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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인연인가요, 악연인가요(2권) (12/69)

나의 황제께 붉은 월계수 꽃을 2권

연아 장편소설

목차

Chapter 11. 인연인가요, 악연인가요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어서 와.”

자정이 넘어갈 시각이 되어서야 그는 그녀에게 기별했다. 자신의 집무실로 오라고.

책을 읽고 있던 로엘은 급한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대강 숄을 걸친 후, 그에게로 왔다. 그런데 와 보니 그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아니, 하루아침에 일이 많아졌을 리는 없고……. 어? 이거, 토르티아 자료네요.”

그녀는 서류 하나를 슬쩍 보더니 금세 알아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자료가 아주 따끈따끈한 북방 자료라는 것을.

몇 시간을 앉아 있었던 에단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그녀에게 다가갔다.

“꽤나 정확한데요? 이거. 제법 토르티아의 근황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어요. 도대체 누가 이런 귀한 자료를…….”

“있어. 내가 숨겨 둔 정보원.”

로엘은 품에 안고 온 장미를 잠시 테이블에 내려다 놓고는 제대로 자리 잡고 앉아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바로 진지해진 그녀의 눈에 그는 웃고 말았다.

“이 정보원, 진짜 대단한데요. 제가 봐도 놀라울 정도니, 이건 거의 북방에 살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에요. 게다가 정보의 선택이 훌륭해요. 정확히 북방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해서 함락 포인트를 잘 잡았어요.”

“그렇겠지.”

그녀는 어느새 그녀를 안은 그의 팔이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와도, 그의 입술이 가볍게 그녀의 머리에 닿아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빠르게 서류를 훑었다. 북방의 사람으로서 감탄스러울 정도로 유용한 정보만이 가득했다.

“정보원만으로 쓰기엔 너무 아까운 분이네요. 차라리 지략가로 데려오심이…….”

“이미 그러고 있어. 그 정보원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형제니까.”

순간 로엘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의 입에서 나온 ‘형제’라는 단어에 바로 이 훌륭한 서류를 준비한 이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그리고 수긍이 갔다.

이반이라면, 충분히 이 정도의 문건을 만들 수 있다. 그는 그녀만큼이나 완벽히 북방을 이해하고 있는 자였으니까.

“네가 지금까지 봤던 북방 자료와는 다를 거라고 자신하지. 내 형제는 날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으니까.”

에단답지 않은 후한 칭찬이 이어졌다.

로엘은 그 몇 마디만으로도 그가 이반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마치 이반의 자료를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은 듯, 그의 눈에는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한가득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이반에 대한 애정.

‘내 형제는 나를 배신하지 않아. 그래서 나 역시 그렇지.’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할 것 같다.

“왜? 틀린 거라도 있어?”

“아. 아니에요.”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가 이상한지 그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의 품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앞에서, 더 이상 이반을 떠올리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그만 서류를 내려놓고, 제대로 그와 마주 보았다.

“이 밤에, 이 서류를 검토하라고 부르신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제법 유혹적인 말을 하는 그녀에게 그 역시 미소 지었다.

솔직히 그는 이반이 가져온 자료를 보는 순간 심장이 뛰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비밀리에 수집한 정보인데 당연하다. 평소의 그였다면, 분명 몇 날 밤을 새워서라도 이 모든 것을 검토했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이 그의 일 욕심을 이겨 버렸다.

“이번 선물도 아카시스 마음에 안 든 건가.”

“아니요. 장미, 아주 좋아해요. 그래서 폐하의 방에도 놓아두면 좋겠다 싶어서 한 다발 들고 왔어요.”

그녀는 다시 장미를 안아 들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보다 더 큰 꽃다발의 향기를 맡으며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붉은 장미에 파묻힌 붉은 공주라. 그의 눈엔 누가 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에도 너무 과하셨어요. 얼마나 많이 보내신 건지, 폐하가 직접 보셨어야 해요. 지금 온 궁이 장미 향으로 가득하다고요.”

“그런 것 같네. 이리도 향기가 밴 걸 보니.”

그는 아까부터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가 마음에 들던 차였다.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 하는 그의 행동에 그녀의 미소가 진해졌다. 이분, 은근히 어리광쟁이시다.

“몸은, 괜찮아?”

“괜찮아요.”

처음부터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을 그는 이제야 했다. 실은 하루 종일 걱정했다. 지난밤 그가 그녀를 너무 괴롭힌 게 아닌가 해서. 그는 그 고통을 경험할 수 없으니 함부로 상상할 수도 없었다.

“정말 괜찮아요. 그렇게 미안한 눈으로 보실 거 없어요.”

그런 그에게 그녀는 웃고 말았다. 그녀가 애원할 때는 그리 짐승처럼 달려들었으면서, 지금은 완전히 풀이 죽은 강아지 눈이었다. 그녀는 손을 올려 그의 목을 안아 가까이 했다.

“게다가, 제가 아프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 뜨거운 숨결을 뱉으며 한다는 소리가 ‘아프기만 한 건 아니다’라니. 이 여자는 이게 문제다.

“자, 잠깐만요! 폐하!”

