했다.
아니 속없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저야 늘 공사가 다망한 사람이고, 케인 경이야말로 지금 공사가 다망하셔야 할 텐데, 아주 한가로워 보이십니다. 이렇게 애먼 분을 잡아 두고 시비 거시는 걸 보면. 정말 할 일이 없으신가 보군요? 소문대로.”
다행히 속없기만 한 건 아니었다. 웃는 얼굴로 대놓고 물 먹이는 이반의 말에 케인의 얼굴이 한층 더 굳어졌다.
“할 일이 없는 건 그쪽 아닌가?”
그런 케인은 이제 이반에게 존칭마저 쓰지 않았다.
“내 걱정하기 전에 본인 걱정이나 하시지요. 황제한테 구걸해서 겨우 목숨 건진 황자가 이리 황궁에 있는 거 자체가 역모인 거 모르십니까?”
“케인 경……!”
듣자 듣자 하니 너무 심했다. 그 무례함과 불손함이 도를 넘어서자 로엘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나섰다. 머리가 뜨끈해질 정도로 화가 올라 제대로 싸워 보려는데, 이반이 그런 로엘 앞을 막아섰다.
자연히 그녀를 완전히 케인으로부터 가려 주는 이반의 뒷모습에, 로엘은 말문이 막혔다.
이 뒷모습, 너무 오랜만에 본다.
이건 일종의 그의 습관 같은 거다. 그녀를 보호하려 드는 그의 오래된 습관.
“하. 뭐야, 이 그림은?”
그런 두 사람의 묘한 기류를 케인이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케인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다 나왔다.
아무리 그가 뭐라 해도 흥분 한 번을 안 하는 로엘이 이반의 일에는 얼굴까지 붉히며 화를 내고 있었다. 이건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다.
“진짜 둘이 뭐라도 있는 거라면……. 이거야말로 제대로 배신 아닌가?”
케인이 한 걸음 더 바짝 다가가 로엘과 이반을 번갈아 보았다. 이반의 등 뒤에 거의 가려진 로엘은 케인의 눈을 피했다. 굳이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면, 그 잘난 우애가 여자마저 양보하는지 확인해 보려는 건가? 그건 나도 좀 궁……!”
“정도껏 해.”
기어코 이반을 화나게 만들었다. 꾹꾹 눌러 담은 분노를 겨우 삼키며, 이반은 케인의 한쪽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정도껏 해. 내게 두 번은 없어.’
어쩌면 말하는 것마저 이리 똑같은 건지.
케인은 나이가 들수록 더 닮아 가는, 이 살벌한 두 형제에게 온갖 욕을 속으로 뱉었다.
이반은 살짝 상체를 숙여, 케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네 말대로 난 겨우 목숨 하나 건진 황자라 무서울 게 없어. 그런 내가 너 하나 이 자리에서 죽인다고 내 형제가 나를 죽일까?”
아니. 절대 그럴 리 없다. 아마 온 원로원을 다 죽여서라도 이반 하나를 살릴 그런 사람이다. 이 나라의 황제께서는.
케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에단 하나 없으면 아무도 뒤를 봐주지 않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황자 주제에 그는 한 번도 케인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여타 다른 황족들이 몰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첨할 때도 그는 나 홀로 권세와 권력 따위 관심 없다는 얼굴로 그 옛날부터 케인을 무시해 왔다.
그러곤 보란 듯, 에단이 황위에 오르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가장 요직인 군사기획사령관에 앉았다.
지금 이반이 앉아 있는 그 자리, 실은 케인이 오래전부터 바라던 자리였다.
“……언제까지 황제가 네 뒤를 봐줄 거 같아? 황위에 오르지 못하는 황자 따위, 결국엔 내쳐질 뿐이야.”
“그 전까지 내가 상전이란 건 확실하지.”
케인은 신경질적으로 이반의 손을 뿌리쳤다.
“허울뿐인 그 황자 자리도 얼마 남지 않았어.”
뒤도 안 돌아보고, 거칠게 이반의 어깨를 치고 지나는 그에게 이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로 끝나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 역시 그만 로엘을 챙기려는데, 그보다 먼저 로엘의 목소리가 울렸다.
“케인 몰브.”
아무래도 그녀에겐 양호하지 않았나 보다.
