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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나의 분신, 나의 형제 (13/69)

Chapter 12. 나의 분신, 나의 형제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닌데. 그냥 그런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아니긴.

콜린은 이상하리만큼 기분 좋은 이반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 루카스 장군과 몸이나 풀고 오겠단 분이 꽤 오래 나가 계시더니만, 돌아오실 땐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전하께서 괜히 웃으시니까 불안하잖아요.”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그러네.”

“나가셨다가 로엘 마마라도 보신 겁니까?”

순간 이반이 걸음이 딱 멈췄다. 그러고는 서류를 한아름 들고 있는 콜린을 돌아보았다.

바로 정색하는 이반의 얼굴에 콜린은 한숨을 삼켰다.

이렇게 티를 내시니 어찌 모를까.

“무슨 소리야, 그게.”

“말 그대로입니다. 아카시스 로엘 마마를 보셔서 기분이 좋으셨냐고 여쭈었습니다.”

“콜린.”

이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넘기려던 콜린은 어쩔 수 없이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심각해진 그의 표정에 설마 하던 마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지금 이분은 화를 내는 게 아니다. 그저 ‘걱정’을 하는 거지.

자신이 아닌 바로 그분의 안위가.

“제가 전하를 뫼신 지 근 열 해가 넘어갑니다. 그런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렇게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을 하시는데요. 그것도 첫날부터. 연달아.”

그 이름만 들어도 얼굴색이 바뀌었다. 혹여 위험할까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가고.

그 얼굴을 보고 난 이후로부터는 멍하니 홀로 생각에 빠져 있기 일쑤였다.

“아니. 제가 아니어도 누구든 조금만 전하를 관찰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그 정도로 티를 내고 계세요. 지금의 전하는요.”

콜린은 잠시 들고 있던 서류를 콘솔에 내려 두었다. 하필이면 황제께 보고드리러 가는 길이었다. 카이로스 황궁이 넓었기에 망정이지, 혹시라도 다른 궁인이 들었으면 경을 칠 그런 이야기였다.

“……콜린.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으나 우리는,”

“‘우리’라니요. 다른 분도 아닌 아카시스십니다. 황자님께서 그리 끔찍이 생각하시는, 바로 그분의 여인이시라고요.”

‘그분의 여인’이라는 콜린의 한마디에 이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와 그가 ‘우리’가 될 수 없는 데에 더 이상 어떠한 이유도 필요 없으니.

‘에단의 여자’라는 그 이유만으로도 그는 감히 그녀를 바라볼 수도 없는 거다.

“정신 차리세요, 전하.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콜린은 단호했다. 그와 그녀의 속사정을 듣지 않아도, 너무도 단호했다.

그저 북방에서 우연히 만났었다고, 그것뿐이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콜린의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두 분이 어떤 관계셨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 인연은 이만 접으라고.

“오. 두 분 벌써 오셨네요.”

“이반 전하를 뵙습니다.”

본의 아닌 대치 상황 중에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론과 루카스였다.

아론 역시 한아름 서류를 들고 있었고, 루카스는 언제나처럼 검 하나 찬 채로 터덜터덜 몸만 왔다.

“오랜만에 이반 전하랑 한 판 하니까 진짜 재밌더라. 맨날 어중이떠중이나, 우리 애들만 상대하다 이반 전하랑 딱 첫 합 부딪히는데 키햐. 막 쾌감이 느껴졌다니까? 역시 우리 이반 전하. 아직 안 죽었어.”

루카스의 잡담에 전혀 관심 없는 아론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다시 이반, 콜린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물론 루카스 역시 아랑곳 안 하고 이야기를 이어 갔지만.

“근데, 로엘 마마도 진짜 실력자시더라. 무려 이반 전하랑 하는데 꽤 버티셨다니까?”

약속이라 한 듯 ‘로엘’이라는 두 음절에 세 사람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누구?”

“로엘 마마.”

아론은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튼 안 끼는 데가 없는 분이다. 아카시스가 이 대낮에 황궁에서 이반 전하와 검을 맞대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기분이 좋으셨군.”

콜린은 혼자 중얼거리며, 다른 의미로 눈살을 찌푸렸다.

모른 척하지는 못할망정 아예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있었다.

“잘하실 줄은 알았지만 진짜 잘하시더라. 내가 보기엔 우리 애들 중에도 웬만한 실력인 애들은 다 이기시겠던데?”

“그 정도야?”

“응. 그죠, 이반 전하?”

루카스는 이반에게 화제를 돌렸다. 대놓고 눈치 주는 콜린을 신경 쓰고 있던 이반은 갑작스런 루카스의 부름에 제법 놀랐다. 덕분에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충분히 그럴 만한 실력이긴 했지.”

“그니까요. 이반 전하를 상대로 딱딱 검이 맞아 들어가는데, 누가 보면, 같이 여러 번 해 본 사이인 줄 알겠어요.”