이런 순수한 얼굴을 하고서 남자를 미치게 하는 거.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설마 이러고 나가실 건 아니죠?”

“아니면 여기서 해?”

“아니, 그 말이 아니라……!”

그녀의 발버둥에도 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제롬을 비롯한 시종들이 문밖에 줄을 지어 서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연히 부끄러움은 그녀의 몫.

“저도 걸을 수 있다고요. 저도……!”

“알아, 나도.”

그의 집무실과 그의 침실은 충분히 걸어서 움직일 수 있는 거리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만이 부끄러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실 지금 그의 전속 시녀들은 난리가 났다.

천하의 에단 폐하께서 자신의 침실에 여자를 들이다니.

이건 처음 있는 일이다.

눈치 빠른 제롬이 발 빠르게 움직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보다도 더 혼란이었을 거다. 카이로스 황궁 중 황제의 침실이 있는 본궁의 시녀들은 일사불란하게 길을 트며 두 사람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카시스께서는 워낙 소문이 무성한 분이라 너무도 그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차마 얼굴을 들진 못했다. 그저 그의 걸음이 움직일 때마다 은은히 번지는 꽃향기와, 아래로 떨어지는 긴 드레스 끝자락 정도로 진짜 그분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걸 실감할 뿐이었다.

그렇게, 에단 폐하의 침실에 첫 여인이 들어서고, 황금빛 거대한 문은 굳게 닫혔다.

“와……. 제 방의 열 배는 되겠는데요.”

얼마나 방이 큰지 침대까지 멀기도 했다. 그녀는 본궁 복도의 화려함에도 놀랐지만, 그의 침실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금으로 도배가 된, 사치스럽기도 한 방이었다.

카이로스 황제 침실은 이런가 싶어, 괜히 주눅 드는 거 같았다.

그는 두리번거리기 바쁜 그녀를 살며시 넓은 침대 위에 내려놨다.

“이런 데서 혼자 있어도 잠이 와요? 어휴. 이건 뭐 자라는 건지 파티를 열라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서 잘 안 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녀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우라고 내려놨건만 그녀는 금세 몸을 일으켜 앉아, 잔소리의 시동을 걸었다.

“그러면 안 돼요. 당신, 진짜 얼마나 몸을 망치고 있는 줄 알아요? 딜리아한테 듣자 하니 잘 드시지도 않는다면서요. 잘 주무시지도 않고. 사람이 그렇게 일만 하다간 죽는다고요!”

엄청 진지한 얼굴로, 숨도 안 쉬도 잔소리를 쏟아 내는 그녀에게 그는 언제나처럼 그저 미소 지을 뿐이다. 하나, 둘 상의를 벗은 그는 꼿꼿하게 앉아 있는 그녀 앞에 앉아 눈을 맞추었다.

“대신 네 앞에서 잘 먹고 잘 자잖아.”

싱긋 웃으며 말하는 그의 말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그녀와 보낸 첫날밤부터 그녀 곁에서 잠들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당시의 그녀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뒤늦게 딜리아에게 전해 들으니 다음 날 아리스가 그 난리를 친 것이 조금 이해되기도 하였다.

여전히 그날 그가 왜 그녀 곁에서, 그리 쉽게 잠들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차가운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럼 언제든 저를 불러 주세요. 어느 때든 달려올게요.”

그녀는 ‘왜’라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보다도 더 듣기 좋은, 예쁜 대답을 했다.

그는 이런 그녀가 좋다. 다른 여인과 다르게 그를 피곤하게 하지 않는, 아니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그렇게 보듬어 주는 그런 그녀가 너무도 좋았다.

그는 상체를 살짝 숙여 그녀의 입가에 입 맞추었다.

“여기, 네가 처음 들어온 거야.”

“알아요. 처음 교육받을 때 들었어요.”

“그럼 좀 더 기뻐해 줘.”

“기뻐하고 있어요. 긴장해서 그렇지.”

그녀는 살짝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걸쳐 있는 얇은 드레스를 끌어 내리며, 그런 그녀의 눈가에 또 한 번 키스했다.

“그럼,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했다는 거네.”

“……기대한 건 아니고요.”

“난 너를 보는 순간부터 기대하고 있었어.”

아무튼 약은 사람.

능숙하고도 달콤한 그의 유혹에 그녀는 또다시 넘어갔다.

여전히 허리가 아프고, 아래 중심은 욱신거렸지만 그게 대수랴. 그녀의 마음이 이리도 요동치는 것을.

로엘은 그가 이끄는 대로 다시 그의 침대 위에 몸을 뉘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 아프게 해 줘야 해요.”

“걱정 마. 어제와 다를 테니.”

그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젯밤이 아닌 오늘 새벽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로엘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오늘 새벽 역시 아픔 따윈 기억도 안 나고, 부끄러울 정도로 좋았던 기억뿐이었으니까.

“아.”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애무하는 그의 손길에 그녀의 입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금세 나신이 된 그녀의 몸 위엔 지난밤 그가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뒤늦게 거울을 본 그녀는 여기저기 없는 곳이 없는 그의 마크에 경악했지만, 그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의 틈도 없이 빼곡히, 이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읏……!”

