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서막
막 동이 트려는 이른 새벽녘, 로엘은 혼자 가벼운 차림으로 검을 들고 나왔다.
“하아. 새벽 공기.”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상쾌한 새벽 공기가 정신을 깨웠다. 일찍 눈을 뜬 에단 때문에 덩달아 눈이 떠 버린 로엘은 오랜만의 아침 운동을 위해, 그가 나서는 길에 함께 나왔다.
그녀를 따라오겠다는 그를 겨우 집무실로 보내고, 그녀는 홀로 에단이 허락해 준 황제 전용 후원에 섰다.
“검 휘두르기 딱이네.”
잘 정돈된 잔디는 아침 이슬을 머금어 촉촉했고, 넓은 부지는 실컷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커다란 나무에 둘러싸여 남들의 방해를 받을 일도 없었으니, 딱 그가 수련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는 주로 이곳에서 루카스와 대련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사람 많은 부대에 가느니 이런 개인 훈련 장소가 있으면 애용할 법했다.
“네아?”
다만, ‘전용’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이용객이 많을 뿐.
로엘은 생각지도 못한 이반의 등장에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이 시간에 혼자 온 거야?”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화장기 전혀 없는 맨얼굴에, 아무렇게나 높이 묶은 긴 머리. 움직이기 편한 바지에, 목선이 훤히 드러나는 편안한 셔츠 차림까지. 드디어 이반이 아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 차림으로 돌아다녔다는 걸 사라가 알면 뒤집어질 텐데.”
남이사,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로엘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으며 애써 그를 무시했다.
그래 봤자 이반에게는 그런 로엘의 속내가 다 보였지만.
“그리고, 새벽이라 아직 그렇게 입으면…….”
“거기까지. 더 다가오시면 벱니다.”
한 걸음 더 다가오려는 이반에게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았다. 그녀의 날 선 검은 정확히 이반의 코앞에 멈춰 섰다.
당장이라도 그를 벨 듯 정색했음에도 이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못 베실 것 같은데.”
“허세 부리지 마. 아무리 너라도 검도 안 뽑……!”
‘챙!’ 하고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 한 번이 울리더니, 그녀의 검은 비껴지고 그는 성큼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나도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라.”
그녀를 이길 때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꼬리. 그녀를 더욱 화나게 하는 저 얄미운 여유.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그가 먼저 안는 그 순간, 로엘은 정확히 그와 눈이 맞았다.
또렷이 상대를 응시하는 그 아름다운 황금의 눈은 여전했다.
“놔.”
“네아.”
“놓으라고.”
그녀의 허리에 닿은 그의 손길이 불편했다. 이리, 조금만 다가와도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 역시 너무도 불편했다. 로엘은 이반과 똑 닮은 에단이 저절로 생각나 바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그건 내가 할 소리인 거 같은데.”
이반은 똑바로 로엘을 응시했다. 로엘 역시 그런 이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제 에단의 이야기를 듣고 다짐한 건 두 가지.
하나는 절대 두 형제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어차피 안 볼 수 없는 사이라면 이반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
로엘은 검을 다시 집어넣고, 그 앞에 제대로 섰다.
로엘이 진지한 만큼 이반 역시 진지해졌다.
드디어 그녀와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어째서 네가 카이로스에 온 거야.”
“몰라서 물어? 카이로스의 황자께서?”
“그러니까 왜 네가 여기에 있냐고. 오려면 지금 토르티아 황제의 딸이 왔어야지!”
“퍽이나 그 귀한 황녀님께서 오셨겠네. 뻔히 팔려 오는 자리인 줄 알고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로엘은 헛웃음이 나왔다. 자기 딸이라면 죽고 못 사는 그 조지 황제께서 잘도 금지옥엽 같은 딸을 포로로 내어 주겠다.
카이로스가 화친의 이유로 황녀를 요구했을 때, 에리카는 울고불고하느라 토르티아 온 성이 시끄러웠다.
조지 황제는 그 지경이 되어서야, 탑에 방치하던 그녀를 찾았다.
자기 딸 대신 사지로 가라고.
“포로인 줄 알면서도 내 발로 왔어. 어딜 가든 적어도 토르티아 황궁보단 나을 테니까.”
단 한 발자국을 나가지 못했다.
시간 맞추어 주는 밥을 먹고, 계절마다 바꿔 주는 옷을 입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었으며 먹고 자는 것 외에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로엘은 조지 황제가 자신이 미쳐 이 탑에서 뛰어내리길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포로로 나가라니. 고민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다른 곳도 아닌 카이로스였다.