대놓고 부르는 그 이름은 분명 하대였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화나 있는 케인은 그녀의 말에 바로 살벌한 눈으로 돌아봤다. 물론 그런다 한들, 로엘은 꿈쩍을 안 했지만.
“몰브는 황자님께 예를 갖춰라.”
겨우 진화된 분위기가 다시금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이반은 더 깊은 한숨을 삼켰다. 그저 자신 뒤에서 보호나 받고 있으면 좋으련만, 로엘은 역시 로엘이었다.
저 차가운 눈을 보건대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하? 케인 몰브? 어디서 감히……!”
순식간에 로엘이 시에라의 검집에서 빼들어 뻗은 검은 정확히 케인의 눈앞에 멈추었다. 어찌나 빠른지 시에라와 이반마저 놀랄 정도였다.
드레스를 곱게 입은 채 검을 든 그 자세가 너무도 정석이라 이반은 웃고 말았다. 참 쓸데없는 시점에서 멋있고 난리다.
“몰브가에서는 황실에 대한 예도 배우지 않는가? 아니면, 누가 상전인지 알려 줘야 할 만큼 그대가 무지한 것인가?”
황자, 황자, 황자.
감히 어디서 ‘황자’야.
로엘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황위에 앉지 못한다는 그 이유 하나로 한 나라의 황자를 이리 대놓고 무시하고 멸시하다니.
로엘은 저절로 생각나는 아버지 때문에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 순간만이라도, 저 오만한 머리가 이반에게 숙여지는 꼴을 봐야겠다.
“케인 몰브는 예를 갖추세요. 내가 다시 저 방에 들어가 그대가 나를 어떻게 희롱하였고, 이반 전하를 어떻게 모욕하였는지 낱낱이 고하기 전에.”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는 거, 정말 싫었다.
“……이반 전하.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비겁하게 그에게로 달려가 이르고, 그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그런 치졸한 짓. 정말 너무 하기 싫었다.
“아카시스 로엘 님. 저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그런데도 머릿속에 생각나는 사람은 그뿐이다.
오만방자한 케인마저 단번에 고개를 조아리게 만드는 그 한 사람.
로엘은 자신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인 케인을 내려보며, 계속 사라의 말이 맴돌았다.
그녀에게는 아직 ‘권력’이 없다는, 그 쓰라린 말, 너무도 맞는 말이다.
“됐으니 그만 가시죠. 다음에 봅시다.”
이반은 그만 그녀에게서 검을 받아 들며 케인을 물렸다.
저 속이 얼마나 악에 받쳤을지 뻔히 알아, 그래서 그 화살이 또다시 로엘을 위험하게 할까 걱정부터 되었지만 그래도 저절로 나오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이 황궁에서 자신을 위해 이리 화내 준 이가 있기는 했던가.
케인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이반은 그녀를 부를 수 있었다.
“네아.”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살짝 닿자 그녀는 탁하고 그 손을 쳐냈다. 바로 한 걸음 물러난 그녀는 매섭게 그를 돌아보았다.
케인을 기어코 고개 숙이게 만들었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나 보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 붉은 눈동자에 이반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지금 그를 원망하고 있는 거다.
“도대체 왜……!”
이런 대접을 받고 가만히 있는 거냐고.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바보처럼 참고 있냐고.
이걸 피해 도망쳐 왔으면서, 무슨 부귀를 보겠다고 그렇게 다 버리고 돌아왔냐고.
이럴 거면, 그때 그냥 내 곁에 있지 그랬냐고.
“……안녕히 가세요. 이반 전하.”
그 모든 말을 로엘은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한 마디라도 했다가는 정말 이곳에서 그를 붙잡고, 참고 참았던 감정을 토해 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없이 그만 그를 지나쳐 갔다.
그 뒷모습을 이반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매정하기도 하네.”
붙잡기엔, 그녀가 조금만 건드려도 울 것만 같아서.
이반의 주먹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또다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쳐 가 버릴 거면, 애초에 그런 눈을 하질 말든지.
이반이 말했던 그 친구 사이, 이제야 시작인데도 벌써부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보면 웃고 그녀 역시 그에게 웃어 주는 그런 나날.