기대 안 했다는 말은 거짓말. 그러기엔 그녀 역시 그의 품에 안기는 순간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미 그의 손길에 익숙해질 데로 익숙해져, 이제는 그가 스치기만 해도 스위치가 켜지는 기분이다.

한기가 도는 그의 손이 그녀로 인하여 뜨거워지는 것이 순식간이듯, 그녀의 중심이 그로 인해 뜨거운 물소리를 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왠지 빨라진 기분인데?”

“진짜……. 짓궂게 굴지 말아요.”

그녀는 일부러 그녀를 놀리는 그가 얄미웠다. 그도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지금 이 순간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그는 역시나 그녀보다 경험 많은 ‘어른’이다. 침대 위에선 더욱더 그보다 어리게 느껴져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다.

“두고 봐요. 나도 똑같이 돌려줄 거야.”

“글쎄. 어떻게 하시려나?”

“……열심히 배워서. 당신한테.”

지금도 미칠 것 같은데, 이보다 더하면 어쩌라는 거냐고. 나를 죽일 셈이냐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그는 조잘조잘 잘도 말하는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했다.

그녀야말로 말을 할수록 오히려 더 그를 부채질했다.

자존심이 상할 만큼 성급하고 서툴렀던 지난밤, 그는 만회의 기회가 필요했다.

“하아……. 에단.”

한 번도 안 해 봤으면 모를까, 한 번이라도 그와 밤을 보냈다면 절대 한 번으로 끝내고 싶게 만들지 않는 것이 그였다. 그런 그의 ‘밤 능력’을 그는 백분의 일도 그녀에게 보여 주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발목을 잡아 끌며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키스마크가 선명한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다시 한 번 키스마크를 새기며, 그는 섹시한 눈으로 그녀에게 경고했다.

“공주님. 기대해도 좋아.”

“……아읏!”

단번에 끝까지 들어온 그에게 그녀는 높은 교성을 뱉었다. 지난밤 가르친 보람이 있는지 더 이상 그녀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그녀의 안이 그를 붙잡아 당겼다. 에단은 갈수록 더 좋아지기만 하는 그 뜨거움에 취하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밤, 신세계를 보여 줄게.”

이 순진무구한 공주님께 알려 드리고 싶은 게 너무도 많다.

그는 한 번 더 허리를 튕기며 생각했다. 오늘 밤 역시 뜨겁고 길 것 같다고.

아니, 당분간은 계속 그럴 거 같다고.

***

“으음. 에단……?”

잠귀가 밝은 그녀는 이불이 스치는 작은 소리에 스르르 눈을 떴다. 잠결에 불러 버린, 이제는 익숙해진 그 이름에 에단은 미소 지었다.

“내가 깨웠나 보네.”

그는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를 넘겨주며 말했다. 혹시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녀가 추울까 조금 들쳐진 이불을 그녀의 목 끝까지 끌어다 덮어 주었다.

자상한 그의 행동에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저절로 번졌다.

“해가 떴나요?”

“음. 막 뜨려는 거 같아.”

“그럼 일어날래요.”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그와 함께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지난번은 그녀가 쓰러져 버린 터라, 이렇게 밤을 함께 보낸 후 함께 눈을 뜨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온전한 맨정신으로 그와 나신인 채 있는 것이 로엘은 새삼 부끄러워 최대한 이불을 끌어 올렸다. 그의 맨다리가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며 거리를 두려는 그녀를 그는 억지로 제게로 당겼다.

“지나치게 새삼스러운 거 같은데.”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다고요.”

“더 분발해야겠네. 안 부끄러워질 정도가 되려면.”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그는 해가 뜨건 말건 계속 그녀를 품에 안고 침대에서 뒹굴고 싶었다. 일 중독자인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놀랄 일이었지만, 진심이 그러했다. 이렇게 그의 품에 쏙 안기는 그녀를 떼어 놓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심지어 이렇게 맨살이 닿아 따뜻한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지면 더더욱 그렇다.

“정말 넓네요.”

“그런가.”

“네. 그래서 더 적막한 거 같아요. 더 외로워질 것 같고.”

태어나 보니 귀하디귀한 카이로스의 황손이었던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외롭다’는 그녀의 말을 그가 제대로 이해하긴 할까 싶었다.

로엘은 귀로 들어온 ‘소문의 그’가 아닌, 자신이 보고 느낀 ‘진짜 그’를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사람. 처음 보는 순간부터 배려가 가득했던 남자.

어쩌면 이 사람은 외로운 걸 모를지도 모른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외로웠던 사람이라.

화려함보다 삭막함이 더한 그의 방이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꽃은 그의 집무실이 아닌 이곳에 가지고 왔어야 했나 보다.

그녀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러면 오늘 아침도 나가지 못할 텐데.”

“어휴. 정말.”

아무튼 틈만 나면 짓궂다. 그녀 역시 그녀의 맨가슴이 고스란히 그의 살에 닿는 게 엄청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그 순간 그를 품에 안아 주고 싶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그리고 선명히 느껴지는 그 부드러운 감촉에 그는 숨을 참아야 했지만, 왠지 어리광 부리는 그녀를 그 역시도 안아 줘야만 할 거 같아 꼭 안았다.