쾌활한 루카스의 목소리가 무색해지게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자연히 아론의 시선은 이반을 향했고, 콜린은 식은땀이 다 흘렀다.

충분히 그냥 하는 소리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웃고 넘기면 되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괜히 루카스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놀랐지 뭐야. 너무 내 패턴을 읽으셔서.”

그 어색한 정적을 깨는 건 이반이었다. 아까와는 다른, 너무도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그는 루카스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답했다.

이반은 안다. 지금 루카스의 시답잖은 이 말이 절대 시답잖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매번 아론에게 핀잔 듣고, 제롬에게 진중하라 잔소리 듣는 이 남자가 실은 그 누구보다도 촉이 좋고 눈치가 빠르다는 것을.

“진짜 실력자인 거지. 그 명성에 맞는.”

“역시 괜히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 아니었어.”

그러니 저 자리에 있는 거다.

최강이라 불리는 카이로스의 황군을 통솔하고, 전장마다 선봉장을 맡으며, 에단의 최근방에서 그를 지키는 그 중요한 자리에 에단이 아무 생각 없이 앉힌 게 아니다.

애초에 지금 루카스가 앉아 있는 그 자리는 결코, 검 하나 잘 써서 앉을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다음에 또 저랑 놀아 주세요, 이반 전하.”

콜린의 말이 맞았다. 그가 너무 흘리고 다녔다 보다.

이리 루카스도 단번에 눈치챌 정도면.

“그럼 들어가실까요?”

의외로 이런 쪽에 눈치 없는 아론은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루카스가 누구랑 대련을 하든 전혀 관심 없는 아론은 그보다 콜린이 안고 있는 서류가 더 궁금했다.

은근 라이벌이자 앙숙인 아론이 처음으로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전하, 끝나고 저랑 얘기 좀 하시죠.”

콜린은 아론과 루카스를 따라 들어가려는 이반을 잡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이반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콜린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이거 1, 2시간으로 끝날 사안이 아닌 듯하다.

***

“오늘도 너무 즐거웠어요. 다음엔 제가 안나가 구운 스페셜 파운드 케이크를 가져올게요.”

“네. 저도 마마가 좋아하시는 티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몇 시간을 실컷 떠들고 나서야, 로엘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시간이 많이 된 걸 깨닫고 일어선 거였다.

“로엘 님. 그럼 다음에 뵐게요. 안녕히 가세……. 어머니?”

수아는 후원에서 다시 안으로 들어와, 로엘을 배웅하려는데 홀에 뜻밖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녀들이 나오는 소리를 듣고 서서 기다리고 있던 그분은 다름 아닌 수아의 어머니였다.

“아카시스 로엘 님을 뵙습니다.”

어머니라는 단어에 로엘 역시 당황하며, 그녀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는 귀부인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로엘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습니다, 켈트 공작부인.”

단정히 올린 머리 사이로 흰머리가 희끗한 중년 부인은 기품이 넘쳐흘렀다. 과하지 않은 화려함을 지닌 푸른 계열 드레스에, 지위를 가늠케 하는 사파이어 목걸이로 포인트를 주고, 그 목걸이와 같은 모양의 반지로 마무리하였다. 아주 훌륭한 매칭 센스였다.

“아카시스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수아가 누굴 닮아 그리 우아한가 싶었더니 어머니를 닮았나 보다. 가히 본이 될 만한 귀부인 상이었다.

“아카시스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부족한 여식을 잘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 신세는 제가 지고 있지요. 제가 늘 와서 얻어먹고 가는걸요.”

로엘은 자신에게 너무 깍듯한 켈트 공작부인에게 어찌할 줄 몰랐다. 서열이 그러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여전히 그녀는 자신보다 한참 연장자에게 받는 이런 존대가 불편하기만 했다.

켈트 공작부인은 그런 로엘을 찬찬히 살폈다.

실은 아까 전부터 도착해 있었지만, 일부러 밖에서 기다렸다.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수아뿐 아니라 켈트 공작부인의 마음도 울렸으니까.

궁에 들어와 하루하루 시들어 가던 딸이 최근 들어 점차 생기가 도는 것 같더니, 그 이유가 이거였다.

처음 베티와 쥰을 통해 로엘 님과 자주 왕래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심 걱정했다. 혹시 무슨 목적이라도 가지고 접근하나 싶어서 경계부터 했었다.

그런데, 잠시라도 그런 의심을 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눈앞의 아카시스는 순수했다. 순수한 만큼 따뜻했고, 그 따뜻함에는 진심도 담겨 있었다.

“저야말로 켈트 공작부인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는 살며시 딸 같은 로엘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공작부인의 행동에 로엘은 물론 수아도 당황해 부인을 말렸다.

“어, 어머니. 실례예요.”

“괜찮아요. 수아 님.”