토르티아를 무너트릴 수 있는 바로 그 나라.
“네가 멋대로 사라지고 난 후, 네가 그토록 존경에 마지않던 내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죽임을 당했고, 내 어머니 역시 내 눈앞에서 처참히 살해당했어. 그럼 나는? 나는 어땠을 거 같니?”
이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네아. 나는…….“
“나는 지금 널 원망하는 게 아니야. 그저 지나간 일들에 대한 사실을 말할 뿐이지. 너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내 부모의 죽음에 눈을 감았는데 네가 뭐라고 널 탓하겠니.”
한 마디, 한 마디 잔뜩 가시 돋친 그녀의 말들은 그의 가슴을 아프게 쑤셨다.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이반에게 로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는 오해를 하고 있나 보다.
“진심이야. 난 널 원망한 적 없어. 단지, 잊었을 뿐.”
아버지가 그렇게 허망히 가실 때, 그녀는 이반을 찾았다. 어머니가 그녀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실 때도 그녀는 이반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머니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괴한을 피해 도망칠 때서야 울면서 깨달았다.
아. 이반은 오지 않는구나.
로엘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런데도 이리 생생한 옛 기억에 주먹을 쥐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 작은 손을 보며 이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는 분명 그의 사부를 떠났고, 그동안 모든 것들이 어그러졌다.
토르티아 사람도 아닌 카이로스 황자 신분으로 그가 있었다고 한들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러함에도 이반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저 멀리 북방의 토르티아에서 전설적인 장군, 제이드 네아레스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소리 내어 통곡했다.
아무한테도 사부라 밝히지 못한, 자신이 평생 가장 존경했던, 마음의 아버지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야만 했다.
“나는 지금,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 이반.”
너무도 오랜만에, 그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다.
그녀는 그녀만큼이나 손에 힘이 들어간, 그의 주먹을 보았다. 로엘 역시, 이반이 아버지께 진심이었다는 걸 알기에 이반의 아픔도 알고 있다. 그저 투정을 부렸을 뿐, 정말로 그녀는 그를 원망해 본 적이 없다.
그저 그립고, 그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는 너무 외로웠으니까.
“이반. 너는 내가 누군지 처음부터 알았지만, 나는 네가 누군지 정말 몰랐어. 어렴풋이 중부의 귀족 자제 중 하나이겠거니 어림짐작했지. 그런데, 네가 이렇게 나타난 거야. 카이로스의 황자로.”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카이로스 황실의 상징인 황금 빛깔의 머리칼을 이리 뚜렷이 가지고 있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중부에 대해, 카이로스에 대해 무지했을 뿐.
“그러니 내가 여기 카이로스에 온 건, 너와 전혀 상관없어.”
로엘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서운해하지도, 화내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그녀의 마음을 말할 뿐이었다.
그 차디차고 냉담한 반응에 이반은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네가 그랬지. 네 형제는 너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너 역시 그러하다고. 그와 똑같은 말을, 나는 네 형제, 황제 폐하께도 들었어.”
로엘은 어젯밤, 에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그 말이 생각났다.
그때 그 말을 했던 이반의 눈은 이반을 말하는 에단의 눈과 똑같았다.
만일 로엘이 이반의 이야기를 그에게 하면, 그 역시 지금의 이반처럼 눈동자가 흔들릴까.
저렇게 마음 아픈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까.
로엘은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런 네 형제의 여자가 되었어. 그러니 이반. 더 이상 나와 엮이지 말아 줘.”
잔인하기도 하다.
어떻게 ‘형제의 여자’가 되었다는 말을 저리 쉽게 할 수 있는 걸까.
그는 ‘아카시스 로엘’이란 말을 듣는 순간 절망했는데.
로엘은 그만 이반을 지나쳐 가려 발걸음을 뗐다.
“싫어.”
그런데 그를 미처 지나치기 전에,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웠다.
과하게 들어간 힘에 로엘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싫어.”
“이반.”
몸이 멋대로 그녀를 잡았다. 그리고 멋대로 싫다는 말이 나왔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에단의 여자가 된 이상 이반은 더 이상 그녀를 가까이할 수 없다.
황제의 여자라니. 감히 함부로 쳐다봐서도 안 될, 그런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도, 이제는 모르는 사람으로 살자는 그녀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많이 와 버렸다.
“네 말이 다 맞아. 나는 네가 필요할 때 옆에 없었고, 너는 네 발로 카이로스에 왔지. 그리고 내가 카이로스의 황자인지도 모른 채, 내 형제의 여자가 되었어, 네 멋대로.”