서로의 따뜻한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상하리만치 저절로 안정이 되었다.

“이렇게 새벽에 깨면, 보통 뭘 하나요?”

“일어나지.”

“그리고?”

“그리고 보통은 훈련. 루카스가 깨어 있으면 상대해 주는 정도?”

“오!”

그의 품 안에 좀 얌전히 있는가 싶더니, 그녀는 또 벌떡 일어났다. 말하면서도 그녀가 관심 보일 거라 생각했던 차라 놀랍지도 않았다. 로엘은 금세 눈동자를 반짝였다.

“저 보고 싶어요. 폐하랑 루카스가 대련하는 거! 당신 소문 어마어마하잖아요. 사신이라 불릴 만큼.”

네 아버지에 비할까.

에단은 저절로 제이드 네아레스가 생각났다.

그의 소문은 명성이라면 자신의 소문은 악명에 가까웠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검을 잡는 모습, 제대로 보고 싶으니까.”

그는 그녀의 가는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이렇게 가늘면서 어떻게 그 많은 장정을 쓰러트렸을까 싶다.

그녀를 품에 안으면서, 그는 속으로 그녀가 제법 단련된 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뼈밖에 없을 정도로 마르고, 상처 하나 없는 보드라운 아기 피부였지만, 오랜 수련으로 인해 완전히 자리 잡은 탄탄한 잔근육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다만, 십수 명의 장정을 쓰러뜨릴 정도의 실력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뿐.

“……폐하는 그날의 일에 대해 왜 제게 묻지 않으십니까?”

에단은 그저 검을 잡는 그녀의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인데, 그녀는 다른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때의 일을 언급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가 무얼 마음에 두는지, 그는 알고 있다.

“내가 뭘 물어야 하지.”

그날, 그 시체 더미 속에서 그녀는 분명 ‘평온’했다. 다른 모든 이들이 경악한 그 순간 홀로 다른 세상 사람 같았던 그녀의 모습은 두고두고 그녀를 따라다닐 거다. 소문은 퍼질 테고, 그녀의 적들은 이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왜곡할 테지.

“죽이려 들기에 죽였다는 말 외에 할 말이 있나.”

“……아니요.”

대수롭지 않은 그 한마디에, 그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됐어.”

그녀야말로 그걸로 되었다. 속으로 안도하는 그 마음이 훤히 보여, 그의 팔이 다시 그녀의 허리를 감싸 당겼다.

이 여자는 무얼 걱정했던 걸까.

피를 본 것으로 친다면, 그는 그녀와 비교도 안 될 텐데.

로엘은 자신을 힘주어 품에 안는 그에게 기댔다.

“아버지가 처음 저에게 검을 선물하면서 그러셨어요. 이 검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그러니 항상 나의 검이 누군가의 생명을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심히 다루라고.”

그녀에게 아버지는 늘 ‘금기’였다.

살아 계실 때에는 너무 높은 분이라 혹여 누가 될까 봐 그러하였고, 그리 허망하게 가신 후에는 생각만 해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아 그러하였다.

그런데 왠지, 그의 품 안에서는 아버지 이야기가 너무도 쉽게 나왔다.

별로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저절로 술술 나와 버렸다.

“살생은 언제나 마음이 불편하고, 두고두고 자신을 괴롭힌다는 아버지의 말씀. 적어도 제가 검을 받았던, 그 어린나이에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저와 어머니를 죽이려고 잠입한 암살자를 죽였을 때, 비로소 깨달았지요. 이 죗값은 평생 치러야겠구나, 하고.”

그건 나를 죽이려던 사람에 대한 마음의 짐이 아니다. 나와 내 가족을 진심으로 해하려던 사람에 대해서는 일말의 동정도 없었으니까.

다만, 가족을 잃게 되는 그들의 가족에 대한 동정이자, 생명 자체에 대한 죄책감일 뿐.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임을 항상 생각하지만, 나 역시 그러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도 하셨죠. 맞는 말이에요. 저 역시 그대로 죽을 수 없었거든요. 그대로 죽어 버리기엔, 저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귀한 딸이었으니까요.”

그녀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느새 어둑어둑했던 하늘에서 해가 올라오고, 새벽이 밝았다는 것을 알리듯 작은 새의 지저귐도 들려왔다.

“그래서 그제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죽을 수 없었기에. 제가 잘못한 걸까요.”

그녀는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은가 보다. 세상 강한 척해도 어쨌거나 천성이 여리고 착한 사람인 거다.

이런 여자가 그 시체 더미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그런 표정을 짓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싶어 마음이 아파 왔다.

“아니.”

그는 그녀를 다시 꼭 안아 주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검 따위 다시는 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다시는 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거짓말.

이 황궁에서, 그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뿐인 거짓이다.

황제와 황손도 죽어 나가는 이곳에서 그 누가 자신의 목숨을 장담할까.

“너는 아무 잘못 없어.”