로엘은 말리는 수아를 도리어 저지했다.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공작부인의 손에 제법 힘이 들어갔다. 따뜻한, 그 주름진 손이 무얼 의미하는지 로엘은 알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로엘 님.”

더 많은 설명은 필요 없었다. 켈트 공작부인의 눈이 그저 로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할 뿐이었다.

한 사람의 부모로서, 외톨이로 나이가 들어가는 마음 아픈 자신의 딸에게 다가와 준 로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있는 거였다.

그 절절한 부모의 마음이 와닿아 로엘 역시 그런 공작부인의 손을 맞잡으며 눈을 맞추었다.

“저야말로 수아 님께 많이 감사드린답니다. 수아 님이 안 계셨으면 저도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좋은 친구가 생겨서 저도 기뻐요.”

활짝 웃는 로엘의 미소는 예쁘단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황궁뿐 아니라 사교계도 흔들어 놓은 이 어린 공주님이 어떻게 폐하의 눈에 들었는지 공작부인은 알 것만 같았다.

같은 여자가 보아도 이리 예쁜데, 남자의 눈에는 얼마나 예뻐 보일까.

누구보다도 외로운 자리에 있는 그분의 마음도 이리 녹였을 거다.

마치 수아에게 다가온 것처럼 그렇게. 한낮의 햇볕처럼 따뜻이 진심을 전했겠지.

그러니, 지금 이분께 쏟아지는 총애는 절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길 간절히 바라는 어느 가문의 말과는 달리.

“로엘 님.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아니, 은혜랄 것도 없는데…….”

“무슨 일이 있으시거든, 저희 켈트가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 주세요. 저희가 로엘 님을 위해 나서겠습니다.”

켈트 공작부인은 좀 더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황제의 눈 밖에 난 순간부터, 수아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몰브가의 영애, 아리스가 황후에 오르고 수도원으로 쫓겨나 홀로 여생을 마감하는 것.

그런데, 그 뻔한 결과가 어쩌면 바뀔 수도 있다. 갑자기 등장하신, 이 어린 공주님 덕분에.

“그건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 켈트 공작부인 손 위로 또 하나의 손이 올라왔다. 가만히 어머니를 지켜보던 수아였다.

켈트 공작부인은 자신의 딸의 안위 때문에 건넨 말이었지만, 수아는 달랐다.

수아는 진심으로, 로엘이 고맙고 또 걱정되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로엘 님. 분명 저희가 도울 일이 앞으로 생길 거예요. 그때, 켈트가를 잊지 말아 주세요. 저희가 함께하는 한, 마마는 절대 카이로스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로엘은 사라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편을 만들라는 바로 그 말.

사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로엘을 칭찬했을지도 모른다.

거물을, 아주 잘 물었다고.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과한 보답을 약속받아 버렸군요.”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게 무엇이 중요할까.

중요한 건 카이로스 2대 가문 중 하나인 켈트가가 로엘의 편에 섰다는 사실이다.

로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진짜 내 편은 ‘진심’이 만들어 주는 거다. 같잖은 계략이나 속 보이는 계산이 아니라. 그러니 누구든 진심으로 대하렴. 로엘.’

“그래도, 켈트가가 저와 함께해 주신다는 그 말, 기억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가 옳다.

진심이 더 큰 진심을 가져왔다.

***

“그만 가.”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밤 귀뚜라미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다른 이들은 모두 퇴정시키고, 오랜만에 에단과 이반만이 남아 있었다. 넓은 테이블에 지도를 펴 두고 밤늦게까지 전략 회의를 하고 있으니, 어렸을 적 추억이 떠올랐다.

둘 다 10대였던 시절, 자신을 증명하여야만 했던 카이로스 황실의 두 동갑내기는 살기 위해 열심히 지도를 들여다보며 연구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락했던 성만 몇 개이며, 수복한 땅이 몇백만 평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던,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었던, 그렇게 분신 같은 형제였다.

그가 즉위하기 전까지.

“그립네.”

“그러게.”

하루아침에 익숙하던 반말이 어색해지고, 매번 함께하던 식사 한 번을 함께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여전했는데, 그들의 주변이 그들을 멀어지게 했다.

아니, 서로를 위해 멀어져야만 했다.

이반은 자신으로 인해 에단의 권위가 흔들리까 두려워서.

에단은 이반을 반역자로 몰아가는 세력으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해.

“일찍 좀 올라오면 좋잖아. 훨씬 빨리 진행되었을 것 아냐.”

“거참. 우리 폐하 뒤끝이 너무 길다.”

“네가 쓸데없는 인간들의 쓸데없는 눈치를 보니까 그렇지. 짜증나게.”

에단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성한 황자는 존재만으로도 황권을 위협한다는 고리타분한 말이 참 오랫동안 이반을 괴롭혀 왔다.

처음 그가 즉위할 때까지만 어린 황제 취급을 받느라, 노인네들 등쌀에 못 이겨 이반을 북방으로 보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카이로스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에게 감히 대항할 이는 그 누구도 없다.