시간이 지나다 보면, 그래서 감정이 무뎌지고 아카시스인 그녀가 익숙해지면 가능할 줄 알았는데, 어쩌면 평생 그런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렵네.”
그래서 그보다 더 쉬운, 절대 해서는 안 될 생각이 들려 했다.
이반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밀려오는 그날의 후회를 꾹꾹 눌러 담았다.
***
“토르티아가 티란 지역을 이양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데릭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도 쉽게, 알짜배기 땅이 넘어왔다.
그가 즉위하고 벌써 두 번째였으며, 조지 황제가 즉위하고 나서는 네 번째 있는 일이었다.
제이드 네아레스가 억지로 유지하고 있던 토르티아는 그가 사라지고 나자 급속도로 쇠락했다.
그 큰 영토를 다스리기에 황제는 무능했으며, 부패한 귀족들은 자기들 잇속 챙기기 바빴고, 백성들은 그들의 착취에 허덕였다.
“애초에 제이드 네아레스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몰락했을 나라야.”
데릭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토록 뛰어난 왕재를 그렇게 허무하게 죽인 순간부터 토르티아의 명운이 이미 다한 거였다. 자연히, 그러한 토르티아의 몰락은 테바로스의 부흥으로 돌아왔다.
“지금 토르티아는 전쟁할 여력이 전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제이드 네아레스 장군의 부재가 군사의 사기를 떨어트렸고, 실제 그 휘하의 유능한 장수들도 대다수 옷을 벗었지요. 지금의 토르티아 군대는 더 이상 북방 최강군이 아닙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북방의 패권을 찾아와야 합니다.”
데릭의 최측근, 참모 버리는 결연한 눈으로 말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한때 토르티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테바로스는 토르티아보다 뒤처지지 시작했다.
고립된 테바로스는 토르티아와의 격차가 점점 벌어졌고, 이제는 북방의 토르티아만이 기억되고 있었다.
그러니 테바로스로선 통탄할 밖에.
“우선 중부와의 활로를 뚫어.”
“예.”
이번에 수복한 티란 역시 중부와 가장 가까운 동남부 경계국이었다. 비록 토르티아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명실상부 무역의 요충지인데 이를 조지 황제는 쉽게 그들에게 팔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군사로 위협해서 억지로 팔게 만든 거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그리고, 토르티아가 또다시 국혼을 제안해 왔습니다. 이번에도 거절할까요?”
데릭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대충 쳤다. 이걸로 벌써 세 번째였다.
그가 다섯 번째 황자였을 때는 죽어도 안 된다고, 그리 정색하며 거절했던 주제에 이제 와 자신들이 아쉬워지니 저리 저자세로 나왔다.
염치도 없고 뻔뻔하기 그지없다.
“……제이드 네아레스 딸은 카이로스로 갔다고?”
“예.”
데릭은 국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문득 자신의 옛 정혼자가 생각났다.
다 해 봤자 열 번은 보았을까.
‘아쉽겠군. 저 황태자비 자리, 원래 네 자리였으니.’
‘전혀 아닌데요?’
테바로스 황태자와 에리카가 약혼을 하던 날, 데릭의 말에 정말 의아하단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그 붉은 눈이 떠올랐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그녀의 태도에 데릭은 순간 말문이 막혔었다.
‘누가 그러던가요? 저 자리가 제 자리라고? 저는 데릭 황자님과 정혼하였으니, 원래부터 이 자리가 제 자리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던 어찌나 맹랑하던가.
‘이 자리가 더 좋은지 안 좋은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황자님의 정혼자가 되었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 작정입니다. 그러니 아직 반의반도 살지 않은 제 인생을 멋대로 단정 짓지 말아 주세요.’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 주제에 그녀는 똑바로 그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그녀의 따가운 질책은 어쩌면 그의 인생에 꽤나 큰 전환점이었는지도 모른다.
‘황자님께서도 황자님 인생을 사세요. 태어난 순서 따위에 얽매여 살지 마시고.’
그 정도로 그녀의 말은 아무것도 허락된 게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했던 데릭 테바로스의 뒷통수를 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평생을 같이할 반려자라면, 저는 이왕이면 잘생긴 편이 좋아요. 저보다 열 살 많은 아저씨는 싫다고요.’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 모습이 생각나 데릭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꽤나 오래된 기억임에도 하나하나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도 살기가 바빠서, 살아남아 이 자리에 앉기 바빠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파혼하였지만 실은 많이 아쉬웠다.