그녀와 그 사이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도 알고, 그녀도 안다.
‘멋대로’라는 단어를 써도 될 만큼, 연인 관계였다 말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리 배신감이 들 만한 관계였던 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나도 내 마음 가는 대로 할 거야.”
로엘의 표정이 바로 굳었지만, 이반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로엘의 팔을 당겨 제대로 마주하였다.
“너……!”
“내 마음대로, 네 곁에 있을 거야.”
로엘은 말문이 막혔다. 네가 그러면 안 된다고 화를 내야 하는데 그러기엔 이반의 눈이 너무 단호했다. 아니, 간절했다.
“내가 네 곁에 없었던 그 시간. 내가 널 지키지 못했던 그 거지 같은 시간. 나는 넘지 못하는 국경에서 하루하루 후회에 몸서리쳤어. 다시 시간을 돌린다면, 그런다면 너를 데리고 오리라 매일매일 다짐했어. 그런데……!”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엔, 그에게 실린 책임의 무게가, 신뢰의 크기가 너무 컸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냈다. 5년씩이나. 지척에 그녀를 두고.
“나는 내 형제를, 에단을 배신할 수 없어.”
“알아.”
“하지만 너도 더 이상 잃을 수 없어.”
로엘의 양팔을 잡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로엘은 마음이 아팠다. 하필, 왜 하필 그 사람과 형제인 걸까.
참, 지독히도 꼬인 인연이다.
“그저 옆에만 있을게. 그저 옆에서 지킬게. 나의 형수로서. 이 나라의 아카시스로서.”
이제는 입을 맞추고, 온기를 나눌 수 없다.
품에 안아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일 수 없다.
늘 바라왔던 그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너는 도대체 언제 크는 거야?’
‘갑자기 뭔 소리야.’
‘얼른얼른 좀 커 봐. 기다리다가 속 터지겠어.’
‘내가 크면 뭐 하게?’
‘음, 이것저것?’
떨리는 손. 떨리는 눈동자.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
아. 오히려 보는 사람이 울 것 같다.
“네가 허락만 해 준다면, 네 친구로서도.”
로엘은 그러지 말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이미 그녀는 그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줬다.
다짐했던 두 가지.
어쩌면 단 한 가지도 못 할지 모르겠다.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론과 콜린은 무미건조한, 영혼 없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직 에단이 오지 않은 빈 회의실에 우연히 두 사람이 제일 먼저 도착했다.
궁인들이 먼저 두 사람에게 차를 내오고, 서로는 각자의 자료를 검토하였다. 숨 막히는 적막이 10분 넘게 이어졌다.
왠지 오늘따라 다들 늦는다.
“……이반 전하는 여전하시더군요.”
“달라지실 이유가 없지요.”
조금 날이 선 대답이 돌아와 아론은 슬쩍 콜린을 보았다.
여전한 건 두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북방에 계시는 동안, 무언가 달라지시길 바라셨나 봅니다.”
“그럴 리가요. 이반 전하는 늘 그랬듯 폐하의 충신으로 남으셔야지요.”
이번엔 콜린이 아론을 보았다.
에단과 이반이 함께한 시간만큼, 그들의 측근들과 함께한 시간도 길었다.
에단의 책사가 아론이라면, 이반의 책사는 콜린. 에단과 이반이 절절한 우애의 형제라면, 두 사람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앙숙이었다.`
“콜린 경 역시도 그러셔야 할 겁니다.”
드디어 두 사람의 눈이 제대로 맞았다. 정확히 콜린을 응시하는 아론의 눈은 단호했다. 아니 냉정했다. 너무도 당연한 저 말이 꽤나 뼈 있는 말이라는 걸 콜린은 잘 안다.
아론이 콜린을 탐탁지 않아 하는 이유. 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으므로.
“……마치 아니란 듯이 들리는군요.”
“그건 본인이 제일 잘 아시겠지요.”
아론은 정색하는 콜린에게 피식 웃어 버렸다. 너무 뻔히 드러내면서 아닌 척하는 그 모습이 아니꼬왔다. 그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 마음의 진짜 주군이 누구인지 어떻게 모를까.
그렇게 열렬히 자신의 주군을 황제로 만들려 노력하는데.
“본인이 제일 잘 아시는 그 본심. 부디 제가 알아채지 않도록 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아는 순간, 아는 것만으로는 안 끝날 테니까요.”
아론의 경고는 분명했다.
반역을 꾀하는 순간, 너는 죽을 거라고. 아니 네 가족과 네 연인, 네 모든 것이 사라질 거라고.