“든든하네. 형제님.”

이반은 미소 지었다.

절절한 우애라는 콜린의 입버릇이 생각났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든든한 형제님을 위해 나도 보답해야지?”

카이로스 황실 역사상 이토록 서로가 서로를 지키려 드는 남자 형제들이 있긴 하였을까.

손이 귀한 카이로스 황실에 한 해 두 명의 황자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기뻐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분명 둘 중 하나는 다른 한 형제의 손에 죽겠구나 싶어서.

그러나 그 뻔한 예상을 보란 듯 깨 버리고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늘 함께였다.

함께 자랐고, 함께 배웠으며, 함께 꿈을 키웠다.

그저 한 사람은 황제가 되었을 뿐.

여전히 두 사람이 가는 길은 같다.

“자. 이게 내가 생각한 루트야.”

1시간 넘게 자를 들고 지도 위에 무언가를 그리는가 싶더니만, 다름 아닌 행군 루트였다.

전략 순서까지 적어 둔 이반의 세심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에단은 회의 테이블 상석에 앉았고, 이반은 제대로 지휘봉을 들고 그 앞에 섰다.

“나의 하늘 같으신 폐하.”

이반은 그 앞에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둘 사이에서는 언제나 낯설고, 낯 간지러운 ‘예’였지만, 그 예를 굳이 지켰다는 건 이 사안이 두 사람에게 그만큼 진지하고 중요하다는 반증이었다.

“폐하께 북방 정벌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알기에 명을 받았고, 최선을 다해 수행하였으며, 앞으로도 폐하께서 명하시면 폐하를 위해 죽겠습니다.”

“아니, 죽는 건 빼.”

단호하기도 한 에단의 말에 이반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죽는 건 관두고, 계속 살아서 폐하의 창이자 방패가 되겠습니다.”

“그래.”

이번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에단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반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북방 점령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짚고 넘어갈 일이 있어.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 토르티아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는 거야. 내가 이번 국경 파견을 통해 느낀 건 북방의 소국들이 의외의 변수가 있다는 사실이지. 근 3년 동안 우리 국경 근처에서 싸운 국가만 여덟 개야. 애초에 토르티아가 북방의 전부가 아니란 거지.”

‘폐하. 북방은 결코 토르티아가 전부가 아니에요.’

에단은 흥미롭단 눈으로 이반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기본적으로 우린 너무 정보가 없이 북방 정벌을 해 왔던 거야. 북방의 생명이라 불리는 타르타니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정복하려 들다니, 아주 오만했던 거지. 타르타니를 먼저 넘어서고 그다음을 기약해야만 해. 다시 말해, 토르티아로의 진격만이 정답인 건 아니란 거지.”

‘감히 말씀드리건대, 토르티아로의 접근으로는 절대 북방의 어느 땅에도 카이로스의 깃발을 꽂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그녀가 이반의 옆에서 말을 해 주듯, 이반은 정확히 로엘이 말했던 것을 반복했다.

신기할 정도로 똑같이.

“내 생각으로는 우선 국경지대의 소국부터 정리하는 편이 나을 거 같아. 내가 꼽은 세 곳은…….”

“사우어, 리모아, 그리고 비터.”

정확히 맞춘 에단을 이번엔 이반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지막까지 로엘과 똑같이 말하는 이반에게 에단은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이 짜고 그를 속이려 들지 않는 한 적어도 이 정보가 그들이 생각한 최선이란 건 확실했다. 그러니, 이리도 똑같이 조언을 하는 거겠지.

“뭐야. 어떻게 안 거야? 이제 마음이라도 읽으시는 건가, 우리 폐하는.”

“너보다 빠른, 숨겨 둔 정보원이 있단 거지.”

“누군지 몰라도 질투 나려 하는데. 이거 꽤 고급 정보라고. 웬만큼 북에서 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반은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에단의 집무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미 꽃병이 눈에 들어왔다.

이반은 바로 그 정보원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그리고 수긍이 갔다.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북방의 정세를 읽는 안목. 경험에서 나오는 전쟁과 전략에 대한 이해도. 나의 패와 상대의 패를 가늠할 줄 아는 통찰력. 그 모든 것을 갖추었을 때 생각해 낼 수 있지.”

어느새 장미를 바라보는 에단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그는 그녀와 꼭 닮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뽑아 그 향을 맡았다.

이 진한 장미향을 내며 자신에게 안기던, 그의 품 안에서 더 붉게 변하던 그녀가 생각나 에단이야말로 얼굴을 붉힐 것 같았다.

“……많이 아끼나 보네.”

그런 에단을 이반이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형제의 모습이었다.

“야생마 같아. 절대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언제부터 나의 형제가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가.

이반은 망설임 없이 답하는 에단이 조금 야속해지려 했다.

“그래서 길들이고 싶어. 온전히 나의 것으로.”