몇 번 만나지 않았어도, 함께 해 본 것이 없어도, 늘 데릭은 그녀를 자신의 반려로 생각해 왔었으니까.
“이왕 말이 나와서 그런데, 정말 국혼은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토르티아 황녀가 아니어도, 황비 자리는 오래 비워 둘 수 없습니다.”
“……나중에.”
그래서인지 모른다.
자신의 옆자리에 그때의 그 붉은 머리 소녀가 아닌 다른 이가 앉는 것이 꺼려지는 이유가.
“다음으로 넘어가지.”
오래된 기억에 잠시 추억에 잠겼지만, 추억은 추억일 뿐.
데릭은 그만 다음 결재 문건을 잡았다.
***
“생각보다 훨씬 더 큰 행사였군요.”
“네. 올해는 최근 몇 년 중 가장 큰 풍년이어서 더 그렇다고 들었어요.”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 대회로 풍년을 기원한다고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번엔 풍년에 감사하다는 황실 연회가 열린단다.
단순히 한 해 농사에 대한 자축뿐 아니라 풍년의 신께 제를 올리는 의미도 있어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카이로스의 연례 행사였다.
“정말 화려네요.”
“그러게요. 저도 오랜만에 와서 보니, 더 그런 거 같아요.”
무희들의 화려한 춤사위를 함께 보며 수아가 말했다.
궁에 들어온 후 쭉 칩거 생활을 하던 수아는 몇 년 만에 연회에 참석하였다. 당연히, 그 결심에는 로엘의 영향이 컸다.
로엘은 그녀만큼이나 제법 즐기고 있는 수아를 보며 미소 지었다.
“함께 와 주셔서 감사해요. 수아 님이 아니었으면 저 혼자서 많이 심심했을 거예요.”
“제가 감사드리죠. 저야말로 로엘 님 덕분에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네요.”
수아는 멀리 자신을 보며 감격스런 눈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자신의 칩거 생활이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눈물을 훔치며 좋아하실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로엘이 고마웠다.
이번에도 완곡히 거절하려는 그녀를 끝끝내 설득해 이 자리까지 오게 하였으니.
수아가 로엘과 함께 연회에 나왔을 때 비들은 하나같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늘 수아의 부재로 홀로 에단과 가장 가까운 아카시스 자리에 앉았던 아리스의 표정이 제일 안 좋았다. 똑같은 개국공신 가문의, 똑같은 아카시스 신분인 수아가 등장하였으니 자연히 아리스 역시 수아와 동등한 아카시스 자리로 맞춰 뒤로 밀려났다.
거기에 최근 가장 소문이 무성한 ‘로엘’마저 함께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모든 관심은 자연히 로엘에게로 쏠렸다.
“수아 님. 오늘 정말 아름다우세요. 평소에도 느꼈지만 이렇게 제대로 꾸미시니까 진짜 천사 같아요.”
정작, 그 당사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아까부터 연신 예쁘다고 말해 주는 그녀의 칭찬에, 수아는 미소 지었다. 참 순수하고도 귀여운 분이시다.
“로엘 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요. 로엘 님이야말로 아까부터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어요.”
로엘은 수긍할 수 없다는 얼굴로 갸우뚱했다.
헤더가 회심의 준비를 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 정도라고 하기엔 절세 미녀 아리스 역시 오늘을 한껏 힘을 줘 눈에 띄게 화려했고, 수아 역시 그 특유의 청순함이 폭발했다.
특히 곱게 머리를 내린 수아의 모습은 너무 단아하고 아름다워 저 멀리 이국의 공주님 같았다.
“그거야 머리색 때문이겠죠. 워낙 이곳에서 눈에 띄는지라.”
“절대 그뿐만이 아닐걸요.”
수아야말로 진심으로 말했다.
단정한 올림머리에, 어깨선이 훤히 드러나는 오프 숄더 드레스는 그녀의 매끈한 하얀 피부를 여실히 보여 주었고, 하나하나 부드럽게 떨어지는 아름다운 선은 그녀의 아찔한 몸매를 훤히 드러냈다.