콜린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그깟 핏줄 때문에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포기하는 게?’
‘포기는 내 것일 때 하는 거야. 콜린. 황제 자리는 처음부터 내 형제의 것이었어.’
‘이반 전하도 황자시라고요! 정당한 계승권을 가진, 그런 황자!’
‘나는 내 것이 아닌 걸 탐하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내 형제는 너무 완벽한 황제감이야.’
에단 황제가 완벽하다는 것. 모든 것을 갖춘 타고난 왕재라는 것. 절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그는, 너무도 완벽한 ‘황족’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것을 가져, 아래를 볼 줄 모르는 사람.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사람.
그가 백성에게 베푸는 것은 공감이 아닌 호의. 위에서 아래로의 자비다.
그에 비해 이반은 그들과 함께 걷고 함께 식사하며 함께 느낀다.
콜린이 몰락하는 가문의 아들인 것을 알면서도, 그는 콜린을 최측근 책사로 등용했고 평생을 함께했다. 그의 아버지가 비리로 목숨이 위태로울 때 기꺼이 에단에게 고개를 숙여 자비를 청했고 수많은 원로원들의 질타를 몸으로 막아 줬다.
이반이 아니었으면, 피도 눈물도 없는 황제는 가차 없이 콜린의 모든 가족을 몰살했겠지.
그 완벽한 사람에겐 두 번의 기회 따윈 없으니까.
세상이 완벽하지 않은데도, 그 혼자 너무 완벽해서 문제인 거다.
그래서, 콜린의 주인은 항상 ‘이반’뿐이다.
“……저는 그저 이반 전하를 보필하는 사람입니다.”
짧게 생각에 잠겼던 콜린은 다시 아론을 직시했다.
자신을 보는 아론의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듯 콜린 역시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의 주군이 그에게는 보다 적합한, 최선의 왕재였으니.
“카이로스의 황위 계승권을 가진 제1황자 전하를 보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황위 계승권’이라니. 아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발에 도발로 맞받아친 거다.
마치 언제라도 황위에 오를 수 있다는, 그 불경한 말에 아론은 진짜 화가 났다. 자리를 박차고 제대로 따지려는데, 하필 타이밍 좋게 밖에 대기 중인 궁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카시스 로엘 마마께서 드셨습니다.”
그리고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회의실과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그녀가 들어왔다.
두 사람이 놀란 만큼, 그녀도 두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아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기어코 로엘을 프란시아로 만들 작정이신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당사자에게까지 제대로 설명조차 안 한 모양이다.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자연히 아론과 콜린의 허리가 굽혀졌다. 그녀 역시 작은 끄덕임으로 그들의 예를 받았다.
그녀는 어색하게 가장 가장자리에 착석했다.
“아론 경, 맞으시죠? 폐하의 수석 보좌관이신…….”
“아론 클래버입니다.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아론의 태도는 꽤나 딱딱했다. 모든 사람이 루카스처럼 과한 호의를 내비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건 호의는커녕 불호에 훨씬 더 가까웠다.
초면인 로엘은 이유 없는 아론의 냉대가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 그럼 이쪽은…….”
“이반 전하의 보좌관 콜린 르페라고 합니다.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로엘은 이반의 보좌관이란 말에 살짝 놀랐다. 이자가 있다는 건 다시 말해 이반 역시 이 자리에 올 거란 소리였으니.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은 그가 아주 많이 원망스러웠다.
그녀에게 자기소개를 한 후에 그들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아론뿐 아니라 콜린 역시 묘하게 그녀에게 퉁명스러워 로엘은 이 숨 막히는 정적이 그저 어색하기만 했다.
심히, 루카스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아카시스님.”
“네. 네?!”
그런데 갑작스럽게 아론이 그녀를 불렀다. 멍하니 시간 가기만을 바라던 그녀는 깜짝 놀라 서둘러 답했다. 기품과는 거리가 먼, 아주 멍청한 반응이라 로엘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첫 대면이 아주 모양 빠졌다.
“마마께서는 폐하께 ‘프란시아’에 대하여 아무런 말씀도 못 들으셨습니까?”
“프란시아요? 음. 폐하께서 저를 프란시아로 임명하신다고 이리로 오라 하셨습니다. 저도 갑작스럽게, 그것도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거라 다른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론은 머리가 뜨끈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를 모르겠다.
한편 로엘은 짜증이 확 지나가는 아론의 표정을 보며, 그리고 제법 놀란 콜린의 표정을 보며, 프란시아가 무언가 엄청난 지위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라나 딜리아에게 물어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아니하였다. 필요하거든 그분께서 말씀하시리라 생각했으니.