언제나 그랬듯 그는 거침이 없다.

언제나 그랬듯, 망설이던 자신과 다르게.

“스스로 내 품에 들어온 이상 절대 놓지 않아.”

에단의 황금 눈동자가 반짝였다.

‘내가 그렇게 정했어. 더 무슨 말이 필요하지?’

평생 살면서 에단이 원하는 걸 얻지 못했던 적이 있긴 할까.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그 눈에 이반은 다음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미 늦어 버렸단 생각이,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

“아카시스님께 인사드립니다.”

아리스의 마차가 몰브 저택에 도착하자, 대기 중이었던 몰브가의 시종들이 줄을 지어 그녀에게 허리를 굽혔다. 아리스의 근 1년 만의 친정 나들이였다.

“마마께서 몸이 별로 좋지 않으시네.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입욕부터…….”

“아냐. 오라버니께 먼저 갈 거야.”

아리스가 애나의 말을 끊었다. 사냥 대회 날의 그 난리통 이후, 아리스는 좀처럼 자신의 처소에서 나가지 않았다. 많은 비들 앞에서 로엘한테 울고불고했던 치욕이 좀처럼 잊히지가 않았다.

심지어 그 일이 있은 후 비들의 발걸음마저 뚝 끊겼으니, 자존심이 정말 꽤나 상했다. 이번 친정 나들이 역시 도망치듯 온 거나 다름없는데, 넋 놓고 목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오라버니는 어디 계셔?”

“아. 그게…….”

시녀는 말끝을 흐렸다. 어쩐지 시녀의 시선이 별채 쪽에 닿아 있었다.

아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누구는 속이 타들어 가는데, 누구는 이 대낮부터 술판인가 보다.

시녀의 반응을 보아하니, 또 여자들을 잔뜩 불러 모아 지저분하게 노나 보다.

“제가 케인 님께 마마께서 오셨다고 알리겠습니다. 일단 본채로 가셔서…….”

“됐어. 오라버니가 여자 끼고 노는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아리스의 반응에도 여전히 시녀들은 쉽사리 길을 트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보고 말을 하지 않아, 그러지 않아도 짜증나 있는 아리스의 성질을 건드렸다.

“뭐야. 똑바로 말하지 않을 거면 꺼져.”

“그게…….”

바로 거친 말이 나왔다. 아리스가 한 성질 한다는 사실은 몰브가 사람 모두가 아는 일이라 시녀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아리스를 막지는 못할 거 같단 케인 님이 계시는 별채에 선뜻 안내해 드릴 수도 없었다.

결국 아리스는 시녀들을 밀치고 별채로 걸음을 향했다.

“뭐야, 이 이상한 냄새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더 가까이 가자 처음 맡아 보는 이상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자연히 아리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 아리스 아가씨.”

“어디서 아가씨야? 내가 누군지 몰라?”

“아, 아카시스님을 뵙습니다.”

별채 문앞을 지키던 사병은 갑자기 나타난 아리스에게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시녀들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아리스의 눈을 피하는 것도, 평소와 다르게 과하게 많은 경비 인원이 별채를 지키는 것도 다 수상하였다.

“마마. 잠시만……!”

아리스는 더 이상 참지 않고 그들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연기가 별채를 가득 메워 앞을 분간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렇게 연기가 밖으로 좀 빠지자 서서히 눈앞의 광경이 들어왔다. 기분 나쁜 냄새 때문에 입가를 손으로 막으며 별채 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아리스는 순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 오라버니……?”

열댓 명은 되는 남녀가 뒤엉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여기저기 술병은 나뒹굴고 있었으며, 반나체인 채로 웃고 떠드는 모습이 가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리스는 그제야 이 기분 나쁜 연기와 냄새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거 같았다.

‘마약’이다.

“뭐야, 이 예쁜 여자는?”

“꺅!”

갑자기 뒤에서 덮쳐 온 남자는 아리스를 그대로 바닥에 쓰러트렸다. 다짜고짜 그녀의 드레스의 아래로 가는 남자의 손길에 아리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거야!!”

다짜고짜 손에 잡히는 술병으로 남자의 머리를 있는 힘껏 가격하자 쨍그랑 소리를 크게 내며 남자가 정신을 잃었다. 그제야, 케인은 반쯤 풀린 눈으로 아리스를 보았다.

“아리스?”

“오, 오라버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너무 놀라 사색이 된 아리스는 별채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 하이톤에 모두 머리가 아픈 듯 얼굴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뒤늦게 들어온 애나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아리스를 감싸며 놀란 그녀를 달랬다.

정작 이 마약 파티의 주동자인 케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미친 사람처럼 웃어 댔다.

“뭐 하는 짓이긴. 즐기는 중이지. 원한다면 너도 껴. 어차피 황제가 안아 주지도 않잖아?”

케인의 모욕적인 언사에 다들 깔깔대며 소리 내 웃었다.