그래서 자신의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로엘은 차마 지켜 준다는 그 말은 못 하더라도, 지켜 주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그녀 역시 그를 마주 안았다.

왜 이렇게 안도가 되는 걸까.

로엘은 뜨거워지는 눈가를 애써 참으며, 오래도록 그의 품 안에 있었다.

***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한 번만 더 물으면 나 진짜 자존심 상할 거 같은데.”

시에라는 근심이 한가득이었다.

다짜고짜 대련 상대가 되어 달라는 그녀의 명을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진심으로 대하자니 그녀가 다칠까 걱정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때의 일을 두 눈으로 본 사람으로서 그녀가 검을 잡는 모습을 보고 싶긴 하였다.

“마마.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악! 진짜 다들 이럴래! 내가 얼마나 졸라서 여길 허락받았는데!!”

그녀의 겉옷을 받는 딜리아까지 한소리 하자 결국 로엘이 터져 버렸다.

그러지 않아도 오랜만에 목숨을 위협받아 보니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확연히 느껴 자존심이 상했는데, 그녀들마저 그녀를 너무 여린 공주님으로만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이래봬도 전설이라 불리는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다.

카이로스 사람들은 북방 사람들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는 능숙하게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카이로스에서 주로 쓰는 검과는 사뭇 다른, 얇고 가벼운 칼날이 정오의 햇빛 아래 반짝였다.

시에라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기어코 하시려는 거 같다.

“시에라 성이 칼슨이었지? 카이로스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는 명문 장군 가문.”

루카스 장군의 세버 가문과 함께 대장군 자리를 돌아가며 하는 명문가. 전통으로 치자면 오히려 칼슨가가 세버가보다 한 수 위였다.

로엘은 슬쩍 미소 지었다. 시에라의 태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녀를 좀 더 진심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 거 같다.

“칼슨은 대대적으로 남아 선호가 강하다지? 그래서 시에라처럼 딸로 태어난 이상 절대로 중앙 부대로 들어갈 수 없고.”

“……네.”

“안타깝네. 내 감이지만, 시에라는 웬만한 남자와 붙어도 절대 지지 않을 거 같은데.”

로엘의 겉옷을 들고 지켜보던 딜리아는 로엘답지 않는 말투에 조금 당황했다. 묘하게 시에라의 심기를 건들고 있었다.

“토르티아에서는, 아니 북방에는 기본적으로 남아 선호가 없어. 모두가 동등하게 배우고 이기는 자가 위에 올라. 그래서 실제 여자가 즉위하는 경우도 많아. 작은 소국은 아예 모계 사회를 유지하는 곳도 있지.”

검을 가볍게 돌리며, 칼날을 살피는 로엘은 모든 것이 능숙했다. 시에라 역시 그 짧은 준비 운동만 보아도 그녀가 여간한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에라도 검을 빼들었다.

“그러니 북방의 여인들에겐 검이 낯설지 않아. 모두가 배우고 모두가 평생 동안 연마하니까. 그래서 우린 늘 강해. 찻잔만 드는 카이로스의 여인과는 달라.”

시에라는 순간 울컥했다. 로엘 님이 일부러 이러시는 걸 안다. 대충 상대하려 드는 그녀를 도발하려 일부러 저리 말씀하시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찻잔만 드는 카이로스의 여인이라니. 칼슨가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시에라는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로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어디 칼슨가의 실력을 볼까?”

시에라의 짧고 굵은 기합과 함께, 순식간에 검과 검이 쨍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빠르게 안으로 파고드는 시에라와 그런 그녀를 미소로 넘겨받는 로엘.

딜리아의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

솔직히 키로스를 뽑을 때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일이 다 상대해서 가장 강한 이를, 아니 가장 바르게 검을 쓰는 이를 곁에 두고 싶었다.

마음과 정신이 곧은 사람일수록 검 역시 곧게 나간다는 것이 카이로스의 오래된 명언.

작은 단서로 시에라를 택했지만 몇 합 맞춰 보지 않아도 그녀의 검이 얼마나 정직한지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정석의 표본. 어떠한 기교도 꼼수도 쓰지 않는,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검이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로엘의 미소가 진해졌다.

시에라의 강함은 이 정직함에 있다.

시에라의 공격이 빨라지고 매서워질수록 로엘 역시 더 빨라지고 더 유연해졌다.

상상과는 다른 전개에, 그리고 카이로스와는 다른 스타일에 시에라는 당황하고 있었다. 물론, 당황한다 하여 뻔한 실수를 할 정도`로 그녀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하지만, 막연히 시에라도 느끼고 있었다.

지금 로엘 님이 자신을 봐주고 있단 사실을.

슬슬 시에라의 검이 길을 잃어 갈 때쯤, 로엘은 검을 돌려 잡았다.

“시에라는 내 생각대로 최고야! 내 사람이 되어 줘서 고마워!”

뜨거운 태양 아래, 높게 묶은 붉은 머리가 한 번 흩날리나 싶더니 어느새 시에라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그 일에 시에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듯 자신을 향해 환히 웃는 로엘의 미소가 보이더니 그녀의 얇은 검이 시에라의 목 바로 옆에 섰다.