그런데 아론이 이 시점에서 다시 프란시아를 언급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걸 물어야 할 시기가 지금인 것 같다.
“아론 경. 저는 프란시아에 대해 폐하께 설명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하죠. 그 설명.”
또다시 문이 열리고, 모두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엘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반은 자연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앉아 있던 로엘이 따가운 눈총을 발사했지만 이반은 싱긋 웃을 뿐이다.
“설명하면 또 우리 이반 전하시지.”
뒤따라 들어온 루카스는 자연스레 그런 이반의 손을 로엘의 어깨에서 떼어 냈다. 눈치 없는 아론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이반은 자신과 눈을 맞추며 웃는 루카스의 눈길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제대로 찍힌 거 같다. 제일 귀찮은 사람에게.
“프란시아는 카이로스 전설에 나오는 전쟁의 여신입니다. 승리의 여신이기도 하고요.”
“네? 여신이요?”
“네. 그래서 전장에 나설 때마다 신전에서는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로 프란시아님께 제를 올리죠.”
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방이든 중부이든 간에 신전에서 신탁을 받는 일은 흔했지만, 유독 카이로스는 전통 신앙이 강했다. 고유의 신들에게 시기를 맞춰 제를 드린다고 사라에게 교육받아 알았지만, 이렇게 막상 예를 들으니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그럼, 저를 프란시아로 임명한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제가 여신도 아니고…….”
“카이로스 초대 황제 때, 프란시아께서 현신하셔서 카이로스를 비호한 결과 카이로스가 건국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때부터 카이로스의 황제께서는 승리를 이끄는 여인을 프란시아로 임명하여, 전쟁과 승리의 신으로 추양해 왔습니다.”
“매번 임명하는 것은 아니고, 아주 드문 경우. 예를 들어 국가의 사활이 걸린 전쟁을 한다거나, 한 나라를 수복하는 등 대규모 군사가 투입되는 경우 군사의 사기를 위해 임명하는 일종의 상징적인 존재이지요. 물론, 프란시아로 임명된 만큼, 프란시아가 동행한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겠지요.”
아론이 설명에 가세하면서 로엘을 직시했다. 역시나 말에 가시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론과 틀어질 만한 접점이 조금도 없는데, 왜 이리 날을 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어 로엘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자식. 쓸데없이 무섭게 말하네. 아니, 전쟁이 무슨 애들 장난인가. 상황에 따라 이기고 지는 거지 프란시아랑 뭔 상관이야. 아. 그렇다고 로엘 마마가 쓸모없다는 건 아니고요. 저야 로엘 님이 프란시아라면 완전 찬성이죠.”
“고마워요, 루카스.”
루카스의 과한 사교성이 빛을 발휘했다. 덮어 놓고 호의적인 루카스가 오늘따라 너무 고마웠다.
“그나저나 저는 여신과 거리가 먼데 왜…….”
“거리가 멀긴 하지. 특히 외향적으로.”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셨다.
아침부터 무능하면서 말만 많은 원로원을 상대하느라 머리가 아팠던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 바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깔끔하게 올려 훤히 드러난 하얀 뒷목에 바로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아니 그녀의 후폭풍이 예상되어 참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그녀의 드러난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그를 올려 보았다.
“솔직히 여신 급은 아니잖아?”
“그거 죄송하게 됐네요.”
토라진 대답에 그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아무튼 시도 때도 없이 귀엽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런 그녀와 눈을 맞추었고, 그녀는 다가온 그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또박또박 잘도 받아쳤다. 주변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두 사람만의 달달한 분위기에 다들 말문이 막혔다.
“야.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묻지 마. 나도 당황스러우니까.”
언제부터 폐하가 저리 다정한 분이셨나. 몇 백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분께서 로엘 마마를 보는 눈에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로엘은 대부분의 시간을 후궁에서 보내고, 설사 후궁 밖에 잠시 나올 때도 폐하와는 같이 있는 걸 보기 힘들었기에, 아론과 루카스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들에게도 이리 낯선데, 이반과 콜린은 오죽할까.
이반은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현실을 직시하세요.”
콜린은 그런 이반의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이반의 눈빛. 누가 볼까 겁난다.
조금만 촉이 좋은 사람이라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이반이 로엘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얼마나 애절하고, 간절한지.
“폐하.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결국 아론이 먼저 나섰다.
정색하는 그의 눈이 왠지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아 로엘은 저도 모르게 뜨끔했다. 에단은 어쩔 수 없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폐, 폐하?”
“네 자리는 거기가 아니야.”