아리스는 치욕에 몸을 떨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케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한시라도 로엘, 그 기집애를 끌어내릴 생각은 안 하시고!”

“하. 로엘. 그 건방진 년.”

로엘이라는 이름에 케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순식간에 실없던 웃음기가 사라지고 살기가 등등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크리스탈 양주잔을 그대로 벽에 던져 버리자, 큰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하아. 오라버니. 아무리 그 일 이후 좌천당했다고 해도, 이렇게 있으면 안 되죠. 이대로 당한 채로 그만두실 거예요? 갚아야 할 거 아니에요!”

분명 에단은 로엘의 암살 사건을 더 이상 파헤치지 않았다. 뻔히 그 배후가 누구인지 모두가 알았지만, 물증이 없기에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은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로 끝낼 그도 아니었다.

케인은 다음 날 바로 영지 시찰 업무를 맡게 되았다. 물론 직급은 동일하였지만, 중앙 요직에 있던 그가 영지를 돌며 시책하는 일로 돌리는 것은 공공연한 좌천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유 없는 부당한 인사라며 아버지께서 한마디 하실 법했지만, 케인이 친 사고가 있으니 에단의 결정에 그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로엘 때문.

“그대로 죽었어야 했어.”

“맞아요. 그때 죽었어야 했어요.”

아리스도 새삼 그날 당한 치욕이 다시 생생히 떠올라 아랫입술을 물었다.

케인은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아니 명확히 ‘하대’하던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생각나 손이 떨렸다.

오만 방자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다. 감히 카이로스 최고 가문, 몰브의 후계자를 그리 대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이런 치욕까지 안겨 주다니.

절대 곱게 죽일 수 없다.

어떻게든 그 고운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그의 발밑에서 빌게 만들 거다.

“궁 안에 도는 소문을 들어 보니, 폐하께서 곧 북방 정벌을 가실 것 같아요. 아무리 그 계집이 날고 기어 봤자, 폐하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그때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고요.”

“알고 있어. 지금은 어쨌거나 황제의 눈치를 봐야 하니 잠깐 나가 있겠지만 북방 계획이 시작되면 올라올 거다. 북방 정벌에 들어가는 몰브가의 돈이 얼마인데 아버지가 절대 날 이대로 내버려 두실 리 없지.”

“당연하죠. 아니. 차라리 안 내려가시는 거 어때요? 아무나 대신 업무 보게 하고 오라버니는 도성에 있어도, 폐하가 모르실 거예요. 지금 정신 없으시다고요.”

“아니. 나가긴 해야 해. 로폴리에서 직접 처리할 일이 있으니.”

“처리할 일이요? 로폴리라면……. 여기서 꽤 가야 하는 항구도시잖아요.”

고개를 갸웃하는 아리스에게 케인은 고갯짓으로 아까부터 연기를 내뿜는 향로를 가리켰다. 아리스는 케인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다가, 이내 이해했다는 듯 놀란 눈으로 케인을 보았다.

“오라버니 설마……. 마약 밀수라도 하시는 거예요?”

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상상치 못한 대답에 아리스는 사색이 되었다

마약을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카이로스에서, 마약 밀수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만일 이게 잘못 걸리면 공작 가문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멸족될 만한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이거 알려지기라도 했다가는 정말 큰일이라고요! 오라버니는 도대체…….”

“아버지도 알고 계신다.”

“네?”

“아버지가 직접 기획하신 일이라고.”

아리스는 정신이 멍했다. 천하의 몰브가가 천한 장사치들이나 할 법한, 그런 마약 밀수를 주도적으로 했다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그게 무슨…….”

“아버지가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그 막대한 수로 사업 예산. 어디서 나왔을 거라 생각해?”

“그야 몰브가 가진 영토도 있고, 광산도…….”

“어리석은 소리.”

에단 황제가 즉위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귀족들 재산의 전수 조사였다.

황권의 강화는 기본적으로 귀족 세력의 약화로부터 출발하는 바.

에단은 황권 강화를 위해 귀족의 재산부터 축소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귀족들이 관행적으로 취득해 왔던 영지 수수료를 없애고, 불법 취득한 온갖 토지, 광산 등을 몰수했다.

당연히 몰브가도 에단의 전수 조사 및 감사를 피해 갈 수 없었고 그 이후 한 해 몰브가 수입은 급감하였다. 에단의 눈을 피해 그 간극을 메우는 방법은 오로지 ‘불법’뿐이었다.

그것도 가장 수익률이 좋은 ‘마약’.

“이건 니블이라는 마약이지. 오직 북방 타르타니 깊숙한 곳에서만 자라는 아주 귀한 천연 마약이야. 비싼 만큼, 효과는 확실해.”

케인은 향로를 들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 정신이 멍해지며 기분이 붕 뜨는 동시에 몸에 열이 오르는 그 쾌감에 케인은 다시 눈빛이 흐려졌다.