뿐만이랴.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화장까지 한 덕분에 이목구비는 더 명확해졌으며, 주먹만 한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잘도 자리 잡은 눈코 입은 가히 미인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거기에 무엇보다도,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그녀의 목걸이.
“수아 님?”
“아, 아니에요.”
수아는 로엘에게 그 목걸이의 출처를 물어보려다 말았다.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로엘의 반응을 보아하니. 보나마나 저 목걸이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한 것 같았다.
아리스는 그걸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는데 말이다.
수아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귀여운 분이다.
“목걸이, 예뻐서요.”
“아. 오늘 제롬 경께서 갑자기 갖다 주셨어요. 지난번 받은 것들이 있어서 괜찮다고 했는데, 꼭 오늘은 이걸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이 연회에 다이아몬드를 해야 한다거나 하는 전통이 있나요?”
“아니요. 특별히 그런 건 없어요. 그저 폐하께서 로엘 님이 하시길 바랐나 봅니다.”
“은근히 화려한 거 좋아하신다니까요. 이렇게 크고 무거운 거, 절대 제 취향 아닌데.”
그녀는 작게 투덜거렸다.
“음. 아마 취향의 문제가 아닐 거예요.”
“네?”
“취향보다는, 유용성의 문제랄까요?”
로엘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수아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수아는 그저 웃을 뿐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다이아몬드는 대대로 카이로스 황실이 독점 생산하는 황실의 보석이다.
물론 황후를 배출한 가문인 수아와 아리스 역시 여러 개 가지고 있지만, 결코 지금 로엘의 목에 걸려 있는 수준일 수 없다.
중심의 가장 큰 다이아서부터 수십 개의 작은 다이아까지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그 다이아 목걸이는 누가 봐도 ‘황후’의 상징.
이걸 그녀의 목에 걸어 두는 건 일종의 경고이자 선포였다.
지금 그의 마음이 어디로 가 있는지에 대해.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네.”
수아는 슬쩍 에단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여전했다.
여전히 태양같이 환하게 빛나시는 분. 너무 빛나 가까이할 수 없는 분.
어릴 적 처음 본 순간부터, 수아는 에단이 단 한 순간도 편해 본 적이 없다.
늘 그녀에게는 그저 차갑고, 무서운 이 나라의 황제일 뿐.
“수아 님, 수아 님! 방금 보셨어요?! 우와. 진짜 너무 신기하다!”
그분께서도 저리 미소 지을 줄 아는 분이셨다니.
수아는 공연에 정신 팔린 로엘을 멀리서 지켜보는 에단의 따뜻한 눈길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그건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히, 이 아름다운 공주님 덕분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대하는 분. 음모와 모략이 일상인 이곳에서 홀로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분. 그 투명함에 그러지 못한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그런 멋진 분.
“정말 멋지네요, 로엘 님.”
그래서, 화려한 폭죽이 하늘을 수놓을 때마다 연신 탄성을 자아내는 로엘의 모습에 수아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카시스님.”
로엘과 수아가 그렇게 연회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창 행사 보안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루카스였다.
평소에 부르던 대로 로엘 님이 아닌, 아카시스라는 호칭에 로엘은 오늘 행사가 중요하긴 하구나 다시 한 번 느꼈다. 제대로 차려입고 수많은 병사들에게 인사를 받는, 장난기 쏙 빠진 루카스는 꽤나 대장군 같았다.
“무슨 일인가요, 대장군.”
그래서 그녀 역시 제법 격식을 갖추어 답했다.
“지난번 불미스러운 일도 있고 하여, 마마의 호위를 강화하라는 폐하의 지시가 있으셨습니다. 외부인의 출입이 특히 많은 오늘 같은 날이 더 위험할 수 있으니, 마마. 불편하시더라도 항상 저희 프래카와 동행해 주십시오.”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군.”
로엘은 마음 써 주는 에단이 고마워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이 자리에 와 눈 한 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는 대표로 제를 올려야 하기도 했고, 그녀가 너무 멀찍이 떨어져 앉기도 하여 시선 한 번이 겹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리 안 보이는 곳에서 그녀를 지켜 주고 있다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저는 계속 수아 님과 있을 거니 너무 염려 마세요. 그렇죠, 수아 님?”