가장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는 그의 손에 이끌려 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안착했다.
이 회의실에 있는 것만으로도 민망한데 가장 요직의 자리라니. 로엘은 당황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는…….”
“방금 전에 뭘 들은 거야. 네가 ‘프란시아’라고.”
에단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고갯짓으로 다른 이들을 가리키자, 그제야 로엘의 눈에도 그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 역시 별다른 불만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프란시아는 늘 황제 폐하 곁에 있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승리를 가져다주는 여신이니까요. 그 축복은 오로지 황제 폐하만이 누릴 수 있는 겁니다.”
아론은 귀찮아하면서도 꼬박꼬박 로엘에게 설명했다. 상징적인 의미라더니만,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이유였다.
애초에 카이로스 사람이 아닌 로엘로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여신이 내려와 승리를 준다니. 너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우리 모두 네가 여신이 아니라는 걸 알아. 하지만, 전장에 나서는 군사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인 백성은 다르지.”
이반은 로엘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 역시 에단과 가장 가까운 자리 중 하나였다.
이반은 로엘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에단의 이야기를 이었다.
“평생 살면서, 백성들이 아카시스님을 뵐 일이 몇 번이나 될까요. 대다수는 한 번도 보지 못하겠지요. 그만큼 황족을 직접 보는 일, 나아가 그 손 한 번 잡아 보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영광입니다.”
에단과 참 닮은, 그의 눈이 정확히 로엘을 향했다.
“심지어 그분이 폐하의 여인이라면 더더욱 그 존안을 뵐 수 없지요. 그런 고귀한 분께서 직접 얼굴을 내비치시어 승리를 준다고 하시고, 황제께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한다면 과연 어느 백성이 그 말을 비웃겠습니까.”
에단이 로엘을 외모로 놀리는 건, 그만큼 그녀가 예쁘다는 반증이었다. 눈치 없는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진짜 예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대 할 수 없는 농이다.
게다가 제대로 갖추고 꾸민 그녀에게 눈길을 안 주는 남자가 있긴 할까.
자신을 또렷이 바라보는, 이 아름다운 여인이 너무 멀게 느껴져 이반은 마음이 아팠다.
“아카시스께서는 전장에 자주 계셨지요.”
“……네.”
“하지만 한 번도 두려워 본 적이 없으셨을 겁니다. 어린 마마께서는 항상 최후방에 계셨던 것도 이유겠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인 믿음이 있었겠지요. 그분께서 반드시 전쟁을 승리를 이끄리라는 믿음. 그분이라면 마마를 끝까지 지켜 주리라는 확신,”
그분.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바로 그 사람.
로엘은 아버지의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반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반이 무얼 말하려는지도 바로 이해했다. 아니, 깨달았다.
그녀가 프란시아를 너무 우습게 보았나 보다.
“그들은 믿어서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어서 믿는 겁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전장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살아남는다는 그 확신을 갖기 위해. 프란시아는 카이로스의 제이드 님과 같은 존재인 겁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가, 내 자식이, 내 남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두려움.
아버지는 분명 그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우리는 살아남을 거라고. 그러니 날 믿고 따라오라고.
“형식적인 것도 맞고, 눈 가리고 하는 아웅도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지. 프란시아는 분명 군사들의 사기를 올려 주고, 백성들의 지지를 담보해. 프란시아가 임명되는 순간 그들은 빌 존재가 눈앞에 생긴 거니까. 대신, 만일 그것이 효과가 없다고 증명되면, 사기는 순식간에 떨어지겠지.”
에단의 말이 유독 무겁게 들렸다. 단순히 사기가 떨어지는 문제일까. 아마 비난의 화살도 고스란히 받아야 할 거다. 이반은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확실히 프란시아는 신중하셔야 힐 필요가 있습니다. 로엘 마마는 북방에서 온 토르티아의 공주이고, 이 전쟁은 북방 전체와의 전쟁이죠. 북방과의 전쟁에서 북방 출신 공주를 프란시아로 임명하는 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 상황에서 만일 패배하기라도 했다간, 모든 책임이 로엘 마마께 향할 수도 있습니다.”
에단과 웬만해선 의견 충돌이 없는 이반이 의외로 제법 강하게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누가 봐도 로엘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조언에 콜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자신은 혹여 에단이 눈치챌까 마음이 조마조마한데 정작 이반은 대놓고 로엘 편을 들었다.
“그러겠지. 그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을 테니.”
그나마 다행은 자신의 형제를 철석같이 믿는 황제께서는 전혀 그런 쪽으로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거다. 에단은 그저 담담히 이반의 말에 수긍했다.