그 즉각적인 반응을 눈앞에서 본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 효과 하나는 확실한 거 같았다. 그 이성적인 케인을 저리 망가트릴 정도면.

“우리가 이 니블을 독점하고 있어. 귀족 사교에서는 이미 유행할 대로 유행되었고, 이제 카이로스 도성에서도 슬슬 암굴이 생기기 시작했지. 덕분에 우리 수익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이미 다른 수입원들의 다섯 배가 넘었지, 아마.”

생각보다도 훨씬 큰 수익에 아리스는 제법 놀랐다. 괜히 아버지가 손을 대신 게 아니구나 조금 이해가 되긴 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여전히, 이 난장판인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아리스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꼭 몸조심하세요. 절대. 정말 절대 들키지 마시고요.”

“걱정 말아라. 우리와 거래하는 자도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엄청난 사람들이니까.”

다시 약에 취해 가는 케인은 더 이상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은 듯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물어봐도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 아리스는 그대로 별채를 나왔다.

금세 드레스에 향이 밴 거 같아 기분이 나빴다.

“당장 목욕물 준비해. 이 드레스는 버려 버리고.”

“네. 마마.”

괜히 싸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좀 안정시키고 위안을 얻어 가려 온 친정이었는데 어쩐지 걱정거리만 더 얹고 가게 생겼다.

***

“아. 폐하.”

홀로 후원에 나와 달을 감상하는 그녀의 어깨에 묵직한 도포가 덮어졌다. 언제 왔는지, 그가 자신의 도포를 벗어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얹어 주곤 그 어깨를 안았다.

그러지 않아도 살짝 서늘하다 느끼던 차라 로엘은 그 따스함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밤에 혼자 무슨 청승이야.”

“달빛이 좋길래.”

그녀는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기댔다.

이반에게 뺏겨 며칠 만에 만나는 거였다.

“오늘도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기다렸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아마도?”

분명 태연히 오늘도 일이 많겠거니 하며 잠들 그녀를 뻔히 알지만, 그러함에도 그녀의 빈말이 좋았다. 그는 자신의 품에 파고드는 작은 그녀를 좀 더 단단히 안았다.

그녀의 말대로, 오늘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대충 가닥이 잡혔나요?”

“어느 정도. 나의 비께서 큰 도움이 되었지.”

“빈말은.”

“황제의 어떤 말도 빈말은 없어. 다 진심인 거다.”

하긴. 빈말을 할 이유가 없겠지. 천하의 카이로스 황제께서 뭐가 아쉬워 빈말을 할까.

로엘은 너무 당연한 그의 말을 기쁘게 수긍했다.

정말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기쁜 일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에단 역시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이 얼굴이 보고 싶어 더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

그는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흐트러트리며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를 만끽했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는 것도 좋아하지만, 이리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둘만의 대화를 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안정이 되는 기분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풀었다.

“좋네.”

“그러게요.”

밤바람이 부드럽게 머릿결을 스쳐 가고, 작게 들려오는 여러 밤의 소리가 기분 좋게 후원을 울렸다.

은은한 달빛이 두 사람을 훤히 비춘 가운데에 둘만이 있다는 적막이 서로를 보다 더 느끼게 해 주었다.

며칠째 강행군인 그에게 그녀는 그 자체가 안식처였다.

늘 경계 태세인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있는 그대로 숨을 쉴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안식처.

“제일 필요한 인물이 들어오니 확실히 속도가 붙었어.”

“……이반 전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제일 한량이지만 제일 유능하지. 제일 믿을 수 있고.”

이반을 이야기하는 에단의 표정은 언제나 밝다.

지난번부터 느낀 거지만, 에단은 진심으로 이반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다.

로엘은 가만히 이반을 이야기하는 에단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옛날 이반에게도 너무 궁금했던 것을 묻기 위해.

“어째서, 그리 믿으시는 거예요?”

“어째서라니. 이반은 나의 형제야.”

“그건 대답이 되지 않아요. 황실이라면 더더욱.”

서로 죽이기 바쁜 황실의 형제 사이에 언제부터 우애가 있었다고 형제라는 이유를 들까.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진짜 답을 구하는 그녀의 눈에 에단은 의아해했다. 자신의 목적 이외에는 세상만사 다 관심 없어 하는 그녀답지 않은 물음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반에 대한 관심.

“뭐가 궁금하신가, 나의 비께서는.”

“보통은 안 그러잖아요. 그것도 황위 계승권이 있는 형제라면 더 그렇고.”

“내가 이반이랑 칼부림이라도 해야 된다는 건가.”

“그게 좀 더 자연스럽긴 하죠?”

조금도 거르지 않고 말하는 로엘에게 에단은 웃고 말았다.

가끔 속을 알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이럴 때는 지나치게 투명해서 탈이다.

“이반은 나보다 하루 먼저 태어났어. 이반은 오후에, 나는 오전에 태어났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하루도 아니지.”