“……제가 졌습니다.”

시에라가 패배를 인정하고, 뒤늦게 넋이 빠져 있던 딜리아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우와아아! 마마!!”

“것 봐. 나 강하다니까?”

로엘은 검을 거두며 시에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스스럼없이 내민 그 손을 시에라도 미소와 함께 잡고 일어났다.

감탄해 마지않는 딜리아와 웃는 로엘은 패배해 버린 시에라에 대해 어떠한 질책도, 실망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에라 스스로 너무 부끄러웠다.

주인보다 약해서야 주인을 지킬 수 있을 리 없다.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키로스가 된 사실에 반항하기 바빠 너무 안일해진 거다.

시에라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단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양 주먹을 세게 쥐었다.

“내가 봐도 넌 키로스 중 최고야. 단지 저분이 말도 안 되게 강하신 거지.”

그런데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뒤에서 들렸다.

언제 왔는지 루카스와 그 옆에 시에라는 처음 뵙는 분이 서 있었다.

황제 폐하를 똑 닮은 그 금발이 단번에 그의 신분을 알려 주었다.

시에라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황자님을, 그리고 대장군을 뵙습니다.”

이반은 미소로 시에라의 인사를 받았다. 루카스의 말대로 멀리서 보아도 실력자였다.

“앞으로도 아카시스님을 잘 부탁한다.”

로엘의 실력을 빤히 알고 있는 이반으로서는 로엘을 상대로 그 정도 버틴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생각했다. 칼슨가라 하더니만 확실히 그 명성에 걸맞는 실력자다. 괜히 그녀의 눈에 든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은 로엘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합을 맞춰 보려, 에단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황궁 후원에 온 거였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먼저 손님이 와 있을 줄이야.

“이야. 아무래도 마마를 우리 프래카로 영입해야겠는데요?”

“과찬이세요, 루카스.”

루카스의 격한 칭찬에 로엘은 미소 지었다. 딜리아가 준 손수건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 내며, 그녀는 오로지 루카스만을 보았다.

마치 이반은 보이지 않는다는 양.

너무도 그녀다운 유치한 무시라 이반은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일부러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섰다.

“아카시스님. 저도 있습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그제야 그녀 역시 잔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루카스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무표정으로 이반에게 인사했다.

루카스의 온 신경은 로엘의 검에 있어서 그런 로엘의 티 나는 냉대를 알아채지 못했지만, 어제부터 이 기묘한 기류를 봐 온 딜리아는 속으로 걱정이 가득이었다.

분명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아니, 물어보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그런 황실 치정이 얽혀 있을까 봐.

“음. 오랜만에 이반 님께 상대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마음이 바뀌었어요. 마마께서 저 좀 상대해 주세요!”

“저야 루카스의 상대가 안 되죠. 제가 무슨 수로 카이로스의 대장군을 이기겠습니까.”

그것도 그냥 장군도 아닌 지옥의 개라고 불리는, 명실상부 현 최고라 불리는 기사 중 한 사람을, 몇 년간 검을 잡지 않았던 그녀가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합을 맞춰 달라 하고 싶었지만 말이다.

“에이. 그러지 말고 저랑 놀아 주세요.”

물론, 루카스 역시 순순히 물러날 위인이 아니었다. 당당히 ‘놀아’ 달라는 단어를 쓰는 그에게 로엘은 웃고 말았다. 정말 대형견이 따로 없다.

“다음에요. 저도 너무 오랜만에 잡는 거라 좀 더 제 실력을 끌어 올려야 해요. 제가 어느 정도 부끄럽지 않을 수준이 되면 그때 먼저 청할게요. 그때 제 상대가 되어 주시겠어요?”

“뭔가 로엘 님께 속는 기분이지만, 좋아요! 다음엔 꼭이에요.”

“그럼요.”

“아니면, 제가 상대해 드릴까요?”

루카스와 훈훈하게 마무리되나 싶더니만, 이반이 불쑥 끼어들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라, 로엘은 이 능글맞은 황자님께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니요.”

“루카스보다는 제가 낫죠. 제가 루카스만큼 강한 것도 아니고.”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이반 전하.”

굳이 루카스가 부인해 주지 않더라도, 로엘은 충분히 안다. 저 남자가 얼마나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는지. 그걸 뻔히 알고 있는 그녀에게 저리 말하는 그 뻔뻔스러움에 로엘은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그는 그녀를 놀리고 있는 거다.

“실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면서요.”

“바닥이라고는 안 했어요.”

이봐. 놀리는 거 맞다니까.

로엘은 루카스만 아니었다면, 정말 저 면상에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몇 년 만에 보아도 저 능글맞음은 어디 가질 않았다.

“얼마큼 떨어졌는지 알려면 내가 제일 제격일 거 같은데.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그의 미소에 로엘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로엘이 이반의 실력을 아는 만큼, 이반 역시 로엘의 실력을 안다. 아니, 서로가 서로를 제일 잘 안다는 말이 맞다.

그들은 그만큼 함께 수행했고, 함께 성장했으니까.

“싫습니다.”

로엘은 일말의 여지없이 딱 잘라 거절했다.