“그런데 난 질 생각이 없어.”
그리고 답했다. 이반의 타당한 문제 제기에 대하여,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답을.
로엘의 시선이 다시 에단에게로 향했다.
그의 황금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빛났다.
‘토르티아의 멸망이라. 나에겐 너무도 쉬운 일이지. 너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고.’
그 어떤 이가 전쟁의 승패를 저리 자신 있게 확신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가장 예측하기 힘들고 가장 변수가 많은, 그래서 가장 잔인한 도박을 어떻게 저리 자신할 수 있을까.
새삼 그가 누구인지, 로엘은 그 한마디로 너무도 확실히 느꼈다.
다른 이도 아닌 ‘그’이기에, 저 말은 허세가 아닌, 사실이 된다.
“단 한 전투도 지지 않는다. 단 한 번도 용납하지 않아. 그 한 번이 실패의 초석이 될 수 있기에, 그 한 번이 카이로스의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가기에 언제 어디서든 카이로스는 이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수년을 고뇌했고, 수년을 준비했으며, 수년을 참아 왔다.
그는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듣는 모든 이의 마음이 숙연해졌다.
어쩌면 그들은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반의 마음이 어떻든, 아카시스의 지위가 어떻든 그런 건 에단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카이로스의 수많은 병사들이 이 북방 정벌에 동원된다는 것이고, 그들의 생명이 그의 지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세상 귀찮아하는 그답지 않는 진지한 그의 눈에 북방에 대한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로엘은 그런 그를 응시했다.
그는 어쩌면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될 거라는 신탁을 받고, 그에 따른 주변의 기대를 온몸으로 감당한 사람.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건 그가 자기 자신에게 평생 동안 한 말일 테지.
북방 정벌의 꿈이 이제는 그의 것인지 카이로스의 것인지 로엘은 잘 모르겠다.
그저 그의 어깨에 놓인 짐이 너무 무거워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은, 그런 마음뿐이다.
로엘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등에 손을 올려 잡았다.
“미력하나, 저 또한 돕겠습니다.”
그러자 그 역시 미소와 함께, 손을 돌려 이제는 익숙한 그 작은 손을 마주 잡았다.
“당연하지. 나는 너를 그저 인형으로 세워 둘 마음이 없어.”
그리고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에 작은 입맞춤을 남겼다.
“진짜 프란시아 역할을 해.”
진짜 프란시아의 역할.
로엘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미소 지었다.
그의 말이 맞다. 그녀는 그의 곁에 인형으로 예쁘게 웃고만 있을 마음이 추호도 없다.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 그리고 그녀가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된 바로 그 이유.
“몸과 마음을 다해 함께하겠나이다.”
토르티아의 멸망이 곧 카이로스의 북방의 제패를 가져오기에 그와 그녀의 이해는 일치한다.
하지만, 과연 그뿐만일까.
맞잡은 두 손에 힘이 실렸다.
“제가 아는 모든 것을 다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비장하기도 한 그녀의 눈빛에 그는 웃고 말았다.
누가 누구한테 지켜 준다고 하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 마음이 사랑스러울 따름이다.
“에이, 마마. 그건 제가 할 말이죠.”
두 사람만의 세계를 깨트리는 건 루카스였다. 너무 그만 바라보고 있던 로엘은 그 쾌활한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무슨 짓을 했나 싶어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며 그녀는 서둘러 그의 손을 놓았다.
그 허겁지겁하는 모습이 귀여워 그는 순순히 도망가는 그녀를 냅두었다.
“머리까지는 모르겠고, 적어도 몸으로는 폐하를 완벽히 지켜 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다 때려 부술 자신 있으니.”
“넌 그 때려 부수는 게 문제야.”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루카스와 그에 상반되게 지나치게 차분한 아론은 바로 핀잔을 주었다.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충분히 봐 줄 만큼 봐 줬으니 이제 본론에 들어가야 했다.
아무 말 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이반 역시 입을 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폐하. 이렇게 다 소집하신 이유가 있으신 거 같은데.”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까부터 테이블 위에 말려 있던 거대한 지도를 펼쳤다.
그러자 이반과 근 일주일을 작업한 정벌 계획도가 상세히 펼쳐졌다.
“내가 북방 정벌을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알듯, 나 역시 여기 있는 모두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나와 함께 이를 준비했다는 걸 안다. 이는 카이로스의 숙원이자, 나의 염원. 우리의 오래된 목표다.”
그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그리고 그 결심에 찬 목소리는 다른 이들의 눈도 반짝이게 만들었다.