때마침 안나가 두 사람을 위한 차와 과자를 내왔다. 따끈한 차를 에단의 잔에 채워 주며, 로엘은 에단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이반의 아버지, 즉 나의 큰아버지 펜 카이로스는 훌륭한 장군이셨지. 내 나이 열두 살에 전쟁에 나가 돌아가실 때까지 늘 외각에서 카이로스를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이야. 그분의 유일한 흠이 있다면 그 친모께서 귀족이 아니라는 것.”

선선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을 낳았으나, 귀족이 아니었던 이반의 할머니는 아카로이는 되었지만 황후 칼라리엔이 될 순 없었다.

칼라리엔이 되지 못하였으니, 당연히 황위는 이반의 아버지가 아닌 에단의 아버지가 물려받았고, 적통인 에단은 자연스럽게 그 황위를 계승받았다.

“이반에겐 처음부터 선택지가 없었어. 어머니도 아닌 할머니가 귀족이 아니었다는 그 같잖은 이유로 아무도 이반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 그렇게 유능한데 말이야.”

참으로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아버지가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그 어미가 선선대 왕에게 그렇게 큰 총애를 받았음에도, 이반은 카이로스 황실의 외톨이였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이들이지.”

에단은 이반을 괄시하던 원로들이 생각나 조소가 새어 나왔다. 이 나라에 하등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이 고작 귀족이란 이유 하나로 황족인 이반을 무시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황제가 될 가능성이 없으니 자신들의 안위에 상관없는 존재라는 거였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분 곁에 있어 준 거군요.”

“아니. 그 반대야. 이반이 항상 내 곁에 있었지.”

그 못된 말들과 괄시와 모함을 받아도, 이반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잠시 정색했던 그의 입가에 다시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 시절의 이반이 생각나는가 보다.

“이반은, 내가 동생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지켜 줘야 할 동생.”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황위가 보장된 황태자였고, 신탁마저 천하를 지배한다 하였으니 말 그대로 모두가 그를 떠받들었다.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부족함이 없었고 모든 이가 그의 밑에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다.

그런데 아무런 힘도 없어 귀족에게마저 무시당하던 이반이 그런 그를 지키다니 얼마나 웃긴 노릇인가.

“그런데도, 나는 분명 그에게 지킴을 받았어.”

나와 똑 닮은, 나의 동갑내기 형제는 마치 분신과도 같았다. 함께 성장하고 함께 배웠다. 함께 실수하고, 함께 고쳐 갔다.

자기 잇속 챙기기들 바쁜 수많은 어른들 사이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바르게 보고 걸으려 노력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를 제일 잘 알아. 내 형제는 단 한 순간도 황위를 욕심낸 적 없어.”

황위는커녕 그 어렸을 적 그가 먹는 과자 하나에도 손대지 않은 게 이반이다.

그런 그를, 원로원 노인네들은 평생에 걸쳐 조심하라는 말만 하니, 에단은 너무도 화가 났다.

‘넌 어째서 화내지 않는 거야? 내가 이렇게 분한데.’

‘네가 아닌 걸 알잖아. 그럼 된 거야. 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에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반이 왔다는 소리에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던 원로들이 생각났다.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게 나를 위해 내 곁에 있던 충신이 바로 내 형제야. 그래서 믿어. 그 누구보다도, 전적으로.”

로엘은 힘이 들어간 그의 손을 살며시 덮었다.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랬구나.”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제 형제를 믿겠다는데, 그걸 의심하는 게 이상한 거다.

“이반 전하는 당신의 ‘형제’였군요.”

그녀의 따뜻한 손을, 그도 마주 잡았다.

역시, 그녀는 그를 이해할 줄 알았다.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순수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위로했다.

당신의 마음을 잘 안다고.

당신이 다 옳다고.

“잘 보여야겠네요. 이거 웬만한 시누이보다 더 무서운 분인 거 같은데.”

“그럴지도.”

에단은 예쁜 말만 하는 로엘은 품에 꼭 안았다. 단단한 그의 품에 안기며 로엘은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두 사람이 너무 보기 좋다고.

그래서 주변이 무엇을 말하든, 두 사람이 지금같이 서로를 믿고 의지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계속 이렇게 달만 볼 건가? 내가 며칠 만에 왔는데.”

“자아죠, 이제. 폐하도 피곤하실 테고.”

“하나도 안 피곤해.”

“꺄!”

“할 건 해야지. 아카시스.”

씩 웃는 에단의 미소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 로엘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체력 하나는 지나치게 좋았다. 이제는 이렇게 번쩍 안는 게 놀랍지도 않아, 그녀는 순순히 자신을 안아 든 그의 목을 안았다.

적어도 이반과 그녀의 이야기를 하는 건 오늘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날이 언제가 되었든, 그녀는 쉽게 입이 떨어질 것 같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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