저런 얄팍한 도발에 넘어갈 그녀가 아니다.

「너무 못할까 봐 그런 거야?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아닐 ‘뻔’했다.

「하. 진짜. 해. 하자고.」

그런데, 저 완벽한 토르티아어에 겨우 유지하던 도도함이 무너져 버렸다. 그를 멋지게 지나쳐 가려던 찰나, 정말 그녀가 안됐다는 눈빛과 목소리로 그녀를 동정하는 ‘연기’에 결국 미끼를 문 것이다.

로엘은 바로 검집에 넣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뭐야, 뭐야? 로엘 님. 진짜 이반 전하와 하시려고요?”

“네. 못할 것 없죠. 이반 전하 말씀대로, 저분이 루카스 장군님만큼 그렇게 강하신 분도 아니고.”

“마마. 후회하실 텐데.”

“아니요. 후회는 저분 몫이죠. 기어코 하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어다 놓고 자기가 지면 얼마나 쪽. 팔. 리. 겠. 어. 요.”

누가 보아도 가시가 잔뜩 서 있었다. 슬쩍 지나간 토르티아어를 아무도 못 알아들어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반의 한마디가 그녀의 심기를 아주 거슬렀다는 건 확실했다.

다른 이를 대할 때하고는 확연히 다른 로엘의 태도를 시에라와 루카스마저 느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때마다 딜리아만 전전긍긍할 뿐이다.

저리 티 내시는데, 이제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두 분 사이에는 과거에 인연이 있었고, 그 인연이 심상치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로엘, 님.”

일부러 ‘로엘’과 ‘님’을 끊어서 말하는 이반이 얄미워 로엘은 검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다시 해! 다시 하자고!! 이건 무효야!’

‘그 말 열 번도 더 들은 거 같은데…….’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맹세한다, 진짜!’

‘그 말도……. 네아. 너는 나 못 이긴다니까?’

‘다시 해 보자고! 이 재수 없는 놈아!!’

멋대로 떠오르는 기억. 그 시절의 열정. 그때의 마음.

아. 짜증이 몰려왔다.

“잘 부탁합니다.”

검을 빼들면 항상 등 뒤로 검을 세우고 상대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버릇마저 여전하다. 그 예가 끝나면 옅은 미소와 함께, 순식간에 결말이 나겠지.

‘오오. 제법인데, 꼬마?’

그렇게 아버지의 눈에 들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천재는.

“뭐야. 엄살이었잖아. 여전한걸? 네아.”

그래. 이 눈과 이 목소리다.

‘어이, 꼬맹이. 너 진짜 내 제자가 되어 볼래?’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제이드 네아레스의 유일한 제자, 이반.

그야말로 여전했다.

***

“오늘은 기분이 별로이신가 봐요.”

“아. 아니에요. 기분이 별로인 것보다, 어떤 사람이 별로인 거예요.”

“예?”

수아는 로엘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는 함께 차를 마시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바람이 잘 드는 수아의 후원에 앉아 오후의 티타임을 가졌다.

“그냥, 뭘 하든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요.”

“갑자기요?”

“네.”

로엘은 과자를 아그작 씹으며 말했다. 생각하니 또 짜증이 올라왔다.

갑자기 사라질 때는 언제고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신경 쓰이게 하는 건지.

참 다양한 방식으로.

“……로엘 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런 로엘에 대한 수아의 반응은 역시나 덤덤했다. 언제나처럼 느긋한 목소리로, 그녀는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다른 이 같으면 그게 누구냐고 궁금할 법한데 그녀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너무 드러내진 마세요. 혹여 해가 될까 염려됩니다.”

다만 그녀에 대한 걱정 한마디 해 줄 뿐.

로엘은 그런 수아가 좋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수아의 이러한 성격은 누군가에게는 무관심으로 보일지 몰라도, 로엘에게는 항상 배려였으니까.

“네. 안 그래도 최대한 안 부딪히려고 노력하려고요.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노력하지 않는 것보다야 덜 만나겠지요.”

“그렇겠죠? 만나도 최대한 무시하는 전략을 쓰고 있긴 해요. 제가 스스로 말려들어서 문제지.”

로엘과 수아의 대화는 별다를 것이 없다. 날씨가 좋으면 날씨 이야기를 하고, 읽고 있던 책이 재미있으면 그 책 이야기를 하는 등 정말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러함에도 두 사람의 티타임은 갈수록 잦아졌다.

“저도 수아 님처럼 좀 차분해져야 할 텐데 말이에요.”

“지금도 충분히 그러하세요.”

“으음. 절대 아니에요.”

맛있는 차가 들어왔으니 와 달라거나, 안나가 쿠키를 맛있게 구워서 가져가겠다는 등 그녀들의 시녀가 서로의 처소를 오가는 일은 많아졌다.

자신의 처소에만 있는 수아 대신 언제나 로엘이 움직였지만, 로엘은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수아가 자신의 처소에서 발을 떼지 않는 이유가 있으려니 하고 넘기고 말았다.

그런 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로엘은 안나의 쿠키를 또 하나 집어먹으며 턱을 괴어 수아를 보았다.