달라진 그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져 로엘 역시 저절로 긴장했다.
숙원이라는 말. 염원이라는 그 단어.
결코 빈말이 아니다.
“대장군 루카스. 프래카를 비롯한 황군 전원. 폐하의 명이라면 언제든 출정할 수 있습니다.”
“황실 기획실 전원. 북방 정벌을 위한 예산 및 그에 다른 국정 운영 계획, 완비하였습니다.”
“국경 8군 전원. 모두 북방 정벌을 위해 출정 대기 중입니다.”
루카스와 아론에 이어 콜린 역시 그 앞에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이반 역시 기꺼이 에단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자 이반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친위군 타스(TARS) 전원. 폐하의 명을 기다립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되었다는 그들의 충성에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 기간 서두르지 않고 철저히 준비한 보람이 있다. 그는 카이로스 황제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그의 나이프를 정확히 지도 한가운데에 꽂았다.
“시작은 리모아의 수도 리모. 다다음 주 월요일 새벽, 오로지 루카스와 프래카만이 움직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그의 파격적인 계획에 순간 모두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쏠렸다.
국경 3국을 첫 타깃을 삼을 것이라는 건 로엘과 이반의 조언 이후 당연시되었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황제께선 그보다 한 걸음 더 나가시려나 보다.
“그 주 목요일, 사우어로 진격. 국경 8군 1, 2, 3사단과 합류 및 수복.”
“네?”
“마지막 일요일. 나머지 5군과 함께 비터를 수복한다.”
루카스, 아론은 물론 오랜 시간 북방 국경에 있던 콜린 역시 뒤통수를 맞은 듯 그의 계획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와 함께 3국 정벌 계획을 세우던 이반 역시 꽤나 놀란 눈치였으니, 그의 계획은 지나치게 파격적이었다. 속전속결의 중요성을 조언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웬만한 자신감과 결단력 없이는 절대 생각해 낼 수 없는 작전이다.
“이 모든 일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반은 자신의 형제의 자신감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여전해도 정말 너무 여전하다. 누가 저 타고난 자신감에 토 한마디 달 수 있을까.
이반 역시 그런 에단을 거들었다.
“이 작전은 애초에 리모의 수복을 사우어가 몰라야 하고, 사우어의 수복을 비터가 몰라야 가능해.”
“서, 설마. 폐하. 원로원의 승인을 안 받고 움직이실 생각이신가요?”
씩 웃는 황제를 보며 아론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뒤늦게 이게 알려지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거다.
그런데 황제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결심을 굳히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무리 설득해 보아야 소용없다. 그의 주군께선 일단 정하면 반드시 밀고 나가시는 그런 분이시니.
“국경 3국이 북방 정벌의 초석이라면 그 어떤 때보다도 빨리, 최소한의 피해로 완벽하게 수복해야 한다. 그 중요한 시작점을 나는 무능한 주제에 말만 많은 그들로 인해 망치고 싶지 않아.”
자기들 이해관계 따지기 바쁜 그 늙은이들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위해, 이런저런 트집으로 그를 붙잡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북방 정벌을 오랫동안 원했던 만큼, 그가 그들의 승인을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하리라는 같잖은 기대를 하고 있겠지.
그는 그 기대를 보란 듯이 밟아 줄 예정인 거다.
“국가의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주제에 국가의 안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자신들의 배불리기만 바쁜 그들의 승인 따위 기다릴 마음, 나는 추호도 없어. 이 전쟁은 내가 준비했고, 내가 계획한, 내 나라, 카이로스를 위한 대의다. 이 대의에, 그 누구라도 걸림돌이 된다면 나는 가차 없이 벤다.”
설사 그것이 이 카이로스 내부 사람일지라도.
설사 그것이 그 잘난 카이로스 개국공신들의 후손일지라도.
“그러니 나의 형제여. 나를 따르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늘 같으신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목숨을 다해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한 목소리로 울리는 충성 맹세는 오로지 한마음만이 담겨 있었다.
바로 그들의 주군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이 몸과 마음을 바쳐, 오직 제이드 님만을 따르겠습니다.’
자신의 주군에게 기꺼이 목숨을 거는, 저 충성으로 가득 찬 눈.
로엘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눈빛이다.
로엘은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그들의 유대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이들 사이에 들어와, 직접 보고 들으니 알겠다.
이렇게 유능한, 그리고 이렇게 충성스런 내 사람이 있는데 그 누가 감히 그를 넘볼까.
그의 진짜 힘은 여기 이곳, 이들에게 있다.
이들과 함께라면, 황제 에단은 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