“네. 저도 로엘 님 곁에 있……!”
루카스에게서 시선을 돌리던 수아의 말이 순간 끊겼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수아 님?”
수아는 로엘의 걱정 어린 부름에도 답하지 못한 채, 그저 루카스 뒤에 있는 한 남자만을 바라보았다. 루카스보다 조금 더 키가 큰, 그 프래카 역시 그런 수아만을 응시했다.
“수아 님. 괜찮으세요?”
“아……. 아. 저기. 그러니까, 아!”
손을 미세하게 떨더니만 결국 테이블 위에 있던 잔이 떨어져 버렸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튀고, 수아의 귀한 드레스가 흥건히 젖어 버렸다.
“괜찮으세요?! 어디 안 다치셨어요?”
“아……. 네. 저는 괜찮은데……. 로엘 님. 저는, 잠시…….”
여전히 수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니. 손뿐이랴. 전쟁이 나도 꿈쩍도 안 할 거 같은,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한 수아답지 않게 너무 동요하고 있었다.
톡 치면 바로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에 로엘은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자연히, 수아의 시선이 닿았고, 수아만을 바라보고 있는 루카스 옆의 프래카에게 눈이 갔다.
“수아 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셔야 할 거 같아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루카스. 루카스는 그만 폐하 곁으로 돌아가 주세요. 이렇게 중요한 날, 대장군은 폐하 곁에 계셔야지요.”
로엘이 너무 단호하여 루카스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생긋 웃으며 가 보라는 그녀의 말은 엄연히 명령. 루카스는 그만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루카스가 떠나자, 로엘은 바로 남은 프래카들 중, 유달리 눈이 가는 그를 보며 말했다.
“이름이 뭔가요?”
“아카시스 로엘 마마를 뵙습니다. 프래카 리암 고든. 인사드립니다.”
그가 이름을 말하자, 수아의 손이 더 떨려 왔다. 애써 그쪽으로 시선을 피하는 그녀가 너무 사시나무 떨듯 떨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로엘은 수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아 주며, 리암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의 눈도 같다.
수아가 그를 바라보던, 그 슬프고도 애틋한 눈이다.
“프래카 리암. 저 대신 수아 님을 안으로 모셔 주겠어요?”
아래로 향하던 수아의 시선이 그 말에 바로 로엘을 향했다. 놀란 그녀의 표정에 오히려 로엘은 더 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계속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죄송해요. 저까지 자리를 비우면, 아카시스가 둘이나 나가 너무 주목받을 거 같아서요. 잠시만 안에 들어가서 쉬다 오세요.”
그럴듯한 명분까지 만들어 주는 그녀의 배려에 수아의 눈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그녀가 무얼 알고 이런다 생각하진 않는다. 몰래 수아의 뒷조사를 할 만큼 앞뒤가 다른 사람도 아니거니와, 설사 조사를 한다고 한들 알 수 있을 만큼 켈트 가문의 보안이 허술하진 않다.
그러니, 로엘이 보인 이 배려는 그저 수아에 대한 호의.
수아 역시 그런 로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럼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더 이상 묻지도 않고,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않은 채 로엘은 그저 수아의 망설이는 등을 떠밀어 줄 뿐이었다.
그렇게 로엘이 만들어 주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두 사람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마마. 오지랖이세요.”
“하하. 너무하다.”
“수아 님은 아카시스세요. 마마.”
“나도 알아.”
딜리아의 작은 한숨에도 로엘은 수아가 가 버린 쪽을 계속 지켜보았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는걸. 둘 다.”
로엘은 잠시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진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황금의 제단에 앉은, 황금의 황제께서는 많이 지루하신 모양인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표정 없이 정면만을 응시했다. 그의 곁에서 한마디씩 열심히 건네는 이들의 아첨들을 듣고는 있는가 싶다.
“……!”
그런 그의 눈이 슬쩍 그녀 쪽을 향하더니, 드디어 두 사람의 눈이 딱 맞았다.
자연히 휘어지는 그의 입가에 로엘 역시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간질간질한 기분.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
수아에게 이런 감정을 줄 수 있는 건 그 프래카 한 사람만이란 걸 알았기에, 로엘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응. 역시나 잘한 일이야.”
로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부디 수아 역시 잠시만이라도 진심으로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