청순함의 극치인 그녀의 오늘 드레스 컨셉은 그린이었다. 신록이 푸르른 나무 밑에서 보는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무슨 숲의 여신처럼 잘 어울렸다.

“오늘도 수아 님은 아름다우시네요. 드레스,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칭찬에 수아는 언제나처럼 감사를 표했다. 예쁘다는 그녀의 말이 진심인 걸 분명 수아도 알 테지만, 정작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워낙 미인인 분이라 이런 말을 너무 자주 들어 감이 없나 했다가도, 이제는 로엘도 깨달았다.

애초에 수아라는 사람 자체가 너무도 감정에 메말랐다는 것을.

시들어 버린 꽃처럼,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그녀는 매사에 관심도, 의욕도 없었다.

그런 수아를 볼 때마다 마치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아 로엘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수아 앞에선 더 말이 많아졌다.

“로엘 님도 오늘 아름다우세요. 언제나처럼.”

그러나 베티와 쥰의 눈에는 달라 보였다. 로엘 앞에서의 수아는 말이 많았다. 그것도 놀라울 정도로.

궁에 들어온 이후, 수아는 그들이 말을 걸지 않으면 하루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로엘과 함께할 때는 그녀가 먼저 말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놀랍고 고마울 수밖에.

메말라 가던 수아에게 로엘은 작은 생기라도 불어넣어 주었다.

“헤더의 작품인가 보군요.”

“오. 바로 알아보셨네요? 맞아요. 헤더가 좋아하는 원단이라고, 엄청 공이 든 드레스랍니다.”

“카이로스 사교계에 한창 유행인 부드 원단이죠. 남부에서 수입해 오는 거라 들었어요. 저에게도 몇 개 있는데, 필요하시면 나중에 갈 때 좋아하시는 색깔로 가져가세요.”

“어휴. 괜찮아요. 이미 창고에 비단만 수십 단이라.”

“폐하께서 주셨나 보군요.”

“아……. 네. 뭐.”

로엘은 아차 싶어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대답한 거였는데, 그게 어쩌다 보니 에단과 연결되고 말았다.

수아가 에단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공공연한 진실. 로엘은 괜한 실수를 한 것 같아 목이 탔다.

“그러실 거 없는데.”

그런 로엘이 수아는 귀엽게 보였다.

혹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일까 봐 그녀와 눈도 못 맞추는 로엘을 보고 있노라면 집에 두고 온 어린 여동생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순수하기도 한 반응이다.

“네?”

“폐하가 금기어도 아니잖아요.”

“켁켁.”

‘폐하’라는 단어에 로엘은 마시던 차가 목에 걸렸다. 수아는 친히 일어나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등을 두들겨 주었다. 로엘은 놀랍고 당황한 눈으로 그런 수아를 보았다.

수아는 그런 로엘에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폐하 이야기를 하셔도.”

“아……. 저는 그럴 의도가 아니라.”

“로엘 님. 저는 그분께 마음이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야기를 하셔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저, 저와는 너무도 다른 세계에 계신 분일 뿐.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로엘은 오히려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너무도 무미건조한 그녀의 대답에. 길 가는 아이를 잡고 에단에 대해 물어도 이보다는 더 애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그녀는 그에 대해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로엘 님은 아직 저에 대해 그분께 묻지 않으셨군요.”

“……네.”

“그리고 저에게도 묻지 않으시네요. 저와 그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황스러워하는 로엘과 다르게 여전히 수아는 차분했다.

언젠가는 한번 짚고 넘어갈 바로 그 주제. 수아는 로엘의 눈과 눈을 똑바로 보았다.

“로엘 님은 어째서 묻지 않으시나요? 물으셨다면, 저도 그렇고, 폐하도 말씀해 주셨을 텐데.”

“……수아 님이 오늘 제가 누구 때문에 화가 났는지, 저에게 묻지 않으시는 그 이유와 같지 않을까요.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요.”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 그 사람 자체에 대한 호의가 있으면 그만일 뿐, 그 외적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적어도 로엘은 그러하였다.

그래서 이반과 그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한 번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곱게 자란, 높은 가문의 자제임은 알 수 있어도 정작 궁금해 본 적 없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보고 느낀, 그 사람 자체로 그 사람을 평가했으니까.

“궁금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죠. 어떻게 안 궁금하겠어요. 저에겐 두 분 다 소중한걸요. 하지만 제가 그분을 뫼시고, 수아 님과 이렇게 차를 마시는 데에 두 분의 과거가 어떠셨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만약, 나중에 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되면 그때 말씀해 주세요.”

로엘은 살며시 수아의 손을 감쌌다. 그녀만큼이나 살이 없는, 그 가는 손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감정 없는 인형이라던 소문이 괜히 생각났다. 사람인데 어떻게 감정이 없을까. 애써 자신의 휘몰아치는 감정을 죽인 걸 테니. 그러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서.

로엘은 수아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환히 웃었다.

“그때 듣게 되면 수아 님 편을 들게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수아의 눈을 바라보며.

다쳐서 꽁꽁 숨겨진 그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되었길 바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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